2011/05/19

100자루의 연필을 깎는 어머니

진실의 말팔매 <21>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981년 1월 말 어느 날 프랑스 파리의 샤를 드골 국제공항. 여행객들로 붐비는 입국장에서 젊은 남녀 20여 명이 엉엉 우는 여아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하는 프랑스인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주위에 몰려들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당시 프랑스에서 열린 국제교예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공항에 내린 평양교예단 단원들이었고, 엉엉 우는 여아는 프랑스인 가정에 넘겨주기 위해 서울에서 데려온 입양아였다.

생전 처음보는 백인 얼굴, 낯설고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따라갈 수 없어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던 그 여아의 귀에 어디선가 귀익은 우리말을 주고받는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여아는 우리말을 주고받는 그들에게로 달려가 옷소매를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뜻하지 않게 우리 동포아이를 만난 것은 이채로운 일었건만, 그 여야가 우는 사연을 알게 된 평양교예단 단원들이 받은 충격과 슬픔은 컸다. 자기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아이의 멀어져가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여성단원들은 참았던 울음을 끝내 터뜨며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보살핌을 받아야 할 이 땅의 소외계층에게 보살핌은 커녕 슬픔과 비극만 강요해온 역대 정권들이 저지른 악행이 숱하게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용납하기 힘든 악행이 고아수출이다. 박정희 정권은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강탈한 1961년에 이른바 '고아입양특례법'이라는 것을 제정하여 해외입양을 적극 추진하였다.



해외입양산업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는 1985년인데, 그 한 해 동안 8,835명이 해외로 팔려나갔다. 6.25 전쟁 이후 해외입양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 넘겨진 아이는 2008년 현재 156,000명에 이른다. 연간 해외입양 아동수는 1995년에 2,000명 선이었는데, 1996년에는 3,000명 선으로 늘어났고, 경제위기사태가 일어난 1999년부터는 4,000명 선으로 급증했다. 2000년 4,046명, 2001년 4,206명, 2002년 4,059명, 2003년 3,851명, 2004년 3,899명, 2005년 3,562명, 2006년 3,231명이었다.

(도표를 한번 누르면 확대된 도표를 볼 수 있음)

이 땅의 역대 정권들이 해외입양정책을 추진한 목적은, 고아들을 보살펴줄 사회복지비용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들이 추진한 것은 명색이 입양정책이지 실제로는 우리 아이들을 다른 나라에 내다버리는 기아정책이나 다르지 않았다. 우리 땅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들을 부모가 없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해외 각국에 내다버리는 잔혹한 정권은 이미 존재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 중앙일보 보도사진 (2004년 8월 5일)

1998년 10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해외입양인 23명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150,000여 명에 이르는 해외입양인들에게 공식사과하였으나 사과의 말만 남겼을 뿐 달라진 것은 없었다. 2005년 노무현 정부 시기에 김근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앞으로 4-5년 안에 해외입양을 폐지하겠다고 말했으나, 후임자인 유시민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2006년 8월 언론과 대담하는 자리에서 10년 안에 해외입양을 폐지하겠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는 집권기간이 거의 끝나가던 2007년에 가서야 생후 6개월 이하 영아의 해외입양을 금지시키고 해외입양기관들에게 해외입양 자제를 권고하였다. 그 바람에 해외입양 아동수는 2007년 1,264명, 2008년 1,250명으로 급감하였다. 이것은 정부가 우리 아이들에 대해 정책적 관심을 가지고 입양정책을 근본적으로 전환할 때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이 땅에 자주적 민주정권이 세워지는 날, 그 정권이 수행해야할 정치과업들 가운데 하나가 고아수출 전면중단과 고아들을 위한 국가적 차원의 복지정책이다.
   
그러면 북측에서는 고아를 어떻게 키우고 있을까? 북측은 국가적 차원에서 고아들을 위한 복지정책을 실시하였다. 젖먹이부터 만 5살까지는 육아원에서 맡아 키우고, 만 5살부터 만 7살까지는 애육원에서 맡아 키우고, 만 7살부터 만 15살까지는 초등학원과 중등학원에서 각각 맡아 키운다. 육아원 원장은 의사와 간호사 사이의 전문직인 준의 이상의 자격증이 있어야 하며, 그 곳에서 아이들을 보살피는 사람도 간호사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 그 아이들에게는 분유와 식품이 최우선으로 공급된다.

북측은 미국과 전면전을 벌이던 6.25 전쟁시기에 갑자기 늘어난 수많은 전쟁고아들을 키울 수 없게 되자, 1952년부터 1959년까지 동유럽 각국에 보내 해외위탁교육을 실시하였다. 2004년 6월 23일 <kbs 1TV>는 루마니아 국립기록영화보존소에서 발굴한, 북측 전쟁고아들을 키우는 위탁교육현장을 찍은 동영상을 방영하였다.

동영상에 따르면, 북측은 1952년부터 1959년까지 해마다 전쟁고아 3,000여 명을 10여 개에 달하는 루마니아 위탁교육시설로 보냈는데, 그 위탁교육시설에 조선인민학교를 세우고, 북측 교사들을 현지에 파견하여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가르치는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남측에서 생겨난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으로 나갈 때, 북측은 남측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해외위탁교육을 통해 전쟁고아들을 정성껏 키운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6.25 전쟁 시기 전쟁고아를 수양딸로 삼아 키우며 고아들에 대한 사랑을 몸소 실천하였다. 평양 서성제1중학교 김경선 부교장이 바로 그 수양딸이다. 김일성 주석은 전쟁고아 모두를 자신의 수양아들, 수양딸로 여겼고, 전쟁의 불길 속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자기들을 해외위탁교육으로 따뜻이 보살펴주는 김일성 주석을 아버지로 부르며 진심으로 따랐다. 그들은 해외위탁교육을 마치고 북측에 돌아가서 대학에 진학하거나 해외유학을 하여 우수한 인재로 자라났으며, 1970년대부터 각계층에 지도간부로 진출하였다. 김일성 주석을 아버지로 부르며 따르는 지도간부들이 이끈 사회에서 수령과 인민의 혈연적 관계가 형성된 것은 필연이었다.

북측 고위간부들도 김일성 주석의 뒤를 따라 입양에 적극적이었다. 이를테면, 연형묵 전 총리는 2남1녀를 입양하였고, 강성산 전 총리는 1남1녀를 입양하였고, 림형구 전 강원도당 책임비서는 친자녀가 4명이 있는데도 3명을 입양하였다. 최영림 내각 총리는 1남1녀를 입양했는데, 그가 입양해 키운 딸은 오스트리아, 몰타, 중국에서 유학하고 외교관이 되었다. 김계관 외무성 부상을 수행하여 6자회담에 참가하였고, 대미협상을 위해 미국에도 여러 차례 수행방문하였던 최선희 씨가 바로 그 외교관인데, 그는 2010년 10월부터 외무성 부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남측이 치명적인 경제위기를 겪었던 1998년부터 고아들이 이전보다 더 많아진 것처럼, 북측에서도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 1995년부터 고아들이 이전보다 더 많아졌다. 1998년 이후 남측에서는 고아들을 다른 나라에 넘기는 해외입양정책이 더 활발해졌는데, 해외입양이라는 말 자체를 알지 못하는 북측에서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고아들을 어떻게 키웠을까? <로동신문> 2011년 4월 30일 부에 실린 기사 한 편이 감동적인 사연을 전해주었다.

1996년 2월 어느날 저녁 퇴근시간. 내각사무국에서 운전기사로 일하던 김영일 씨는 포단에 싼 갓난아기를 안고 집에 들어왔다. 그의 아내 리성옥 씨는 부모 잃은 아기를 맡아서 키우자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제안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장아장 걷는 효성이와 효명이를 키우는 것도 힘겨운 판에, 낯모를 아이를 하나 더 키우는 것은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 달 동안만 보살펴주고 애육원에 보내기로 하였다.

한 달 동안 정성껏 키운 아이를 애육원에 보내는 날, 리성옥 씨는 아이가 입을 옷가지를 보자기에 자꾸 쌌다 풀었다 하다가 아기를 덥썩 품에 안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가 키우자요. 내가, 내가 이 얘 엄마가 되겠어요. 선뜻 결심을 내리지 못했던 날 용서하세요." 뜨거운 음성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그 부부는 부모를 잃은 아이들 14명을 또 다시 품에 안았다. 친자녀 2명에 더하여 15명이나 되는 갓난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너무도 고된 일이었으나, 하루하루 사랑의 힘으로 그 어려움을 이겨냈다.

평양에서 제2차 전국어머니대회가 열린 날, 리성옥 씨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15명의 갓난아이를 키운 훌륭한 어머니로 그 대회에 참석하였다. 전국어머니대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그는 얼굴을 붉히며 남편에게 말했다. "조국과 인민, 사회와 집단을 위하여 좋은 일을 많이 한 훌륭한 녀성들과 나란히 대회장에 앉자있자니 정말 부끄러웠어요."

몇일 뒤, 그의 집에는 자그마한 베개 5개가 더 놓였다. 지난 날 아들딸 남매를 키우던 어머니가 이제는 아들딸 22명을 키우는 어머니가 된 것이다. 22명의 아들딸들이 학교에서 쓸 연필 100자루를 날마다 깎아주다가 손에 근육통이 생겨 밥숟가락을 들기 힘든 날도 많았다. 22명을 키우자니 주거공간도 넓어야 하였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직장동료들은 어느 날 이삿짐차를 가지고 집에 들이닥쳐 아이들을 각자 품에 하나씩 안고 떠났다. 직장동료들에게 이끌려 간, 22명 아이들이 자라날 넓은 집안에는 새로 장만한 집안살림들이 놓여있었다. 직장동료들은 때때로 각종 생활필수품을 안겨주며 그들 부부의 헌신적인 육아사업을 성심껏 도와주었다.

15년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다. 아들딸들이 한꺼번에 중학교(남측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이 어느덧 다가왔다. 아들딸들에게 줄 졸업기념품을 사려고 상점에 다녀오던 그들 부부는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방안에는 아들딸들이 정성껏 마련한 갖가지 음식들이 그득하였다.

 "우리를 키우시느라 이 날 이 때껏 남모르게 많은 수고를 하신 아버지, 어머니!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며 아버지, 어머니가 애오라지 바라고 또 바라신 그 소원을 우리는 한 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22명 아들딸이 합창하듯 외치는 힘찬 목소리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가슴을 흔들었다.

12명의 아들딸들이 다가와 자기들 손에 쥐고 있던 탄원증서를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내보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주의농촌에 진출하기로 탄원한 것이다. 다른 10명의 아들딸들도 다가와 "우리는 조국보위초소에 나가 꼭 영웅이 되여 돌아오겠습니다"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말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하고 22명의 아들딸들을 와락 그러안았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2010년 5월 17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