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28

중국의 핵무력, 일본의 핵야망, 미국의 철군정책

[한호석의 개벽예감](312)
자주시보 2018년 08월 27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중국은 미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어떻게 이겼나? 
2.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전범국의 핵야망 
3. 고용간첩 도미탈주극으로 파탄된 대만의 핵개발사업
4.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과 저우언라이의 오판


1. 중국은 미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어떻게 이겼나?

1964년 4월 14일 미국 정책기획협의회(Policy Planning Council) 의장 월트 로스토우(Walt W. Rostow)가 작성하여 맥조오지 번디(McGeorge Bundy) 국가안보보좌관에게 1964년 4월 22일에 보낸 극비문서가 기밀해제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 문서에는 ‘중국 공산주의 핵시설들에 대해 가능한 기본행동의 탐색(An Exploration of the Possible Bases for Action Against the Chinese Communist Nuclear Facilities)’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극비문서에 따르면, 1961년 1월에 출범한 케네디 행정부와 1963년 11월에 출범한 존슨 행정부는 중국의 핵무기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중국의 핵시설들을 예방타격(preventive strike)으로 파괴하는 공습계획을 검토해왔는데,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 대통령은 미국이 중국의 핵시설들을 공습할 경우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것으로 우려한 나머지, 공습계획 대신에 특수부대를 중국에 침투시키는 급변사태계획들(contingency plans)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중앙정보국(CIA)과 다른 관련부서들에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의 핵시설들을 파괴하려는 각종 작전계획을 검토했으면서도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실행하지 못했다. 

왜 실행하지 못했을까? 중국에게 섣부른 불질을 하는 경우 전면전으로 확전되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대만이 중국에게 넘어갈 것으로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우려는 미국이 겁쟁이여서 생겨난 것만이 아니었다. 1950년대에 일어난 대만해협위기가 미국에게 심각한 교훈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그런 우려가 생겨난 것이었다. 

중국내전에서 패하여 대만으로 도주한 장졔스(蔣介石) 정권은 1954년 8월 중국 본토 앞바다에 있는 섬들에 방대한 규모의 군사기지를 건설하였다. 대만군 병력 58,000명이 진먼(金門)섬을 뒤덮었고, 15,000명이 마추(馬祖)렬도에 밀려들었다. ‘본토수복’에 광분하는 장졔스의 도발을 방치할 수 없었던 중국은 진먼섬과 마추렬도에 대한 맹렬한 포격과 폭격을 계속하였다. 그 전투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은 이장산(一江山)섬과 다첸(大陣)군도를 점령하였는데, 이것이 1954년 9월 3일부터 1955년 5월 1일까지 계속된 제1차 대만해협위기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1964년 10월 16일 중국이 진행한 첫 핵시험에서 거대한 버섯구름이 하늘 높이 솟구쳐오르는 광경을 보며, 중국인들이 승리의 환성을 올리는 장면이다. 1964년 가을, 서울에서 국민학교(당시 명칭) 4학년 학생이었던 나는 "핵시험 이후 중국에서 대기의 흐름을 타고 우리나라 상공으로 날아오는 낙진을 맞으면 방사능오염으로 죽는다"는 학교당국의 거짓안전교육을 받았는데, 비가 내리는 날이면 방사능낙진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비옷으로 몸을 감싸고 등교길에 올랐던 일이 내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핵무기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중국은 1980년 5월 18일 미국 본토 전역에 핵타격을 가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여 마침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였다. 중국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것은 적국의 핵무기개발을 저지하려던 미국의 계획이 파탄되고, 미국이 적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역사상 첫 사례로 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대만이 중국에게 넘어갈까봐 다급해진 미국은 1955년 3월 3일 대만과 상호방위조약을 허겁지겁 체결하였고,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만상륙을 막아줄 미국 해군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황급히 들이밀었으며, 미국산 전투장비들로 대만군을 무장시켰다. 대만을 중국에서 떼어내려는 미국과 대만의 국가분렬책동은 진먼섬과 마추렬도에 대한 중국의 집중공격을 또 다시 촉발하였는데, 이것이 1958년 8월 23일부터 9월 22일까지 계속된 제2차 대만해협위기다. 

중국의 통일전쟁을 우려한 미국이 중국의 핵시설을 파괴하지 못하고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중국은 핵무기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중국은 1964년 10월 16일 첫 핵시험에서 성공하였고, 1966년 7월 1일에는 전략미사일부대인 제2포병부대를 창설하였으며, 1980년 5월 18일에는 미국 본토 전역에 핵타격을 가할 수 있는 둥펑(東風)-5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여 마침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였다. 중국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것은 적국의 핵무기개발을 저지하려던 미국의 계획이 파탄되고, 미국이 적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역사상 첫 사례로 되었다. 

미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승리한 중국은 자기의 핵무력을 더욱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2008년 3월 <중국중앙텔레비전방송(CCTV)>은 중국인민해방군 전략미사일부대가 주둔하는 거대한 지하핵기지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그 길이가 약 5,000km에 이른다고 보도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서울에서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까지 거리가 약 5,000km인데, 중국이 그렇게 긴 지하핵기지를 건설했다는 말은 누구도 선뜻 믿기 힘들었다. 그런데 2009년 12월 중국인민해방군 언론매체인 <중국국방일보>가 위의 보도내용이 사실이라고 확인해주었다. 

길이가 약 5,000km라는 것은 지하핵기지를 한 줄 직선으로 길게 뚫어놓았다는 뜻이 아니다. 중국의 지하핵기지는 수많은 지하시설, 지하도로, 지하철도가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된 거대한 지하도시다. 험준한 타이항(太行)산악지대에 건설된 지하핵기지에는 미사일발사구 수 백 개가 지표면으로 나 있는데,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진짜 발사구이고 어떤 것은 가짜 발사구이므로 적국 정찰위성의 식별능력을 교란할 수 있다. 

2017년 5월 22일 <중국중앙텔레비전> 온라인 보도매체는 1966년에 창설된 중국의 첫 전략미사일부대인 둥펑(東風) 제1여단이 허난(河南)성 쑹산(嵩山)에 있는 지하핵기지 미사일발사구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하는 놀라운 장면을 공개하면서, 만일 중국이 핵타격을 받으면 10분 안에 보복핵타격을 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중국의 험준한 타이항산악지대에 건설된 지하핵기지의 내부를 촬영한 것이다. 그 지하핵기지는 수많은 지하시설, 지하도로, 지하철도가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된 거대한 지하도시다. 그 지하핵기지에는 미사일발사구 수 백 개가 지표면으로 나 있는데,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진짜 발사구이고 어떤 것은 가짜 발사구이므로, 적국 정찰위성의 식별능력을 교란할 수 있다. 2017년 5월 22일 중국 언론매체는 1966년에 창설된 중국의 첫 전략미사일부대인 둥펑 제1여단이 허난성 쑹산에 있는 지하핵기지 미사일발사구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하는 놀라운 장면을 공개하면서, 만일 중국이 핵타격을 받으면 10분 안에 보복핵타격을 가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중국이 미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승리한 때로부터 37년이 흐른 2017년 11월 29일 조선은 미국 본토 전역에 전략핵타격을 가할 수 있는 화성-15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여 마침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였고, 미국과 맞선 운명적인 핵대결에서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의 승리는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뒤집어버린 엄청난 사변이었다. 

중국은 첫 핵시험에서부터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로 국가핵무력을 완성하기까지 16년 걸렸으나, 조선은 첫 핵시험에서부터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로 국가핵무력을 완성하기까지 11년 걸렸다.  

핵무기를 틀어쥐고 세계를 지배한다고 떠들어댔으나, 중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핵제국은 조선과 맞선 핵대결에서 또 패했다. 지난날 중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미국은 대만에서 미국군을 철수해야 했고, 오늘날 조선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미국은 한국에서 미국군을 철수해야 하는 궁지에 빠졌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 미국 대통령은 핵무기현대화사업으로 “위대한 미국을 재건하겠노라”고 큰 소리를 치고 있지만, 지난 반세기에 걸쳐 힘이 차츰 약해지고 있는 핵제국의 몰골을 신형 핵무기로 감출 수는 없다.  


2.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전범국의 핵야망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핵탄개발을 시도한 나라는 전범국 일본이다. 일본은 이미 1940년대에 핵탄개발에 손을 댔다. 당시 일본은 핵탄개발부문에서 미국과 경쟁하려고 하였다. 일제는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핵탄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미국은 영국과 협력하여 핵탄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과 미국 가운데서 어느 나라가 먼저 핵탄을 만드는가에 따라 태평양전쟁의 운명이 결정될 판이었다.   

2015년 7월 26일 일본 언론매체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1944년 10월 4일 일본 해군은 교또제국대학(당시 명칭)의 핵과학자 아라까쓰 분사꾸(荒勝 文策) 교수에게 핵탄개발을 의뢰하였는데, 아라까쓰 교수와 도꾜계기제작소가 각각 작성한 우라늄농축 원심분리기 설계도면 두 점이 그 대학의 이전 방사성동위원소연구소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설계도면에는 원심분리기제작이 완성되는 날짜가 적혀있었는데, 일제 패망 나흘 뒤인 1945년 8월 19일이 완성예정일이었다. 그들이 거의 완성해가던 원심분리기는 미국군의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일본 육군은 일본 해군보다 먼저 핵탄개발에 손을 댔다. 일본 육군은 1941년 도꾜제국대학(당시 명칭)의 저명한 핵과학자 니시나 요시오(仁科 芳雄) 교수에게 핵탄개발을 의뢰했고, 그로부터 2년 뒤 니시나는 폭발위력 10,000t급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비밀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 보고를 받은 1급 전범 도조 히데끼(東條 英機) 일본 총리는 일본 육군항공본부에게 핵탄을 만들라고 지시했고, 핵탄개발사업은 1943년 9월부터 추진되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여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일제의 핵탄연구시설들을 파괴하였고, 핵탄연구문서들을 압수하였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일제의 핵탄개발기술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일제가 패망한 직후 일제의 핵탄개발사업을 폐지하기 위해 미국이 일본에 급파한 핵공학전문가집단의 일원으로 일제의 핵탄개발사업을 현장에서 조사하였던 로벗 퍼먼(Robert R. Furman)은 2008년 미국 언론매체와 진행한 대담에서 1945년 8월 당시 일제의 핵탄개발기술은 초기단계에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심층정보를 모르는 몇몇 미국인 연구가들은 1945년 8월 12일 새벽 일제가 식민지조선의 흥남 앞바다에서 감행한 수중대폭발시험이 핵시험이었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고성능폭약을 터뜨린 고폭시험이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1945년 9월 패전국 일본에 급파된 미국 핵공학전문가집단이 교또제국대학(당시 명칭)에 있는 핵연구장치들을 해체하는 장면이다. 일본 해군은 1944년 10월 4일 교또제국대학의 핵과학자 아라까쓰 분사꾸 교수에게 핵탄개발을 의뢰하였다. 당시 아라까쓰가 추진하고 있었던 원심분리기제작이 완료되는 날은 일제 패망 나흘 뒤인 1945년 8월 19일로 예정되었다. 일제가 패망한 직후 일제의 핵탄개발사업을 폐지하기 위해 미국이 현지에 급파한 핵공학전문가집단의 일원으로 일제의 핵탄개발사업을 현장에서 조사하였던 로벗 퍼먼은 1945년 8월 당시 일제의 핵탄개발기술은 초기단계에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고도의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조선을 비핵화하겠다고 떠들어대면서, '조선반도의 완전한 비핵화'가 무슨 뜻인지도 알지 못하는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일제가 패망하여 핵야망이 사라지는 듯했지만, 패망 이후 일본은 전범국으로서 자기 죄행을 반성하고 자숙하기는커녕 핵야망을 버리지 않았다. 흉악한 1급 전범으로 마땅히 사형을 당했어야 하지만, 미국이 사형집행 직전에 극적으로 살려주어 전후 일본을 미국의 요구대로 재건하는 임무를 맡긴 기시 노부스께(岸 信介) 일본 총리는 1957년에 “현행 헌법 아래서도 자위를 위한 핵보유는 용인된다”고 하면서 핵야망을 드러냈다. 

2013년 11월 29일 미국 노틸러스 연구소(Nautilus Institute)가 공개한, 미국 국무부 원동지역 연구부가 1957년 8월 2일에 작성한 보고서는 “1950년대 일본의 보수정권은 원동지역이 냉전적 긴장상태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핵무기를 생산하는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고 하면서 “기시 노부스께 일본 총리는 핵무기가 일본 방위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핵무기 생산을 반대하는 여론을 무마하여야 했기 때문에 핵무기를 만들지 못했다”고 지적하였다. 

2014년 7월 24일 일본 텔레비전방송 <NHK>가 기밀해제된 일본 외교문서를 보도하였는데, 그 문서에는 기시 노부스께의 뒤를 이어 일본 총리가 된 이께다 하야또(池田 勇人)와 딘 러스크(David Dean Rusk) 미국 국무장관이 1964년 1월 28일 일본 도꾜에 있는 총리관저에서 진행한 회담내용이 담겼다. 회담에서 러스크 국무장관은 중국이 1~2년 안에 핵시험을 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들은 이께다 총리는 중국이 한 두 차례 핵시험을 해도 정세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중국의 과학수준과 경제수준을 보면, 핵시험은 불가능하지 않지만 (실전에 사용될) 핵무기를 만드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께다는 당시 중국의 핵무기개발능력을 과소평가하였다. 이께다가 러스크 앞에서 과소평가발언을 늘어놓은 때로부터 9개월 만에 중국은 핵시험에서 성공하였고, 1966년 10월 27일에는 사거리가 1,250km인 둥펑-2 탄도미사일에 전술핵탄두를 장착하고 시험발사하여 기폭시켰으며, 1967년 6월 17일에는 3.3메가톤급 수소탄 기폭시험에서 성공하였다. 

중국의 핵무기개발은 일본을 자극하였다. <NHK> 2010년 10월 4일 보도에 따르면, 1964년 중국의 첫 핵시험 직후 일본 정부는 비밀보고서에서 중국의 핵보유가 일본에 미치는 정치적, 심리적 영향이 크다고 하면서, 일본은 “언제라도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는 잠재능력을 중국보다 높은 수준에서 항상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핵야망이 꿈틀거리자 미국은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 ‘핵우산’ 공약을 확인해주어야 했다. 일본 외무성이 2008년 12월 22일에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시 중국의 핵무기개발에 자극을 받은 사또 에이사꾸(佐藤 英作) 일본 총리는 1965년 1월 12일부터 13일까지 워싱턴을 방문하여 린든 존슨 대통령과 회담하면서 일본에 대한 핵우산 제공을 보증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존슨 대통령은 즉석에서 “내가 보증한다”는 확답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사또 총리는 로벗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 미국 국방장관과 진행한 회담에서도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미국은 즉각 핵공격을 포함한 반격을 해주기 바란다”고 하면서, “해상에 배치된 핵무기탑재 함선이라면 즉각 핵공격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이것은 ‘핵우산’ 공약을 보증해달라는 소리였다. 말귀를 금방 알아차린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해상에 배치된 핵무기탑재 함선이라면 기술적인 문제는 없다”고 맞장구를 쳤다. 

2007년 9월 14일 기밀해제된 일본 외교문서에 따르면, 중국이 수소탄 기폭시험에서 성공한 직후인 1967년 11월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워싱턴을 또 다시 방문한 사또 총리와 회담하면서 그에게 “핵무기 사용이 중국의 핵위협을 저지하기 위한 방도로 간주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공약확인과 더불어, 미국은 일본과 핵밀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일본의 핵야망을 억제하였다. 1969년 11월 19일 워싱턴에서 진행된 미일정상회담에서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 대통령과 사또 에이사꾸 총리는 긴급사태가 일어나는 경우 일본은 미국이 오끼나와 미국군기지에 핵무기를 반입하거나 미국의 핵전략자산이 오끼나와를 통과하는 것을 인정하고, 미국은 오끼나와에서 핵무기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게 준비한다는 핵밀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과 핵밀약을 체결하였으면서도 핵야망을 포기하지 않고 은밀히 책동하였다. 독일 외무성의 기밀문서를 인용한 <NHK> 2010년 10월 4일 보도와 <요미우리신붕> 2010년 11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1969년 2월 3일부터 5일까지 일본 도꾜에서 진행된 일본-서독 정책기획협의에서 일본 외무성 관리들은 “국제적으로 감시해도 핵분열물질을 5% 정도 추출하는 것을 차단하지는 못하므로, 핵탄생산기반을 구축할 수 있다. 일본은 핵무기 원료를 만드는 기술을 가졌다”고 밝히면서, 서독에게 핵공학기술협력을 요청했는데, 서독 외무성 대표단은 자기들이 그 문제를 결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발뺌하였다고 한다. 

그보다 앞서, 1967년 12월 사또 총리는 일본 국회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던 중에 이른바 ‘비핵3원칙’이라는 것을 언급하면서 일본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 반입하지 않고, 만들지 않겠다고 뇌까렸지만, 그것은 흑막 뒤에서 핵야망을 실현하려고 책동하면서, 무대 위에서는 마치 핵야망을 포기한 것처럼 연출한 희대의 사기극이었다. 사기극에 감쪽같이 속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비핵3원칙’을 제시한 ‘공로’를 인정하여 1974년 3월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일본이 핵야망을 실현하려고 책동해도, 미국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얼마 전, 조선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직후 일본의 핵야망은 또 다시 꿈틀거렸지만, 일본은 중국이 핵무기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1960년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핵야망을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미국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3. 고용간첩 도미탈주극으로 파탄된 대만의 핵개발사업

1988년 1월 9일 미국 서북단에 있는 워싱턴주 씨애틀-타코마 국제공항에 미국 중앙정보국 요원들이 모여들었다. 이윽고 홍콩발 미국 민항기에서 내린 중국인 한 사람이 특별입국절차를 마치더니 중앙정보국 전용차량을 타고 순식간에 공항을 빠져나갔다. 그 중국인은 미국 중앙정보국에게 포섭되어 오랜 기간 대만에서 고용간첩으로 암약해온 장셴이(張憲義)였다. 그는 당시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던 대만 중산과학연구원 제1연구소 부소장이었다. 1988년 1월 13일 장셴이는 미국 연방의회 비밀청문회에서 대만의 핵무기개발에 관한 극비정보를 털어놓았다. 첩보영화장면처럼 흘러가는 이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대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일본이 그러했던 것처럼 대만도 중국의 첫 핵시험에서 자극을 받고 핵야망을 품었다. 대만이 중산과학연구원을 설립하고 ‘신주(新竹)계획’이라는 이름의 핵무기개발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한 때는 1969년이었다. 당시 중산과학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던 장셴이는 미국에 유학하였는데, 그가 미국에서 핵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때는 1973년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대만이 핵무기개발사업을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다시 말해서 장셴이가 1965년부터 1968년까지 대만 국립칭화대학에서 핵공학을 공부할 때부터 그를 포섭하여 고용간첩으로 육성하였다. 

대만은 중국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였던 1980년에 기존 ‘신주계획’을 ‘타오위안(桃園)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핵무기개발사업을 가속화하였는데, 대만의 핵무기개발사업이 가속화될수록 장셴이의 간첩활동도 더욱 대담해지고 활발해졌다. 대만은 핑둥(屛東)현에 건설된 주퍼(九鵬)지하시설 안에 각종 핵공학설비들을 들여놓고 플루토늄추출기술을 확보하였고, 연속적인 고폭시험으로 핵무기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핵탄두운반수단을 만들기 위해 ‘텐마(天馬)계획’이라는 이름의 탄도미사일개발사업도 병진시켰다. 그리하여 대만은 늦어도 1989년까지 핵무기개발을 완료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대만 중산과학연구원 경내에 있는 연구개발전시관 외부를 촬영한 것이다. 중국의 첫 핵시험에서 자극을 받은 대만은 1960년대 후반에 핵무기개발을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대만은 1969년 중산과학연구원을 창설하고, '신주계획'이라는 이름의 핵무기개발사업에 집착하였다. 중국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였던 1980년에 대만은 기존 '신주계획'을 '타오위안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핵무기개발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그리하여 대만은 늦어도 1989년까지 핵무기개발을 완료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국은 20여 년 동안 대만 핵무기개발사업의 핵심부에 박아둔 고용간첩 장셴이를 1988년 1월 8일 미국으로 빼돌려 대만의 핵무기개발사업을 파탄시켰다.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에 의해 주한미국군 제7사단이 전격 철수되자 안보불안에 사로잡힌 박정희는 비밀리에 핵무기개발을 추진하던 중 미국의 제지를 받고서도 계속 강행하다가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 술자리에서 김재규의 총에 암살당했고, 중국의 국가핵무력 완성에 자극을 받은 대만 총통 장징궈는 비밀리에 핵무기개발을 추진하였으나 미국 중앙정보국 고용간첩 장셴이와 그의 가족이 도미탈주한 사건에서 너무 큰 충격을 받고 비명횡사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핵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한국, 대만, 일본은 어떤 경우에도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만일 대만이 핵무기를 만들고 독립을 선포하면, 중국은 즉각 대만을 복속시키는 통일전쟁을 단행할 판이었다. 그렇게 되면, 핵보유국과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따르는 미국은 발만 동동 구르다가 대만을 중국에게 넘겨주게 될 판이었다. 1987년 중국-대만-미국 삼각관계는 극도의 긴장 속에 휘말렸다.   

중국이 통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대만이 중국에게 넘어가는 씨나리오는 미국에게는 대재앙인데, 미국이 그런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이 20여 년 동안 대만 핵무기개발사업의 핵심부에 박아둔 고용간첩 장셴이를 미국으로 빼돌려 대만의 핵무기개발사업을 파탄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1988년 1월 8일에 일어난 장셴이와 그 가족의 극적인 도미탈주극으로 대만의 핵무기개발사업은 파탄되었다. 장셴이의 도미탈주극을 보고받고 심한 충격에 빠진 대만 총통 장징궈(蔣經國)는 병석에서 피를 토하다가, 장셴이가 미국 연방의회 비밀청문회에서 대만의 핵개발사업에 관한 극비정보를 털어놓은 바로 그날 숨을 거두었고, 그의 뒤를 이어 미국의 말을 잘 듣는 리덩후이(李登輝)가 권좌에 올랐다. 리덩후이는 미국이 정해준 비핵화씨나리오에 따라 대만의 핵무기개발사업을 폐기하였다.  

그렇다면 대만은 핵야망을 영구히 포기하였던가? 리덩후이가 핵무기개발사업을 폐기한 때로부터 18년이 지난 2007년 11월 11일 중국 홍콩에서 발간되는 시사주간지 <아주주간>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대만이 핵보유국인 인도로부터 비밀리에 핵무기개발에 관련된 기술지원을 받고 있다는 폭로기사였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1998년 5월 인도가 핵시험에서 성공하였을 때 인도 국방장관으로 재직하였으며, 평소에 중국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쉬리 조지 퍼난데스(Shri George Fernandes)는 2004년 11월 대만을 처음 공개적으로 방문하여 대만 총통 천수이볜(陳水扁)을 만난 이후 여러 차례 비공개로 대만을 방문하였는데, 대만에 갈 때마다 그는 총통의 안보자문기관인 국가안전회의 인사들을 비밀리에 만났고, 대만 국가안전회의 인사들도 여러 차례 인도를 비밀리에 답방하여 인도 국방부 관리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대만의 야당인사는 2007년 10월 19일 대만 입법원에서 대정부질의를 하면서 천수이볜 정부가 인도의 전직 국방장관과 핵무기개발전문가들을 비밀리에 대만으로 초청하였다고 폭로하였다. 

대만이 인도의 기술협력을 받으며 핵무기개발을 재개하였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는 보이지 않지만, 양자 사이의 비공개 교류는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2020년까지 대만을 복속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중국이 대만의 분리독립책동을 억제하려는 군사활동을 대만 주변에서 계속 벌이고 있는 오늘의 긴장된 정세에서 대만이 또 다시 핵야망을 추구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긴다.   


4.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과 저우언라이의 오판

1960년대 말에 핵탄두를 개발한 중국은 그것을 운반할 탄도미사일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1970년 1월 30일 중국은 둥펑-4 중거리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였다. 2단형 로켓으로 설계된 이 중거리탄도미사일이 실전배치되면, 미국의 서태평양전략거점인 괌(Guam)을 사정권 안에 둘 수 있었다. 또한 중국은 1970년 4월 24일 중국의 첫 인공위성 둥팡홍(東方紅)-1호를 탑재한 위성운반로켓 창정(長征)-1호를 성공적으로 쏘아올렸다. 이것은 중국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국가핵무력 완성을 향한 중국의 움직임을 감시해오던 미국은 국가안보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은 신흥 핵보유국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수밖에 없었다. 닉슨 대통령은 자기의 심복 헨리 키씬저(Henry A. Kissinger) 국가안보보좌관에게 대중관계개선을 추진하라는 특명을 주고, 그를 베이징에 밀사로 파견하였다. 1971년 7월 9일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와 키씬저 미국 대통령 밀사의 비밀회담이 진행되었다. 회담에서 저우언라이는 철군지역들을 지적하였는데, 그가 중요순위에 따라 열거한 지역은 베트남, 대만, 한반도였다.  

그런데 당시 중국은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에 관한 심층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은 베트남중부전선 케산전투에서 미국군이 패한 이후 베트남에서 미국군을 완전히 철수하고, 중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이후 대만에서도 미국군을 완전히 철수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닉슨은 1968년 1월 23일 미국 첩보선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조선인민군 해군에게 나포된 사건, 1969년 4월 15일 미국 첩보기 EC-121이 동해 상공에서 조선인민군 공군 전투기에게 격추당한 사건으로 핵제국의 체면이 무참히 짓밟힌 한반도에서도 미국군을 완전히 철수하려고 생각하였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1971년 7월 9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베이징을 비밀리에 방문한 미국 대통령 밀사 헨리 키씬저와 상봉하는 장면이다. 1960년대 말 국가핵무력 완성을 향한 중국의 움직임을 감시해오던 미국은 국가안보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고, 신흥 핵보유국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수밖에 없었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자기의 심복 키씬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대중관계개선을 추진하라는 특명을 주고, 그를 베이징에 밀사로 파견하였다. 저우언라이-키씬저 비밀회담은 그렇게 성사되었다. 그런데 당시 중국은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에 관한 심층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만일 저우언라이가 정세를 오판하지 않고 키씬저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를 강하게 요구하였더라면, 닉슨은 자기의 철군구상을 실행에 옮겼을 것이고, 그런 정세급변에 대처하지 못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붕괴되고, 평화통일을 천명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김대중 정부와 북측 정부는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에 제시된 조국통일 3대 원칙에 의거하여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공화국을 건설하였을지 모른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1969년 8월 21일 미국 쌘프랜시스코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닉슨은 박정희에게 “북의 도발이 계속되기 때문에 주한미국군을 철수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철군을 두려워하는 박정희를 속인 거짓말이었다. 닉슨은 자신을 수행하여 한미정상회담에 배석한 윌리엄 포터(William J. Poter) 주한미국대사를 한미정상회담 직후 따로 부르더니, 주한미국군 철수훈령을 곧 내리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국은 닉슨 대통령의 철군준비지시를 받고 주한미국군 철수문제를 검토하였다. 

그런데 키씬저가 철군을 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닉슨은 주한미국군을 완전히 철수하려던 자신의 구상을 접고, 감군훈령을 내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닉슨의 감군훈령에 따라, 미국 국방부는 1971년 3월 27일 주한미국군 제7사단을 전격 철수하였고, 남겨둔 제2사단은 서부전선 방어임무를 한국군 전방사단에게 넘겨주고 뒤쪽으로 물러서게 조치하였다. 

키씬저는 왜 닉슨의 철군구상을 반대하였을까? 이 물음에 명쾌한 해답을 주는 문서들은 찾아볼 수 없지만, 당시 그는 두 가지 반론을 제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주한미국군이 철수하는 경우, 박정희 정권이 붕괴되어 한국을 잃어버리게 될 것으로 우려하였기 때문에 키씬저는 닉슨의 철군구상을 반대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둘째, 주한미국군이 철수하고, 미국이 한국을 잃어버리는 경우, 정세급변으로 충격을 받은 일본이 핵야망을 다시 추구하게 될 것으로 우려하였기 때문에 키씬저는 닉슨의 철군구상을 반대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닉슨의 철군구상은 키씬저가 반대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고, 제7사단만 철수하였는데, 당시 그런 내막을 알지 못한 중국은 제7사단 철수가 주한미국군을 단계적으로 완전히 철수하는 ‘서막’인 것으로 오판하였다. 미국군이 베트남과 대만에서 각각 철수하기 훨씬 전에 한반도에서 먼저 제7사단이 전격 철수했으니, 중국이 그렇게 오판할 만도 했다.  

중국이 그런 오판에 빠져 있었던 때, 다시 말해서 주한미국군 제7사단이 철수된 때로부터 약 석 달 뒤, 키씬저가 베이징에 나타났다. 그를 만난 저우언라이는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철수하고 일본자위대를 한국에 파병하려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1971년 7월 11일 베이징에서 키씬저를 만난 저우언라이는 “25년 뒤 미국이 패권적 지위를 누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일본은 강해졌다. 만일 지금 원동지역에서 미국군이 모두 철수하면, 일본을 강화시켜 아시아 나라들을 통제하는 데서 미국의 전위대로 내세우려는 것이 미국의 목적”이라고 지적하면서,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철수하고 일본자위대를 한국에 파병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을 키씬저에게 들이댔다.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키씬저는 미국이 일본의 해외팽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꺼내놓았는데, 저우언라이의 의심은 그런 답변으로 해소될 수 없었다. 1971년 10월 22일 베이징에서 진행된 제2차 회담에서 저우언라이는 키씬저에게서 확답을 받아내기 위해 이렇게 다그쳤다. “나는 한 마디 덧붙고 싶다. 만일 당신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남조선에서 미국군을 철수하는 것이라면, 미국군을 일본군으로 대체하는 것도 당신들의 목표인가?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이 물음에 키씬저는 이렇게 답변했다. “주한미국군을 일본자위대로 대체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일본자위대의 대만 파병에 대해 내가 어제 언급했던(반대했다는 뜻-옮긴이) 일반적인 원칙과 똑같다. 미국은 일본의 군사팽창을 반대한다.”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을 오판한 저우언라이는 주한미국군을 일본자위대로 대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키씬저의 답변을 믿을 수 없었다. 일본자위대가 한국에 파병되는 최악의 씨나리오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 저우언라이는 키씬저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만일 저우언라이가 정세를 오판하지 않고 키씬저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를 강하게 요구하였더라면, 중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해 수세에 몰린 닉슨은 자기의 철군구상을 실행에 옮겼을 것이며, 그런 정세급변에 대처하지 못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붕괴되고, 1971년 4월 27일 대선에서 ‘3단계 평화통일’을 천명한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김대중 정부와 북측 정부는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에서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조국통일 3대 원칙을 구현하여 통일공화국을 건설하였을지 모른다. 

당시 베트남이 통일된 과정을 보면, 1968년 1월 21일부터 7월 9일까지 계속된 케산전투에서 패한 미국은 1973년 3월 29일 베트남에서 미국군을 철수했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75년 4월 30일 베트남민족은 통일공화국을 건설하였다. 베트남의 역사적 경험은 미국의 패배로부터 철군까지 5년, 철군에서 통일까지 2년밖에 걸리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1970년대 초 우리 민족에게 다가왔던 철군의 기회는 사라졌고, 전쟁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정전체제는 그대로 남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긴 세월이 흐른 오늘 우리 민족은 금은보화보다 더 귀중한 두 번째 기회를 맞았다. 어떤 기회인가?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으로 미국이 조선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하였고, 근 반세기 전에 닉슨 대통령이 주한미국군 철수를 구상하였던 것처럼 오늘 트럼프 대통령도 주한미국군 철수를 구상하고 있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미핵대결에서 승리한 기세로 주한미국군을 철수시키고 자주통일을 실현하려는 전략구상을 추진하고 있고, 문재인 대통령은 그토록 험악했던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하에서도 3단계 평화통일론을 외쳤던 김대중 대통령을 따라가지는 못하지만 남북관계개선에는 상당히 적극적이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그런 변화들이 정전-분단체제를 뒤흔드는 가운데, 남북정상회담, 조미정상회담, 조중정상회담이 잇달아 성사되면서 종전선언 발표가 일정에 올랐고, 철군기회가 마침내 시야에 들어왔다. 

위와 같은 정세인식에 이르면, 올해 1월부터 주체적 조건들과 객관적 조건들이 서로 착착 맞물리면서 조국통일정세가 성숙되어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나니, 8천만 우리 민족이 힘을 합쳐 몇 해 안에 통일공화국을 건설할 눈부신 내일을 뉘라서 감히 외면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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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1

주한미국군 감축 예상한 미국 국방부와 연방의회

[한호석의 개벽예감](311)
자주시보 2018년 08월 20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국방수권법안에서 뭐가 달라졌는가?
2. 올해 국방수권법안에서 드러난 무지몽매와 망동
3. 조미비핵화협상 감시하려는 국방부와 연방의회
4. 대통령의 철군결정은 누구도 가로막지 못한다


1. 국방수권법안에서 뭐가 달라졌는가?

2018년 8월 13일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 미국 대통령이 뉴욕주 북부에 있는 포트 드럼(Fort Drum)을 방문하였다. 이 군사기지에는 미국 육군 제10산악사단이 주둔하고 있다. 미국군에 단 하나뿐인 이 경보병산악사단은 지난 10여 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전쟁과 이라크전쟁에서 실전경험을 쌓아온 정예부대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 정예부대를 찾아가 흥미로운 정치극을 연출하였다. 미국 언론매체들의 보도사진을 보면, 그는 미국 육군의 전투장비를 대표하는 AH-64E 어파치(Apache) 공격헬기 두 대와 차량견인식 155mm M777 곡사포 두 문을 배경에 두고, 장병들 앞에서 법안서명식과 연설을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백악관에서 법안에 서명해온 전통과 관례를 벗어나 전투부대에서 서명식을 진행하고 연설까지 하였으니, 이를 어찌 의도적으로 연출된 정치극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2018년 8월 13일 뉴욕주 북부에 주둔하는 경보병산악사단을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이 장병들 앞에서 서명한 '2019회계년도 국방수권법안' 문서를 손에 들고 장병들과 취재진에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미국 국방부가 작성하고, 연방의회가 승인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국방수권법안은 오는 10월 1일부터 1년 동안 시행된다. 2019회계년도에 미국 국방부가 지출할 군사예산은 약 7,170억 달러인데, 거기에는 미국의 핵무력을 현대화하고, 우주군을 창설하고, 병력을 증원하고, 신형 전략폭격기를 개발하고, 신형 전투함을 건조하고, F-35 스텔스전투기 77척을 제작하는 방대한 규모의 예산이 포함되었다. "위대한 미국의 재건"을 무력증강으로 실현하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적 의지가 그 법안에 반영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트럼프 대통령이 그런 정치극을 연출하면서 서명한 법안은 미국 국방부가 작성하고 연방의회가 승인한 ‘2019회계년도 국방수권법안(National Defense Authorization Act for Fiscal Year 2019)’이다. 국방수권법안이라는 것은 군사예산을 얼마나 책정하고, 어느 부문, 어느 사업에 군사예산을 어떻게 배정하는지를 명시한 회계법안이다. 미국 연방정부의 회계년도는 10월 1일부터 이듬해 9월 30일까지 1년이므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8월 13일에 서명한 국방수권법안은 2018년 10월 1일부터 시행되어 2019년 9월 30일에 종료되는 한시법안이다. 

미국 국방부가 작성하고 연방의회가 승인한 법안에서 책정된 2019회계년도의 군사예산은 약 7,170억 달러다. 거기에는 핵무력을 현대화하고, 우주군을 창설하고, 병력 15,000명을 증원하고, 신형 전략폭격기 B-21을 개발하고, 신형 군함 13척을 건조하고, F-35 스텔스전투기 77척을 제작하는 방대한 예산이 포함되었다. “위대한 미국의 재건”을 무력증강으로 실현하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적 의지가 그 법안에 반영되었다. 법안에 서명한 트럼프 대통령은 곧이어 진행된 연설에서 “지난 몇 해 동안 지독한 삭감조치가 있었으나, 지금 우리는 이전에는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우리 군대를 재건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자유를 살리기 위한 것임을 알기에 우리 군대의 힘에 의존한다. 지구 위의 그 어떤 적도 미국군의 힘과 용기와 기량에 맞서지 못한다.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게 되었으며, 결코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큰 소리를 쳤다.    

일반적으로 국방수권법안에는 미국 국방부가 인식하는 군사정세와 그에 대한 대응책이 반영되는데, ‘2019회계년도 국방수권법안’과 ‘2018회계년도 국방수권법안’을 비교하면서 그 문제를 파악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2018회계년도 국방수권법안’에 서명하였던 2017년 12월 12일은 조선이 화성-15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여 미국 본토 전역에 전략핵타격을 가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한 날로부터 불과 12일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으므로, 당시 미국 국방부는 국가안보파탄위험을 직감하고 있었고, 바로 그런 사정이 그 법안에 반영되었다. 그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18년회계년도 국방수권법안’에는 미국이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가장 중시하는 세 가지 군사전략목표가 명시되었는데, 그 목표를 우선순위에 따라 열거하면, 첫째가 “한반도의 위협에 대처하기에 필요한 군사적 임무들”이고, 둘째가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중국이 제기한 도전과 관련된 미국 국방부의 역할”이고, 셋째가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테러와 싸우기 위한 목적과 우선순위들”이다. 

미국 국방부는 지난해 국방수권법안에서 “북조선의 핵 및 미사일프로그램이 오늘 미국이 직면한 가장 위험한 국가안보위협들 가운데 하나라고 인식하고, 현 행정부가 한국과 일본의 방어를 최우선순위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12월 12일 백악관에서 '2018회계년도 국방수권법안'에 서명하는 장면이다. 미국 국방부는 지난해 국방수권법안에서 조선의 핵무력 완성을 미국이 직면한 가장 위험한 국가안보위협이라고 지적하면서, 미국이 한국과 일본의 방어를 최우선순위에 놓아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그와 달리, 올해 국방수권법안에서는 조선의 핵무력이 인도양-태평양 전역의 안정에 중대한 국가안보위협을 제기한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서술내용의 변화는 2018년 6월 12일 조미정상회담이 성사된 이후 조선의 국가핵무력에 대한 미국의 위협체감도가 현저하게 낮아졌음을 말해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당시 다급한 사정에 처한 미국 국방부는 국방장관이 조선의 대륙간탄도미사일에 관한 정보와 대응계획을 연방의회에 보고하겠다고 하였다. 이를테면, “북조선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또는 핵무기의 개발 및 배치”, “북조선의 핵 및 미사일프로그램이 미국과 동맹국들에 주는 영향”, “북조선의 위협을 억제하고 방어하는 계획”, “우주공간에서 미국의 사활적 이익과 능력을 북조선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계획”, “북조선의 전자기파무기(EMP weapon)가 촉발할 수 있는 손실과 파괴” 등에 관한 국방장관 보고서를 연방의회에 제출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와 달리, ‘2019회계년도 국방수권법안’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프로그램이 미국만이 아니라 한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하는 인도양-태평양 전역의 안전과 안정에 중대한 국가안보위협을 제기하는 것으로 인식한다”고 간략하게 명기되었다. 

미국이 직면한 국가안보위협에 관한 서술내용이 지난해 국방수권법안과 올해 국방수권법안에서 그처럼 확연히 달라진 것은, 2018년 6월 12일 조미정상회담이 성사된 이후 조선의 국가핵무력에 대한 미국의 위협체감도가 현저하게 낮아졌음을 말해준다. 

미국 국방부는 지난해 국방수권법안에서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에 맞서기 위한 대책들을 열거하였다. 이를테면, “미국 국방부가 2017년에 작성하는 ‘핵태세검토보고서(Nuclear Posture Review)’에서 미국이 한국과 일본에게 충분한 방어능력을 제공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음을 재확인하는 행동들을 충분히 고려하여야 한다”고 지적하였고, 한미군사회담과 미일군사회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미국의 확장억제노력의 신뢰성과 실천성을 보장하는 현존 핵능력을 유지하고 현대화하여야 한다”고 언급하였으며, “현대적인 핵능력을 갖춘 항공모함을 적절한 시기에 개발하고, 생산하고, 배치하는 것은 미국이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확장억제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보장하는 데서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미국 국방부는 지난해 국방수권법안에서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에 대처하는 대책수립과 관련하여 법안시행일로부터 30일 안에 “미사일방어체계, 장거리타격자산, 중거리타격자산 같은 미국의 주요군사자산들을 해당지역에 증강배치하고, 해당지역에서 동맹국들과의 군사협력, 군사연습, 통합방위를 강화하고, 해당지역 동맹국들에게 대외군사판매를 증대시키고, 해당지역에 이중용도 항공모함을 배치하거나 훈련하는 계획을 수립하며, 핵탄두를 장착하는 잠수함발사순항미사일을 해당지역에 재배치하는 문제를 포함하여 핵무력태세에 관련된 필요한 조치들을 취하고, 미국 국방장관이 해당지역에서 확장억제 및 안보보장을 강화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행동들도 취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와 달리, 올해 국방수권법안에서는 “미국이 한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방어와 확장된 핵억제에 관한 조약의무와 보장을 포함하여 자기의 조약의무와 보장을 흔들림 없이 견지하는 것으로 인식한다”고 간략하게 명시되었다.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에 맞서려는 미국의 핵무력준비태세에 관한 서술내용이 지난해 국방수권법안과 올해 국방수권법안에서 그처럼 달라진 것은, 2018년 6월 12일 조미정상회담이 성사된 이후 조선의 국가핵무력에 대한 미국의 위협체감도가 현저하게 낮아졌음을 말해준다.


2. 올해 국방수권법안에서 드러난 무지몽매와 망동

지난해 국방수권법안과 올해 국방수권법안을 대조하면, 서술내용에서 차이점이 하나 더 나타나는데, 그것은 지난해에는 언급되지 않았던 비핵화문제가 올해 매우 비중 있게, 그리고 아주 상세하게 명기된 것이다. 미국 국방부가 올해 국방수권법안에서 명시한 비핵화문제에 관한 서술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 국방부는 올해 국방수권법안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완전하고, 검증할 수 있고,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가 미국의 중심적인 대외정책목표로 되었다”고 명시하였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비핵화합의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충돌종식합의”도 한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방어와 확장된 핵억제에 관한 미국의 조약의무와 보장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였으며, 주한미국군을 “강력하게,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미국 국방부는 지난해 국방수권법안에서 북조선이라는 비공식 국호를 썼지만, 올해 국방수권법안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표기했다. 이것은 조선의 국가적 지위 및 조미관계에 대한 미국의 인식이 변화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위에 서술된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한반도에서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한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는 역사적 과업에 대한 미국 국방부의 인식은 정세발전을 거스르는 퇴행적이고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강변으로 일관되었다. 이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면, 미국 국방부는 남북정상회담과 조미정상회담에서 합의되고 천명된 ‘조선반도의 비핵화’라는 핵심개념을 ‘조선의 비핵화’라는 자의적 개념으로 바꿔버리고, 조선이 ‘완전하고, 검증할 수 있고,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미국 국방부는 조선과 미국이 비핵화나 평화체제구축과 관련하여 어떤 합의에 이르더라도, 한미동맹체제는 그런 합의와 무관하게 종전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미국 국방부의 그런 견해와 입장은 그들의 무지몽매를 드러내 보여줄 뿐이다. 그들은 조미관계가 올해 국방수권법안에 서술된 방향과는 정반대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몽매에 빠져있는 것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한미동맹체제라는 것은 정전체제에 의해 산생된 것이므로, 종전선언 발표에서 출발하여 평화체제가 구축되는 일련의 정세변화 속에서 정전체제가 해체되면 한미동맹체제도 존재근거를 상실하고 당연히 해체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무지몽매에 빠진 미국 국방부는 한반도 평화체제와 한미동맹체제가 양립, 병존할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였다. 한반도 평화체제와 한미동맹체제의 상호관계와 관련하여 미국 국방부가 드러내 보인 그런 무지몽매는 아주 오래 전부터 흘러나오는 왜곡관념의 병리적 분비물이므로, 별로 특기할 만한 것이 아니다. 

정작 특기할 만한 것은, 올해 국방수권법안에는 지난해 국방수권법안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내용이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그 새로운 내용은 미국 국방부가 올해 국방수권법안에서 주한미국군 감축문제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주한미국군 감축을 반대해오던 그들이 올해 국방수권법안에서 그 문제에 대해 처음 언급한 것은 중대한 문제이므로, 아래에서 자세히 논한다. 

미국 국방부는 지난해 국방수권법안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대조선전략수립문제에 대해 언급하였다. 지난해 국방수권법안에서 미국 국방부는 대조선전략수립에 관한 대통령 보고서가 연방의회에 제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테면, “대통령은 법안시행일로부터 90일 안에 대조선전략수립에 관한 보고서를 연방의회에 제출하고, 이에 관련된 진전상황을 알려주는 갱신된 연례보고서를 연방의회에 제출할 것”이라고 하면서, 대통령 보고서에 들어가야 할 주요내용들까지 적시하였다. 미국 국방부와 연방의회가 대통령 보고서에 적시되기를 원했던 주요내용들은 “미국의 국가안보에 대한 북조선의 주요위협에 대한 설명과 평가”, “외교, 경제, 안보부문에서 한반도전략의 목표들과 북조선으로부터 발생되는 안보위협의 종식”, “안보위협을 종식시키는 상세한 실행경로와 시간표” 등이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2018년 8월 1일 미국 연방상원이 '2019회계년도 국방수권법안'을 의결하는 장면이다. 미국 국방부는 올해 국방수권법안에서 국방장관이 '조선의 비핵화'에 관한 보고서를 연방의회에 제출하겠다고 하면서, 그 보고서에 조선이 전면 배격한 "강도적이고 일방적인 요구"를 반영하겠다고 하였다. 올해 국방수권법안에서 미국 국방부는 조미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조선반도의 완전한 비핵화'가 아니라 '조선의 비핵화'를 조선에게 요구하겠다고 하면서, 핵무기가 아닌 대량파괴무기들까지 비핵화대상으로 규정함으로써 조미정상회담 공동성명을 훼손하려는 불순한 저의를 드러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미국 국방부는 올해 국방수권법안에서 대통령 보고서가 아니라 국방장관 보고서를 연방의회에 제출하겠다고 하였고, 대조선전략에 관한 보고서가 아니라 조선의 비핵화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겠다고 하였다. 이를테면, “미국 국방장관이 국가정보실장, 국무장관, 에너지장관과 협력하여 법안시행일로부터 60일 안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협상을 진전시키는 기준선을 정하기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프로그램 현황에 관한 보고서를 연방의회 산하 위원회들에 제출하겠다”고 명시된 것이다. 그리고 미국 국방부는 국방장관 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주요내용들을 담겠다고 하였다.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무기, 그리고 화학무기 및 생물무기를 포함한 다른 대량파괴무기들의 위치, 수량, 능력, 작전상태”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무기, 그리고 화학무기 및 생물무기를 포함한 다른 대량파괴무기들을 연구, 개발, 생산, 시험하는 시설들의 위치”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상고정식 탄도미사일발사대의 위치, 수량, 능력, 작전상태, 그리고 이동식 발사대와 해상발사대의 능력, 준비태세에 관한 평가”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도미사일 제조시설, 조립시설들의 위치”
(5) “위의 서술부분에서 요구되는 정보와 관련된 정보격차와 확인수준에 대한 평가, 그리고 그런 정보격차를 메울 수 있는 검증 또는 사찰”

미국 국방부가 연방의회에 제출할 국방장관 보고서에 담으려는,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 사항들은 조선이 전면적으로 배격한 “강도적이고 일방적인 요구”들이며, 국가자주권을 인정하는 국제법에서 탈선한 비법적인 요구들이다. 더욱이 ‘조선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합의한 조미정상회담 공동성명과 어긋나게 핵무기가 아닌 대량파괴무기까지 비핵화대상으로 규정하였다는 점에서, 조미정상회담 공동성명을 훼손하려는 불순한 저의가 올해 국방수권법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조선에게 그런 부당한 요구를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불법행위다. 그런데도 미국 국방부가 연방의회에 제출하여 승인을 받은 올해 국방수권법안에서 그런 불법행위를 거론한 것은 망동이 아닐 수 없다.   


3. 조미비핵화협상 감시하려는 국방부와 연방의회

미국 국방부는 올해 국방수권법안에서 만일 조선과 미국이 비핵화에 관련된 합의에 이르는 경우, 합의일로부터 60일 안에, 그리고 그 이후에도 90일마다 위에 열거된 다섯 가지 사항이 들어간 국방장관 보고서를 연방의회에 제출하겠다고 하였다. 이런 내용이 올해 국방수권법안에 들어간 것은, 미국 국방부가 조선과 미국이 2019년 9월 30일 이전에 비핵화를 합의할 것으로 예상하였음을 말해준다. 

미국 국방부의 그런 예상은 그들이 조선과 미국의 비핵화협상을 감시하려는 의욕을 불러일으켰는데, 연방의회도 그런 감시조치에 동조하였음은 물론이다. 미국 국방부는 올해 국방수권법안에서 자기들이 연방의회에 제출할 조미비핵화협상 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주요내용들을 담겠다고 적시하였다.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밖으로 이전되거나 또는 검증할 수 있도록 해체되고 파괴되고 영구히 사용할 수 없게 된 핵무기, 그리고 화학무기 및 생물무기들과 탄도미사일들을 비롯한 대량파괴무기들의 수량”
(2) “확인하고, 검증할 수 있도록 해체되고 파괴되고 영구히 사용할 수 없게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무기, 그리고 화학무기 및 생물무기들을 비롯한 대량파괴무기들을 연구, 개발, 생산, 시험하는 시설들의 위치” 
(3) “검증할 수 있도록 해체되고 파괴되고 영구히 사용할 수 없게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도미사일 제조 및 조립시설들의 위치”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제에 남아있는 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통제하는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의 수량”
(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무기프로그램을 재생시키고 핵무기를 재생산하기에 필요한 돌파기간(breakout period)을 연장하는 상황에 대한 평가”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있는 연방의사당 건물이다. 그 건물 안에서 연방상원과 연방하원이 국정을 논하고 각종 법안을 채택하고 연방정부의 주요정책을 승인한다. 올해 국방수권법안에서 미국 국방부는 그들이 주장하는 '조선의 비핵화'가 실현더라도 조선의 국가핵무력이 전부 해체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인정하면서, '조선의 비핵화' 실행여부를 검증하는 것에 강조점을 찍었다. 그러나 미국 국방부가 '조선의 비핵화' 실행여부에 대한 검증을 거론한 것 자체가 현실을 배반하는 망상의 산물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 사항들이 말해주는 것처럼, 미국 국방부는 그들이 주장하는 ‘조선의 비핵화’가 실현되더라도 조선의 국가핵무력이 전부 해체되는 것은 아니므로, 조선이 국가핵무력을 일정기간 뒤에 재건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의 국가핵무력을 전부 해체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는 미국 국방부의 강조점은 ‘조선의 비핵화’ 실행여부를 검증하는 것에 찍혀있다. 그래서 그들은 검증평가보고서를 ‘조선의 비핵화’가 실현된 날로부터 180일 안에 연방의회에 제출하고, 그 이후에도 180일마다 제출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 국방부가 검증평가보고서를 거론한 것 자체가 현실을 배반한 망상의 산물이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조미협상이 진전되면서 공고하고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축되면, 조선은 ‘조선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해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복귀할 것으로 예견된다. 조선의 국제원자력기구 복귀는 조선이 그 기구의 포괄적안전협정(Comprehensive Safeguards Agreement)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조선이 국제원자력기구에 복귀하여 포괄적안전협정을 받아들이면, 그 기구가 구성한 사찰단이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포괄적안전협정에 의거하여 녕변핵시설단지에 대한 정기사찰을 시행할 것이고, 녕변핵시설단지에서 조선이 자발적으로 해체한 몇몇 핵시설들의 해체상황을 정기사찰을 통해 검증할 수 있다. 하지만 녕변핵시설단지 밖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비밀핵시설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은 결코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미국이 국제원자력기구를 앞세워 미신고 핵시설들에 대한 특별사찰을 시행하려면, 조선과 추가의정서(Additional Protocol)를 합의해야 하는 데, 1993년의 경험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조선이 추가의정서를 합의할 가능성은 털끝만큼도 없다.  

더욱이 핵물질생산시설이 아닌 핵무기를 사찰하고 그것의 해체여부를 검증하는 것은 국제원자력기구의 권한과 임무를 넘어서는 엄청난 일이므로, 만일 미국이 조선의 핵무기를 사찰하고 검증하려면, 조선과 협상을 벌여 사상 초유의 특별검증방식을 합의해야 하는데, 조선이 그런 협상요구에 응해줄 가능성은 전혀 상상할 수 없다. 


4. 대통령의 철군결정은 누구도 가로막지 못한다

미국 국방부는 올해 국방수권법안에서 주한미국군 감축문제를 처음 언급하였다. 그 동안 주한미국군 완전철수를 반대할 뿐 아니라 감축마저 반대해온 그들이 감축문제를 거론한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 그런 변화는 조미협상이 진전되면서 주한미국군 감축이 불가피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자인한 것이다. 
그런데 조미관계에 관한 보도에서 사실왜곡을 일삼는 한국의 언론매체들은 올해 국방수권법안에 서술된 주한미국군 감축문제에 대해 왜곡하였다. 그들은 연방의회가 승인해주지 않으면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국군을 감축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식의 왜곡보도를 내보낸 것이다. 이를테면, <조선일보>는 2018년 8월 14일부 보도기사에서 올해 국방수권법안에 서술된 주한미국군 감축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언젠가 주한미군 감축, 철수를 원한다고 말한 상황에서, 미 의회가 트럼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도록 법으로 막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상투적인 왜곡보도다. 미국군 해외파병 또는 증파, 그리고 해외 주둔 미국군의 감축 또는 철수는 연방의회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이 미국 대통령이 독자적으로 시행하는 권한이므로, 미국 연방의회가 대통령의 그런 권한을 가로막을 수 없다. 그런데도 한국의 언론매체들은 미국 연방의회가 트럼프 대통령의 주한미국군 감축을 승인해주지 않으려는 법적 조치를 의결한 것처럼 보도하였으니, 왜곡보도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미국 국방부가 작성하고 연방의회가 승인한 올해 국방수권법안에서 주한미국군 감축문제가 언급된 항목의 제목은 “한국에 배치되어 현역으로 복무하는 군대의 전체 병력수를 축소하기 위해 자금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제한”이다. 이 제목만 보더라도, 주한미국군 감축을 가로막은 것이 아니라, 올해 책정된 군사예산이 주한미국군 감축에 사용되는 것을 제한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항목에는 다음과 같은 세 문장이 들어있다.

“국방장관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연방의회 국방관련위원회들에 먼저 증명하지 않으면, 이 법안에서 승인된 자금이 한국에 배치되어 현역으로 복무하는 군대의 전체 병력수를 22,000명 수준으로 감축하는 데 사용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1) 감축은 미국의 국가안보이익에 부합되고, 해당지역 동맹국들의 안전을 심하게 훼손하지 않는다. 
(2) 감축문제와 관련하여 국방장관은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맹국들과 적절히 상의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번에 책정된 군사예산이 주한미국군 감축에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단정적인 어법이 아니라, “사용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어정쩡한 어법이 쓰였다는 점이다. 

<한겨레> 2015년 10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는 한국 정부가 국민의 혈세를 거둬 미국에게 상납해온 ‘방위비분담금’ 가운데 일부를 사용하지 않고 미국 민간은행 ‘뱅크 오브 어메리카(Bank of America)’ 서울지점이 위탁운영하는 ‘커뮤니티은행(Community Bank)’이라는 미국 국방부 소유의 특수은행에 2002년부터 비자금으로 적립해놓았는데, 비자금 규모는 2008년 10월에 1조1,193억원, 2013년 8월에 7,100억원, 2014년 1월에 6,210억원, 2015년 10월에 3,900억원에 이르렀다고 한다. 미국 국방부는 해마다 적립되는 비자금을 가지고 2002년부터 2015년까지 3,000억원 이상의 이자수익을 올린 것으로 추산되는데, 한국 정부는 미국 국방부의 이자수익에 대한 세금을 한 푼도 걷지 못한 채 수수방관해온 것이다. 비자금 내막을 보면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국방부에게 그 비자금으로 주한미국군 감축비용을 충당하라고 지시할 수 있다.  

주한미국군 감축문제가 언급된 국방수권법안 항목에서 주목되는 것은, 미국 국방장관이 주한미국군 감축의 필요성을 연방의회에 증명하는 경우, 트럼프 행정부는 올해 책정된 군사예산을 지출하여 주한미국군을 22,000명 선까지 감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미국 국방부는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국군 감군 행정명령서에 서명만 하면 주한미국군이 즉각 감축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으므로, 감군하더라도 22,000명 이하로는 감군하지 말 것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권고한 것이다.  

현재 주한미국군 총병력수는 공식적으로 28,500명이므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국방부의 권고를 받아들이면 2019회계년도 안에 주한미국군 6,500명을 감축할 수 있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2018년 1월 22일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환태평양동반자협정(TPP) 탈퇴를 명령하는 행정명령서에 서명하는 장면이다. 그런 행정명령서만 한 장 있으면, 주한미국군도 완전히 철수될 수 있다. 미국 국방부와 연방의회는 올해 국방수권법안에서 주한미국군 감축을 예상하였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구상하는 것은 감군이 아니라 철군이다. 머지않아 종전선언이 발표되어 공고하고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되면, 트럼프 대통령은 몇몇 각료들과 연방의회의 반대를 물리치고 주한미국군 감축을 전격적으로 단행할 것이고, 종전선언에 이어 평화협정에 체결되면, 감축 이후에 남게 되는 주한미국군까지 모두 철수할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미국 국방부는 전투부대를 한국에 고정배치하지 않고, 미국 본토에서 한국으로 9개월마다 정기적으로 순환배치하고 있는데, 9개월마다 순환배치되는 병력은 약 3,500명이다. 그러므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으로 순환배치되는 병력을 두 번만 연거푸 순환배치하지 않고 미국 본토에 남겨두라고 명령하면, 감축비용을 한 푼도 들이지 않고 주한미국군 약 7,000명을 감축할 수 있다.  

이전에 <자주시보>에 실린 나의 글들에서 몇 차례 거론한 것처럼, 트럼프 대통령은 주한미국군 철수문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해왔다. 미국 텔레비전방송 <NBC> 2018년 5월 1일 보도, <뉴욕타임스> 2018년 5월 3일 보도, 그리고 <워싱턴포스트> 2018년 6월 7일 보도에서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국군 철수문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해오면서도, 자기의 철군의지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주저하는 까닭은 몇몇 각료들이 그의 철군결정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1968년 8월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주한미국군 철수문제를 적극적으로 검토하였으나, 헨리 키씬저(Henry H. Kissinger) 국가안보보좌관이 반대하는 바람에 주한미국군을 철수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닉슨은 1971년 3월 주한미국군 7사단 20,000명을 감축하는데 그쳤고, 1973년 3월 베트남에서만 미국군을 완전히 철수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오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매우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주한미국군 철수문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지만, 존 볼턴(John R. Bolton) 국가안보보좌관, 존 켈리(John F. Kelly) 비서실장, 제임스 매티스(James N. Mattis) 국방장관이 철군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정세는 50년 전 정세와 완전히 다르다. 1968년 8월 닉슨 대통령은 아시아 주둔 미국군을 철수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주한미국군 철수문제를 검토하였는데, 당시 그가 아시아 주둔 미국군을 철수하려고 하였던 까닭은, 미국군이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한 충격과 중국의 대륙간탄도미사일개발에 대한 우려가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968년 1월 21일부터 7월 9일까지 베트남에서 격렬하게 계속된 케산전투(Battle of Khe Sanh)에서 미국군이 북베트남군에게 패하였고, 비록 발사 후 30초 만에 엔진폭발로 실패하였으나 중국이 1968년 1월 26일 사상 처음으로 3단형 위성발사체 창정(長征)-1호를 쏘아올렸다. 

그런데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오늘 정세는 전혀 다르게 변모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시아 주둔 미국군을 철수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주한미국군 철수문제를 검토하는 게 아니라, 아시아대륙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주한미국군을 철수하는 문제를 검토하는 것이다. 그가 주한미국군 철수문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까닭은, 미국이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을 막으려고 갖은 술책을 다하다가 실패하여 조선과의 핵대결에서 패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이 미국을 국가안보파탄위험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50년 전에는 한반도가 아닌 베트남과 중국에서 각각 일어난 변화에 의해 아시아 주둔 미국군을 철수하는 과정에 덤으로 주한미국군을 감축하였지만, 지금은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으로 조미관계가 결정적으로 바뀐 정세변화 속에서 주한미국군을 철수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머지않아 종전선언이 발표되면 트럼프 대통령은 몇몇 각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주한미국군 감축을 단행할 것이고, 종전선언에 이어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감축 이후에 남게 되는 주한미국군도 모두 철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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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4

1945년 태평양전쟁, 2018년 태평양지배체제

[한호석의 개벽예감](310)
자주시보 2018년 08월 13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태평양전쟁 종전, 태평양지배체제 성립
2. 퀘벡비밀군사회담의 내막
3. 전세를 바꿔놓은 미국군의 악전고투 118일
4. 미국이 규슈상륙 포기하고 핵폭탄개발에 매달린 사연
5. 소련의 대일전쟁, 조선의 조국해방전투, 미국의 핵폭탄투하
6. 73년 묵은 태평양지배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7. 모든 문제는 종전과 철군으로 귀결된다


1. 태평양전쟁 종전, 태평양지배체제 성립

해마다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강점에서 해방된 날이다. 일왕 히로히또(裕仁)는 1945년 8월 15일 정오 <NHK> 라디오방송을 통해 이른바 ‘대동아전쟁종결의 조서(詔書)’라는 문서를 읽어 내려간 녹음방송을 내보냈다. 사람들은 그 녹음방송을 일제의 항복선언이라고 알고 있지만, ‘조서’에서 항복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조서’는 어려운 한자말로 작성되었을 뿐 아니라, 1940년대의 저급한 라디오방송 송출기술 때문에 무슨 소리를 중얼거리는지 청취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그 방송내용을 정확히 알아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주목되는 것은, 그 ‘조서’가 대일전쟁에서 승리한 국제연합군에게 보내는 항복선언이 아니라 일본 국민에게 보내는 대국민담화였다는 사실이다. 그러했으니 항복이라는 단어가 ‘조서’에 들어있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항복의사를 간접적으로 표시한 것으로 해석될 만한 문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서’에는 일왕 히로히또가 미국, 소련, 영국, 중국에게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할 것을 일본제국정부에게 지시하였다고 서술한 문구가 들어있었다. 그가 ‘조서’에서 언급한 공동선언이라는 것은 1945년 7월 26일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이 일제에게 항복을 요구하였던 포츠담선언(Potsdam Declaration)을 뜻한다. 하지만 당시 포츠담선언이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일본 국민들은 일왕 히로히또가 ‘조서’에서 간접적으로 항복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1945년 8월 15일 정오 '대동아전쟁종결의 조서'를 읽어내려간 일왕 히로히또의 녹음방송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자 일본인들이 머리를 숙인 장면이다. '조서'는 대일전쟁에서 승리한 국제연합군에게 보내는 항복선언이 아니라 일본 국민에게 보내는 대국민담화였다. '조서'에는 1945년 7월 26일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이 일제에게 항복을 요구하였던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는데, 그것이 항복의사를 간접적으로 표시한 유일한 대목이었다. 일제가 도꾜만 앞바다에 정박한 미국 해군 미주리함 함상에서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한다는 항복문서에 조인한 날은 1945년 9월 2일이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로부터 73년이 흘렀다.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난 그 전쟁을 오늘 다시 논하는 까닭은, 우리 민족이 겪는 고통과 불행의 화근인 한반도 분단을 태평양전쟁 종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73년 전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전된 그 전쟁은 어떤 전쟁이었던가? 일제가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1940년 7월 26일이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하여 일본을 점령한 미국 점령군사령부는 1945년 12월 15일부터 점령지에서 대동아전쟁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금하면서 그냥 전쟁이라는 말만 쓰도록 조치하였다. 얼마 뒤부터 미국은 그 전쟁을 태평양전쟁(Pacific War)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고, 그 전쟁명칭은 굳어져버렸다.

전쟁명칭에 전쟁목적이 비껴있다. 미국이 그 전쟁에서 노린 목적은 일제를 패망시키고 태평양을 장악하여 그 대양을 자국이 지배하는 ‘미국해(American Sea)’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태평양과 아시아대륙을 모두 점령할 전쟁능력을 갖지 못했으므로, 미국의 야욕은 태평양을 지배하려는 것이었다. 1897년에 하와이왕국을 병탄한 미국은 당시 서태평양을 지배하던 에스빠냐(스페인이라는 미국식 국호를 쓰지 말고, 그 나라의 정식 국호를 써야 함)를 상대로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전쟁을 벌여 필리핀과 괌(Guam)을 점령하고 태평양지배권을 틀어쥐었다. 

그런데 1941년 12월 1일 일왕 히로히또는 전시각료회의에서 전쟁을 태평양으로 확전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결정에 따라 일본군이 1941년 12월 8일 새벽 하와이 진주항(Pearl Harbor라는 지명은 진주만이 아니라 진주항으로 번역해야 함)을 기습공격하여 미국의 태평양지배권에 도전하였다. <요미우리신붕> 2018년 7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일본군의 진주항 기습공격을 몇 시간 앞둔 1941년 12월 7일 오후 8시 30분경 일본 총리 도조 히데끼(東條英機)는 “(일본은) 이미 이겼다”고 떠들어대며 망상에 빠졌다고 한다. 망상은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그들은 태평양전쟁이 일본의 패망과 미국의 일본점령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의 전략목표는 일본을 점령하고 태평양지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미 필리핀과 괌을 점령하고 서태평양 남부해역을 장악한 미국은 일본점령을 태평양지배체제를 완성하는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했다. 미국의 일본점령은 1951년 9월 8일 쌘프랜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미국군의 무기한 일본주둔으로 변형되었다. 태평양지배체제는 지난 73년 동안 변함없이 유지되어왔다.


2. 퀘벡비밀군사회담의 내막

일본의 진주항 기습공격으로 선제타격을 받은 미국은 비밀군사회담에서 일본점령을 태평양전쟁의 전략목표로 확정하였다. 그 비밀군사회담은 1943년 8월 17일부터 24일까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로저벌트(Franklin D. Roosevelt, 루즈벨트라는 한국식 발음표기는 오류)와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캐나다 퀘벡시에서 만난 퀘벡비밀군사회담(Quebec Secret Military Conference)이다. 원래는 이오시프 비싸리오노위쯔 쓰딸린(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조섭 스탈린이라는 발음표기는 미국식으로 왜곡된 것)도 퀘벡비밀회담에 참석하기로 했으나, 소련군과 독일군이 격렬하게 싸운 쿠르스크전투(Battle of Kursk)가 1943년 7월 5일부터 8월 23일까지 계속되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다. 처칠은 캐나다 총리 맥켄지 킹(Mackenzie King)도 비밀회담에 참석시키려고 하였지만, 로저벌트가 반대하는 바람에 맥켄지 킹은 의전행사에만 얼굴을 내밀었다. 

퀘벡비밀군사회담에서 로저벌트와 처칠은 전쟁수행에 필요한 일본의 전략자원(석유, 철강, 식량)을 소모시키기 위한 전쟁전략, 일본렬도상륙을 위한 공격거점을 확보하는 전쟁전략을 검토했다. 미영합동참모본부가 1942년 8월에 공동으로 작성한 ‘일본을 타파하기 위한 평가와 계획(Appreciation and Plan for the Defeat of Japan)’이라는 제목의 전쟁계획서에는 일본렬도에 상륙하는 작전계획이 들어있지 않았는데, 퀘벡비밀군사회담에서 일본렬도에 상륙하여 일본을 점령하는 것이 전쟁목표로 정해졌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1943년 8월 17일부터 24일까지 캐나다 퀘벡시에서 진행된 퀘벡비밀군사회담 중에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로저벌트,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 캐나다 총리 맥켄지 킹이 의전용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원래는 이오시프 비싸리오노위쯔 쓰딸린도 그 회담에 참석하기로 했으나, 유럽전선의 전황이 복잡해서 참석하지 못했다. 맥켄지 킹은 의전행사에만 얼굴을 내밀었고, 회담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 비밀군사회담에서 로저벌트와 처칠은 일본상륙을 위한 공격거점을 확보하는 전쟁전략을 검토했다. 이것은 미국과 영국이 일본에 상륙하여 일본을 점령하는 것을 전쟁목표료 정하였음을 말해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당시 미영합동참모본부가 작성한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국 전쟁부(War Department)에서는 독일이 항복하면 1년 안에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였지만, 미국 해군과 육군 사이에서 대일전쟁전략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 미국군에는 육군과 해군만 있었고, 공군은 없었다. 미국 해군은 일본에 대한 해상봉쇄와 공중폭격을 주장하면서, 중국 샹하이(上海)와 조선에 있는 일본군 항공기지들을 점령하여 일본렬도를 폭격하기 위한 공격거점을 확보하는 전략을 내놓았다. 하지만 미국 육군은 그런 전략은 전쟁의 장기화와 엄청난 인명손실을 불러올 뿐이라고 반대하면서, 대규모 공격력으로 일본렬도를 직접 타격하는 전략을 꺼내놓았는데, 전략논쟁은 결국 육군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미국군이 일본렬도에 상륙할 수 있는 지대는 두 군데였다. 하나는 일본렬도 서남부에 있는 규슈(九州)남부 해안지대였고, 다른 하나는 일본렬도 중앙부에 있는, 수도권으로 연결되는 간또(關東)지방 해안지대였다. 그래서 미영합동참모본부는 일본을 두 단계에 걸쳐 점령하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먼저 규슈를 점령하여 그 지역의 항공기지들을 장악한 다음, 그 항공기지들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의 지원을 받는 25개 사단이 도꾜만(東京灣)에 상륙하는 작전계획이었다. 규슈점령작전을 올림픽작전(Operation Olympic)이라고 불렀고, 도꾜만상륙작전을 코로닛작전(Operation Coronet)이라고 불렀다. 규슈를 점령하는 올림픽작전 개시일은 1945년 11월 1일로 예정되었고, 도꾜만에 상륙하는 코로닛작전 개시일은 1946년 3월 1일로 예정되었다.


3. 전세를 바꿔놓은 미국군의 악전고투 118일

미영합동참모본부가 1945년 11월 1일과 1946년 3월 1일로 예정한 전쟁일정을 대폭 앞당겨야 하는 사정이 생겼으니, 그것이 바로 얄타회담(Yalta Conference)이다.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흑해 북쪽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로저벌트, 쓰딸린, 처칠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얄타회담에서 쓰딸린은 독일이 항복하는 경우 2~3개월 뒤에 대일전쟁을 개전하겠노라고 약속하였다. 유럽전선에 배치된 소련군 병력과 전투장비를 대일전쟁을 벌일 원동지역(Far East라는 지명에서 Far는 멀다는 뜻이므로 극동지역이 아니라 원동지역으로 번역해야 함)으로 이동시키려면 2~3개월 걸릴 것으로 예상한 것이었다.

쓰딸린이 대일전쟁 참전을 약속하자 미국은 불안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미국보다 한 발 앞서 소련이 일본을 점령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일본점령이라는 전쟁목적을 놓고 미국과 소련이 치열한 경쟁을 벌인 태평양전쟁 말기의 상황은 그렇게 조성되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1945년 4월 1일부터 82일 동안 계속된 오끼나와전투의 한 장면이다. 미국 해병대 전투원들이 지친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다. 미국이 일본을 점령하려면 규슈 남부에 상륙하여, 그곳을 공격거점으로 삼고 일본 혼슈를 폭격해야 하였는데, 그렇게 하려면 오끼나와부터 먼저 점령해야 하였다. 미국군은 오끼나와전투에서 엄청난 인명손실을 입고, 수많은 전투장비를 잃으며 82일 동안 악전고투했다. 미국이 오끼나와전투에서 고전하고 있었던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미국과 소련에게 항복하였다. 나치 독일의 항복은 쓰딸린의 얄타회담 약속이행을 추동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되었다. 그 약속이행에 따라 소련군은 늦어도 1945년 8월 초순까지는 원동지역에 집결하여 대일전쟁을 개전하게 되어 있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소련과의 경쟁을 의식한 미국은 규슈점령을 예정일보다 크게 앞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전황은 미국의 욕망을 따라주지 않았다. 미국군이 규슈에 상륙하려면 우선 오끼나와(沖繩)를 점령해야 했고, 오끼나와를 점령하려면 이오섬(硫黃島)부터 점령해야 했다. 이오섬은 도꾜에서 남쪽으로 1,050km 떨어진 태평양에 떠 있는, 면적이 21㎢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이다. 사정이 급해진 미국군은 얄타회담이 끝난 날로부터 8일이 지난 1945년 2월 19일 이오섬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10일이면 점령할 것으로 예상했던 그 섬에서 미국군은 고전하였다. 미국군이 병력 110,000 명과 각종 전투함선 500여 척을 동원하여 공격한 이오섬전투는 1945년 2월 19일부터 3월 26일까지 무려 36일 동안이나 격렬하게 계속되었다. 그 전투에서 미국군 6,821명이 전사하였고 21,865명이 전상했으며, 일본군 20,129명이 전사하였고, 1,083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조급증에 사로잡힌 미국은 태평양전쟁을 하루빨리 끝내기 위해 일본의 심장부를 공격하였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미국군 B-29 폭격기 344대가 3시간 동안 도꾜에 소이탄 2,400t을 퍼부었다. 거대한 폭탄화염 속에서 100,000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일제가 징용으로 그 지역 군수공장에 끌어간 조선인 10,000여 명도 미국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희생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무차별 폭격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제는 이른바 ‘국체호지(國體護持, 나라를 보호하고 지킨다는 뜻)’를 부르짖으며 계속 버텼다.

더욱 다급해진 미국은 오끼나와(沖繩)공격을 서둘렀다.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22일까지 82일 동안 계속된 오끼나와전투는 이오섬전투보다 훨씬 더 격렬하였다. 미국은 오끼나와전투에 육군 102,000명, 해병대 88,000명, 해군 18,000명을 동원하였으나 고전을 면치 못했다. 미국군 20,195명이 전사하였고 55,162명이 전상했으며, 일본군 77,166명이 전사하였고 7,000여 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오끼나와전투에서 미국군은 구축함 12척, 상륙함 15척, 전투기 768대, 전차 225대를 잃었다.


4. 미국이 규슈상륙 포기하고 핵폭탄개발에 매달린 사연

미국이 오끼나와전투에서 고전하고 있었던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미국과 소련에게 항복하였다. 나치 독일이 미국과 소련에게 항복하였으므로, 독일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동서로 분할점령되었다. 그와 달리 일본은 미국에게 항복하였으므로, 일본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점령되지 않고 미국에게 점령되었다. 일본을 단독으로 점령한 미국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영토였던 한반도에 분할점령선으로 그었다. 우리 민족에게 고통과 불행을 강요하는 분단체제는 그렇게 생겨났다.

나치 독일의 항복은 쓰딸린의 얄타회담 약속이행을 추동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되었는데, 쓰딸린의 약속에 따르면 소련군은 1945년 7월 초순에, 아무리 늦어도 1945년 8월 초순에는 원동지역에 집결하여 대일전쟁을 개전하게 되어 있었다.

미국군은 소련군이 원동지역에 집결하기 전에, 그리고 여름철 일본렬도에 태풍이 불어오기 전에 서둘러 규슈를 점령해야 하였으므로, 1945년 7월 초에 규슈상륙전을 예정하였다. 당시 미국의 전쟁기획자들은 규슈 남부에 있는 35개 해안구역에 상륙하여 규슈 면적의 3분의 1을 점령하는 작전계획을 세워놓았다. 

다른 한편, 당시 일본의 전쟁기획자들은 일본군이 결사항전으로 미국군의 규슈상륙을 저지하면 미국은 일본을 패망시키지 못할 것이고, 결국 정전협정을 체결하는 것으로 태평양전쟁이 끝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미국군의 규슈상륙을 저지하는 ‘게쯔고작전(決号作戰)’을 준비하였다.

1945년 2월 일본 해군연합함대 참모장 우가끼 마또메(宇垣纏)가 규슈에 주둔하는 제5항공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제5항공함대는 오끼나와전투가 벌어졌을 때 전투기에 폭탄을 싣고 적함에 충돌하는 자살공격전술로 미국군 상륙함을 격침시켰었다. 1945년 7월 당시 10,000대 이상의 각종 군용기를 보유한 일본군은 규슈해안에 접근하는 미국군 군함 400척 이상을 자살공격전술로 격침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견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1945년 3월부터 규슈의 전투부대를 대폭 증강했는데, 만주, 조선, 북부 혼슈(本州)에 배치된 전투부대들을 규슈로 집결시켜 3개 전차여단을 포함한 14개 사단 900,000명 대병력을 배치해놓고 미국군 상륙에 대비하였다. 

일본군이 만주, 조선, 북부 혼슈에 배치된 전투부대들을 규슈로 집결시켰으니, 소련군은 만주와 조선반도를 파죽지세로 공격할 수 있었고, 사할린과 쿠릴렬도를 거쳐 혹까이도(北海道)에 상륙하고 곧바로 북부 혼슈를 점령할 수 있었다. 실제로 소련군은 매우 허술한 방어선밖에 없는 혹까이도를 1945년 8월 말까지 점령하는 작전계획을 세워놓았다. 그 작전계획이 실행되면, 일본이 소련에게 항복하게 될 것이고, 소련군이 일본의 중심부를 점령할 판이었다. 소련군이 일본을 점령하는 것은 미국에게 재앙이 아닐 수 없었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1945년 7월 16일 미국의 핵폭탄개발사업에 참가한 기술자들이 뉴멕시코주 사막에서 진행된 핵폭발시험 직후 현장에서 잔해를 살펴보는 장면이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을 누가 점령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소련과 경쟁하였던 미국은 원래 규슈에 상륙하여 그곳을 공격거점으로 혼슈를 폭격하고, 도꾜만에 상륙하려고 하였던 작전계획을 포기하고 핵폭탄개발을 황급히 서둘렀다. 그러는 사이에 소련군 전투부대들은 유럽전선에서 원동지역으로 이동, 집결하여 전쟁준비태세를 갖추었다. 원동지역에 집결한 소련군이 혹까이도에 상륙하여 일본을 점령하지나 않을까 하고 조바심하던 미국은 불과 며칠 전에 핵폭발시험을 마쳤으나 실전상황에서 제대로 터질지 알 수 없는 첫 핵폭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미국은 일본점령기회를 소련에게 빼앗길까봐 조바심하며 규슈상륙전을 준비하였으나, 일본이 규슈에 매우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을 알고 규슈상륙을 포기하였다. 그 대신 미국은 핵폭탄개발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1943년 8월 17일부터 24일까지 진행된 퀘벡비밀군사회담에서 로저벌트와 처칠은 미국과 영국이 핵폭탄개발에 상호협력하기로 공약한 퀘벡합의(Quebec Agreement)를 채택하였다. 영국은 캐나다를 끌어들인, ‘튭 얼로이즈(Tube Alloys)’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핵폭탄개발사업을 1941년 8월 30일부터 시작했었는데, 그 핵폭탄개발사업은 1942년 8월 13일 미국이 추진하기 시작한,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핵폭탄개발사업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일제가 규슈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을 알게 된 미국은 일제가 항복하지 않고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핵폭탄을 투하하는 계획부터 서둘러 검토하였다. 미국은 일본의 어느 도시에 핵폭탄을 투하할 것인지를 검토하는 표적위원회(Target Committee)를 구성하였다. 표적위원회는 당시 미국이 개발 중이던 핵폭탄이 완성되면, 일본의 주요도시들을 핵폭탄으로 완전히 파괴할 수 있으므로 미국군이 규슈에 상륙할 필요가 없게 되리라고 예상했다. 표적위원회가 정한 핵폭탄투하대상목록에는 도꾜(東京), 요꼬하마(橫浜), 교또(京都), 히로시마(廣島), 고꾸라(小倉), 니이가다(新瀉) 등이 포함되었다. 


5. 소련의 대일전쟁, 조선의 조국해방전투, 미국의 핵폭탄투하 

누가 먼저 일본에 상륙하여 일본을 점령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소련과 경쟁하던 미국은 핵폭탄개발을 황급히 서두르던 중, 1945년 7월 16일 핵폭발시험에 성공하였다. 미국이 핵폭탄개발을 서두르는 사이에 소련군 전투부대들은 유럽전선에서 원동지역으로 이동, 집결하여 전쟁준비태세를 갖추었다.

소련군이 혹까이도에 상륙하여 일본의 중심부로 남하하지 않을까 하고 조바심하던 미국은 불과 며칠 전에 핵폭발시험을 마쳤으나 실전상황에서 제대로 터질지 아직 알 수 없는 첫 핵폭탄을 실전에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이 ‘태양의 힘을 끌어들인 무기’라고 불렀던 첫 핵폭탄은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다.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투하되기 6시간 전, 태평양 북서부에 있는, 괌(Guam)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화산섬 15개로 이루어진 마리아나제도(Mariana Islands)의 열세번째 섬 티니안(Tinian)에 건설된 활주로에서 B-29 폭격기 세 대가 이륙하였다. 한 대에는 핵폭탄이 실렸고, 다른 한 대에는 핵폭발측정기구들이 실렸고, 또 다른 한 대에는 관측기재와 사진촬영기가 실렸다.

B-29 폭격기에서 투하된 핵폭탄은 44.4초 동안 낙하하다가 지상으로부터 580m 상공에서 폭발하였다. 원래는 B-29 폭격기 탑승자들이 고공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아이오이하시(相生橋)라는 다리를 향해 낙하했어야 하는데, 바람에 밀려간 핵폭탄은 그 다리에서 240m 떨어진 도병원(島病院) 상공에서 낙하하다가 폭발하였다.

히로시마 핵폭탄투하로 민간인 126,000여 명과 일본군 20,000여 명이 몰살당하는 핵참사가 일어났다. 조선인 30,000여 명도 목숨을 잃었는데, 조선인 희생자들 가운데는 의친왕의 아들로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군 중좌가 된 리우(李鍝)도 있었다.

일제는 히로시마가 날아갔는데도 항복하지 않았고, 소련은 1945년 8월 9일 대일전쟁을 개시하였다. 소련이 대일전쟁을 개시한 날, 이미 1930년대부터 만주에서 일제관동군과 싸워온 조선의 항일전쟁은 조국해방전투로 전개되었다. 조선의 역사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은 전황을 알 수 있다. 

러시아-중국 국경으로부터 30km 떨어진 하바롭스크 부근에 임시군사기지가 있었다. 김일성 사령관의 지휘를 받으며 만주에서 일제관동군과 격전을 벌이던 조선인민혁명군은 1942년 7월 22일 그 군사기지에서 소련원동군, 동북항일련군 중국인부대와 함께 국제연합군을 결성하였다. 소련원동군은 3국 국제연합군을 독립88여단 또는 8461보병특별여단이라고 불렀다. 조선인으로 편성된 국제연합군 제1지대는 김일성 지대장이 지휘하는 조선인민혁명군이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30명 정도로 편성된 소부대들을 두만강 국경일대와 함경북도 북부지역에 출동시켜 일본군을 타격하는 습격전, 정찰활동, 지하정치활동을 계속하면서 조국해방전투를 준비해왔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소련군이 대일전쟁을 개시하기 하루 전인 1945년 8월 8일에도 비가 내리는 밤에 두만강을 도하하여 함경북도 웅기군 최북단에 있는 토리에서 조선주둔일본군을 습격하였으며, 중국 훈춘(琿春)현 남별리와 동흥진도 습격하였다. 이튿날 소련이 대일전쟁을 개시한 새벽, 조선인민혁명군은 소련군과 함께 총진격을 개시하였다. 두만강을 도하한 조선인민혁명군은 함경북도 은덕, 새별, 남양, 회령으로 진격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1945년 8월 11일 19시 함경북도 웅기만에 상륙하고 서수라항으로 진격하였으며, 이튿날에는 함경북도 라진만에 상륙하였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미국이 히로시마에 첫번째 핵폭탄을 투하한 날로부터 사흘이 지난 1945년 8월 9일 나가사끼에 두번째 핵폭탄을 투하한 직후 폐허로 변한 시가지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미국군이 일본에 상륙하는 날까지 적어도 핵폭탄 7발이 준비되고 있었다고 한다. 두 차례 핵폭탄투하로 소련군의 혹까이도상륙을 미연에 중지시킨 미국은 1945년 9월 2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고 일본을 점령하였다. 그로써 미국은 태평양지배체제를 완성하였고,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를 지켜주는 군사거점으로 전략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조선인민혁명군이 조국해방전투를 개시한 1945년 8월 9일, 미국은 일본 나가사끼(長崎)에 두 번째 핵폭탄을 투하하였다. 원래 미국은 1945년 8월 11일 기따규슈(北九州) 후꾸오까(福岡)현 고꾸라에 두 번째 핵폭탄을 투하하기로 예정하였는데, 소련군이 만주에서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전황에 놀라 투하날짜를 이틀 앞당겼다. 핵폭탄을 실은 B-29 폭격기가 고꾸라 상공에 도착하였을 때, 지상에서 짙은 연기가 피어올라 투하대상을 식별할 수 없었고, 일본군 전투기들이 접근하였다. 그래서 B-29 폭격기는 나가사끼로 기수를 돌렸다. 오전 11시 1분, B-29 폭격기에서 투하된 핵폭탄은 47초 동안 낙하하다가 원래 정했던 투하대상에서 약 3km 벗어난 정구장 상공에서 폭발하였다. 나가사끼 핵폭탄투하로 약 40,000여 명이 사망하였고, 약 60,000여 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핵폭탄제조기술자로 근무했던 미국 육군 소장 케네스 니콜스(Ken D. Nichols)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미국군의 일본상륙전에 사용하기 위해 핵폭탄 15발을 제조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의 핵폭탄제조사업을 총지휘한 육군 소장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R. Groves)의 보좌관이었던 육군 대령 라일 씨먼(Lyle E. Seeman)은 미국군이 일본상륙전을 개시하는 날까지 적어도 핵폭탄 7발이 준비될 것이라고 상부에 보고하였다.

두 차례 핵폭탄투하로 소련군의 혹까이도상륙을 미연에 중지시킨 미국은 1945년 9월 2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고 일본을 점령하였다. 그로써 미국은 태평양지배체제를 완성하였고,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를 지켜주는 군사거점으로 전락하였다. 미국이 태평양사령부를 창설한 때는 1947년 1월 1일이었다. 만일 미국이 핵폭탄을 1945년 8월 말까지 개발하지 못했더라면, 소련군은 혹까이도에 상륙했을 것이며,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분할하지 않고 일본을 분할했을 것이다. 그런 사정을 살펴보면,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는 처음부터 핵무력으로 건설되었고, 지난 73년 동안 핵무력으로 유지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6. 73년 묵은 태평양지배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를 위태롭게 만드는 거대한 ‘지각변동’이 두 방향에서 거의 동시에 밀려왔다.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 그리고 중국의 남중국해지배권 확립이 그것이다.

2017년 11월 29일 조선은 미국 본토 전역에 전략핵공격을 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5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였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8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조선의 국가핵무력이 완성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조선이 미국의 방해를 물리치고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사연에 대해서는 내가 2017년과 2018년에 <자주시보>에 발표한 여러 글들에서 계속 논하였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미국 텔레비전방송 <CNBC> 2018년 5월 2일 보도에 따르면, 2018년 4월 중국은 남중국해 난사(南沙)군도에 건설한 세 개의 인공섬에 대함순항미사일 잉지(鷹擊)-12B와 지대공미사일 훙치(紅旗)-9B를 각각 실전배치하였다고 한다. 잉지-12B의 사거리는 550km이고, 훙치-9B의 사거리는 230km다. 중국은 그 인공섬들 가운데 메이지자오(美濟礁)에는 군사통신기지와 전자전기지도 건설하였다. 남중국해 시사(西沙)군도에 있는 융싱섬(永興島)에는 중국의 정규 항공편이 개설되었고 거주민과 주둔부대를 위한 해수담수화시설이 건설되었다. 

미국은 2017년 한 해 동안 ‘항해의 자유 작전’을 벌이면서 구축함과 정찰기를 남중국해에 계속 들이밀었고, 나중에 사정이 급해지자 B-1B 전략폭격기까지 들이미는 소동을 일으켰으나, 중국의 남중국해군사기지 건설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2018년 4월 12일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항공모함, 이지스구축함, 핵추진잠수함을 비롯한 각종 전함 48척과 조기경보기, 전략폭격기, 전투기, 공중급유기를 비롯한 각종 작전기 76대와 해군병력 10,000여 명이 동원된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열병식을 진행하였다. 전투복을 입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해상열병식을 직접 사열하고 훈시하였다. 그것은 중국이 미국의 방해를 물리치고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하였음을 내외에 알린 사변이었다. 중국은 1988년 남중국해 난사군도에 군대를 파견한 때로부터 30년 만에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한 것이다. <사진 6>   

▲ <사진 6> 이 사진은 2018년 4월 12일 전투복을 입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남중국해에서 진행된 중국인민해방군 해상열병식을 사열하고 훈시하는 장면이다. 남중국해 해상열병식은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로 진행되었다. 남중국해 해상열병식은 중국이 미국의 방해를 물리치고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하였음을 내외에 알린 커다란 사변이었다. 중국은 1988년 남중국해 난사군도에 군대를 파견한 때로부터 30년 만에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중국이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함으로써 73년 묵은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만일 미국이 위에 서술한 두 가지 ‘지각변동’을 방치하면, 73년 묵은 태평양지배체제는 심하게 흔들리다가 어느 순간 무너질 판이다. 미국은 흔들리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위에 서술한 두 가지 ‘지각변동’에 전력으로 대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미국에게는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조선과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한 중국을 상대로 3자동시대결을 벌일 능력이 없다. 조선과 중국 가운데 어느 한 쪽을 택하여 양자대결을 하는 수밖에 없다. 

2017년 12월 28일 미국은 백악관이 발표한 ‘아메리카합중국의 국가안보전략’이라는 제목의 문서에서 인도양-태평양전략(Indo-Pacific Strategy)을 천명하였고, 2018년 1월 7일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조미정상회담을 제안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두 가지 조치는 미국이 흔들리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중국에게는 대결정책을, 조선에게는 협상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주는 사건들이다. 

2018년 3월 22일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중국의 경제침략을 표적으로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중국과 무역전쟁을 시작했는데, 미중무역전쟁의 본질은 흔들리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중국을 상대로 벌이는 미국의 패권대결 이외에 다른 게 아니다. 그에 맞서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한 중국은 동중국해지배권을 놓고 미국을 상대로 더 심각한 패권대결을 벌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일본을 끌어들여 중국과 대결할 것이다. 미일동맹의 강공에 홀로 맞서는 중국은 조선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최근 중국의 대조선정책이 급변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7. 모든 문제는 종전과 철군으로 귀결된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8년 6월 20일 베이징에서 진행된 조중정상회담에서 “새로운 정세 하에서 두 당, 두 나라 사이의 전략전술적 협동을 더욱 강화해나가기 위한 문제들”을 논의하였다고 하는데, <아사히신붕> 2018년 7월 5일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6.20 조중정상회담에서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을 교체되면 미국군이 조선반도에 주둔할 필요가 없으므로, 조선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미국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를 촉구하기 위해 조선과 중국이 전략적으로 협력하기로 합의하였다고 한다. <사진 7>

▲ <사진 7> 이 사진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6월 20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진행된 조중정상회담에서 발언하는 장면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그 회담에서 두 당, 두 나라 사이의 전략전술적 협동을 더욱 강화해나가기 위한 문제들을 논의하였는데, 일본 언론보도에 따르면, 조선과 중국의 전략전술적 협동이란 조선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미국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를 촉구하기 위해 상호협력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주한미국군은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전략적 가치를 잃어버렸다. 미국은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과 중국의 남중국해지배권 확립으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종전선언 발표에 동참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해야 한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워싱턴포스트> 2018년 6월 7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주한미국군이 전략적으로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자신은 동의하지 않는다고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미국군을 한국에 계속 배치해야 하는 이유에 관한 미국군 지휘관들의 설명을 들을 때마다 그들의 설명에 불만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미국 텔레비전방송 <NBC> 2018년 5월 1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국군 전원철수명령을 내리려고 하자, 존 켈리(John F. Kelly) 비서실장이 강하게 만류하였고, 그것으로 하여 트럼프 대통령과 켈리 비서실장 사이에서 열띤 언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 보도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국군 전원철수명령을 내리려고 하였던 때가 2018년 2월 9일에 개막된 평창동계올림픽 이전이라고 하였으므로,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1월 중에 주한미국군 전원철수명령을 내리려고 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런 정황은 트럼프 대통령이 2018년 1월 7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조미정상회담을 먼저 제안하기로 결정한 직후 주한미국군 전원철수명령을 내리려고 하였음을 말해준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머릿속에서 조미정상회담과 주한미국군 철수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연관관계에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국군을 철수하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흔들리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중국과 대결하려면 조선과의 대결을 멈추고 관계개선을 추진해야 한다는 전략적 인식을 갖고 있으며, 조선과 관계를 개선하려면 종전선언을 발표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한미국군은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전략적 가치를 잃어버렸다. 미국이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주한미국군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는 생각은 조선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고, 중국이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하기 이전의 정세를 반영한 고정관념이다. 조선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고, 중국이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한 지금, 그런 고정관념은 설 자리를 잃었다. 정세는 정반대로 바뀌었다. 미국은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과 중국의 남중국해지배권 확립으로 심하게 흔들리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종전선언 발표에 동참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해야 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있어서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언제가도 실현될 수 없는 조선의 국가핵무력 해체라는 뜻이 아니라, 종전선언을 발표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하여 미국 본토에 대한 조선의 핵공격위험을 해소하기 위한 명분이다. 지금 그에게는 그 명분을 언제, 어떻게 실행하느냐 하는 문제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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