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23

진보정치 3박자에 발을 맞추라

변혁과 진보 (71)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진보정치의 첫 박자

음악에서 가장 경쾌한 느낌을 안겨주는 선율은 3박자 선율이다. 그래서 경쾌한 무도곡은 3박자로 연주된다. 지난 시기 동방 음악사에서 3박자를 경쾌하게 연주하는 법은 우리 민족만 알고 있었다. 동방의 다른 나라 민족음악에서 찾을 수 없는 3박자 선율이 우리 민족음악에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경쾌한 선율을 즐길줄 아는 뛰어난 음악성을 타고났음을 말해준다.

사회변혁운동을 3박자 운동에 비유할 수 있다. 사회변혁발전은 객관현실, 주체역량, 촉발계기라는 진보정치 3박자에 맞춰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러한 3박자 운동이 절정에 이를 때 그 때 비로소 승리한다는 뜻으로 쓰는 비유다.

진보정치의 첫 박자는 사회변혁의 객관현실에 맞춰 운동한다. 객관현실이 사회변혁의 요구에 맞게 무르익어야 진보정치의 첫 박자가 힘찬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사회변혁의 객관현실이란 수구정권의 경제정책이 전면적으로 파산하고, 그에 따라 사회계급모순이 격화된 사회정치적 현실을 말한다. 지금 이 땅에서 우리는 그런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또한 수구정권이 숨겨온 부패와 전횡과 악행이 경제정책의 전면파산으로 국민들에게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그에 따라 수구정권과 수구정당에 대한 대중의 불만, 반감, 저항이 부글부글 끓게 될 때, 바로 그렇게 될 때 사회변혁의 객관현실이 무르익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땅의 대중은 이명박 정권과 새누리당에 대해 심한 불만을 반감을 느끼고 있지만, 저항행동에는 나서지 않고 있다. 이것은 사회변혁의 객관현실이 아직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계속해서 무르익는 과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땅에서 사회변혁의 객관현실이 파산과 갈등의 굉음을 내고 있기는 하지만 대중적 저항행동은 미흡하다. 객관현실은 진보정치의 첫 박자에 아직 맞지 않는 것이다.

진보정치의 둘째 박자

진보정치의 둘째 박자는 사회변혁의 주체역량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사회변혁의 주체역량이란 사상력과 조직력을 뜻한다.

사상력이란 변혁사상으로 무장한다는 뜻이니, 변혁주체가 변혁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해야 올바른 변혁전략과 변혁전술을 내올 수 있다.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유럽식 변혁사상을 버리고 이 땅의 현실에 맞는 우리식 변혁사상을 가질 때, 과학적인 변혁전략과 변혁전술이 나온다.

조직력이란 변혁조직을 건설한다는 뜻이니, 변혁주체가 우리식 변혁사상에 따라 변혁조직을 건설해야 변혁전략과 변혁전술을 편향 없이 실행할 수 있다. 변혁조직 건설이란 진보적 대중정당과 선도적 변혁조직을 건설한다는 뜻이다.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어려움을 뚫고 기어이 통합진보당을 창당한 것은, 진보정치의 둘째 박자에 발을 맞춰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땅에서 변혁조직을 건설하는 과업과 관련하여 두 가지가 당면과제가 더 제기되었다.

첫째, 진보적 대중정당은 건설하였지만 아직 당역량이 약하다.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진보적 대중정당을 더욱 강화, 발전시키는 당면과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진보적 대중정당을 더욱 강화, 발전시킨다는 말은, 이제껏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것처럼 당의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대한다는 뜻이다.

지금 통합진보당이 야권연대를 실현하여 원내교섭단체로 진출하려는 것은 진보적 대중정당의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대하는 당면과제와 직접적으로 결부된다. 통합진보당이 원내교섭단체로 진출해야 정치적 지위가 높아지고 정치적 영향력이 강해질 것이며, 원내교섭단체 수준의 지위와 영향력을 가져야 대중들 속에 더욱 파고들어 호소력 있고 설득력 있는 대중정치사업을 전개할 수 있다.

이런 정황을 살펴보면, 통합진보당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번 총선에서 무조건 야권연대를 끝까지 고수하고 원내교섭단체로 진출해야 사회변혁이 한 걸음 더 전진하게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정황을 간파한 진보정치의 정적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야권연대를 저지하고 통합진보당의 원내교섭단체 진출을 차단하려고 갖은 술책을 다 동원하고 있다. 통합진보당은 진보정치의 정적들이 선거국면 곳곳에 파놓은 보이지 않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경각심을 최고 수위로 높일 필요가 있다.

둘째, 진보적 대중정당은 건설되었으나, 선도적 변혁조직은 아직 건설되지 않았다.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진보적 대중정당을 강화, 발전시키는 것과 더불어 선도적 변혁조직을 건설하는 당면과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사회변혁의 싻을 자르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악법들을 동원해온 수구정권이 퇴장한 이후,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악법들이 줄줄이 철폐될 때, 그 때 비로소 선도적 변혁조직을 건설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날 것으로 예견된다. 이런 정황을 생각하면,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이 공동정책에서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악법들을 철폐하기로 합의한 것은 선도적 변혁조직 건설을 위해서 매우 고무적이다.

진보정치의 셋째 박자

진보정치의 셋째 박자는 사회변혁의 촉발계기다. 사회변혁의 객관현실이 무르익고, 사회변혁의 주체역량이 형성되었다 하더라도, 사회변혁의 촉발계기가 없으면 사회변혁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회변혁의 촉발계기는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의 객관현실이 무르익고 사회변혁의 주체역량이 형성된 조건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사회변혁의 객관현실이 아직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고, 사회변혁의 주체역량도 아직 충분하지 못한 이 땅의 현재상황에서 사회변혁의 촉발계기가 생겨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성급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수행해야 할 당면과업은 진보통합당을 더욱 강화, 발전시키고, 선거국면에서 야권연대를 고수하여 사회변혁발전에 유리한 객관현실을 조성함으로써 선도적 변혁조직을 건설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고, 우리식 사회변혁론에 대한 학습과 연구를 심화시켜 우리식 변혁사상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2013년에 민주통합당이 집권한다 해도

민심이 이명박 정권에 등을 돌렸으므로, 새누리당이 올해 총선과 대선에서 패하리라는 것이 대체적인 전망이다. 물론 새누리당의 선거패배는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이 추진하는 강력한 야권연대전술이 승리하였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만일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이 이제와서 야권연대를 중단하면 선거패배를 자초하는 것이며 그 어수선한 틈을 노린 새누리당은 어부지리를 틀어쥐고 승리할 것이다.

그렇지만 야권분열이 동반패배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의식한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이 야권연대를 끝내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야권연대가 중단될 가능성보다는 새누리당이 패배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보인다.

그러면 올해 총선과 대선에서 민주통합당이 승리하여 2013년에 민주통합당 정권이 등장하는 경우, 그런 식의 정권교체가 이 땅의 사회변혁발전에 과연 이로운 것일까 아니면 해로운 것일까?

첫째,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민주통합당 집권은 이명박 집권기에 격화되던 사회계급모순을 완화시켜줄 것이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대중의 불만과 반감을 일정하게 해소시켜줄 것이다. 이것은 사회변혁의 객관현실이 무르익는 현 추세를 가로막는, 뜻하지 않은 차단효과가 나타나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이처럼 진보정치의 첫 박자를 가로막은 차단효과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민주통합당 집권은 사회변혁발전에 해로울 것으로 예견된다.

물론 민주통합당 집권이 사회변혁의 주체역량을 강화, 발전시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고 볼 수 있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사회변혁의 객관현실이 무르익는 현 추세를 가로막는다는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땅의 경제가 이명박 정권의 경제정책 실패로 망가진 것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의 파탄위기에 종속적으로 연동되어 망가진 것이므로 민주통합당이 집권하더라도 경제파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2013년 이후에도 사회계급모순은 완화되기는커녕 더욱 격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나 그러한 전망은 전체가 아니라 한 측면만 보는 것이다. 이 땅의 경제파탄이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의 파탄위기에 종속적으로 연동되어 망가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경제파탄 정도를 비교하면, 이 땅보다 더 심하게 파탄된 그리스나 스페인도 사회계급모순 격화가 일정수준에서 머물고 더 격화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럽연합의 직접개입으로 위기상황을 정체시켜주는 반짝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다.

이 땅에서도 미국과 일본의 직접개입으로 위기상황을 정체시켜주는 반짝효과가 나타날 것이고, 바로 그런 반짝효과가 사회변혁의 객관현실이 무르익는 현 추세를 가로막게 될 것이다. 반짝효과는 파상적인 부침운동을 거듭하면서도 민주통합당 집권 5년 동안 지속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2013년 이후 이 땅의 사회계급모순은 현 상태에서 정체되거나 아니면 현 상태보다 약간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

위의 논지를 종합하면, 민주통합당 집권은 사회변혁발전에 이롭기도 하고 해롭기도 한 양면성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양면성을 지닌 민주통합당 집권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의 인식과 투쟁에 달렸다. 민주통합당 집권을 사회변혁의 주체역량을 강화, 발전시키는 환경조성의 기회로 인식하고, 그것을 위해 전력한다면 민주통합당 집권이 사회변혁발전에 이로울 것이다.

둘째,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민주통합당 집권은 이명박 정권이 완전히 파탄시킨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이전에 발표한 나의 글들에서 논한 것처럼,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은 이 땅의 사회변혁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이 자주적 평화통일의 지름길을 열어놓는다는 점에서, 한반도 평화는 사회변혁발전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환경으로 되는 것이다.

물론 한반도 평화가 사회변혁발전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환경으로 되는가 또는 그렇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도 역시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의 인식과 투쟁에 달렸다.

2013년에 민주통합당 정권이 등장하여 정세가 지금과 달리 양면성을 지니게 되면, 통합진보당도 당연히 양면전략으로 선회하게 될 것이다. 2013년에 정권이 교체되는 경우, 통합진보당의 전략은 새 정권의 시장경제정책에 대해서는 민중의 이익을 위하여 타격을 가하고, 새 정권의 한반도 평화정책에 대해서는 민족의 이익을 위하여 지지해주는 양면전략이 될 것이다.

올해 사회변혁발전을 위한 진보정치의 3박자 운동은 선거국면을 지나고 있고, 2013년에도 진보정치의 3박자 운동은 지금처럼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엇박자를 허용하지 않는 진보정치 3박자에 발을 맞추라. (2012년 3월 23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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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6

백치 민주주의와 3인 과두정치

변혁과 진보 (70)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그 이름에 얽혀있는 망각과 좌절의 25년

노무현은 1946년부터 2009년까지 이 땅에 살았던 제16대 대통령의 이름이 아니다. 승리의 짧은 기쁨와 좌절의 긴 아픔을 간직한 그 이름은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그리고 이 시대의 진보정치가 기어이 넘어야 할 영마루의 이름이다.

이 땅의 각계각층 대중들이 포악한 군사독재정권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던 반독재민주화운동이 1987년 6월에 마침내 이르렀던 그 승리의 절정 잘 보이지 않는 한 구석에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올라있다. 그는 1985년에 부산 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직을 맡으며 반독재민주화운동에 나섰고,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부산지역 상임집행위원장으로 6월 민주항쟁에 적극 참가하였다.

그러나 그 때는 알지 못했다. 1987년 6월에 이 땅의 각계각층 대중들은 '양김'이 성큼 올라선 승리의 절정을 바라보면서 노무현이라는 낯선 이름은 알지 못했다. 노태우 정권, 김영삼 정권, 김대중 정권을 거치며 16년이라는 좌절의 긴 세월을 보낸 뒤에서야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1987년 6월의 승리와 결부되었음을 깨달았다.

만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이 노무현을 1988년 4월 제13대 총선에 불러내어 혼탁한 정치판에 휩쓸리게 만들었던 것이 아니라, 이 땅의 각계각층 대중들이 1987년 6월 승리의 절정에서 '양김'의 이름이 아니라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불렀더라면, 그리하여 1987년 12월 노무현이라는 이름 위에 새로운 민주정권을 세웠더라면, 지금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되돌아보면,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부터 노무현 정권 수립까지 이어진 그 세월은, 이 땅의 각계각층 대중들이 반독재민주화 이후의 새로운 사회역사적 발전전망을 잃어버린 16년이었다. 16년 뒤에 등장한 노무현 정권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6월 민주항쟁의 짧은 승리마저 망각 속에 파묻어버린 16년이 반독재민주화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역사적 발전전망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3년에 등장한 노무현 정권은 1987년에 풀었어야 할 '밀린 숙제'를 붙들고 씨름하다가 힘이 다해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2009년 5월 23일 봉하마을에서 일어난 비극과 이명박 정권이 지닌 5년 동안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놓은 퇴행은 그 좌절의 사연이 얼마나 쓰리고 아픈 것인지를 말해준다.

이제 이 땅의 각계각층 대중들은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다시 부르며 망각과 좌절의 과거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노무현을 넘어서, 그의 이름에 얽혀있는 망각과 좌절의 25년 세월을 딛고 일어나 새로운 사회역사적 발전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바로 이것이 2012년의 정권교체와 2013년의 새로운 체제수립을 향한 진보정치의 절실한 요구이며 강렬한 지향이다.


백치 민주주의와 3인 과두정치

이 땅의 사회역사적 발전전망을 진보적 민주주의에서 찾지 못한 채 정치적 방황을 거듭해온 사람들은 말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승리한 이후 이 땅에서 군사독재가 물러가고 마침내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그들은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래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도 세우고, 민주화운동 유공자에게 포상도 하였다.

그러나 그건 착시현상일 뿐이다. 축소발표한 통계에 따르더라도 생활고를 겪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600만명이 되고, 실질실업률이 21.4%로 치솟고, 청년층 실질실업률은 22.1%에 이르고, 발버둥쳐도 헤어날 수 없는 빈곤의 늪에서 견디지 못해 자기 장기를 빼어 팔려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오고, 자산빈부격차가 474배로 벌어지고, 빈곤인구가 해마다 10% 포인트씩 늘어나 300만 가구에 육박하고, 가계부채가 734조원을 돌파한 것이 이 땅의 국민들이 바라던 민주주의였더냐?

아이들의 푸른 꿈이 학교폭력과 자살충동으로 시들어버리고, 성인인구의 30%가 정신질환에 걸려 있고, 사회 전반이 '자살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해마다 15,000명 이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국민 100명 가운데 65명이 이 사회가 전반적으로 부패하였다고 탄식하고, 먹고 살기가 막막해진 이 땅의 여성 14만 명이 성매매 소굴에 들어가고, 한 해 동안 형법범죄 99만3,000여 건과 특별법 범죄 117만5,000여 건이 발생하여 연간 범죄의 사회적 비용을 158조7,293억원이나 쏟아붓는 것이 이 땅의 국민들이 바라던 민주주의였더냐?

이처럼 썩어가고 죽어가고 미쳐가고 몸부림치는 이 땅의 참담한 현실을 뻔히 보면서도 그 무슨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떠드는 것은 백치가 아니면 할 짓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땅의 국민들이 속아온 가짜 민주주의는 '백치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누가 이 땅의 국민들을 '백치 민주주의'로 속여왔을까? 이 물음은 '백치 민주주의'를 넘어서지 못하고 좌절한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이 땅의 국민들에게 던지는 심각한 물음이다. 그러므로 노무현을 좌절시킨 슬픈 과거를 넘어서 새로운 미래를 여는 사회역사적 발전을 전망하지 못하면, 그 물음의 답을 영영 찾지 못한다. 노무현이 좌절한 슬픈 과거에 물어보라, 누가 이 땅의 국민들을 '백치 민주주의'로 속였는가를...

누군가가 이 땅의 국민들을 '백치 민주주의'로 속이기 위해서는 교활한 기만의 시나리오가 필요하였다. 6월 민주항쟁의 불꽃을 '6.29 선언'으로 꺼버린 시나리오가 있었다. 군사독재정권을 향한 국민적 투쟁열기를 3당합당으로 거두어 가버린 시나리오가 있었다. '문민정부'를 등장시켜 '백치 민주주의'를 완성한 시나리오가 있었다. 이른바 'DJP 야합'을 부추겨 '백치 민주주의'를 '국민의 정부'로 계승하게 만든 시나리오가 있었다. 대통령 당선자를 주한미국군사령부로 불러들여 주눅이 들게 한 굴욕사건으로 '참여정부'를 손아귀에 틀어쥔 시나리오가 있었다. 그리고 '경제성장신화의 주인공'을 조작하여 그 잘난 'CEO형 경제대통령'을 등장시킨 시나리오가 있었다.

지난 25년 동안 그처럼 교활한 시니리오를 꾸며내고 그것을 관철시킨 범인은 이 땅의 역대 정권들이 아니다. 이 땅의 역대 정권들은 그 시나리오가 적용된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잘라 말하면, 그 교활한 기만의 시나리오는 미국이 꾸며내고 관철시킨 것이다.

1987년 이후 25년 동안 이 땅에서 벌어진 좌절과 퇴행의 정치현실을 파고 들어가면, 결국 미국이라는 범인의 정체를 목격하게 된다. 이 땅의 국민들은 미국이 조작해낸 기만의 시나리오에 따라 '백치 민주주의'에 안주하며 25년 동안 철저히 속아온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이 말하면, 모든 것을 미국 탓으로 돌리는 반미주의자의 과장어법을 듣는 것 같아서 도무지 신뢰하기 힘들다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의혹은 이 땅의 정치현실을 표피를 지나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보지 못하는 정보결여와 그에 따른 인식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이를테면, 2007년 1월부터 12월까지 지속된 대선국면에 주한미국대사관이 퇴행적 정권교체를 관철하기 위해 어떠한 비밀공작을 벌였는지를 알면 반미주의자의 과장어법이라는 의혹은 꺼내지 못한다. '위킬릭스'가 폭로한 방대한 분량의 비밀전문들 가운데는 2007년 대선을 퇴행적 정권교체로 끌어간 미국의 시나리오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비밀문건이 93편이나 들어있다.

주한미국대사관이 2007년 1월부터 12월까지 작성하여 본국에 전송한 93편의 비밀전문을 분석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므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논하지 않지만, 한 가지 정확히 짚어야 할 사실이 있다.

이 땅의 중요한 정치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내리지만, 이 땅의 정치문제를 좌우하는 권한은 주한미국대사, 주한미국군사령관, 미국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 세 사람의 합의에 따라 행사되는 것이며, 따라서 '백치 민주주의'를 조장하고 유지하는 것은 바로 그 세 사람의 과두정치(oligarchy)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3인 과두정치는 매우 은밀하고, 압도적이며, 교활하다. 은밀하기 때문에 국민들이 알지 못하고, 압도적이기 때문에 아무도 맞서려 하지 않고, 교활하기 때문에 감쪽같이 속아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3인 과두정치를 폐지하지 않으면, 이 땅의 국민들이 '백치 민주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고, '백치 민주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진보적 민주주의는 언제까지나 소수 선각자들의 '희망사항'으로 남게 될 것이다.

3인 과두정치의 흑마전술을 돌파할 수 있을까?

이 땅의 국민들은 올해 2012년을 선거의 해로 맞았고,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올해를 정권교체의 해로 맞았다. 그리고 벌써 석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있다. '위킬릭스'에 폭로된 93편의 비밀문건에 나온 2007년 경험을 생각하면, 미국은 이미 올해 1월 초에 이 땅에서 대선개입공작을 시작한 것이고, 2월부터는 그 공작을 본격적으로 벌이고 있는 셈이다.

정치적 비중과 중요도를 가늠해보면, 2007년 대선보다 2012년의 총선과 대선이 훨씬 더 큰 정치적 비중과 중요도를 지니므로, 지금 주한미국대사관과 미국 중앙정보국 한국지부는 총선과 대선에 개입하는 비밀공작을 2007년보다 더 집요하고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요구되는 진보정치는 3인 과두정치와 근본적으로 대치되고 전적으로 배치된다. 진보정치와 3인 과두정치의 모순관계는 적대적이다.

이 땅에서 3인 과두정치를 폐지하는 것 자체가 진보정치의 당면과업이지만, 그 과업은 간단한 게 아니다. 3인 과두정치를 폐지하여 그들의 선거개입공작이 없는 공정선거를 실시하지 않으면 통합진보당이 원내교섭단체로 올라설 수는 있으나,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3인 과두정치의 비밀공작이 진보적 정권교체를 가로막은 가장 큰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통합진보당이 추구하는 진보적 정권교체는 3인 과두정치의 폐허 위에서 실현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통합진보당이 제기해야 할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종래 물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3인 과두정치를 폐지하고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새로운 물음으로 바뀌어야 한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은밀하고, 압도적이고, 교활한 3인 과두정치를 통합진보당의 현재 정치역량으로 폐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통합진보당이 3인 과두정치를 폐지하는 전략적 승리가 사실상 불가능한 조건에서는, 우선 3인 과두정치의 힘을 축소시키는 전술적 승리부터 추구할 필요가 제기된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이야말로, 통합진보당이 전술을 잘 써서 3인 과두정치의 힘을 축소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러면 올해 선거국면에서 통합진보당이 어떤 전술을 써야 3인 과두정치의 힘을 축소시킬 수 있을까? 3인 과두정치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들이 이 땅의 국민 전체를 직접 상대하여 비밀공작을 벌이지는 못한다. 이것이 그들이 지닌 가장 큰 약점이다.

반면에, 통합진보당은 선거국면에서 이 땅의 국민 전체를 직접 상대하여 정치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것이 통합진보당이 지닌 가장 큰 강점이다. 통합진보당은 그러한 상대의 약점과 자기의 강점을 타산해서, 강력한 선거전술을 개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두 가지 전술문제를 논할 수 있다.

첫째, '위킬릭스'가 폭로한 93편의 비밀문건을 읽어보면, 3인 과두정치가 친미정치인들을 주요공작대상으로 삼고, 친미도 반미도 아닌 중간정치인들을 선별, 포섭하는 전술을 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통합진보당은 3인 과두정치의 비밀공작대상으로 전락한 친미정치인들을 철저히 고립시키는 한 편, 중간정치인들이 그들의 비밀공작에 본의 아니게 말려들지 않도록 견인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서 말하는 중간정치인이란 민주통합당에 소속된, 친미도 아니고 반미도 아닌 정치인들을 뜻한다.

그러므로 통합진보당이 단기적으로 좀 손실을 보더라도 총선에서 야권연대를 성사시키고, 대선에서 야권단일후보를 내세우는 것은 필수적이다. 통합진보당은 총선에서 성사시킨 야권연대의 기반 위에서 대선의 야권단일후보를 내세워야 3인 과두정치의 비밀공작을 차단하고 전술적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올해 대선에서 야권단일후보를 내세우는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모두 공감하고 있지만, 단순히 정권교체만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3인 과두정치의 힘을 위축시키기 위해 그렇게 한다는 전략적 관점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3인 과두정치의 힘을 위축시키기 위해 야권단일후보를 내세운다는 말은, 3인 과두정치에 휘둘렸던 노무현 정권의 실패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노무현을 넘어선 2013년 체제를 세우기 위해 야권단일후보를 내세운다는 뜻이다.

지금 노무현 후계자들이 이끄는 민주통합당은 노무현 정권보다 조금 '왼쪽'으로 이동하였지만, 민주통합당이 집권한 경우라 해도 일단 3인 과두정치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다시 '오른쪽'으로 견인당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2013년 체제는 정권교체를 실현하고서도 노무현 정권 복제판처럼 퇴행하게 될 것이다. 통합진보당은 이런 상황을 예상하여야 하며, 2013년 체제가 노무현 정권 복제판으로 퇴행하는 것을 막을 '안전장치'를 만들어놓아야 할 것이다.
 
둘째, 2003년 대선경험을 분석하면, 당시 대선국면 막판에 노무현 후보에게 부동표가 쏠리는 바람에 선거결과가 3인 과두정치의 시나리오대로 나오지 않았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표심을 아직 정하지 못한 부동표의 최종 향배가 팽팽한 접전이 벌어진 선거판세를 결정짓는 법이다. 올해 총선과 대선은 역대 어느 선거보다 부동표에 의해 결판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조건에서, 3인 과두정치가 부동표를 분열시킴으로써 야권단일후보에게 가야 할 표를 갉아먹게 만든다면, 여권후보가 이길 가능성이 매우 높아질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선 열기가 절정에 이르게 될 11월에 가서 부동표를 흡수할 제3후보가 출현하여 야권단일후보에게 돌아갈 표를 흡수해버리면, 결국 여권후보가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부동표는 대중선동에 매우 약하다. 3인 과두정치가 대중적 인기 높은 특정인물을 대기시켰다가 11월에 제3후보로 등장시켜 친미언론을 총동원한 '인기몰이'를 밀어붙이면 부동표 흡수전술은 얼마든지 먹혀들어갈 것이다. 선거판에 뜻밖에 등장하는 유력한 후보를 서양에서는 '흑마(dark horse)'라 부르는데, 지금 3인 과두정치는 흑마전술을 치밀하게 준비하는 중인지 모른다.

올해 대선에서 야권후보를 단일화하는 전술을 비밀공작으로 차단할 수 없게 된 3인 과두정치에게 남아있는 비상대책은 흑마전술밖에 없다. 그러므로 통합진보당은 3인 과두정치의 흑마전술을 꺾어버릴 효과적인 대응책을 준비하였다가, 저들이 흑마전술을 들고 나올 때 강타를 날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2012년 3월 16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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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9

정세발전추세에 둔감한 '19대 총선 평화.통일공약'

변혁과 진보 (69)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비핵화의 의미해석은 9.19 공동성명에 근거해야 한다

이 글을 집필하고 있는 지금, 제국주의깡패국가(imperialist rogue state) 미국은 '키 리졸브-독수리 연습'이라는 작전명으로 연례적인 북침전쟁연습을 이 땅에서 또 감행하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 사실 하나만 봐도 이 땅의 현실이 군사긴장과 전쟁위험으로 가득 찬 정전체제에 의해 규정되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런데 북측과 미국의 전면대결상태에서 조성된 한반도 군사정세에 누구보다 민감하여야 할 통합진보정당이 '핵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한반도 군사정세에 둔감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를테면, 통합진보당이 2012년 3월 1일에 발표한 '평화로운 한반도를 위한 3+1 과제와 15대 공약'을 읽어보면 그런 인상을 받게 된다.

그 발표내용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북한 핵무기 외국 이전"으로 인식한 것은 비핵화에 관한 초보지식도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다. 프랑스와 일본, 미국과 캐나다, 미국과 아르헨티나 등의 양국관계에서 드러난 것처럼, 쌍무협정에 따라 자국산 핵물질을 다른 나라에 넘겨주거나 다른 나라에 가공을 위탁하는 경우는 더러 있지만, 자국의 핵무기를 다른 나라에 넘겨주는 '바보나라'는 세상에 없다.


심지어 한반도 비핵화가 아니라 '북한의 비핵화'라는 생억지를 부리는 미국조차도 북측이 자기들에게 핵무기를 넘겨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언필칭 진보정당을 자처하는 통합진보당이 9.19 공동성명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엉뚱하게도 소설적 상상력에 의존하여 "북한 핵무기 외국 이전"을 공식 발표한 것은 너무 창피한 노릇이다.

한반도 비핵화는 북측 핵무기를 다른 나라로 이전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반도를 근본적으로 위태롭게 만든 핵위협을 불가역적으로, 검증할 수 있게, 완전히 제거한다는 뜻이다. 한반도 비핵화는 철두철미 한반도 핵문제의 당사자인 북측과 미국이 쌍무적 합의에 의해서 등가적 동시행동의 원칙에 따라 실현되는 핵위협의 상호제거다.

바로 그런 목표와 원칙에 따라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해갈 기본방도를 밝혀준 불멸의 이정표가 2005년에 6자회담에서 채택된 9.19 공동성명이다. 그 역사적인 성명은 미국의 의무 불이행으로 이제껏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으나, 국제법적 효력을 상실한 종이장으로 전락한 것은 아니며, 이번에 북측이 미국을 강제하여 채택한 2.24 합의를 통해 결국 이행단계로 진입하였다.

9.19 공동성명에 규정된 한반도 비핵화의 의미는, 북측 핵무기를 미국에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북측과 미국이 서로에게 가해온 핵위협을 등가적 동시행동의 원칙에 따라 쌍무적 합의에 의거하여 순차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순차적 제거란 핵위협을 임시로 제거하는 1단계 조치에서 출발하여 영구히 제거하는 2단계 조치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을 인식하고 나면, 핵위협 제거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밝혀낼 필요가 생긴다.


평화협정 체결과 핵위협 제거는 어떻게 연관되는가?

미국이 요구하는 핵위협 제거란 북측이 지하핵실험을 중지하고, 녕변 핵시설단지의 우라늄농축을 중지하고,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중지하고,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을 통해 미국에게 생산량을 통보한 무기급 핵물질로 만든 '신고한 핵무기'를 자진 해체하는 것이다.

북측이 신고한 핵무기만 해체한다는 점과 국외 이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진 해체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자진 해체 여부를 검증하는 방식은 장차 북미양자회담에서 합의할 것인데, 이 검증단계가 한반도 비핵화의 마지막 단계다.

미국은 위에 열거한 것 이상으로 비핵화 수준을 높일 수도 없고, 높이려 하지도 않는다. 실제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통합진보당이 위의 발표문에서 엉뚱하게 상상한 것처럼, 비핵화의 마지막 단계에 가서 만일 미국이 정말로 북측에게 핵무기를 넘겨달라고 요구한다고 가정하면, 북측도 등가적 동시행동 원칙에 따라 북측이 미국에게 넘겨줄 핵무기에 상당한 미국 핵무기를 넘겨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핵무기 상호교환은 아동만화에나 나올 법한 우스운 이야기다.
 
다른 한 편, 북측이 요구하는 핵위협 제거란 미국이 대북핵공격을 상정한 북침전쟁연습을 중지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여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수립하고, 한반도를 겨냥한 '핵우산' 제공공약을 폐기하고, 북침전쟁 인계철선으로 존재하는 주한미국군을 철군하는 것이다.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문제는 다자간 평화회담에서 해결할 것이고,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는 북미양자회담에서 해결할 것이다. 주한미국군을 철군하는 단계가 한반도에서 미국의 핵위협을 제거하는 마지막 단계다.

북측은 위에 열거한 것 이상으로 비핵화 수준을 높일 수도 없고, 높이려 하지도 않는다. 북측이 미국 본토에서 북측을 겨냥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제거하라고 요구하거나 또는 태평양 바다밑에서 잠행하는 핵추진 잠수함에 배치된 전략미사일까지 제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한반도 비핵화 수준을 넘어서 전 세계 비핵화를 미국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전 세계를 비핵화하는 의제는 북미양자회담애서 논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9.19 공동성명에 들어가지 않았다.

북측과 미국이 서로에게 가하는 상호핵위협을 등가적 동시행동 원칙에 따라 순차적으로 제거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북측과 미국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기 위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즉시 실행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중요한 것은, 평화협정 체결을 선행하지 않는 한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이다. 평화협정 체결과 비핵화 실현의 상관성을 비유로 말하면, 서로 싸우지 않는다는 약속을 아직 하지도 않았는데, 총부터 성급히 내려놓을 어리석은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한반도 정세에서 최우선적으로 시급하게 풀어야 할 문제는, 한반도 비핵화를 앞두고 북측과 미국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는 합의를 내오는 것이다. 친미성향 수구언론매체들이 북미관계와 관련하여 퍼뜨리는 헛소리 같은 왜곡보도와 축소보도만 자꾸 읽다보면, 이 당면문제가 어떻게 해결되고 있는지 모르고 헷갈리게 된다. 저들의 헛소리를 듣고 헷갈리지 않으려면, 2012년 2월 29일 평양과 워싱턴 디씨에서 동시에 발표된 2.24 합의를 꼼꼼하게 정독할 필요가 있다.

잘라 말하면, 2.24 합의는 북측과 미국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기로 합의하였음을 천명한 매우 중대한 문서다. 길이가 제한된 이 글에서 그 합의사항을 상론하지는 못하지만, 제3차 북미고위급회담에서 그런 합의에 이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기로 한 2.24 합의는 미국의 정치적 패배이자 북측의 정치적 승리이므로, 미국은 그 합의사실을 자꾸 감추려 하고, 북측은 그 합의사실을 세상에 알리려 하는 바람에 서로 엇갈린 정보가 언론에 공개된 것이다.

북측과 미국이 2.24 합의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기로 합의한 것을 9.19 공동성명의 시각으로 다시 읽으면, 핵위협을 상호제거하는 한반도 비핵화가 속도를 내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북측과 미국이 핵위협을 서로 제거하는 비핵화 실현속도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는 평화실현 진척정도에 따라 빨라질 것이다.



미국의 계략을 간파하지 못하면 낭패다

주목하는 것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는 과정이 2.24 합의에 의해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한반도 정세는 여기까지 와 있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는 과정은 한반도 비핵화를 적극 추동할 것이며, 이제까지 진행해온 북미고위급회담보다 한 급 높은 북미고위급회담이 열리면 주한미국군 철군문제가 당연히 의제로 오를 것이다. 이처럼 평화협정 체결, 비핵화 실현, 철군을 포괄하는 일련의 전 과정을 가리켜 한반도 평화실현과정이라 한다.

그런데 통합진보당이 2012년 3월 1일에 발표한 '평화로운 한반도를 위한 3+1 과제와 15대 공약'에는 이상하게도 주한미국군 철군문제가 빠져있다. 철군문제가 나오면 이성을 잃고 과민반응을 하는 수구정당과 수구언론을 의식해서 철군문제에 대한 언급을 회피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에서 대선후보를 비롯한 일부 수구정객들도 철군을 주장하는 판인데, 정작 철군문제를 제기해야 할 통합진보당이 철군문제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면, 수구세력의 눈치를 너무 살피는 게 아니냐는 실망스러운 평가밖에 듣지 못할 것이다.

통합진보당은 철군문제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민주통합당과 똑같은 행동을 취할 것이 아니라, 민주통합당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가면서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어법으로 철군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명백하게도, 철군문제는 한반도 평화실현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다.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비핵화를 실현하는 목적은 주한미국군을 철군하기 위한 것이며, 철군 없이는 평화도 비핵화도 전혀 실현하지 못한다.

혹시 평화협정이 체결된 뒤에 정세가 호전되고 사회분위기가 바뀌면, 통합진보당이 그 때 가서 철군문제를 제기해도 되지 않겠는가 하고 안이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철군문제를 둘러싼 내외사정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미국은 평화협정 체결문제와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분리해놓고,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국군 지위를 '조정자 지위'로 변경하여 계속 주둔시킬 것이라는 소리를 이미 오래 전부터 꺼내놓았다. 이것은 미국이 평화협정을 체결하더라도 주한미국군은 철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평화협정을 체결하더라도 주한미국군이 계속 주둔하면 그 협정문은 사실상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하게 되므로, 북측이 계속주둔 의지를 드러낸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리 만무하다. 북측이 미국에게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국군 철군을 일괄타결방식으로 추진하자고 요구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북측과 미국이 평화협정을 체결하기로 합의하는 것은 오직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국군 철군을 일괄타결방식으로 합의하였을 때만 가능하다. 평화협정 체결문제가 이처럼 주한미국군 철군문제와 떼어놓을 수 없게 결부되었기 때문에, 평화협정 체결이 이제껏 59년 동안 지체되어온 것이다.

만일 평화협정 체결문제와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분리시켜놓고 평화협정만 체결하고 끝난다면, 그것은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왜냐하면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킬 확실한 국제법적 근거를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화협정 체결문제와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분리시키고 평화협정 체결문제만 제기하는 것은, 주한미국군 영구주둔을 획책하는 미국의 계략을 본의 아니게 따라가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이 미국의 계략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 계략을 멋모르고 따라가다니 세상에 이런 낭패가 또 어디 있을까!


진척시기를 너무 늦춰잡았다

이번에 통합진보당이 발표한 내용을 읽어보면, 한반도 평화실현 진척시기를 전망하는 데서도 통합진보당이 정세발전추세에 둔감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위의 발표문에 따르면, 통합진보당은 2020년에 가서야 한반도 평화체제를 수립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왜 그렇게 늦춰잡았을까?

2.24 합의가 나오기 전에는 진척시기를 그렇게 늦춰 전망할 수 있었으나, 2.24 합의로 정세발전속도가 빨라졌으니 이제는 2020년까지 늦춰잡을 필요는 없다. 물론 평화실현 진척시기를 전망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정보은폐로 잘 보이지 않는 정세발전추세를 예민하게 포착하는 감각을 가져야 평화실현 진척시기를 가늠할 수 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한반도 평화실현과정에서 2012년은 결정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2012년은 북측과 미국이 평화문제와 비핵화문제의 해결방도를 일괄타결방식으로 합의하는 시기이며, 남측에서 정권교체가 실현되는 시기이다.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수립되는 시기는 남측에 자주적 진보정권이 수립되는 시기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이 땅에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자주적 진보정권은 정전체제에서 수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미국이 남측에 대한 지배력을 정전체제에서 유지하고 있으므로, 정전체제가 남아있는 한 미국의 지배력이 강하게 관철되는 것이고, 따라서 그런 지배와 예속의 관계에서 민주통합당이 집권할 수는 있어도 통합진보당이 집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한미국군의 단계적 철군이 아직 완료되지는 않았더라도, 평화협정이 체결된 다음에 핵위협이 단계적으로 제거되는 발전추세에 조응하여 미국이 단계적으로 철군할 때, 다시 말해서 미국의 대남지배력이 현저히 위축되었을 때, 이 땅의 진보적 민중들이 그토록 염원해온 자주적 진보정권이 출현할 것이다.

2.24 합의로 이미 시작된 한반도 평화실현과정이 한껏 고조기에 이른 시점에서, 이 땅의 진보적 민중들은 자기들이 선택한 자주적 진보정권을 강력한 '무기'로 삼고 이 땅에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이며, 자주적 평화통일을 앞당길 것이다. (2012년 3월 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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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3

탈소비에트화가 IMF의 덫에 걸린 사연

변혁과 진보 (68)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한반도의 '38선'과 발칸반도의 '몰건선'

전쟁이 끝나면, 전승국은 패전국을 상대로 전후문제를 처리하면서 국제질서를 재편한다. 그런데 전승국이 자국 이익에 맞춰 배타적으로 전후문제를 처리하기 때문에 심각한 사태가 벌어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그러하였다.

북위 38도선을 중심에 놓고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한 것은, 전후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저지른 가장 악랄한 범죄행위였다. 미국은 아시아의 한반도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유럽의 발칸반도에서도 분할강점전략을 추구하였다.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하는 '38선'을 그은 미국은 발칸반도 일부지역을 동서로 분할하는 '몰건선(Morgan Line)'도 그었다. 한반도의 '38선'은 미국이 주도하고 소련이 합의해주는 식으로 그어졌고, 발칸반도의 몰건 라인은 미국이 주도하고 이탈리아가 합의해주는 식으로 그어졌다.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하고 남측을 점령한 미국은 1947년 9월 15일 전범국 이탈리아와 야합하여 '몰건선'을 그음으로써 '트리스티 자유령(Free Territory of Trieste)'을 조작하였다. 트리스티란 발칸반도 북서쪽에 유고슬라비아와 이탈리아 사이에 끼어있는 738㎢에 이르는 지역인데, 당시 그 지역인구는 33만 명이었다.
 
 
미국은 트리스티를 동서로 갈라놓고 거주인구가 26만 명이 되는 서부지역을 강점하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거주인구가 7만1,000명밖에 되지 않는 동부지역은 유고슬라비아가 군정을 실시하였다. 미국이 트리스티를 분할강점한 목적은 그 지역을 전범국 이탈리아에게 넘겨줌으로써 인민민주주의국가로 출현한 유고슬라비아를 견제하고 발칸반도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려는 데 있었다.

미국의 의도가 그러하였으니, 유고슬라비아가 트리스티 영토문제를 놓고 미국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유고슬라브 인민군 전투기들이 그 지역을 비행하는 미국군 수송기 네 대를 격추하였다. 유고슬라비아가 그처럼 미국을 상대로 무력대결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강군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유고슬라브 인민군을 강군으로 키운 지도자는 조십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다. 1941년 4월 6일 나치 독일이 주도하고 파쇼 이탈리아와 헝가리까지 가세한 3개국 연합군이 유고슬라비아 왕국(당시 국명)을 침공하고 강점하였을 때, 티토는 '노동계급여단(Proletarian Brigade)'이라는 이름의 반파쇼유격대를 조직하여 치열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침략군을 몰아낸 해방지역마다 '반파쇼민족해방위원회'라는 이름의 임시혁명정부를 조직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유고슬라비아민주연방(당시 국명)과 유고슬라브 인민군을 창설하였다.


조십 브로즈 티토


나치 독일, 파쇼 이탈리아, 헝가리가 연합한 강적과 맞서 반파쇼무장투쟁을 벌인 '노동계급여단'을 골간으로 하여 창설된 유고슬라브 인민군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한 군대들 가운데 하나였다.

티토는 왜 스탈린과 갈라섰을까?

당시 발칸반도의 정세는 매우 복잡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4월 나치 독일이 주도하고 파쇼 이탈리아와 불가리아까지 가세한 3개국 연합군의 침공을 받고 강점당했던 그리스는, 티토 같은 걸출한 지도자를 만나지 못한 탓에 종전 직후부터 내부혼란을 겪다가 결국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내전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전에 나치 강점을 반대하여 반파쇼투쟁을 벌였던 그리스 공산당을 중심으로 결집한 무장세력인 그리스 민주군과 미국과 영국이 배후조종한 그리스 정부군의 충돌로 일어난 것이 그리스 내전이다. 민중의 지지를 받는 그리스 민주군에게 전세가 유리하게 돌아가자, 다급해진 영국과 미국이 차례로 파병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리스와 국경을 맞댄 유고슬라비아는 당연히 그리스 민주군의 투쟁을 적극 지원하였다. 종전 직후 인민민주주의국가로 등장한 유고슬라비아는 인접국 그리스에 친미정권이 들어서는 경우, 미국의 지배전략이 발칸반도 전역으로 파급될 것으로 우려하였다.

특히 당시 계급적 대립이 심각하였던 알바니아에서도 인민민주주의국가 건설을 반대하는 수구세력이 내전을 일으킬 조짐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유고슬라비아는 즉각 알바니아에 파병하여 혁명세력을 지원하였다. 역사적으로 평가하면, 유고슬라비아의 그리스 민주군 지원과 알바니아 파병은 미국의 발칸반도 지배전략에 맞선 정당한 조치였다.

그런데 당시 소련은 발칸반도 정세에 대해 이상한 태도를 취하였다. 소련은 유고슬라비아가 트리스티 영토문제를 놓고 미국과 충돌하자, 유고슬라비아가 미국에게 도발하였다고 비난하였다. 그 뿐 아니라, 소련은 유고슬라비아가 자기들과 상의하지 않고 알바니아에 파병한 것을 비난하였고, 미영 제국주의연합세력에 맞서 싸우는 그리스 민주군을 지원하지 않고 모른 척 외면하였다.

소련이 그런 이상한 태도를 취하게 된 배경에는 1944년 10월 9일 조셉 스탈린(Joseph Stalin, 1878-1953)이 제국주의연합세력의 두목들 가운데 한 사람인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을 모스크바에서 만나 비밀합의를 맺은 말 못할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백분율 합의(Percentages Agreement)'가 그것이다. 그 합의의 골자는 소련과 영국이 종전 후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각각 50%씩 균등하게 행사한다는 것이다. 그 비밀합의에 따르면, 소련은 루마니아에 대한 배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영국은 그리스에 대한 배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되었으니, 소련이 그리스 내전을 모른 척 외면하였던 것이다.

소련이 발칸반도의 자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유고슬라비아를 지원해주지 못할망정 유고슬라비아를 비난한 처사는 유고슬라비아의 격분을 샀다. 바로 이것이 역사에 '티토-스탈린 결별(Tito-Stalin Split)'로 기록된, 세계 사회주의진영의 첫 내부갈등이었다.


사회주의시장경제의 설계자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은 세계 사회주의진영을 이끌어가기 위한 세 개의 국제동맹체를 창설하였다. 소련이 창설한 국제정치동맹은 1947년 9월 폴란드 남서부에 있는 스클라르스카 포렘바(Szklarska Poremba)에서 창설한 코민포름(Cominform)이다.

공산주의정보국(Communist Information Bureau)을 그렇게 약칭하였다. 소련공산당, 폴란드연합노동당, 체코슬로바키아공산당, 헝가리노동당, 루마니아노동당, 불가리아공산당, 프랑스공산당, 이탈리아공산당, 트리스티자유령공산당이 가입한 코민포름은 스탈린이 세상을 떠난 직후 소련공산당 안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나자 1956년에 해체되었다. 유고슬라비아연방인민공화국(당시 명칭) 집권당인 유고슬라비아공산연맹도 코민포름에 가입하였는데, 티토-스탈린 결별 이후 1948년에 코민포름에서 쫓겨났다.

소련이 1955년 5월 14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창설한 국제군사동맹이 바르샤바 조약기구(Warsaw Treaty Organization)다. '친선, 협조, 상호원조를 위한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그렇게 약칭한다. 미국이 주도하여 창설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응하기 위한 그 국제군사동맹에는 소련, 동독,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알바니아, 불가리아가 가입하였는데, 사회주의진영이 무너지는 것과 함께 1991년 7월 1일에 해체되었다.

1949년 1월 모스크바에서 소련이 창설한 국제경제협력기구가 코메콘(COMECON)이다. '상호경제지원협의회(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를 그렇게 약칭한다. 처음에 소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6개국으로 시작하였는데, 나중에는 알바니아, 동독, 몽골, 쿠바, 베트남도 가입하였다. 코메콘은 사회주의진영이 무너지는 것과 함께 1991년 6월 28일에 해체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코민포름에서 일찌감치 쫓겨났고, 바르샤바조약기구와 코메콘에는 아예 가입하지 않았다. 유고슬라비아는 당시 사회주의진영을 이끌던 소련의 통제에서 벗어나 탈소비에트화(de-sovietization)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유고슬라비아의 그러한 독자노선을 티토주의(Titoism)라고 불렀다.

티토주의가 추구한 탈소비에트화는 소비에트형 국유화 및 계획경제를 중단하는 것을 뜻하였다.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국가경제의 중앙계획을 중단하고, 그 대신 노동자 자주관리(worker's self-management)와 대외무역 자유화를 도입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방향전환이 유고슬라비아의 미래를 망친 화근이 될 줄은 그 당시에 아무도 몰랐다.

국가경제의 중앙계획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생산자 대중이 생산현장에서 참여할 의사결정과정이 없는 것이 문제였으므로, 국가경제의 중앙계획을 그대로 두고 생산현장에 의사결정과정을 도입하면 사회주의계획경제를 망치지 않고 강화발전시킬 수 있었는데도 유고슬라비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소련의 통제에 대한 반감이 사회주의의 고유한 경제관리방식까지 내버리게 만든 것이다. 사회주의경제관리를 내버리고 노동자 자주관리와 무역자유화를 도입한 유고슬라비아의 경제를 가리켜 사회주의시장경제(socialist market economy)라고 부를 수 있는데,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는 양립할 수 없는 데도, 그런 형용모순을 인정한 것 자체가 이미 실패를 예고한 것이다.

모든 생산자 대중에게 투표권을 주어 생산현장에 노동자협의회(worker's council)를 내올 것이 아니라, 선진적인 생산자 대중으로 구성된 당위원회를 생산현장에 조직하여 생산자 대중 전체에게 생산의 주인, 인민의 충복이 되자는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생산자 대중의 자주의식화를 추진하여야 하였다. 생산자에게 자주의식이 없으면, 투표권 행사는 형식적인 수준을 넘지 못한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시장경제의 설계자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다.

생산자 대중의 자주의식화를 추진하지 않으면서, 생산현장에 생산자 대중의 의사결정과정만 도입해봐야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없다. 어떤 제도적 결함을 바로잡고 혁신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 하는 것은, 생산의 주인과 인민의 충복이라는 자각을 가진 선진적 생산자 대중의 자발적인 노력과 투쟁으로 해결하는 정치과업인 것이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시장경제의 설계자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다.


국제통화기금의 '덫'과 미국의 '조용한 혁명'

반사회주의 선동가들은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 자주관리가 그 무슨 선진적인 경제관리방식인 것처럼 목청을 높혔지만, 그것은 허위선전이었다. 노동자 자주관리와 무역자유화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생산자 대중의 집단이기주의를 통제할 수 없었다.

노동자 자주관리와 무역자유화를 도입하자 처음에는 생산력이 제법 증가하였지만, 경제활동에서 사리사욕의 집단화 현상이 차츰 만연되면서 사회계급적 모순이 재생되었으며 나중에는 국가재정마저 파산위기에 빠졌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유고슬라비아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여러 차례 구제금융을 받으며 재정파산위기를 넘겼다. 국제통화기금은 결코 아무런 대가 없이 달러를 빌려준 것이 아니라, 유고슬라비아의 '시장자유화(market liberalization)'를 요구한 대가로 달러를 빌려주었다. 노동자 자주관리와 무역자유화가 사회주의시장경제마저 차츰 밀어내고 완전한 시장자유화를 불러들인 것이다.

국제통화기금의 덫에 걸린 유고슬라비아 경제는 밖으로는 대외부채위기를, 안으로는 대량실업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유고슬라비아 대외부채는 1954년에 4억 달러밖에 되지 않았는데, 1981년에는 1,990억 달러로 폭증하였고, 실업자수는 1980년에 100만명을 넘어섰다. 유고슬라비아는 대량실업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자국 노동자들의 해외이주를 허용하였다. 그에 따라 서독으로 '탈출'한 유고슬라비아 노동자는 1961년에 16,000명이었는데, 10년 뒤인 1971년에는 410,000명으로 급증하였다.

사회주의를 말살하려고 날뛰는 제국주의깡패국가들이 그처럼 곤경에 처한 유고슬라비아를 방관할 리 만무하였다. 1982년에 작성되고, 1990년에 기밀해제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결정서 제54호 문건에 따르면, 미국은 "동유럽 나라들을 시장경제로 다시 끌어들이는 한 편, 공산주의 정부들과 정당들을 전복하기 위한 '조용한 혁명(quiet revolution)'을 추진하는 노력을 확대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유고슬라비아는 미국이 은밀히 추진하는 '조용한 혁명'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미국이 유고슬라비아에서 '조용한 혁명'을 어떻게 자행하였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나, 6개 자치공화국과 2개 자치주로 구성된 유고슬라비아에서 쌓이고 쌓인 내부모순은, 국가적 단합의 중심이었던 티토가 1980년 5월 4일에 별세한 뒤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1990년까지 유지된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연방공화국(맨위 그림)은 1991년 연방이 해체되며 4개의 나라로 쪼개졌다. (중간 그림). 그리고 내전과 내분을 거듭한 끝에 2008년에 이르러 7개 나라와 분쟁지역(코소보)으로 분화되고 말았다. (맨 아래 그림)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가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연방공화국(당시 국명)에서 탈퇴하자, 이튿날 유고슬라브 인민군이 무력을 행사하여 연방탈퇴를 저지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시작이었다. 티토가 '형제애와 단합(brotherhood and unity)'이라는 기치 아래 건설한 유고슬라비아연방은 그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 뒤로 크로아티아 독립전쟁과 보스니아 전쟁이 이어졌다. 1998년에 코소보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전투기를 동원하여 유고슬라비아를 공습하였다. '형제애와 단합'의 땅은 전쟁과 학살과 침략으로 분열되고 황폐화되었다. (2012년 3월 2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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