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25

금수산영빈관에서 합의한 반제공동전선구축과 사회주의공동번영

[한호석의 개벽예감](353)
자주시보 2019년 06월 24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조중정상회담은 외교활동이 아니다
2. 중재자를 앞세운 트럼프의 특별대책
3. 특별대책은 어떻게 물거품으로 되었는가? 
4. 금수산영빈관에서 이루어진 역사적인 합의


1. 조중정상회담은 외교활동이 아니다

2019년 6월 20일 전 세계의 이목이 평양으로 쏠렸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조선을 국가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상봉하고 역사적인 조중정상회담을 진행한 것이다. 조중정상회담 앞에 ‘역사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까닭은, 시진핑 주석이 사상 처음으로 조선을 ‘국가방문’한 것으로 하여 성사된 회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국가방문이라는 말에 주의를 돌릴 필요가 있다. 남측에서는 국빈방문이라는 말을 쓰고, 북측에서는 국가방문이라는 말을 쓰는데, 국제외교에서 통용되는 공식용어는 국빈방문이 아니라 국가방문(state visit)이다. 국가수반이 국가방문보다 한 급 낮은 외교의전으로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 것을 공식방문(official visit)이라 하고, 외교의전을 생략하고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 것을 실무방문(working visit)이라 한다. 국가방문은 국가수반이 수행하는 최고의 외교활동이므로, 아무 때나 흔하게 있는 일이 아니며, 특별한 시기에, 중대한 의제를 논의할 필요가 있을 때 성사되는 특례적인 국가외교활동이다. 

조선은 중국내전에서 승리한 혁명세력이 새로운 나라를 수립한 1949년 10월 1일로부터 닷새 뒤에 신생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맺었는데, 올해까지 장장 70년 동안 조선의 최고지도자들과 중국의 최고지도자들은 평양과 베이징을 여러 차례 상호방문하였다. 올해 2019년 10월 6일은 조중국교수립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70년을 헤아리는 조중친선력사에서 이제껏 유일한 국가방문은 1982년 9월 16일 김일성 주석의 중국국가방문밖에 없다. 그날 김일성 주석이 특별렬차편으로 베이징역에 당도하였을 때,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인 덩샤오핑과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인 후야오방을 비롯한 중국의 최고지도부가 역두에 나가 김일성 주석을 정중히 영접하였다. 이처럼 파격적인 출영은 중국의 외교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중국 최고지도부의 파격적인 출영은 조중친선관계가 어떤 것인지 잘 말해준다. 

70년의 연륜을 아로새겨온 조중친선력사를 살펴보면, 조선의 최고지도자들과 중국의 최고지도자들의 상호방문은 형식상으로 공식방문 또는 비공식방문으로 구분되었지만, 내용적으로는 그렇게 구분할 필요가 없는 친선방문(friendly visit)이었다. 공식친선방문도 있었고, 비공식친선방문도 있었다. 이를테면, 시진핑 주석이 이번에 조선을 국가방문하기 이전에 장쩌민 당시 주석은 1990년 3월 14일부터 16일까지, 그리고 2001년 9월 3일부터 5일까지 조선을 두 차례 공식친선방문하였고, 장쩌민 주석의 뒤를 이은 후진타오 당시 주석은 2005년 10월 28일부터 30일까지 조선을 공식친선방문하였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면, 시진핑 주석은 중국의 역대 최고지도자들 가운데 사상 처음으로 조선을 국가방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은 70년 조중친선력사에서 처음으로 국가방문한 시진핑 주석을 최상의 외교의전으로 맞이하였다. 이 글에서 나는 더 이상 적확한 용어를 찾지 못해, 최상의 외교의전이라는 통상적인 용어를 썼지만, 그것은 모든 측면에서 관례적인 국가외교활동을 뛰어넘은 초외교적 사변이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이번에 평양에서 상봉한 것은 관례적인 국가외교활동이 아니었다. 명백하게도, 그것은 사회주의공동리념에 따라 사회주의공동위업을 수행하며 사회주의공동번영을 추구하는 동지적 상봉이었다.       

국제외교관례에 따른 일반적인 국가방문일정을 살펴보면, 국가수반이 출영하여 환영의식을 진행하는 가운데 21발의 예포가 발사되고, 양국 국가가 주악되고, 명예위병대(honour guard) 사열이 진행되고, 국가지도성원들을 국빈에게 소개하고, 국빈숙소로 이동하고, 정상회담을 진행하고, 외교선물을 교환하고, 국가연회를 진행하고, 입법기관을 방문하고, 국립묘지를 방문하고, 문화예술공연에 참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남북관계는 국가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분단국가 내부의 특수관계이므로, 남측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면 양측 기를 게양하지 않고, 양측 애국가를 주악하지 않는다. 

이번에 시진핑 주석의 조선방문일정에는 위와 같은 통상적인 국가방문일정에서 찾아볼 수 없는 두 가지 특례적인 일정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금수산태양궁전 광장에서 성대한 환영식을 진행한 것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 앞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리설주 여사와 펑리위안 여사를 각각 대동하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성원들과 함께 뜻깊은 기념촬영을 한 것이다. <사진 1>


▲ <사진 1> 위쪽 사진은 2019년 6월 2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리설주 여사, 펑리위안 여사를 각각 대동하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성원들과 함께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본부 청사 앞에서 뜻깊은 기념촬영을 하는 사진이다. 조선과 중국의 건국 이래 이런 기념촬영은 처음 있는 일이다. 조선을 이끄는 혁명활동의 구심점에서 진행된 그날의 특례적인 기념촬영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70년 조중친선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심화, 발전시키는 동지적 우의와 신뢰를 내외에 과시한 것이다. 아래쪽 사진은 1982년 9월 16일 김일성 주석이 특별렬차편으로 중국을 국가방문하였을 때,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인 덩샤오핑과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인 후야오방을 비롯한 중국의 최고지도부가 역두에 나가 정중히 영접하는 장면이다. 김일성 주석이 덩샤오핑 주석과 후야오방 위원장의 손을 잡고 걸어나오는 모습은 조중친선관계가 어떤 것인지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위와 같은 특례적인 일정을 시진핑 주석의 국가방문일정에 포함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시진핑 주석의 국가방문일정에 특례적인 일정을 포함시킨 의도는 무엇인가?  

금수산태양궁전은 조선에서 ‘주체의 최고 성지’로 모시는 곳이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본부는 조선을 이끄는 혁명활동의 구심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 두 가지 특례적인 일정이 왜 시진핑 주석의 국가방문일정에 포함되었는지 자명해진다. ‘주체의 최고 성지’에서 진행된 특례적인 환영식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은 일찍이 두 나라 선대 최고지도자들이 마련한 조중친선관계를 변함없이 계승하는 동지적 의리를 내외에 과시한 것이다. 또한 조선을 이끄는 혁명활동의 구심점에서 진행된 특례적인 기념촬영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70년 조중친선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심화, 발전시키려는 동지적 우의와 신뢰를 내외에 과시한 것이다.  

조선을 방문하는 다른 나라 국가수반들은 무개차도심행차(motorcade)와 연도군중환영이라는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번에 조선을 국가방문한 시진핑 주석도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함께 무개차를 타고 평양 시가지를 지나면서 열렬한 군중환영을 받았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번에 공항출영에는 1만명 군중이 참가하였고, 연도환영에는 25만명 군중이 참가하였다고 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은 두 나라 국기와 꽃술을 흔드는 25만 환영인파가 연도에 늘어서서 열렬히 환호하는 가운데 무개차를 타고 평양 시가지를 행차하였다. 그런 희한한 군중환영은 전 세계에서 오직 조선에서만 볼 수 있다. 수 십 만명이 참가하는 엄청난 연도군중환영은, 사회과학적 용어를 빌리면, 사회적 통합이 고도화된 사회주의나라에서, 그리고 조선의 표현을 빌리면 일심단결을 이룩한 사회주의나라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매우 오래 전에 중국에서도 다른 나라 국가수반을 영접할 때 무개차도심행차와 연도군중환영을 진행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안전문제, 군중참가문제, 도심교통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대규모 군중환영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기록에 의하면, 1958년 11월 22일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 수상은 30만 환영인파가 연도에 늘어서서 열렬히 환호하는 가운데 무개차를 타고 베이징 중심부를 행차하였다고 한다. 


2. 중재자를 앞세운 트럼프의 특별대책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9년 1월 8일 베이징에서 진행된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주석에게 “편리한 시기에” 조선을 공식방문해달라고 초청하였고, 시진핑 주석은 “초청을 쾌히 수락하고 그에 대한 계획을 통보하였다”고 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초청과 시진핑 주석의 수락은 조중국교수립 70주년을 맞은 올해 2019년 안에 시진핑 주석의 조선방문이 성사될 것이라는 확실한 기대를 안겨주었다.  

올해 초 김정은 국무위원장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그 초청을 수락한 시진핑 주석은 언제 방문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형식으로 방문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였다. 외교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동아일보> 2019년 6월 18일 보도에 따르면, 시진핑 주석의 조선방문은 중국의 요청에 따라 성사되었다고 한다. 시진핑 주석은 2019년 6월 20일부터 1박2일 동안 조선을 국가방문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시진핑 주석은 자신이 결정한 방문시점과 방문형식을 언제쯤 조선에 통보하였을까?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인민일보> 2019년 6월 19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에서는 시진핑 주석의 방문을 앞두고 지난 6월 초부터 평양에 있는 조중우의탑을 개보수하고, 그 주변환경을 정리하기 시작했으며, 조중우의탑 부근에 있는 주조중국대사관 주변환경도 정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정황을 살펴보면, 시진핑 주석은 자신이 결정한 방문시점과 방문형식을 지난 5월 말에 조선에 통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시진핑 주석은 조선방문날짜를 하필이면 왜 6월 20일로 정했을까? 시진핑 주석의 조선국가방문을 수행한 쑹타오 중국공산당 대외련락부장의 발언에서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쑹타오 부장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인민일보> 2019년 6월 22일부 기사에서 시진핑 주석의 조선국가방문에 대해 언급하면서 “시기가 특수하고, 의의는 중대하며, 영향은 깊고도 크다”고 했다. 시기가 특수하다는 말은 시진핑 주석이 특별한 시기에 조선을 국가방문하였다는 뜻이다. 

쑹타오 부장이 언급한 특별한 시기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심층정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시진핑 주석이 오는 6월 28일부터 1박2일 동안 일본 오사까에서 진행될 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기로 한 회담일정을 앞두고 조선에 가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먼저 만난 것이야말로 특별한 시기에 조선을 방문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고 생각하겠지만, 그의 조선방문에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중요하고, 복잡다단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한국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에게 오는 6월 28일부터 1박2일 동안 오사까에서 진행되는 주요 20개국 정상회의가 끝나는 길로 한국을 방문해달라고 요청하였다고 한다. 이런 정황은 올해 초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초청을 수락한 시진핑 주석이 평양과 서울을 동시방문하던가 아니면 어느 한 쪽을 선택하여 방문하던가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시진핑 주석은 한국방문요청을 사절하고 조선방문을 선택하였다. 2019년 6월 7일 청와대 관계자는 시진핑 주석이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때 한국을 방문하지 않을 것이라고 취재기자에게 말했다.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시점에 맞춰 시진핑 주석을 한국에 초청하려던 문재인 대통령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다시 말하면, 2019년 5월 말 시진핑 주석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자신의 조선방문날짜를 통보하였고,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한국방문요청을 사절한다고 통보하였던 것이다.  

여기까지 서술된 사실만 보면, 시진핑 주석은 한중관계보다 조중관계를 더 중시하기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의 한국방문요청을 사절하고 조선을 국가방문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선택은 누구나 다 알만한 것이므로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시진핑 주석이 한국방문요청을 사절하고 조선국가방문을 선택한 것에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깊고 중대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19년 4월 11일 백악관에서 한미정상회담을 시작하기 직전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취재진 앞에서 공동기자회견을 진행하는 장면이다. 이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결정한 특별대책을 살짝 언급하는 실언을 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의 특별대책은 중재자로 나선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 오사까에서 진행될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전에 남북정상회담을 먼저 성사시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직후에 판문점에서 개최하고 한반도 종전선언을 채택하자고 제의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특별대책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의 전략전술적 협동으로 물거품으로 되었다.     

이야기는 2019년 4월 11일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진행한 정상회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4월 11일은 서울에서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식이 진행된 날이었다. 2018년부터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에 공을 들여온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4월 11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식에 꼭 참석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알 턱이 없는 트럼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2019년 4월 11일 백악관에서 만나자고 통보하였다. 갑작스러운 초청통보를 받은 문재인 대통령은 꼭 참석하고 싶었던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는 것을 포기하고 워싱턴으로 급히 날아갔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과 마주앉아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것은 2019년 2월 28일 윁남 하노이에서 진행된 조미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좀처럼 풀리지 않고 장기화되는 교착상태를 넘어서기 위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수립한 특별대책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날 백악관에서 한미정상회담을 진행한 두 정상은 공동성명도 내놓지 않고 헤어졌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를 두고 문재인 반대파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빈손외교’로 망신을 자초했다느니 뭐니 하며 빈정거렸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외부에 공개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가 토의되었기 때문에 공동성명을 내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나 중요한 문제를 토의하였기에 공동성명도 내지 않은 것일까? 

이 흥미로운 질문에 대한 해답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속에 들어있었다. 그는 2019년 4월 11일 백악관에서 한미정상회담에 들어가기 직전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진행한 공동기자회견에서 취재기자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받고 얼떨결에 특별대책을 살짝 공개하는 실언을 했다.   

취재기자 - “남북미회담도 계획에 있는가?”
트럼프 - “그것 역시 열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대체로 김정은 위원장에게 달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할 것이다. 문 대통령은 훌륭한 일을 해왔다. 나는 문 대통령을 훌륭한 협력자라고 생각한다.”

위의 인용문을 읽어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과 진행한 정상회담에서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추진하려는 특별대책을 토의하기도 전에 공동기자회견에서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받고 얼떨결에 그 특별대책에 대해 살짝 언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정황은 그날 한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특별대책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설명하고, 그에 관해 토의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흥미로운 특별대책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날 한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특별대책을 설명하였을 뿐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이 중재자로 앞에 나서서 특별대책을 추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중재자로 앞에 나서서 특별대책을 추진해달라는 말은,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제의하기 위해 먼저 남북정상회담부터 진행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백악관에서 한미정상회담을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간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4월 15일 오후 청와대에서 진행된 수석보좌관회의에서 4월 11일 한미정상회담에 대해 언급하면서 남북정상회담과 남북미 3자 정상회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과 기대를 표명했다. 이제 남북정상회담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추진할 시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결단할 경우, 남북미 3자 정상회담도 가능하다는 뜻을 밝혔다.” 

위에 인용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과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을 종합하면, 조미핵협상 교착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수립한 특별대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중재자로 나선 문재인 대통령이 오사까에서 진행될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전에 남북정상회담을 먼저 성사시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직후에 판문점에서 개최하고, 한반도 종전선언을 채택하자고 제의하려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만약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 제의를 수락하면, 문재인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에게 남북미가 판문점에서 3자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종전선언을 채택하기로 합의하였으니 중국도 참가해달라고 요청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만약 트럼프 대통령의 특별대책이 실행되는 경우, 주요 20개국 정상회담이 끝난 직후 트럼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을 판문점에서 만나 4자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그 자리에서 한반도 종전선언을 채택하여 조미핵협상 교착국면을 돌파해보겠다는 속셈이었다. 이런 속셈을 실행하는 데서 무엇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 문재인 대통령은 오사까에서 열릴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이전에 어떻게 해서든지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고 무던히 애썼던 것이다. 


3. 특별대책은 어떻게 물거품으로 되었는가? 

트럼프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을 중재자로 앞에 내세워 추진하려던 특별대책은 그가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제기하여 회담을 결렬시킨 리비아식 비핵화 방안을 철회하지 않은 채, 조미핵협상 교착상태를 미국에게 유리하게 전환시키려는 간계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제기한, 조선에게 일방적인 핵무장해제를 요구하는 리비아식 비핵화 방안을 철회하고 조선식 비핵화 방안을 논의하겠다는 명백한 의사를 표명해야 조미핵협상을 재개할 수 있다고 언명하였고, 그 시한을 2019년 12월까지로 못박았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리비아식 비핵화 방안을 철회하지 않은 채 조미핵협상을 재개해보려는 간계를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로 추진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말이라면 덮어놓고 따르는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남북정상회담을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이전에 개최할 것을 여러 차례 제안하는 한편, 시진핑 주석에게도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직후 한국을 방문해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그러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은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의 특별대책을 추진하기 위해 그런 제안과 요청을 제기하였음을 간파하였다. <사진 3>


▲ <사진 3> 위쪽 사진은 2019년 6월 20일 금수산영빈관에서 진행된 조중정상회담 장면이다. 이 역사적인 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은 제국주의핵제국의 전횡과 폭력에 맞서 싸우는 반제공동전선을 구축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사회주의공동번영을 조중 두 나라의 공동리익에 맞게 추구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아래쪽 사진은 2019년 6월 21일 금수산영빈관 경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리설주 녀사, 펑리위안 녀사와 함께 산책하면서 토의하는 장면이다. 올해 새로 건설된 풍치수려한 금수산영빈관에서 산책하면서 조선과 중국의 두 정상은 한반도문제, 지역문제, 국제문제에 관한 깊이 있는 토의를 진행하였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거듭되는 남북정상회담 제안에 응답하지 않았고, 시진핑 주석은 2019년 6월 20일부터 1박2일 동안 조선을 국빈방문한다고 발표하여 트럼프 대통령의 특별대책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러 정황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트럼프 대통령의 간계를 무력화시키는 전략전술적 협동을 실행하였음을 말해준다. 

미국에 맞서는 조선과 중국의 전략전술적 협동은 원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시진핑 주석에게 제의한 것이다. 2018년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시진핑 주석과 정상회담을 진행할 때마다 조선과 중국의 전략전술적 협동에 대해 언급하였었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8년 3월 2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주석과 정상회담을 하면서 “습근평 동지를 비롯한 중국 동지들과 자주 만나 우의를 더욱 두터이하고 전략적 의사소통, 전략전술적 협동을 강화하여 조중 두 나라의 단결과 협력을 굳건히 해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고 한다. 또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8년 5월 7일 중국 다롄에서 시진핑 주석과 단독회담을 하면서 “조중 사이의 전술적 협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치밀하게 강화해나가기 위한 방도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말씀하시였다”고 한다. 

시진핑 주석은 조선과 중국이 전략전술적으로 협동하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제의를 적극 찬동하였다. 그리하여 2018년 6월 20일 베이징 낚시터국빈관에서 진행된 단독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은 “새로운 정세 하에서 두 당, 두 나라 사이의 전략전술적 협동을 더욱 강화해나가기 위한 문제들”을 토의하였던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을 중재자로 앞에 내세워 추진하려던 트럼프 대통령의 특별대책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의 전략전술적 협동으로 무력화되고 말았다.    


4. 금수산영빈관에서 이루어진 역사적인 합의
   
2019년 6월 20일 금수산영빈관에서 진행된 조중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은 중대한 의제들을 토의하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것은 외부에 공개하기 힘든 내용이므로, 공동성명이 발표되지 않았다. 공동성명은 발표되지 않았지만, 이번 조중정상회담에 관한 조선의 언론보도를 종합, 분석하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어떤 의제를 토의하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는지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1)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은 2019년 6월 20일 금수산영빈관에서 진행된 정상회담에서 “조선반도 정세를 비롯한 중대한 국제 및 지역문제들에 대한 폭넓은 의견교환을 진행하시고, 지금과 같이 국제 및 지역정세에서 심각하고 복잡한 변화가 일어나는 환경 속에서 조중 두 당,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깊이 있게 더욱 발전시키는 것은 두 나라의 공동의 리익에 부합되며 지역의 평화와 안정, 발전에 유리하다고 평가하시였다”고 한다. 

또한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2019년 6월 2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은 금수산영빈관에서 산책과 오찬을 함께 하면서 “각기 자기 나라의 주요대내외정책적 문제들에 대하여 소개하시고 서로의 관심사로 되는 국내 및 국제문제들에 대한 건설적인 의견을 교환하시면서 깊이 있는 담화를 하시였”고 “조중친선관계에서 보다 큰 만족감을 가질 수 있도록 협동을 강화해나가기 위한 일련의 계획들과 조선반도 정세를 긍정적으로 추동해나가기 위한 토의를 계속하시였다”고 한다. 

위의 두 인용문은 이번 조중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한반도정세, 지역정세, 국제정세를 폭넓게 토의하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은 한반도, 동북아시아지역, 국제사회에 제기된 여러 문제들을 조중 두 나라의 공동리익에 맞게 해결하기 위해 전략전술적으로 협동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번 조중정상회담에서 의견의 일치를 본 한반도문제라는 것은 교착상태에 빠진 조미핵협상을 진전시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실현하는 중대현안을 뜻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번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제기하여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을 결렬시키고 조미핵협상을 교착상태에 빠뜨린, 조선에 대한 일방적인 핵폐기 요구, 곧 리비아식 비핵화 방안의 부당성을 시진핑 주석에게 설명하였고, 시진핑 주석은 그 설명에 대해 이해와 공감을 표시하였던 것이다. 또한 두 정상은 트럼프 대통령이 리비아식 비핵화 방안을 철회하는 것으로 조미핵협상을 재개하여 조선식 비핵화 방안을 논의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현실적인 해결방도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던 것이다. 

위의 서술은 근거 없는 추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신화통신> 2019년 6월 21일 보도에 따르면, 금수산영빈관에서 진행된 조중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주석은 “국제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중국은...조선반도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여 조선반도의 영구적 안정을 실현하려는 (조선의) 모든 노력을 확고히 지지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시진핑 주석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조선식 비핵화 방안을 확고히 지지하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이번 조중정상회담에서 의견의 일치를 본 지역문제라는 것은 미국과 일본이 ‘안보동맹’이라는 허울 아래 무력을 대폭 증강하여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고 있는 문제를 뜻한다. 이와 관련하여 시진핑 주석은 미국과 일본의 도발로 위험수위에 이른 대만문제와 댜오위다오문제에 대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설명하였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그에 대해 이해와 공감을 표시하였던 것이다. 두 정상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미일동맹의 무력증강과 도발책동을 저지, 파탄시키기 위해 전략전술적으로 협동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또한 이번 조중정상회담에서 의견의 일치를 본 국제문제라는 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산 수출품목들에 대한 고율관세를 부과하고, 중국의 과학기술개발을 억제하고 있는 심각한 사태를 뜻한다. 시진핑 주석은 교역부문과 과학기술부문에서 악화되고 있는 중미갈등에 대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설명하였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그에 대해 이해와 공감을 표시하였던 것이다. 두 정상은 중국경제와 세계경제를 위협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고율관세부과공세와 과학기술개발억제를 저지, 파탄시키기 위해 전략전술적으로 협동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던 것이다. 

또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은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과 베네수엘라에게 무력침공위협을 가하고, 꾸바를 압박하여 국제정세를 불안과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심각한 국제정세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하였다. 두 정상은 사회주의국가들과 반미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고립압살책동과 무력침공위협을 저지, 파탄시키기 위해 전략전술적으로 협동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던 것이다.   

이번 조중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한반도문제, 지역문제, 국제문제를 조중 두 나라의 공동리익에 맞게 해결하기 위해 전략전술적으로 협동하기로 합의한 것은 조선과 중국이 한반도, 동북아시아, 국제사회에서 자행되는 제국주의핵제국의 전횡과 폭력에 맞서 싸우는 반제공동전선을 구축하였음을 의미한다. <사진 4> 

▲ <사진 4> 무지와 오해와 편견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진실을 드러내는 데서 논리적 해설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때가 있다. 위의 사진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 뜻깊은 장면은 2019년 6월 2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양을 국가방문 중인 시진핑 주석과 함께 조중우의탑을 방문한 장면인데, 시진핑 주석이 방명록에 글을 남기고 있는 모습이다. 이 사진에 배경으로 나온 커다란 전쟁화는 6.25전쟁 중에 조선인민군과 조선인민들이 중국인민지원군과 힘을 합쳐 미국군과 격전을 벌이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조선에서 말하는 "피로써 맺어진 조중 두 나라 인민들 사이의 불패의 친선단결"이라는 말을 그 그림을 보면서 실감할 수 있다. 금수산영빈관에서 진행된 조중정상회담은 지난날 피흘려 함께 싸운 반제공동전선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여 더 높은 차원에서, 변화된 정세에 맞춰 21세기 조중반제공동전선을 구축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되었다.     

조선과 중국에서는 두 나라의 반제공동전선을 “피로써 맺어진 친선단결”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조선과 중국이 두 차례의 반제전쟁과 한 차례의 혁명전쟁의 불길 속에서 함께 싸우며 전우관계를 맺었다는 뜻이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2019년 6월 20일 저녁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시진핑 주석을 환영하는 국가연회에서 연설하면서 “일찌기 조중 두 나라 혁명가들과 인민들이 공동의 사회주의리념을 실현하기 위한 성스러운 투쟁의 불길 속에서 서로의 운명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참다운 동지적 우의와 단결, 지지협조의 고귀한 전통을 마련한 데 대하여 언급하시였다”고 한다. 시진핑 주석은 2019년 6월 19일 <로동신문>에 발표한 자신의 글에서 “오랜 기간 중조 두 당의 굳건한 령도 밑에 두 나라 인민들은 외세의 침략을 공동으로 반대하고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서...호상신뢰하고 지지하며 서로 도와주면서 깊고 두터운 우정을 맺었습니다”라고 지적하였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조선과 중국은 일제를 타도하기 위한 항일반제전쟁에서 함께 싸웠고, 1946년 6월부터 1949년 10월까지 지속된 중국혁명전쟁에서도 함께 싸웠으며, 6.25전쟁 중인 1950년 10월 북위 38도선을 넘어 한반도 전체를 무력으로 강점하려던 미국의 북침공격과 핵전쟁도발을 저지하기 위한 항미반제전쟁에서도 함께 싸웠다. 조선에서 말하는 “조중친선의 불변성과 불패성”은 바로 그런 역사를 계승, 발전시키면서 공고화된 것이다.   

2013년 6월 7일 시진핑 주석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써니랜즈에서 진행된 미중정상회담에서 ‘신형 대국관계’를 제기하면서 중국과 미국이 싸우지 말고 상호협력하기를 바랐지만, 중국의 굴기위세에 경계심을 느낀 오바마 대통령은 그 제의를 무시해버렸고, 그 뒤를 이어 백악관에 들어간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이 미국을 위협한다는 흑색선동을 늘어놓으면서 중국에 대한 무역전쟁도발, 중국의 과학기술발전억제, 미일동맹의 무력증강 같은 대결정책을 밀고 나갔다. 그런 혼란과 위험 속에서 중국의 전략적 선택은 중국보다 먼저 미국과 정면대결을 벌이고 있는 조선과 손잡고 반제공동전선을 구축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시진핑 주석은 조선과 중국의 전략전술적 협동을 강화하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제안에 적극 찬동하였고, 반제공동전선을 구축하기로 합의했던 것이다. 제국주의핵제국에 맞서 싸우는 동방의 반제협동전선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의 합의로 구축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은 사회주의공동번영을 위한 상호협력을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하였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2019년 6월 20일 금수산영빈관에서 진행된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은 “호상 자기 나라의 형편과 사회주의건설위업을 전진시키기 위한 두 당, 두 나라 인민들의 투쟁에서 이룩된 성과들에 대하여 통보하시고 그에 전적인 지지와 련대성을 표명하시였다”고 한다. 

조선과 중국이 사회주의공동번영을 추구하기 위해 전략전술적으로 협동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시진핑 주석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진핑 주석은 2019년 6월 19일 <로동신문>에 발표한 지신의 글에서 “이미 합의한 협조대상들을 잘 리행하고 두 나라 민간의 친선적인 래왕을 확대발전시키며 교육, 문화, 체육, 관광, 청년, 지방, 인민생활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교류와 협조를 확대하여 두 나라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두 나라 인민들의 복리를 증진시킴으로써 중조친선이 대를 이어 영원히 전해지도록 할 것입니다”라고 썼다. 

금수산영빈관에서 진행된 조중정상회담에 조선측에서는 김재룡 내각총리가 참석하였고, 중국측에서는 허리펑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주임과 중산 상무부장이 참석하였다. 이것은 이번 조중정상회담을 계기로 조선과 중국이 사회주의공동번영을 추구하기 위해 전략전술적으로 협동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준다. 트럼프 대통령이 감행하는 대조선경제제재와 대중국무역전쟁의 혼란과 위험 속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의 전략전술적 협동은 날로 더욱 강화, 발전될 것이며, 그 협동의 길에서 두 나라는 사회주의공동번영을 이룩할 것이다.  

2019/06/18

32년 지났어도 이루지 못한 민주주의

[한호석의 개벽예감](352)
자주시보 2019년 6월 17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독재정권의 세대교체로 귀결된 민주항쟁
2. 불평등과 불공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3. 고강도 계급독재와 저강도 계급독재
4. 1987년 6월 민주로조가 없었다
5. 진보정당 없이 일어난 민주항쟁
6. 모습을 드러낸 씨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리브시  


1. 독재정권의 세대교체로 귀결된 민주항쟁

항쟁의 열기로 들끓었던 1987년 6월, 그로부터 어언 32년 세월이 지난 2019년 6월 10일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 홍익표는 논평에서 “더불어민주당도 6.10민주항쟁정신을 받들어 민주주의 완성과 한반도 평화의 길을 국민과 함께 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6월항쟁의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강령에서 천명한 정당이 집권당으로 되었고, 32년 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으로 6월민주항쟁을 이끌었던 인권변호사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되었다. 이런 사정을 보면, 지난 32년 동안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생각되지만, 눈에 보이는 겉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진실이 드러난다.   

돌이켜보면, 6월민주항쟁기간에 500만 명에 이르는 시위군중이 총궐기하여 광장과 거리에서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치며 싸웠건만, 그들이 타도하려고 하였던 전두환 독재정권은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선거를 통해 노태우 독재정권으로 간판만 바꿔 달았다. 독재정권의 세대교체가 실현된 것이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야합한 보수대연합에 의해 이른바 ‘문민’이라는 명목으로 변형된 독재정권이 또 다시 출현하였다.  

32년 전, 500만 명에 이르는 시위군중이 항쟁의 광장과 거리에 쏟아져 나와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치며 싸웠건만, 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민주주의는 실현되지 않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서 가장 초보적인 과업들 가운데 하나인 선거제도개혁(직선제 개헌)만 실현되었을 뿐이다. 6월민주항쟁의 집단적 체험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까지 얼마나 멀고 험한 투쟁의 길을 헤쳐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한국의 민중만이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민중들 모두가 그런 이치를 깨달았다. <사진 1> 

▲ <사진 1> 1987년 6월 18일 부산에서 민주항쟁에 참가하여 투쟁하던 청년 한 사람이 전투경찰이 난사한 직격최루탄을 맞고 다리에서 떨어져 숨졌다. 민주주의를 위해 스물여덟의 짧은 생애를 바친 대학생 출신 노동자 이태춘 열사였다. 위의 흑백사진은 1987년 6월 27일 부산에서 거행된 이태춘 열사 장례행진의 한 장면이다. 이 흑백사진 속에는 장래에 대통령이 될 인권변호사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얼굴에 마스크를 쓴 채 열사의 영정을 두 손으로 정중히 받쳐든 노무현 인권변호사와 그의 곁에 있는 문재인 인권변호사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 노무현 인권변호사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민주항쟁의 앞장에 섰고, 문재인 인권변호사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으로 민주항쟁의 앞장에 섰다.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치며 시위군중과 함께 싸웠던 인권변호사 두 사람이 각각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들이 외친 민주주의는 32년이 지나도록 실현되지 않았다.     

이를테면,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20년 동안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민주주의를 짓밟고 부정부패와 폭압만행을 저지른 독재정권들 가운데서 특별히 악독했던 3대 독재정권이 있었다. 1961년부터 1997년까지 간판만 바꾸면서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으로 4대에 걸쳐 지속된 한국의 독재정권들, 그리고 1965년부터 1986년까지 존재하였던 필리핀의 마르코스 독재정권, 그리고 1974년부터 1990년까지 존재하였던 칠레의 피노체트 독재정권이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으로 4대에 걸쳐 지속된 독재정권기에 1979년 10월 부산마산민주항쟁,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 1987년 6월 6월민주항쟁이 일어나 수많은 시위군중이 피를 흘리며 싸웠건만, 독재정권은 그때마다 간판만 바꿔달면서, 무려 36년 동안 독재정권의 세대교체가 계속되었다. 

1998년 2월 25일 김대중이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가 집권하여 4대에 걸친 독재정권의 세대교체는 종식되었지만, 김대중 정권의 출현은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한 보수적 정권교체에 지나지 않았다. 이명박 독재정권과 박근혜 독재정권의 연속적인 출현에서 보듯이 보수적 정권교체는 매우 불안정하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한국에서 진행된 보수적 정권교체가 필리핀과 칠레에서도 똑같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1965년부터 1986년까지 21년 동안 존속하였던 마르코스 독재정권은 1986년 2월 22일부터 25일까지 전개된 2월민주항쟁으로 막을 내리고, 1986년 코라존 아퀴노가 이끄는 민주당계 정당연합체인 통합국가민주기구가 집권하여 보수적 정권교체를 실현하였다. 다른 한편, 칠레에서 1974년부터 1990년까지 16년 동안 존속하였던 피노체트 독재정권은 1990년 빠뜨리씨오 아일윈이 이끄는 기독교민주당의 집권으로 막을 내리고 보수적 정권교체가 실현되었다. 

한국, 필리핀, 칠레에서 일어난 보수적 정권교체는 극우정당의 집권이 우익정당의 집권으로 교체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세계 각국에 존재하는 민주당 계렬의 우익정당들은 당명에 민주라는 두 글자를 얹혀놓고, 민주주의라는 말만 요란하게 늘어놓을 뿐이다. 민주당 계렬의 우익정당들에게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의지도 없고, 민주주의를 실현할 능력도 없다. 그러므로 극우정당의 집권이 우익정당의 집권으로 교체되는 보수적 정권교체로는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없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민주당 계렬의 우익정당들이 집권한 이후에 펼쳐놓은 현실이 이를 충분히 입증한다.  


2. 불평등과 불공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2019년 6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은 서울 용산구 남영동 옛 치안본부 대공분실 앞에서 진행된 6월민주항쟁 32주년 기념식에서 행정안전부장관이 대독한 기념사를 통해 “민주주의를 제도로만 생각하면 이미 민주주의가 이뤄진 것처럼 생각할지 모른다. 민주주의는 제도이기 이전에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더 자주 실천하고, 더 많이 민주주의자가 되어가는 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가 더 커지기 위해서는 불평등을 해소해야 하며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경제에서도 우리는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은 더불어민주당이 집권하여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되었지만, 불평등과 불공정은 아직 청산되지 못하였으므로, 한국 사회를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로 전변시켜 민주주의를 완성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민주주의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되고, 아직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불평등과 불공정도 아직 청산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민주주의가 완성되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부분적으로도 실현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늘 한국 사회에 불평등과 불공정이 만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불평등은 극단적으로 벌어진 빈부격차로 표출되었고, 불공정은 극도로 악화된 대량실업과 부정부패로 표출되었다.  

▲ <사진 2> 위의 사진은 양극화된 한국 사회의 빈부격차를 보여준다. 사진에 보이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초호화 고층아파트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있는 타워 팰리스이고, 사진에 보이는 허물어져 가는 판자집들은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의 극빈층 거주공간이다. 세계경제연단(WEF)이 2015년 9월 7일에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112개국의 사회경제상황을 분석하였더니 한국이 불평등을 해소하는 정책에서도 최악이고 구조적 부패도 최악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오늘 문재인 정부 시기에 불평등과 구조적 부패는 더욱 악화되었다. 32년 전, 500만 명에 이르는 시위군중이 항쟁의 광장과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피흘려 싸웠지만, 오늘 한국에서는 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불평등과 불공정, 빈부격차와 구조적 부패가 더욱 만연되고 있다. 이것이 보수적 정권교체가 가져온 오늘의 참담한 현실이다.     

명백하게도, 불평등과 불공정이 만연된 사회는 민주주의가 전혀 실현되지 못한 비민주적인 사회다. 독재정권은 사라졌으나,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이 만연된 사회를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된 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이 청산될 때,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고, 사회역사적 발전이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아져 대립적 사회계급관계가 폐절될 때,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오늘 한국 사회에 만연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은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된 사회에서 생겨나는 현상이 아니라,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class-dictatorship)의 직접적 산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계급독재는 권력과 재부를 과점한 극소수 사회계급이 절대다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구조적으로 지배, 억압하고 착취, 수탈하는 독재라는 뜻이다.

모든 형태의 독재는 권력과 재부를 독점한 극소수 사회계급에 의해 자행되는 계급독재이므로, ‘개인독재’라는 개념은 성립될 수 없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같은 독재자들은 계급독재의 집행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개별적 독재자들이 퇴출되었다고 해서, 계급독재가 폐절된 것은 결코 아니다. 


3. 고강도 계급독재와 저강도 계급독재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는 다음과 같이 두 종류로 구분된다. 

첫째, 극우정당이 집권하면, 군대와 경찰, 정보기관과 사법기관을 동원하여 진보정당을 해산하고,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농민과 중산층을 억압하는 가장 폭력적이고 극악한 고강도 계급독재를 자행하게 되는데, 이런 고강도 계급독재를 패씨즘(fascism, 파시즘)이라고 부른다.  

둘째, 극우정당이 퇴진하고 민주당 계렬의 우익정당이 집권할 때, 고강도 계급독재는 저강도 계급독재로 이행된다. 민주당 계렬의 우익정당이 집권하더라도 대립적 사회계급관계는 폐절되지 않기 때문에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은 여전히 만연되어 있는데, 그런 사회정치체제를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라고 부른다. 박근혜 독재정권이 퇴진하고, 문재인 우익정권이 등장한 이후에도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이 여전히 만연되어 있고, 더욱이 지난 시기 역대 독재정권들이 탄압의 도구로 사용하던 악법(국가보안법)도 철폐는커녕 개정도 되지 않았다. 이런 고착현상은 오늘 한국 사회가 패씨즘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저강도 계급독재 아래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 3> 

▲ <사진 3> 위의 사진은 2018년 8월 9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가 진행한 제1183차 정기목요집회의 장면이다. 민가협은 1993년부터 서울 종로2가에 있는 탑골공원 앞에서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촉구하는 집회를 매우 목요일마다 진행해왔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민가협은 박근혜 독재정권이 퇴진하고 문재인 우익정권이 들어서자 문재인 대통령이 양심수를 사면석방할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그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박근혜 독재정권이 퇴진하고 문재인 우익정권이 등장한 이후에도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은 여전히 만연되어 있고, 더욱이 지난 시기 역대 독재정권들이 탄압의 도구로 사용하던 국가보안법도 철폐는커녕 개정도 되지 않았다. 이런 고착현상은 오늘 한국 사회가 패씨즘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저강도 계급독재 아래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익정치인들은 저강도 계급독재를 자유민주주의라는 그럴듯한 말로 미화, 분식하지만, 저강도 계급독재 아래서는 계급적 지배의 강도와 계급적 착취의 강도가 이전보다 조금 약해졌을 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이 여전히 만연되어 있다. 전후맥락을 면밀히 따져보면, 대립적 사회계급관계가 계급적 지배와 계급적 착취를 산생시키고, 계급적 지배와 계급적 착취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을 산생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2019년 현재 한국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계급적 지배와 계급적 착취가 자행되는 저강도 계급독재 아래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고강도 계급독재 아래서는 권력과 재부를 과점한 극소수 사회계급을 제외한 절대다수의 사회구성원이 혹독한 불행과 고통을 겪는데 비해, 저강도 계급독재 아래서는 억압강도와 착취강도가 약간 낮아지기 때문에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계급적 지배와 계급적 착취를 여전히 당하면서도 계급독재에 저항하지 않고 때로 순응하게 된다. 자유민주주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저강도 계급독재에 저항하지 않고 불평등과 불공정을 참고 견디게 만든다.  

고강도 계급독재와 저강도 계급독재를 구분할 때, 6월민주항쟁의 한계가 뚜렷이 드러난다. 그 항쟁으로 전두환 독재정권이 물러가고, 노태우 독재정권이 등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6월민주항쟁 이후 고강도 계급독재가 저강도 계급독재로 이행된 것이 아니라, 고강도 계급독재가 여전히 지속되었던 것이다. 왜 이런 최악의 씨나리오가 펼쳐졌던 것일까? 


4. 1987년 6월 민주로조가 없었다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 아래서 계급적 지배와 계급적 착취를 가장 가혹하게 당하는 사회계급은 노동계급(working class)이다. 계급독재 아래서 농민도 억압과 수탈을 당하지만, 농민은 독자적인 사회계급이 아니다. 자기의 생산수단을 전혀 갖지 못한 노동자는 자본가가 소유한 생산수단을 사용하여 사회적으로 생산활동을 벌이지만, 농민은 토지와 농기계, 농기구 같은 자기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개별적으로 생산활동을 벌인다. 자기의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개별적으로 생산활동을 벌이기 때문에 농민은 독자적인 사회계급으로 되지 못한다. 자본주의사회에 존재하는 사회계급은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사회계급, 곧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이고, 나머지 근로대중은 사회계층(social stratum)으로 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계급은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를 폐절시키는 데서 누구보다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진다. 그런 노동계급이 민주로조를 조직하고, 농민과 도시중산층 등 다른 사회계층들과 전략적으로 연대하여 민주항쟁을 주도할 때, 계급독재를 폐절시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위대한 변혁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민주로조를 건설한 노동계급의 조직력량은 민주항쟁을 이끄는 주도력량으로 된다. 

그러나 6월민주항쟁이 일어났던 1987년에 한국에는 민주로조가 없었고, 독재정권에 순응하는 어용로조만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민주로조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대중투쟁에 앞장선 노동계급의 자주적 조직이다. 오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바로 그런 조직이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6월민주항쟁 직후인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일어난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하여 지역별, 업종별로 민주로조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456개 단위로조가 참가하고, 16만 명 조합원이 망라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결성된 때는 1990년 1월 22일이었고, 전노협이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결성된 때는 1995년 11월 11일이었다. 

다른 한편, 한국의 농민들은 6월민주항쟁 직전인 1987년 2월 26일 전국농민협회를 결성하였고, 1989년 3월 1일 전국농민운동연합을 결성했다. 그리고 6월민주항쟁에서 선봉투쟁에 앞장선 대학생들은 6월민주항쟁 직후인 1987년 8월 19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결성했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1986년을 기준으로 한국의 노동계급은 1,400만 명을 넘어섰지만, 그들 대부분은 조직화, 의식화되지 못하였다. 1987년 6월에 존재하였던 단위로조 2,742개는 모두 어용로조들이었다. <사진 4>

▲ <사진 4> 위의 사진은 1987년 8월 4일 기독교백주년기념관 강당에서 진행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제1차 전국회의 현장을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속에 서 있는 세 사람은 6월민주항쟁의 지도부를 구성하였던 문익환, 김대중, 김영삼이다. 2,196명이 참가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야당정치인, 종교인, 사회단체대표가 주도하였고, 전체구성비율에서 노동자는 1.78%, 농민은 7.8%밖에 되지 않았다.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를 폐절시키는 데서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진 노동계급이 민주로조를 아직 조직하지 못한 상황에서 6월민주항쟁이 일어났으므로, 항쟁지도부는 계급독재를 폐절시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전략목표를 제시할 수 없었다. 항쟁지도부에서 발언권이 강한 우익정당(통일민주당)이 자기의 구상대로 항쟁을 이끌어갔다. 민주항쟁의 투쟁력량이 민주변혁의 추진동력으로 전화, 발전되지 못하고 유실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마땅히 민주항쟁의 주도자로 나서야 할 민주로조가 세상에 아직 출현하지 않은 시기에 민주항쟁이 일어나면, 노동계급이 아닌 다른 사회계층들이 연대련합하여 항쟁을 주도하게 된다. 6월민주항쟁은 바로 그렇게 전개되었다. 1987년 5월 27일에 결성되어 6월민주항쟁을 주도하였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계급계층적 구성에서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2,196명이 참가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종교인 683명, 교육자 413명, 사회단체대표 343명, 야당정치인 213명, 농민 171명, 여성 161명, 문화예술인 100명, 언론출판인 43명, 노동자 39명, 빈민 18명, 청년 12명으로 구성되었다. 노동자는 1.78%, 농민은 7.8%밖에 되지 않았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주도한 것은 1987년 4월 21일 김대중과 김영삼을 중추로 하여 창당된 통일민주당과 1985년 3월 29일 민주주의정치활동가들이 결성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었다. 민통련 의장은 문익환, 부의장은 계훈제, 김승훈, 사무총장은 이창복이었다.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를 폐절시키는 데서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진 노동계급이 민주로조를 아직 조직하지 못한 상황에서 6월민주항쟁이 일어났으므로, 항쟁지도부는 계급독재를 폐절시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전략목표를 제시할 수 없었다. 항쟁지도부에서 발언권이 강한 우익정당(통일민주당)이 자기의 구상대로 항쟁을 이끌어갔다. 당시 우익정당이 6월민주항쟁에서 추구한 전략목표는 직선제 개헌이었다. 각계각층 군중 500만 명이 총궐기하였으나, 민주항쟁의 투쟁력량이 민주변혁의 추진동력으로 전화, 발전되지 못하고 유실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5. 진보정당 없이 일어난 민주항쟁

민주로조로 조직화된 노동계급의 투쟁력량은 민주항쟁을 이끌어가지만, 민주로조가 새로운 민주정권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정권을 수립하는 과업은 언제나 정당에 의해 수행된다. 민주로조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투쟁을 이끄는 영도조직이라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힘으로 건설된 진보정당은 정권수립의 직접적 담당자다.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를 폐절시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역사적 과업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업, 곧 독재정권을 퇴출시키고 민주정권을 수립하는 진보적 정권교체의 과업은 민주로조가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로조가 주도적으로 참가한 진보정당이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보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나면, 독재정권은 퇴출되고 민주정권이 수립되는 진보적 정권교체는 실현될 수 없고, 극우정당과 대립하는 우익정당이 민주항쟁을 주도하고 우익정권을 수립하는 보수적 정권교체가 실현된다. 

그런데 32년 전 6월민주항쟁은 극우정당의 집권이 우익정당의 집권으로 교체되는 보수적 정권교체마저 실현하지 못했고, 전두환 독재정권이 노태우 독재정권으로 간판만 바꾸는 독재정권의 세대교체가 진행되었다.   

진보적 정권교체의 직접적 담당자로 되어야 할 진보정당은 6월민주항쟁이 끝난 뒤 3년이 지난 1990년 11월 10일에 민중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되었는데, 1990년 1월 22일에 결성된 전국노동조합협의회는 같은 해 11월 10일에 창당된 민중당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처럼 민주로조와 진보정당이 서로 분리된 비정상적인 정치현실이 펼쳐진 가운데, 1992년 3월 24일에 시행된 제14대 총선에서 민중당은 한 석도 얻지 못해 해산되었다. 민주로조가 참가하지 않은 진보정당은 대중적 지지기반을 든든히 구축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한다.      

민주로조와 자주적 농민조직의 힘으로 건설된 진보정당은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을 청산하는 민주주의강령,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의 부분적 실현을 위한 민주변혁강령을 전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제시하는 한편, 조직화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강력한 힘에 의거하여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게 된다. <사진 5> 

▲ <사진 5> 위의 사진은 2017년 10월 15일 오후 서울시청 광장에서 당원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민중당 출범식 장면이다. 민주로조와 자주적 농민조직의 힘으로 결성된 진보정당은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을 청산하는 민주주의강령을 전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제시하는 한편, 조직화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강력한 힘에 의거하여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게 된다. 낡고 썩은 사회를 뒤집어엎고, 새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민주변혁은 민주주의강령을 가진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당건설사업에서 시작된다. 대중적 지지기반을 강화한 진보정당은 진보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어놓을 것이며, 바로 그 길에서 전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새로운 민주사회를 건설하는 민주변혁을 추진하고, 민주사회의 주인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진보정당의 민주주의강령,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를 부분적으로 실현하는 민주변혁강령이다. 진보정당의 민주주의강령은 그 정당의 전략목표이며 존재근거다. 낡고 썩은 사회를 뒤집어엎고, 새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민주변혁은 민주주의강령을 가진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당건설사업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진보정당을 건설하지 않고, 새로운 민주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말은 공리공담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로조와 자주적 농민조직의 힘으로 건설된 진보정당은 진보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어놓을 것이며, 바로 그 길에서 전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새로운 민주사회를 건설하는 민주변혁을 추진하고, 민주사회의 주인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민주사회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사회역사발전경로는 민주로조 건설과 자주적 대중조직 건설 → 진보정당 건설 → 진보적 정권교체 → 민주변혁 → 새로운 민주사회 건설로 이어지는 것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힘이 진보정당으로 결집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독재정권이다. 그래서 독재정권은 민주로조와 자주적 대중조직들을 악랄하게 탄압하고, 진보정당을 강제로 해산시킨다. 이를테면, 박근혜 독재정권은 2011년 12월 6일에 창당된 통합진보당에게 말도 되지 않는 내란음모죄를 뒤집어 씌웠고, 우익언론매체들은 통합진보당을 ‘종북정당’이라고 집중공격하였고, 그런 광란적 분위기 속에서 헌법재판소는 2014년 12월 19일 통합진보당을 해산하는 판결을 내렸다. 박근혜 독재정권의 폭거로 104,692명의 당원과 5명의 국회의원을 가진 통합진보당은 창당 3년 만에 강제해산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진보정당을 건설하려는 줄기찬 노력은 강제해산으로 막을 수 없었다. 통합진보당의 뒤를 이은 또 다른 진보정당이 2017년 10월 15일에 창당되었으니, 그 정당이 바로 민중당이다.  

민중당은 자기의 기본정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건설”하고, “민중 자신의 힘으로 노동존중, 인간존중의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진보집권”을 전략목표로 제기하였고, “민족의 자주권을 확립”하고, “민중이 경제의 주인이 되는 평등사회를 실현”하고, “평화지향의 중립적 통일국가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민중당의 강령(기본정책)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명명백백한 민주주의강령이다. 그것은 낡고 썩은 사회를 뒤집어엎고, 새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민주변혁강령이며, 사회과학용어로 표현하면,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를 폐절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민주변혁강령이다. 32년 전 6월민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그런 민주주의강령을 가진 진보정당이 있었더라면 민주항쟁은 민주변혁으로 전화, 발전되었을 것이다.  


6. 모습을 드러낸 씨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리브시

1987년 6월 전두환 독재정권의 고문살해만행과 장기집권음모에 분노한 각계각층 군중이 서울과 부산을 비롯한 대도시들에서 광장과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위군중은 화염병을 던져 각지의 파출소들과 경찰차량들을 불태웠다. 항쟁의 폭발력은 무서운 속도로 증폭되었고, 최루탄을 난사하는 전투경찰의 진압으로는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날로 불어나는 시위군중이 총공세를 벌여 경찰저지선을 돌파하는 날, 전두환이 있는 청와대까지 들이닥칠 판이었다. 상황이 자기에게 불리해지는 것을 직감한 전두환은 최후의 대책을 꺼내들었다. 1987년 6월 19일 오전 10시 전두환은 국방장관, 고위급 군지휘관들, 안기부장을 청와대로 불러 비상회의를 진행하면서, 최후의 대책을 논의했다. 그들이 논의한 최후의 대책은 군대를 출동시켜 6월민주항쟁을 짓밟으려는 유혈진압대책이었다. 1980년 5월 군대를 출동시켜 광주민주항쟁을 짓밟고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살인악당이 6월민주항쟁을 총칼로 짓밟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위급한 정황이 조성되었다. 

<뉴욕타임스> 1987년 7월 6일 보도에 따르면, 한국 경찰이 시위군중을 진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1987년 6월 19일 밤, 전두환은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출동시켜 서울과 다른 대도시들의 외곽을 포위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한국군 부대들이 출동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전두환은 갑자기 출동명령을 취소하였다고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워싱턴포스트> 1987년 7월 5일 보도기사에 당시 긴박했던 상황이 담겨있다. 보도에 따르면, 1987년 6월 20일 아침 오스트레일리아를 향해 태평양 상공을 날아가던 전용기 회의실에서 미국 국무장관 조지 슐츠와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개스턴 씨거가 당시 한국에서 벌어진 급박한 상황을 놓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고 한다. 씨거는 몇 시간 전에 주한미국대사관이 보내온 상황보고를 받고 밤잠을 설친 채, 아침 일찍 슐츠 국무장관과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그 두 사람을 긴장시킨 것은 전두환이 6월민주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한국군 출동을 검토하고 있다는 긴급보고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전두환에게 자제하라는 친서를 이미 보냈지만, 상황이 더욱 악화되면 전두환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는 아무도 몰랐다. 씨거는 슐츠에게 자기가 오스트레일리아 방문을 수행하지 않고 서울로 날아가 전두환에게 미국의 의사를 직접 전달하는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슐츠도 그 의견에 찬성하였다.       

국무장관 슐츠의 지시에 따라 미국 국무부는 1987년 6월 22일에 발표한 공식논평을 통해 한국 군부가 6월민주항쟁에 개입하지 말라고 직접적으로 경고했고, 슐츠와 헤어진 씨거는 6월 23일 허둥지둥 서울에 나타났다. 씨거는 6월 24일 오후 청와대에서 전두환을 만나 90분 동안 회담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시 전두환과 미국 사이에서 벌어진 긴박한 움직임을 시간별로 파악하는 것이다. 전두환이 청와대에서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한 때는 6월 19일 오전 10시였고, 그가 위수령을 발동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한국군에게 시위진압출동명령을 내린 때는 6월 19일 밤이었고, 씨거가 청와대에서 전두환을 만난 때는 6월 24일 오후였다. 그런데 6월 20일 새벽 전두환은 자기가 몇 시간 전에 내렸던 위수령발동지시와 시위진압출동명령을 갑자기 취소하였다. 전두환의 갑작스러운 취소와 씨거의 청와대 방문 사이에는 무려 4일이라는 시차가 있다. 이런 정황은 전두환이 씨거를 통해 미국의 강한 압박을 받고 취소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어떤 다른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취소결정을 내렸음을 말해준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워싱턴포스트> 1987년 7월 5일 보도에 따르면, 씨거가 서울에 도착한 6월 22일 이전에 “워싱턴은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이 개입을 거부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미국 국무부는 그런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에게 개입하지 말라고 직접 요구하는 이례적인 성명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이 보도기사는 전두환으로부터 시위진압출동명령을 받은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항명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자발적인 항명이 아니었다. 전두환이 6월 19일 오전 10시에 청와대에서 소집한 비상대책회의에서 위수령 발동과 한국군의 시위집압출동을 전두환과 함께 논의한 한국군 고위지휘관이 불과 몇 시간 뒤에 마음이 바뀌어 전두환의 명령을 자발적으로 거부하고 항명하였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다. 항명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외압에 의한 것이었다.  

6월민주항쟁에 관한 역사기록에서 오랜 기간 은폐되었던 항명사태의 진상은 1987년부터 3년 동안 주미한국대사관에서 정무참사관으로 근무한 정태익이 <조선일보> 2013년 12월 9일부에 실은 기사에서 드러났다. 정태익의 서술에 따르면, 전두환이 안보위기를 빌미로 장기집권을 하기 위해 친위군사정변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가 미국으로 전해졌을 때, 미국은 “주한미군에 배치된 각급 장교들을 통하여 한국에서 군사쿠데타는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신속히 한국군의 각급 장교들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이것은 주한미국군사령관이 한국군 지휘체계를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런 내막을 살펴보면, 1987년 6월 20일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이 전두환의 시위진압출동명령을 거부한 항명사태는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이었던 윌리엄 리브시의 긴급명령에 따른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리브시는 전두환의 시위진압출동을 차단한 날로부터 닷새가 지난 1987년 6월 25일 전역하여 미국으로 돌아갔다. <사진 6>   

▲ <사진 6> 이 사진은 1987년 6월 24일 오후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개스턴 씨거가 청와대에서 전두환을 만나 악수하는 장면이다. 전두환-씨거 회담은 90분 동안 진행되었다. 회담에는 당시 외무차관이었던 최광수와 당시 주한미국대사이었던 제임스 릴리가 배석하였다. 전두환-씨거 회담이 있었던 때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6월 24일 자정, 전두환은 야당지도자 김대중의 가택연금을 해제하면서, 그에 대한 사면복권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유혈진압을 감행하려고 광분하던 전두환이 갑자기 유화적인 태도로 돌변한 것은 미국이 씨거를 청와대에 보내 전두환을 강하게 압박하여 장기집권음모를 포기시켰음을 말해준다. 그보다 앞서 6월 19일 오전 10시 전두환은 청와대에서 진행된 비상대책회의에서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출동시켜 6월민주항쟁을 진압하는 문제를 논의했고, 그날 밤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출동시켜 6월민주항쟁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은 전두환의 시위진압출동명령을 거부하는 항명사태를 일으켰고, 전두환은 하는 수 없이 시위진압출동명령을 취소하였다. 이런 돌발적인 항명사태는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이었던 윌리엄 리브시의 긴급명령에 따른 행동이었다.     

그렇다면 6월 24일 오후 청와대에서 진행된 전두환-씨거 회담에서는 무슨 대화가 오갔을까? 전두환-씨거 회담이 있었던 때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6월 24일 자정, 전두환은 김대중의 가택연금을 해제하면서, 그에 대한 사면복권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유혈진압을 감행하려고 광분하던 전두환이 갑자기 유화적인 태도로 돌변한 것이다. 이런 태도돌변은 미국이 씨거를 청와대에 보내 전두환을 강하게 압박하여 장기집권음모를 포기시켰음을 말해준다. 1987년 6월 29일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였던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을 통해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하고, 김대중의 사면복권 및 시국관련 구속자들의 석방을 공약한 특별선언을 발표한 것은 6월민주항쟁에 총궐기한 각계각층 군중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대민타협이 아니라 미국의 강한 압박에 무릎을 꿇은 대미굴종이었다. 

미국이 전두환의 장기집권음모를 포기시키고 김대중을 사면복권하도록 비상조치를 발동하여 전두환의 유혈진압기도를 극적으로 차단한 까닭은 항쟁에 나선 시위군중의 안전을 지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6월민주항쟁이 위수령과 군대출동으로 진압되기는커녕 더욱 강하게 폭발하면서 한국 군부가 친전두환파와 반전두환파로 분렬되어 내전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내전위험을 직감한 미국은 전두환의 장기집권음모를 포기시키고 김대중을 사면복권하도록 강하게 압박하는 비상조치를 발동하여 6월민주항쟁의 불꽃을 꺼버렸던 것이다. 각계각층 군중 500만 명이 총궐기하였으나, 민주항쟁의 투쟁력량이 민주변혁의 추진동력으로 전화, 발전되지 못하고 유실된 근본원인은 미국이 한국의 정치와 군사를 틀어쥐고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하는 대미예속체제에 있었다. 

1986년 2월 22일 필리핀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독재자 마르코스가 필리핀군을 출동시켜 유혈진압을 감행하려고 하자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은 필립 하빕을 자신의 특사로 마닐라에 급파하여 마르코스에게 당장 하야하고 미국으로 망명하라고 압박했고, 마르코스는 그 압박에 굴종하였다. 미국의 막후공작으로 필리핀 2월민주항쟁의 불꽃은 사흘 만에 꺼지고 말았다. 

영원히 잊지 못할 민주항쟁은 미국의 장기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권을 갖지 못하면 민주주의도 실현할 수 없고, 통일국가도 건설할 수 없다는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다.   

2019/06/11

평택에서 지하전쟁지휘소가 완공되는 날

[한호석의 개벽예감](351)
자주시보 2019년 06월 10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최첨단 군사전략시설이 매물로 나온 사연
2. 쓰지 않는 ‘탱고’ 관리비 떠안게 된 한국
3. 연합사령부를 미국군기지에 두려는 속셈
4. 세상에는 허수아비 사령관도 있다
5. 3자 정상회담이 성사될 수 없는 이유


1. 최첨단 군사전략시설이 매물로 나온 사연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인 2010년 3월 21일 <코리아타임스>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2007년부터 주한미국군사령부는 한국 국방부에게 ‘탱고’를 사거나, 빌려 쓰라고 요구해왔는데, 2010년 3월 한미합동전쟁연습 중에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이었던 월터 샤프가 한국군 당국자들에게 ‘탱고’를 사라고 또 다시 요구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탱고(TANGO)는 유네스코가 2009년에 세계무형문화재로 지정한 라틴아메리카의 사교춤이 아니라, 전구공중해상지상작전(Theater Air Naval Ground Operations)의 영어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그러므로 탱고지휘소(Command Post TANGO)라는 말은 육해공군작전을 지휘하는 전쟁지휘소를 뜻한다.  

미국은 1970년대에 경기도 성남시 인근에 있는 해발고 618m의 청계산에 굴을 뚫어 지하전쟁지휘소를 만들었다. 총건설비는 50억 달러다. 전술핵공격에 견딜 수 있게 건설되었다는 이 지하전쟁지휘소를 탱고지휘소라고 부른다. 청계산 지하전쟁지휘소는 총면적이 33,000㎡로 너무 넓어서, 근무자들이 전동차를 타고 다닌다고 한다. 청계산 지하전쟁지휘소에는 군사지휘관들이 대형 화면을 통해 화상회의를 하며 육해공군작전을 통제하는, ‘전쟁실(war room)’이라고 부르는 작전통제상황실이 있는데, 거기에 ‘스킾(SCIP: Security Cooperation Information Portal)’이라고 부르는 최첨단 정보통신시설이 설치되었다. 이 정보통신시설은 정찰위성, U-2 고고도유인정찰기, 글로벌 호크 고고도무인정찰기가 보내오는 영상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영상정보망, 미국 국방부와 인도양-태평양사령부에 직보하고 그들로부터 명령을 받는 연락망, 한국군 합참본부와 주일미국군사령부에 각각 연결된 통신망, 중앙정보국과 국방정보국에 각각 연결된 정보망을 통합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국은 그런 군사전략시설을 팔거나 빌려주겠다고 매물로 내놓은 것이다. 물론 최첨단 정보통신장치들은 떼어내고, 팔거나 빌려주겠다는 뜻인데, 어째든 이것은 주한미국군이 청계산 지하전쟁지휘소를 더 이상 사용할 필요가 없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전쟁지휘소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니, 이건 또 무슨 이상한 소린가?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2015년 8월 17일 미국 연방의회 상원의원 탐 카튼이 경기도 성남시 부근에 있는 청계산 지하전쟁지휘소를 시찰하는 장면이다. 미국이 1970년대에 청계산에 굴을 뚫어 건설한 이 최첨단 군사전략시설은 북침전쟁지휘거점들 가운데 하나다. 전술핵공격에 견딜 수 있게 건설되었다. 위의 사진을 보면, 궁륭식 천장이 매우 높고, 전동버스가 돌아다닐 정도로 내부면적이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크고 넓은 군사전략시설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많은 양의 전기를 생산하려면, 디젤발전기로는 감당하지 못하므로 전략잠수함에 들어가는 소형 원자로가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미국은 2007년부터 한국에게 청계산 지하전쟁지휘소를 사들이거나 빌려쓰라고 요구해왔다. 하지만 지하전쟁지휘소를 두 개소나 운영하는 한국은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여 청계산 지하전쟁지휘소를 매입하거나 임차할 필요가 없다.     

<코리아타임스> 2010년 3월 21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이 한국에게 청계산 지하전쟁지휘소를 팔거나 빌려주겠다고 매물로 내놓은 때는 미국이 한국군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을 돌려주기로 결정한 2007년이라고 한다. 미국이 한국군 전작권을 돌려주는 것과 청계산 지하전쟁지휘소를 매물로 내놓은 것은 서로 어떤 연관성을 갖는 것일까? 미국군 소식지 <스타즈 앤 스트라입스> 2010년 4월 13일 보도기사가 그 의문을 풀어준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이었던 월터 샤프는 한국군 전작권을 돌려주는 상황변화에 대처하여 미국코리아사령부(U.S. Korea Command, KORCOM)를 2010년 안에 창설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고 한다. (미국은 그로부터 9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군 전작권을 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주한미국군사령부는 미국코리아사령부로 전환되지 않았다.)   

월터 샤프가 위와 같이 발언한 때로부터 3년이 지난 2013년 7월 25일 미국은 경기도 평택에 있는 미국군기지 캠프 험프리즈에서 미국코리아사령부 작전본부 착공식을 진행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작전본부(Operation Center)는 지하전쟁지휘소를 뜻하므로, 그날 평택 미국군기지에서는 미국코리아사령부 지하전쟁지휘소 착공식이 진행된 것이다. 이런 사정을 보면, 미국이 왜 청계산 전쟁지휘소를 매물로 내놓았는지 알 수 있다. 미국은 청계산 지하전쟁지휘소를 한국에게 팔아넘기고, 새로 건설될 평택 지하전쟁지휘소를 사용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청계산 지하전쟁지휘소를 사야 할 필요도 없고, 빌려야 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서울 한강 남쪽 관악산 지하에는 B-1이라고 부르는 지하전쟁지휘소가 있고,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지하에도 B-2라고 부르는 지하전쟁지휘소가 있기 때문이다. 지하전쟁지휘소를 두 개소나 운영하는 한국이 미국에게 많은 돈을 주고 지하전쟁지휘소를 사들이거나 빌려 쓸 필요는 전혀 없다.  


2. 쓰지 않는 ‘탱고’ 관리비 떠안게 된 한국

<동아일보> 2011년 4월 4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평택 미국군기지에 건설되는 미국코리아사령부 방호시설을 미국 국방부 산하 국방위협감소국(DTRA)의 기준에 맞춰 대폭 강화할 것을 한국에게 요구하였고, 그에 따라 한국은 미국코리아사령부 방호시설을 건설해주기 위한 약 5억 달러의 건설비를 떠안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방호시설은 지하전쟁지휘소를 뜻하고, 국방위협감소국의 기준은 전술핵공격에 견딜 수 있는 핵방호력기준을 뜻한다. 그러므로 한국은 주한미국군이 사용할 평택 지하전쟁지휘소를 전술핵공격에 견딜 수 있는 견고한 핵방호시설로 건설해주는 비용 5억 달러를 전액 부담하게 된 것이다.   

<경향신문> 2008년 11월 1일 보도에 따르면, 평택 지하전쟁지휘소는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 지하 3층으로 설계되었는데, 1,000여 명이 들어가서 한 달 이상 밖에 나오지 않고 머무를 수 있다고 한다. 보도기사에서 한국군 관계자는 핵전쟁을 전제로 하는 평택 지하전쟁지휘소 같은 군사시설은 유럽이나 중동에는 없다고 하였다. 

<연합뉴스> 2019년 3월 27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청계산 지하전쟁지휘소 관리를 한국에게 떠맡기고, 관리비 전액을 부담하라고 요구하였다고 한다. 한국 국방부는 그 요구를 도저히 받아줄 수 없어 난색을 표했으나, 미국은 청계산 지하전쟁지휘소 관리비를 한국에게 떠넘기려고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청계산 밑으로 커다란 수맥이 지나가는 줄 모르고, 그 산을 뚫어 지하전쟁지휘소를 건설해놓았기 때문에 그 지휘소 곳곳에서는 지하수가 줄줄 새고 습기가 심해 해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내부를 보수해야 하고, 방수설비와 방습설비를 1년 내내 가동해야 한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13년 7월 18일 평택 미국군기지 캠프 험프리스 경내에서 진행된 '미국코리아사령부 작전쎈터' 착공식 장면이다. 미국의 계획은 한국군 전작권을 돌려주는 것과 더불어 주한미국군사령부를 미국코리아사령부로 전환하고, 평택 미국군기지에 그 사령부를 설치하려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군 전작권을 돌려주겠다고 말하지만, 한국이 돌려받는 것은 명목상 전작권이다. 실질적인 전작권은 여전히 미국코리아사령관이 행사하게 될 것이다. 위의 사진에 나오는 작전쎈터라는 말은 지하전쟁지휘소라는 뜻이므로, 그날 미국은 평택 지하전쟁지휘소 착공식을 진행한 것이다. 지금도 건설 중인 평택 지하전쟁지휘소는 총면적이 34,838 평방미터이며, 850명이 근무하는 최첨단 군사전략시설이다. 그런데 미국은 이 최첨단 군사전략시설 건설비를 한국에게 떠넘겼고, 앞으로 쓰지 않게 될 청계산 지하전쟁지휘소 관리비도 한국에게 떠넘겼다. 미국이 막대한 자금을 뜯어가도 항변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상납해야 하는 것이 오늘 한국이 처해있는 대미예속관계의 현주소다. 자주성을 갖지 못하면, 평화와 통일을 실현할 수 없다.     ©

미국이 청계산 지하전쟁지휘소 관리를 한국에게 떠넘기는 까닭은, 미국의 연간 군사예산에 들어있는 청계산 지하전쟁지휘소 관리비를 지출하지 못할 사정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사정은 2019년 3월 18일 미국 텔레비전방송 <CNN>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지금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다급하게 추진하는 메히꼬국경장벽을 건설하기 위한 예산 36억 달러를 연방의회의 반대로 마련하지 못하게 되자, 미국 국방부에게 국방예산의 일부를 전용하여 메히꼬국경장벽을 반드시 건설하라고 명령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국방부는 연방의회에 제출한 건설사업목록에서 청계산 지하전쟁지휘소 관리비로 배정된 2019년도 예산 1,750만 달러를 메히꼬국경장벽건설에 전용하겠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이제야 미국의 흉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미국은 평택 지하전쟁지휘소 건설비 전액 5억 달러를 한국에게 떠넘기는 것도 성에 차지 않아, 청계산 지하전쟁지휘소 연간관리비 1,750만 달러를 메히꼬국경장벽건설비로 돌려쓰고, 그 대신 한국에게 청계산 지하전쟁지휘소 관리비 1,750만 달러를 해마다 부담시키려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갈취범의 고약한 심보가 아니고 무엇인가! 자주성이 없는 한국은 그처럼 억울한 일을 당해도 누구에게 하소연도 하지 못한 채 울며 겨자 먹기로 미국에게 막대한 자금을 상납해야 하니, 이것이야말로 굴종의 비극이 아니면 무엇인가!  


3. 연합사령부를 미국군기지에 두려는 속셈

2019년 6월 3일 패트릭 섀너핸 미국 국방장관 대행은 서울 용산구에 있는 국방부 청사에서 정경두 국방장관과 60분 동안 회담하였다. 그 회담에서 미래한미연합사령부 창설에 관한 중대한 결정이 내려졌는데, 그 결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정경두-섀너핸 회담의 결정에 따르면,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경기도 평택에 있는 미국군기지 캠프 험프리스에 두기로 했다는 것이다. 현재 평택 미국군기지에는 주한미국군사령부, 미8군사령부, 미육군2사단 본부가 있고, 미국코리아사령부 지하전쟁지휘소가 건설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평택 미국군기지에 둔다는 결정은 무슨 뜻인가? 

2017년 10월 28일 서울 국방부에서 진행된 한미안보협의회 49차 회의에서 당시 한국 국방장관이었던 송영무와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었던 제임스 매티스는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한국 국방부 경내에 두자고 구두로 합의하였고, 2017년 12월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이었던 빈센트 브룩스는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한국 국방부 경내에 두기로 명시한 양해각서(MOU)에 서명하였다. 

그런데 2018년 11월 8일 로벗 에이브럼스 육군대장이 주한미국군사령관으로 부임한 이후 상황이 급변하였다. 그는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한국 국방부 경내가 아니라 평택 미국군기지에 두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 미국 국방부는 전임 주한미국군사령관이 서명한 양해각서를 일방적으로 폐기하였을 뿐 아니라, 2019년 6월 3일 정경두-섀너핸 회담에서 기존 구두합의를 번복하면서,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평택 미국군기지에 두겠다는 자기들의 주장을 내리먹였다.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한국 국방부 경내에 두는가 아니면 평택 미국군기지에 두는가 하는 것은 미래한미연합사령부의 지휘부를 어떻게 구성하는가 하는 문제에 직결되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다. 만약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한국 국방부 경내에 두면, 한국군 합참의장이 미래한미연합사령관을 겸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정경두-섀너핸 회담에서 결정된 대로,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평택 미국군기지에 두면, 한국군 합참의장이 합참본부를 떠나 평택 미국군기지로 들어갈 수 없으므로, 당연히 한국군 합참의장이 아닌 한국군 육군대장이 미래한미연합사령관에 임명될 수밖에 없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기존 합의를 뒤엎고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평택 미국군기지에 두려는 미국의 속셈은 한국군 합참의장이 아닌 한국군 육군대장을 미래한미연합사령관에 임명하려는 데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2019년 6월 3일 서울 용산구에 있는 한국 국방부를 처음으로 방문한 패트릭 섀너핸 미국 국방장관 대행을 위한 환영식 장면이다. 정경두 국방장관이 섀너핸 국방장관 대행을 국방부 청사로 안내하면서 무엇인가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인다. 2017년 10월 28일 한국 국방부에서 진행된 한미안보협의회 49차 회의에서는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한국 국방부 경내에 두자고 구두로 합의하였고, 같은 해 12월 주한미국군사령관은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한국 국방부 경내에 둔다고 명시한 양해각서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2019년 6월 3일에 진행된 정경두-섀너핸 회담에서 미국은 위와 같은 구두합의를 무효화했고, 양해각서도 일방적으로 폐기했다. 미국은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한국 국방부 경내가 아니라 평택 미국군기지에 두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고, 한국은 그 주장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자주성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2018년 10월 31일 워싱턴에서 진행된 한미안보협의회 50차 회의에서 정경두 국방장관과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었던 제임스 매티스는 한국군 합참의장이 미래한미연합사령관을 겸직하고, 미국군 대장이 미래한미연합부사령관을 맡는 지휘부 구성방안을 검토하기로 하였는데, 2018년 11월 8일에 주한미국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로벗 에이브럼스 육군대장은 그 방안을 폐기했다. 그는 한국군 합참의장이 아닌 한국군 육군대장을 미래한미연합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미국코리아사령관(현재는 주한미국군사령관)이 미래한미연합부사령관을 겸직하는 자기 주장을 내리먹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대미예속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비록 한국군 합참의장이 아니더라도 한국군 육군대장이 미래한미연합사령관에 임명되면, 그가 한미연합군 전작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대미예속관계는 그처럼 단순한 게 아니다. 

한국 국방부가 바라는 대로,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한국 국방부 경내에 두고, 한국군 합참의장이 미래한미연합사령관을 겸직한다고 해도, 그에게 주어질 한미연합군 전작권은 명목상 권한이 될 판인데, 정경두-섀너핸 회담에서 결정한 대로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평택 미국군기지에 두고, 한국군 합참의장이 아닌 한국군 육군대장이 미래한미연합사령관에 임명되게 되었으므로, 한미연합군 전작권은 미국코리아사령관(미래한미연합부사령관)이 사실상 장악하게 될 것이고, 한국군 합참의장은 군령권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한국군 전작권은 현재도 주한미국군사령관이 한미연합사령관 모자를 쓰고 행사하고, 한국군 합참의장은 전작권을 행사하지 못하는데, 앞으로 미래한미연합사령부가 창설되어도 한국군 합참의장은 여전히 전작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자주성이 없는 한국은 그런 굴욕을 당해도 누구에게 하소연도 하지 못한 채 살아야 하니, 이것이야말로 예속의 비극이 아니면 무엇인가! 

다른 한편, 미래한미연합사령관을 맡게 될 한국군 육군대장도 사령관 모자를 쓰고 있지만 명목상 사령관일 뿐이고, 한국군 합참의장처럼 전작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예견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4. 세상에는 허수아비 사령관도 있다

(1) 주한미국군사령부는 평택 지하전쟁지휘소가 완공되면, 청계산 지하전쟁지휘소 관리를 한국 국방부에게 떠넘기고, 평택 지하전쟁지휘소를 사용하게 될 것이다. 지금 건설 중인 평택 지하전쟁지휘소의 설계와 시공은 한국 건설업체가 아니라 미국 건설업체가 맡았다. 평택 지하전쟁지휘소를 극비보안시설로 건설해야 하기 때문에 미국 국방부가 신뢰하는 미국 건설업체에게 설계와 시공을 맡긴 것이다.  

평택 지하전쟁지휘소의 소유자는 미래한미연합사령부가 아니라 미국 국방부이고, 그 지휘소를 관리, 운영하는 책임자는 미래한미연합사령관이 아니라 미국코리아사령관이다. 미래한미연합사령관에 임명될 한국군 육군대장은 미래한미연합사령부 청사에는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지만, 그 청사 바로 옆에, 지하통로 연결된 지하전쟁지휘소에는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극비보안시설은 미래한미연합사령부 시설이 아니라, 미국 국방부 시설이기 때문이다. 육해공군작을 지휘통제하는 모든 군사정보가 평택 지하전쟁지휘소에서 처리되는데, 미래한미연합사령관이 그곳을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하면, 군사정보접근권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미래한미연합사령관 모자를 쓰고 평택 미국군기지에 들어갈 한국군 육군대장이 군사정보접근권을 갖지 못하면, 한미연합군의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싶어도 수립하지 못한다. 사령관이 군령권(전작권)을 행사하려면 작전계획을 수립하는 권한을 가져야 하고, 작전계획을 수립하려면 군사정보접근권을 가져야 하는데, 군사정보접근권이 없는 사령관이 무슨 수로 작전계획을 수립할 수 있겠는가.  

한미연합군의 작전계획을 수립하는 권한은 미래한미연합부사령관 모자를 쓴 미국코리아사령관(현재는 주한미국군사령관)이 장악할 것이고, 한미연합군의 작전계획을 수립하는 실무는 미래한미연합사령부 참모장, 기획참모, 작전참모가 맡을 것이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2019년 6월 3일 서울 용산구에 있는 한국 국방부 청사에서 정경두 국방장관과 섀너핸 미국 국방장관 대행이 회담을 시작하기에 앞서 악수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 회담에서 미국은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평택 미국군기지에 두고, 한국군 합참의장이 아닌 한국군 육군대장을 미래한미연합사령관에 임명하려는 자기 주장을 내리먹였다. 미래한미연합사령부가 미국의 주장대로 창설되면, 미국이 전작권을 한국에 돌려준다고 해도 한국군 합참의장은 전작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고, 미래한미연합사령관 모자를 쓰고 미국군기지에 들어간 한국군 육군대장도 전작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평택 미국군기지에 두려는 미국 국방부의 속셈은 한국군 전작권을 형식적으로 돌려주고, 실제로는 자기들이 전작권을 장악, 행사하려는 것이다. 앞으로 창설될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미국코리아사령부 산하기구로 만들려는 것이 미국의 음흉한 계략이다.     

그렇다면 미래한미연합사령부 참모장은 한국군과 미국군 중에서 어느 쪽이 맡게 되고, 기획참모와 작전참모는 또 어느 쪽에서 맡게 되는가? 2017년 10월 28일 서울 국방부에서 한미안보협의회 49차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었던 제임스 매티스는 그 회의에 제출된 미래한미연합사령부 창설안을 승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국군 중장과 미국군 중장이 미래한미연합사령부 참모장을 공동으로 맡는 방안이 그 창설안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매티스는 공동참모장이 아니라 미국군이 단독으로 참모장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창설안을 승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매티스가 미국군이 미래한미연합사령부 참모장을 단독으로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 까닭은 군사정보접근권과 작전계획수립권을 모두 미국군이 장악하려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국방장관이 한미안보협의회에서 주장하면, 실권이 없는 한국 국방장관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주장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 이런 정황을 살펴보면, 미래한미연합사령부에서 가장 핵심적인 군직들인 참모장, 기획참모, 작전참모를 모두 장악한 미국군 지휘관들은 미래한미연합사령부에서 실권 없는 군직에 임명될 한국군 지휘관들에게 보조업무나 맡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미래한미연합사령관에 임명된 한국군 육군대장은 미국군 참모장, 미국군 기획참모, 미국군 작전참모가 작성하여 제출한 서류를 읽어보고 결재나 하는 무권한상태에 빠질 것이 너무 뻔하다. 

(2) 조미군사대결은 사회주의핵무력과 제국주의핵무력의 대결이다. 만약 조미전쟁이 일어나면, 선제전술핵타격과 보복전술핵타격이 오가는 인류역사상 최초의 핵교전이 벌어질 것이다. 조선핵무기연구소가 사회주의핵무력을 완성한 때에 맞춰 조선인민군은 김정은 최고사령관으로부터 핵전쟁교리를 받았고, 전군을 사회주의핵무력을 중심으로 개편하였다. 다른 한편, 미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핵전략자산을 중심에 둔 작전계획을 수립해놓고, 핵전략자산을 동원하는 제국주의북침전쟁을 연습하고 있다. 

그런데 미래한미연합사령관에 임명될 한국군 육군대장은 핵탄두를 만져보지도 못했고, 재래식 무력을 지휘한 경험밖에 없다. 그런 한국군 육군대장이 미국의 핵전략자산들인 항모타격단과 장거리전략폭격기 편대를 지휘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미래한미연합사령관에 임명될 한국군 육군대장이 한미연합군 전작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미래한미연합사령관 모자를 쓴 한국군 육군대장이 한미연합군 전작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꿔다놓은 보리자루처럼 소외당할 때, 미래한미연합부사령관 모자를 쓴 미국코리아사령관은 평택 지하전쟁지휘소에서 자기 측근들인 참모장, 기획참모, 작전참모를 데리고 한미연합군 작전계획을 수립할 것이다. 미래한미연합사령관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작성한 작전계획서에 결재서명을 하는 것이다. 이런 정황은 미국코리아사령관이 미래한미연합부사령관 모자를 쓰고 한미연합군에 대한 실질적인 전작권을 행사하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지금 미국 국방부는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미국코리아사령부 산하기구로 만들려는 계략을 행동에 옮기고 있는 중이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2019년 4월 15일 서울 중구에 있는 프레스쎈터 국제회의장에서 진행된 '평화의 시대, 냉전의 유물 유엔사 해체를 촉구하는 1차 국제선언 발표 기자회견' 장면이다. 한국의 진보단체대표들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행정부에게 미국이 불법적으로 만든 유엔사를 해체하고, 남북협력을 방해하지 말라고 촉구하였다. 이미 오래 전에 유엔총회는 미국이 6.25전쟁에 파병하기 위해 불법적으로 조작한 유엔사령부를 해체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하였고, 조선도 미국이 불법적으로 조작해놓은 유엔사령부를 해체하라고 거듭 요구하였건만, 오만방자한 미국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미국이 유엔사령부를 계속 틀어쥐고 있는 까닭은, 조선에 대한 무력침공의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3) 이제껏 주한미국군사령관이 유엔사령관을 겸직해오는 것처럼, 앞으로 미국코리아사령관도 유엔사령관을 겸직할 것이다. 유엔사령관 임명권은 유엔안보리가 아닌 미국 국방부에 있으므로, 미래한미연합사령관에 임명된 한국군 육군대장이 유엔사령관을 겸직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이미 오래 전에 유엔총회는 미국이 6.25전쟁에 파병하기 위해 불법적으로 조작한 유엔사령부를 해체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하였건만, 오만방자한 미국은 그런 결의에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또한 조선은 미국이 불법적으로 조작해놓은 유엔사령부를 해체하라고 거듭 요구하였지만, 오만방자한 미국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이처럼 미국이 유엔사령부를 계속 틀어쥐고 있는 까닭은, 그것이 다국적 증원군에게 유엔기를 내주고 그들을 한반도 전선으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고, 조선에 대한 무력침공의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6.25전쟁 시기 한반도 전선에 파병된 친미추종국 군대들은 미국군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유엔군보충대에서 미국의 전쟁교리에 의거하여 단기전투훈련을 받은 뒤에 미국군 사단에 대대단위로 배속되었는데, 만약 조미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그런 사태가 또 다시 재연될 것으로 보인다. 전시에 미국코리아사령관은 유엔군사령관 모자를 쓰고 한반도 전선에 파병된, 일본자위대, 영국군, 오스트레일리아군, 캐나다군, 뉴질랜드군 등을 미국군이 지휘하는 유엔군에 편입시킬 것이다.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철수하는 경우에도, 유엔사령부를 일본으로 이전하면 전시에 친미추종국 군대들을 유엔군의 이름으로 한반도 전선에 끌어들일 수 있다. 미국이 유엔총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조선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유엔사령부를 끈질기게 붙들고 있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전시에 미래한미연합사령관은 유엔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리라는 점이 명백하다. 미래한미연합사령관은 평시에도 전시에도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 사령관이다. 


5. 3자 정상회담이 성사될 수 없는 이유

2019년 3월부터 매달 한국군 합참의장과 주한미국군사령관이 주관하는 특별상설군사위원회(SPMC)가 월례회의를 계속 소집하고 있다. 그 회의에서는 한국군 전작권을 돌려받기 위해 한국군의 작전능력을 평가하는데, 오는 8월에는 한국군 합참의장이 사령관을 맡고, 주한미국군사령관이 부사령관을 맡는 임시지휘체계로 전쟁지휘소연습을 진행하여 한국군의 작전능력을 평가하기로 했다. 

그러나 위에 서술한 대로, 한국군 전작권을 돌려받더라도 한국군이 한미연합군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한국군 합참의장은 전작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미국코리아사령관이 한미연합부사령관 모자를 쓰고 전작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유엔사령부가 존속하는 한, 유엔군 전작권도 미국코리아사령관이 장악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한국군 전작권은 한미연합군 전작권과 유엔군 전작권에 이중으로 종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이 한국군 전작권을 돌려준다고 해서 한국군 합참의장이 전작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군 육군대장이 미래한미연합사령관에 임명된다고 해서 전작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전작권을 돌려받는 문제 또는 한국군 육군대장을 미래한미연합사령관에 임명하는 문제를 부각시키면서 군사주권을 운운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  

그런데 한국 언론매체들의 예상에 따르면, 미국은 2022년에 한국군 전작권을 돌려주면서 주한미국군사령부를 미국코리아사령부로 전환하고,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창설할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미국이 미일동맹군을 비상히 증강시켜 미일동맹의 전략적 가치를 최대화하고 있는 지금, 한미동맹의 전략적 가치가 그에 반비례하여 최소화하고 있는데도 미국 국방부는 주한미국군을 철수할 생각은 하지 않고,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창설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미래한미연합사령부가 창설되는 것과 한미동맹의 전략적 가치가 최소화되는 것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 한미동맹의 전략적 가치가 최소화되면, 미국 국방부가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장악하는 것도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 국방부는 왜 미래한미연합사령부를 창설하려는 것일까? 그들의 욕망은 주한미국군 철수를 반대하는 입장과 결부된다. 미국 국방부가 주한미국군 철수를 반대하는 까닭은, 주한미국군을 철수하는 경우 미국군 대장, 중장, 소장을 비롯한 고위군직들이 사라지고 많은 군사지휘관들이 현역에서 은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철군문제는 퇴직문제이므로, 군직을 지키려는 자들이 철군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런 미국 국방부와 달리,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주한미국군 철수문제를 몇 차례 제기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미국 국방장관과 합참의장, 그리고 군출신 백악관 고위관리들이 이구동성으로 반대하는 바람에 철군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군직을 지키려는 철군반대파의 저지와 만류를 물리치고 철군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트럼프 대통령이 철군결정을 내리느냐 혹은 내리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는 두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한 가지 요인은 조미핵협상이 진전되어 평화협정이 체결되는 것이다. 동서고금의 역사적 경험들은 평화협정 체결이 철군을 불가피하게 동반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조미핵협상이 진전되어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트럼프 대통령은 철군결정을 내릴 수 있다.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을 우두머리로 하는 백악관의 철군반대파가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을 결렬시킨 까닭은, 조미핵협상이 진전되어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트럼프 대통령이 철군결정을 내리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백악관의 철군반대파가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이 결렬시키는 바람에 조미핵협상이 진전되어 평화협정을 체결할 전망이 당분간 불투명해졌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철군결정을 이끌어낼 다른 한 가지 요인이 아직 남아있다. 그것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철군압박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철군압박을 가중시키며 트럼프 대통령을 궁지에 몰아넣으면, 그는 어쩔 수 없이 철군결정을 내려야 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철군압박은 미국과의 핵협상을 중단하고, 핵탄두 증산과 미사일발사훈련을 재개하는 것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지금 조선은 미국과의 핵협상을 중단하였고, 녕변핵시설을 계속 가동하여 무기급 핵물질을 증산하고 있으며, 지난 5월 초 미사일발사훈련을 재개하였다. 그런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다급해진 트럼프 대통령은 제3차 조미정상회담을 개최하자는 의사를 거듭 표명하는데도, 조선은 응답하지 않는다. 더욱 안달이 난 트럼프 대통령은 2019년 6월 28일부터 29일까지 1박2일 일정으로 일본 오사까에서 진행되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울을 방문하려고 한다. <세계일보> 2019년 6월 7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주요 20개국 정상회의를 마친 6월 29일 오후에 서울을 방문하려고 하는데, 청와대는 1박2일 일정을 원하고, 백악관은 무박1일 일정을 선호한다고 한다. <사진 6>

▲ <사진 6> 이 사진은 2019년 4월 11일 백악관에서 한미정상회담을 시작하기 직전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장면이다. 이 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교착상태에 빠진 조미협상과 남북협상을 재개하기 위해 남북미 3자정상회담을 판문점에서 개최하는 방안을 제기하였고, 트럼프 대통령도 그 방안에 찬성의사를 표하였다. 그래서 트럼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6월 28일부터 29일까지 일본 오사까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 정상회의를 마치고 곧바로 판문점으로 가서, 남북미 3자정상회담을 개최하려고 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문제를 제의하기 위해 북측에 여러 차례 연락하였으나,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렇게 된 까닭은, 미국이 리비아식 비핵화 방안을 철회하고 조선식 비핵화 방안을 놓고 협상하는 태도변화를 보이지 않으면, 조선은 그 어떤 형태의 회담도 재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목적이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정상회담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 참석할 것이므로, 트럼프 대통령이 그와 정상회담을 하려면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중에 잠깐 시간을 내어 정상회담을 하면 된다.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이 굳이 서울을 방문하는 것은 한미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것이 아닌 어떤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목적인가?  

2019년 4월 15일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청와대에서 진행된 보좌관 회의에서 지난 4월 11일 백악관에서 진행된 한미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결단할 경우 남북미 3자정상회담도 가능하다는 뜻을 밝혔다”고 말했다. 이 발언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사실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4월 11일 백악관에서 진행된 한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교착상태에 빠진 조미협상과 남북협상을 재개하기 위해 남북미 3자정상회담을 판문점에서 개최하는 방안을 제기하였고, 트럼프 대통령도 그 방안에 찬성의사를 표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트럼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주요 20개국 정상회의를 마치고 함께 판문점으로 가서, 남북미 3자정상회담을 개최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미국이 계산법을 바꾸지 않으면, 협상을 재개하지 않겠다고 아예 못을 박아놓았다. 미국의 계산법을 바꾸라는 것은 외교적인 표현인데, 조선에게 일방적인 비핵화를 요구하는 리비아식 비핵화 방안을 철회하고, 조선식 비핵화 방안을 놓고 다시 협상하자는 뜻이다. 조선식 비핵화 방안 속에 평화협정체결방안과 철군방안이 들어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리비아식 비핵화 방안을 철회한다는 의사를 표명하기만 하면, 조미협상과 남북협상은 곧바로 재개될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아직 미국의 계산법을 철회하지 않았으므로, 조선은 남북미 3자정상회담 개최제의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식 계산법을 말끔히 철회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 바로 그것이 교착상태에 빠진 조미협상과 남북협상을 재개하는 길이다. 교착을 넘어서는 길은 오직 그 길 하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