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30

을 수 없는 개전전황보고

[한호석의 개벽예감](401)
자주시보 2020년 06월 29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군사정보를 독점통제한 미국군사고문단
2. 믿을 수 없는 개전전황보고
3. 원동군사령부 군사정보단의 정보보고서
4. 북진공격으로 일어난 국지적 내전
5. ‘서울해방작전’과 3일 간의 평온
6. 대남군사행동계획은 확대회의에서 비준된다


1. 군사정보를 독점통제한 미국군사고문단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2020년 7월 1일은 미국군사고문단이 창설된 때로부터 71주년이 되는 날이다. 미국 육군성은 주한미국군철수를 완료한 이튿날인 1949년 7월 1일 약 500명으로 이루어진 군사고문단을 서울에 설치했다. 군사고문단의 정식명칭은 ‘대한민국 주재 미국군사고문단(United States Military Advisory Group to the Republic of Korea)'이다. 이 글에서는 미국군사고문단이라는 약칭을 쓴다.   

미국군사고문단이 한국군을 어떻게 지휘통제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군의 경험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이를테면, 1950년 당시 개성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보병사단은 미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었다. 당시 제1보병사단만 미국군 밑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한국군 전체가 미국군 밑에 들어갔다. 당시 한국군에는 합동참모본부가 없었기 때문에 미국군 밑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군 합동참모본부는 1990년 10월 1일에 창설되었다. 그러므로 1948년에 창군된 이래 1990년까지 42년 동안 한국군은 주한미국군사령관의 직접적인 지휘통제를 받아온 것이다. 1990년 10월 1일 한국군 합동참모본부가 창설되었지만, 지금도 한국군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주한미국군사령관이 장악, 행사한다. 

1950년 6월 당시 미국군 제1군단장 프랭크 밀번(육군 소장)은 자기 군단에 배속된 한국군 제1보병사단을 공식적으로 지휘통제하고 있었지만, 그 사단을 현지에서 사실상 지휘통제한 지휘관은 미국 육군 중령 로이드 로크웰이었다. 1950년 당시 한국군 제1보병사단 사단장이었던 백선엽이 2010년에 남긴 회고록을 보면, 로크웰은 수석고문이라는 군직을 가지고 한국군 제1보병사단을 사실상 지휘통제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미국군사고문단은 수석고문 밑에 작전고문, 정보고문, 통신고문, 군수고문, 군단연락장교, 공지(空地)연락장교, 연대고문 등 10명을 두고 한국군을 지휘통제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어깨에 별을 단 한국군 사단장들이 미국군 중령의 지휘통제를 받는 치욕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존엄과 자존심마저 내던지고 미국군에게 매달린 것이야말로 한국군이 겪은 불행과 비극이었다. 

70년 전에만 그런 게 아니었다. 미국군사고문단이 창설된 때로부터 오늘까지 71년 동안 한국군 작전통제권은 변함없이 주한미국군사령관의 손아귀에 있다. 몇 해 전부터 미국이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돌려주겠다고 하는데도, 한국군은 아직 돌려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느니 또는 ‘철통같은 혈맹’은 영원하다느니 뭐니 하면서 미국군의 작전통제를 계속 받으려고 한다. 미국의 발밑에서, 미국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는 한, 이 땅에서는 진정한 민주주의도 실현될 수 없고, 조국통일도 실현될 수 없다.  

돌이켜보면, 미국군사고문단은 1949년 7월 1일부터 군사정보를 독점통제했다. 당시 한국군 전투부대에 파견된 미국군사고문단 정보고문이 수집한 군사정보는 수석고문을 통해 미국군사고문단 본부에 직보되었다. 이런 사정은 미국군사고문단이 6.25전쟁과 관련된 모든 군사정보를 독점통제하였음을 말해준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개전전황보고는 미국군사고문단이 작성한 것이다. 미국군사고문단은 당일 오전 4시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짤막한 전황보고를 당시 주한미국대사 존 무초에게 통보했다. 무초는 자기가 받은 전황보고를 워싱턴으로 급히 타전했다. 미국군사고문단이 작성한, 6.25전쟁 개전전황보고는 사람들이 전혀 의심하지 않는, 아니 의심해서는 안 되는 역사적 사실로 굳어졌다. 

그러나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는 6.25전쟁 개전전황보고는 객관적으로 입증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미국군사고문단은 1950년 6월 25일 오전 8시까지만 해도 그날 새벽에 38도선 어느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인민군이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에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역사기록은 미국군사고문단이 적당히 가공처리한 개전전황보고가 역사적 사실로 굳어진 것이다. 

미국과 남측의 정치권과 학계, 언론계 등에서 활동하는 우익학자들과 우익선동가들은 미국군사고문단이 가공처리한 개전전황보고에 의거하여 6.25전쟁 개전상황을 왜곡했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한 오늘 그 전쟁의 개전상황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검토하려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사진 1>
  
▲ <사진 1> 6.25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던 1950년 7월 미국군사고문단은 조선인민군의공격에 밀려 서울에서 대구로 후퇴했다. 위의 사진은 당시 대구로 피난한 미국군사고문단의 임사청사를 정문쪽에서 촬영한 것이다. 올해 2020년 7월 1일은 미국군사고문단이 창설된 때로부터 71주년이 되는 날이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개전전황보고는 미국군사고문단이 작성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는 6.25전쟁 개전전황보고는 객관적으로 입증된 것이 아니다.  

2. 믿을 수 없는 개전전황보고

1950년 6월 25일에 펼쳐진 급박한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당시 서울 신당동 자택에 있었던 그는 38도선 무력충돌이 일어났다고 알려주는 전화를 당일 오전 7시경에 받았다고 한다. 누가 백선엽에게 그런 중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는가 하는 문제는 6.25전쟁 개전상황을 파악하는 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백선엽은 누가 자기에게 그런 정보를 전해주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백선엽은 1950년 6월 25일 이른 아침 자신이 겪었던 다음과 같은 경험담을 회고록에 서술했다.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은 백선엽이 서울 용산에 있는 한국군 육군본부에 가려고 자기 집을 나선 시각은 오전 7시 10분경이었다. 백선엽이 육군본부 청사 2층에 있는 육군참모총장실로 올라갔더니 육군참모총장 채병덕과 장교 7~8명이 방안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회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방안에서 서성대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한국군 지휘부가 38도선 무력충돌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모든 군사정보를 미국군사고문단이 독점통제하고 있었으므로, 한국군 지휘부는 미국군사고문단으로부터 군사정보를 제공받기 전에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까막눈 신세였다.  

전선으로 급히 돌아가라는 채병덕의 호통을 듣고 밖으로 나온 백선엽은 한국군 제1보병사단 수석고문 로이드 로크웰부터 찾았다. 왜냐하면 백선엽은 사단장이라는 군직만 가지고 있었고, 사단을 지휘통제하는 진짜 지휘관은 로크웰이었기 때문이다. 

일요일이었던 1950년 6월 25일 이른 아침, 로크웰은 한국군 육군본부 인근에 있는 미국군사고문단 사택에서 아직 잠을 자고 있었다. 백선엽이 로크웰의 집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더니, 잠에서 깨어난 부스스한 얼굴로 문을 열어준 그는 “전쟁이 터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백선엽과 로크웰이 군용차를 타고 서울 서대문구 수색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사령부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9시경이었다. 

위와 같은 정황을 보면, 1950년 6월 25일 오전 9시까지 미국군사고문단은 군사고문들에게 개전상황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지 못하고 있었고, 개전상황에 대처할 긴급명령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로크웰은 한국군 제1보병사단 수석고문으로서 개성-문산-파주-고양-서울로 이어지는 제1축선에서 전략임무를 수행하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을 지휘통제하였는데, 그처럼 중요한 군직에 있는 그가 당일 오전 9시까지 개전상황을 몰랐으므로, 미국군사고문단도 개전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미국군사고문단은 한국군 사단, 여단, 연대마다 군사고문을 10명씩 파견하여 한국군을 지휘통제했는데,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개성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의 작전고문은 미국 육군 대위 조섭 대리고였다. 서울 서대문구 수색을 떠난 백선엽과 로크웰이 경기도 파주군 파주국민학교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전방지휘소에 도착한 때는 1950년 6월 25일 오전 10시경이었다. 백선엽은 회고록에서 자신과 로크웰이 오전 9시경에 수색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사령부에 도착했고, 오전 9시 30분경 파주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정부지휘소에 도착했다고 썼지만, 오전 9시경 수색에 있는 사단 사령부에 도착하여 잠시 머문 뒤에 그곳을 출발하여 오전 9시 30경에 파주에 있는 사단 전방지휘부에 도착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였다. 백선엽과 로크웰은 오전 10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파주에 있는 사단 전방지휘부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백선엽과 로크웰은 개성쪽에서 포성이 들리고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한국군 제1보병사단 다른 지휘관들과 함께 임진강 철교 남단까지 나가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 작전고문 조섭 대리고가 신발조차 신지 못한 맨발로 자기 군용차를 몰고 “뭔가 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허겁지겁 패주해왔다. 황망히 패주하다가 임진강 철교 남단에서 뜻밖에 로크웰 일행과 마주친 대리고는 “숨이 넘어갈 듯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면서 “큰일났다. 적들이 이미 기차로 개성역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포성이 차츰 가깝게 들려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백선엽과 로크웰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미국군사고문단 최고지휘관 월리엄 로벗츠(육군 준장)의 첫 명령이 작전현장에 하달되었다.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윌리엄 로벗츠는 최전방 한국군 전투부대들에 파견된 미국군사고문들에게 “모두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철수명령을 받은 로크웰은 백선엽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서울로 발길을 돌렸는데, 자기들을 버리고 떠나는 로크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억장이 무너진 백선엽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위에 서술한 정황을 보면, 미국군사고문단은 1950년 6월 25일 개전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미국군사고문단의 전황보고는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조선인민군이 공격을 개시했다는 공격주체에 관한 보고도 믿을 수 없고, 오전 4시에 공격이 개시되었다는 공격시각에 관한 보고도 믿을 수 없으며, 38도선 전역에서 총공격이 개시되었다는 공격범위에 관한 보고도 믿을 수 없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20년 6월 16일 북이 개성공업지구에 있는 남북공동련락사무소를 폭파한 장면이다. 파주쪽에서 바라본 사진에는 검은 폭파연기가 하늘로 솟구치는장면이 담겼다. 북이 남북공동련락사무소를 폭파한 것은 문재인 정부가 대북적대정책을 변함없이 고수하는 것으로 하여 평화통일의 가능성이 사라졌음을 말해주는 엄청난사건이었다. 70년 전에도 개성지구 38도선에서 남북의 무력충돌이 벌어졌는데, 70년이 지난 오늘도 개성지구 군사분계선에서 무력충돌위험이 고조되었다. 세월이 흐르고세대가 바뀌었어도 분단체제의 본질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조국통일이 실현될 때까지 분단체제의 본질은 바뀌지 않을 것이며, 평화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분단국가의 평화는 오직 통일국가건설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조국통일은 매우 시급하고,절대적인 민족사적 과업이다.  

3. 원동군사령부 군사정보단의 정보보고서

1950년 6월 25일 개전상황을 좀 더 정확하게 서술한 전황보고는 그로부터 2년이 지나서야 나왔다. 미국 원동군사령부 군사정보단이 1952년 7월에 작성한 정보보고서는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38도선 남쪽으로 포사격을 개시한 시각이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40분이었고, 그로부터 약 20분 동안 포사격이 계속되다가 오전 5시경부터 조선인민군 보병부대가 38도선을 넘어 한국군을 공격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역사자료를 조사한 한국군사연구소 소속 연구원은 미국 원동군사령부 군사정보단이 1952년 7월에 작성한 정보보고서에서 6.25전쟁 개전상황에 관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사실들을 더 알아냈다.

1) 오전 6시경 서울의 미국군사고문단은 일본 도꾜의 원동군사령부에게 무선통신을 통해 38도선 전황을 처음 보고했다. (당시 미국군사고문단은 38도선 전투현장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통해 전황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첫 전황보고는 38도선 개전상황에 관한 정확한 보고가 아니었고, 38도선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는 정도의 간략한 보고였다.)

2) 오전 7시경 미국군사고문단 참모회의가 소집되었다. 참모회의에서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조선인민군이 “대규모 수색정찰”을 하던 중 한국군과 무력충돌을 벌인 것으로 판단했다. (조선인민군이 대규모 수색정찰을 하던 중에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났다는 미국군사고문단의 최초 판단은 그로부터 약 3시간 뒤에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전황보고로 둔갑했다.)

3) 오전 9시경 미국군사고문단은 황해남도 옹진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로부터 옹진이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당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옹진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미국군사고문단 최고지휘관 월리엄 로벗츠는 최전방 한국군 전투부대들에 파견된 군사고문들의 신변위험을 직감하고, 그들에게 전원 철수하라는 긴급명령을 내렸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로크웰도 로벗츠의 철수명령을 받았는데, 그 때는 오전 10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4) 오전 10시경 미국군사고문단은 서울에 주재하는 당시 주한미국대사 존 무쵸에게 38도선 전황을 통보했다. 

미국군사고문단으로부터 38도선 전황을 통보받은 무쵸는 미국 육군성에 긴급히 전문을 보냈는데, 그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었다. “(전략) 오전 4시경 옹진에서 북조선군의 포사격으로 행동이 개시되었다. 오전 6시경 북조선 보병부대가 옹진지구, 개성지구, 춘천지구에서 38도선을 넘어오기 시작했고, 동해안 강릉 남쪽에서 (조선인민군의) 해안상륙이 있었다는 보고도 있다. (중략) 공격의 성격과 방식을 보면, 전면적인 공격으로 보인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미국군사고문단은 당일 오전 7시경 조선인민군이 대규모 수색정찰을 하던 중에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났다고 판단했는데, 그로부터 약 3시간 뒤에 그들은 조선인민군이 전면공격으로 보이는 공격을 개시했다는 전혀 다른 전황보고를 무초에게 통보한 것이다. 

무초의 전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옹진지구에서 시작된 무력충돌이 시차를 두고 개성지구와 춘천지구로 차츰 확대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6.25전쟁 개전상황을 파악하려면, 당일 새벽 옹진지구에서 무력충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미국군사고문단은 당일 새벽 옹진지구에서 무력충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옹진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여단 미국군사고문들은 1950년 6월 25일 당시 옹진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다. 백선엽이 회고록에 서술한 것처럼, 한국군 제1보병사단 수석고문 로크웰도 1950년 6월 25일 당시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에 있었다. 

미국군사고문들은 왜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6월 25일 아침 서울에 모여 있었을까? 한국군 최전방부대들에 배치된 미국군사고문들은 주말마다 최전방을 떠나 서울에 가서 휴일을 즐겼다. 토요일이었던 1950년 6월 24일 밤 서울에서는 한국군 장교구락부 개설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는데, 미국군사고문들은 그 연회에서 술과 춤을 마음껏 즐기다가 곯아떨어진 상태에서 6월 25일 새벽을 맞았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1997년 미국 뉴욕에서 출판된 자신의 책 ‘코리아의 양지바른 곳(Korea's Place in the Sun)’에서 개전당일 38도선 최전방에 미국군사고문이 없었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개성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에 작전고문 조섭 대리고가 1950년 6월 25일 최전방에 남아있었다. 그가 왜 서울에 가지 주말을 즐기지 않고, 개성에 남아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개전당일 최전방에 남아있었던 유일한 미국군사고문이었다. 그렇지만 개전당일 개성에 있었던 대리고는 옹진에서 무력충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여 일본을 점령한 미국이도꾜에 설치한 원동군사령부 청사를 촬영한 사진이다. 워싱턴에 있는 미국 육군성은도꾜에 있는 원동군사령부를 통해 서울에 있는 미국군사고문단에게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당시 미국군사고문단 최고지휘관은 육군 준장 윌리엄 로벗츠였다. 미국군사고문단은 모든 군사정보를 독점통제하면서 한국군 전체를 지휘통제했다. 그러나 정작1950년 6월 25일 미국군사고문단 소속 군사고문들은 38도선 최전방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개전전황을 제때에 파악하지 못하고 허둥댔으며, 나중에 작성한 개전전황보고도 제멋대로 가공처리했다.  


4. 북진공격으로 일어난 국지적 내전

그러면 1950년 6월 25일 새벽 옹진지구 무력충돌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이 중요한 물음에 대한 해답은 브루스 커밍스의 책 ‘코리아의 양지바른 곳’과 최태환의 책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개전당일 최태환은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 제13연대 정치보위부 책임장교로 개성전투에 참가했는데, 그는 자기의 전쟁경험을 1989년 서울에서 출판된 책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 남겼다. 

1) 1950년 6월 23일 밤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의 은파산 공격

ㄱ. 최태환의 회고담에 따르면, “숨막히는 긴장감이 계속되는 가운데 (조선인민군) 15연대가 주둔하는 옹진반도로부터 백인엽이 이끄는 국방군 17연대 맹호부대 병력이 은파산을 폭격(포격을 폭격으로 오기했음-옮긴이)하기 시작했으며, 곡사포와 박격포가 동원된 소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다는 속보가 날아왔다.” 최태환은 은파산 전황속보를 1950년 6월 24일에 수신한 것으로 기억했다.   
ㄴ. 평양라디오방송의 6월 26일 전황보도를 인용한 커밍스의 서술에 따르면, 1950년 6월 23일 오후 10시 옹진에 주둔하는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가 곡사포와 박격포로 옹진지구 은파산에 있는 조선인민군 진지를 공격했고, 전투는 6월 24일 오전 4시까지 계속되었다. 

2)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의 두락산 공격
ㄱ. 평양라디오방송의 6월 26일 전황보도를 인용한 커밍스의 서술에 따르면, 6월 25일 오전 2시 또는 3시경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 맹호부대가 옹진지구 두락산에 있는 조선인민군 진지를 공격했다. 
ㄴ. 최태환의 회고담에 따르면,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가 은파산을 공격했다는 전황속보가 있었고, “이어서 옹진반도의 두락산이 공격당하고 있다는 정보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는 은파산 전황속보를 수신한 시각과 두락산 전황속보를 수신한 시각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이어서”라는 말로 뭉뚱그려놓았는데,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의 은파산 공격과 두락산 공격은 약 20시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났다.)

3) 1950년 6월 25일 오후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의 해주 점령
ㄱ. 평양라디오방송의 6월 26일 전황보도를 인용한 커밍스의 서술에 따르면, 6월 25일 오후 2시 30분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는 38도선을 넘어 수동으로 진격했다.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 맹호부대가 38도선을 넘어 수동으로 북진하여 해주를 점령했으나, 평양라디오방송은 해주가 점령당했다는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ㄴ. 커밍스의 서술에 따르면, 1950년 6월 26일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뉴욕헤럴드트리뷴>은 한국군 2개 대대가 6월 25일 38도선 이북에 있는 해주를 점령했다고 각각 보도했다. 
ㄷ. 커밍스의 서술에 따르면, 주일영국대사관 소속 무관이 1950년 6월 27일 본국에 보낸 전문은 한국군 대대가 6월 25일 38도선 이북에 있는 해주를 점령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실지회복’이라는 전략목표를 내건 이승만 친미파쇼정권과 한국군 지휘부는 “아침은 해주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는 북진공격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가 6월 25일 38도선을 넘어가 해주를 점령한 것은 우발적인 군사행동이 아니라 작전계획에 의거한 북진공격이었다.)

2020년 6월 22일 <자주시보>에 실린 나의 글 ‘군사상황은 매우 엄중하다’에서 서술한 것처럼, 은파산, 두락산, 국사봉, 해주를 포괄하는 옹진지구는 1949년 4월 29일부터 11월 15일까지 38도선 무력충돌이 치렬하게 벌어진 격전지였다. 당시 한국군 육군본부는 38도선 무력충돌이 언제나 조선인민군의 공격으로 일어난 것처럼 발표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브루스 커밍스의 분석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의 공격으로 일어난 무력충돌보다 한국군의 공격으로 일어난 무력충돌이 더 많았다. 

옹진지구에서 한국군이 북진공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옹진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가 육군본부 직할부대로서 무장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로씨야 군사역사학자들인 볼꼬브스끼와 뻬뜨로바가 공동으로 집필하여 2000년 쌍끄뜨 뻬쩨르부르그에서 발표한 논문 ‘조선에서의 전쟁에 대한 쏘비엣 관점(Soviet View of the War in Korea)'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당시 옹진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는 병력과 화력에서 그 지구에 주둔한 조선인민군 보병대대보다 더 강했다. 옹진지구에 주둔한 쌍방의 무장력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군
조선인민군

대대

4개 대대
1개 대대


전차와 자행포


없음
5


견인포와 박격포


57
27

    
위의 비교표가 말해주는 것처럼, 당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는 비록 전차와 자행포를 갖지는 못했지만, 다른 무장력은 압도적으로 강했다. 당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는 소련에서 생산된 T-34 중형 전차와 76mm 포를 탑재한 SU-76 자행포를 운용하였는데, 옹진지구에는 5대만 배치되었다.  

한국군 제17독립연대는 1950년 6월 23일 오후 10시 은파산에 있는 조선인민군 진지에 포사격을 개시했고, 6월 25일 오전 2시 또는 3시경에는 두락산에 있는 조선인민군 진지에 포사격을 개시했고, 38도선을 넘어 수동으로 진격하여 해주를 점령했다. 그들의 옹진지구 북진공격은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일으킨 결정적인 요인이다.

그러면 옹진지구 북진공격은 어떻게 국지전으로 확대되었을까? 한국군의 공격을 받은 조선인민군은 옹진지구에서 반격전을 벌인 것은 물론, 개성지구에서도 전투에 돌입했다. 개성 북쪽에 주둔한 조선인민군 제6사단 제13연대와 제15연대는 개성 남쪽에 주둔한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를 향해 포사격을 개시했다. 브루스 커밍스가 자신의 책 ‘코리아의 양지바른 곳’에 서술한 바에 따르면, 한국군 제1보병여단 제12연대 작전고문 조섭 대리고가 포성에 놀라 잠이 깬 시각은 6월 25일 오전 5시 30분경이었고, 조선인민군 제6사단 제13연대와 제15연대가 개성을 점령한 시각은 오전 9시 30분경이었다. 개성전투는 약 4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약 4시간 만에 한국군 방어선이 무너지고 조선인민군 보병부대가 개성 시내로 진격해오자, 대리고는 너무 급해서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자기 군용차를 몰고 개성 남쪽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 본부로 피신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가 옹진지구에서 38도선을 넘어 해주를 점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같은 날 조선인민군 제6사단 제13연대와 제15연대는 개성지구에서 38도선을 넘어 개성을 점령했다. 옹진지구에서 벌어진 소규모 무력충돌은 그렇게 동쪽으로 옮아가면서 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옹진지구에서 시작되어 개성지구와 춘천지구로 확대된 38도선 무력충돌이 국지전이었다는 사실이다. 1950년 6월 25일 국지전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를 제시한 사람은 미국 육군 군사연구소 실장이었던 로이 애플먼이다. 그는 1961년 미국 워싱턴에서 발행된 책 ‘남으로 낙동강, 북으로 압록강(South to the Nakdong, North to the Yalu)’에서 1950년 6월 25일 38도선 무력충돌에 투입된 조선인민군 병력이 38,000명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당시 38도선에 배치된 한국군 병력은 약 50,000명이었는데, 조선인민군은 6월 25일에 38,000명밖에 동원하지 않았으므로, 전면전이 아니라 국지전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인민군 육군 병력은 175,000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6월 25일에 38,000명밖에 동원하지 않았으므로, 전면전이 아니라 국지전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인민군은 지상공격기 일류신-10 93대를 실전배치했는데, 6월 25일에 지상공격기가 단 한 대도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전면전이 아니라 국지전이었다. 일류신-10은 23mm 기관포 2문이 장착되었고, 무유도 로켓탄 4발과 100kg짜리 폭탄 4발을 탑재하고, 시속 310km의 속도로 날아가는 지상공격기인데, T-34 전차보다 훨씬 더 강한 공격력을 가졌다. 

위에 열거한 사실들을 보면, 조선인민군은 1950년 6월 25일에 전면전계획에 따라 개전한 것이 아니라, 옹진지구 무력충돌이 확대된 것에 따라 국지전을 개시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4>

▲ <사진 4> 1950년 7월 초 인천 방어전에 참가한 한국군 전투원들을 촬영한 사진이다.카빈총을 들고 달려가는 전투원들 옆에 한자로 쓴 치과의원 간판이 보인다. 6.25전쟁은 황해남도 옹진지구에서 6월 23일 밤부터 6월 25일 새벽까지 계속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의 북진공격이 해주점령으로 이어지면서 38도선 다른 지역들에서 조선인민군의 반격전을 촉발시켰고, 그렇게 되어 격화된 국지적 내전으로 시작되었다. 6월25일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가 해주를 점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인민군 제6사단 제13연대와 제15연대는 개성을 점령했다. 옹진지구에서 벌어진 소규모 무력충돌은 그렇게 동쪽으로 옮아가면서 국지적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5. ‘서울해방작전’과 3일 간의 평온

1950년 6월 25일 새벽 옹진지구에서 한국군의 북진공격으로 일어난 소규모 무력충돌이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일어난 국지전에 참가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작전계획에 따라 한국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당시 조선인민군의 작전계획은 38도선 이남 전역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6.25전쟁은 국지전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북의 공식용어를 빌리면,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국지전은 ‘서울해방작전’이다. 만일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전쟁이 서울을 ‘해방’하는 국지전이 아니라 38도선 이남 전역을 ‘해방’하는 전면전이었다면, 북에서는 그 전쟁을 ‘남조선해방작전’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1948년 9월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1차 회의에서 채택된 헌법 제103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는 서울시”라고 명기되었다. 북이 자기의 수도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변경한 날은 1972년 12월 27일이다. 그날 최고인민회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변경한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했다. 그러므로 북의 시각에서 보면, 1950년 6월 25일 당시 자기의 수도인 서울이 반란세력에게 점령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반란세력이 점령한 수도를 탈환하는 ‘서울해방작전’은 북에게 더 이상 뒤로 미룰 수 없는 중대과업이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국지전은, 북의 표현을 빌리면, “이승만 괴뢰도당이 점령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서울을 해방하는” 제한적 해방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개성전투에 참가한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 제13연대 지휘관들 중에는 정치보위부 책임장교였던 최태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책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서 6월 25일을 전후하여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50년 6월 23일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 소속 대대장급 이상 군관들은 송악산 골짜기에 임시로 만든 천막회의장에 모였다. 그 회의에서 최태환은 당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이었던 김두봉의 연설을 들었다. 김두봉은 연설에서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상임간부회가 남조선 당국에 평화통일을 여러 차례 제안했건만, 번번이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략) 이제는 더 이상 앉아서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 동포를 해방시켜야 합니다. 이제 부득이 해방전쟁을 개시하게 되는데, 일주일 동안만 서울을 해방시킬 것입니다. 서울은 남조선의 심장입니다. 그러므로 심장을 장악하게 되면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후략)”  

위와 같은 사정을 파악하면, 한국군은 ‘서울해방작전’을 준비한 조선인민군을 옹진지구에서 먼저 공격하는 바람에 ‘서울해방작전’이 시작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태환의 회고담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개성전투에 참가한 조선인민군 제6사단 지휘관들은 서울 이남 지역이 표시되지 않고, 경기도 평택까지만 표시된 5만 분의 1 축적의 군사지도를 가지고 전투를 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조선인민군 제6사단 사단장이었던 방호산은 조선인민군이 서울로 진격하는 도중 한국군과 맞닥뜨리면 교전은 하되 결전은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38도선 이남 전역을 ‘해방’하는 전면전이 아니라 서울을 ‘해방’하는 국지전이었기에 그처럼 특이한 명령을 내린 것이다. 최태환의 회고담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제6사단은 개성을 ‘해방’하고 곧바로 서울로 진격하는 도중에 붙잡은 한국군 포로들에게 ‘서울해방작전’의 정치군사적 의의를 해설하고 즉각 풀어주었는데, 석방된 포로들 가운데 몇 사람은 즉석에서 조선인민군 전투대오에 합류했다고 한다.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해 진격하던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1950년 6월 27일 오후 5시경 서울 북쪽 경기도 고양군 미아리(현재 서울 성북구 미아동) 인근까지 진출했고, 한국군은 미아리고개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서울방어전에 돌입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아리 인근까지 진출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았다. <로동신문> 2016년 6월 28일 보도기사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1950년 6월 27일 밤에 서울 시내로 진격하지 않은 까닭은, 서울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서울에 있는 문화유적들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6월 25일 오전 5시에 공격을 하되 포사격은 하지 말고 ‘서울해방전투’를 개시하라는 작전명령이 하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어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6월 28일 오전 ‘서울해방작전’을 완료했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1950년 6월 28일 '서울해방작전'에서 승리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서울 시내로 진입하던 때, 조선인민군 제105땅크려단 소속 T-34 전차가 서울시내를 지나는 장면이다. 많은 청년학생들이 땅크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날 오전 5시 '서울해방작전'에 돌입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한국군이 구축한 미아리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해방'했다. 조선인민군 제107련대 제1대대장 김영 소좌가 중앙청 꼭대기에 공화국기를 게양했다. 류경수 려단장이 지휘한 조선인민군 제105땅크려단은 1950년 7월 오산전투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맞붙은 미국군을 격파하고, '대전해방전투'를 승리적으로 결속했다. 제105땅크려단은 1950년 7월 27일근위서울제105땅크사단으로 승격되었고, 2001년 5월 23일 사단명칭을 근위서울류경수제105땅크사단으로 바꿨다. 정전 이후 긴 세월이 흘렀건만, 북에서는 6.25전쟁 시기땅크전 지휘관으로 활약한 류경수 려단장의 전공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류경수 려단장은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으로 항일전쟁에 참가한 항일혁명투사였다.  

1950년 6월 28일 오전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은 공격을 중지했다. ‘서울해방작전’이 완료되었으므로, 공격을 중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최태환은 자기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그때부터 우리들은 별다른 교전이 없는 가운데 대기상태로 돌입했다. 대기상태란 김포전투가 사실상 끝난 6월 30일에서 7월 2일까지 주둔지에서 중앙의 명령을 기다리며 휴식, 정비, 정찰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 주둔지는 현재 새마을본부 자리 근방(서울 종로구 삼청동-옮긴이)이었다.” 

‘서울해방작전’이 완료되자 되찾은 서울의 평온은 너무 짧았다. 1950년 6월 29일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원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해군력과 공군력을 동원하여 조선인민군을 공격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작전명령을 받은 주일미공군기지의 B-29 폭격기들은 6월 29일 오후부터 한반도 상공으로 건너와 조선인민군 주둔지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한반도 공습은 코리언들끼리 싸운 국지전에 외국군대가 불법적으로 개입하여 전쟁의 성격을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바꿔놓은 중대사건이었다. 

오늘의 군사분계선과 마찬가지로, 당시 38도선도 두 개의 나라를 갈라놓은 국경선이 아니라 하나의 나라 안에 그어진 군사경계선이었으므로, 미국의 무력개입이 시작되기 전 6.25전쟁 초기의 국지적 내전에는 침략이나 침공이라는 개념이 사용될 수 없으며, 남침이니 북침이니 하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미국과 남측의 우익학자들과 우익선동가들은 “북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궤변을 70년 동안 붙들고 있다.   

북의 시각에서 보면,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전혀 다른 상황은, 미국이 조선인민군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자, 1950년 7월 1일부터 국지적 내전에 불법개입한 ‘미제침략군’을 상대로 조선인민군이 반침략전쟁에 나섰다는 것이다. 최태환의 회고록에 따르면, 1950년 6월 28일 국지적 내전에서 승리하고 종로구 삼청동에 주둔한, 자신이 배속된 조선인민군 제6사단 보병부대에게 한강 남쪽에 있는 영등포와 인천을 ‘해방’하는 전투를 재개하라는 새로운 작전명령이 하달된 때는 7월 3일 새벽이었다. 


6. 대남군사행동계획은 확대회의에서 비준된다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이 ‘서울해방작전’을 개시했던 때로부터 70년 세월이 흘렀다. 세월은 그렇게 멀리 흘러갔건만, 한국군과 조선인민군은 군사분계선에서 여전히 대치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옹진지구에서 한국군의 북진공격으로 일어난 소규모 무력충돌이 조선인민군의 ‘서울해방작전’으로 확전된 국지적 내전은 70년 간극을 뛰어넘어 오늘 군사분계선 무력충돌위험으로 또 다시 고조시켰다.    

6.25전쟁 70주년을 이틀 앞둔 2020년 6월 23일 평양에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회의 예비회의가 진행되었다.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김정은 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화상회의다. 군사분계선에서 무력충돌위험이 고조된 시점에 진행된 회의인 것으로 하여 세계의 이목이 평양에 집중되었다. 조선의 언론매체들이 예비회의에 관해 보도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회의 예비회의가 진행되었으므로, 앞으로 머지않아 제7기 제5차 확대회의가 진행될 것이다. 제7기 제4차 확대회의는 2020년 5월 23일에 진행되었었다. 과거기록을 보면,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는 2013년에 한 차례, 2014년에 한 차례, 2015년에 두 차례, 2018년에 한 차례, 2019년에 두 차례 진행되었다.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가 두 차례씩 진행된 2015년과 2019년은 군사분계선 무력충돌위험이 고조된 시기였다. <사진 6>

▲ <사진 6>이 사진은 2020년 5월 23일 김정은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이 당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4차 확대회의를 지도하는 장면이다. 과거사례를 보면, 군사분계선 무력충돌위험이 고조되었던 2015년과 2019년에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가 각각 두 차례씩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올해 2020년에도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가 두 차례 진행될 것이 확실하다. 이런 상황은 군사분계선 무력충돌위험이 또 다시 고조되었음을 말해준다. 머지않아 당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확대회의가 열리면,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제출한 대남군사행동계획이 비준될 것으로 예견된다.  

2)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번 예비회의에는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리병철 동지와 당중앙군사위원회 일부 위원들이 참가하였다”고 한다.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 13명 중에서 일부 위원들만 예비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이런 정황은 이번 예비회의가 중대안건을 의결하는 회의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런 까닭에 예비회의에서는 앞으로 진행될 확대회의에 상정할 “주요군사정책토의안들을 심의하였고”, 본회의에 제출할 보고서들와 결정서들, 그리고 “나라의 전쟁억제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국가적 대책들을 반영한 여러 문건들을 연구하였다.” 

3) 예비회의에서는 “조성된 최근 정세를 평가하고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제기한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을 보류하였다.” 

머지않아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가 소집되면,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들 이외에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는 당과 국가의 고위간부들도 참석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예비회의에는 당중앙군사위원회 일부 위원들만 참석했으므로, 상정된 안건들과 제출된 보고서들 및 결정서들을 비준하지 않고, 심의하거나 검토하거나 보류했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제출한 대남군사행동계획을 이번 예비회의에서 심의만 하고 비준하지 않은 까닭은, 머지않아 소집될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비준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에 제출한 대남군사행동계획은 매우 중대한 사안이므로 예비회의가 아니라 확대회의에서 비준되어야 마땅하다. 대남군사행동계획에 대한 비준이 이번 예비회의에서 보류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사정이 그런데도, 뭐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은 대남군사행동계획을 실행할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남군사행동계획 비준을 보류했을 것이라느니, 또는 김여정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은 대남군사행동계획을 추진했으나 김정은 당중앙위원회 위원장이 그 계획 비준을 보류한 것은 양면전술이라느니, 또는 대남군사행동계획 비준을 보류한 것은 문재인 정부에게 대화요청신호를 보낸 것이라느니, 또는 대남군사행동계획을 비준할 경우 미국이 무력으로 위협할 것을 우려해서 보류했을 것이라느니 하는 말이 되지 않는 억측과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런 가지각색 억측과 궤변을 뒤엎고, 당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확대회의가 머지않아 소집되면 조선인민군 총참모부의 대남군사행동계획은 비준될 것이다. 

2020/06/23

군사상황은 매우 엄중하다

[한호석의 개벽예감](400)
자주시보 2020년 06월 22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대적군사행동계획’ 작성하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2. 소규모 충돌이 확대되어 전쟁이 일어난다
3. 경무장 경찰대를 최전방에 배치한 사연
4. 미점령군이 후방으로 물러난 날 시작된 38도선 무력충돌
5. 최단공격선 차지하기 위한 개성지구전투
6. 전선을 축소하기 위한 옹진지구전투
7. 오늘의 군사상황은 매우 엄중하다


1. ‘대적군사행동계획’ 작성하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2020년 6월 17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이 담화를 발표했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담화에서 6월 17일 현재 “구체적인 군사행동계획들이 검토되고 있”는데, “대적군사행동계획들을 보다 세부화하여 빠른 시일 안에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의 비준에 제기하도록 할 것”이라고 하면서, “전 전선에 배치된 포병부대들의 전투직일근무를 증강하고 전반적 전선에서 전선경계근무급수를 1호 전투근무체계로 격상시키며 접경지역 부근에서 정상적인 각종 군사훈련들을 재개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담화에서 언급한 ‘1호 전투근무체계’는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무기고에서 각종 군사장비와 실탄을 꺼내 중무장하고 전투명령을 대기하는 최고 수위의 전투동원태세를 뜻한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담화에서 언급한 ‘대적군사행동계획’은 한국군을 공격하는 작전계획을 뜻한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담화에서 언급한 ‘정상적인 각종 군사훈련들’은 한국군을 공격하기 위한 전투행동훈련을 뜻한다. 

이 글이 <자주시보>에 발표되는 2020년 6월 22일 현재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에게 1호 전투근무체계를 아직 명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1호 전투근무체계를 명령하기 전에 ‘대적군사행동계획’을 세부적으로 작성한 다음, 김정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의 검토를 받고, 최종적으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의 비준을 받기까지 약 2주 정도 걸릴 것이다.  

이런 사정을 간파하면,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2020년 7월 중으로 중무장을 하고, 최고 수위의 전투동원태세를 취할 것이며, ‘대적군사행동계획’에 의거한 실전급 군사훈련을 실시할 것으로 예견된다. 그에 대응하여 한국군도 중무장을 하고, 비상태세에 돌입할 것이며, 대규모 군사훈련을 시작할 것으로 예견된다. 그렇게 되면, 전쟁발발에 아주 근접한 준전시상황이 조성되는 것이다. 

준전시상황이 조성되면, 군사분계선에서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나는 사태는 불가피해진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오늘까지 67년 동안 군사분계선에서 일어난 무력충돌사례는 이 글에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부지기수인데, 이제껏 군사분계선에서 일어난 수많은 무력충돌은 전쟁발발에 근접한 준전시상황이 아닌 평상적인 군사상황에서, 그야말로 우발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군사긴장만 고조시켰을 뿐 국지전으로는 비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을 ‘배신자’로 낙인한 조선인민군이 징벌보복의지를 불태우면서 1호 전투근무체계에 진입한 상황에서는 사정이 전혀 달라질 것이다. 우발적 무력충돌이 아니라 준비된 무력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만일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어느 한 쪽이 불꽃을 한 점이라도 날리는 순간, 불의의 교전이 벌어질 것이고, 그에 따라 쌍방의 화력증원부대들이 일제히 불을 뿜게 될 것이다. 준비된 무력충돌은 국지전으로 비화될 것이며,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확전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2. 소규모 충돌이 확대되어 전쟁이 일어난다

돌이켜보면, 70년 전에도 그러했다. 70년 전 북은 남측 정부를 ‘매국도당’을 낙인하면서 ‘국토완정’을 추구했고, 남은 북측 정부를 ‘괴뢰집단’으로 낙인하면서 ‘실지회복’을 추구했다. 당시 북에서는 국토완정이라는 말이 널리 쓰였고, 남에서는 실지회복이라는 말이 널리 쓰였다. 북의 국토완정론과 남의 실지회복론은 38도선 무력충돌을 불러일으켰다.   

그처럼 38도선 무력충돌이 격화되고 있었던 1949년 6월 30일 미점령군이 철수했다. <조선중앙일보> 1949년 7월 2일부에는 미국 육군성이 6월 30일에 발표한 철군성명서 전문이 실렸다. 철군성명서는 다음과 같다. “미국 육군성은 유엔 결의에 의거하여 한국으로부터 미주둔군철퇴를 완료하였다. 따라서 동 부대는 하와이 및 미국 본토로 철수하게 될 것이다.” 소련군은 1948년 12월에 이미 철수했고, 미국군은 1949년 6월 30일 잔여병력 8,000명을 철수하는 것으로 철군을 완료했다. 

소련군과 미국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한 것은 그 두 나라가 합의하여 그어놓은 38도선이 존재리유를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38도선이 존재리유를 상실했으므로, 민족주체력량으로 통일국가를 창건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소련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냉전의 시각에서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던 미국의 눈에는 우리 민족의 통일국가건설운동이 아시아대륙으로 남하하는 소련의 팽창주의전략으로 보였다. 당시 미국이 한반도문제와 관련하여 작성한 모든 정책문서들과 정보문서들은 우리 민족의 통일국가건설운동을 소련의 아시아 팽창주의전략으로 오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소련의 아시아 팽창주의전략를 반대, 배격한 미국은 38도선 이남지역에 친미극우세력을 내세워 우리 민족의 통일국가건설운동을 잔인무도하게 탄압하면서, 친미반공국가를 건설하려고 광분했다.   

38도선을 철폐하고 민주주의적 통일공화국을 건설하려는 전민족적 운동이 미국과 친미극우세력의 탄압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좌절되었을 때, 북은 38도선을 철폐한 국토완정을 필연적으로 선택했다. 그에 대항하여 남측 친미극우세력은 38도선을 철폐한 실지회복을 주장했다. <연합신문> 1949년 6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육군참모부장 정일권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38 이북의 실지회복에 있어서 가상 아닌 적이 엄연히 있다. 우리는 그 적을 압도적으로 단시일 내에 타도함으로써만 생명이나 물질의 막대한 손해를 최소한도로 멈출 수가 있는 것이고, 뜻하는 실지회복의 성스러운 민족과업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이 실지회복에 국민은 총궐기하여야 할 것을 거듭 강조하는 바이다.”

북의 국토완정의지와 남의 실지회복의지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사실상 준전시상태로 전변된 38도선에서 무력충돌이 격화되었다. <조선일보> 1949년 6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국방군 제1사단장 김석원은 6월 14일 국방부 출입기자단과 회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금번 38선 각지에서 발생한 사태를 계기로 작금의 시국은 이미 전시체제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될 시기에 도달하였다. 그 이유로는 공산군이 아직까지 그 병력의 주력을 38선 후방에 두었던 것이 최근에 이르러는 차츰 최전선에 배치하고 있는 점이며 이에 따라 (아)군도 38선 최전선에서 이에 대비상태에 놓이게 된 점이다. 또한 전쟁이라는 것이 어느 때나 소규모의 충돌이 확대되어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니만큼 예정대로 되는 것도 아니므로 어느 때 어느 지점에서 일어날런지 모르는 것이다.” 


3. 경무장 경찰대를 최전방에 배치한 사연

김석원이 우려했던 대로, 38도선에서 일어난 대규모 무력충돌은 국지전으로 비화되었고, 격화된 국지전은 내전으로 확전되었다. 1949년 내내 일어난 38도선 무력충돌은 1950년 6월 25일 마침내 내전으로 폭발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38도선 무력충돌은 6.25전쟁과 떼어놓을 수 없는, 그 전쟁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자료를 살펴보면, 38도선에서 무력충돌위험이 조성되기 시작한 때는 1948년 7월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에 주재하는 미국 <합동통신(UP)> 특파원 제임스 로우퍼가 전한 1948년 7월 22일 서울발 보도에 따르면, 1948년 7월 20일 미점령군 병사 5명이 38도선 남쪽 약 360m 지점에서 경계근무를 하면서 옥수수밭을 지나가는 순간, 옥수수밭에 매복하고 있던 민간인 복장을 한 저격병들이 갑자기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며 기습하는 바람에 미점령군 병사 1명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 이것은 38도선에서 미점령군이 전사한 최초의 사건이었으며, 그로부터 약 2년 뒤인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임을 예고한 사건이었다. 

1948년 8월 30일 오후 6시경 경기도 개성시 개풍군 여현리 38도선에서 남측 경찰대와 북측 경비대가 약 30분 동안 교전을 벌였다. 쌍방의 피해는 없었다고 했으니, 우발적인 총격전이었던 생각된다. 이것은 남과 북이 38도선에서 교전을 벌인 최초의 무력충돌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북측 경비대는 38도선과 선만(鮮滿)국경을 지키는 경비부대를 뜻한다. 1947년 2월 22일에 창설된 북조선인민위원회(처음에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라는 명칭을 썼음)는 내무국 산하에 3개 경비부대를 두었는데, 38도선을 경비하는 보안독립려단과 38경비보안대대, 그리고 선만국경을 경비하는 국경경비대대였다. 경무장을 한 38경비보안대대는 소규모 무력충돌에 나섰고, 중무장을 한 보안독립려단은 대규모 무력충돌에 나섰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되자, 보안독립려단은 조선인민군 보병사단으로 개편되었다. 이 글에서는 보안독립려단, 38경비보안대대, 조선인민군 보병사단을 구분하여 표기하지 않고 편의상 인민군 전투부대로 통칭한다.

내무국 산하 보안독립려단의 초대 려단장은 항일전쟁에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으로 참전한 최현 항일혁명렬사(1907~1982)였다. 그의 선친은 홍범도 항일부대에서 활동한 최화심 항일투사이고, 그의 아들은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최룡해 위원장이다. 그런데 1949년 8월 7일 국방군 육군본부 정훈감실 보도과는 개성지구 전황을 언론매체들에게 전하면서 여단장 최현 소장이 국방군이 발사한 81mm 박격포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했다. 이런 사례가 말해주는 것처럼, 당시 국방군 육군본부가 발표한 전황자료들은 국방군의 전과를 크게 부풀려놓고, 인민군의 인명손실을 터무니없이 과장해놓은 것이므로 신뢰성을 갖지 못한다. 당시 국방군 육군본부는 38도선 전황에 관한 보도를 전면적으로 통제했으므로, 그들이 발표한 것 이외에 실제 전황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여기에 나오는 국방군은 남조선국방경비대의 후신이다. 미점령군은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했고, 그것을 1946년 3월에 설치한 국내안전부(Department of Internal Security) 산하기구로 만들었다. 1948년 8월 15일 미점령군이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할 때, 남조선국방경비대는 육군으로 개편되었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한국군이라는 명칭은 사용되지 않았고, 국방군 또는 국군이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국방군으로 통칭한다. 

1949년 4월 4일 <동아일보>는 국방군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이 발표한 담화내용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38도선을 경비해오던 미점령군 부대들은 1948년 12월 15일 38도선 남쪽 후방지대로 물러났고, 1949년 1월 15일에는 더 남쪽에 있는 후방지대로 물러났는데, 바로 그때부터 국방군과 경찰대가 38도선을 경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유신문>이 1949년 5월 7일에 보도한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의 보고서에 따르면, “38선 부근을 경계하는 데 있어서 미국측과도 의논이 있어서 국방군을 배치하게 되면 충돌할 위험성이 많으므로 최전선에는 경찰대를 배치하고 후선에 국방군을 배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찰대는 사거리가 짧은 카빈총과 경기관총으로 무장했는데, 국방군은 사거리가 긴 M1총과 중기관총, 81mm 박격포와 105mm 곡사포로 무장했다. 


4. 미점령군이 후방으로 물러난 날 시작된 38도선 무력충돌

위에 인용한 신성모의 보고서를 보면, 당시 미점령군은 38도선 무력충돌이 전면전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경무장한 경찰대를 38도선 최전선에 배치했고, 중무장한 국방군은 경찰대 후방에 배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49년 5월 21일 국회 제3회 속기록에 따르면, 38도선 전투현장을 방문했던 국회의원 이진수는 국회에서 보고발언을 하는 중에 1949년 5월 4일 개성지구전투에서 국방군 전투부대의 공격에 밀린 인민군 전투부대가 38도선 북쪽으로 퇴각할 때, 국방군 전투부대가 추격전을 벌이려고 하자, 미점령군 군사고문 여러 명이 38도선을 넘어가지 말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추격전을 포기하고 후퇴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은 당시 미점령군이 자기들의 작전계획에 따라 자기들이 전쟁을 도발할지언정 자기들 밑에 있는 국방군이 38도선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무력충돌을 격화시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억제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70년 전의 미점령군이나 오늘의 미점령군이나 똑같다. 지금 주한미국군사령관은 자기들의 작전계획에 따라 자기들이 전쟁을 도발할지언정 자기의 작전통제를 받는 한국군이 군사분계선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무력충돌을 격화시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억제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조선인민군이 보복공격을 해도, 한국군은 제대로 반격하지 못한 채 얻어맞기만 하는 것이다. 

1949년 1월 15일 미점령군이 38도선 남쪽 후방지대로 멀리 물러나고, 경무장한 경찰대가 38도선 접경지에 배치되고, 중무장한 국방군이 경찰대 후방에 배치되었을 때, 인민군 전투부대들(보안독립려단과 38경비보안대대)은 38도선을 넘어와 경무장한 경찰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1949년 38도선 무력충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남측 친미극우세력의 시각에서는 북의 38도선 월선공격이 내란도발로 보였겠지만, 북측의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38도선을 철폐하고 국토완정을 실현하려는 무력투쟁이었다. 38도선 무력충돌은 얼마나 격렬했던가?  

1949년 4월 4일 <동아일보>가 보도한 채병덕의 담화에 따르면, 인민군 전투부대들은 1949년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한 달 동안 38도선을 넘어와 77차례 공격했다고 한다. 이것은 미점령군이 38도선 경비임무를 국방군과 경찰대에 인계하고 후방지대로 물러난 날부터 인민군 전투부대들이 38도선을 넘어오는 무력투쟁을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남측 내무부의 자료를 인용한 <동아일보> 1949년 4월 28일 보도를 보면, 1949년 3월 20일부터 4월 20일까지 한 달 동안 인민군 전투부대들은 경기도 38도선에서 연인원 1,132명이 공격했고, 강원도 38도선에서 연인원 1,410명이 공격했다. 그 기간에 38도선 무력충돌로 남측에 발생한 인명손실과 피해는 다음과 같다.  

경찰관 - 전사 1명, 부상 10명, 포로 2명 
국방군 - 전사 5명, 부상 9명, 포로 2명
민간인 - 사망 4명, 부상 7명, 포로 60명
경찰지서 소각 - 1개소

남측 공보처 자료를 인용한 <조선일보> 1949년 8월 2일 보도에 따르면, 1948년 12월 12일부터 1949년 6월 25일까지 인민군 전투부대가 38도선을 넘어와 공격한 회수는 212회이며, 공격에 참가한 연인원은 21,056명이라고 한다.

위에 서술한 38도선 무력충돌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949년 남측 언론매체들이 보도한 38도선 무력충돌상황을 보면, 38도선 전역에서 1년이 넘도록 격전이 거의 매일같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 38도선 전역은 사실상 전시상태였다. 38도선 무력충돌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전투는 개성지구전투와 옹진지구전투다. 


5. 최단공격선 차지하기 위한 개성지구전투

1949년 당시 개성은 38도선 이남 접경지역에 속했다. 개성 북동쪽는, 해발고가 488m인 송악산이 솟아있다. 지리공간적으로 서울에 가까운 개성과 송악산은 군사전략적 요충지로 되었다. 

1949년 5월 4일 오전 4시 30분 인민군 전투원 약 200명이 송악산을 넘어 쑥고개를 거쳐 개성 시내 성균관 부근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경찰대가 교전을 벌였지만, 인민군 전투부대에게 밀렸다. 인민군 전투부대는 개성시 신관리 부산동을 점령했고, 오후 3시경부터 박격포를 쏘면서 신관리 서북쪽에 있는 안화사 방면으로 전선을 확대시켰다. 인민군 전투부대는 오후 4시 30분경 안화사 인근 38도선에서 남쪽으로 300m 지점에 있는 송악산 292고지를 점령한 다음, 개성 북쪽을 향해 박격포와 기관총을 쏘았다. 전투현장에 증파된 국방군 전투부대가 반격전을 벌여 오후 6시경 292고지를 탈환했다. 인민군 전투부대는 오후 7시 30분경 공격을 재개할 기세를 보였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38도선 북쪽으로 퇴각했다. 
5월 5일 오전 11시경 인민군 전투부대는 쑥고개와 운학동에서 38도선을 또다시 넘어와 송악산 292고지와 155고지를 점령했고, 곡사포와 박격포와 기관총을 쏘면서 개성으로 진격하여 성균관 부근에 있는 신관파출소를 점령했다. 오후 2시경부터 개성 시내 조동 일대에서 국방군 전투부대와 인민군 전투부대가 약 500m의 거리를 두고 치렬한 시가전을 벌였다. 시가전은 오후 7시경까지 계속되었다. 
5월 6일 오전 11시 국방군 전투부대는 박격포를 쏘면서 송악산 292고지, 155고지, 107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공격했고, 개성 시내 선죽동과 천동 일대를 점령한 인민군 전투부대를 공격했다. 개성에서 시가전을 벌이던 인민군 전투부대는 오후 6시경 고랑포와 남천 부근의 38도선을 넘어 북쪽으로 퇴각했다.   
6월 13일 개성지구전투가 재개되었다. 당일 오후 8시경 인민군 전투원 약 120명은 송악산 483고지에 구축한 진지에서 국방군 진지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국방군 제1사단 제11연대가 출동하여 교전이 벌어졌다. 
6월 14일 오후 1시경 인민군 전투부대는 송악산 473고지에서 진지구축작업을 하고 있던 국방군 전투부대에게 박격포를 사격했다. 국방군 전투부대는 즉각 응사했고, 인민군 전투부대는 38도선을 넘어 북쪽으로 퇴각했다. 
7월 20일 오후 2시 40분 인민군 전투부대는 송악산 292고지에서 국방군 진지를 향해 박격포를 사격하여 사상자가 났다.
7월 22일 오후 4시 30분 국방군 전투부대는 송악산 475고지에서 송악산 최고봉인 488고지에 있는 인민군 진지를 향해 박격포를 사격하여 사상자가 났다.
7월 25일 오전 2시 국방군 전투부대는 488고지의 인민군 진지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당일 오전 11시 인민군 전투부대는 송악산 292고지에서 개성 북쪽을 향해 박격포를 사격했다. 
7월 26일 오전 5시 인민군 전투부대는 송악산 488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전투를 개시했다. 당일 오후 1시 인민군 포병부대는 곡사포와 박격포로 쏘면서 송악산 475고지의 국방군 진지를 공격했다.
7월 31일 인민군 포병부대는 송악한 북사면에 집결하여 개성 북쪽을 향해 곡사포와 박격포를 사격했고, 국방군 포병부대도 곡사포로 응사했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1949년 5월초부터 7월말까지 인민군과 국방군은 개성지구에서 치렬한 공방전을 계속했다. 개성지구전투는 최단거리축선을 차지하기 위한 무력충돌이었다. 북측 시각에서 보면, 개성-문산-파주-고양-서울로 이어지는 제1축선은 서울로 진격하는 최단공격선이고, 남측 시각에서 보면 그 축선은 평양으로 진격하는 최단공격선이다. 제2축선은 동두천-양주-의정부-서울로 이어진다. 

개성지구전투가 벌어졌던 때로부터 71년이 지난 지금 서부전선에 주둔하는 조선인민군 2군단 관하 전투부대들이 개성공업지구에 다시 배치된다. 북은 개성공업지구가 개발되기 직전, 그 지역에 주둔하던 조선인민군 2군단 관하 전투부대들을 후방으로 10km 이동하여 재배치했었는데, 이번에 남북공동련락사무소를 폭파하고, 조선인민군 2군단 관하 전투부대들을 개성공업지구에 다시 배치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선인민군은 71년 전 무력충돌을 일으켰던, 개성-문산-파주-고양-서울로 이어지는 최단공격선을 복원하는 것이고, 서울 전역은 조선인민군 2군단 포병부대들이 조준한 대구경방사포와 대구경자행포 사정권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다. 


6. 전선을 축소하기 위한 옹진지구전투

1949년 당시 황해남도 옹진군, 강령군, 연안군은 38도선 이남에 속했고, 백령도도 38도선 이남에 속했다. 지도를 보면, 백령도 동쪽에 옹진군과 강령군이 있다. 옹진군과 강령군이 옹진반도를 이룬다. 옹진반도와 연안군 사이에 해주만이 있다. 옹진반도는 다른 38도선 이남지역으로부터 섬처럼 고립되었기 때문에 서울이나 개성에서 육로로 왕래하지 못했다. 그래서 국방군은 군사장비와 군수물자를 인천항에서 배에 실어 옹진반도까지 운반해야 했는데, 항로는 12시간이나 걸렸다. 

만일 북이 섬처럼 고립된 옹진반도를 점령하면, 38도선의 길이가 약 120km나 줄어든다. 또한 그 지역은 당시 손꼽히는 미곡생산지였다. 그러므로 북측의 시각에서 보면, 국방군과 경찰대가 방어하기 힘든 옹진반도를 점령하여 미곡생산지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옹진지구전투는 38도선 무력충돌 중에서 가장 먼저 벌어졌고,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1948년 7월 2일 인민군 전투부대는 옹진경찰서를 습격했다. 경찰대와 인민군 전투부대 사이에서 여러 시간 동안 격전이 벌어졌는데, 옹진경찰서 지서주임이 전사했다. 이것이 옹진반도에서 벌어진 첫 무력충돌이었다. 

1949년 4월 27일 새벽 인민군 전투부대는 옹진군 38도선을 넘어와 옹진군 교정면 비파리를 점령했다. 
4월 29일 오후 1시 50분 국방군 전투부대는 비파리를 탈환하기 위한 반격전을 개시하여 오후 6시경에 탈환했고, 현지 경찰대에게 치안을 맡겼다. 
5월 4일 인민군 전투원 약 500명은 옹진군 38도선을 넘어와 옹진군 서석면 경찰지서를 공격했다.
5월 13일 오전 5시경 인민군 전투부대는 옹진군 가천면 경찰지서를 공격했고, 5월 17일부터 19일까지 옹진군 교정면 경찰지서와 벽성군 월록면 경찰지서를 연속 공격했으며, 38도선 남북에 걸쳐있는 두락산에 진지를 구축했다.   
5월 17일 인민군 전투원 약 500명은 옹진군 서석면 문정리 38도선을 넘어와 경찰지서를 공격하고 문정리를 점령했다. 
5월 18일 오전 8시, 정오, 오후 3시 인민군 포병부대는 개성을 출발하여 연안군을 지나는 열차를 행해 포사격을 가해 열차운행을 5월 19일 오후 4시까지 중단시켰다. 
5월 19일 오전 6시 인민군 전투원 약 200명은 황해남도 배천군 은천면 량청리와 치악산 방면에서 맹렬한 사격을 가하며 배천읍으로 진격했는데, 오전 11시 50분 개성지구에 주둔하는 국방군과 경찰대가 현지에 증파되어 량청리 방면에서 반격전을 벌였고, 오후 1시 30분경에는 배천읍 방면에서 반격전을 벌였으며, 4시 30분 이후 쌍방은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당일 새벽 인민군 전투부대는 배천읍 공격에 호응하여 황해남도 연백군 운산면 우포리와 예성강 왼쪽에 있는 오봉산으로 진격하여 오봉산을 점령했다. 인민군 포병부대는 오봉산 103고지, 209고지, 116고지, 103고지에서 예성강 철교를 향해 곡사포와 박격포를 쏘았다. 
5월 20일 오전 11시경 개성지구에 주둔하는 국방군 전투부대가 증파되어 연백군 운산면 우포리를 탈환했고, 오봉산에서는 쌍방이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5월 21일 새벽 1시경 인민군 전투부대는 38도선을 넘어 옹진군 교정면 경찰지서, 가천면 경찰지서, 서석면 경찰지서, 옹진읍 은동리 경찰지서를 공격했고, 당일 새벽 5시경 인민군 전투원 약 100명은 옹진군 38도선에서 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국사봉을 점령하고 박격포와 중기관총을 사격했다.  
5월 23일 오후 6시경 옹진군에서 전투를 벌이던 인민군 전투부대는 태탄군 방면에서 증파된 전투부대와 합세했다. 
5월 24일 오전 6시 증강된 인민군 전투부대는 박격포와 중기관총을 쏘며 총공격을 개시하여 옹진군 교정면 경찰지서, 가천면 경찰지서, 벽성군 대차면 경찰지서를 점령했다. 
5월 25일 오전 9시 국방군 전투부대는 증파부대와 합세하여 반격전을 벌인 끝에 옹진군 가천면 경찰지서와 벽성군 대차면 경찰지서를 탈환했다. 
5월 26일 인민군 전투원 약 1,500명은 옹진군 교정면 비파리 38도선을 넘어와 그 일대를 점령했다. 
5월 27일 인민군 전투부대는 38도선을 넘어 황해남도 태탄군, 황해남도 벽성군의 가좌면 취야리와 장곡면 죽천리, 그리고 해주시를 향해 세 방향에서 진격하여 그 일대를 여러 곳 점령하고 진지를 구축했다. 
5월 29일 오전 8시경 인민군 전투원 약 2,000명은 옹진군 우치지서를 습격하고 북면 삼산리 피재고개로 진격했다. 옹진군에 주둔하는 국방군 제1사단 제12연대는 반격전을 벌였다. 
6월 1일 오전 5시 국방군 제1사단 제12연대는 증파된 제13연대와 합세하여 반격전을 계속했다. 인민군 전투부대는 국사봉 246고지에서 포사격을 가해 국방군측에서 사상자가 많이 났다. 
6월 4일 오후 4시경 인민군 항공대 소속 단발비행기 두 대가 38도선에 걸쳐있는 두락산 상공에 나타나 약 30분 동안 정찰비행을 한 뒤 북쪽으로 사라졌다. 
6월 5일 오후 6시 국방군 전투부대는 38도선을 넘어와 옹진군 동북쪽에 있는 소고개(우치)를 점령했다. 
6월 6일 국방군 전투부대는 옹진군 동북쪽에 있는, 해발고가 700m인 까치산에 구축된 인민군 진지를 공격, 탈환했다.
6월 7일 새벽 국방군 전투부대는 반격전을 벌여 황해남도 벽성군 대차면 은동리를 탈환했다. 
6월 12일 밤 국방군 전투부대는 인민군 전투부대가 점령한 국사봉을 빼앗기 위한 제2차 탈환전을 개시했다. 인민군 전투부대는 국방군 전투부대의 공격을 막아내며 국사봉을 지켰다. 
6월 14일 황해남도 벽성군 월록면 장둔리에서 국방군 보도원이 인민군 전투원들에게 확성기방송을 통해 투항을 권고하자 인민군 전투부대는 즉각 공격해왔고 약 2시간 동안 전투가 벌어졌다. 그와 때를 같이 하여 벽성군 대차면 은동리에서도 인민군 전투부대가 국방군 진지를 공격했다.   
6월 19일 오전 5시 50분 국방군은 곡사포를 쏘면서 국사봉 진지를 또 다시 공격했고, 인민군 전투부대는 국사봉 진지에서 박격포와 중기관총으로 응사했다. 
6월 27일 국방군 전투부대는 두락산, 견불산, 은파산, 까치산에 있는 인민군 진지들을 공격했으나, 인민군 전투부대의 반격에 밀려 퇴각했다.   
6월 30일 평양과 해주에서 옹진점령축하인민대회가 동시에 열렸다.
7월 중순부터 인민군 전투부대는 국사봉과 계명산에 집결하여 벽성군 대차면 은동리에 있는 국방군 진지를 점령하기 위해 매일밤 야간습격을 계속했다. 
7월 19일 오전 5시 국방군 전투부대는 국사봉에 있는 인민군 진지들을 공격했다. 
7월 20일 새벽 인민군 전투부대는 국사봉에서 공격을 개시했고, 전투는 7월 22일 오전 8시까지 계속되었다. 
7월 22일 인민군 전투부대는 벽성군 장곡면에 있는 경찰지서와 그 인근에 있는 북산고지를 점령했다.  
8월 4일 오전 5시 인민군 2개 보병련대와 포병부대는 옹진시를 점령하기 위한 공격전을 개시했다. 인민군  포병부대는 120mm 중박격포와 122mm 곡사포를 쏘면서 국방군 방어선을 뚫고 옹진시 외곽까지 진격했다. 이 전투에서 국방군 2개 중대가 궤멸당했다. 
8월 5일 오전 2시 국방군 2개 보병련대와 105mm 곡사포부대는 옹진지구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상륙정을 타고 인천항을 출항하여 옹진군 해안에 도착했으나,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심해 상륙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당일 오전 미군사고문단장 윌리엄 로버츠는 국방장관 신성모와 참모총장 채병덕을 불러 긴급작전회의를 진행했다. 이 작전회의에서 신성모는 옹진시가 인민군에게 점령되면, 그에 대한 보복으로 국방군은 38도선에서 북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강원도 철원시를 점령해야 한다고 미군사고문단장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미군사고문단장은 신성모의 건의를 묵살했다. 왜냐하면, 서부전선을 방어하는 국방군 병력을 옹진지구와 철원지구로 분산시키는 경우, 개성-문산-파주-고양-서울로 이어지는 제1축선과 동두천-양주-의정부-서울로 이어지는 제2축선의 방어력이 약화될 것이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인민군은 그 두 축선을 타고 서울로 진격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국방군 전투부대는 인천항을 출항한 증원부대가 옹진반도에 상륙하여 합세한 덕에 인민군 전투부대를 옹진시 외곽에서 가까스로 물리치고 옹진시를 방어할 수 있었다.  
10월 14일 새벽 인민군 전투부대는 황해남도 벽성군 용정리 인근에 있는 은파산을 공격했다. 해발고가 284m인 은파산은 용정리 서남쪽에 있다. 은파산공방전은 11월 15일까지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7. 오늘의 군사상황은 매우 엄중하다

개성지구전투와 옹진지구전투는 1949년 내낸 계속된 38도선 무력충돌 중에서도 전투규모가 가장 컸고, 전투기간도 가장 길었다. 그 이외에도 경기도 장단군, 포천군, 가평군, 그리고 강원도 홍천군, 춘천 북부, 강릉군 등에서 전투가 계속 벌어졌다. 이처럼 38도선 전역에서 1년 이상 격렬히 벌어진 전투에서 국방군은 화력과 병력의 열세로 계속 밀렸다. 그래서 1949년 7월 9일 남측 치안국장은 38도선에서 남쪽으로 20km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통행제한지구로 설정했다. 

38도선 무력충돌의 전개양상이 또다시 반복될 리는 없지만,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이한 오늘, 군사분계선에서는 70여 년 전에 일어났던 것과 매우 유사한 무력충돌위험이 조성되고 있다. 71년 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 조선인민군의 전투력은 한국군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이것은 주관적 평가가 아니라 객관적 평가다. 

이를테면, 2004년 9월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보좌관은 국회 본관에 있는 국방자료열람실에서 2급 군사기밀자료를 열람하고 나서 한국군이 단독으로 조선인민군과 싸우면 보름 만에 한국군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2013년 11월 5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한 국방정보본부장은 한국군과 조선인민군이 일대일로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기느냐는 질문에 한국군이 질 것이라고 답변했다.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방어훈련이 아니라 공격훈련을 해왔고, 한국군은 공격훈련이 아니라 방어훈련을 해왔기 때문에 조선인민군의 공격력은 한국군의 공격력보다 우세하다. 또한 조선인민군은 사상무장으로 단결되어 있고, 기강도 강하지만, 한국군은 사상무장이라는 말조차 알지 못하고, 기강도 무척 해이해졌다. 더욱이 조선인민군은 독자적인 작전계획과 정찰정보를 가졌기 때문에 임의의 시각에 독자적으로 전쟁을 할 수 있지만, 한국군은 미국군의 작전계획과 정찰정보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전쟁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처럼 허약한 한국군에게 보복공격을 가하는 ‘대적군사행동계획’이 지금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기획실에서 작성되는 중이다. 조선인민군 전투원들이 동해안에서 서해안에 이르는 비무장지대 북측 관할지역에 산재된 민경초소 150개소에 배치되고 있다. 군사상황은 매우 엄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