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27

미국 육군장관 맥휴즈의 비공개 전선시찰

<연재> 한호석의 진보담론 (224)
통일뉴스 2012년 08월 27일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군사훈련이 아니라 전쟁연습이다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진 것처럼, 2012년 8월 20일에 시작된 ‘을지 프리덤 가디언’이라는 작전명칭을 가진 대북전쟁연습이 이 글을 집필하고 있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대북전쟁연습은 오는 8월 31일까지 계속된다.

주한미국군사령부 2012년 8월 21일 보도자료에 따르면, 미국 본토 및 태평양 여러 지역에서 한반도 전선으로 수송된 병력 약 3,000명을 포함하여 30,000명 이상의 미국군 병력이 올해 ‘을지 프리덤 가디언’에 동원되었다. 장거리 수송작전으로 한반도 전선에 출동한 미국군 병력 약 3,000명은, 주한미국군사령부 2012년 8월 20일 보도자료에 인용된 제8군 부사령관 월터 골든(Walter M. Golden)의 말에 따르면, “현역과 예비역 및 주방위군 병력”이다.

그런데도 미국 군부는 이제껏 그렇게 해온 것처럼 올해도 ‘을지 프리덤 가디언’이 “방어적 성격의 연례훈련”이라고 주장하였다. 만일 미국 군부가 30,000명 병력을 미국 본토에서 동원하였다면 방어적 성격의 훈련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현역과 주방위군은 물론이고 예비역까지 동원하고, 게다가 장거리 수송작전으로 태평양을 건너 적진 바로 앞에까지 나아가서 대규모 공격전을 열흘 동안이나 맹렬히 연습하면서 무슨 방어적 성격의 훈련을 운운하는 것은 거짓말 중의 거짓말이다. 그 거짓말을 뒤집어보면, ‘을지 프리덤 가디언’이야말로 미국의 대북전쟁계획인 ‘작전계획 5029’는 말할 것도 없고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비공개 대북전쟁계획들까지 종합적으로 연습하는 침략적 성격의 전쟁연습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훈련(training)과 연습(exercise)의 차이를 지적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군사학에서 말하는 훈련이란 어떤 군사단위가 자기의 전략전술을 숙달하는 군사활동을 뜻하고, 연습이란 어떤 군사단위가 자기의 전쟁계획과 군사교리에 따라 실전과 유사하게 시행하는 군사활동을 뜻한다. 훈련과 연습을 이처럼 구분하면, ‘을지 프리덤 가디언’이 군사훈련을 넘어선 전쟁연습이라는 사실이 자명하게 드러난다.

미국군 홍보국(AFPS) 2012년 8월 24일 보도자료에 따르면, 주한미국군사령관 제임스 서먼(James D. Thurman)은 ‘을지 프리덤 가디언’이 “현실적인 시나리오에 바탕을 두고, 범정부 차원에서 수행할 중요한 임무를 훈련”는 것이라고 언급하였으며, 다른 주한미국군 지휘관들은 ‘을지 프리덤 가디언’에서 군사지휘관들이 작전기획, 작전지휘 및 통제, 군사정보활동, 군수지원을 훈련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 보도자료에서는 훈련과 연습을 혼동하여 ‘을지 프리덤 가디언’을 군사훈련이라고 서술하였지만, 그들의 말에서 명백히 드러난 것처럼 그것은 군사훈련이 아니라 명백한 전쟁연습이다.

미국 군부는 ‘을지 프리덤 가디언’이 침략적 대북전쟁연습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전쟁연습상황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는다. 군사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언론공개를 피하는 측면도 물론 있지만, 다른 대북전쟁연습은 취재진에게 형식적으로나마 극히 일부 상황을 공개하였으면서도 올해 ‘을지 프리덤 가디언’은 철저한 보도통제를 시행하고 있다. 그처럼 철저한 보도통제를 시행하는 바람에 이 땅의 대중들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파괴하는 침략적 대북전쟁연습이 실시되고 있는지 마는지 너무 무관심하다.


미국의 우주정찰위성과 대북전쟁연습

미국 공군은 8억2,300만 달러를 들여 개발한 우주거점 우주정찰위성(SBSSS)이 2012년 8월 20일 마침내 정상가동을 개시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미국에 하나밖에 없고, 따라서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그 최신형 위성은 지상을 정찰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궤도를 정찰하는 특수위성이다. 미국은 이 특수위성을 가동함으로써 ‘우주거점 우주정찰체계(Space Based Space Surveillance System)’를 수립하고 우주작전능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우주거점 우주정찰위성은 지구궤도를 정찰하면서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군사작전을 지원한다고 한다. 구체적인 성능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매우 강력한 성능을 지닌 특수정찰위성인 것으로 보인다.

우주거점 우주정찰위성은 원래 2010년 9월 25일에 발사되었는데, 근 2년 동안 지구궤도를 돌다가 이제서야 정상가동을 개시하였다. 미국 공군은 그 위성을 발사하여 지구궤도에 올려놓고 나서도 약간의 기술적 결함을 바로잡으며 정상가동을 준비하는 바람에 2년이 지난 2012년 8월 20일에 가서야 정상가동을 개시하였다고 밝혔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힘들다.

지구궤도를 도는 우주거점 우주정찰위성이 정상가동을 개시한 날, 공교롭게도 이 땅에서는 ‘을지 프리덤 가디언’ 대북전쟁연습이 시작되었다. 미국이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특수정찰위성의 정상가동과 세계 최대 규모의 전쟁연습을 같은 날 시작한 것은 우연한 일이었을까? 우주거점 우주정찰위성 정상가동과 ‘을지 프리덤 가디언’ 시작이 시간적으로 일치한 것은, 미국이 이번 대북전쟁연습에 사상 처음으로 우주거점 우주정찰위성을 동원하였음을 말해준다. 그 내막은 아래와 같다.

<국방일보> 2012년 8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태평양공군사령부 예하 우주작전부장 앨런 레볼즈(Alan F. Rebholz)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을지 프리덤 가디언’에 참가하여 한미 공군 우주협조팀을 구성하고 우주작전훈련을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태평양공군사령부 우주작전부는 무엇을 하는 곳일까?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공군기지(Los Angeles Air Force Base)에는 세계 각국에서 쏘아올린 수많은 위성들이 떠도는 지구궤도를 감시하고 적국의 위성공격에 대처하는 우주우세체계비행단(Space Superiority System Wing)이 배치되어 있는데, 태평양공군사령부 예하 우주작전부는 바로 그 우주우세체계비행단에 배속된 태평양지역 우주작전단위다.

위의 보도에 따르면, 태평양공군사령부 우주작전부는 ‘을지 프리덤 가디언’에 참가하여 북측의 위성항법체계(GPS) 교란공격과 같은 위성체계공격에 대응하는 우주작전을 연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군이 한반도 전선에서 벌이는 그런 우주작전연습을 뒤집어보면, 인민군이 지상에서 미국의 통신위성과 정찰위성을 공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인민군의 위성공격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레이저무기에 관한 단편적인 정보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신동아> 1994년 5월호에 실린 관련기사에 따르면, 인민무력부 총참모부 직속 ‘710연구소’에서는 약 250명 연구원이 레이저무기를 연구개발하고 있다고 한다. 레이저무기는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지만, 위성공격에 가장 적합한 무기다. 인민군이 이미 1990년 초반에 250명 고급두뇌를 동원하여 레이저무기 개발사업을 추진하였으니, 그로부터 근 20년이 지난 오늘 인민군이 레이저무기 개발능력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올해 ‘을지 프리덤 가디언’에서 드러난 미국의 우주작전연습은 태평양공군사령부 우주작전부를 참가시킨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콜로라도주 피터슨 공군기지(Peterson Air Force Base)에 배치된 제3육군우주지원단(Army Space Support Team 3)도 참가시켰다. 제3육군우주지원단은 우주군 기능강화와 우주통제를 담당하는 미국 육군 우주 및 미사일방어사령부 겸 육군전략군사령부 예하 부대다. 제3육군우주지원단은 감시, 정보, 정찰, 지형분석, 환경점검, 우주자산활용에 특수위성체계를 사용한다. 이번에 ‘을지 프리덤 가디언’에 참가한 제3육군우주지원단은 북측의 미사일공격에 대처하는 미사일방어체계를 가동하는 연습을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올해 ‘을지 프리덤 가디언’에서 미국 공군과 육군이 그처럼 우주작전을 실전상황과 똑같이 연습한 것은 미국군이 인민군과의 대결에서 우주작전능력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말해준다. 미국은 북측과의 군사대치상태를 우주작전분야로까지 넓혀놓은 것이다. 북측의 ‘선군혁명’과 미국의 전쟁전략 사이에 형성된 첨예한 대치전선은 거의 무한대로 확장되는 듯하다.


미국 육군장관은 왜 비공개 전선시찰을 하였을까?

소문도 없이 남측을 방문한 미국 육군장관(Secretary of the U.S. Army) 존 맥휴즈(John McHugh)가 ‘을지 프리덤 가디언’ 직전에 비공개 전선시찰을 하고 돌아갔다. 언론 취재망을 피해 전선을 시찰하고 돌아간 육군장관 맥휴즈의 비공개 행각은, 미국 육군 홍보국(ANS) 2012년 8월 22일 보도자료를 통해 알려졌다.

맥휴즈는 2009년 9월 21일에 제21대 육군장관에 임명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미국 연방하원 군사위원회 소속 하원의원으로 재직하였다. 현역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 임명되는 육군장관직은 군정권을 행사하는 직책이다. 군령권은 육군사령관이 행사한다.

‘을지 프리덤 가디언’이 임박한 시점에, 미국 육군장관이 한반도 전선을 시찰하고 대북전쟁연습 준비상황을 점검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의 비공개 전선시찰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전선시찰과 대북전쟁연습 준비상황 점검을 마친 육군장관 맥휴즈는 2012년 8월 20일 하와이에 있는 태평양육군사령부로 곧장 이동하여 태평양육군사령부 부사령관 로저 매튜스(Roger Mathews)를 만나 태평양지역의 지상군 작전상황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육군장관 맥휴즈와 부사령관 매튜스의 회담에서는 “태평양지역에서 우리의 새로운 전략적 재균형(new strategic rebalancing)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밝혔다. 그가 남긴 그 한 마디 말만 가지고서는 그의 비공개 시찰이 무엇을 뜻하는지 밝혀내기 힘들다. 다른 정보를 첨부하여 그 내막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육군장관 맥휴즈가 올해 들어 시행한 군사행정에 관한 보도자료들 가운데는, 2012년 1월 23일에 그가 ‘일반명령 2012년 제2호’를 하달하였다는 보도자료가 눈길을 끈다. 그 명령서의 내용은 제8군사령부를 작전급 야전군본부로 지명한다는 것이었다. 원래 서울 용산기지에 있는 제8군사령부는 작전통제권이 없고 행정권만 있는 구성군사령부였는데, 올해 1월 23일부터 야전사령부로 전환된 것이다. 미국 군부가 제8군사령부를 행정사령부에서 야전사령부로 전환시킨 것은, 주한미국군 육군과 한국군 육군에 대한 연합작전통제권을 그 사령부에 맡겼다는 뜻이다. 이로써 주한미국군 육군과 한국군 육군은 제8군사령관 존 존슨(John D. John)의 휘하로 들어가 그의 작전통제를 받게 되었다.

미국 군부가 제8군사령부를 행정사령부에서 야전사령부로 전환시킨 것은, 2012년 1월 5일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Barack H. Obama)가 이례적으로 참석한 가운데, 국방장관 리언 패내타(Leon E. Panetta)와 합참의장 마틴 뎀프시(Martin E. Dempsey)가 미국 언론에 공개한 ‘방위전략지침(Defense Strategic Guidance)’에 따른 개편조치다. 여기서 말하는 ‘방위전략지침’이란 <미국의 세계 영도력 유지: 21세기 방위를 위한 우선순위(Sustaining U.S. Global Leadership: Priorities for 21st Century Defence)>라는 제목의 8쪽짜리 문건에 담긴 것이다.
 
이 문건에 담긴 ‘방위전략지침’에 대해서는 2012년 3월 26일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 ‘두 개의 전쟁전략 폐기와 미국의 군사패권’에서 자세히 논하였다. 나는 그 글에서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방침을 해설하면서, “오바마 행정부가 장기화된 반란진압전에 재래식 지상군과 해병대 병력을 투입하는 것 대신에, 반테러 비정규전(counterterrorism irregular war)에 적합한 맞춤형 전력에 더 집중하기를 원한다"고 지적한 <워싱턴 포스트> 2012년 1월 5일 보도기사를 인용한 바 있다.

위의 정보를 종합하면, 미국 군부가 기존 전력을 반테러 비정규전에 적합한 맞춤형 전력으로 재편하는 ‘방위전략지침’에 따라 제8군사령부를 행정사령부에서 야전사령부로 전환시켰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주둔하는 제8군은 이른바 ‘반테러 비정규전’에 적합한 작전단위로 전환된 것이다.

그런데 미국 군부가 말하는 ‘반테러 비정규전’이란 적국에 침투하여 테러를 자행하고 급변사태를 일으켜 정권을 전복하는 새로운 형태의 무력침공작전이다. 그런 새로운 형태의 무력침공작전을 정밀한 전쟁계획으로 작성해놓은 것이 바로 ‘작전계획 5029(Operation Plan 5029)’다.

미국은 대북테러로 급변사태를 일으켜 북측 정권을 전복하려는 ‘작전계획 5029’를 작성해놓고, 제8군을 그 대북전쟁계획을 실행에 옮길 작전단위로 개편한 다음, 야전군사령부로 전환된 제8군사령부가 작전통제하는 대북전쟁연습인 ‘을지 프리덤 가디언’을 지금 강행하는 중이다. 얼마 전 리비아에서 테러와 급변사태를 일으켜 카다피 정권을 전복하였고, 지금은 시리아에서 아싸드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반군’이라고 불리는 테러조직에게 자금과 무기를 대주며 끔찍스런 급변사태를 일으키고 있는 미국이 한국군은 물론 일본 자위대까지 이 땅에 끌어들이는 ‘작전계획 5029’를 실행에 옮길 야전사령부를 내세워 대북테러와 급변사태를 일으킬 실전급 전쟁연습을 강행하고 있으니, 이런 내막을 알게 되면 어찌 경악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리비아와 시리아에서 테러와 급변사태를 일으킨 것도 성에 차지 않아, 이제는 일본 자위대까지 끌어들여 대북테러와 급변사태를 일으키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미국이야말로 평화와 안정을 파괴하는 제국주의국가테러리즘(imperialist state terrorism)의 음험한 소굴이 아니면 무엇인가! 21세기에 들어와 국가테러리즘과 결합한 제국주의는 반미정권 또는 사회주의정권을 전복하려고 광분하면서 무력침공의 창끝을 한반도에 겨누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역사학자이며 언론인인 닉 터스(Nick Turse)가 2011년 8월 4일 발표한 글 ‘120개 나라에서 벌어지는 비밀전쟁 - 미국 국방부의 신흥권력집단(A Secret War in 120 Countries - The Pentagon's New Power Elite)’에 들어있는 충격적인 정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 특수작전사령부(SOCOM) 예하에 배속된, “초법적인 살인납치 군사행동(extra-legal ‘kill/capture’ campaign)”을 전문으로 하는 합동특수작전사령부(JSOC)는 “거의 산업규모의 반테러 살해기관(almost industrial-scale counterterrorism killing machine)”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부대는 해외 곳곳에 비밀감옥을 만들어놓고, 다른 나라의 반미저항자들을 ‘테러범’으로 낙인 찍어 납치, 구금, 고문을 일삼고 있을 뿐 아니라, “암살, 반테러습격, 장거리정찰, 정보분석, 외국군 훈련, 대량파괴무기 반확산작전” 등을 벌이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암살은 반미저항을 이끄는 지도급 인사를 암살하는 것이고, 반테러습격이란 반미저항조직을 습격한다는 뜻이고, 외국군 훈련이란 미국으로부터 자금과 무기를 받는 친미테러집단을 훈련시킨다는 뜻이고, 대량파괴무기 반확산작전이란 적국 정권의 전략무기를 탈취하거나 전략무기개발을 폭력으로 저지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극악무도한 살인집단에게 배정된 연간 예산은 2011년 9월 현재 63억 달러이며, 전 세계 120개 나라에 침투시킨 병력은 과거에 비해 네 배로 급증하였다. 닉 터스는 자기의 글에서, 그러한 특수작전을 지휘하는 야전사령부가 전 세계에 세 군데 배치되었는데, 남측, 독일, 하와이가 바로 그런 배치지역이라고 특정하였다.

닉 터스의 그런 지적은 제8군 예하에 주한미국군특수전여단이 배속되어 있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주한미국군특수전여단은 ‘작전계획 5029’에 따른 대북테러를 전문으로 하는 여단급 작전단위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제8군은 자기 예하에 배속된 제2보병사단(제1전투여단, 제210화력여단, 제2전투항공여단)의 전력증강보다 특수전여단의 전력증강에 더욱 힘쓰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미국의 ‘방위전략지침’에 따라, 한국군 육군을 작전통제하게 된 제8군사령관 존슨은 한국군 가운데 가장 강한 부대라는 제3군을 확실하게 통제하기 위한 군사협정을 체결하였다. 주한미국군사령부 2012년 6월 7일 보도자료에 따르면, 2012년 6월 6일 제8군사령관 존슨이 한국군 제3군사령관 이홍기와 “역사적인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 협정은 “급변사태 및 정전상태에 대처하는 (미국군 제8군과 한국군 제3군의) 연합작전능력을 높이고, 두 부대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하여 “결연관계를 맺고, 상호연합하여 실탄사격훈련 및 소단위훈련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작전계획 5029’의 핵심개념인 ‘급변사태 대처’라는 개념이 미국군 제8군과 한국군 제3군의 협정에 포함되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인민군에게 참패한 미국군 제8군

미국군 제8군은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6월 10일에 창설되어 지금까지 68년 동안 존속해왔다. 68년 전 창설 당시 제8군은 ‘태평양의 전승자(Pacific Victors)’라는 제명(motto)를 내걸었지만, 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패전경험이 있다. 제8군 68년사에 등장하는 패장 세 사람이 겪은 쓰라린 경험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찰스 스미스(Charles B. Smith)는 태평양전쟁이 계속되던 1942년 8월과 1943년 2월 남태평양 솔로몬제도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과달카날전투(Battle of Guadalcanal)에 대대장으로 참전한 경력을 비롯하여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많은 실전경험을 쌓은 유능한 군사지휘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제8군 예하 제24사단 사단장 월리엄 딘(William F. Dean)의 긴급명령에 따라 일본에서 C-54 수송기 여섯 대에 병력과 군사장비를 싣고 한반도 전선에 출전하였다. 전사에 나오는 스미스 기동부대(Task Force Smith)가 바로 그 부대다. 장맛비가 내리던 1950년 7월 5일 경기도 오산 북쪽 계선까지 올라간 스미스 기동부대는 남진하는 인민군과 첫 전투를 벌였다. 인민군과 미국군이 첫 지상전으로 격돌한 오산전투에서 스미스 기동부대는 순식간에 궤멸당했다.

스미스 기동부대가 궤멸당한 직후, 제8군 예하 제24사단은 충청남도 대전 일대에 견고한 방어진을 치고 버텼지만, 중무장 병력 9,000명으로 편성된 제24사단은 1950년 7월 14일부터 21일까지 계속된 격렬한 대전전투에서 인민군에게 대패하여 992명이 전사하고, 228명이 부상당하고, 2,400명이 실종되었을 뿐 아니라, 제24사단 사단장인 육군 소장 윌리엄 딘마저 인민군에게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대전전투에서 생포된 딘은 1953년 9월 포로교환으로 미국에 돌아가는 패장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것만이 아니라, 제8군사령관 월튼 워커(Walton H. Walker)는 1950년 12월 23일 서울 북쪽에 전선시찰을 나갔다가 교통사고로 즉사하였다.

위의 역사적 사실들이 말해주는 것처럼, 제8군은 미국 전쟁사에서 치욕스런 참패를 당한 패전부대다. 미국 군부는 그런 패전부대에게 ‘작전계획 5029’를 주어 대북테러와 급변사태를 일으키라고 명령한 것이다. 6.25 전쟁에서 당한 참패를 설욕하라는 뜻에서 그런 명령을 내린 듯하다.

그러나 미국 군부가 예상하는 설욕전은 치명적인 오판이다. 지난 60년 동안 ‘미제 원쑤 격멸’을 외치며 ‘조국통일대전’을 끊임없이 준비하여온 오늘의 인민군은 6.25 전쟁 시기의 인민군과는 비할 바 없이 강해진 군대다. 미국 군부가 제8군의 참혹한 패전경험을 잊고 대북전쟁연습을 강행하는 것은, ‘조국통일대전’을 위한 결전태세에 진입한 인민군의 전투의지를 더욱 자극하는 매우 위험천만한 행동으로 보인다.

2012년 8월 25일 동부전선을 시찰하는 중에 김정은 인민군 최고사령관은 8.25 경축연회에서 이렇게 연설하였다. “만약 적들이 신성한 우리의 령도와 령해에 단 한 점의 불꽃이라도 튕긴다면 즉시적인 섬멸적 반타격을 안기고 전군이 산악같이 일떠서 조국통일대업을 성취하기 위한 전면적 반공격전에로 이행할 데 대한 명령을 전군에 하달하였으며 이를 위한 작전계획을 검토하고 최종수표하였습니다. 지금 이 시각 나의 명령을 받은 영용한 인민군 장병들은 미국과 남조선괴뢰들의 무모한 전쟁도발책동에 대처하여 전투진지를 차지하고 적들과의 판가리결전을 위한 최후돌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정은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작전계획서를 결재한 것은, 전군에 결전진입태세를 명령하였음을 뜻한다.

해마다 8월 25일이 오면, 북측에서는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인민군 제105땅크사단을 시찰하는 것으로 ‘선군혁명령도’를 시작한 역사를 기념하는데, 바로 그 제105땅크사단이 오산전투와 대전전투에서 미국군 제8군 예하 제24사단을 궤멸시킨 부대다. 제8군은 자기 선배들이 겪은 참혹한 패전경험을 기억해야 하며, 제105땅크사단을 계속 자극하는 경거망동을 즉각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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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6

미국의 한국 진보정당 압살은 반복되는가?

[한호석 칼럼] 반세기 전 진보당 사건과 통합진보당 사태
민중의 소리 2012년 08월 25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진보당의 평화통일 강령과 미국의 대북테러 강령
 

“조봉암 피고가 검찰당국에 구속되기 얼마 전, 미국첩보 관계로 한국에 체류하고 있던 ‘니코라스’ 중령이 오제도 검사에게 제공한 정보가 있었다. ‘니코라스’ 중령이 보내온 정보는 조봉암 피고가 국제공산계와 관계가 있다는 단서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 정보가 조봉암 피고의 간첩사건 처형에 관련을 맺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것은 박태균 교수가 1995년에 쓴 책 ‘조봉암 연구’에 나오는 인용문이다.

사실관계를 분명하게 밝히지는 못하였지만, 이 인용문은 진보당 사태의 본질을 파헤치는 데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그 중요한 단서는, 이승만 정권이 조봉암을 사형에 처하고 진보당을 강제해산하였던 진보당 사태가 ‘니코라스’라고 불리는 미국군 중령의 ‘제보’로 일어났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진보당 사건으로 재판받을 당시의 죽산 조봉암 선생
진보당 사건으로 재판받을 당시의 죽산 조봉암 선생
 
 
진보당 사태에 깊숙이 연관된, ‘니코라스’라고 불린 미국군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진보당 사태에 왜 미국군이 연관되었을까?

‘니코라스’의 정체에 대해 박태균 교수는 <중앙일보> 1995년 6월 20일자 보도를 인용하여 이렇게 덧붙였다. “현재로서는 ‘니코라스’의 실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단지 한국전쟁 이전부터 한국과 토오꾜오의 유엔군사령부에서 근무했던 공군정보국 소속 ‘니콜스(Donald Nichols)’와 동일인으로 추측된다. 그는 이승만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주로 대북 첩보공작을 진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한국전쟁 이후에도 한국의 정치상황에 개입했는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17년 전 <중앙일보>가 보도기사에서 그처럼 모호하게 기술하였던 도널드 니콜스의 정체는, 2008년 미국에서 출판된 책 ‘우리 아버지의 전쟁(My Father's War)’에서 드러났다. 이 책은 황하영이 남긴 기록을 그의 아들 황성이 정리하고 관련인물들의 증언으로 보완하고 풍부한 사진자료까지 곁들여 펴낸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정보에 따르면, 도널드 니콜스는 미국 제5공군사령부 예하 6006 항공정보군무대대(Air Intelligence Service Squadron) 지휘관이었다. 정전협정을 체결한 직후에 편성된 6006 항공정보군무대대는 북측에 침투하여 시설파괴, 무기탈취, 저격, 납치, 살해 같은 극악한 테러활동을 전문으로 하는 대북테러군사조직이었다.

6.25 전쟁 전후로 대북첩보공작과 대북테러작전을 자행한 기관은 6006 항공정보군무대대 이외에도 많았다. 이를테면, 미국 군부는 1949년에 주한미국군을 잠시 철군하는 척하면서 ‘한국연락소(Korean Liaison Office)’라는 대북테러조직을 서울에 남겨두었는데, 그 조직은 영어명칭 머릿글자를 따서 ‘케일로(KLO)부대’라고도 불렸다. 1950년에 6.25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케일로부대’를 전시편제로 확충, 강화하면서 ‘극동사령부 연락분견대 8240(Far East Command Liaison Department Unit 8240)’으로 이름을 바꿨다.
 
더욱이 전쟁 중에 이 땅에서는 한국, 미국, 영국이 운영하는 각종 대북기관들이 난무하였다. 이를테면, ‘고등정보분견대(Higher Intelligence Detachment/HID)’는 한국 육군사령부 정보국이 운영하였고, ‘해군정보실(Office of Naval Intelligence/ONI)’은 한국 해군이 운영하였고, ‘DALD’는 미국 국무부가 운영하였고, ‘한국합동자문위원회(Joint Advisory Commission, Korea/JACK)’는 미국 중앙정보국이 운영하였고, ‘케논(Kennon)’은 미국 극동군사령부가 운영하였고, ‘NICK’은 영국 해병대가 운영하였고, ‘NEPARTA’는 영국 육군이 운영하였다.

정전협정 직후 미국이 도널드 니콜스를 지휘관으로 내세워 6006 항공정보군무대대을 창설하여 대북테러를 자행한 것은 그 협정에 대한 난폭한 파기행위였다. 니콜스의 정체가 서술된 책 ‘우리 아버지의 전쟁’에 따르면, 그는 현역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들 가운데서 적격자를 선발하여 집중훈련을 통해 테러범을 육성하였고, 테러범들이 대북테러작전에 성공하면 미국 정부로부터 많은 돈을 받을 수 있고, 미국에 유학까지 할 수 있다고 꼬드기면서 인민군 복장을 입힌 그들을 대북테러에 내몰았다.

위의 책에 서술된 내용에 따르면, 당시 6.25 전쟁 전후로 북측에서 남측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르고, 북측에서 배운 초보적인 러시아어만 조금 할 줄 알았던 한국인 대원들이 니콜스라는 미국식 이름을 니콜라스(Nikolas)라는 러시아식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박태균 교수의 책에 들어 있는 인용문에 서술된 것처럼, 진보당 탄압에 앞장선 악질반공검사 오제도에게 조봉암에 관한 ‘비밀정보’를 제공하여 그를 구속하게 만든 바로 그 ‘니코라스’ 중령이 니콜라스라는 러시아식 이름으로 불렸던 니콜스 중령이었던 것이다.
 
원래 니콜스는 1948년에 미국 육군 정보국(CIC) 요원으로 서울에 와서 우리말은 물론 우리 문화, 지리, 역사, 문학 등을 배웠으므로 주한미국군 지휘관들 가운데 우리말을 할 줄 아는 극소수 지휘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위의 책에 따르면, 니콜스가 지휘하는 대북테러조직 6006 항공정보군무대대 본부는 서울 오류동에 있었는데, 6.25 전쟁 중에 대북테러작전에 동원되었던 경력자들과 월남도주자(지금은 탈북자)들, 석방된 ‘반공포로’들, 남쪽으로 피난한 북측 주민들 가운데서 엄선한 ‘정예요원’들로 편성되었다. 니콜스는 대북테러작전으로 북측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미국의 흉계를 최전선에서 실행에 옮기는 대북테러군사조직의 우두머리였다.

그런데 1950년대 후반기에 반공광증에 사로잡혀 대북테러를 자행하며 북측 정권 전복을 노리고 있었던 미국의 시각으로 보면, 정전 이후 처음으로 평화통일강령을 제기하고 대중적 지지를 받기 시작한 진보당은 미국의 눈을 찌르는 ‘눈엣가시’였다.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 않았지만, 진보당의 평화통일강령과 미국의 대북테러강령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진보당을 계속 방치하면 평화통일에 대한 대중적 요구가 점차 더욱 강렬해질 것이고, 더욱이 진보당이 당시 집권당이었던 자유당을 대선에서 꺾고 정권교체를 실현하게 되면 자기들의 대북테러강령은 무용지물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미국은 판단하였다.

그렇게 판단한 미국에게 진보당 파괴는 불가피한 조치가 되었다. 세계 진보정당사를 살펴보면, 미국이 다른 나라의 반미성향 진보정당들을 비밀공작으로 파괴한 사례가 드러나는데, 진보당이 바로 그런 사례에 속한다. 미국이 진보당을 파괴하는 방도는 그 당의 대표인 조봉암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미국이 대북테러범들을 동원하여 조봉암을 암살하는 것은 테러 배후조종자로서의 정체가 발각될 위험이 너무 컸으므로, 조봉암의 정적인 이승만을 앞에 내세워 그를 제거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미국의 조봉암 제거공작에는 이승만과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니콜스가 적임자였다. 위의 책에 따르면, “이승만은 니콜스를 100% 지원해주었”고, 정전 직후 그에게 한국 공군 명예 대령계급을 수여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니콜스와 이승만이 밀착관계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위에서 언급한 박태균 교수의 책에 인용된 자료가 말해주는 것처럼, 니콜스가 반공검사로 악명 떨친 오제도에게 조봉암에 관한 ‘비밀정보’를 넘겨준 것은 미국의 조봉암 제거공작이라는 정치음모를 배경으로 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조봉암을 제거하고 진보당을 파괴한 이승만의 등뒤에서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던 배후조종자는 미국이었던 것이다.


작전계획 5029와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 강령

북측이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 최대 시련을 겪고 있었던 1990년대 후반, 미국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과거경험을 되살려냈다. 그것은 정전협정 체결 직후 도널드 니콜스를 현지 책임자로 내세워 추진하였던 대북테러작전이었다. 북측에서 전기공급이 끊겨 수많은 공장들이 가동을 멈추고 식량공급이 끊겨 수많은 인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였던 시련기에, 미국 군부의 머리 위에서는 니콜스의 테러망령이 배회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개념계획 5029’라고 부르는 대북테러계획을 1990년대 후반에 작성하였고, 그것을 수정, 보완하여 마침내 ‘작전계획 5029’를 몇 해 뒤에 완성하였다. ‘작전계획 5029’는 대북테러로 급변사태를 일으켜 북측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미국의 전형적인 국가테러계획이다. 미국이 추진하는 그런 국가테러계획을 미국 언론에서는 정권교체(regime change)라는 외교용어로 바꿔 부른다. 리비아 정권전복사태와 시리아 테러사태는 미국이 국가테러계획을 어떻게 실행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작전계획 5029’를 실행에 옮기는 대북테러군사조직인 주한미국군 특수작전사령부가 현재 대북침투작전을 벌이고 있다는 극비정보가 그 사령부 지휘관 닐 톨리(Neil Tolley)의 공식발언으로 미국 언론에 보도되었고, 게다가 미국이 탈북자들로 조직된 대북테러단체 ‘동까모’에게 운영자금과 무기조달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까지 드러난 것은, 미국이 ‘작전계획 5029’라는 국가테러계획을 이미 실행에 옮기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그처럼 대북테러와 북측 정권 전복을 노린 ‘작전계획 5029’를 준비하고 있을 때, 이 땅에서는 미국에게 예상치 못한 사변이 일어났다. 미국의 대북테러강령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평화통일강령을 든 진보정당이 건설된 것이다. 평화통일강령을 제기한 진보당이 1956년 11월에 창당되었던 것처럼, 평화통일강령을 제기한 민주노동당이 2000년 1월에 창당되었다. 지난 시기 진보당은 반미성향을 드러낼 수 없는 엄혹한 시대환경에서 창당되었던 반면, 민주노동당은 반미자주화를 강령에 담았다. 미국의 대북관계 시야에서 바라보면, 평화통일강령을 제기한 반미성향의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것은 대북테러강령을 추진하는 미국에게 ‘도전’이었다.

그러나 ‘도전’의 대척점에 역사적 필연이 있다.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분단국가에서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는 진보정치세력이 정당으로 조직화되고 대중적 지지를 받게 되는 것은 역사적 필연인 것이다. 미국이 극도로 혐오하는 것은 바로 그 역사적 필연이다.

민주노동당을 주시하고 있었던 미국에게 또 한 차례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2012년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당적 기반을 크게 확대한 통합진보당이 창당된 것이다. 1950년대 후반기에 평화통일강령을 제기한 진보당과 대북테러공작을 자행한 미국 사이에 모순관계가 조성된 것처럼, 2012년 현재 평화통일강령을 제기한 통합진보당과 대북테러공작을 자행하는 미국 사이에는 1950년대 후반기보다 더 날카로운 모순관계가 조성되었다.

더욱이 통합진보당은 창당 직후 실시된 총선에서 야권연대에 성공하여 제3당으로 부상하더니, 대선에서 야권연대전략을 추진하려는 준비태세를 취하였다. 1950년대 후반기에 진보당 창당으로 정권교체 가능성이 높아진 것처럼, 2012년 현재 통합진보당 창당으로 정권교체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2004년 국회에 첫 등원하는 민주노동당 의원단
2004년 국회에 첫 등원하는 민주노동당 의원단
 


2007년에는 이명박 당선, 2012년 미국의 목표는?

한국에서 대선이 실시될 때마다 미국이 기존 공작망을 총가동하면서 선거국면에 깊숙이 개입하여 선거판세를 좌지우지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예컨대, ‘위킬릭스’가 폭로한, 2007년 대선기간에 주한미국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비밀전문 93편은 미국의 대선개입공작이 얼마나 치밀하게 전개되었는지를 말해준다. 미국의 대선개입공작을 생각하면, 한국에서 실시되는 대선은 유권자들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실시되는 자유선거가 아니라, 미국의 대선개입공작으로 좌우되는 선거라고 말할 수 있다.

‘위킬릭스’가 폭로한 비밀전문 93편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처럼, 2007년에 미국이 자행한 대선개입공작의 기본방향이 이명박 당선이었다면, 2012년 현재 미국이 자행하고 있는 대선개입공작의 기본방향은 새누리당 집권연장과 수구우파정권 재창출일 것이다.

그런데 제3당으로 부상한 통합진보당이 대선국면에서 민주통합당과 야권연대를 실현하는 경우, 미국의 대선개입공작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평화통일강령을 제기한 통합진보당이 야권연대에 의한 정권교체를 실현하고 정권의 한 축을 떠맡게 되는 경우, 앞으로 2013년부터 5년 동안 남북관계는 미국의 요구와는 정반대로 급변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노무현 정권 시기의 청와대가 미국의 ‘작전계획 5029’를 반대하면서 미국과 갈등을 빚은 것 이상으로, 새로운 정권은 미국의 대북테러강령을 무력화시킬 것이며, 그에 따라 미국의 대북적대정책 전반이 흔들리게 될 것이다. 이런 맥락을 생각하면, 미국이 야권연대 차단공작에 나서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한국 사회 각 분야에 깔아놓은 공작망을 가동하여 야권연대 차단공작을 은밀히 준비하고 있었던 미국에게 아주 좋은 기회가 왔다. 통합진보당 내분사태가 터진 것이다. 내분사태로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한 통합진보당에게 이 땅의 수구우파세력들은 일제히 ‘종북제거’를 외치며 집중공세를 퍼부었다. 그것은 통합진보당을 와해시킴으로써 야권연대전략까지 파탄시키려는 집요한 공세였다. 그 집요한 공세에 미국이 어떻게 개입되었는지를 말해주는 자료는 아직 찾을 수 없지만, 미국이 어떤 형태로든 개입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53년 전 미국이 대북테러작전을 은밀히 추진하는 가운데, 니콜스의 결정적인 제보로 조봉암을 구속한 이승만 정권은 대선 8개월 전인 1959년 7월 31일 사형집행으로 그를 제거하였다. 그로부터 53년이 지난 올해 미국이 대북테러작전을 은밀히 추진하는 가운데, 이석기 의원과 김재연 의원을 제거하려는 음해모략이 계속되고 있다.
 
53년 전 조봉암에게 이른바 ‘간첩죄’를 들씌운 수구우파세력은 오늘 이석기 의원과 김재연 의원에게 이른바 ‘종북죄’를 들씌웠고, 대선 4개월 전인 2012년 8월 21일 그 두 의원에 대한 국회 차원의 자격심사를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 땅에서 미국의 범죄사는 그렇게 반복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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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5

“ㅁ-동-82531호” 목선이 말해주는 사연

[한호석의 개벽예감] (27)
자주민보 2012년 08년 25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3시간 동안 접적수역 항해한 조그만 목선
 
개머리라는 낯선 지명은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전이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던 때 남측 언론에 처음 나왔는데, 바로 그 개머리 지역에 부포라는 어촌이 있다. 미국 상업위성이 촬영한 위성사진에 나타난 부포는 이 나라 어느 바닷가에서나 만날 수 있는 작은 어촌이다. 어민들이 사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고기잡이배들이 닻을 내리고 있는 평화로운 모습이 보인다.

아침바다에 갈매기 소리도 상쾌한 2012년 8월 16일 이른 아침, 부포 포구를 떠나 바닷물살 가르며 항해하는 조그만 고기잡이배 한 척이 있었다. 10명 남짓 적은 인원이 타는 그 작은 목선에는 “ㅁ-동-82531호”라는 배이름이 적혀 있었다. 27마력짜리 발동기에서 통통거리는 동음을 울리며 포구를 떠난 그 목선에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타고 있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그 작은 목선을 타고 찾아간 곳은 장재도와 무도였다. 그 날 김정은 제1위원장은 먼저 장재도를 들른 뒤 무도에 들렀다. 미국 상업위성이 촬영한 위성영상자료에서 지구위치확인체계(GPS)로 거리를 측정하면, 부포 방파제 입구에서 장재도까지 직선거리는 7.6km, 장재도에서 무도까지 직선거리는 6.2km, 무도에서 부포까지 직선거리는 7.7km다. 그러므로 직선거리로만 따져봐도, 그 날 김정은 제1위원장은 작은 목선을 타고 21.5km를 항해하였으니, 실제 항해거리는 30km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처럼 작은 목선의 일반적인 항해속도는 시속 10km 정도이므로, 그 날 김정은 제1위원장은 작은 목선을 타고 약 3시간 동안 서해 접적수역을 오간 것이다.

그런데 적진이 손에 잡힐 듯 바라다 보이는 접적수역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이 탄 목선이 항해하고 있었던 3시간 동안, 미국군 공중정찰망은 다른 곳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대북전쟁연습인 ‘을지 프리덤 가디언’ 개시일을 불과 나흘 앞두고 팽팽한 긴장감이 엄습한 접적수역에서 미국군 정찰위성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내려다보는 서해안 인민군 해군기지에서 군함을 타지 않고, 미국군 정찰위성이 감시하지 않는 어촌 포구에서 조그만 목선을 타고 나가 적진 바로 앞에서 3시간 동안이나 오가며 항해한 것은 누구도 상상하기 힘든 놀라운 일이었다.

장재도와 무도는 웬만한 지도에는 나오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섬이다. 특히 장재도는 무도보다 더 작은 섬이어서, 그 섬에 주둔하는 인민군 병력은 얼마 되지 않는다. 미국 상업위성이 촬영한 위성사진에 나타난 장재도와 무도에는 섬 안에서 곳곳으로 통하는 섬방어대 교통호들이 뚫려있다.

미국 상업위성이 촬영한 위성사진자료에서 지구위치확인체계로 거리를 측정하면, 장재도 북쪽에 있는 인민군 섬방어대 지휘소에서 연평도 북쪽에 있는 한국군 해병대 포진지까지 직선거리는 7.7km이고, 무도 북쪽에 있는 인민군 방어대 지휘소에서 연평도 북쪽에 있는 한국군 해병대 포진지까지 직선거리는 12.7km다. 그런데 한국군 연평부대가 쏘는 155mm 자주포는 사거리가 40km이고, 105mm 곡사포는 사거리가 11km이므로, 장재도와 무도는 연평부대의 사격권 안에서도 아주 가까운 지척에 놓여 있는 셈이다. 실제로 장재도에 있는 인민군 해안포 감시소에서 연평도 쪽을 바라본, 북측에서 방영한 텔레비전 화면에는 연평도에 배치된 한국군 연평부대의 안테나도 보이고 군사시설들도 보인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그처럼 한국군 사격권 안에 있는 최전선 섬방어대를 시찰하면서 인민군 지휘관 4명, 당중앙위원회 부부장 2명, 경호병력 4명만 대동하였다. 만일 더 많은 군지휘관들과 경호병력이 수행하였어도 작은 목선에 다 타지 못하였을 것이다.


8.16 섬방어대 시찰에서 주목해야 할 두 가지 사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8.16 섬방어대 시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아래와 같다.

첫째, 8.16 섬방어대 시찰을 보도한 북측 텔레비전 방영화면에는 감격의 만세를 부르며 김정은 제1위원장을 맞이하는 섬방어대 군인들의 열렬한 모습이 나온다. 그들이 감격에 겨워 환호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연출이 아니다. 너무 외진 곳에 떠 있는 작은 섬이고, 더욱이 적진의 포성이 수시로 들리는 위험지역이어서 일년 내내 거의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최전선 섬방어대에 자기들이 마음 속에 그리는 최고영도자가 뜻밖에 예고도 없이 찾아왔으니 섬방어대 군인들이 느낀 놀라움과 기쁨이 오죽 컸겠는가. 섬방어대 군인들은 조그만 목선을 타고 자기들을 찾아온 최고사령관이 다시 목선을 타고 섬을 떠날 때, 허리 치는 바닷물에 뛰어들어 감격의 만세를 부르고 또 불렀으며, 섬에서 멀어지는 뱃전에 선 김정은 제1위원장은 바닷물에 뛰어들어 만세를 부르는 군인들에게 어서 돌아가라고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저어주었다.

무력충돌의 긴장감이 팽팽히 감도는 최전선에서 자기들의 최고사령관이 아무런 격식을 차리지 않고 해안포 병사들과 만나 그들의 노고를 알아주고 그들에게 격려와 보살핌을 안겨주는 극적인 장면을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바라본 100만 인민군 장병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8.16 섬방어대 시찰 직후 북측 언론에 나온 인민군 장병들의 반응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8.16 섬방어대 시찰의 극적인 장면을 바라본 인민군 장병들은 자기들의 최고사령관에게 더욱 굳은 충성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북측 외부에서는 거의 외면하거나 경시하고 있지만, 바로 그러한 최고사령관과 장병들의 사상정신적 결합이야말로 북측에서 ‘선군정치’의 중핵을 이루는 것이다. 북측 시야에서 보면, 8.16 섬방어대 시찰 같은 최고영도자의 현장정치활동에 의해서 ‘선군정치’가 더욱 심화되고 발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측 외부에서 북측의 ‘선군정치’를 무력증강정책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너무 부분적인 이해다.

둘째, 8.16 섬방어대 시찰을 보도한 북측 텔레비전 방영화면에는 젊은 여성들이 자기 아이를 데리고 김정은 제1위원장에게 달려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 젊은 여성들은 섬방어대 군인 아내들이고, 그 아이들은 섬방어대 군인 자식들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군인가족들인 것이다. ‘선군정치’를 시행하는 북측에서 군인가족은 사회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집단이다.

<조선중앙통신> 2012년 8월 17일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어머니들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아이들의 볼을 다정히 쓸어주시며 아버지는 무엇을 하는가도 물어주시면서 태여난지 6개월 된 정항명 어린이를 사랑의 한 품에 안아주시”고, “포성을 들으며 사회주의조국을 지키는 투사로 억세게 자라나고 있는 어린이들의 앞날을 축복해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무력충돌위기가 감도는 때에 최전선을 시찰하는 긴박한 느낌이 아니라 마치 평화로운 시기에 후방에 있는 유치원을 방문하는 따사로운 느낌을 준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아이들을 소중히 여기며 그들에게 사랑과 축복을 안겨주는 장면은, 적진이 지척에 있는 섬방어대의 긴장된 분위기에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대조적인 장면이다. 북측 시야에서 보면, 바로 그러한 극적인 대조가 8.16 섬방어대 시찰을 감동의 절정으로 끌어올리는 요소다. 만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섬방어대 군인들만 만나고 그들에게 격려와 보살핌을 안겨주는 예사로운 현지시찰을 하였더라면, 그 날의 섬방어대 시찰에서 북측 인민들이 느끼는 감동은 그처럼 절정에 이르지 못하였을 것이다.

무력충돌위기의 긴장감이 감도는 최전선에서 아이들에게 사랑과 축복을 안겨주는 극적으로 대조적인 장면을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바라본 2,400만 북측 인민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북측에서 쓰는 표현을 빌리면, “선군혁명의 진두에 서 계시는” 자기들의 최고영도자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며 “끝까지 선군혁명의 길을 함께 가려는” 북측 인민들의 의지가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이러한 인민적 의지의 강화현상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이전에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러했던 것처럼, 군대와 인민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현지시찰을 통해서 사회 전체를 최고영도자를 중심으로 결집시키고 단합시키는 강력한 통합정치를 시행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북측의 모든 가요와 시들이 ‘수령을 중심으로 화목한 사회주의 대가정’을 노래하고, 모든 언론의 논조와 예술의 주제가 그러한 ‘사회주의 전민통합’으로 집약되는 것은, 북측에서 통합이라는 가치를 얼마나 귀중히 여기며, 전민통합을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힘써왔는지를 말해준다. 8.16 섬방어대 시찰은 북측에서 ‘사회주의 전민통합’이 얼마나 높은 단계에서 실현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포탄이 떨어졌던 자리에서 흐름을 멈춘 연평도 포격전의 시간

북측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무도 섬방어대를 시찰하면서 감시소로 가는 길에 2년 전 연평도 포격전 당시 한국군 연평부대가 쏜 포탄이 떨어졌던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살펴보면서, “연평도의 적들이 멸적의 불줄기가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모르고 무도에 무모한 포탄을 날렸다가 이곳 방어대 군인들이 치솟는 증오를 안고 퍼부은 백발백중의 명중포탄에 호되게 얻어맞았다”고 하면서, “그 날 한 명의 군인도 상하지 않고 적들에게 백두산 혁명강군의 총대맛을 보여준 방어대 군인들의 위훈을 높이 평가”하였다고 한다. 그 날 김정은 제1위원장은 무도 방어대 1포에 영웅칭호를, 무도 방어대에 영웅방어대칭호를 수여할 것을 제의하였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무도 방어대를 그처럼 높이 평가한 것은 2010년 11월 23일에 일어난 연평도 포격전을 회상하게 한다.

원래 연평도 포격전에서 인민군이 122mm 방사포를 발사한 포격원점은 무도가 아니라 개머리 해안이었다. 무도 방어대에는 방사포가 없고 해안포만 있다. 연평도 포격전은 1차 공격과 2차 공격이 13분 간격을 두고 나뉘어 지속되었는데, 북측 관할수역으로 쏘는 한국군 연평부대 자주포의 포성을 하나둘 세고 있던 인민군은 한국군이 포탄을 재장전하기 위해 사격을 마치고 한숨 돌리는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교란전파를 방사하는 것과 함께 개머리 해안에 배치한 122mm 방사포를 한국군 연평부대를 향해 기습적으로 발사하였다. 3축6륜 차량에 탑재된 사거리 30km의 122mm 방사포는 40발을 연속발사하는 위력적인 무기다.

<동아일보> 2010년 12월 3일 보도에 따르면, 연평도 포격전 당시 한국군 연평부대의 대포병레이더(AN/TPQ-37)가 “(인민군의 전파교란으로 오작동을 일으켜) 공격원점을 찾지 못하고 ‘먹통’이 되는 바람에 연평부대의 K-9 자주포 3문은 실제 공격원점인 개머리 진지 대신 무도 진지로 50발을 대응사격했다.”

처음에 무도 방어대는 해안포를 한 발도 쏘지 않았지만, 한국군 연평부대가 엉뚱하게도 무도를 향해 마구잡이로 자주포를 50발이나 쏘아대는 바람에 예상치 못한 포격을 받았다. 그런데 한국군 연평부대가 무도를 향해 쏜 포탄 50발 가운데 무도에 떨어진 포탄은 고작 15발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 35발은 행방불명되었다.

행방불명된 35발은 무도에 있는 타격목표를 맞추기는커녕 무도도 맞추지 못하고 바다쪽으로 빗나갔다. 한국군 연평부대가 쏜 155mm 자주포의 사거리는 40km이고, 무도 북쪽에 있는 인민군 방어대 지휘소에서 연평도 북쪽에 있는 한국군 연평부대 포진지까지 직선거리는 12.7km인데, 사거리 40km짜리 자주포를 쏘아 12km 밖에 있는 큰 섬도 맞추지 못한 것이다. 물론 선제기습포격을 받아 당황하였다는 점은 인정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국군 연평부대의 사격실력이 너무 저조하지 않은가.

그러면 무도에 떨어진 포탄 15발은 어느 타격목표물을 맞추었을까? <연합뉴스> 2010년 12월 2일 보도에 따르면,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한 국가정보원 관계자들은 연평부대가 쏜 “15발이 무도 안에 있는 해안포 부대(중대본부) 진지 안에 떨어졌다”고 하면서 “중대본부 내 15발이 떨어져 상당한 인명피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런 추정은 실제상황과 완전히 달랐다. 그 날 국정원이 공개한 위성사진을 보면, “바다에 인접한 쪽의 진지에 포탄 10발이 집중적으로 떨어졌으며, 나머지 5발의 흔적은 막사와 지원시설로 추정되는 건물 사이에 일렬로 형성돼 있었다”고 한다.

한국군 연평부대로부터 포사격을 받은 인민군 무도 방어대는 76.2mm 해안포로 즉각 대응사격을 하였다. <한국일보> 2010년 11월 30일 보도에 따르면, 무도 방어대가 쏜 76.2mm 포탄 12발은 연평도 면사무소, 보건소, 파출소에 명중하였고, 14발은 민간거주지에 떨어졌는데, 민간거주지에 떨어진 14발 가운데 해안도로 방벽에 떨어진 1발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건물에 명중하였다. 개머리 지역에서 쏜 방사포는 연평부대 주둔지와 군사시설을 조준한 것이었고, 그와 달리 무도에서 쏜 해안포는 연평도에 있는 관공서를 조준한 것이었다.

그 날 인민군 무도 방어대가 쏜 76.2mm 포탄은 화약과 분말 알루미늄을 혼합하여 폭발력을 높인 고폭탄(HE)이었다. 또한 타격목표에 부딪쳐 터지는 재래식 충격신관이 아니라, 타격목표 4~7m 앞에서 터져 파괴력을 높이는 근접신관이 장착되어 있었다. 그런 근접신관을 장착한 포탄은 전파를 쏴서 타격목표와 비행포탄 사이의 거리를 순간적으로 측정하는 데, 연평도 주거지 허공에 널려있는 전깃줄들이 근접신관 전파를 간섭하는 바람에 근접신관이 오작동하여 터지지 않은 불발탄이 몇 발 있었다.

장재도 북쪽에 있는 인민군 방어대 지휘소에서 연평도 북쪽에 있는 한국군 연평부대 포진지까지 직선거리는 7.7km이고, 무도 북쪽에 있는 인민군 방어대 지휘소에서 연평도 북쪽에 있는 한국군 연평부대 포진지까지 직선거리는 12.7km다. 그런데 연평부대에 배치된 105mm 곡사포 사거리는 11km밖에 되지 않으므로, 그 포탄은 무도까지 날아가지 못하고 장재도까지만 날아간다. 그런데도 연평부대는 장재도를 향해 곡사포를 쏘지 않았고, 그에 상응하여 장재도 방어대도 연평도를 향해 해안포를 쏘지 않았다. 만일 연평도에서 가장 가까운 장재도 방어대까지 연평도를 향해 해안포를 쏘았더라면, 연평도는 치명적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북측의 모든 해안포 진지들이 그런 것처럼, 무도 방어대 포진지도 갱도화되었으므로 포격전이 개시되는 순간 무도 해안포병들은 모두 갱도로 뛰어들어 사격태세를 취했다. 그러므로 무도 방어대 앞마당에 떨어진 연평부대 포탄 5발은 앞마당에 조그만 구덩이를 다섯 군데 파놓은 것에 불과하였다. 북측에서 인명피해나 건물피해는 없었다. 개머리 지역에 떨어진 포탄도 논밭에 구덩이만 몇 개 파놓았을 뿐이다.

무도 방어대에 배치된 76.2mm 해안포는 해안으로 접근하는 적 함선을 향해 쏘는 것이어서 사거리가 13km밖에 되지 않고, 무도 방어대 포진지에서 연평도 민간거주지까지 거리는 15km나 된다. 이것은 무도 방어대가 사거리를 2km 정도나 넘어선 사정권 밖의 타격목표를 향해 해안포를 쏘았다는 뜻이다. 놀랍게도, 무도 방어대가 사정권 밖으로 해안포를 쏘았는데도 명중률이 뛰어났던 것이다. 바로 그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8.16 섬방어대 시찰 중에 김정은 제1위원장은 즉석에서 무도 방어대 제1포에 영웅칭호를, 무도 방어대에 영웅방어대칭호를 수여할 것을 제의한 것이다.


‘통일전쟁’ 총결사전 준비를 명령한 최고사령관

북측 언론보도에 따르면, 8.16 섬방어대 시찰 중에 김정은 제1위원장은 무도 방어대 군인들에게 “적들이 감히 서툰 불질을 해대며 우리의 령토에 단 한 점의 불꽃이라도 떨군다면 그것을 서남전선의 국부전쟁으로 그치지 말고 조국통일을 위한 성전으로 이어가라”고 지시하였고, “만약 침략자들이 전쟁을 강요한다면 서해를 적들의 최후무덤으로 만들라고 명령”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서해 5도 분쟁수역에서 무력충돌이 또 다시 일어날 경우 국지전이 아니라 전면전을 벌여 한반도를 통일하라는 남진준비명령이고, 미국 제7함대가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를 앞세우고 서해에 출동하여 북측을 공격하는 경우 제7함대를 수장해버리라는 격침준비명령이다.

2011년 1월 8일 북측에서 방영된 기록영화 ‘위대한 령장을 모시여 26’에는 북측 인민들 누구나 부르는 노래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 악보가 화면에 나오는데, 김정은 제1위원장이 그 악보 위에 쓴 활달한 필체를 읽을 수 있다. “전군이 이 노래를 어깨겯고 심장으로 더 높이 부르도록 합시다. 미제와 남조선 괴뢰들과의 총결사전에서도 전군이 이 노래를 함께 부르며 남진의 길을 가야 합니다. 김정은 2010.9.11”이라고 쓰였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이처럼 북측의 무력을 통해 한반도를 통일한다는 ‘통일전쟁’ 총결사전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인민군에게 내린 까닭은 미국의 대북전쟁위험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명백하게도, 한반도 전쟁위기의 원인과 책임은 전적으로 미국에게 있다. 이 땅의 대중들이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미국은 9.19 공동성명을 전혀 이행하지 않고 되레 ‘작전계획 5029’로 북측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대북테러작전을 노리고 있고, 이명박 정권은 대북적대정책에 매달리며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전면 폐기하였다. 미국의 대북테러작전과 이명박 정권의 대북적대정책으로 ‘동까모’와 ‘5.24조치’가 생겨난 기막힌 현실 앞에서 평화통일의 가능성이 사실상 사라져버렸으므로, ‘통일전쟁’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 북측의 전략적 판단이다.

2012년 8월 20일부터 이 땅에서 미국군이 강행하는 ‘을지 프리덤 가디언’이라는 대북전쟁연습은 북측을 ‘통일전쟁’ 총결사전으로 떠미는 자극요인이 되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작은 목선을 타고 접적수역을 항해하며 기상천외한 전선시찰을 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최고사령관의 ‘통일전쟁’ 총결사전 준비명령을 받은 인민군도 미국과 이명박 정권이 전쟁을 강요하는 경우 미국군의 정찰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비대칭전력으로 심장부 허점을 기습적으로 찔러 전신마비에 빠뜨리는 기상천외한 작전방식으로 ‘통일전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김정은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담력과 배짱으로 ‘통일전쟁’ 총결사전을 개시할 결심을 하는 것이다.

2012년 1월 초 북측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방영된 기록영화 ‘백두의 선군혁명위업을 계승하시여’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정은 제1위원장의 성품과 관련하여 “그의 신념과 의지가 얼마나 강하고 배짱이 센지 어떤 때에는 나도 탄복할 정도입니다. 신념과 의지에 있어서나 담력과 배짱에 있어서 그를 따를 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고 말하였음을 전하는 해설대목이 나온다. 그러고 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이 타고 서해 최전선으로 나아간 27마력짜리 작은 목선은, 원자로 2기와 초대형 증기터빈 4대로 움직이는 핵추진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의 침입을 꺾을 수 있다는 담력과 배짱의 상징으로 보인다.(2012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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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4

기로에 선 진보적 대중정당과 진보적 노동운동

변혁과 진보 (90)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파벌주의 질곡과 노동조합주의 포위망

2012년 8월 17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1년 노조 조직대상 노동자 1,709만 명 가운데 172만 명이 노조에 망라되어 노조조직률이 10.1%다. 우리 사회에서 노조조직률은 1989년에 19.8%로 정점에 오른 뒤 계속 하강곡선을 그렸고, 요즈음에는 10% 선을 겨우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지난 20여 동안 이 땅의 노동운동이 노동자의 양적 급증추세를 따라잡지 못하였음을 말해준다.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2011년 현재 전체 노조원 172만 명 가운데, 민주노총 조합원이 56만2,310명(32.7%), 한국노총 조합원이 76만8,953명(44.7%), 미가맹 노조 조합원이 36만6,746명(21.3%), 국민노총 조합원이 2만1,913명(1.3%)이다. 민주노총 창설 이후 17년이 되었건만, 이 땅의 전체 노동자 1,709만 명 가운데 민주노총 조합원이 차지하는 비율은 3.3%밖에 되지 않는다.
 
위의 통계자료가 말해주는 것처럼, 진보적 노동운동과 어용적 노동조합주의운동이 33 대 67의 비율로 판세를 이루고 있는 것은 이 땅의 노동운동에 어용적 노동조합주의가 만연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전체 노동자 중에 민주노총 조합원이 차지하는 비율이 3.3%밖에 되지 않는 것은 이 땅의 진보적 노동운동이 아직 약세를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말해준다.
 
어용적 노동조합운동이란 노동자의 계급정치역량을 강화하여 진보와 변혁으로 나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노동조건개선과 임금인상에만 매달려 자본가계급과 타협하고 중도우파정권에 협조적인 노동조합주의(trade unionism)의 운동형태다. 잘라 말해서, 그런 어용적 노동조합주의이야말로 진보적 노동운동의 앞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선진적 노동자들이 노동계급 일반을 진보적 노동운동으로 이끌어가지 못하고, 어용적 노동조합주의 포위망에 갇혀 있을 때,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노동자 계급정당을 건설하는 급진적 방식으로는 진척되지 못한다.
 
더욱이 이 땅의 수구우파정권이, 진보와 변혁을 지향하는 선진적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폭력으로 짓밟는 '국가보안법'이라는 강력한 정치탄압수단을 틀어쥐고 있고, 수구우파정권과 야합한 '대중언론'이 강력한 반노동자 선동을 토해내고 있는 조건에서,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처럼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이라는 과업을 실현할 수 없는 오늘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 그 대안으로 제기된 것이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이다.
 
진보적 노동운동은 진보적 대중정당을 건설함으로써 자신을 정치세력화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진보적 대중정당의 장성과 발전은 진보적 노동운동에 의거하여야 한다. 진보적 노동운동이 장성, 발전된 만큼 진보적 대중정당도 장성, 발전되는 것이다.
 
진보적 노동운동이 분열되고 미약하면, 그에 의거하는 진보적 대중정당도 그 이상으로 장성, 발전되지 않는다. 진보적 노동운동이 파벌주의 질곡에 빠져 있고 노동조합주의 포위망에 갇혀 있으면, 진보적 대중정당의 장성,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에서 노조조직률이 10%선을 유지하는 것과 진보적 대중정당에 대한 대중지지율이 10%선을 유지하는 것은 무관하지 않으며, 민주노총 조합원이 전체 노동자 가운데 약 3%를 차지하는 것과 진보적 대중정당의 대선 독자후보가 약 3%의 득표율을 얻는 것은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진보적 노동운동에게는 파벌주의 질곡에서 벗어나고 노동조합주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나아가 자기의 사회정치역량을 더욱 장성, 발전시키는 당면요구가 제기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서 진보적 노동운동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민주노총은 어떠한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지금 민주노총 지도부는 파벌주의 질곡에 빠져있고, 민주노총 자체는 노동조합주의 포위망에 갇혀 있다. 32.7%와 3.3%라는 저조한 수치가 그런 사정을 말해주고 있다.

 
진보적 노동운동의 정치적 무능, 그리고 전략적 오판

민주노총이 자기의 정치방침을 논의하는 공식기구인 '새정치특별위원회'가 2012년 8월 21일 2차 토론회를 진행하였다. 그 토론회에 관한 언론보도를 읽어보면, 세 가지 문제가 시야에 들어온다.
 
첫째, '새정치특별위원회' 2차 토론회에서는 민주노총이 "진보정당의 동원부대로 전락하였다"고 평가하였다고 한다. 진보적 노동운동의 정치적 무능에 대한 자조적인 평가로 들린다.
 
반성적으로 고찰해야 할 문제는, 민주노총이 겪는 그런 정치적 무능의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 건설된 통합진보당에서 민주노총이 사실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정치적 무능에 빠진 것이다.
 
진보적 노동운동이 왜 진보적 대중정당 안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을까? 민주노총 지도부는 그렇게 된 원인을 진보적 대중정당의 패권주의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원인규명은 자기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는 오류다.
 
만일 진보적 대중정당에 패권주의가 존재한다면, 그 패권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진보적 노동운동의 몫이다. 진보적 노동운동의 정치역량만이 진보적 대중정당의 패권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패권주의 극복은 진보적 노동운동이 수행해야 할 중요한 정치임무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파벌주의 질곡에 빠지고 노동조합주의 포위망에 갇혀 정치적으로 무능한 민주노총 지도부에게 진보적 대중정당의 패권주의를 극복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기는 힘들다. 민주노총은 진보적 대중정당의 패권주의를 말하기 전에 자기의 파벌주의 질곡부터 청산해야 한다.
 
둘째, '새정치특별위원회' 2차 토론회에서는 민주노동당이 자유주의정치세력과 통합하여 통합진보당을 건설한 오류를 지적하고,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철회를 정당하다고 평가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평가는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에 대한 부정을 전제한 것이다.
 
이전에 발표한 나의 글들에서 여러 차례 논한 것처럼,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은 노동자 계급정당을 건설하는 원칙과 방도와는 다른 자기의 고유한 원칙과 방도에 따라 건설되어야 한다. 진보적 대중정당은 진보와 변혁을 지향하는 여러 정치역량들을 통합하고,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요구하는 중간적 정치역량까지 끌어들여 건설하는 것이다.
 
당의 사회계급구성으로 보면, 진보적 대중정당은 선진적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과 중간적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이 폭넓게 연합한 형태의 정당이다. 그와 달리, 노동자 계급정당은 진보와 변혁을 지향하는 정치역량만으로만 건설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자유주의세력과 통합하여 통합진보당을 건설한 것이 오류라고 비판한 '새정치특별위원회'의 견해는,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요구하는 중간적 정치역량을 배제하고 선진적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의 정치역량만으로 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견해다.
 
그런 주장은 앞으로 정치정세가 지금보다 더 발전하여 노동자 계급정당을 건설해야 할 때 나와야 하는 것인데, 너무 조급하게 지금 나왔다. 객관현실을 무시하고 주관관념에 사로잡힌 조급증은 진보와 변혁의 앞길에 혼란을 조성한다.
 
셋째, '새정치특별위원회' 2차 토론회에서는 민주노총이 2012년 대선에 독자후보를 내고, 새누리당과 민주당을 제외한 진보적 대선후보들과 민중경선을 치러 단일 대선후보를 선출하자는 논의도 있었다고 한다. 민주노총이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으니, 당연히 대선에 자기의 독자후보를 내겠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된다.
 
그러나 '새정치특별위원회' 2차 토론회에서 논의된 '진보적 대선후보' 선출방안은, 민주노동당이 지난 10여년 동안 추진하다가 실패로 끝난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자기의 그런 실패경험을 딛고 나아가 통합진보당을 건설하고 민주당과 야권연대를 실현하는 새로운 정치방침을 채택하였다.
 
그런데 '새정치특별위원회'가 그처럼 실패로 끝나 폐기된 대선방침을 다시 끄집어내었으니, 이것은 진보정치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놓고, 실패가 뻔한 선거방침을 고집하는 일이다.
 
이번 대선에서 통합진보당이 민주당과 야권연대를 실현하려는 까닭은 진보적 정권교체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2013년에 박근혜 정권이 등장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통합진보당이 진보적 정권교체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는커녕 사실상 속수무책으로 될 것이다.
 
진보적 대중정당이 사실상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던 이명박 정권 5년의 암울한 경험이 2013년부터 또 다시 5년이나 연장되는 것이다.
 
2012년 대선이 진보정치에 주는 의의는 바로 그런 속수무책의 악순환을 끊어버릴 절호의 기회라는 데 있다. 통합진보당이 속수무책의 악순환을 끊어버릴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도는 야권연대로 정권교체를 실현하는 것밖에 없다.
 
'새정치특별위원회'가 이처럼 명백한 이치를 외면하고 이미 폐기된 대선방침을 다시 끄집어낸다면, 불행하게도 진보정치가 좌절하는 속도가 빨라질 것이다. (2012년 8월 23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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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0

경수로 구조물에 왜 지붕을 덮지 않았을까?

<연재> 한호석의 진보담론 (223)
통일뉴스 2012년 08월 20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경수로 압력용기가 드디어 설치되었다

2012년 1월 6일 미국에서 발행되는 <원자과학자 회보(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는 녕변 경수로 공사 진척도를 파악할 수 있도록 공사현장을 시기별로 촬영한 위성사진 아홉 장을 실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북측이 공사 중인 경수로 구조물 바로 옆에서 작업을 개시한 반구형 덮개지붕(dome) 제작현장을 찍은 촬영날짜가 2011년 6월 13일이고, 반구형 덮개지붕이 완성된 모습을 찍은 촬영날짜가 2011년 11월 3일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북측이 2011년 하반기에 약 4개월에 걸쳐 반구형 덮개지붕을 공사현장에서 완성하였음을 말해준다.

미국 상업위성이 녕변 경수로 공사현장을 촬영한 또 다른 위성사진은, 2012년 8월 16일 미국의 과학국제안보연구소(Institute for Science and International Security) 누리집에 실린 보고서에도 나온다. <원자과학자 회보>에 실린 2011년 11월 3일에 촬영한 위성사진과 마찬가지로, 과학국제안보연구소 보고서에 실린 2012년 6월 24일에 촬영한 위성사진도 압력용기가 들어갈 경수로 구조물 좌우에 대형 탑식 기중기(tower crane)가 각각 한 대씩 설치되어 있고, 그 구조물 바로 옆에 반구형 덮개지붕이 놓여있는 것이 보인다. 이 두 위성사진이 말해주는 것은, 북측이 반구형 덮개지붕을 완공한 2011년 11월 초부터 2012년 7월 초까지 약 7개월 동안 그 덮개지붕을 공사 중인 경수로 구조물 옆에 놓아두었다는 사실이다.

북측은 경수로 구조물 골조공사를 완공하였으면서도 왜 반구형 덮개지붕을 덮지 않고 구조물 옆에 놓아두었을까? 그 까닭은, 미국군 정찰위성이 포착하지 못하는 다른 지역의 지하공장에서 제작한 경수로 압력용기를 초대형 화물차에 실어 공사현장으로 운반해서 아직 지붕을 덮지 않은 구조물 상층부를 통해 들여놓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지붕을 덮지 않은 경수로 구조물 상층부를 통해 압력용기를 들여놓으려면 당연히 기중기가 필요한데, 위성사진에 나타난 대형 탑식 기중기 두 대가 바로 거기에 사용한 대형 기중기다. 다시 말해서, 북측은 대형 탑식 기중기를 사용하여 압력용기를 경수로 안에 들여놓은 다음, 맨 나중에 반구형 덮개지붕을 들어올려 경수로 상층부를 덮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세계 각국의 분석가들이 북측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지만, 녕변 경수로 공사가 보여주는 특이한 건축공법도 역시 이해하기 힘든 경우에 속한다. 다른 나라 같으면, 압력용기를 들여놓기 위해 건물 외벽 한 쪽 면을 터놓았다가 그곳으로 압력용기를 들여놓는 것이 일반적인데, 북측은 그런 일반적인 방식으로 공사를 하지 않았다. 북측은 지붕을 덮지 않고 나머지 골조공사를 완공한 다음에, 대형 탑식 기중기를 사용하여 압력용기를 들여놓는 독특한 방식으로 공사를 하였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경수로 골조공사 중에 터놓은 외벽을 통해 압력용기를 들여놓는 공법보다 지붕을 덮지 않은 경수로 건물 위쪽을 통해 압력용기를 들여놓는 공법이 더 힘들다. 북측은 왜 쉬운 공법을 마다하고 일부러 힘든 공법을 택하였을까?

이 물음에 해답을 주는 실마리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바로 그 곳 녕변 핵시설단지에서 있었던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82년 4월 어느 날, 미국군 정찰위성이 녕변지역을 촬영한 위성사진에 건축공사현장이 나타났다. 미국은 위성사진 판독을 통해 북측이 녕변에서 핵시설 공사를 진행하고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공사진척도를 정밀분석한 결과 핵시설 공사가 이미 3년 전부터 시작되었음을 알아냈다.

그런데 1982년 4월에 촬영한 위성사진에 나타난 녕변 흑연감속로 건설공사는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바로 그 곳에서 진행되는 경수로 건설공사와 매우 흡사하였다. 30년 전 녕변 핵시설단지에서는 축구장 두 배만큼 큰 직사각형 건물 신축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북측은 놀랍게도 그 건물의 지붕을 일부러 덮지 않고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일부러 지붕을 덮지 않았으므로, 두꺼운 벽으로 차단된 수많은 격실(cell)들이 거대한 직사각형 건물 안에 들어찬 모습이 위성사진에 노출되었다. 위성사진을 통해 그 격실의 모습과 배치상태를 정밀분석한 미국은, 그 거대한 직사각형 건물이 플루토늄을 분리하여 추출하는 격실을 배치한 건물이라고 판단하였다.

30년 전에 흑연감속로를 건설할 때 일부러 지붕을 덮지 않았던 것이나, 오늘 경수로를 건설하면서 7개월 동안 일부러 지붕을 덮지 않은 것은, 북측이 미국에게 공사진척상황을 보여주려는 의도적인 노출이다. 만일 북측이 처음부터 지붕을 덮고 공사를 하였더라면, 미국군 정찰위성이 그 건물 내부를 촬영할 수 없으므로 미국은 그 건물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북측은 지붕을 덮지 않는 독특한 공법을 택함으로써 경수로 공사진척상황을 미국에게 보여주는 ‘친절’을 베풀었던 것이다.

누구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북측이 미국에게 베푼 그러한 ‘친절’은 결코 친절한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시시각각 진척되고 있는 경수로 건설상황을 미국군 정찰위성에 일부러 노출함으로써 미국을 시시각각 옥죄어가는 기상천외한 대미압박공세인 것이다. 1982년 녕변 흑연감속로를 건설할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시하였던 기상천외한 대미압박공세는 30년이라는 시간간극을 뛰어넘어 오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게 계승되었다.

30년 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도 북측은 녕변 원자로 건설공사로 미국을 시시각각 옥죄가고 있으니, 북측에서 대를 이어 계속되는 대미압박의 연속성과 일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30년 전의 대미압박과 오늘의 대미압박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30년 전 북측은 미국의 일방적인 핵공격위협에 재래식 반격력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비해, 오늘 핵보유국의 지위를 확보한 북측은 미국의 핵공격에는 반드시 섬멸적인 핵공격으로 대응하겠다고 공언하면서 당당하고 단호한 태도로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일본 정부 관계자가 전한 말을 인용한 <교도통신> 및 <후지TV> 2012년 7월 12일 동시보도에 따르면, 북측은 경수로 구조물 바로 옆에 7개월 동안 놓아두었던 반구형 덮개지붕을 2012년 7월 초에 기중기로 들어올려 그 구조물 상층부를 덮었다. 북측이 반구형 덮개지붕을 제자리에 올려놓은 것은, 경수로 구조물 안에 압력용기를 들여놓고 덮개지붕을 덮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2012년 7월 초 북측은 녕변 이외의 다른 지역에 있는 지하공장에서 완성한 압력용기를 대형 화물차에 싣고 가서 경수로에 설치한 다음, 반구형 덮개지붕을 덮은 것이다. 그런 사실을 위성사진으로 파악한 미국과 일본은 경악하였을 것이다.

녕변 경수로 건설현장 책임자는 2010년 11월 12일 녕변 핵시설단지를 방문한 미국의 핵과학자 식프릿 헥커(Siegfried S. Hecker)에게 2010년 7월 31일에 시작한 경수로 건설을 2012년까지 완공할 것이라고 말했고, 2012년 3월 26일 <교도통신> 특파원과 대담한 북측 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 리기성 교수는 녕변 경수로가 2012년 말까지 완공될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미국 전문가들 가운데 녕변 경수로가 2012년 말까지 완공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를테면, 식프릿 헥커는 2011년 12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토론회에 강연자로 출연하여 “북측이 2012년까지 경수로를 완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하였다. 또한 2012년 5월 <AP통신>은 미국 존스합킨스대학 국제관계대학원 한미연구소의 평가발언을 인용하여 녕변 경수로는 2014~2015년에 가서야 완공될 것으로 예측하였고, 2012년 8월 16일 미국의 과학국제안보연구소가 발표한 보고서에서는 위성사진을 검토한 전문가들의 견해를 인용하여 녕변 경수로가 2013년 하반기에 완공될 것으로 예측하였다.

그러나 북측은 2012년 7월 초에 압력용기를 경수로에 설치하고 반구형 덮개지붕을 덮어놓음으로써 2012년까지 경수로를 완공할 것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행동으로 입증하였다.

수직적 핵확산의 재앙이 미국에게 밀려오고 있다

북측이 예상하는 완공시기인 2012년 말까지 녕변 경수로가 완공될 것인지 아니면 미국 전문가들이 예측한 것처럼 2013년 하반기 또는 2014~2015년에 가서야 완공될 것인지는 두고 보면 알 수 있지만, 중요한 문제는 북측이 공사기간을 얼마나 단축하느냐 하는 게 아니라 북측이 미국의 예상을 뒤엎고 초고속으로 진척시키는 경수로 건설속도가 미국을 심하게 옥죄이고 있다는 것이다.

북측의 녕변 경수로 완공이 왜 미국을 옥죄는 엄청난 압박공세로 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아래의 정보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첫째, 우라늄 235를 90%로 농축하면 무기급 우라늄(WGU)이 되는 데, 북측이 초현대식 우라늄농축설비를 자체로 만들어낸 고도의 우라늄농축기술을 확보하였으므로, 우라늄 235를 90%로 농축한 무기급 우라늄을 생산하는 것은 기술공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과학국제안보연구소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녕변 우라늄농축시설에서 가동 중인 2세대 원심분리기 2,000대가 한 해 동안 생산하는 무기급 우라늄 추정량은, 추산방법에 따라 편차가 나지만, 최대 34kg에 이른다.

그런데 위의 보고서에 따르면, 북측은 원심분리기 10,000대를 만들 수 있는 막대한 분량의 자재를 지난 10여 년 동안 확보하였다고 한다. 원심분리기 10,000대를 만들 수 있는 자재를 확보한 북측이 녕변 우라늄농축시설에 원심분리기 2,000대만 들여놓은 것은, 녕변 우라늄농축시설이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더 방대한 우라늄농축시설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준다. 북측이 원심분리기 10,000대를 만들어 가동하고 있다면, 무기급 우라늄 연간 최대 생산량은 170kg에 이른다.

둘째, 북측이 녕변 경수로를 가동하는 경우, 무기급 플루토늄(WGP)을 생산할 수 있는데, 열용량이 100메가와트급(MWt)인 녕변 경수로는 연간 20kg의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

셋째, 북측은 핵탄두 소형화 기술을 뛰어넘어 핵탄두 극소형화 기술을 확보하였다. <연합뉴스> 2012년 5월 2일 보도에 따르면, 북측은 1980년대 후반부터 내폭형 기폭장치를 집중적으로 개발해왔다. 한국국방연구원 자료를 인용한 <신동아> 2009년 7월호 관련기사에 따르면, 북측이 실시한 고폭실험은 무려 140차례 이상이다. 일반적으로 대형 핵폭탄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고폭실험을 30~40차례만 하면 충분한데, 북측은 고폭실험을 왜 140차례 이상 실시하였을까? 핵전문가들이 인정하는 것처럼, 소형 핵탄두 제조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 그처럼 수많은 고폭실험을 실시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에 탑재하는 핵탄두는 지름이 90cm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북측이 1999년에 방북한 파키스탄 핵과학자 압둘 카디르 칸(A. Q. Khan)에게 실물로 보여준 핵탄두는 지름이 60cm밖에 되지 않았다. 이것은 북측이 무게가 250~500kg밖에 되지 않는 소형 핵탄두를 개발하였음을 말해준다.

<연합뉴스> 2009년 4월 1일 보도에 따르면, 인민군은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핵폭탄을 극소형화하는데 관심을 두었으며, 극소형 핵폭탄을 사용하는 전술연구에 몰두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 언론보도에 따르면, 2010년 11월 북측 외무성 리근 미주국장이 방북한 미국 중앙정보국(CIA) 출신 인사에게 “우리는 소형화한 핵무기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소형화한 핵무기를 운반하는 기술도 이미 개발하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핵무기 제조기술이 가장 발달했다는 미국에서 핵개발을 전담하는 정부부서인 에너지부(Department of Energy)는 소형 핵탄두 1발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플루토늄 최소량이 4kg이라고 밝혔으나, 북측이 2006년 지하핵실험을 통해 입증한 것처럼 북측은 플루토늄 2kg만 가지고서도 극소형 핵탄두를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였다.

셋째, 무기급 우라늄 15kg으로 핵탄두 1발을 만들 수 있으므로, 북측이 녕변 우라늄농축시설과 그 밖의 다른 비밀농축시설들에서 무기급 우라늄 170kg을 생산하면, 해마다 핵탄두 11발씩 추가로 만들 수 있다. 거기에 더하여 녕변 경수로에서 해마다 20kg의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하면, 북측은 해마다 핵탄두를 10발씩 추가로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북측은 우라늄농축시설과 경수로를 가동하여 해마다 핵탄두를 21발씩 추가로 생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북측이 해마다 핵탄두를 21발씩 추가로 생산하는 것은, 핵확산금지체제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미국에게 ‘수직적 핵환산의 재앙’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미국은 북측의 경수로 건설과 우라늄농축을 중단시키기 위해 대북관계에서 평소에는 도저히 생각하지 못할 굴욕적인 외교행동마저 취해야 할 정도로 최악의 궁지에 몰린 것이다. 올해 2012년은 그런 의미에서 미국에게 ‘고난의 시기’인 것이다.

미국 고위관리들의 유엔주재 북측 대표부 극비방문

녕변 경수로 건설상황과 관련하여 최근 북미관계에서는 오랜 침묵을 깨고 ‘조용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그 사연은 아래와 같다.

<교도통신> 보도를 인용한 <연합뉴스> 2012년 8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고위관리들이 2012년 7월 10일경 뉴욕에 있는 유엔주재 북측 대표부를 찾아갔다. 언론보도에는 미국의 고위관리들이라고 기술했지만,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미국 국무부 고위관리들이라고 기술해야 한다.

‘뉴욕통로’로 알려진, 북측과 미국의 비공식 외교경로가 있는 데, 그 외교경로는 한성렬 유엔주재 북측 차석대사와 클리퍼드 하트(Clifford Hart) 미국 국무부 6자회담 특사 사이에서 전화통화로 상호연락하는 것이다. 북측과 미국이 그처럼 상호연락하는 ‘뉴욕통로’가 있는 데도, 미국 국무부는 ‘뉴욕통로’를 통하지 않고 유엔주재 북측 대표부에 고위관리를 보낸 것이다. 그 날 유엔주재 북측 대표부를 찾아간 미국 국무부 고위관리들은 누구였을까? 미국 국무부 6자회담 특사인 클리퍼드 하트를 비롯한 관리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 디씨에서 일하는 미국 국무부 고위관리들이 뉴욕까지 가서 유엔주재 북측 대표부를 직접 찾아간 것은 전례 없는 이변이다. ‘초강대국’으로 자처하는 미국의 고위관리들이 적국의 외교대표부를 찾아간 것은 미국이 지켜온 외교활동원칙을 스스로 어긴 굴욕적인 저자세 외교다. 미국이 북측 앞에서 자국의 외교활동원칙을 스스로 어기는 굴욕적인 저자세 외교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런 수치스런 이변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도록 언론 취재망을 따돌리고 극비리에 유엔주재 북측 대표부를 방문한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극비방문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한 달 이상 시간이 흘렀던 것이다.

외교관계에서 시종일관 거만한 태도로 일관해오던 미국 국무부 고위관리들은 왜 북측에게 그처럼 굴욕적인 저자세 외교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들의 비밀방문날짜에서 사연을 엿볼 수 있다. 미국 국무부 고위관리들이 유엔주재 북측 대표부를 찾아간 2012년 7월 10일경이라는 시점은, 북측이 녕변 경수로에 압력용기를 설치하고 반구형 덮개지붕을 덮은 2012년 7월 초에서 불과 3~4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은 북측이 녕변 경수로에 압력용기를 설치한 것을 보고 엄청난 정신적 충격과 심리적 압박을 받았기 때문에 곧바로 국무부 고위관리들의 유엔주재 북측 대표부 극비방문을 추진했던 것이다.

위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2012년 7월 10일경 유엔주재 북측 대표부에서 진행된 북미접촉에서 양측은 2.29 북미합의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고 한다. 그 날 북미접촉에서 미국은 2.29 북미합의를 강조하면서 북측에게 우라늄농축과 경수로건설을 제발 중지해달라고 애걸하면서 6자회담을 재개하자고 간청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미국으로서는 ‘초강대국 체면’ 같은 것도 잠시 접어두고, 자기들의 외교활동원칙도 어기면서 북측에게 ‘간청외교’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다급한 처지에 몰린 것이다.

2011년 11월 22일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모습을 드러낸 국무부 정무차관 웬디 셔먼(Wendy Sherman)의 오만한 발언처럼, “6자회담을 재개하고 싶으면, 북측이 먼저 우라늄농축 중단을 포함한 비핵화 사전조치를 이행해야 한다”고 하면서 “북측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지켜볼 것”이라고 거만을 떨던 미국은 이제 우라늄농축과 경수로건설을 중지해달라고 북측에게 애걸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하였다.

그러면 북측은 미국의 그러한 ‘간청외교’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미국의 ‘간청외교’에 대한 북측의 반응을 알아보려면, 미국의 대북 ‘간청외교’가 있었던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2012년 7월 말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싱가포르에서 진행된 또 다른 북미비밀접촉을 살펴볼 필요가 었다. 대북관계에서 잔뜩 궁지에 몰려 다급해진 미국이 또 다시 만나자고 북측에게 ‘간청’한 끝에, 이른바 미국 외교가에서 ‘제2경로(track two)’라 부르는 북미접촉이 싱가포르에서 진행된 것이다.

싱가포르에서 진행된 북미접촉, 모란봉 악단이 연주한 미국 동요

싱가포르 북미접촉에 관한 정보는, 2012년 8월 16일 미국의 외교전문지 <외교정책(Foreign Policy)> 누리집에 실린 단독보도 ‘미국과의 2005년 합의를 재고하겠다고 위협한 북측(North Korea Threatens to Reconsider 2005 Agreement with U.S.)’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싱가포르 북미접촉에 나선 북측 참석자는 한성렬 유엔주재 북측 대표부 차석대사와 최선희 외무성 미국국 부국장이었고, 미국측 참석자는 국무부에서 15년 동안 핵문제를 담당했던 조엘 위트(Joel Wit) 컬럼비아대학 동아시아연구소 상임연구원을 단장으로 하고 코리 힌더스타인(Corey Hinderstein) 핵위협발의(Nuclear Threat Initiative) 국제담당 부책임자를 포함한 6명의 미국인 전문가 집단이었다. 뉴욕 북미접촉에 참석한 한성렬 차석대사가 싱가포르 북미접촉에도 참석하였고, 평양에서 파견한 최선희 외무성 미국국 부국장도 참석하였으므로, 싱가포르 북미접촉에서 나온 북측 참석자들의 발언내용을 북측의 공식견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2012년 8월 16일 <외교정책> 누리집에 실린 단독보도에 따르면, 싱가포르 북미접촉에서 “(북측과 미국의) 양자관계의 미래에 관한 의제가 토론에 올랐을 때,” 북측 참석자들은 “우리는 2.29 북미합의에 더 이상 관심이 없다. 9.19 공동성명까지 폐기할 것인지 내부적으로 고려하는 중”이라고 하면서 “이제는 미국이 먼저 양보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러한 발언내용은 북측이 미국을 옥죄었던 기존 압박수위를 뛰어넘는 초강경한 압박이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훼손한 2.29 북미합의에 대해 북측이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발언도 충격적이지만, 9.19 공동성명까지 폐기하는 문제를 북측 내부에서 논의한다는 것은 미국과의 모든 대화통로를 영구폐쇄하겠다는 뜻이므로 미국에게 더욱 충격적이다. 거기에 더하여, 이제까지 북측이 줄곧 미국에게 요구해온 동시행동원칙을 접고 이제부터는 미국이 먼저 양보행동을 취하라고 요구한 것은 미국에게 너무도 충격적인 발언이다.

뉴욕 북미접촉과 싱가포르 북미접촉을 전후로 하여 북측 외무성은 대변인 성명과 대변인 담화를 연속적으로 발표하였다. 그 대변인 성명과 대변인 담화가 뉴욕 북미접촉 및 싱가포르 북미접촉과 무관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문제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북측이 싱가포르 북미접촉에서 9.19 공동성명 폐기문제를 고려하는 중이라고 말한 것은, 북측 외무성 대변인이 2012년 7월 20일에 발표한 대변인 성명에서 “조성된 사태는 미국이 (줄임) 우리 공화국을 공격하거나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언하고 조미가 서로의 자주권을 존중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기로 한 9.19 공동성명의 기본조항들을 통채로 뒤집었다는 것을 실증해주고 있다”고 지적한 내용과 상통된다.

여기서 ‘조성된 사태’라는 것은 이른바 ‘동까모’ 같은 대북테러단체를 미국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지원해준 사태를 뜻한다. 그러므로 북측이 싱가포르 북미접촉에서 9.19 공동성명 폐기문제를 고려한다고 밝힌 것은, 미국이 대북테러단체에 대한 배후조종과 지원을 중단하지 않으면, 북측은 더 이상 미국과 대화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북측이 싱가포르 북미접촉에서 기존 동시행동원칙을 접고 이제부터는 미국이 먼저 양보행동을 취하라고 요구한 것은, 북측 외무성 대변인이 2012년 7월 25일에 발표한 대변인 담화에서 “미국은 말로만 우리에 대하여 적대의사가 없다고 할 것이 아니라 아무런 구실이나 전제조건이 없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꿀 용단을 내리는 것과 같은 실천행동으로 그를 증명해보여야 한다”고 요구한 내용과 상통된다.

 7.25 대변인 담화는 이런 문장으로 끝맺었다. “우리에게는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문제를 푸는 방법도 있고 조선반도에서 전쟁의 화근을 송두리채 들어내여 항구적인 평화를 실현하는 방법도 있다. 선택은 미국이 해야 할 것이다.”

뉴욕 북미접촉이 진행되기 바로 몇 일 전인 2012년 7월 6일 평양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모란봉 악단 시범공연이 진행되었다. 시범공연이 후반부로 넘어갔을 때, 미국인들 누구에게나 익숙한 미국 동요 ‘이렇게 좁은 세상(It's A Small World)’이 연주되었다. 원래 이 동요는 미국의 저명한 영화음악 작곡가들인 로벗 셔먼(Robert B. Sherman)과 리처드 셔먼(Richard M. Sherman) 형제가 196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0일까지 쿠바 미사일 사태로 핵전쟁 위기가 전 세계를 휩쓴 직후에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지었고, 1964년 4월 22일 뉴욕 플러싱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서 초연되어 세계 각국에 널리 알려진 미국의 대표적인 동요다. 모란봉 악단 시범공연에서 왜 그런 특이한 사연을 지닌 미국 동요가 연주되었을까?

모란봉 악단 여성가수들은 영어원문과 다르게 번역된 동요가사로 노래하였는데, 북측에서 번역한 우리말 가사는 “지나고 보면 간단한 명제...너와 나 함께 함께 살고 있지 않어, 이렇게 좁은 세상”이라고 되어 있었다. 녕변 경수로 공사가 막바지에 올라 미국을 강하게 옥죄고 있는 지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그 동요의 우리말 번역가사에 담긴 뜻을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김정은 제1위원장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내는 그처럼 간단명료한 메시지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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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9

1954년 독도 방어전, 그리고 독도해전

[한호석의 개벽예감] (26)
자주민보 2012년 08월 18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일본 함정 격퇴하고 승리한 1954년 독도방어전

1954년 7월 4일 새벽 안개 속에 잠긴 독도 앞바다에서 일본 해상보안청 1,000t급 경비함 한 척이 해안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당시 독도는 홍순칠 수비대장이 이끄는 독도의용수비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일본 경비함에 맞서 싸울 중화기가 없었고, 무장이라고는 고작 경기관총과 소총 몇 정, 수류탄 몇 발 뿐이었다. 6.25 전쟁 직후 울릉도로 귀향한 제대군인들이 일본의 독도강탈책동을 보고 참을 수 없어 의용대를 조직하여 독도에 들어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결사조로 나선 홍순칠 수비대장과 두 대원은 경기관총과 수류탄을 들고 전마선에 뛰어올랐다. 그 전마선은 수비대원들이 먹을 물고기를 잡고 해산물을 채취할 때 쓰는 1t짜리 소형선박이었다.

경기관총과 수류탄을 든 3인의 결사조는 전마선을 몰고 일본 경비함을 향해 돌진하였다. 1t짜리 전마선과 1,000t급 경비함의 해상대결이었다. 전마선에 탄 결사조의 경기관총이 독도 영해를 침범한 일본 경비함에게 응징의 불을 뿜었고, 독도 해안에서 다른 수비대원들은 엄호사격을 퍼부었다. 결사조는 일본 경비함에 접근하여 집중사격을 하였으나, 총탄은 두꺼운 함체를 뚫지 못하였다.

불의의 기습공격을 받고 놀란 일본 경비함은 대응사격도 하지 못한 채 선수를 홱 돌려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결사대가 탄 1t짜리 전마선은 일본 경비함이 달아나며 일으킨 거대한 파도에 떠밀리며 뒤집힐 뻔하였다. 1t짜리 전마선과 1,000t급 경비함의 해상대결은 전마선 결사조의 기습공격이 거둔 승리로 끝났다. 일본 경비함을 격퇴하고 제1차 독도방어전에서 승리한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은 너무 감격하여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지금으로부터 5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눈물겨운 독도방어전 이야기는, 1976년 5월 신병치료를 위해 서울에 머물던 홍순칠 수비대장이 언론에 남긴 회고담이다.

독도를 강탈하려는 일본의 야욕은 집요하였다. 1954년 11월 21일 이른 아침 일본 해상보안청은 경비함 3척을 또 다시 독도로 내몰았다. 4개월 전에 있었던 해상대결에서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한 일본은 자기들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이번에는 경비함 3척을 출동시킨 것이다.

독도를 향해 삼면에서 포위할 듯이 다가오는 일본 경비함들을 순찰하던 도중에 발견한 홍순칠 수비대장은 수비대 막사로 뛰어가 대원들에게 적들의 침입을 소리쳐 알렸다. 막사에서 뛰쳐나온 수비대원들은 박격포와 기관총을 들고 사격진지로 달려가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4개월 전에 있었던 첫 방어전에서 일본 경비함을 격침시킬 중화기가 없어 안타까움을 느낀 홍순칠 수비대장은 그 사이에 대구에 있는 경북병사구 사령부와 경상북도 경찰국에 찾아가 발사대 없는, 사거리가 1.8km인 60mm 박격포 1문과 사거리가 2km인 12.7mm 소련제 기관포 1정을 많은 포탄과 함께 넘겨받았다. 6.25 전쟁 직후였던 1954년 당시에는 무기관리가 허술해서, 폐기처분될 노획무기를 구할 수 있었다. 홍순칠 수비대장의 회고담에 따르면, 독도에서 잡은 수컷 물개의 해구신을 담당관들에게 주고 중화기를 넘겨받았다고 한다.

일본 경비함들이 약 500m까지 접근하였을 때, 수비대장이 쏜 권총 한 발을 신호로 수비대원들은 일제사격을 개시하였다. 박격포탄 한 발이 일본 경비함에 명중하였고, 기관포 집중사격으로 다른 일본 경비함의 함교는 벌집이 되었다. 불의의 기습공격을 받은 경비함들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황망히 달아났다. 그 날 정오 홍순칠 수비대장이 청취한 일본 NHK 라디오방송 긴급보도에 따르면, 독도의용수비대 기습공격을 받고 퇴각한 일본 경비함들에서 16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한다. 식수가 없어 빗물을 받아 먹으며 일본 경비함에 맞서 용감히 싸운 독도의용수비대는 두 차례에 걸친 독도방어전에서 연승하고 독도를 지켰다.


일본의 독도강탈 군사작전은 ‘작전계획 5029’의 일환이다

독도방어전이 있었던 때로부터 58년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일본의 독도강탈야욕은 여전하다. 일본은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지명)가 일본 영토”라는 도발적인 폭언을 내뱉는 수준을 넘어서 독도를 강탈하려는 도발적 폭거를 자행하고 있다. 그런 도발적 폭거는 즉흥적인 행동이 아니라 계획적인 행동이다.

이 땅의 대중들은 일본이 “다케시마는 일본 영토”라는 도발적인 폭언을 반복하지만, 그들이 설마 독도에 쳐들어 오겠냐고 하면서 방심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방심은, 1954년 독도방어전의 역사적 경험을 망각한 오판이며, 일본이 속에 감추고 있는 흉계를 알지 못하는 착오다.

1954년 독도방어전 당시 일본은 해상보안청 경비함을 독도침범에 내몰았지만, 지금은 해상보안청이 아니라 자위대가 ‘독도강탈 군사전략’을 세워놓고 실전연습을 통해 그 전략을 수정, 보완해오며 독도상륙전 기회를 노리고 있다. 일본 자위대가 독도에 상륙하여 독도를 점령하려는 독도강탈전쟁을 실제로 연습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일본 자위대의 독도상륙이 소설적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인 1970년 3월 23일 <마이니치신붕>에 실린 보도기사를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보도기사를 요약하면, 일본 자위대는 “조선반도 유사시에 조선반도의 동해안, 서해안, 남해안과 쓰시마해협(대한해협의 일본식 명칭-옮긴이)을 봉쇄한다는 것, 북조선이 한국을 선제공격할 경우에 조선전쟁에 참전한다는 것, 조선반도 유사시에 미군이 조선반도에서 작전하는 경우, 그리고 재한일본인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조선반도에 상륙한다는 것”이다.
 
이 보도기사에 나와있는 것처럼, 한반도 유사시에 일본 자위대가 한반도에 상륙하고 한반도 해상을 봉쇄한다는 말은 독도를 완전히 강탈한다는 뜻이다. 한반도 유사시에 일본 자위대가 한반도 동해안을 봉쇄하려면 우선 독도부터 점령하여야 하기 때문에,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해상봉쇄가 독도강탈로부터 시작되리라는 점은 명백하다. 일본은 이미 1905년에 러시아와 동해에서 전쟁을 벌이기 위해 독도를 강탈한 전과범이 아닌가.

일본 자위대는 한반도 유사시라는 말을 쓰고, 미국군은 한반도 급변사태라는 말을 쓰는 데, 그 두 말은 같은 뜻이다. 그러므로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해상봉쇄는 미국군이 북측에서 급변사태를 유발하여 한반도 전쟁을 도발하려는 ‘작전계획(Operation Plan) 5029’의 일환인 것이다. 미국군의 북침전쟁과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해상봉쇄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작전계획 5029’에서 일본 자위대가 맡을 주요작전임무는 한반도 해상봉쇄인 것이다. 일본 자위대가 지난 50여 년 동안 끊임없이 연습해온 것이 바로 한반도 해상봉쇄이고, 한반도 동해안을 봉쇄하기 위한 독도강탈 군사작전이었다.

이 땅의 대중들이 일본의 독도강탈야욕에 분노하는 반일감정을 표출하면서도, 정작 일본의 독도강탈을 보장하는 미국의 ‘한반도 급변사태’ 도발책동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는 것은 인식혼동이다. 이 땅의 대중들이 일본의 독도강탈야욕에 분노하는 것만큼, 아니 그 보다 더 강렬하게 미국의 ‘한반도 급변사태’ 도발책동에 분노하여야 정상인 것이다. 미일동맹군이 한통속으로 공모결탁하여 전쟁위험을 조성하고 있으므로, 한반도 전쟁위험을 제거하고 독도를 수호하려는 이 땅의 대중들에게 반일운동과 반미운동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운동이다.


14년 동안 독도상륙전 준비해온 일본 자위대

1994년 7월 북측 최고영도자가 서거한 직후, 북측에서 혼란이 일어날 것으로 오판한 미국과 일본은 북측의 혼란을 변란으로 증폭시켜 북측 정권을 무너뜨리는 이른바 ‘급변사태’를 상상하였다. 그런 오판에 따라 도발적인 무력침공작전을 준비한 것은 물론이다. 미국이 ‘한반도 급변사태’를 구실로 북침전쟁을 도발하여 인민군 대량파괴무기(WMD)를 탈취하는 내용으로 작성된 ‘개념계획(Concept Plan) 5029’의 비밀스러운 존재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99년 8월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 존 틸럴리(John H. Tilelli)가 그런 전쟁계획이 존재한다고 인정한 발언을 통해서였지만, 이미 1994년 7월 이후 미국은 ‘개념계획 5029’를 작성하였던 것이다.

미국 군부가 1994년에 ‘개념계획 5029’이라는 비밀전쟁계획을 작성한 것과 보조를 맞춰, 일본 방위청(당시 명칭)과 자위대 통합막료감부도 1994년에 ‘K-반도 사태 대처계획’이라는 비밀전쟁계획을 작성하였다. 그 비밀전쟁계획의 개략적인 내용은 일본 시사월간지 <분게이슌주(文藝春秋)> 2003년 2월호를 통해 세상에 공개된 바 있는데, 인민군과 일본 자위대가 전쟁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미국의 ‘개념계획 5029’와 일본의 ‘K-반도 사태 대처계획’의 상호관계를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전자가 본계획이고 후자는 부속계획이다.

놀랍게도, 일본은 ‘K-반도 사태 대처계획’을 작성한 1994년부터 해마다 한 두 차례씩 독도 영해를 침범하기 시작하였다. 한일 두 정부의 정보은폐로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이 1994년부터 연례적으로 독도 영해 침범을 계속해왔다는 사실을 말해준 문서는, 폭로전문 누리집 ‘위키리크스(Wikileaks)’에 게시된, 주일미국대사관 정치참사 조셉 윤(Joseph Y. Yun)이 작성하여 2006년 9월 13일 본국에 보낸 3급 비밀전문 󰡐한국-일본, 한 차례 해저조사에 합의(KOREA-JAPAN ONE-TIME AGREEMENT ON SEABED SURVEY)󰡑였다. 비밀전문에 따르면, 일본은 1994년부터 해마다 한 차례씩 해양조사 명목으로 독도 영해를 침범하였다는 것이다.

독도 영해를 침범해오던 일본 정부는 1998년 4월에 이른바 ‘주변사태법’, ‘자위대법 개정안’, ‘미일물품역무 상호제공협정’을 일본 국회에 상정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법률제정은 ‘K-반도 사태 대처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법률적 정비’를 갖춘 것이었다.

이처럼 일본은 ‘K-반도 사태 대처계획’이라는 이름의 비밀전쟁계획을 작성하고, 그와 관련된 법률적 정비를 마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실전급 전쟁연습을 벌였다. 1998년 11월 15일 일본 육해공 자위대가 이오지마(硫黃島)에서 병력 2,400명, 군함 11척, E2C 조기경보기 등 작전기 20대를 동원하여 3군합동상륙훈련을 실시한 것이다. 이오지마 3군합동상륙훈련은 일본이 패전한 이후 53년만에 처음으로 실시한 3군합동상륙훈련이다. 당시 자위대 통합막료감부는 “어느 나라가 점령하고 있는 일본해(동해의 일본식 명칭-옮긴이)의 한 섬을 탈환하는 시나리오에 따라 합동상륙훈련을 실시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것은 일본 자위대가 독도강탈 군사작전을 실전급 규모로 연습하였음을 노골적으로 밝힌 것이다.

일본 자위대는 2000년대에 들어와 독도상륙전 준비를 계속하였다. 2004년 12월 서울 용산기지에 있는 한미연합군사령부 청사에서 열린 비밀회의에서 ‘작전계획 5029’ 보완작업을 2005년 안에 끝내기로 하고 그 보완작업에 관한 중간평가를 하였는데, 그러한 미국 군부의 북침전쟁계획 작성에 발맞추어 일본 방위성도 2005년부터 ‘방위백서’에 “다케시마가 일본 영토”라는 도발적 내용을 집어넣었다. 일본 외무성이 “다케시마가 일본 영토”라는 도발적 주장을 늘어놓는 차원에서 한 술 더 떠서 일본 방위성이 그런 도발적 주장을 늘어놓은 것은, 일본이 외교부문에서만이 아니라 군사부문에서도 독도강탈책동을 시작하였음을 말해준다.

2006년 4월 17일에 해상보안청 측량선을 독도 앞바다에 보내 해양탐사를 하겠다는 구실을 내건 일본은, 측량선을 보내기 직전에 첩보선과 초계기를 독도 인근 해상으로 먼저 보내 한국 해양경찰청 경비동향을 살폈다. 그에 대응하여 한국 해양경찰청 경비함 18척이 독도로 급파되어 쌍방이 해상대치를 벌였다.

2008년 3월 26일 일본 자위대는 육상자위대 예하에 즉응집단군을 창설하였다. 즉응집단군은 헬기 구축함에서 이륙하는 강습헬기를 타고 적진에 침투하는 특수기동부대다. 독도에는 상륙함정이 아니라 강습헬기를 타고 상륙해야 한다는 점에서 보면, 즉응집단군의 강습헬기 침투대상이 독도라는 점은 명백하다. 이처럼 1994년부터 2008년까지 14년 동안 일본 자위대가 추진해온 독도상륙전 준비는 즉응집단군 창설로 완료되었다.


독도해전 가상시나리오

일본 자위대가 독도상륙전 준비를 완료하였다고 해서, 곧바로 독도에 쳐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독도 앞바다에서 충돌이 일어난 것을 빌미로 독도강탈 군사작전에 돌입할 것이다. 독도 앞바다에서 일어날 충돌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가상시나리오를 논할 수 있다.

미국과 일본이 바라는 북측의 정권 붕괴가 실현될 가능성은 없지만, 미국과 일본이 바라지 않는 남측의 진보적 정권교체가 실현될 가능성은 있다. 남측에서는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려는 정치세력이 결집하여 이미 2000년에 진보정당을 건설하였고, 그 진보정당은 12년 만에 제3당으로 부상하였다. 지금 통합진보당은 자유선진당을 제치고 제3당으로 부상하자마자 내홍과 외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지만, 고비를 넘기고 정상화될 것이며, 진보적 정권교체를 위한 정치활동을 재개할 것이다.

한미관계와 한일관계를 중심에 놓고 정세발전추세를 전망하면, 남측에서 장차 실현될 진보적 정권교체는, 뼛속까지 친미적이고 친일적인 예속적 수구정권이 반미정책과 반일정책을 추진하는 자주적 진보정권으로 교체된다는 뜻이다. 물론 남측에서 반미정책과 반일정책을 추진하는 자주적 진보정권이 앞으로 몇 해 안에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보정치 시각에서 정세발전추세를 전망하면 예속적 수구정권의 퇴장과 자주적 진보정권의 등장은 필연적이다.

한반도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주한미국군이 단계적으로 철군하는 정세격변 속에서 등장할 자주적 진보정권은 당연히 독도수호정책을 밀고 나갈 것이다. 이것은 한일관계에서 미증유의 대결분위기를 촉발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남측에서는 각계각층 대중들이 격렬한 반일시위를 벌이고, 일본에서는 극우세력이 격렬한 반한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일본 극우세력의 ‘다케시마 상륙선단’이 독도 영해를 침범하게 된다. 그들을 저지하는 한국 해양경찰청 경비함들이 일본 해상보안청 경비함들과 충돌하여 쌍방에 많은 사상자가 나고, 그로써 한일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정면충돌로 치닫게 된다.

극도로 험악한 분위기에서 주일한국대사관과 주한일본대사관은 각각 폐쇄되고, 불안에 떠는 재일동포들이 남측으로 급거귀환하고 주한일본인들이 일본으로 집단대피하는 가운데, 일본 기동함대가 독도로 출동하게 된다. 마이즈루(舞鶴)항을 근거지로 삼고 동해 작전을 담당한 일본 해상자위대 제3호위대군 함대가 독도를 기습하는 것이다. 이지스구축함 2척, 강습헬기 탑재 구축함 1척, 구축함 5척으로 편성된 제3호위대군은 일본 해상자위대 중에서도 최정예 기동함대다. 일본 기동함대가 독도를 포위한 가운데, 강습헬기를 동원한 즉응집단군이 독도에 상륙하여 독도 경비병력을 제압하고 독도를 점령한다.

동해항을 근거지로 삼고 동해 작전을 담당한 한국 해군 제1함대가 독도를 탈환하기 위해 긴급출동하지만, 진해항을 근거지로 삼고 남해 작전을 담당한 한국 해군 제3함대는 일본 잠수함대가 대한해협을 봉쇄하는 바람에 증원군을 독도에 보내지 못하고 남해에서 대치상태에 들어간다.

<연합뉴스> 2012년 8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2012년 9월 초로 예정된 독도수호전 연습에 투입되는 한국 해군 제1함대는 3,200t급 구축함 1척, 1,800t급 호위함 1척, 1,200t급 잠수함 1척, 3,000t급 해경 경비함 1척이다. 그런데 제1함대의 호위함이나 해경의 경비함은 일본 기동함대에 맞설 전투력이 없으므로, 한국 해군은 구축함 1척과 잠수함 1척으로 맞서야 한다. 무장력에서 그처럼 열세인 한국 해군 제1함대는 일본 기동함대에게 상대가 되지 않지만, 일본에게 강탈당한 독도를 탈환하려는 결사각오를 안고 독도해전에 나서는 것이다. 쌍방 함대의 함대공 미사일을 우려한 쌍방의 전투기는 독도해전에 참가하지 못한다.

2005년 3월 한국해양전략연구소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안병태 전 해군참모총장은 독도해전이 벌어지면 반나절도 되지 않아 한국 해군이 패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제1함대의 무장력이 일본 기동함대에 비해 크게 열세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요인은 일본과 한통속인 미국이 한국군에게 제공해오던 군사정보를 차단해버리는 바람에 제1함대는 동해 해상작전에 관한 정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독도해전에 나서게 된다는 점이다.

독도를 탈환하려는 결사각오를 갖고 출전한 제1함대는 일본 기동함대에 맞서 사투를 벌였으나 모두 격침당하고, 잠수함 1척만 살아남아 악전고투하며 일본 구축함 4척을 격침하는 기적적인 전과를 올렸는데, 결국 533mm 어뢰 24발을 모두 쏘고 나서 전투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바로 그 때 어디선가 나타난 정체불명의 잠수함대가 일본 함대의 배후에 맹렬한 어뢰공격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독도해전 전황을 듣고 동해의 지하잠수함기지에서 긴급출동한 인민군 잠수함대였다. 몇 척인지 알 수 없는 인민군 잠수함대가 집중발사한 어뢰에 맞은 일본 기동함대는 거대한 물기둥을 일으키며 모조리 격침되었고, 독도에 상륙한 일본 즉응집단군 병력은 강습헬기 구축함마저 격침되는 바람에 전원 포로로 붙잡혔다.

즉응집단군 포로를 송환받는 대신에 일본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영구히 주장하지 않는다는 항복각서를 써야 하였다. 독도해전에서 승리하고 독도를 탈환하고 일본의 항복각서까지 받아내어 한반도 전역이 전승의 환희로 들끓던 날, 자주적 진보정권은 한국군과 인민군이 외세침략으로부터 한반도를 공동방어할 민족연합군을 창설하기로 북측과 합의하였다.(2012년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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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7

분당선동과 부화뇌동의 시끄러운 불협화음

변혁과 진보 (89)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우경기회주의자들의 분당선동

분당파의 막말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다. '진보정치 혁신모임'에 참석한 분당파 대표인사는 거리낌도 없이 "통합진보당은 국민에게 해로운 당이 됐다"는 막말을 내뱉었다.

'혁신'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위장한 그들이 일으킨 반대파 제거소동이 자기들 뜻대로 잘 되지 않자 나중에는 통합진보당을 분당소동에 몰아넣고 '해로운 당'이 되었다고 하면서 자기 당을 비방하다니, 이거야말로 제 얼굴에 침뱉기다. 정파이익에 병적으로 집착한 나머지, 통합진보당을 기어이 둘로 쪼개려는 분당파의 분당선동야말로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에 해롭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해로운 독소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기회주의(opportunism)라는 아주 해로운 사상조류가 있다. 원칙을 팽개치고 무원칙하게 상황변화에 따라 자기이익에만 집착하는 성향이나 행동으로 나타나는 사상조류가 바로 기회주의인데, 분당파가 드러낸 성향과 행동에서 기회주의의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사실이 드러나 보인다.

첫째, 진보적 대중정당이 지켜야 할 원칙을 팽개쳤다는 점에서, 분당파의 성향과 행동은 기회주의의 전형이다. 진보적 대중정당은 분당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정파별로 갈라서는 경망스러운 분당선동으로 건설되는 게 결코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진보적 대중정당은 분산, 분열된 정파들을 공동강령으로 결집시키는 진지한 통합노력으로 건설되는 것이다.

진보적 대중정당이 여느 정파집단과 질적으로 다른 근본적인 차이는, 서로 정견이 다른 정파들이 상호합의한 공동강령 아래 총결집하고 대통합하는 데 있다. 통합진보당이라는 당명 앞자리에 앉힌 '통합'이라는 말이 진보적 대중정당이 지켜야 할 총결집과 대통합의 원칙을 명백히 말해주고 있다. 진보적 대중정당의 존재방식과 발전방향은 명백하게도 분열이 아니라 통합이다. 도대체 이런 진리를 모르는 진보정치인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도 분당파는 진보적 대중정당의 존재방식과 발전방향을 전면 부정하는 분당선동으로 줄달음치고 있다. 만일 진보정치가 분당선동으로 발전될 수 있다는 분당파의 주장과 견해가 객관적으로, 경험적으로 입증된다면, 모든 진보정치활동가들은 당연히 분당파의 그런 주장과 견해를 존중하고 그들의 뒤를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진보정치가 분당선동으로 강화발전될 수 있다는 소리야말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궤변이요 입에 담지 못할 모독이다. 세상 물정을 아직 잘 몰라도 초보적인 사리판단 정도는 할 줄 아는 중학생이라면, 그런 궤변에 속지 않을 것이며, 그런 모독을 배격할 것이다.

통합진보당의 정적인 새누리당에서 요즈음 대선출마를 놓고 박근혜파와 김문수파가 심한 갈등을 빚고 있는데, 김문수파가 박근혜파를 앞질러 대선출마권을 차지할 가망은 전혀 없다. 차츰 궁지에 몰린 김문수는 비방발언으로 박근혜를 공격하다가 박근혜파에게 멱살까지 잡혔는데도, 김문수 입에서는 분당이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새누리당 분당이 수구정치를 망치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잘 알기 때문에 분당이라는 소리를 전혀 꺼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수구우파정당에 맞서 진보정치를 하겠다고 한때 목소리를 높이며 통합진보당을 함께 건설한 유시민파와 심상정파는 통합한지 몇 달만에 분당선동이나 벌이고 있으니, 당의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유시민은 김문수에게서, 심상정은 박근혜에게서 정당정치의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 하지 않을까.
  
둘째, 요즈음 통합진보당 현실이 잘 말해주는 것처럼, 분당파는 상황변화에 따른 자기들의 정파이익추구에만 집착하고 있다. 분당파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자기들의 정파이익추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 통합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런데 반대파 제거소동이 실패로 끝나 당내 상황이 바뀌자마자 그들의 태도는 정확히 180도로 돌변하였다. 자기들이 언제 통합을 말했냐는 식으로 태도가 돌변하여 지금은 무조건 분당해야 한다는 궤변과 망언을 늘어놓기 바쁘다. 분당이 자기들의 정파이익을 추구하는 길이라고 믿기에 "분당만이 살 길"이라는 식의 궤변과 망언을 늘어놓는 것이다.

통합에서 재빨리 분당으로 옮겨탄 분당파의 초고속 돌변속도는, 정파이익추구의 기회를 순식간에 포착하고 180도로 돌변하는 우경기회주의의 동물적 감각이 얼마나 고도로 발달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정파이익추구에 따라 돌변하는 우경기회주의자들은 원래 수구우파정당에 기생하는 '철새 정객'이다. 그런데 수구우파정당에 둥지를 틀고 있어야 할 '철새 정객'들이 진보적 대중정당에 끼어들어 잠깐 기웃거리다가 갑자기 '가출'하겠다고 한다. 원래 '철새 정객'의 생존방식은 '무단가출'과 '집단이동'이 아닌가.

계절변화에 따라 계속 이동하는 철새들을 붙잡아두고 길들이려는 것은 철새의 떠돌이 생리와 맞지 않는 듯하다. 철새는 떠돌아다녀야 자연스럽다.


분당망동에 더하여 부화뇌동까지

통합진보당에서 울려나오는 우경기회주의자들의 분당선동도 듣기가 괴로운 판에, 이번에는 민주노총이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민주노총이 통합진보당을 지지하지 않겠다니,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린가? 왜 지지를 철회하였는가 알아봤더니, 통합진보당이 노동중심성을 확보하지 못해서 지지를 철회하였다고 한다.

통합진보당 진성당원 75,000명 가운데 46.6%에 이르는 35,000명 당원이 민주노총 조합원이라는데, 그런 당을 보고 노동중심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니 무슨 소린가? 통합진보당 강령은 "노동이 존중받고, 민중생존권이 보장되는 경제적 평등사회"와 "민생중심의 자주자립경제체제"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목표들을 밝히고 있는데, 그런 당을 보고 노동중심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니 무슨 소린가?

당원의 46.6%가 노조조직화된 노동자들이고, 당의 강령에서 노동자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 진보정치를 실현하겠노라고 명백히 천명하였는데도, 노동중심성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노동중심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말인가.

민주노총이 말하는 진보정당의 노동중심성이라는 것은 민주노총이 진보정당을 지도한다는 뜻인가? 만일 민주노총 지도부가 통합진보당을 지도하려고 하는 데도 지도할 수 없게 되니까 통합진보당을 외면하겠다고 하였다면, 그거야말로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설마 그런 무식한 생각은 하지 않을 것으로 믿으면서, 진보적 대중정당과 진보적 대중단체의 관계문제에 관해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간다.

과학적인 사회변혁이론에 따르면, 노동계급은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을 이끌어가는 선진적 영도계급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진적 영도계급이 민주적 노동조합을 통해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을 이끌어가는 게 아니라, 반드시 진보적 대중정당을 통해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을 이끌어간다는 점이다.

민주노조활동이 진보정당활동과 분리될 수 없지만, 양자가 동일한 것은 결코 아니다. 민주적 노동조합에 결집한 선진적 노동자들은 진보적 대중정당을 적극 지지함으로써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실현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진보정당의 노동중심성이라는 개념이 뜻하는 핵심내용이다. 그러므로 민주노총이 통합진보당을 적극 지지할 때, 바로 그러할 때 통합진보당이 노동중심성을 확보한 정당으로서 자기의 성격을 분명히 지니고 자기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이 노동중심성을 확보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는 민주노총이 그 당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그 당에 입당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그 당에서 얼마나 책임적인 역할을 하느냐 하는 문제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만일 통합진보당이 노동중심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민주노총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렇게 된 일차적 책임은 그 당을 적극 지지해주지 못한 민주노총 자신에게 있고, 또한 그 당에서 책임적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 당원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현재 민주노총 지도부는 다섯 개 정파로 구성되었다. 통합진보당 지지파, 분당선동 동조파, 좌파정당 건설추진파, 진보신당 지지파, 민주통합당 연대파 등이다. 이처럼 복잡한 정파구성은, 민주노총 조합원이 60만명이나 되는데도 통합진보당에 진성당원으로 가입한 조합원은 민주노총 전체 조합원 가운데 불과 5.83%(35,000명)밖에 되지 않는 까닭을 잘 말해주고 있다.

민주노총이 자기 조합원 가운데 5.83%만 통합진보당에 입당시켜놓고 이제와서 그 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는 말을 어떻게 낯 뜨겁게 할 수 있을까! 민주노총이 통합진보당을 지지한다는 말을 꺼낼 때는 적어도 전체 조합원 가운데 최소한 10%에 이르는 6만명 정도는 그 당에 입당시키고 나서 지지한다고 말했어야 이치에 맞지 않는가.

이런 사정을 보면, 처음부터 민주노총은 통합진보당을 말로만 지지한다고 했지, 실질적으로는 지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말로만 지지한다고 했으면서 이제와서 지지를 철회하였다고 하니,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다.

비록 민주노총 지도부 정파구성이 너무 복잡하여, 민주노총이 통합진보당을 지지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통합진보당에 입당한 민주노총 조합원이 진성당원 가운데 46.6%나 되므로, 그들이 단합하여 당 안에서 자기의 책임적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였더라면 우경기회주의자들의 소동을 간단히 저지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을 최악의 시련과 위기에 몰아넣은 우경기회주의자들의 소동이 지난 몇 달 동안 지속되는데도 그 당의 민주노총 소속 진성당원들은 맥을 놓고 있었다.

2012년 8월 14일 '분당반대! 통합진보당 사수를 위한 노동자운동본부(준)'가 결성됨으로써 분당선동을 저지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작되었지만, 우경기회주의자들이 분당선동을 너무 확산시켜놓은 통에 지금은 그 소동을 저지하기 불가능하다.

그런 노동자 정치활동은 우경기회주의자들이 비례대표 당내경선 결과를 왜곡하며 당을 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기 시작한 넉 달 전에 절실히 필요하였는데, 이제는 때가 너무 늦었지만 뒤늦게나마 그런 정당한 목소리가 울려나오는 것은 바람직하고 다행한 일이다.
 
민주노총 제13차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표결권자 39명 가운데 27명이 찬성하여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다고 하였으니, 민주노총 지도부 성원들 가운데서 통합진보당 지지파는 불과 12명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 27명은 다른 네 개 정파에 각각 속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 조합원이 60만명을 헤아리고, 그 가운데서 통합진보당에 입당한 조합원만 해도 35,000명인데, 통합진보당과 정견을 달리하는 27명이 통합진보당과 민주노총을 갈라놓는 결정을 내린 것은 모순의 극치다. 민주노총 지도부 성원 27명이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철회 결정과정에서 민주노총 전체 조합원들의 의사를 묻지 않고 각자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부화뇌동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통합진보당 우경기회주의자들이 벌이는 분당망동에 더하여 그 당에 대한 민주노총의 지지를 철회하는 민주노총 지도부의 부화뇌동까지 겹쳤으니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의 앞길에 겹겹이 가로막힌 역경과 난관은 혹심하다.

하지만 분당선동과 부화뇌동의 시끄러운 불협화음은 머지 않아 꺼질 것이고,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을 연주하는 장중한 선율이 다시 울릴 것이다. 진보와 변혁을 향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열망으로 불덩이 마냥 뜨거운 미래만이 진보정치활동가들과 당원들을 역경과 난관 앞에서 쓰러지지 않게 붙들어주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시끄러운 불협화음 속에서도 좌절과 후퇴를 모른다. (2012년 8월 16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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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3

일본은 독도에 대한 식민지 영유권을 포기하였는가?

<연재> 한호석의 진보담론(222)
통일뉴스 2012년 08월 13일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려는 일본의 흉심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이 한일관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3자군사동맹 추진을 사주받은 일본과 밀담을 나누며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을 추진하더니, 갑자기 독도는 왜 찾아갔을까? 대일군사협정 체결추진과 독도방문은 서로 모순되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이명박 대통령이 대일군사협정을 더 이상 추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독도를 찾아갔다면 모를까, 막후에서는 일본을 상대로 여전히 반민족적인 대일군사협정을 체결하려고 기회를 노리면서, 무대 위에서는 독도방문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독도방문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집권 말기에 더욱 심각해진 민심이반을 돌려보려고 독도를 찾아간 돌출행동을 취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돌출행동도 눈길을 끌지만, 그 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그 돌출행동에 대한 일본의 어처구니 없는 반발행동이다. 특히 일본 외무상 겐바 고이치로(玄葉光一郞)의 반발이 돋보인다. 그는 긴급대책회의라는 것을 하고 나더니 취재진에게 “우선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방안을 포함해 국제법에 근거한 분쟁의 평화적 분쟁 해결 조치를 검토하겠다.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일본의 주장을 명확히 함으로써 국제사회에 일본의 주장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겐바는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로 끌고 가서 국제법에 따라 ‘처리’해 보겠다는 흉심을 드러낸 것이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려는 흉심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8년 9월 11일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당시 외무장관 이동권의 회고담에 따르면, 박정희 정부가 망국적인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던 1965년 6월 22일, 조인식을 시작하기 직전에, 당시 일본 총리 사토 에이사쿠(佐藤英作)가 이동원을 잠깐 자기 방에서 만나자고 해서 들어갔더니, “다케시마는 일본 영토이지만, 한국 입장에서 국제재판소에 제소하는 것을 한일 양국이 합의한다”고 쓰인 문서를 꺼내놓고 거기에 서명하라고 요구하였다고 한다. 외무장관 이동원은 사토의 서명요구를 거절하였다고 회고하였지만,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부설 독도연구센터는 ‘한일기본조약’ 협상과정에 관한 1차 자료를 조사한 결과를 2008년 7월 31일에 기자회견을 통해 밝히면서, 일본이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기간 14년 동안에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하자고 집요하게 주장하였음을 지적하였다.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독도에 관한 수많은 역사자료들은 한결같이 그 섬이 한반도에 속해 있음을 입증하였고, 독도의 지리적 조건도 그 섬이 한반도에 속해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예컨대, 독도(獨島)라는 섬이름에서도 그런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독도는 돌섬 102개와 암초 78개로 이루어진 커다란 바위섬인데, 독도라는 섬이름은 먼 옛날 우리 선조들이 돌섬이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지, 한자표기처럼 홀로 떨어져 있는 외딴 섬이라는 뜻이 아니다. 실제로 독도는 울릉도에서 87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울릉도 높은 지대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울릉도에 딸린 섬(屬島)이지 홀로 떨어져 있는 외딴 섬이 아니다. 영남대학교 부설 독도연구소가 2009년 2월에 발간한 ‘독도연구’ 제5집에 실린 정태만 용산세무서장의 논문에 따르면, 정상 높이가 해발 984m인 울릉도에서는 해발 88m 지대에 오르면서부터 독도가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해발 524m 지대까지 올라가면 독도 전체가 보인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 ‘고려사지리지’, ‘신동국여지승람’ 같은 옛 문헌들에서도 맑은 날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인다는 기록이 나온다.

세종대학교 부설 독도종합연구소 소장 호사카 유지(保坂祐二) 교수의 자료조사에 따르면, 일본 메이지 정부가 1877년에 발표한 ‘태정관 지령문’에 나온 다케시마(竹島)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의 일본식 지명이었고, 원래 독도의 일본식 지명은 마쓰시마(松島)였는데 1883년 이후에 마쓰시마라는 지명이 차츰 폐기되었다는 것이며, 메이지 정부는 독도를 한반도에 속한 영토로 공식 인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영남대학교 부설 독도연구소가 2010년 4월 1일에 공개한, 일본 제국육해측량부가 1903년에 편찬한 ‘일로청한명세신도(日露淸韓明細新圖)’에도 다케시마(울릉도)와 마쓰시마(독도)는 조선계(朝鮮界)에 속하는 것으로 명시되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독도는 한반도에 속한 영토라는 사실이 너무도 확실하므로, 만일 천백번 양보해서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판결한다고 해도 일본이 이길 가망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일본은 왜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지 못해 안달하는 것일까?

물론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려 해도,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는 쌍방이 합의해야 가능하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가 제소를 거부하는 조건에서 제소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려고 집요하게 책동하는 까닭은, 제소되면 자기들이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독도는 한반도에 속한 영토라는 사실이 확실한데도, 독도 영유권 문제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되는 경우 일본이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근거는 무엇일까? 위에서 언급한 일본 외무상 겐바의 발언이 강하게 암시한 것처럼, 일본이 믿는 것은 독도에 관한 국제법적 근거다. 일본은 독도가 한반도에 속한 영토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모든 역사적, 지리적 근거를 뒤집어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어떤 국제법적 근거를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그처럼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우기며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려는 노골적인 강탈야욕을 드러내는 것이다.

1954년 9월 30일 당시 미국 대통령 특사 제임스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가 당시 미국 대통령 드와잇 아이젠하워(Dwight A. Eisenhower)에게 제출한 ‘밴 플리트 보고서’는 “그들(이승만 정부와 일본 정부를 뜻함-옮긴이)의 (독도에 관한) 영토분쟁은 국제사법재판소에 당연히 제소되리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며, 제소에 관한 미국의 제안도 한국에게 비공식적으로 전달된 바 있다”고 하였다. 일본과 한통속인 미국도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서 일본이 독도를 국제법적으로 강탈하려는 것을 적극 지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독도강탈야욕에 사로잡힌 일본이 움켜쥐고 있는 강력한 국제법적 근거는 무엇일까? 그들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공개하려고 꽁꽁 감춰놓은 비밀문서가 무엇인지 추적하노라면, 아래와 같은 경악할 사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독도 바닷속에서 발견된 녹슨 불발폭탄

2008년 7월 24일과 25일 <연합뉴스> 사진부 수중취재단이 독도 동쪽섬 선착장 부근에 있는 부채바위와 동쪽섬과 서쪽섬 사이에 있는 촛대바위 아래서 수중탐사를 벌였다. 수중탐사 결과, 부채바위 아래 수심 약 15m 해저에서 녹슨 불발폭탄 1발을 발견하였고, 촛대바위 아래 바닷속에도 녹슨 불발폭탄 2발을 발견하였다. 또한 2011년 10월 7일 국회에서 진행된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독도 삼형제굴바위 인근 바닷속에 녹슨 불발폭탄 1발과 서쪽섬 북쪽 바닷속에 녹슨 불발폭탄 2발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녹슨 불발폭탄들은 모두 무게가 450kg이나 되는 같은 종류의 폭탄인데, 미국군 폭격기가 지상폭격에 사용하는 ‘AN-M-65 일반목적폭탄(general purpose bomb)’으로 판명되었다.

미국군 폭격기가 지상공격에 사용하는 폭탄이 왜 독도에 떨어졌을까? 일본의 독도강탈책동을 안받침해주는 비밀문서의 존재여부를 추적하는 데서 한 가지 단서를 밝혀줄 녹슨 불발폭탄의 존재는, 1948년 6월 8일에 있었던 미국군 폭격기 편대의 독도폭격사건을 기억 속에 불러일으킨다. 당시 서울에서 발행된 월간지 <신천지> 1948년 7월호에 따르면, 그 날 미국군 폭격기들이 갑자기 날아들어 독도를 폭격하고 기관포를 난사하는 바람에 그 일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울릉도 어민 16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어선 23척이 침몰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독도와 그 주변바다를 무차별 폭격하고 기관포를 난사하여 무고한 울릉도 어민들에게 대참사를 입힌 극악한 범죄자는, 그 날 아침 오키나와(沖繩)를 이륙한 B-29 폭격기 편대를 몰고 장거리 비행을 하여 독도 상공에 출몰한 미국 극동공군(Far East Air Force) 제93폭격대대였다. 그들은 왜 독도를 폭격하였을까? 당시 도쿄에 주둔하던 동맹국 최고사령부(Supreme Command of the Allied Powers)가 독도를 극동공군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1947년 9월 16일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지휘하는 동맹국 최고사령부는 휘하 중앙연락실(Central Liaison Office)을 통해 일본 정부에게 공식문서를 보냈다. ‘리안커트 바위섬 폭격연습장(Liancourt Rocks Bombing Range)’이라는 제목이 붙은 통보서(SCAPIN) 제1778호가 오늘도 전해진다. ‘리안커트 바위섬’이라는 낯선 지명은 미국 정부가 독도를 표기할 때 고집하는 미국식 지명이다. 1849년 1월 독도를 탐사하고 독도 위치를 프랑스 정부에 보고하였던 프랑스 고래잡이배 리앙꾸르호가 그 바위섬을 자기 선박명칭에 따라 리앙꾸르(Liancourt)로 부르기 시작하였으므로, 일부 서양 나라들에서는 독도를 리앙꾸르 또는 리안커트라 부른다. 미국 정부는 모든 공식문서들에서 독도라는 지명이나 다케시마라는 일본식 지명을 쓰지 않고 ‘리안커트 바위섬’이라는 자의적 지명만 고집한다.

문제의 통보서 제1778호에는 세 문장이 적혀있다. “북위 37도 15분, 동경 131도 50분에 위치한 리안커트 바위섬(또는 다케시마)이 폭격연습장으로 지정되었다. 이 폭격연습장을 사용하기 전에, 오키레토(오키군도) 주민들과 북위 38도 이북 혼슈 서부해안 주민들에게 미리 통보할 것이다. 이 통보는 군정당국 관계부서들을 통해 일본의 지역민간당국자들에게 전파될 것이다.”

이 통보서가 작성된 1947년 무렵에 일본 영토는 대일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에게 점령당한 상태에 있었고, 한반도 북위 38도 이남지역도 역시 미국에게 점령당한 상태에 있었다. 미국 시각으로 보면, 한반도는 일본이 식민지로 강점한 일본의 ‘해외영토’였으므로, 미국은 한반도 38도 이남지역을 일본 영토와 똑같이 점령하였던 것이다. 점령지 통치권은 점령군사령관 맥아더가 지휘하는 군정당국이 행사하고 있었는데, 당시 도쿄에 있었던 동맹국 최고사령부는 일본과 한반도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을 점령하고 통치하던 상급 군정기관이었다.

그런데 도쿄 군정당국이 독도를 극동공군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하고, 그 지정사실을 이상하게도 일본 정부에게 통보한 것이다. 1947년 당시 한반도 북위 38도 이남지역에는 아직 정부가 세워지지 않았고, 미군정이 실시되고 있었으므로, 도쿄 군정당국은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하였다는 사실을 독도를 행정적으로 관할하는 서울의 미군정당국에 통보하였어야 마땅한데, 그렇게 하지 않고 행정권 없는 일본 정부에 통보한 것이다. 이것은 도쿄 군정당국이 독도를 한반도에 속한 영토로 인정하지 않고 일본에 속한 영토로 인정하였음을 말해준다.

일본은 독도에 대한 식민지 영유권을 포기하였는가?

미국이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해오던 한반도 북위 38도 이남지역에서 1948년 8월 15일에 분단정부가 수립되자, 미국은 자국 군대를 철군하였다. 이처럼 1948년 8월 15일부터 1949년까지 기간에 미국 군정당국이 해산되고, 미국군이 철군하였으나, 일본이 식민지 영유권을 국제법적으로 포기하는 영유권 말소 문제는 1951년 9월까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영유권이 국제법적으로 말소된 것은,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된 대일강화조약에 의해서였다. 그 조약 제2조에는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퀄파트(Quelpart, 제주도의 서양식 표기-옮긴이), 포트 해밀튼(Port Hamilton, 거문도의 서양식 표기-옮긴이), 대즐릿((Dagelet, 울릉도의 서양식 표기-옮긴이)을 비롯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한, 소유를 포기한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이 식민지 영유권을 포기한다고 명시한 조항에서 한반도의 주요 섬들을 열거하면서도 유독 독도만 빼놓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실수로 빠뜨린 것도 아니었고, 편의상 생략한 것도 아니었다. 미국 국무부 실무작업반이 대일강화조약 제1차 초안을 작성한 때는 1947년 3월이고, 미군정당국이 독도를 극동공군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한 때는 1947년 9월이다. 미국이 약 6개월 시차를 두고 대일강화조약 초안을 작성한 것과 독도를 극동공군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한 것은, 미국이 대일강화조약 초안작성에서 독도를 실수로 빠뜨릴 수도 없었고, 편의상 생략할 수도 없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이화여자대학교 정병준 교수가 2010년에 펴낸 책 ‘독도 1947’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은 미국이 독도를 극동공군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하기 약 석 달 전인 1947년 6월에 미국에 보낸 소책자 ‘일본의 부속소도’에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규정하였고, 1949년 11월부터는 당시 일본 정부의 정치고문이었던 친일파 미국인 윌리엄 시볼드(William J. Sebald)를 앞세워 일본의 요구를 미국 정부에 파급시키는 대미외교공작을 벌였다. 이처럼 1947년부터 일본이 집중적으로 밀고 나간 독도 영유권 강탈책동은 미국 국무부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미국 국무부는 1949년 12월 15일에 작성한 대일강화조약 초안에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명문화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대일강화조약 체결을 주도한 미국 특별고문 존 덜레스(John Foster Dulles)는 1950년 6월, 1951년 1월과 4월에 각각 일본을 방문하여 대일강화조약 체결에 관한 의견을 일본 정부와 ‘조율’한다고 하면서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기에 바빴다.

대일강화조약 체결 직전에 이처럼 미국과 일본이 한통속이 되어 돌아가는 것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승만 정부는 마냥 헛다리만 짚고 있었다. 이를테면, 1951년 7월 19일 당시 주미한국대사 양유찬은 국무부에 찾아가 덜레스를 만난 자리에서 이승만 정부의 다섯 개 요구사항을 전하였다. 5개 항 가운데서 마지막 항은 “대마도, 파랑도, 독도가 러일전쟁 중 일본이 점령하기 전에 한국 영토였으므로, 일본은 그 세 섬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일본과 한통속이 되어 돌아가는 미국이 독도에 대한 식민지 영유권을 인정한 판인데, 이승만 정부가 뒤늦게 독도 영유권은 말할 것도 없고 대마도 영유권까지 주장한 요구사항을 보내왔으니, 이승만 정부의 그런 헛다리 짚는 행동은 미국 국무부로부터 비웃음이나 샀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1951년 8월 10일 당시 미국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딘 러스크(Dean Rusk)가 당시 주미한국대사 양유찬에게 보낸 답신에는 독도가 한반도에 속한 영토가 아니라 일본 영토라고 쓰여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1951년 8월 13일 미국 국무부는 대일강화조약 최종 초안을 작성하였다.

이처럼 대일강화조약 체결과정에서 일본과 한통속이 되어 돌아간 미국은 독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영유권을 국제법적으로 인정해준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다. 미국이 대일강화조약 체결과정에서 독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영유권을 국제법적으로 인정하였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확정적인 근거는, 그 조약이 체결된 때로부터 3년이 지난 뒤에 작성된 ‘밴 플리트 보고서’에 들어있다. 그 보고서는 “대일강화조약 문안을 작성할 때 한국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였으나, 미국은 독도가 일본의 주권에 속한다고 결론을 내렸고, 그 조약에 따라 일본이 영유권을 포기하는 섬들 가운데 독도를 포함시키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밴 플리트가 보고서에서 미국은 “일본이 영유권을 포기하는 섬들 가운데 독도를 포함시키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고 서술한 것은, 미국 국무부가 자기들끼리 내부회의에서 그런 결론을 구두로 내렸다는 뜻이 아니다. 미국 국무부가 그처럼 중대한 ‘결론’을 구두로 내렸을 리 만무하므로, 대일강화조약의 영유권 포기조항과 관련하여 일본이 독도에 대한 식민지 영유권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명문화한 대일강화조약 부속문서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다.

대일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약 넉 달 전인 1951년 4월 23일 당시 미국 대통령 특사로 대일강화조약 체결을 주도한 국무부 특별고문 존 덜레스와 당시 일본 총리 겸 외상 요시다 시게루(吉田茂)가 그 부속문서에 서명하였을 것이다. 밴 플리트는 보고서에서 “미국은 독도문제에 대한 입장을 공개하지 않기로” 하였다고 서술하는데, 미국이 공개하지 않기로 한 입장을 비밀문서로 작성한 것이 바로 덜레스와 요시다가 서명한 대일강화조약 부속문서인 것이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면 자기들이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대일강화조약의 영유권 포기조항에 독도를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를 확인해줄 부속문서를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한일기본조약’ 체결과정에서 박정희 정부와 진행한 협상에 관한 방대한 외교문서를 2008년에 공개하면서도, 대일강화조약의 해석에 관한 사항과 독도문제에 대한 미국의 견해를 수록한 부분에 먹칠을 하고 공개하였다. 그 먹칠한 부분에 덜레스와 요시다가 서명한 대일강화조약 부속문서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독도침탈야욕 배격하지 못한 이승만과 박정희

미국과 일본이 그처럼 서로 공모결탁하여 독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강점 영유권을 국제법적으로 인정한 독도강탈책동이 벌어졌는데, 당시 이승만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을까? ‘밴 플리트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독도문제에 대한 입장을 공개하지 않기로 하는 한편, 한국에게 은밀히 통보하였다”고 한다. 이 인용문에 나온, ‘미국이 공개하지 않기로 한 독도문제에 대한 입장’은,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정해준 미국의 입장을 말하는 것인데, 미국은 자기의 그런 입장을 이승만에게 은밀히 통보하였다는 것이다.

‘밴 플리트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독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영유권을 국제법적으로 인정하였다는 내용이 담긴 통보문서를 이승만 정부에게 보냈다. 그렇다면 이승만 정부는 당연히 그 문서를 공개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독도강탈밀약을 전면 백지화한다는 반박성명이라도 발표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일본의 독도강탈을 국제법적으로 인정한 미일공모에 관한 통보를 미국으로부터 받았으면서도 침묵하였다. 뼛속까지 친미적인 이승만 정부는, 일본의 독도강탈책동에 적극 호응한 미국의 범죄적 정체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도록 은폐해준 것이다. 만일 그 때 이승만 정부가 일본의 독도강탈책동을 적극 호응한 미국의 공모범죄를 폭로, 배격하면서 독도가 한반도에 속한 영토임을 공식적으로 재확인하였더라면, 일본은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승만 정부의 침묵은 일본의 독도강탈책동을 사실상 묵인해준 것이었다.

대일강화조약이 1952년 4월에 발효되면 독도를 일본에게 정말 빼앗기는 게 아닌가 하고 우려한 이승만은, 1952년 1월 18일에 독도 영유권을 확인한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일명 평화선 선언)’을 발표하였으나 이승만의 그런 선언발표는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모했다. 1952년 1월 28일 일본은 “자국 영토인 다케시마를 평화선 안에 포함시킨 것은 영토침략”이라는 식의 망언을 늘어놓았고, 2월 12일 미국은 이승만의 평화선 선언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하였다.

이승만에게는 일본의 독도침탈책동을 배격하고 독도 영유권을 수호할 의지가 너무도 빈약하였다. 그는 아무런 실효도 없는 평화선 선언이나 발표해놓고, 독도에 대한 일본의 물리적 침입을 방치하였다. 이를테면, 1952년 6월 26일 일본 수산시험선을 타고 독도에 출몰한 일본인들이 불법상륙하여 조난어민위령비를 파괴하고 “시마네현 오키군 고카촌 다케시마(島根縣 隱岐郡 五箇村 竹島)”라고 쓴 큰 나무기둥을 세워놓은 만행을 저질렀고, 1954년에는 일본 참의원 쓰지 마사노부(辻政信)가 일본인 기자들을 데리고 독도에 침입해 암벽에 페인트로 일장기를 그려넣는 만행을 저질렀는데도, 이승만 정부는 단호한 대책을 취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가 독도에 경찰을 파견한 때는 1956년 12월 30일이다.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 영유권을 포기하였으면서도 독도를 한반도에서 떼어내어 그 섬에 대한 식민지 영유권을 국제법적으로 포기하지 않았다. 2011년 5월 서울에서 출판된 노다니엘의 책 ‘독도밀약’에 따르면, 1965년 1월 11일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특명을 받은 당시 국무총리 정일권과 당시 일본 총리 사토 에이사쿠의 특명을 받은 일본 자민당 의원 우노 소스케(宇野宗佑)의 비밀회담에서 “한일 두 나라는 독도를 각자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서로 인정하고, 어느 일방이 다른 일방의 영유권 주장에 반론하는 경우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합의하고, “한국은 독도에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시설을 증축하거나 신축하지 않는다”고 명시한 이른바 ‘독도밀약’을 작성하였고, 박정희와 사토 에이사쿠는 각각 양국 정부를 대표하여 ‘독도밀약’에 서명하였다. 박정희 정부가 채택한 반민족적인 ‘독도밀약’에 따르면, 독도는 영유권을 아직 확정하지 못한 ‘영유권 미정지’다. 이것은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갈 또 하나의 결정적인 국제법적 근거를 마련해 준 것이다.

식민지 과거사 청산이 독도 영유권 수호하는 길이다

독도를 강탈하려는 일본의 집요하고 간교한 책동을 배격하고 독도 영유권을 어떻게 수호할 수 있을까? 세간에서 널리 이야기되는 것처럼, 뼛속까지 친일적인 이명박 정부는 일본의 독도강탈책동을 배격하지 못하며, 일본의 간계에 넘어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다. 독도 영유권을 수호하는 힘은 친일정부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일의식과 독도수호의지를 지닌 이름 없는 대중들에게서 나온다.

이를테면, 2012년 8월 11일 런던 올림픽 남자축구 한일전에서 남측이 이겼을 때, 남측 축구선수 한 사람이 관중석 응원단에서 넘겨받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크게 쓰인 손자보를 들고 관중들의 환호 속에 축구경기장을 뛰었고, 그 모습을 언론보도를 통해 알게 된 이 땅의 대중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지지와 공감을 보냈는데, 이러한 현상은 일본의 침탈야욕에 맞서 독도 영유권을 수호하려는 사회적 공감대가 남측에 널리 형성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 땅의 대중들이 지닌 반일의식과 독도수호의지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인터넷 <독도신문>이 2012년 2월 말에 일반대중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독도 영유권 문제를 수호하기 위해 남북이 공동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답한 응답비율이 56%로 가장 높게 나왔다. 이러한 응답은 이 땅의 대중들이 독도 영유권을 수호하는 데서 전민족적 단결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2012년 8월 12일 조국해방 67돐에 즈음하여 ‘해내외 온 겨레의 힘을 모아 일본의 재침책동을 배격하고 나라의 평화와 조국통일의 새 지평을 열어나가자’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공동호소문에서 6.15 공동선언 실천 남측, 북측, 해외측 위원회가 “일본은 과거의 침략전쟁과 식민지통치에 대한 사죄와 배상이 없이는 그 누구와도 평화, 협력의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지적하고 “일본은 시대착오적인 망상에서 벗어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당장 철회하여야 한다”고 질타한 것은 독도 영유권을 수호하고 식민지 과거사를 청산하려는 전민족적 요구와 의지를 명백히 천명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현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일본의 독도강탈야욕을 배격하고 독도 영유권을 수호하는 길은 전민족적으로 단결된 역량을 결집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 따라 평화통일을 실현함으로써 강력한 자주역량을 지닌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이다.

67년 묵은 한반도 분단이 식민지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한 전민족적 불행인 것처럼, 67년 묵은 일본의 독도강탈책동도 식민지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한 전민족적 불행이다. 식민지 과거사를 청산하기는커녕 그 불행과 비극에 우리 민족을 결박시키려는 미국과 일본의 정치폭거에 맞서 민족자주와 평화통일을 실현해야 할 역사적 과업은 그래서 더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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