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3/26

침몰하는 경제, 진보정치가 구조한다

변혁과 진보 (27)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위기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하는 까닭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을 흔히 경제성장(economic growth)이라 한다. 원래 경제성장은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물질의 양과 질이 증대개선되는 복잡다단한 과정이지만, 자본주의체제의 경제성장 이면에는 또 다른 현실이 있다. 그것은 자본들끼리의 상호경쟁이 치열하게 격화되는 것이다. 자본들끼리의 상호경쟁이 격화되면 자본이 집적되고 집중되며, 자본의 집적과 집중은 생산을 거의 무제한적으로 확대시킨다. 생산이 이처럼 무제한적으로 확대되는데 비해, 소비는 일정한 수준에 한정되므로, 필연적으로 생산과 소비의 모순이 발생한다. 이러한 생산과 소비의 모순에 재정파산위기가 더해지면, 경기침체(stagnation)와 물가상승(inflation)이 동시에 촉발되는데, 이것을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라 한다.
 
이전에는 없었던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내부충격이 자본주의시장경제에 처음 일어난 때는 수렁에 빠진 베트남전쟁에 들어간 천문학적인 비용이 미국의 국가재정을 파산위기에 몰아넣었던 1970년대 초였다. 그 당시 엎친데 덮친 격으로 중동발 세계 석유위기(global oil shock)가 일어나자 자본주의시장경제는 1973년부터 1980년까지 기간에 파국적 위기를 겪었다.
 
파국적 위기에 빠져 허덕이는 자본주의시장경제를 구하기 위해 선택한 궁여지책이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인데, 신자유주의가 가져다준 것은 비정규직 양산, 실업공포 만연, 빈부격차 확대, 부채 폭증, 생활물가 상승, 민생 피폐화다. 오늘날 세계 각국의 현실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것처럼,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시장경제의 파국적 위기를 극복하기는커녕 그 위기를 더욱 심화시켜 결국 회복하기 힘든 치명상을 입히고 말았다.
 
신자유주의의 파산위기는 세 차례나 자본주의시장경제를 강타하였다. 1990년에서 1991년 기간에 미국 금융시장의 붕괴위기, 국제유가 급등, 1차 걸프전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제1차 파산위기가 닥쳤고, 2001년에서 2002년 기간에 이른바 '닷컴' 거품의 붕괴, 9.11 테러 충격, 뉴욕 금융시장의 회계부정사건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제2차 파산위기가 닥쳤고, 20074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파산사태로부터 시작되어 20089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 파산으로 절정에 이른 제3차 파산위기가 닥쳤다. 3차 파산위기는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멈추지 않고 날로 심화되는 중이다.

자본주의시장경제가 이처럼 연속적으로 파산위기에 빠진 것을 두고, 우파 이론가들은 자본주의시장경제가 일시적 불안정을 겪고 있는 것이므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선동일 뿐이다. 1970년대 이후 40년 동안에 일어난 위기의 역사를 살펴보면, 마지막 궁여지책으로 택한 신자유주의마저 파산위기를 몰고 왔으니 이제 자본주의시장경제가 살 길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존재근거를 상실한 자본주의시장경제는 절망과 파국의 심연으로 천천히 침몰하는 중이다.
 
 
침몰하는 한국 경제
 
누구나 알고 있듯이, 세계 각국의 자본주의시장경제는 균일하게 생성되고 균등하게 발전되어온 것이 아니다. 나라마다 자본주의시장경제의 생성원인은 서로 다르며, 그것의 발전도 매우 불균등하다. 따라서 당연히 자본주의시장경제의 파국도 동일하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먼저 급격하게 파국에 빠지는 자본주의시장경제가 있을 것이고, 나중에 점차적으로 파국에 빠지는 자본주의시장경제가 있을 것이다. 전자는 현상유지력이 비교적 약한 자본주의시장경제이고, 후자는 현상유지력이 상대적으로 강한 자본주의시장경제다.

이 문제는 사회성격론으로 해명된다. 식민지반자본주의 성격을 지닌 사회의 자본주의시장경제는 현상유지력이 약하기 때문에 가장 먼저 급속히 파국에 빠질 것이고, 독점자본주의 성격을 지닌 사회의 자본주의시장경제는 현상유지력이 강하기 때문에 나중에 점차적으로 파국에 빠질 것이다. 이를테면, 전형적인 식민지반자본주의 성격을 지닌 한국의 자본주의시장경제는 가장 먼저 급속히 파국에 빠질 것이고, 전형적인 독점자본주의 성격을 지닌 미국의 자본주의시장경제는 나중에 점차적으로 파국에 빠질 것이다.

한국 경제가 다른 나라 경제보다 먼저 파국에 빠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은, 좌파의 정치적 선동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로 확인된다. 객관적 사실은 아래와 같이 설명된다.
 
지금 세계 각국 경제전문가들은 시장경제의 파산위기를 겪고 있는 위태로운 6개국을 주시하고 있는데, 한국, 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이 그 나라들이다. 그런데 위태로운 6개국 가운데서도 한국이 가장 위태로운 지경에 있다. 그 까닭은 이렇다.

한국 경제는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쓰러졌는데,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닥쳐왔을 때는 1997년보다 적은 충격을 받았다. 이것은 한국 경제가 1997년 이후 기업구조조정을 강행하여 그만큼 현상유지력을 강화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가 파산위기를 은폐하였기 때문이다. 2011223일 김태동 교수가 미국 재무부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민중의 소리>와 대담한 기사에 따르면, 20087월부터 20092월까지 이명박 정부는 외환보유액의 22%에 이르는 약 570억 달러와 선물환 310억 달러를 투입하여 무너지는 환율을 간신히 방어하였고,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또 다시 긴급구제금융을 받는 것이 국가신용도를 폭락시키는 일이라서, 하는 수 없이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로부터 300억 달러에 이르는 긴급구제금융을 조용히 받아 파산위기를 간신히 넘겼다고 한다.

이것은 한국 경제가 1997년 외환위기와 2003년 카드대란을 겪고 나서도 2008년에 또 다시 금융위기에 빠졌음을 말해준다. 그처럼 거듭하여 파산위기에 빠지는 경우는 전 세계에서 한국 경제가 유일하다. 불행한 일이지만, 이것은 시장경제의 파산위기에 처한 다른 5개국보다 한국에서 먼저 경제파국이 일어날 것임을 예고한다.

침몰하는 한국 경제를 구조하기 위해 제시된 우파적 대안이 중소기업 회생안이다. 일반적으로 중소기업이란 종업원이 300명 미만이거나 자본금이 80억원 이하의 기업을 말하는데,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중소기업이 전반적으로 파산위기에 빠져있다는 사실은 통계적으로 입증된다. 이를테면 20101213일 한국무역협회가 발표한 보고서 '중소기업 수출 비중 하락과 대응전략'에 따르면, 한국의 전체 수출액 가운데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2003년에 53.1%이었는데 2008년에는 38.8%로 떨어졌으며, 2000년에 수출액 100만 달러 이하의 기업 24,000여 개의 수출실적을 추적했더니 2009년에 현상을 유지한 소기업은 7,411개밖에 되지 않아 소기업 생존율이 30%로 나타났다.

우파적 대안으로 제시된 중소기업 회생안이란 파산위기에 빠진 중소기업에게 정부가 정책자금을 싼 이자로 빌려주어 그들을 회생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채무가 급증하는 재정위기상황에서 정부가 중소기업에게 빌려주는 정책자금의 한계는 너무 뻔하다. 한국조세연구원에 따르면, 국가채무는 2008309조원, 20104071,000억원이었고, 20124747,000억원, 20145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측되는데, 정부만 빚더미에 올라앉은 것이 아니라, 기업과 가계도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다. 2009년 말 기준으로 정부, 기업, 가계의 금융부채 총액은 2,4474,000억원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한국 경제는 지난 10년 동안 빚을 얻어 '최후의 잔치'를 벌여온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소기업 회생을 위한 정책자금을 얼마나 동원할 수 있겠는가. 우파적 대안은 해결책이 아니다.
 
 
진보정치가 구조한다
 
경제파국이 한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까닭은, 한국 자본주의체제가 다른 나라들과 달리 식민지반자본주의 성격을 지녔으므로 경제부문에서 대미예속성이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의 대미예속성은 통계적으로 입증된다. 이를테면, 유엔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위원회(ESCAP)2008327일에 발표한 보고서 '2008년도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 조사'에서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지고 달러화 약세가 더욱 심화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면 한국, 대만, 싱가포르가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측하였다. 한국 경제와 마찬가지로, 대만 경제와 싱가포르 경제도 대미예속성이 심화되어 있으니, 그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200843일 산업연구원이 발표한 보고서 '미국의 경제부진과 한국 산업에 미치는 영향'에 따르면, 미국의 경제성장률이 1% 포인트 내려가면 1분기 정도의 시차를 두고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0.83% 포인트 떨어지고, 한국의 수출 증가율은 1.8% 포인트나 떨어진다. 우파 이론가들은 이러한 현상을 이른바 '세계화 시대'에 흔히 일어나는 동조현상인 것처럼 가볍게 보아넘기지만, 진보정치의 시각으로 보면 그러한 현상은 명백하게도 한국 경제의 대미예속성을 드러내는 현상인 것이다.

물론 중국 경제와 미국 경제 또는 일본 경제와 미국 경제 사이에서도 위와 같은 동조현상이 나타나지만, 미중 경제관계나 미일 경제관계에 존재하는 상호의존성과 한미 경제관계에 존재하는 대미예속성은 전혀 다르다. 똑같은 동조현상이 나타난다고 해서, 상호의존성과 예속성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오류다.

그런데 우파 이론가들은 삼성, 현대, 포스코 같은 대기업들이 국제시장에서 미국의 세계적인 대기업들과 당당히 겨루고 있는 판이므로, 한국 경제의 대미예속성은 좌파의 정치선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대미예속성을 판별하는 기준은 개별기업의 생산력 수준이 어느 정도로 높아졌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한국 경제체제와 미국 경제체제의 관계가 수직적 도급관계인가 수평적 의존관계인가 하는 문제로 결정되는 것이다.
 
예컨대, 740억달러 재산을 가진 세계 최고 거부 카를로스 슬림(Carlos Slim Hel )이 멕시코 자본가라고 해서 멕시코가 부유한 나라로 될 수 없는 것처럼, 한국의 몇몇 대기업들이 미국의 대기업들과 경쟁할 정도로 고도의 생산력을 가졌다고 해서 한국 경제가 수직적 도급관계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과 수직적 도급관계의 예속화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파국적 위기에 빠진 한국 경제가 살 길은 경제부문에서 대미예속성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수직적 도급관계를 철폐하는 것이다. 한국 경제가 파국적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낡은 경제체제에 여기저기 미봉책을 들이대는 우파정권의 무능한 땜질처방으로는 어림도 없고, 진보정당이 집권하여 낡은 경제체제의 대미예속성을 청산하는 그야말로 혁명적 경제정책을 강행하는 길밖에 없다. 침몰하는 한국 경제는 진보정치가 구조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구조해야 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정치부문에서 예속성을 청산하는 것을 자주화라 하고, 경제부문에서 예속성을 청산하는 것을 자립화라 한다. 예속성을 청산하는 정치적 자주화와 경제적 자립화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면, 정치적 자주권을 가져야 경제부문에서 예속성을 청산하고 자립할 수 있는 것이다.

경제적 자립화란 낡은 예속경제체제를 개조하여 새로운 자립경제체제를 건설하는 일련의 정치활동을 뜻한다. 자립경제 건설은 진보적 경제정책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 경제건설노선에 속하는 문제로 된다.

낡은 예속경제체제를 개조하여 새로운 자립경제체제를 건설하려면, 기업경제 자립화, 주요산업 국유화, 민생경제 복지화를 추진해야 한다. 줄여서 표현하면, 경제의 자립화, 국유화, 복지화를 추진한다는 말이다.

첫째, 기업경제 자립화란 생산활동에 요구되는 원료, 소재, 부품, 기술의 국산화를 추진하여 경제적 자력을 강화해나가는 것이다. 국내에서 나지 않는 석유 같은 필수불가결한 원료는 불가피하게 외국에서 수입해야 하지만, 외국산 원료의 수요범위를 축소하고 자국산 원료의 수요범위를 결정적으로 확대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외국산 원료를 쓰지 않는 새로운 생산체제를 독자적으로 개발하는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자립적인 원천기술 개발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2009726일 언론매체들이 보도한 일본 과학기술진흥기구(JST)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과학기술은 미국, 일본, 유럽의 선진국들의 과학기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뒤떨어졌으며, 어떤 부문에서는 중국보다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조건에서 기업경제 자립화는 불가능하므로, 과학기술의 자립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둘째, 기업경제를 자립화하는 방도는 기업을 국유화하는 것이다. 기업을 국유화하지 않고 기업을 자립화하는 길은 없다. 명백하게도, 국유화와 자립화는 비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의 지름길이다. 국유기업이라고 해서 반드시 자립화된 것은 아니므로, 자본주의세계시장의 지배권에서 벗어나 자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전에 우리식 변혁담론에서 논한 것처럼, 현 시기 진보적 민주주의 발전단계에서는 주요산업부문의 대기업을 국유화, 자립화하고, 자립적 중소기업을 육성하는 것이 당면과제로 나선다.
 
셋째, 주요산업 국유화는 민생경제 복지화와 맞물려야 한다. 민생경제 복지화와 무관하게 운영되는 중국의 국유기업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기업경제 자립화, 주요산업 국유화, 민생경제 복지화는 진보적 민주주의의 3대 경제강령이며, 자주적 민주정부의 3대 경제건설노선이다. 경제부문의 우리식 사회변혁은 3대 경제건설노선에 따라 수행될 것이다. (2011325일 작성)

2011/03/23

그 간호원은 누구일까?

진실의 말팔매 <14>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201138일 남측의 주요 언론매체들은 그 전날 <조선중앙통신>에 실린 흥미로운 기사를 인용하여 보도하였다. <조선중앙통신>에 실린 기사의 제목은 '예쁜이로 불리우는 조선녀성들'이다. 제목만 보면 무슨 뜻인지 선뜻 알기 힘든데, 첫 줄은 이렇게 시작된다. "조선에서는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훌륭한 일을 한 녀성들을 예쁜이라고 부르고 있다."
 
남측과 북측의 말쓰임새가 너무 다르다는 점을 누구나 직감할 수 있다. 남측 국민들이 쓰는 예쁜이라는 말은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여성을 일컫는데,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여성을 실제로 예쁜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미인이라는 한자말을 쓴다. 남측에서는 예쁜게 생긴 아이를 예쁜이라고 부른는데, 북측에서는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훌륭한 일을 한 여성을 예쁜이라고 부른다.
 
2007730<로동신문>'예쁜이'라는 제목의 정론을 실었는데, 그 기사에 따르면, "녀성의 미는 용모에 앞서 사상정신의 미이며 그 생활과 인생의 아름다움"이라고 하였다. 만일 정신미라는 신조어를 이 글에서 쓸 수 있다면, 북측에서 말하는 예쁜이는 정신미의 전형적 형상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고난의 행군'이 막바지에 올랐던 19981225<로동신문>'예쁜이'라는 제목의 노래 악보가 크게 실렸다. 박영순이 노랫말을 짓고 안정호가 곡을 붙이고 보천보전자악단이 연주한 노래 '예쁜이'의 가사는 이렇다.
 
조국에 포연이 휘몰아칠 때 처녀는 전선에 탄원해왔네
어머니 조국 기어이 지키려 처녀는 전선에 탄원해왔네
그 이름 예쁜이 간호원 예쁜이
처녀는 전선에 처녀는 전선에 탄원해왔네
 
이 노랫말을 읽어보면, 자기 조국을 지키려 불타는 전선으로 자원해 나간 어느 이름 모를 처녀 간호원의 총 잡은 모습이 눈 앞에 선연히 떠오른다. 그 간호원은 누구였을까? 다음 절은 이렇게 이어진다.
 
바위도 불타던 전호가에서 처녀는 병사들 누이되였네
뜨거운 그 정성 고지의 꽃처럼 처녀는 병사들 누이되였네
간악한 원쑤의 무리를 맞받아 처녀는 나갔네 수류탄 안고
그 이름 예쁜이 간호원 예쁜이
처녀는 나갔네 처녀는 나갔네 수류탄 안고
 
탄우가 빗발치고 포화가 하늘을 찢는 결전의 마지막 순간, 처녀 간호원은 수류탄 묶음을 가슴에 안고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적진을 향해 달려나갔다. "영웅의 그 넋을 영원히 전하며 고운 새 우짖고 꽃은 만발"하였다는 마지막 절은, 처녀 간호원의 가녀린 몸이 육탄이 되어 적진을 타격하고 장렬히 전사하였음을 암시한다. 수류탄 묶음을 가슴에 안고 적진을 향해 달려나간 간호원 출신의 여병사가 북측 인민들의 가슴에 그려진 바로 그 예쁜이의 모습이다. 그 예쁜이 간호원은 누구였을까?

20101221일 북측에서 운영하는 웹싸이트 <우리민족끼리>에 게시된 '록화실황: 청년대학생들과 은하수 합동공연 <5월 음악회>'에는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차려입은 여대생 네 명이 출연하여 노래 '예쁜이'를 열창하는 장면이 나온다. 최근 북측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은하수 관현악단의 공연종목에 그 노래가 선택된 것을 보면, 그 노래가 북측 인민들 사이에서 평소에 애창곡으로 불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측과 북측이 공유한 우리나라 현대사에 등장한 여성들 가운데는 1920928일 서대문 감옥에서 왜놈들의 가혹한 고문을 받고, 열여덟 살 꽃다운 나이에 옥사한 류관순 열사가 있다. 조선 민중이 총궐기하여 일제의 식민지 강점을 반대하여 싸웠던 3.1운동 시기에 저들의 탄압만행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어찌 류관순 한 사람 뿐이었으랴만, 후대는 류관순이라는 이름으로 3.1운동의 반일항쟁사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류관순은 류관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3.1운동에 참가하여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름 없는 여성열사들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북측 인민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예쁜이 간호원'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 자기 조국과 인민을 위해 청춘을 바친 모든 여성들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것이다.
 
201117<로동신문>은 은률광산 노동자의 아내가 편집국에 보내온 눈물 겨운 편지 한 통을 소개하였다. 기사 제목은 '돌 우에도 꽃을 피우는 사랑의 힘'이다. 201010월 말, 은률광산에서 일하는 평범한 노동자가 불의의 사고로 심한 화상을 입고 은률광산병원으로 실려갔다. 환자는 소생할 가망이 거의 없어보였으나, 의사들과 간호원들은 "눈에 피발이 서고 입술까지 부르트는" 소생치료전투를 밤낮 없이 계속하였다.
 
위급한 순간, 화독이 퍼져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를 위해 의사들과 간호원들이 먼저 수술대에 올라 자기 피부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서 곧장 수술칼을 쥐고 피부이식수술을 하였다." 그것은 실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북측 웹싸이트 <우리민족끼리>에는 수술대 위에 엎드려 자기 허벅지에서 살을 떼어내는 어느 여자 간호원의 모습을 찍은 사진 한 장이 실렸다. 피부미용에 무척 신경을 쓸 미혼여성이 생면부지의 노동자를 살리기 위해 서슴 없이 살을 떼어주는 참으로 놀라운 장면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간호원의 이름이 <로동신문>이나 <우리민족끼리>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왜 그러했을까? 화상을 당한 노동자를 살리기 위해 자기 피를 주고, 자기 살을 떼어준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낯설은 사람들조차도 환자의 작은 어머니라고, 친척이고 형제라고 하면서 앞을 다투어 자기의 피와 살을 아낌없이 다바쳤다. 광산마을에서 함께 살면서 이름조차 익히지 못했던 사람들, 무릎 한 번 마주하고 정을 나눈 적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건만 환자를 귀중한 혁명동지로, 한식솔로 여기며 진정을 바쳤다"<로동신문>은 전했다.
 
만일 남측에서 어느 여자 간호사가 생면부지의 환자를 살리기 위해 자기 피부를 떼어주었다면, 언론에서 그 미담을 크게 보도하면서 그 간호사의 이름과 사진까지 세상에 알렸을 것이고 정부에서 선행 봉사상까지 안겨주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북측에서는 의사들과 간호원들이 환자를 살리기 위해 자기의 피와 살을 환자에게 주는 경우가 각 병원마다 흔히 있는 일이라서, 그들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는다.
그들의 정신세계는 어떠하길래 이처럼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일이 일상사처럼 일어나는 것일까? 지금도 자기 허벅지에 아름다운 상처가 남아있을 그 '예쁜이 간호원'은 누구일까? (2011323일 작성)

2011/03/17

'진보지수' 저조기의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과 진보 (26)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946년에 일어난 상승과 고조

사회구성원의 진보성향을 지수(index)로 표시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높은 '진보지수'를 기록한 시기는 1946년부터 1947년에 이르는 약 2년 동안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분단체제가 고착화되기 직전인 그 시기에 북위 38도선 이북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이남에서도 '진보지수'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첫째, 1946년 7월 미군정청 여론국이 서울 시민 10,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결과가 역사기록에 남아있다. '어떤 경제체제를 원하는가?'라는 질문항에 대한 응답비율은, 사회주의 70%, 자본주의 14%, 공산주의 10%로 나왔다. 또한 '어떤 정부형태를 원하는가?'라는 질문항에 대한 응답비율은, 대의민주주의 85%, 계급지배 5%, 과두제 4%, 1인 독재 3%로 나왔다.

이념적으로 극히 편향된 시각을 지닌 미군정청 여론국이 실시한 조사결과가 그렇게 나왔으니, 만일 공정한 시각을 지닌 다른 기관이 똑같은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면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원한다는 응답비율이 80% 이상으로 올라갔을지 모른다. 이러한 여론조사결과는 당시 남측에서 70-80%에 이르는 절대다수가 대의민주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체제를 원하였음을 말해준다. 당시 남측에서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진보적인 분위기가 고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1946년도 역사기록을 보면, 북위 38도선 이남에서 활동하던 진보단체들이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1946년 현재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회원수는 57만4,000명이었고,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 맹원수는 331만3,000명이었고, 조선부녀총동맹(여맹) 맹원수는 80만명이었으며,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 맹원수는 65만6,000명이었다. 4대 진보단체에 가입한 노동자, 농민, 청년, 여성은 534만3,000명이었다.

1946년도 현재 한반도 전체 인구는 1,831만9,000명이었는데, 그 가운데서 약 3분의 2가 북위 38도선 이남에 있었으므로, 당시 남측 인구는 약 1,221만2,000명으로 추산된다. 1,221만2,000명 인구 중에서 4대 진보단체 성원이 534만3,000명이었으므로, 남측에서 조직화된 진보성향 대중은 인구의 43.7%를 차지하였다. 총인구가 아니라 성인 인구에 대한 진보성향 대중의 비율은 약 65%이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당시 진보단체의 조직규모와 사회정치적 역량은 오늘날 진보단체들의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막강하였다.

여기서, 위의 통계자료가 말해주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일제 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 진보성향은 무자비하게 짓밟혔다. 1925년에 '치안유지법', 1936년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1941년에 '조선사상범예비구금령'을 조작해놓은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대중들 속에서 진보성향이 싹트지 못하도록 짓밟았다. 그런데 8.15 해방 후 불과 1년밖에 지나지 않은 1946년에 이 땅의 '진보지수'는 초고속으로 높아졌다.

이처럼 놀라운 초고속 상승현상의 원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중에게 잠재된 진보성향은 그것을 짓누르는 족쇄가 끊어져 나가는 해방공간에서 무서운 속도로 상승, 고조되는 것이다. 상승의 속도와 고조의 범위는 평상시에 통용되는 '상식'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남측에서 대중의 진보성향을 짓누르는 '국가보안법'이 철폐되는 경우, 1946년에 일어났던 상승과 고조에 버금가는 정치적 급진현상이 재현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전에 발표한 나의 글에서 논한 것처럼, 민주노동당이 정책연합에 기초한 연립정부 수립을 추진하여 2013년에 연립정부의 이름으로 '국가보안법'을 철폐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진보지수' 고조기의 사회변혁운동

'진보지수'를 백분율로 측정하는 경우, 그 지수가 70을 넘었던 1946년과 1947년에 북위 38도선 이남에서 사회변혁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시 남측의 사회변혁운동은 그처럼 막강한 조직역량과 대중적 지지기반을 갖추었으면서도 뜻밖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진보지수'가 70을 넘었으니, 사회변혁운동이 승승장구하였어야 하는데, 당시 남측의 사회변혁운동은 그렇지 않았다. 무슨 연유가 있었던 것일까?

첫째, 당시 남측의 급진주의자들이 저지른 오류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1946년 현재 남측에서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응답비율이 10%밖에 되지 않고,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응답비율이 70%에 이르렀으니, 남측의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은 대중의 그러한 정치적 요구에 따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중도좌파정당을 건설했어야 한다.

그러나 급진주의자들은 대중의 정치적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공산주의를 표방한 좌파정당을 건설하였으니, 1945년 8월 24일 서울에서 재건된 조선공산당이 바로 그 좌파정당이다. 사회변혁운동의 발전단계로 볼 때, 명백하게도 중도좌파정당을 건설해야 하는 시기에, 한 단계를 뛰어넘어 좌파정당을 건설한 것이야말로 조급증에 사로잡힌 급진주의자들의 오류였다.   

당건설에서 범한 자기들의 좌편향 오류가 드러나자,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좌경적 당건설노선을 수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을 진보통합당으로 합당하라는 요구가 강하게 제기되었는데, 그 요구에 따라 1946년 11월 23일 조선공산당은 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과 합당하였다.

그러나 3당 합당은 조선공산당이 다른 두 당에 심어놓은 '프락치'들을 긁어모아 합당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방식의 합당으로 출범한 남조선노동당은 중도좌파정당으로 변신한 것이 아니라 조선공산당의 후신으로 남아있었다. 당의 '간판'을 1년 3개월만에 바꾸기는 했어도, 당지도부는 이전과 대동소이하였으므로 대중들은 남조선노동당을 10%의 대중적 지지밖에 받지 못하는 '공산당'으로 여겼던 것이다.

급진주의자들이 좌파정당을 건설한 것은 남측 인구 70%를 포괄하는 각계각층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한 실패였고, 정치적 고립을 자초한 것이었다. 사회변혁의 주체인 대중으로부터 겨우 10%밖에 되지 않는 지지를 받으면서 사회를 변혁하겠다는 생각은, 그 때나 지금이나 객관적 현실과 동떨어진 급진주의적 공상이다.

둘째, 남측의 4대 진보단체 지도부가 저지른 오류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전평, 전농, 여맹, 민청의 각 지도부들은 조선공산당 지도부를 장악한 '쎅트(sect)'의 분열공작을 억제하고 마땅히 진보통합당 건설을 추진하여야 하였고, 남측에서 대중적 지지를 가장 많이 받는 진보적 정치인을 진보통합당의 대표로 내세워야 하였다.

그러나 4대 진보단체 지도부는 '쎅트'의 지시에 맹종하였다. 아마 그들 자신도 좌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쎅트'의 지시를 옳은 것으로 여기고 따라갔는지 모른다. 혹은 조선공산당 지도부를 장악한 '쎅트'가 4대 진보단체의 각 지도부들에 '프락치'를 잠입시켜 자기들을 맹종하게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쎅트'의 분열공작을 방치한 채 사회를 변혁하겠다는 생각은, 그 때나 지금이나 백전백패를 예고하는 것이다.


여운형을 다시 보아야 하는 까닭

여기서 8.15 해방 직후 북위 38도선 이남의 정치상황을 말해주는 역사적 사실 가운데 두 가지를 더 거론할 필요가 있다.

첫째, 〈조선일보〉 1947년 7월 6일 부에는 조선신문기자회가 실시한 여론조사결과가 실렸다. 그 여론조사에 따르면, '어떤 국호를 찬성하는가?'라는 질문항에 대한 응답비율은, 조선인민공화국 69.5%, 대한민국 24.6%, 무응답 6.0%로 나왔다. 또한 '어떤 정부형태를 원하는가?'라는 질문항에 대한 응답비율은 인민위원회 71.5%, 종래 제도 13.3%, 기타 10.7%, 기권 4.6%로 나왔다. 이러한 여론조사결과는 당시 남측 사회에서 70%에 이르는 다수가 인민위원회 기반 위에 인민공화국을 세우는 민주건국노선을 지지하였음을 말해준다.

대중의 정치적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좌파정당을 건설한 급진주의자들의 주장대로 하면, 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이 아니라 사회주의공화국(socialist republic)을 건설하였어야 하지만, 남측 인구의 70% 이상은 민주건국노선을 지지하였다. 이처럼 절대다수 대중의 요구에 따라 민주건국노선을 관철하려면, 진보적 민주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중도좌파정당을 세워 집권했어야 한다.

둘째, 당시 남측에서 대중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은 정치인은 몽양 여운형이었다. 1945년 10월 10일 우파단체인 선구회가 실시한 여론조사결과를 보면, 여운형에 대한 대중적 지지율은 33%로 나타났는데, 이승만(21%), 김구(18%), 박헌영(16%)을 크게 앞질렀다.

여운형 암살공범들 가운데 한 사람은 월간지 〈말〉 1992년 5월호에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시 몽양의 인기는 대단했다. 몽양이 종로 YMCA에서 강연을 끝내고 길을 걷는데 길 건너편에 가던 사람들까지 몰려와 악수를 청할 정도였다. 저렇게 인기가 좋은 사람이 왜 이쪽이 아니고 저쪽이냐 하는 것이었다. 해방되고 2년밖에 못 살아도 그 정돈데 만일 그가 6.25 때까지 살았다면 이 나라가 어찌 되었겠는가." 

여운형이 그처럼 대중의 지지를 받았던 까닭은 그가 대중의 이념적 지향과 정치적 요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힘썼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당시 남측 인구의 70%가 요구한 사회주의를 실현할 정치인이었다. 또한 여운형은 당시 남측 인구의 70%가 바랐던 인민위원회의 기반 위에서 인민공화국을 세우는 민주건국노선을 실현할 정치인이었다. 또한 여운형은 민족분열을 반대하고 연북합작을 추구한 정치인이었다.  

인구의 70%에 이르는 다수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인민위원회의 기반 위에서 인민공화국을 세우는 민주건국노선을 지지하고, 진보단체의 조직역량이 그처럼 막강하고, 여운형 같은 유력한 정치인이 존재하였는데도, 남측의 사회변혁운동은 결국 좌절하였다.

좌절의 주된 원인은 진보의 가면을 쓰고 진보정당과 진보단체를 장악한 '쎅트'의 준동을 억제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보정당과 진보단체를 장악한 '쎅트'는 공명심과 출세야욕에 사로잡힌 나머지, 좌우편향으로 갈팡질팡하고 내부분열로 변혁역량을 소진시켰다. 8.15 해방 직후 사회변혁운동이 전진하느냐 후퇴하느냐 하는 결정적 시기에 '쎅트'가 사회변혁운동에 끼친 해악은 치명적이었다.


왜 사회주의가 아니라 진보적 민주주의인가

지금 민주노동당은 강령개정사업을 추진하는 중인데, 강령개정위원회는 사회주의 관련 서술을 민중주체 민주주의 관련 서술로 대체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당 안팎의 좌파들은 민주노동당이 이념적으로 후퇴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민중주체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보다 '오른쪽'에 있는 정치이념이다. 사회주의보다 '오른쪽'으로 가는 것은 이념적 후퇴가 명백하다.

여기서 제기되는 쟁점은, 이념적 후퇴가 정당한가 아니면 부당한가를 평가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강령개정에서 사회주의 관련 서술을 민중주체 민주주의 관련 서술로 대체하는 이념적 후퇴를 평가하는 기준은, 당연히 대중의 사상의식 수준이 되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선진적 노동계급과 정치활동가들이 결집한 전위정당이 아니라 진보성향의 각계각층 대중이 결집한 대중정당이기 때문에 그 당의 강령은 어디까지나 각계각층 대중의 사상의식 수준에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만일 민주노동당의 강령이 대중에게 진보정치의 전략목표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당 안팎의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이 자기들의 사상을 검증하는 기준으로 제시되는 것이라면, 민주노동당은 당연히 사회주의 관련 서술을 강령에 포함시켜야 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강령은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의 '사상검증 확인서' 같은 것이 아니다. 그 강령은 당의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에 의해 작성되는 것이지만, 그들의 손을 떠나 각계각층 대중에게 제시되어야 하고, 더욱이 대중 자신의 정치적 요구로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사회여론조사기관에 부탁하여 남측 대중의 사상의식 수준을 객관적으로 측정해볼 필요도 없이, 남측 대중이 사회주의를 자기의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한 처지에 있는 대중에게 제시하여 대중 자신의 정치적 요구로 인정을 받아야 할 민주노동당의 강령에 대중이 받아들이기 힘든 사회주의 관련 서술을 포함시키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자주파나 좌파나 똑같이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하지만, 두 정파에게는 차이점이 있다. 자주파는 대중의 정치적 요구에서 출발하여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사회변혁의 단계적 실현을 추구하고, 좌파는 대중의 정치적 요구를 앞질러가며 사회주의를 급진적으로 추구한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두 정파의 차이는 사회변혁을 단계적으로 실현할 것인가 아니면 급진적으로 실현할 것인가 하는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가 두 정파의 정치적 연합을 가로막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동일한 전략목표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두 정파는 정치적으로 연합할 수 있고, 또 마땅히 연합하여야 한다. 자주파는 좌경화를 견제하고, 좌파는 우경화를 견제하는 역할을 각각 수행한다면 그 두 정파의 정치연합은 좌우편향에 빠지지 않고 바른 길을 걸어가게 하는 '촉진제'로 될 것이다.   


'진보지수' 저조기의 진보적 민주주의

위에서 논한 것처럼, 65년 전 '진보지수'가 최고조에 이르러 70을 넘어섰던 시기에 이 땅의 진보정치이념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로 구분되었는데, 당시 각계각층 대중은 사회주의를 자기의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였다. 여운형은 대중이 자기의 정치이념으로 인정한 사회주의를 진보적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여운형에게 있어서 사회주의와 진보적 민주주의는 동의어였다.

그로부터 65년이 지난 오늘 '진보지수'가 10배나 하락하여 7을 오르내리는 저조기에 이 땅의 진보정치이념은 사회주의와 진보적 민주주의로 구분된다. 65년 전에 공산주의라고 불렀던 정치이념을 가리켜 오늘 우리는 사회주의라고 부르고, 65년 전에 사회주의라고 불렀던 정치이념을 가리켜 오늘 우리는 여운형의 명명방식을 따라 진보적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자주파가 제기한 정치이념이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강령개정위원회는 강령에 들어있는 사회주의 관련 서술을 민중주체 민주주의 관련 서술로 대체하려 하고 있다. 이를 두고 좌파들은 자주파가 사회주의를 포기하였거나, 사회주의를 진보적 민주주의로 대체하였다고 비판하지만, 그것은 좌파들의 오해다. 자주파는 사회주의를 포기한 적도 없고, 사회주의를 진보적 민주주의로 대체한 적도 없다. 자주파가 진보적 민주주의를 제기한 것은, 두 단계 사회변혁론에 따라 사회주의에 이르는 경로와 단계를 과학적으로 해명한 것이다. 명백하게도, 이러한 과학적 해명은 65년 전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중도좌파의 진보정치이념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정치이념은 자주파가 창안한 것이 아니라, 8.15 해방 직후 이 땅의 사회변혁운동에서 중도좌파가 제기한 것이고, 대중 자신의 정치이념으로 인정받은 것이며, 여운형에 의해서 명명된 것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정치이념이 그러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강령개정위원회는 강령개정작업을 진행하면서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용어 대신에 민중주체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택하였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자주파의 창안물, 전유물로 오해하는 좌파들과 함께 강령을 개정하여야 하므로, 민중주체 민주주의라는 대체용어를 선택하여 논란의 소지를 없앤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자주파의 창안물, 전유물이 아니라 역사성을 지닌 것이라는 사실을 좌파들에게 설명하고, 그들이 그 사실을 용인할 수 있다면, 굳이 용어를 대체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신을 민중으로 여기지 않고, 또 실제로 민중이 될 수 없는 진보성향의 중산층은 민중주체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선뜻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진보정치를 지향하는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정치이념은 대중에게서 나와서 대중에게로 돌아가는 대중 자신의 것이므로, 강령의 용어도 그런 방향에서 선택하여야 한다. (2011년 3월 17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