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29

어느 철학자가 본 진보당 사태 (3)- 사상의 심사위원 진중권교수에게 외

아래 글은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사이트에 게재한 글이다.


 사상의 심사위원 진중권 교수에게
 
이병창
 

지금 낡은 진보를 척결하고 새로운 진보를 세우는 작업이 혁신이라는 미명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 혁신의 흐름에 자발적으로 참가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는 몽둥이가 기다리고 있다. 지금 곳곳에서 낡은 진보를 고백하고 참회하라는 사상전향의 공작이 진행되고 있다.

그 선두에 선 자, 그가 바로 진중권 교수이다.

진중권 교수는 이제 국회의원의 사상을 검증하자고 한다. 북한에 대해서, 북핵과 천안함과 삼대세습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라는 것이다. 그것을 밝힌다면 그에 따라서 그가 종북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여 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모르겠다. 공직자의 의무에 이웃나라의 내정에 대해서도 자기 입장을 고백해야 하는 것인지. 그러면 공직자는 의무적으로 일본의 자민당에 대한 입장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략에 관한 입장과 중국의 인권문제에 대한 입장도 고백해야 하는 것인지?

그런데 그렇게 고백한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누가 이렇게 물을 지도 모른다. 진중권 교수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건 나는 모른다. 내가 맡은 임무는 그저 판단하는 것일 뿐이라고. 하기야 그 다음은 진중권 교수가 맡은 일은 아니다.

그가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리고 아마 두둑한 찬사를 받으면서 심사석을 떠나간 다음에 그 자리로 찾아오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아마도 먼저 조중동이 나타날 것이다. 조중동은 준엄하게 선언할 것이다. 여기는 대한민국이고 종북파인 당신이 있을 곳은 저기라고. 이 땅에서 떠날 때까지 우리는 나발을 불어 당신의 숙면을 방해할 것이라고.

그리고 조중동이 떠난 그 다음은?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한번이라도 안기부에 끌려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잘 알지 않을까?

70년대 초 박정희에 의해 자행된 사상전향 공작의 그 끔찍한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물론 더 잘 알 것이다.

물론 오늘 진중권 교수가 심사하는 대상은 국회의원이라는 공직자에 제한될지 모른다. 참으로 심사 대상을 공직자로 제한하는 진중권 교수의 너그러움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나는 공직자가 아니기 때문에 고백을 하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과거 미국에서 일어난 매카시 선풍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심사받는 사람이 국회의원이라면 내일은 공무원과 교사들일 것이며 모레는 노동자이며 그 다음에 온 국민일 것이라는 것을.

그러기에 나는 진중권 교수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진중권 교수, 어떻게 생각하시오. 당신은 지금 새누리당 국회의원에게 물어 볼 생각은 없소? 그들도 공직자 아니요? 그들에게 제발 한 번 물어 보시오.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했는데, 소고기를 계속 수입해도 아무 문제없는가를. 그러면 당신이 그가 한국에서 넘치고 넘친다는 종미파인지를 아니 한국에서 암약하는 미 CIA 에이전트인지를 판단해 주겠다고. 아마도 새누리당 국회의원은 대답하지 못할 것이요.

그때도 당신은 이렇게 말하겠소? 양심을 고백하지 못하는 떳떳하지 못한 인간이라고.

진중권 교수, 당신은 자랑스러울 것이요. 당신의 양심을 항상 떳떳하게 밝힐 수 있어서 말이요. 당신이야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자유와 민주만 보면 되니까. 그러나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의 이면이 조중동이고, 안기부이라는 것은 아시오? 이 땅에 비비린내 나는 억압을 보지 않아도 되는 당신은 정말 행복하겠소.

그러나 이 땅에는 남북 간의 긴장해소를 위해 북한을 하나의 공인된 국가로 인정해야 하며 상대를 해치지 않는 한 서로의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소. 그 사람들은 자신의 평화주의 때문에 종북파로 몰리고 종내는 감옥에 가야할까를 두려워하고 거꾸로 자신의 침묵 때문에 남북의 긴장이 강화되고 종내는 전쟁이 터지지 않을까도 두려워 하고 있소. 그들은 침묵이냐 감옥이냐 이 선택 때문에 잠들지 못한다는 것을.

당신이 두둑한 찬사로 배부르게 잠들 때, 이렇게 잠들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알기나 하는 것이요? (2012528)
 
 
-----------------------------------------------------------------
 
비례대표는 간접선거인가?
 

이병창
 

검찰은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 문제를 국법의 이름으로 척결하겠다고 한다. 필자는 법을 잘 모른다. 하지만 정의가 법의 기초라고 볼 때 검찰의 행위가 정의에 기초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검찰의 논리는 간단하다. 비례대표 경선은 간접선거라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헌법이 정한 직접선거의 원칙을 위배한 것이니 비례대표제를 폐지해야 한다. 검찰은 헌법을 모르는 것인가?
 
도대체 간접선거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국회에서 국회의장을 뽑는 경우를 말하는가? 아니면 사법부의 수장을 판사들이 추천하여 대통령이 임명하는 제도를 말하는가?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 모든 것은 간접선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 제도의 전형적인 예가 있다면 유신정권 때 대의원들이 체육관에서 모여 대통령을 뽑던 선거이다. 미국식 민주주의도 유사한 예이지만 유신정권의 체육관 선거와 달리 미리부터 대의원의 의사가 결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간접선거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비례대표의 선출구조가 우리나라에서 간접선거의 방식인가. 즉 국민을 대신하여 당원들이 비례대표를 뽑는다는 것인가? 물론 당연히 그렇지 않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잘 아는 일이다. 비례대표 역사 변형된 것이기는 하지만 직접선거에 속한다. 비례대표란 일종의 전국대표라고 보면 쉽게 이해되지 않을까? 당은 다만 그 추천권을 행사할 뿐이다.
 
비례대표의 추천은 당의 자율적인 권리에 속한다. 우리나라에서 비례대표를 경선에 의해 추천하는 정당은 통합진보당 하나뿐이었다.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등등 어떤 정당도 비례대표를 경선하지 않는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우선순위를 규정하는 내부 규정이나 있는 것일까? 필자의 인상으로는 대부분 정당의 당권을 가진 집단이 거의 임의로 추천해온 것이 아닐까?
 
물론 정당도 국민의 기본권인 주권을 침해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공무담임권도 분명 기본적인 권리에 속한다. 따라서 어떤 인종, 여성, 종교를 이유로 어떤 정당이 공무담임권을 박탈할 수 없다. 비례대표도 이런 공무담임권 중의 하나인데, 이런 비례대표가 만일 돈으로 거래 되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기본권의 침해에 해당된다.

이런 기본권 사항은 네가티브의 조항이다. 적어도 이런 것은 안 된다는 것이지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포지티브한 규정은 아니다. 이런 기본적인 원칙들이 제대로 지켜진다면 비례대표를 어떻게 추천하는가는 당의 자율에 맡겨져 있다.
 
그래서 만일 가정이지만 통합진보당의 당내 비례대표 선거에서 부정과 부실이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은 네가티브한 공무담임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당의 자율에 맡겨진 부분에서 일어난 문제이다. 당내 규율에 따르면 이 사람이 추천되어야 하는데 저 사람이 추천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당의 규율의 위반이며 그렇다면 이것에 대해서 당은 당원들에게 책임져야 한다. 이렇게 잘못 추천한 결과 국민들은 좋은 후보가 아니라 보면서 이미 그만큼 제한된 선택을 했던 것이라 보면 된다.

그러니까 이미 국민이 판단한 것이기에 비례대표가 선출된 이후에는 당이 임의로 대신 시킬 수 없는 것이다. 당은 이렇게 자신의 잘못으로 국민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도록 했고, 그 결과 당에게 중대한 침해를 가했으니 엄정한 책임을 당에 대해 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당의 규율 위반 즉 포지티브한 조항에 대해 국법이 개입한다면 그것은 당의 자율권에 대한 국가의 침해이다. 이것은 명백한 정치적 탄압이다.
 
통합진보당의 당내 비례대표 선출 규정을 잘 모르지만 거기에 보면 우리 철학자들을 위한 배려는 전혀 없다. 통합진보당에 철학자들은 전혀 없을까? 소수이겠지만 나를 비롯해 여러 명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철학자들은 당의 선출 규정들을 국법에 고발해야 할까? 이것은 철학자들을 차별한 것이며 공무담임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우리 철학자가 고발한다면 검찰인 당신들은 웃지 않겠는가?
 
이렇게 당내 자율에 맡겨진 부분이기에 심지어 당의 대표들의 합의에 의해서 비례대표의 순위가 바뀌기도 한다. 또 일부 후보들에게는 경선의 부담을 덜어주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당내 합의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민주주의 국가에는 국가의 법이 개입하는 데 한계가 있다. 국가의 법이 개입할 수 있더라도 한정적으로 개입한다. 생각해 보자. 형제들 간의 재산 싸움이라면 국법이 개입할 수 있다. 소유권은 국법이 정한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제들 간에 서로 제사를 맡은 책임을 보자. 이것은 형제들 간의 합의에 맡겨져 있고 설혹 그들이 합의하지 못해서 제사를 지내지 못한다고 국법이 개입해야 할 일인가? 서로 싸우며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형제들을 지탄할 수 있다. 그러나 국법은 개입할 수 없지 않는가?
 
마찬가지이다. 당내 규율 위반으로 비례대표 부정과 부실을 비난할 수는 있다. 그러나 국법이 칼을 빼들고 이 문제를 척결하겠다면 이는 명백히 정치탄압이다. (2012524)



[알림]스마트폰 사용자를 위한 <변혁과 진보> 큐알코드와 모바일 뷰
위의 <변혁과 진보> 큐알코드(QR Code )를 스마트폰으로 스캔해 보세요.

스마트폰 사용자는 웹버전과 같은 주소 www. changesk.blogspot.com 에서 자동으로 모바일 뷰로 보실 수 있습니다.

동독의 비밀전문이 밝혀준 북측의 자주노선


<연재> 한호석의 진보담론 (211)
통일뉴스 2012년 5월 28일(월)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브레즈네프 집권 이후 북측과 중국의 의견충돌
2012년 5월 16일 미국의 우드로우 윌슨 국제학술센터(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는 ‘북코리아 국제문서 정리사업(North Korea International Documantation Project)’을 통해 발굴한 역사자료를 공개하였다. 공개된 문서들은 평양 주재 동독대사관이 1975년 4월 29일과 5월 12일 동독 외무부 극동과에 보낸 비밀전문들, 베이징 주재 동독대사관이 1975년 5월 6일 본국에 보낸 비밀전문, 1977년 11월 17일 평양 주재 동독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비밀전문이다. 원래 독일어로 작성된 이 비밀전문들은 현재 베를린 연방외교실 정치문서보관소에 소장된 것인데, 우드로우 윌슨 국제학술센터가 영어로 번역하여 공개하였다.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인 1975년에 작성된 그 비밀전문들을 다시 읽어보는 까닭은, 1975년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던 아시아 정세에 북측이 어떻게 대응하였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비밀전문들은 북측이 작성한 문서가 아니라 동독대사관이 작성한 것이어서 외부 시각으로 작성된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37년이라는 시간격차를 뛰어넘어 오늘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정세에 대한 북측의 대응전략방향을 말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비밀전문들이 지닌 가치가 있다.

1975년 4월 29일 평양 주재 동독대사관이 동독 외교부 극동과에 보낸 비밀전문(이하 4.29 비밀전문으로 약칭함)은 1975년 4월 18일부터 26일까지 진행된 김일성 주석의 중국 방문에 관한 보고서다.

김일성 주석이 1975년 이전에 중국을 방문한 때는 1961년 7월 11일이었으니, 14년 만에 다시 중국을 방문한 것이다. 1961년 김일성 주석이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조중 우호협조 및 상호원조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그로부터 14년 동안 김일성 주석이 중국을 방문하지 않은 것은 양국 관계가 오랫동안 긴장상태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당시 북중관계는 왜 긴장상태에 있었던 것일까? 두 가지 주된 이유가 있었는데, 첫 번째 이유는 당시 소련의 정치정세에 대한 북측과 중국의 견해가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었다.

1964년 10월 14일 레오니드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 1906-1982)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브레즈네프의 집권은 소련의 정치정세에 큰 변화를 일으킨 사변이었다. 브레즈네프는 이른바 ‘자유화와 정치개혁’ 그리고 친미정책으로 소련공산당을 갈팡질팡하게 만들었던 니키타 후르시쵸프(Nikita Khrushchev, 1894-1971)를 반대하는 당내 투쟁을 이끌었던 사람이다. 그런 브레즈네프가 집권한 것은, 후르시쵸프가 불러온 ‘수정주의 혼란’에서 소련이 벗어나 사회주의정치노선을 회복하게 되었음을 뜻하였다.

그리하여 북측은 브레즈네프의 집권을 긍정적으로 대하고 소련과의 관계를 복원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브레즈네프와 후르시쵸프를 똑같은 ‘수정주의자’로 규정하고 브레즈네프 집권을 부정적으로 대하였다. 브레즈네프의 집권을 수정주의 세력의 집권연장으로 보느냐 아니면 반(反)수정주의 세력의 정권교체로 보느냐 하는 것은 당시 국제사회주의진영에 매우 중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브레즈네프의 집권을 수정주의 세력의 집권연장으로 보는 경우 소련을 계속 반대하게 되고, 브레즈네프의 집권을 반수정주의 세력의 정권교체로 보는 경우 소련과의 관계를 복원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북측은 후자를 택했고, 중국은 전자를 택했다.

후르시쵸프 집권기에 ‘현대 수정주의(modern revisionism)’로 변질된 소련에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던 중국은, 자국 안에서도 수정주의 세력이 고개를 들자 그 세력을 척결하는 ‘문화혁명’을 급진적으로 밀고 나갔다. ‘문화혁명’을 급진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중국은 소련을 ‘사회제국주의(social-imperialism)’로 규정하였다. ‘문화혁명’ 시기의 중국이 타도하려고 하였던 ‘주적’은 ‘미제국주의’가 아니라 ‘소련 사회제국주의’였다. 중국의 극렬한 반소련 적대정책은 국제사회주의진영을 분열시키고 대립과 반목을 불러일으켰다. 이른바 중소분쟁으로 알려진 사태가 그것이다.

중소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북측은 중국의 반소련 적대정책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1977년 11월 17일 평양 주재 동독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비밀전문(이하 11.17 비밀전문으로 약칭함)에 따르면, “조선은 국제공산주의노동운동에서 중국공산당의 분열주의 행동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제3세계에서 활동하는 마오주의 분파집단들을 상대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11.17 비밀전문에 따르면, “형제적 사회주의 나라들의 고위급 대표자들과의 회담에서 조선 동지들은 중국 지도부가 소련을 ‘사회제국주의’로, ‘주적’으로 규정하는 혹독한 반소련정책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고, “조선은 사회주의 나라들의 단결과 공동보조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소련과 중국의 관계가 정상화되기를 바란다”고 언명하였다.

그런데 중국은 한 술 더 떳다. 중국은 북측이 ‘소련 사회제국주의’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적대시하였을 뿐 아니라, 북측에게 ‘문화혁명’의 극좌노선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였다. 11.17 비밀전문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조선과 중국의) 관계는 때로 극렬하게 악화되었다. 그렇게 된 까닭은 중국 지도부가 마오주의(Maoism)의 지위와 원칙을 조선에게 내려 먹이기 위해 조선의 내정문제에 간섭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문화혁명’ 시기 중국의 극좌노선을 ‘교조주의(dogmatism)’라고 비판하던 북측에게 중국이 자기의 극좌노선을 받아들이라는 요구까지 들이대자, 북측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북측은 중국의 부당한 내정간섭을 ‘대국주의’로 규정하고 배격하였으니, 북측이 중국의 이념적 오류를 비판하고 중국의 내정간섭을 배격하는 자주노선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이 1966년 8월 12일 <로동신문>에 실린, ‘자주성을 옹호하자’라는 제목의 사설이다. 이 장문의 사설은 1960년대 중소분쟁 시기 북측의 자주노선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문건이다.

사설 ‘자주성을 옹호하자’는 북측에 대한 중국의 내정간섭에 대해 “최근 년 간의 국제공산주의운동은 자기의 그릇된 로선과 견해를 다른 형제당들에 강요하며 이것을 접수하지 않는다고 하여 압력을 가하고 내정에 간섭하는 등 참을 수 없는 현상들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비판하고, “우리는 이러한 대국주의적 행동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대국주의는 형제당들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엄중한 후과를 가져오게 된다....대국주의가 허용된다면, 형제당들 호상 간에 동지적이며 평등한 관계가 유지될 수 없다”고 강한 어조로 경고하였다. 사설 ‘자주성을 옹호하자’에서 북측이 내정간섭을 배격하고 자주노선을 천명한 때로부터 46년의 긴 세월이 흐른 지금, 국제사회주의정치사는 북측의 판단과 행동이 옳았고 중국의 판단과 행동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증언한다.

지금 남측의 진보정치세력은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확립하려고 투쟁하고 있는 데 비해, 1960년대 북측은 중국의 내정간섭을 배격하고 자주노선을 견지 수호하는 투쟁을 벌였다. 만일 북측이 대중관계에서 자주노선을 견지하지 못하고 중국의 대국주의 영향권에 포섭되었더라면, 중국이 1980년대에 자본주의세계체제에 자신을 개방하여 ‘시장사회주의(market socialism)’로 넘어갈 때 북측도 그 뒤를 따랐을 것이며, 그렇게 되었더라면 1990년대에 미국과 남측이 밀어붙인 강력한 대북 흡수통합 연합공세를 막아내지 못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오늘 세계 지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는 없을지 모른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생각하면, 북측이 “자주성은 곧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수사적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북측의 반미노선과 중국의 반소노선
1960년대 후반기에 국제사회주의진영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국제사회주의진영의 시각에서 보면, 북베트남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을 적극 지원하는 것은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고 반제노선을 견지하는 응당한 행동이자 의무였다. 그리하여 1965년 2월 브레즈네프 집권기의 소련은 미국의 제국주의침략에 맞서 싸우는 북베트남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을 지원하기 위한 사회주의 집권당들의 국제회담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소련의 수정주의적 태도를 지적하면서 그 회담을 거부하였으며, 1968년 10월에는 한 술 더 떠서 북베트남에게 소련과의 관계를 단절하라고 요구하였다. 이것은 명백한 내정간섭이었다. 북베트남이 중국의 내정간섭을 거부하자, 중국은 그에 대한 보복조치로 1968년 11월부터 북베트남에서 자국 군대를 철수하였다.

북측은 사설 ‘자주성을 옹호하자’에서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것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윁남 인민의 투쟁을 지원하는 것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하는 것은 실제 투쟁 속에서 검열될 것이며 명백하여질 것”이라고 지적하고, “미제를 반대하고 윁남 인민을 지원하기 위한 국제적인 반제공동행동과 통일전선의 형성을 위해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베트남 군역사 연구원(Military History Institute of Vietnam)이 2001년에 하노이에서 펴낸 ‘반미구국항전사 1954-1975’ 제5권 ‘총공세와 봉기’에 수록된 바에 따르면, 1966년 9월 북측은 북베트남과 파병협정을 맺었고, 1967년에 연대 규모의 인민군 비행사들과 2개 연대 규모의 방공포 부대를 북베트남에 파병하여 북베트남 공군 조종사들을 훈련시켰을 뿐 아니라 공중전에 참가하고 하노이 상공을 방어하였는데, 미그 17기 20대와 미그 21기 10대를 몰고 출격한 인민군 비행사들은 미국군 공군 조종사들과 맞붙은 여러 차례 공중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2009년 11월 18일 평양출판사에서 펴낸 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 장군’에 수록된 바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갱도시설을 건설해달라는 호치민(Ho Chi Minh, 1890-1969) 베트남 국가주석의 요청을 받고 즉각 인민군 공병부대를 파견하고 설비와 자재를 전량 공급하여 당중앙위원회와 국방부가 들어갈 갱도시설을 건설해주었으며, 1967년 5월 20일 하노이 상공에서 인민군 전투기 8대가 미국군 전투기 32대와 맞선 4 대 1의 공중전에서 미국군 전투기 12대를 격추하고 1대를 격상하는 놀라운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북측이 베트남 전선에 파병한 인민군 비행사들이 미국군 공군 조종사들과 맞붙은 공중전에 대해서는 2010년 3월 1일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 ‘미국이 공중전에서 패한 두 전쟁’에서 논한 바 있다.

북베트남이 자기들에게 소련과의 관계를 단절하라고 요구한 중국의 내정간섭을 거부하자, 중국은 베트남 전선에서 미국군과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철군하더니, 한 술 더 떠서 미국과 싸우기는커녕 거꾸로 북측에 대한 도발을 기도하였고 소련과는 무력충돌까지 벌였다.

1967년 10월 20일 평양 주재 동독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폴란드 인민공화국 대리대사 푸디쉬(Pudisch) 동지와의 1967년 10월 9일 대화 비망록’에 따르면, 문화혁명기에 홍위병들은 “홍위병들과 중국 동북지방의 조선족들이 충돌한 직후인 1967년 가을, ‘하찮은 수정주의자들아 봐라 너희들 운명이 이렇게 될 것이다’고 쓴 글발을 써 붙이고, 지붕에 조선족 시신들을 내걸어놓은 화물열차를 중국 단둥에서 조선 신의주로 운행하였다”고 한다.

1967년 11월 13일 평양 주재 동독대사관의 1등 서기관 디트리히 자르크(Dietrich Jarck)가 본국 외무성 과장 쿠르트 쉬나이드빈트(Kurt Schneidewind)에게 보낸 보고서는 “1967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사회주의 10월혁명 50주년 기념행사에 김일성 주석이 참석하지 못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김일성 주석이 소련을 방문하는 경우 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에서 충돌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었다고 기술하였다.

1984년 5월 31일 김일성 주석이 당시 북측을 방문한 독일민주공화국 국가수반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 1912-1994)와 만나 진행한 정상회담을 수록한 동독측 비망록에 김일성 주석이 이렇게 말한 내용이 들어있다. “문화혁명 기간에 압록강에서는 우리를 반대하는 (중국측의) 대규모 선전활동이 있었다. 1969년 우수리강에서 중조충돌이 있었던 시기에 북코리아에 대한 (중국측의) 도발행동들이 있었다. 내가 지방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 중국 군대가 두만강을 건너 우리쪽으로 오고 있다는 사회안전부의 전화보고를 받았다. 나는 그들을 우리 영토에서 체포할 수 있으니 그들에게 발포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고 현지에 군대를 보냈다. 그러자 중국 군대는 물러갔다. 소련을 수정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한 중국은 심지어 우리까지 그렇게 비난했다. 우리에 대한 그들의 비난은 근 5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 때문에 평온을 유지해야 하였다. 우리는 인내하여야 했다.”

1969년 3월 2일 중국인민해방군은 중국과 소련의 국경하천인 우수리강에 있는 젠바오섬(珍寶島, 러시아 지명은 다만스키섬)에 주둔하는 소련군 국경수비대를 습격하고 그 섬을 점령하였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소련군 국경수비대 병력 58명이 전사하였고, 94명이 부상 당했다. 보복에 나선 소련은 3월 15일 우수리강 유역에 주둔하는 중국인민해방군 기지를 공습하고 T-62 전차를 동원하여 포격하였다. 중국은 그 섬을 9월까지 점령하였다.

그처럼 중국이 베트남 전선에서 철군하고 북측에 대해 도발을 기도하고 소련과 무력충돌을 벌이고 있을 때, 북측은 베트남 전선에서 미국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국제사회주의진영의 시각에서 1960년대 북중소 3국 분쟁사를 돌이켜보면, 당시 북측의 반미노선이 옳았고 중국의 반소노선이 그릇된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보인다.

14년 만에 이루어진 김일성 주석의 중국 방문
1975년 4월 18일 김일성 주석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악화되었던 북중관계를 뒤로 하고 중국을 방문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4월 19일에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하였고, 4월 20일에는 저우언라이(朱恩來, 1898-1976) 총리와 회담하였다.

4.29 비밀전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김일성 주석의 방중일정은 긴급히 조정된 것이었다. 같은 시기에 레오 틴더만스(Leo Tindemans) 당시 벨기에 총리가 중국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두 나라 국가수반이 동시에 중국을 방문한 이례적인 일정은 김일성 주석의 중국 방문이 긴급히 추진되었음을 말해준다. 김일성 주석이 14년 만에, 그것도 방문일정을 긴급히 조정하여 중국을 방문한 것은, 당시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던 사정과 관련이 있다.

1975년 5월 12일 평양 주재 동독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비밀전문(이하 5.12 비밀전문으로 약칭함)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과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의 회담에서는 아시아 정세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특히 남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새로 전개되는 상황과 그것이 남측의 정세발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논의하였다고 한다. ‘남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새로 전개되는 상황’이란 베트남 전쟁의 종전을 뜻한다.

1975년 4월 30일 새벽 5시 남베트남 주재 미국 대사 그레이엄 마틴(Graham Martin, 1912-1990)이 군용헬기편으로 비상탈출하였고, 오전 10시 24분 당시 남베트남 대통령이었던 두옹반민(Duong Van Minh, 1916-2001)이 남베트남군에게 전투중지 명령을 내리면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그로부터 20분 뒤, 북베트남군 전차가 남베트남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 정문을 부수고 들어가고, 그 뒤를 따라 진입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병사들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깃발을 독립궁에 게양하였다. 중국, 프랑스, 일본, 미국의 잇따른 지배와 점령으로 116년 동안이나 불행과 고통을 겪어온 베트남 민족의 긴 수난사는 그렇게 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김일성 주석은 베트남 전쟁이 끝나기 12일 전에 중국을 방문하여 베트남 전쟁 종전 이후의 정세발전방향을 중국 지도부와 논의하였던 것이다.

1955년 11월 1일부터 1975년 4월 30일까지 무려 19년 180일 동안 베트남에서 계속된 전쟁은 세계사에 베트남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 민족해방을 실현한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 전쟁은 명백하게도 민족해방전쟁(national liberation war)이었다. 베트남 민족해방전쟁은 제국주의 미국의 패전과 남베트남 친미예속정권의 붕괴, 그리고 사회주의 북베트남의 승전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집권으로 종결되었고, 곧바로 베트남 통일정부 수립과 통일국가 건설로 이어졌다.

베트남 민족해방전쟁의 승리적 결속과 제국주의 미국의 패전은, 커다란 상처와 충격과 압박을 미국에게 안겨주었다. 특히 미국은 한반도가 제2베트남처럼 되지 않을까 하고 크게 우려하며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4.29 비밀전문에는 “여러 가지 지표들은 인도차이나에서 일어난 정세발전 방향을 가리키고 있으며, 조선의 지도부는 미국이 남조선에 대한 (지배적) 지위를 포기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해 분명한 평가를 내렸다”고 쓰여 있다.

1975년 5월 6일 베이징 주재 동독 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비밀전문은, 1975년 4월 19일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지도부의 환영연회에서 김일성 주석이 연설한 내용 중에서 중요한 대목을 이렇게 인용하였다.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한 우리 인민의 현 투쟁은 세계 반제민족해방투쟁에서 중요한 련결고리입니다...만일 남조선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경우, 우리는 같은 민족성원으로서 팔짱을 끼고 구경하지 않을 것이며, 남조선 인민들을 힘있게 지원할 것입니다. 만일 적들이 무모하게 전쟁을 시작한다면, 우리는 전쟁으로 결정적인 대답을 줄 것이며 침략자들을 완전히 소멸할 것입니다. 이 투쟁에서 우리가 잃을 것은 군사분계선이요, 우리가 얻을 것은 조국의 통일입니다. 오늘 조선에서 전쟁이냐 평화냐 하는 문제는 궁극적으로 미국의 태도에 달려있습니다. 남조선의 권력을 틀어쥐고 주인행세를 하는 것은 미국입니다....남조선 인민들이 바라는 대로, 남조선에서 미군이 철수하고, 민족적 양심을 가진 민주인사가 집권하면, 우리는 조선의 항구적인 평화에 대한 확고한 보장을 얻게 될 것이며, 우리 조선사람들끼리 평화적인 방법으로 조선의 통일문제를 성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혁명과 전쟁인가, 철군과 통일인가
위에 인용한 김일성 주석의 연설내용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남측에서 혁명이 일어나면, 북측은 그 혁명을 적극 지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남측의 민주세력에 대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은 극에 달했으나, 그것이 곧 혁명적 상황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활동과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언론사전검열과 대학휴교조치를 강행하였다. 1973년 8월 8일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일본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저질렀으며, 1974년 4월에는 ‘민청학련 사건’을 일으켜 각계 민주인사와 학생운동 참여자 180여 명을 이른바 ‘국가변란’을 기도하였다는 ‘죄목’을 씌워 구속수감하였고, 1975년 4월 9일에는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을 조작하여 진보정치활동가 8명을 사형하였다.

1967년 12월 8일 평양 주재 동독대사 브리(Brie)가 베를린에 있는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 외교담당 비서 겸 동독 제1외무상 헤겐(Hegen)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 지도부가 생각하는 세 가지 민족문제 해결방안”은 “남코리아 인민대중이 대규모 혁명봉기를 일으키는 것”, “박정희를 반대하는 군부세력이 군사정변을 일으키는 것”, 그리고 “미국군이 남코리아 정권을 지원하지 못할 만큼 국제정세를 악화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제1해결방안과 제2해결방안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북측은 제3해결방안에 노력을 집중할 것으로 보았다.

둘째, 만일 미국이 북침전쟁을 도발하면, 북측은 미국군을 격퇴하고 조국통일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미국의 북침전쟁 도발이 북측이 말하는 무력통일의 전제조건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1976년 8월 18일에 ‘판문점 사건’이 일어난 직후, 미국은 방대한 무력을 한반도에 집결시키고 북침전쟁을 도발하려고 하였다. 북측의 시각으로 보면, 미국이 북침전쟁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던 당시의 긴박한 군사상황은, 북측에게 무력통일을 실현할 기회로 되었다.

그러나 북측과 미국의 무력충돌을 바라지 않은 중국은 당시 고조된 미국의 북침전쟁위협에 대해 침묵하였다. 11.17 비밀전문에 따르면, “중국은 조선반도에서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1976년 판문점 사건에 대해서도 매우 절제된 반응을 보였다”고 하였다. 또한 4.29 비밀전문에 따르면, 당시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 관계개선을 추진하고 있었던 중국은 한반도에 불안정한 상황이 조성되는 경우 북측과 미국의 대결, 북측과 남측의 대결에 중국이 휘말려 들어갈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여 북측의 대미정책과 대남정책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셋째, 주한미국군이 철군하고, 남측에서 “민족적 양심을 가진 민주인사가 집권하면” 평화통일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북측의 시각에서 보면, 평화통일의 전제조건이 주한미국군 철군과 남측의 민주정권 수립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우선 여기서, 주한미국군 철군은 평화통일의 전제조건이지 무력통일의 전제조건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북측이 말하는 무력통일의 전제조건은 주한미국군 철군이 아니라 미국의 북침전쟁 도발이다. 주한미국군이 철군하면 남측의 친미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족적 양심을 가진 민주인사”가 집권할 것이므로 북측은 철군 이후에 등장할 새로운 민주정권과 협상을 통해 평화통일을 실현하면 되는 것이지, 남북 쌍방에 전쟁피해를 가져올 무력통일을 강행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1967년 11월 20일 박성철(1913-2008) 당시 북측 외무상과 안드레이 그로미코(Andrei Gromyko, 1909-1989) 당시 소련 총리의 회담내용을 정리한 러시아 외교정책 문서에 따르면, “미군 철수 이후 북코리아가 남측을 공격하여 군사적 수단으로 통일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이라고 말할 만한 근거는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런데도 남측의 친미독재정권은 주한미국군이 철군하면 북측이 남침할 것이라는 헛소문을 끊임없이 퍼뜨려왔다. 그것은 친미독재정권이 정말로 철군 이후 북측이 남침하리라고 믿기 때문에 그런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 아니라, 철군으로 자기들이 정권을 잃어버릴 것을 우려한 나머지 허구적인 ‘남침설’을 퍼뜨려 정권을 계속 유지하여야 했기 때문에 그런 헛소문을 퍼뜨렸던 것이다. 그로부터 근 4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남측의 친미수구정권은 주한미국군이 철군하면 북측이 남침할 것이라는 헛소리를 계속하고 있다.

5.12 비밀전문에 따르면, 중국 방문 기간에 김일성 주석은 “조선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남조선에서 미군이 철수하는 것”이라는 점을 중국측에 강조하였고, 중국측은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조국통일) 3대 원칙과 5대 방안이 조선문제 해결을 위한 조선의 평화적 방안으로 된다고 인정하고 이를 지지하였다”고 하였다. 얼핏 생각하면, 김일성 주석이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강조한 것과 중국측이 평화통일 방안을 강조한 것 사이에서는 아무런 견해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중국은 북측이 강하게 제기한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사실상 외면하고 있었으므로, 김일성 주석이 중국 방문 중에 다시 제기한 주한미국군 철군문제에 대해 지지의사를 한 마디도 표명하지 않고, 그 대신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평화통일방안에 대해서만 지지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11.17 비밀전문에 따르면, 중국은 1977년 8월 사이러스 밴스(Cyrus R. Vance, 1917-2002)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주한미국군 철군계획에 관한 카터 행정부의 조치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주한미국군 철군문제에 지지의사를 표명하지 않은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11.17 비밀전문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비밀전문에 따르면, “최근 몇 해 동안, 조선은 중국이 남조선에서 미국군을 철수시키려는 자기들의 투쟁을 진정으로 지원해주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중국은 반소련 정책의 연장선에서 아시아에 미국군이 주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은 미국이 아니라 소련을 ‘주적’으로 삼고 소련과 적대관계를 유지하면서 미국과의 적대관계를 해소하려고 하였으므로, 당연히 주한미국군이 철군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중국이 미국과 관계정상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대만 주둔 미국군 철군 요구를 관철시켰으면서도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사실상 외면한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한미국군이 철군하고, 남측에서 “민족적 양심을 가진 민주인사가 집권하면” 평화통일이 실현된다고 했을 때, 북측이 말한 ‘민족적 양심을 가진 민주인사’는 누구였을까? 당시 북측이 남측에서 새로운 집권세력으로 등장해주기를 바랐던 민주인사는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민주세력의 지도급 인사 김대중(1924-2009)이었다. 북측은 그의 집권을 평화통일의 전제조건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1998년 2월 25일 마침내 김대중 정권이 등장하였다. 북측의 시각으로 보면, 2000년 6월 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과 6.15 공동선언을 채택한 것은, 그로부터 25년 전에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평화통일의 전제조건을 마련한 역사적인 사변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의 등장과 6.15 공동선언 채택은 평화통일의 전제조건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만 충족시킨 것이었다. 주한미국군 철군이라는 또 다른 평화통일의 전제조건은 여전히 충족되지 못하였다.

2008년 2월 25일에 등장한 이명박 정권이 6.15 공동선언을 전면 부정하고 남북관계를 파탄에 몰아넣은 것은, 평화통일의 전제조건 가운데 한 가지만 충족시킨 정치정세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를 현실로 입증하였다. 오늘 한반도 정세는 주한미국군이 이 땅에 남아있는 한, 평화통일이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알림]스마트폰 사용자를 위한 <변혁과 진보> 큐알코드와 모바일 뷰
위의 <변혁과 진보> 큐알코드(QR Code )를 스마트폰으로 스캔해 보세요.

스마트폰 사용자는 웹버전과 같은 주소 www. changesk.blogspot.com 에서 자동으로 모바일 뷰로 보실 수 있습니다.

2012/05/26

정파연합 파탄으로 증폭된 분당위험

변혁과 진보 (79)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애초에 왜곡과 선동이 있었다

통합진보당 건설과 야권연대 실현, 이것은 지난 반 년 동안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정력적으로 수행해온 당면과업이었고, 그들이 이룩한 성과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지난 반 년 동안 어렵사리 획득하고 쟁취한 통합진보당 건설과 야권연대 실현이라는 큰 성과를 한꺼번에 잃어버릴 위험에 빠져있다.

당 안팎에서 그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려는 온갖 행패가 저질러지고 있다는 점에서, 통합진보당이 처한 현 상황은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버렸다. 당 안팎에서 분당설이 떠도는 것은 위험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말해준다.

당지도부를 장악하기 위한 신당권파와 구당권파의 공정한 경쟁은 어느 정당에서나 불가피한 일이므로 어느 한 쪽을 비난할 수 없지만, 공정한 경쟁이 아니었다는 것이 충돌과 분쟁의 촉발요인이었다.

신당권파와 구당권파가 당지도부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공정하게 경쟁했어야 정상인데, 비례대표 당내경선이 "총체적 부정선거"였다고 왜곡하면서 비례대표 당선자와 후보자 전원을 사퇴시키자는 무분별한 선동이 벌어진 것이다. 통합진보당을 분당위험에 빠뜨린 결정적 원인은 바로 그 왜곡과 선동에 있다.

만일 왜곡과 선동이라는 말이 눈에 거슬린다면, 최근에 드러난 중요한 사실을 주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신당권파가 언론에 공개한 부정사례를 다시 조사했더니 부정사례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를테면, 2012년 5월 23일 <주권방송>의 '추정 60분' 제작단이 밝힌 진상조사위원장의 사실왜곡, 그리고 5월 24일 <민중의 소리>에 실린 핵심적인 진상조사위원의 사실왜곡 등은 진상조사위원회를 장악한 신당권파가 사실을 왜곡하고 전원사퇴를 선동하였음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례들이다.


진보적 대중정당이냐 개혁적 국민정당이냐

왜곡과 선동으로 뒤틀리고 꼬인 상황에서 신당권파는 구당권파 인사들에 대한 출당조치를 강행하겠다고 결정하였다. 신당권파의 출당조치로 구당권파가 당지도부에서 밀려나면, 신당권파가 당지도부를 장악하는 것은 절차문제만 남게 될 것이다.

정파이익에 몰두한 나머지 당권에 집착하는 것은 당내 분쟁을 일으키는 부정적 요인이지만, 어느 정파가 당지도부를 장악하고 당을 이끄는가 하는 것은 당권에 집착하는 문제와는 다른 문제다. 그 문제는 당의 정체성에 직결된 매우 중대한 문제다.
   
신당권파의 주도세력은 국민참여당 계열과 새진보통합연대 계열의 중도우파연합체인데, 특히 국민참여당 계열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국민참여당 계열의 비중이 압도적인 중도우파연합체가 당지도부를 장악하고 통합진보당을 이끌어 가면 어떻게 되는가?

보나마나 통합진보당의 정체성이 변화될 것이다. 당의 정체성 변화는 진보적 대중정당이 개혁적 국민정당으로 주저앉다는 것을 뜻한다.

통합진보당이 개혁적 국민정당처럼 변모되면,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과 자주적 평화통일 강령은 유명무실하게 될 것이고, 또 다른 개혁적 국민정당인 민주통합당과의 정쟁 또는 야합에 열중하게 될 것이다.

어느 정파가 통합진보당을 이끄는가 하는 것은 어느 정파가 당지도부를 장악하는가 하는 정파문제를 넘어서 진보적 대중정당이냐 개혁적 국민정당이냐, 야권연대냐 야권야합이냐를 결정하는 원칙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다.


진보를 제거한 개혁, 변혁을 대체한 개량

당 밖에서는 수구우파가 통합진보당이 제3당이 되었으니,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개혁적 국민정당으로 거듭나라고 목청을 높이고 있고, 사이비 진보인사들이 '진보의 재구성'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이를테면, "당내 행사에서 애국가를 제창하라, 당지도부가 현충원을 참배하라, 당의 편향적 대북관을 바로잡아라"고 하면서 자발적으로 '사상검증'을 하고,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라고 강박하는 것이다.

그러나 명백하게도, 수구우파와 사이비 진보인사들이 말하는 '국민의 눈높이'나 '진보의 재구성'이란 진보를 제거한 개혁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고, 변혁을 대체한 개량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진보적 대중정당에게 개혁적 국민정당으로 변신하라고 강박하는 것은, 진보적 대중정당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회변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뢰한들의 행패가 아닐 수 없다.

만일 통합진보당이 그들의 강박과 행패를 견디지 못해 민주통합당과 똑같이 사고하고 행동한다면, 통합진보당은 존재가치와 존재의의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존재가치와 존재의의를 잃어버릴 바에는 차라리 통합진보당을 자진 해산하고 민주통합당으로 집단입당하는 편이 더 좋은 게 아닐까.

통합진보당의 진보정치활동가들과 당원들은 통합진보당을 개혁적 국민정당으로 변질시키려는 당 안팎의 불순한 기도를 배격해야 하며,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할 것이다.

최악의 분당사태를 막아야 한다

통합진보당 건설의 초석이 된 정파연합은 어느 정파가 다른 정파를 정략적으로 잠시 이용하다가,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서로 결별하는 식의 정파야합이 아니다. 그런 정파야합은 수구우파정당에 모여든 파벌들의 이합집산이다. 통합진보당은 여러 정파들이 통합하여 건설한 진보적 대중정당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통합진보당의 정파연합이 구당권파와 신당권파의 정면충돌로 깨지고 말았다. 신당권파의 구당권파 출당조치 강행은 정파연합의 완전한 파탄을 의미한다. 정파연합 파탄은 통합진보당을 분당으로 끌어간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구당권파와 신당권파가 완전히 갈라서는 분당사태는 진보적 대중정당의 붕괴이며, 진보정치의 좌절이다.

당내 분쟁이 극도로 격화되어 하는 수 없이 분당하면, 뜻이 통하는 정파끼리 각자 새로운 당을 창당하면 될 것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은 대중들로부터 고립되어 존재감을 상실한 군소정당이나 건설하겠다는 얼빠진 소리나 마찬가지다.

통합진보당에 결집한 진보정치활동가들과 당원들은 최악의 분당사태를 막아야 한다. 구당권파와 신당권파가 정면충돌을 피하고 대화하면서 양보와 타협의 해법을 함께 찾는다면, 어찌 최악의 분당사태를 막지 못하겠는가.

구당권파와 신당권파는 감정적 대응을 자제하고 이성적 판단을 앞세워 분당사태를 막아야 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2012년 5월 26일 작성)




[알림]스마트폰 사용자를 위한 <변혁과 진보> 큐알코드와 모바일 뷰
위의 <변혁과 진보> 큐알코드(QR Code )를 스마트폰으로 스캔해 보세요.

스마트폰 사용자는 웹버전과 같은 주소 www. changesk.blogspot.com 에서 자동으로 모바일 뷰로 보실 수 있습니다.

2012/05/24

어느 철학자가 본 진보당 사태 (2)- 누가 죽산 조봉암을 죽였는가?


아래 글은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사이트에 게재한 글이다.


누가 죽산 조봉암을 죽였는가?
이병창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는 반복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 이것은 마르크스의 말이다. 지금 이 땅에서 마르크스의 말이 다시 반복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냉소보다는 오히려 비애감에 사로잡힌다.
 
역사를 아는 사람은 기억하리라. 죽산 조봉암을! 그는 진보당 당수로서 5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했다. 이승만은 차기 선거에서 조봉암과 진보당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조봉암을 간첩사건에 연루시켜 사형시키고 진보당을 해체하였다.
 
조봉암을 죽이고 진보당을 해체한 책임자는 당연히 이승만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음모에 조연이 있었다. 그들은 침묵으로써 이승만의 음모를 지원했다. 이 조연이 누구였는가? 역사가들은 바로 당시 장면이 이끌던 민주당이 그랬다고 믿는다.
 
민주당은 조봉암과 진보당의 무서운 기세에 위협을 받았다. 조봉암과 진보당의 기세가 계속되면 민주당은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그들은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이승만의 음모를 침묵으로써 지원했다.
 
지금 이 땅에서 과거 조봉암과 진보당을 압살했던 음모를 다시 한 번 보게 된다. 물론 이번 경우도 이명박 새누리당 정권의 작품이다. 그러나 이 음모에서 조연으로 나선 이들을 보면서 나는 치를 떤다. 소위 자유주의자들, 소위 민주주의자들, 소위 국민주의자들, 그들의 언론, 그들의 정당이 바로 그런 조연들이다.
 
그들도 마찬가지이다.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모든 문제는 마땅히 한 두석으로 자리나 빛내 주어야 할 통합진보당, 그들이 의심스러워하는 주사파들이 이번 선거를 통하여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이들 조연들은 이를 묵과할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그들은 차라리 이명박 새누리당의 음모에 동조하고 만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지금 통합진보당의 당사가 검찰에 의해 침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자유주의자, 소위 민주주의자, 소위 국민주의자들 어느 누구나 나서지 않는다. 일일이 언급할 수 없지만 대체로 그들의 입장은 차라리 잘 되었다는 식이다. 아무렴 주사파가 국회에 들어오는 것보다는 낫겠지. 이게 그들의 생각이다.
 
지금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진보당 당사에 침탈한 것을 보면서 비애감이 드는 이유는 어쩌면 역사가 이렇게 반복되는가 하는 느낌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조연들이 모르는 게 하나 있다. 4.19가 왜 실패했는가? 그것은 4.19 이후 분출하는 민중적인 요구를 수용할 통합된 정당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보당과 조봉암이 있었더라면 분명 그런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으로서는 그런 요구를 수용할 능력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민주당은 지리멸렬했다. 그 틈을 노린 것이 바로 5.16 쿠데타 세력이고. 민주당은 침묵으로 동조한 댓가를 역사로부터 받은 것이다.
 
지금 이 땅의 소위 자유주의자들, 소위 민주주의자들, 소위 국민주의자들, 당밖에도 있고 당안에도 우글우글하는 이들도 동일한 댓가를 받지 않을까? 반복되는 역사 앞에 나는 통곡하고 싶다. (2012522)



[알림]스마트폰 사용자를 위한 <변혁과 진보> 큐알코드와 모바일 뷰
위의 <변혁과 진보> 큐알코드(QR Code )를 스마트폰으로 스캔해 보세요.

스마트폰 사용자는 웹버전과 같은 주소 www. changesk.blogspot.com 에서 자동으로 모바일 뷰로 보실 수 있습니다.


2012/05/22

통합진보당 와해시키려는 4단계 시나리오

<민중의 소리>  입력 2012-05-22 09:06:55l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적출→와해→파탄→재집권 4단계 시나리오


통합진보당에 몰아닥친 내분과 외압이 최악의 사태로 치닫고 있다. 검찰과 경찰이 압수수색을 저지하는 통합진보당 인사들을 강제로 끌어내고 당원명부를 압수한 것이다. 군사독재정권 시기에 야당을 물리적으로 탄압하였던 사법적 폭거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의 사법당국이 통합진보당에게 자행한 사법적 폭거는, 통합진보당 내분사태에 수구우파정권이 직접 개입함으로써 통합진보당 사태가 구당권파 대 신당권파의 분쟁구도를 넘어 통합진보당 대 이명박 정권의 대립구도으로 전화, 확대되었음을 말해준다.

지금까지 수구우파언론은 마녀사냥식 음해모략으로 통합진보당 구당권파를 도려내려는 이른바 ‘적출공작’을 밀어붙였다. 수구우파언론의 ‘적출공작’은 통합진보당이 애써 구축한 대중적 지지기반을 허물어뜨림으로써 수구우파정권의 사법당국이 통합진보당 내분사태에 개입할 길을 터주었다. 통합진보당에게 자행된 사법적 폭거에 대해 대중들은 공분을 느끼지 않는 냉랭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명백하게도, 수구우파정권이 통합진보당 내분사태에 직접 개입한 목적은 통합진보당을 와해시키는 데 있다. 수구우파언론의 구당권파 적출공작이 이제부터는 수구우파정권의 통합진보당 와해공작으로 증폭,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구우파정권이 통합진보당을 와해시키려는 목적은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의 야권연대를 파탄시키기 위한 것이다. 통합진보당이 내분과 외압의 합병증으로 쓰러지거나, 또는 분당하거나, 또는 와해 직전의 극심한 혼란과 무력한 상태에 빠져들면 야권연대가 불가능하게 되리라는 점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수구우파정권이 야권연대를 파탄시켜야 올해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막고 자기들의 재집권을 실현할 수 있는데, 야권연대를 파탄시키는 방도는 야권연대를 떠밀고 나가는 구동축 한 쪽을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수구우파언론의 구당권파 적출공작→수구우파정권의 통합진보당 와해공작→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의 야권연대 파탄→수구우파정권의 재집권으로 이어지는 4단계 시나리오가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 4단계 시나리오를 간략하게 표기하면, 적출→와해→파탄→재집권이다.

수구우파언론의 악의적 대중선동에 휘말려 구당권파에게 무모한 돌팔매질이나 할 게 아니라, 수구우파정권의 재집권이라는 최종 목적을 향해 날로 악화되는 통합진보당 사태의 본질적 측면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경찰에게 팔 꺽이는 김제남 당선자
21일 저녁 서울 금천구 가산동 스마일서브에서 통합진보당 김제남 당선자가 입회인 없이 진행되는 검찰의 당원명부 서버 압수 수색에 항의하며 서버실 앞에서 연좌하다 여경에게 팔이 꺽이고 있다.


선무당들이 펼쳐놓은 굿판

미국식 저질영화의 총본산인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에는 때로 단역배우(extra)들이 모여드는 적이 있다. 그들은 시간당 임금을 받고 영화촬영에 동원되는데, 영화감독은 단역배우들에게 시나리오를 말해주지 않으며, 단역배우들도 어떤 시나리오에 따라 영화를 촬영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고 알 필요도 없다. 단역배우들은 촬영장면 한 부분에 잠깐 동원되는 것이 전부다.

그런 영화촬영에 비유하면, 통합진보당 와해공작 시나리오에서 통합진보당을 해치는 악당 주역을 수구우파정권이 맡고, 구당권파를 해치는 악당 조역을 수구우파언론이 맡았다고 말할 수 있다. 통합진보당 와해공작 시나리오를 총연출하는 영화감독의 정체를 알아내기 힘들지만, 촬영현장에 동원된 단역배우들이 누구인지는 금방 알 수 있다.

통합진보당 와해공작 시나리오가 가동되는지 알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단역배우들이다. 이를테면, 당내경선 부정의혹을 구실로 구당권파를 밀어내고 당지도부를 장악하려는 신당권파가 그런 단역배우들이고, 같은 자주파이면서도 당권관계의 이해득실에 따라 구당권파와 대립각을 세운 당내 자주파 일부가 그런 단역배우들이고, ‘자주파 혐오증’에 걸린 듯한 일부 지식인들 및 재야인사들이 그런 단역배우들이다.

예술적 기량이 없는 단역배우들이 단역밖에 맡을 수 없는 것처럼, 통합진보당 와해공작 시나리오를 간파할 만한 정치적 식견이 없는 그 세 부류의 사람들도 그 시나리오의 연출에 무분별하게 부화뇌동하였다. 통합진보당 와해공작 시나리오가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촬영장면에 덜컥 출연해버린 단역배우들의 부화뇌동은 영화촬영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이 있는데, 그 세 부류의 사람들이야말로 수구우파의 대중선동을 촉발시키거나 대중선동에 부화뇌동하며 통합진보당을 잡는 선무당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선무당 굿판은 이제 그만 걷고, 수구우파의 악질선동과 정치탄압에 맞서 함께 싸워야 한다.


[알림]스마트폰 사용자를 위한 <변혁과 진보> 큐알코드와 모바일 뷰
위의 <변혁과 진보> 큐알코드(QR Code )를 스마트폰으로 스캔해 보세요.

스마트폰 사용자는 웹버전과 같은 주소 www. changesk.blogspot.com 에서 자동으로 모바일 뷰로 보실 수 있습니다.


2012/05/19

어느 철학자가 본 진보당 사태 (1) - 유시민의 논리와 이정희의 논리 외


아래 세 편의 글은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사이트에 게재한 글이다.
 
 
유시민의 논리와 이정희의 논리
 
 
이병창
 
나의 삶의 원칙 중의 하나가 있다. 그것은 끝까지 이론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시민사회적인 실천이라면 몰라도, 정당정치적인 참여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원칙을 나는 지켜왔다. 다만 현재는 통합진보당의 당원이다. 그러나 한 번도 어떤 모임에도 나가본 적이 없다. 그것은 내가 속한 분회에 물어보면 알 것이다. 다만 진보의 정치를 후원하기 위한 참여에 불과하다.
 
이렇게 나 자신을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지금 내가 쓰는 글이 오해를 자아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명백히 말하는 데 결코 당권파가 아니다. 당권이 아니라 당직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의 글은 당권파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일 것임을 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그 이유는 아래 글에서 밝혀질 것이겠지만 지금 우리 시민사회가 특히 진보주의자들이 너무나도 위험한 사고방식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볼테르만한 능력이 없고 에밀졸라와 같은 열성도 없다. 그러나 누군가 그런 역할을 해 주어야 할 것 같아서 지금 이 글을 쓴다.
 
무엇이 위험한 사고방식인가? 지금 많은 진보주의자 지식인들 그리고 언론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논리가 있다. 그것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어 억울하더라도 당권파는 당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정치의 논리이고, 통합진보당이 제3당이 되었으니 이제 정치의 논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유시민의 논리라 칭하겠다. 실제 그는 이런 주장을 해 온 것으로 안다.
 
역사를 공부하여 본 사람이라면 이런 논리가 너무나도 익숙하게 들어온 나치의 논리였음을 잘 알 것이다. 나치가 주장했던 것이 국민이다. 그것을 위해 그들은 유태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왜 유태인이었던가? 유태인이 유럽의 사회의 변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치는 집시들을 박멸했다.
 
정치의 세계에서 이런 희생양의 논리는 너무나도 자주 사용되어 왔다. 아주 가까운 예로 이라크 전쟁을 들어보자. 부시는 알카에다의 테러에 대해 이라크 후세인 정권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왜 이라크였던가? 후세인이 이슬람이고, 또 독재자이니 죄를 뒤집어 쓰기에 가장 적절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진보 언론과 진보지식인이 그들 스스로 그토록 무서워하던 나치의 논리에 그대로 빠져들었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약간 짐작 가는 것은 있다. 그것이 바로 종북파라는 딱지이다.
 
당권파는 오래전부터 종북파라는 딱지를 부여받았다. 최근 그런 딱지를 붙인 것이 잘못이라는 점이 공인되었다. 그러나 한번 붙여놓은 딱지는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여전히 그들은 시시때때로 종북파라고 불린다.
 
그런데 종북파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유대인과 같은 처지에 있다. 마치 유대인이 음모의 소굴이라 여겨졌듯이 우리사회는 종북파가 모든 음모의 소굴인 것처럼 두려워 한다. 그런데 그들이 소수였을 때는 그래도 참아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제3당의 자리를 차지하자, 위기감이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나의 주장을 단적으로 실증하는 사실이 있다.
오늘 아침 조선일보를 보라.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주사파가 대한민국의 법을 만든다라고. 이 위험한 나치적인 선동이 바로 그간 사태의 진짜 원인을 밝혀주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전후 나치와 같은 범죄를 막기 위해 등장한 이론이 바로 인권이론이다. 그것은 소수파, 주변인을 비롯한 누구에게도 법적인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권이론에 기초하여 무죄 추정의 원칙 등과 같은 여러 법의 원칙들이 확정되었다. 나는 이런 인권이론들을 법치의 원리라 하겠다. 이것이 바로 바로 이정희 대표의 논리이다.
 
진보 지식인들과 진보 언론은 이구동성으로 이정희 대표를 사악한 종파주의자로 그려놓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정희 대표는 소수 당권파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억울한 희생자를 막는다는 것은 곧 인권의 논리를 옹호하는 가장 결정적인 투쟁이다. 그러므로 이정희 대표는 그 엄청난 참을 수 없는 비난을 들어가면서도 무릎을 꿇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유시민의 논리에 굴복한다면, 앞으로도 우리 정치는 끊임없이 희생양을 만들 것이다. 오늘 당권파가 희생당하면 다음에는 유시민 자신이 그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 이정희가 싸우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 위험한 나치의 논리이다.
 
지금 이정희 대표가 외롭게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이 정치의 논리, 나치의 논리, 유시민의 논리에 맞서고 있다. 나는 힘이 없다. 나는 그저 학자에 불과하다. 나는 아무도 읽지 않는 철학을 공부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정희 대표와 같이 지금 박해받는 편에 서고 싶다. 나에게 돌을 던지라. (2012516)
 
------------------------------------------------------------------------------------------------------------

  
나는 하소연한다
 
 
이병창
 
(이 글은 한철연 사이트에 올리지만 한철연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 글에 대해서는 오직 나 개인이 책임질 것이다.)
 
방안의 꽃병이 깨어졌다. 어머니는 아이를 야단친다. 너 꽃병을 깨뜨려놓고 미안하다는 말도 없니? 아이는 억울한 듯, 엄마 내가 안 그랬어. 이렇게 말한다. 엄마가 화를 낸다. 이 방에 너 혼자 놀고 있었잖아. 너 아니면 누가 깨겠니. 아이는 정말 억울하다. 그래서 문을 팍 닫고 나가버린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이를 쫓아가서 혼을 낸다. 이 년이, 어른 한테 머르장 머리 없이 문을 닫고 가.
 
위의 예는 우리가 자주 보는 엄마와 아이의 싸움이다. 현재의 상황과 너무 유사해 제시해 보았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억울하다는 것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모두 너를 의심하니까 일단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 다음 나중에 잘못인지 아닌지 철저히 알아보자.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아무리 그가 의심스럽고 시간이 다급하더라도 그럼 먼저 진상을 철저히 알아보고 그런 다음 처리하자.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일까?

법을 원리로 하는 사회라면 아마 후자가 당연한 길일 것이다. 만일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의 마음을 어떤 식으로 풀어주지 않는 한,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는 극단적인 경우 자살을 택하거나 아니면 자신에게 사과를 강요하는 자에 대한 폭력에 호소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비슷한 사건을 접한 적이 있다. 바로 영화 부러진 화살을 통해 널리 알려진 사건이다. 억울함을 호소해도 들어주지 않을 때, 그는 결국 폭력에 호소하지 않았던가? 폭력에 호소하는 것은 물론 정당하지 못하다. 하지만 그에 앞서서 우리는 먼저 그가 그토록 호소하고 싶던 억울함을 들어주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통합진보당 당권파에 속하는 사람이 처한 입장이 바로 위와 같지 않을까? 물론 그들이 중앙위 석상에서 폭력행위를 저질렀다면 그것은 범죄적인 행위이다. 그런데 우리 시민사회는 그들을 그렇게 몰고 간 원인에 대해 반성을 해 볼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그들이 그토록 억울하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들은 거짓말쟁이고, 사악한 사람이니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들 당권파는 이번에 문제가 된 비례대표 경선에서 자신들의 억울함을 거듭거듭 호소해 왔다. 그런데 비당권파는 한결같이 사과하고 비례대표를 사퇴하기를 요구했다. 그리고 결국 이번 중앙위원회에서 당권파의 비례대표 사퇴를 당의 이름으로 강요하려 했다.

꼭 그렇게 했어야 했을까? 만일 사과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진상조사를 철저하게 한 다음 당 기율 위반으로 제명하면 되지 않을까? 왜 이렇게 악착같이 사과와 사퇴를 강요했을까? 그렇게 하면 억울한 사람이 극단적인 행위에 호소할 것을 몰랐던 것일까?
 
지금 진보 언론이나 진보적인 지식인은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당권파가 부정을 저질렀으며 당연히 사과 및 사퇴를 해야 하며, 더구나 이런 폭력까지 저질렀으니 이제 매장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나는 하소연하다. 왜 그렇게 서두르는가? 기다려 보자. 그들의 억울하다는 말을 들어보고 철저하게 진상조사를 해보자. 그런 다음 처리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선거부정에 대해 잘못이 있다면 거기에 맞게 응당하게 처리돼야 한다. 지금은 모두 도매금으로 처리되고 있다. 이미 우리 모두는 그들의 부정을 확인하기도 전에 확신한다. 이런 확신의 원천은 무엇인가? 우리의, 진보 언론과 진보 지식인의 선입견은 아닐까? 우리도 반성을 하자.
 
그런데 비당권파는 또 다시 중앙위원회를 열어 기어코 비례대표 사퇴를 관철하고자 한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적어도 이런 것 정도는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비당권파가 원하듯이 현재 당권파를 제거했을 때, 통합진보당는 계속될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그 이유는 비당권파 자신이 더 잘 알 것이다. 당권파의 힘이 필요하기에 합당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당권파를 제거한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원래의 힘밖에 행사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장수의 목을 치는 것이다. 만일 그 장수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소문이 있으면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심적으로 공황상태에 빠진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함께 한 사이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장수의 목을 치려면 철저한 명분이 필요하다.

그런데 내가 보이게 비당권파는 당권파의 수장들을 목 칠 힘은 있다. 그러나 그 힘을 행사하기 위한 명분을 마련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그 결과는 말하지 않더라도 잘 알 것이다. 이미 일어난 폭력이 그런 심적 공황상태를 잘 보여준다.
 
나는 하소연한다. 비당권파 사람들, 그리고 많은 진보 언론 및 지식인들에게. 물론 당권파의 폭력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먼저 당권파의 억울함부터 들어보기 바란다. 먼저 진상조사를 철저하게 하라. 사과니 사퇴니 하는 것 그 뒤에 처리해도 늦지 않다. 나머지 급한 일이라면 서로 협조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2012514)
 
--------------------------------------------------------------
 
나는 유대인이다
 
이병창
 
나는 유대인이다. 왜냐면, 나는 남북의 평화협력을 믿는다. 그러면 나는 이 남한 땅에서는 종북파이다. 나는 종북파로 찍히기 싫어서 어느 자리에서나 남북 관계의 문제가 나오기만 하면 다른 자리로 도망간다. 사람들은 비겁하다고 한다. 솔직하게 말하시라고. 그 사람들이야 국가보안법의 보호를 받으니 솔직히 말하겠지. 그러나 나는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감옥에 가야 한다. 그저 남북의 평화협력을 옹호했다고 하더라도. 감옥에 가야 한다.
 
그래도 때로 분노한다. 남북의 대결을 역설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때는 참을 수 없어서 분노하는데 그러면 돌아오는 것이 종북파라는 딱지이다. 그 때문에 다들 나를 싫어한다. 그러니 점차 침묵하고 또 침묵할 수밖에, 글을 쓰면 스스로 검열한다.

과거 안기부 때문에 검열하는 것 이상으로 종북파가 될까 봐 검열한다. 박정희 전두환 시절만큼이나 나는 나를 검열하는 한겨례 신문을 두려워한다. 나는 한겨레 신문이 두려워 한겨레 신문을 끊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이 땅의 유대인이다. 니들은 아느냐, 내가 두려워서 밤마다 떨고 있는 것을? 그렇게 떨고 있으므로 나는 유대인이다.
 
나는 유대인이다. 왜냐면, 나는 아직도 통합진보당에서 부정선거를 믿지 않는다. 나는 수 십년 간 대학에 있어서 운동권이 어떻게 선거하는가 매년 보아왔다. 남들이 보면 저건 웃기는 부정선거이다. 그러나 잘 보면 그들처럼 정직하고 깨끗한 선거가 없다. 나는 청년학생들을 믿는다. 나는 그들 운동권을 믿는다.

그런데 과거 운동권 출신조차 그런 것은 부정선거라 한다. 민주노총, 한겨레, 경향신문 모두가 부정선거라 한다. 나는 안 믿는다. 그러나 그렇게 안 믿는다면, 한겨레 신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소름끼치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 나는 소름끼치는 인간이다. 그러니 유대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사람들에게 말하지만 진실을 보라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내용을 보라고. 작은 것이 아니라 큰 전체를 보라고. 억압된 자의 진리는 이렇게 마음 속에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한다. 진중권이 말한다.

형식적인 것이 세부적인 것이 진리라고. 표면적인 사실의 세계는 지배자의 세계이다. 지배자의 진리와 억압된 자의 진리가 다르다는 것을 진중권은 알까? 나는 억압된 자의 진리를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그것은 유대인의 진리이다.
 
나는 유대인이다. 그러니 다시는 한겨레 신문을 보지 않겠다. 한겨레야 민족 같은 것보다 정권을 획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나는 다시는 소위 진보주의자들을 만나지 않겠다. 그들은 국가보안법의 보호를 받고 나는 유대인이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 한겨레 신문을 끊었다. 나는 한겨레 신문의 창간독자이다. 그러나 나는 소름끼치는 유대인이다. (2012515)



[알림]스마트폰 사용자를 위한 <변혁과 진보> 큐알코드와 모바일 뷰
위의 <변혁과 진보> 큐알코드(QR Code )를 스마트폰으로 스캔해 보세요.

스마트폰 사용자는 웹버전과 같은 주소 www. changesk.blogspot.com 에서 자동으로 모바일 뷰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