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30

세계 3대 친미파쇼독재자의 과거사는 오늘 어떻게 되었을까?

진실의 팔말매 <44>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친미파쇼독재자로 전 세계에 악명이 높았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미국의 배후조종으로 권력을 잡고 반공을 명분으로 파쇼독재를 자행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리고 그들의 말로가 비참하였다는 공통점도 있다. 세계 3대 친미파쇼독재자에 관한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2011년 10월 12일 필리핀 대통령 베니그노 아키노는 1989년에 사망한 전직 대통령 페르니난드 마르코스(Ferdinand Marcos, 1917-1989)의 시신을 필리핀 국립묘지로 이장하려는, 그의 추종자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1965년부터 1986년까지 친미파쇼독재를 자행한 반인륜범죄자다.


△마르코스는 자신의 집권시기였던 1980년 벤퀘트 산간지역에 자신의 콘크리트 흉상을 제작했다. (왼쪽 사진) 그러나 1986년 그가 미국으로 도망가자, 흉상의 얼굴은 지역 주민들에 의해 파괴됐다. (오른쪽 사진)

그의 친미파쇼독재 21년 동안 민주주의를 요구하여 투쟁하던 정치활동가 3,257명이 처형 또는 살해당하였고, 35,000여 명이 고문당하였으며, 70,000여 명이 투옥당하였다. 천추에 용납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반인륜범죄가 아닐 수 없다.

또한 마르코스는 대권을 쥐고 있었던 시기에 필리핀 국고에서 약 50억 달러를 빼돌려 부정축재한 도둑정치(kleptocracy)의 주범이기도 하다.

1986년에 필리핀 민중들은 항쟁을 일으켜 그를 권좌에서 끌어냈는데, 갈 곳이 없었던 그는 자기가 숭앙하던 미국으로 도망쳤다가 3년 뒤에 미국의 품에서 사망하였다.

1993년 필리핀 정부가 그의 시신을 미국에서 필리핀으로 가져오도록 허용하였는데, 그의 추종자들은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그의 고향마을에 미라로 임시보관하면서 줄곧 국립묘지로 이장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요구는 단호히 거절당하였다. 그처럼 극악무도한 반인륜범죄를 저지른 친미파쇼독재자를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필리핀의 마르코스만 친미파쇼독재자로 전 세계에 악명이 높았던 게 아니다.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1915-2006)도 친미파쇼독재자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2011년 8월 18일 '칠레 정치범과 고문에 관한 국가조사위원회'는 피노체트가 친미파쇼독재를 자행하였던 1973년부터 1999년까지 잔혹한 정치탄압을 받은 희생자들 가운데, 납치, 고문, 투옥, 살해, 처형을 당한 9,800여 명의 희생자 명단을 추가로 확인하였다.

피노체트 친미파쇼독재는 칠레의 민주주의를 요구한 정치활동가 40,018명을 살해 또는 처형하였다. 그 가운데 실종자는 3,065명이다. 마르코스와 마찬가지로, 피노체트도 마약밀매와 무기밀매로 부정축재한 도둑정치의 주범이었다.

1998년 10월 17일 피노체트는 신병치료를 위해 머물던 영국 런던에서 전격 체포되었다. 그의 폭압통치기에 칠레에서 고문당한 수많은 희생자들 가운데는 당시 칠레에 체류하던 스페인 국적자 94명이 포함되어 있고, 스페인 국적자 1명은 살해당했다.

그러한 범죄사실을 파악한 스페인 사법당국이 국제체포영장을 영국의 사법당국에게 보내 체포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영국 정부는 그를 재판하는 척하며 시간을 끌다가 국제여론이 잠잠해진 2000년 3월에 칠레로 슬그머니 돌려보냈다.

△가택연금 상태로 말년을 산  피노체트

칠레에서 오랫동안 재판을 받던 그는 2004년 12월 가택연금형에 처해졌고, 2006년 12월 10일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 있는 육군병원에서 심장마비로 91세에 사망하였다.

칠레 정부는 사망한 그를 위해 국장을 거행하자는 피노체트 추종자들의 요구를 거부하였고, 그의 유해는 산티아고에 있는 가족묘지에 묻혔다. 흉악한 친미파쇼독재자 피노체트는 생전에 가택연금상태에서 장기재판을 받다가 자연사하였지만, 칠레 정부의 과거청산작업은 그의 사망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2009년 9월 2일 칠레 정부는 피노체트 친미파쇼독재 시기에 잔혹한 탄압을 자행하였던 국가정보국 요원 출신자 129명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2008년 5월 26일에 국가정보국 요원 출신자 100여 명을 체포한 뒤 두 번째로 시행된 사법처리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필리핀의 마르코스, 칠레의 피노체트와 더불어 친미파쇼독재자로 전 세계에 악명이 높았던 사람이 전직 대통령 박정희(1917-1979)다. 그는 미국 육군방첩대(CIC) 한국지부장의 사주를 받아 1961년 5월 16일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정권을 찬탈하였으며,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국이 운영하던 궁정동 안가의 비밀연회장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손에 암살당했다.

그런데 해괴한 것은, 세계 3대 친미파쇼독재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악명이 높았던 박정희의 범죄사실에 대한 사법당국의 법적 규명이 전혀 되지 않았고, 그의 범죄실상마저도 파헤치지 않고 적당히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박정희 친미파쇼독재 18년 동안, 이 땅에서 자행된 구금, 납치, 테러, 살해, 처형은 얼마나 많았으며, 그의 하수인들이 조작한 간첩사건과 자행한 고문사건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남측에서 박정희의 범죄사실을 추적해온 언론인이 폭로한 바에 따르면, 박정희가 부정축재로 남긴 유산만 해도 10조원이 넘는다니, 그도 마르코스와 피노체트와 똑같은 도둑정치의 주범이다.

그런데 통탈할 노릇은, 2005년 12월부터 2010년 12월까지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만들어놓고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는 '결정사항'이나 발표하다가 어물어물 막을 내린 것이다. 과거사를 법적으로 규명하고 청산하여야 마땅한데도, 과거사를 정리하겠다니, 도대체 범죄를 정리한다는 망측한 궤변은 누가 조작해냈을까? 과거사 정리라는 말 자체가 과거사 청산을 포기하였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처럼 과거사를 청산하지 않고 슬그머니 넘어갔으니,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는 기고만장하여 현재사로, 미래사로 연장, 확대되고 있다. 청산되지 않아 기고만장해진 과거사가 어떻게 연장, 확대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필리핀의 마르코스는 필리핀 정부당국의 거부조치에 따라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했고, 칠레의 피노체트도 칠레 정부당국의 거부조치에 따라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했으나, 박정희는 암살당하자 서울에 있는 국립현충원에 버젓이 안장되었다.

더욱이 칠레의 피노체트는 죽기 전에 가택연금상태에서 재판이라도 받았으나, 박정희는 사망 이후에 찬양을 받고 있다. 친미파쇼독재자를 찬양하는 기괴한 정치촌극이 벌어지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데, 참담하게도 이 땅만은 세계적인 예외로 되었다.

△2011년 11월 14일 구미에서 열린 박정희 동상 제막식

2011년 11월 14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이 세워졌고, 같은 날 경상북도 구미시에 있는 그의 생가터에서는 7,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박정희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경상북도 구미지역 25개 사회단체들이 '박정희대통령동상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12억원을 들여 대형동상을 세운 것이다.

원래 박정희 반신상은 그가 군사반란을 일으켰던, 지금은 문래공원으로 바뀐, 서울 영등포구 육군 제6관구사령부 자리에 1966년 7월 7일에 이미 세워진 바 있는데, 이제는 반신상도 성에 차지 않아 높이가 8m나 되는 대형동상까지 세운 것이다.

칠레의 친미파쇼독재 청산조치에는 감히 비길 수도 없고, 정치적으로 칠레보다 낙후한 필리핀의 친미파쇼독재 단절노력과도 상치되게 친미파쇼독재자를 찬양하는 이 땅의 정치현실은 너무도 암담하다.

필리핀처럼 친미파쇼독재와는 단절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칠레처럼 친미파쇼독재를 청산해야 하는데도, 이 땅의 추악한 정치현실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그 무슨 기념도서관이니 동상이니 하는 것들을 세우는가 하면, 이 땅의 국민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박정희 향수병'이라는 환각상태에 빠져있는 것이다.

친미파쇼독재의 추악한 과거를 청산하지 않은 낡아빠진 오늘이 만나는 것은 절망과 불행과 재앙의 내일일 것이다. (2011년 11월 30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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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5

생의 마지막 순간, 눈동자에 비친 여명

변혁과 진보 (56)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그는 혁명가였다

세계를 미국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친미언론매체들이 무시해버리는 바람에 이 땅의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지만, 오늘 적지 않은 나라들에서 미국과 친미예속정권에 맞선 좌파무장조직들의 전투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미국은 좌파무장조직을 ‘테러조직’으로 낙인찍고 파괴하려고 하지만, 그들은 국제법상 교전단체(belligerent body)이지 ‘테러조직’이 아니다.

1949년부터 1963년까지 14년 동안 지리산, 태백산, 오대산, 한라산 등지에서 투쟁하였던 이 땅의 빨찌산에 대한 대중들의 기억은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 머물러 있지만,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오늘도 좌파무장조직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다.

좌파무장조직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아시아 나라들 가운데서 필리핀과 인도가 첫 손에 꼽힌다. 필리핀의 좌파무장조직 신인민군(New People's Army)은 1969년에 창설되었고, 인도의 좌파무장조직 낙쌀라이트(Naxalite)는 1967년부터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 땅에서 바라보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남미대륙의 콜롬비아도 그런 무장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제3세계 나라들 가운데 하나다. 남미대륙 서북단에 있는 콜롬비아는 인구가 이 땅의 인구 4,875만 명보다 조금 적은 4,472만 명이고, 국토면적은 이 땅의 넓이 99,720㎢보다 조금 넓은 1,138,910㎢인 나라다.

그런데 2011년 11월 5일 미국 주요언론들은 콜롬비아에서 두 눈을 감지 못하고 숨진 알폰소 카노(Alfonso Cano)의 마지막 사진을 보도하였다. 카노는 누구일까?

1948년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카노는 스무 살 되던 1968년에 콜롬비아국립대학 인류학과에 입학하였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이 땅의 의식 있는 대학생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순과 궁핍으로 가득 찬 낡은 세상을 뒤집어엎고 새로운 세상을 세우는 꿈을 꾸어오던 카노도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70년대 후반 어느 날, 그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커다란 전환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그가 콜롬비아혁명무력(FARC)에 가입한 것이다. 만일 콜롬비아에 친미예속정권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인류학자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과 친미예속정권의 억압과 착취에 짓밟힌 콜롬비아의 현실은 한때 인류학자를 꿈꾸었던 청년 카노를 혁명의 길로 불러냈다.

콜롬비아혁명무력에 가입한 그는 보고타 지하조직을 지도하는 정치위원으로 투쟁하던 중, 1981년 어느 날 그의 아파트를 급습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당시에는 아직 밀림의 무장투쟁에 참가하지 않고 도시의 지하투쟁만 하다가 체포되었던 까닭에, 카노는 1983년의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밀림으로 떠난 카노, 도시에 당을 건설하다

출옥한 카노는 어느 날 자기 아내 마리아 유지니아와 어린 아들 페데리코와 영영 헤어지는 눈물의 작별인사를 나누고, 밀림으로 떠났다. 콜롬비아혁명무력이 열대밀림 속에서 벌이는 무장투쟁에 참가하여 총을 잡은 것이다.

대학교육을 받을 기회마저 박탈당한 대원들이 대다수였던 콜롬비아혁명무력에 카노와 같은 대학생 출신 지식인이 입대한 것은 크게 반길 일이었다. 입대 후 그는 콜롬비아혁명군의 사상이론부문과 대외정치협상부문을 담당한 지휘관으로 성장하였다.
 
콜롬비아혁명무력 대원들과 함께 있는 알폰소 카노

그런데 그가 무장투쟁에 나선 때로부터 6년 뒤, 사회주의진영이 맥없이 무너지는 세계사적 대격변이 일어났다. 1990년대 초 이 땅의 운동권이 사회주의진영의 붕괴로 충격과 혼란을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콜롬비아혁명무력도 커다란 사상정신적 충격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카노는 소비에트형 사회주의가 실패하였음을 인정하고, 콜롬비아의 현실에 맞는 남미식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고 설파하였고, 스페인 제국주의의 남미대륙 식민통치를 뒤엎고 자주적 민주공화국을 건설한 민족영웅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 1783-1830)가 제창하였던 자주적 발전의 길을 모색하였다.

카노가 자주적 혁명사상에 눈을 뜬 것은 콜롬비아혁명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적 의의를 지닌다. 불시에 달려드는 ‘토벌대’에 맞서 피어린 전투를 수없이 벌이며 생사경계를 오가는 밀림에서 그가 자주적 혁명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기는 힘들었지만, 볼리바르주의(Bolivarianism)에 기초한 남미식 사회주의는 훗날 베네주엘라의 우고 챠베스 대통령이 1999년에 베네주엘라 헌법으로 제시하기 전에 이미 콜롬비아 열대밀림 속에서 카노에 의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회주의진영이 무너진 뒤에도 좌절을 모른 카노는 10여 년 동안 사상정치사업을 꾸준히 밀고나가 마침내 새로운 유형의 혁명정당을 건설하였으니, 그것이 콜롬비아혁명무력의 정치조직으로 2000년에 창당된 콜롬비아혁명당이다.

알폰소 카노는 볼리바르주의에 기초한 남미식 사회주의를 지도이념으로 제시한 콜롬비아혁명당의 창건자이자 당대표였다. 콜롬비아혁명당을 창당한 직후, 그는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가 콜롬비아에 파견한 미국인 기자와 비밀장소에서 만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담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콜롬비아정부가 이 나라의 발전에 참여할 기회를 인민들에게 주지 않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투쟁하는 이유다.”

2008년 3월 26일 당시 콜롬비아혁명무력 최고사령관이었던 마누엘 마룰란다 벨레즈(Manuel Marulanda Velez, 1930-2008)가 밀영에서 심장마비로 78세에 별세하였다. 그는 농민 출신 무장대원 48명을 이끌고 1964년 5월 27일에 콜롬비아혁명무력을 창설한 1세대 혁명가다. 무려 47년 동안이나 무장투쟁을 계속해오고 있으니, 혁명1세대의 뒤를 이은 아들과 딸들이 총을 잡았고, 지금은 손자와 손녀들이 그 뒤를 이어 총을 잡았다.

△콜롬비아혁명무력의 청년 대원들 

마누엘 마룰란다가 별세한 직후, 미국과 콜롬비아정부는 콜롬비아혁명무력이 곧 와해될 것처럼 떠들었지만, 그의 뒤를 이어 최고사령관직을 맡은 사람이 알폰소 카노다. 그는 콜롬비아혁명당의 대표이며 콜롬비아혁명무력 최고사령관이었다.

△ 콜롬비아혁명무력 지도부. 앞줄 왼쪽에 안경을 쓰고 구레나누를 한 인물이 알폰소 카노이다. 
앞줄 오른쪽에  어깨에 노란천을 올려놓은 인물이 마누엘 마룰란다 전 최고사령관이다.
대원들이 차고 있는 노랑,  파랑, 빨강색 바탕의 완장은 콜롬비아혁명무력을 상징하는 표식이다.
 
카노는 두껍고 큰 안경알이 들어있는 검은 색 뿔테 안경을 썼고, 여느 60대 남성들이 그러한 것처럼 희끗희끗해진 구레나룻을 길러 지식인 인상을 풍기는 혁명가였다. 그런데 미국 언론에 보도된 그의 마지막 사진을 보면, 그는 구레나룻을 말끔히 면도한 모습이었다. 비합법정당인 콜롬비아혁명당을 지도하기 위해 밀림에서 도시로 나갈 때, 군경의 살벌한 검거망을 피하기 위해 면도를 하였다고 한다.


콜롬비아혁명을 가로막는 주범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잘 아는 사실이지만, 미국의 정치적 지배와 군사적 개입은 제3세계의 변혁과 진보를 가로막는 여러 요인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변혁과 진보를 가로막는 최대의 결정적인 요인이다. 이러한 사정은 콜롬비아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콜롬비아혁명무장을 진압하려는 불법적이고 야만적인 술책을 썼다.

미국 군부가 콜롬비아에서 혁명세력을 압살하기 위해 극우민병대를 창설한 때는 1962년이었다. 미국은 이른바 ‘라조계획(Plan Lazo)’에 따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랙(Fort Bragg)에 주둔하는 미국군 특수전부대를 콜롬비아에 밀파하여 콜롬비아군이 극우민병대를 창설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미국 군부의 배후조종으로 창설된 극우민병대는 부패한 콜롬비아군부와 공모결탁하여 양민학살과 마약수출 같은 극악무도한 범죄를 자행하였다. 얼마나 많은 콜롬비아 민중들이 극우민병대에게 학살당했는지 알 수 없으며, 얼마나 많은 콜롬비아산 마약이 해외로 밀수출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미국은 그런 콜롬비아정부에게 2000년 이후 2009년까지 60억 달러를 원조하면서 콜롬비아군을 ‘토벌군’으로 육성하였다. 미국의 무기지원을 받은 콜롬비아군은 2002년부터 콜롬비아혁명무력에 대한 집요한 ‘토벌작전’에 매달렸다.

이 글을 쓰는 오늘도, 미국의 국방부, 국방정보국, 중앙정보국, 마약단속청이 콜롬비아에 밀파한 약 300명의 지휘관들이 배후조종하는 콜롬비아의 군부, 정보기관, 경찰, 그리고 현지에서 날뛰는 미국의 사설무장경비업체들은 반미반정부무장투쟁을 지원하는 민중들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은 미국은 자국군대를 동원하여 콜롬비아혁명무력을 진압하려는 직접개입전략에 따라 2009년 10월 30일 콜롬비아 각지의 군사기지들을 미국군이 언제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미국-콜롬비아 군사협정을 체결하였다.

미국의 그러한 막가파식 무력진압으로 콜롬비아혁명무력은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콜롬비아정부의 추산에 따르면, 2002년 16,000명에 이르렀던 콜롬비아혁명무력이 2011년에 8,000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특히 미국이 ‘토벌군’에게 넘겨준 블랙호크 공격헬기와 야간투시경은, ‘토벌군’이 밀림에서 벌이는 야간작전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작전환경을 조성하였다. 콜롬비아혁명무력 대원들은 공격헬기를 동원한 ‘토벌군’의 야간공습을 격퇴할 대응무기를 갖지 못했다. 7.62mm 기관총, 12.7mm 속사포, 30mm 자동속사포, 70mm 로켓포, 그리고 레이저유도미사일까지 장착하고 시속 278km로 고속비행하는 블랙호크 공격헬기를 소총과 기관총으로 경무장한 콜롬비아혁명무력 대원들이 어떻게 당할 수 있겠는가.


생의 마지막 순간, 눈동자에 비친 여명

콜롬비아 열대밀림에 비가 내리던 2011년 11월 4일, 콜롬비아혁명무력 최고사령관 카노는 공격헬기를 앞세운 ‘토벌군’이 밀영을 기습하였을 때, 공격헬기가 공중에서 난사한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열대밀림에 들어가 혁명의 총을 잡은 날로부터 28년 동안 오로지 콜롬비아혁명을 위해 남김없이 자신을 불태우던 63세 혁명가의 심장은 박동을 멈추었다. 최고사령관 카노와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근위대원 네 명도 그와 함께 전사하였고, 또 다른 근위대원 다섯 명은 ‘토벌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카노는 비록 두 눈을 감지 못한 채 최후를 마쳤지만, 콜롬비아혁명무력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2011년 11월 15일 누리집 <콜롬비아 리포츠(Colombia Reports)>에 따르면, 전사한 카노의 뒤를 이어 티몰레온 히메네스(Timoleon Jimenez)가 콜롬비아혁명무력 제3대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콜롬비아 정부당국은 히메네스에게 117개의 체포영장을 발부하였으며, 미국 국무부는 그를 체포하도록 제보해주는 사람에게 500만 달러를 주겠다고 현상금까지 내걸었다.

44년 전인 1967년 10월 9일 볼리비아의 유로협곡에서 ‘토벌군’ 병력 1,800명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1928-1967)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에게 목숨을 잃었고, 2011년 11월 4일 비 내리는 콜롬비아의 카우카 밀림지대에서 공격헬기를 동원한 ‘토벌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알폰소 카노는 미국 육군 특수전사령부에게 목숨을 잃었다.

38세에 전사한 체 게바라도 두 눈을 감지 못하고 숨졌고, 63세에 전사한 알폰소 카노도 두 눈을 감지 못하고 숨졌다. 1950년대 지리산 어느 이름 모를 골짜기에서 ‘토벌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이 땅의 빨찌산 대원들도 두 눈을 감지 못하고 숨졌다. 생의 마지막 순간, 그들의 눈동자는 어둠을 뚫고 저 멀리 밝아오는 여명을 응시하였을 것이다. (2011년 11월 24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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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3

무상으로 나눠주는 36평형 아파트

진실의 말팔매 <43>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북측의 조선륙일오편집사가 운영하는 포털사이트 '우리민족끼리'에 '영상취재'라는 동영상 게시판이 있다. 거기에 매우 흥미로운 동영상 한 편이 올라있다. 3분 32초짜리 그 동영상은 평양에서 어린 아들 일혁이를 키우는 현희라는 여성이 해외출장 중인 남편에게 새로 입주한 아파트를 보여주고 싶다고 하면서 촬영한 것이다.

물론 그 동영상은 어느 개인이 편집한 것이 아니라, 조선륙일오편집사가 남측 국민들에게 평양시민의 일상생활 중 한 단면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게시한 선전물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여 그 동영상을 시청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동영상은 있지도 않은 것을 꾸며낸 허위선전이 아니라, 지금 실재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실선전이다.

△<우리민족끼리> 동영상에 소개된 새 아파트 전경

그 동영상에 나오는 현희라는 여성이 얼마 전 입주한 새 아파트는 어떻게 생겼을까? 36평(120㎡)형 아파트인데, 방 3개, 욕실 1개, 위생실(화장실) 1개, 거실, 부엌, 발코니로 되어 있다. 동영상에서 보여준 아파트 내부는 편안하고 쾌적해보이는 생활공간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36평형 새 아파트에 무상으로 입주하였다는 점이다. 북측에 있는 모든 주택은 각자 개별적으로 소유한 개인재산이 아니라 전체 인민이 소유한 공동재산이므로, 개인이 영리목적으로 사고 파는 주택상품이 아니라 전체 인민이 공동복리를 위해 나누어쓰는 사회적 재산이다. 그래서 새 아파트를 지으면 지역주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36평형 새 아파트만 무상으로 나누어준 것이 아니라, 그 아파트에 들여놓은 새 가구들까지 무상으로 준 것이다. 어쩐지 북측에서 나온 각종 사진과 동영상에 나오는 가구들은 좀 비슷하게 생긴 듯하다. 그처럼 새 아파트와 새 가구를 무상으로 평양시민들에게 나누어주니, 입주하는 세대는 자기들이 쓰는 가전제품, 부엌 조리기구와 식기 따위만 가지고 들어가 살면 된다.

서울의 주택시장에서 아파트 거래가격은 지역별, 시기별로 변동폭이 크지만, 서울 잠실주공5단지에 있는 36평형 아파트도 평양의 36평형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방 3개, 욕실 1개, 거실, 부엌, 발코니로 되어 있는데, 2011년 11월 21일 현재 11억원에 매물로 나왔다. 서울에 있는 아파트와 평양에 있는 아파트의 가치를 단순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서울과 평양의 주거환경을 비교한다면, 평양시민들은 10억원(90만달러)짜리 새 아파트를 무상으로 받고 있는 것이다.


△북측 언론 보도에 의하면 평양 10만세대 아파트 공사가 외부미장 80%, 내부미장 60%를 끝내고 완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 위 사진은 <로동신문> 20011년 11월 19일 보도사진. 아래 사진은 <우리민족끼리> 2011년 10월 12일 보도사진)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진 것처럼, 지금 평양에서는 10억짜리 아파트 10만세대를 건설하는 대공사가 한창이다. 서울의 아파트 시세로 환산하면, 무려 100조원(900억달러)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대공사다. 또한 평양의 10만세대 아파트에 들여놓을 새 가구의 가격을 서울의 가구시장 시세로 환산하여 한 세대당 100만원이라고 가정하면, 가구값만 해도 1,000억원에 이른다.

그것만이 아니다. 새 아파트 10만세대가 쓸 막대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희천에 대형수력발전소를 건설하였고, 아파트가 완공되면 그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기를 거의 무상으로 공급하게 될 것이다. 발전소와 전기공급체계를 건설하는 비용은 또 얼마나 되는지 산정하기조차 힘들다.

오늘날 지구 위에 크고 작은 나라들이 수없이 많고, 인류역사가 수수천년 이어져왔지만, 그처럼 경이적인 무상주택공급제를 시행하는 나라가 북측 말고 또 어디에 있을까! 쿠바는 1959년 이후 무상주택공급제를 시행해왔는데, 2011년 11월 10일부터 개인들의 주택매매를 허용하는 새로운 법이 발효되었다. 그래서 무상주택공급제를 시행하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북측이 유일무이하다.

2011년 7월 14일 서울의 부동산정보업체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서울에서 18평형 소형아파트 전세보증금은 1억3,710만원이나 하는데,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그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가기 위해 보증금을 마련하려면 한 푼도 쓰지 않고 저축하더라도 꼬박 11년 11개월이 걸린다. 서울에 사는 서민들은 36평형 새 아파트에 살고 싶은 꿈조차 꾸지 못한다.

또한 2010년 3월 23일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서울시 전체 세대 중 26.7%가 전세로 거주하고 있고, 4.8%가 월세로 거주하고 있으며, 자기 집을 소유한 세대는 68.6%인데, 자기 집을 소유한 세대 가운데 31.4%가 평균 1억9,000만원의 대출빚을 갚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찬바람 부는 길거리에 노숙자들이 몰려있고, 지하방, 옥탑방, 쪽방, 만화방, PC방, 찜질방, 고시원, 비닐하우스 같은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살아야 하고, 나날이 오르는 전월세 압박에 집 없는 설움을 겪는 서울시민들에게 10억원짜리 새 아파트를 무상으로 나누어주는 평양의 현실은 정말 꿈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남측에서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북한'과는 너무도 다른 '북한'의 놀라운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혹시 어떤 사람은 위의 동영상에 나온 현희라는 여성의 가족이 특권층에 속하기 때문에 10억원짜리 새 아파트를 무상으로 받은 게 아니냐 하는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북측 현실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빚어낸 불필요한 의혹이다.

물론 평양에 사는 수십만 세대에게 한꺼번에 10억원짜리 새 아파트를 모두 지어줄 수는 없다. 아파트를 건설하는 데 들어가는 막대한 자원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순차적으로 새 아파트를 지어주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10억원짜리 새 아파트를 무상으로 나누어주는 주택배정은 어떻게 처리되는 것일까? 남측에서 새 아파트를 거래할 때 청약자들이 많이 몰리면 제비뽑기를 하지만, 북측에서는 사회적 공헌도가 높은 사람에게 새 아파트를 우선적으로 배정하는 원칙이 시행된다.

사회적 공헌도란 자기의 개인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조국과 인민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한 '노력적 성과'를 측정한 공로지수를 뜻한다. 이를테면, 직장이나 건설장에서 열심히 일하여 뛰어난 생산성과를 이룩한 혁신자, 조국보위 군사복무를 모범적으로 수행한 군인, 과학연구사업에서 공헌한 과학자, 새로운 기술을 창안하여 생산능력을 증대시킨 기술자, 체육활동에서 공을 세운 체육인, 자기 이웃에게 헌신적 사랑을 안겨준 미담의 주역, 문화예술활동의 공로가 있는 문화예술인, 교육사업을 잘한 교육자, 의료사업에서 공로가 있는 의료인, 그리고 열사가족과 영웅가족 등 사회의 각 부문에서 공헌한 사람들이 무상입주자 명단에 든다.
 
하지만 그처럼 조국과 인민을 위해 큰 공헌을 한 사람이 평양에 아무리 많다고 해도, 10만명이 되지는 않을 것이고 아마 1만명 안팎 수준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나머지 9만세대 새 아파트는 어떻게 나누어주는 것일까? 그것도 역시 사회적 공헌도의 순위에 따라 배정된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공헌도 순위가 높은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차츰 순위가 낮은 사람들로 내려가면서 공헌도 순위별로 배정하는 공평성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다. 평양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지방도시의 아파트와 연립주택, 농촌의 단독주택도 공평성의 원칙에 따라 무상으로 나누어준다.

북측에서는 무상주택의 공평한 배정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가 전체 인민의 주거권을 책임적으로 보호해주고 있으므로 북측 인민들 모두가 집 없는 설움을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2011년 11월 21일 북측 언론은 이미 골조공사를 마친 평양의 10만세대 아파트가 외부미장 80%, 내부미장 60%를 끝냈다고 보도하였다. 100조원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새 아파트 10만채의 무상공급이 평양시민들의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 (2011년 11월 22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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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8

대중에게 '진보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변혁과 진보 (55)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예상효과가 감소되었다

이 땅에 변혁과 진보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진보통합정당 건설에 힘써온 민주노동당은 그 동안 앞을 가로막는 난관과 역경을 뚫고 마침내 목적지를 눈앞에 둔 마지막 선을 넘어서고 있다. 그 목적지에서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통합연대는 3자 통합을 실현하게 된다. 

원래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의 3당 합당이 바람직한 목표로 제기되었으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통합규모가 2당1파로 축소, 변형되었다. 그래서 진보통합정당 건설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언론매체들은 2당1파 통합을 '진보소통합'이라 부르고 있다.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통합연대는 진보통합정당 건설을 눈앞에 두고 있다. (<연합뉴스> 보도사진)

3당 합당에서 2당1파 통합으로 축소, 변형되자, 민주노동당이 애초에 예상했던, 진보통합정당 건설이 국민대중에게 주는 예상효과가 다소 줄어들었다. 더욱이 민주당과 '혁신과 통합'이 1당1파 통합을 추진하는 데다가, 느닷없이 안철수 포퓰리즘까지 초대형 태풍처럼 불어닥치는 바람에, 국민과 언론의 관심은 1당1파 통합과 안철수 포퓰리즘의 결합 여부에 쏠리고 있다.

이것은 진보통합정당 건설의 예상효과를 감소시키는 외적 요인들이다.

민주노동당이 통합시기를 놓쳐 통합추진속도가 떨어지는 바람에 정세변화의 주도권이 1당1파 통합과 안철수 포퓰리즘으로 넘어가버렸고, 그래서 현재 상황이 그처럼 불리하게 바뀐 것이다. 정치활동에서 시기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확인하게 된다.

언론매체들이 진보통합정당 건설을 '진보소통합'이라고 평가하는 판에, 진보통합정당을 건설하면 그 당의 대중적 지지기반이 자동적으로 크게 확장되어 행여 2012년에 집권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하는 것은 과대망상이다. 일반적으로 주관이 매우 강한 정치활동가들이 객관적 현실을 자기들의 주관주의 잣대로 재면서 근거 없는 낙관론에 사로잡히는 것은 흔한 일인데, 그런 판단착오는 피해야 한다.

어째든 현재 정치상황이 이전에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바뀌었으니, 진보통합정당 건설의 예상효과에 대해서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재검토할 것인가?


'진보의 능력'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목소리

두말할 나위 없이, 진보통합정당 건설의 예상효과를 대중의 정치적 요구에 근거하여 객관적으로 검토해야 주관주의적 판단착오를 피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2011년 11월 14일 인터넷 언론매체 <미디어오늘>에 젊은 여성기자가 쓴 '진보대통합이 대안이라고? 착각 마세요'라는 제목의 글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진보통합정당 건설에 전심전력해온 민주노동당의 시각에서 보면, 글제목에서부터 도전적인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녀는 진보통합정당 건설만을 염두에 두고 그 글을 쓴 것은 아니지만,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통합연대가 받아야 할 그녀의 지적을 여기에 옮겨적는다.

"야당은 그간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정당을 통합하거나 후보를 단일화하면 그 효과를 톡톡히 누려왔습니다. 선의의 경쟁과 공정한 승복에 유권자들이 감동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과정이 신선한 드라마가 아닙니다. 오히려 선거를 앞두고 벌이는 정치쇼나 계산된 선거공학이라는 느낌만 줍니다. 더 이상 유권자들이 감동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일찌감치 야권은 대통합을 이뤄, 수권능력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유권자들이 진보진영의 능력에 의구심을 품지 않을 겁니다. (줄임) 이제 진보의 능력을 보여주십시오. (줄임) 일찌감치 통합을 마무리하고 고심하며,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그것만이, 저를 포함한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진보 리더십의 꿈을 현실화시켜줄 길입니다."

위의 인용문에 나타난 것처럼, 진보통합정당 건설만으로는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 오늘의 변화된 현실이다. 진보통합정당 건설은 민주노동당이 당의 운명을 걸고 추진해온 자기혁신인데, 이 땅의 대중들은 진보통합정당 건설을 중대하고 소중한 혁신으로 평가해주지 않고, 선거 직전에 표심을 의식한 정치권의 상투적 변신행위와 같은 것으로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민주노동당이 대중의 그런 과소평가가 진보통합당 건설에 대한 오해라고 해명할 수도 없고, 설령 해명해봐야 소용이 없다.

그런데도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통합연대는 대중의 그런 과소평가를 무딘 촉각으로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위의 인용문에 나타난 것처럼, 대중은 새로 건설될 진보통합정당에게 '진보의 능력'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데,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통합연대는 대중의 그런 요구에 부응할 어떤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일까?

진보정치활동가들에게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진보정치는 소수 진보적 지식인들의 현학적 토론에 의해서 규정될 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대중 자신의 사회정치적 요구에 의해서, 오직 그것에 의해 규정될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진보정치는 오롯이 대중의 것이어야 하므로, 이제 새로운 진보통합정당을 건설하는 모든 주체들은 '진보의 능력'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대중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대중에게서 실력을 인정받는 길

대중이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진보의 능력'이란 새로 건설될 진보통합정당의 실력을 뜻한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진보통합정당의 실력은 일차적으로 집권능력으로 표현되는 것이고, 집권 뒤에는 통치능력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진보통합정당의 통치능력은 집권 이후에 요구되는 것이므로, 아직 한 번도 집권해보지 못한 그 당에게 통치능력을 보여달라고 하면,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새로 건설될 진보통합정당이 실력을 보여달라는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려면 자기의 집권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누구나 예상하는 것처럼, 새로 건설될 진보통합정당이 집권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정치쇼'가 아니라, 정권교체기에 조성되는 복잡한 정치정세 속에서 대중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는 것이다. 수구정당은 표심을 얻기 위한 '사탕발림 정치쇼'를 벌여 대중을 미혹하지만, 진보정당은 자기의 강령에 따른 책임적인 정치활동으로 실력을 인정받는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두 가지 주체적 조건을 논할 수 있다. 
 
첫째, 안철수 포퓰리즘을 넘어서는, 그리고 안철수 포퓰리즘과 전략적으로 차별화된 진보담론을 내올 필요가 있다. 보나마나 안철수 포퓰리즘에는 대중을 미혹하는 사탕발림식 복지담론이 넘쳐나게 될 것이다.

△2011년 11월 15일  경기도 수원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으로 안철수 원장이 출근하자 취재진들이  보유주식 사회환원과 정치 행보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안 원장은 이번 1500억원 상당의 기부는 당연한 일 일뿐이라고 짧게 입장을 밝혔다. (<연합뉴스> 2011년 11월 15일 보도사진)

새로 건설될 진보통합정당은 포퓰리즘 복지담론을 넘어서는 진보적 민주주의의 본태를 담론화하여 대중에게 제시해야 할 것이다. 새로 건설될 진보통합정당이 담론에서 포퓰리즘에게 밀리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담론전파에서 주도권을 잃지 말아야 한다.

포퓰리즘 복지담론을 넘어서는 진보적 민주주의의 본태란 무엇일까? 좀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실업고통, 빈부격차, 범죄공포, 자살비극이 사라진 참으로 살맛나는 새로운 사회상이다. 새로 건설될 진보통합정당이 대중에게 집권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당면임무는, 대중이 꿈꿔온 새로운 세상을 희망의 언어로 담론화하는 것이다.

둘째, 진보통합정당 건설을 가속적으로 밀고 나가 이른 시일 안에 완결하고, 가장 중요한 대중정치활동에 매진할 필요가 있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관심과 지지를 받는 정당이 집권할 수 있다는, 누구나 알고 있는 진리는 정당의 대중정치활동에 의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새로 건설될 진보통합정당은 진부한 방식의 대중정치활동을 반복할 것이 아니라 진보정당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특유한 대중정치활동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야 수구정당, 중도정당, 안철수 포퓰리즘을 모두 앞질러, 대중에게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특히 대중에게 호감을 주는 유능한 정치인을 대중정치활동을 통해 내세울 필요가 있다. 대중들은 정치이념이나 정당을 바라보는 것보다도 정치인을 먼저 보고 판단하는 것에 익숙하다.

새로 건설될 진보통합정당이 대중에게 실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주체적 조건을 조성하는 것과 더불어 객관적 조건에 대응하는 것에도 힘써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객관적 조건이란, 수구정당, 중도정당, 안철수 포퓰리즘이 도저히 대응할 수 없을만큼 강력한 정세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을 뜻한다.
 
정세변화들 가운데는 대중투쟁 폭발도 있지만, 2012년에 가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선거열풍이 이 땅에 몰아칠 것이므로 강력한 대중투쟁이 2012년에 폭발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남측에서 대중투쟁이 폭발할 가능성보다는 북미관계에서 격동적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보인다.

미국은 자기들이 개입할 남측 선거국면에 북미관계의 변화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을 우려하여 북미관계 변화의 양상과 속도를 자기들의 이익에 맞게 조절하려고 기도하겠지만, 북측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북미관계에서 변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쪽은 북측이다. 북측이 남측 선거국면에 영향을 주기 위해 북미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북측이 주도하는 북미관계 변화가 남측 선거국면에 영향을 주는 것은 불가피하다.

2012년에 북미관계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 그 변화는 미국이 한반도에 조성한 군사적 긴장이 감소되고, 북측의 요구에 따라 공고한 평화체제를 세우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 건설될 진보통합정당은 북미관계의 그런 변화방향에 맞춰 남북관계를 평화와 통일로 이끌어갈, 이전보다 더 진전된 평화담론과 통일담론을 대중에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2011년 11월 18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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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6

사랑과 행복의 미래로 가는 의자차

진실의 말팔매 <42>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발행되는 <로동신문>에는 '독자의 편지'라는 제목의 독자투고란이 있다. 북측 각지에서 인민들이 <로동신문> 편집국에 보내온 편지글 형식의 갖가지 사연이 부정기적으로 거기에 실린다.

그 독자투고란을 읽으면 북측 인민들이 살아가는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탈북자들과 고정간첩들이 악의적으로 꾸며내는 괴담과 헛소문을 듣고 헷갈릴 것이 아니라, '독자의 편지'를 읽어야 북측 사회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물론 '독자의 편지'에 실리는 이야기는 읽는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미담들이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나 자식이 없이 사는 노인내외를 성심껏 돌보는 사랑의 이야기, 인민군대에 복무하던 중 사고로 장애인이 되어 살아가는 영예군인을 자기 가족처럼 돌보는 사랑의 이야기 같은 갖가지 감동적인 사연을 읽을 수 있다.

살인, 강도, 사기, 성폭행, 마약, 자살, 부정비리 같은 사건보도로 넘쳐나는 남측 신문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남측 일간지들에도 '독자투고란'이 있지만, 거기에는 언론매체가 보도하지 않은 사실을 해명하거나 폭로하는 글, 투고자 개인의 주장과 견해를 밝히는 글, 잘 알려지지 않은 생활정보를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글 등이 실린다.

2011년 10월 28일 <로동신문> '독자의 편지'에는 사리원시 은덕동 12인민반에 사는 리춘희 여성이 쓴 편지가 실렸다. 그녀는 앞을 못보는 특류영예군인인데, 옆동네에 사는 리명희 여성과 그 가족이 10여 년 전부터 리춘희 여성을 돌봐주어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그 편지에 담겨있다.

그와 함께, 눈길을 끄는 보도사진 한 장이 실렸는데, 그 보도사진에는 영예군인을 "친혈육의 정으로 돌봐주고 있는 강계시 상업관리소 일군들과 종업원들"이 강계시 외룡동에 사는 최성상 영예군인의 집에서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그의 손을 잡고 찍은 온정어린 모습이 담겼다.

그 날, <로동신문>에 실린 '독자의 편지'와 '보도사진'도 감동적이었지만, 그보다 더 진한 감동을 안겨주는 보도기사로 실린 사연 한 편이 읽는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들었다. 여기 그 사연을 전한다.

평양에 있는 동안중학교(남측에서는 중고등학교)에서 내일의 푸른 꿈을 꾸며 함께 공부하던 청춘남녀가 있었다. 학창시절에 축구를 잘했던 오철진과 손풍금 연주와 노래를 잘했던 고혜숙이 그들이다. 북측의 모든 중학교 졸업생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 두 청춘남녀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인민군에 입대하여 각자 조국보위초소에 섰다.
  
그런데 군사복무 중이던 고혜숙이 뜻밖의 사고로 심한 부상을 입었다. 21살의 꽃다운 처녀가 입은 치명적인 부상은 너무도 가혹하였다. 그녀는 흉추 및 요추 압박골절로 영영 일어서지 못하는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된 것이다.

하반신이 마비된 장애인들이 타는 삼륜차에 실려 특류영예군인 제대증을 받고 집에 돌아가던 날, 그녀는 이 땅의 모든 처녀들이 갖고 싶어하는 꿈과 희망을 고이 접으며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 날 이후 그녀의 두 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아침 하반신이 마비된 자기 몸을 삼륜차에 싣고 김일성 주석의 영상을 형상화한 모자이크벽화를 찾아가 그 주변을 알뜰하게 가꾸었고, 기회가 올 때마다 평양의 여러 건설현장들을 찾아가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자기 두 손으로 바퀴를 돌려 건설현장에 찾아온 그녀가 삼륜차에 앉아 부르는 노래는 근로자들의 마음을 흔들어주는 감동의 선율이었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비장애인들보다 더 활기차게 살아가는 그녀의 삶을 높이 평가한 당조직은 그녀가 평양연극영화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도록 추천해주었다. 

고혜숙이 특류영예군인으로 그처럼 소중한 삶을 살아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의 집안은 '군인가정'이었다. 제대군인인 그녀의 아버지는 자기의 두 딸과 막내아들에게 군복을 입혀 모두 초소에 세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 앞에 문득 낯익은 얼굴의 병사가 나타났다. 군대에서 휴가를 받고 집에 왔던 길에 그녀에게 달려간 중학교 동창생 오철진이었다. 오랜만에 반갑게 만나야 할 상봉이었건만,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는 모습으로 그 앞에 나서야 하는 고혜숙의 마음은 괴로왔고, 무릎걸음으로 자기를 맞아준 그녀 앞에서 오철진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조국보위에 두 다리를 바친 뒤에도 시련을 딛고 일어서 훌륭히 삶을 살아온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묵묵히 들으며 오철진은 뜨거운 것을 삼켰다.

휴가를 마치고 부대에 돌아간 오철진의 눈가에는 고혜숙의 모습이 영영 지워지지 않았다. 그가 고혜숙에게 편지를 쓰는 날이 차츰 많아졌다.

오철진이 제대를 앞두고 있었던 어느 날, 그의 부모는 자기 아들이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편지에는 고혜숙과 일생을 함께하겠다고 결심한 오철진의 절절한 마음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결코 아무나 쉽게 내릴 수 없는 결정이었다.

오철진은 자기의 뜨거운 마음을 담은 편지를 고혜숙에게 보냈다. 그러나 고혜숙은 그의 청혼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오철진이 이 땅을 두 발로 걷는 다른 어엿한 여성과 만나 결혼하는 것이 그녀가 그에게 바라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와 일생을 함께하기로 마음을 굳힌 오철진은 그녀로부터 거절을 당했다고 해서 돌아설 사람이 아니었다. 제대한 뒤에 집에 돌아간 오철진은 거의 매일같이 고혜숙의 집을 찾아갔다.

조국보위의 길에 자신의 두 다리를 바친 고혜숙이 무릎걸음으로 걸어가는 한 생에 안겨주려는 순결한 사랑이 그의 발걸음을 그녀의 곁으로, 아니 그녀의 마음 속으로 이끌어갔다.

오철진의 부모가 오철진을 앞세우고 고혜숙의 집에 처음 들어선 날, 무릎걸음을 하는 딸의 모습을 보며 고혜숙의 부모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무릎걸음으로 다가서는 고혜숙의 두 손을 와락 부여잡은 오철진 어머니의 따스한 목소리가 들렸다.

"혜숙이 어머니, 우리 부부나 철진이의 결심이 단순히 동정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랍니다. 한 영예군인이 한생토록 피워가야 할 꽃이 소중하기에 물러설 수 없는 것입니다. 혜숙이가 계속 피워가는 혁명의 꽃이 사회와 집단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우리 장군님께 기쁨을 드리게 된다면 더 바랄게 없습니다."
 
△행복한 삶을 열어가는 오철진, 고혜숙 부부 (<통일신보> 2011년 10월 29일 보도사진)

오래도록 참았던 울음이 끝내 터져나왔다. 기쁨의 웃음보다 더 뜨겁고 더 진실한 사랑과 행복의 울음이었다.

지금 고혜숙은 자기 두 손으로 바퀴를 돌리는 삼륜차를 더 이상 타지 않는다. 자기의 남편, 아니 자기의 영원한 길동무인 오철진이 뒤에서 밀어주는 의자차(wheelchair)를 탄다. 그들의 의자차는 사랑과 행복의 미래로 가고 있다. (2011년 11월 16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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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1

국유기업과 문화개혁, 자강사약에 제동을 거는가?

변혁과 진보 (54)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전환경제가 아니라 혼합경제다

2009년 7월 중국 주간지 <남방주말(南方周末)>은 중국공산당 조직부가 주도하여 세계 100여 개 나라들에 있는 127개 공산당들의 실태를 조사한 보고서에 관해 보도하였는데, 그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127개 공산당 가운데 집권하였거나 또는 원내진출에 성공한 공산당은 25개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유명무실한 공산당이며, 자본주의가 강해지고 사회주의가 퇴조하는 자강사약(資强社弱)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제국주의경제침탈의 첨병들인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orld Bank)은 자강사약 현상이 나타난 나라를 '체제전환국가'라고 명명하고, 세계적으로 33개 나라가 '체제전환국가'라고 밝혔다.

그들이 말하는 점진적 체제전환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경제체제의 성격변화인데, 그들은 '체제전환국가'의 경제체제가 지닌 성격을 '전환경제(transitional economy)'라고 규정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전환경제'란 사회주의계획경제가 자본주의시장경제로 전환되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 경제라는 뜻이다.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이 지목한 '체제전환국가' 33개국들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은 1997년 10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경제건설'을 강령으로 채택하였는데, 중국 특색이란 시장경제의 수용을 뜻한다.

중국이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경과를 개괄하면, 30년 전 처음으로 자본주의시장경제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여 이전의 전민소유제 기업을 개편하였고, 1984년에 계획적 상품경제를 공식화하였고, 1993년에 사회주의시장경제를 본격적으로 추구한 결과, 의료시장은 1992년부터, 주택시장은 1998년부터 생겨났다.

그 여세를 몰아 중국은 2001년에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였고, 2004년에는 자국의 자본시장을 발전시키기 위한 조치를 발표하고, 국유화된 상업은행을 주식제 상업은행으로 전환시켰다.

△중국 경제의 상징 상하이 푸둥지역.

중국에서 시장경제의 수용은, 서방의 시장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본주의체제로 전환하는 것일까? 중국의 사회주의시장경제는 사회주의계획경제가 자본주의시장경제로 전환되는 과도기적 경제가 아니라, 그 양자의 혼합체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의 사회주의시장경제는 혼합경제(mixed economy)다. 정부의 거시경제적 통제에 따라 자원분배에서 시장의 기초적 작용을 허용하면서도, 국유기업경영체계를 운영한다는 점에서 혼합경제인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얼마 전 강령을 개정하면서 경제강령에 혼합경제를 명시하였지만, 아래 정보를 읽어보면 진보적 민주주의가 혼합경제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민주노동당이 자기 강령에 우리식의 독창적인 경제개념을 창안, 도입하지 못하고 기존 경제개념인 혼합경제를 모방적으로 서술한 것은 오류였다.


중국 국유기업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

중국의 사회주의시장경제가 전환경제인가 아니면 혼합경제인가를 판단하는 객관적 근거는 중국의 국유기업에서 찾아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아래 정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중국의 사회주의시장경제에서 국유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이다. 2011년 11월 3일 중국기업연합회와 중국기업가협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매출액을 기준으로 선정한 중국의 500대 기업에서 국유기업은 316개, 사유기업은 184개다.

또한 그 500대 기업의 매출액에서 국유기업은 83%, 사유기업은 17%를 차지하였고, 자산총액에서 국유기업은 90%, 사유기업은 10%를 차지하였고, 순이익에서 국유기업은 82%, 사유기업은 18%를 차지하였다.

국유기업은 금융, 석유화학, 통신, 운수 등 중요산업부문에 걸쳐있으며, 사유기업은 정보기술부문, 유통부문, 부동산부문 등에 걸쳐있다. 이러한 통계자료는 중국이 시장경제를 받아들였어도 중요산업은 여전히 국유화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국유화 문제에서 기업(생산수단)의 소유관계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업의 경영체계도 중요하다. 사회주의식으로 경영되는 국유기업이라야 진짜배기 국유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국유기업은 어떻게 경영되고 있을까? 국무원 산하 국유자산관리감독위원회가 국유기업을 관리하고, 중국공산당 당원들이 국유기업을 현장에서 직접 경영한다. 정부기관이 관리하고 공산당 당원들이 경영한다는 사실만 보면, 중국의 국유기업에 사회주의식 경영체계가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의 국유기업경영체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딴판이다. 

첫째, 중국의 국유기업은 정부기관이 작성한 계획경제에 따라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경제원리에 따라 운영된다. 중국 정부의 거시경제적 통제란 국가경제의 발전계획을 뜻하는 것이지 국유기업의 계획경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시장경제에 대한 '적응'에 실패하고 도산하는 국유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2011년 3월 4일 차이지밍 전국정치협상회의 위원이 발표한 '국유기업의 현황과 개혁'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 따르면,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중국 국유기업의 순수익률은 -6.2%였다. 2002년부터 2009년까지 지방정부가 운영하는 국유기업은 해마다 평균 5,000개씩 도산하였다. 사회주의시장경제에서는 거대국유기업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중국에서 자본주의식으로 경영하는 시장화된 국유기업들이 출현하였다. 2010년 말 현재 증시에 상장되어 사실상 시장화된 국유기업은 336개다.

넷째, 국유기업이 납부하는 국가배당금이 중국 인민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있다. 중국에서 석유화학, 통신, 담배부문의 국유기업은 매출의 15%를 국가배당금으로 납부하고, 무역, 건설, 광산, 철강부문의 국유기업은 매출의 10%를 국가배당금으로 납부하고, 국방공업부문의 국유기업은 매출의 5%를 국가배당금으로 납부한다.

그런데 그 기업들이 납부한 국가배당금은 어디에 쓰이는가? 중국 농촌인구의 80%인 9억명, 중국 도시인구의 45%인 4억명이 의료보험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국가배당금이 중국 인민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다섯째, 중국의 국유기업에서 경영자와 노동자의 임금격차가 최대 128배나 된다. 임금격차가 벌어지는 것만 문제가 아니라, 국유기업 경영자가 저지르는 부정부패도 큰 문제다. 이른바 권력형 부정부패가 그것이다.

2010년 한 해 동안 중국에서 기율위반으로 처벌된 관리는 14만6,517명이고, 그 가운데 5,373명이 형사처벌을 받았다. 처벌된 관리들 가운데 국영기업 경영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중국 국유기업의 임금격차와 부정부패야말로 중국의 국유기업경영체계가 비사회주의적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중국의 국유기업경영에서 나타난 심각한 결함과 병폐를 해결하기 위해, 2009년 7월 12일 중국 공산당중앙위원회 판공청과 국무원 판공청은 국유기업 경영자가 중대한 정책결정, 인사권 행사, 자금이동, 연봉책정을 할 때는 반드시 유관기관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해마다 해외예금상황, 부동산보유상황, 주식투자상황, 배우자 및 자녀의 직업과 출입국 등에 관해 보고하도록 요구한 '국유기업청렴복무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였다.

중국의 사회주의시장경제를 이끌어 가는 국유기업들이 소유관계만 사회주의적일 뿐 경영체계는 비사회주의적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하여, 오늘 중국은 극심한 빈부격차의 고통을 겪고 있다. 

2011년 10월 현재 중국에서 100만 달러 이상의 자산을 가진 부유층은 101만7,000명이고, 5,000만 달러 이상의 자산을 가진 최고부유층은 5,400명이고, 10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가진 대부호는 146명이다. 중국의 상위 10% 부유층과 하위 10%의 빈곤층의 소득격차는 40배에 이른다. 그 격차는 5년만에 32배에서 40배로 늘어난 것이다.

중국의 400대 부호들 가운데 땅투기로 돈을 긁어모은 부동산기업가가 154명이다. 또한 증권업계 종사자와 생산직 노동자의 임금격차는 최대 15배로,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미국에서는 상위 5% 부유층이 미국 전체 부의 60%를 차지한 데 비해, 중국에서는 상위 1% 부유층이 중국 전체 부의 41.4%를 차지하였다. 이것은 중국의 빈부격차가 미국의 빈부격차보다 훨씬 더 심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중국공산당의 문화개혁과 당원대중


2011년 10월 15일부터 18일까지 진행된 중국공산당 17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에서는 '문화체제개혁을 심화하고 사회주의문화 대발전과 번영을 촉진하는 중대문제에 대한 결의'가 채택되었다. 중국공산당이 문화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2011년 10월 열린 중국공산당 17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에서 호금도, 오방국, 온가보, 가경림, 리장춘, 습근평, 리극강, 하국강, 주영강이 주석대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 ( <신화통신> 보도사진) 

그리하여 2012년 1월 1일부터 중국 34개 위성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저질 오락방송이 126개에서 9개로 줄어들고, 그 대신 보도, 경제, 문화, 과학, 도덕, 법률에 관한 새로운 방송순서를 진행하게 된다.

중국공산당이 추진하는 문화개혁은 중국 인민들의 사상정신활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언론부문, 공연부문, 출판부문에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시장주의자들이 터무니 없이 비난하는 것처럼, '언론의 자유'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자강사약 현상을 막기 위한 중국공산당의 정당한 조치다.
 
오늘날 중국 사회를 위협하는 타락, 부패, 불안정이 배금주의와 향락주의의 병폐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의 사상정신적 뿌리는 어디까지나 개인주의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집단의 이익을 해친다는 범죄적 의미에서 말하는 개인주의다.

돌이켜보면,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기 이전의 중국 사회에는 원래 집단주의가 지배적이었다. 집단만 인정하고 개인은 무시한다는 식으로 시장주의자들이 왜곡해버린 뜻이 아니라, 개인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더 중시한다는 뜻으로 말하는 집단주의다.

그러므로 중국이 겪고 있는 타락, 부패, 불안정의 근본원인은, 다른 자본주의나라들에서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주의가 만연한 사상정신적 혼란에서 찾아야 한다. 중국공산당이 그런 사상정신적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화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문화개혁이란 집단주의 대 개인주의의 사상전이므로, 개인주의를 퇴치하고 집단주의를 복원할 사상정신적 역량이 준비되어야 사상전에서 이길 수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 역량의 실체는 중국공산당 당원대중이다. 문화개혁의 성패는 그들 당원대중에게 달려있다. 이와 관련하여 아래 정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2010년 말 현재, 중국공산당 당원은 8,026만9,000명이다. 당시 중국 인구가 13억3,972만명이었으므로, 중국공산당 당원의 비율은 중국 인민 17명당 1명이다. 총인구에 대비한 당원 비율이 그처럼 높다는 사실은 문화개혁의 밝은 전망을 열어준다. 그런데 중국에는 공산당 당원보다 기독교인이 더 많다. 비공식통계에 따르면 중국의 기독교인은 1억2,500만명이나 된다.

둘째, 중국공산당의 사회계급적 토대가 중요하다. 중국공산당 당원구성을 보면, 농어민 2,442만7,000명(30.43%), 은퇴자 1,485만2,000명(18.50%), 기업관리직 및 전문기술자 1,084만3,000명(13.50%), 노동계급 698만9,000명(8.71%), 당정기관 공직자 681만2,000명(8.49%), 대학생, 실직자를 비롯한 기타 1,634만6,000명(20.37%)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공산당은 노동계급의 당이므로 중국공산당 당원구성에서 노동계급의 비율이 높아야 정상인데, 노동계급의 당원비율이 10%도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중국공산당이 추진하는 문화개혁이 당원대중들이 자발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먹이는 일방통행식으로, 그래서 형식적으로 추진될 위험이 있음을 예시한다.
  
셋째, 당원대중이 문화개혁의 주체로 나서려면, 평소에 집단주의 정신으로 교양을 잘 받아야 한다. 중국공산당 당원들은 어떻게 훈련과 교육을 받고 있을까? 그들은 매달 기층당조직이 진행하는 당활동에 참가하고, 당원교육을 받거나, 혁명사적지를 단체로 관람하거나, 생산현장을 지원하는 활동에 참가한다. 외부에서 중국공산당 당원교육의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좀 허술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넷째, 중국공산당 당원들 가운데서도 중간간부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는 2010년 7월부터 2012년 상반기까지 당과 정부의 국장급 청년간부 4만여 명에게 강도높은 혁명운동 체험교육을 실시하는 중이다. 이러한 중간간부 교육사업은 중국공산당이 추진하는 문화개혁의 밝은 전망을 열어준다.

위에서 논한 내용을 종합하면, 오늘날 중국에서 자강사약에 제동을 거는 결정적인 요인은 국유기업이 아니라 문화개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추진하는 문화개혁은 자약사강의 돌파구를 얼어놓을 수 있을까? (2011년 11월 11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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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9

25만 개의 수갑과 300대의 전차

진실의 말팔매 <41>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991년 8월 19일 오전 7시 소련군 제4수비대 칸테미로브스카야 전차사단 소속 T-80 전차들과 제2수비대 타만스카야 기계화보병사단 병력이 모스크바 중심부에 전격 진입하였다. 세계사에 '8월 정변(Avgustovsky Putch)'으로 기록된 사건이었다. '8월 정변'은 소련을 와해시키려는 당시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쵸브(Mikhail Gorbachev)와 인민대표회의 의장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의 책동을 막으려는 마지막 시도였다.

△1991년 8월 19일 모스크바 붉은광장에 진입한 소련군 전차 부대.

1991년 8월 4일 고르바쵸브는 가족과 함께 흑해 크리미아반도 최남단의 휴양지 포로스(Foros)에 있는 여름별장(dacha)으로 휴가를 떠났다가 8월 20일에 모스크바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가 휴가를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가면, 소련을 해체하고 독립국가연합으로 전환하기 위한 이른바 '신연방협정(New Union Treaty)'에 서명하기로 되어 있었다. 고르바쵸브의 '신연방협정' 서명은 사실상 소련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었다.

소련의 와해를 막기 위한 마지막 비상책은 무력을 동원한 정변밖에 없었다. 정변으로 소련을 살려내자는 데 의기투합한 최고위관료 8명은 부통령 게나디 야나예브(Gennady Yanayev), 총리 발렌틴 파블로브(Valentin Pavlov), 국가안전부(KGB) 의장 블라디미르 크류취코브(Vladimir Kryuchkov),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브(Dmitiry Yazov), 내무장관 보리스 푸고(Boris Pugo), 당중앙위원회 국방담당위원 올레그 바클라노브(Oleg Baklanov), 농민동맹 의장 바실리 스타로두브체브(Vasily Starodudtsev), 국영기업연합 의장 알레산드르 티쟈코브(Alexandr Tizyakov)였다.

그들은 국가비상위원회(GKchP)를 구성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모스크바 주요거점들을 점거하고, 국정을 장악할 정변계획을 세웠다.

예컨대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세계 각국의 친미군부세력을 배후조종하여 반미자주정권을 무너뜨리는 무장반란을 위한 기술과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당시 국가비상위원회를 구성한 최고위관료 8명은 정변에 대해 말로만 들어보았을 뿐이었으므로 허술하게 사전준비를 하였다. 바로 이것이 '8월 정변'이 실패한 결정적인 요인이다. 

첫째, 1991년 8월 18일 국가비상위원회는 국방차관 발렌틴 바레니코브(Valentin Varennikov),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원 올레그 쉐닌(Oleg Shenin), 당중앙위원회 국방담당위원 올레그 바클라노브, 당중앙위원회 총국장 발레리 볼딘(Valeriy Boldin)을 흑해 휴양지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는 고르바쵸브에게 급파하였다. 고르바쵸브에게 대통령직을 사퇴하라고 권고하기 위해서였다.

정변을 하루 앞둔 긴박한 시각에 축출대상을 찾아가 사퇴를 권고하다니, 정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한심한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르바쵸브는 자기에게 찾아와 대통령직 사퇴를 점잖게 권고한 그들 앞에서 '별 미친 놈들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너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짓을 해라, 빌어먹을 놈들아!"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둘째, '8월 정변' 첫째날, 국가안전부 요원들이 모스크바에서 체포한 사람은 고작 네 명이었다. 국가비상위원회는 정변을 일으키기 직전, 소련을 와해시키려는 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25만 개의 수갑과 30만 개의 죄수복을 공장에 주문하였고, 체포한 자들을 수감하기 위해 모스크바 근교의 레포르토브 구치소를 비워두었다. 그런데 겨우 네 명을 체포하다니, 정변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변이었다.

셋째, '8월 정변'의 성패를 좌우할 결정적인 계기는 소련을 와해시키려는 수괴들인 고르바쵸브와 옐친을 전격 체포하는 것이었다. 국가안전부 요원들은 흑해 연안 휴양지에 머물던 고르바쵸브를 가택연금하였으나, 옐친을 체포하지 않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옐친은 정변이 일어난지 두 시간만에 모스크바 중심부에 있는 의사당으로 들어가 '8월 정변'을 좌절시키려고 날뛰었다.
  
국가비상위원회는 정변을 개시하자마자 의사당부터 점거하고 축출대상을 체포하여야 정변을 성공시킬 수 있었으나, 정변을 어떻게 끌어갈지 몰라 우유부단하다가 반격을 받고 말았다. 당시 상황은 이러하였다.

국가비상위원회는 1991년 8월 20일 오후에 가서야 특수전부대, 공수부대, 경찰특공대, 내무군병력, 3개 전차대대, 1개 공격헬기 부대를 동원한 '우레작전(Operation Grom)'을 시작하였다. 장갑차를 타고 출동한 병력이 의사당에 이르렀을 때는 고르바쵸브와 옐친을 지지하는 군중들이 이미 의사당을 에워싸고 '인간방패'를 형성하고 있었다.

현장지휘관들은 유혈사태를 우려한다고 국가비상위원회에 보고하고, 공격명령을 집행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면서 대치하였다. 하지만, 의사당 공격명령을 받은 현장지휘관들이 유혈사태를 우려한다는 소리는 거짓말이었다.

2011년 8월 20일 러시아 일간지 <리아노보스티> 가 보도한, 당시 공수부대 지휘관으로 의사당 공격명령을 받았던 바벨 그라체브(Pavel Grachev)의 체험담을 읽어보면, 현장에 출동한 군지휘관들은 이미 옐친에게 정신적으로 굴복하였기 때문에 공격명령을 집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사정을 간파한 옐친은 버젓이 의사당 밖으로 나오더니 현장에 배치된 전차에 기어올라 자기를 지지하는 군중들에게 선동연설을 하는 기괴한 장면까지 연출하였다. 여기에 실은 현장사진은 어쩔줄 몰라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은 전차병 옆에서 옐친이 선동연설을 하는 장면을 찍은 것이다. 이 현장사진은 '8월 정변'의 실패와 소련의 와해를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1991년 8월 20일 탱크에 올라타 연설을 하는 옐친과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은 전차병.

그런데 만일 '8월 정변'이 성공하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8월 정변'의 성공은 소련의 와해시각을 뒤로 좀 늦출 수는 있었겠지만 와해를 막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소련 인민들의 사상이 약화, 변질되어 사회주의체제를 수호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련 인민들이 지키려고 하지 않는 체제를 8명이 25만 개의 수갑과 300대의 전차로 지키려고 애쓴 마지막 시도는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 천 년을 헤아리는 인류사에서 최초의 강력한 사회주의공화국으로 등장하여 진보적 인류에게 한때 사회변혁의 희망을 안겨주었던 소련은 그처럼 어이없게 와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8월 정변'을 일으킨 국가비상위원회 성원들은 전원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하였고, 몇 년 뒤에 석방되었다. '8월 정변'이 실패한 때로부터 6년이 지난 1997년 10월 7일 러시아 <이타르타스통신>은 당시 소련 국방장관으로 정변을 주도한 드미트리 야조브가 그 해 7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을 받고 평양을 방문하였다는 기사를 실었다.

1997년 7월 야조브가 가족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기 위해 탑승한 고려항공 여객기에 나도 타고 있었다. 그 여객기가 평양비행장에 착륙하였을 때, 탑승객들에게 자리에 앉아 기다려달라는 기내방송이 흘러나왔다.

탑승객들은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해, 창 밖에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잠시 후, 서양노인 한 사람과 가족 일행이 비행기에서 내리는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를 영접하기 위해 검은색 리무진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고, 북측 관리들이 그를 맞이하는 모습도 멀리서 보였다.

탑승객들 가운데 누군가가 "야조브가 왔구만"하고 말하는 통에 나는 그 서양노인이 야조브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무렵 러시아 정세에 어두웠던 나는 야조브가 러시아 사람이라는 것만 눈치챘을 뿐 그 이상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라를 다 망쳐놓고..쯪쯔"하며 혀를 차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내 귓전을 때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았더니, 놀랍게도 20대 초반의 아리따운 고려항공 여승무원이 탑승객들 틈에서 창 밖으로 환영행사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야조브가 누구이며, '8월 정변'이 왜 실패했는지를 퍽 시간이 흘러 나중에 알게 된 나는 고려항공 여승무원의 당당한 목소리를 영영 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당당한 목소리는 사회주의체제가 와해되는 것을 막지 못한 소련 인민들에게 보내는 북측 인민들의 질책으로 들렸다.

1997년 여름 <고난의 행군>으로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던 북측 인민들은 사상 최대의 시련기를 헤쳐가고 있었지만, 자기 체제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은 그 어떤 혹독한 시련으로도 꺾을 수 없었다.

고려항공 여승무원의 당당한 목소리를 충격 속에서 들은 나는 "앞으로 6개월 안에 북한도 소련처럼 무너진다"고 떠들던 '북한붕괴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유언비어인지 알게 되었다. 1997년 8월에 집필한 나의 글 '최근 북(조선)의 정세관과 정세대응에 대한 담론 분석'은 고려항공 여승무원의 당당한 목소리를 충격 속에서 듣고 '북한붕괴설'을 허구성을 폭로하기 위해 쓴 것이다. (2011년 11월 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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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4

새로운 민주공화국 건설과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

변혁과 진보 (53)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민주공화국의 통치형태에 관한 역사학계의 논쟁

언론보도를 통해 것처럼,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개발 공동연구진이 작성한 중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놓고 역사학계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주요쟁점은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진 40년 동안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는가 아니면 독재가 자행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수구파는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는 궤변을 늘어놓았고, 중도파는 독재가 자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논쟁은 단순히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 관한 역사학계의 내부논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논쟁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외면할 수 없는 정치문제다.

아쉬운 것은, 그 논쟁이 수구파와 중도파의 어설픈 논쟁으로 지속되는 통에 정작 진보파가 끼어들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언론매체들은 '보수 대 진보의 논쟁'이 벌어졌다고 보도하였으나, 그것은 언론매체들이 보수와 진보라는 통속적 유행어를 습관적으로 들고나와 논쟁에 혼란을 부채질한 것이다.

△2011년 10월 28일 4. 19혁명기념도서관에서 열린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이론, 헌법, 역사'토론회에서 수구파와 중도파 학자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2011년 10월 28일 보도사진)

이론적 정합성을 가지고 민주주의와 독재에 관한 논쟁을 제대로 하려면, 우선 국체와 정체를 헷갈리는 인식의 혼동을 피해야 한다. 국체는 국가형태를 뜻하는 것이고, 정체는 통치형태를 뜻하는 것이다. 국가형태와 통치형태를 혼동하면 민주주의와 독재에 관한 논쟁이 오리무중에 빠진다.

서구정치학 이론에서 국가형태를 구분할 때, 공화국과 입헌군주국으로 나누는 오래된 관행이 있다. 이를테면 프랑스, 미국, 독일 같은 나라들이 대표적인 공화국들이고, 영국, 스페인, 일본 같은 나라들이 대표적인 입헌군주국들이라는 식이다.

그런 식의 고전적 분류법이 오류는 아니지만, 변화발전된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19세기에나 통했던 낡은 인식이다. 20세기를 지나 어느덧 21세기로 넘어가고서도 10년을 더 보낸 오늘, 현실 속에 존재하는 국가형태를 19세기식 낡은 분류법으로 파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19세기에 출현한 세계 각지의 공화국들이 20세기 100년 동안 급속히 진척된 사회역사발전에 따라 다양하게 변모되었기 때문이다.

세계 각지의 공화국들이 20세기 100년 동안 다양하게 변모되었지만, 오늘날 현실 속에 존재하는 공화국의 두 형태는 사회주의공화국(socialist republic)과 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이다. 

그런데 지금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둘러싸고 벌어진, 민주주의와 독재에 관한 논쟁은 사회주의공화국이냐 아니면 민주공화국이냐 하는 국가형태에 관한 국체논쟁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통치형태에 관한 정체논쟁이다.


압제에서 비자유민주주의로 이동한 통치형태

서구정치학계가 그들 나름대로 규정해놓은 개념정의에 따르면, 민주공화국의 통치형태에서 대비되는 두 개념은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와 비자유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다. 전자를 실질적 민주주의(substantive democracy)라고도 부르고, 후자를 절차적 민주주의(procedural democracy)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누구나 아는 것처럼, 이승만 정권에서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의 통치형태는 절차적 민주주의도 실현되지 못한 최악의 압제(despotism)였다. 다시 말해서, 자유민주주의는 고사하고, 비자유민주주의도 되지 못한 독재정치의 전형이었던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비자유민주주의를 가르는 기준은 자유선거를 실시하고 자유시장경제를 실현하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따르는데, 이승만 정권에서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 이 땅에서는 자유선거가 아니라 폭압선거, 부정선거, 금권선거가 계속 자행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중에는 심지어 '체육관 선거'까지 자행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폭압선거를 반대하여 일어난 1948년의 단선단정반대투쟁,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반대하여 일어난 1960년 4.19 민주항쟁, 박정희 정권의 '체육관 선거'를 반대하여 일어난 1970년대의 유신철폐투쟁, 그리고 전두환 정권의 '체육관 선거'를 반대하여 일어난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처럼 자유선거가 없었으니, 자유시장경제가 실현될 리 만무하였다. 이승만 정권에서 전두환 정권까지 40년 동안 이 땅에서는 자유시장경제가 아니라 관치경제와 재벌경제가 판을 쳤다. 이 땅에서 줄기차게 벌어진 생존권투쟁은 관치경제와 재벌경제가 강요한 착취와 궁핍에서 벗어나려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피눈물 흐르는 투쟁이었다.
 
그렇다면 노태우 정권에서 이명박 정권에 이르는 23년 동안 이 땅에서 자유선거와 자유시장경제에 의거한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되었을까? 이 땅의 국민들이 선거철마다 투표장에 가서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을 자유선거라고 생각하면 오판이다.

얼마 전 위킬릭스(Wikileaks) 폭로문건들에서 드러난 것처럼, 이 땅의 대통령 선거는 미국의 정치공작에 의해 좌우되어 왔으니, 이 땅의 국민들은 미국의 선거공작이 허용한 범위 안에서 자기의 정치의사를 표현한 것 뿐이다. 그처럼 미국의 '보이지 않은 손'이 은밀히 조종하는 선거를 자유선거라고 하는 것은 궤변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이 땅의 자유시장경제도 미국, 일본, 유럽연합의 경제적 지배권에 편입되어 있다. 구조적으로 보면, 삼성, LG, 현대 같은 대기업들도 미국, 일본, 유럽연합의 '보이지 않는 손' 안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것 뿐이다.

예를 들어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서 주택가격이 1% 떨어지면, 이 땅의 소비는 0.13% 위축되고, 경기는 0.09% 침체되고, 금융시장이 요동하여 결국 이 땅의 경제성장률이 0.04%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판에, 이명박 정권이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까지 체결해놓으면 어떤 끔찍스런 결과가 나올 것인지 너무 뻔하다. 이것을 어찌 자유시장경제라 하겠는가!

△2011년 11월 3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열린 한미 자유무역협정 저지 긴급 국민 행동 촛불문화제에서 5천여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민중의 소리> 2011년 11월 3일 보도사진)

위와 같이 실상과 내막을 알아보면, 노태우 정권에서 이명박 정권에 이르는 23년 동안에도 그 이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전환점으로 하여 이 땅에 '민주화'가 실현되었다는 주장은, 지배와 예속의 진실을 감추는 거짓선동이다.

굳이 서구정치학계의 개념정의를 빌어서 말하자면, 노태우 정권에서 이명박 정권에 이르는 23년 동안 이 땅에 실현된 민주주의는 대미예속적 비자유민주주의다.

요컨대, 이 땅의 통치형태는 대미예속적 비자유민주주의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대외예속적 비자유민주주의를 타파하여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치형태를 실현하는 것,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 사회변혁운동에 맡겨진 당면과제이며, 그 중심과제의 실현방도가 진보적 정권교체인 것이다.


민주공화국의 사회성격은 진보적 민주주의다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헷갈리기 쉬운 까닭은, 그 개념이 민주공화국의 통치형태를 규정하는 개념으로도 쓰이고 민주공화국의 사회성격을 규정하는 개념으로도 쓰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 개념이다. 예컨대, 미국은 통치형태도 자유민주주의이고, 사회성격도 자유민주주의인데 비해, 영국, 독일, 프랑스 같은 서유럽 나라들은 통치형태는 자유민주주의이지만 사회성격은 사회민주주의다.

물론 민주공화국이라는 국가형태가 자유민주주의라는 사회성격과만 결합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공화국이라는 국가형태는 네 가지 사회성격들과 각각 결합될 수 있다. 네 가지 사회성격을 각각 규정하는 요인들은 민주공화국 사회경제의 네 가지 형태다.

이를테면,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시장경제가 규정한 민주공화국의 사회성격이고,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는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가 규정한 민주공화국의 사회성격이고, 인민민주주의(people's democracy)는 민주적 토지개혁(democratic land reform)이 규정한 민주공화국의 사회성격이고, 진보적 민주주의(progressive democracy)는 중요산업의 자립적 계획경제(self-reliant planned economy in major industry)가 규정한 민주공화국의 사회성격이다.

1948년 8월 이승만 정권이 등장한 이후 이명박 정권이 존재하는 2011년 11월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는 위의 네 가지 사회성격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 땅의 헌법에는 민주공화국이라는 국가형태가 명시되었으나, 그 민주공화국은 위의 네 가지 사회성격 가운데 어느 것과도 무관한, 사실상 무늬만 민주공화국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민주노동당이 얼마 전 개정한 강령에서 자기의 정치이념을 진보적 민주주의로 명시한 것은,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사회성격이 실현된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재건하겠다는 정치적 의지의 표출인 것이다.

그러면 왜 21세기 민주공화국의 사회성격이 진보적 민주주의로 되어야 하는 것일까? 자유민주주의의 파산에서 사회민주주의의 실패경험을 딛고 일어나 진보적 민주주의에로 나아가는 길고 험난한 사회변혁의 역사적 발전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첫째, 자유민주주의는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을 격화시킴으로써 이미 오래 전에 파산한 민주주의다. 경험은, 민주공화국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사회성격에 의존하는 한, 발전은커녕 쇠락과 퇴행을 거듭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사회성격으로 고착된 자유민주주의가 얼마나 위태로운 파산위기에 빠졌는지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둘째, 사회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의 결함과 모순을 극복하려는 정치적 동기에서 출발하였으나, 극복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변형 또는 완화시켰을 뿐이다. 오늘 사회민주주의를 실현한 서유럽 나라들이 내부 모순과 혼란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실패경험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회민주주의는 더 이상 민주공화국의 발전대안이 아니다.

셋째, 인민민주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제국주의나라들의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된 약소민족들이 제각기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면서 택한 사회성격이다. 당시 신생 민주공화국들은 공업화되기 이전 낙후한 농업국들이었으므로 당연히 민주적 토지개혁이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제기되었다.

그런데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 민주공화국이 건설된 이후 60여 년이 지난 오늘 사회역사적 현실은 크게 바뀌었다. 지금 3개 대륙에 존재하는 민주공화국들이 실현해야 할 새로운 사회성격은, 중요산업의 자립적 계획경제가 규정하는 새로운 사회성격, 곧 진보적 민주주의다.

3개 대륙의 민주공화국들이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사회성격을 가질 때, 민주헌법에 명시된 주권재민사상이 꽃펴나는 참된 민주공화국으로 거듭날 것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은 곧 새로운 민주공화국 건설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도 그 건설대오에 그들과 함께 있다. (2011년 11월 4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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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2

인민군이 작전배치한 맞춤형 비대칭무기

진실의 말팔매 <40>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한국군의 불량품 전차 개발

2011년 3월 31일 한국군 육군 30사단이 실시한 전차기동훈련 중에 웃지 못할 사건이 일어났다. 전차포를 왼쪽으로 홱 돌려 발사하는 순간 전차 안에 설치된 자동소화장치가 오작동하면서 할론가스가 갑자기 분사되었는데, 전차병들은 불이 났는 줄 알고 깜짝 놀라 전차를 세우고 황급히 기어나와 대피하였다.

자동소화장치가 오작동한 전차는 한국군이 작전배치한 신형 전차 K1A1이다. 원래 한국군은 그 신형 전차에 미국산 화재감지기를 설치했는데, 2010년부터 생산한 97대에는 국산 화재감지기를 설치하였다. 그런데 국산 화재감지기를 설치한 97대의 K1A1 전차에서 자동소화장치 오작동이 일어났다.

한국기계연구원은 K1A1 전차가 운행 중 좌우로 이동할 때마다 갑자기 전차에 강한 충격이 일어나는 이상현상을 발견하고 정밀검사를 하였더니 변속기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고, 2010년 2월부터 그 전차의 생산이 중단되었다.

2010년 6월 18일 육군기계화학교에서 전차조종실습에 동원된 K1 전차의 엔진에서 새어나온 기름에 불이 붙으면서 화재가 났다. 이번에는 진짜 화재였는데, 그 원인을 조사하였더니, 값비싼 미국산 부품을 써야 하는 데도 규격조차 맞지 않는 값싼 국산 부품으로 대체하는 바람에 그런 사고가 난 것으로 밝혀졌다.

2010년 8월 6일 한국군 26사단 전차대대가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무건리 훈련장에 K1 전차를 동원하여 전차포 사격을 훈련을 하는 도중 포탄이 발사되지 않고 포신 안에서 폭발하는 사고가 났다. 동종의 전차는 2009년 10월까지 무려 여덟 차례나 포탄이 발사되지 않고 포신 안에서 폭발하는 사고를 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첨단 차기 전차로 개발하여 '흑표'라는 이름을 붙인 K2 전차에 장착된 엔진, 변속기, 윤활유분배기, 전자제어장치, 냉각환풍기, 조향장치 등에서 총체적인 결함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국산 전차만이 아니라, 다른 국산 군사장비들에서도 갖가지 결함들이 나타나 사고로 이어지고 있다. 어떻게 그처럼 불량품 무기를 종합적으로, 체계적으로 만들어내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 정도다.

그렇다면, 북측 인민군이 쓰는 각종 군사장비들에서도 결함이 나타날까? 북측 언론보도에서 인민군 군사장비 결함에 대해 보도한 적이 전혀 없어서 알 길은 없지만, 북측의 군사장비는 민간 군사장비 제조업체들이 개발, 생산하여 인민군에 납품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군이 직접 개발, 생산하고 있으므로 성능시험에서 통과하여 일단 작전배치된 군사장비들에서는 결함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해, 아래의 보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인민군은 왜 전차에 바퀴를 달았을까?

<로동신문> 2010년 8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평양 주재 외국군 무관단이 2010년 8월 23일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땅크사단 관하 구분대를 방문하였는데, 인민군은 외국군 무관단에게 전차부대 기동훈련을 보여주었다.

북측이 외국군 무관단에게 전차부대 기동훈련을 공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평양 주재 외국군 무관단에게 전차부대 기동훈련을 보여준 것은, 전차전에서 미국군을 꺾을 수 있다는 자신만만함을 과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 날 외국군 무관단은 그 동안 소문으로만 들어온 최신형 전차 '폭풍호'를 실물로 처음 보았다. 인민군의 최신형 전차 '폭풍호'는 2002년부터 류경수땅크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다. 외국군 무관단이 제105땅크사단 관하 부대를 방문하기 직전,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도 '폭풍호'가 질주하는 장면을 방영하였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2010년 1월 정초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105땅크사단 관하 구분대를 시찰하였다. 그 날 전방감시소에 오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제105땅크사단 관하 구분대가 실시한 전차전훈련을 지켜보았다.

2010년 1월 5일 <조선중앙텔레비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한 제105땅크사단 관하 구분대의 전차전훈련 장면을 방영하였다. 그 훈련장에는 남측 지명을 써넣은 커다란 간판들이 서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중앙고속도로 춘천-부산 374km'라고 쓴 간판이 눈길을 끌었다.

△2010년 1월 5일 <조선중앙텔레비죤>이 방영한 조선인민군 근위 서울 류경수제105땅크사단
관하 구분대의 전차전훈련 장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인민군 최정예 전차부대가 그런 간판을 세워놓고 전차전훈련을 실시한 것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중앙고속도로를 고속질주하여 부산부터 점령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여기까지는 웬만한 군사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 아는 정보다.

문제의 핵심은, 인민군이 어떤 군사장비로 중앙고속도로를 고속질주하여 눈깜짝할 사이에 374km를 주파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전차가 고속도로를 고속질주하려면, 교통량이 거의 없는 새벽시간대를 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문제다.

만일 인민군 전차들이 새벽시간대에 중앙고속도로를 달리는 경우 주한미국군 오산기지에 배치된, '탱크 킬러'라고 부르는 A-10 대지공격기가 집중공격할 것이다. 이라크전쟁과 리비아전쟁에서 입증된 것처럼 전차부대가 공습을 받는 경우 생존률이 크게 떨어진다.

주한미국군이 출격시킨 A-10 대지공격기의 집중공격을 뚫고 고속질주하는 새로운 개념의 전차는 없을까?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듯이, 인민군은 한반도 전쟁상황에 아주 적합한 맞춤형 전차를 만들어냈다.

그것이 바로 차륜식 무인공격전차다. 아직까지 세계가 알지 못하는 기발한 착상으로 개발된 그 전차에는 고속도로를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도록 무거운 무한궤도를 떼어내고 대형고무바퀴를 달았다.

<자주민보> 2011년 10월 28일 보도기사는 제105땅크사단의 전차전훈련 장면에 등장한 전차사진을 확대하여 그 전차에 무한궤도가 아니라 대형고무바퀴 4개가 달려있는 것을 확인하였는데, 그 보도기사에서는 그 차륜식 전차가 무인공격전차라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자주민보>가 2011년 10월 28일 보도한 사진. 이 사진은 2010년 1월 5일 <조선중앙텔레비죤>이 방영한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땅크사단 관하 구분대의 전차전훈련 장면을 확대한 것으로 바퀴가 4개 달린 차륜식 전차의 모습이 보인다.

전투종심이 매우 짧은 한반도에서 벌어질 전차전에서 승리를 담보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장갑능력이나 포화력이 아니라 진격속도다. 인민군의 차륜식 무인공격전차는 그런 요구에 맞게 만들어진 맞춤형 전술무기다.

차륜식 무인공격전차는 고속기동을 위해 차체무게를 크게 줄어야 하였으므로 당연히 장갑이 약하다. 그래서 대전차무기로 공격을 받을 경우 생존할 수 없으므로, 인명손실을 줄이기 위해 무인자동화한 것이다.


차륜식 무인공격전차는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을까?

인민군의 차륜식 무인공격전차는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을까? 인민군이 보유한 궤도식 경전차 최고속도가 시속 75km이므로, 차륜식 무인전차는 그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어야 한다.

무게 7-8t짜리 차륜식 장갑차의 최고 속도가 시속 95km 정도이므로, 인민군의 차륜식 무인공격전차도 그만큼 빠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인공격전차가 중앙고속도로에 들어서면 4시간만에 부산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무인전차는 인민군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각종 무기를 보유한 미국군도 무인전차 개발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그런데 미국군이 개발 중인 무인전차들은 두 가지 약점을 지녔다.

하나는 차륜식 무인전차가 아니라 무한궤도식 무인전차를 만들기 때문에 속도가 느리다는 약점이고, 다른 하나는, 공격용 무인전차가 아니라 정찰용 무인전차라는 약점이다.

다만 미국군이 보유한 무한궤도식 무인전차 '블랙 나이트(Black Knight)'는 예외여서, 25mm 전차포와 7.62mm 기관총을 장착하여 공격전차의 면모를 갖추었다. 하지만 그 무인전차의 최고속도는 시속 77km밖에 되지 않는다.



미국군이 보유한 무한궤도식 무인전차 '블랙 나이트'

웬만한 군사정보를 아는 사람이라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인민군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비대칭무기를 독자적으로 조성한 비대칭전투환경에서 사용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고 있을 것이다.

무기만 비대칭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전투환경도 비대칭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인민군이 자기의 비대칭전력을 극대화하는 비결이며, 대칭전력밖에 알지 못하는 미국군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위협요인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인민군의 비대칭무기인 차륜식 무인공격전차는 미국군의 대응전력을 무력화할 비대칭전투환경에서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그 비대칭전투환경이 바로 갱도전이다.

미국 군부는 세상이 곤히 잠든 새벽시간에 갱도에서 인민군의 차륜식 무인공격전차들이 쏟아져나오는 장면을 상상하며 전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미국 군부는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땅크사단의 최신형 전차 '폭풍호'가 갱도에서 쏟아져나온 차륜식 무인공격전차를 앞세우고 새벽시간대의 중부고속도로를 고속질주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전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011년 11월 1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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