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8

좌우격돌의 혁명적 상황과 민중의 혁명적 요구

[한호석의 개벽예감](392)
자주시보 2020년 04월 27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좌우격돌의 혁명적 상황에 제기된 최대쟁점
2. 민족주의로는 새로운 나라 세울 수 없었다
3. 민중은 어떤 사회체제를 요구했는가?
4. 점령군 철수하면 15분 만에 무너질 우익세력
5. 모스크바협정 파기한 미국의 반통일-반혁명계획


1. 좌우격돌의 혁명적 상황에 제기된 최대쟁점

식민지조선이 일제의 강점에서 해방된 1945년 8월 15일부터 미국이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했던 1948년 8월 15일까지 3년 동안 혁명적 상황이 조성되었다. 미국의 분할점령책동을 배격하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통일공화국을 세우느냐 아니면 미국의 분할점령책동에 휘말려들어 억압과 착취가 자행되는 분단체제로 전락하느냐 하는 근본문제를 결정해야 하는 혁명적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세계혁명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혁명적 상황에서는 대립과 투쟁이 벌어지게 되는데, 1945년 8월 15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남북조선의 혁명적 상황에서도 그러했다. 절대다수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미국의 분할점령을 배격하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통일공화국을 세우려는 강렬한 의지와 열망을 표출했다. 반면에 소수의 반역자들은 미국의 분할점령정책을 추종하여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했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억압하고 착취했다. 혁명적 상황에서 좌익세력은 민중의 강렬한 의지와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했고, 우익세력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탄압, 착취하고 미국의 분할점령책동을 추종했다. 

여기서 좌익과 우익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사전적 의미를 말하면, 좌익은 왼쪽 날개라는 뜻이고, 우익은 오른쪽 날개라는 뜻이지만, 불상용적인 상극관계에 놓여 있는 좌익과 우익을 새의 양쪽 날개에 비유하는 것은 오류다.  

역대극우정권들의 탄압으로 좌익세력은 압살당했고 우익세력만 득세하여 좌익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는 좌익을 극좌와 혼동하여 기피하고, 중도를 좌익으로 오인하는 비정상적인 풍조가 만연되었지만, 정치세력을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는 것은 합리적인 분류법이다. 좌익-우익 분류법은 19세기 말 프랑스 정치권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이래 세계로 퍼져나가 약 150년 동안 국제사회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전 세계에서 유독 한국 사회에서만 좌익-우익 분류법을 쓰지 않고 엉뚱하게도 진보-보수 분류법을 쓴다. 

원래 보수라는 말은 전통을 보전하고 지킨다는 좋은 말인데, 미래통합당 같은 정치세력을 그런 좋은 뜻을 가진 대명사로 부르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미래통합당 같은 정치세력은 전통을 보전하고 지키는 세력이 아니라, 낡고 썩은 사회체제를 유지하려는 세력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진보-보수 분류법은 낡고 썩은 사회체제를 유지하려는 세력을 전통을 보전하고 지키는 세력으로 미화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진보-보수 분류법은 폐기되어야 하며, 150여 년 동안 국제사회에서 널리 쓰이고 있고, 8.15해방부터 6.25전쟁 종전 이후까지 남북조선에서 널리 쓰였던 좌익-우익 분류법을 복원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진 1>

▲ <사진 1> 위의 사진은 1946년 10월 1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일어난 민중항쟁 현장을 촬영한 것이다. 민중항쟁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된 여성들을 미점령군 군사경찰대 소속 병사들이 끌어가고 있다. 대구민중항쟁을 기폭제로 하여 경상북도, 경상남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서울, 경기도, 전라남도, 전라북도에서 연속적으로 민중항쟁이 폭발했다. 10월 한 달 동안 남조선 각지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에 약 200만 명의 각계층 군중들이 참가했다. 폭발적인 민중항쟁을 진압할 수 없었던 미점령군은 우익단체들을 앞세워 무자비한 폭력으로 탄압했다. 좌익세력을 한편으로 하고, 미점령군과 우익세력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격돌이 벌어지고 했던 당시는 혁명적 상황이었다.   

좌익세력은 위험한 기피대상이 아니라, 민중을 위해 헌신하고 투쟁하며, 사회력사를 발전시키는 진보세력이다. 반면에 우익세력은 보수세력이 아니라 민중의 이익과 요구를 짓밟고 사회력사발전을 가로막는 반역세력이다.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이 격돌했던 1947년의 혁명적 상황을 민중의 관점에서 인식하려는 것이 이 글의 집필목적이다.  

미국의 분할점령을 배격하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통일공화국을 세우느냐 아니면 미국의 분할점령에 휘말려들어 억압과 착취가 자행되는 분단체제로 전락하느냐 하는 혁명적 상황에서 벌어진 좌우격돌, 그 속에서 제기된 최대쟁점은 무엇이었을까? 두말할 나위 없이 그것은 일제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남북조선에 어떤 나라를 세우느냐 하는 국가건설문제였다. 당시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은 어떤 나라를 세우느냐 하는 국가건설문제를 놓고 격돌한 것이다. 격돌은 격전으로 격화되었다. 1953년 7월 27일 6.25전쟁이 정전되기까지 격돌과 격전에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주목되는 것은, 그 싸움이 7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우리 민족이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고, 남측 민중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때 그 싸움은 끝나게 될 것이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면, 국가건설문제는 70년 역사의 갈피 속에 묻혀있는 과거문제가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문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민족주의로는 새로운 나라 세울 수 없었다 

일제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남북조선에 어떤 나라를 세우느냐 하는 국가건설문제를 놓고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이 격돌한 혁명적 상황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인식하면, 우리 민족이 통일된 독립국가를 세우려고 하였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당시 민족 전체의 절실한 요구였던 독립과 통일은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이 공통적으로 인정한 절대과업이었다. 이를테면, 우익세력을 대표한 이승만은 입만 열면 독립과 통일을 부르짖었고, 우익세력을 대표한 김구도 독립과 통일을 외쳤다. 혁명적 상황이 격화되면서 우익세력이 분렬될 때, 김구는 민족주의의 길을 계속 걸었고, 이승만은 민족주의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친미예속의 나락으로 전락했지만, 이승만과 김구가 한때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독립과 통일이라는 양대 개념으로 포장된 민족주의를 공통분모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 더 분석적으로 고찰하면, 당시 이승만은 무력사용에 의한 북진통일을 부르짖었고, 김구는 남북협상에 의한 평화통일을 추구했다. 하지만 김구는 처음부터 남북협상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이 이승만을 앞세워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위기가 심화되어 자기의 정치적 입지가 매우 좁아졌을 때 남북협상에서 마지막 활로를 찾으려고 했다.  

이승만이 추구한 독립은 미국의 분할점령정책에 따라 남조선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독립’이었고, 김구가 추구한 독립은 반미자주라는 핵심내용이 모호한 즉시독립이었다. 이승만과 다르게 김구는 비타협적인 반일투쟁을 벌였지만, 미국에 대해서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1945년 8월 18일 김구는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에게 보낸 서한에서 “우리는 귀하가 조선의 독립을 보장할 것으로 확신하며, 조선의 독립이 극동의 평화를 위한 열쇠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중략) 미합중국이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희생으로 얻은 민주세계의 평화를 영원히 보장할 것으로 믿습니다”라고 썼다.  

그러나 김구가 믿었던 트루먼은 김구가 보낸 서한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김구가 믿었던 미국은 점령군 방첩대(CIC) 암살단 소속 비밀요원 안두희에게 김구를 암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김구가 미국의 손에 암살당한 때로부터 1년 뒤, 트루먼은 우리 민족 전체를 말살시킬 핵공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국 국무부 비밀문서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미국 공군참모총장에게 핵공격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사람은 맥아더가 아니라 트루먼이었다. <사진 2>

▲ <사진 2> 위의 사진은 1946년 2월 14일 미군정청에서 진행된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성립식에 참석한 김구와 이승만이 성립식을 마치고 인근 경복궁에서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우익세력의 양대 거두였으면서도 권력쟁탈을 벌였던 김구와 이승만은 자기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일시적으로 협력하기도 했다. 8.15해방 이후 3년 동안 남조선을 통치했던 미군정청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반대, 배격하는 좌익세력을 고립시키기 위해 우익세력을 중심으로 하고 중도세력을 끌어들인 정치조직을 조작해냈다. 그것이 바로 1946년 2월 14일 미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진행된 성립식에서 창설된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다. 미군정청은 이승만을 의장에 앉혔고, 김구와 김규식을 각각 부의장에 앉혔다. 대표의원은 28명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청이 끌어들인 중도세력은 성립식에 참석하지 않고, 이탈했다. 그렇게 되자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은 극소수의 우익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고, 미군정청의 계략은 파탄되었다.   

위에 서술한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면, 민족주의의 한계를 알 수 있다. 민족주의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는 당위론만 외쳤을 뿐, 새로운 나라에 어떤 사회체제를 세울 것인가 하는 근본문제에는 해답을 주지 못한 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혁명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한 정치이념이었다. 그래서 민족주의로는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도 없었고, 사회력사를 발전시킬 수도 없었다. 친미예속적인 역대극우정권들이 좌익정치이념인 사회주의는 물론이고 우익정치이념인 민족주의까지 탄압했던 한국 사회에서 정권의 탄압을 받는다는 것 때문에 민족주의가 진보적 정치이념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이 일어났지만, 명백하게도 민족주의는 낡은 우익정치이념이다. 

일제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남북조선에 어떤 나라를 세우느냐 하는 국가건설문제를 놓고 격돌이 벌어진 혁명적 상황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인식하면, 민족주의성향이 강한 정치세력이 크게 부각된다. 다시 말해서, 민족주의역사학은 민족주의성향이 강한 우익세력의 지도자들이었던 김구와 김규식, 그리고 민족주의성향이 강한 중도세력의 지도자였던 여운형을 중심으로 혁명적 상황을 서술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익세력이 표방한 민족주의에도 민족의 이익과 요구를 실현하는 진보적 측면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승만과 김성수는 민족주의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친미예속을 택했고, 김구과 김규식은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을 뿐이다. 우익세력이 표방한 민족주의는 반미민족자주라는 핵심내용이 빠진 공허한 우익정치이념이었다.   

그러므로 혁명적 상황을 우익정치이념의 관점에서 인식하는 것은 오류다. 좌우격돌이 벌어진 혁명적 상황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인식할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혁명적 요구에 부응하는 민중의 관점에서 인식해야 마땅하다. 민중의 관점에서 혁명적 상황을 인식하면,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보이지 않는 새로운 사실이 보인다. 민중의 관점에서 혁명적 상황을 인식할 때 제기되는 물음은 민중이 어떤 사회체제를 요구했는가 하는 물음이다. 바로 이 물음 앞에서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이 갈라졌다.  


3. 민중은 어떤 사회체제를 요구했는가?
  
1947년 7월 5일 정당 및 사회단체들이 미소공동위원회가 요청한 자문에 대한 답신서를 보냈는데, 그 답신서를 보면 민중이 어떤 사회체제를 요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자문을 요청한 것은, 장차 미소공동위원회의 후원으로 수립될 임시정부가 어떤 사회체제 위에 수립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정당 및 사회단체들의 의견을 물은 것이었다. 만일 미국이 미소공동위원회를 폐기하지 않았더라면, 그 답신서가 말해주는 것처럼, 통일임시정부가 세워졌을 것이고, 통일임시정부가 민주주의국가를 건설하고, 새로운 사회체제를 수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에 답신서를 제출한 정당 및 사회단체들을 정치이념지형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민주주의민족전선 (약칭 민전) - 남조선로동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로동조합전국평의회, 조선농민조합총련맹, 조선청년총동맹, 조선부녀총동맹, 각종 문화단체들을 비롯하여 70개 좌익성향의 정당 및 사회단체들이 참가함.

2) 근로인민당 (약칭 근민당) - 여운형을 중심으로 창당된 중도정당.

3) 미소공위대책각정당사회단체협의회 (약칭 공협) - 중도성향의 52개 정당 및 사회단체들이 참가함.

4) 좌우익합작위원회 (약칭 합위) - 시국대책협의회를 모체로 중도성향의 사회단체들이 참가함. 

5)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 (약칭 임협) - 우익정당인 한국민주당을 중심으로 우익성향의 170여개 정당 및 사회단체들이 참가함. 

위에 열거한 정당 및 사회단체들의 정치이념지형을 살펴보면, 좌익, 중도, 우익을 모두 포괄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답신내용이 민족 전체의 요구와 의사를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답신내용을 분석하면, 당시 민중이 어떤 사회체제를 요구했는지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살펴보려는 것은 국호, 토지정책, 토지소유권, 산업소유권, 경제체제, 노동권, 노동임금제, 노동시간에 관한 답신내용이다. 




민전
근민당
공협
합위
임협



국호



조선인민공화국
고려공화국
고려공화국
고려공화국
대한민국

토지정책

무상몰수
무상분배
무상몰수
무상분배
무상몰수
무상분배
무상몰수
무상분배
유상매수
유상분배

토지소유권

사유권 인정
(처분금지)
사유권 인정
(매매저당 금지)
사유권 인정
사유권 인정
(자유처분 제한)
사유권 인정
(매매제당 제한)

산업소유권

대기업-국유화
중기업-국유화공유화사유화
소기업-사유화
대기업-공유화사유화
중기업-공유화사유화
소기업-사유화
대기업-국유화
중기업-사유화
소기업-사유화
대기업-국유화
중기업-관민합동경영
소기업-사유화
대기업-공유화하여 국가경영
중소기업-사유화

경제체제

계획경제
계획경제
통제경제
계획경제
통제경제

노동임금

최저임금제
최저임금제
최저임금제
최저임금제
최저임금제

노동시간

8시간제
8시간제
최저 8시간최고 10시간제
8시간제
8시간제

노동권

단체교섭권
파업권 인정
단체교섭권 파업권 인정
단체교섭권
파업권 인정
단체교섭권
인정
단체교섭권
파업권 인정

위의 표를 보면, 좌익세력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중도세력들인 근민당, 공협, 합위도 주요산업 국유화와 무상몰수-무상분배에 따른 토지개혁을 요구했으며, 계획경제 또는 통제경제를 요구했고, 노동계급의 자주적 권리를 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주목되는 것은, 당시 좌익세력과 중도세력이 함께 제시한 주요산업 국유화와 무상몰수-무상분배에 따른 토지개혁, 계획경제 또는 통제경제, 그리고 노동계급의 자주적 권리가 혁명적 강령이라는 사실이다. 좌익세력과 중도세력이 함께 제시한 혁명적 강령을 오늘날 사회과학용어로 설명하면,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민주주의혁명의 강령이다. 그러므로 당시 북조선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남조선에서도 절대다수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민주주의혁명을 지향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사회주의혁명은 구분된다.) 

당시 중도세력은 좌익세력을 따라 혁명적 강령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혁명적 상황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자기의 고유한 강령보다 높은 수준의 강령을 수용한 것이었다. 원래 혁명적 상황이 아닌 평시에 중도세력이 제시하는 것은 혁명적 강령이 아니라 개혁적 강령이다.   

미소공동위원회의 자문요청에 응답한 정당 및 사회단체들은 일반대중보다 정치의식수준이 상당히 높기 때문에 민주주의혁명을 지향했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일반대중도 민주주의혁명을 지향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명하려면, 다음과 같은 역사자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진 3>

▲ <사진 3> 위의 사진은 민주주의민족전선 대구시위원회가 30만 대구시민에게 시민대회에 참석할 것을 호소하는 전단을 촬영한 것이다. 민주임시정부수립 촉성, 미소공동위원회속개 촉성이라는 구호가 보인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1946년 2월 19일 서울에서 결성되었다. 의장단에는 허헌, 여운형, 김원봉, 백남운, 박헌영이 선출되었고, 부의장단에는 성주식, 김성숙, 장건상을 비롯한 10명이 선출되었고, 상임위원 73명과 중앙위원 305명이 선출되었다. 민전에는 70개에 이르는 남조선로동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조선민족혁명당, 전평, 전농, 청년총동맹, 부녀총동맹, 각 문화단체들과 종교단체들이 참가하였다. 민전은 우익세력을 배제하고 좌익세력과 중도세력 전체가 결집한 광범위한 통일전선체였으며, 전체 인구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혁명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했다.    

1947년 7월 3일 조선신문기자회가 당일 오후 5시부터 1시간 동안 서울 시내 중요지점 10개소에서 일제히 진행한 설문조사에 서울시민 2,495명이 응답했는데, 응답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어떤 국호를 바라는가?
조선인민공화국 - 1,708명 (70%)
대한민국 - 604명 (24%)
기권 - 139명 (4%)
기타 - 8명 (1%)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되었는데, 위의 여론조사결과를 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에는 당시 일반대중의 정치적 요구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에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들어간 것은 당시 남북조선에서 혁명의 발전단계가 민주주의혁명단계였기 때문이다.)   

2) 어떤 정권형태를 바라는가?
인민위원회 - 1,757명 (71%)
종래제도 - 327명 (14%)
기타 - 262명 (10%)
기권 - 113명 (5%)
(인민위원회는 남북조선에서 전국적으로, 자주적으로 조직되었다. 남조선 각지에 조직된 인민위원회를 폭력으로 탄압, 파괴한 것은 미점령군과 우익세력이었다.) 

3) 어떤 방식의 토지개혁을 바라는가?
무상몰수 무상분배 - 1,673명 (68%)
유상몰수 유상분배 - 427명 (17%)
유상몰수 무상분배 - 260명 (10%)
기권 - 99명 (5%)
(이 여론조사는 농촌이 아니라 서울에서 진행된 것이어서 토지문제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서울시민들이 응답했는데도, 무상몰수-무상분배원칙에 따른 토지개혁을 요구하는 응답이 68%나 되었다. 만일 토지개혁에 대한 여론조사를 농촌에서 진행했다면, 무상몰수-무상분배원칙에 따른 토지개혁을 요구하는 응답이 90%를 넘었을 것이다. 당시 인구분포를 보면, 농민이 절대다수를 차지했으므로, 무상몰수-무상분배원칙에 따른 토지개혁은 민중 전체의 혁명적 요구였다고 말할 수 있다.)  

1940년대 후반 미점령군이 통치한 남조선에서 일반대중이 얼마나 높은 정치의식을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역사자료가 있다. 1947년 9월 1일 미군정청이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서울을 방문한 앨벗 웨드마이어에게 전달한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서울에서 발행되는 4대 주요신문사의 발행부수는 다음과 같다. 

경향신문 - 61,000부 
서울신문 - 50,000부 
노력인민 - 45,000부 
동아일보 - 40,000부

지금도 서울에서 발행되는 <경향신문>과 <서울신문>은 당시 중립지로 분류되었고, 지금도 서울에서 발행되는 <동아일보>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우익지로 분류되는데, <노력인민>은 처음 들어보는 낯선 신문이다. 역사자료에 따르면, <노력인민>은 남조선로동당 기관지였다. 남조선로동당 기관지가 서울에서 3대 주요언론매체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놀라운 사실은 1940년대 후반 미점령군 통치한 남조선에서 일반대중의 정치의식이 얼마나 높은 수준에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역사자료를 하나 더 살펴보자. 1946년 8월 13일 <동아일보>는 미군정청 여론국이 서울시민 8,45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결과를 보도했는데, 그 가운데서 어떤 정치이념을 지지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응답결과는 다음과 같다.

사회주의 - 6,037명 (70%)
자본주의 - 1,189명 (14%)
공산주의 - 574명 (7%)
모름 - 653명 (8%)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말조차 모르고 있었던 미군정청 여론국이 그 개념을 여론조사 선택사항에 넣지 않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응답결과가 나온 것이다. 하지만 만약 진보적 민주주의를 선택사항으로 넣은 여론조사를 실시했더라면,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응답은 70%를 넘었을 것이다. 

위에 열거한 몇 가지 역사자료들은 1947년의 혁명적 상황에서 민족구성원 중 70% 이상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중(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혁명적 요구가 무엇이었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위에 열거한 역사자료에 근거하여 민중의 혁명적 요구를 요약하면,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주요산업을 국유화하여 계획경제를 운영하고, 노동계급의 자주적 권리를 보장하며, 무상몰수-무상분배원칙에 따른 토지개혁를 시행하는 새로운 사회체제, 곧 진보적 민주주의가 실현된 새로운 사회체제를 세우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70여 년 전 혁명적 상황에서 민중이 제기한 혁명적 요구였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인식하면, 극우성향의 역사학자들이 절대다수 민중이 제기한 혁명적 요구를 “소수의 좌익세력”이 제기한 정파적 요구인 것처럼 축소한 것도 사실왜곡이고, 민족주의성향의 역사학자들이 절대다수 민중이 제기한 혁명적 요구를 외면하고 중도정치세력이 제기한 민족주의적 요구를 과대평가하는 것도 사실왜곡이라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4. 점령군 철수하면 15분 만에 무너질 우익세력 

1947년 8월 26일부터 9월 3일까지 미국 대통령 특사 앨벗 웨드마이어가 수행원들을 이끌고 서울에 나타났다. 그런데 웨드마이어 특사단이 서울방문을 마치고 떠난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47년 9월 27일 미국 육군성 차관 윌리엄 드레이퍼가 수행원들을 이끌고 서울에 나타났다. 트루먼이 보낸 웨드마이어 특사단과 육군성이 보낸 드레이퍼 대표단이 줄이어 서울에 나타난 것은 당시 워싱턴에서 조선문제와 관련하여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드레이퍼 대표단의 동선을 추적해보자. 그들은 서울에 도착한 다음 날인 1947년 9월 23일 미군정청 고위당국자들과 회의를 진행했다. 역사자료에 따르면, 회의 중에 육군성 차관 드레이퍼와 미군정청 고위당국자들이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드레이퍼 - “미국군이 철수하면, 이승만은 오래 가지 못하겠지요?”
하지(남조선점령군사령관) - “15분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고, 그래서 차츰 더 필사적으로 행동하고 있죠. 이승만의 처는 자기 남편을 계속 부추기고 있는데, 작은 암컷 여우 같은 그녀는 오스트리아 여자입니다. 그녀가 혹시 소련의 돈을 받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 때가 가끔 있죠.”
드레이퍼 - “이승만에 대한 인민의 지지도는 어느 정돕니까?”
제이콥스(미군정청 정치고문) - “우익세력은 미국이 지지하는 사람이면 그가 누구이든 지지할 겁니다.” 
브라운(미소공동위원회 미국측 수석대표) - “이승만은 인기가 높은 유일한 지도자입니다.”  

미국 육군성이 드레이퍼 대표단을 서울에 보낸 목적은 그들이 미군정청 고위당국자들을 만나 한담에 가까운 회담이나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파견목적은 38도선 일대의 군사상황을 시찰하고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군정청 고위당국자들과 회담을 마친 드레이퍼 대표단은 1947년 9월 24일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으로 가서 무력충돌위험이 감도는 38도선 동부전선을 시찰하고, 이튿날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사진 4> 

▲ <사진 4> 위의 사진은 8.15해방부터 남조선단독정부가 수립되기까지 3년 동안 남조선을 점령, 통치했던 미군정청 청사를 촬영한 것이다. 원래 이 석조건물은 식민지조선을 억압, 착취했던 일제의 조선총동부 청사였다. 일장기가 걸렸던 깃대에 성조기가 걸려있는 것이 보인다. 미점령군과 우익세력은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고 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려는 남조선 좌익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 압살했고, 나중에는 중도세력까지 제거했으며, 좌익세력과 중도세력을 지지하는 수많은 민중을 학살했다.   

38도선 일대의 군사상황을 시찰하고 워싱턴으로 돌아간 드레이퍼가 어떤 보고서를 상부에 제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47년 10월 22일 드레이퍼와 존 하지 사이에 오간 비밀전문에서 미국 군부의 의도와 동향을 엿볼 수 있다. 드레이퍼는 하지에게 보낸 비밀전문에서 남조선군이 앞으로 1년 안에 북조선군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 만큼 강해질 수 있는지를 물었고, 하지는 미국군이 남조선군에게 군사장비와 군사훈련인원을 보충해주면 1년 만에 북조선군의 공격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군대가 될 수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하지의 그런 보고는 미점령군이 창설한 남조선국방경비대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었다. 드레이퍼 대표단이 38도선 일대의 군사상황을 시찰하기 직전인 1947년 9월 2일 <동아일보>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일본 도꾜에 주둔하는 미8군 소속 연락장교는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도중 8월 31일 알래스카주 앵커리지에서 진행된 대중연설에서 “북조선은 무장화된 진영으로 되었”다고 하면서, “북조선군은 10개 사단과 20만 명의 병력으로 편성되었는데, 남조선군은 1개 군단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발언은 당시 북조선이 남조선에 비해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인데, 남조선국방경비대를 1년 만에 강군으로 육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하지의 생각은 허상에 불과했다.  

하지와 다르게, 미국 군부는 미점령군이 남조선에서 철수하면 우익세력이 맥없이 무너지고 민주주의혁명이 일어나 좌익세력이 집권할 것으로 우려했고, 민주주의혁명이 일어나면 남북조선에 ‘소련의 위성국가’가 건설될 것으로 우려했다. 

미국은 자기들이 점령한 남조선에서 민주주의혁명이 일어나도록 방치할 수 없었고, 남북조선이 ‘소련의 위성국가’로 되도록 방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이승만이 이끄는 우익세력을 앞세워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했고, 남조선 좌익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5. 모스크바협정 파기한 미국의 반통일-반혁명계획 

미국이 이승만을 앞세워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하려면, 미소공동위원회부터 폐기해야 했다. 미소공동위원회 폐기공작은 다음과 같이 감행되었다. 

1947년 8월 26일 웨드마이어 특사단의 서울방문에 때를 맞춰 미국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소련 외무상 뱌체슬라브 몰로또브에게 외교문서를 보냈다. 미국은 외교문서에서 조선문제를 4개국 회의에서 해결하자고 제의하였다. 4개국 회의는 미국, 소련, 영국, 중국(국민당 정부) 대표들이 참가하는 4자회담이다. 이 제안은 미국이 조선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운영해오던 미소공동위원회를 폐기하고 조선문제를 4개국 회의로 넘기려는 술책이었다. 

그런데 4개국 회의는 소련에게 3대1의 불리한 구도로 진행될 것이 분명했고, 그래서 소련은 미국이 제의한 4개국 회의를 거부했다. 미국은 소련이 거부할 수밖에 없는 4개국 회의를 제의하여, 소련을 궁지에 몰아넣고 미소공동위원회를 마비시켜 모스크바협정을 파기하고,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넘기려는 정치음모를 행동에 옮기고 있었다. 그런 정치음모는 워싱턴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거론되고 있었다. 1947년 1월 27일 미국 국무부 극동문제담당관 존 카터 빈센트가 국무장관에게 보낸 비망록에 따르면, 1947년 1월 22일 맥아더는 국무부에 보낸 비밀전문에서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넘기는 문제를 건의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유엔은 친미추종국들을 거느리고 국제문제를 제멋대로 결정해버리는 미국의 거수기로 전락했으므로, 조선문제가 유엔으로 넘어가면 미국은 자기 계략을 유엔의 이름으로 정당화, 합법화할 수 있었다. 조선문제를 미국의 이익에 따라 제멋대로 처리하려는 계략은 1947년 9월 17일 미국 국무장관 마셜이 유엔총회에서 진행한 연설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연설에서 조선독립방안을 제의했다. 그 제의는 조선독립방안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된 것이었지만, 민중의 관점에서 보면, 모스크바협정을 파기하고, 남북조선에서 유엔위원회의 감시 하에 우익성향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억압과 착취가 자행되는 낡고 썩은 사회체제를 세우려는 계략이었다. 마셜이 유엔총회에서 언급한 방안은 다음과 같다. <사진 5>

▲ <사진 5> 위의 사진은 1946년 3월 20일 서울에서 진행된 미소공동위원회 제1차 회의 개회식 장면이다.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 테렌티 슈티꼬브가 개회연설을 하고 있다. 그 옆에 미소공동위원회 미국측 대표 존 하지가 앉아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1945년 12월 미국, 소련, 영국의 외무장관들이 체결한 모스크바협정에 따라 조선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협력기구로 설치되었다. 슈티꼬브는 개회연설에서 "조선민중은 민주주의적 정당과 사회단체들을 바탕으로 민주자치기관인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지적하고, "앞으로 수립될 민주주의적 조선임시정부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각 민주주의정당과 사회단체를 망라한 대동단결의 토대 위에서 창건될 것"이라고 언명했다.   

1) 최근 미국은 모스크바협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4개국 회의를 제의했는데, 중국(국민당 정부)과 영국은 그 제의를 동의했고, 소련은 거부했다. 그 동안 미소공동위원회에서는 아무런 합의도 이루지 못했다. 미국은 미소 양국이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바람에 조선의 독립이 지연되는 것을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은 조선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하려고 한다.  
2) 미국은 남북조선에서 조속한 시일 안에 실시될 총선을 감시하는 유엔위원회를 설치하는 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한다.
3) 총선결과에 따라 유엔위원회 감시 하에 남북조선에서 임시국회가 구성되고, 임시정부가 수립될 것이다.  
4) 미국은 유엔위원회와 조선임시정부에게 미소 양국 군대가 철수하는 시기를 결정하는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5) 만약 위의 계획이 실패하면, 미국은 미국이 점령한 남조선을 발전시키는 계획을 추진할 것이다. 

위의 인용문 중에서 “만약 위의 계획이 실패하면, 미국은 미국이 점령한 남조선을 발전시키는 계획을 추진할 것”이라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남북조선에서 유엔위원회의 감시 하에 총선이 실시될 것으로 예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스크바협정을 파기한 총선은 소련의 반대에 가로막혀 북조선에서 실시될 수 없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총선이 남북조선에서 실시될 수 없을 것으로 예상한 미국은 자기들이 점령한 남조선에서만 유엔위원회 감시 하에 단독선거를 실시하고,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별도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마셜은 유엔총회 연설 중에 그 별도의 계획이 이미 준비되었음을 밝혔던 것이다.

민중의 관점에서 보면,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미국의 계획은 모스크바협정을 파기하고 38도선을 분단선으로 고착시키려는 반통일계획일 뿐 아니라,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민주주의혁명을 가로막고 억압과 착취가 자행되는 낡고 썩은 사회체제를 세우려는 반혁명계획이었다. 하지만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모스크바협정을 파기하고 38도선을 분단선으로 고착시키려는 반통일계획만 보일 뿐이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민주주의혁명을 가로막고 억압과 착취가 자행되는 낡고 썩은 사회체제를 세우려는 반혁명계획은 보이지 않는다. 

소련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추진하려는 반통일-반혁명계획이 소련의 이익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마셜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유엔총회 소련대표 안드레이 비신스키는 즉각 발언기회를 얻어 미국의 주장을 배격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선문제를 해결하려는 미소공동위원회의 노력이 진전되지 않는 책임이 소련에게 있다고 하면서, 조선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하려는 미국의 행위는 조선을 통일된 민주주의독립국가로 건설하는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한 모스크바협정을 위반하는 것이다. 
2) 조선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하려는 미국의 조치를 반대한다.
3) 미국의 정책은 유엔을 파괴하고, 제3차 세계대전을 불러오고 있다.

소련이 미국의 독단과 전횡을 저지하려고 강하게 반대했지만, 미국은 1947년 9월 23일 조선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했다. 친미추종국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여 미국의 거수기로 전락한 유엔총회는 조선문제를 유엔에서 처리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찬성 41표, 반대 6표, 기권 7표로 채택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1947년 9월 26일 유엔총회 소련대표 비신스키는 유엔총회연설에서 조선문제를 유엔총회 의제에서 제외하고, 남북조선에서 소련군과 미국군을 동시에 철수하고, 조선문제를 조선인민에게 맡길 것을 제의했고, 같은 날 서울에서 진행된 미소공동위원회 제61차 회의에서 소련측 대표 테렌티 슈티꼬브는 소련군과 미국군을 동시에 철수하고 조선문제를 조선인민에게 맡길 것을 거듭 주장했지만, 이미 사흘 전에 유엔총회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채택된 미국의 제안을 뒤집을 수 없었다. 

미국이 추진하는 반통일-반혁명계획에 따라 8개 친미추종국 대표들로 구성된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이 1948년 1월 8일 서울에 나타났다. 미국이 유엔과 이승만 우익세력을 앞세워 조선을 남북으로 갈라놓고 민주주의혁명을 가로막은 비극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