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18

아메리카제국 100년, 제국의 시대는 끝났는가?

[한호석의 개벽예감](169)
자주시보 2015년 08월 17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아메리카제국 100년, 제국의 시대는 끝났는가?
2. 랭리급 항공모함에서 니미츠급 항공모함까지 95년
3.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4. 아메리카제국의 위성통신망에 드리운 종말징조
5. 패권적 지위의 상실이 아니라 제국의 해체다


▲ <사진 1> 1915년 2월 8일 미국의 저명한 영화감독 데이빗 그리피스가 제작한 영화 '국가의 탄생'이 로스앤젤레스에서 개봉상영되었다. 당시 미국사회는 미국내전의 상처를 반세기만에 털어버리고 신흥제국으로 일어선 미국의 모습을 비쳐주는 그 영화에 열광하였다. 아메리카제국 100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1. 아메리카제국 100년, 제국의 시대는 끝났는가?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Is the American Century Over?) 이 물음은 2015년 1월 미국에서 출판된 화제의 저서에 붙어있는 제목이다. 그 저서를 집필한 사람은 1990년대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가정보위원회 의장, 국방부 국제안보담당 차관을 연이어 지냈고, 지금은 하버드대학교 석좌교수, 국무부 대외정책부 위원, 국방부 정책부 위원으로 활동하는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조셉 나이(Joseph S. Nye, Jr.)다. 이름이 꽤나 알려졌다는 정치학자들이 거의 모두 그런 것처럼, 조셉 나이도 아메리카제국을 옹호하는 자기의 정치성향을 숨기지 않는다.

조셉 나이 교수는 자기 저서에서 ‘미국의 세기’라는 말을 썼지만, 그건 지배세력의 비위에 맞는 치장언어에 지나지 않는다. 더 정확한 말을 쓰면, ‘미국의 세기’가 아니라 아메리카제국의 세기라고 해야 한다. 그가 자기 저서에서 제기한 물음을 나의 언어방식으로 옮기면, 아메리카제국의 세기는 끝났는가라는 물음으로 대체될 수 있다. 

조셉 나이 교수가 자기 저서에서 사용한 ‘미국의 세기’라는 말에서 세기는 100년을 뜻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 저서에서 지난 100년 동안 지속되어온 아메리카제국의 세기가 끝났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그에 대해 답한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아메리카제국의 한 세기 100년은 이제 끝난 것일까?

조셉 나이 교수는 지난 100년 동안 지속되어온 아메리카제국의 세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자기 저서에서 결론하였다. 그는 그런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몇 가지 논거를 늘어놓았지만,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런 논거들은 사실관계에 맞지 않는 억지주장으로 보인다. 나는 그가 늘어놓은 논거들을 일일이 논박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나는 이 글에서 다른 논거를 제시하면서 아메리카제국의 세기가 끝났음을 논증하려 한다.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라는 제목이 붙은, 조셉 나이 교수의 저서가 2015년 1월에 출간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미국의 세기’가 시작된 1915년으로부터 100년이 되는 2015년 1월에 맞춰 그 저서가 출간되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미국이 신흥제국으로 출현한 원년,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5년에 그 신흥제국에서 무슨 특기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일까?
 

미국의 저명한 영화감독 데이빗 그리피스(David L. W. Griffith)가 제작한 영화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이 1915년 2월 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처음 상영되었다. <사진 1> 오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51달러나 되는 고액의 입장권을 사야 관람할 수 있었던 그 영화는 당시 뉴욕 맨해튼 극장가에서 무려 44주 동안 연속상영되면서 놀라운 흥행기록을 세웠는데, 1936년에 미국 극장가를 휩쓸었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흥행수익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미국 영화사상 두 번째로 많은 흥행수익을 올렸다. 웃드로우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당시 미국 대통령도 백악관 정원에 임시로 설치된 영사막 앞에서 그 영화를 관람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영화 ‘국가의 탄생’이 불러일으킨 관람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알 수 있다. 

1915년의 미국사회는 왜 그 영화에 열광한 것일까? ‘국가의 탄생’이라는 영화제목에서 진한 냄새가 풍기는 것처럼, 1861년부터 1865년까지 계속된 내전으로 입은 상처를 반세기만에 털어버리고 신흥제국으로 일어선 미국의 모습을 형상한 영화이었기에 당시 미국사회가 그토록 열광했던 것이다. 

▲ <사진 2> 이 사진에 보이는 거대한 증기선은 당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영국의 여객선 루시태니어호다. 1915년 5월 7일 미국 뉴욕항을 떠나 영국 리버풀항으로 항해하던 루시태니어호는 독일 잠수함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하였다. 1,191명이 몰살당한 그 날의 대참사는 1815년부터 100년 동안 전 세계를 지배해온 대영제국의 시대가 끝났음을 말해준 극적인 사건이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1915년 신흥제국으로 일어선 미국은 1917년 4월 6일 대독선전포고를 발표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는데, 미국의 참전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사건은 1915년 5월 7일 미국 뉴욕항을 떠나 영국 리버풀항으로 항해하던 44,000t급 영국 여객선 루시태니어(Lusitania)호가 아일랜드 앞바다에서 독일 잠수함 U-20의 어뢰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바람에 1,191명이 몰살당한 대참사였다. 그 여객선에 탔다가 졸지에 사망한 미국인은 128명이었는데, 미국인 사망자들 가운데 저명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미국의 분노가 컸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영국의 여객선이 유럽의 2등 국가인 독일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한 대참사는 1815년부터 100년 동안 이어진 대영제국의 시대가 끝났음을 말해준 극적인 사건이었다. <사진 2> 역사가들은 중국에서부터 아르헨티나에 이르는 세계적인 범위에서 2,600만㎢에 이르는 식민지영토를 강점하고, 4억 명에 이르는 식민지인구를 지배, 착취한 대영제국의 시대가 1815년부터 1914년까지 100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본다.

역사가들이 공인하는 것처럼, 대영제국을 유지시켜준 핵심수단은 증기로 움직이는 군함과 전선을 통해 정보를 주고받는 전보였다. 당시로서는 최강의 무력수단이었던 증기군함과 당시로서는 최첨단 통신수단이었던 전보통신이 없었더라면, 대영제국의 시대는 1915년 이전에 일찌감치 막을 내렸을 것이다.

대영제국의 시대가 막을 내린 1915년에 미국에서 신흥제국의 탄생을 알리는 문제의 영화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장기상영된 것은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이었다. 영국 여객선 루시태니어호의 비극적 최후와 미국 영화 ‘국가의 탄생’의 열광적 흥행은, 대영제국의 시대가 아메리카제국의 시대로 대체되었음을 알려준 극적인 사건들이었다. 아메리카제국이 출현한 1915년으로부터 100년 세월이 흐른 오늘 2015년에 아메리카제국의 시대는 끝났는가라는 물음이 미국사회에서 제기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 <사진 3> 1850년대 대영제국 해군이 보유했던 2,300t급 호위함 밸로러스호의 모습을 그린 사실화다. 범선에 증기추진력을 추가한 이 호위함에는 함포가 19개 장착되었고, 승조원 175명이 탑승하였다. 1855년 흑해에 출동한 이 군함은 러시아제국 해군과 맞붙은 크리미아전쟁에 동원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영제국의 시대 100년 동안 그 제국을 유지시켜준 요인은 증기군함과 전보통신을 사용한 것이었다. 다른 나라 해군들이 범선을 타고 바다에 나갈 때, 영국 해군은 증기군함을 타고 바다를 누볐으니 그 무력격차는 너무 컸다. <사진 3> 또한 다른 나라 육군들이 말을 타고 달리는 연락병을 배치하여 파발마식 통신을 운영할 때, 영국 육군은 전기를 사용하는 전보통신체계(telegraph system)를 구축하였으니 그 기술격차는 너무 컸다. <사진 4>

▲ <사진 4> 영국인 발명가 프랜시스 로널즈가 1816년에 만든 첫 전보통신은 13km 떨어진 곳에 송신되었다. 이 사진은 1837년에 영국에서 처음으로 상업화된 전보통신기기를 촬영한 것이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지난날 대영제국을 유지시켜준 무력수단이 증기군함이었다면, 대영제국 이후에 등장한 아메리카제국을 유지시켜주는 무력수단은 핵추진 항공모함이다. 또한 지난날 대영제국을 유지시켜준 통신수단이 전보통신이었다면, 대영제국 이후에 등장한 아메리카제국을 유지시켜주는 통신수단은 위성통신이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오늘날 미국의 핵추진 항공모함 동향과 전지구적 위성통신망 동향을 분석적으로 고찰하여야 아메리카제국의 시대가 끝났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자명해진다.  

▲ <사진 5> 1920년 4월 미국은 대형 석탄운반선에 비행갑판을 올려놓은 첫 항공모함 랭리호를 만들었다. 13,900t급 항공모함 랭리호는 프로펠러식 함재기 36대를 실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미국은 모두 68척의 항공모함을 건조하였고, 그 항공모함을 해외침략전쟁에 내몰아 인류에게 말할 수 없는 재난과 고통을 들씌웠다. 아메리카제국의 항공모함 역사는 제국의 세계침략전쟁 역사와 겹쳐진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2. 랭리급 항공모함에서 니미츠급 항공모함까지 95년

미국이 첫 항공모함을 보유하게 된 때는 1920년 4월 11일이다. 미국의 첫 항공모함 랭리호(USS Langley)는 함재기 36대를 싣는 13,900t급 항공모함이었다. 약소국들을 식민지로 강점하기 위한 침략전쟁을 도발하려면 무엇보다 해군력을 강화해야 하였던 미국은 대형 석탄운반선 주피터호(USS Jupiter)를 항공모함으로 개조하여 첫 항공모함이 랭리호를 만들었다. <사진 5> 항공모함에 맛을 들인 미국은 곧이어 순양함을 개조한 항공모함 2척을 만들어냈는데, 렉싱턴호(USS Lexington)와 쌔러토가호(USS Saratoga)가 그것이다.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미국은 석탄운반선이나 순양함을 개조하는 식에서 벗어나 항모설계기술을 발전시켜 본격적으로 항공모함을 건조하게 되었는데, 그런 식으로 건조된 첫 항공모함은 1933년 2월 25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14,000t급 레인저호(USS Ranger)였다. 이 항공모함에는 함재기 86대를 실을 수 있었다.    

항공모함 랭리호가 건조된 1920년부터 항공모함 조지부쉬호(USS George H. W. Bush)가 건조된 2003년까지 83년 동안 미국이 건조한 항공모함은 모두 68척이다. 1920년부터 오늘까지 95년에 이르는 미국 항공모함 역사를 살펴보면, 세 차례의 획기적인 전환이 순차적으로 일어났다.

미국은 태평양전쟁 중이던 1942년 7월부터 1945년 5월까지 기간에 에쎅스급(Essex-class) 항공모함 24척을 건조하였는데, 항공모함을 그처럼 짧은 기간에 대량으로 건조한 것은 미국 항공모함 역사에서 첫 번째로 일어난 획기적인 전환이었다.

또한 미국은 6.25전쟁 중이던 1952년 7월 항공모함 역사에서 처음으로 포레스털급(Forrestal-class) 항공모함을 건조하여 초대형 항공모함 시대에 진입하였는데, 이것이 미국 항공모함 역사에서 두 번째 획기적인 전환이었다. 당시 미국이 초대형 항공모함을 건조한 까닭은,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함재기가 프로펠러기에서 제트기로 교체되자 제트기를 이착륙시키기 위한 길고 넓은 비행갑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52년부터 2003년까지 기간에 초대형 항공모함을 모두 19척 건조하였는데, 1960년 9월 24일 사상 처음으로 원자로를 장착한 핵추진 항공모함 인디펜던스호(USS Independence)를 건조하였다. 인디펜던스호의 건조는 40년에 걸친 재래식 항공모함 시대가 막을 내리고 핵추진식 항공모함이 등장한, 미국 항공모함 역사에서 세 번째 획기적인 전환으로 되었다. 2015년 현재 미해군이 보유한 초대형 핵추진 항공모함 10척은 모두 니미츠급(Nimitz-class) 항공모함들이다. 니미츠급 항공모함 이외에, 2015년 현재 미국이 건조 중인 포드급(Ford-class) 초대형 핵추진 항공모함 1척은 2016년에 완성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95년에 이르는 미국 항공모함 역사를 고찰하면, 항공모함이라는 강력한 무력수단을 가지고 약소국들을 침략하고 전 세계를 지배해온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가 무너지고 있음을 알려주는 종말징조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종말징조들은 아래와 같다.
 
 
3.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알려주는 첫 번째 종말징조는 미국의 항공모함 건조능력이 감소된 현상이다. 지난 1940년대에 10년 동안 재래식 항공모함 27척을 건조하여 전무후무한 항모건조기록을 세웠고, 그 이후에도 핵추진 항공모함을 10년 단위로 2~3척씩 꾸준히 건조해오던 미국은 2010년대에 접어들어 핵추진 항공모함을 10년 동안 겨우 1척밖에 건조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항공모함 건조능력이 눈에 띄게 감소되었음을 말해준다. 

2015년 4월 2일 미국 국방부 부장관 로벗 워크(Robert O. Work)가 작성하여 미국 연방의회 상하원군사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 ‘해군전함 장기건조계획’에 따르면, 미국은 2018년부터 2043년까지 기간에 포드급 항공모함을 5년마다 1척씩 건조하여 모두 7척을 건조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그러나 그런 전망은 비현실적이다. 포드급 항공모함 1척을 건조하는데 드는 비용은 120억 달러나 되는데, 미국의 국가재정이 파산상태에 빠져든 조건에서 그처럼 막대한 건조비가 드는 항공모함을 5년마다 1척씩 건조할 것이라는 미국 국방부의 전망은 파산 직전에 있는 국가재정능력을 무시한 비현실적인 발상이다.

▲ <사진 6> 미국이 조선을 공격하기 위해 일본 요꼬스까 미해군기지에 상시적으로 전진배치해둔 핵추진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는 2015년 5월 18일 그 기지를 떠나 미국 본토의 해군정비소로 갔다. 그런데 지금 국가재정파산위기에 빠진 미국은 조지워싱턴호를 퇴역 1순위로 지목하였다. 미국에서 제2차 국방비자동삭감조치가 불가피한데, 그렇게 되면 조지워싱턴호는 고철로 해체될 수밖에 없다. 미해군 항공모함 작전력이 급속히 하락하는 현상은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종말징조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알려주는 두 번째 종말징조는 미국의 항공모함 운용능력이 격감된 현상이다.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라는 제목이 붙은, 조셉 나이 교수의 저서가 미국 서점가에 나온 때로부터 넉 달이 지난 2015년 5월 18일 일본 요꼬스까 미해군기지에서 환송식이 진행되었다. <사진 6> 2008년 9월 미해군 역사상 처음으로 해외기지에 상시적으로 전진배치되었던 핵추진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USS George Washington)가 원자로연료를 교체하고 정비와 수리를 받기 위해 미국 본토의 해군정비소로 돌아가는 환송식이었다. 원래 핵추진 항공모함은 25년마다 한 차례씩 원자로연료를 교체해주고 전체적인 정비와 수리를 받아야 하는데, 올해 조지워싱턴호의 차례가 된 것이다. 해군정비소에서 항공모함의 원자로연료를 교체하고 전체적인 정비와 수리를 받으려면 3년이 걸린다.

하지만 조지워싱턴호는 앞으로 3년 뒤에 요꼬스까 미해군기지에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영영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군 소식지 <성조> 2014년 2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척 헤이글(Chuck Hagel) 당시 미국 국방장관은 국가재정자동삭감조치가 또 다시 시행되는 경우 조지워싱턴호를 2016년에 퇴역시킬 수밖에 없으며, 운영비를 절약하기 위해 미해군 항모강습단 10개 가운데 절반의 작전회수를 줄여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로이터통신> 2014년 3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2014년 3월 25일 미국 연방하원 세입세출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한 미국 해군장관 레이먼드 메이버스(Raymond E. Mabus, Jr.)는 내구년한이 이미 절반이 지난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의 경우 원자로연료를 교체해주고 정비수리를 하는가 아니면 퇴역시키는가 하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국방비 대폭삭감으로 재정적 불확실성이 커지는 바람에 그 결정도 1년 이상 지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발언에 따르면, 미해군은 조지워싱턴호를 계속 운용하고 싶지만, 항공모함 운영비를 5년 동안 70억 달러나 지출해야 하므로 국방비를 대폭 삭감하게 된 조건에서 항공모함의 퇴역문제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1척당 가격이 45억 달러가 되는 니미츠급 핵추진 항공모함을 운영하려면, 연간 승무원급여 1억6천만 달러, 연간 연료비 및 유지비 4억 달러를 지출해야 한다. 세계경제 9월 위기설로 불안에 떠는 미국에게 국방비의 추가삭감조치는 불가피한데, 그렇게 되면 운영비가 가장 많이 드는 항공모함부터 퇴역시키라는 압박이 커질 것이고, 그럴 경우 미해군 7함대 소속 조지워싱턴호가 제1순위 퇴역대상인 것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2011년 12월 6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방비가 1조 달러 삭감되는 경우 항공모함 2척을 동시퇴역시켜야 한다.

지난 시기 미국은 해외 각지의 해상작전구역들에 항공모함 3척을 전진배치해놓고, 또 다른 항공모함 3척을 북미대륙 인근해역에 대기시켰는데, 2015년 현재 미국이 해외 각지의 해상작전구역들에 전진배치한 항공모함은 2척으로 줄었고, 북미대륙 인근해역에 대기시킨 항공모함은 1척으로 줄었다. 미국의 군사전문 웹싸이트 <브레이킹 디펜스(Breaking Defense)> 2015년 7월 7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올가을 미국 항공모함 역사에서 처음으로 중동해역에 항공모함을 1척도 배치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2015년 5월 18일 요꼬스까 미해군기지에서 미국 본토의 해군정비소로 떠난 조지워싱턴호의 귀로는 고철더미로 해체될 퇴역의 항로였음을 알 수 있다.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알려주는 세 번째 종말징조는 미국의 적국 또는 잠재적국이 미해군 항공모함을 격침시킬 치명적인 공격능력을 강화한 것이다. 미해군 항공모함을 격침시킬 두 가지 치명적인 무력수단은 디젤전동식 잠수함과 대함탄도미사일(ASBM)이다.

미국 군사전문가들의 견해를 인용한 <UPI> 2008년 4월 9일 보도에 따르면, 미해군 항공모함은 러시아산 디젤전동식 킬로급(Kilo-class) 잠수함의 수중공격위협에 노출되었다. 항공모함이 두려워하는 최강의 적수가 수중소음이 가장 적은 디젤전동식 스텔스 잠수함이라는 사실은 군사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미국의 군사전문 웹싸이트 <디펜스 뉴스(Defense News)>가 2013년 3월 12일에 인용, 보도한 미국신안보센터(CNAS) 보고서에 따르면, 대함탄도미사일이 실전배치된 이후 미해군 항공모함은 공격대상에 접근하기도 힘들게 되었고, 미사일공격을 받기 쉬운 취약성을 드러내는 바람에 현대전을 수행하기에 부적합한 ‘애물단지’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예컨대, 미해군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함재기의 작전비행거리는 482km밖에 되지 않는데, 중국이 실전배치한 항모타격미사일 둥펑-21D의 사거리는 1,500km나 된다. 이것은 미해군 항공모함이 함재기 편대를 발진시켜 중국의 군사기지를 공격하기 전에 중국에서 발사된 항모타격미사일이 미해군 항공모함을 공격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 <사진 7> 미국 군사전문가들은 중국의 잠수함과 항모타격미사일이 미해군 항공모함을 위협하는 요인이라고 습관적으로 지목하지만, 미해군 항공모함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것은 조선이 올해 들어 세상에 공개한 전략잠수함, 금성-3호 대함미사일, 항모격침결사대다. 위의 사진은 조선의 전략잠수함이 금성-3호 대함미사일을 수중에서 성공적으로 발사한 직후 해수면 위로 떠오른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미국 군사전문가들은 미해군 항공모함의 위협요인을 거론할 때 중국의 잠수함과 항모타격미사일을 습관적으로 지적하지만, 그런 지적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미해군 항공모함에게 직접적인 위협요인으로 되는 것은, 미국 군사전문가들이 우려하는 중국의 잠수함과 항모타격미사일이 아니라 조선이 올해 들어 세상에 공개한 전략잠수함, 금성-3호 대함미사일, 항모격침결사대다. <사진 7> 이에 대해서는 이전에 발표한 나의 글들에서 논한 바 있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미국에게 강한 전의가 품지 않은 중국과 달리, 미국과는 반드시 최후결전을 벌이려는 강한 전의를 가진 조선이 미해군 항공모함을 격침시킬 치명적인 타격수단을 보유한 것이야말로 미국을 공포에 빠뜨리기에 충분하다. 

이제껏 5대양이 좁다하게 돌아치며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를 유지해준 핵추진 항공모함은 ‘세계 최강의 불침항모’라고 자랑하는 무력수단인데, 그런 무력수단의 작전력이 요즈음 급속히 약해지면서 조선으로부터 직접적인 격침위협까지 받게 된 것은 아메리카제국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극적인 변화다.
 
 
4. 아메리카제국의 위성통신망에 드리운 종말징조

아메리카제국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극적인 변화는 미해군 항공모함 작전력의 약화현상에서만 드러난 것이 아니다. 아메리카제국의 시대를 유지시켜주는 또 다른 핵심수단인 위성통신망이 미증유의 위험에 빠지게 된 것도 아메리카제국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극적인 변화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아메리카제국의 시대가 막 시작되었던 1916년 3월 8일 미국 보스턴 근교에 있는 터프스대학교에서 무선방송전파가 송출되었다. 미국인 발명가 해롤드 파워(Harold J. Power)가 3시간 동안 연속하여 진행한 그 무선방송은 세계 최초의 라디오방송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전보라는 유선통신망에 의해 1815년부터 1914년까지 100년 동안 유지되었던 대영제국의 시대는 1916년 미국에서 출현한 세계 최초의 무선방송에 의해 아메리카제국의 시대로 대체되었다.

그 이후 오늘까지 100년 동안 지속된 아메리카제국의 시대에 무선통신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되었다. 미국이 저지구궤도(LEO)로 쏘아올린 세계 최초의 통신위성 엑코(Echo)-1호가 우주공간에서 무선신호를 발신하기 시작한 1960년 8월 12일 인류는 위성통신시대에 접어들었다. 위성통신기술을 독점한 미국은 자기의 제국주의지배력과 제국주의침략무력을 더욱 공고하게 강화시키는 듯하였다. 

▲ <사진 8> 2007년 1월 11일 중국은 위성요격미사일을 발사하여 이미 수명이 다한 자국의 기상위성을 우주공간에서 파괴하였다. 이 사건은 위성통신기술을 독점하면서 전 세계를 지배해온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가 치명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오늘 미국에게 있어서 우주는 더 이상 독점공간도 안전공간도 아니다. 아메리카제국의 위성통신망에서 종말징조가 보인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그러나 위성통신기술 독점으로 그처럼 공고화된 듯이 보였던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는 2007년 1월 11일 치명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바로 그 날 중국이 위성요격미사일(ASAT)을 발사하여 이미 수명이 다한 자국의 기상위성을 우주공간에서 파괴한 것이다. <사진 8>

오는 2015년 10월 초 조선이 정지궤도를 향해 통신위성을 발사하면 그것은 중국이 위성요격미사일을 발사한 것보다 더 놀라운 사변으로 될 것이다. 올해 10월 초에 진행될 것이 확실해보이는 조선의 통신위성발사에 대해서는 이전에 발표한 나의 글에서 논한 바 있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위성요격미사일이 출현한 이후 미국의 전지구적 위성통신망은 무방비로 노출되었고, 우주는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니다.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를 유지시켜주는 위성통신망이 무방비로 노출되고 미증유의 위험에 빠진 것은 아메리카제국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극적인 변화다.
 
5. 패권적 지위의 상실이 아니라 제국의 해체다

세계자본주의체제를 지배해온 미국 금융자본의 총본산인 뉴욕 월스트릿 금융가에 군림하던 대형 투자은행들이 2008년 3월 16일부터 9월 16일까지 6개월 동안 사상 최악의 연쇄파산으로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이러다가 미국이 무너지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미국사회에 엄습하였다. 그런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의 불확실한 미래를 내다보는 몇 가지 견해들이 미국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미국에서 이름이 꽤나 알려진 폴 케네디(Paul M. Kennedy) 교수의 견해와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IC)의 견해를 각각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88년에 발간된 ‘강대국의 흥망’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미국 예일대학교 폴 케네디 교수는 2008년 10월 12일 영국 <썬데이 타임스>에 발표한 자신의 글에서 군사적 과잉팽창과 과도한 재정적자로 미국의 국력이 쇠락하였지만 ‘미국의 세기’가 당장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그는 오스만제국, 합스부르크왕가, 대영제국 같은 제국들이 무너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하면서, 제국은 패배와 파산의 상처를 입으면서도 오랜 기간 동안 자기 지위를 유지하게 된다고 지적하였다. 하지만 그는 미국이 패권적 지위를 오랜 기간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도, 그 기간이 어느 정도 연장될 것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못했다.  

미국 국가정보위원회는 2008년 11월 20일에 펴낸 보고서 ‘세계의 추세 2025년(Global Trend 2025)’에서 2025년쯤 미국의 패권주의가 무너지고 다극체제로 전환되면서 세계는 불안정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시기를 맞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폴 케네디 교수는 미국의 국력이 쇠퇴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미국의 패권적 지위가 앞으로 오랜 기간 유지될 것이라고 모호하게 언급하였지만, 미국 국가정보위원회는 앞으로 20년 뒤 미국은 패권적 지위를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미국의 국력이 차츰 쇠퇴하여 2025년에는 패권적 지위를 상실하게 되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 <사진 9> 위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아메리카제국은 전 세계 40개 나라들과 자기 해외영토들에 865개의 해외군사기지를 설치하였고, 그 군사기지들에서 약소국들에 대한 무력침공을 도발하고 있다. 2014년 현재 4,650만명이 식량전표에 의존하여 끼니를 잇는 빈곤한 나라 미국이 무력침공을 준비하는 해외군사기지들에 지출하는 연간 군사비는 무려 2,500억 달러나 된다. 아메리카제국은 이성을 잃고 광기를 부리는 거대한 육식공룡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그런데 주목하는 것은, 그들이 미국의 국력이 차츰 쇠퇴하여 20년 뒤에 패권적 지위를 상실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도 아메리카제국의 해체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20년 뒤에 아메리카제국이 자기의 패권적 지위를 상실해도 아메리카제국 자체는 해체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 것이다. 하지만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의 종말은 제국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인데, 아메리카제국의 해체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들의 전망은 핵심내용을 놓쳐버린 불투명한 전망으로 생각된다. <사진 9>

그런 그들과 달리, 아메리카제국의 해체를 정면으로 다룬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이 있다. 폭로와 비판의 칼날을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에 들이댄 저서들을 2004년부터 연속 발표하다가 2010년 8월 17일 자신의 마지막 저서 ‘제국의 해체: 미국이 지닌 최후, 최상의 희망(Dismantling the Empire: America's Last Best Hope)’을 세상에 내놓고 3개월 뒤 노환으로 별세한 차멀스 존슨(Charmers A. Johnson) 교수는 아메리카제국이 해체되어야 할 세 가지 논거를 이렇게 제시하였다. 

미국은 자기의 전후 팽창주의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 패하면 막대한 군비지출이 유발한 국가재정적자로 파산될 것이라는 점, 미국은 자기의 해외군사기지들에서 은밀히 자행되어온 현지여성들에 대한 성폭력, 납치, 살인 같은 범죄의 역사를 끝내야 한다는 점이다.

차멀스 존슨 교수는 아메리카제국이 마땅히 해체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논하여 미국의 양심을 흔들어 깨웠지만, 미국의 양심이 바라는 아메리카제국의 자진해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인류사에 출현하였던 다른 제국들의 멸망사가 말해주는 교훈은, 아메리카제국이 다른 군사강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항복할 때 해체되리라는 것이다.

▲ <사진 10> 이 사진에서 보는 조선의 선전화가 말해주는 것처럼, 전쟁광기를 부리며 약소국들을 짓눌러온 아메리카제국에 복수의 핵탄을 겨눈 조선은 아메리카제국을 해체할 반미대전에 주저없이 나설 것이다. 조선은 미국과 전면전을 벌일,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결전의 날은 임박하였다고 한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그렇다면 오늘날 어느 군사강국이 아메리카제국을 해체할 반미대전에 용감히 나설 수 있을까? 아메리카제국으로부터 무력침공과 봉쇄압박을 받은 최대 피해국, 그리하여 아메리카제국에 대한 피맺힌 원한 때문에 그 제국을 날강도 또는 승냥이무리라고 타매하는 반미자주국가, 아메리카제국과는 반드시 피로써 결산하겠노라고 불같이 다진 보복일념을 안고 60년 동안 허리띠 졸라매며 억척스레 최후결전을 준비해온 군사강국, 그리하여 전쟁광기를 부리며 약소국들을 짓눌러온 아메리카제국에 복수의 핵탄을 겨눈 핵무장국이 아메리카제국을 해체할 반미대전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사진 10>

“조성된 현실 앞에서 우리 군대와 인민은 날강도 미제를 과녁으로 삼은 우리의 거족적인 반미투쟁이 새로운 높은 단계에 진입한다는 것을 온 세계에 정식으로 공표한다.” 이 인용문은 2015년 6월 25일 조선국방위원회가 발표한 성명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 구절을 읽으면, 아메리카제국을 해체하려는 조선의 결전의지가 얼마나 강렬하고 단호한지 누구나 직감할 수 있다. 1915년부터 오늘까지 100년 동안 지속되어온 ‘미국의 세기’가 끝났는가라는 물음에 조선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대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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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1

해방은 1945년 8월 16일 하루뿐이었다

[한호석의 개벽예감](168)
자주시보 2015년 08월 10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1945년 8.15 이후 38도선 이남의 민심
2. 두 차례 연속 핵참화를 입고서도 즉각 항복하지 않은 일제
3. 일왕의 8.15 라디오방송은 항복방송이 아니었다
4. 미주리호 함상의 항복문서조인식은 희대의 기만극
5. 점령군 군용기편으로 귀국한 조선총독
6. 포츠담 회의에서 미국이 꾸민 음모
7. 미국을 위해 총을 쏘고, 미국인보다 앞서 피 흘리는 군사기지

▲ <사진 1> 이 사진은 1945년 8월 16일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의 당시 명칭)에서 석방된 항일운동가들이 환영인파 속에서 만세를 부르는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석방이 해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안재홍의 말대로, 남조선에서 해방은 항일운동가들이 석방된 바로 그날 하루뿐이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1. 1945년 8.15 이후 38도선 이남의 민심

올해도 어김없이 8.15가 다가왔다. 해마다 8.15를 맞는 한국인들은 일제식민통치로부터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었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주관적 믿음이지 객관적 사실은 아니다. 한국인들은 올해 70번째 8.15를 맞았으나, 한국에서 광복절이라고 부르는 8.15는 해방의 날이 아니다. 8.15가 해방의 날이라고 가르쳐온 주입식 역사교육에 의해 한국인들은 8.15를 해방의 날이라 믿는 것이지, 실제로 그날은 해방의 날이 아니었다. <사진 1>

8.15가 해방의 날이 아니었다는 말은 1945년 8월 15일이 해방의 날이 아니었으나 그날 이후 일정한 시기가 지난 뒤에 해방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1945년 8월 15일로부터 70년이 지난 오늘까지 여전히 해방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왜 그런 것일까?
아래에 인용하는 두 사람의 발언은 이제껏 8.15에 대해 알고 있었던 한국인들의 역사인식이 무지와 오해에 지나지 않았음을 드러내준다.

여기에 인용하는 첫 번째 발언은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가로 활동하였고 8.15 직후 38도선 이남에서 우파정치인으로 활동하였던 안재홍이 남긴 말인데, 그는 “남조선에서 해방은 1945년 8월 16일 하루뿐이었다”고 말했다.

여기에 인용하는 두 번째 발언은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2006년에 발굴한 2,000여 장의 편지들 가운데 어느 편지의 일절인데, 그 편지들은 1947년 8월 미국 대통령 특사자격으로 사절단을 이끌고 서울을 방문했던 앨벗 웨드마이어(Albert C. Wedmeyer)에게 38도선 이남에 살던 일반인들이 보낸, 당시의 민심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자료다. 그 편지에는 “1945년 8월 15일 이후 순간적으로 해방의 맛을 보았으나 이제 와서는 구속과 고통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고 쓰여 있다.

위의 두 인용문이 말해주는 것처럼, 1948년 8월 15일 38도선 이남에 분단정부가 세워지기 전 남조선이라 불렀던 지역의 민심은 8.15를 해방의 날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을 해방의 날로 여기지 않은 남조선의 민심은, 1945년 8월 15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남조선이 여전히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1948년 8월 16일부터 오늘까지도 그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948년 8월 15일부터 오늘까지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누려왔다고 생각하는 한국인들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8.15가 해방의 날이 아니라는 말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8.15가 해방이 아니라고 여겼던 70년 전 남조선의 민심이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서 그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지, 당시의 그런 민심은 8.15를 전후하여 복잡하게 전개된 사회정치상황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8.15를 전후하여 복잡하게 전개된 사회정치상황을 살펴보면, 8.15를 해방의 날로 여기지 않았던 당시 남조선의 민심을 넉넉히 이해할 수 있다.
 
 
2. 두 차례 연속 핵참화를 입고서도 즉각 항복하지 않은 일제

1945년 3월 10일 미국은 B-29 폭격기 344대를 동원하여 일본 도꾜를 맹폭하였다. 도꾜대공습으로 10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지만 일제는 ‘국체호지(國體護持)’를 외치고 발악하면서 순순히 항복하지 않았다. 미국은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핵탄을 투하하였고, 그로부터 사흘 뒤 일본 나가사끼에 두 번째 핵탄을 투하하였으나, 일제는 두 차례 연속 핵참화를 입고서도 즉각 항복하지 않았다. 미국의 핵탄투하에 놀란 일제가 무조건 항복하였다는 기존 인식은 미국식 역사교육에 의해 주입된 착오다. 일제가 항복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의 핵탄투하가 아니라 소련의 대일전쟁이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대일선전포고를 내고 대일전쟁에 돌입하였는데, 2014년 9월 9일 일본 궁내청이 공개한 ‘쇼와천황실록’에 따르면, 일왕 히로히도(裕仁)는 1945년 8월 9일 오전 9시 37분 소련군이 대일전쟁을 개시하였다는 긴급보고를 받은지 18분 만에 다급하게 종전을 결정하였고 한다. 일왕 히로히도가 항복결정이 아니라 종전결정을 내렸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사진 2> 1945년 8월 9일 대일전쟁에 돌입한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며 일제관동군과 만주제국을 궤멸시켰고, 일제는 패주하고 투항하기에 바빴다. 이 사진은 1945년 8월 중순 만주해방전투에서 소련군에 투항한 관동군병사들이 무장해제를 당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대일전쟁에 돌입한 소련군은 만주방면과 한반도방면으로 각각 진격하였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진격이었다. <사진 2> 소련군 본대가 만주해방전투를 개시한지 이틀만인 1945년 8월 11일 소련군 선발대가 함경북도 라진에 상륙하였다. 조선의 역사자료에 따르면, 소련군이 대일전쟁에 돌입하였던 1945년 8월 9일 김일성 사령은 조선인민혁명군에게 대일공격명령을 내렸고, 그 명령에 따라 조선인민혁명군은 라진에 상륙한 소련군 선발대와 함께 8월 12일 라진해방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소련군이 경성(서울의 당시 명칭)에서 북동쪽 직선거리로 약 370km 떨어진 라진에 상륙하였을 때, 미국군은 경성에서 남서쪽 직선거리로 약 780km 떨어진 일본 오끼나와를 점령하고 있었다. 소련군의 맹렬한 진격속도를 가늠해보면, 라진에 선발대를 상륙시킨 소련군은 미국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훨씬 전에 한반도를 종단, 남진하여 부산과 목포에 각각 도달할 수 있었다. 소련군의 맹렬한 진격속도를 보고 다급해진 미국의 전쟁지휘부는 소련군 선발대가 라진에 상륙한 바로 그 날 미10군에게 조선을 점령하라는 긴급작전명령을 내렸다.

실제로 소련군이 한반도에 상륙한 날은 8월 11일이었고, 미국군이 한반도에 상륙한 날은 9월 7일이었다. 남조선점령군사령관 존 하지(John R. Hodge)가 지휘하는 제7상륙부대와 미해군제독 토머스 킨케이드(Thomas G. Kincaid)가 지휘하는 제7함대로 구성된 25척의 함대가 인천에 들어간 날은 1945년 9월 7일이었다. 만일 미국이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하지 않았더라면 소련군은 부산과 목포까지 곧바로 진격하였을 것이다.
 
 
3. 일왕의 8.15 라디오방송은 항복방송이 아니었다

주목하는 것은, 조선인민혁명군과 소련군이 라진해방전투에서 승리한 1945년 8월 12일부터 일제가 항복문서에 조인한 9월 2일까지 실로 급박하고 격동적이었던 그 기간에 일제가 취한 괴이한 행동들이다. 당시 일제가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를 말해주는 역사적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왕 히로히도는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라디오방송을 통해 ‘대동아전쟁종결조서(大東亞戰爭終結詔書)’라는 것을 읽어 내려간 육성녹음을 내보냈다. 그것은 명백하게도 항복방송이 아니라 종전방송이었다. 일제가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하였다는 것은 무지가 빚어낸 인식착오다. 일제는 1945년 9월 2일 오전 9시 도꾜만에 정박해있던 미해군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할 때까지 항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제는 왜 8월 15일에 항복하지 않고 계속 버티다가 9월 2일에 항복하였을까? 그 까닭은 미국군이 일본에 상륙하기를 기다렸다가 미국에게 항복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미국군 7,300명과 영국군 450명으로 구성된 미영연합함대가 일본 도꾜만에 있는 요꾜스까에 입항한 날은 1945년 8월 30일이었다. 

일왕 히로히도의 종전방송이 나오기 13시간 전인 1945년 8월 14일 오후 11시경 조선총독부는 소련군의 경성점령에 대비하는 비상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심야회의를 진행하였다. 심야회의 결정에 따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또 류사꾸(遠藤柳作)는 일왕의 종전방송이 나오기 6시간 전인 1945년 8월 15일 오전 6시 여운형을 급히 만났다. 일제가 패전하는 위기상황에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저명한 항일운동가 여운형을 급히 만난 까닭은, 만일 소련군이 경성을 점령하면 여운형을 내세워 전후처리문제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1919년 말에 일제의 초청을 받고 도꾜를 방문하는 중에 일제의 회유를 물리치고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하여 일본정계를 뒤흔들어놓았고, 1922년 초에는 동방민족대표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련 모스끄바를 방문하는 중에 레닌을 만나 조선독립에 관한 소련의 지지를 이끌어낸 여운형의 특별한 경력 때문에 조선총독부가 위기상황에서 그의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엔또 류사꾸는 여운형에게 8월 17일 오후 2시경에 소련군 선발대가 경성에 들어올 것이라고 말했고, 이튿날인 1945년 8월 16일 여운형을 다시 만난 자리에서는 미국군이 한반도 남단의 부산과 목포를 점령할 것이며, 소련군은 한반도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할 것이라고 말했다.

엔또 류사꾸가 여운형에게 그런 정보를 알려준 날, 일제가 괴뢰국으로 조작해놓은 만주제국의 수도 신경(오늘의 장춘)으로 진격한 소련군은 그 도시에 주둔한 관동군사령부를 점령하였다. 소련군이 진격해오자 사령부를 버리고 달아났던 관동군사령관 야마다 오또조(山田乙三)는 1945년 8월 23일 소련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 <사진 3> 이 사진은 일제가 1926년에 준공한 조선총동부 청사를 촬영한 것이다. 지금 광화문이 있는 자리에 이 건물이 있었다. 악랄한 식민통치의 총본산이었던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 14일 밤 소련군의 경성점령을 예상하고 공포와 불안에 빠져들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만주에서 일제의 식민통치기구와 침략무력이 소련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에 접한 조선총독부는, 위에 인용한 엔또 류사꾸의 발언에서 드러난 것처럼, 소련군이 경성을 점령하여 조선총독부의 항복을 받아내고 조선주둔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할 것으로 예상하면서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혔다. <사진 3>

미국의 시사주간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 1959년 11월 2일부에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전후처리를 주도한 조지 마샬(George C. Marshall)이 노환으로 사망하기 직전에 남긴 대담기록이 실렸는데, 마샬은 일제가 패전하기 직전 조선주둔일본군사령관의 동향에 대해 이런 회고담을 남겼다.
“우리는 일본의 연락문을 감청하였다. 그 연락문은 조선주둔일본군사령관이 그들의 본국에 있는 대본영으로 보낸 것이다. 연락문은 공산주의자들이 조선으로 밀려오고 있는 상황이므로, 미국이 조선을 공격할 때 미국군에게 항복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들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두려워하였는데, 그것은 응당한 걱정이었다.”

조선총독부와 조선주둔일본군사령부가 소련군의 경성점령을 예상하고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소련군의 맹렬한 진격속도를 보고 다급해진 일왕 히로히도는 1945년 8월 17일 미국이 제시한 항복조건을 수락하겠다는 항복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당시 필리핀 마닐라에 있던 미극동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에게 자신의 밀사를 급파하였다. 원래 일왕 히로히도는 일제가 식민지로 강점한 모든 해외영토를 포기하되 자기들에게 식량과 자원을 보급해주는 조선과 대만은 종전대로 식민지로 보유하는 조건으로 항복함으로써 일제의 완전파멸을 방지하고 소련의 참전 이전에 종전한다는 조건부 항복의사를 미국에게 전달한 바 있었는데, 소련군의 맹렬한 진격으로 전황이 자기들에게 매우 불리해지자 무조건 항복의사를 타진한 것이었다. 어째든 일왕 히로히도는 막전에서 종전방송을 내보내면서도 막후에서는 항복의사를 타진한 것인데, 그의 종전방송은 막후에서 은밀히 미국에게만 항복의사를 밝히려는 교활한 연막전술이었다. 
 
 
4. 미주리호 함상의 항복문서조인식은 희대의 기만극

소련군이 강원도 원산에 상륙하였던 1945년 8월 18일 일제가 괴뢰국으로 조작해놓은 만주제국이 멸망하였다. 소련군의 맹렬한 진격속도를 보고 다급해진 맥아더는 바로 그날 일본군과 일제식민통치기구에게 “공인되지 않은 현지 세력에게 항복하지 말고, 기존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라”는 긴급성명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일제가 미국군에게 항복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만주해방전투에서 승리한 소련군이 1945년 8월 21일 만주 지린성 옌지(延吉)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무장해제협정을 맺기 하루 전날인 8월 20일 맥아더는 일본군 육군대장 가와베 또라시로(河邊虎四郞)를 단장으로 하여 16명으로 구성된 일제의 사절단을 만난 자리에서 그들에게 미국의 전략방침을 하달하였다. 그 전략방침은 미국이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할 것이므로, 미국군은 이남지역에서 조선주둔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게 되고 소련군은 이북지역에서 조선주둔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게 된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38도선 이남의 경성에 있는 조선주둔일본군사령부가 미국군으로부터 무장해제를 받게 되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맥아더를 통해 미국의 전략방침을 받고 안심하게 된 히로히도는 1945년 8월 28일 일본은 미국군의 “조속한 조선상륙을 열렬히 기다린다”는 내용의 전문을 맥아더에게 보냈다. 히로히도의 전문을 받은 맥아더는 미국군이 8월 30일 일본에 상륙하고, 9월 8일에 조선에 상륙할 것이므로, 8월 31일부터 조선주둔일본군사령관이 조선에 상륙할 미국군사령관에게 직접 연락하라는 내용의 답신을 히로히도에게 보냈다. 그리하여 1945년 8월 31일부터 9월 4일까지 조선주둔일본군사령관 고즈끼 요시오(上月良夫)와 남조선점령임무를 맡은 미24군사령관 존 하지(John R. Hodge) 사이에서 40차례 이상의 비밀전문이 오갔다.

▲ <사진 4> 1945년 9월 2일 오전 9시 도꾜만에 정박한 미해군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 외상 시게미쯔 마모루가 점령군사령관 맥아더가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조인하고 있다. 하지만 그 항복문서조인식은 소련에게 항복하지 않으려는 일제가 미국에게 항복하는 척하였던 희대의 기만극이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적군의 조속한 상륙을 열렬히 기다리면서, 자국 영토를 무력으로 점령할 적군 사령관과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은 일제의 행동은 세계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참으로 괴이한 행동이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1945년 9월 2일 오전 9시 도꾜만에 정박한 배수량 45,000t급 미해군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 나타난 점령군사령관 맥아더 앞에서 패전국 외상 시게미쯔 마모루(重光葵)가 항복문서에 조인한 것은, 소련에게 항복하지 않으려는 일제가 미국에게 항복하는 척하였던 희대의 기만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4> 미국과 일제가 미주리주 함상에서 연출한 기만적인 항복문서조인식은 그 두 나라가 더 이상 적대국이 아니며, 공동의 적인 소련과 대결하고 한반도의 통일독립을 저지하기 위한 은밀한 결탁관계에 빠져들었음을 말해준 사건이었다. 
 
 
5. 점령군 군용기편으로 귀국한 조선총독

승전국 미국과 패전국 일제가 공동의 적인 소련과 대결하고 한반도의 통일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은밀히 결탁한 것은, 남조선점령군사령관이 조선총독의 식민통치권을 넘겨받는 충격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1945년 9월 9일 오후 3시 45분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진행된 조인식이 바로 그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조인식장에는 미24군사령관 존 하지, 미7함대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미70사단 사단장 아취볼드 아놀드(Archibold V. Arnold)가 참석하였고,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끼(阿部信行), 조선주둔일본군사령관 고즈끼 요시오, 경비사령관 야마구찌 기이찌(山口儀一)가 참석하였다.

그런데 그 조인식은 항복문서조인식이 아니라 일제식민통치권을 미국이 넘겨받는 통치권이양식이었다.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끼와 남조선점령군사령관 하지는 조선총독의 남조선 식민통치권을 남조선점령군사령관에게 넘겨주는 통치권이양문서에 서명하였다. 통치권이양식을 마친 남조선점령군과 조선총독부는 당일 오후 4시 35분 조선총독부 앞마당에서 국기교체식을 진행하였다. 조선총독부 국기게양대에서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올라갔다.

▲ <사진 5> 1945년 9월 9일 오후 3시 45분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조선총독의 식민통치권을 남조선점령군사령관에게 이양하는 통치권이양식이 진행되었고, 곧이어 4시 35분에는 조선총독부 앞마당에서 국기교체식이 진행되었다.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올라갔다. 미군정 3년은 일제식민통치의 연장이었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권을 넘겨받은 남조선점령군사령관 존 하지는 1945년 9월 14일 총독을 비롯한 조선총독부 관리들을 사법처리하지 않고 해임하였고, 남조선 각 지방의 일제 관리들을 10월 17일에 해임하였다. 그런 까닭에 경성의 조선총독부에서는 일장기가 성조기로 교체되었어도 남조선 지방관청들에서는 10월 10일까지 일장기가 여전히 게양되어 있었다. 남조선점령군에게 식민통치권을 넘겨준 조선총독과 휘하 관리들은 남조선점령군사령관이 친절하게 마련해준 군용기에 몸을 싣고 9월 19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끼는 점령군 군용기를 타고 경성을 떠나면서 이런 끔찍한 저주를 내뱉었다고 한다.

“우리가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우리 대일본제국은 조선인들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결국 그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의 삶을 살 것이다. 과거의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오늘의 조선은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한 것이다. 나 아베 노부유끼는 반도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

남조선점령군사령관 존 하지가 조선총독부로부터 이양받은 식민통치권을 행사할 군정청이 설립된 날은 1946년 1월 4일이었는데, 명백하게도, 미군정 3년은 일제식민통치의 연장이었다.
 
 
6. 포츠담 회의에서 미국이 꾸민 음모

미국과 일제의 은밀한 반소반공결탁은 일제식민통치권이 미군정으로 이양된 것으로만 귀결되지 않았다. 미군정은 3년 만에 종식되었고 이 땅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미국과 일제의 반소반공결탁은 두 가지 비극적 사태로 귀결되었다. 첫째는 38도선을 가운데 두고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진 비극적 사태이고, 둘째는 38도선 이남지역이 미국의 반공군사기지로 전락된 비극적 사태다.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한 미국의 음모는,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2013년 서울에서 펴낸 책 ‘한반도 분할의 역사’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 책에는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굴한, 미국의 한반도 분할음모에 관한 새로운 자료가 실렸다. 그 새로운 자료는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 중에 한반도 분할선을 구상한 미국군 작전국장 존 헐(John E. Hull)이 1949년 6월 17일 미국군 대령 해리스와 전화로 통화한 내용을 녹취한 것이다. 헐은 전화통화에서 이런 회고담을 늘어놓았다. “제임스 번스(James F. Byrnes)는 (미국이) 소련과 함께 조선을 분할하기를 원했다. 번스는 미국이 조선에 상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전략가들은 3개의 주요항구를 주목했고, 이 중 2개의 항구(부산과 인천)를 우리쪽에 포함시켜야 하며, 서울 바로 북쪽에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38도선을 따라 선을 긋는 것이 가장 좋은 위치라고 판단했다.”

▲ <사진 6>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미국, 소련, 영국이 동아시아와 유럽의 종전문제 및 전후처리문제를 포괄적으로 논의한 포츠담 회의가 진행되었다. 이 사진은 포츠담 회의에 참석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 소련공산당 서기장 조셉 스탈린(왼쪽부터)이 회담장 출입구에서 악수하며 촬영한 것이다. 미국은 그 회담에서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당시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는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을 수행하여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진행된 포츠담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위에 인용한 헐의 회고담은 포츠담 회의에서 미국이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하려는 음모를 꾸몄음을 말해준다. <사진 6>

미국, 소련, 영국이 동아시아와 유럽의 종전문제 및 전후처리문제를 포괄적으로 논의한 포츠담 회의에서 8.15와 직결된 것은 1945년 7월 26일에 발표된 포츠담 선언이다, 그 선언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라고 촉구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는데, 위에 인용한 헐의 회고담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서로 연결하여 생각하면 미국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면서 속으로는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의 38도선 분할에 대한 기존 학설은 1945년 8월 9일 대일전쟁을 개시한 소련군이 관동군을 파죽지세로 격파하며 한반도를 향해 남진하자, 소련군의 진격속도에 놀란 미국 3부조정위원회 산하 전략정책단이 1945년 8월 11일 소련군의 남진을 저지하려는 긴급대책으로 38도선을 그어 한반도를 서둘러 분할하였다는 것인데, 미국은 소련이 대일전쟁을 개시하기 훨씬 전인 1945년 7월 17일 포츠담 회의가 시작될 때부터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하려는 음모를 품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하고 영구분단을 획책한 장본인이 미국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38도선 분할은 미국이 주도하고 소련이 멋모르고 동의해준 것이라는 기존 인식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착오다.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한 분단의 원죄는 미국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것이었음을 명백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이 민족의 염원과 요구를 짓밟고 폭력적으로 저지른 분단의 원죄는 70년 전 역사 속에 과거사로 박제화된 게 아니다. 분단의 원죄는 6.25전쟁을 거치면서 분단체제로 고착되었고, 그렇게 고착된 분단체제는 이 민족을 말할 수 없는 불행과 치욕, 고통과 재앙 속에 빠뜨렸다.
“남조선에서 해방은 1945년 8월 16일 하루뿐이었다”는 안재홍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한국인들이 분단체제를 거부하고 자주통일위업을 실현할 때 8.15는 비로소 해방의 날로 될 것이다.
 
▲ <사진 7> 이 사진은 미국 군사고문단 청사를 촬영한 것이다. 미국 군사고문단은 38도선 이남지역을 미국의 반공군사기지로 전락시키는 임무를 현지에서 직접 수행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7. 미국을 위해 총을 쏘고, 미국인보다 앞서 피 흘리는 군사기지

미국과 일제의 반소반공결탁은 38도선 이남지역을 미국의 반공군사기지로 전락시켰다. 당시 38도선 이남지역을 미국의 반공군사기지로 전락시키는 임무를 현지에서 직접 수행한 기관은 남조선국방경비대의 군사훈련을 지도한 임시군사고문단이었는데, 임시군사고문단 단장 윌리엄 로벗츠(William L. Roberts)는 “미국을 위해 총을 쏘고, 미국인보다 앞서 피를 흘리게 하기 위해 우리가 자기들을 훈련시키고 있는지를 한국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윌리엄 로벗츠의 이 발언은 미국의 38도선 분할에 의해 38도선 이남지역이 미국의 반공군사기지로 전락되고 말았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준 말이다. <사진 7>

<뉴욕헤럴드> 1949년 6월 5일 보도기사에 따르면, 1949년 10월 한국군 육군사령부에서 진행된 사단장회의에서 한국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단장 윌리엄 로벗츠는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수많은 공격은 자기 명령에 의해 수행되었고 앞으로 더 많은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많은 경우에 한국군 부대들은 제멋대로 공격하고 아무런 전과도 없이 막대한 탄약만 허비하였으며 치명적인 인명손실까지 입었다. 앞으로 38도선 이북에 대한 한국군의 진공은 군사고문단의 명령에 의해서만 수행되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미국이 정전체제에 결박된 한국을 반공군사기지로 전락시켜 대북군사대결로 끌어갔음을 말해주는 윌리엄 로벗츠의 이 발언은 위에 인용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끼가 경성을 떠나면서 내뱉은 저주발언과 일맥상통한다. 

70년 전 조선총독부에 게양된 성조기 아래서 조선총독으로부터 식민통치권을 이양받은 남조선점령군사령관은 용산미군기지에 게양된 성조기 아래서 한국군으로부터 이양받은 작전통제권을 틀어쥔 주한미국군사령관으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남조선점령군사령관이 주한미국군사령관으로 교체되었다고 해서, 한국을 자기들의 반공군사기지로 전락시킨 미국의 지배정책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최근 미국 언론의 폭로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대로, 주한미국군은 존 하지로부터 물려받은 점령군의 군기 아래서 탄저균실험을 감행하며 국제법적으로 금지된 세균전까지 준비해왔던 것이다.

“남조선에서 해방은 1945년 8월 16일 하루뿐이었다”는 안재홍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한국인들이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키고 한반도의 평화를 실현할 때 8.15는 비로소 해방의 날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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