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1/28

갱도진지 차폐문들이 모두 열릴 때

[한호석의 개벽예감] (89)
자주민보 2013년 11월 25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전쟁승패를 결정할 초탄사격능력

“지난 달(2013년 10월을 뜻함-옮긴이)에는 (인민군이) 동부전선에서 장사정포진지를 상당기간 개방해 우리군(한국군을 뜻함-옮긴이)이 긴급대비태세를 갖춘 일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것은 <조선일보> 2013년 11월 20일 보도기사의 한 구절이다. 비록 한 줄밖에 되지 않는 짤막한 문장이지만, 이 구절은 2013년 10월 7일에 발표된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담화에서 인민군이 “임의의 시각에 즉시 작전에 진입할 수 있는 동원태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밝힌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었는지를 말해준다. 동부전선의 인민군 야전부대들은 2013년 10월 중에 장사정포진지를 상당기간 동안 개방해놓고 사격태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동부전선의 인민군 야전부대들이 사격태세를 취한 까닭은,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USS George Washington)를 주축으로 편성된 미국 해군 제7함대 항모타격단(aircraft carrier strike group)이 동해에서 감행하고 있었던, 전속항진과 야간기습을 결합시킨 대북선제핵타격연습에 대응하여야 하였기 때문이다. 미국 해군 제7함대 항모타격단은 2013년 9월 30일부터 10월 4일까지 동해에서 북을 겨냥한 선제핵타격연습을 감행하였다.

원래 장사정포란 사거리가 40km 이상인 야포, 방사포, 자행포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지만, 위의 인용구에서 장사정포진지를 개방하였다는 표현은 인민군이 방사포나 자행포가 아니라 야포를 임의의 시각에 즉시 사격할 수 있도록 갱도진지 차폐문을 열어놓고 사격명령을 대기 중이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당시 인민군 야전부대들에서는 장사정 야포들만이 아니라 당연히 방사포들과 자행포들까지 사격태세를 취하고 있었을 것이다. 전방에 배치된 인민군 지상화력구성에서 기본요소는 야포가 아니라 방사포와 자행포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인민군 포무력은 방사포를 중심으로 하면서 자행포와 야포로 더욱 보강된 형태로 구성된 것이다.

이처럼 동부전선의 인민군 야전부대들이 제7함대 항모타격단의 대북선제핵타격연습에 대응하여 장사정포 사격태세를 취하였다면, 그와 더불어 동부전선의 인민군 미사일부대들도 당연히 발사태세에 돌입하였을 텐데, 위의 인용구에는 인민군 미사일부대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장사정포보다 미사일이 더 사거리가 길므로 당시 미국군 및 한국군 정찰부대들은 인민군 미사일부대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감시하였을 것인데, 왜 그에 대한 언급은 없는 것일까? 그 까닭은 미국군 및 한국군 정찰부대들이 지하기지에 배치된 인민군 미사일의 움직임을 식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사진 1> 인민군 포병들이 130mm 해안포 사격태세를 취하는 장면이다. 이 포를 쏘면 27km밖에 있는 타격목표를 소멸할 수 있다.     © 자주민보, 한호석 소장 제공


위의 인용구에 서술된 것처럼, 동부전선의 인민군 야전부대들이 장사정포진지를 개방한 것은 갱도진지 차폐문을 열고 장사정포를 포좌로 끌어내어 사격태세를 취했다는 뜻이다. <사진 1>에서 보는 것처럼 장사정포는 갱도진지 차폐문을 열고 포좌로 나가 긴 포신을 쳐들고 사격태세를 취하는데 비해, 3축6륜 차량에 탑재된 방사포나 무한궤도차량에 탑재된 자행포는 갱도진지 차폐문을 열고 나와 사격위치로 재빨리 이동하여 사격태세를 취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인민군 야전부대 포병들이 갱도진지 차폐문을 열고 사격태세를 취한 다음 제1탄을 사격하기까지 걸리는 초탄사격시간이다. 명백하게도, 인민군 야전부대 포병들의 초탄사격능력은 인민군의 다종다양한 선제타격력 중에서 매우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만일 초탄사격시간이 오래 걸려 사격임박징후가 적에게 노출되면 선제타격은커녕 적의 포병부대로부터 역습을 받게 된다. 전투종심이 매우 짧은 한반도에서 선제타격이 사실상 전쟁승패를 좌우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초탄사격능력이야말로 전쟁수행에서 사활적인 요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민군 야전부대 포병들의 초탄사격능력은 어느 정도일까? 그들이 갱도진지 차폐문을 열고 장사정포를 포좌로 끌어내어 초탄을 발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40초인 것으로 추산된다. 그들의 초탄사격시간을 세분하면, 갱도진지 차폐문을 여는 시간 20초, 장사정포를 포좌로 끌어내어 정치하는 시간 10초, 사격목표를 조준하는 시간 7초, 포탄을 장전하는 시간 3초로 연속 진행되는 것이다.

<유투브(You Tube)>에 게시된, 인민군 실탄사격훈련을 촬영한 동영상을 보면, 포병들이 초탄사격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훈련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라톤선수가 자기 기록을 0.1초라도 더 단축하기 위해 체력한계를 넘나드는 질주훈련을 반복하는 것처럼, 인민군 포병들도 군사복무기간 7년 동안 초탄사격시간 단축훈련을 반복한다. 초탄사격시간 단축이야말로 전쟁승패를 결정할 문제인데, 초탄사격능력 강화훈련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7년 동안이나 초탄사격시간 단축훈련을 끊임없이 반복, 숙달하고 있으므로 실전상황에서 초탄사격시간은 1∼2초 더 짧아질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인민군이 갱도진지 장사정포를 배치하지 않고 야포견인차량에 끌려 다니는 견인포를 배치하였더라면, 초탄사격시간은 훨씬 길어져 약 20분 정도 걸리게 된다. 견인포 초탄사격시간을 세분하면, 포를 무기고에서 끌어내고, 야포견인차량을 차고에서 끌어내어 서로 연결하는 시간 약 7분, 포탄을 탄약고에서 꺼내어 야포견인차량에 적재하는 시간 4분, 야포견인차량이 사격위치로 이동하여 정렬하는 시간 5분, 사격위치에서 야포견인차량과 포를 분리하고 포를 정치하는 시간 4분, 타격목표를 조준하는 시간 7초, 포탄을 장전하는 시간 3초로 진행되므로 총시간은 20분 정도 걸린다고 볼 수 있다.


갱도진지를 건설하려면 시간, 노력, 경비가 많이 들지만, 실전상황에서는 갱도진지 장사정포가 견인포에 비해 월등히 우세한 선제타격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단 1초 사이에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급박하기 이를 데 없는 실전상황에서 초탄사격시간이 40초 걸리느냐 아니면 20분 걸리느냐 하는 것은 실로 엄청난 격차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한국군 포무력이 견인포 71%, 자주포(자행포) 26%, 다련장로켓포(방사포) 3%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군이 견인포로 인민군의 갱도진지 장사정포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글을 시작할 때 첫 문장으로 인용한 구절에서 2013년 10월 동부전선에서 인민군 야전부대들의 갱도진지 장사정포가 사격태세를 취하였을 때, 한국군이 긴급대비태세를 취하였다고 하였는데, 그들의 긴급대비태세는 견인포로 응사할 사격태세를 취하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초탄사격시간이 20분 걸리는 한국군의 견인포가 초탄사격시간이 40초 걸리는 인민군의 갱도진지 장사정포를 상대하는 실전상황에서 인민군 포병들은 장사정포 초탄을 발사한 뒤에 한국군 포병들이 견인포 초탄으로 응사하기까지 19분 20초 동안 50발 이상 더 사격할 수 있다.

다른 한 편, 인민군 야전부대의 방사포와 자행포가 갱도진지 차폐문을 열고 나와 사격위치로 이동하여 초탄을 발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5분 27초다. 방사포와 자행포의 초탄사격시간을 세분하면, 갱도진지 차폐문을 여는 시간 약 20초, 사격위치로 이동하여 정렬하는 시간 약 5분, 타격구역 또는 타격목표를 조준하는 시간 약 7초로 연속 진행되는 것이다. 

그런데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전이 일어났을 때, 한국군 자주포는 방호시설에서 나와 사격위치로 이동하여 초탄을 발사하기까지 13분이나 걸리는 바람에 늑장대응이라는 여론의 화살을 맞은 바 있다. 인민군 자행포의 초탄사격시간은 5분 27초밖에 걸리지 않는데, 한국군 자주포의 초탄사격시간은 13분이 걸린다니 격차가 너무 심하다. 이러한 격차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언급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다.


‘수시첩보보고’에서 엿본 충격적인 사실들

초탄사격능력을 측정하는 데서 아직 계산에 넣지 않은 시간이 더 있다. 그것은 적의 사격임박징후를 식별한 정찰보고가 군수뇌부에 전달되는 시간, 군수뇌부가 상황을 판단하고 응사여부를 결정하는 시간, 사격명령이 포병부대에 하달되는 시간이다. 이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정확히 측정하기는 힘들지만, 연평도 포격전 상황을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연평도 포격전이 일어났을 때 한국군은 ‘호국훈련’ 중이었고, 그에 맞서 특별경계근무 2호 태세를 취한 인민군도 대응훈련 중이었으므로, 쌍방이 모두 긴장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연평도 포격전은 한국군이 방심한 사이에 인민군이 기습포격을 가한 것이 아니라, 그처럼 긴장된 전투태세를 취한 상태에서 일어났는데도, 주한미국군사령부와 한국군 합참본부는 응사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포격전이 끝나버렸다. 당시 언론에 보도된 전투상황을 짚어보면 아래와 같다.

<연합뉴스> 2010년 11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한민구 당시 한국군 합참의장과 월터 샤프(Walter L. Sharp)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은 인민군이 연평도를 향해 포격을 개시한 시각으로부터 6분이 지난 뒤에 긴급통화를 하였다. 인민군 포격에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문제는 한국군 합참의장과 주한미국군사령관 두 사람의 통화에서 결정될 문제가 아니므로 한미연합군 수뇌부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한국일보> 2010년 12월 10일 보도에 따르면, 한미연합군 수뇌부는 인민군이 연평도를 향해 포격을 개시한 시각으로부터 38분이 지난 뒤에 긴급회의를 시작하였는데, 그 회의는 무려 3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대응작전문제를 긴급히 결정해야 할 군수뇌부가 회의를 3시간 이상 계속했다면, 그것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의견을 모으지 못하고 설왕설래하는 난상토론을 벌였다는 뜻이다. 정전 이후 사상 처음으로 인민군으로부터 포격을 당한 위급한 상황에서 작전회의 난상토론을 3시간 넘게 계속하다니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한국일보> 2010년 12월 10일 보도기사를 읽어보면, 연평도 포격전 당일 3시간 이상 계속된 긴급회의를 마친 주한미국군사령부가 인민군의 포격개시로부터 무려 6시간 2분이 지난 뒤에 태평양사령부에게 대북정찰작전을 확대할 것을 요청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연평도 포격전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고 가정하면, 한미연합군 야전부대들은 수뇌부의 결정을 6시간 동안 기다리다가 인민군의 집중공격을 받고 궤멸되었을지 모른다.

연평도 포격전이 한미연합군에게 안겨준 정신적 충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겨레>가 2012년 12월 13일에 입수한 한국군 정보참모부의 ‘수시첩보보고’에서 또 다른 충격적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한국군 정보참모부의 ‘수시첩보보고’에서 엿보는 충격적인 사실은 한국군 정찰부대가 인민군 방사포의 사격임박징후를 식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민군이 연평도를 향해 포격을 개시하기 약 3시간 전인 오전 11시 30분 한국군 수뇌부에 상신된 ‘수시첩보보고’에 따르면, 한국군 정찰부대가 인민군의 해안포 전개상황을 식별하였으므로, 접적해역 일대에서 화력도발가능성에 대비하여 한국군의 장비를 추가로 전개하고 인민군 해안포의 사격임박징후에 대한 감시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보고내용을 읽어보면, 연평도 포격전 당시 한국군 정찰부대가 인민군 해안포의 사격임박징후만 식별하였고, 인민군 방사포의 사격임박징후는 식별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연평도 포격전 직전에 인민군 야전부대들은 해안갱도진지 14개소의 차폐문을 열어놓고 장사정포 14문을 사격할 태세를 취하고 있었고, 그와 더불어 122mm 방사포 4문도 사격위치로 이동하여 사격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원래 방사포는 해안갱도진지에 배치된 것이 아니므로, 내륙갱도진지에서 해안으로 이동한 다음 연평도를 향해 사격태세를 취하고 사격명령을 대기하던 중이었다. 

그런데도 한국군 정찰부대는 인민군 방사포 4문이 사격위치로 이동하여 사격태세를 취하고 있는 정황을 식별하지 못했다. 왜 식별하지 못하였을까? 그 까닭은 인민군 방사포가 한국군 정찰부대의 시야를 벗어난 위치에서 보이지 않게 사격태세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한국군 지휘부는 연평도 포격전에서 인민군 방사포 4문이 발사된 사격위치가 어디였는지 3년이 지난 지금도 특정하지 못한다. 그 사격위치가 해안의 개머리진지 부근이라는 설도 있고, 개머리진지 인근의 산 너머에 있는 ‘가는골’ 마을이라는 설도 있으나, 모두 추정일 뿐이다. 따라서 인민군 야전부대가 연평도 포격전에 122mm 방사포 4문을 동원하였다는 한국군 당국의 발표도 대상식별에 따른 정확한 판단이 아니라 연평도에 남겨진 탄착흔적을 헤아려보고 아마도 4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 것일 뿐, 인민군 야전부대가 방사포 몇 문을 동원하였는지 알지 못한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인민군 지상화력은 방사포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는데, 당시 ‘호국훈련’ 중에 긴장된 상황에서 대북정찰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한국군 정찰부대가 인민군 방사포의 사격임박징후를 식별하지 못한 것은 정찰능력한계를 노출한 심각한 사건이다. 한국군의 정찰능력한계가 연평도 포격전에서 인민군의 선제타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치명적인 사태를 불러왔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만일 전면전 개전상황에서 한국군이 그런 치명적 한계에 묶여 있다면, 그 이후에 전개될 전황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가 없다.

연평도 포격전에서 인민군의 선제타격을 받은 한국군은 또 다시 그런 사태가 발생하면 인민군의 사격원점을 타격하겠다고 공언해왔다. 그러나 한국군 정찰부대가 인민군 방사포의 사격위치를 식별하지 못하는데, 표적정보도 없이 어떻게 사격원점을 타격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한국군 정찰부대는 인민군의 장사정포가 배치된 갱도진지의 위치를 식별할 수 있으므로, 연평도 포격전 같은 사태가 또 다시 일어나면 한국군이 인민군의 장사정포 갱도진지를 타격하겠다고 공언한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한국군 핵심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중앙일보> 2013년 11월 3일 보도에 따르면, 한국군은 2013년 8월에 실시한 ‘을지연습’에서 인민군 장사정포를 제압하기 위한 선제타격훈련을 컴퓨터를 이용한 모의작전방식으로 실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인민군의 장사정포 갱도진지를 타격하겠다는 한국군의 공언도 엄밀히 따져보면 빗나간 발언으로 들린다. 왜냐하면, 위에서 논한 것처럼, 인민군 야전부대들에 배치된 강력한 포무력은 실전상황에서 사격임박징후를 노출하지 않은 채 초탄을 무더기로 기습발사하여 한국군 야전부대들의 응사능력을 제압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조선일보> 2010년 12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인민군 야전부대들은 한미연합군의 대북정찰을 교란하기 위해 실물과 똑같이 생긴 가짜 장사정포 갱도진지와 가짜 장사정포를 곳곳에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만전술은 어느 것이 진짜 장사정포 갱도진지이고 어느 것이 가짜 장사정포 갱도진지인지 식별하기 힘들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실전상황의 ‘불소나기’ 속에서 살아남은 한국군이 응사할 수 있다고 가정해도, 인민군이 만들어놓은 가짜 장사정포 갱도진지를 향해 사격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미그-23기 보유대수가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늘어나는 현상

한국군 정보참모부의 ‘수시첩보보고’에서 엿보이는 특이점은 인민군 전투기에 관한 서술이다. 인민군이 연평도를 향해 포격을 개시하기 약 3시간 전인 오전 11시 30분에 한국군 수뇌부에 상신된 ‘수시첩보보고’에 따르면, 한국군 정찰부대가 인민군 ‘신예기’들의 전방전개상황을 식별하였으므로, 접적해역 일대에서 화력도발가능성이 있어 한국군의 장비를 추가로 전개하고 인민군의 무력사용임박징후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신예기란 새로 생산한 기종이라는 뜻이다. 한국군 정찰부대는 왜 구체적인 기종을 적시하지 않고 신예기라고 기록했을까?

‘수시첩보보고’에 따르면, 연평도 포격전 당일 오전 9시 40분께 인민군 미그-23기 5대가 전방지역 상공에 전개되고 있는 것을 식별하였다고 한다. 옛 소련이 1970년에 실전배치한 미그-23기는 40년이 넘은 기종이지 신예기가 아니다. 그런데 한국군 정찰부대는 미그-23을 가리켜 왜 신예기라고 하였을까? 이 의문을 풀어줄 단서는 미국의 군사전문 웹사이트 <글로벌 씨큐리티(Global Security)>에 게시된 자료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자료에는 인민군 항공군의 미그-23기 보유대수가 2005년까지는 45대로 변동이 없었는데 2006년부터 2010년 사이에 56대로 늘었다는 것이다. 또한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Wikipedia)>에 게시된 조선인민군 전력현황자료는 인민군 항공군의 미그-23기 보유대수를 66대로 적시하였으므로, 미그-23기 보유대수가 2010년에서 2013년 사이에 56대에서 66대로 더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사진 2>는 초계비행 중인 쿠바 공군의 미그-23기 편대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 <사진 2> 쿠바 공군의 미그-23기 편대가 쿠바 영공을 초계비행하는 장면이다. 북은 2000년대 중반부터 외형이 미그-23기와 흡사하게 생긴 신형 전투기를 자체로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 신형 전투기가 북의 최남단 공군기지에서 출격하여 서울 상공에 이르기까지 2분 30초 걸린다.     © 자주민보, 한호석 소장 제공

 
누구나 아는 것처럼, 노후기종은 시간이 지날수록 보유대수가 줄어들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인민군 항공군의 경우는 정반대로 노후기종 보유대수가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늘어나는 추세다. 2005년 이후에 북이 미그-23기를 다른 나라에서 수입하였기 때문에 그 기종의 보유대수가 늘어나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북이 다른 나라에서 미그-23기를 수입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2000년대 후반 이후 북에 전투기를 수출할 나라도 없고, 북도 다른 나라에서 전투기를 수입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인민군 항공군의 미그-23기 보유대수가 2005년 이후 21대나 늘어난 불가사의한 현상은 북이 독자적으로 전투기를 생산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증거다. 다시 말해서, 북은 한국군 정찰부대가 보기에 외형이 미그-23기와 흡사한 신예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개성 서북쪽에 있는 황해남도 봉천군의 누천리 공군기지에서 서울까지 직선거리는 약 100km밖에 되지 않는다. 그 공군기지에서 출격한, 미그-23기와 흡사하게 생긴 신예기가 전속력으로 남하비행하여 서울 상공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2분 30초다.

그에 대응하는 한국군 공군의 방어제공작전(DCA)을 알아보면, 인민군 전투기의 내습을 저지하기 위해 수원공군기지의 제10전투비행단에는 F-5E가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F-5E가 비상출격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5분이다. 미국에서 수입한 F-5E는 한국군 공군조종사들이 ‘곤로’라는 별칭으로 부르는 저성능 노후기종이다. 전기곤로는 가열속도가 늦고 발열량도 상대적으로 적으므로 노후기중 F-5E에 ‘곤로’라는 별칭을 달아놓은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F-5E는 엔진출력이 약하여 공중전에서 격추당할 위험이 크고, 전자장비가 허술하여 적기가 쏜 미사일이나 적지상군의 방공망에 격추당할 위험이 매우 크다. 한국군이 운용하는 F-5E는 2000년 이후에만 11대가 기체고장으로 추락했다.

서울 상공을 방어하기 위해 그처럼 낡은 전투기를 배치한 것은 누가 봐도 위태롭다. 서울 상공을 제대로 방어하려면 F-16이나 F-15K가 출격해야 하는데, 그런 전투기들은 인민군의 미사일공격을 피해 충청남도 서산 인근의 서산공군기지와 경상북도 대구 인근의 대구공군기지 같은 후방에 멀찌감치 배치되었다.

서산공군기지와 대구공군기지에 배치된 전투기들이 완전무장하고 적진을 향해 출격하려면, 한미연합군 수뇌부 작전회의에서 주한미국군사령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연평도 포격전이 일어났을 때, 한미연합군 수뇌부는 인민군이 포격을 개시한 시각으로부터 38분이나 지난 뒤에 긴급회의를 시작하였다. 전면전 개전상황에서 38분이라는 시간은 한미연합군 수뇌부가 작전회의를 진행하는 서울 용산기지가 인민군의 맹폭격으로 초토화되고도 남을 긴 시간이다. 전투종심이 너무 짧은 한반도에서는 긴급작전회의를 진행할 몇 분의 시간적 여유마저 없다. 다시 말해서, 한반도에서는 강력한 선제공격능력을 확보한 쪽이 무조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누가 왜 우려와 불안을 느끼고 있는가?

2013년 11월 5일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한 조보근 국방정보본부장(현역 중장)은 “남과 북이 전쟁하면 누가 이깁니까?”라고 물은 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한국의 독자적인 군사력 비(比)로는 우리가 불리하다고 평가한다”고 답변하였다. 또 다른 민주당 의원이 “미국 없이 한국 단독으로 북한과 싸우면 진다고 했는데 사실이냐”하고 되묻자, 그는 “진다고 하지는 않았다. 군사력 비에서는 우리가 열세”라고 답변하였다.

한국군과 인민군의 군사력을 비교하면 한국군이 열세이고, 따라서 전쟁이 일어나면 한국군이 불리해진다는 국방정보본부장의 답변이 언론에 보도되자 충격을 받은 남측 국민들 속에서 여론이 들끓었다. 원래 국정감사는 정치적 의도에 따라 가공된 발언들이 오가는 자리이므로, 그런 자리에서 국방정보본부장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열세라고 말한 것은 사실상 패배를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된 남측 국민들로서는 충격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군 열패설의 여파를 직감한 남측 언론계는 군사전문가의 수습발언을 인용하여 개전 초기에 인민군이 장사정포로 수도권을 타격할 때는 한국군이 좀 불리하지만, 미국이 증원군을 파병하여 한미연합군 전투력이 월등히 강화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꺼내놓았다.

그러나 군사지식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그런 식의 주장이 현실과 거리를 둔 주관적 상념으로 보일 뿐 객관적 현실을 반영한 견해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 심각한 문제와 관련하여 다시 읽어보아야 할 것은 미국 정보분석가들의 판단이다. 북미전쟁위험이 극도로 고조되었던 2013년 4월 7일 미국의 온라인 언론매체 <WND>가 미국 정보분석가들의 말을 인용하여 워싱턴발로 보도한 기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주한미국군) 28,500명은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과속방지턱(speed bump)으로, 그리고 전쟁의 방아쇠로 최전방에 배치되었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그들은 죽을 것이다. 모든 주한미국군기지들과 한국군기지들은 인민군의 타격좌표로 사전입력되었다(pre-programmed).”

이 인용구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전방지역에 배치된 한미연합군이 인민군의 선제공격으로 전멸할 것이라고 예견한 것인데, 미국의 정보분석가들은 인민군의 재래식 지상화력만을 고려하여 그렇게 예견한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인민군이 재래식 지상화력만 동원할 것으로 예견하는 것도 오산이고, 인민군이 전방지역의 한미연합군만 공격할 것으로 예견하는 것도 오산이다. 이 짧은 글에서 구체적인 사례들을 열거하며 자세히 서술할 수 없지만, 인민군의 ‘반미대결전’ 시나리오에 대한 설명을 몇 마디로 축약하면, 전방지역과 후방지역을 동시다발적으로 타격하는 전후방동시공격전이며, 지상과 지하, 해상과 해저, 고공과 저공에서 한꺼번에 작전하는 입체공격전이며, 적의 ‘급소’를 정밀타격수단으로 연속 강타하여 반격능력을 초기에 제거하는 급소연속강타전으로 전개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주시하는 것은, 태평양작전구역 곳곳에 산재한 31개에 이르는 미국군기지들이 인민군 전략로케트군의 타격좌표를 사전입력해놓은 핵타격대상목록에 올라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이 이미 몇 차례 공개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북의 그러한 언급이 엄포가 아니라는 점은 미국군 수뇌부의 발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국군 수뇌부는 인민군의 ‘반미대결전’ 준비태세에 관한 북의 발언이 엄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우려와 불안을 느끼고 있다. 이를테면, 2011년 1월 11일 중국 베이징을 방문 중이던 로벗 게이츠(Robert M. Gates) 당시 미국 국방장관은 “북이 미국에게 직접적인 위협으로 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하면서 우려와 불안을 감추지 못하였다. 미국 일간지 <월 스트릿 저널(WSJ)> 2013년 11월 18일 보도에 따르면, 그 일간지가 보도일과 같은 날 워싱턴에서 주최한 최고경영인 연례행사에 연사로 출연한 마틴 뎀프시(Martin E. Dempsey) 미국군 합참의장도 “나는 내가 매일 다루고 있는 어떤 다른 문제들보다도 북의 고조되는 도발을 실제로 더 우려한다”고 하면서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러나 미국군 수뇌부가 자기들의 우려와 불안을 드러낸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북의 위협’에 대처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수시로 강행하는 위험천만한 대북전쟁연습을 즉각 중지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고, 주한미국군을 자진하여 철군함으로써 전쟁재발요인을 제거하는 전향적인 선택만이 태평양작전구역 미국군의 궤멸위험을 미리 피하는 길이다. 전선 너머에서 갱도진지 차폐문들이 모두 열릴 때는 너무 늦을 것이다.

특히 갈수록 막강해져가는 북에 군사력 대응한 한미연합군훈련도 갈수록 더 강력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또 다시 북을 자극하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될 것이고 지금보다 더 강력한 대규모 무력을 한미연합군이 대북압박군사훈련에 동원하게 되며 그것을 북이 공격의사로 간주하고 선제타격을 감행할 우려마저 없지 않다.

‘상대가 공격진지를 차지하는 것을 두고만 보고 있지 않을 것이다. 선제타격은 미국의 전유물이 아니다.’라는 말은 북에서 우리의 귀가 닳도록 강조해온 말이다. 물론 미국은 핵무기를 사용한 예방전쟁 차원의 선제타격 대상국에 부시정부시절부터 북의 이름을 떡 올려놓고 있다는 것도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결국 군비경쟁은 우리민족의 경제위기 극복에도 치명적일 뿐만 아니라 전면적 무력충돌이라는 치명적인 상황으로 민족 전체를 몰고 가는 악수 중에 악수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결국 해법은 대화뿐이라는 것이다. 북미평화협정과 남북의 공동선언 이행 그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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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23

미국에게 한국은 아시아의 ‘전방초소’일 뿐

민중의 소리 2013년 11월 21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를 제외한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천문학적 규모의 도감청을 자행해왔다는 범행사실이 얼마 전에 드러나는 바람에 국제사회가 경악과 분노로 들끓었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그처럼 불법적인 도감청을 자행해온 미국의 범행이 말해주는 것은 미국이 세계패권(global hegemony)을 틀어쥐고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세계패권을 틀어쥐고 세계의 지배자로 자처하며 군림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요인을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기축통화와 금융자본을 틀어쥔 강력한 재정운용력과 상품생산력

둘째, 핵무력을 중심으로 편제된 전지구권 타격력과 공격적 군사체계

셋째, 고도의 과학기술력과 그에 기초하여 세계적 범위로 확장시킨 교통통신망과 정보망

넷째, 넓은 영토와 거기에서 얻어내는 막대한 식량과 부존자원

다섯째, 세계패권을 유지하기에 적당한 3억1,500만 명의 인구

돌이켜보면, 기나긴 인류사에 출현하였다가 사라진 그 어떤 고대제국도 위에 열거한 여러 요인들을 두루 갖추지 못했다. 이런 측면을 보면, 미국이 틀어쥔 세계패권이 생각보다 탄탄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미군 핵잠수 자료사진
미군 핵잠수 자료사진ⓒ뉴시스


미국 패권을 위한 동서양 전초기지, 일본과 영국

눈여겨보는 것은, 미국이 자기의 세계패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서방과 동방에 각각 한 군데씩 전초기지를 구축해놓았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서방전초기지는 유럽대륙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섬나라 영국이고, 미국의 동방전초기지는 동아시아대륙에서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섬나라 일본이다.

미국의 핵무기전문가 핸스 크리스텐슨(Hans M. Kristensen)이 2011년 4월 1일 미국과학자연맹(FAS) 웹사이트에 게시한 글에 따르면, 미국은 얼마 전에 성능을 개량한 핵탄두 W76-1을 영국에 곧 제공할 것이고, 영국은 자국 해군의 핵추진 잠수함들에 그 핵탄두를 장착한 탄도미사일을 탑재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미국이 영국의 전략적 가치를 얼마나 중시하는지는 그처럼 최신개량형 핵탄두를 그 나라에 선뜻 넘겨주는 놀라운 사실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미영관계는 일정한 수준의 핵무력까지 공유할 정도로 끈끈하게 결착된 매우 특수한 전략적 동맹관계다.

또한 핸스 크리스텐슨이 2008년 10월 21일 ‘미국과학자연맹’ 웹사이트에 게시한 ‘미국 공군전략사:1958.1∼1958.6’에 따르면, 미국은 중국과 대만의 무력충돌위험이 고조되자 중국을 겨냥한 핵타격계획을 세웠고, 1958년 6월 30일에는 일본 오키나와현에 있는 가데나(橫須賀)공군기지에 대륙간탄도미사일에 장착하는 수소폭탄탄두인 MK-39와 그보다 경량급 열핵탄두인 MK-6을 배치했다고 한다. 미국이 일본 영토에 마음대로 핵무기를 배치하는 사실만 봐도, 미국이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알 수 있다.

1960년 1월 19일 미국은 미일안보조약을 개정하면서 미국이 일본에게 아무런 통보를 하지 않고서도 일본 영토에 미국 핵무기를 마음대로 배치한다는 미일핵밀약을 체결한 바 있다. 그런 밀약을 체결해놓고서도 당시 일본 총리였던 사토 에이사쿠(佐藤英作)는 1967년 12월 일본 국회에서 일본은 핵을 보유하지도, 제조하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이른바 ‘비핵3원칙’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세계를 속였고, 그런 기만적인 비핵조치발표로 1974년에는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으니 사기극도 그런 희대의 사기극이 없다. 미국과 일본이 그런 핵밀약을 맺었으니, 지금 미국 핵무기가 일본 영토 안의 미국군기지 어디에 얼마나 많이 배비되었는지는 오직 미국군 최고지휘관만 알고 있다. 미일관계는 세계를 기만하는 핵밀약을 체결할 정도로 끈끈하게 밀착된 매우 특수한 전략적 동맹관계다.

그런데 미국의 세계패권전략은 영국과 일본에 각각 전초기지를 구축한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미국은 자기의 서방전초기지 앞에 초소를 세워두었는데, 미국이 자기의 세계패권전략에 따라 전방초소로 간택한 나라가 영국과 북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네덜란드다. 네덜란드 일간지 <텔레그라프> 보도기사를 인용한 <연합뉴스> 2013년 6월 10일 보도에 따르면, 루드 루버스(Ruud Lubbers) 전 네덜란드 총리는 네덜란드 동남쪽 브라반트(Brabant)에 있는 볼켈공군기지(Volkel AFB)에 미국 핵폭탄 B61이 22발이나 배비되어 있다고 폭로했다. 미국이 핵무기를 유럽에 배비하였다는 소문은 아주 오랜 전부터 돌았지만, 미국 핵무기의 유럽배비사실이 확인된 것은 그 때가 처음이다.

미국이 자기의 세계패권전략에 따라 유럽에서 네덜란드를 영국 앞쪽에 세워둔 전방초소로 간택하였다면, 동아시아에서는 한국을 일본 앞쪽에 세워둔 전방초소로 간택했다. 한국 국민들은 한국이 미국의 동맹국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한미관계의 은폐된 진실을 알지 못해 일어나는 커다란 착시현상이다. 세계패권전략을 추구하는 미국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인 일본을 지켜주는 일개 전방초소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4자군사협력체 수립과정에서 드러난 하위동반자의 모습

2012년 6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한국이 1999년 말에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의 필요성을 일본에 먼저 제기했는데, 그 이후 일본은 한국의 그런 제안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2010년부터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과 한일상호군수지원협정을 체결하자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일본은 왜 2010년부터 한국과의 군사협력관계를 본격화하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을까? 그 까닭은, 일본이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세계패권전략을 계속 유지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의도를 그 무렵부터 적극 추종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한국과의 군사협력관계를 본격화하려는 일본의 배후에서 움직인 미국의 모습을 파악하려면, 일본이 한국과의 군사협력관계를 본격화하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던 2010년에 있었던 미국의 움직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010년 당시 미국은 아래와 같이 부산을 떨었다.

2010년 7월 27일 미국은 한미연합전쟁연습에 동원된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에 일본해상자위대 장교 4명을 승선시켜 당시 동해에서 실시된 한미연합전쟁연습을 참관하게 하였고, 같은 해 11월 29일에는 호주군 장교들을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에 승선시켜 당시 서해에서 실시된 한미연합전쟁연습을 참관하게 했다.

그런 참관활동을 전개한 미국은 2010년 10월 29일 하와이에서 미국, 일본, 한국의 지상전력공조를 강화하기 위한 비밀전략회의를 진행했고, 같은 해 11월 초에는 미국, 일본, 호주의 해상-공중전력공조를 강화하기 위한 비밀전략회의를 진행했다.

미국의 그러한 움직임은 일본, 호주, 한국 3자 사이에서 새로운 군사협력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행동을 유발했다. 그리하여 한국과 일본은 2011년 1월 10일 서울에서 진행한 국방장관급 회담에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한국과 호주는 2011년 12월 제1차 국방장관회담을 진행했고, 2012년 5월 14일에는 참모차장급 회의와 연합해상훈련을 정례화하는 방안과 외교-국방장관이 참석하는 2+2회담을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합의했으며, 그로부터 14일이 지난 5월 28일에는 제주도 동북방 해상에서 처음으로 한국-호주 연합전쟁연습을 실시했다.

이처럼 2011년 초부터 2012년 상반기에 이르는 기간에 한국-일본 군사협력관계와 한국-호주 군사협력관계에 시동이 걸리자,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2012년 9월 27일에 부산에서 동남쪽으로 100여 km 떨어진 해상에서 이른바 확산방지구상(PSI)해양차단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일본, 호주, 한국이 참가한 첫 번째 4자연합전쟁연습을 실시했다.

위에 열거한 사실들은 미국이 미국, 일본, 호주, 한국이 참가하는 새로운 다국적 군사협력체를 수립하려고 움직이고 있음을 말해준다. 미국은 유럽-대서양지역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라는 다국적 군사협력체를 1949년 이후 계속 운용해왔는데, 아시아-태평양지역에는 그런 다국적 군사협력체가 없다. 그래서 미국은 유럽-대서양지역에서 그러한 것처럼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도 자기가 관리하는 다국적 군사협력체를 수립하려는 것이다. 시야를 동북아시아-동중국해지역으로 좁히면, 미국, 일본, 한국이 참가하는 3자군사협력체가 수립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야를 아시아-태평양지역으로 넓히면, 미국, 일본, 호주, 한국이 참가하는 4자군사협력체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미국이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자기의 세계패권전략을 추구하기 위해 다국적 군사협력체를 수립하는 작업을 시작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미국은 이미 2007년 6월에 미국, 일본, 호주 3자 국방장관급 안보회의를 개최했고, 그 회의의 결정에 따라 같은 해 10월 17일 미국, 일본, 호주가 참가한 3자연합전쟁연습이 동중국해에서 실시됐고, 2008년 4월 18일에는 미국, 일본, 호주 3자 국장급 안보회의가 미국 하와이에서 진행됐다. 미국, 일본, 호주가 참가하는 3자연합전쟁연습은 2007년 6월에 처음 실시된 이후 해마다 계속 실시되고 있다.

위에 열거한 사실들을 종합하면, 미국은 미국, 일본, 호주가 참가하는 3각동맹체제를 수립해놓고, 거기에 한국을 받아들여 4자군사협력체를 수립하려는 속셈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전개되는 미국의 세계패권전략은 미국, 일본, 호주가 참가하는 3각동맹체제 안에 한국을 끼워 넣음으로써 4자군사협력체를 완성하려는 것이다.

일본 아베 신조 총리의 연설 자료사진
일본 아베 신조 총리의 연설 자료사진ⓒ뉴시스


그런데 한미관계를 전략적 동맹관계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미국이 미국, 일본, 호주가 참가하는 3각동맹체제에 한국을 끼워 넣는다는 말이 좀 불편하게 들릴 것이다. 미국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한국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경우 한미관계에서 한국의 위상은 동맹국처럼 보이지만, 세계패권전략을 추구하는 미국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경우 한국의 위상은 너무도 다르다. 이와 관련하여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 당시 미국 국무장관의 솔직한 견해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2008년 7월 1일에 발매된 미국의 권위 있는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현직 국무장관으로 기고한 ‘국익재고론(Rethinking the National Interest)’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일본과 호주를 각각 ‘동맹국’으로 지칭하면서도 한국은 ‘동반자(partner)’라고 지칭했다. 한국 국민들은 한국을 미국의 동맹국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객관적 현실이 아니라 한낱 주관적 상념일 뿐이다.

세계패권전략을 추구하는 미국은 자기의 동맹국과는 끝까지 함께 가지만, 동반조건이 힘들어지면 4자군사협력체에 끼워준 하위동반자와는 갑자기 결별하는 수가 있다. 미국은 자기의 하위동반자와는 전략적 동맹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결별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결별사태가 일어나는 경우 동반이냐 결별이냐를 결정하는 기준은 한국과 미국의 상호이익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미국의 일방적인 이익이다. 미국이 한국에서 자기 이익을 챙겨가느라고 쏟아놓은 입에 발린 말만 곧이듣고 한미관계를 전략적 동맹관계라고 맹신해온 하위동반자의 최면상태에서 하루빨리 깨어나 자주독립정신을 가져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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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21

진보당 탄압의 배후에 어른거리는 그림자

[한호석의 개벽예감] (88)
자주민보 2013년 11월 19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통합진보당 해산중단을 촉구하는 손팻말도 등장했다.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2001년 9월 22일에서 2012년 3월 8일까지 

“10년 안에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과 연방통일조국 건설이라는 역사적 위업을 실현할 민중의 강력한 무기로서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과 민족민주정당 건설! 우리는 이것을 향후 2∼3년 안에 해내자고 결의한다.”

당찬 인상을 안겨주는 이 문장은 누구의 글인가? 2001년 9월 22일 1박2일 일정으로 충청북도 괴산군 보람원에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 진행한 ‘2001년 민족민주전선일꾼전진대회’에서 채택한 문서 ‘3년의 계획, 10년의 전망 - 조국통일의 대사변기를 맞는 전국연합의 정치.조직방침에 대한 해설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전국연합’ 대의원 513명이 참석한 그 대회에서는 민족민주정당 건설→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연방통일조국 건설이라는 방침을 채택하였다. 2001년까지만 해도 ‘전국연합’은 진보정당이나 진보정치라는 개념을 아직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2001년 9월 23일 ‘전국연합’이 앞으로 2∼3년 안에 민족민주정당을 창당하겠다고 결의하였을 때는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때로부터 1년 8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따라서 ‘전국연합’이 민족민주정당을 창당하는 경우 진보정당이 두 개가 될 판이었다.

이런 사정을 고려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전국연합’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04년에 민주노동당에 대거 입당하여 그 당의 주도세력으로 되었고, 그 주도세력은 ‘2001년 민족민주전선일꾼전진대회’에서 채택한 방침을 보완하여 진보정당 건설→진보적 정권교체→진보적 민주주의 실현→자주적 평화통일 실현으로 이어지는 발전경로를 제시하였다.

2001년 9월 23일 ‘전국연합’이 채택한 방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은 진보적 정권교체를 의미하는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이었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해야 진보적 민주주의도 실현할 수 있고, 자주적 평화통일도 실현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001년 9월 23일 ‘전국연합’ 대의원 513명이 모여 앞으로 10년 뒤에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겠다고 결의하였을 때,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그들의 결의를 ‘극소수 운동권 핵심세력의 희망사항’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의 결의를 실천하기 위해 10년 동안 헌신분투한 결과 놀라운 현실이 펼쳐지게 되었다. 2001년 9월 23일 513명이 진보적 정권교체를 10년 뒤에 실현하겠다고 결의한 때로부터 11년이 지난 2012년 3월 8일 이정희 당시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와 한명숙 당시 민주당 대표가 두 당이 합의한 ‘범야권 공동정책합의문’을 발표한 것이다.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이 공동정책합의문을 발표한 것은 6.25전쟁 이후 정치사에서 사상 처음으로 정당들 사이의 정책연합을 실현한 주목할 만한 사변이었다. 그 두 원내정당의 정책연합은 중요한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첫째, 통합진보당이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제기하였던 진보적인 정책의제들이 그 두 당의 공동정책의제에 포함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일보> 2012년 3월 12일부 분석기사는 “과거 총선과 대선 때마다 현 통합진보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이 주장했던 정책들이 (범야권 공동정책합의문에) 다수 포함됐다”고 지적하였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미FTA 반대, 제주해군기지 건설 즉각 중단, 국립대학 법인화 폐지, 대기업의 순환출자 금지 같은 진보적인 정책들이다.

 둘째,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이 공동정책의제를 실현하기 위한 상설기구를 결성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공동정책의제를 실현하기 위한 상설기구를 결성하려는 것은 2012년 대선에서 승리하여 공동정부를 수립하겠다는 뜻이다.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이 이처럼 ‘정책연합’을 실현한 것은 그 두 당이 2012년 대선에 범야권단일후보를 출마시켜 승리함으로써 공동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강력한 공동집권의지를 표출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일보>는 2012년 3월 12일부 분석기사에서 “민주노동당은 당시만 해도 집권과는 관계없는 노동자정당, 이념정당이었다. 그러나 소수자정당이 내세웠던 급진적인 정책들이 시대상황변화와 ‘선거연대’라는 정치공학과정을 거치면서 집권을 내다보는 정당의 정책이 되어가고 있다”고 크게 ‘우려’하였다.

원래 공동정부구성을 처음으로 제안한 쪽은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민주당이었다. <노컷뉴스> 2010년 1월 8일 보도에 따르면, 2010년 1월 7일 정세균 당시 민주당 대표는 신년기자회견에서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창조한국당, 국민참여당에게 6.2지방선거에서 연대하고 공동지방정부를 구성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11년 1월 수많은 유권자들은 2012년 대선에 범야권단일후보가 출마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예컨대, 여론조사기관의 설문조사결과를 인용한 <경향신문> 2011년 1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2012년 대선에서 범여권단일후보와 범야권단일후보의 양자대결구도가 형성되는 경우 범여권단일후보 지지도는 38.5%밖에 되지 않았는데 범야권단일후보 지지도는 45.5%나 되었다.

당시 일반국민들은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의 공동정부수립이라는 고도의 정치변화를 명시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범야권단일후보에 대한 기대감은 매우 높았다. 그런 기대를 안고 대권주자로 떠오른 문재인 당시 노무현재단이사장은 2011년 9월 1일 공식석상에서 “야권대통합의 목적은 총선, 대선승리가 아니라 정권교체를 통해 진보개혁진영의 공동연합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9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서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의 범야권단일후보가 승리하여 사상 최초의 공동정부를 수립할 가능성이 열리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국정원은 왜 2010년 5월부터 내사를 시작하였을까?

위에 열거한 사실들을 종합하면, 2012년 대선에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의 범야권단일후보가 출마하는 경우, 여권후보를 꺾고 당선될 가능성은 매우 높았고, 그에 따라 그 두 당이 구성한 공동정부가 등장할 가능성도 높았다.

만일 공동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의 노력이 아무런 반대와 방해를 받지 않았더라면, 2012년 대선에 범야권단일후보가 출마하여 승리하고 공동정부가 수립되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었더라면, 통합진보당 인사들의 ‘내란예비혐의’를 조작하고 그 당을 강제로 해산시키려는 박근혜정권의 탄압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2012년 대선에 범야권단일후보가 출마하여 승리하고 공동정부가 수립될 것으로 내다보았던 기대와 희망과 요구는 전혀 실현되지 못하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기대와 희망과 요구와 어긋나는 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다.

범야권단일후보의 대선승리와 공동정부수립을 향한 기대와 희망과 요구가 사라지고 새누리당이 정권연장에 성공한 사태로 귀결된 원인은 여러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 한 가지 원인은 범야권단일후보의 대선승리와 공동정부수립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변화를 극력 거부한 반대세력의 대응이 있었다. 그런 대응행동이 당시 이명박정권에 의해 취해졌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명백하다.

이명박정권이 범야권단일후보의 대선승리와 공동정부수립을 저지하기 위한 대응행동은 통합진보당을 ‘종북정당’으로 모략함으로써 그 당과 민주당의 사이를 갈라놓는 것이었다. ‘여론재판’을 벌여놓고 통합진보당을 ‘종북정당’으로 모략하면, 민주당은 그 당과 자연히 거리를 두게 될 것으로 타산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타산에 따라 이명박정권에게는 ‘종북정당’ 모략을 위한 ‘증거’들이 필요하였는데, 이명박정권 시기의 국정원이 ‘증거수집’에 나섰다. <동아일보> 2013년 8월 28일 보도기사에서 차경환 수원지검 2차장 검사는 국정원이 이석기 의원을 비롯하여 현재 구속 중인 통합진보당 인사들에 대한 내사를 2010년 5월부터 시작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국정원은 통합진보당(당시는 민주노동당) 인사들에 대한 내사를 왜 2010년 5월부터 시작했을까? 그 까닭은 2010년 6월 2일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당시 민주노동당이 뜻밖의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 뜻밖의 성과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2010년 2월 10일 ‘2010 지방선거 공동승리를 위한 야5당 협상회의’가 결성되었고, 2월 16일에는 ‘야5당 정책연합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아쉽게도, 야5당은 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하는 바람에 그 합의를 이행하지는 못했지만, 2010년 4월 현재 지지율 13.3%를 기록하며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었던 민주노동당은 2010년 6월 2일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야권연대를 실현하여 142명을 당선시켰고, 민주당과 손잡고 두 곳에서 공동지방정부를 구성하였고, 26곳에서 공동지방정부구성에 대한 협약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민주노동당이 6.2지방선거에서 지역별 야권연대를 통해 공동지방정부를 구성한 사상 최초의 경험은 당시 2년 앞으로 다가온 2012년 12월 대선에서 범야권단일후보를 출마시켜 공동정부를 수립할 가능성을 성큼 앞당긴 결정적인 계기로 되었다.

둘째,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에게 있어서 공동정부수립은 그 당의 최종목표가 아니었다. 그 당의 최종목표는 진보적 정권교체였다. 그러므로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은 2012년 대선에서 야권연대로 승리하여 공동정부를 수립하는 중단단계를 거쳐 2017년 대선에서 마침내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려는 단계적 실현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공동정부수립이라는 중간단계를 거쳐 진보적 정권교체를 추구하려는 민주노동당의 집권전략을 간파한 국정원이 수수방관할 리 없었다. 국정원은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의 야권연대를 통한 공동정부수립을 저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2010년 5월부터 민주노동당에 대한 내사를 감행하면서 무슨 ‘대북혐의점’을 찾아보려고 아무리 애썼어도 결국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국정원의 집중내사는 물거품으로 끝나고 말았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내사에서 실패한 국정원이 ‘북의 지령을 받은 반국가단체’를 적발하였다고 하면서 2011년 7월 8일에 터뜨린 것이 이른바 ‘왕재산사건’이다.



국가안보실이 말하는 ‘비정형적 도발’과 국정원이 말하는 ‘내란예비음모’ 


2013년 5월 28일 <연합뉴스>는 흥미로운 보도기사를 실었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박근혜정권이 출범하기 하루 전날인 2013년 2월 24일 청와대에 들어가 위기관리상황통제권을 넘겨받은 뒤로 3개월 동안 단 하루도 자택으로 퇴근하지 못하고 청와대 지하층의 위기관리상황실에서 비상특근을 계속해오다가 5월 24일에야 자택으로 퇴근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3개월 동안 청와대 인근 군부대의 장교숙소(BOQ)에서 숙식을 해결하였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택에 잠깐씩 들렀다고 한다. 안보부문 최고책임자인 국가안보실장이 3개월 동안 그처럼 긴박한 비상특근태세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전쟁재발위험이 어느 정도로 격화되었는지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자기들은 그처럼 초긴장상태에 있었으면서도, 3개월 동안이나 지속된 전쟁재발위험이 사실대로 알려지면 남측에서 걷잡을 수 없는 대혼란이 일어날까봐 그들은 전쟁재발위험에 대해 쉬쉬하며 관련정보를 통제하기에 급급하였다.

중요한 것은, 김장수 국가정보실장이 3개월 동안 집에 가지도 못하고 군부대 장교숙소에서 숙식하며 청와대 지하층의 위기관리상황실에서 비상특근을 계속한 2013년 2월 24일부터 5월 24일까지 3개월 동안의 상황이 ‘위기관리단계’에 근접한 비상사태였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위기관리단계’란 박근혜정권이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른 전쟁재발위험에 대처해야 하는 비상사태를 뜻한다.


박근혜정권은 출범과 함께 그런 비상사태를 맞았지만, 전쟁재발위험에 대처할 준비를 아직 갖추지 못한 채 허둥지둥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위기관리단계’에 진입하는 경우, 정권 차원의 긴급대응행동을 취하게 되어 있는데, 당시 박근혜정권에게는 그런 긴급대응행동을 취할 준비가 거의 없었다. 박근혜정권이 ‘위기관리단계’에 대처하여 긴급대응행동을 취하려면, 우선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부터 있어야 하는데, 2013년 4월 말 현재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그 두 지침을 작성하는 중이었다.

<머니투데이> 2013년 4월 18일 보도에 따르면,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은 2013년 4월 18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하여 “국가위기요인을 사전에 발견해 선제대응하겠다. 국가전쟁지침, 국가위기관리지침도 작성 중이고 8월까지 안보관련 최고지침인 국가안보전략지침을 확정해 정부 내에 배포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주목하는 것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 사전에 발견해 선제대응하겠다고 말한 ‘국가위기요인’들 가운데 “테러로 분류할 수 있는 비정형적 도발”이 포함된다는 점이다. 이에 관해서는 <조선일보> 2013년 3월 9일 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보도에 따르면, 새로 출범한 박근혜정권의 고위관리들이 2013년 3월 8일 위기관리상황실에서 진행된 긴급회의에서 ‘북의 도발’에 대한 대응책을 검토하였는데, 그들이 예상한 네 가지 유형의 도발 가운데 “테러로 분류할 수 있는 비정형적 도발”이 들어있었다. 또한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은 2013년 4월 18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철도역과 같은 대중이용시설을 중심으로 테러위험 등을 점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면,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은 기반시설을 파괴하려는 적대세력의 비정형적 도발을 사전에 발견하여 선제대응한다는 내용을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에 포함시킨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국정원과 검찰이 이석기 의원을 비롯한 통합진보당 인사들을 구속, 기소할 때, 그들이 “RO라고 부르는 혁명조직을 결성하고 기반시설을 파괴하려는 내란예비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조작, 적용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조작된 혐의는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에 포함된, “기반시설을 파괴하려는 적대세력의 비정형적 도발음모”에 대한 혐의와 일맥상통한다.


‘특별관리’라고 부르는 선제대응

<연합뉴스> 2013년 11월 12일 보도에 따르면, 이 날 열린 첫 공판에서 통합진보당 구속자 공동변호인단은 국정원이 2013년 7월까지만 해도 이른바 ‘RO총책’을 이석기 의원이 아니라 이전 민주노동당 시절에 당직자였던 다른 사람으로 ‘추정’하였고, 이석기 의원은 “RO중앙팀 일원”으로 ‘추정’하고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2013년 8월에 갑자기 이석기 의원을 ‘RO총책’으로 지목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동변호인단은 그처럼 갑작스러운 변경행위야말로 국정원과 검찰이 통합진보당 인사들의 ‘내란예비음모사건’을 조작하였음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국정원은 이석기 의원이 아닌 다른 사람을 ‘RO총책’으로 지목하고 그를 2010년 5월부터 3년 동안 계속 감시해오다가 2013년 8월에 갑자기 ‘RO총책’을 이석기 의원으로 교체하면서 통합진보당 인사들에 대한 압수수색과 검거를 자행하였고, 박근혜정권은 ‘기반시설을 파괴하려는 내란예비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통합진보당 인사들에게 씌워 통합진보당 해산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하였던 것이다.

2013년 4월 18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 기반시설을 파괴하려는 적대세력의 비정형적 도발을 사전에 발견하여 선제대응한다는 취지로 말한 발언내용에 통합진보당에 대한 탄압을 비춰보면, 박근혜정권은 통합진보당 인사들이 기반시설을 파괴하려는 ‘비정형적 도발(내란)’을 예비한 음모를 사전에 발견하여 선제대응하였다는 탄압사유를 조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정원을 비롯한 정부기관들의 대선개입 범죄행위가 드러나 그들을 처벌하고 국정원을 해체하라는 각계각층의 요구가 강하게 제기되자, 대선개입을 자행한 자기들에게 쏟아지는 규탄과 비난을 피해보려는 의도에서 국정원이 통합진보당을 탄압하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물론 그런 요인도 작용하였겠지만, 원내정당을 강제로 해산하려는 전대미문의 탄압은 국정원과 검찰이 자행하는 공안기관 수준의 탄압을 넘어서,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에 따라 자행되는 정권 차원의 특대형 탄압으로 보아야 한다.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기밀이어서 무슨 내용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그 두 지침에는 1999년 2월 국정원이 작성한 ‘전시대비 비밀문서’에 나오는 이른바 ‘특별관리’라고 부르는 선제대응도 포함된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 비밀문서에 나오는 ‘특별관리’라고 부르는 선제대응은 “위기관리단계에서 남파간첩출신, 사회주의지하혁명조직 구성원, 친북좌익이념단체의 인물, 재야-노동운동단체의 핵심인물, 북한공작조직과 연계혐의가 있는, 내사와 수사.공작 대상자 등을 (국정원이) 경찰, 검찰, 기무사와 함께 특별관리한다”는 것이다. ‘위기관리단계’에서 국정원, 경찰, 검찰, 기무사 등이 자행하는 ‘특별관리’는, 전시에 진보세력이 내란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한 극우독재정권이 진보세력을 말살하려는 선제대응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박근혜정권이 통합진보당 인사들의 ‘내란예비혐의’를 조작하여 그 혐의를 그 당에 확대, 적용하는 최악의 경우에는 공안기관만 탄압에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군부까지 동원할 수 있다.

박근혜정권이 통합진보당 탄압에 군부까지 동원할 수 있다는 말이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적 판단이라는 점을 밝혀준 것은 <연합뉴스> 2012년 10월 10일 보도였다. 그 보도에 따르면, 국방부는 이 날 한국군 전체 부대에 배포한 이른바 ‘종북실체 표준교안’에서 “종북세력”으로 지목한 진보세력을 “국군의 적”으로 규정하였다. 군부가 진보세력을 적으로 규정한 것은, 전시상황이 조성될 경우 군부가 나서서 진보세력을 말살하겠다는 극도의 적대감을 드러낸 것이다.

6.25전쟁이 종전되지 못하고 매우 불안정한 정전상태에서 전쟁재발위험이 전례 없이 격화된 현재의 위기상황에서 군부가 진보세력을 적으로 규정하였고, 청와대 국가안보실이 그런 내용을 담은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을 작성하였고, 그에 따라 통합진보당을 말살하려는 전대미문의 대탄압이 벌어지고 있는 경악할 사태를 보면서 60여 년 전 이승만정권이 전시에 자행한 끔찍스러운 대학살을 상기하게 되는 것은 결코 무리한 연상작용이 아니다. 그런 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키는 역사적 사실은 아래와 같다.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진보세력을 무차별적으로 탄압, 처형한 이승만정권은 식민지시기에 항일세력을 짓누른 일제의 탄압도구였던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모방하여 1949년 6월 5일 이른바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30여 만 명에 이르는 진보세력을 그 단체에 강제로 가입시켰다. 이승만은 6.25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에 공표한 ‘비상조치령 제1호’에서 “국가적 위기에 당하여 반국가죄는 될 수 있는 대로 조속히 또는 엄격하게 처벌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 명령에 따라, 군부는 1950년 6월 29일부터 서울을 탈환한 9월 28일까지 3개월 동안 남측 전역에 산재한 168개소의 집단학살지에서 ‘보도연맹원’ 30여 만 명 대부분을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4.19민주항쟁 직후인 1960년 10월 전국피학살자유족회 회장이 정부기관에 제출한 자료를 인용한 <매일신문> 2000년 1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이승만정권은 6.25전쟁 발발 전후 진보세력과 그 가족 113만 명을 집단학살하였다고 한다.


통합진보당 탄압의 배후에 누가 있는가?

2013년 10월 23일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은 미국 워싱턴을 방문하였다. 그는 워싱턴 방문 중에 수전 라이스(Susan E. Rice)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척 헤이글(Chuck Hagel) 국방장관, 존 케리(John F. Kerry) 국무장관, 제임스 클래퍼(James R. Clapper, Jr.) 국가정보실장을 차례로 만났다. 이제껏 워싱턴을 방문한 남측 역대 정부의 고위관리들 가운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국방장관, 국무장관, 국가정보실장을 두루 만난 사람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밖에 없다.

언론매체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5월 6일부터 9일까지 워싱턴 방문 중에 미국의 환대를 받았다고 대서특필했지만, 그런 떠들썩한 환대는 과시용이었고, 미국의 실세들이 진짜 환영한 사람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었다.  

미국의 실세들은 왜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을 그처럼 환영하였을까? 그의 경력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2004년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이 되었고, 2006년 노무현정권 말기에 국방장관이 되었고, 2008년 한나라당 국회의원 및 최고위원이 된 경력이다. 그런데 미국은 2006년 국방장관이었던 그에게 공로훈장을 수여하였고, 2008년 한나라당 국회의원 및 최고위원이었던 그에게 또 다시 공로훈장을 수여하였다.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 출신자들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을 포함하여 모두 24명인데, 그들 가운데 미국의 공로훈장을 3년 동안 두 차례나 연거푸 받은 사람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밖에 없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미국의 공로훈장은 아무나 받는 게 아니다. 미국을 위해 특출한 공을 세운 사람이 미국의 공로훈장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미국의 공로훈장을 두 차례나 받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의 이색적인 경력은 그가 미국을 위해 어떤 특출한 공을 세웠음을 말해준다.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 이전에 미국을 위해 무슨 공을 세웠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특이한 수상경력은 그가 친미군부인맥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기에 충분하다.

그처럼 친미군부인맥을 대표하는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미국군사령관이 행사하는 현실조건에서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을 작성할 때, 미국과의 협의과정을 거쳐 그 두 지침을 작성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청와대 국가안보실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실은 박근혜정권의 ‘국가전쟁지침’과 ‘국가위기관리지침’을 협의할 때, ‘위기관리단계’에서 취하게 될 선제대응에 대해서도 당연히 협의하였을 것이다.

 세상이 다 아는 것처럼, 박근혜정권만 통합진보당을 적대시하는 게 아니라 미국도 통합진보당을 적대시한다. 미국의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한반도에서 반미자주화의 기치를 든 통합진보당이 추구하는 진보적 정권교체는 미국의 국익을 결정적으로 해치는 것이므로, 미국은 통합진보당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막후에서 은밀히 적대시하는 것이다. 이처럼 통합진보당을 적대시하는 청와대 국가안보실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실이 ‘위기관리단계’의 선제대응에 관해 협의할 때 통합진보당 강제해산문제를 협의하지 않았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통합진보당 인사들의 ‘내란예비혐의’를 조작하고 그 당을 강제로 해산하려는 특대형 탄압의 배후에 미국의 은밀한 개입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한 추정이 아니다.

 2012년 8월 25일 <민중의 소리>에 실린 나의 글 ‘미국의 한국 진보정당 압살은 반복되는가?’에서 논한 것처럼, 진보적 정권교체를 추구하던 진보당의 지도자 조봉암에게 ‘간첩죄’를 씌운 이승만정권은 1958년 2월 25일 진보당을 강제로 해산하였고, 대선 8개월 전인 1959년 7월 31일에는 조봉암의 사형집행까지 감행하였는데, 그런 악랄한 정치탄압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다.

54년 전에 있었던 진보당 강제해산에 대한 기억은, 오늘 박근혜정권이 통합진보당 인사들의 ‘내란예비혐의’를 조작하고 그 당을 강제로 해산하려는 특대형 탄압의 배후에 미국의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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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2

10월 초, 미 항모와 북의 급박했던 대결전

[한호석의 개벽예감] (87)
자주민보 2013년 11월 12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사진 1> 2013년 10월 4일 부산항 해군작전기지에 입항하는 미국해군 제7함대 소속 핵추진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     © 자주민보, 한호석 소장 제공
 

 
언론보도망 밖에서 은밀히 움직인 제7함대 항모강습단
 
미국해군 제7함대 공보실은 2013년 9월 30일 일본 요코스카(橫須賀)항 미국해군기지에서 발표한 보도자료에서 “조지워싱턴호 항모강습단이 해상연합작전능력, 전술능력, 기술능력, 절차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9월 30일부터 10월 13일까지 한국해군과 함께 일련의 훈련을 실시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아니나 다를까 제7함대 항모강습단은 제7함대 공보실이 발표한대로, 2013년 9월 30일부터 10월 13일까지 14일 동안 대북전쟁연습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그 때로부터 오늘까지 근 한 달이 지났다. 제7함대 항모강습단의 대북전쟁연습이 끝난 때로부터 근 한 달이 지난 지금 이 글에서 그 전쟁연습을 다시 논하는 까닭은,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제7함대 공보실이 보도자료에서 언급한 제7함대 항모강습단의 대북전쟁연습 개시일과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의 부산 입항일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제7함대 공보실 보도자료는 제7함대 항모강습단의 대북전쟁연습이 2013년 9월 30일에 시작되었다고 밝혔는데, 남측 언론매체들은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가 <사진 1>에서 보는 것처럼 2013년 10월 4일에 부산항 해군작전기지에 입항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제7함대 항모강습단이 대북전쟁연습을 시작한 9월 30일부터 조지워싱턴호가 부산에 입항한 10월 3일까지 4일 간의 움직임이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은 것이다. 제7함대 항모강습단은 나흘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제7함대 항모강습단이 나흘 동안 은밀히 전개한 비밀스런 움직임은 북의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2013년 10월 7일 북측 언론에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담화가 실렸는데, 그 담화에서 제7함대 항모강습단의 비밀스런 움직임이 드러났다. 담화는 조지워싱턴호가 “지난 9월 30일부터 조선동해에서 비밀리에 우리 공화국을 겨냥하여 감행된 련합해상훈련에 참가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담화에 따르면, 제7함대 항모강습단은 한국해군을 참가시킨 가운데 동해에서 9월 30일부터 10월 3일까지 나흘 동안 은밀히 대북전쟁연습을 실시한 것이다. 전투종심이 매우 짧고 비좁은 공간에서 중무장한 방대한 무력이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 군사상황에서 은밀한 전쟁연습이 얼마나 심각한 무력충돌위험을 조성하는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제7함대 공보실 보도자료에 따르면, 14일 간의 대북전쟁연습 중에 제7함대 항모강습단은 “이중해안 2자연합 반(反)특수작전해상연습(MCSOFEX), 전문가 상호교환, 대잠수함전연습, 대수상함전연습, 교신연습, 대공방어연습, 의료소개연습, 기뢰제거계획, 외부인사 함상방문” 등을 실시하였다. 인용구에 나오는 ‘이중해안(dual-coast) 2자연합(bilateral) 반특수작전해상연습’이란 미국 해군과 공군이 한국 해군과 공군을 참가시킨 가운데 인민군 특수전병력의 기습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실시한 것인데, 남측에 배치된 전투력은 물론이고 일본과 서태평양지역에 배치된 전투력까지 동원하는 실전급 전쟁연습이었다.
 
현대전 양상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미국의 항모강습단이 정찰기와 함재기나 출격시키는 제2차 세계대전식 전쟁을 하는 게 아니라는 군사상식을 알고 있을 것이다. 제7함대 항모강습단의 전투임무가 선제핵타격이라는 사실은 명백하고, 14일 간의 대북전쟁연습에서 그들이 선제핵타격을 집중적으로 연습하였다는 사실도 역시 명백하다.
 
주목하는 것은, 미국이 항모강습단의 선제핵타격준비를 완성하기 위한 대북전쟁연습을 감행하기 직전에 북미관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점이다. 당시 중국은 북미관계의 긴장상태를 완화시키고 대화분위기를 살려내려기 위해 2013년 9월 18일 베이징에서 6자토론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6자토론회에 참석해달라는 중국의 요청을 일축하고 제7함대 항모강습단을 대북전쟁연습에 내몰았다. 이처럼 미국이 중재국의 대화요청마저 일축하고 선제핵타격연습을 감행한 것은 누가 봐도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다 못해 이제는 그것을 파괴하려는 전쟁광기를 세상에 드러낸 행동밖에 보이지 않는다.
 
 
▲ <사진 2> 경상북도 포항만 인근 동해해상으로 출동하기 위해 2013년 9월 29일 필리핀해 북부해상에서 전속항진 중인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의 모습. 이 사진은 2013년 9월 30일 제7함대 공보실 웹사이트에 실렸다.     © 자주민보, 한호석 소장 제공

 
전속항진과 야간기습을 결합한 항모강습단 선제핵타격연습
 
2013년 9월 30일 제7함대 공보실 웹사이트에는 미국 해군 소속 2급통신요원이 촬영한 사진 한 장이 게시되었는데, <사진 2>에서 놀라운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그 보도사진은 2013년 9월 29일 필리핀해에서 항진 중인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를 촬영한 것이다. 그 보도사진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미국이 동해에서 14일 간의 대북전쟁연습을 시작하기 하루 전인 9월 29일에 제7함대 항모강습단이 필리핀해에서 작전 중이었다는 매우 중대한 정보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정보를 종합하면 윤곽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미국군 지휘부는 14일 간의 대북전쟁연습을 시작할 때 필리핀해에 대기 중이던 제7함대 항모강습단에게 동해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출동명령을 받은 제7함대 항모강습단은 9월 29일에 필리핀해를 출발하여 전속력으로 북상항진한 끝에 9월 30일 동해의 작전구역에 도착한 것이다.
 
필리핀 루존섬(Luzon)에서 가까운 필리핀해 북부해상에서 경상북도 포항만 인근 동해해상까지 항해거리는 약 2,300km이고, 조지워싱턴호의 최대속력은 시속 64km이므로, 제7함대 항모강습단은 필리핀해 북부해상에서 포항만 인근 동해해상까지 전속력으로 36시간 동안 항해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제7함대 항모강습단이 2013년 9월 29일 오전에 필리핀해 북부해상을 출발하였다면, 9월 30일 밤에 포항만 인근 동해해상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제7함대 항모강습단이 동해의 작전구역에 출동하여 야간기습방식의 선제핵타격연습을 감행하였음을 말해준다. <사진 3>에서 보는 것처럼, 2013년 9월 30일 미국은 항모강습단을 전격적으로 동해에 진입시켜 선제핵타격으로 대북전쟁을 일으키려는 야간기습전을 연습한 것이다.
 
미국이 방대한 핵무력을 틀어쥐고 세계 곳곳에서 자신들의 무력패권을 실현하기 위한 실전연습을 강행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는데, 2013년 9월 30일부터 실시한 4일 간의 실전연습처럼 항모강습단의 전속항진과 야간기습을 결합시킨 선제핵타격연습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미국 해군이 태평양에 배치된 150년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다.
 
그 대상국인 북의 입장에서는 자기 집을 향해 대형 덤프트럭이 전속력으로 육박해오는 것과 같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북이 놀라 맞불작전이라도 폈다면 무슨일이 터질 줄 누가 알겠는가.
 
전쟁광기에 사로잡힌 미국이 전면전에서나 있을 법한 항모강습단의 전속항진과 야간기습을 결합시킨 선제핵타격연습을 바로 자기들 곁에서 강행하는데도, 그리하여 자기들 머리 위에서 불시에 핵탄이 터질지 모르는 실로 위험천만한 위기상황이 조성되었는데도 그런 사실을 모르는 남측 국민들은 전쟁재발위기에 무감각한 불감상태를 넘어 미국이 자기들을 지켜준다고 믿어버리는 친미최면상태에 빠져 있는 듯하다. 친미최면은 핵폭발보다 더 무서운 망국병이다.
 
미국의 전쟁광기는 4일 간의 은밀한 선제핵타격연습에서 멈추지 않았다. 제7함대 항모강습단이 한국해군, 공군, 해병대를 참가시킨 가운데 동해에서 감행한 대북전쟁연습이 절정에 오른 2013년 10월 2일 미국은 서울에서 열린 한미안보협의회에서 북의 전략거점들을 정밀타격으로 파괴하겠다는 이른바 ‘맞춤형 억제(tailoring deterrence)’를 천명하였고, 이튿날 도쿄에서 진행된 미일안보협의위원회 회의에서는 일본자위대까지 대북전쟁연습에 끌어들이기 위해 이른바 ‘집단적 교전권’을 승인해주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할 경우 핵전쟁돌격대로 앞장설 제7함대 항모강습단은, 동해에서 나흘 동안 은밀히 실시한 선제핵타격연습을 끝내고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10월 4일 부산항에 모습을 드러냈고, 곧이어 10월 8일부터 남해로 이동하여 한국해군과 일본해상자위대를 참가시킨 3자연합전쟁연습을 10월 11일까지 나흘 동안 실시하였다. 남해에서 3자연합전쟁연습을 끝낸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는 10월 12일 <사진 4>에서 보는 것처럼 불시에 서해 남부해상을 통과하였다. 제7함대 항모강습단이 그처럼 동해, 남해, 서해로 이동하며 대북전쟁연습을 강행하는 와중에 미국 육군은 10월 10일 공격정찰헬기 1개 대대를 부산항에 상륙시켰다.
이처럼 미국이 14일 동안 대북전쟁연습을 감행하면서 ‘맞춤형 억제’를 천명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의 ‘집단적 교전권’까지 승인한 일련의 정치군사행동이야말로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한 전쟁광기를 드러낸 행동이었음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을 만큼 명백하다.
 
 
제7함대 항모강습단의 부산입항과 인민군 총참모부의 긴급지시하달 
 
2013년 9월 30일부터 14일 동안 미국이 제7함대 항모강습단을 동원하여 북을 겨냥한 선제핵타격연습을 감행하고 있을 때, 북은 어떤 반격태세를 취하였던 것일까? 군사기밀이어서 구체적인 사정을 외부에서 알 수 없지만,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2013년 10월 7일에 발표한 대변인 담화를 읽어보면 당시 북이 미국의 선제핵타격연습에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조금은 알 수 있다. 담화는 “10월 5일 조선인민군 각 군종, 군단급 부대들에서는 최고사령부로부터 이미 비준된 작전계획들을 다시 점검하고 미일침략자들과 괴뢰들의 일거일동을 각성 있게 주시하면서 임의의 시각에 즉시 작전에 진입할 수 있는 동원태세를 유지할 데 대한 긴급지시를 접수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인용구에 나오는 “임의의 시각에 즉시 작전에 진입할 수 있는 동원태세”는 인민군이 미국의 선제핵타격연습에 대응하여 대반격에 돌입할 결전태세를 뜻한다. 북에서 쓰이는 표현을 빌리면, 2013년 10월 5일 인민군은 완전무장을 갖추고 ‘조국통일대전’에 돌입할 결전태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한반도에서는 총 한 방만 쏴도 전면전이 터질 초긴장상태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의 인용구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내용으로 읽힌다. 왜냐하면, 제7함대 항모강습단이 필리핀해를 출발하여 전속항진으로 동해에 진입하고, 야간기습방식으로 선제핵타격연습을 시작한 때가 9월 30일 밤이었는데, 인민군은 10월 5일에 가서야 결전태세를 취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현대전에서는 누가 먼저 공격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는 법인데, 제7함대 항모강습단의 선제공격연습이 시작된 때로부터 무려 5일이나 지난 10월 5일에 인민군이 결전태세를 취하였다면 그런 전쟁에서는 인민군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인가? 궁금증을 풀어주는 중요한 단서는 위의 인용구가 들어있는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10월 7일 담화 안에 있다. 담화를 자세히 읽으면, 두 군데에서 시선이 멎는다.

첫째, 조선인민군 수뇌부는 전쟁재발위험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2013년 3월 26일 최고사령부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그에 못지않게 전쟁재발위험이 극도로 격화된 2013년 10월 7일에는 총참모부 대변인 담화를 발표하였다. 왜 최고사령부 성명이 아니라 그보다 한 급 낮은 총참모부 대변인 담화를 발표하였을까? 전쟁재발위험이 지난 3월에 비해 상대적으로 좀 낮았기에 그런 것일까? 아래에서 논하겠지만,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둘째,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10월 7일 담화에는 인민군 각 군종, 군단급 부대들이 전투동원태세를 ‘유지’할 데 대한 긴급지시를 접수하였다고 서술되었다. 이러한 서술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가 2013년 3월 26일에 발표한 성명에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는 지금 이 시각부터 (줄임) 모든 야전포병군집단들을 1호 전투근무태세에 진입시키게 된다”고 밝힌 것과 차이를 보인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2013년 10월 7일 대변인 성명에서 인민군 부대들이 동원태세에 ‘진입’하라는 긴급지시를 접수하였다고 표현하지 않고, 왜 동원태세를 ‘유지’하라는 긴급지시를 접수하였다고 표현하였을까?

그런 표현에 담긴 뜻은, 인민군 부대들이 최고사령부의 전투동원태세 진입명령을 이미 받고 전투동원태세를 취하고 있었던 긴장된 상태에서 총참모부가 전투동원태세를 계속 유지하라는 2차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을 살펴보면, 2013년 3월 26일에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성명이 발표되었는데, 10월 7일에는 왜 격을 한 급 낮춰 총참모부 대변인 담화가 발표되었는지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전투동원태세에 진입하라는 최고사령부 명령은 이미 10월 5일 이전에 인민군 부대들에 내려졌고, 10월 5일에는 최고사령부 명령을 계속 수행하라는 총참모부의 긴급지시가 내려진 것이다.

2013년 9월 말에서 10월 초에 이르는 기간에 나온 북측 언론보도를 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이 당시 완공을 앞둔 교육자살림집 건설장을 9월 28일에 시찰하였고, 역시 완공을 앞둔 아동병원 건설장을 10월 5일에 시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북측 언론에서는 김정은 제1위원장의 전선시찰과 현지지도를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보도하는데, 특이하게도 9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6일 동안에는 김정은 제1위원장의 전선시찰과 현지지도를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이것은 제7함대 항모강습단이 동해에 진입하여 선제핵타격연습을 시작하기 하루 전날부터 김정은 제1위원장이 자신의 공개활동을 중지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고, 또한 전투동원태세를 계속 유지하라는 총참모부 긴급지시가 내려진 10월 5일부터 김정은 제1위원장이 자신의 공개활동을 재개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제7함대 항모강습단이 9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전속항진과 야간기습을 결합한 선제핵타격연습을 끝내고 부산항에 모습을 드러낸 바로 그 다음날인 10월 5일 김정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은 최고사령부 명령을 계속 수행하라는 총참모부 긴급지시를 인민군 부대들에게 하달하고, 아동병원 건설장을 현지지도하는 공개활동을 6일 만에 재개한 것이다.  

이런 정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은 유추해석이 가능하다. 2013년 9월 29일 인민군 정찰부대들은 제7함대 항모강습단이 동해에 진입하기 위해 필리핀해를 출발할 때부터 그들의 전속항진을 감시하고 있었고,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제7함대 항모강습단이 북상항진을 시작하였다는 정찰보고를 받고 항모강습단이 동해에 진입하기 전에 인민군 부대들에게 전투동원태세에 진입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전투동원태세 진입명령을 인민군 전군에 내린 것이 아니라, 총참모부 대변인 10월 7일 담화에 따르면 “각 군종, 군단급 부대들”에게만 내렸다.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항모강습단 공격임무를 수행할 인민군 최강부대들에게만 전투동원태세 진입명령을 내린 것이다. 총참모부 대변인이 10월 7일 담화에서 “미제침략군의 핵타격수단들이 불의에 당할 수 있는 참혹한 참사”를 거론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항모강습단 공격임무를 맡은 인민군 최강부대들은 당시 항모강습단을 공격할 전투동원태세에 진입하였고 최고사령관의 최후공격명령을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2013년 2월과 3월 북과 미국 사이에 조성된 전쟁재발위기는 그 전개상황이 언론에 계속 보도되면서 차츰 격화되었는데 비해, 2013년 10월 초 북과 미국 사이에 조성된 전쟁재발위기는 언론보도망 밖에서 은밀하게 급속히 격화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2013년 9월 29일, 왜 아무런 조짐도 나타나지 않았을까?
 
인민군 최강부대들이 최고사령부 명령을 받고 항모강습단을 공격할 전투동원태세에 진입하였던 2013년 9월 29일 북에서는 당연히 어떤 전쟁징후가 나타났어야 한다. 그런데 당시 북의 전쟁징후를 언급한 남측 언론보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미국군과 한국군은 9월 29일 전투동원태세에 진입한 인민군 동향을 포착하였지만, 군사기밀로 처리했기 때문에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미국군과 한국군은 9월 29일 인민군이 전투동원태세에 진입한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전자가 아니라 후자다.

인민군이 전쟁징후를 노출하지 않고 전쟁을 시작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어느 군사전문가의 추정이나 상상이 아니다. 전쟁징후를 노출하지 않고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인민군의 전쟁수행력에 대해 미국 국가정보기관의 최고책임자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례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교도통신> 2013년 3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제임스 클래퍼(James R. Clapper, Jr.) 미국 국가정보국장은 3월 12일 연방상원 정보특별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북조선군이 사전에 탐지되기 전에 한국 등에 한정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다”고 밝혔다. 그는 인민군이 전쟁징후를 노출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 등에 한정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다”고 얼버무렸지만, 인민군이 남측과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 본토에까지 선제공격을 개시할 준비를 갖추었다고 서술해야 더 정확하다.

미국군과 한국군이 인민군의 전쟁징후를 포착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결정적으로 중대한 문제이므로, 이에 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13년 4월 18일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국회 운영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북한이 전면전을 일으키려면, 적어도 2∼3주 전에는 (우리가) 그 징후를 판단할 수 있다. 한미연합정찰 등으로 충분히 예측, 판단할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 그가 그렇게 장담한 것은 주한미국군과 한국군을 연결하는 군사정보통합처리체계 구축작업이 완료된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경향신문> 2011년 4월 27일 보도에 따르면, 한국군은 주한미국군과 군사정보통합처리체계(MIMS)를 연결하여 대북군사정보를 공유한다는 내용의 양해각서(MOU)를 2010년 11월에 체결하였고, 군사정보통합처리체계 구축작업을 2013년까지 완료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이전에 미국군은 북측 지역을 촬영한 위성사진 가운데 80%만 한국군에게 넘겨주었고, 그것도 며칠에 걸쳐 한 두 장씩만 넘겨주었는데, 올해 2013년에 군사정보통합처리체계가 구축되었다면 한국군은 미국 정찰위성이 북측 지역을 촬영한 위성사진을 제한 없이 실시간으로 넘겨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군이 미국 정찰위성이 촬영한 위성사진을 분석하면 인민군의 전쟁징후를 사전에 포착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은 현실과 어긋난다. 월간 <북한> 2005년 7월호 기사에 담긴 정보가 그런 판단을 반박한다. 기사에 따르면, 인민군 총참모부는 러시아 정찰위성이 촬영한 북측 지역 위성사진을 러시아로부터 입수하여 정밀분석한 다음, 위성사진에 노출된 지하군사시설 출입구를 다시 은폐하는 공사를 시행하여 미국 정찰위성의 감시망을 무력화하였다고 한다.

명백하게도, 인민군이 전쟁징후를 노출하지 않고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은 지하군사시설이다. 한국국방연구원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인민군은 최전방에만 1,800여 개소의 지하군사시설을 건설해놓았고 북측 전역에는 총 8,200여 개소를 건설해놓았다고 한다. 미국과 남측에도 지하군사시설들이 몇 개소 있지만, 그 가운데 대부분은 전시에 대피시설로 사용되는데 비해, 북의 지하군사시설들은 전시에는 물론이고 평시에도 지하기지로 사용된다. 한국군 정보당국자의 말을 인용한 <중앙일보> 2005년 5월 14일 보도에 따르면, 북측 각지에 건설된 지하군사시설의 총연장거리는 547km로 경부고속도로의 길이 417km보다 훨씬 더 길다.
지하군사시설만이 아니라 유선통신망도 인민군이 전쟁징후를 노출하지 않고 전쟁을 시작할 수 있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이다. 인민군 지휘부는 무선교신으로 거짓 정보를 흘려 미국군과 한국군을 기만하면서 유선통신망으로 각 전투부대들에게 명령을 내리게 되기 때문에 한국군의 통신감청장비로는 그런 유선통신망을 통한 교신을 탐지할 수 없으며, 인민군이 무선교신으로 흘린 거짓정보에 속아 넘어가기 쉽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군이 운용하는 각종 통신감청장비들이 부실하다는 점이다. <한겨레> 2012년 1월 4일 보도에 따르면, 한국해군의 대북첩보함에서 발진하는 통신감청 무인항공기 3대 가운데 2대가 추락하였고 나머지 한 대는 추락을 우려하여 띄우지도 못하고 있고, 북의 통신-전자신호를 감청하는 ‘향백사업’, 신호감청장비를 장착한 ‘백두정찰기’, 전방사단에 배치한 전자전장비(ES/EA)도 거의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은 인민군이 자기의 내부교신에서 징후를 노출하지 않고 전쟁을 시작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미국의 정찰위성, 고고도정찰기, 공중조기경보기의 감시정찰성능이 제아무리 우수한들 거의 완벽하게 은폐된 지하군사시설에서 유선통신망을 통해 교신하며 전투동원태세에 진입하는 인민군의 움직임을 무슨 수로 포착할 수 있겠는가.
 
 
북은 자기를 공격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선제타격이란 집중타격과 다른 개념이다. 집중타격은 각종 대량타격수단을 총동원하여 타격대상지점과 그 일대를 전부 소멸하는 것인데 비해, 선제타격이란 타격좌표를 사전에 파악하고 정밀타격수단으로 타격목표를 제거하는 것이다. 선제타격의 목적은 적의 전쟁수행력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선제타격을 준비하기 위해 타격좌표를 파악하려면 타격대상이 어디에 있는지 그 위치부터 알아내야 한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민군은 모든 주요군사기지를 지하에 건설하였고, 모든 주요군사장비들도 지하에 배비하였으므로 미국군과 한국군은 북에서 지상군사기지들 이외에 다른 타격대상위치를 알아내기 힘들다. 그에 비해, 인민군은 남측, 미국, 일본, 그 밖의 서태평양지역에 산재한 한국군, 미국군, 일본자위대의 모든 군사기지위치를 파악하고 선제타격대상목록을 작성해두었다.

미국의 군사전문가 윌리엄 아킨(Willam M. Arkin)이 2005년 5월 15일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미국은 ‘개념계획(CONPLAN) 8022-02’이라는 이름의 선제타격계획을 2003년 11월에 완성하였다. 아킨의 글에 따르면, 미국이 정찰위성을 통해 북의 전쟁징후를 포착하면 미국 전략사령부가 북의 미사일기지를 정밀타격으로 파괴하고 특수전병력을 북에 투입하여 핵무기를 탈취하겠다는 것이 ‘개념계획 8022-02’의 주요내용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미국이 북의 미사일기지를 정밀타격으로 파괴하려면 타격좌표를 파악해야 하는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민군 전략로케트군 지하기지들은 자기 위치를 외부에 노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 전략사령부가 타격좌표도 모르면서 어떻게 인민군 전략로케트군 기지들을 정밀타격하겠다는 것인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로 들린다.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미국이 대북선제핵타격을 시작하려면 반드시 항모강습단을 한반도 인근해상으로 진입시켜야 하는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민군 정찰부대들은 미국의 항모강습단이 한반도 해역에 접근하기 전에 그 움직임을 먼저 파악하게 되고, 그에 따라 인민군 최강부대들이 즉각 전투동원태세에 진입하게 된다는 점이다. 

미국 항모강습단이 한반도에 접근하기 전에 북이 먼저 선제공격으로 미국을 제압한다는 것이 북의 ‘조국통일대전’ 시나리오라는 사실은 이미 19년 전에 미국 정부가 작성한 비밀문서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바 있다. 2013년 4월 11일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부설 국가안보문서보관소의 연구원은 미국 정부의 기밀해제된 비밀문서들을 입수하여 공개하였는데, 국무부 정보조사국이 국무장관에게 보고하기 위해 1994년 3월 29일에 작성한 문서에 따르면, 1994년 3월 25일 판문점에서 진행된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에서 인민군 대표는 “우리가 먼저 공격할 생각은 없지만, 당신들이 공격할 것이라는 점이 명백해지면 (먼저) 공격하겠다. 우리는 미국이 조선반도 주변에 군대를 모아서 우리를 공격할 시간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인민군 대표가 미국군 대표에게 인민군의 선제타격능력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근 20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지난 20년 동안 인민군이 선제타격능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해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살펴보면, 지금 인민군은 외부에 자기의 전쟁징후를 전혀 노출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습적인 선제타격으로 전쟁상대를 ‘뇌사상태’에 빠뜨리고 ‘조국통일대전’을 초단기속결전으로 끝낼 준비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2012년 2월 25일 북측 국방위원회는 대변인 성명에서 “미제침략군의 본거지들과 반공화국 군사소굴들을 우리의 타격권 안에 집어넣고 움쩍만 하면 일격에 짓뭉개버릴 것”이라고 하면서 “그 누구에게도 없는 최첨단 타격장비가 (인민군에게)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가 말한 최첨단 사격장비는 최고사령부 대변인이 2013년 3월 5일에 발표한 성명에 나온 “누르면 발사하게 되어있”는 “우리 식의 정밀핵타격수단”을 가리킨 것이다.

미국은 동해, 남해, 서해로 이어진 14일 간의 작전일정에 따라 항모강습단의 전속항진과 야간기습을 결합한 선제핵타격연습까지 감행하기는 하였으나, 북과 맞선 실제대결상황에서는 자기의 움직임을 전쟁연습개시 전에 북에게 노출함으로써 결정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제7함대 항모강습단이 선제핵타격연습을 강행하였어도 자기의 움직임을 전쟁연습개시 전에 인민군에게 노출하고 말았으니, 만일 2013년 9월 29일에 미국이 실제로 대북전쟁에 돌입했더라면, 전속항진으로 북상하던 제7함대는 포항만 인근해상에 도착하기도 전에 인민군 전략로케트군이 미국의 심장부를 타격하였다는 급전을 받고 갈팡질팡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어쨌든, 미국의 항공모함이 한반도 주변에 자주 출몰하고 그에 따라 북의 반발이 갈수록 강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한반도가 위험천만한 전쟁위기로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북미대결전이 격화된다면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따라서 한반도 전쟁을 막기 위한 북미평화협정체결을 요구하는 우리민족의 목소기가 더욱 크게 울려 나와야할 절박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남녘 정부도 미군이 있기에 한반도에 전쟁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만 하지 말고 근본적인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미국에만 의존하지 말고 자주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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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0

이승만이 역설한 ‘민중주권론’이 종북이라니

<민중의 소리> 2013년 11월 09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이승만 대통령이 주장한 민중주권론, 통합진보당이 주장하면 종북?

2013년 11월 5일 국회 예결위에 출석한 정홍원 국무총리에게 통합진보당 오병윤 의원이 “통합진보당 강령의 내용이 헌법의 국민주권 조항과 뭐가 달라서 위헌이냐”고 물었다. 정 총리는 헌법에는 국민주권이라고 명시되었다고 지적하면서, 국민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용어지만 통합진보당이 자기 강령에 명시한 민중이라는 용어는 “사회주의적”이라고 답했다. 만약 정 총리가 인민이라는 용어가 사회주의적 용어라고 말했다면 현직 총리로서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하고 넘어가겠지만, 민중이라는 용어가 사회주의적 용어라니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다른 사람이 아닌 국무총리가 농담을 주고받는 사석이 아니라 국회 예결위에 출석해서 민중이라는 용어가 사회주의적 용어라고 말한 것은 상식을 파괴한 충격발언이었다.

민중이라는 용어는 1941년 11월 28일에 채택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에도 나오고,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48년 5월 31일에 열린 제1차 제헌국회에서 초대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의 개회사에서도 민중이라는 말이 네 차례나 나온다. 이승만 당시 국회의장은 개회사에서 “군주정치시대에는 정부 당국들에게 맡기고 일없이 지냈지만 민주정체에는 민중이 주권자이므로 주권자가 잠자코 있으면 나라는 다시 위험한 자리에 빠질 것”이라고 하면서 민중주권론을 설파한 바 있다. 사회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거부감을 느낀 이승만 대통령도 민중이라는 말을 그처럼 제헌국회에서 여러 차례 썼는데, 민중이라는 말이 사회주의적 용어라니 억지도 그런 생억지가 없다.

통합진보당이 중소기업가들과 5급 이상 공무원을 배척한다고?

법무부가 통합진보당을 해산하려고 만들어놓은 ‘위헌정당·단체 관련 대책 태스크포스’라는 탄압기구를 지휘하는 정점식 서울고검 공판부장이 취재기자와 진행한 질의응답에서 꺼내놓은 발언을 들어보면 더 기가 막힌다. 그는 “기본적으로 민중은 전체 국민을 의미하지 않는다. 농민과 중소상인, 아주 작은 소지주 등만을 민중이라고 얘기한다. 진보당은 중소기업하는 사람, 5급 이상 공무원 등 이런 사람들은 민중을 지배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가진 모든 것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점식 서울고검 공판부장의 주장에 따르면, 통합진보당에게 있어서 중소기업가들과 5급 이상 공무원은 배척대상이라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이 자기 강령에서 노동자, 농민, 노점상, 사회적 소수자, 장애인, 이주민을 위한 민중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중소기업가들과 5급 이상 공무원을 무슨 배척대상으로 본다는 소리는 날조다. 법무부 당국자의 그런 날조와는 정반대로, 통합진보당은 중소기업을 보호, 육성하는 경제의 민주화를 중시한다. 그 당의 강령에는 “재벌의 소유경영의 독점해소 등을 통해 독점재벌 중심 경제체제를 해체하고, 불공정하도급거래 관행 근절, 대형유통점 규제 등을 통해 중소기업 및 영세 자영업자를 보호 육성함으로써 경제의 민주화를 실현하고 내수 중소기업 주도형 경제체제를 강화한다”고 명시되었다.
 
6일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가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열린 위헌적인 통합진보당 해산청구 의결 전면무효 시민사회 긴급 기자회견에서 해산청구 전면 무효를 주장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6일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가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열린 위헌적인 통합진보당 해산청구 의결 전면무효 시민사회 긴급 기자회견에서 해산청구 전면 무효를 주장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김철수 기자


대한민국 건국강령과 일치하는 통합진보당의 국공유화강령

통합진보당에게 ‘종북올가미’를 씌워 그 당을 해산하려는 박근혜정부의 탄압은 그 당이 이른바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한다고 제멋대로 규정한 것에서 궤변과 모략의 극치를 이룬다. 이를테면, 법무부의 ‘위헌정당·단체 관련 대책 태스크포스’ 단장인 정점식 서울고검 공판부장이 “민영화 추진 중단과 소유구조 다원화를 사회주의경제질서로 단정한 근거가 무엇인가?”라는 취재기자의 물음에 대해 “이전의 진보당 당원들이 각종 서적 또는 발언 등을 통해 결국 당이 추구하는 경제체제가 북한식 사회주의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답변한 것이 그런 궤변과 모략의 대표적인 사례다.

통합진보당이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하고 있다는 법무부 당국자의 주장이 얼마나 황당한 궤변과 모략인가 하는 것을 알려면, 우선 통합진보당의 경제강령을 읽어보아야 한다. 그 당의 강령 중에 “민생중심의 자주자립경제체제 실현을 위하여”라는 항목 가운데, “물, 전력, 가스, 교육, 통신, 금융 등 국가기간산업 및 사회서비스의 민영화 추진을 중단하고, 국공유화 등 사회적 개입을 강화해 생산수단의 소유구조를 다원화하며 공공성을 강화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기간산업과 사회서비스를 국유화 또는 공유화하여 생산수단의 소유구조를 다원화하고 공공성을 강화하는 경제강령이 어째서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종북강령’으로 둔갑하는 것인가.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직후 오바마 정부도 자국의 부실금융기관들을 국유화하였고, 유럽연합의 여러 나라들도 국유기업을 운영하고 있는데, 국유화라는 말만 들어도 즉각 ‘북한식 사회주의’를 연상하는 그들의 동물적 감각이 놀랍다.

주요산업의 국유화강령은 1941년 11월 28일에 채택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에도 명시되었다. 그 건국강령에는 “대산업기관의 공구와 시설을 국유로 하고, 토지, 광산, 어업, 수리, 임업, 소택과 수상, 공중의 운수사업과 은행, 전신, 교통 등과 대규모의 농, 공, 상, 기업과 성시, 공업구역의 공용적 주요산업은 국유로 하고, 소규모 혹 중소기업은 사영으로 함”이라고 명시되었다. 또한 그 건국강령이 채택된 때로부터 7년이 지난 1948년 7월 17일에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제85조는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 수산자원, 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을 국유로 한다”고 규정하였고, 제87조는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국공유화강령을 명시하였다.

이처럼 주요산업 국공유화강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이며 동시에 대한민국의 첫 헌법에 명시된 건국강령이다. 그러므로 오늘 통합진보당의 국공유화강령은 1940년대에 천명된 주요산업 국공유화강령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통합진보당의 주요산업 국공유화강령이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종북강령’이라니,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모독해도 분수가 있지 어떻게 그런 궤변과 망발을 서슴없이 꺼내놓으면서 통합진보당을 공격하는가. 만일 법무부의 주장대로 하자면 박근혜 정부는 ‘북한식 사회주의’와 동일한 주요산업 국공유화강령을 헌법으로 채택한 제헌절은 폐지되어야 하며, 현행 헌법 전문에 들어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법통성 조항도 삭제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국제적으로 이미 파산선고를 받은 신자유주의 경제강령을 아직도 맹신하면서 공기업을 사영화하는 박근혜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에 반하는 공기업 사영화 정책을 당장 중지해야 하며 통합진보당이 요구하는 공공성 강화정책을 수용해야 할 것이다.

북의 건국이념은 진보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인민민주주의다

통합진보당을 위헌정당으로 몰아 해산하려는 박근혜 정부의 탄압에서 결정판은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한 왜곡과 궤변이다. 이를테면 정점식 서울고검 공판부장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김일성이 사용했다고 위헌적이라 할 수 있나?”라고 물은 기자의 물음에 “이 용어자체는 ‘민족해방민주해방’(민족해방민주혁명의 오기로 보임-필자)이 가장 기본이 되는 용어”라고 답변하였다.

통합진보당은 자기의 강령 전문(前文)에서 “민중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생활 전반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진보적인 민주주의 사회를 실현하겠다”고 명시하였다. 진보적인 민주주의 사회라는 것은 진보적 민주주의가 실현된 사회라는 뜻이므로, 통합진보당이 자기의 정치이념을 진보적 민주주의로 천명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법무부 당국자들이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를 북의 건국이념을 추종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는 데 있다. 법무부 당국자들의 그런 주장이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 생억지인지를 알려면, 진보적 민주주의가 정말로 북의 건국이념인지 역사자료를 가지고 밝혀내야 한다.

법무부 당국자들은 김일성 주석이 1945년 10월 3일에 평양로농정치학교 학생들 앞에서 한 강연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하여’를 근거로 들면서,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가 북의 건국이념을 추종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이 그 강연을 한 시점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환영군중대회’를 통해 북에서 공식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이었고, 강연대상도 학생들이었으므로, 그가 그 강연에서 언급한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북의 공식적인 건국이념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북의 공식적인 건국이념은 무엇이었던가? 김일성 주석은 1948년 7월 9일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 전원회의에서 한 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실시에 관하여’에서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길은 부르죠아민주주의가 아니라 인민민주주의입니다”라고 명백히 밝혔고, 그로써 북의 헌법 제12조에는 “국가는 계급로선을 견지하며 인민민주주의독재를 강화하여 내외적대분자들의 파괴책동으로부터 인민주권과 사회주의제도를 굳건히 보위한다”고 명시되었던 것이다.

위의 역사자료에서 입증된 것처럼, 북의 건국이념은 진보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인민민주주의다.
여운형 선생이 생전아 주창한 ‘진정한 민주주의’가 오늘날 계승된 것이 ‘진보적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여운형 선생이 생전아 주창한 ‘진정한 민주주의’가 오늘날 계승된 것이 ‘진보적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인터넷자료


진보적 민주주의, 2007년 시민단체가 먼저 주장했다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여운형 선생이 인민당의 건국노선을 설파하면서 제시한 진정한 민주주의와 일맥상통한다. 여운형 선생은 1945년 12월 8일 <조선인민보>에 발표한 글 ‘인민당의 신념’에서 “정치형태의 형식과정이 반드시 대중으로부터 조직되어 올라오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제시한 바 있는데, 그가 말한 진정한 민주주의가 오늘 통합진보당이 자기 강령에서 제시한 진보적 민주주의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의 정치이념적 계보는 조선인민당→사회노동당→근로인민당→진보당→민중당→민주노동당으로 이어져온 한국의 진보정당사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도 법무부 당국자들이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연결고리로 하여 통합진보당과 북의 조선로동당을 억지로 연계시키려는 것은 모략 이외에 다른 게 아니다.

더욱이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통합진보당에서 먼저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통합진보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은 2009년 6월 20일 1차 정책당대회에서 발표한 공식문서들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였지만, 시민사회단체들이 그보다 먼저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하였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2007년 6월 7일 서울 대우센터 컨벤션홀에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와 희망제작소가 주최하고 <한겨레>가 후원하여 열린 ‘6월 항쟁의 현재적 의미와 시민사회운동의 진로모색’이라는 토론회에서 김상곤 한신대 교수는 “시민사회운동진영이 보수적 민주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회경제적 공공적 민생민주주의와 민주적 구조개혁을 총체적으로 이룰 수 있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프로그램화하고 전술을 공동으로 구해나가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명백하게도,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통합진보당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전 세계 모든 진보정치세력이 공인한 국제적 공유개념이다.
위에서 논한 것처럼, 박근혜정부가 통합진보당에게 씌운 위헌정당이라는 올가미는 날조와 궤변으로 조작된 것이다. 그처럼 허황하기 짝이 없는 위헌정당모략으로 국민을 기만하고 통합진보당을 해산하려는 박근혜정부의 탄압은 즉각 중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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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6

오판으로 가득 찬 비밀문건

[한호석의 개벽예감](86)
자주민보 2013년 11월 05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2013년 10월 13일동해에서 작전 중이던 인민군 구잠함 233호의 장병 20여 명이 전사하였다. 그들은 미국 항모강습단의 전격적인 동해진입과 기습타격전연습 강행으로 조성된 긴장된 상황에서 해상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불의의 사태를 만나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사진은 구잠함 233호와 유사한 중국인민해방군 소속 400t급 037형 구잠함을 촬영한 것이다. (image credit=sinodefense.com)     © 자주민보, 한호석 소장 제공
  

1999년 2월에 작성된 국정원 비밀문건  

김대중 대통령이 재임기간 중에 이룩한 가장 큰 공적은 사상 처음 현직 대통령으로 방북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상봉하고 6.15 공동선언을 채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2000년에 6.15 공동선언을 채택한 김대중정부의 ‘뒷모습’은 전혀 다르게 생겼다.

1999년 2월 김대중정부는 “북한 급변사태와 통일대비책을 정리한 비밀문건”을 작성하였다. 그 비밀문건의 존재는 2013년 1월 이정훈 <신동아> 편집위원이 발표한 글에서 드러났다.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그 비밀문건을 작성한 주체가 구체적으로 김대중정부의 어느 부처였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비밀문건의 성격과 내용을 보면 국가정보원이 그 비밀문건을 작성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국정원 비밀문건에 따르면, 북의 급변사태에 대한 김대중정부의 대응은 세 단계에 걸쳐 진행되는데, 위기관리단계→통일추진단계→실질통합단계가 그것이다.
▲ 미주 통일학연구소 한호석 소장     ©자주민보
첫째, 국정원 비밀문건에서 말한 위기관리는 북의 정권붕괴조짐이 나타난 초기에 긴급히 대처하는 대응행동을 뜻한다. 국정원 비밀문건에 들어있는 대응행동의 구체적인 내용은 너무 황당해서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고, 다만 김대중정부 시절의 국정원이 위기관리단계에서 예상한 여러 긴급대응행동들 가운데 진보세력에 대한 탄압이 포함되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국정원 비밀문건에 따르면, “위기관리단계에서는 남파간첩출신, 사회주의지하혁명조직 구성원, 친북좌익이념단체의 인물, 재야-노동운동단체의 핵심인물, 북한공작조직과 연계혐의가 있는, 내사와 수사-공작 대상자 등은 (국정원이) 경찰, 검찰, 기무사와 함께 특별관리한다”는 것이다. 국정원이 기존 감시대상을 특별히 관리한다는 말은 그들을 체포, 구속, 처형한다는 것을 뜻한다. 최근 통합진보당, 전교조, 자주민보, 개별적 진보인사들을 포함하는 진보세력 전반에 대한 무차별적인 탄압은 국정원 비밀문건의 위기관리단계에서 언급한 진보세력에 대한 탄압을 연상케 한다. 지금 국정원은 그들이 말한 ‘위기관리’를 연습하고 있는 것일까?

둘째, 국정원 비밀문건에 수록된 ‘통일추진단계’는 김대중정부가 북에서 ‘개혁정권’을 세우는 단계다. 그 단계에서 국정원은 ‘북한지역평정합동대책반’을 운영하게 되는데, 그 대책반 공작원들이 북측 각지에 파견되어 “북한에 심어놓은 우리 공작망(부식첩망)과 탈북자, 한국에 협조하는 북한주민 등을 활용해” 북의 집권당과 정부와 군부의 핵심세력을 “분류, 선정해 제거하거나 격리, 체포, 수감”한다는 것이고, “소극적 저항세력은 동향을 감시하며, 회유, 순화시킨다”는 것이다. 김대중정부는 북의 핵심세력을 제거하는 것과 동시에 북의 ‘개혁세력’에게 “정보, 자금, 장비를 제공하여” ‘개혁정권’을 세우는 비밀계획을 속에 품고 있었다.

셋째, 국정원 비밀문건에 수록된 ‘실질통합단계’는 국정원이 북에 세운 ‘개혁정권’이 조선로동당을 해산하고, ‘공산잔재청산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고, ‘잔재청산대책위원회’를 운영하는 단계다. 국정원 비밀문건에 따르면, ‘잔재청산대책위원회’는 그들이 북에서 청산할 대상자를 1등급에서부터 6등급까지 분류하고, 1등급에서 3등급까지는 ‘사법처리’한다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추진한 주무부처였던 국정원이, 6.15 공동선언이 채택되기 불과 1년 4개월 전에 위와 같은 비밀문건을 작성한 것은 경악과 충격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그 비밀문건이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로 작성된 것인지 아니면 국정원 고위관리가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고 단독적으로 작성한 것인지 판단할 근거를 찾을 길 없으나, ‘햇볕정책’을 선전하면서 6.15 공동선언에 서명하기까지 한 김대중정부가 ‘북한정권붕괴’에 대비한 ‘북한평정공작’을 준비하는 비밀문건을 임기 내내 속에 품고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처럼 막 뒤에서는 ‘북한정권붕괴’를 바라고 ‘북한평정공작’을 준비한 김대중정부가 막 앞으로 잠깐 모습을 드러내며 6.15 공동선언에 서명하였으니, 그런 서명을 골백번 다시 한들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국정원은 김대중 대통령이 방북하여 6.15 공동성명에 서명한 뒤에 그 비밀문건을 폐기하였을까? 그렇지 않다는 데 사태의 재앙적 위험성이 있다. 국정원 비밀문건은 6.15 공동성명 이후 폐기된 것이 아니라 김대중정부 임기가 끝난 뒤 후속정부로 계승되어오면서 지난 13년 동안 더욱 보완되었다. 1994년 8월 11일에 발간된 <시사저널> 250호 보도기사에 따르면, ‘북한정권붕괴’에 대처하는 ‘북한평정공작’을 담은 비밀계획은 1970년대에 박정희정부가 원래 ‘충무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작성한 것인데, 전두환정부와 노태우정부를 거쳐 김영삼정부에게 계승되면서 ‘통합계획’으로 보완되었다고 한다.

가장 근자에 국정원 비밀문건의 계승과 보완에 대해 언급한 보도기사는 <조선일보> 2011년 3월 28일부에서 발견되었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당시 이명박정부 시절의 국정원이 “북의 급변사태에 대비하여 수립한 ‘00계획’에도 공산주의유물유적은 말소시키고, 일부는 보존해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다는 규정이 포함”되었고, 군부는 북의 급변사태에 대처하여 실행할 군사작전계획의 일환으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상을 제거하는 방안을 수립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김대중정부의 뒤를 이어 등장한 노무현정부가 대북침공구상을 대북작전계획으로 완성하려던 미국의 기도를 반대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알려진 노무현정부의 ‘뒷모습’은 전혀 다르게 생겼다. <중앙일보> 2004년 10월 8일 보도에 따르면, 정문헌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공개한 통일부 국감자료는 북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나는 경우 노무현정부가 실행할 ‘응전자유화계획’을 수립해두었음을 밝혔는데, ‘응전자유화계획’이란 이전 정부들로부터 계승한 ‘충무계획’을 더 보완, 발전시킨 것이다. 정동영 당시 통일부장관은 정문헌 의원의 서면질의에 답변하면서 “충무9000계획은 통일부 주관이며 현재 충분히 보완, 발전시키고 있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보면, 노무현정부도 이전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북한정권붕괴’를 바라면서 ‘북한평정공작’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막 뒤에서는 ‘북한정권붕괴’를 바라면서 ‘북한평정공작’을 준비한 노무현정부가 막 앞으로 잠깐 모습을 드러내 10.4 선언에 서명하였으니, 그런 서명을 골백번 다시 한들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위에서 밝혀진 것처럼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가 그처럼 속과 겉이 다르게 행동하였으니,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공개적으로 전면 거부한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에 대해서는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문화일보> 2010년 1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2009년 말 이명박 정부는 김대중정부의 ‘충무계획’과 노무현정부의 ‘응전자유화계획’을 더 보완하여 ‘부흥계획’을 작성하였다. 이런 맥락을 살펴보면, ‘충무계획’은 ‘통합계획’, ‘응전자유화계획’, ‘부흥계획’으로 계승, 보완되어 오늘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모체약정형식으로 체결된 비밀군사협정 

국정원과 통일부가 ‘북한정권붕괴’를 바라면서 ‘북한평정사업’을 준비해온 것과 마찬가지로, 군부도 ‘북한정권붕괴’를 바라면서 ‘북한안정화작전’을 준비해왔다. 국정원의 ‘북한평정사업’이나 통일부의 ‘부흥계획’이 점령지역에 대한 행정사업계획이라면, 군부의 ‘북한안정화작전’은 북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나는 경우 즉각 무력을 사용하여 북을 점령하는 군사점령작전이다. 그런데 전시작전통제권을 갖지 못한 한국군이 그런 군사점령작전을 단독으로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한국 군부의 ‘북한안정화작전계획’은 처음부터 미국 군부의 주도로 작성되고 보완되어왔다. 아래와 같은 정보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첫째, 김영삼정부 말기인 1997년 12월 9일 미국 워싱턴에서 진행된 제29차 한미안보협의회(SCM)에서 윌리엄 코헨(William S. Cohen) 당시 미국 국방장관과 김동신 당시 한국 국방장관이 ‘북한안정화작전’에 관한 비밀군사협정을 체결하였다. 1997년의 한미비밀군사협정이 모체약정(umbrella agreement)형식으로 체결되었다는 2010년 2월 9일 <동아일보> 보도기사를 통해 비밀군사협정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난 바 있다. 제29차 한미안보협의회는 공동성명에서 “양 장관은 이러한 불확실한 상황 하에서 한국과 미국이 광범위한 가능성에 대해 공동으로 대비해 나가는 것이 현명하다는 데 견해를 같이하였다”고 밝혔는데, 그들이 언급한 ‘불확실한 상황’에서 발생할 ‘광범위한 가능성’이란 ‘북한정권의 붕괴가능성’을 뜻하며, ‘공동대비’란 ‘북한안정화작전’을 위한 공동준비를 뜻한다.

둘째, 미국의 군사전문 웹사이트 <글로벌 씨큐리티(Global Security)>에 게시된 자료에 따르면, 1999년 8월 존 틸럴리(John H. Tilelli)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은 ‘북한정권붕괴’에 대비한 전쟁시나리오를 준비하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 그 전쟁시나리오는 아직 작전계획으로 완성되지 못한 ‘개념계획(CONPLAN) 5029-99’였다.

김대중정부 시절의 국정원이 1999년 2월에 ‘북한평정공작’ 비밀문건을 작성한 것은, ‘북한안정화작전’에 관한 비밀군사협정을 체결한 1997년 12월에서부터 주한미국군사령관이 ‘북한정권붕괴’에 대비한 ‘개념계획 5029-99’를 작성하였다고 인정한 1999년 8월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미국 군부가 한국 군부를 참가시킨 가운데 작성한, ‘북한정권붕괴’에 대비한 ‘개념계획 5029’는 오랜 기간에 걸쳐 검토되고 보완된 끝에 ‘작전계획(OPLAN) 5015’로 완성되었다. ‘개념계획 5029’가 ‘작전계획 5015’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내일신문> 2013년 2월 15일 보도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바 있다.

미국 일간지 <월 스트릿 저널(Wall Street Journal)> 2013년 3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2013년 3월 22일 제임스 서먼(James D. Thurman)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과 정승조 당시 합참의장이 “급변사태계획(contingency plan)에 서명하였다.” <월 스트릿 저널>은 급변사태계획에 서명했다고 보도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북한안정화작전’을 실행할 ‘작전계획 5015’에 서명한 것이다.

지금 미국군과 한국군은 ‘북한안정화작전’을 실전급 규모로 해마다 두 차례씩 연습하면서도 키리졸브 한미합동전쟁연습이나 을지프리덤가디언 한미합동전쟁연습에 ‘작전계획 5015’를 포함시켜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은폐하고 있으며, 자연재해에 대비한 ‘인도주의적 지원작전연습’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실제로는 ‘작전계획 5015’를 연습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는 정보는 아래와 같다.

<연합뉴스> 2010년 9월 9일 보도에 따르면, 당일 서울 용산에 있는 주한미국군기지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월터 샤프(Walter L. Sharp)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은 2010년 8월 을지프리덤가디언 한미합동전쟁연습 중에 북의 급변사태에 대비한 안정화작전을 실시하였느냐고 물은 취재기자의 질문에 대해 “한미 양국은 (북한)주민 안정화작전을 하고 있고, 이는 중요한 작전”이라고 지적하고, “두 지역(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뜻함-옮긴이)에서 도출한 교훈은 어느 지역에선 전투를 하고 다른 지역에선 안정화작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 자리에 동석한 정승조 당시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은 “안정화작전에서 지상군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한미 양국군의 강약점이 다를 수 있어 양군의 장점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식으로 안정화작전을 실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측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조선일보> 2012년 4월 6일 보도에 따르면, 2012년 키리졸브 한미합동전쟁연습에서 “북한급변사태 중 내전발생 시 대규모 한국군 병력을 투입해 북한지역을 안정화하는 훈련을 실시했”는데, 인민군 내부에서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격화되어 내전이 일어나는 급변사태를 상정하여 “10만 명이 넘는 한국군 수 개 군단을 평양이남지역에 투입해 강경파를 진압하고 북한지역을 안정시키는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해체와 합병을 준비한 비밀문건이 없었다

  국정원은 ‘북한평정공작’ 비밀문건을 왜 1999년 2월에 작성하였을까? 그 비밀문건이 1999년 2월에 작성된 배경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당시 북이 겪고 있었던 ‘고난의 행군’이라는 혹독한 시련이다. 국정원은 당시 혹독한 시련을 겪던 북이 ‘고난의 행군’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급변사태에 빠지게 될 것으로 예상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예상한 국정원이 ‘북한평정공작’ 비밀문건을 작성한 것은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1999년 2월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해체되고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 합병된 때로부터 불과 8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래서 국정원은 ‘고난의 행군’으로 시련에 겪는 북에서 동독형 해체와 합병이 재발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국정원만 그런 것이 아니라, 통일부와 군부도 그렇게 전망하였다.

그러나 국정원, 통일부, 군부가 동독형 해체와 합병의 재발을 내다본 전망은 사실상 전망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전망은 동독의 해체와 합병에 대한 무지와 오해, 그리고 북의 현실에 대한 무지와 착각이 빚어낸 망상이라는 비판을 피할 길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는 논거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국정원, 통일부, 군부는 북을 해체하고 합병하려는 비밀계획을 가지고 있지만, 지난 시기 서독의 연방정보국(Bundesnachrichtendienst), 독일내부관계부(Ministrium fűr innerdeutsche Relations), 연방방위군(Bundeswehr)은 동독을 해체하고 합병하려는 비밀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다. 지난 시기 서독 정부는 동독을 해체하고 합병하려는 비밀계획을 갖지 않았지만, 오늘 남측 정부는 북을 해체하고 합병하려는 비밀계획을 가지고 있는 상반된 현실은 동서독관계와 남북관계를 갈라놓은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그런데 그런 상반된 현실에 대해 눈을 감아버린 남측 정부는 자기들이 서독 정부와 얼마나 다른지 알지 못하고 있다.

둘째, 지금 남측 정부는 북을 폭력적으로 해체하고 강제로 합병하려는 비밀계획을 가지고 있지만, 서독 정부는 동독을 폭력적으로 해체하고 강제로 합병하지 않았고, 동독이 자진해체와 자진합병을 택하였던 것이다. 동독이 자진해체와 자진합병을 택한 까닭은, 동독의 군대와 인민이 자기들의 사회주의체제를 외면하고 서독의 자본주의체제를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1989년 9월 동독 인민 15,000여 명이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서독으로 탈출하였고, 동독의 국방회의(Nationaler Verteidigungsrat)가 지휘하는 국가인민군(Nationale Volksarmee) 병력 175,300명은 비상대기상태에 들어갔지만 그 이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였다. 1990년 3월 18일 동독총선에서 승리하여 동독의회(Volkskammer)를 장악한 병합추진세력은 1990년 8월 23일 동독 자진해체를 의결하였고 그에 따라 1990년 10월 2일 동독이 서독에 병합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던 날 국가인민군도 와해되었다. 체제와 주권을 수호하는 마지막 물리적 수단인 군대가 체제붕괴상황을 뻔히 보면서도 그것을 저지하지 못하더니 결국 어이없게 와해된 것이다.

동독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났는데도 국가인민군이 대응하지 못하다가 결국 와해된 것은, 국정원, 통일부, 군부의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국가인민군이 와해된 것처럼, 조선인민군도 와해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이를테면 <신동아> 2013년 4월호에 실린 기사에서 그런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그 기사에 따르면 “(남측의) 안보전문가들은 북한도발을 우리가 환수한 평시작전통제권을 제대로 사용해보는 기회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대응에 성공하면 북한내부가 ‘충격과 공포’에 빠져 병사들이 대거 탈영하는 진짜 급변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봤다”는 것이다. 이 인용문에서 대응이라는 말은 국지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났을 때 한국군이 우세한 화력으로 인민군을 격파하는 것을 뜻하는데, 무력충돌에서 참패하여 충격과 공포에 빠진 인민군이 대거 탈영할 것이고, 그에 따라 급변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남측 안보전문가들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남측 안보전문가들의 그런 생각은 국정원, 통일부, 군부의 대북전망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위에 인용한 내용은 국정원, 통일부, 군부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정원, 통일부, 군부가 조선인민군을 국가인민군 수준으로 얕보는 것은 오판 중의 오판이다. 그렇게 보는 논거는 아래와 같다.

국가인민군은 당시 동독에 주둔하던 소련군에게 의존하였다. 소련군이 철군하는 경우 국가인민군이 버티기 힘들 정도로 의존도가 높았다. 그와 달리, 조선인민군은 모든 종류의 핵탄과 전략무기들을 자력으로 생산하는 군사력 강화에 힘쓴 결과 군사강국대열에 들어섰으며, 그 보다 더 중요하게는 정신무장이 매우 강하다. 북에서는 전략무기보다 정신무장을 더 중시하는데, 북의 정신무장상태를 이 말해주는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구잠함 233호 최후와 대각봉호의 최후

2013년 11월 1일 북의 언론은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해군 제790군부대 소속 구잠함 233호 장병들이 안장된 묘에 조화를 진정하고 묵상한 소식을 보도하였다. 제790군부대는 동해함대에 소속된 부대다. 구잠함(sub chaser)이란 적 잠수함을 탐지하여 격침시키는 전투함인데, 대잠수함작전 이외에도 연안경비, 호위, 정찰, 기뢰부설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한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구잠함 233호 장병들은 2013년 10월 중순 “전투임무를 수행하다가 장렬하게 희생”되었다고 한다. 북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그들의 시신을 모두 찾아 안장해주며 장례도 잘해줄 데 대한 은정 깊은 조치”를 취하였고, “묘비와 란간은 어떻게 만들며 돌색갈은 어떤 것으로 해야 하는가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지도하였고, “묘비들에 용사들의 생전의 모습을 새긴 돌사진을 붙일 데 대한 지시”를 주었고, 직접 묘소에 찾아가 애도하고 묘비에 자신의 이름을 묘주로 써넣으라고 말하였다. 만일 구잠함 233호 장병들이 해상훈련 중에 단순사고로 순직하였다면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그렇게까지 특별하게 배려하였을 리 없으므로, 구잠함 233호 장병들은 어떤 작전상황에서 전투임무를 수행하던 중 전사한 것이 분명하다. 보도영상을 보면, 묘비에 “2013년 10월 13일 전사”라고 새겨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2013년 10월 13일 구잠함 233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2013년 10월 19일 <로동신문>에 실린 ‘위험계선을 넘어서는 북침핵전쟁위기’라는 제목의 해설기사에 따르면, 미국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USS George Washington)가 “조선서해에 들어온 것은 여러 차례이지만 조선동해와 남해에 이어 서해에 진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일보> 2013년 10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조지워싱턴호는 2013년 10월 10일과 11일 이틀 동안 남해에서 실시된 한미일 3자연합해상훈련에 참가하였고, 12일에는 서해로 진입하였다. 남측에서는 당시 조지워싱턴호가 동해에 진입하였다는 보도가 전혀 나오지 않았는데, 북측에서는 조지워싱턴호가 먼저 동해에 진입한 뒤에 남해와 서해로 갔다고 보도하였다.

북측 보도를 읽어보면, 당시 미국은 항모강습단의 남해출동정보만 언론에 흘려주고, 남해에 출동하기 전에 동해에 전격적으로 진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항모강습단이 언론보도를 차단한 채 동해에서 기습공격연습을 감행하였음을 말해준다. 항모강습단이 그처럼 동해에 전격 진입하여 기습공격연습을 감행하는 것을 간파한 북의 동해함대가 그에 맞서는 대응작전에 돌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구잠함 233호는 동해에서 기습공격연습을 감행한 항모강습단을 정찰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항모강습단에 대한 해상정찰은 정찰대상에 접근해야 하는 매우 위험한 전투임무다. 더구나 정찰대상은 기습타격전을 연습하기 위해 출동한, ‘세계 최강’이라는 항모강습단이었다.

조지워싱턴호가 10월 10일 뱃머리를 동해에서 남해로 돌렸다고는 하지만, 핵추진잠수함이 언제 어디서 출몰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동해함대는 여전히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긴장상태는 구잠함 233호 장병들이 전사한 10월 13일까지 지속되었다.

400t급 구잠함 승선인원은 78명인데, 구잠함 233호 장병들이 안장된 묘소에 세워진 묘비는 약 20기다. 그러면 약 58명에 이르는 다른 장병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구잠함 233호가 미국 핵추진잠수함과 교전 중에 피격되었다면 78명 장병들 가운데 생존자는 몇 사람 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구잠함 233호가 해상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불의의 사태로 위급한 순간에 처했을 때, 20여 명의 장병들이 자기 목숨을 바쳐 다른 50여 명의 장병들을 구하고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위급한 작전상황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기에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그들의 묘 앞에서 그처럼 애도하였을 것이고, 그들의 묘비에 ‘희생’이 아니라 ‘전사’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북에서 펴낸 각종 자료들에 따르면, 인민군은 전쟁승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며, 조국과 동지를 위해서 라면 불길 속에도 몸을 던지고 바닷물 속에도 뛰어드는 정신무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북에서는 인민군이 ‘총폭탄정신’으로 무장되었다고 말한다. 구잠함 233호 장병들도 그런 정신을 발휘하며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그렇게 정신무장을 갖춘 조선인민군을 자기 체제가 무너질 때 총 한 방 쏴보지 못하고 와해된 국가인민군과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013년 7월 9일 <아사히신붕>에 실린 보도기사 한 편이 눈길을 끌었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일본 경찰은 2013년 2월부터 약 6개월에 걸쳐 일본 서해안지역인 니가다현(新潟縣) 바닷가와 아키타현(秋田縣) 바닷가에 떠밀려온,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북측 주민 시신들을 연이어 발견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시신들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상화를 가슴에 품고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일본 언론은 “대다수의 시신들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총비서의 초상화를 품고 있었다. 조난 당시 필사적으로 꺼낸 것으로 보인다. 대다수가 붉은 통을 안고 있었다. 붉은 통 안에는 비닐로 정중히 싼 초상화가 손상되지 않은 채로 들어 있었다”고 보도한 바 있다.

그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되어 머나먼 일본 서해안까지 밀려온 것일까? 이 의문을 풀어준 것은 <로동신문> 2013년 10월 29일 보도기사였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그들은 2012년 12월 어느 날 러시아 연해주에서 가까운 동해 동북부 해상에서 조난을 당해 침몰한 14,000t급 화물선 대각봉호의 선원들이었다. 당시 사고해역에는 강풍을 동반한 엄청난 풍랑이 몰아치는 바람에 항해가 불가능하였다. 강풍과 파도가 대각봉호 선체를 연속 강타하자 대형화물들이 무너져 한쪽으로 쏠리면서 무게중심을 잃은 대각봉호는 침몰하기 시작하였다. 배에서 탈출하라는 본국의 다급한 무선교신을 거듭 받았건만, 그들은 “조국의 한 부분이고 살점과도 같은” 대각봉호와 운명을 같이 하였다. 북측 보도기사에 따르면, 그들은 “김정은 동지를 잘 모셔주기 바란다”는 마지막 무선교신을 보내고, 최고영도자들의 초상화를 보관한 수밀함통을 가슴에 품었다고 한다. 사나운 파도에 수밀함통이 자기들 품에서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끈으로 자기 몸에 단단히 묶은 그들의 마지막 모습은 광란하는 겨울바다 속으로 사라져갔다. 성난 풍랑 몰아치는 망망대해에서 바다에 빠지면 시신조차 찾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아는 선원들이었기에 그들은 자기 시신이 몇 달 뒤 누구에게 발견되리라고 예상하고 죽더라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행동한 게 아니었다.

북의 현실을 알지 못하는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지금 저 군사분계선 너머에는 대각봉호 선원들과 같은 평범한 인민들이 그런 정신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북측 인민들을 자기 체제를 저버린 동독 인민들과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북의 현실과 동독의 과거사를 억지로 결부시키는 발상이야말로 오판 중의 오판이다.

하기에 국정원, 통일부, 군부가 작성한 비밀문건을 다시 생각해야 하며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이 아닌 6.15남북공동선 우리민족끼리정신에 따라 대화와 협력을 통해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는 것만이 가장 바른 방도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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