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22

오바마가 해임한 플린, 트럼프의 실세로 등장하다

[한호석의 개벽예감](228)
자주시보 2016년 11월 21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트럼프-아베 비공개 회담에 배석한 제3인물
2. ‘대통령 매일 정보보고’ 받게 될 제2키신저
3. 오바마가 해임한 플린,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로 변신하다
4. 플린이 모스끄바에 가서 푸틴을 만난 사연
5. ‘전략적 인내’ 버리면, ‘전략적 대화’ 택할까?


▲ <사진 1> 이 사진은 2016년 11월 17일 도널드 드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트럼프 타워에서 아베신조 일본 총리와 비공개 회담을 진행하기 직전에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아베 총리는 트럼프 당선인을 가장 먼저 만난 외국정상이다. 그날 트럼프 당선인은 외교의전관례를 무시하고 아베 총리를 만났고, 아베는 일본인 통역 한 사람만 데리고 트럼프 타워에 갔다. 트럼프의 파격적인 행동으로 미국 정치권의 기존관례와 기성관념이 흔들리고, 뜻밖의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1. 트럼프-아베 비공개 회담에 배석한 제3인물

시작부터 파격의 연속이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행동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언론의 관심을 끈 것은 2016년 11월 17일 아베신조(安培晉三) 일본 총리와 만난 비공개 회담이다.

원래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미국 국무부 의전실이 마련한 공식의전절차를 따라 외국정상을 접견하는 관례를 따라야 한다. 이를테면, 국무부는 대통령 당선인이 외국정상들의 당선축하전화를 받는 순서를 미리 정해주고, 외국정상을 접견하기 전에 해당국가에 대한 미국의 외교정책을 설명해주고, 외국정상과의 전화통화 중에 또는 외국정상을 만나는 접견석상에 공식통역관을 배정하는 것 등이다.

그러나 트럼프 당선인은 그 모든 의전절차를 무시하였다. <뉴욕타임스> 2016년 11월 17일 보도에 따르면, 그는 외국정상들의 당선축하전화를 받는 순서도 정하지 않았고, 당선축하전화를 받을 때 공식통역관도 배정받지 않았다. 이전에 다른 대통령 당선인들은 외국정상들 중에서 가장 먼저 영국 총리의 당선축하전화를 받는 관례를 따랐었는데, 이번에 트럼프 당선인은 엉뚱하게도 압델 파타 엘씨씨(Abdel Tattah el-Sisi) 이집트 대통령의 당선축하전화를 가장 먼저 받았다. 트럼프 당선인이 두 번째 당선축하전화를 받은 외국정상은 맬콤 턴불(Malcolm Turnbull) 오스트레일리아 총리였는데,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골프선수 그렉 노먼(Greg Norman)에게서 트럼프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축하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또한 맛떼오 렌치(Matteo Renzi) 이딸리아 총리의 당선축하전화를 받았을 때, 트럼프 당선인은 ‘챠오’(Ciao, 영어에서 헬로라는 말처럼 쓰이는 간단한 인사말)라는 이딸리아말로 인사하더니 통역도 없이 영어로 통화하였다. 트럼프의 그런 파격적인 행동을 본 미국 국무부 의전실 관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만도 하였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일본 총리를 만나기 직전에 미국의 일본정책에 관한 국무부의 해설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공식통역관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중앙일보> 2016년 11월 18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당선인은 아베 총리와 만찬을 나누면서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아베 총리는 자기를 수행하는 고위관리들을 호텔 숙소에 남겨두고 일본인 통역관 한 사람만 달랑 데리고 트럼프를 만나러 그의 사저인 트럼프 타워(Trump Tower)에 갔다.

아베 총리는 트럼프 당선인의 만찬제의를 받아들여 트럼프 타워에서 만찬까지 하고 싶었겠으나, 바로 이틀 뒤 뻬루(Peru)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APEC) 정상회의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게 될 것을 의식한 나머지 만찬제의를 정중히 사양했다고 한다. 트럼프 당선인은 아베 총리와 회담을 마친 뒤 그의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던 지하주차장까지 내려가 배웅해주는 이변도 연출하였다. 이처럼 트럼프의 첫 외교활동은 파격의 연속이었다.

주목되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파격적인 행동이 뭐가 뭔지 모르는 좌충우돌이 아니라, 미국 정치권의 기존관례와 기성관념에서 벗어나 자기 식대로 하는 자신만만한 행동이라는 점이다.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억만장자 부동산재벌총수가 대통령으로 덜컥 뽑힌,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엄청난 이변으로 미국 정치권의 기존관례와 기성관념이 흔들리고 있는데, 트럼프 당선인의 파격행동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가 백악관에 들어가면 더욱 놀라운 이변들이 일어날 것으로 예견된다.

트럼프-아베 회담시간은 원래 1시간으로 예정되었는데, 30분이나 길어졌다. 회담시간이 예정보다 길어진 까닭은, 트럼프 당선인이 가장 신뢰하는 측근들을 두 차례에 걸쳐 회담에 동석시켰기 때문이다. 그로써 트럼프 당선인이 가장 신뢰하는 측근들이 트럼프-아베 비공식 회담을 계기로 자기 정체를 세상에 드러낸 셈인데, 그 내막은 이러하였다.
▲ <사진 2> 이 사진은 2016년 11월 17일 트럼프 타워에서 진행된 트럼프-아베 비공개 회담 현장을 촬영한 것이다. 이 사진은 그 회담에 참석한 다섯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진에서 맨 오른쪽에 앉은 여성이 트럼프의 맏딸 이방카 트럼프이고, 그 다음에 앉은, 촛대에 얼굴이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이 트럼프의 맏사위 쿠쉬너이고, 그 다음에 앉은 사람이 아베 총리이고, 그 옆에 트럼프 당선인이 앉았다. 그런데 사진의 맨 왼쪽에, 트럼프 곁에 앉아있는 또 한 사람의 옆얼굴이 보인다. 그가 바로 트럼프의 신임을 받는 실세 중의 실세로 등장한 마이클 플린이다. 트럼프는 그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내정하였다.     © 자주시보

트럼프 당선인은 아베 총리와 만난 비공개 회담에 자기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맏딸 이방카 트럼프(Ivanka M. Trump)와 그녀의 남편이자 자기 맏사위 재럿 쿠쉬너(Jared C. Kushner)를 동석시켰다. 이방카는 지난 대선기간 중에 타고난 미모와 화술로 트럼프의 당선을 돕기 위해 이러 저리 뛰어다닌 통에 그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며 유명세를 탔고, 쿠쉬너는 트럼프에게 영향을 줄 중요한 조언자로 등장할 것이라는 소문이 짜하다.

그런데 트럼프 당선인이 아베 총리와 만난 비공개 회담에는 트럼프의 직계친족인 이방카와 쿠쉬너 이외에 제3인물이 동석하였다. 트럼프 당선인이 이방카, 쿠쉬너, 제3인물을 그 비공개 회담에 동석시켰으니, 의전관례로 보면 그 세 사람은 사실상 정상회담에 배석자로 참석한 셈이다.

<중앙일보> 2016년 11월 18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당선인은 비공개 회담이 끝나갈 무렵 마이클 펜스(Michael R. Pence) 부통령 당선인을 불러 아베 총리와 인사를 나누게 하였다. 그렇다면 트럼프-아베 비공개 회담에 처음부터 배석한 제3인물은 펜스 부통령 당선인보다 트럼프의 신임을 더 많이 받는 실세 중의 실세라고 말할 수 있다. 트럼프-아베 비공개 회담에 처음부터 배석한 실세 중의 실세는 마이클 플린(Michael T. Flynn)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였다.

 
2. ‘대통령 매일 정보보고’ 받게 될 제2키신저
 
미국 대통령은 매일 아침 7시 45분부터 백악관 집무실에서 제국주의세계체제를 경영하는데 필요한 극비정보(top-secret intelligence)를 보고받는데, 이것을 ‘대통령 매일 정보보고(Presidential Daily Briefing)’라 한다.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극비정보는 중앙정보국(CIA), 국가안보국(NSA), 국방정보국(DIA), 연방수사국(FBI)을 비롯한 16개 국가정보기관들이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2013년 6월 6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대통령이 매일 아침 보고받는 극비정보들 가운데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국가안보국이 ‘프리즘(PRISM)’이라는 비밀감시망을 통해 수집한 극비정보라고 한다. 예컨대, 2012년 한 해 동안 국가안보국이 비밀감시망을 통해 수집한 극비정보들 가운데서 ‘대통령 매일 정보보고’에 포함된 정보는 모두 1,477건이다. 국가안보국이 운용하는 비밀감시망은 세계 각국 국가수반들의 은밀한 대화나 비공개 발언을 몰래 엿듣는 감청도청체계다.

미국 대통령은 극비정보를 알고 있어야 제국주의세계체제를 경영하기 위한 대외정책을 수립 또는 시행하라는 지시를 내릴 수 있으므로, ‘대통령 매일 정보보고’야말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인데, 그처럼 중요한 정보보고업무를 수행하는 책임자가 바로 국가정보국장(Director of National Intelligence)이다.
▲ <사진 3> 미국 대통령은 매일 아침 7시 45분부터 백악관 집무실에서 제국주의세계체제를 경영하는 데 필요한 극비정보를 보고받는데, 이것을 '대통령 매일 정보보고'라 한다. 위의 사진은 오바마 대통령이 '대통령 매일 정보보고'를 받는 장면이다. 사진 속의 대통령은 극비정보를 문서로 받는 게 아니라 아이패드로 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2016년 11월 16일보터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대통령 매일 정보보고'와 똑같은 내용의 정보보고를 받고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2016년 11월 16일부터 국가정보국장실이 작성한 극비정보를 보고받기 시작하였다. 그가 보고받기 시작한 극비정보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대통령 매일 정보보고’와 똑같은 내용이다.

관례에 따르면, 미국에서 행정부가 교체되는 기간 중에는 대통령 당선인과 부통령 당선인이 함께 ‘대통령 매일 정보보고’와 똑같은 내용의 극비정보를 보고받고, 대통령이 정식으로 취임하면 대통령 집무실에서 대통령만 ‘대통령 매일 정보보고’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2017년 1월 20일 대통령 취임식 이전까지 트럼프와 펜스는 트럼프의 사저인 트럼프 타워에서 극비정보를 매일 보고받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일이 있었다. 트럼프 당선인이 극비정보를 보고받는 자리에 펜스 부통령 당선인 이외에 또 한 사람을 추가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규정에 따르면, 현직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인 이외에 ‘대통령 매일 정보보고’를 받을 사람을 지명할 수 있으므로, 트럼프는 자신과 펜스 이외에 제3인물을 극비정보보고 청취대상에 포함시켜달라고 오바마 대통령에게 요구한 것이다.

오바마, 트럼프, 펜스 세 사람만 보고받는 극비정보를 함께 보고받게 해달라고 트럼프가 요구한 그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이 바로 마이클 플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자신이 펜스와 함께 극비정보를 보고받기 시작한 지난 11월 16일 다음날 마이클 플린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내정하였고, 곧바로 오바마 대통령에게 연락하여 그 내정자를 극비정보보고 청취대상에 추가로 포함시켜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런 정황을 살펴보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내정된 마이클 플린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국가안보부문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세 중의 실세로 등장하게 될 것임을 직감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뉴욕타임스>는 2016년 11월 17일 보도기사에서 앞으로 플린 국가안보보좌관은 미국이 국제위기상황들에 대처하는 방도에 관한 “최종조언(last word)”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주게 될 것으로 예견하였던 것이다.
▲ <사진 4> 이 사진은 2016년 11월 17일 마이클 플린이 트럼프 타워에 들어서는 장면이다. 오른손을 들고 승리를 뜻하는 V자 모양을 손가락으로 표시한 그의 얼굴에 자신감이 어려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날 그는 트럼프가 제의한 국가안보보좌관직을 수락하였다. 미국 언론매체들은 마이클 플린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가 트럼프 행정부에서 실세 중의 실세로 등장할 것으로 예견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트럼프 당선인이 마이클 플린을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내정하고, 오바마 대통령에게 그를 극비정보보고 청취대상에 추가로 포함시켜달라고 요구했던 바로 그 날, 지난 6년 동안 ‘대통령 매일 정보보고’를 작성하여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고해온 제임스 클래퍼(James R. Clapper) 국가정보국장이 연방하원 정보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하였다. <CNN> 2016년 11월 17일 보도에 따르면,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은 청문회에서 11월 16일 밤에 자기의 사직서를 오바마 대통령에게 제출하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관례에 따르면, 미국 대통령이 지명한 연방정부 고위관리들은 대선이 끝난 다음 달인 12월 중에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하는데, 대통령에게 제출된 사직서는 차기 대통령이 취임하는 이듬해 1월 20일에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무슨 급한 사정이 생겼는지 알 수 없으나,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은 대선이 끝난 직후 일찌감치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이 퇴장하고, 마이클 플린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가 등장한 대조적인 장면이 불과 몇 시간 시차를 두고 펼쳐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대조적인 장면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클래퍼가 연방의회 정보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하여 국가정보국장 사직서를 오바마 대통령에게 제출하였음을 언급하고, 플린이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내정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바로 그 시각, 뉴욕 맨해튼에 있는 트럼프 타워로 걸어 들어가는 노인 한 사람이 있었다.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였다. 트럼프 당선인은 그 날 오후 아베 총리와 비공개 회담을 시작하기 전에 키신저의 조언을 들었던 것이다. 올해 나이가 93살이 된 키신저는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인이다. 노쇠하여 사고력마저 퇴화된 그에게서 트럼프 당선인은 무슨 조언을 들었을까?

키신저는 1970년대에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지역에 몰아친 사회주의혁명을 중앙정보국 비밀공작을 동원하여 폭력적으로 잔인하게 압살하였을 뿐 아니라, 친미군사독재정권을 등장시켜 이른바 ‘더러운 전쟁(Dirty War)’을 일으킨 배후조종자이다. 1970년대 칠레의 친미군사독재정권이 자행한 폭압으로 각계층 진보인사 10,000여 명이 무참히 학살당했고, 12,000명이 실종되었으며, 같은 시기 아르헨띠나의 친미군사독재정권이 자행한 폭압으로 각계층 진보인사 7,158명이 무참히 학살당했고, 13,000여 명이 실종되었다. 그런 천인공노할 폭압만행을 저지른 라틴아메리카지역의 친미군사독재정권들을 원격조종한 범인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키신저였다. 그것만이 아니라 키신저는 베트남전쟁에서 무고한 베트남인민을 학살한 미국군의 전쟁범죄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져야하는 전범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만일 1970년대에 국제형사재판소가 있었더라면, 키신저부터 전범재판을 받았어야 한다.
▲ <사진 5> 이 사진은 1970년대 어느 날 당시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과 당시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백악관 정원을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다. 사진에서 왼쪽에 보이는 사람이 닉슨이고, 오른쪽에 보이는 사람이 키신저다. 닉슨은 1994년 4월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고, 키신저는 올해 93살난 노인이다. 2016년 11월 16일 트럼프 당선인은 플린을 국가안보보좌관에 내정하고, 아베 총리를 만나기 직전 키신저와 만나 그의 조언을 들었다. 트럼프는 지난 선거유세 중에도 키신저를 만났으니, 그 날 두 번째로 만난 것이다. 노쇠한 키신저는 트럼프 당선인을 만난 뒤 언론과 회견하면서 트럼프는 자신이 만나본 가장 독특한 사람이며, 어느 특정세력에게도 의무감이 없으니 아무런 부담이 없이 독자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했다. 트럼프의 국정운영에서 이변이 일어날 것임을 예언한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물론 트럼프 당선인이 노쇠한 키신저에게서 들은 조언은 1970년대에 라틴아메리카 친미군사독재정권들을 원격조종한 흉악한 범죄경험이 아니라, ‘닉슨교의(Nixon Doctrine)’에 따라 베트남전쟁을 끝내기 위한 빠리평화협정을 체결하였고, 소련과 긴장완화를 추진하였고, 중국과 국교수립을 위한 대화를 시작하였고, 주한미국군을 전격적으로 감축하였던 과정에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서 겪었던 외교경험이었을 것이다.

키신저는 1969년 1월 20일 닉슨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되어 1973년 9월 21일까지 재직하였고, 1973년 9월 22일부터 1975년 11월 3일까지는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겸직하였으며, 1975년 11월 4일부터 포드 행정부가 퇴임한 1977년 1월 20일까지는 국무장관으로 재직하였다. 그런 특이한 경력만 봐도, 키신저가 닉슨 행정부와 포드 행정부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실세 중의 실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70년대에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키신저의 뒤를 이어 2017년부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제2키신저가 출현하였으니, 그가 바로 마이클 플린이다.


3. 오바마가 해임한 플린,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로 변신하다
 
마이클 플린은 현역 육군 중장으로 국방정보국장을 지냈다. 33년에 걸친 그의 군복무경력은 다음과 같다. 플린은 1983년 미국이 도발한 그레나다침공, 1994년 미국이 도발한 아이티침공, 2001년 미국이 도발한 아프가니스탄전쟁, 2003년 미국이 도발한 이라크전쟁에 미국군 특수부대 정보장교로 참전하였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피비린내와 화약내가 진동하는 전쟁경험은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을 바꿔놓을 만큼 강렬한 것이다. 플린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오랜 전쟁경험을 가진 군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징집된 젊은 날의 키신저도 서부유럽 벌지전투에 정보부대 요원으로 참전한 경험이 있는데, 그의 전쟁경험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 플린은 전쟁터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그가 일곱 개의 군공메달을 받고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던 것을 보면, 여러 전선들에서 정보장교로서 큰 공을 세운 것이 분명하다. 당시 그는 미국 육군에서 가장 뛰어난 정보장교라는 평가를 받았다.

플린의 정보능력을 인정한 오바마 대통령은 그에게 중책을 맡겼다. 그리하여 플린은 2012년 7월부터 2014년 8월까지 국방정보국장, 군사정보위원회 의장, 전략사령부 산하 정보-감시-정찰 합동기능구성사령부 사령관을 3중으로 겸직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2014년 8월 오바마 대통령이 플린을 모든 공직에서 해임하였다는 사실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그를 해임한 사연은 다음과 같다. 2011년 5월 오마바 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특수부대가 파키스탄에 숨어 지내던 알-카에다(Al-Qaeda) 국제테러조직의 수괴 오싸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의 은신처를 급습하여 그를 사살하였을 때, 오바마 대통령은 알-카에다가 제거되고, 국제테러위험이 소멸되었다는 식으로 발표하였고, 오바마 대통령의 인기는 급상승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방정보국장이었던 플린은 연방의회 청문회에 출석하여 빈 라덴이 제거되었다고 해서 국제테러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알-아케다보다 더 위험한 다른 국제테러조직들이 출현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예언’은 적중하였는데, 알-카에다가 쇠락한 이후 ‘이슬람국가(Daesh)’를 비롯한 국제테러조직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미국과 서방세계를 끊임없이 위협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플린의 그런 주장이 오바마 대통령의 반테러전쟁성과를 깎아내리는 것으로 비쳐지는 바람에 오바마의 미움을 샀다. 그래서 오바마 대통령은 플린 국방정보국장이 아프가니스탄전쟁 중에 미국군의 군사작전정보를 그 전쟁에 참전한 영국군, 오스트레일리아군과 무책임하게 공유하였다는 과거행적을 들춰내어 군수사당국의 수사를 받게 하더니, 결국 그를 국방정보국장직에서 해임하고 말았다.
▲ <사진 6> 마이클 플린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는 제2키신저로 등장하여 미국의 국가안보부문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예견된다. 위의 사진은 2010년 어느 날 아프가니스탄전쟁에 참전한 플린이 전선사령부에서 군사작전정보를 문서로 받아보는 장면이다. 당시 그는 전선의 군사작전정보를 총괄하는 육군 소장이었다. 그런 경력을 인정한 오바마 대통령은 그를 국방정보국장에 임명하였으나, 2년 뒤에 그를 해임하였다. 그렇게 된 까닭은 플린이 오바마 행정부의 반테러전쟁성과에 대해 의의를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오바마에게서 부당하게 해임당했다고 생각한 플린은 원래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였으나,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로 나서자 그를 열렬히 지지하면서 힐러리 클린턴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오바마 대통령이 자신을 부당하게 해임하였다고 생각한 플린이 오바마에게 반감을 품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플린의 태도가 달라졌다. 오래 전부터 민주당에 당적을 두었던 플린은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로 나서자 그를 열렬히 지지하면서 힐러리 클린턴(Hillary D. R. Clinton) 민주당 대선후보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지난 대선기간에 미국군 고위지휘관 출신 88명이 트럼프에 대한 지지의사를 표명했는데, 그들 군출신 인사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트럼프를 지지하고 나선 사람이 바로 플린이다.

2016년 7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로 확정되기 훨씬 전인 2015년 여름 어느 날, 트럼프 앞에 그의 열렬한 지지자로 변신한 플린이 나타났다. 트럼프와 플린이 처음 만난 날, 원래 30분으로 예정되었던 회동시간은 1시간 30분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트럼프가 플린과의 첫 만남에서 아주 좋은 인상을 받았음을 말해준다. 트럼프와 플린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2016년 2월 트럼프는 플린을 자기 대선본부의 군사고문으로 임명하였다. 이것은 트럼프와 플린의 관계가 대권에 도전하는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4. 플린이 모스끄바에 가서 푸틴을 만난 사연
 
플린은 국방정보국장으로 재직하던 2014년 상반기 어느 날 뜻밖에 러시아 모스끄바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러시아말로 지루(GRU)라고 약칭하는 주력정보국(Main Intelligence Agency) 초청을 받고 그 정보기관을 방문한 것이다. 주력정보국은 러시아 국방부 산하 군사정보기관인데, 미국군 현역 육군 중장인 국방정보국장이 러시아군 정보기관을 공식방문한 것은 전무후무한 이변이었다.

주력정보국에 도착한 플린은 거기서 근무하는 정보요원 전체를 대상으로 정보능력개발과 국제정세에 관한 강연을 하였다. 미국 국방정보국장이 러시아 군사정보기관을 방문한 것도 이변인데, 거기서 민감한 주제를 놓고 강연까지 하였으니 이변 중의 이변이었다. 이런 이변 중의 이변을 계기로 하여 플린과 러시아 사이에 서려있던 경계심이 자취를 감추면서 묘한 호감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그 묘한 호감은 결국 2015년 12월 러시아 관영영어언론매체 <러시아 투데이>가 모스끄바에서 주최한 창설 10주년 기념 만찬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러시아 투데이>는 기념만찬에 플린을 초청하였는데, 그는 기념만찬에서 국제정세에 관한 강연을 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V. Putin) 러시아 대통령이 그 기념만찬에 참석하였다는 사실이다. 주최측은 만찬좌석을 배치하면서, 푸틴 대통령 옆자리에 플린을 앉게 배려하였다. 그렇게 되어 푸틴과 플린의 기묘한 만찬상봉이 이루어졌다.
▲ <사진 7> 이 사진은 2015년 1월 러시아 관영영어언론매체 <러시아 투데이>가 모스끄바에서 주최한 창설 10주년 기념만찬 주빈석을 촬영한 것이다. 사진의 중앙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앉아있고, 그의 오른쪽에, 얼굴이 반쯤 가려진 사람이 마이클 플린이다. 플린은 현직 국방정보국장으로서 러시아군 정보기관을 방문하여 강연하는 이변을 연출하였을 뿐 아니라, 기념만찬에 연사로 출연하여 국제정세에 관한 강연을 하고, 푸틴 대통령 옆자리에 앉아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는 이변 중의 이변을 연출하였다. 이런 짜릿한 경험들은 러시아에 대한 플린의 생각을 바꿔놓았고, 그를 친러성향으로 끌어갔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나중에 상봉사실을 알게 된 미국 언론매체들은 플린과 회견하는 중에 그가 푸틴 대통령 옆자리에 앉아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느냐고 캐물었다. 그러자 플린은 그냥 인사만 했을 뿐이라고 적당히 답변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그 답변은 자신을 친러파로 몰아가려는 미국 언론매체의 의도를 슬쩍 피해간 임기응변이었다. 러시아 대통령이 자기 옆자리에 앉아 있는 미국 국방정보국장에게 어찌 인사말만 건네고 말았겠는가. 만찬석상에서 푸틴 대통령과 플린 국방정보국장이 의미 있는 대화를 주고받았다고 보아야 정상이다.

현직 국방정보국장으로서 러시아의 주력정보국을 방문하여 강연하는 이변을 연출하였을 뿐 아니라,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이변 중의 이변을 연출한 짜릿한 경험은 러시아에 대한 플린의 생각을 바꿔놓았고, 그를 친러성향으로 끌어갔다.

지난 선거기간 중에 트럼프와 푸틴이 서로에게 공개적으로 호감을 표시하였을 뿐 아니라, 트럼프가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가장 먼저 푸틴 대통령부터 만나겠다는 의사를 몇 차례 표명한 것은, 플린의 친러성향이 트럼프에게 전이되었음을 말해준다.


5. ‘전략적 인내’ 버리면, ‘전략적 대화’ 택할까?
 
국방정보국장 출신 플린에게는 군사정보를 다루어본 경험이 있는데, 그가 제18대 국방정보국장으로 재직하던 시기인 2012년 7월부터 2014년 8월까지 2년 동안 조선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변들이 있었다.

1) 조선은 2012년 4월 15일과 2013년 7월 27일 평양에서 진행된 군사행진에서 8축16륜 자행발사대 6대에 탑재한 화성-13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등장시켰는데, 이것은 미국 본토에 대한 핵공격능력을 과시한 것이었다.

2) 2012년 12월 12일 조선은 인공위성 광명성-3호 2호기를 실은 위성운반로켓 은하-3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하였는데, 이것은 우주개발능력과 더불어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능력도 과시한 것이었다.

3) 2013년 2월 12일 조선은 제3차 지하핵시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는데, 이것은 소형화된 핵탄두를 대륙간탄도미사일에 탑재하는 능력을 과시한 것이었다.

4)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2년 8월 25일 ‘선군절’ 경축연설에서 조국통일대전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밝혔고, 그 때로부터 2013년 5월까지 조선인민군은 최고의 긴장상태에 돌입하여 공격명령을 대기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조선이 최후결전 준비를 완료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당시 국방정보국장이었던 플린은 위에 열거한 사변들을 목격하면서 조선인민군의 전략타격력과 전쟁준비태세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파악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 까닭에 플린이 이끄는 국방정보국은 2013년 3월에 작성한 군사정보보고서에서 조선이 탄도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적시하였던 것이다. 당시 플린이 이끌던 국방정보국은 미국 국가정보기관 16개 가운데 유일하게 조선이 탄도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조선이 탄도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정보는 미국의 고위층에만 보고되었고, 미국 언론에는 알려지지 않은 극비정보였다. 2013년 4월 11일 당시 국방정보국장이었던 플린은 연방하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하였는데, 위에서 언급한 극비정보가 그 청문회에서 공개되는 바람에 군사기밀이 유출되었다는 말썽이 일어났다.
▲ <사진 8> 이 사진은 2014년 1월 29일 미국 연방상원 정보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한 오바마 행정부 고위관리 5명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진에서 맨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당시 국방정보국장 마이클 플린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사람 건너 중앙에 앉은 사람이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이다. 클래퍼는 제11대 국방정보국장을 지냈고, 플린은 제18대 국방정보국장을 지냈으나, 미국 본토에 대한 조선의 핵공격능력을 평가하는 데서 서로 의견이 갈렸다. 플린은 국방정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미국 본토에 대한 조선의 핵공격능력을 처음으로, 유일하게 인정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주목되는 것은, 2013년 3월 당시 국방정보국이 미국 본토에 대한 조선의 핵공격능력을 인정하였다는 점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도 오바마 행정부는 미국 본토에 대한 조선의 핵공격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데, 플린이 이끌던 국방정보국은 이미 3년 전에 그 사실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2014년 8월 국방정보국장에서 해임된 플린은 2015년 6월 10일 연방하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 민간인 신분으로 출석하여 미국이 상대하는 3대 축을 러시아, 중국, 조선이라고 지적하였다. 그가 조선의 국제적 지위를 러시아, 중국과 같은 수준에 올려놓은 것은 조선의 핵무력이 러시아와 중국에 버금갈 만큼 고도화되었음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누구나 예상하는 것처럼, 미국이 미국 본토에 대한 조선의 핵공격능력을 인정하게 되면, 미국은 기존 대조선정책을 폐기하고 새로운 대조선정책을 세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미국의 기존 대조선정책은 조선이 미국 본토에 대한 핵공격능력을 갖지 못했다는 정보판단에 근거하여 수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미국의 기존 대조선정책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오바마 행정부는 이미 3년 전 플린의 국방정보국이 미국 본토에 대한 조선의 핵공격능력을 인정하였건만, 그것은 국방정보국이 너무 앞서나간 정보판단일 뿐이고, 다른 국가정보기관들의 일치된 정보판단은 아니라고 하면서 국방정보국의 정보판단을 인정하지 않았다.

<워싱턴자유횃불> 2013년 4월 18일 보도에 따르면, 클래퍼 국가정보국장과 플린 국방정보국장은 그날 연방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함께 출석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은 국방정보국이 탄도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하는 조선의 능력을 다른 정보기관들보다 더 확신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하지만 다른 정보기관들은 국방정보국의 그런 정보판단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그런 까닭에, 오바마 행정부는 조선이 미국 본토를 핵무기로 공격할 능력을 가지려면 아직 5년 정도 더 걸려야 한다는 정보판단에 근거하여 수립된 ‘전략적 인내’ 정책에 줄곧 매달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2016년에 들어와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조선이 미국 본토를 핵무기로 공격할 능력을 가지려면 아직 5년 정도 더 걸려야 한다는 기존 정보판단이 오류였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수정하였다. 물론 미국 본토에 대한 조선의 핵공격능력에 대한 정보판단이 그처럼 수정되었다는 사실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안에서만 논의된 것이다.

2016년 5월 4일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이 대통령 밀사로 청와대를 찾아가 박근혜 대통령과 밀담을 나누던 중 뜻밖에도 평화협정체결문제를 꺼낸 것은, 조선이 미국 본토를 핵무기로 공격하려면 아직 5년 정도 더 걸려야 한다고 보았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기존 정보판단이 수정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오바마 행정부가 그런 기존 정보판단에 기초하여 수립하고 줄곧 견지해온 ‘전략적 인내’ 정책이 사실상 폐기되었음을 말해준 것이었다.

그런데 이미 3년 전에 플린이 이끌던 국방정보국은 조선이 미국 본토를 핵무기로 공격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판단을 내렸던 것이니, 2017년 1월 20일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면 ‘전략적 인내’ 정책이 공식적으로 폐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수명이 다한 ‘전략적 인내’ 정책을 공식적으로 폐기한 트럼프 행정부는 어떤 새로운 대조선정책을 수립할 것인가? 오바마 행정부가 내걸었던 ‘전략적 인내’라는 정책개념은 전술적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대화를 단절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오바마 행정부는 조선과의 대화를 전술적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단절해버렸다. 그러므로 ‘전략적 인내’라는 정책개념을 대체할 새로운 정책개념은 ‘전략적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2017년 1월 20일 출범할 트럼프 행정부가 조선과의 전술적 대화가 아니라 전략적 대화를 시작할 가능성이 엿보인다. 트럼프 당선인이 지난 선거유세 중에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나 정상회담을 하겠다는 의사를 몇 차례 밝힌 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조선과의 전술적 대화가 아니라 전략적 대화를 시작할 가능성을 예고하는 것이다.

서세평 스위스 주재 조선대사는 2016년 5월 23일 <로이터통신>과 회견하면서, 트럼프가 선거유세 중에 조미정상회담에 관해 언급한 발언을 쓸데없는 소리라고 일축해 버렸다. 그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 <사진 9> 이 사진은 2016년 11월 17일 서세평 스위스 주재 조선대사가 대사관 청사에서 <로이터통신>과 두 번째 회견을 진행하는 장면이다. 첫 번째 회견은 지난 5월 23일에 있었다. 두 번째 회견에서 서세평 대사는 트럼프 행정부가 조선에 대한 적대시정책을 포기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조미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것은 대통령 취임을 앞둔 트럼프 당선인에게 보내는 조선의 첫 메시지라고 생각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2017년 1월 20일 출범하면, 조선의 첫 메시지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가 사실상 폐기되었으니, 조선과 전략적 대화를 시작할 것인가?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것(조미정상회담) 성사여부는 우리 최고령도자의 결정에 달렸다. 하지만 나는 그(트럼프)의 생각이나 발언이 터무니없는 소리(nonsense)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대통령선거용이다. 일종의 선전 또는 광고로서 쓸데없는 것이며, 대통령 선거를 위한 거동(gesture)일 뿐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6개월이 지난 2016년 11월 17일 <로이터통신>과 진행한 두 번째 회견에서 서세평 대사는 전혀 다르게 말했다.

“(조미)정상회담은 우리 최고령도자의 결정에 달려있다. 만일 그(트럼프)가 조선에 대한 적대시정책을 포기하고, 남조선에서 미군을 포함한 모든 군사장비를 철수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되면, 1990년대에 우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조미)관계(정상화)를 논의하는 기회가 올 것으로 생각한다.”

서세평 대사가 두 번째 <로이터통신> 회견 중에 위와 같이 말한 것은, 출범을 앞둔 트럼프 행정부 준비집단에 보내는 조선의 첫 메시지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2017년 1월 20일 출범하면, 조선의 첫 메시지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1969년 1월 20일에 출범한 닉슨 행정부는 미국과 필적할 핵강국으로 등장한 소련과 긴장완화를 추구하였고, 핵보유국으로 등장한 중국과 국교수립을 위한 대화를 시작하였으며, 베트남전쟁을 끝내는 빠리평화협정을 체결하였고, 주한미국군을 대폭 감축하는 일련의 전략적인 조치들을 연이어 취하였는데, 2017년 1월 20일에 출범할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과 정면대결하는 ‘동방의 핵강국’으로 떠오른 조선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하는 전략적인 조치들을 취하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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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5

트럼프의 출현, 누구에게 공포스러운 악재인가?

[한호석의 개벽예감](227)
자주시보 2016년 11월 14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세계주의 버리고 고립주의 택한 정치적 이단아
2. 다시 살펴보아야 할 중립법과 닉슨교의
3. 대침체, 아메리카제국의 세계화를 저지하다
4. 트럼프 행정부가 단행할 중대조치들
5. 트럼프의 출현은 한국에게 공포스러운 악재
6. 트럼프는 조미관계변화를 불러올 것인가?
7. 로드먼의 평양방문, 트럼프의 지지발언
                                              
▲ <사진 1> 이 사진은 이번 미국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부동산재벌총수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라!"는 선거구호 앞에서 환호하는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화답하는 장면이다. 2016년 11월 8일 그는 힐러리 클린턴을 꺾고 제45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트럼프는 4년 전 공화당 대선후보 밋 롬니가 오바마에게 패하였을 때,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라!"는 구호의 저작권을 특허청에 신청하였다. 그는 경제위기에 빠진 미국을 구원해줄 강한 대통령의 출현을 바라는 기저여론을 간파하였고, 그에 걸맞은 선거전략을 펼쳐 승리할 수 있었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1. 세계주의 버리고 고립주의 택한 정치적 이단아

미국의 유력한 여론조사기관인 퓨연구쎈터(Pew Research Center)가 2013년에 발표한 여론조사결과가 있다. 그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미국이 국제문제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국내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는 질의문항에 찬성한 응답자는 80%였고, 반대한 응답자는 16%였다고 한다. 미국의 여론이 이처럼 국제문제보다 국내문제에 압도적인 관심을 드러낸 것은 그 여론조사기관이 1964년부터 여론조사를 실시한 이후 50년 만에 처음으로 나타난 특이현상이었다.

바로 그런 특이현상을 예민한 감각으로 포착한 재벌총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제45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다. <워싱턴포스트> 2016년 5월 5일 보도에 따르면, 2012년 11월 6일에 실시된 미국 대선에서 당시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밋 롬니(Mitt Romney)가 버락 오바마(Barack Obama)에게 패하였는데, 그 선거일로부터 엿새가 지난 뒤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라(Make America Great Again)”는 구호의 저작권을 미국 특허청에 신청했다고 한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당시 공화당 지도부는 청년층, 중남미이민계층, 여성계층의 표심을 끌어당기지 못해 대선에서 패했다고 분석하고 그 계층들의 표심에 호소하는 새로운 대선전략을 거론하였으나, 트럼프는 금융위기와 세계화정책으로 주저앉은 미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자는 구호로 유권자의 표심을 사로잡겠다는 독자적인 대선전략을 구상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트럼프가 막말이나 내뱉는 괴짜선동가가 아니라 기저여론을 포착하는 예민한 감각을 지녔음을 말해주는 사례이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휘몰아친 주택시장붕괴로 심대한 타격을 입은 미국을 경제위기에서 구원해줄 강한 대통령의 출현을 바라는 기저여론이 2010년부터 형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트럼프의 대선승리는 놀라운 이변이 아니라 당연한 귀결로 평가된다.

미국이 국제문제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국내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는 대중의 여론을 정치학 개념으로 다듬어놓은 것이 고립주의(isolationism)라는 정치이념이다. 고립주의와 쌍벽을 이루며 그 대척점에 놓인 또 다른 정치이념은, 정반대로 미국이 국내문제보다 국제문제에 관심을 더 집중해야 한다는 세계주의(globalism)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정치이념변천사는 고립주의 대 세계주의가 대립하면서 시대상황에 따라 교차되어온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정치이념변천사를 통해 이번 미국 대선국면을 바라보면, 힐러리 클린턴(Hillary D. R. Clinton)은 이제껏 미국의 지배적인 정치이념으로 자기 위치를 굳힌 세계주의의 대변자로 대선무대에 등장하였고,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에서 세계주의를 대체하기 위한 정치이념으로 대두된 고립주의의 대변자로 대선무대에 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계주의 대 고립주의의 이념대결에서 고립주의가 승리한 이번 대선은 미국 사회의 기저에서 대체이념으로 대두된 고립주의가 수명이 다한 세계주의를 눌렀다는 의미를 지닌다.

얼마 전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로 선출되었을 때, 공화당 상층부가 자기 당의 대선후보인 그를 배척, 외면하였던 까닭은 그가 공화당이 추구해오는 세계주의에서 이탈하여 고립주의를 택하였기 때문이다.

공화당과 민주당으로 양분된 미국의 양당체제의 이념적 심층부를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공화당의 정치이념을 세계주의로, 민주당의 정치이념을 고립주의로 각각 속단하기 쉽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이제껏 공화당이나 민주당이나 모두 세계주의를 맹신해왔고, 민주당이 공화당보다 세계주의에 더 강하게 집착하였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미국에서 초당적인 정치이념으로 공인되어온 세계주의를 버리고 고립주의를 택하였다는 점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대선승리는 정치적 이단아의 돌출이변으로 되었음이 드러난다.

세계주의라는 이념은 미국 정치권에만 들어박혀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여론을 움직이는 언론계와 학계에도 세계주의가 들어박혀 있다. 고립주의를 택한 트럼프가 대선후보로 등장하였을 때, 미국의 언론계와 학계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그를 비하, 배척하면서,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 응원하였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만일 트럼프가 공식석상에서 막말을 내뱉는 선동적 기질을 자제하면서 좀 더 세련되게 처신하였더라면, 이번 대선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을 것이다. 세계주의에서 고립주의에로 전환하여 미국을 경제위기에서 끌어내주기를 바라는 기저여론을 타고 상승세를 이어간 도널드 트럼프는 거친 말버릇이 감점요인으로 되는 바람에 힐러리 클린턴을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지 못했다.


2. 다시 살펴보아야 할 중립법과 닉슨교의

여기서 제기되는 물음은, 왜 미국의 기저여론이 세계주의에 등을 돌리고 고립주의로 기울어졌을까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명하려면 미국의 정치이념이 변천되어온 역사를 훑어보아야 하는데, 정치이념변천사는 전쟁사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전쟁이라는 국가행위는 국가의 지배적 정치이념을 그 밑바닥까지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미국은 전쟁으로 건국되었고 전쟁 속에서 장성되어온, 가장 완전한 의미의 전쟁국가이다. 북미원주민을 말살하는 살육전쟁을 벌이면서, 대영제국의 식민지지배를 배격하는 독립전쟁도 벌이는 이중전쟁의 와중에 아메리카합중국이 세워졌다. 건국과정부터 그러했으니, 건국 이후 미국의 발걸음은 언제나 무력침공과 침략전쟁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수많은 크고 적은 전쟁으로 얼룩진 미국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으로 전쟁이 없었던 부전기(不戰期)가 있었다. 전쟁이 없다고 해서 평화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므로, 평화기가 아니라 부전기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미국은 1935년부터 1940년까지 6년 동안 전쟁을 하지 않았다. 미국 역사에 제1차 부전기로 기록된 그 기간에 무력침공과 침략전쟁으로 향하려던 미국의 발목을 붙잡은 요인은 미국 연방의회가 1935년부터 1939년까지 해마다 채택한 중립법(Neutrality Act)이다.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그 법에 발목이 잡힌 미국은 6년 동안 부전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1930년대 중반에 출현한 중립법은 고립주의의 법적 표출이었다. 1930년대 후반기 미국 정치를 지배하였던 고립주의는 1941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자취를 감췄다.
                                                    
▲ <사진 2> 미국이 전대미문의 대공황에 빠져 신음하고 있었던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연방의회는 중립법을 채택하였다. 그것은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법이다. 이 법에 발목이 잡힌 미국은 6년 동안 전쟁을 하지 않았다. 1930년대 중반 미국의 경제파탄 속에서 제정된 중립법은 고립주의의 법적 표출이었다.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가 주장한 '미국우선주의'는 이미 1930년대 후반 미국에서 사용된 바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세계의 지배자’로 등장하여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고, 약소국들에 대한 군사개입, 무력침공, 침략전쟁을 자행하였다. 아래의 연표는 미국이 1946년부터 2016년까지 군사개입, 무력침공, 침략전쟁을 끊임없이 계속해오는, 호전광이 지배하는 전쟁국가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필리핀 침공 (1946년)
그리스 침공 (1947년)
6.25전쟁 (1950-1953년)
과떼말라 침공 (1954년)
베트남전쟁 (1955-1975년)
도미니까공화국 침공 (1965-1966년)
그레나다 침공 (1983년)
빠나마 침공 (1988-1990년)
걸프전쟁 (1990-1991년)
이라크내전 군사개입 (1992-1996년)
아이티 침공 (1994-1995년)
보스니아, 헤르쩨고비나 공습 (1995년)
아프가니스탄, 수단 공습 (1998년)
아프가니스탄전쟁 (2001년 이후 현재진행형)
예맨내전 군사개입 (2002년 이후 현재진행형)
이라크내전 군사개입 (2003년 이후 현재진행형)
파키스탄내전 군사개입 (2004년 이후 현재진행형)
쏘말리아 침공 (2007년)
리비아 침공 (2011년)
시리아내전 군사개입 (2011년 이후 현재진행형)

그런데 위에 열거한 연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국은 베트남전쟁이 끝난 이듬해 1976년부터 그레나다를 침공하기 전인 1982년까지 7년 동안 전쟁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은 1935년부터 1940년까지 6년 동안 제1차 부전기를 거쳤고, 1976년부터 1982년까지 7년 동안 제2차 부전기를 거친 것이다. 그런 두 차례의 부전기가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세계자본주의체제는  대공황(Great Depression)이라고 부르는 재앙을 겪었다. 1929년 10월 29일 미국의 주식시장이 무너지는 급변사태로 촉발된 그 재앙은 미국의 실업률을 25%까지 끌어올린 살인적인 실업대란을 몰고 왔다. 1930년대 전반기에 미국을 휩쓴 경제붕괴와 실업대란은 미국의 자본주의체제가 조락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당시 미국이 그처럼 조락상태에 빠졌으니 다른 나라에 대한 군사개입, 무력침공, 침략전쟁은 생각할 수 없었다. 바로 이것이 미국 역사에 제1차 부전기가 기록된 원인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1976년부터 1982년까지 7년 동안 제2차 부전기를 거쳐야 했던 원인은 무엇일까? 
세계자본주의체제는 1969년부터 이른바 스택플레이션(stagflation)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겪었다. 스택플레이션이란 실업대란과 물가폭등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경제붕괴를 뜻한다.
                                                 
▲ <사진 3> 이 사진은 1969년부터 미국을 강타한 스택플레이션으로 실업대란과 물가폭등이 한꺼번에 몰아쳤을 때, 1972년 미국의 빈곤층 어린이들이 시위행진을 준비하는 장면이다. "닉슨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는 구호가 적혀 있다. 당시 미국을 강타한 스택플레에션으로 미국은 1976년부터 1982년까지 7년 동안 전쟁을 하지 않았고, 닉슨 대통령은 닉슨교의를 발표하였다. 닉슨교의는 1930년대 후반 미국에 팽배하였던 고립주의의 정치적 부활을 의미한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1969년에 미국의 상품생산량이 전 세계 상품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5%에서 27%로 추락하였다. 1971년에 미국의 실업률은 6.1%로 상승하더니, 1975년에는 9%까지 치솟았다.
무너지는 경제를 구해보려고 다급해진 미국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이 달러화를 마구 찍어내자 1971년의 통화공급량은 10%로 급증하였고, 그에 따라 물가상승률은 5.84%로 치솟았다.
더욱이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지출한 막대한 전쟁비용이 국가재정부담을 가중시켰고, 1973년 10월에는 이른바 석유위기(Oil Crisis)라는 사상 초유의 급변사태가 스택플레이션으로 허덕이던 세계자본주의체제를 덮쳤다. 
미국은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무후무한 비상대책들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1971년 8월 15일 금본위제를 폐지하였고, 임금과 물가를 90일 동안 동결시키는 조치를 취하였고, 1973년 3월에는 고정환율제를 폐지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제1차 부전기의 고립주의가 중립법을 낳았고, 제2차 부전기의 고립주의가 닉슨교의(Nixon Doctrine)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닉슨교의란 무엇인가? 당시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은 1969년 7월 25일 필리핀 방문길에 중간기착한 괌(Guam)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면서 닉슨교의에 대해 처음 언급했는데, 이것은 그가 1969년 1월 20일 대통령에 취임한 뒤 6개월 만에 파격적인 내용의 대외정책방침을 발표한 것이다. 닉슨교의를 요약하면, 미국이 동맹국을 위한 전쟁을 할 것이 아니라 동맹국 스스로 전쟁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1969년 11월 3일 그는 닉슨교의를 좀 더 명확히 설명한 문서를 발표하였는데, 그 문서는 이런 마지막 문장으로 끝난다. “이전 행정부들에서 우리는 베트남전쟁을 미국화하였다. 현 행정부에서 우리는 평화추구를 베트남화하고 있다.”

닉슨교의의 출현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 관리해오던 제국주의세계체제를 종전 방식으로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조락했기 때문에, 새로운 관리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음을 말해준다. 당시 미국이 모색한 새로운 관리방법은, 적국들과의 종전 또는 정치협상, 그리고 전진배치한 해외무력의 감축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닉슨 행정부는 베트남전쟁을 끝내기 위해 적국(북베트남)과 평화회담을 시작하였고, 핵강국으로 등장한 적국(소련)과 핵군축회담을 진행하면서 유럽에서 긴장완화를 추구하였고, 신흥 핵보유국으로 등장한 적국(중국)과 국교수립을 위한 대화를 시작하였고, 전진배치한 해외무력(주한미국군)을 감축한 것이다. 닉슨 행정부는 당시 주한미국군 61,000명 중에서 제7사단 20,000명을 1971년 3월까지 전격적으로 감축한 바 있다.
                                           
▲ <사진 4> 이 사진은 1973년 닉슨 대통령이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회담하는 장면이다. 닉슨교의에 따라,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쟁을 끝내기 위해 북베트남과 평화회담을 시작하였고, 핵강국으로 등장한 소련과 핵군축회담을 진행하면서 유럽에서 긴장완화를 모색하였고, 신흥 핵보유국으로 등장한 중국과 국교수립을 위한 대화를 시작하였으며, 주한미국군을 감축하였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3. 대침체, 아메리카제국의 세계화를 저지하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한 날로부터 꼭 27년 전인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유럽을 동서로 갈라놓은, 155km에 이르는 그 장벽이 무너진 것은, 냉전체제의 붕괴를 의미하였다. 냉전체제의 붕괴로 사회주의진영의 견제와 억제를 받지 않게 된 미국은 약소국들이 제국주의세계체제에 무조건 굴복, 순응하라고 강요하였다. 약소국들을 굴복, 순응시켜 제국주의세계체제를 확장, 완성하려는 아메리카제국의 정치이념이 바로 세계화(globalization)였다. 세계주의는 정치적 세계화, 경제적 세계화, 문화적 세계화의 세 방향에서 서로 동조, 융합하면서 세계를 휩쓸었다.

세계화의 첨병노릇을 해오는 국제통화기금(IMF)은 2000년 4월 12일에 펴낸 자료 ‘세계화: 위협인가 기회인가?’에서 그 개념을 명확하게 정리해놓았는데, 그것은 국경을 넘어선 무역과 금융자산의 자유이동, 자본과 투자의 자유확대, 이민의 자유화, 지식과 정보의 자유파급을 뜻한다.

아메리카제국의 산업자본은 저임금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자국의 생산수단을 저개발국으로 이전하여 세계화된 착취체제를 구축하였으며, 자국 산업자본의 해외이전으로 국내산업시설이 공동화되고, 저임금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자 ‘이민의 자유화’라는 명목으로 다른 나라의 노동력을 미국에 끌어들여 국내착취체제를 더욱 보강하였다.

흔히 월가(Wall Street)의 지배자로 불리는 아메리카제국의 금융자본은 동맹국들과 저개발국들에서 천문학적 규모의 이윤을 수탈하기 위해 세계화된 금융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국경을 넘어선 상품과 자본의 자유이동을 국제법으로 보장해주는 아메리카제국의 자유무역협정이 세계적 범위로 확장되었다. 아메리카제국의 자유무역체제는 지금 오바마 행정부가 세계 최대 자유무역협정으로 추진하는 ‘환태평양동반자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 Agreement)’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아메리카제국의 세계화는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아메리카제국의 정치권은 이른바 미국식 민주주의(American democracy)를 동맹국들과 약소국들에 자유롭게 이식시키는 정치적 세계화를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아메리카제국의 정보기관들은 미국식 민주주의의 이식을 거부하는 약소국들에게 내정간섭을 자행하였고, 아메리카제국의 군부세력은 미국의 해외자본과 해상무역로를 지키기 위한 해외무력 증강책동에 광분하였다.

아메리카제국의 언론계와 학계는 세계화를 반대하는 약소국들을 ‘자유세계의 적’으로 악마화하면서, 그 적들을 폭력적으로 제거해야 한다고 설교하였고, 미국식 민주주의의 자유이식을 거부하는 약소국들에 대한 내정간섭과 군사개입, 무력침공과 침략전쟁을 정당화, 합리화하였다.

냉전체제가 무너진 이후 마치 고삐 풀린 미친 소처럼 날뛰기 시작한 아메리카제국의 난동은 약소국들에게 공포와 악몽, 수탈과 살육이었다.

그런데 아메리카제국이 세계화 난동을 자행하던 중에 뜻하지 않은 급변사태가 또 일어났다. 아메리카제국과 세계자본주의체제는 이른바 대침체(Great Recession)라고 부르는 경제붕괴위험에 빠진 것이다. 이 심각한 위험은 미국의 주택시장붕괴로 시작되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3년 동안 미국의 주택시장이 붕괴되었는데, 주택융자금을 갚지 못한 미국인들은 채권자인 은행에게 주택을 빼앗겼고, 영세사업체들은 무더기로 도산하였으며, 가계부채가 폭증하였다. 2008년 미국의 가계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290%로 급증하였으며, 2009년 미국의 실업률은 10%로 치솟았다.
                                                  
▲ <사진 5> 2007년부터 미국의 주택시장붕괴로 시작된 대침체는 미국의 근로대중에게 고통과 불행을 안겨주었다. 위의 사진은 2008년에 집을 잃고 한지에 나앉은 수많은 노숙자들이 천막을 치는 바람에 네바다주 리노시 중심가에 생겨난 천막촌의 모습이다. 1930년대 대공황이나 1970년대 스택플레이션이 10년 안에 끝났던 것과 달리, 오늘 대침체는 장기화되면서 미국을 조락의 벼랑으로 떠밀고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 까닭에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2009년 2월 연방의회에 제출한 정보보고서에서 최근에 발생한 경제위기가 미국 안보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요인으로 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아메리카제국의 최대 위협요인으로 출현한 대침체는 그것이 발생한 때로부터 9년이 지났으나, 오늘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1930년대 대공황이나 1970년대 스택플레이션이 10년 안에 끝났던 것과 달리, 오늘 대침체는 장기화되면서 아메리카제국을 조락의 벼랑으로 떠밀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언급한 퓨연구쎈터의 2013년도 여론조사에 나타난 것처럼, 고립주의가 미국 사회의 기저여론으로 자리 잡고, 고립주의의 대변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2007년부터 장기화되고 있는 대침체가 가져온 사회정치현상들이다.


4. 트럼프 행정부가 단행할 중대조치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제32대 대통령으로 재직하였던 프랭클린 로저벨트(Franklin D. Roosevelt)이 대공황으로 조락하던 미국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고립주의노선을 택했던 것처럼,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제37대 대통령으로 재직하였던 리처드 닉슨이 스택플레이션으로 조락하던 미국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고립주의노선을 택했던 것처럼, 2017년부터 5년 동안 제45대 대통령으로 재직하게 될 도널드 트럼프도 대침체로 조락하는 미국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고립주의노선을 추구할 것이다. 트럼프는 세계주의의 대변자들인 조지 부쉬(George H. W. Bush), 빌 클린턴(Bill Clinton), 조지 부쉬(George W. Bush), 버락 오바마(Barack Obama)가 지난 27년 동안 추진해오던 기존 정책을 버리고 고립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 <사진 6> 이 사진은 2016년 11월 10일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당선자의 신분으로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첫 회담을 가진 뒤 기자들 앞에서 악수하는 장면이다. 사진 속에서 두 사람의 표정은 굳어져 있는데, 그것만 봐도 두 사람이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두 사람의 껄끄러운 첫 만남은 고립주의의 대변자인 트럼프가 오바마의 세계주의를 버리고, 고립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정책을 준비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첫째, 트럼프 행정부는 사회경제부문에서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 조치를 단행할 것으로 예견된다.

1) 자유무역협정을 미국에 유리하도록 개정하거나 폐지한다.
2) 미국 금융자산의 해외유출을 제한한다.
3) 미국 달러화 가치를 보호한다.
4) 해외에 이전한 산업시설이 미국으로 복귀하도록 유도한다.
5) 미국으로의 이민을 제한하고, 미국 내 불법이주를 금지한다.
6) 사회간접자본을 재개발한다. 
7) 기존 에너지산업을 더욱 확장한다.
8) 소득세와 법인세를 인하하고, 상속세를 폐지한다.

둘째, 트럼프 행정부는 국제정치부문과 군사부문에서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조치들을 단행할 것으로 예견된다.

1) 해외배치 미국군 주둔비용을 동맹국에게 전담시킨다.
2) 미사일방어체계를 동맹국에 배치하지 않는다.
3) 동맹국 군대와의 합동군사훈련을 축소한다.
4) 다른 나라에 대한 군사개입과 무력침공을 자제한다.
5) 동맹국에 배치한 미국군을 감축한다.
6) 적국과의 정치협상을 시작한다.
7) 북대서양조약기구 확장정책을 폐기한다. 
8) 미국의 군사력을 증강한다.


5. 트럼프의 출현은 한국에게 공포스러운 악재

위에 열거한 중대조치들을 살펴보면, 트럼프의 출현은 한국에게 공포스러운 악재로 된다. 많은 분석가들이 그런 불길한 예상을 거론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와 한국 정부가 갈등을 빚게 될 첫 충돌지점은 한미자유무역협정이다. 대선기간 중에 트럼프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이 미국에게 불리하게 체결된 잘못된 협정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를 일찌감치 지지하면서 그의 최측근으로 등장한 공화당 소속 4선 상원의원 제프 쎄션즈(Jeff Sessions)는 트럼프 행정부의 장관 물망에 오른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2015년 5월 6일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낸 공식서한에서 한미자유무역협정의 심각한 문제점을 따졌다. 그의 지적에 따르면, 2014년에 한국이 미국으로 수출한 상품은 전년에 비해 22.5%가 늘어난 126억 달러나 되었는데, 미국이 한국으로 수출한 상품은 전년에 비해 1.8%밖에 늘어나지 않은 8억 달러에 그쳤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에 대한 미국의 무역적자규모는 2011년부터 2014년까지 80.4%가 늘어난 118억 달러나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는 2001년 이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국가들과의 자유무역으로 미국에서 일자리 210만개가 사라졌다고 개탄하였다. 그런 주장에 따르면, 한미자유무역협정은 미국에게 유리하게 개정되거나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폐기되는 게 당연해 보인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을 그처럼 강하게 비난한 제프 쎄션즈 상원의원은 2016년 11월 11일 트럼프의 정권인수단에 합류하였는데, 이것은 한미자유무역협정이 존폐위기를 맞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트럼프의 출현이 한국에게 공포스러운 악재로 된다는 말은, 한미자유무역협정을 존폐위기로 내몰 악재만 예상된다는 뜻이 아니다. 트럼프의 출현은 한반도 군사정세를 예상하기 힘든 질곡으로 끌어갈 것이다.

<조선일보> 2016년 5월 6일 보도에 따르면, 2015년 주한미국군 주둔경비 분담에서 한국이 떠안은 금액은 전체 비용의 약 절반인 9,320억 원이었는데, 만일 트럼프 행정부가 전액부담을 요구하는 경우 한국은 약 2조원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 <사진 7> 이 사진은 2014년 1월 초 서울에서 진행된 주한미국군 주둔비 분담금 규모를 결정하기 위한 10차 고위급 회담의 한 장면이다. 트럼프는 선거유세 중에 주한미국군 주둔비를 전액 한국에게 부담시켜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이것은 주한미국군 주둔비 부담문제를 놓고 한미관계에서 심각한 갈등이 빚어지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그 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군 전시군사작전권을 반환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하겠다고 협박하면서 한국을 굴복시키려 할 것이다. 트럼프의 출현은 박근혜 퇴진 이후 새로 등장할 차기 정부에게 악몽이 아닐 수 없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2015년에 한국이 지급한 분담금 9,320억 원은 현금으로 지급한 금액이고, 현금으로 지급하지 않은 간접비용부담이 또한 엄청나다. <동아일보> 2016년 5월 6일 보도에 따르면, 주한미국군이 공짜로 사용하는 군사기지토지임대료, 주한미국군을 위한 세금면제금액, 공공요금감면금액, 도로-항만-공항사용료면제금액 등을 합한 간접부담비용까지 더하면 한국이 해마다 지출하는 실질금액은 2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에게 주한미국군 주둔경비 전액을 부담하라고 요구하면, 한국은 약 3조 원을 미국에게 해마다 ‘상납’하게 되는 것이다. 가뜩이나 경제붕괴위험과 재정파산위기에 내몰려 비틀거리는 한국에게는 그처럼 막대한 금액을 ‘상납’할 재정능력이 없다.

해마다 거듭되는 군사비자동삭감에 따라 군사비가 부족한 미국에서 트럼프가 주한미국군 주둔비용 전액부담을 거론하기 전부터 한국이 더 많이 분담해야 한다는 여론이 이미 조성된 바 있으므로, 트럼프 행정부는 그 문제를 놓고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주한미국군 주둔경비 부담문제를 놓고 한미관계에서 심각한 갈등이 일어나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군사비 부족분을 채울 궁여지책을 모색할 것인데, 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THAAD)를 한국에 배치하려던 결정을 취소하고, 한미합동군사훈련 규모를 축소할 가능성이 보인다.

더욱이 주한미국군 주둔비용 부담문제를 놓고 한미관계에서 빚어진 심각한 갈등이 타협점을 찾지 못하게 되면,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군 전시작전통제권을 반환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하겠다고 협박하면서 한국을 굴복시키려 할 것이다. 이것은 박근혜 퇴진 이후 새로 등장할 차기 정부에게 악몽이 아닐 수 없다.


6. 트럼프는 조미관계변화를 불러올 것인가? 

트럼프의 출현은 조미관계에 변화를 불러올 것으로 예견된다. 그렇게 예견하는 까닭은, 1970년대에 고립주의를 택한 닉슨 행정부가 소련과의 긴장완화(détente)와 평화공존, 그리고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기 위한 대화를 추진하였던 것처럼, 오늘 고립주의를 부활시킨 트럼프 행정부도 적국들과의 긴장완화와 평화공존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미국의 주적은 소련과 중국이었지만, 지금 미국의 주적은 조선과 러시아이므로, 트럼프 행정부는 조미관계와 러미관계에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대화를 시작할 것으로 예견된다.

트럼프는 대선기간 중에 자신이 당선되면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러시아 대통령을 직접 만나 정상회담을 하겠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2016년 10월 17일 트럼프는 라디오방송과 대담하는 중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선에서 승리하면 집무를 시작하기 전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등 러시아측과 만날 수 있다. 힐러리 클린턴은 러시아에 대해 그렇게 거칠게 말해서는 안 된다. 현 상황은 솔직히 말해서 정말 재앙적이며, (미국과 러시아의) 긴장상황은 정말 심각한 문제다. 냉전 이후 러시아와의 상황은 단연코 가장 나쁘다.”
                                              
▲ <사진 8> 도널드 트럼프는 선거유세 중에 자신이 대선에서 승리하면 대통령 집무를 시작하기 전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만나 미국과 러시아의 긴장을 완화시키겠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의 북대서양조약기구 확장과 대러시아 경제제재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푸틴은 그런 말을 해준 트럼프에게 아주 좋은 인상을 갖게 되었다. 2017년 1월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하면, 가장 먼저 푸틴부터 만나게 될 것으로 보인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러면 트럼프는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만나려고 하는 것인가? 트럼프의 발언을 주의 깊게 들어볼 필요가 있다.

트럼프는 2016년 5월 18일 <로이터통신>과 대담하는 자리에서 “나는 그(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뜻함-옮긴이)와 대화하겠다. 그와 대화하는 데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대담자가 트럼프에게 북조선의 지도자와 정말 대화하려는가 하고 다시 묻자, 트럼프는 “정말이야(Absolutely)”라고 못을 박았다.

트럼프는 2016년 6월 3일 캘리포니아주 레딩에서 선거유세를 하면서 조선과 대화하겠다고 말한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들은 북조선과의 협상이 꺼려지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내겐 문제로 되지 않는다. 도대체 누가 그렇게 쓸데없이 신경을 쓰는가? 그들은 자기들이 절대로, 절대로 (조선과) 대화하지 않겠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가! 대화가 효과를 볼 수 있을지 누가 알겠나. 효과를 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진실을 알려고 한다면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는 2016년 6월 15일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진행한 선거유세 중에 이렇게 말했다.

“누가 그렇게 신경을 쓰는가? 나는 누구와도 대화할 것이다. 누가 아는가? 도대체 누가 그(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뜻함-옮긴이)가 핵무기를 갖기를 바라는가? 기회는 있다. 나는 우리에게 유리하게 협상할 것이다. 분명히 기회는 있다. 그런데 힐러리는 ‘내가 독재자와 협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클린턴, 그만 좀 해라. 힐러리는 비전문가 수준이다. 그녀는 이제껏 그러했고, 그래서 알지도 못한다. (조선과) 대화하는 것이 도대체 왜 잘못되었다는 건가? 모두 다 알다시피, 대화를 시작하자는 말이다. 대화를 시작하는 거다. 나는 그것(조선과의 대화를 뜻함-옮긴이)이 실제로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대화가 성사되지 않을 수도 있다.”

위에 인용한 트럼프의 발언들을 들어보면, 조미대화에 대한 그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실패로 끝난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정책’을 폐기하고, 조미대화를 추진할 가능성이 보인다.

주목되는 것은, 트럼프가 차관급 조미회담이 아니라 조미정상회담을 염두에 두었다는 사실이다. 2016년 6월 15일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진행한 선거유세 중에 트럼프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그(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뜻함-옮긴이)가 여기에(미국을 뜻함-옮긴이) 온다면, 나는 그를 맞이하겠다. 하지만 나는 그를 위해 국빈만찬을 차리지는 않겠다. 우리를 이용해먹는 중국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커다란 국빈만찬을 차리는 일은 하지 않으련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만찬을 차릴 것이다. 우리는 그들과 국빈만찬을 나누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회의탁자에서 햄버거를 먹으면서 중국이나 다른 나라들과 협상하게 될 것이다.”

거친 표현이 들어간 즉흥연설이기는 하지만, 트럼프가 차관급 회담이 아니라 정상회담을 생각한 것은 기존 외교행태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발상이다. 거대한 재벌기업을 경영해오는 과정에서 최고경영자들 사이의 직접담판을 경험해본 그로서는 정상회담이야말로 난국을 타결할 가장 현실적인 방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7. 로드먼의 평양방문, 트럼프의 지지발언

미국의 전국농구협회(NBA)에서 뛰어난 농구선수로 활약하여 유명인사가 된 데니스 로드먼(Dennis Rodman)은 이번 대선에 출마한 도널드 트럼프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몇 안 되는 유명인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2016년 7월 23일 자기의 트위터(Twitter) 계정에 이런 글을 올려 유권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도널드 트럼프는 지난 몇 해 동안 훌륭한 친구(great friend)였다. 우리에게는 다른 정치인이 필요 없다. 우리는 트럼프와 같은 기업가가 필요하다! 2016년의 트럼프”
                                               
▲ <사진 9> 이 기념사진은 2009년 3월 미국의 인기 있는 텔레비전방영프로그램이었던 '명사 견습생'에서 진행자와 참가자로 만나 친분관계를 맺은 도널드 트럼프와 데니스 로드먼이 뉴욕 맨해튼에 있는 트럼프 타워에서 다정하게 찍은 것이다. 그로부터 4년 뒤 로드먼은 미국 농구선수단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접견을 받은 첫 미국인으로 조미관계사에 기록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트럼프는 위의 메시지를 읽고 자기의 트위터 계정에 즉각 답신을 올렸다. “고마워 데니스 로드먼. 지금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때라네! 자네가 잘 지내기 바라오.”

트럼프와 로드먼은 미국 <NBC> 텔레비전방송의 인기 있는 방영프로그램이었던 ‘명사 견습생(Celebrity Apprentice)’에 함께 출연한 것을 계기로 친분관계를 맺었다. 2009년 3월 트럼프와 로드먼은 그 프로그램에서 진행자와 참가자로 만났던 것이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13년 2월 26일 데니스 로드먼은 미국 농구선수들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하여 조선 국가대표 농구선수들과 친선경기를 진행하여 조선과 미국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로써 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접견을 받은 첫 미국인으로 조미관계사에 기록되었다. 로드먼은 2013년 9월 3일 두 번째로 평양을 방문하였는데, 그 때도 이전처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파격적인 접견을 받았다.

2013년에 데니스 로드먼이 평양을 방문한 뒤, 미국 텔레비전방송 <팍스 뉴스(Fox News)>에 출연한 트럼프는 발언 중에 그의 방북을 은근히 지지하는 말을 남겼다. “데니스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여러모로 똑똑한 사람이다. 그는 세상물정에 매우 밝다. 지금 세계를 바라보면, 우리 주위에서 야단법석이 일어나고 있다. 데니스는 우리보다 훨씬 더 잘하였을 것이다.”
                                               
▲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 <사진 10> 위쪽 사진은 2014년 1월 8일 조선을 세번째로 방문한 로드먼이 평양시민이 가득 찬 실내경기장에서 미국 농구선수들의 시범경지를 진행한 직후,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관람군중들 앞에서 '해피 버스데이 투 유'라는 제목의 축하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그 날은 조선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탄생일로 알려진 날이다. 아래쪽 사진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부인 리설주 여사와 함께 로드먼과 그 일행에게 환영연회를 베푼 장면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손뼉을 치면서 기뻐하는 로드먼의 모습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다. 평양에서 감동의 시간을 보낸 로드먼은 미국에 돌아와 미국 언론매체들과 대담하는 자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자기에게 "평생의 벗"이라고 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로드먼은 2014년 1월 초 세 번째로 평양을 방문하였는데, 조선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탄생일로 알려진 1월 8일 평양시민이 가득 찬 실내경기장에서 미국 농구선수들의 시범경기가 진행되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현장에 나가 시범경기를 참관하였는데, 로드먼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관람군중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해피 버스데이 투 유(Happy Birthday to You)’라는 제목의 축하노래를 불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자 조선에 대한 악의적인 선동에 매달려온 미국의 수구세력은 로드먼의 방북을 맹렬히 비난하였고, 반대여론을 불러일으켜 그의 방북길을 가로막았다.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대선주자로 나서게 된 트럼프는 보수층 표심을 의식한 나머지 자신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자는 로드먼의 방북제의를 거절하면서 자신은 평양에 가지 않겠노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트럼프는 2013년에 로드먼의 방북을 지지한 바 있다. 이번 선거유세 중에 드러난 트럼프의 조미정상회담 구상은 3년 전 로드먼의 방북에 대한 지지의사의 연장선에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조미정상회담은 트럼프의 구상만으로는 성사되기 힘들고, 조선의 긍정적인 반응이 있어야 성사될 수 있다. 만일 트럼프 대통령이 철군문제와 핵문제를 담판하기 위한 정상회담을 조선에 제의한다면, 즉각 성사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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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8

백악관은 왜 박근혜의 몰락위험을 방관하였는가?

[한호석의 개벽예감](226)
자주시보 2016년 11월 07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한미관계와 무관하지 않은 박근혜-최순실 사건
2. 박근혜-최순실 사건 폭로조짐 방치한 주한미국대사관
3. 박근혜-오바마의 유별난 친밀관계에서 발생한 난기류
4. 사상 초유의 대격변 예고하는 박근혜퇴진투쟁
▲ <사진 1> 이 사진은 1976년 어느 날 유신독재자 박정희가 박근혜와 함께 대한구국선교단 야간진료센터를 찾아가 대한구국선교단 총재 최태민을 만나 환담하는 장면이다. 당시 박근혜는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였다. 그 무렵 기독교 목사로 행세하며 청와대와 밀착하여 사리사욕을 채운 최태민의 범죄는 그로부터 40여 년 뒤에 터져 나온 박근혜-최순실 사건의 뿌리이다. 박정희-박근혜 부녀와 최태민-최순실 부녀가 2대에 걸쳐 저질러온 범죄가 오늘 박근혜-최순실 사건에 응집되어 있는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1. 한미관계와 무관하지 않은 박근혜-최순실 사건

지금 한국에서는 괴기소설보다 더 괴기소설 같은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으니, 그것은 세간에 박근혜-최순실 사건으로 알려진 괴기사건이다.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진 것처럼, 1970년대 중반 기독교 목사로 행세하며 청와대와 밀착하여 사리사욕을 채운 최태민의 범죄는 그로부터 40여 년 뒤에 터져 나온 박근혜-최순실 사건의 뿌리이다. 다시 말해서, 박정희-박근혜 부녀와 최태민-최순실 부녀가 2대에 걸쳐 저질러온 범죄가 오늘 박근혜-최순실 사건에 응집되어 있는 것이다. 그 응집된 범죄는 정치적으로 문란하고 부정비리로 부패한 친미독재자가 국민대중이 염원하는 민주주의를 정치문란행위로 파괴하고, 근로대중이 피땀 흘려 창조한 천문학적 규모의 사회적 재부를 부정비리로 갈취한 중세기적 만행 이외에 다른 게 아니다.

그러므로 박근혜-최순실 사건을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이 공모한 범죄사건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절반의 진실밖에 알지 못하는 것으로 된다. 정치문란과 부정부패를 일삼았던 친미독재자 박정희의 범죄적 유산을 청산하지 않고 방치해온 구조적 모순이 40여 년 동안 누적, 심화되어오다가 결국 폭발한 사건으로 박근혜-최순실 사건을 인식할 때, 나머지 절반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그런데 얼핏 보면, 박근혜-최순실 사건은 한미관계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숨겨진 연결고리를 파헤쳐보면 그런 게 아니다. 더욱이 박근혜-오바마 집권기간 두 정상의 관계가 유별나게 친근해졌음을 생각하면, 박근혜-최순실 사건과 한미관계가 어떤 형태로든 연관되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2013년 5월 8일 제1차 박근혜-오바마 정상회담이 진행되었고, 2016년 9월 6일 마지막으로 제6차 박근혜-오바마 정상회담이 진행되었다. 두 정상은 2013년 5월부터 2016년 9월까지 약 3년 동안 무려 여섯 차례나 정상회담을 계속 진행한 것이다. 두 정상은 정상회담을 할 때마다 자기들의 친밀한 관계를 국제사회에 과시하곤 하였다. 

그런데 3년 동안 오바마 대통령과 여섯 차례나 정상회담을 진행할 정도로 백악관과 유별난 밀착관계를 맺은 박근혜 대통령이 박근혜-최순실 사건이 폭로되어 몰락위험에 차츰 빠져들고 있었던 때, 주한미국대사관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였을까?

장장 68년에 이르는 한미관계사의 이면을 파헤쳐보면, 한국의 정치판을 흔드는 대형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백악관이 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깊숙이 개입해왔으며, 심지어는 백악관이 직접 나서서 한국의 정치판을 갈아엎는 대형사건을 기획, 실행한 적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백악관이나 그 현지집행자인 주한미국대사관이 박근혜 정권의 몰락위험을 몰아오는 박근혜-최순실 사건이 폭로되었을 때, 그 폭로조짐을 초기에 제거하기 위해 은밀히 개입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이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파헤치려면, 박근혜-최순실 사건의 폭로조짐이 언론에 나타나면서 매우 불길한 예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던 지난 8월의 초기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박근혜-최순실 사건을 최초로 폭로한 특종보도를 따낸 언론매체는 <TV조선>이다. 2016년 7월 26일 <TV조선>은 ‘청와대 안종범 수석, 문화재단 미르 500억 모금 지원’이라는 제목의 보도를 방영하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새누리당 정책위원회 부의장이었던 안종범을 2014년 6월 청와대로 불러들여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임명했으며, 2016년 5월에는 그에게 대통령비서실 정책조정수석비서관의 중책을 맡겼다. 그런데 한국 언론보도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이 막후에서 조종하여 문화재단 미르와 K스포츠재단을 급조할 때, 재벌총수들을 총동원하여 설립자금 770억원을 불법적으로 모금하였는데, 안종범을 그 범죄의 실행자로 앞에 내세웠다고 한다. 문화재단 미르는 2015년 10월 27일에 설립되었고, K스포츠재단은 2016년 1월 13일에 설립되었다.
▲ <사진 2> 이 사진은 <TV조선>이 박근혜-최순실 사건을 최초로 폭로한 2016년 7월 26일 특종보도장면이다. 이 특종보도 이후 더 밝혀진 바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이 막후에서 조종하여 문화재단 미르와 K스포츠재단을 급조할 때, 재벌총수들을 총동원하여 설립자금 770억원을 불법적으로 모금하였는데, 안종범을 그 범죄의 실행자로 앞에 내세웠다고 한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지난 8월 문화재단 미르와 K스포츠재단의 특대형 비리의혹이 언론에 보도되는 바람에 검찰의 수사와 청와대 특별감찰관의 감찰이 시작되었다. 만일 지난 8월 검찰과 청와대 특별감찰관이 그 비리의혹을 제대로 수사, 감찰하였다면, 안종범-최순실-박근혜로 이어진 범죄인맥의 연결고리가 드러나게 될 판이었다.

위험조짐을 감지한 박근혜 대통령은 문화재단 미르와 K스포츠 재단의 비리의혹에 대한 검찰수사를 중단시켰고, 2016년 8월 29일 이석수 청와대 특별감찰관을 사직시켰으며, 9월 3일 자기의 공범인 최순실을 독일로 긴급히 도피시켜 안종범-최순실-박근혜로 이어진 범죄인맥의 연결고리를 끊어놓으려는 비상대책을 취했다.

그러나 그런 미봉책으로는 박근혜-최순실 사건이 세상에 폭로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결정적인 폭로의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내 2016년 9월 20일 일간지 <한겨레>가 ‘권력의 냄새 스멀...실세는 정윤회가 아니라 최순실’이라는 제목의 폭로기사를 내보내면서 상황은 돌변하기 시작하였고, 10월에 들어와 박근혜-최순실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중세기적 만행이 언론보도를 통해 속속 드러나 세상을 경악과 충격에 빠뜨렸다.

지금 박근혜-최순실 사건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린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고 몰락하였고, 이 땅의 통치체계는 대혼란에 빠져 사실상 마비되고 말았다. 박근혜-최순실 사건을 보고 격분한 각계각층 대중은 거리와 광장에 집결하여 박근혜퇴진투쟁을 벌이고 있고, 국제사회는 박근혜 정권이 몰락하는 과정을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박근혜 대통령은 분노한 국민대중의 퇴진요구를 외면하면서 자기 임기를 채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박근혜 대통령을 몰락의 소용돌이에서 구원해줄 사람은 없으며, 민심이 등을 돌린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파국적 결말뿐이다. 


2. 박근혜-최순실 사건 폭로조짐 방치한 주한미국대사관

한국의 정치판에 깊숙이 개입하여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오는 백악관은 지난 8월 문화재단 미르와 K스포츠재단의 비리의혹을 제기한 언론보도가 나오기 전에 이미 청와대 도청공작으로 박근혜-최순실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는 논거는 미국의 보도전문매체 <CNN>이 2013년 10월 26일에 방영한 보도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가안보국(NSA)은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하여 35개 친미추종국 국가수반들의 전화통화를 24시간 도청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미국 국가안보국이 박근혜-최순실의 도청자료를 확보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박근혜-최순실 도청자료를 통해 백악관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박근혜-최순실 사건의 전개과정까지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사진 3> 미국 언론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미국 국가안보국은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하여 35개 친미추종국 국가수반들의 전화통화를 24시간 도청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미국 국가안보국이 박근혜-최순실의 도청자료를 확보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박근혜-최순실 도청자료를 통해 백악관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박근혜-최순실 사건의 전개과정까지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백악관은 지난여름 문화재단 미르와 K스포츠재단의 비리의혹이 언론보도를 통해 처음 제기되었을 때, 그런 언론보도가 확대되는 경우 박근혜-최순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날 것을 예감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주한미국대사관에 지령을 내려 비리의혹보도를 초기에 얼마든지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한국 언론계 안에 거미줄처럼 엮어놓은 친미비선들을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주한미국대사관 정치참사에게 그까짓 언론통제는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이다. <위킬릭스(Wikileaks)>의 폭로를 통해 드러난 것처럼, 주한미국대사관이 작성하여 자기네 상급기관들에 보낸 수많은 비밀전문들은 주한미국대사관이 한국의 언론계, 정치권, 관료집단, 선거판 등을 어떻게 주물러왔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백악관은 지난 3년 동안 오바마 대통령과 무려 여섯 차례나 정상회담을 진행하면서 끈끈한 친밀관계를 유지해온 박근혜 대통령에게 박근혜-최순실 사건의 폭로조짐이 얼마나 큰 위험을 불러오게 될는지를 간파하였으면서도, 그 폭로조짐을 초기에 제거하여 박근혜 대통령을 지켜주기는커녕 모르는 척 방치해버렸다. 그것만이 아니라, 박근혜-최순실 사건이 폭로되어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생명이 끊어지는 위급한 상황이 닥쳐왔어도 여전히 무관심한 척하면서 수수방관하였다. 이를테면, 2016년 11월 1일 조슈아 어니스트(Joshua R. H. Earnest) 백악관 대변인은 백악관 출입기자가 박근혜-최순실 사건에 관해 질문하자 이상한 답변을 꺼내놓았다. 그 이상한 답변내용 중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을 발췌, 번역하면 이렇다.

“나는 당신들이 작성한 언론보도자료들 가운데서 그 소식(박근혜-최순실 사건을 뜻함-옮긴이)을 읽어보았다. 나는 (오마바) 대통령에게 그 소식에 관해 보고하지 않았다. (줄임) 그것(박근혜-최순실 사건을 뜻함-옮긴이)은 남한 내부의 정치상황에 결부된 것이므로, 남한 국민이 토론하고 논쟁할 문제이며, 내가 끼어들고 싶지 않은 일이다. (that's something that I won't weigh in on)”

오바마 대통령과 끈끈한 친밀관계를 유지해온 박근혜 대통령이 박근혜-최순실 사건에 휘말려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았는데, 명색이 백악관 대변인이라는 사람이 공식정보자료를 통해 그 사건을 파악한 게 아니라, 백악관 출입기자단이 일상적으로 작성하는 비공식보도자료를 통해 그 사건을 파악하였다니, 이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았다는 충격적인 정보를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보도자료만 대충 읽어보고 그만두었다면, 11월 1일까지만 해도 오마바 대통령이 박근혜-최순실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인데, 이건 또 무슨 낮도깨비같은 횡설수설인가?

만일 오마마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의 끈끈한 친밀관계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면, 그 날 백악관 대변인은 이 정도의 발언수위로 답변했어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 사건에 관한 보고를 이미 여러 차례 받은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백악관은 미국이 중시하는 우방국에서 정치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한국 정부와 국민이 정치혼란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하루빨리 안정을 되찾기 바란다.”

그러나 백악관은 뜻밖에도 너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는 오바마 대통령이 제임스 클래퍼(James R. Clapper) 국가정보국장의 매일독대보고를 통해 박근혜-최순실 사건의 전개상황에 관해 수시로 보고받았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대책을 논의하였던 것이 확실해 보이는데도, 그 날 백악관 대변인은 마치 오바마 대통령이 박근혜-최순실 사건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거짓말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 <사진 4> 이 사진은 조슈아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이 백악관 출입기자들을 상대로 정례회견을 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는 지난 11월 1일 백악관 출입기자가 박근혜-최순실 사건에 관해 질문하였을 때, 오바마 대통령이 그 사건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답변하였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또한 그는 지난 11월 4일 백악관 출입기자가 박근혜-최순실 사건에 관해 질문하였을 때, 박근혜 대통령이 아니라도 한미동맹은 정상적으로 유지될 것이라는 식으로 답변하였다. 이것은 백악관이 박근혜 대통령과 거리를 두면서 그가 몰락하도록 수수방관해왔음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박근혜 대통령의 몰락위험에 대한 백악관의 더욱 싸늘한 반응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11월 4일에 나왔다. 그 날 조슈아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과 백악관 출입기자 사이에 오간 질의응답 중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을 발췌, 번역하면 이렇다.

질문 - 그(오바마 대통령)는 남한의 박 대통령과 대화하였나? 그 두 사람은 지난날 매우 가까웠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그녀가 대통령직을 유지하기 바라는가? 아니면 (박근혜 대통령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가?

답변 - 강한 동맹이 지니는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람, 다른 인물이 나라를 이끌게 되어도 동맹은 존속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맹관계에 있는) 두 나라 정부와 국민이 동맹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줄임) 명백하게도, 그녀(박근혜 대통령을 뜻함-옮긴이)는 어려운 국내정치상황에 직면하였는데, 그 문제는 내가 끼어들고 싶지 않은 일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공개적으로나 사적으로 그 문제에 끼어들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돌아온 직후 (9월 6일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열린 아세안정상회의 도중 별도로 진행된 한미정상회담 이후라는 뜻-옮긴이) 오바마 대통령은 그녀와 대화한 적이 없지만, 한미동맹의 다른 요소들은 모두 정상적이다. (줄임)

박근혜 대통령이 아니라도 한미동맹은 정상적으로 유지될 것이라는 식으로 언명한 백악관 대변인의 발언은, 최근 백악관이 박근혜 대통령과 거리를 두면서 그가 몰락하도록 수수방관해왔음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백악관은 왜 박근혜 대통령의 몰락위험을 방관한 것일까? 거기에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어떤 비밀스런 사연이 있는 게 아닐까? 박근혜-최순실 사건의 폭로조짐이 언론에 나타나기 시작한 2016년 8월 이전 한미관계에서 은밀히 일어났던 움직임을 파헤쳐보면, 박근혜-오바마의 유별난 친밀관계가 갑자기 냉각될 수밖에 없었던 소설 같은 이야기가 드러난다.


3. 박근혜-오바마의 유별난 친밀관계에서 발생한 난기류

박근혜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2016년 9월 6일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열린 아세안정상회의 중에 별도로 진행된 제6차 박근혜-오바마 정상회담이다. 그보다 앞서 제5차 박근혜-오바마 정상회담은 2016년 3월 31일 미국 워싱턴 디씨에서 열린 제4차 핵안보정상회의 중에 진행된 바 있다.

지난 9월 6일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진행된 제6차 박근혜-오바마 정상회담은 자신에게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한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을 독일로 긴급히 대피시킨 날로부터 불과 사흘 뒤에 진행되었다.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불길한 예감을 느꼈을 박근혜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자기에게 확실한 지지의사를 공식적으로 표명해주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과 회담을 진행한 직후 현장에서 공동언론발표문을 내놓으면 좋겠다는 뜻을 백악관에 미리 전했다. 청와대가 제6차 박근혜-오바마 정상회담 직후 현장에서 공동언론발표문을 통해 회담결과를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는 당시 한국 언론보도에서 그런 사실이 확인된다. 제3국에서 열린 다자정상회의 중에 양자정상회담이 별도로 진행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다자정상회의 중에 별도로 진행된 양자정상회담에서 공동언론발표문이 나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 <사진 5> 이 사진은 2016년 9월 6일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열린 아세안정상회의 중에 별도로 진행된 제6차 박근혜-오바마 정상회담이 시작되기 직전 장면이다. 사진 속에서 그들은 웃고 있지만, 이 정상회담은 자신에게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한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을 독일로 긴급히 대피시킨 날로부터 불과 사흘 뒤에 진행되었다. 불길한 예감을 느꼈을 박근혜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이 자기에게 확실한 지지의사를 표명해주기를 갈망하였고, 그래서 정상회담 직후 현장에서 공동언론발표문을 내놓으면 좋겠다는 뜻을 백악관에 미리 전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의 절박한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것은 유별나게 밀착되었던 두 정상의 관계에 난기류가 발생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박근혜-최순실 사건이 폭로되면서 궁지에 몰린 박근혜 대통령은 백악관에게 공동언론발표를 요청했지만, 정작 정상회담 현장에서는 그가 간절히 기대하였던 공동언론발표가 나오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의 요청을 거절한 것이다. 이것은 박근혜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의 마지막 정상회담이 다소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그 이전까지만 해도 정상회담을 무려 다섯 차례나 진행할 정도로 유별나게 밀착되었던 두 정상의 관계에 난기류가 발생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박근혜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이 다소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마지막 정상회담을 진행하기 넉 달 전인 2016년 5월 4일 청와대의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결정에 따라 미국 대통령의 밀사로 청와대에 급파된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이었다. 그 날 청와대 비밀회동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독대한 클래퍼의 입에서는 한미관계에서 공식적인 사용이 시종 폐절되어온 ‘평화협정’이라는 금기어가 줄줄 흘러나왔다.

나는 2016년 10월 17일 <자주시보>에 실린 ‘밀사의 청와대 비밀회동과 조선의 전략핵압박’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아니 그로서는 종내 생각하기 싫은 평화협정문제가 미국 대통령 밀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충격적인 장면”이라고만 서술하였을 뿐, 그 자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평화협정문제가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의 입에서 흘러나왔을 때 거부의사를 밝히며 조건반사적으로 반발하였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미국 대통령 밀사가 비밀회동에서 제시한 평화협정문제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반발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진지하게 검토되고 채택된 평화협정문제를 정면으로 거부하였다는 뜻이다. 통속적으로 표현하면, 그 이전까지만 해도 백악관의 결정을 100% 지지하고 따랐던 박근혜 대통령이 갑자기 백악관을 향해 반기를 치켜드는 난기류가 발생한 것이다.

2016년 5월 4일 박근혜-클래퍼 비밀회동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강한 반발이 그런 난기류를 발생시켰으므로, 지난 6월 이후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발언강도가 극언수준으로 갑자기 높아진 이상현상이 나타났던 것이고, 지난 9월 6일 박근혜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만난 비엔티엔 정상회담이 뜻밖에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 이상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통속적으로 표현하면, 백악관은 자기 밑에 있다고 여기는 박근혜 대통령이 자기들의 고심어린 결정에 대해 감히 반발한 것을 보고 그와 맺었던 친밀관계를 냉각관계로 전환시켰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올해 들어 조선이 날로 가중시키는 전략핵압박을 회피하기 위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조선이 핵시험과 장거리미사일발사를 유예하는 경우 그에 상응하여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는 고육지책을 격론 끝에 어렵사리 채택하였다는 것이 나의 분석인데, 박근혜 대통령이 그런 고육지책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으니 박근혜-오바마의 친밀관계가 냉각관계로 뒤바뀐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4. 사상 초유의 대격변 예고하는 박근혜퇴진투쟁

박근혜 대통령의 몰락이 기정사실로 굳어지고 있는 지금, 정세분석가들이 그의 몰락으로 일어날 대격변씨나리오를 예상하는 것은 응당한 일이다. 소설적 상상이 아니라 과학적인 분석으로 대격변씨나리오를 얼마나 치밀하게 예상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내가 예상하는 대격변씨나리오의 첫 장면은, 박근혜 대통령이 민심의 버림을 받고, 미국으로부터도 외면당했으면서도 경향 각지에서 들불처럼 타오르는 국민대중의 퇴진요구를 거부하면서 끝까지 버티려고 하는 모습을 비춰주는 장면이다. 체면치레식 사과담화를 두 차례 발표하고, 제멋대로 국면전환용 개각을 발표하면서 국민대중에게 실망과 분노를 더해준 그의 행동은 그가 얼마나 맹목적으로 권좌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잘 말해준다. 국민대중의 정당한 퇴진요구를 거부하면서 끝까지 버텨보려는 고집스런 행동은 세계정치사를 어지럽힌 친미독재자들이 집권말기에 보여준 전형적인 자해행위인데, 박근혜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대중의 정당한 퇴진요구를 거부할수록 각계각층 대중의 퇴진투쟁은 더욱 확대, 격화될 것이다. 부패한 친미독재정권과 분노한 국민대중 사이에서 타협을 배제한 적대적 모순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 <사진 6> <AP통신>에 나온 이 보도사진은 2016년 11월 5일 저녁 광화문 광장과 그 일대에 구름처럼 모여든 성난 시위군중 20만명이 "박근혜 퇴진, 새누리당 해체"를 외치는 장면이다. 부패한 친미독재정권과 분노한 국민대중 사이에서 타협을 배제한 적대적 모순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국민대중을 경악과 공분으로 몰아넣은 박근혜-최순실 사건은 민중항쟁을 불러일으킬 결정적인 폭발계기로 작용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주목되는 것은, 56년 전에 청년계층이 주도했던 4.19 민중항쟁을 폭발시킨 사회경제적 조건이 오늘 고도로 성숙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청년실업대란, 살인적인 저임금노동, 불안정한 취업상태, 경제적 궁핍으로 가장 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헬조선’의 20~30대 청년계층에게 누적되어온 집단적 불만과 분노가 불꽃 한 점만 튕겨도 대폭발을 일으킬 정도로 위급한 오늘의 현실은 4.19 민중항쟁이 폭발하였던 1960년 당시의 사회경제적 현실을 아주 방불케한다. 하지만 오늘 이 땅에서 민중항쟁을 폭발시킬 사회경제적 조건이 그처럼 고도로 성숙되었는데도 민중항쟁이 폭발하지 않았던 까닭은, 뇌관역할을 하는 결정적인 폭발계기가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근혜-최순실 사건은 민중항쟁을 불러일으킬 결정적인 폭발계기로 작용하기에 충분하다. 20~30대 청년들은 물론 10대 청소년들까지 거리와 광장에 쏟아져나와 대중적 공분을 급속히 확산시키는 추세를 보면, 그런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60년에 이승만 친미독재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가 폭로되자 그것이 결정적인 폭발계기로 작용하여 4.19 민중항쟁이 일어났고, 1987년에 전두환 친미독재정권이 저지른 박종철 열사 고문살인만행이 폭로되자 그것이 결정적인 폭발계기로 작용하여 6월 민중항쟁이 일어났던 것처럼, 오늘에는 박근혜-최순실 사건이 결정적인 폭발계기로 작용하여 민중항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박근혜 친미독재정권과 분노한 국민대중이 정면충돌상태에 들어가면, 시위군중의 평화적인 퇴진투쟁이 민중항쟁양상으로 격화되면서 시위투쟁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게 될 것인데, 그것이 바로 청와대진격투쟁이다. 성난 시위군중이 청와대진격투쟁에 돌입하는 경우, 다급해진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폭력진압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성난 시위군중의 청와대진격투쟁, 그리고 그것을 저지하려는 경찰의 폭력진압은 유혈사태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우려된다.

그런데 민중항쟁이라는 대격변이 북에서 말하는 통일대전(reunification megawar)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동아일보> 2013년 8월 22일부 보도기사를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 보도기사에 따르면, 북은 2004년에 제정된 ‘전시사업세칙’을 2012년 9월에 개정하면서 ‘전시선포시기’를 새로 첨부했는데, 북이 전시로 규정하는 세 가지 조건이 명시되었다고 한다.

전후문맥을 정확히 이해하면, ‘전시사업세칙’에 나오는 ‘전시선포’라는 말은 선전포고라는 뜻이 아니라, 선전포고 없이 전격적으로 통일대전에 돌입한다는 뜻임을 알 수 있다. 만일 북이 정부성명을 통해 전시선포를 하고 나서 통일대전을 개전하면, 미국이 북을 먼저 선제타격할 것이므로, 북은 전시선포를 하지 않고 최고사령관의 총공격명령이 하달되는 시각에 전격적인 선제기습타격으로 통일대전에 돌입할 것으로 예견된다.

위의 보도기사에 따르면, 북은 ‘전시사업세칙’에서 통일대전에 돌입할 세 가지 조건을 열거하면서 그 가운데 한 가지 조건을 “남조선 애국력량의 지원요구가 있거나 국내외에서 통일에 유리한 국면이 마련될 경우”라고 명시하였다고 한다. 인용구에 나오는 “남조선 애국력량의 지원요구”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남측 민중세력이 북에게 무엇을 지원해달라고 요구할 때 북이 통일대전에 돌입한다는 뜻으로는 해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남과 북을 격폐시킨 분단체제에서 남측 민중세력이 북에게 무엇을 지원해달라고 요구한다는 생각은 비현실적인 상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용구에 나오는 “남조선 애국력량의 지원요구”라는 말은, 남측 시위군중의 정권퇴진투쟁이 민중항쟁양상으로 격화되었으나 친미독재정권의 무차별 폭력진압으로 좌절될 때, 북이 통일대전에 돌입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옳다.

위와 같은 맥락을 이해하면, 북의 ‘전시사업세칙’에 나오는 전시규정은 지금 날로 고조되고 있는 박근혜퇴진투쟁이 민중항쟁양상으로 격화되어 청와대진격투쟁이 벌어졌으나 경찰의 무차별 폭력진압으로 좌절되는 때, 북이 통일대전에 돌입할 것임을 명시한 것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서, ‘72시간 통일대전’은 박근혜퇴진투쟁이 격화되어 일어난 청와대진격투쟁이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좌절되는 유혈사태와 거의 동시에 일어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예상을 뒷받침하는 논거는 2016년 11월 4일 북측 언론보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언론보도는 2016년 11월 3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조선인민군 제525군부대 직속 특수작전대대를 시찰한 소식을 전하였는데, 시찰소식 보도기사에서 두 가지 사실을 읽을 수 있다.
▲ <사진 7> 이 사진은 2016년 11월 3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조선인민군 제525군부대 직속 특수작전대대를 시찰한 가운데 전투원들이 모형헬기를 타고 적진에 침투하여 공중강습훈련을 진행하는 장면이다. 남측에서 박근혜퇴진투쟁의 불길이 타오르는 긴장된 시점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특수작전대대를 시찰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남측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진 북의 <전시사업세칙>을 다시 읽어보면, 박근혜퇴진투쟁이 격화되면서 마지막 단계에서 벌어질 청와대진격투쟁이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좌절되는 유혈사태가 일어날 때, 북은 특수작전대대의 청와대습격전투로 '72시간 통일대전'에 돌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 상상을 초월하는 대격변씨나리오가 실제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첫째, 그 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현지시찰을 수행한 군사지휘관들은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총참모장, 총참모부 제1부총참모장 겸 작전총국장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최고위급 군사지휘관 3명을 모두 대동하고 시찰한 것이다. 대연합부대 지휘부나 대규모 합동군사훈련이 아니라 대대급 부대를 시찰하였는데도, 최고사령관이 최고위급 군사지휘관 3명을 모두 대동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북측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그 특수작전대대를 직접 조직하였고, “특별히 중시하며 제일 믿는 전투단위”이고, 대대병영을 최상의 수준에서 현대화하는 특별조치를 취해주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그 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왜 최고위급 군사지휘관 3명을 모두 대동하고 특별시찰을 하였는지 알 수 있다.

둘째, <연합뉴스> 2016년 11월 4일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이번에 시찰한 제525군부대 직속 특수작전대대는 총참모부 작전국 직속 특수작전대대라고 한다. 북측 언론보도에 나온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면, 그 특수작전대대는 “유사시 적구에서 자유자재로 활동하면서 정찰, 침투, 습격, 파괴 등 적후투쟁을 해야 하는 전투원들”로 편성되었는데,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받으면 “단숨에 원쑤의 아성인 서울에 돌입하여 청와대와 괴뢰정부, 군부요직에 틀고 앉아 천추에 용서 못할 만고대역죄를 저지르고 있는 인간추물들을 제거해버리는 것을 기본전투임무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에 열거한 두 가지 사실을 살펴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특수작전대대 특별시찰은 달빛 없는 깊은 밤에 방공레이더망을 감쪽같이 뚫고 들어가는 초저공 습격기(AN-2)의 무월광무소음활공비행으로 서울에 침투하려는 청와대습격전준비를 완료하고 대기 중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세상에 공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박근혜퇴진투쟁이 격화되면서 마지막 단계에서 벌어질 청와대진격투쟁이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좌절되는 유혈사태가 일어날 때, 북은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직속 특수작전대대의 청와대습격전투로 ‘72시간 통일대전’에 돌입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날로 확대, 격화되는 박근혜퇴진투쟁 → 성난 시위군중의 청와대진격투쟁 → 청와대진격투쟁을 좌절시킬 친미독재정권의 폭력진압 → 조선인민군 특수부대의 청와대습격전투 → 통일대전 돌입으로 이어질 전율적인 급변사태의 연속전개과정은 위에 열거한 여러 가지 정보자료들을 분석한 데 기초하여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대격변씨나리오이다. 

물론 지금쯤 주한미국대사관은 박근혜퇴진투쟁이 고조되는 양상을 면밀히 감시, 분석하면서 그 투쟁이 민중항쟁양상으로 격화될 위험에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긴박한 정황을 살펴보면, 박근혜퇴진투쟁이 민중항쟁양상으로 격화될 조짐이 보이는 경우 백악관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해 그를 하야시킬 것으로 예견할 수 있다. 4.19 민중항쟁이 격화되자 백악관이 이승만에게 압력을 가해 그를 하야시켰고, 6월 민중항쟁이 격화되자 백악관이 전두환에게 압력을 가해 그를 하야시켰던 과거사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백악관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압력을 넣어 그를 하야시키는 것은, 그들이 북의 ‘72시간 통일대전’을 예방할 유일한 방책인 것이다. 

백악관은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하는 경우 그 뒤를 이을 새로운 대통령을 이미 예비해둔 것으로 생각된다. 새로운 대통령이 누구인지 이 글에서 밝히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이지만, 백악관이 한국의 대선예비주자들 가운데 미국에게 가장 순종적인 대선예비주자를 한국의 차기 대통령으로 이미 간택해두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 땅에서 되풀이된 것은, 민중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백악관의 압력으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장면이 등장하였고, 백악관의 압력으로 전두환이 하야하자 노태우가 등장하였던 불행한 과거사였다. 자주성을 확립하지 못하여 미국의 불법적인 내정간섭을 허용하는 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은 이 땅의 민중항쟁사가 가르쳐주는 피의 교훈이다. “박근혜 퇴진, 한나라당 해체”를 외치며 거리와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이 땅의 국민대중은 백악관의 불법적인 내정간섭으로 부패한 친미독재정권을 청산하지 못한 불행한 과거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올겨울에 또 다시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자주의식화되고, 행동조직화된 선진대중의 정의로운 투쟁만이 그런 불행한 과거사의 족쇄를 끊어버리고 참된 민주주의를 향한 사회역사발전을 힘있게 추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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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1

백악관 파견원이 참석한 콸라룸퍼 비공식대화

[한호석의 개벽예감](225)
자주시보 2016년 10월 31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백악관 파견원은 누구였을까?
2. 비공식대화가 성사될 수 있었던 배경
3.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전언, 조선 외무성 당국자들의 반응
4. 비공식대화 사흘 뒤에 나타난 세 번째 특이징후
▲ <사진 1> 2016년 10월 21일과 22일 말레이시아 수도 콸라룸퍼의 어느 호텔에서 조선과 미국이 비공식대화를 진행하였다. 위의 사진은 비공식대화 현장을 취재한 KBS 보도영상에 나온 것인데, 취재기자가 한성렬 조선 외무성 부상에게 질문하는 장면이다. 조선에서는 한성렬 외무성 부상 이외에 장일훈 유엔주재 차석대사를 비롯한 외무성 당국자 5명이 비공식대화에 참석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1. 백악관 파견원은 누구였을까?

건물외부를 온통 흰색으로 칠해놓은 백악관을 얼핏 보면 깨끗한 인상을 받게 되지만,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세계를 지배하는 모략과 음모가 거기서 꾸며지므로 흑악관이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그런 백악관에서 요즈음 특이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특이징후라는 것은 대조선관계에서 기존 행동과 다른 미국의 특이한 행동을 뜻한다. 

첫 번째 특이징후는 2016년 5월 4일 제임스 클래퍼(James R. Clapper, Jr.) 국가정보국장이 미국 대통령 밀사로 서울에 급파되어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비밀회동을 갖고 평화협정문제를 거론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2016년 10월 17일 <자주시보>에 실린 나의 글 ‘밀사의 청와대 비밀회동과 조선의 전략핵압박’에서 자세히 논하였다. 나는 그 글을 쓸 때까지만 해도 특이징후가 청와대 비밀회동으로 끝났다고 여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게 전혀 아니었다.

첫 번째 특이징후가 나타난 날부터 4개월 반 정도 지난 2016년 10월 21일 두 번째 특이징후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콸라룸퍼에서 진행된 비공식대화에서 두 번째 특이징후가 나타난 것이다.

콸라룸퍼(Kuala Lumpur)는 말레이시아 수도이다. 나는 외국어학습을 그르치는 불합리한 외래어표기법을 따르지 않고 원음에 가까운 소리를 우리글로 표기하기 때문에 쿠알라룸푸르라고 표기하지 않고 콸라룸퍼라고 표기한다.

콸라룸퍼에서 진행된 비공식대화에서 나타난 두 번째 특이징후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과 미국이 2016년 10월 21일과 22일 콸라룸퍼의 어느 호텔에서 비공식대화(unofficial dialogue)를 진행하여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비공식대화라는 것은 정부대표들이 공식적으로 진행하는 회담보다 격이 한 급 떨어지는 외교협상의 한 형태다. 그러므로 비공식대화에는 정부대표가 아니라 정부당국자 출신 인사나 비정부기관 전문가들이 참석하는 것이 관례다.

그러면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 참석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조선에서는 한성렬 외무성 부상과 장일훈 유엔주재 차석대사를 비롯한 외무성 당국자 5명이 참석했고, 미국에서는 조섭 디트라니(Joseph R. DeTrani) 대니얼 모건 전문학교(Daniel Morgan Academy) 교장, 로벗 갈루치(Robert L. Gallucci) 미국 국무부 전직 대조선핵협상 대표, 지난날 몇 차례 조미비공식대화를 주선한 토니 남궁(Tony Namkung) 박사, 리언 씨걸(Leon V. Sigal) 미국 사회과학원 동북아안보협력사업 국장 등 4명이 참석했다.

미국의 관영매체인 <자유아시아방송> 2016년 10월 24일부 보도기사에 따르면, 토니 남궁 박사는 취재기자와 대담하는 중에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의 내용을 미국 정부에 보고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였다. 이것은 미국 정부부서들 가운데 어느 특정부서가 선정한 사람이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 참석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는 누구였을까? 

위에 열거한 미국측 참석자들 가운데 주목되는 사람은 조섭 디트라니 교장이다. 지금 그는 워싱턴 디씨에 있는, 국가안보 및 정보부문 관리를 육성하는 사립기관인 대니얼 모건 전문학교의 교장이지만, 2003년부터 2006년까지 6자회담 미국측 특사로 일했으며, 부쉬행정부가 2005년 4월 국가정보국장실(Office of the Director Of National Intelligence)을 신설한 직후 국가정보국장실에 들어가 2010년까지 북조선담당관(North Korea Mission Manager)으로 일했고, 2010년부터 2012년까지 국가정보국장실 산하 국가비확산센터 소장으로 일했으며, 2012년부터 2014년까지 국가정보국장 선임보좌관으로 일했다.

위에 적은 경력을 살펴보면, 조섭 디트라니는 조선에 대한 정보를 분석하는 데서 실력을 인정받은 ‘제1인자’로서 미국 국가정보기관들이 수집한 조선에 대한 정보들을 분석, 종합하여 자기 직속상관들인 국가정보국장과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2년 전까지만 해도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의 ‘오른팔’로 일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사진 2> 이 사진은 조미 비공식대화가 진행된 호텔 복도에서 디트라니 대니얼 모건 전문학교 교장이 취재기자들과 마주친 장면이다. 그는 조선에 대한 정보를 분석하는 데서 실력을 인정받은 '제1인자'로서 미국 국가정보기관들이 수집한 조선에 대한 정보들을 분석, 종합하여 자기 직속상관들인 국가정보국장과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2년 전까지만 해도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의 '오른팔'로 일하였다. 그런 그가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 백악관 파견원으로 나타났으니,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위에 열거한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보면,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은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디트라니 교장을 2016년 10월 21일과 22일 콸라룸퍼에서 진행된 조미비공식대화에 파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섭 디트라니는 미국 정부와 무관한 민간인 신분이 아니라, 미국 국가정보국장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 보낸 백악관 파견원이었던 것이다.

약 4개월 반 시차를 두고 나타난 두 개의 특이징후 중심에서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이 그림자처럼 움직이고 있다.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은 대통령 밀사로 청와대를 방문하여 박근혜 대통령과 비밀회동을 진행하였고, 그로부터 4개월 반 뒤에는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디트라니 교장을 콸라룸퍼에 파견하여 조선 외무성 당국자들과 비공식대화를 진행하게 한 것이다.


2. 비공식대화가 성사될 수 있었던 배경

주목되는 것은, 정보사업을 총지휘하는 국가정보국장이 직접 나서서 조선을 상대하는 비공개외교활동을 전개하는 특이징후가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외교활동은 국가정보국장실 소관이 아니라 국무부 소관이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 국가정보국장이 국무장관을 제치고, 자기 소관 이외의 비공개외교에 깊숙이 개입한 것일까? 이런 특이징후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지금 조선의 강력한 전략핵압박을 받아 벼랑끝에 몰리며 다급해진 미국은 조선문제를 외교부문에 국한시켜 다룰 처지가 아니다. 미국에게 조선문제는 정치문제, 외교문제, 군사문제를 포괄하는 매우 심각한 국가안보문제로 제기된 것이다. 그처럼 심각한 국가안보문제는 외교부문을 넘어서는 것이므로 국무부가 다루지 않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나서서 직접 다룬다.

지난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심각한 국가안보문제를 처리할 적임자를 선정할 때, 국무장관이 아닌 다른 고위관리를 선정하는 사례가 있었다. 이를테면 미국이 중국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비공식대화를 시작하였을 때, 또는 베트남전쟁에서 패한 미국이 북베트남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비공식대화를 시작하였을 때,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를 적임자로 선정한 바 있다. 국무장관이 움직이는 경우에는 국제관례에 따른 외교절차를 밝아야 하므로 추진과정이 복잡해지지만,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나 국가정보국장은 외교절차를 생략하고 신속하고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으므로 비공개외교활동에서는 그런 고위관리들이 적임자로 선정될 수 있다. 

2016년 10월 17일 <자주시보>에 실린 나의 글 ‘밀사의 청와대 비밀회동과 조선의 전략핵압박’에서 논한 것처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2016년 5월 6일부터 나흘 동안 평양에서 진행된 조선로동당 제7차 대회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미국에게 평화협정문제를 공식 제의할 것으로 예측하고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을 대통령 밀사로 청와대에 급파하였으나, 그들의 예측은 빗나가고 말았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예측을 뒤엎고, 조선은 강도를 더욱 높인 전략핵압박을 계속하였다. 조선이 평화협정을 제의할 줄 알았더니, 그런 게 아니라 전략핵압박을 강도를 높여가며 계속하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당황망조하였다.
▲ <사진 3>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2016년 5월 6일부터 나흘 동안 평양에서 진행된 조선로동당 제7차 대회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미국에게 평화협정문제를 공식 제의할 것으로 예측하고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을 대통령 밀사로 청와대에 급파하였으나, 그들의 예측은 빗나가고 말았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예측을 뒤엎고, 조선은 강도를 더욱 높인 전략핵압박을 계속하였다. 자기들의 예측을 뒤엎고 전략핵압박의 강도를 높이는 조선의 단호한 행동 앞에서 당황망조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대응방침을 논의하였는데 의견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두 갈래로 갈라진 대응방침 가운데서 강도 높은 전략핵압박을 계속하는 조선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조선측 당국자들을 직접 만나야 한다는 신중론의 채택, 바로 이것이 미국이 콸라룸퍼에서 조선과 비공식대화를 진행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자기들의 예측을 뒤엎고 전략핵압박의 강도를 높이는 조선의 단호한 행동 앞에서 당황망조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대응방침을 논의하였는데, 의견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두 갈래 대응방침 가운데 한 갈래는 평화협정을 제의하지 않고 강도 높은 전략핵압박을 계속하는 조선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조선측 당국자들을 직접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한 갈래는 비핵화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는 조선과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으므로, 이란에게 적용했던 강경한 경제제재를 들이대어 조선을 더욱 압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강경한 대조선경제재재를 감행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강행론자들과 신중론자들이 격론을 벌였다는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른 팔러씨(Foreign Policy)> 2016년 10월 6일부 기사는, 조선의 전략핵압박에 맞서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대응방침이 두 갈래로 갈라져 양측이 격론을 벌였다는 나의 분석을 안받침해준다. 

그런데 그 격론에서 신중론자들이 이겼고, 강행론자들이 졌다. 다시 말해서, 강경한 경제제재를 들이대어 조선을 압박하기 보다는 조선측 당국자들을 직접 만나보아야 한다는 신중론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채택된 것이다. 강도 높은 전략핵압박을 계속하는 조선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조선측 당국자들을 직접 만나야 한다는 신중론의 채택, 바로 이것이 2016년 10월 21일과 22일 콸라룸퍼에서 미국이 오랜만에 조선과 비공식대화를 진행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다.

위와 같은 사정을 파악하면, 콸라룸퍼 비공식대화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조선에게 요청하고, 조선이 그 요청을 받아주는 형식으로 성사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콸라룸퍼 비공식대화 이전에 있었던 조미비공식대화에 참석한 경험이 있는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태평양연단의 칼 베이커(Carl W. Baker) 국장은 <연합뉴스> 2016년 6월 15일 보도기사에서 조선은 비공식대화에 관심이 없다고 했는데, 이번에 조선이 미국의 비공식대화 요청에 이례적으로 응한 까닭은 이전에 이른바 ‘트랙(Track) 2’라고 불렀던 비공식대화들과 달리 이번에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직접 나서서 요청한 특별한 비공식대화였기 때문이다.

이런 성사배경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미국의 견지에서 콸라룸퍼 비공식대화를 바라보면, 그것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조선의 전략적 의도를 알아보기 위한 탐색기회로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조섭 디트라니 교장은 2016년 10월 25일 미국의 관영언론매체 <미국의소리>와 진행한 전화통화에서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 참석한 미국측 인사들이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탐색적 토론(exploratory discussions)”을 진행하였다고 말했던 것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조선에게 비공식대화를 먼저 요청하였고, 그 대화에 백악관 파견원을 참석시킨 것은 미국의 ‘전략적 인내’ 정책의 패배, 그리고 그 대척점에 있는 조선의 ‘경핵병진노선’의 승리를 말해주는 또 하나의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한 편, 조선의 견지에서 콸라룸퍼 비공식대화를 바라보면, 조선은 자기의 ‘경핵병진노선’으로 미국의 ‘전략적 인내’ 정책을 꺾고, 미국에게 자기의 전략적 의도를 비공식대화를 통해 다시 한 번 명백하게 밝혔다고 볼 수 있다.


3.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전언, 조선 외무성 당국자들의 반응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콸라룸퍼 비공식대화를 통해 조선에게 무슨 전언(message)을 보냈을까? 이 민감한 물음에 해답을 찾으려면, 그 비공식대화에서 조섭 디트라니 교장이 한성렬 조선 외무성 부상을 대표로 하는 조선측 참석자들에게 무엇을 말했는지 알아보아야 하는데, 그가 비공식대화 직후 워싱턴 디씨에 돌아가 미국 언론매체들에게 밝힌 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섭 디트라니 교장은 2016년 10월 25일 <미국의소리>와 진행한 전화통화에서 자신이 “북조선에 제안할 목록을 갖고”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 참석하였는데, 그 목록은 “미국의 정부부처들과 사전 협의하거나 의견을 교환하지 않은”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것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미국 국무부와 협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성한 중대제안들을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서 꺼내놓았다는 뜻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독자적으로 작성하여 꺼내놓은 중대제안들은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디트라니 교장이 미국 통신사 <블룸벅통신(Bloomberg News)>과 주고받은 전자우편 내용을 보도한 그 통신 2016년 10월 25일부 기사에서 발견된다. 그 기사에 들어있는 디트라니 교장의 말에 따르면,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서 “미국 대표단은 (조미) 양측이 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초기행동들(initiatives)의 필요성과 더불어 조선의 핵시험 및 (장거리)미사일발사 일시정지(halt)를 권고(recommend)하였다”고 한다.
▲ <사진 4>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콸라룸퍼 비공식대화를 통해 조선에게 조선과 미국이 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초기행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조선의 핵시험 및 장거리미사일발사를 일시 정지해줄 것을 권고하였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권고'는 요즈음 미국 국무부가 목청을 높이는 대조선인권공세와 대조선경제제재, 그리고 미국 국방부가 감행하는 대조선핵타격위협 같은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적대행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내용이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이 인용문을 읽으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다른 정부기관들과 협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성한 제안은, 요즈음 미국 국무부가 목청을 높이는 대조선인권공세와 대조선경제재재, 그리고 미국 국방부가 감행하는 대조선핵타격위협 같은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적대행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읽어보면, 위의 인용문은 불완전한 문장이다. 왜냐하면, 그 문장에서는 조선과 미국의 상호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초기행동들 가운데 미국이 조선에게 권고한 사항만 언급되었고, 그에 상응하여 미국이 실행할 사항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전략구상을 언론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디트라니 교장이 그 부분을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의도적으로 생략된, 미국이 실행할 사항은 무엇일까? 그것은 조선이 핵시험과 장거리미사일발사를 일시적으로 정지하는 행동에 상응하여 미국이 취해야 하는 행동일 것이다. 디트라니 교장이 위에 인용한 <미국의소리> 보도기사에서 “북조선이 9.19공동성명으로 돌아갈 의지가 있는지 알아보는 데 초점을 맞춘 탐색적 대화가 있었다”고 말한 것을 보면, 미국이 취해야 할 상응행동은 9.19공동성명에 들어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2005년 9월 19일 중국 베이징에서 진행된 제4차 6자회담에서 채택된 9.19공동성명에서 미국의 상응행동과 관련하여 눈길을 끄는 것은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가질 것”이라는 문장이다. 이 문장은 디트라니 교장이 자기의 전자우편 내용에서 생략한 미국의 상응행동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생략된 부분을 보충하여 완전한 문장을 만들면, 조선이 핵시험과 장거리미사일발사를 일시정지하면, 그에 상응하여 미국은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을 시작한다는 내용이 드러나는데, 바로 이것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콸라룸퍼 비공식대화를 통해 조선에게 전한 제안이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조선이 핵포기를 단행하려는 태도변화를 먼저 보여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버리고, 조선이 핵시험과 장거리미사일발사를 일시정지하는 것과 동시에, 그에 상응하여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는 선으로 크게 후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조선의 핵시험과 장거리미사일발사는 곧 미국에 대한 조선의 전략핵압박이므로, 미국은 조선이 전략핵압박을 일시정지하면,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는 상호신뢰구축방안을 제안한 것이다.

이제껏 미국은 평화협정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도 않으면서 조선에게 무조건 핵포기를 강요해왔지만, 조선의 강력한 전략핵압박을 받으며 벼랑끝에 몰리게 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었고, 그래서 조선이 전략핵압박을 일시정지하는 것과 동시에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는 선으로 후퇴하였으니, 바야흐로 미국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서 백악관 파견원이 제시한 위와 같은 제안을 들은 조선 외무성 당국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연합뉴스> 2016년 10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 참석한 미국측 인사들 가운데 한 사람인 리언 씨걸(Leon V. Sigal) 미국 사회과학원 동북아안보협력사업 국장은 그 호텔에서 취재기자와 만났을 때 “북측 참석자들이 북미평화협정과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미국측에 요구했다”고 말했다. 조미평화협정과 한반도평화프로쎄쓰(peace process)를 요구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 말은 핵시험 및 장거리미사일발사 일시정지와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을 동시에 실행함으로써 상호신뢰구축을 시작하자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견해와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언제 다시 깨질지 모르는 상호신뢰구축을 시작하자는 것이 아니라, 조미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공고하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평화실현과정(peace process)을 시작하자는 뜻이다. 바로 여기서 두 가지 중대사안이 드러난다.


첫째,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이라는 모호한 표현은 협정을 체결할 당사자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것이다. 미국이 말하는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은 조선과 미국의 양자협상이 아니라 중국과 한국까지 포함되는 다자협상이므로 4자의 상충적인 이해관계를 조절하려고 허송세월하다가 결국 흐지부지 될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 시기에 진행된 4자회담이 시간만 끌다가 결국 실종되어버린 실패경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 참석한 조선 외무성 당국자들은 조미평화협정을 명시함으로써 조선과 미국이 평화협정을 체결할 당사자이라는 점, 그리고 다자협상이 아니라 양자협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한 것이다.

둘째, 만일 조선과 미국이 평화협정을 위한 양자협상을 시작하더라도, 미국은 협상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끌어가려고 지연술책을 쓰면서 시간이나 질질 끌게 될 것으로 예견된다. 지난 20년 동안 중단과 재개를 반복해왔던 조미핵협상경험이 그런 예상을 충분히 뒷받침해준다. 조선의 전략구상에 따르면,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장기적인 협상으로는 언제 가도 한반도평화실현과정을 시작할 수 없으므로, 조미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으로 한반도평화실현과정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조미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으로 한반도평화실현과정을 시작하자는 조선의 전략구상이 사실상 미국에게 정치적 굴복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서 조선 외무성 당국자들이 미국에게 조미평화협정과 한반도평화프로쎄쓰를 요구한 것이 사실상 미국의 정치적 굴복을 요구한 것임을 디트라니 교장이 모를 리 없다. 그래서 그는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서 협상재개의 돌파구가 열리지 못했음을 인정하였다.
▲ <사진 5> 이 사진은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 참석한 미국측 인사들 가운데 한 사람인 리언 씨걸 미국 사회과학원 동북아안보협력사업 국장이 호텔 복도에서 취재기자와 마주친 장면이다. 그는 조선측 참석자들이 조미평화협정과 한반도평화프로쎄쓰를 미국측에 요구했다고 말했다. 이것은 핵시험 및 장거리미사일발사 일시정지와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을 동시에 실행함으로써 조선과 미국이 상호신뢰구축을 시작하자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견해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조선측 참석자들은 언제 다시 깨질지 모르는 상호신뢰구축을 시작하자는 것이 아니라, 조미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공고하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평화프로쎄쓰를 시작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위에 인용한 <블룸벅통신> 보도기사에서 디트라니 교장은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서 조선 외무성 당국자들이 비록 추가 핵시험이나 추가 미사일발사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과거 경험을 보면, 핵시험과 미사일발사를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고 하면서, 조선 외무성 당국자들이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조선은 “장기적으로(in the longer term)” 미국과의 탐색회담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것은 조선이 콸라룸퍼 비공식대화를 통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제안을 받고서도 그것을 일축하고 미국이 정치적으로 굴복할 때까지 기존 전략핵압박을 계속할 것으로 예견된다는 뜻이다. 

나는 지난 10월 17일 <자주시보>에 발표한 글 ‘밀사의 청와대 비밀회동과 조선의 전략핵압박’에서 “조선의 전략핵압박은 미국의 억지와 전횡으로 중단된 핵협상으로 미국을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조선에게 정치적으로 굴복하여 평화협정을 간청하든지 아니면 조선의 강력한 핵압박으로 벼랑끝에 떠밀린 미국이 벼랑에서 떨어져 파멸하든지 하는 최후의 양자택일로 미국을 끌어가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는데, 그런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4. 비공식대화 사흘 뒤에 나타난 세 번째 특이징후

특이징후는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콸라룸퍼 비공식대화가 끝난 날로부터 사흘이 지난 2016년 10월 25일 세 번째 특이징후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이 전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날 뉴욕 맨해튼에 있는 대외관계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에서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이 출연한 대화모임이 진행되었다. 95년 역사를 가진 대외관계협의회는 미국의 대외정책 및 국제관계부문에서 최고 권위와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비정부단체다. 그 날의 대화모임은 참석자들이 질문하고,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이 답변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주고받은 대화의 주제는 여러 가지였는데, 그 가운데 미국의 대조선정책에 관한 질의응답이 눈길을 끌었다. 한국 언론매체들이 아전인수로 사실을 왜곡하는 사례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그 질의응답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좀 길지만 해당부분을 원문 그대로 번역, 인용한다.
▲ <사진 6> 이 사진은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대외관계협의회 건물을 촬영한 것이다. 95년 역사를 가진 대외관계협의회는 미국의 대외정책, 국제관계부문에서 최고 권위와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비정부단체다. 그런데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조섭 디트라니 교장을 백악관 파견원으로 보낸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이 콸라룸퍼 비공식대화가 끝난 날로부터 사흘이 지난 2016년 10월 25일 대외관계협의회 대화모임에 연사로 출연하여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해 발언하였는데, 그 가운데 대조선정책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클래퍼 - “북조선을 비핵화하려는 생각은 헛일(lost cause)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비핵화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핵무기를 뜻함-옮긴이)은 그들의 생존수단이다. 내가 북조선을 방문하였을 때 세계가 어떻게 자기들의 유리한 위치에서 북조선을 바라보는지 알 수 있었다. 북조선은 포위공격을 받고 있으며, 공포를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핵능력을 포기한다는 생각은, 그것이 무엇이던 간에, 고려할 가치가 없는 생각(nonstarter)이다. 내 생각에는...”
질문자 - “핵프로그램을 중지시키는 것(suspending)은...”
클래퍼 - “무슨 말인지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질문자 - “중지를 말했다.”
클래퍼 - “아마도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선책은 글쎄 일종의 마개씌우기이다. (Well, the best we could probably hope for is some sort of a cap.) 하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요구한다고 해서 그들이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참석자들 웃음) 어떤 중대한 유인책들(significant inducements)이 있어야 할 것이다.” (줄임)
사회자 - “당신의 외교경험에 따르면, 마개를 씌우거나 중지시키는 이란식의 협상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데...”
클래퍼 -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회자 - “그러면 스턱스넷 파괴활동(Stuxnet sabotage) 같은 것은 어떤가?” (스턱스넷 파괴활동이란 지난날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시설 전산망에 스턱스넷 바이러스를 침투시켜 그 핵시설을 일시 중지시켰던 사례를 말한다. - 옮긴이)
클래퍼 - “뭐라구?”
사회자 - “그들의 (핵)시설에 대한 파괴활동말이다.”
클래퍼 - “글쎄,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참석자들 웃음)

▲ <사진 7> 이 사진은 대외관계협의회 대화모임에 연사로 참석한 클래퍼 미국 국가정보국장이 질의응답을 진행하던 중에 생각에 잠겨있는 장면이다. 그 자리에서 그는 미국이 조선에게 핵포기를 요구하는 것도 비현실적이고, 핵시험 중지를 요구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므로, 마개를 씌우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책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핵시험 중지보다 한 급 낮은 핵시험 유예를 가장 현실적인 방책으로 인정한 발언이다. 이것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대조선관계에서 드러내보인 세번째 특이징후였는데, 그의 그런 발언내용이 언론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워싱턴 디씨와 서울에서 큰 파문이 일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비록 참석자들의 웃음을 자아내며 즉흥적으로 답변한 것이지만,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의 답변은 초점을 잃지 않았다. 위에 서술한 그의 답변내용을 요약하면, 미국이 조선에게 핵포기를 요구하는 것도 비현실적이고, 핵시험 중지를 요구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므로, 마개를 씌우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책이라는 것이다.

마개를 씌운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핵시험 중지(suspension)보다 한 급 낮은 핵시험 유예(moratorium)를 뜻하는 말이다. 유예라는 말은 어느 때이건 재개할 수 있도록 일시적으로 중지하는 행위를 뜻한다. 한국 언론매체들은 마개를 씌운다는 말을 핵능력 제한이라는 뜻으로 해석했지만,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의 답변에 담긴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그 말은 핵시험 유예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2016년 10월 21일과 22일에 진행된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조선이 핵시험과 미사일발사를 일시정지하면 그에 상응하여 평화협정체결을 위한 평화회담을 시작할 수 있다고 제안하였고, 그로부터 사흘 뒤에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은 핵시험 유예가 미국의 최선책이라고 말하였다. 일시정지라는 말과 유예라는 말은 사실상 동의어이므로,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제안을 사흘 뒤에 재확인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답변은 미국의 대조선정책이 핵포기에서 핵시험 유예로 크게 후퇴하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말해준다.    

클리퍼 국가정보국장의 답변이 언론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워싱턴 디씨와 서울에서 큰 파문이 일었다. 조선의 핵포기를 끊임없이 주장해온 미국의 대조선정책을 뒤엎는 충격적인 발언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워싱턴 디씨에서는 미국 국무부 대변인이 직접 나서서 “미국의 목표는 아직도 북조선의 핵무기를 검증가능하게 포기시키는 것”이라고 하면서 파문을 가라앉히려는 수습발언을 꺼내놓았고, 서울에서는 외교부 당국자가 “한미는 물론 국제사회의 북핵 불용의지는 변함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런데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의 답변과 관련하여 조슈아 어니스트(Joshua R. H. Earnest) 백악관 대변인은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는 2016년 10월 27일 백악관 출입기자단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추진해오는 전략이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 중에 북조선의 핵프로그램을 포기시킬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클래퍼 국장이 언급한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오랜 기간 동안 우리는 국제사회와 함께 북조선 정권이 여러 유엔안보리 결의들을 포함하여 국제적 의무들을 이행하도록 추가압박을 계속 가해왔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온 전략인데, 만일 차기 대통령이 그 정책의 변경을 택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문제로 될 것이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이 꺼내놓은 위의 발언과 비교하면, 백악관 대변인이 꺼내놓은 위의 발언은 발언각도가 전혀 다르다. 백악관 대변인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은밀히 논의되는 대조선정책의 변화흐름을 알고 있으므로, 국무부 대변인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말하였던 것이다.

백악관 대변인은 위의 인용문에서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의 답변이 그의 개인견해인 것처럼 여겼으나, 그런 것은 아니다.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의 답변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은밀히 논의되는 대조선정책의 변화흐름을 반영한 것이지 그의 개인견해가 아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핵포기를 요구해온 오바마 행정부의 기존 대조선정책이 차기 행정부에서 뒤집어질 수 있음을 예견하였다는 점이다. 그런 예견은 미국의 차기 행정부가 새로운 대조선정책을 추진할 수 있음을 언급한 것이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임기가 거의 끝나가는 오바마 행정부가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서 조선 외무성 당국자들을 만나 탐색대화를 진행한 목적은, 새로운 대조선정책의 방침을 정하여 차기 행정부에게 넘겨주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사진 8> 이 사진은 2000년 10월 12일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조명록 차수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백악관을 방문하여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친서를 전하고 회담하는 장면이다. 조명록 차수는 미국 방문 중에 입고 있었던 양복을 군복으로 갈아입고 백악관에 들어가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군복을 입고 백악관에 들어가 미국 대통령을 만난 외국인 사절이었는데, 조선이 '선군정치'로 미국을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다. 조명록-클린턴 회담 직후 평양과 워싱턴 디씨에서는 조미공동코뮈니께가 동시에 발표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이 아직 전략핵타격수단을 완비하지 못했던 16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오늘 오바마 행정부는 질적으로 변화된 역량관계를 바로보지 못하고, 조미공동코뮈니께에 나온 낡은 신뢰구축방안을 다시 꺼내어 '재탕'하려는 조짐을 보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러나 조선이 핵시험과 장거리미사일발사를 유예하면, 그에 상응하여 미국은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평화회담을 시작할 수 있다는 정책방침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2000년 10월 12일 워싱턴 디씨에서 채택, 발표된 조미공동코뮈니께에서 그런 정책방침을 찾아볼 수 있다. 그 문서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은 새로운 관계구축을 위한 또 하나의 노력으로 미사일문제와 관련한 회담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모든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 대하여 미국측에 통보하였다”고 명시되었는데, 이것은 장거리미사일발사를 유예하는 조치를 뜻한다. 2000년 당시에는 조선이 핵시험을 하기 이전이었으므로, 핵시험 유예는 언급되지 않고 장거리미사일발사 유예만 언급되었다. 

또한 그 문서에는 “쌍방은 조선반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1953년의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체계로 바꾸어 조선전쟁을 공식 종식시키는 데서 4자회담 등 여러 가지 방도들이 있다는 데 대하여 견해를 같이하였다”고 명시되었다. 이것은 조선이 장거리미사일발사를 유예하면, 그에 상응하여 미국은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평화회담을 시작할 것임을 공약한 것이다.

위에 열거한 문서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임기가 거의 끝나가는 오바마 행정부가 ‘전략적 인내’ 정책이 완전히 파산되자 하는 수 없이 16년 전 클린턴 행정부가 추진하려고 했던 장거리미사일발사 유예와 한반도 평화회담 개최를 맞바꾸는 정책방침을 다시 꺼내놓으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클린턴 행정부가 16년 전에 꺼내놓았던 그 정책방침이 실패로 끝난 것이 언제인데, 오바마 행정부는 아직도 그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16년 전 조선에게는 화성-13, 화성-14 같은 대륙간탄도미사일도 없었고, 핵시험도 하지 않았으며, 수소탄시험은 생각하지 못했고,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북극성’도 없었으므로, 미국에게 전략핵압박이 아니라 전술핵압박밖에 가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조선은 위에 열거한 각종 전략타격수단들을 두루 갖춘 ‘동방의 핵강국’으로 등장하였다. 이처럼 역량관계에서 질적 변화가 일어났으므로 2016년 조미관계와 2000년 조미관계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16년 전 조선에게 제의하였다가 실패하여 폐기된 낡은 정책방침을 꺼내어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제의하려는 미국의 행동이 조선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만일 미국의 차기 행정부가 새로운 대조선정책을 수립한다면, 그들은 무슨 유예조건 같은 것을 달지 말고 조선에게 조미평화협정 체결을 직접 제의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만일 미국이 그것을 끝내 거부한다면, 조선의 강력한 전략핵압박을 받아 벼랑끝에 몰리다가 어느 날 벼랑에서 뚝 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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