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8/27

전투기매매 촌극이 막을 내릴 무렵

[한호석의 개벽예감](76)
자주민보 2013년 08월 25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F-15SE, 시험 기종 외엔 아직 실전배치 되지 않은 기종이어서 보잉에서 만든 소개 동영상도 대부분 컴퓨터 그래픽 영상이다.     © 자주민보


특정전투기에 집착하는 방위사업청


남측 정부당국이 추진해오는 차기전투기도입사업은 외국산 전투기 60대를 8조3,000억 원(74억 달러)를 주고 구입하는 대형사업이다. 방위사업청은 그 동안 차기전투기를 선정하기 위한 입찰을 진행해왔는데, 2013년 8월 13일과 14일에 진행한 입찰은 총사업비 74억 달러 이내로 입찰가를 써낸 입찰기업이 하나도 없어서 유찰되었다.

그런데 2013년 8월 16일에 진행한 입찰에서는 방위사업청이 요구한 입찰가를 써낸 입찰기업이 드디어 나타났다. 그 날 방위사업청 백윤형 대변인은 “16일 차기전투기구입사업 3개 후보기종에 대한 가격입찰을 마감한 결과, 총사업비 8조3,000억 원 이내로 진입한 기종이 있어 이후 기종선정을 위한 다음절차로 진행된다”고 밝혔다. 그는 총사업비 74억 달러 이내로 진입한 기종이 어느 기종인지 밝히지 않았지만, 당시 미국과 남측의 언론매체들은 이구동성으로 미국 보잉의 전투기 F-15SE와 유럽항공방위우주산업(EADS)의 전투기 유로파이터 타이푼(Eurofighter Typhoon)이 총사업비 이내로 진입한 양대 기종이라고 일제히 지적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2013년 9월 중순에 열릴 방위사업추진위원회에서 F-15SE와 유로파이터 타이푼 가운데 어느 하나가 최종적으로 선택될 것이라고 예상하였지만, 그런 예상을 뒤집어버린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2013년 8월 18일 방위사업청은 유럽항공방위우주산업이 조건을 임의로 축소, 완화하여 입찰가를 써냈다고 지적하면서 그처럼 합의조건을 일방적으로 변경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이것은 남측 정부당국이 기종선정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유로파이터 타이푼을 사실상 배제하였음을 뜻한다. 같은 날 남측 언론매체들은 방위사업청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한 보도기사에서 보잉의 전투기 F-15SE가 2013년 9월 중순에 열릴 방위사업추진위원회에서 차기전투기 단독후보로서 최종평가를 받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아래에 서술한 두 가지 정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유럽항공방위우주산업은 과연 막판에 합의조건을 일방적으로 변경하여 탈락을 자초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방위사업청의 주장에 따르면, 유럽항공방위우주산업은 2명이 탑승하는 복좌기 판매대수를 15대에서 6대로 줄이는 등 조건을 임의로 변경하여 입찰가격을 맞추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2013년 8월 19일 유럽항공방위우주산업 해외사업본부장은 자기들이 방위사업청과의 계약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선택방안을 방위사업청에 제시한 것이므로, 계약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해명하면서, 방위사업청이 8월 19일과 8월 20일에 자기들과 다시 협의하자고 해놓고 갑자기 8월 18일에 ‘계약위반설’을 들고 나왔다고 불만을 표했다.

그런 해명과 불평에 대해 방위사업청 관계자는 한 기업으로부터 2개의 제안서를 받아 검토할 수 없으므로, 유럽항공방위우주산업이 이전에 제시한 조건을 입찰가격에 맞춰 변경한 최종제안서는 무효이며 그 이전에 제출한 제안서만 인정된다고 하면서, 그 이전에 제출한 제안서에 나온 입찰가격은 총사업비를 초과한 것이므로 결국 입찰가격초과로 사실상 탈락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방위사업청의 그런 주장에는 형평성의 문제가 있다. 보잉도 입찰과정에서 F-15SE의 꼬리날개 설계를 변경하는 방안을 나중에 제출하였는데, 방위사업청이 그런 보잉의 변경은 관대하게 눈감아주고, 유럽항공방위우주산업의 변경에 대해서만 엄격한 기준을 들이댄 것이다. 방위사업청의 그런 행동은 보잉에게 치우친 편파적 행동으로 보인다.

둘째, 2013년 4월 25일과 29일 국군기무사령부 수사관들이 서울에 있는 어느 무기중개업체 사무실을 급습하여 압수수색을 벌였다. 그 무기중개업체가 방위사업청의 차기전투기도입사업에 관련된 비밀문서를 빼냈다는 정황을 포착한 기무사가 두 차례에 걸쳐 압수수색을 진행한 것이다. <세계일보> 2013년 4월 30일 보도에 따르면, 무기중개업체가 빼낸 군사비밀문서들 가운데는 2012년에 한국공군평가단이 차기전투기 후보기종들에 대한 운용적합성을 평가한 내용과 시험평가점수가 수록된 문서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무기중개업체는 보잉이 F-15K를 남측에 판매하였던 2002년에 보잉의 무기중개 업무를 맡아보았던 기업체다.

이런 정황을 보면, 군사비밀문서를 빼낸 무기중개업체와 보잉의 내밀한 관계를 당연히 수사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수사는커녕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다. 만일 이번에 기무사가 군사기밀유출사건을 수사하였더라면, 보잉의 F-15SE는 후보기종에서 탈락하였을 것이다.

2002년에 있었던 차기전투기 입찰과정 중에 기무사는 당시 전투기 라팔(Rafale)을 유력한 후보기종으로 내놓았던 프랑스의 전투기생산기업 다쏘(Dassault)가 서울에서 진행한 라팔 홍보행사를 수사하였고, 그 수사가 벌어지자 결국 라팔은 후보기종에서 탈락하였고, 라팔에게 밀렸던 보잉의 F-15K가 후보기종으로 선정되는 이변이 일어났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홍보행사가 아니라 군사기밀유출이라는 더 엄청난 사건이 터졌는데도, 기무사가 흐지부지 넘어가는 이변 중의 이변이 일어났다. 기무사가 수사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방위사업청이 검찰에 고소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들도 잠잠하였다.

위에 서술한 두 가지 정보는 차기전투기 도입사업을 책임진 방위사업청이 보잉의 F-15SE에 대해 얼마나 집착하는지를 말해준다.

 

후보기종선택에서 드러난 방위사업청의 이상한 행동
 
전투기성능을 비교하면 최신예 전투기 F-35의 성능은 F-15SE의 성능이나 유로파이터 타이푼의 성능보다 더 우수하다. <방위소식(Defense News)> 2010년 7월 7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공군은 예산부족 때문에 F-15SE 구입계획을 중단하였지만 현재 운용 중인 F-15와 F-16이 수명주기를 넘겨 퇴역한 이후 F-35를 실전배치할 때까지 중간공백기를 메워줄 기종으로 F-15SE를 배치하려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다. 이것은 성능 면에서 F-15SE가 F-35에 비해 한참 뒤떨어진다는 점을 말해준다.

보잉은 이전에 남측에 판매한 F-15K를 개량하여 F-15SE를 만들려는 것이므로, 두 전투기의 부품은 85%가 서로 똑같다. 성능을 개량하였다고 하지만, F-15SE가 차세대전투기가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일본은 F-15SE를 차기전투기 선정대상에 아예 올려놓지도 않았다. 일본은 F-35 구입결정을 2011년 12월 20일에 내렸는데, 그들의 선정대상에는 F-35 이외에 FA-18E/F와 유로파이터 타이푼이 올려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측 정부당국은 F-15SE에 집착하면서 F-15SE의 가격이 총사업비에 적합하다고 말하였다. 그에 따라 세간에는 F-35가 F-15SE보다 훨씬 더 비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하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항공주간(Aviation Week)> 2013년 7월 30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와 록히드마틴이 최근 합의한 해외수출용 F-35의 대당 가격은 F-35A의 경우 1억910만∼1억1,310만 달러 선에서 결정될 것이고, F-35B의 경우 1억3,850만∼1억4,280만 달러 선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 일본이 구입하는 F-35 대당 가격은 1억3,400만 달러인데, 그 가격에는 전투기기체를 구입하는 비용만이 아니라 각종 부대비용들도 포함된 것이다.

주목하는 것은, F-35의 가격이 고정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공군보도국(Air Force News Agency) 2013년 6월 20일 자료에 따르면, 2013년 6월 19일 연방 상원 예산배정위원회 국방소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한 미국 국방부의 조달, 기술, 병참담당 부장관 프랭크 켄달(Frank Kendall)은 개발 중인 F-35의 설계를 변경하고 그에 따라 가격도 조정해야 한다고 발언하였다. 이것은 F-35의 가격이 떨어지게 될 것임을 암시한 발언이다.

미국 법에 따르면, 미국산 전투기는 전투기생산기업이 남측에 직접 판매할 수 없고 미국 정부가 남측 정부에게 판매하는데, 이것을 대외군사판매(FMS)라 한다. 대외군사판매를 통해 전투기를 구입해온 남측 정부당국의 과거경험을 보면, 원래 제시된 가격보다 더 싸게 구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CBS노컷뉴스> 2013년 6월 17일 보도에 따르면, F-35 대남판촉활동을 담당한 록히드마틴 관계자들은, 전투기생산량이 늘어날수록 가격도 떨어지게 되므로 F-35는 대당 가격이 8,500만 달러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물론 그들이 말한 8,500만 달러는 F-35기체를 구입하는 데 드는 비용이므로, 기타 부대비용까지 합하면 그보다 더 늘어날 것이다.

위에 서술한 몇 가지 정보를 종합하면, F-35 해외수출가격은 대당 1억1,000만 달러 선에서 책정될 것으로 예견된다.

그러면 F-35보다 싸다는 소문이 난 F-15SE의 가격은 얼마일까? <내일신문> 2012년 1월 30일 보도에 따르면, 한국국방연구원은 연구보고서에서 2010년 당시 1달러를 1,050원으로 환산할 때 F-35 가격은 1,040억 원(9,904만 달러), F-15SE 가격은 1,100억 원(1억476만 달러)이고, 전투기기체 60대의 가격만 따져보면 F-35 가격은 66억200만 달러, F-15SE 가격은 79억5,400만 달러가 될 것이라고 추산하였다. 이처럼 한국국방연구원의 연구보고서는 F-35가 F-15SE보다 더 비쌀 것이라는 소문을 뒤집고 되레 F-15SE가 더 비쌀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제인정보집단(Jane's Information Group)>은 2009년 3월 18일에 발표한 자료에서 F-15SE 가격을 대당 1억 달러로 추산한 바 있다.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에 판매하는 F-15SE 가격은 각종 부대비용까지 포함하여 1억3,670만 달러다.

그런데 F-15SE 구입자는 전 세계에서 남측과 사우디아라비아밖에 없으므로, 보잉이 남측과 사우디아라비아에 판매하려고 생산하는 F-15SE는 총215대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남측이 F-15SE를 구입한 뒤 40년 동안 그 전투기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데 드는 차후비용은 끝없이 오르게 될 것이다. 전투기의 경우, 구입비 대 유지보수비는 1:3의 비율로 계산되므로, 유지보수비가 구입비보다 3배나 더 많다. 215대밖에 만들지 않는 소량생산기종인 F-15SE의 유지보수비에 비해 3,000대나 만드는 대량생산산기종인 F-35의 유지보수비가 훨씬 더 적을 것이다.

위에 서술한 정보를 종합하면, 남측 정부당국은 최신예 전투기 F-35를 1억1,000만 달러 선에 구입할 수 있는데도, 그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개량형 전투기 F-15SE를 더 비싸게 주고 구입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최신예 전투기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개량형 전투기를 되레 더 비싼 값을 주고 구입하다니, 그런 바보짓이 또 어디에 있을까.

차기전투기구입사업에서 방위사업청이 보여준 F-15SE에 대한 비이성적인 집착은 아래의 사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방위소식> 2013년 6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록히드마틴은 남측이 F-35를 구입하는 경우, 남측에게 군사통신위성을 개발하여 발사해주고, 공군조종사를 위한 실전급 모의훈련체계를 제공하겠다는 특혜조건을 제시하였다. 록히드마틴의 국제통신부문 책임자 에릭 쉬네이블(Eric Schnaible)은 록히드마틴이 남측에 제시한 특혜는 “고도의 기술(high technology)”을 남측 군부에게 이전해주는 “전략적 동반사업(strategic partnership program)”이라고 자평하였다.

<아전스 프랑스 프레스(AFP)> 2013년 7월 19일 보도에 따르면, 유럽항공방위우주산업은 남측이 유로파이터 타이푼을 구입하는 경우, 남측의 F-16급 전투기개발사업(KFX사업)에 20억 달러를 투자하고, 판매하려는 유로파이터 타이푼 60대 가운데 53대를 남측에서 면허생산하게 해주겠다는 파격적인 특혜조건을 제시하였다. 외국산 전투기 면허생산은 전투기생산기술을 상당부분 전수받게 된다는 뜻이므로, 유럽항공방위우주산업의 면허생산제안은 그야말로 특혜 중의 특혜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보잉은 한국항공우주산업이 생산하는 전투기부품을 구입해주고, 공군조종사를 위한 실전급 모의훈련체계를 제공하고, 2,000만 달러를 투자하여 경상북도 영천에 항공전자부품 유지보수개조센터를 건설해주겠다는 특혜조건을 제시하였다. 한국항공우주산업이 생산하는 12억 달러의 전투기부품이란 F-15K와 F-15SE에 들어가는 부품이다.

위에 열거한 특혜조건들을 비교해보면, 남측이 F-15SE를 구입하는 것보다 F-35나 유로파이터 타이푼을 구입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방위사업청은 F-15SE에만 비이성적으로 집착하였다. 그런 비이성적인 집착에는 반드시 어떤 원인이 있는 법인데, 언론에 드러나지 않은 원인을 파헤치면 아래와 같은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다.

 

다급해진 보잉의 F-15SE 해외판촉활동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제항공기전시회인 파리항공전시회(Paris Air Show)가 2013년 6월 17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되었는데, 그 전시회에서 미국산 전투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미국산 전투기가 전시회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국제무기시장의 지배자로 자처하는 미국이 국제무기시장 판매품목 가운데 제1순위에 오르는 최고가 품목인 전투기를 국제항공기전시회에 한 대도 출품하지 못했다니, 선뜻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일이다.

국제무기시장의 지배자로 자처하는 미국은 올해에 왜 국제항공기전시회에 자국산 전투기를 출품하지 못하였을까? 그 까닭은 미국의 전투기생산기업들이 연방정부예산자동삭감(sequestration)의 충격파에 밀려 신형전투기를 개발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올해 파리항공전시회의 전투기부문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상을 펼쳐 보인 것은, 국제전투기시장에서 미국산 전투기 F-35와 경쟁해온 러시아산 전투기 수호이(SU)-35S였다.

미국은 ‘제국의 체면’을 지켜야하기에 그냥 쉬쉬하고 넘어갔지만, 연방정부예산자동삭감으로 손발이 묶인 미국의 전투기생산기업들은 국제항공기전시회에 신형전투기를 출품하지 못할 만큼 최악의 상황으로 밀려간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라는 표현은 과장어법이 아니다. 예컨대, 미국의회연구소(CRS)가 2013년 5월 1일에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연방정부예산자동삭감의 충격파를 입은 미국공군은 수명주기가 끝나가는 B-52, B-1, B-2 같은 전략폭격기들을 대체할 신형전략폭격기를 개발할 수 없게 되자, 하는 수 없이 B-52와 B-1의 작전수명을 2040년까지 연장하고, B-2의 작전수명을 2058년까지 연장하는 궁여지책에 의존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공군보도국 2013년 8월 15일 자료에 따르면, 연방정부예산자동삭감의 충격파로 미국공군 우주사령부의 우주정찰작전이 2013년 9월 30일부터 무기한 중단된다. 우주정찰작전이란 지구궤도를 도는 세계 각국 인공위성들과 지구궤도에 출현하는 각종 비행물체를 발견하고 감시하는 군사활동이다. 또한 <국제비행(Flight International)> 2013년 7월 31일 보도에 따르면, 연방정부예산자동삭감의 충격파로 미국공군은 전술비행대대 5개와 C-130수송기비행대 1개를 해체해야 할 지경이라고 한다. 이런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

이처럼 연방정부예산자동삭감이라는 치명적인 ‘돈맥경화증’에 걸린 미국의 내상(內傷)은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심하다. <방위담화(Defense Talk> 2012년 10월 3일 보도에 따르면, 2012년부터 10년 동안 국제전투기시장은 전투기생산국들의 재정적자와 연속적인 가격변동 때문에 거래부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그 동안 국제전투기시장을 쥐락펴락해온 미국의 양대 전투기생산기업들인 보잉과 록히드마틴은 연방정부예산자동삭감의 충격파와 국제전투기시장의 거래부진을 피해갈 수 없었다. 지난 몇 해 동안 전투기생산부문의 동향을 보면, 록히드마틴보다 보잉이 더 심각한 위기상황에 빠져들었다. 왜냐하면, 록히드마틴은 ‘세계 최강 전투기’라는 F-35를 개발하는 사업에서 탈출구를 찾고 있지만, 보잉은 F-35와 경쟁할 신형전투기를 개발하는 사업을 아직 시작하지도 못해 탈출구마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시장에서는 경쟁에서 뒤지면 시장에서 퇴출당하는 수밖에 없다. 다급해진 보잉에게는 기존 F-15를 개량하여 판매하는 비상자구책을 취하는 것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2009년 6월 3일 보잉의 군용기생산부 경영자인 크리스 채드윅(Chris Chadwick)이 언론대담을 통해 F-15개량사업에 동참할 다른 나라 전투기생산기업들을 찾고 있다고 밝힌 것은 보잉의 다급한 내부사정을 배경으로 한 발언이었다.

그런데 연방정부예산자동삭감의 충격파로 전투기구입예산을 마련하지 못한 미국공군은 F-15SE를 구입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발표하였다. 전투기 최대구입자인 미국공군이 F-15SE를 구입해주리라고 믿었던 보잉은 미국공군이 그 전투기를 구입하지 않겠다고 발표하자 막다른 골목에 몰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궁지에 몰린 보잉에게는 F-15SE를 다른 나라에 수출하는 해외판로를 뚫는 것밖에 살아남을 길이 없게 되었다. 2009년 6월 14일 파리항공전시회에 나타난 보잉의 통합방위체계(Integrated Defense Systems)최고경영자 짐 앨버그(Jim Albaugh)는 해외판매를 위해 F-15SE를 개발하겠다고 공식선언하였다.

보잉의 시각에서 보면, F-15SE 해외판로는 이전에 F-15를 수입하여 운용해오는 대상들로 좁혀지는데, 남측, 일본, 이스라엘, 싱가포르, 사우디아라비아가 그런 대상들이다. <국제비행> 2009년 6월 4일 보도에 따르면, 보잉은 기존 F-15를 운용하고 있는 남측, 일본,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를 대상으로 F-15SE 판매전략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이스라엘, 싱가포르가 구입하는 차기전투기는 보잉의 F-15SE가 아니라 록히드마틴의 F-35다. 영국, 호주, 캐나다도 F-35를 도입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되자 보잉의 F-15SE 해외판로는 남측과 사우디아라비아로 대폭 축소되고 말았다. 보잉이 F-15SE를 남측과 사우디아라비아에게 판매하지 못하는 경우 보잉의 전투기생산설비는 도태되어 고철로 팔릴 폐쇄위기에 내몰릴 판이었으므로, 보잉은 회사의 명운을 걸고 F-15SE 해외판촉활동에 달라붙었다. 남측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직접 조준한 보잉의 F-15SE 해외판촉활동이 2009년부터 공세적으로 전개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보잉은 2010년 초에 미국정부에게 F-15SE 해외수출허가를 신청하였고, 미국정부는 2010년 7월 8일에 F-15SE 해외수출허가를 내주었는데, 보잉은 사정이 얼마나 다급했던지 해외수출허가를 받기도 전에 해외판촉활동부터 벌여놓았다.

 

차기전투기 입찰경쟁은 촌극이다

2012년 9월 3일 경상북도도청 제1회의실에서 김관용 도지사, 김영석 영천시장, 조셉 송 보잉 아태지역사업개발부사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양해각서(Memorandum of Understanding)가 체결되었다. 양해각서에 따르면, 보잉은 F-15K항공전자부품을 공급할 항공전자수리정비개조센터를 도내 경제자유구역인 경상북도 영천에 건설한다는 것이다. 양해각서가 체결된 때로부터 약 8개월이 지난 2013년 5월 6일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장관과 제임스 맥너니(W. James McNerney) 보잉최고경영자가 영천 항공전자수리정비개조센터 설립투자서에 서명하였다. 보잉은 2,000만 달러를 투자하여 항공전자수리정비개조센터를 설립하려는 것인데, 2013년 10월에 착공하여 1년 뒤에 완공될 예정이다.

보잉이 한국공군의 차기전투기입찰을 눈앞에 둔 시기에 항공전자수리정비개조센터를 설립해주는 것은, 차기전투기입찰경쟁에서 보잉의 F-15SE 대남판촉활동이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되었는지를 말해주는 단적인 사례다. 보잉의 F-15SE 대남판촉활동을 추적하면 아래의 사실이 드러난다.

2010년 6월 25일 <국제비행>은 ‘F-15SE를 남측에 수출하려는 보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는데, 그 기사에서 보잉의 F-15SE개발책임자 브래드 존스(Brad Jones)는 남측을 “서열 제1순위(the first in queue)”라고 지칭하였다. 보잉의 F-15SE 대남판촉활동은 앞으로 6년 뒤 전투기 약 100대가 부족하게 될 한국공군의 다급한 사정을 뒤흔들며 그야말로 공세적으로 전개되었다. 2011년 4월 7일 공군본부 전력소요처장 송택환 대령이 토론회에서 지적한 바에 따르면, 한국공군은 전투기 400대를 유지해야 하는데, 2019년에는 전투기 약 100대가 부족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방위소식> 2010년 7월 7일 보도에 따르면, 보잉의 F-15SE개발책임자 브래드 존스와 대변인 대미언 밀스(Damien Mills)는 보잉이 남측을 F-15SE 판매대상으로 일찌감치 점찍어놓고 2009년부터 남측 정부당국과 판매협의를 진행해왔으며, F-15SE 관련정보를 보내달라는 남측 정부당국의 요청을 2009년 말에 받은 바 있다고 밝혔다. 2009년 3월에 F-15SE의 실물축소모형을 처음 세상에 공개한 보잉은 시제기도 아닌 실물축소모형을 앞에 놓고 남측 정부당국과 판매를 협의한 것이다.

<항공주간> 2009년 6월 12일 보도에 따르면, 보잉의 F-15SE개발책임자 브래드 존스는 2010년 중반부터 2011년 사이 어느 시점에 남측 정부당국으로부터 F-15SE를 구입하겠다는 요청을 받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F-15SE 대남판촉활동에서 자신만만한 태도를 드러낸 발언이다. 그가 그처럼 자신만만한 까닭은, 미국공군이 보잉의 F-15SE 대남판촉활동에 가세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2010년 9월 12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공군 관계자들이 9월 16일 충청남도 계룡대에 있는 한국군 3군통합기지에 가서 한국공군 관계자들에게 F-15SE의 성능을 해설해주고, 9월 17일에는 방위사업청에 가서 같은 내용을 해설하게 된다는 것이다. 보잉은 F-15SE의 시험비행기로 제작한 F-15E1을 2010년 7월에 처음으로 하늘에 띄웠는데, 아직 시제기도 만들지 못한 그들은 시험비행기의 첫 비행을 마치자마자 한국공군과 방위사업청을 찾아가 실물로 존재하지도 않는 F-15SE의 성능을 설명하는 촌극을 공연한 것이다.

보잉과 미국공군이 남측에서 ‘합동작전’으로 전개한 공세적인 대남판촉활동의 결과는 즉각 나타났다. 2010년 11월 3일 보잉이 발표한 보도자료에 기술된 것처럼, 보잉과 한국항공우주산업이 F-15SE의 내부무기탑재실(internal weapon carriage)을 공동으로 “설계-개발-제작하기 위한 합의각서(Memorandum of Agreement)”를 2010년 11월 3일에 체결한 것이다. 보잉이 생산한 AH-64D아파치(Apache) 공격헬기와 피스아이(Peace Eye) 공중조기경보통제기를 구입하는 사업에 한국항공우주산업이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것도 한국항공우주산업이 보잉의 F-15SE 대남판촉활동에 그처럼 쉽게 끌려들어간 원인들 가운데 하나다. 보잉과 한국항공우주산업이 F-15개량사업에서 핵심과제로 제기된 내부무기탑재실을 공동으로 제작하는 각서를 체결한 것은, 방위사업청이 추진해오던 차기전투기구입사업의 향방이 이미 2010년 11월 3일에 F-15SE를 구입하는 쪽으로 정리되었음을 말해준다.

<공군기술(Air Force Technology)> 2013년 5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방위안보협력국(Defense Security Cooperation Agency)은 총16억1,600만 달러에 이르는 각종 공대공미사일, 각종 고성능폭탄, 각종 훈련탄 및 관련 장비를 남측에 판매하는 수출허가신청을 연방의회에 제출하였는데, 이 무기들과 장비들은 모두 F-15SE에 탑재되거나 설치되는 것들이다. 만일 남측 정부당국의 F-15SE 구입여부가 사실상 정리되지 않았다면, 미국방위안보협력국이 그 전투기에 탑재 또는 설치될 각종 무기와 장비들을 그처럼 남측에 수출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위에 열거한 정보를 종합하면, 한국항공우주산업과 보잉을 각각 앞에 내세운 남측의 방위사업청과 미국의 방위안보협력국은 F-15SE를 팔고 사기로 사실상 합의해놓고서도 그 동안 차기전투기 입찰경쟁을 벌이는 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차기전투기 수입사업의 내막이 그러하였으니, 록히드마틴과 유럽항공우주방위산업이 제아무리 좋은 조건을 각각 제시해도 남측 정부당국이 F-35나 유로파이터 타이푼을 차기전투기로 선택할 리 만무하다. 입찰경쟁은 연출가의 극본에 따라 펼쳐진 촌극이었던 것이다.

▲ f-15se의 장점으로 내세운 점이 레이더를 피하기 위해 무기를 내부에 숨긴다는 것인데 그것 때문에 연료통이 작아져 항속거리가 1/3로 줄었다. 일본은 커녕 대구 기지에서 독도도 왕복하기 어렵다고 한다.     © 자주민보


전투기매매촌극이 막을 내릴 무렵

보잉이 과대포장 해놓은 F-15SE의 특징적 성능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보잉은 F-15SE에 내부무기탑재실을 설치한다는 것이다. 보잉이 2010년 7월 9일과 7월 20일에 각각 발표한 보도자료들에 따르면, 보잉은 내부무기탑재실을 설치한 시험비행기(F-15E1)를 제작하고, 2010년 7월 8일에 시험비행을 마친 다음, 내부무기탑재실에 탑재한 중거리공대공미사일(AIM-120 암람)을 비행 중에 발사하는 실험을 2010년 7월 14일에 실시하였다. 보잉이 풍동실험(wind tunnel test)을 통해 F-15E1 내부무기탑재실의 항공역학적 설계에 대한 최종적인 기술확증을 얻은 때는 2012년 6월이다.

내부무기탑재실을 설치하는 목적은, 미사일과 폭탄을 기체 외부에 장착하지 않게 하여 레이더반사면적(radar cross section)을 그만큼 줄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무기탑재실을 기체 안에 들여놓는 바람에 항공연료저장공간이 그 만큼 줄어들어 F-15SE의 작전반경이 대폭 축소되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게 되었다. 보잉이 발표한 F-15K의 작전반경은 1,800km인데, <중앙일보> 2013년 8월 24일 보도기사에서 지적한 F-15SE의 작전반경은 600km다. 성능을 개량했다고 하면서 작전반경은 되레 3분의 1로 줄어드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작전반경이 600km밖에 되지 않는 F-15SE는 대구공군기지에서 이륙하여 독도상공까지 날아가 작전하지 못한다. 둘째, 수직으로 서 있는 기존 F-15 꼬리날개의 직립각을 밖으로 15도 기울여 설계함으로써 방공레이더에 노출되는 레이더반사면적을 줄이고, F-15SE의 비행거리를 138∼185km 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행거리를 그렇게 늘였다고 해도 작전반경이 600km밖에 되지 않으므로, 꼬리날개 설계변경은 무의미하게 보인다.

셋째, 기존 F-15기체 앞부분에 전파흡수도료(RAM)를 칠하여 방공레이더에 노출되는 레이더반사면적을 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체 앞부분에만 전파흡수도료를 칠한 전투기는 스텔스기종이 아니다. 스텔스전투기를 만들려면, 기존 전투기기체를 전면적으로 새로 설계해야 한다.

넷째, F-15SE조종석에는 헬멧장착현시장치, 사격통제장치, 적외선탐지추적장치, 목표식별자동추적장치, 전천후야간항법장치, 능동전자주사배열(AESA)레이더를 비롯한 신형전자장비들이 갖춰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측 정부당국이 구입하려는 F-15SE에는 위에 열거한 신형장비들이 모두 설치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 문제를 파악하려면, 남측과 마찬가지로 F-15SE를 구입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구입방식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국제비행> 2012년 3월 9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에 판매하는 F-15SE 가격은 부대비용까지 포함하여 대당 1억3,670만 달러다. 그런데 남측 정부당국이 F-15SE 60대 구입을 위해 책정한 예산은 74억 달러이므로, 미국이 남측에 판매하는 F-15SE 가격은 부대비용까지 포함하여 대당 1억2,330만 달러가 될 것이다. 똑같은 기종을 구입하는데, 사우디아라비아는 왜 남측보다 대당 1,340만 달러나 더 주고 비싸게 구입하는 것일까? 얼핏 보아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 문제를 해명하려면, 보잉의 F-15SE 해외판매전략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방위소식> 2010년 7월 7일 보도기사에서 보잉의 F-15SE개발책임자 브래드 존스는 구매자가 전투기에 들어갈 어떤 장비를 선택하는가에 따라 F-15SE 판매가격이 정해질 것이라고 하면서, 신형항공장비들은 구매자의 선택에 따라 선별적으로 설치될 것이라고 밝혔다. 다시 말해서 F-15SE에 어떤 신형항공장비가 설치되느냐 하는 문제는 구매자의 지불능력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을 살펴보면, 사우디아라비아가 구입하는 F-15SE에는 보잉이 그 전투기에 설치해주는 모든 종류의 신형장비가 구비되기 때문에 대당 판매가격이 1억3,670만 달러로 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석유수출수익금(oil money)을 챙기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전투기구입에 그처럼 막대한 예산을 지출할 재정능력이 있지만, 재정적자압박에 시달리는 남측은 그보다 1,340만 달러나 싼 값으로 F-15SE를 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다시 말해서, 비록 겉모습은 똑같이 생긴 F-15SE이지만, 남측이 구입하게 될 F-15SE의 성능은 사우디아라비아가 구입하는 F-15SE의 성능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다.

<한국일보> 2012년 1월 25일 보도에 따르면, 록히드마틴 관계자는 보잉이 기존 F-15의 성능을 “약간 업그레이드해 (남측에) 납품할 수밖에 없을 거라 주장했다”는데, 이것은 기존 F-15K와 성능에서 대동소이한 F-15SE를 개량형전투기라는 명목으로 구입할 수밖에 없는 남측 정부당국의 처지를 지적한 말로 들린다.

F-15SE를 남측에 판매하기 위해 미국방위안보협력국과 보잉은 남측의 방위사업청과 한국항공우주산업을 판촉활동에 끌어들였고, 거기에 끌려들어간 방위사업청은 K-15K와 비교하여 별반 개량되지도 않을 F-15SE를 F-35보다 비싸게 구입하면서도 신형전투기를 구입하는 것처럼 연막을 쳤다. 미국방위안보협력국이 제작을 맡고, 보잉이 총연출을 맡고, 방위사업청이 주연배우로, 한국항공우주산업이 조연배우로 각각 출연하고, 청와대가 관객으로 관람한 전투기매매촌극이 막을 내릴 무렵 미국이 남측에서 걷어갈 흥행수익은 막대할 것이다. 저임금과 중노동에 시달리는 남측 노동자들이 땀 흘려 창출한 재부는 전체 근로대중의 민생안정에 쓰여야 마땅한데, 전투기매매촌극이 막을 내릴 무렵 그 재부가 미국의 먹잇감으로 고스란히 넘어가는 참담한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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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0

8.18 판문점사건의 진실과 허상

[한호석의 개벽예감](75)
자주민보 2013년 08월 19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제5차 비동맹운동정상회의와 제31차 유엔총회, 그리고 판문점사건

1970년대에 북은 국제외교전에서 비약적인 상승세를 탔고, 미국은 추락을 거듭하였다. 그런 변화를 일으킨 국제관계의 원인은 아래와 같다.

첫째, 1960년대에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반대하고 일어선 신생독립국들이 비동맹운동(북에서는 쁠럭불가담운동이라고 부름)에 결집하였는데, 비동맹운동 성원국들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북은 전 세계 반제전선에서 가장 선도적으로, 가장 비타협적으로 투쟁하였으므로 그들이 북을 지지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북의 국제적 위상은 비동맹운동의 지지에 힘입어 더욱 높아졌다.

둘째, 미국은 베트남전쟁의 깊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패전하여 국제적 위상이 땅에 떨어졌고, 반제자주노선을 제시한 비동맹운동의 위세 앞에서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런데 북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는 상승효과와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 떨어지는 하락효과가 각각 극대화되는 두 가지 계기가 판문점사건과 각각 결부되었으니, 그에 얽힌 기묘한 사연은 이러하였다.

판문점사건이 일어나기 이틀 전인 1976년 8월 16일부터 나흘 동안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 제5차 비동맹운동정상회의가 진행되었는데, 그 회의에서 북은 비동맹운동 성원국으로 가입하였다. 박성철 당시 정무원 총리와 허담 당시 정무원 외무상이 그 정상회의에 참석하여 주한미국군 철군문제와 미국 핵무기 철거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하였다.

판문점사건 하루 전인 1976년 8월 17일 북을 지지하는 유엔 성원국들은 미국이 남에서 모든 군사장비를 철수할 것과 대북침공위협을 중지할 것과 남에서 실시하는 군사연습 같은 도발행동을 중지할 것을 촉구하는 대미결의안을 유엔총회에 상정하였다.

북을 지지하는 유엔 성원국들은 1973년 12월 28일 제28차 유엔총회에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 해체 결의안을 채택하였고, 1975년 11월 18일 제30차 유엔총회에서 주한유엔군사령부 해체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미국이 유엔의 이름으로 조작해놓았던 정치기구와 군사기구를 각각 해체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것이다. 북을 지지하는 유엔 성원국들은 그 여세를 몰아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키고 미국이 남측에 배치한 핵무기를 철거시키는 결의안을 1976년 9월에 열리는 제31차 유엔총회에 상정해 놓았으니, 사상 최악의 외교적 패배로 궁지에 몰린 미국은 당황망조할 수밖에 없었다.

제31차 유엔총회를 며칠 앞둔 1976년 8월 30일 백악관에서 비상대책회의가 진행되었다.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 당시 국무장관, 브렌트 스카우크로프트(Brent Scowcroft)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윌리엄 스크랜튼(William W. Scranton) 당시 유엔주재미국대사가 진행한 그 회의의 비망록이 2008년 12월 31일에 기밀해제되었는데, 위에서 언급한 대미결의안을 지지하는 유엔 성원국은 31개국이었는데, 미국이 제출한 대북결의안을 지지하는 유엔 성원국은 19개국밖에 되지 않아 곤경에 빠진 그들의 모습이 비망록에서 드러난다.

만일 판문점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1976년 8월과 9월에 각각 열린 비동맹운동정상회의와 유엔총회에서 주한미국군 철군과 남측 배치 미국 핵무기 철거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을 것이며, 그로서 미국은 국제외교전에서 만회하기 힘든 참패를 당하였을 것이다. 적대적 북미관계에서 미국이 사상 최악의 외교적 곤경에 빠졌을 때 판문점사건이 일어났고, 미국은 그 사건을 이용하여 외교적 곤경에서 빠져나오려고 총력을 집중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76년 판문점 미루나무 벌채사건 당시 북과 미군의 육박전, 쓰러진 미군이 인민군에게 짖밟히고 있는데도 옆의 두명의 미군은 돕기는 커녕 동료를 버리고 도망가기에 바쁘다. 미군 측에서는 작업하기 위해 놓아둔 도끼를 인민군이 집어 들어 찍었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북은 미군이 먼저 도끼를 던지며 공격을 하기에 그 날아오는 도끼를 잡아 본격적으로 미군과 싸움을 벌렸다고 주장했다. 미군 측에서 촬영한 이 사진에서는 도끼나 무장없이 몸으로만 싸우고 있는데 표정만 봐도 인민군은 기세가 등등하다. 미군들은 쓰러진 동료를 버려두고 도망을 치거나, 의자 위에까지 몰려 더는 도망 못가게 되어 그런지 위자 꼭지에 털썩 주저 앉아 벌벌 떨고 있다. / 사진 자료 정설교 시인  제공 , 설명글은 자주민보   © 자주민보
 

새로운 사실을 밝혀주는 회고담

1976년 8월 18일 미루나무 가지치기작업을 지휘하던 미국군 경비병들을 인민군 경무원들이 도끼로 공격하여 그들 중 2명을 죽이고 다른 9명에게 부상을 입혔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진 판문점사건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건현장 목격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래리 쇄딕스(Larry G. Shaddix)가 판문점사건에 관한 기존 서술내용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사건 당시 미국군 판문점경비대 병참장교였는데, 작업현장을 지휘하다가 피살된 아서 보니파스(Arthur Bonifas) 대위와 무전기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제5관측초소에서 사건현장을 사진기로 촬영하고 있었다. 쇄딕스는 2008년 7월 15일 인터넷에 실은 판문점사건 회고담에서 “지난 32년 동안 (판문점사건에 관한) 모든 책들과 기록들을 큰 관심을 갖고 읽어온 나는 (사건에 관한) 부정확한 정보가 출판된 것을 보고 놀랐다”고 지적한 바 있다.

쇄딕스를 비롯한 판문점사건 체험자들이 남긴 회고담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판문점사건의 진상을 보여주는데, 판문점사건과 관련하여 미국측에서 세 사람, 북측에서 한 사람이 언론에 회고담을 남겼다.

회고담을 남긴 미국인 세 사람은 위에서 언급한 래리 쇄딕스, 사건 당시 보니파스 대위의 운전병 겸 호위병이었던 마크 루트럴(Mark Luttrull), 사건 당시 미국군 판문점경비대 제3소대 기동타격대원으로 사건현장에 출동한 스티브 스프래그(Steve Sprague)다. 루트럴과 스프래그의 회고담은 2001년 8월 17일 <코리아 타임스>에 실렸다.

다른 한 편, 북에서 회고담을 남긴 사람은 사건 당시 인민군 경무원으로 사건현장에 출동한 박지선이다. 그의 회고담은 2012년 12월에 촬영된 북의 텔레비전 방송 소개편집물 ‘<도끼사건>의 주인공으로 영생하는 전사-전 조선인민군 군관 공화국영웅 홍성문’에 들어있다.

 
물리적 충돌 예측하고 사전준비 갖춘 미국군 판문점경비대

판문점공동경비구역 서쪽에 사천이라는 내가 흐른다. 사천의 물줄기를 따라 군사분계선(MDL)이 그어져 있고, 미국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 부르는 사천교가 북측 지역과 판문점공동경비구역을 연결한다. 1976년 8월 당시 사천교 부근에 키가 24m 정도로 크게 자란 수령 30년의 노르만디 미루나무(Normandy poplar tree) 한 그루가 서 있었다.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 30분이 조금 지난 시각, 미루나무 나뭇가지를 자를 작업반이 현장에 도착하였다. 작업반은 미국군 판문점경비대 병력 11명과 나뭇가지를 자르는 작업에 동원된 남측 민간인 5명으로 구성되었다. 민간인 5명은 미8군사령부가 고용한 한국노무단(Korean Service Corps)에 소속된 노동자들이었다.

판문점사건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사건 직전에 있었던 미국군 판문점경비대의 준비행동이다. 이에 관한 정보는 콘래드 디래터(Conrad DeLateur) 미국군 해병대 대령이 1987년 3월 미국 국무부의 대외업무단기강좌(Foreign Service Institute) 제29차 상급토론회에서 발표하였고 1989년 12월에 기밀해제된 연구보고서 ‘판문점에서의 살해: 위기해결에서 전역사령관의 역할(Murder at Panmunjom: The Role of the Theater Commander in Crisis Resolution)’에서 찾을 수 있다.

디래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판문점경비대 지휘관 빅터 비에라(Victor S. Vierra) 중령은 보니파스 대위가 지휘하는 작업반을 현장에 보내기 직전 몇 가지 사전조치를 취하였다. 1개 소대병력으로 편성된 기동타격대를 작업현장에서 600m 떨어진 경비초소에 대기시킨 비에라 중령은 작업현장에서 인민군 경무원들과 충돌하면 기동타격대가 출동할 것이라고 보니파스 대위에게 일러두었고, 작업현장을 촬영하기 위해 미루나무 인근에 있는 다른 두 초소에 촬영담당인원을 각각 배치하였다. 이것은 미국군 경비병들이 인민군 경무원들과 물리적 충돌을 벌일 것에 대비한 사전준비였다.

비에라 중령은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 것을 어떻게 그처럼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을까? 루트럴의 회고담에 따르면, 판문점사건이 일어나기 12일 전인 8월 6일 미국군 경비병 4명과 남측 노동자 6명이 미루나무 제거작업을 하려고 현장에 나갔으나 인민군 경무원들이 나타나 작업반을 위협하여 현장에서 쫓아냈다는 것이다. 12일 전에 그런 일이 있었으므로, 비에라 중령은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 것에 대비해 사전준비를 갖추었던 것이다.

디래터의 보고서는 사건 당시 비에라 중령이 두 초소에 영화촬영기를 지참한 인원을 각각 배치하였다고 서술하였지만 그것은 사실과 조금 다르다. 쇄딕스의 회고담에 따르면, 자신은 “미국군 제5관측초소에서 사진기(camera)를 들고 사건현장을 촬영하였고, 자신이 찍은 현장사진들이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판문점경비대 기술하사관으로 근무하던 티모시 그레이(Timothy Gray)의 회고담에 따르면, 자신은 사천교 인근에 있는 제3검문소에서 영화촬영기로 사건현장을 촬영하였다는 것이다.

그레이가 사건현장을 촬영한 흑백영화필름은 사건진상을 밝혀줄 결정적인 증거자료인데도, 미국은 그런 영화필름이 있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다. 또한 쇄딕스의 회고담에 따르면, 자신이 촬영한 현장사진들 중에 미국이 공개하지 않은 현장사진들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처럼 결정적인 증거자료들인 영화필름과 일부 현장사진을 공개하지 않은 까닭은, 그 미공개 자료들이 판문점사건에 대한 미국의 기존 서술내용을 뒤집는 장면을 담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건현장에서 보니파스 대위의 지시에 따라 남측 노동자 5명이 미루나무에 올라가 가지치기작업을 막 시작하였을 때 촬영된 현장사진을 보면, 인민군 경무원 4명이 군용차(jeep)를 타고 현장에 도착한 장면이 나타난다. 처음부터 인민군 경무원 수 십 명이 군용트럭을 타고 사건현장에 몰려왔다고 서술한 것은 사실왜곡이다. 경무원 3명과 함께 현장에 도착한 인민군 군관은 박철 중위였다.

 
누가 곤봉을 사건현장에 가져갔을까?

박철 중위는 작업을 중지하라고 요구하였으나, 미8군한국군지원단(KATUSA) 장교의 통역을 통해 작업중단요구를 전해들은 보니파스 대위는 그 요구를 거부하였다. 박지선의 회고담에 따르면, 인민군 경비병들은 “이 나무를 찍자면 정전협정 합의조항에 따라서 사전에 우리와 합의를 하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는 것이다. 당시 군사정전위원회 미국군 특별고문이었던 이문항(제임스 리)의 회고담에 따르면, 판문점사건 다음날 열린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에서 인민군 대표는 “우리 경비병 4명이 그 곳에 가서 그 나무는 우리가 심고 기른 것으로 도로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라며 약 30분 동안 자르지 말라고 설득했었다. 그리고 반드시 잘라야 한다면 우리측과 상의해서 합의를 본 다음에 해야지 일방적으로 자르면 안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 충돌에 대비한 사전준비까지 갖추고 현장에 나온 미국군 경비병들에게 인민군의 작업중단요구가 통하지 않았고, 양측의 발언과 행동이 차츰 격해지며 격앙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박철 중위는 만일 작업을 중지하지 않으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마지막으로 경고하였으나, 보니파스 대위는 그 경고마저도 무시하고 가지치기작업을 계속 강행시켰다.

디래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박철 중위는 경무원 한 명을 인민군 경비초소에 보내 증원병 출동을 연락하였고, 그에 따라 경무원들이 군용트럭을 타고 사천교를 건너 현장에 도착하였다. 증원병이 도착하자 박철 중위는 작업을 중지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미국군 경비병들을 위협하였으나, 보니파스 대위는 가지치기작업을 계속 강행시켰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물리적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고, 가지치기작업은 어느덧 끝나가고 있었다. 쇄딕스의 회고담에 따르면, “나뭇가지를 충분히 쳤냈을 때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물리적 충돌이 어느 쪽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 먼저 공격을 시작하였을까?

디래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사건현장에 있던 미국군 경비병이 군용트럭을 몰고 인민군 경무원들에게 돌진하였다는 것이다. 미국군 경비병들의 작업강행에 화가 치민 인민군 경무원들은 자기들에게 차량을 돌진시킨 것을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격분한 인민군 경무원들은 손목시계를 풀어 주머니에 넣으며 격투태세를 취하였다.

디래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 긴박한 순간에 보니파스 대위는 인민군 경무원들을 등지고 서 있었기 때문에 인민군 경무원들이 격투태세를 취하는지 알 수 없었고, 박철 중위가 “죽여”라고 소리치며 보니파스 대위의 사타구니를 걷어차는 것을 신호로 인민군 경무원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격자가 상대의 사타구니를 등 뒤에서 걷어차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위의 서술은 신빙성을 잃는다. 박철 중위가 보니파스 대위를 뒤에서 덮쳐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두들겨 팼다는 스프래그의 회고담이 사실에 더 가까운 상황묘사로 보인다.

디래터의 보고서와 스프래그의 회고담에 따르면, 격분한 인민군 경무원들은 도끼는 물론 칼, 곤봉, 쇠파이프, 곡괭이자루를 마구 휘두르며 공격하였다는 것인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쇄딕스가 촬영한 현장사진을 보면 칼과 쇠파이프를 손에 쥔 인민군 경무원은 보이지 않고, 도끼와 곤봉을 손에 쥔 인민군 경무원만 보인다. 멀리서 찍은 현장사진에서 곤봉과 곡괭이자루를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문제의 곤봉은 미국군 경비병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건 당일 판문점경비대 지휘관 비에라 중령은 12일 전 미루나무를 베어버리려다가 인민군 경무원들에게 제지당하고 쫓겨난 실패경험을 잊지 않고, 8월 18일의 물리적 충돌을 예상하여 그에 대비하여 몇 가지 사전준비를 갖추었는데, 작업현장에 나가는 미국군 경비병들에게 곤봉을 준 것도 그런 사전준비에 속한 행동이었다.

박철 중위가 보니파스 대위를 뒤에서 덮쳐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두들겨 패기 시작하자, 미국군 경비병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박지선의 회고담에 따르면, “적들은 곤봉을 비롯한 흉기를 들고 집단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군 경비병들이 곤봉으로 인민군 경무원들을 제압하려고 한 것은 오산이었다. 판문점공동경비구역에서 근무하는 인민군 경무원들은 격술을 연마한 정예병들이다. 그들의 격술공격을 곤봉 따위로 제압해보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미국군 경비병들은 자기들이 휘두르던 곤봉을 인민군 경무원들에게 빼앗겼고, 결국 그 곤봉에 맞아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판문점공동경비구역 인근 북측 지역에 있는 정전협정조인장의 평화박물관에는 사건현장에서 인민군 경무원들이 격투 중에 빼앗은 미국군 경비병들의 곤봉이 도끼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영문자가 새겨진 미국산 도끼

판문점사건을 도끼사건이라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사건에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곤봉이 아니라 도끼였다. 미국측 자료들은, 남측 노동자들이 작업에 사용하다가 격투가 벌어지자 내던지고 달아난 도끼를 인민군 경무원들이 집어 들고 미국군 경비병들을 쳐죽였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아래의 정보를 살펴보면, 그러한 서술은 사실과 다르다.

문제의 도끼는 자루가 짧은 손도끼가 아니라, 자루가 긴 도끼다. 박지선의 회고담에 따르면, 그 도끼는 도끼날과 도끼자루를 합해 길이가 1m 25cm이고, 도끼날의 너비도 거의 20cm나 되는 것이다. 길이가 1m가 넘는 긴 도끼는 장작을 패거나 나무둥치를 찍는 벌목도구이지 나뭇가지를 치는 전지도구가 아니다. 작업현장에서 남측 노동자 5명은 미루나무 아래서 도끼로 나무둥치를 찍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나무에 걸친 사다리에 올라가 동력사슬톱(chain-saw)으로 나뭇가지를 잘라내고 있었다. 작업현장에 발동기가 있었다는 사실이 박지선의 회고담에 들어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동력사슬톱을 사용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 날의 가지치기작업에 도끼는 필요하지 않았는데, 문제의 도끼는 어디서 온 것일까?



 
 
▲ "판문점 사건"에서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도끼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
 




북이 정전협정조인장의 평화박물관에 전시해놓은 도끼를 촬영한 사진을 보면, 그 도끼날에 새겨진 ‘아메리카(America)’라는 영문자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것은 주한미국군에게 지급된 미국산 도끼인 것이다. 남측 노동자들이 미국산 도끼를 작업현장에 가져왔을 리 만무하다. 문제의 도끼는 미국군 경비병들이 타고 온 군용트럭에 실려 있었다. 박지선의 회고담에 따르면, “그 때 미제침략군 한 놈이 차에 달려있던 도끼를 조장 동무를 향해서 집어던졌”다는 것이다.

박지선의 회고담이 들어있는 소개편집물에는 판문점사건에서 격투를 벌인 경무원 홍성문이 자신의 전투기록장에 남긴 글이 소개되었는데, 그는 “나는 조장 동지를 향해 날아오는 도끼를 몸을 날려 잡아챘다. 순간 나의 눈에서는 복수의 불이 펄펄 일었고, 적들의 흰 철갑모와 이지러진 더러운 승냥이의 상통밖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고 썼다. 만일 미국군 경비병이 군용트럭에 있던 도끼를 집어 박철 중위에게 던지지 않았더라면 그 날의 충돌사건은 이전에 판문점공동경비구역에서 벌어지곤 하였던 주먹싸움으로 끝났을 것이고, 판문점도끼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박지선의 회고담에 따르면, “조장 동무 옆에서 적정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던 홍성문 동무는 잽싸게 도끼를 걷어쥐고 3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놈들을 네 놈이나 족쳐버렸”다고 한다. 홍성문이 미국국 경비병이 던진 도끼로 미국군 경비병들을 공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군 피살자 두 명이 그 도끼에 맞아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수 십 명이 서로 뒤엉켜 싸운 격투에서 도끼에 맞아 죽은 사람을 구별해내는 것은 부검을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쇄딕스의 회고담에 따르면, 미국이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미공개 현장사진들은 “북측 사람들이 곤봉으로 반장 보니파스를 때려죽이고, 반장 김씨(미8군한국군지원단 장교를 뜻함-옮긴이)가 그를 찾아내기까지 보니파스가 주차구역 한 복판에 홀로 남겨져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회고담은 미국이 말하지 않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첫째, 보니파스 대위가 도끼에 맞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목숨을 끊어놓은 치명타는 도끼가 아니라 곤봉이라는 점이다.

둘째, 격투 중 부상을 입은 미국군 경비병들이 집중공격을 받고 쓰러진 보니파스를 버려두고 모두 달아났다는 점이다.

보니파스는 현장에서 즉사하였지만, 또 다른 피살자인 마크 배럿(Mark T. Barrett) 중위는 현장에서 즉사하지 않았다. 쇄딕스의 회고담에 따르면, 중상을 입은 배럿을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4.5km 정도 떨어진 캠프 그리브스(Camp Greaves) 야전병원으로 자신이 데리고 갔고, 거기서 긴급의료수송에 쓰이는 군용헬기에 태웠을 때 그가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판문점사건 직후 북의 대응과 미국의 대응 

판문점사건은 북미적대관계를 전쟁 직전 상황으로 끌어간 심각한 사건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세상에 알려진 것은, ‘도끼살해’에 대해 보복하려는 미국이 북에게 초강경하게 대응하였고, 궁지에 몰린 북이 미국에게 ‘사과’함으로써 전쟁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과설’이야말로 사건진상을 왜곡한 미국의 극본이었다. ‘사과설’과 관련하여 아래의 정보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박지선의 회고담에 따르면, 당시 판문점사건에 관해 보고를 받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우리 경무원들의 행동은 응당한 자위적 행동이며 자랑할 만한 영웅적 행동”이며, “우리 인민과 영웅적 인민군대의 전투적 기상을 높이 보여주었다”고 치하하였고, 판문점사건에서 미국군 경비병들을 공격한 인민군 경무원들을 크게 표창하였다고 한다. 치하와 표창은 북이 궁지에 몰려 미국에게 사과하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둘째, 미국은 판문점사건에 대응하여 문제의 미루나무를 제거하는 ‘폴 번연 작전(Operation Paul Bunyun)’을 실시하였는데, 그 작전이 끝난 직후 군사정전위원회 인민군 대표인 한주경 소장은 군사정전위원회 미국군 대표인 마크 프루든(Mark P. Frudden) 해군소장에게 “사적인 만남(private meeting)”을 요구하였다. 그 날 정오에 있었던 사적인 만남에서 한주경 소장은 프루든 소장에게 통지문을 읽어주었다. 이문항의 회고담에 수록된 통지문은 다음과 같다.

“판문점에서 오랫동안 큰 사건이 없었던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판문점공동경비구역에서 이번에 사건이 일어나서 유감입니다. 앞으로는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측이 다같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당신측이 도발을 사전에 방지할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측은 절대로 먼저 도발하지 않을 것입니다. 도발을 받을 때만 오로지 자위적인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측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한주경 소장은 위의 통지문을 프루든 소장에게 읽어줄 때,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의 위임에 따라” 통지한다고 밝혔으므로, 위의 통지문은 김일성 주석이 미국에 보낸 것이다.

미국은 김일성 주석이 자기들에게 통지문을 보낸 사실만 언급하였지만, 판문점사건 다음날 열린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에서 미국이 김일성 주석에게 공식적으로 구두메시지를 보냈으므로 김일성 주석의 통지문은 그에 대한 답장이었다.

김일성 주석이 미국에 보낸 답장통지문은 미국에게 사과의사를 표명한 게 아니라, 미국군 경비병들의 도발로 유감스러운 사건이 일어났으니 앞으로는 그런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노력하라고 미국에게 훈계한 것이다. 디래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의 답장통지문을 전달받은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 리처드 스틸웰(Richard G. Stilwell)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부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도 미국은 북의 통지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1976년 8월 22일에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왜곡하고 ‘사과설’을 조작해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헨리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이다. 그는 북의 ‘유감표명’을 긍정적인 조치로 해석해야 한다는 긴급지시를 국무부에 내렸고, 그로써 미국 국무부는 불과 하루 만에 태도를 180도로 번복하여 미국이 북의 유감표명을 “긍정적인 조치”로 인정한다고 발표하였다. 키신저의 지시에 따라 국무부는 김일성 주석의 훈계를 유감표명으로 둔갑시키면서 자기들의 거부의사표명을 하루 만에 번복하여 수락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이 다급한 번복행위는 미국이 판문점사건으로 고조된 북미전쟁위험에서 벗어나려고 하였음을 말해준다.

판문점사건 직후 미국은 북에 대한 보복으로 전쟁을 당장 일으킬 것처럼 흥분했는데, 왜 갑자기 태도를 바꿔 전쟁위험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일까? 미국의 그런 돌변행동에는 사연이 있다.

2010년 미국에서 출판된, 일본정책대학원 교수 미치시타 나루시게(道下德成)의 책 ‘북의 군사-외교활동(North Korea's Military-Diplomatic Campaigns), 1966-2008)에 따르면, 판문점사건 직후 북에서는 50살 미만의 제대군인들이 모두 복대하여 군복을 다시 입었고, 공장과 기업소들은 생산설비를 후방으로 이동시킬 준비를 갖추었으며, 1976년 8월 말부터 11월 중순까지 평양시민 약 20만 명과 황해남도 및 강원도의 약 8,000가구가 후방으로 이동하는 대규모 소개작전이 실시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월간조선> 2013년 3월호에 실린 관련기사에 따르면, 당시 인민군 특전병들이 해상으로 침투하여 주한미국군기지들과 한국군기지들 주변에 매복하면서 기습타격명령을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규모 소개작전과 선제기습타격준비는 평시군사훈련이 아니라 전면전에 돌입하는 마지막 단계의 전시군사행동이다. 미국을 상대로 ‘최후결전’을 벌이려는 북의 결심과 준비가 얼마나 단호하고 강력했는지 알 수 있다. 판문점사건 직후 북을 위협하려는 무력시위를 며칠 동안 벌이다 슬그머니 물러간 미국과 달리, 북은 미국의 무력시위에 위축되기는커녕 선제기습타격으로 ‘최후결전’을 벌이는 전시군사행동단계에 돌입하였던 것이다. 박지선은 회고담에서 “정말 그 때 우리는 전쟁이 막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고 말했다.

전면전 태세에 돌입한 북의 단호한 결심과 대규모 타격준비를 보고 덜컥 겁이 난 미국은, 느닷없이 훈계발언을 유감표명으로 둔갑시켜 그것을 받아들이는 돌변행동을 취함으로써 북미전쟁위험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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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9

미국은 왜 ‘알우하이시 공포’에 떠나

<민중의 소리> 2013년 08월 18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얼마 전 국제테러조직 알카에다(al-Qaeda)의 임박한 테러위험에 관한 미국 언론의 집중보도는 9.11 사태의 무서운 기억을 되살려놓았다.

그 무서운 기억을 되살려놓은 장본인은 미국 국무부다. 2013년 8월 2일 미국 국무부는 당일부터 8월 말까지 약 한 달 동안 알카에다의 테러위험이 고조될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에 따라, 해외여행 중인 미국인들에게 테러주의보가 발령되었고,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있는 미국 대사관 및 영사관 19개소가 잠정 폐쇄되었을 뿐 아니라, 예맨의 외교공관에서 근무하는 외교관과 공관직원들 가운데 비상요원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인원들은 군수송기에 실려 안전지대로 소개되는 등 수위 높은 테러예방대책이 긴급히 취해졌다. 미국의 반테러전쟁에 적극 동조해오는 영국, 프랑스, 독일도 미국의 뒤를 따라 예맨에 있는 자국 외교공관을 잠정 폐쇄하였다. 사태가 이 지경으로 악화되었으니, 미국 전체가 테러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되살아난 9.11 악몽

2011년 5월 2일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특명을 받은 미국 해군특전요원과 중앙정보국 군사작전요원이 파키스탄 아봇타바드(Abbottabad)에 은거하던 알카에다 최고책임자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의 은신처를 급습하여 현장에서 사살하였을 뿐 아니라, 테러위험 국가들에서 무인공격기 공습으로 알카에다 조직원들을 계속 제거해왔으므로 미국은 이제 알카에다의 핵심역량이 불능화되었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는데, 왜 알카에다의 심각한 테러위험이 재발하였을까?

미국 텔레비전방송의 2013년 8월 3일 보도에 따르면, 알카에다의 임박한 테러위험에 따른 미국의 예방대책은 2013년 8월 3일 저녁에 긴급히 소집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내려진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그날 저녁에 소집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긴급회의는 2013년 7월 1일 제24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된 수전 라이스(Susan Rice)가 주재하였다. 그 긴급회의에 출석한 미국 고위관리들이 위기감을 느끼며 긴장한 까닭은, 미국 국가정보국(NIA)이 그 회의에 제출한 알카에다의 최근 동향에 관한 정보를 보고받았기 때문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제출된 정보보고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데일리 비스트> 2013년 8월 5일 단독보도가 그 정보보고서의 내용을 대략적으로 알려주었다. 단독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가안보국(NSA)은 파키스탄에서 암약하는 알카에다 최고책임자 아이만 알자와히리(Ayman al-Zawahiri)가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암약하는 알카에다 지역조직 책임자 20여 명과 국제전화로 통화하며 전화회의를 진행하는 통화내용을 2013년 8월 1일에 감청하였다고 한다. 미국이 그들의 통화내용에서 주목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알자와히리가 나세르 알우하이시(Nasser al-Wuhayshi)를 알카에다 총지배인으로 임명하였다는 것과 9.11 테러 이후 가장 심각한 테러공격이 임박했음을 언급하였다는 것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를 긴장시킨 것은 알우하이시가 알카에다 총지배인으로 임명된 것과 때를 같이하여 알카에다 지도부가 대규모 테러공격을 언급하였다는 정보였다.
 
무장한 경비 요원이 바레인 수도 마나마의 미국 대사관 앞에서 세워진 장갑차에 탑승해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
무장한 경비 요원이 바레인 수도 마나마의 미국 대사관 앞에서 세워진 장갑차에 탑승해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뉴시스
 

미국을 떨게 한 알우하이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를 긴장시킨 알우하이시는 누구인가? 미국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아래와 같은 정체가 드러난다. 1990년대에 오사마 빈 라덴을 추종한 알우하이시는 아프가니스탄 산악지대에 건설된 알카에다 군사훈련소 4개소 가운데 한 곳을 맡아 운영하면서 오사마 빈 라덴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다가 미국의 반테러작전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개시되어 더 이상 버티기 힘들게 되자, 2001년에 이란으로 피신하였다. 이란은 2003년에 그를 그의 출신국인 예맨으로 추방하였고, 예맨에 도착하여 예맨 사법당국에 체포된 그는 중무장 경비원들이 감시하는 감옥에 갇혔다. 수감된 알우하이시는 은밀히 옥중정치활동을 벌였고, 그 결과 알카에다 조직원들 사이에서 정신적 지도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22명의 다른 알카에다 수감자들과 함께 감방바닥을 파내고 지하통로를 뚫어 2006년 2월 3일 탈옥하였다.

탈옥한 알우하이시는 자기 고향인 예맨 남부지역에 잠입하여 조직강화에 힘썼으며, 2009년 1월 알카에다 아라비아반도지부를 창설하였다. 당시 핵심성원은 약 200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가 이끄는 알카에다 아라비아반도지부는 예맨에서 반정부투쟁으로 혼란이 조성된 기회를 이용하여 예맨 남부지방인 아비안(Abyan)을 16개월 동안 점령하고 통치하였다. 그 기간에 알카에다 아라비아반도지부 조직성원은 200명에서 1,000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미국이 반테러작전을 예맨 남부지역으로 집중하자, 알카에다 아라비아반도지부는 미국군과 예맨 정부군의 공격에 밀려 아비안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사기가 높아진 그들은 최근에 예맨에서 가장 면적이 넓고, 사우디아라비아에 인접한 요충지인 하드라마우트(Hadramaut)지방의 중심도시 무칼라(Mukalla)를 점령하는 작전과 예맨 국가경제의 생명선인 석유수송관과 천연가스시설을 파괴하려는 작전을 동시에 실행에 옮기려고 대담하게 획책하였다.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예맨, 소말리아, 시리아, 이라크, 말리, 알제리 등에서 암약하는 알카에다 지역조직들 가운데 조직역량이 가장 강한 것이 알우하이시가 이끄는 아라비아반도지부다. 이것은 그가 알카에다 내부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 그가 총지배인으로 임명되어 테러공격을 준비하였으므로, 미국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 최강 군사대국, 왜 알카에다 1만명에 쩔쩔매나

누구나 아는 것처럼, 반테러의 간판을 내걸고 아프가니스탄전쟁을 12년 전에 일으킨 미국은 알카에다를 제거하려는 반테러전쟁에 자기의 국력을 소모하는 중이다. ‘국력소모’라는 표현을 쓰는 까닭은, 미국이 반테러전쟁에서 이길 수 없고, 반테러전쟁을 중도에서 포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반테러전쟁은 미국이 빠져 들어간 거대한 함정이다. 미국 언론에서는 전 세계의 알카에다 조직원을 약 10,000명으로 추산하는데, ‘세계 최강’이라고 자처하는 군사대국인 미국의 판단기준으로 보면 그야말로 한 줌도 되지 않는 알카에다를 왜 제거하지 못하고 12년 동안 쩔쩔매는 것일까?

그에 관해서 <월 스트릿 저널> 2013년 8월 7일 보도기사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연을 전해주었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미국은 최근 몇 해 동안 예맨에서 알카에다를 제거하기 위해 1억5,000만 달러를 쏟아 부었는데, 그 비용은 미국의 특전병을 파견하여 예맨군의 군사훈련을 실시하는데 거의 지출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군 특전병들은 안전한 기지 안에서 군사훈련이나 지도해줄 뿐, 산악지대에서 벌어지는 작전에는 나서지 않으며, 알카에다 제거작전에 동원된 예맨군은 실전경험도 없고 전투의지도 허약하기 때문에 알카에다를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원인분석은 미국 언론의 피상적 관찰에서 끌어낸 부분적 결론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이 알카에다를 제거하지 못하는 원인을 좀 더 심층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지난 2011년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왼쪽 2번째)이 백악관 상황실에서 조 바이든(왼쪽) 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오른쪽 2번째),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오른쪽) 및 백악관 안보보좌관 등 미 수뇌부와 함께 미 네이비실 특수요원들이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지난 2011년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왼쪽 2번째)이 백악관 상황실에서 조 바이든(왼쪽) 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오른쪽 2번째),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오른쪽) 및 백악관 안보보좌관 등 미 수뇌부와 함께 미 네이비실 특수요원들이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AP/뉴시스
 

미국의 국제테러문제 전문가들이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알우하이시는 단순히 테러조직 책임자가 아니라 전략적 사고에 익숙한 전략가다. 그에게 그런 평가가 어울리는 까닭은, 최근 그가 알카에다의 새로운 전략방침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알우하이시가 제시한 알카에다의 새로운 전략방침은, 이슬람율법에서 이탈한 이슬람국가의 ‘세속정권’을 공격하는 것보다 미국을 집중공격하는 반미테러에 더욱 힘쓴다는 것이다. 알우하이시는 자기들의 주되는 테러공격대상을 미국으로 명확히 규정해놓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의 판단에 따르면, 2009년과 2010년에 미국 민간 항공기들에 대한 폭탄테러를 각각 시도한 테러미수행위가 알우하이시 지도를 받는 알카에다 아라비아반도지부의 소행이었다는 것이다.

테러세력 공격할수록 반미세력 늘어나는 딜레마

알우하이시가 그처럼 대미테러의 중심인물로 등장하자, 미국은 즉각 그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에 나섰다. 미국이 예맨에 급파한 무인공격기들이 알카에다 아라비아반도지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예맨 남부지역에 서 순항미사일을 쏘는 공습을 벌인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파키스탄의 탈레반을 제거하겠다고 하면서 파키스탄에 보낸 무인공격기들이 탈레반이 아니라 지역주민을 오인살해하고 있는 것처럼, 예맨 남부지방에서도 오인살해가 되풀이되었다. 주목하는 것은, 미국의 무인공격기가 알카에다와 지역주민을 구분하지 못하는 무차별 공습을 계속할수록 그 지역의 민심은 반미적대감으로 급속히 이동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 미국과 달리, 알카에다는 자기 지역주민을 마구 죽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에 관한 정보를 정부당국에 넘겨준 ‘배신자’를 처형하거나 이슬람 율법을 어기고 미국식 생활양식에 빠진 ‘타락자’에게 벌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무인공격기를 동원하여 무차별 공습을 가하며 지역주민들을 오인살해하고 있으니, 미국 무인공격기의 공습에 자기 가족과 친지를 잃고 자기 생활터전을 파괴당한 지역주민들의 분노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그들의 분노한 눈길로 바라보면, 미국 무인공격기의 무차별 공습은 국가테러(state terrorism)로 보인다.

최근 테러위험으로 긴장이 고조된 예맨 남부지방에 들어가 현장취재를 벌인 영국 소속 아랍계 영국인 기자 한 사람이 2013년 8월 8일 라디오방송 에 출연하여 밝힌 바에 따르면, 미국의 무인공격기가 무차별 공습으로 파괴하고 돌아간 폐허 위에 나타나 피해보상금과 장례비를 지역주민들에게 지급해주는 ‘고마운 사람’들은 알카에다 아라비아지부 조직원들이라는 것이다. 그 조직원들은 미국 무인공격기의 무차별 공습으로 오인살해당한 지역주민 유가족들에게 미국에게 복수하려면 알카에다에 가입하여 함께 싸워야 한다고 선동한다고 한다. 이런 정황을 살펴보면, 무인공격기를 동원한 미국의 반테러작전은 알카에다 조직원들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지역주민에게 반미적대감을 불어넣으며 그들을 알카에다의 편으로 떠밀어주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무인공격기 투입은 작전적으로 실패한 것이다.

미국의 그러한 작전적 실패공간을 적극적으로 파고드는 새로운 전략을 추진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알우하이시다. 2013년 8월 9일 보도에 따르면, 알우하이시는 아프리카의 말리(Mali) 북부지역에서 암약하는 알카에다 조직에 보낸 비밀편지에서 지역주민에게 전기와 수도를 공급해주고 쓰레기 처리문제를 해결해주면서 민심을 얻으면 “그들과 우리들이 운명공동체가 될 것”이라고 썼다. 실제로 알하우시가 이끄는 알카에다 아라비아반도지부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비안지방을 16개월 동안 통치할 때, 그 낙후한 지역에 전기를 끌어오고 상수도시설을 놓아주는 등 적극적인 민생활동으로 지역민심을 사로잡았다. 알카에다 조직역량이 제거되기는커녕 장성, 강화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반미테러에 집중하는 알카에다는 지역주민의 민심을 얻으며 강화되고 있고, 무인공격기로 지역주민에게 국가테러를 자행하는 미국은 민심을 잃으며 국력만 소모하고 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미국의 반테러전쟁은 실패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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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4

청천강호 항해 가로막은 미국의 훼방

[한호석의 개벽예감] (74)
자주민보 2013년 08월 13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훼방의 배후조종자는 미국

2013년 7월 15일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파나마운하의 만사니요국제하역구(Manzanillo International Terminal)로 화물선 한 척이 들어갔다. 그 화물선은 1977년 북의 남포조선소에서 건조된 청천강호다. 길이가 155m이고 폭이 20m인 청천강호는 쿠바를 떠나 북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청천강호가 만사니요국제하역구에 들어서자 파나마 정부당국은 느닷없이 청천강호를 정선시키고 강제수색을 벌였다. 청천강호의 선장과 선원 35명은 파나마 수색요원들의 급습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파나마가 청천강호를 억류하고 수색한 까닭은, 그 화물선에 마약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허위제보를 제3국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이었다. 청천강호를 마약밀수선으로 몰아가면서 파나마로 하여금 그 화물선을 억류, 수색하게 만든 배후조종자는 미국이다. 정찰위성을 동원하여 청천강호의 항해를 줄곧 감시해오던 미국은 파나마를 앞세워 억류와 수색을 강제한 것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청천강호는 마약밀수선이 아니라 국제해상무역에 종사하는 화물선이다. 언론에 보도된 사진을 보면, 그 화물선의 위층 화물적재공간에는 쿠바산 황설탕포대 250,000자루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는데, 그 가격은 약 360만 달러다. 그리고 아래층 화물적재공간에는 대형철제짐함(container)들이 있었다. 언론매체들은 대형철제짐함을 황설탕포대로 감춰놓은 것으로 보도함으로써 청천강호에 무슨 밀수품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떠들썩했지만, 그것은 왜곡보도다. 다른 화물선처럼 화물적재공간이 2층 구조로 되어 있는 청천강호는 위층에 황설탕포대를 싣고 아래층에 대형철제짐함을 실은 것뿐이다.   

파나마 수색요원들이 대형철제짐함들을 열어보니, 그 안에 각종 군사장비들이 들어있었다. 그 군사장비들은 지대공미사일 축전지 2개와 부품 9개, 미사일발사통제차량 5대, 미그(MiG)-21의 기체 앞부분 2개와 미그-21 엔진 15개다.

파나마는 청천강호가 위와 같은 군사장비들을 운송 중이었다는 사실을 언론에 공개하면서 북과 쿠바가 불법적인 무기거래를 하다가 자기들에게 적발된 것처럼 사실을 왜곡하며 또 한 차례 소동을 피웠다. 청천강호를 억류, 수색하는 소동이 일어난 때로부터 24시간이 지나지 않은 2013년 7월 16일 쿠바외교부는 즉각 성명을 발표하고, 청천강호에 실린 “낡은 방어무기들”은 수리하기 위해 북으로 보내는 자국의 군사장비들이라고 밝혔다. 쿠바외교부가 발표한 성명의 한 대목을 옮기면 이렇다.

“쿠바외교부는 위에 언급한 화물선이 10,000t에 이르는 설탕을 싣고 쿠바의 항구를 떠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보한다. 거기에 더하여, 위에 언급한 화물선은 240t에 이르는 낡은 방어무기들을 운송하고 있었다. 그것은 대공미사일종합체 볼가와 대공미사일종합체 페초라, 미사일부품 9개, 미그-21비스 2기와 그 엔진 15개인데, 그것은 모두 20세기 중반에 생산된 것들이며, 수리를 받은 뒤에 다시 쿠바로 돌아오게 되어있는 것이다.”

무기수출국과 무기수입국이 재래식 무기를 거래하는 것은 언론에 보도되지도 않을 만큼 일상적인 일이고, 이번에 북과 쿠바는 무기를 거래한 것이 아니라 북이 쿠바의 무기를 수리해주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북과 쿠바의 합법적인 무기수리거래를 불법행위로 규정하려는 속셈을 품고 파나마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청천강호를 억류, 수색하였고,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 유엔사찰단을 파견하여 조사하는 소동을 벌인 것이다.

쿠바외교부가 위의 성명을 발표한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2013년 7월 17일 북의 외무성 대변인은 <조선중앙통신>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이번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북의 외무성 대변인은 파나마가 청천강호를 억류한 것을 “비정상적인 사건”으로 규정하고, 파나마가 “걸고드는 짐은 합법적인 계약에 따라 수리하여 다시 꾸바에 되돌려주게 되어 있는 낡은 무기들”이라고 밝히면서, “억류된 우리 선원들과 배를 지체 없이 출항시키는 조치를 취하여야 할 것”이라고 강력히 촉구하였다.

볼가에게 타격 입은 미국의 쓰라린 경험

위에서 언급한 쿠바외교부 성명에 따르면, 쿠바가 북에 보내 수리하려고 한 지대공미사일은 볼가(Volga)와 페초라(Pechora)다. 그 성명에서 볼가와 페초라를 언급할 때 미사일이라 하지 않고 미사일종합체(missile complex)라 한 것은, 단지 미사일만이 아니라 발사통제레이더가 장착된 미사일발사차량까지 포함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쿠바는 부분수리가 아니라 전면수리를 북에게 요청한 것이다.

위의 성명에 명시된 대공미사일종합체 볼가는 러시아산 지대공미사일 S-75M볼가를 뜻한다. 미국 군부는 이 미사일을 ‘SA-2’라고 제멋대로 부른다.

소련과 그 계승국 러시아는 1957년부터 1995년까지 38년 동안 S-75계열 지대공미사일의 성능개량을 거듭하면서 무려 36종이나 생산하였다. S-75M볼가는 소련-러시아가 생산해온 S-75계열의 여러 지대공미사일들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인 1995년에 생산한 지대공미사일이다. 쿠바외교부 성명은 “20세기 중반에 생산된 낡은 방어무기들”이라고 하였지만, S-75M볼가는 20세기 말에 생산된 우수한 무기다.

그런데 미국은 왜 파나마를 앞세워 S-75M볼가를 압류한 것일까? 언론보도에 나오지 않은 사연을 알아보려면, 아래의 정보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미국 군부의 기억 속에는 지난날 S-75 지대공미사일에게 당한 쓰라린 피격경험이 남아있다. 이를테면, 1959년 10월 7일 중국영공을 침범하여 정찰비행을 하던 미국의 고공정찰기 U-2가 중국인민해방군이 발사한 S-75를 맞고 격추되었고, 1960년 5월 1일 소련영공을 침범하여 정찰비행을 하던 미국의 고공정찰기 U-2가 소련군이 발사한 S-75를 맞고 또 격추되었고, ‘쿠바미사일위기’로 전쟁위험이 격화된 1962년 10월 27일 쿠바영공을 침범하여 정찰비행을 하던 미국의 고공정찰기 U-2가 쿠바혁명군이 발사한 S-75를 맞고 또 격추되었고, 베트남전쟁 중에 북베트남영공을 침범한 미국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북베트남군이 발사한 S-75를 맞고 줄줄이 격추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공중우세를 자랑하던 미국의 항공무력이 S-75에 격추되어 막심한 피해를 입었음을 말해준다. <사진1>은 2011년에 실시된 베트남군 실탄사격훈련에서 S-75의 발사장면이다.
 
▲ <사진1> 2011년 베트남군이 실탄사격훈련에서 S-75를 발사하는 장면이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1981년 8월 26일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가데나공군기지를 이륙하여 북측 영공에 접근하던 미국의 고공정찰기 SR-71검은새(Blackbird)가 인민군이 발사한 S-75에 격추당할 위험을 간신히 피해 달아난 적이 있다.  S-75의 성능은 요격고도 22km, 비행속도 마하 3.5이고, SR-71검은새의 성능은 비행고도 22km, 비행속도 마하 3이다. 그러므로 S-75를 쏘는 경우 SR-71검은새는 전속력 회피기동으로 재빨리 달아나게 되므로, S-75가 쫓아가 격추하기 어렵다.

SR-71검은새가 피격위험을 간신히 피해 달아난 때로부터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작전상황은 많이 바뀌었다. 미국의 고공정찰기 SR-71검은새는 퇴역하였고, 지난 시기 인민군이 보유하였던 소련산 지대공미사일 S-75는 성능이 더욱 향상된 조선산 지대공미사일 번개-1로 대체되었다.

번개-1과 S-75는 외형이 똑같이 생겼지만, 겉만 보고 그 성능이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판이다. 냉전시기에 소련이 만든 초기형 S-75의 요격고도는 22km이고, 이번에 쿠바가 북에게 보내려고 한 후기형 S-75M볼가의 요격고도는 30km인데 비해, 북이 만든 번개-1의 요격고도는 35km 이상이다. 이런 정보를 파악하면, 이번에 쿠바가 S-75볼가를 북에 보내 번개-1로 개조하려고 하였던 까닭이 자명해진다.

미국이 파나마를 앞세워 억류하고 수색한 청천강호의 적재화물들 가운데는 미사일발사통제차량 5대도 있었다. 공중에서 비행하는 요격목표를 육안으로 쳐다보고 지대공미사일을 쏘는 게 아니라, 미사일발사통제차량에서 대공레이더로 탐지하여 쏘는 것이므로, 지대공미사일과 미사일발사통제차량은 언제나 한 짝이 되어 작전한다. 따라서 지대공미사일의 성능을 개조하려면 당연히 미사일발사통제차량의 성능도 함께 개조해야 한다.

쿠바와 미국은 ‘번개’의 위력을 알고 있다
▲ <사진2> S-125페초라가 화염을 뿜으며 상승비행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위에서 언급한 쿠바외교부 성명에 따르면, 쿠바는 S-75M볼가와 함께 지대공미사일 페초라(Pechora)도 청천강호에 실어 북에 보내려고 하였다. 쿠바외교부 성명에 나온 페초라는 러시아가 만든 지대공미사일 S-125페초라를 뜻한다. 미국 군부는 페초라를 ‘SA-3’이라고 제멋대로 부른다. <사진2>는 S-125페초라를 발사한 장면이다.

S-75M볼가와 S-125페초라는 쿠바혁명군 반항공군의 주력무기들이다. 미국 군사전문가들의 자료에 따르면, 현재 쿠바혁명군 반항공군은 S-75M볼가 144기, S-125페초라 48기를 실전배치하였다. 이런 정황을 보면, 이번에 S-75M볼가와 S-125페초라를 북에 보내 개조하려고 한 쿠바는 반항공군의 무기성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쿠바가 볼가와 페초라를 북에 보내려고 하였다는 보도기사만 읽은 독자들은 미사일을 개조하는 기술이 쿠바에게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미국의 끊임없는 무력침공위협과 경제제재를 받아오는 쿠바는 군사부문, 특히 미사일부문을 강화, 발전시키는 사업에 힘써오면서 그 부문에서 상당한 기술을 축적하였다. <사진3>은 쿠바의 미사일개조기술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 말해준다. 그 사진은 2006년 4월 18일 쿠바항공군 및 반항공군 창설 45주년을 맞아 진행된 시위행진에 등장한 지대공미사일대오인데, 앞줄에 나선 것이 쿠바가 자체로 개조한 쿠바형 페초라이고, 뒷줄에 있는 것이 쿠바가 자체로 개조한 쿠바형 볼가다.
 
▲ <사진3> 2006년 4월 18일 쿠바항공군 및 반항공군 창설 45주년 시위행진에 등장한 쿠바형 지대공미사일 2종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러시아는 페초라의 성능을 향상시킨 페초라-2를 2000년에 실전배치하였는데, 쿠바도 페초라의 성능을 자체의 기술로 향상시킨 것이다. 소련이 초기형 페초라를 생산한 때는 1961년인데, 북은 외형이 페초라와 똑같이 생긴 조선형 페초라인 번개-3을 이미 1970년대에 실전배치하였다. 번개-3은 번개-1의 뒤를 이어 등장한 북의 2세대 지대공미사일이다.

주목하는 것은, 지대공미사일의 성능을 개조하는 기술을 이미 확보한 쿠바가 쿠바형 볼가와 쿠바형 페초라를 북에 보내 번개-1과 번개-3으로 각각 개조하려고 하였다는 사실이다. 지난 시기에 소련-러시아에서 생산된 각종 무기를 수입한 쿠바가 볼가와 페초라의 원생산국인 러시아에 쿠바형 볼가와 쿠바형 페초라를 보내 개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쿠바는 쿠바형 볼가와 쿠바형 페초라를 원생산국인 러시아에 보내려 하지 않고, 북에 보내려고 한 것이다.

만일 쿠바가 그 2종의 지대공미사일을 러시아에 보내려고 하였다면, 파나마를 앞세운 미국의 훼방도 피해갈 수 있었을 텐데, 쿠바는 해상운송과정에서 생길 억류위험을 무릅쓰고 원생산국이 아닌 북에 지대공미사일을 보내려고 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쿠바가 그렇게 한 까닭은 북이 지대공미사일부문에서 러시아와 비견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쿠바가 쿠바형 볼가와 쿠바형 페초라를 청천강호에 실어 무사히 북에 보냈더라면, 북은 그 지대공미사일들을 번개계열의 강력한 지대공미사일로 개조하여 쿠바에 다시 보내주었을 것이다. 번개계열의 강력한 지대공미사일이 쿠바영토에 실전배치되는 날, 미국의 항공무력이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번개계열 지대공미사일의 위력을 알고 있는 미국은, 위와 같은 군사전략적 변화가 쿠바-미국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했고, 그래서 정찰위성을 동원하여 청천강호의 항해를 끈질기게 추적하였고, 파나마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청천강호를 억류, 수색하였던 것이다. 자기 추종국들에게 각종 미사일을 수없이 팔아먹으며 막대한 이윤을 챙기는 미국은 지대공미사일 2종을 개조하여 미국의 적대행위에 맞서려는 쿠바의 정당한 노력을 그렇게 가로막았다.

전투기를 시급히 개조해야 하는 쿠바

미국이 파나마 정부당국을 앞세워 억류한 청천강호에 실린 각종 화물들 가운데는 쿠바가 성능개조를 위해 북에 보내려던 전투기 항공장비와 부품들도 있었다. 그런데 언론보도에서는 청천강호에 실린 전투기 항공장비와 부품들을 미그-21의 항공장비와 부품들이라고 간단히 표기해놓았기 때문에 중요한 사실이 돋보이지 않는다.
 
▲ <사진4> 인도 공군이 운용하는 미그-21바이슨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사진4>에서 보이는 전투기는 인도 공군이 운용하는 미그-21바이슨(Bison)인데, 미그-21은 지금으로부터 54년 전에 생산되었으므로 이제는 퇴역되어 군사박물관에나 전시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미그-21에 관한 깊은 정보를 알지 못하는 독자들은 쿠바가 왜 그처럼 고쳐 쓰기도 힘들만큼 낡은 전투기를 북에 보내 개조하려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수구언론매체들은 바로 그런 불가사의한 측면을 파고들며 진실을 왜곡하는데, 이를테면 오래 전에 퇴역시켜 고철로 폐기했어야 할 낡은 전투기를 수리하려는 ‘가난한 쿠바’의 모습을 부각시키거나, 또는 낡은 전투기를 운용하는 북에게는 노후기종 전투기를 수리할 능력밖에 없다고 폄하하는 식의 왜곡선전이다. 그러나 미그-21에 관한 아래의 정보를 살펴보면, 상황을 바라보는 시야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열린다.

소련-러시아는 3세대에 걸쳐 미그-21의 성능개조를 거듭해왔다. 그래서 미그-21은 27종이나 된다. 미그-21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판이다. 이를테면,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생산된 1세대 미그-21은 5종이고, 1961년부터 1966년까지 생산된 2세대 미그-21은 10종이고,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생산된 3세대 미그-21은 12종이다. 그 밖에 훈련기종으로 생산된 미그-21도 5종이나 된다.  

위에서 언급한 27종의 미그-21 가운데 1세대와 2세대에 속한 15종의 미그-21은 거의 모두 퇴역하였고, 일부 미그-21 보유국들은 그 기종을 작전기가 아니라 훈련기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도 여전히 작전기로 사용되는 것은 1972년에 생산된 3세대 기종인 미그-21비스(bis)다. 위에서 언급한 쿠바외교부 성명에 나와 있는 것처럼, 쿠바가 이번에 북에 보내 개조하려고 한 전투기가 <사진5>에서 보이는 미그-21비스다.
 
▲ <사진5> 쿠바혁명군 항공군이 운용하는 미그-21비스. 쿠바는 이 전투기를 북에 보내 개조하려고 하였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실상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쿠바혁명군의 항공무력에 관한 정보부터 살펴보면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미국 군사전문가들의 자료에 따르면, 쿠바혁명군 항공군은 8,000명의 병력과 226대의 전투기를 보유하였는데, 226대 전투기 가운데서 실제로 공중작전에 참가할 수 있는 전투기는 130대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나머지 전투기 96대는 수명시한을 넘긴 부품을 새 것으로 교체하지 못해 지상에 발이 묶여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쿠바혁명군 항공군이 실제로 운용하는 전투기 130대 가운데 120대가 미그-21이다. 미그-21을 주축으로 쿠바혁명군의 항공무력이 구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쿠바혁명군 항공군이 현재 운용 중인 120대 전투기들 가운데 미그-21비스가 84대, 미그-21MF가 36대, 훈련기로 쓰는 미그-21US/UM이 15대다. 

누구나 직감할 수 있는 것처럼, 미국으로부터 무력침공위협을 받아오는 쿠바가 1970년대에 생산된 미그-21비스 84대로 미국의 강력한 항공무력에 맞서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폭이 150km밖에 되지 않는 플로리다해협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마주보고 있는 쿠바가 그처럼 빈약한 항공무력을 가진 것은, 자기의 영토와 주권을 수호하는 쿠바혁명군에게 위험신호를 울려주는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쿠바가 자국에 실전배치된 미그-21비스를 시급히 개조하려고 하는 까닭이 자명해진다.

조선형 미그-21은 근접공중전에서 미국군 주력기를 이길 수 있다

미그-21 원생산국인 러시아는 지금도 미그-21-97을 생산하여 해외에 수출하고 있다. 최근 세계 최강의 성능을 자랑하는 첨단전투기 수호이(SU)-35를 만들어낸 러시아가 왜 미그-21 기종을 아직도 생산하는 것일까? 그 내막을 알아보려면 아래의 정보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미그-21은 현존하는 전투기들 가운데 근접공중전과 저공침투비행에서 우세한 기종이다. 원래 소련은 미그-21을 설계할 때 근접공중전에서 미국 전투기의 공중우세를 돌파하기 위한 장점만을 결합하여 단순하게 설계하였으므로 무게가 아주 가볍고 민첩하게 비행할 수 있는 전투기로 태어났다. 

그러나 미그-21은 엔진추력이 약해서 다른 전투기들에 비해 기동성(maneuverability)이 좀 떨어지고, 항공연료소비효율이 낮아 멀리 비행하지 못하므로 작전반경이 다른 전투기들에 비해 협소한 약점을 가지고 있다. 비록 기동성이 좀 떨어지고 작전반경이 협소하지만, 회전비행성능(turn performance)과 민첩성(agility)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미그-21은 근접공중전과 저공침투비행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러시아는 미그-21-97을 생산하여 해외에 판매하는 것이며, <사진6>에서 보이는 것처럼 북은 미그-21을 퇴역시키지 않고 성능을 개조하여 운용하고 있는 것이다.
 
▲ <사진6> 조선인민군 항공군기지에서 야간비행훈련에 나설 이륙준비를 갖추고 있는 미그-21의 모습. 북은 미그-21비스와 미그-21PFM을 자체로 개조한 개량형 미그-21을 실전배치하였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1982년 6월부터 1985년 6월까지 계속된 레바논전쟁의 항공작전경험에서 미그-21의 위력을 찾아볼 수 있다. 레바논전쟁 중에 이스라엘군과 맞붙은 시리아군은 1967년 6월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빼앗긴 골란고원에 이스라엘군이 설치한 대공레이더기지를 공습으로 파괴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시리아군의 공습작전은 이스라엘군 전투기들의 요격과 대공무기들의 화력에 가로막혀 번번이 실패하였다. 어려움에 빠진 시리아는 북에게 긴급지원을 요청하였고, 북은 인민군 전투기비행사 4명을 시리아에 급파하였다.

시리아에 도착하여 미그-21 4대를 몰고 출격한 인민군 전투기비행사들은 평소에 연마한 고도의 비행술을 발휘하였는데, 땅에 닿을 듯 초저공에서 이스라엘군의 방공망을 뚫고 들어가는 기습적인 침투비행으로 이스라엘군 대공레이더기지를 단숨에 파괴하였다. 미그-21의 우수한 저공침투비행능력과 인민군 전투기비행사의 수준 높은 비행술이 상호결합하여 이룩한 놀라운 전과였다. 레바논전쟁에서 보았던 미그-21의 저공침투비행능력을 잊지 않은 이스라엘은 오늘 미그-21-2000을 만들어 해외에 수출하고 있으며, 루마니아와 기술합작으로 미그-21랜스(Lance)R을 만들었다. 

현재 인민군 항공군이 보유한 미그-21 기종은 3종인데, 미그-21비스 이외에 미그-21PFM과 미그-21F-13이 있다. 북은 미그-21비스와 미그-21PFM만 개조하여 작전기로 쓰고, 미그-21F-13은 훈련기로 쓰는 것으로 보인다. 주목하는 것은, 지금 인민군 항공군이 운용하는 미그-21비스와 미그-21PFM은 <사진6>에서 보이는 것처럼 북이 자체로 성능을 개조한 미그-21이라는 사실이다. 외형이 똑같다고 해서 인민군 항공군이 미그-21비스와 미그-21PFM을 낡은 기종 그대로 운용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판이다. 북이 성능을 개조한 미그-21을 낡은 기종 미그-21과 구분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전자를 조선형 미그-21이라 부른다.

북은 1994년부터 1999년까지 체코로부터 미그-21비스 40기를 아주 싼 값으로 사들여 조선형 미그-21로 개조하였고, 1999년에는 카자흐스탄으로부터 미그-21비스 38기를 아주 싼 값으로 사들여 조선형 미그-21로 개조하였다. 북이 개조한 조선형 미그-21은 얼마나 우수한 성능을 발휘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해줄 관련자료가 세상에 공개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러시아가 개조한 미그-21-97의 성능을 보면 조선형 미그-21의 성능이 어느 수준인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러시아군의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가 개조한 미그-21-97이 미국군 주력전투기 F-16을 상대로 근접공중전을 연습하였는데, 놀랍게도 미그-21-97이 F-16을 4 대 1의 비율로 이겼다고 한다. 다른 한편 인도군의 자료에 따르면, 미국-인도 합동훈련 중에 인도군의 미그-21바이슨이 미국군의 F-15와 F-16을 상대로 각각 근접공중전을 연습하였는데, 미그-21바이슨이 F-15와 F-16에게 밀리지 않고 대등하게 맞섰다고 한다.

근접공중전에서 승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성능은 회전비행을 얼마나 민첩하게 하여 적기를 따돌리고 우세한 비행위치를 선점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상승속도(rate of climb)다. 미국군 주력전투기들인 F-15와 F-16의 상승속도는 초당 254m인데, 러시아가 개조한 미그-21-97의 상승속도는 초당 225m다. 상승속도에서 미그-21-97이 초당 29m 뒤지지만, 실전상황에서 그런 근소한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므로, 숙련된 비행술과 용감성을 지닌 조종사가 미그-21-97을 몰고 근접공중전에 나서면 F-15나 F-16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북이 개조한 조선형 미그-21도 러시아가 개조한 미그-21-97처럼 F-15나 F-16과 맞붙은 근접공중전에서 이길 수 있다는 점이다.
 
▲ <사진7> 조선형 미그-21이 저공침투비행으로 폭격훈련을 실시하면서 지상목표물을 향해 로켓탄을 쏘는 장면.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다른 나라의 미그-21은 주로 근접공중전을 벌이지만, 북의 조선형 미그-21은 근접공중전만이 아니라 저공침투비행과 결합된 폭격전도 수행한다. <사진7>은 조선형 미그-21이 저공침투비행으로 폭격훈련을 실시하면서 지상목표물을 향해 로켓탄을 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미그-21비스는 사거리가 3km인 로켓탄(S-24)을 두 날개 아래에 각각 한 발씩 장착하거나, 또는 57mm 로켓탄(UB-32) 32발이 들어가는 로켓발사기를 두 날개 아래에 각각 한 기씩 장착할 수 있다. 또한 미그-21비스는 고도 4km 이상의 상공을 비행하면서 5킬로톤급 전술핵폭탄(8U49 244N)을 투하할 수 있다.

북은 조선형 미그-21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을까? 2013년 5월 2일 미국 군부가 연방의회에 제출한 군사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인민군 항공군이 보유한 각종 전투기는 730대다. 언론보도에 나온 몇몇 자료들에 따르면, 2012년 현재 인민군 항공군에 실전배치된 미그-21은 약 300대에 이른다. 기존형 미그-21과 조선형 미그-21을 구분하지 못하는 언론매체들은 인민군 항공군이 미그-21 약 300대를 실전배치하였다고 기술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전시에 F-15와 F-16을 상대할 조선형 미그-21 약 300대를 실전배치한 것이다. 북의 다른 고성능 전투기들을 논외로 치고 조선형 미그-21 약 300대를 실전배치한 것만 봐도, 인민군 항공군이 얼마나 강한 전투력을 지녔는지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을 살펴보면, 오래 전에 생산된 전투기라고 해서 무조건 퇴역시키고 신형 전투기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제무기시장에서 신형 전투기를 판매하여 막대한 이윤을 챙기려는 전투기생산국의 군수기업과 국제무기상이 꾸며낸 상술이다.

미국은 청천강호의 항해를 가로막지 못한다

쿠바가 청천강호에 실어 북에 보내려다가 파나마에 의해 압류된 미그-21비스 관련장비는 기체 뒤쪽의 엔진부분을 떼어낸 기체 2개와 엔진 15개다.

언론에 보도된 청천강호에 실린 미그-21비스 조종석이 있는 기체 앞부분을 촬영한 사진을 보면, 다른 전투기들과 달리 미그-21비스 기체의 맨 앞부분에는 가늘고 기다란 쇠막대기 같이 생긴 것이 하나 달렸는데, 그것은 안테나가 아니라 피토관(pitot tube)이라 부르는 유속측정장치다. 미그-21비스의 안테나는 꼬리날개 맨 위쪽에 내장되어 겉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청천강호에 실린 미그-21비스의 유속측정장치 앞부분에는 운송 중의 손상을 예방하기 위해 빨간색 보호장구가 씌워졌다. 미그-21비스의 레이더는 유속측정장치 바로 옆에 내장되어 겉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미그-21비스 기체 앞부분에 파란색으로 칠해진 원뿔꼴은 엔진이 아니라 엔진으로 이어진 공기도관(air duct)으로 들어가는 공기흡입구다. 미그-21비스의 엔진은 기체의 맨 뒤쪽에 내장되어 있다.  

쿠바가 미그-21비스의 기체 앞부분을 북으로 보내려 한 것은, 그 전투기의 항공전자장비를 신형으로 교체해달라고 북에게 요청하였음을 말해준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항공전자공학(avionics) 선진기술을 갖지 못한 나라는 전투기의 전자장비를 신형으로 교체하지 못한다. 쿠바가 보내려 한 미그-21비스의 항공전자장비를 신형으로 교체할 수 있는 북은 그 분야에서 이미 세계 정상급 기술을 확보한 것이다. 미그-21비스의 엔진은 소련이 만든 터보제트엔진(turbo jet engine)인데, 그 엔진의 공식명칭은 투만스키(Tumanskiy)R-25-300이다.

쿠바는 미그-21비스의 투만스키 엔진을 자체로 정비하는 전투기엔진정비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런 쿠바가 투만스키 엔진을 북에 보내려는 것은 그것을 정비하려는 게 아니라 개조하려는 것이다. 놀랍게도, 북은 전투기엔진을 개조하는 고도의 항공장비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은하계열 위성발사체를 자체로 만들어낸 북이 전투기엔진을 개조하는 기술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일 쿠바가 미국의 훼방을 받지 않고 미그-21비스의 항공전자장비와 엔진을 북에 보내 개조하였더라면, 전시에 미국군 주력전투기들에 맞설 항공무력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파나마를 앞세운 미국의 훼방으로 북과 쿠바의 군사협력은 잠시 주춤하고 있지만, 북은 미사일기술자와 항공장비기술자를 쿠바에 보내서라도 쿠바의 방위력증강사업을 적극 지원해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반미자주화를 위해 투쟁하고 사회주의를 수호하는 전선에서 맺어진 두 나라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깊기 때문이다. 2013년 7월 18일 <조선중앙텔레비죤방송>이 방영한 ‘백두의 담력과 배짱을 안겨주시여’라는 제목의 기록영화가 그런 사실을 말해준다.

기록영화에 따르면, 미국의 쿠바침공위험이 심각하였던 1966년 11월 김일성 주석은 장정환 당시 쿠바주재조선대사에게 만일 쿠바가 미국의 무력침공을 받으면 대사관직원들은 물론 쿠바에서 공부하는 북의 유학생들까지 모두 총을 들고 참전하여 쿠바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유격전도 각오하고 준비를 갖추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따라, 당시 쿠바에 주재하던 대사와 대사관직원들, 그들의 아내들까지 쿠바군복을 입고 쿠바혁명군 훈련장에서 전투훈련을 받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 그 기록영화에서 방영되어 시청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는 경우, 현역군인도 아닌 북측 대사, 대사관직원들과 그 아내들, 유학생들이 유격전을 벌인다고 해서 전세가 바뀌지는 않겠지만, 쿠바에서 미국의 침공에 맞서 싸울 유격전을 준비하라는 김일성 주석의 지시는 인민군 지원부대가 지구를 반바퀴 돌아 쿠바에 당도하기까지 쿠바와 함께 싸우려는 북의 강력한 의지를 전선에서 시위하라는 지시였던 것이다.

지난 시기 중동전쟁에서, 베트남전쟁에서, 이란-이라크전쟁에서 미국 또는 그 추종국들의 무력침공에 맞서 싸우며 피를 흘린 북은 미국의 쿠바침공에 맞서 싸울 강력한 전투준비를 갖추었다. 2010년 11월 3일 인민군 군사대표단을 이끌고 쿠바를 공식방문 중이던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은 쿠바혁명군 육군사령관과 만나 회담하면서 “만일 쿠바가 침공을 받으면, 조선은 쿠바와 한 전호에서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북에서는 이것을 ‘국제주의적 의리’라고 말한다.

청천강호는 미국의 훼방으로 잠시 항해를 멈추었지만, ‘국제주의적 의리’를 지키는 길 위에 자기의 항적을 남기며 거친 파도를 헤쳐갈 것이며, 제국주의나라들에게 짓밟히는 전 세계 피압박민족의 반제전선에서 함께 피를 흘린 북의 ‘국제주의적 의리’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2013년 8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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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9

세상이 다 알지 못하는 7.27 핵무력시위

[한호석의 개벽예감](73)
자주민보 2013년 08월 08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북의 7.27 대행진, 어떻게 볼 것인가?

북에서 ‘위대한 조국해방전쟁 승리 60돐’로 경축한 2013년 7월 27일, 예상했던 대로 사상 최대의 행진이 김일성광장에서 진행되었다. 북에서는 그 행진의 공식명칭을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승리 60돐 경축 열병식 및 평양시 군중시위’라 하였는데, 이 글에서는 7.27 대행진이라 부른다. 7.27 대행진은 열병식, 분열행진, 군중행진 순으로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7.27 대행진 진행과정을 담은 북의 기록영화를 정밀분석하면, 그 행진의 전 과정을 관철하며 표현된 총적 주제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7.27 대행진의 총적 주제는 두 가지로 표현되었는데, 북의 서술방식을 빌리면, 반제혁명전쟁의 전승업적을 칭송하는 것과 핵무력에 의해 극대화된 혁명무력을 시위하는 것이다. 그 두 가지 총적 주제에 담긴 본질은, 다시 북의 서술방식을 빌리면, 20세기 중반에 이룩한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21세기 초반에 ‘위대한 조국통일대전의 승리’로 이어가겠다는 정치군사적 의지라고 해석된다. 이러한 나의 해석을 뒷받침해주는 객관적 사실은, 7.27 대행진이 진행된 김일성광장 양쪽 건물벽에 각각 내걸린 초대형 현수막에 적혀 있는 중심구호가 ‘최후승리’와 ‘조국통일’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북의 그런 시각과는 정반대쪽의 대척점에 있는 미국과 남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정전협정 체결을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로 보는 북의 역사인식을 납득할 수 없고, 그 ‘전승’의 연장선 위에 투영되는 ‘조국통일대전의 승리’라는 북의 미래전망도 전혀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정전상태에서 빚어진 그처럼 상반된 역사인식과 상충적인 미래전망은 현 시기 북미관계와 남북관계에서 대결과 격돌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다시 말해서, 6.25전쟁에 대한 역사적 인식과 그 전쟁의 정전상태를 종식시킬 미래에 대한 전망이 무력대치쌍방의 대결과 격돌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것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지난 60년 동안 한반도정세는 언제 또 다시 교전이 재개될지 알 수 없는 긴장된 정전정세, 그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명백하게도, 한반도정세의 본질은 정전정세다. 무려 60년 동안 교전재개위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위태로운 정전정세를 생각할 때, 왜 군사문제를 정세인식의 중심부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다. 

군사문제를 중심부에 두고 정전정세를 인식할 때, 중요한 것은 북의 군사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다. 정전정세인식에서 북의 군사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중요한 까닭은, 6.25전쟁 중에 격돌과 혈전을 거듭한 교전쌍방 사이에서 정전정세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교전과 정전의 일방인 미국은 6.25전쟁을 ‘잊어버린 전쟁’으로 외면해왔고, 앞으로 일어날 북의 ‘조국통일대전’을 ‘생각하기도 싫은 전쟁’으로 전면 부정하고 있는데 반해, 교전과 정전의 다른 일방인 북은, 다시 북의 서술방식을 빌리면, 60년 전의 ‘조국해방전쟁’을 “미국놈들이 항복서에 도장을 찍은” 전쟁으로 인식하고, 앞으로 일어날 ‘조국통일대전’을 “항복서에 도장 찍을 놈도 없게 될” 전쟁으로 전망하는 것이다. 

정전상태를 종식시키는 방도는 오직 두 가지뿐이다. 정전의 국제법적 당사자들끼리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제1방도가 있고, 그와 완전히 다른 제2방도는 정전상태에서 치열하게 맞서온 무력대치쌍방이 교전을 재개하여 어느 한 쪽의 교전상대가 패전, 항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 정전정세는 평화협정 체결이냐 아니면 패전에 따른 항복이냐 하는 갈림길에 다가선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정전상태를 종식시킬 제3방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전 60년의 긴 역사가 말해주는 것은, 정전협정을 체결한 일방인 미국이 사실상 효력을 상실한 그 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려 하기는커녕 평화협정이라는 말조차 아예 입에 올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60년 동안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과 고위관리들 가운데서 한반도 평화협정이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이것은 미국이 평화협정 체결을 무조건 거부하고, 고집스럽게 반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평화협정 체결을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대한 당면과업으로 여기는 북의 일관된 시각에서 보면, 60년 묵은 정전상태를 종식시킬 방도는 교전을 재개하여 교전상대를 무력으로 항복시키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요즈음 북은 “항복서에 도장 찍을 놈도 없게 될 전쟁”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것이다.

설명이 없어도 잘 알 수 있는 것처럼, “항복서에 도장 찍을 놈도 없게 될 조국통일대전”에 대해 언급하는 북의 전쟁담론에는 교전상대를 아주 짧은 시간에 격멸한다는 뜻이 담긴 것이다. 지면제약으로 이 글에서 논할 수 없지만 이전에 내가 인민군의 ‘조국통일대전’ 준비태세와 관련하여 쓴 몇몇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현재 인민군의 정신적 준비, 작전적 준비, 무장력 준비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북의 그런 전쟁담론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런 맥락을 살펴보면, 북에서 말하는 ‘최후결전 시나리오’에서 읽을 수 있는 기습타격전, 고속돌파전, 양익포위전, 조기섬멸전이라는 개념들은 이미 60여 년 전 6.25전쟁 중에 전개된 것일 뿐 아니라 “항복서에 도장 찍을 놈도 없게 될 조국통일대전”에서 더 완성된 형태로 전개될 4대 전쟁개념이며, 북은 바로 그 4대 전쟁개념에 따라 60년 정전정세 속에서 자기의 전쟁수행력을 구축해왔으며, 그렇게 구축된 전쟁수행력은 핵무력 건설이라는 조선로동당의 정치군사노선에 의해 극대화되었으며, 그 당이 건설한 핵무력을 내외에 시위한 계기가 이번에 사상 최대 규모로 진행된 7.27 대행진인 것이며, 그 행진을 통해 특히 핵무력의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 정밀화가 실현되었음을 물리적으로 과시한 것이다.

은회색 옷을 입고 새 모습으로 등장한 화성-13

7.27 대행진에 참가한 인민군 로케트(미사일)종대는 번개계열의 지상대공중로케트(지대공미사일)들과 화성계열의 지상대지상로케트(지대지미사일)들을 앞세우고 행진하였다. 번개계열의 지상대공중로케트들이 김일성광장에 들어설 때, 4대의 전투기로 각각 편성된 3개의 항공군 비행편대가 저공비행으로 광장상공을 지나가고, 화성계열의 지상대지상로케트들이 김일성광장에 들어설 때, 동평양 쪽에서 나타난 5대의 전투기로 편성된 항공군 비행편대가 오색연기를 내뿜으며 광장상공에서 축하비행을 전개할 때, 분위기는 절정에 올랐다. 이처럼 7.27 대행진의 분위기가 화성계열의 지상대지상로케트들이 등장하면서 절정에 오른 까닭은, 핵타격미사일들인 화성계열의 지상대지상로케트들이 이미 완성단계에 이른 북의 핵무력을 시위하였기 때문이다.

기록영화 장면을 살펴보면, 7.27 대행진에 참가한 번개계열의 지상대공중로케트들은 ‘번개-1’, ‘번개-3’, ‘번개-4’, ‘번개-5’다. 이 4종의 지상대공중상로케트들은 2012년 4월 15일 태양절 100주년 경축행진 때도 똑같이 등장하였다. 번개계열의 지상대공중로케트들의 뒤를 이어 화성계열의 지상대지상로케트들이 등장하였는데, 번개계열의 로케트들은 인민군 반항공군의 무기체계이고, 화성계열의 로케트들은 인민군 전략로케트군의 무기체계다.

7.27 대행진에 참가한 화성계열의 지상대지상로케트는 4종이다. 4축8륜 자행발사대에 탑재된 화성-5가 행진대오 맨 앞에 나섰고, 5축10륜 자행발사대에 탑재된 화성-7과 6축12륜 자행발사대에 탑재된 화성-10이 그 뒤를 이었다.

로케트종대의 맨 끝이며 동시에 인민군 분열행진의 맨 끝에 등장한 것은 8축16륜 자행발사대 6대에 각각 탑재된 6기의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3이다. <사진1>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번에 자행발사대에 탑재된 화성-13의 거대한 동체들은 모두 은회색으로 도색되었다. 2012년 4월 15일 태양절 100주년 경축행진에는 위장무늬로 도색된 화성-13 6기가 등장하였는데, 이번 7.27 대행진에는 화성계열의 다른 미사일들과 똑같이 은회색으로 도색된 화성-13 6기가 등장하였다. 8축16륜 자행발사대는 2012년 태양절 100주년 경축행진 때나 이번 7.27 대행진 때나 똑같이 위장무늬로 도색된 것이었는데, 거기에 탑재된 화성-13의 도색만 달라진 것이다. 화성-13 동체 도색이 그처럼 달라진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 <사진1> 2013년 7.27 대행진에 등장한 화성-13의 거대한 동체는 화성계열의 다른 미사일들과 똑같이 은회색으로 도색되었는데, 그것은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3과 그 발사체계를 다종화하였음을 시위한 것이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위장무늬 화성-13은 자행발사대에 탑재된 도로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road-mobile ICBM)이고, 은회색 화성-13은 수직갱발사대에 배치된 대륙간탄도미사일(silo-based ICBM)과 열차발사대에 탑재된 철도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rail-mobile ICBM)이다. 북이 위장무늬 화성-13과 은회색 화성-13을 지난해와 올해 세상에 각각 공개한 것은, 도로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 수직갱배치 대륙간탄도미사일, 철도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모두 실전배치하였음을 시위한 것이다. 수직갱배치 화성-13과 철도이동식 화성-13에 대해서는 이전에 발표한 나의 글들에서 논한 바 있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그런데 기록영화 장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화성-13을 탑재한 자행발사대의 위장무늬 도색에서 차이가 엿보인다. <사진2>에서 보이는 것처럼, 2012년 4월 15일 태양절 100주년 경축행진에 참가한 화성-13 자행발사대의 위장무늬는 색상이 매우 선명한데, 이번 7.27 대행진에 참가한 화성-13 자행발사대의 위장무늬는 <사진1>에서 보이는 것처럼 색상이 그리 선명하지 않다. 이런 도색 차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자행발사대의 위장무늬 도색이 서로 다른 것은, 북이 8축16륜 자행발사대를 자체로 생산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 <사진2> 2012년 4월 15일 태양절 100주년 경축행진에 등장한 화성-13을 탑재한 8축16륜 자행발사대의 위장무늬 도색은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그런데 이번 7.27 대행진에 참가한 8축16륜 자행발사대의 위장무늬 도색은 그리 선명하지 않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예를 들어, 화성-10을 탑재한 6축12륜 자행발사대는 러시아군의 6축12륜 자행발사대와 아주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처럼 외형이 비슷하다고 해서, 북이 6축12륜 자행발사대를 러시아에서 수입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북은 러시아군의 6축12륜 자행발사대를 보고 그와 비슷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외형이 흡사한 것이지, 러시아에서 그것을 수입한 것은 아니다.

그처럼 6축12륜 자행발사대를 자체로 만드는 기술을 이미 오래 전에 확보하였을 뿐 아니라, 위성발사체 로켓엔진까지 자체로 만드는 북이 8축16륜 자행발사대를 만드는 기술을 아직 개발하지 못해서 중국산 8축16륜 목재수송차량을 수입하여 거기에 화성-13을 탑재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북의 기계공업수준을 깎아내리려는 억지로 들린다. 

화성-13 탄두부의 모양은 왜 달라졌을까?

7.27 대행진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화성-13의 탄두부 모양이다. 2012년 4월 15일 태양절 100주년 경축행진에 참가한 화성-13의 탄두부는 <사진2>에서 보이는 것처럼 매우 뾰족하게 생겼는데, 이번 7.27 대행진에 참가한 화성-13의 탄두부는 <사진3>에서 보이는 것처럼 좀 뭉툭하게 생겼다. 7.27 대행진에 참가한 화성-13의 탄두부는 다탄두미사일인 화성-10의 탄두부 모양에 상당히 근접하였다. 이런 탄두부의 변모는, 위장무늬 화성-13이 단탄두 대륙간탄도미사일이고, 은회색 화성-13이 다탄두 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위장무늬 화성-13의 탄두부에는 대형 핵탄두 1기가 들어있고, 은회색 화성-13 탄두부에는 소형화되어 한 다발로 묶인 핵탄두 3기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이 탄두부 외형이 서로 다른 2종의 화성-13을 세상에 공개한 것은, 전략핵탄두의 다종화를 실현하였음을 시위한 것이다.

▲ <사진3> 7.27 대행진에 등장한 화성-13의 탄두부는 뾰족하게 생기지 않았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전시에 인민군 전략로케트군이 다탄두미사일을 쏘는 까닭은, 여러 개 핵탄두들 속에 가짜 핵탄두를 섞어놓아 미국의 미사일방어망을 교란, 돌파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단탄두미사일을 쏘아 맞추는 요격실험에서 번번이 실패하여 쩔쩔매는 미국의 미사일방어망이 화성계열의 다탄두미사일을 요격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화성-13의 탄두부만 주목할 게 아니라 그 동체에 쓰인 고유번호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2년 4월 15일 태양절 100주년 경축행진에 참가한 위장무늬 화성-13의 고유번호들은 ㅈ901010418, ㅈ904830215, ㅈ904830216, ㅈ904830218이었고, 나머지 2기의 고유번호는 기록영화 화면에서 보이지 않았다. 이번 7.27 대행진에 참가한 은회색 화성-13의 고유번호들은 ㅈ904910331, ㅈ904910113, ㅈ907102727이고, 나머지 3기의 고유번호는 기록영화 화면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인민군 무장장비관 전략로케트관에 전시된 화성-13의 고유번호는 ㅈ100021618이다.

위에 열거한 화성-13의 고유번호를 살펴보면, 901, 904, 907, 100으로 각각 시작하는 4종의 고유번호로 계열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화성-13의 고유번호가 901부터 시작하여 100까지 모두 10종의 고유번호로 계열화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0종의 고유번호에 따라 전략로케트군에 실전배치된 화성-13이 모두 몇 기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최소 40기에서 최대 80기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 가운데 단탄두미사일이 몇 기이고 다탄두미사일이 몇 기인지 알 수 없지만, 단탄두를 장착한 위장무늬 화성-13은 북이 8축16륜 자행발사대를 생산한 수량만큼 될 것이고, 다탄두를 장착한 은회색 화성-13은 나머지 수량만큼 될 것이다.

2013년 4월 1일 북의 최고인민회의가 발포한 ‘자위적 핵보유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데 대한 법’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가중되는 적대세력의 침략과 공격위험의 엄중성에 대비하여 핵억제력과 핵보복타격력을 질량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실제적인 대책을 세운다”는 조항이 들어 있는데, 이 조항에 따르면 지금 북은 화성-13을 질적으로, 양적으로 강화하는 중이다.

전설 속의 핵배낭이 현실 속에 나타난 놀라운 사연

7.27 대행진 중에 각종 대구경견인포로 무장한 로농적위군 기계화종대가 등장한 다음에 인민군 기계화종대가 등장하였는데, 위장무늬 군복을 입고 병력수송차량에 25명씩 탑승한 특전병들이 인민군 기계화종대의 맨 앞장에 섰다. 그런데 그 특전병들 중에서 세계 언론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핵배낭을 가슴에 안고 병력수송차량에 탑승한 특전병들이다. 이제껏 전설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세상에 알려진 핵배낭이 <사진4>에서 보이는 것처럼 김일성광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 장면을 바라본 사람들의 놀라움은 컸다.

▲ <사진4> 이제껏 전설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핵배낭이 7.27 대행진 중에 나타나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북의 핵배낭에 관해 논하려면, 전설 속에 존재하는 핵배낭에 얽힌 냉전시대의 기억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군사전문가들 사이에서 핵배낭(backpack nuke)으로 알려진 전술핵무기를 만든 나라는 미국과 러시아 두 나라밖에 없다. 나중에 이스라엘도 핵배낭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런 소문의 진위를 확인할 길은 없다.

냉전시기가 막을 내리고 있었던 1988년부터 소련군사정보국(GRU)의 비밀요원으로 미국에서 활동해오던, 스타니슬라브 루네브(Stanislav Lunev)라는 가명을 사용한 소련군 현역 대령이 소련 해체 직후인 1992년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가 미국에 망명하여 미국정보당국에 넘겨준 정보에 따르면, RA-115라 부르는 극소형핵무기가 소련군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소련군의 극소형핵무기를 묘사하면서 지름이 13cm이고, 길이가 62cm이고, 무게가 45kg이고, 일반폭약(TNT) 190t의 폭발력을 지닌 포신형 핵탄(gun-type nuclear bomb)이라고 하였다. 이 정도의 부피와 무게를 가진 핵무기는 핵배낭보다 더 작은 핵가방(suitcase nuke)이다.

당시 루네브가 말한 소련의 핵가방에 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은 미국정보당국은 망명자가 자기 ‘몸값’을 올리기 위해 과장한 이야기로 여겼는데, 1997년 미국 연방하원 군사위원회의 연구 및 개발에 관한 소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한 러시아군 안보책임자 알렉산더 레베드(Alexander Lebed)의 증언에 의해서 소련의 핵가방 이야기가 과장만은 아닌 것 같다는 재평가가 제기되었다. 청문회에서 레베드는 자기가 통제하고 있었던 소련군 핵무기고에서 극소형핵무기 100여 기가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말하였다. 그의 청문회 증언에 따르면, 소련이 해체되는 극심한 혼란 속에서 소련군이 핵가방 100여 개를 잃어버린 특대형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유에스에이 투데이(USA TODAY)> 2007년 3월 12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핵과학자들은 부피와 무게가 그처럼 작고 가벼운 극소형핵무기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논증하였다. 그리하여 루네브와 레베드가 말한 소련의 핵가방은 냉전시대의 전설 속에 파묻혀 사람들의 기억에서 차츰 희미해졌다.  

그런데 지난 냉전시기에 미국이 핵가방보다 더 크고 무거운 핵배낭을 만든 것은 공공연한 비밀로 세상에 알려진 바 있다. 미국이 만든 핵배낭의 공식명칭은 MK-54 특수원자파괴탄(Special Atomic Demolition Munition/SADM)이다. 미국군사전문가들의 자료에 따르면, 이 핵배낭은 데이비 크로킷(Davy Crocket)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는데, 지름이 20cm, 길이가 58cm의 특수합금 원통에 무기급 핵분열물질이 들어 있고, 그 무게는 32kg이며, 폭발력은 1킬로톤이며, 폭발하는 경우 반경 800m 안의 모든 물체를 날려버린다. 거기에 더하여 고성능 고폭장약, 기폭장치, 중성자 방출장치, 건전지 등 다른 내장물들의 무게까지 합하면, 미국의 핵배낭은 총무게가 74kg으로 늘어나고 부피도 등산배낭만큼 커진다. <사진5>에서 보이는 것처럼, 미국이 만든 핵배낭은 원통형으로 생긴 대형배낭이다.

▲ <사진5> 이것은 냉전시기 미국이 만든 핵배낭은 원통형으로 생긴 대형배낭이다. 폭발력은 1킬로톤이며, 무게는 74kg이다. 이 핵배낭은 이미 24년 전에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전설의 핵무기로 되었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소련을 상대로 핵군비경쟁을 치열하게 벌이던 냉전시기에 미국군 지휘부는 핵배낭을 공수특전대에 배치하였는데, 1989년까지 단계적으로 해체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미국의 핵배낭은 이미 24년 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전설의 핵무기로 되었다. 이처럼 전설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세상에 알려진 핵배낭이 7.27 대행진 중에 사상 처음으로 세상에 자기 모습을 드러냈으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2013년 7월 28일 국방부 출입기자단 앞에서 남측 국방부 대변인은 “핵배낭은 굉장히 크기가 작은데 그것을 소형화하는 것은 굉장히 높은 기술이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그 정도 핵배낭을 만들 수 있는 수준에 와있다고 평가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인민군 핵배낭의 출현에 놀라 횡설수설한 것이다. 그의 발언을 횡설수설이라고 보는 까닭은, 그가 “(핵배낭은) 더티밤(dirty bomb)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을 터뜨리면 방사능누출이 많아서 한 지역이 완전히 오염된다”는 무식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핵배낭과 방사능오염탄(dirty bomb)을 혼동하였기 때문이다. 핵배낭은 고도의 핵기술을 보유한 핵강국이 만드는 첨단전술핵무기의 일종이고, 방사능오염탄은 테러범들이 고준위방사성물질을 국제암시장에서 밀거래하여 만드는 조악한 테러무기의 일종이므로, 양자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큰 것이다.

핵배낭을 실전에서 사용하는 목적은 강력한 파괴력에 있는 것이지 방사능오염에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군사전문가들의 자료에 따르면, 핵배낭이 폭발하였을 때 방출되는 방사능은 폭발 직후부터 4시간 동안 약 90%가 남아 있지만, 2일이 지나면 약 1%로 크게 감소되고, 12일이 지나면 방사능측정기로 추적해야 오염여부를 판별할 수 있을 만큼 극소량으로 감소된다고 한다. 일본 후쿠시마원전 사고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원전사고로 발생하는 방사능오염이 핵탄폭발에서 발생하는 방사능오염보다 100만 배 이상 더 심하기 때문에, 대형원전사고의 방사능오염이 발생한 나라에서는 모든 생물체들이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방사능오염의 위험성을 따져보면, 핵탄보다 원전이 비할 바 없이 더 위험한데도 일본은 인민군의 미사일타격권 안에 수많은 원전을 건설해놓았으니, 오도가도 못하게 된 것이다.

기록영화 장면을 살펴보면, 위장무늬 군복을 입은 인민군 특전병들이 가슴에 안고 있는 핵배낭의 크기는 대략 가로 30cm, 세로 45cm, 두께 20cm인 것으로 보인다. 그처럼 북이 만든 핵배낭은 미국이 만든 핵배낭보다 크기와 부피가 더 작아서 전설 속의 핵가방에 더 가까운 형태로 보인다. 북의 핵무력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7.27 대행진에 등장한 핵배낭에 대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식의 썰렁한 반응을 보였지만, 북의 핵배낭에 관한 진실을 알려면 아래의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9년에 방북한, 파키스탄의 핵개발 총책임자 압둘 카디르 칸(Abdul Qadeer Khan) 박사가 평양에서 자동차로 2시간 떨어진 지하핵시설을 방문하여 운반대 위에 놓인 3기의 핵탄두를 관찰하였을 때 그 핵탄두의 지름이 약 60cm라고 회고한 바 있는데, 이번 7.27 대행진에 등장한 핵배낭은 그 핵탄두보다 크기와 부피가 훨씬 더 작은 것이다. 14년 전 칸 박사가 북에서 관찰한 핵탄두를 소형핵탄이라고 한다면, 이번 7.27 대행진에 등장한 핵배낭은 극소형핵탄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북이 2006년 10월 9일에 실시한 지하핵실험에서 리히터 규모로 진도 3.6∼4.2에 이르는 인공지진파가 측정되었고, 당시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은 일반폭약 0.5∼0.9킬로톤 규모의 폭발력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한 바 있는데, 이것은 북이 정밀한 핵폭발장치를 내장한, 1킬로톤 이하의 폭발력을 지닌 극소형핵탄을 만들었음을 물리적으로 입증한 것이다. 7.27 대행진에 등장한 북의 핵배낭은 <사진6>에서 보이는 미국의 핵배낭처럼 매우 정밀하게 설계된 것이다.

▲ <사진6> 이것은 미국이 만든 핵배낭에 들어가는 정밀한 핵폭발장치들이다. 사진의 왼쪽으로부터 살펴보면, 원통형 특수합금상자, 극소형핵탄, 암
암호해독장치, 기폭장치 등이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2013년 5월 21일 <로동신문>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핵무기는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 정밀화된 위력한 전쟁억제력”이라고 지적하고, “오늘 우리는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 정밀화된 핵탄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고 서술한 바 있다.

전시에 핵배낭을 멘 인민군 특전병들은 어디로 달려가는가?

핵배낭을 가슴에 안고 7.27 대행진에 참가한 인민군 특전병 225명은 평안남도 덕천군에 야전지휘소가 있는, 인민군 최정예 특전부대인 제11군단에 소속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판단하는 까닭은, 핵배낭특전병대오가 제11군단 소속의 다른 특전병대오와 함께 7.27 대행진에 참가하였기 때문이다. 7.27 대행진에 참가한 특전병대오는 저격보총을 든 저격병 225명, 강하복장을 하고 전투배낭을 가슴에 안은 항공륙전병 225명, 핵배낭을 가슴에 안은 핵배낭특전병 225명이다.

<사진7>에서 보이는 것처럼, 7.27 대행진 중에 무인타격기종대가 김일성광장에 들어설 때, 3대로 편성된 수송기 편대가 저공비행으로 광장상공을 지나갔는데, 그 거대한 수송기들은 50t의 병력과 군사장비를 싣고 시속 900km의 속도로 4,300km를 날아가는 중거리 전략수송기 일류신(Il)-76이다. 인민군 항공륙전병은 전시에 바로 그 전략수송기를 타고 적진 후방에 낙하할 것이다.

▲ <사진7> 7.27 대행진 중에 무인타격기종대가 김일성광장에 들어설 때, 거대한 중거리 전략수송기 일류신-76 3대가 광장상공을 지나갔다. 전시에 그 전략수송기에는 인민군 제11군단 예하 항공륙전려단 소속 특전병들이 타게 된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그런데 핵배낭특전병과 항공륙전병이 7.27 대행진에 참가한 것을 보면, 핵배낭특전병이 항공륙전병과 별도로 편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11군단 예하 10여 개 여단들 가운데는 벼락이라는 별칭을 지닌 저격려단, 우뢰라는 별칭을 지닌 항공륙전려단, 번개라는 별칭을 지닌 경보병려단 등이 있는데, 이번에 7.27 대행진에 참가한 특전부대를 보면 핵배낭려단도 있는 것이 확실하다.

이처럼 핵배낭려단과 항공륙전려단이 분리되어 있는 것은, 전시에 핵배낭려단이 전략수송기를 타고 공중낙하로 적진 후방에 침투하는 부대가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서, 핵배낭려단은 북에서 말하는 ‘조국통일대전’이 개전되기 직전에 ‘밀로’라 부르는 남진갱도를 통해 적진 후방에 침투하는 사전침투부대인 것이다. 핵배낭려단은 그처럼 사전에 침투하여 주한미국군기지들과 한국군기지들 인근에 핵배낭을 매설한 뒤 현장을 빠져나가 대기하다가 개전시각에 맞춰 원격조종장치로 핵배낭을 폭발시킬 것으로 보인다.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핵배낭이 폭발 뒤에 주한미국군기지들과 한국군기지들에는 지름이 약 1.5km에 이르는 거대한 분화구만 남아 있을 것이다.

1996년 9월 19일에 발매된 <시사저널> 제360호 실린, 인민군 항공륙전려단을 제대한 탈북자의 말에 따르면,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민군 특전병들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가 명령만 내리신다면 폭탄을 안고 적진에 투하하겠다는 맹세문에 서명하고, 매일 같이 암송해 정신무장이 잘 되어 있다”고 한다. 전시에 그들이 가슴에 안고 적진으로 나아갈 폭탄은 일반폭약으로 만든 폭탄이 아니라 극소형핵탄으로 만든 핵배낭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대북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데일리 NK> 2011년 11월 25일부 기사에 따르면, 여단급 핵배낭부대가 평안북도 동창군에 주둔한다고 하며, <동아일보> 2001년 3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제11군단 예하 1개 여단의 병력은 6,000∼8,000명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민군 핵배낭려단의 병력은 최소 6,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최소 6,000명에 이르는 핵배낭려단 특전병들 가운데, 전시에 핵배낭을 메고 적진 깊숙이 사전침투할 병력이 몇 명인지 알 수 없지만, 각지에 널려 있는 주한미국군기지들과 한국군기지들은 바로 그 핵배낭려단 때문에 가장 심각한 궤멸위험에 처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이 주한미국군기지와 한국군기지를 거대한 분화구로 만들어버릴 핵배낭을 7.27 대행진 중에 공개한 것은, 평화협정 체결을 끝내 거부하면서 대북전쟁연습을 강행해온 미국에 대한 격렬한 적개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요즈음 북에서 나온 각종 반미선전화들 가운데는 미국의 지배계급이 아연실색할 대미적개심을 표출한 선전화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구호가 적혀 있다. “미국, 너는 없어져야 한다!”(2013년 8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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