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27

평양시 만경대구역 축전1동

진실의 말팔매 <11>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조선일보> 2011224일 보도에 따르면, 영국 왕립예술학교에 유학하였다는 김 아무개라는 사람이 영상물(DVD) 500개를 제작하였는데, 북측을 드나드는 조선족에게 부탁하여 20106월 그 영상물을 북측에 밀반입시켰다고 한다. 보나마나 그 영상물은 북측을 교란시키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추악한 선전물이다. 보도기사에서 그는 "평양에 하나 뿐인 피자 레스토랑은 북한 특권층만 이용하는 문화봉쇄의 상징"이기 때문에 "북한 체제가 잘못돼 있다는 것을 (북측 인민들에게) 문화적인 방식으로 알리고 싶어서" '모두를 위한 피자'라는 제목의 영상물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만일 평양시민들이 그런 비방중상 망언을 들으면, 분노하기 전에 어이 없어 허탈감을 느낄지 모른다. 왜 분노가 아니라 허탈감일까? 북측에 있지도 않은 '특권층''피자 레스토랑'을 독점적으로 이용한다는 소리는 너무도 역겨운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대북 혐오감이 극에 이르러 정신착란을 일으킨 중증환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토록 역겨운 거짓말을 영상물로 제작하여 북측에 밀반입시킬 수 있을까!

정신착란으로 토해낸 듯한 역겨운 거짓말은 대꾸할 가치도 없으니, 평양시민들이 즐기는 '이딸리아 료리'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로 넘어가는 게 좋을 듯하다. 2008628<조선신보> 평양발 기사는 평양시 창광거리 련화동에 있는 이딸리아 요리 전문식당 '별무리 차집'(북측에서는 사이시옷이 쓰이지 않으므로 찻집으로 발음함)에 대해 보도하였다. 그 식당을 왜 차집으로 부르는지는 알 수 없으나, 까페(cafe)라는 외래어를 피해 우리말을 살려 쓰려다보니 차집이라는 말을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말 이름이 정겨운 '별무리 차집'2006년에 문을 열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삐쨔(pizza)나 빠스따(pasta)는 세계 각국에 퍼져나간 이딸리아 요리다. 남측에서는 이탈리아, 피자, 파스타라고 각각 발음하는데, 그런 발음이 어디서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빠스따를 파스타로 발음하는 것은 미국식 발음으로 생각되지만, 미국에서는 이탈리아가 아니라 이들리라고 발음하며, 피자가 아니라 핏쨔라고 발음한다. 이탈리아, 피자라고 발음하는 것은, 유래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혼란이다. 미국에게 사상문화적으로도 예속된 사회에서는 외래어마저도 미국식을 추종하여 발음하거나 또는 정체불명의 발음혼란에 빠져 있으니, 어찌 개탄할 노릇이 아닌가. 어떤 나라에서 쓰이는 고유명사는 그 나라 사람들이 읽는 대로 발음하고 적는 것이 옳은데, 이딸리아, 삐쨔, 빠스따라고 발음하는 것이 원음에 아주 가까운 발음이다.

그런데 2009314<조선신보>는 평양발 기사에서 "본격적인 이딸리아 료리 전문식당"200812월에 평양시 광복거리에 개업하여 "련일 시민들로 흥성이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200812월에 개업한 이딸리아 요리 전문식당의 이름은 무엇일까? 식당 이름은 따로 없고, 이딸리아 료리 전문식당이 그 식당의 이름이다. 이딸리아 요리만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식당 이름에서부터 느낄 수 있다. 그 식당이 그런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된 데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위의 보도에 따르면, 평양에 이딸리아 요리 전문식당이 문을 열기 전에도 평양에 있는 여러 식당들에서 오래 전부터 삐쨔나 빠스따를 봉사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딸리아 요리 몇 종류를 조선요리들 속에 끼워넣고 봉사하였으니 전문성이 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북측에서는 조선요리에 비해 외국요리를 그닥 중시하지 않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어서 이딸리아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특별한 식당을 세울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그런데 <조선중앙통신> 2009428일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우리 인민들도 세계적으로 이름난 료리들을 맛보게 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딸리아 료리를 전문으로 봉사하는 식당을 꾸리도록 해주시였다"고 한다. 북측 인민들이 세계적으로 이름난 요리들을 맛보게 하는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2012년 구상'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세계적으로 이름난 요리들을 북측 인민들이 맛볼 수 있도록 외국요리 전문식당을 건설하도록 조치할 때, 왜 프랑스 요리가 아니라 이딸리아 요리를 선택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프랑스 요리가 귀족적인데 비해 이딸리아 요리는 대중적(인민적)이어서 그렇게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2012년 구상'에 따라, 이딸리아 요리 전문식당 건설사업이 추진되었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북측에는 이딸리아 요리에 정통한 전문요리사가 없어서 시행착오만 되풀이하였다. 그런 형편에 대해 보고를 받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85월 북측 요리사들을 삐쨔와 빠스따의 본고장들인 나뽈리와 로마에 보내 요리실습을 받고 오도록 배려하였고, 북측 정부당국은 이딸리아 요리에 쓰이는 각종 식재료를 이딸리아 원산지에서 직수입하여 식당에 보내주는 공급체계를 세웠다. 이딸리아 '정통요리'의 고유한 맛은 그렇게 하여 재현될 수 있었다.

그 전문식당의 차림표에 적혀있는 삐쨔 종류를 보면, 삐쨔 꼰 쌀라다(pizza con salada), 삐쨔 멜란자네 주끼네(pizza melanzane zucchine), 삐쨔 꼰 마리나라(pizza con marinara), 삐쨔 알 프르띠디마레(pizza al fruttidimare), 삐쟈 꼰 뻬뻬로니(pizza con peperoni), 삐쨔 깔조네(pizza calzone), 삐쨔 나뽈리(pizza napoli) 등이다. 이딸리아 음식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설명을 듣지 않으면 어떤 맛이 나는 삐쨔인지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정통삐쨔들이 즐비하다. 삐쨔가 그러하니, 빠스따는 또 얼마나 이딸리아식 고유의 맛을 담은 것들인지 여기서 열거하기도 힘들다.

평양시민들이 조선요리를 즐겨 먹다가 가끔 이딸리아 정통삐쨔를 맛본다면, 서울시민들은 미국식 변형피자를 아주 즐겨 먹는다. 특히 남측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미국식 피자맛에 중독된 나머지 우리 전통음식을 기피하는 부작용도 생긴다고 한다. <연합뉴스> 2008727일 보도에 따르면, 남측 중고생 가운데 피자, 햄버거 같은 미국식 간식을 자주 먹는 사람의 비율은 70%에 이르렀다.

남측 국민들에게 미국식 변형피자를 대량판매하는 것은 미국의 거대한 요식업 재벌들인 '도미노 피자(Domino's Pizza)', '피자 헛(Pizza Hut)', '파파 존스(Papa John's)'. '도미노 피자' 매장 345, '피자 헛' 매장 340, '파파 존스' 매장 51개가 남측 각지에 퍼져 있다. 특히 '피자 헛'은 세계 최대의 미국 요식업 재벌 '! 브랜즈(Yum! Brands)'의 자회사다. 세계 100개 나라에 34,000개 식당을 차려놓은 요식업 재벌 '! 브랜즈'2010년도 총매상은 110억 달러다.

평양시민들은 삐쨔를 먹으면서 그것이 이딸리아 정통삐쨔인 것을 알지만, 서울시민들은 미국의 요식업 재벌들이 제멋대로 변형시킨 피자를 먹으면서도 자신들이 이상한 피자를 먹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평양시민들은 자신들이 사회주의체제에서 사는 덕으로 정통삐쨔를 먹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서울시민들은 각자 지불능력으로 변형피자를 사먹는다는 착각에 빠진다. 서울시민들은 미국식 변형피자를 사먹는 순간, 자기들이 미국의 요식업 재벌들이 장악한 거대한 피자시장에 갇혀버린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지와 착각은 '노예의 덕'이다.

앞으로 6.15 민족공동행사가 재개되면, 이전처럼 남측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북할 텐데, 평양에 간 김에 사회주의 급양봉사망에서 공급하는 이딸리아 정통삐쨔 한 번 맛보는 건 어떨까? 이딸리아 전문 료리식당은 평양시 만경대구역 축전1동에 있는데, 전화번호는 02-721-2768이다. (2011226일 작성)

2011/02/26

쎅트는 '개울'에서만 산다

변혁과 진보 (23)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사전 속의 쎅트, 현실 속의 쎅트
 
1948820일 문우인서관이 서울에서 발간한 '사회과학대사전'이 있다. 백남운, 전석담, 이석태를 비롯한 당시 쟁쟁한 진보적 지식인 37명이 공동집필한 사전이다. 그 사전에 쎅트(sect)라는 문항이 있다. 좀 길지만, 원문을 그대로 인용한다.

"쎅트는 종파로 번역된다. (줄임) 그러한 쎅트주의적 조직과 정책은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하여 발생한다.
첫째는, 대중 속에서 공작하는 경험이 부족하여 대중의 상태와 이익과 요구와 기분을 충분히 체득하지 못하고, 그것에 따른 공작방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
둘째는, 전략과정을 잘못 규정하여 대중보다 너무 급진하였거나 너무 낙후된 데서 발생한다.
셋째는, 소뿌르죠아들이 공산주의자란 가면을 쓰고 나온 데 있다. 그의 계급적 본능과 감정은 신민주주의운동과 무산계급의 해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소뿌르죠아적 지위욕, 관료욕을 충족시키는 데 최대의 주의를 돌리고, 아첨자, 추세자를 등용하고, 유능인, 직설자를 기피한다. 따라서 전 대열에는 만족한 소뿌르죠아들과 불평한 소뿌르죠아들로 충만하고, 그 비위에 알마진(알맞은-옮긴이) 지위를 획득하기와 그것을 쟁탈하기에 정력의 대부분을 소비하고 있을 때, 대중은 그들로부터 피리(避離)하여 갈 것은 필연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서 쎅트주의와 그 조직은 형성된다."

63년 전에 나온 오래된 해설이지만, 쎅트의 해악을 명백하게 설파한 글이다. 쎅트라는 외래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종파라 하는데, 종파라는 말은 남측에서는 쓰지 않고 북측에서 자주 쓰는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친북'이니 '종북'이니 하는 비방딱지를 붙이려는 세력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판이므로, 북측에서 쓰는 종파라는 말을 놓아두고 이 글에서는 하는 수 없이 쎅트라는 외래어를 쓸 수밖에 없다.

60여 년 전,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이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었을 때, 그 투쟁동력을 안으로부터 갉아먹고 진보정치운동을 결국 분열과 좌절의 낭떠러지로 끌어간 치명적 요인들 가운데는 미군정과 극우세력의 극렬한 탄압만이 아니라 쎅트의 준동도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당시 이 땅의 정치현실에서 쎅트의 해악이 얼마나 심하였으면, 8.15 해방 직후 처음으로 펴낸 사회과학사전에서 쎅트의 해악에 대해 그처럼 긴 해설을 달아놓았을까.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쎅트가 추구하는 목적은 진보정치운동의 이익을 훼손하여 개인의 이익 또는 자기 분파의 이익을 거머쥐는 것이다. 쎅트는 공명심과 출세야욕에 사로잡힌 소수파에 의해서 형성된다. 쎅트는 입으로는 진보를 부르짖으면서도 진보정치운동을 자기들의 출세야욕과 직위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쎅트의 활동방식은 주도권 쟁탈, 이간분열, 음해모략, 파벌대립이다. 쎅트의 해악은 연대연합을 반대하는 것이고, 심한 경우에 적대세력과 공모결탁하여 진보정치운동을 파멸로 끌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진보정치운동에 쎅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진보통합당 건설이 난항을 겪고 있는 요즈음 통합 분위기를 해칠까봐 어떤 특정한 인사들을 쎅트라고 지목하기를 자제하고 있지만, 쎅트의 존재를 부정할 사람은 없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이 글에서 말하는 쎅트는 현존하는 어느 특정정당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라 어느 특정정당 안에 존재하는 소수파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현존하는 특정정당과 쎅트를 동일시하는 것은 오류다.

우리 진보정치운동에 쎅트가 존재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 진보정치운동이 쎅트의 준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한 더 이상 강화발전되기 힘들다는 것을 뜻한다. 만일 쎅트의 준동을 뻔히 보면서도 못 본 척 침묵하면서 진보정치운동의 강화발전을 추진하려 한다면, 그것은 몸 안에 암세포가 생긴 중환자가 자기의 발병사실에 대해 쉬쉬하면서 건강한 척하는 어리석음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현 시기 진보정치운동에 나타난 쎅트 현상들
 
명백히 말하자면, 지금 우리 진보정치운동에는 쎅트와 유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형적인 쎅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 전형적인 쎅트 현상은 현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치운동에 음으로 양으로 해악을 끼치고 있다. 쎅트는 우리 진보정치운동에 어떤 해악을 끼치고 있는 것일까?

첫째, 위에서 지적한 대로, 쎅트의 가장 큰 해악은 정치연합을 반대하는 것이다. 정치연합을 반대하는 쎅트 현상은, 이러저러한 구실을 내걸면서 반이명박 연합정치를 반대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명박 정권에 대한 각계각층 대중의 공분이 겹쌓이고 있는 지금, 그 정권을 반대하는 다양한 '색깔'의 정치세력들이 폭넓은 범야권 정치연합체를 결성하여 투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상식 중의 상식이다.

그런데 그처럼 이해하기 쉬운 상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테면, 반이명박 연합정치를 실현하면 진보정당의 '색깔'을 잃어버리게 된다느니 민주당이 설치해놓은 틀 속에 진보정당이 갇히게 된다느니 하는 알쏭달쏭한 반대론을 꺼내들고 반이명박 연합정치가 실현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보정치운동을 대중으로부터 고립시켜 존재감 없는 소수집단으로 가두어놓으려는 해악이 아니면 무엇일까.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땅의 쎅트가 반이명박 연합정치를 반대하는 진짜 원인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진보정당의 독자성을 고수옹호하려는 선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 원인은 범야권 정치연합체로 결집하는 경우, 그 정치연합체 안에서 쎅트의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데 있다.

개울에서 사는 송사리가 강에 나가서 살지 못하는 것처럼, 쎅트는 개울에서 벗어나 진보와 개혁이 만나 흐르는 강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고, 앞으로 언젠가는 자기들이 사는 개울로 강물이 흘러들어오리라는 망상을 품고 산다.

쎅트는 진보와 개혁이 만나 정치연합을 강화발전시키면 자기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기는커녕 자기 존재감마저 잃어버리게 되므로, 정치연합을 실현하는 공명정대한 대의를 이러저러한 구실을 내걸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둘째, 정치연합을 반대하는 쎅트의 해악은, 반이명박 연합정치 실현을 반대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진보통합당을 건설해야 하는 당면한 요구에 대해서도 난관을 조성하고 있다. 진보정치운동을 분열시킨 상처를 다시 건드리지 말고 진보양당이 먼저 통합하여 중심을 잡고 나서, 통합된 진보양당이 다른 진보정치세력들과 손잡고 진보통합당을 건설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이 분명한데도, 통합문제를 양자회담이 아니라 8자회담으로 끌고 가서 통합과정을 한층 더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려는 것이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땅의 쎅트가 진보통합당을 건설하기 위한 양자회담을 자꾸 회피하면서 8자회담을 고집하는 까닭은, 통합문제를 8자회담으로 끌고 가야 통합과정의 주도권을 자기들이 장악하기에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쎅트에게 있어서는 주도권 장악이 최우선 과제이고, 진보통합당 건설은 어쩌다 되면 좋고 안 되도 할 수 없다는 식이다.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쎅트 현상이 아닌가.

셋째, 이 땅의 쎅트는 진보정치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자기들의 경쟁상대에게 비방딱지를 붙여놓고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려는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은 피와 땀과 눈물을 배신했고, 억압받고 소외된 자들의 염원을 조롱했다. 그 핵심원인이 종북파에게 있다"고 단죄하고, "진보정당이라는 껍질 속에 감추어져 있던 민주노동당의 종북주의와 패권주의, 회계문제 등 온갖 문제점을 사회와 대중 앞에 남김없이 폭로하면서, 그 주도세력을 전 사회적으로 고립시"켜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면서 진보정치운동을 분열시킨 쓰라린 경험은 쎅트의 해악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준다.

국민참여당을 창당한 친노인사들이 민주당과 결별할 때, 그들은 민주당에게 어떤 비방딱지를 붙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쎅트는 민주노동당에서 탈당할 때, 민주노동당을 '종북파'가 주도하는 '종북당'이라는 흉칙스러운 비방딱지를 붙였다. 친북이라는 말 자체를 불온시하는 반북세력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친북 수준을 넘어서 종북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적대행위인지는 누구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잘 알 수 있다. 민주노동당의 정적인 한나라당도 민주노동당을 '종북'이라고 비방하는 악선전을 감히 하지 못했는데, 쎅트는 '종북'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서 민주노동당을 '종북파'가 주도하는 '종북당'이라고 낙인 찍었다.

반북성향을 지닌 사람들의 시각으로 볼 때,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민주노동당의 정치활동이 혹시 친북적인 행위로 오해될 수 있다는 점은 이해할만 하나, 그 당의 정치활동을 '종북'으로 낙인 찍는 일은 상대의 정치생명을 끊어놓으려는 적대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과거 상처를 건드리지 말고 진보통합당을 건설해야 할 오늘에 와서도 쎅트의 '종북문제' 제기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쎅트와 손잡고 진보통합당을 건설한다고 해도, 통합당 안에 들어간 쎅트가 '종북문제'를 들고나와 끊임없이 분란을 일으키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넷째, 쎅트의 해악은 남북관계를 대결국면으로 끌어가려는 한나라당이나 극우세력과 똑같은 목소리를 냄으로써 평화통일운동을 가로막는 것이다. 평화통일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혹은 북측에 대해 심리적 거리감을 느끼는 경우 그 문제에 대해 침묵하거나 북측에 대해 중립적 태도를 취하면 될 것이고, 공개석상에서까지 북측을 노골적으로 비방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이 땅의 쎅트는 마치 한나라당과 입을 맞춘 듯이 "북한의 급변사태나 붕괴 가능성을 열어놓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독재세습'이니 '군사봉건왕조''북한 인권문제'니 하는 따위의 극우적인 망언을 진보의 이름으로 남발하고 있다. 이 땅의 쎅트가 그처럼 대북 비방망언을 늘어놓고 있지만,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 스스로를 한나라당의 '2중대'로 전락시키는 어리석은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진보는 쎅트의 준동으로 망한다
 
우리식 변혁담론에서 말하는 연합정치의 원칙은, 단결과 투쟁의 양면성을 지닌다. 그런데 연합정치를 실현한다고 해서 쎅트의 해악을 어물어물 방관하거나 쎅트에게 양보나 하면서 덮어놓고 타협과 단결만 추구한다면, 본의 아니게 쎅트의 준동을 용인하게 되고, 그 결과는 연합정치의 최종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쎅트의 준동을 억제하는 반쎅트투쟁은 현 시기 연합정치의 실현을 보장하는 중요한 원칙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새삼스러운 말로 들릴지 몰라도, 진보의 탈을 쓴 쎅트는 우리 진보정치운동이 안고 있는 불행이다. 수구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속설이 있는데, 그것은 비과학적인 말이다. 수구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쎅트의 준동으로 망한다고 해야 과학적인 언사가 될 것이다.

쎅트는 진보정치를 망하게 하는 자해요인이므로, 진보정치운동이 쎅트의 준동을 방관하는 것은 진보정치운동사의 역사적 교훈을 망각한 착오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민주노동당은 마땅히 진보양당 통합을 실현해야 하지만, 통합대상 안에 존재하면서 사실상 진보양당 통합을 반대하는 쎅트와도 통합해 보려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민주노동당은 진보양당 통합과 반쎅트투쟁을 병행 추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개울은 강보다 더 맑고 깨끗하지만, 개울에 사는 것은 잉어가 아니라 송사리다. 잉어는 송사리가 사는 물에서 살지 않는다. 맑고 깨끗한 개울에는 계급적 원칙과 진보정당의 독자성이 흐르지만, 그것은 이 땅의 근로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낱 송사리의 심리적 자기위안을 위한 것이다. 계급적 원칙과 진보정당의 독자성을 거스르는 험상궂은 바위들이 강물 곳곳에 버티고 있지만, 잉어는 그런 험한 강에서 이리저리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 무심히 흐르는 물결은 바위에 부딪쳐 부서져도,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는 잉어는 결코 바위에 부딪치는 일이 없다.

강이 싫어 개울에서만 살려는 쎅트는 그들이 소원하는 대로 맑고 깨끗한 개울에서 살면 될 것이다. 알에서 깨어난지 10년이 되었어도 아직 개울을 벗어나지 못한 민주노동당은 송사리와 결별하고 강으로 나아가야 힘센 잉어로 자랄 수 있다. (2011225일 작성)

2011/02/23

그들이 사는 아파트 내부는 어떻게 생겼을까?

진실의 말팔매 <10>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2011년 2월 11일 <조선일보>가 흥미로운 사진기사를 실었다. 탈북자들이 운영하는 대북 방송국에서 보내준 것이라고 하면서, 평양의 어느 집안을 촬영하였다는 사진 일곱 장을 보도한 것이다. "최근 북한을 방문한 중국 소식통을 통해 사진을 입수했"고 "고위급 간부들이 사는 집"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그런데 사진을 촬영한 시점부터 거짓이다. 사진 일곱 장 가운데 첫째 사진에 나오는 중년여성과 젊은 여성이 소매 짧은 옷을 입은 것으로 봐서 여름철에 찍은 사진이 분명하고, 더욱이 벽걸이 달력의 일부가 촬영된 셋째 사진에는 8월로 넘겨져 있는 달력이 살짝 보인다. 8월에 찍은 사진이 분명한데도, 최근에 찍은 사진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문제는, 그 사진이 <조선일보>의 설명 대로 정말 평양에 사는 고위간부의 집안을 촬영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평양에 사는 고위간부의 집안을 촬영하였다는 사진설명을 달아놓은 근거는 첫째 사진에 들어있다. 첫째 사진을 보면, 김일성 주석 초상, 김정일 국방위원장 초상, 그리고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함께 찍은 사진이 거실벽면에 있다. 그러한 초상과 사진이 촬영된 것만 본다면, 그 사진이 평양에 있는 어느 아파트 내부를 촬영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독자들의 눈을 속이는 속임수다. 그 사진이 평양에 사는 고위간부의 집안을 촬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래와 같이 설명된다.

첫째, 부엌을 촬영한 사진에는 조리대가 보이는데, 조리대 오른쪽 끝에는 남비 두 개가 얹혀 있는 가스레인지가 있다. 이동식 가스레인지가 아니라, 부엌 창문 쪽에서 들어온 가스관이 연결된 고정식 가스레인지다. 그런데 평양에 건설된 모든 아파트 부엌의 조리대에는 가스레인지가 없고 전기가열대만 있다. 북측에는 도시가스가 아예 없다. 도시가스가 없는 평양에서 어떻게 고정식 가스레인지를 쓸 수 있을까? 그 사진은 평양에 있는 어느 아파트 내부를 촬영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 있는 어느 아파트 내부를 촬영한 것이 분명하다.

둘째, <조선일보>가 보도한 일곱 장 사진 가운데 창문이 촬영된 것은 거실 사진 세 장이다. 그런데 거실에 있는 대형 창문을 커튼으로 가려놓아 밖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커튼을 열어놓은 침실 창문과 커튼이 없는 부엌 창문으로는 햇빛이 비쳐드는 것이 보이는데, 침실과 부엌을 촬영할 때 촬영각도를 창문과 다른 쪽으로 비스듬히 돌려 잡아 창문이 보이지 않게 촬영하였다. 의도적으로 밖이 보이지 않게 촬영한 것이 분명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그 아파트가 평양에 있는 아파트가 아니라 중국 어느 도시에 있는 아파트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중년여성과 젊은 여성이 정면을 향해 서 있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 있는데, 누구인지 식별하지 못하도록 두 여성의 얼굴을 일부러 흐려놓았다. 만일 그 사진이 평양에 사는 고위간부의 집안을 촬영한 것이라면, 중년여성은 고위간부의 부인이고, 젊은 여성은 그의 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두 여성의 왼쪽 가슴에 초상휘장이 없다. 북측 인민들이 초상휘장이 없는 옷차림을 하는 것은 그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진에 중국풍 가구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조선일보>가 보도한 그 사진들은 중국에 사는 북측 해외공민 집안을 촬영한 것이 분명하다. 
 
주목하는 것은, <조선일보>가 달아놓은 이상한 사진설명이다. <조선일보>는 사진설명에서 "모든 평양시 주민들이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이는 고위간부가 사는 집"이라고 강조하면서, 평양 중구역에 고위간부들이 모여산다는 추가설명까지 덧붙였다. 그렇게 강조한 까닭은, 사진에 촬영된 집에 피아노, 대형 평면 텔레비전, 대형 평면 컴퓨터 모니터, 대형 음향기기, 고급스러운 목재옷장, 파스텔 색조의 벽면찬장 등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 사는 북측 해외공민의 집에 그러한 가전제품과 가구들이 있다면, 중국에서 그의 생활은 중산층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평양에 사는 일반 시민이 그런 가전제품과 가구를 쓰고 있다면, 북측 인민들의 생활이 궁핍하다는 식으로 이제껏 선전해온 <조선일보>의 보도가 허위라는 것이 드러날 터이므로, "고위급 간부가 사는 집"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일보>는 그 사진을 보도하면서 북측 고위간부들은 부유하게 사는 반면, 북측 인민들은 궁핍하게 산다는 식의 왜곡선전까지 늘어놓은 것이다.

그러면 평양 시민들이 사는 아파트 내부는 어떻게 생겼을까? 그들이 사는 아파트 내부를 찍은 사진을 구할 길은 없으나, 때마침 동영상 세 편이 눈길을 끈다. 북측에서 운영하는 포털 싸이트(portal site) '우리 민족끼리'에 실린, <조선중앙텔레비죤>이 방송한 각종 방영물 가운데 '소개편집물'이라는 분류명칭이 붙어있는 동영상 세 편이 있다. 2010년 11월 12일에 게시된 '행복 넘치는 체육인 가정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동영상, 2010년 11월 28일에 게시된 '사랑에 대한 생각-축복받은 예술인 가정을 찾아서(1)'이라는 제목의 동영상, 그리고 2010년 12월 1일에 게시된 '사랑에 대한 생각-축복받은 예술인 가정을 찾아서(2)'라는 제목의 동영상이다.
첫 번째 동영상은 현역에서 은퇴한 여자축구선수가 사는 집안에서 진행한 방송대담을 촬영한 것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 동영상은 최근에 새로 지은 아파트에 입주한 현역 연극배우가 사는 집안에서 진행한 방송대담을 촬영한 것이다. 은퇴한 축구선수나 현역 연극배우가 사는 아파트는 평양 시민들이 일반적으로 사는 아파트라고 할 수 있으므로, 그 동영상에 나타난 집안 모습은 현재 평양 시민들이 사는 일반적인 집안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 편의 동영상에 나타난 아파트 내부 모습은 <조선일보>가 보도한, 중국에 사는 중산층 수준의 북측 해외공민이 사는 아파트 내부 모습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 물론 평양 아파트 내부 모습이 담긴 동영상에서는 대형 평면 텔레비전이나 대형 음향기기 같은 값비싼 가전제품을 찾아볼 수 없지만, 집안 분위기는 평양 아파트 내부가 더 깔끔하고 깨끗하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도시와 농촌의 생활수준 차이는 아직 해소되지 못하였지만, 간부의 귀족화를 사회적으로 용납하지 않고, 법적으로도 금하고 있는 북측에서 간부와 인민들 사이에 생활수준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유층과 빈곤층의 생활수준 격차를 벌여놓은 요인은 자산격차와 소득격차인데, 북측에는 금융자산이나 부동산자산이 없으므로 자산격차를 발생시킬 원인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남측에서는 월급이라고 부르고, 북측에서는 생활비라고 부르는 소득은, 사회주의 헌법 제70조에 규정된 대로 "공민은 능력에 따라 일하며 로동의 량과 질에 따라 분배를 받는" 것이다. 이를테면, 15년 이상 근무경력이 있는 탄광 노동자의 월소득은 북측 돈으로 6,000원이고, 내각의 장관급(상급) 고위간부의 월소득은 5,000원이고, 20년 근무경력의 대학교수 월소득은 4,000원이고, 일반 근로자의 평균 월소득은 3,000원이다. 노동의 양과 질에 따른 분배 차이가 있어도, 소득격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북측에는 이처럼 자산격차와 소득격차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고위간부가 사는 아파트라고 해서 일반 근로자가 사는 아파트보다 부유하지 않은 것이다.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 방영한 세 편의 동영상에 나타난, 평양 시민들이 사는 집안 모습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경제적 평등이 실현된 북측의 생활상이다.

2010년 2월 19일 유엔인구기금(UNFPA)이 발표한 '2008년 북코리아 인구총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평양에 사는 81만3,769가구 가운데 44만4,672가구(54.6%)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지금 평양에서는 2012년에 완공될, 아파트 10만 가구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남측 기준으로 보면 중산층 수준의 아파트다. 쾌적하고 편리한 주거공간으로 설계된 아파트 10만 가구가 완공되면, 평양 시민 40여 만 명이 무상으로 입주할 것이다. (2011222일 작성)

2011/02/18

재개정 요구하는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

변혁과 진보 (22)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왜 통일학 연구를 심화시켜야 하는가?
 
평화통일강령을 채택한 정당은 민주노동당만이 아니다. 진보신당, 민주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도 평화통일강령을 채택하였다. 분단국가체제에서 정치활동을 벌이는 그 어떤 정당도 평화통일강령을 외면할 수 없으므로, 그런 현상은 당연하다. 심지어 반통일세력의 '소굴'인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마저도 평화통일문제를 외면할 수 없으므로, 실제로는 평화통일을 실현할 생각이 전혀 없는데도 자기 강령에 "자유민주적 평화통일" 또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실현되는 방식의 통일"이라는 수사를 집어넣어 체면을 차렸다.

그렇지만 위의 여섯 정당 가운데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평화통일강령을 추구하는 유일한 정당은 민주노동당이다. 민주노동당은 진보적 민주주의강령과 함께 평화통일강령을 자기가 추구하는 2대 강령으로 채택한 유일한 정당이다. 1950년대 진보당의 평화통일강령, 1960년대 혁신정당의 평화통일강령 이후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으로 오랜 세월 동안 끊어졌던 평화통일강령의 맥을 되살렸다는 점에서,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 채택은 커다란 정치사적 의의를 지닌다.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은 2005227일 당대회에서 개정되었다. 6년 전에 평화통일강령을 개정한 것은 그 이전에 있었던 평화통일강령의 부실한 내용을 보완한 것인데, 개정된 평화통일강령의 내용도 역시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차마 국민대중 앞에 내놓기가 창피할 지경이다.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이 그처럼 부실하게 된 까닭은, 당의 통일학 연구수준이 보잘 것 없기 때문이다. 평화통일강령을 추구하는 유일한 정당이 통일학을 깊이 연구하지 않고 다른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평화통일에 관한 일반상식을 열거해놓고 그것을 당의 강령으로 채택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 식민지 시기 우리 민족이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는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였다면, 오늘 우리 민족은 자주통일국가를 세우는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주적 평화통일은 다른 강령들과 차원을 달리하는 최대, 최고의 강령이다. 이처럼 평화통일강령은 낡은 분단국가체제를 새로운 통일국가체제로 교체하기 위한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원칙을 제시하는 정치강령인데,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에서 그런 원칙을 찾아보기 힘들다. 개정된 평화통일강령에는 한반도 통일정세에 대한 분석과 네 가지 평화통일정책이 산만하게 열거되어 있을 뿐이다.
 
민주노동당은 통일학 연구를 더욱 심화시켜 과학적인 통일관, 주체적인 통일정세 인식, 합리적인 통일실현 원칙을 명백하고 논리정연하게 담아 평화통일강령을 다시 개정해야 할 것이다.
 
 
개정된 평화통일강령에서 퇴치되지 못한 네 가지 결함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에 나타난 네 가지 결함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에서 한반도 통일정세에 대한 주체적 관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주체적 관점이 없는 대신에, 엉뚱하게도 한반도의 분단국가체제를 '냉전의 산물'로 규정하는 천박한 정세인식이 논리에도 맞지 않게 서술되어 있다.
 
"냉전의 양극체제 아래서는 아무리 남과 북이 자주적인 통일의 길로 나아가려 해도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의 거센 힘에 부딪혀 통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서술한 대목과 "머지 않아 도래할 것으로 예견되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동북아 신냉전이 구축되기 이전에 최소한 국가연합이나 연방제 방식의 통일이라도 이루어 국제적으로 우리의 민족통일을 기정사실화하는 일이다"고 서술한 대목은 고등학생들의 통일백일장에나 나올 법한 저급한 서술이다.
 
이전에는 미국과 소련의 구냉전체제가 가로막아서 평화통일이 불가능하였고, 앞으로는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체제가 가로막아 평화통일이 불가능할 것이므로 하루빨리 평화통일을 실현해야 한다는 식의 저급한 견해는 주체적 관점을 배제한 오류다.

한반도에서 낡은 분단국가체제가 새로운 통일국가체제로 교체되지 못한 까닭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가 가로막았기 때문이 아니라 식민지예속체제가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명백하게도 한반도의 분단국가체제는 일제 식민지체제의 반역사적 유물이고,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체제의 직접적 산물이다.

평화통일강령 서술에서 미국과 소련의 구냉전이나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을 언급하는 것은, 평화통일세력과 분단유지세력의 대립구도, 다시 말해서 우리 민족의 반제자주역량과 미국의 제국주의지배력이 대립하는 구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국가체제는 그 어떤 냉전체제 위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반제자주역량 대 제국주의지배력의 대립 속에 존재한다.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는 우리 민족의 반제자주역량이 분단국가체제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제국주의지배력을 압도할 때 그 때 비로소 평화통일이 실현되는 것이다. 분단론과 냉전론을 연계시킨 오류를 청산하고, 주체적 관점에서 평화통일강령을 다시 서술해야 한다.
 
둘째,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은 역사인식 결핍증을 드러내었다. 민주노동당은 분단국가체제의 긴 역사에서 처음으로 평화통일을 실현하겠다고 나선 정당이 아니다.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는 투쟁과 노력은 한반도에 분단국가체제가 세워졌던 1948년부터 민주노동당이 자기의 평화통일강령을 개정하였던 2005년까지 57년 동안 지속되었고, 지금도 의연히 지속되고 있다.
 
1948년 이후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된 평화통일운동의 경험과 성과를 오늘의 변화된 통일정세에 맞게 계승, 발전시켜야 할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에 평화통일운동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결여된 것은 충격적인 일이다.

셋째,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은 낡은 분단국가체제를 새로운 통일국가체제로 교체하는 문제와 낡은 사회체제를 새로운 사회체제로 개조하는 문제를 뒤섞어 놓았다. 이러한 혼동은 "궁극적인 통일체제는 남한 자본주의의 천민성과 북한 사회주의의 경직성이 극복되면서 민중의 권익과 민주적 참여가 보장되는 체제여야 한다"고 서술한 것에서 선명하게 노출되었다.
 
명백하게도,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은 사회체제를 개조하는 강령이 아니라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강령이다. 민주노동당이 추구하는 사회체제 개조 문제는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이 아니라 자주적 민주주의강령에 들어있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은 "민중의 권익과 민주적 참여가 보장되는 체제"를 새로운 통일국가체제라고 강변하였지만, 그런 체제는 민주노동당이 주요산업 국유화를 실현하여 건설할 남측의 진보적 민주주의체제를 말하는 것이지 한반도의 자주적 통일국가체제가 아니다. 남측에 세워질 진보적 민주주의체제와 한반도에 세워질 자주적 통일국가체제를 혼동한 것은 치명적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남한 자본주의의 천민성과 북한 사회주의의 경직성"이라고 서술한 대목에 나오는 천민성이라는 말과 경직성이라는 말도 주간지 기사에나 나올 법한 비과학적인 용어들이다. 원래 천민이라는 말 자체가 민중을 천한 존재로 깔보는 봉건귀족계급의 악습적 용어인데, 민주노동당에서 써서는 아니 될 금지어를 평화통일강령에 버젓이 들여놓은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천민성에 대비되는 말은 귀족성인데, 자본주의체제의 성격을 천민성과 귀족성으로 구분하려는 발상 자체가 무지의 극치를 드러낸 것이다. 천박성이라는 말을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천민성이라는 잘못된 말을 쓴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남측 자본주의체제의 성격은 천박성이 아니라 예속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해야 옳다.
 
게다가 북측 사회주의체제의 경직성이라는 말은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경직성이란 부드럽지 못하고 딱딱한 성질을 뜻하는 말인데, 사회주의체제의 성격을 유연성과 경직성으로 구분하려는 발상 자체가 비과학적이고 터무니 없다. 평화통일강령 서술에 남북의 현존 사회체제에 대한 양비론을 도입해야 한다는 한심한 강박관념은, 평화통일 문제와 사회체제 문제를 혼동하여 생겨난 착각이므로 마땅히 버려야 한다.
 
넷째,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은 당면목표와 최종목표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모든 정당은 자기 강령을 일거에 실현할 수 없고 단계적으로 실현해야 한다. 그래서 강령의 단계적 실현이 당면목표와 최종목표를 제시하는 서술방식으로 강령에 들어가는 법이다.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의 당면목표는 남측의 중도연립정부와 북측의 사회주의정부가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전면적으로 이행하여 한반도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상설통일기구를 설립하는 것이다. 또한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의 최종목표는 남측의 진보적 민주주의정부와 북측의 사회주의정부가 6.15 공동선언에 의거하여 전국적 범위의 연립정부를 세우는 것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전국적 범위의 연립정부는 한반도에 세워질 통일국가체제의 정치적 주체이며 대표체다. 자주적 평화통일을 향한 전 민족의 숙망과 염원은 전국적 범위의 연립정부를 세우는 날 실현될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에 담아야 할 네 가지 원칙
 
민주노동당이 앞으로 강령을 재개정할 때 평화통일강령에 담아야 할 원칙들은 아래와 같다.

첫째, 자주적 추진의 원칙을 담아야 한다.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이 다른 중도우파정당들의 평화통일강령을 뛰어넘는 전략적 차별성은,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이라는 점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자주적'이라는 말은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라,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근본원칙을 표현한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국가체제에 전쟁위험과 영구분단까지 추가로 강요하는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체제를 배격하고 평화통일을 자주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뜻에서, '자주적'이라는 말은 평화통일강령을 규정하는 중요한 원칙을 표현한 것이다.
 
이 짧은 글에서 자료를 일일이 열거하여 논증하지는 못하지만, 지난 시기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각각 북측과 정상회담을 추진하였을 때, 그 추진과정을 음으로 양으로 간섭하고 개입하고 통제한 것은 미국이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미국이라는 제국주의국가체제를 움직이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남북 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 남측 정부당국을 음으로 양으로 간섭하고 개입하고 통제하였던 것이다. 만일 그들의 간섭, 개입, 통제가 없었다면, 남북 정상회담은 더욱 진전된 정치적 합의에 이르렀을 것이다.

한반도에 분단국가체제를 세운 주범도 미국이고, 자기들이 세워놓은 분단국가체제에 전쟁위험과 영구분단을 강요해온 주범도 미국이고,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남북 정부당국의 노력을 음으로 양으로 방해해온 주범도 미국이다.

평화통일은 미국의 지배와 간섭, 개입과 통제를 배제, 배격하고 '우리 민족끼리' 추진한다는 뜻에서 자주적 평화통일이며, 전 민족의 주체역량으로 추진한다는 뜻에서 자주적 평화통일이다.
 
둘째, 평화적 방도의 원칙을 담아야 한다. 낡은 분단국가체제를 새로운 통일국가체제로 교체하는 방도는 평화적 방도와 비평화적 방도로 구분되는데, 남북의 정부당국은 평화적 방도를 선택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적 방도란 남북의 정부당국이 대화와 협상으로 통일국가체제를 세운다는 뜻이다. 평화적 방도의 원칙은 남과 북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며, 실현 가능한 원칙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북 정부당국의 통일회담이다. 남북 정부당국의 통일회담이 재개되고 진전되어야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길이 열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남북 정부당국의 통일회담 자체를 거부하고 북측의 사회주의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위험천만한 대결주의 반북정책에 열중하는 반통일세력이 활개치고 있는 것이 문제다. 그런 반통일세력이 활개치는 한, 남북 정부당국의 통일회담은 영영 불가능하며 평화통일은 멀어지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자기의 평화통일강령에 담을 평화적 방도의 원칙은, 평화적 방도 자체를 거부하는 반통일세력까지 용인한다는 뜻은 아니다.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은 평화적 방도 자체를 거부하는 내외 반통일세력을 배격한다는 점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

셋째, 사회체제 불거론 원칙을 담아야 한다. 사회체제 불거론 원칙이란 남북 정부당국이 통일회담을 진행하면서 남북에 각각 현존하는 사회체제에 대해 거론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동시에 장차 건설될 통일국가의 사회체제에 대해서도 규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일 남북 정부당국이 통일회담을 진행하면서 서로 상대방에게 사회체제를 바꾸라고 요구하거나, 장차 건설될 통일국가의 사회체제가 자기의 현존 사회체제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대화와 협상이 이루어질 수 없고 갈등과 충돌만 불거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체제 불거론 원칙은 평화적 방도의 원칙을 안받침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넷째, 자주적 평화통일강령과 진보적 민주주의강령을 상호연계하는 원칙을 담아야 한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남측 자본주의체제와 북측 사회주의체제의 관계는 적대적이다. 이처럼 남북관계에 사회체제의 적대성이 존재하는 엄연한 현실을 그대로 두고 통일국가체제를 세운다는 말은 비과학적인 낭설이다. 통일국가체제 안에 서로 다른 사회체제가 공존하리라는 점은 명백하지만, 서로 다른 사회체제라고 해서 서로 적대적인 사회체제라는 말은 아니다. 적대적 공존은 형용모순이다. 그러므로 체제공존형 통일은 사회체제의 비적대화를 불가피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사회체제의 비적대화는 누가 누구에게 요구하는 것일까? 그것은 민주노동당이 남측의 사회체제에 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남측 자본주의체제가 북측 사회주의체제에 적대적이지 않는 새로운 사회체제로 바뀌어야, 낡은 분단국가체제를 새로운 통일국가체제로 교체할 수 있고, 새로운 통일국가체제 안에서 남북의 서로 다른 사회체제가 공존할 수 있다.
 
물론 북측은 남측에게 사회체제의 비적대화를 거론할 수 없고, 거론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대남관계에서 사회체제 불거론 원칙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북측이 대남관계에서 사회체제 불거론 원칙을 지켜야 마땅하지만, 민주노동당도 북측을 따라서 사회체제의 비적대화를 거론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대북관계에서 사회체제 불거론 원칙을 지켜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측의 사회체제에 대해 불거론 원칙을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자기 사회체제의 비적대화를 거론할 필요가 있고 책임도 있다.
 
민주노동당의 진보적 민주주의강령은 남측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진보적 민주주의체제로 바꾸려는 사회체제 개조강령인데, 그 강령은 자주적 평화통일강령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고, 서로 무관한 것도 아니다. 민주노동당의 강령서술체계에서 사회변혁과 평화통일은 모순되는 것도 아니고 서로 무관한 것도 아니다. 민주노동당이 추구하는 그 두 강령이 상호연계되어 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 두 강령을 상호연계시켜주는 연결고리가 사회체제의 비적대화라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민주노동당이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진보적 민주주의체제로 바꾸어 남북의 사회체제가 비적대화되어야 평화통일강령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낡은 분단국가체제를 교체한 새로운 통일국가체제 안에서는 남측의 진보적 민주주의체제와 북측의 '우리식 사회주의체제'가 서로 다른 사회체제로 공존하게 될 것이다. (2010217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