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26

44년 만에 다시 보낸 최후통첩

<연재> 한호석의 진보담론(236)
통일뉴스 2012년 11월 26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미국군 71명 사망, 85명 부상, 85명 포로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올해까지 59년 동안,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날 위험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이 시각에도 한반도 어느 지역에서는 전쟁에 대비한 군사활동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전쟁대비 군사활동은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첨예하게 대치 중인 정전의 땅에서 올해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데, 특히 정전협정 체결 60주년을 눈앞에 둔 올해 2012년은 전쟁재발위험이 매우 고조된 시기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미국군이 한국군을 참가시킨 가운데 은밀히 추진해오는, 북측 정권을 폭동과 변란으로 전복하려는 대북전쟁계획을 실제 행동에 옮기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난 것도 올해 2012년에 있었던 일이고, 인민군이 조국통일대전 준비태세를 갖추고 최고사령관의 총공격명령을 대기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알려진 것도 올해 2012년에 있었던 일이다.

정전 59년 역사를 돌아보면, 전쟁재발위험이 매우 고조되었던 시기가 올해 말고도 한 차례 더 있었는데, 1967년부터 1969년까지 3년 동안이 바로 그런 시기였다. 특히 1968년 1월에 이틀 간격으로 연속발생한 인민군의 청와대 습격기도사건과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은 전쟁재발위험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청와대 습격기도사건과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을 바라보는 북측 외부의 인식은 이제껏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미국과 힘을 겨뤄보려는 북의 ‘군사모험주의’ 군사행동으로 인식되었는가 하면, 당시 미국과 전쟁을 하고 있었던 북베트남을 도와주는 북의 ‘국제주의’ 군사행동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군사모험주의 해석’이나 ‘국제주의 해석’은 당시 극도로 높아진 전쟁재발위험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러한 해석은 이틀 간격으로 연속발생한 청와대 습격기도사건과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을 다른 무력충돌사건들과 떼어놓고 바라보는 인식오류에 빠진 것이다. 정전 59년 역사가 말해주는 것은, 그 두 사건이 1967년부터 3년 동안 인민군의 기습공격으로 벌어진 수많은 무력충돌사건들과 직접 결부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두 사건을 전후로 하여 인민군이 비무장지대에서 미국군 순찰병력, 전방초소, 군용차량을 기습공격하는 사건이 계속 일어났을 뿐 아니라, 미국 해군 정찰기를 청진 앞바다에서 격추하고, 비무장지대 상공에서 미국 육군 헬기를 격추하고, 임진강에서 미군 육군 정찰선박을 공격하는 사건도 있었다. 아래의 통계자료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1967년 한 해 동안 인민군의 미국군 순찰병력 기습공격은 4회, 미국군 전방초소 기습공격은 2회, 미국군 차량 또는 선박에 대한 기습공격은 3회였다. 1967년의 무력충돌에서 인민군은 6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당하는 인명손실을 입었으며, 미국군은 16명이 사망하고 51명이 부상당하는 인명손실을 입었다. 미국군 인명손실에는 미8군 한국군지원단 인명손실도 포함되었다.
미국군에 대한 인민군의 기습공격은 1968년에 더욱 확대되었는데, 미국군 순찰병력 기습공격 7회, 미국군 전방초소 기습공격 5회, 미국군 차량 기습공격 2회, 인민군과 미국군의 교전 5회였으며, 1968년 1월 21일 원산 앞바다에서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이 있었다. 1968년의 무력충돌에서 인민군은 13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당하는 인명손실을 입었고, 미국군은 19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당하는 인명손실을 입었으며, 82명이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패배를 겪었다.

미국군에 대한 인민군의 기습공격은 1969년에도 1968년과 같은 격렬한 양상으로 계속되었는데, 미국군 순찰병력 기습공격 7회, 미국군 전방초소 기습공격 3회, 미국군 차량 기습공격 1회였다. 또한 1969년 4월 15일 인민군 공군 전투기가 미국 해군 최신형 정찰기 EC-121를 함경북도 청진 앞바다 동해 상공에서 격추하여 탑승자 31명을 몰살시켰고, 8월 17일 인민군 방공포부대가 비무장지대 상공에서 미국군 OH-23 헬기를 격추하여 미국군 3명을 포로로 잡았다. 1969년의 무력충돌에서 인민군은 1명이 사망하는 인명손실을 입었고, 미국군은 36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당하는 인명손실을 입었으며 3명이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패배를 겪었다.

위에 열거한 전과를 종합하면, 1967년부터 3년 동안 지속된 무력충돌에서 인민군은 20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하는 인명손실을 입었고, 미국군은 71명이 사망하고, 85명이 부상당하는 인명손실을 입었으며, 85명이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패배를 겪었다.

위에 열거한 인민군과 미국군의 무력충돌은, 인민군의 기습공격으로 전쟁재발위험이 극도로 높아지면서 당시 북미관계가 사실상 전시상황으로 전환되었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문제는, 북이 왜 미국군에게 그처럼 3년 동안 기습공격을 가하여 전쟁재발위험을 극도로 높였을까 하는 것이다.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은, 미국의 우드로우 윌슨 국제학술센터(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가 ‘북코리아 문서 사업(North Korea Documentation Project)’을 통해 발굴하여 2012년 4월에 공개한 비밀전문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대북 선제공격방안을 검토하고 있을 때

우드로우 윌슨 국제학술센터가 루마니아 외무성 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하여 영어로 번역한 이 비밀전문들은,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에 작성하여 본국 외무성에 보낸 것이다. 44년 전에 작성된 이 비밀전문들을 읽어보아야 하는 까닭은, 인민군 특수군의 청와대 습격기도사건과 인민군 해군의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으로 전쟁재발위험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당시 북의 단호한 결전의지가 엿보이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청와대 습격기도사건이 일어난 날로부터 불과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1968년 1월 23일 인민군이 미국의 통신감청첩보선 푸에블로호를 강원도 원산 앞바다에서 나포한 사건이 일어나자,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미국은 당장에라도 무력보복을 감행할 것처럼 날뛰었다. 미국의 대북무력보복은 선제핵공격으로 시작되는 격렬한 전면전을 뜻하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인민군이 푸에블로호를 나포한 이튿날, 미국은 이전에 미리 준비해둔 ‘자유의 투하(Freedom Drop)’라는 작전명의 대북공격계획을 즉각 가동하였다. 그에 따라, 일본에 전진배치된 미국 해군 제7함대 소속 핵추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가 긴급출동명령을 받고 원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그런데 엔터프라이즈호를 원산 앞바다에 배치한 북침준비태세는 시작에 불과하였다. 미국은 또 다시 항공모함 두 척을 추가로 동해에 배치하였고,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주일미공군 전투기 361대를 남측으로 이동배치하였다. 이러한 무력이동은 미국이 전면전을 하고도 남을 만큼 방대한 무력을 대북공격태세로 근접배치한 것이다.

1968년 1월 하순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북에게 무력보복을 감행할 다섯 가지 선제공격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것은 공습지원을 받으며 지상공격을 감행하는 방안, 특수전 부대를 침투시키는 방안, 북측 선박을 나포하는 방안, 원산항을 해상봉쇄하는 방안, 북의 군사시설을 선택적으로 공습파괴하는 방안이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위와 같은 대북 선제공격방안을 검토하고 있을 때, 미국군 지휘부는 공격명령이 떨어지면 즉각 전투에 돌입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1월 29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긴급극비전문에 따르면,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 찰스 본스틸(Charles H. Bonesteel)은 한국군 전군에게 전투훈련과 전투준비에 돌입하라고 명령하였고, 원산항을 해상봉쇄하려는 목적에서 미국 해군 기뢰부설함 및 어뢰정 6척을 추가로 북측 영해 가까이 북상배치하였다.

위의 긴급극비전문에 따르면, 미8군 사령관 얼 프리먼(Earl Freeman) 중장은 판문점 정전위원회에서 북측 대표단 박충국 단장에게 만일 북이 남을 공격하면 미국은 핵폭탄을 포함한 가장 현대적인 군사수단과 무기를 대북전쟁에 사용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에 대해 북측 박충국 단장은 미국의 그런 협박은 조선인민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구두로, 그리고 문서로 응답하였다.

미국이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을 구실로 대북전쟁을 도발하려는 세계 최대 규모의 침공작전태세를 취하자, 당시 미국과 냉전상태에 있었던 소련도 그처럼 위험천만한 사태를 방관할 수 없었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1월 29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극비전문에 따르면, 동해에 진입한 미국 제7함대 가까이 접근하여 동향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은 소련군 태평양함대는 군함 두 척을 미국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 인근에 배치하였고, 소련군 태평양함대 소속 군함들이 추가로 동해에 남진배치될 것이라고 하였다.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이 있었던 1968년 1월 당시, 소련은 미국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사회주의핵강국이었다. 당시 중국의 핵억지력은 미국에 맞설 수 있을 만한 수준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 중국은 1964년 10월 16일 첫 핵실험에 성공함으로써 소련에 이어 두 번째 사회주의핵강국으로 등장하였으나, 미국 본토까지 핵탄두를 날려 보낼 운반수단은 아직 갖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중소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바람에 자기의 주적을 미국이 아니라 소련으로 규정하였다. 중국이 사거리 12,000km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둥펑-5를 시험발사한 때는 1971년 9월이었고, 그것을 실전배치한 때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81년이었다.

1968년 당시 미국은 대북전쟁이 벌어지는 경우 사회주의핵강국 소련의 군사개입 가능성을 우려하였다. 그래서 미국은 대북전쟁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소련의 발목을 붙잡아두려고 생각하였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1월 29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평양 주재 체코슬로바키아 외교관의 말을 인용한 긴급극비전문에 따르면, 당시 미국의 저명한 정치인 로벗 케네디(Robert F. Kennedy) 연방상원의원은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소련이 개입하지 않겠다고 공약하는 미소 양자협정을 채택하는 문제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긴급히 검토할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소련이 미국의 대북전쟁에 개입하지 않을까 하는 미국 정가의 예상은 빗나간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소련은 미국과 전쟁을 벌일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재발위험이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다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직후 발송된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의 비밀전문들은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이상한 분위기 가운데 첫 번째는, 미국이 소련에게 푸에블로호를 송환하고 승무원들을 석방하도록 대북압박을 가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정보가 흘러나온 것이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1월 27일에 본국 외무성에 보낸 긴급극비전문은, 평양 주재 아랍연합공화국 부대사 에스맛 나기브(Esmat Naguib)가 전해준 이른바 대북압박요청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이를테면, 나기브 부대사는 1월 25일 북측 외무성 허담 제1부상을 만난 자리에서, 미국이 소련에게 푸에블로호 송환과 승무원 석방을 위해 대북압박을 가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 사실인가고 물었다고 한다. 그 물음을 받은 허담 제1부상은 “조선의 배타적인 권한 아래에 있는 이 문제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제3자는 그 누구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그런 참견행위는 조선의 내정에 대한 간섭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상한 분위기 가운데 두 번째는, 미국이 소련에게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을 중재해달라고 요청하였다는 정보가 흘러나온 것이었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1월 29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극비전문에 따르면, 당시 북측 박성철 부수상과 두 차례 면담한 평양 주재 소련 부대사는 미국이 소련에게 푸에블로호 사건을 중재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소련은 이를 거부하였다고 말했다고 하였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1월 26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극비전문에 인용된 북측 외무성 성명에 따르면, “우리(북을 뜻함 - 옮긴이)는 소련이 함정 나포 문제에 대한 중재를 거부한 것에 대해 만족한다. 우리는 이 문제를 중재해달라는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나라를 미국의 편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고 한다.

미국이 소련에게 대북압박을 요청하였다는 압박요청설과 소련의 중재를 요청하였다는 중재요청설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진실에 가까운 정보였을까? 아랍공화국 부대사가 압박요청설이 사실인가고 북측 외무성 제1부상에게 물어본 것만 봐도, 압박요청설이 당시 평양 주재 외국인 외교관들 사이에 떠돌던 소문이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1월 26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극비전문에 인용된 북측 외무성 성명은 “나포한 승무원들을 풀어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만이 결정할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그처럼 북은 푸에블로호 송환문제와 승무원 석방문제에 대해 매우 단호한 태도를 취하였다. 결전의지를 갖고 미국에게 기습공격을 퍼붓고 있었던 북이 그처럼 단호한 태도를 취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작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된 까닭은, 북이 그처럼 단호한 태도를 공개적으로 취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 소련에게 중재를 은밀히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방대한 규모의 대북전쟁 침공무력을 한반도에 출동시키고 선제공격방안까지 검토하고 있었던 미국은 왜 갑자기 소련에게 중재를 요청한 것일까? 미국은 대북전쟁 준비태세를 갖추고 북을 위협하고 있었지만, 북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는 경우 미국 자신도 엄청난 전쟁피해를 입게 되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미국이 엄청난 전쟁피해를 각오하였더라면, 대북전쟁을 당장이라도 도발할 수 있었으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게는 그런 전쟁을 벌일만한 뱃심과 담력이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푸에블로호를 반환받고, 승무원을 송환받는 선에서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을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소련에게 비밀리에 중재를 요청한 미국의 속셈이었다.

그러나 그런 속셈이 북에게 통할 것으로 보았던 미국의 예상은, 대북관계에서 패배를 불러온 심각한 상황오판이었다. 미국의 무력침공을 한반도 통일의 결정적인 기회로 전환시킬 통일대전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북이 미국의 막후협상 제안을 배격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의 상황오판과 북의 통일대전 준비태세는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을 계기로 조성된 전쟁재발위험이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전쟁재발위험의 새로운 국면이란 북과 미국의 무력충돌이 임박한 사실상 전시상황에서 북이 정치군사적으로 주도권을 완전히 틀어쥐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전쟁재발위험이 고조된 사실상 전시상황에서 북이 취할 수 있었던 전략적 선택은 두 가지였다. 푸에블로호 나포사건과 관련하여 미국의 정치적 굴복을 받아 내거나, 아니면 미국이 끝내 정치적으로 굴복하지 않을 경우 조국통일대전을 개시하는 것이었다.

비밀전문이 전해주는 44년 전 북의 통일대전 준비태세

2010년 7월 14일 기밀해제된 미국 연방의회 외교위원회 1968년 1월 26일 비공개 회의 회의록에 따르면, 딘 러스크(David Dean Rusk)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이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을 구실로 삼고 북에게 군사보복을 가하는 경우 북이 미국과 전쟁을 할 가능성이 진지하게 검토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북이 미국과 전쟁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였지만, 실제로 그것은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아래의 정보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1월 26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극비전문에 인용된 북측 외무성 성명은 “만일 미국이 우리의 영토주권을 침해하는 위협행위나 무력행사를 취하는 경우, 우리도 무력사용을 포함하여 똑같은 수단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하면서, “분쟁의 해결은 전적으로 미국에게 달린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북이 말하는 분쟁의 해결은, 미국이 북에게 정치적으로 굴복하여 사죄문에 서명하고, 침공무력을 철수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북은 외무성 성명을 통해 통일전쟁과 정치적 굴복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미국을 강하게 압박하였던 것이다.

북의 그러한 압박은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결전의지의 실천이었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의 비밀전문들은 북이 통일대전을 벌일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는 생생한 모습을 이렇게 전해주었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1월 26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긴급비밀전문에 따르면, “1968년 1월 10일부터 12일까지 인민군과 로농적위대(지금은 로농적위군으로 개칭됨 - 옮긴이)가 북측 남부지역에서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북측 지도부는 이 합동군사훈련 결과에 대해 만족하였다. 더욱이 1월 22일과 23일 인민군 부대들과 로농적위대가 평양에서 열차편으로 출발하였다”고 한다. 또한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1월 29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극비전문에 따르면, 북은 “비밀리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방대한 병력을 남부전선과 동부전선으로 이동 중”이라고 하였다. 비밀전문에 쓰여 있는 남부전선이란 군사분계선 부근 최전방을 뜻하는 것이고, 동부전선이란 함경남북도 해안에서 강원도 해안에 이르는 기나긴 해안방어선을 뜻하는 것이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2월 27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극비전문은 전시총동원령이 내려진 당시 평양 분위기를 이렇게 전해주었다. “병력이동과 평양 주민의 방공훈련이 계속되고 있다. 비행기와 탐조등을 동원한 야간방공훈련이 강화되고 있다. 평양 시내와 인근 지역에서는 6.25 전쟁 때 파놓았던 방공호가 복구되었고, 아파트 단지들과 모든 개별주택 인근에 새로 방공호가 건설되고 있다. 참호와 저격수를 배치할 엄폐호를 파고 있으며, 평양 시내 밖에서는 위장막을 설치한 트럭과 버스들만 운행할 수 있다. 평양과 다른 지방도시들에서 집중적인 주민대피훈련이 실시되고 있다. 중앙정부기관에 보관 중인 문서들, 국가도서관과 과학원의 중요한 문고들, 인쇄공장에 설치된 인쇄기계 가운데 절반 이상을 평양 밖으로 대피하였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1월 26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긴급비밀전문에 따르면, 북은 평양 주재 폴란드 대사관에게 평양에 건설된 거대한 지하시설로 연결되는 지하갱도를 폴란드 대사관 앞에 건설할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그리고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2월 27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극비전문에 따르면, 북은 평양에 주재하는 모든 외국 대사관들에게 미국의 공습에 대비하여 자체로 방공호를 건설하도록 권고하였다.

또한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3월 17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긴급극비전문에 따르면, 야간에 차량이 평양 시내로 들어가지 못하게 출입을 금지하는 조치와 외국 외교관 차량을 포함해 모든 차량에 통과증을 붙이지 않으면 운행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고 한다.

위에 인용한 비밀문건들에 나타난 북의 통일대전 준비태세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북이 미국에게 전쟁징후를 사전에 노출하지 않기 위해 “비밀리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통일대전 준비태세를 갖추었다는 사실과 전국적인 공습대피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실을 통하여, 북의 통일대전 결전의지가 얼마나 강하고 단호하였는지 알 수 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44년 만에 다시 보낸 최후통첩
북이 결전의지를 가지고 통일대전 준비태세를 다그치던 사실상의 전시상황으로부터 44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다. 오늘 북의 통일대전 준비태세는 어떠할까? 보나마나, 1960년대 후반의 통일대전 준비태세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도로 정밀하게 완성된 수준에 이르렀을 것이 분명하다. 40년 이상 장기간에 걸쳐 통일대전의 군사적 준비에 전당, 전군, 전민이 온힘을 기울여왔으니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다. 1968년에 일어난 전쟁재발위험에 대처하고 있었던 북의 통일대전 준비태세를 전해주는 위의 비밀전문들을 읽으면, 마치 ‘옛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오늘 북은 전쟁징후를 사전에 전혀 노출하지 않고 통일대전 준비태세를 완료하고 최고사령관의 총공격명령을 대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전국적 범위의 공습대피계획도 완벽하게 준비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1968년 당시 북의 국방공업은 아직 발전도상에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무기는 소련에서 도입한 것들이었고 전략무기는 갖지 못하였지만, 오늘 북의 국방공업은 핵탄두와 대륙간탄도미사일, 잠수함과 전투기를 자력으로, 마음먹은 대로 만들어내는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발전수준에 이르렀다. 바로 이것이 북의 통일전쟁 준비태세가 미국의 대북전쟁 준비태세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다고 보는 근거이며, 북과 미국이 전쟁을 벌이면 인민군이 순식간에 미국군을 제압하고 이길 것으로 보는 근거다.

44년 전, 김일성 주석은 전군이 통일대전 준비태세를 완료하고 자신의 총공격명령을 기다리라고 지시한 뒤, 통일대전과 정치적 굴복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하라는 최후통첩을 미국에 보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와 똑같은 정치군사상황이 44년이 지난 오늘 북미관계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김정은 제1위원장은 전군이 통일대전 준비태세를 완료하고 자신의 총공격명령을 기다리라고 지시한 뒤, 통일대전과 정치적 굴복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하라는 최후통첩을 미국에 보낸 것이다. 그것은 비록 문서화된 최후통첩은 아니지만, 그 어떤 문서보다도 더 명확하게 행동으로 이행되는 최후통첩이다.

44년 전, 김일성 주성이 보낸 최후통첩을 받고 결국 정치적으로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미국은, 푸에블로호가 북측 영해를 침범하여 불법정찰활동을 감행하였음을 인정하고 그런 범죄를 다시 저지르지 않겠다고 공약한 사죄문에 서명하였고, 동해에 배치한 항모강습단을 철수하였다.

44년이 지난 오늘 김정은 제1위원장이 통일대전과 정치적 굴복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하라고 미국에 보낸 최후통첩에서 미국의 정치적 굴복이란, 미국이 그토록 기피해오는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국군 철군을 뜻하는 것이다.
만일 미국이 이번에 상황을 또 오판하여 김정은 제1위원장의 최후통첩을 무시한다면, 미국에게 남게 될 선택은 북과 전쟁을 하는 것밖에 없다. 이미 북은 김정은 제1위원장의 명령에 따라 통일대전 결전의지를 행동에 옮기는 중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최후통첩을 무시한 미국이 결국 사회주의핵강국의 기상천외한 선제공격을 받고 손을 쓸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패하여 항복하는 것은, 푸에블로호가 대동강변에 전리품으로 전시된 지난 13년 간의 굴욕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100년 간의 굴욕으로 될 것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44년 만에 다시 보낸 최후통첩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심사숙고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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