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11

민주노동당의 강령에 나타난 몇 가지 결함들

변혁과 진보 (21)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낡은 서술체계 답습한 민주노동당 강령
우리 사회에 현존하는 7개 정당의 강령을 보면, 서술체계가 전문(前文)과 본문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문에는 당의 정체성이 서술되어 있고, 본문에는 당의 강령(platform)과 정책(policy)이 구분되지 않고 뒤섞어 서술되어 있다. 민주노동당 강령도 예외가 아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정당이 추구하는 총적 목표(general goal)를 서술한 것은 강령(또는 정강)이고, 정당의 총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기본방침(basic principle)을 서술한 것은 정책이다. 강령은 상위개념이고 정책은 하위개념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현존하는 정당들의 강령 서술체계는 강령과 정책을 구분하지 않고 뒤섞어 놓았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정당의 목표는 낡은 현실을 개변시켜 새 것을 창조하려는 정치적 의사와 행동이 집약된 것이다. 그러므로 낡은 현실을 개변시켜 새 것을 창조하려는 진보정당만이 자기의 총적 목표를 강령으로 명백하게 제시할 수 있다. 그와 달리, 낡은 현실을 유지하고 그 속에 안주하려는 보수정당은 현상유지를 위한 잡다한 정책들만 제시하고 있을 뿐, 현실을 개변시켜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총적 목표를 제시하지 못한다. 따라서 보수정당의 강령은 엄밀한 의미에서 강령이 아니라 잡다한 현상유지정책들을 열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민주노동당의 강령 서술체계는 다른 보수정당들의 강령 서술체계와 달리 강령과 정책을 구분하여 서술하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민주노동당의 강령 서술체계에는 다른 보수정당들의 강령 서술체계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강령과 정책이 뒤섞여 있다. 다른 정당에 비해 창조적이고 혁신적이며 진보적인 성격을 드러내야 할 민주노동당이 당의 강령 서술체계에서 진보정당으로서의 독창성을 지니지 못한 까닭은, 당의 강령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다른 보수정당들의 강령 서술체계를 무심히 모방하고 구태를 답습하였기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이제 민주노동당은 낡고 무의미한 종래의 강령 서술체계에서 벗어나 진보정당만이 가질 수 있는 독창적인 강령 서술체계를 새로 개발할 필요가 절실하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지금 강령 개정작업을 추진 중인 당강령개정위원회의 노력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2010년 11월 12일 당강령개정위원회에 제출된 강령 개정안 초안을 읽어보면, 실망하게 된다. 강령 서술체계에서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면모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당강령개정위원회에 제출된 강령 개정안 초안의 서술체계는 전문을 앞에 앉혔고, 그 뒤로 15개 항목(plank)을 체제, 정치, 경제, 통일, 외교 및 국방, 사회복지, 보건의료, 교육, 환경, 에너지, 사회적 약자, 문화, 여성, 노동, 농민 순으로 열거하였다. 강령 개정안 초안에 따르면, 앞으로 개정될 민주노동당의 강령과 정책은 이처럼 15개 항목들 속에 산만하게 혼재되는 것이다.

강령 개정안 초안의 서술체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체제'라는 항목과 '통일'이라는 항목이다. 전자는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를 실현"하는 내용으로 서술된 것이고, 후자는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내용으로 서술된 것이다.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 두 항목은 정책이 아니라 명백하게도 강령이다.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것은 민주노동당의 여러 정책항목들 가운데 하나로 격하될 수 없고, 민주노동당이 추구하는 두 개의 총적 목표로 격상되어야 마땅하다.

민주노동당은 진보적 민주주의강령과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을 자기의 양대 강령으로 제시한 유일무이한 정당이다. 진보적 민주주의강령과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을 이 땅의 정치현실 앞에 당당히 제기하였다는 점에서,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 특유의 역사적 지위와 역할을 가질 수 있었으며, 그 어떤 정당도 따라올 수 없는 진보적 성격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진보적 민주주의강령과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을 당 강령 서술체계에 명백히 새기는 것이야말로 진보정당으로서의 독창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당강령개정위원회에 제출된 강령 개정안 초안은 강령과 정책이 혼재된 서술체계를 답습하였다. 그 낡고 무의미한 서술체계는 이번 개정과정에서 새롭고 독창적인 서술체계로 바꿀 필요가 있다. 

진보적 민주주의강령과 민주노동당 명칭, 어울리지 않은 어색함
민주노동당의 2대 강령은 진보적 민주주의강령과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이다.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을 채택하는 것에 대해서는 민주노동당 안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이지만, 진보적 민주주의강령을 채택하는 것에 대해서는 민주노동당 안의 특정정파가 이견을 내놓을 수 있다. 민주노동당 안의 특정정파가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다른 특정정파의 전유물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 개념을 당의 강령으로 채택하는 것을 꺼리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꺼리는 것은 오해와 몰이해에서 생겨난 정서적 반응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 사회민주주의라는 개념, 사회주의라는 개념이 세계적 보편성을 지닌 것처럼,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도 세계적 보편성을 지닌 개념이지 특정정파가 틀어쥔 전유개념은 아니다.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이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쓰고 있지만 그 개념이 그 두 당의 전유물로 될 수 없고, 사회당과 노동당(labor party)이 사회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쓰고 있지만 그 개념이 그 두 정당의 전유물로 될 수 없고, 좌파당이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쓰고 있지만 그 개념이 좌파당의 전유물로 될 수 없는 것처럼, 민주노동당의 특정정파가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많이 쓴다고 해서 그 개념이 그 정파의 전유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 각국의 보수정당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세계 각국의 개량정당들은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세계 각국의 좌파당들은 사회주의를 추구하고, 세계 각국의 진보정당들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추구한다. 민주노동당도 세계 각국의 진보정당들 가운데 하나이므로, 당연히 진보적 민주주의를 당의 강령으로 채택하는 것이지, 당내 특정정파가 요구하기 때문에 그 개념을 당의 강령으로 채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민주노동당의 강령에는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들어 있지 않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당을 건설하던 초창기에 당 강령 작성을 담당한 간부급 인사들이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그 개념을 강령에 넣지 못하였을 수도 있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한낱 정파적 개념으로 오해한 당내 특정정파가 당 강령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그 개념을 넣지 말자고 요구하여 빼놓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간부들의 인식부족 때문이었건 아니면 정파적 거부행동 때문이었건 간에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민주노동당 강령에 들어있지 않은 것은 매우 심각한 결함이 아닐 수 없다. 국민대중과 함께 "세상을 바꾸자!"고 외치는 민주노동당이 세상을 바꾸는 변화의 미래상을 명확한 개념에 담아 강령으로 제시하지 못한 것은, 자기의 행선지가 어디인지 대지 못하는 방랑객의 처량한 신세와 무엇이 다를까!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은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의 강령에서만 찾아볼 수 있고, 그 밖의 다른 정당들은 그 개념을 강령에 넣지 않았다. 이를테면, 민주당 강령에서는 "사회경제적 권리가 반영되는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썼고, 진보신당 강령에서는 "모든 시민이 국가의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썼고, 국민참여당 강령에서는 "국민의 권력이 온전히 실현되는 참여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썼다. 창조한국당 강령에서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명시적으로 쓰이지 않았지만, 다른 3개 야당의 강령에 나온 민주주의 개념과 대동소이한 내용이 들어있다.

주목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당 강령에서 쓰지 않은 민주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이 이러저러한 수식어를 앞에 붙인 민주주의를 각자 자기들 강령에 제시하였지만, 그들의 강령에서 서로 다른 수식어로 표현된 민주주의는 공히 사회민주주의와 동일하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는 사회당은 없지만, 당 강령에 나오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기준으로 정당의 성격을 구분하면 민주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은 사회민주주의 성격의 정당으로 분류된다. 좀 더 엄밀하게 구분하면, 진보신당은 다른 나라의 사회당과 같고, 민주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은 다른 나라의 노동당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당은 노동당보다 좀 더 '왼쪽'에 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자기의 당명을 노동당이라고 정한 것은 그러한 분류법에 들어맞지 않는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강령으로 채택하였다는 점에서, 민주노동당은 사회민주주의를 강령으로 채택한 사회당보다 '왼쪽'에 있고, 사회주의를 강령으로 채택한 좌파당보다 '오른쪽'에 있다. 민주노동당이 사회당과 좌파당의 중간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까닭은, 그 당이 추구하는 총적 목표가 사회민주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니며, 진보적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런 민주노동당이 자기의 당명을 가장 '오른쪽'에 있는 노동당으로 정했으니 이치에 전혀 맞지 않는다.

널리 알려진 대로, 다른 나라의 사회당이나 좌파당은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려는 야당들이거나 또는 실제로 실현한 집권당들이다. 민주노동당도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려는 정당이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의 진보적 민주주의가 사회당의 사회민주주의나 좌파당의 사회주의와 다른 까닭은, 주요산업 국유화와 보편적 복지를 동반적으로 실현하는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주요산업 국유화와 보편적 복지를 동반적으로 실현하는 민주주의는 이 세상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밖에 없다. 주요산업을 국유화하지 않고 조세정책과 재정정책만으로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려는 것은 진보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다.

그런데 당강령개정위원회에 맨 처음 제출된 강령 개정안 초안에는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명시되었다고 하는데, 그 개념에 대해 "당내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돼 4차 기획단 회의를 통해 일단 '000 민주주의'로 수정, 토론용으로 제출"하였다고 한다.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강령 개정안 초안에 넣었다가 빼놓은 것은, 그 개념에 대한 오해와 몰이해가 빚어낸 일이므로 설득과 토론을 통해 정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당 강령 개정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논제들
민주노동당의 강령 서술체계는 2대 강령(two platforms), 1개 정치노선(one political line), 20개 정책(twenty policies)으로 구성되어야 이치에 맞는다. 이런 서술체계에 따라, 민주노동당의 강령을 재검토하면 아래와 같이 지적이 나온다.

첫째, 정치노선과 정책을 구분하여 서술할 필요가 있다. 경제정책, 외교정책, 국방정책 같은 말은 있지만, 정치정책이라는 말은 없다. 그 까닭은 정치를 정책개념에 가두어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란 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여러 정책들을 총괄하고 이끌어 가는 영도활동의 총체이므로, 다른 정책들과 구분된다. 그래서 정치정책이라는 말은 없고 정치노선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둘째, 20개 정책을 부문별 정책과 계급계층별 정책으로 구분하여 서술할 필요가 있다. 부문별 정책이란 12개인데, 경제정책, 외교정책, 국방정책, 평화정책, 사회복지정책, 주거정책, 보건의료정책, 교육정책, 환경정책, 문화예술정책, 과학기술정책, 에너지정책이다.

강령 개정안 초안에서는 외교정책과 국방정책를 분리하지 않고 '외교, 국방'으로 표기하였지만, 그 양자를 분리하여 서술할 필요가 있다.
강령 개정안 초안에는 들어있지 않지만, 새로 앉혀야 할 정책으로 손꼽은 것은 평화정책, 주거정책, 과학기술정책이다.
 
한반도 평화를 실현하는 문제는 외교정책과 국방정책에 끼어넣을 정도로 비중이 낮은 과업이 아니라, 고유한 정책으로 추진해야 할 중대과업이다. 민주노동당은 자기의 강령에 평화정책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한미동맹체제를 해체하는 문제는 외교정책에 넣어야 하고, 한반도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남북이 군축을 실현하고 주한미국군을 단계적으로 철군시키는 문제는 평화정책에 넣어야 한다.

각계층 서민의 주거권을 실현하는 문제는 민주노동당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업들 가운데 하나다. 살림집을 장만하지 못하고 셋방에서 쪼들려 살거나 반지하실, 옥탑방, 쪽방, 고시원 등에서 살며 고통을 겪는 이 땅의 서민대중에게 주거권 실현의 희망을 안겨주는 것이야말로 민주노동당의 당면과업이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날 사회변혁은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된 시대의 사회변혁인데, 사회변혁을 실현하려는 민주노동당이 자기의 과학기술정책을 제시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다른 한 편, 계급계층별 정책은 8개인데, 노동자, 농어민, 중소상공인, 여성, 청년학생, 지식인, 노인,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정책들이다. 원래 강령 개정안 초안에는 노동자, 농민, 여성, 사회적 약자를 위한 4개 계급계층별 정책만 들어있으나, 중소상공인, 지식인, 청년학생, 노인을 위한 정책들도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우리 사회의 인구구성비율이나 경제활동비중에서 중산층이 압도적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사회계급관계를 변화시키는 사회변혁담론에서 중산층 문제를 빼놓는 것은 계급적 현실에 대한 커다란 인식착오이며, 중산층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사회변혁은 실현될 수 없다. 중산층의 실체는 중소상공인이므로, 민주노동당이 중소상공인 정책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자기의 잠재적 지지층을 외면하는 치명적 결함으로 된다.

청년학생은 민주노동당이 중시해야 할 사회계층이다. 이 땅에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는 현 세대의 노력은 미래의 주역인 청년학생들을 위한 것이다. 

지식인은 과학기술시대를 선도하는 중요한 사회계층이므로, 민주노동당이 진보적인 지식인 정책을 당 강령에 포함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 사회는 오래 전에 고령화 사회로 넘어갔는데, 사회의 고령화 현상은 앞으로 더욱 확대될 것이고, 노인의 사회적 권익을 옹호하는 문제는 정치문제로 제기될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노인정책을 당 강령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셋째, 당 강령을 서술할 때, 용어사용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농민이라는 말을 농어민이라는 말로 바꾸어, 농민은 물론 어민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서술해야 현실을 반영할 수 있다.

또한 사회적 약자라는 말을 사회적 소수자라는 말로 바꾸는 것이 좋다. 그들은 약한 사람들이 아니라 당당한 소수자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서술순서도 노동자, 농어민, 중소상공인, 여성, 청년학생, 지식인, 노인, 사회적 소수자 순으로 서술해야 무리하지 않을 것이다. (2011년 2월 10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