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05

흑막에 가려진 미일방위협력지침 개정의 진상

[한호석의 개벽예감](157)
자주시보 2015년 05월 04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스가모형무소의 수형번호 436번 전범
2. 1978년, 1997년, 2015년, 미일군사동맹의 점진적 변화
3. 눈앞에 다가온 일본군 재창설 
4. 미국이 일본의 핵야욕을 충족시켜주는 방법

▲ <사진 1> 미국과 일본은 2015년 4월 27일 미국 뉴욕에서 미일방위협력지침을 개정하였다. 개정에 합의한 직후,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 애쉬튼 카터 미국 국방장관이 나까따니 겐 일본 방위상, 후미오 기시다 일본 외무상과 두 손을 맞잡았다. 사진 속에서 그들의 표정은 밝지만, 그들이 개정해놓은 미일방위협력지침은 핵전쟁의 위험이 그들의 머리 위에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한다.     © 자주시보


1. 스가모형무소의 수형번호 436번 전범
 
2015년 4월 27일 봄기운이 무르익은 미국 뉴욕에서 진행된 미국과 일본의 외교국방장관 연석회의에서 방위협력지침이 개정되었다. <사진 1> 한국, 미국, 일본의 언론매체들은 미국과 일본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방위협력지침을 개정한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그러나 그런 분석은 미일방위협력지침 개정의 부차적인 요인만 알고, 그보다 더 중요한 선차적인 요인들은 알지 못하는 우매한 분석으로 보인다.

미국과 일본의 정치군사적 공모를 드러내 보여줄 심층정보들은 언제나 흑막에 가려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번에 그 두 나라가 방위협력지침을 개정한 목적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결론은 복잡한 요인들을 한 가지 요인에로 환원시킨 인식오류다. 물론 미국과 일본이 중국을 견제하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그처럼 겉으로 드러난 한 가지 요인만 가지고서는 미일방위협력지침 개정의 진상을 파악할 수 없다. 

미일방위협력지침 개정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한 이 글의 분석방향은 두 갈래다. 첫 번째 갈래는 미일동맹변천의 역사적 맥락을 짚어보는 것이고, 두 번째 갈래는 이 글의 분석방향과 연관된 비밀문서들에서 미국과 일본의 진짜 속셈을 살펴보는 것인데, 그런 분석을 통해서 흑막에 가려진 진상으로 다가설 수 있다.

▲ <사진 2> 1946년 3월 26일 일본 스가모형무소에서 찍은 이 수형사진 속의 인물은 당시 미점령군에게 체포되어 그 형무소에 수감된 일제전범 기시 노부스께다. 미점령군은 다른 전범들은 교수형에 처했으면서도 기시는 전격 석방하였다. 이 기이한 석방조치는 기시를 일본 총리로 만들어주었으며, 정치적으로 재기한 기시는 전후 일본의 군사적 재무장을 촉진시켰고, 일본의 핵야욕을 되살려놓았다.     © 자주시보

이 글은 1946년 일본 도꾜에 있는 스가모형무소에 수감되어 전범재판을 받던 일제전범의 초췌한 몰골이 촬영된 한 장의 수형사진에서 시작된다. 1946년 3월 26일이라는 촬영날짜가 찍힌 수형사진 속의 인물은 <사진 2>에서 보는 것처럼 그 형무소에 수형번호 436번으로 수감된 기시 노부스께(岸 信介, 1896-1987)다. 이 수형사진이 말해주는 것은, 동아시아를 식민지화하려고 광란하던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여 조작해놓은 만주괴뢰국을 설계하고 관리해온 막후실권자였던 그 사람, 일제의 침략전쟁을 총지휘한 전시내각에서 상공대신을 맡아보았던 바로 그 사람 기시 노부스께가 일제의 패전으로 미점령군에게 체포되어 스가모형무소에 수감된 1급 전범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미국은 스가모형무소에 수감된 1급 전범 7명의 교수형을 1948년 12월 23일에 집행할 때, 그들과 함께 수감된 1급 전범 기시 노부스께만은 전격 석방하였다. 미국은 왜 기시를 교수대에 매달지 않고 석방하였을까? 그가 일제전범에서 미국에게 충성을 맹약한 극우반공주의자로 변신하였기 때문이고, 미점령군과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기들에게 이용가치가 별로 없어 보이는 다른 전범들은 교수형에 처하면서도, 자기들이 이용할 만하게 보인 기시는 살려두었던 것이다.

교수대에 끌려가기 직전 미국의 전격 석방으로 구사일생 목숨을 건진 기시 노부스께는 출감 이후 전범전력을 숨기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지 않았다. 일본의 발목에 채워진 전범국의 족쇄를 쌘프란씨스코 강화조약 체결로 벗겨준 미국의 지원, 특혜, 비호 속에서 그는 전후 일본의 군사적 재무장을 추진하는 노회한 야심가로 재기하였다.

▲ <사진 3> 미국의 유력한 시사주간지 '타임'은 1960년 1월 25일부 표지인물로 일본의 극우정치권을 대표하는 기시 노부스께를 선정하였다. 원폭투하로 불타는 피폭도시의 폐허에서 회생한 불사조 한 마리가 일제침략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를 향해 두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오르려는 기이한 상상도가 배경에 그려졌다. 미국은 1급 전범 출신인 그를 처형하지 않고 석방해주었고, 결국 국제정치무대에 불사조의 모습으로 화력하게 등장시켜 아시아의 반공돌격대장으로 이용하였다.     © 자주시보

전범출신 야심가의 정치적 재기는 일본 정계의 울타리를 훌쩍 넘어 국제정치무대로 향했다. 미국의 유력한 시사주간지 <타임>은 1960년 1월 25일부 표지인물로 기시 노부스께를 선정하였다. <사진 3>에서 보는 것처럼, 그 표지의 배경에 그려진 기이한 그림은 원폭투하로 불타는 피폭도시의 폐허에서 회생한 불사조 한 마리가 일제침략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를 향해 두 날개를 활짝 펴고 막 날아오르는 상상도다.

▲ <사진 4> 1960년 1월 19일 백악관을 방문한 당시 일본 총리 기시 노부스께가 신미일안보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당시 미국 대통령 드와잇 아이젠하워가 팔짱을 끼고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11년 전 스가모형무소 교수대에 매달렸어야 하는 기시가 미국 대통령의 환대를 받으며 백악관에 들어간 극적인 반전의 흑막 뒤에는 미국과 일본의 계략이 있었다.     © 자주시보

<사진 4>는 피폭일본의 폐허에서 회생한 ‘불사조’의 모습으로 국제정치무대에 등장한 당시 일본 총리 기시 노부스께가 1960년 1월 19일 백악관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 드와잇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와 함께 신미일안보조약에 서명하는 장면이다. 1948년 12월 23일 스가모형무소 교수대에 매달렸어야 하는 1급 전범 기시 노부스께가 11년 뒤에 미국 대통령의 환대를 받으며 백악관에 들어갔으니, 이런 극적인 반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극적인 반전의 흑막 뒤에는 미국과 일본의 간계가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에게 항복한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전후 일본의 진보세력을 폭력으로 제거하고 전범세력에게 정권을 쥐어주었고, 전범세력이 지배하게 된 일본과 범죄적 간계를 공모하였는데, 기시 노부스께를 ‘불사조’로 둔갑시킨 극적인 반전은 바로 그런 범죄적 간계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미국과 일본이 공모한 범죄적 간계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동아시아 사회주의진영의 양대축인 조선과 중국을 상대로 무력침공준비와 국가전복공작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식민지강점범죄와 침략전쟁범죄를 청산하지 않은 채 전과범국가로 전락한 일본이 미국의 지원으로 유엔회원국이 된 1960년 1월 14일로부터 닷새가 지난 1월 19일 드와잇 아이젠하워는 백악관에서 기시 노부스께를 만나 신미일안보조약에 함께 서명하였는데,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미국이 조선과 중국을 상대로 준비하는 무력침공준비와 국가전복공작에 일본을 끌어들이는 계략에 따른 행동이었다. 미국이 교수대에 매달지 않고 살려 놓아준 수형번호 436번 전범이 그 계략의 한 쪽에 서 있었다.

1960년 당시 미국과 일본이 공모한 계략은 미국의 전술핵탄을 주일미국군기지에 비밀리에 배비해놓았다가 불시에 조선을 치려는 북침핵전쟁음모에로 집중되었다. 미국의 핵문제 전문가 핸스 크리스텐슨(Hans M. Kristensen)이 1999년 7월에 발표한 논문 ‘핵우산 아래의 일본: 냉전시기 일본에서의 미국의 핵무기와 핵전쟁계획수립’에 따르면, 드와잇 아이젠하워와 기시 노부스께가 신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하였던 1960년부터 3년 동안 미국은 워싱턴주 타코마의 맥코드공군기지에 두었던 전술핵탄들을 비밀리에 일본의 요꼬다, 미사와, 이루마, 가데나 등의 주일미국군기지들에 이동배치해놓았고, 1962년 9월에는 미일동맹군이 미국 태평양사령관의 작전지휘를 받는 북침핵전쟁연습인 ‘높은 언덕(High Hills) II’를 감행하였다.
1962년 9월부터 미국군이 일본자위대를 끌어들여 감행하였던 북침핵전쟁연습의 흑막 뒤에는 미국이 스가모형무소에서 전격 석방한 기시 노부스께의 핵야욕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2. 1978년, 1997년, 2015년, 미일군사동맹의 점진적 변화

기시 노부스께가 백악관에서 신미일안보조약에 서명한 때로부터 18년이 지난 1978년 11월 27일 미일방위협력지침이 제정되었다. 이 땅에서 전쟁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던 1951년 9월 8일 미일안보조약을 서둘러 체결하였고, 1960년 1월 19일에는 그 조약의 내용을 더 강화한 신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한 미국과 일본은 왜 방위협력지침을 추가로 제정한 것일까? 그 까닭은, 1970년대 후반 미국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던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미일동맹군을 증강해야 할 다급한 요구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정은 이러하였다.

20세기 세계사에 냉전기라고 기록된 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는 냉전만이 아니라 열전도 벌어졌는데, 그 열전의 무대가 바로 베트남전선이다. 미국은 첨단무기로 무장한 미국군과 추종국 군대들을 그 전선에 대거투입하고 무던히 안간힘을 썼으나, 결국 구식 무기밖에 갖지 못한 북베트남군에게 쓰라린 패배를 당하고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에서 완전히 쫓겨나고 말았다. 첨단무기로 무장한 미국군이 당연히 이길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베트남전쟁에서 미국군이 어이없게 패하였을 때, 미국이 받은 정신적 충격은 컸다. 첨단무기가 전쟁에서 만능이 아니라는 진리를 뒤늦게 깨달은 미국은 앞으로 동아시아에서 일어날지 모르는 또 다른 전쟁에 대비하여 후방지원이 필요했는데, 미국은 그런 후방지원임무를 일본에게 맡겼던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일어날지 모르는 또 다른 전쟁에 대비하여 미국군은 전방전투임무를 맡고 일본자위대는 후방지원임무를 맡는다는 것, 바로 이것이 1978년 11월 27일에 제정된 미일방위협력지침의 기본내용이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패한 자기에게 닥쳐올 미증유의 위험이 조선과의 전쟁이라고 예감하였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미국의 한심한 전쟁능력을 목격한 조선은 미국과 싸워 능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더욱 굳게 가질 수 있었다. 중국 외교문서를 인용한 중국인 전문가의 연구결과를 보도한 <연합뉴스>와 <조선일보> 2013년 10월 24일 보도들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베트남전선에서 사이공 함락이 눈앞에 다가왔던 1975년 4월 18일부터 26일까지 중국을 방문하여 ‘남조선 해방’을 위한 군사행동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였다고 한다. 

▲ <사진 5>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사건이 일어나자, 미국은 조선에게 보복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방대한 무력을 한반도에 집결시켰다. 이 사진은 당시 미해군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구축함 피킹호와 미사일구축함 프레블호를 대동하고 동해의 작전구역으로 출동하는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 자주시보

베트남전쟁이 끝난 뒤에 조미전쟁이 터질지 모른다는 예감이 팽팽한 긴장감을 몰아왔던 그 시기에 조선인민군과 미국군이 물리적으로 격돌한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으니, 그것이 바로 1976년 8월 18일에 일어난 판문점사건이다. 그 사건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미국군 병사들의 정전협정 위반행위를 제지하던 조선인민군 병사들에게 미국군 병사들이 먼저 싸움을 걸자 그에 격분한 조선인민군 병사들이 그들을 현장에서 쳐죽인 사건이다. 판문점사건 직후 미국은 무력보복을 하겠다고 협박하면서, <사진 5>에서 보는 것처럼 전면전을 하고도 남을 방대한 무력을 이 땅의 공중과 해상에 집결시켰다. 서태평양에서 긴급출동한 항공모함 3척,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F-4 전투기 24대, 괌에서 출격한 B-52 전략핵폭격기 3대, 미국 본토에서 출격한 F-111 전술핵폭격기 20대가 이 땅에 몰려들었던 것이다. 

미국과 한국의 관련자료들은 당시 판문점 정전위원회 조선인민군 대표가 김일성 주석의 위임에 의하여 작성한,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구두통지에서 유감의 뜻을 밝힌 것으로 하여 조선이 전쟁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서술하였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월간조선> 2013년 3월호에 실린 관련기사에 따르면, 판문점사건이 일어나자 평양시민 30만명이 각 지방으로 분산, 소개되었고, 등화관제와 전시배급제가 실시되었으며, 로농적위대는 물론 학생들까지 총을 잡았고, 군사분계선 이남으로 침투한 ’폭풍군단’ 부대들이 각지의 주한미국국 및 한국군 군사기지들 주변에 매복하고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당시 정황은 조선의 군대와 인민들이 ‘최후결전’에 총궐기할 일촉즉발의 마지막 단계에 돌입하였음을 말해준다. 당시 조선은 핵탄을 한 발도 갖지 못했는데, 그런 조선이 핵탄 수 천 발로 무장하고 덤벼드는 미국과 단독으로 맞서 전면전을 벌이려 하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패하고 쫓겨난 때가 불과 1년 전이었으므로, 그런 미국에게 조선과의 전면전에서 이길 자신이 전혀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선인민군이 북베트남군과는 격이 다른 강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미국군은 그런 강군과 맞서기 위해 지원군이 필요하였는데, 미국이 체계적으로 육성한 일본자위대가 바로 그런 지원군이었다. 그래서 안보조약으로 결탁해온 미국과 일본은 조선을 상대로 싸우게 될 전면전에 대비하여 또 다른 전쟁지침을 별도로 만들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 전쟁지침이 바로 미일방위협력지침이다.    
 
냉전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70년대 후반 미국과 일본에게는 소련을 군사적으로 견제할 필요가 있었지만, 소련 견제는 미일방위협력지침 제정에서 부차적인 요인으로 되었을 뿐이다. 소련 견제보다 더 직접적이고, 선차적인 요인은 미국이 겪었던 베트남전쟁 패배와 조선과의 전면전 위기였던 것이다.

미국과 일본이 조선과의 전면전에 대비해 방위협력지침을 제정한 때로부터 또 다시 9년이 지난 1997년 9월 24일 미국과 일본은 그 지침을 개정하였다. 그 무렵 동아시아 정세에 어떤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기에 미국과 일본은 기존 방위협력지침을 개정한 것일까? 1997년에 조선은 ‘고난의 행군’을 헤쳐가며 건국 이래 가장 혹심한 시련을 겪고 있었고, 미국과 일본에서는 조선이 앞으로 6개월 안에 갑자기 붕괴할지 모른다는 ‘붕괴임박설’이 흉흉한 소문처럼 나돌고 있었다. 국제사회는 걱정 어린 시선으로 조선의 운명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걱정 어린 시선은 조선의 모습 가운데서 겉으로 드러난 절반의 모습밖에 볼 수 없었다. 조선이 드러내지 않은 나머지 절반은 어떤 모습이었던가?

▲ <사진 6> 조선이 미사일능력을 증강시키는 것을 저지하려고 1996년 4월 20일 조선과 미사일회담을 시작한 미국은 자기의 북침핵전쟁능력을 증장시키기 위해 1997년 9월 24일 미일방위협력지침을 개정하였다. 이 사진은 2012년 4월 15일 태양절에 평양에서 진행된 군사행진에 등장한 화성-6호 준중거리미사일이다. 4축8륜 자행발사대에 탑재된 사거리 1,500km의 이 탄도미사일은 핵탄을 장착하고 일본의 심장부를 타격할 수 있다.     © 자주시보

1996년 2월 22일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 존 도잇취(John M. Deutch)가 연방상원 정보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조선이 드러내지 않은 절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보고서에서 그는 노동 미사일과 대포동 미사일을 개발하는 조선의 미사일능력증강은 미국과 동맹국들에게 위협으로 된다고 우려하면서, 조선이 장거리 미사일의 성능을 향상시킬 미사일유도통제기술을 갖지 못하도록 차단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가 지적한 노동 미사일은 조선에서 쏘면 일본의 심장부를 핵탄으로 타격할 사거리 1,500km의 화성-6호 준중거리미사일이며, 그가 지적한 대포동 미사일은 조선에서 쏘면 미국 본토를 핵탄으로 타격할 사거리 10,000km의 목성-1호 대륙간탄도미사일이다. 도잇취의 보고서는 <사진 6>에 보이는 조선의 미사일이 동아시아 군사정세를 뒤흔들어 놓았음을 말해준다. 1994년부터 조선을 상대로 핵회담을 진행해오던 미국이 협상방향을 핵문제에서 미사일문제로 갑자기 바꿔 1996년 4월 20일에 미사일회담을 시작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1997년 9월 24일 미국과 일본이 방위협력지침을 개정한 것은 조선의 핵타격권에 들어가게 된 미국이 일본과의 합동작전범위를 확장하여 자기의 북침핵전쟁능력을 증강시키려는 새로운 조치를 취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이 합의한 새로운 조치가 조선을 겨냥한 선제타격전략이라는 사실은 미일방위협력지침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1997년에 개정된 미일방위협력지침에는 “일본의 주변사태가 예상될 때, 미일 양국 정부는 그 사태가 더욱 악화되는 것을 예방하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명기되었고, 2015년에 2차로 개정된 미일방위협력지침에는 “일본에 대한 무력공격이 임박하면, 양국 정부는 일본의 방위에 필요한 준비를 갖추고,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명기되었다. 그 지침에 명기된 ‘예방조치’는 미국군과 일본자위대가 함께 조선을 먼저 치는 선제타격을 의미하는데, 그 선제타격이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는 선제타격이 아니라 핵탄을 사용하는 선제핵타격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미국이 미일합동작전범위를 북침선제타격으로 더욱 확장해놓은 방위협력지침 개정판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때로부터 또 다시 18년이 지난 2015년 4월 27일 그 두 나라는 그 지침을 2차로 개정하였다. 1978년에 방위협력지침을 제정하자고 요구한 쪽은 미국이고, 1997년에 그 지침을 개정하자고 요구한 쪽도 미국인데, 이번에 그 지침을 또 다시 개정하자고 요구한 쪽은 일본이다. 이런 사정은 2차 개정이 제정이나 1차 개정과 달리 일본의 군사적 요구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미일방위협력지침 2차 개정의 진상을 파헤치려면, 2차 개정에서 일본이 노리는 군사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3. 눈앞에 다가온 일본군 재창설 

미일방위협력지침 2차 개정에서 일본이 노리는 군사적 목적 가운데 첫 번째 목적은 일본군 재창설이다. 일본이 평화헌법을 개악하여 집단자위권을 갖겠다는 것은 일본자위대를 정규군으로 재창설하겠다는 뜻이다. 일본은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추진한 자기의 군사적 재무장을 이미 오래 전에 완료하였으므로, 오늘 일본자위대는 자위대라는 간판만 달았지, 내용적으로는 사실상 정규군인데, 지금 일본의 노림수는 자위대라는 간판을 내리고 일본군이라는 간판을 내걸겠다는 것이다.

일본이 사실상 정규군을 보유하였으면서도 일본군이라는 간판을 내걸지 못한 것은, 70년 전 태평양전쟁 패전으로 미국에 의해 일본군을 강제로 해산당한 과거사가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인데, 이번에 일본은 방위협력지침을 개정함으로써 자위대를 일본군으로 재창설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미일방위협력지침 2차 개정으로 고무된 일본 총리 아베 신조(安培 晉三)는 안보에 관련된 국내법들을 줄줄이 개악한 뒤에 자위대를 일본군으로 재창설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이 재창설되면 일본은 교전권을 공식적으로 보유하게 되는데, 그것은 미국이 스가모형무소에서 살려 놓아준 일제전범들이 실행하려고 하였던 미완의 계획을 65년 만에 다시 살려내 완성하는 것이다. 기밀해제된 미국의 비밀문서를 인용한 <교도통신> 2006년 8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일제시기 육군대신이었던 전범 출신 우가끼 가즈시게(宇垣一成)가 총사령관을 맡고, 그 밑에서 육군중장이었던 전범 출신 가와베 또라시로(河邊虎四郞)가 참모총장을 맡는 일본군 재창설 계획이 1950년 2월 미점령군의 양해 아래 작성되었는데, 당시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吉田武)는 그 계획에 대한 백악관의 최종승인을 받기 위해 우가끼와 가와베를 워싱턴 디씨에 파견하려고 하였다.

이 땅에서 6.25전쟁이 터지기 직전 일제전범 출신 극우세력이 추진했던 일본군 재창설 계획은 65년이 지난 오늘 아베 신조가 대표하는 극우세력에 의해 재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강점범죄와 침략전쟁범죄를 청산하지 않은 채 전과범국가로 전락한 일본이 일본군을 재창설하여 교전권을 틀어쥐면, 그것은 일제의 광란적인 침략전쟁책동을 70년 뒤에 되살려놓는 죄악 이외에 다른 게 아니다.

▲ <사진 7> 미일방위협력지침 2차 개정으로 일본자위대는 미국군과의 공동작전에서 교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미일동맹군이 일차적으로 노리는 공격대상이 조선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므로, 미일방위협력지침 2차 개정은 미국이 일본에게 북침전쟁의 길을 터준 것이다.     © 자주시보

한국과 미국의 언론매체들은 이번에 방위협력지침이 개정되어 일본자위대의 파병범위가 전 세계로 확대되었고, 파병시기도 전시만이 아니라 평시까지 확대되었다는 식으로 해석하였지만, 그런 해석은 문제의 초점을 흐려놓은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일본자위대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전시는 물론 평시에도 교전권을 행사하려는 게 아니라, 미국군이 전쟁을 감행할 어느 특정지역에서 미국군과 공동작전으로 교전권을 행사하려는 것이다. <사진 7>

한국의 언론매체들은 일본자위대가 교전권을 틀어쥐면 독도를 강탈할 위험이 조성될 수 있다고 우려하였지만, 그런 보도는 미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작성한 전쟁계획이 무엇인지 모르는 무지의 산물이다. 교전권을 틀어쥔 일본자위대가 전쟁을 벌이려는 특정지역은 독도가 아니다. 일본자위대는 미일동맹군의 한 축으로 전쟁을 벌이게 될 것이므로, 일본자위대의 작전지역은 미일동맹군의 작전지역과 일치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작전지역은 미국군이 일본자위대와 함께 북침전쟁을 감행하려는 한반도인 것이다. 미일동맹군이 ‘K반도사태’를 상정한 대규모 지휘소연습(CPX)을 실시하고, 그에 따른 실전연습(FPX)까지 연속 실시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인 1999년 9월과 10월이었다.

미국군과 함께 북침전쟁을 감행하려는 일본자위대의 작전구상은 <마이니찌신붕> 1970년 3월 23일부 보도기사에서 폭로된 바 있는데,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자위대는 조선반도 유사시에 조선반도의 동해안, 서해안, 남해안, 대마도해협에서 해상봉쇄작전을 벌인다. 북조선이 선제공격을 할 경우, 일본은 조선전쟁에 참전한다. 그 밖의 다른 사태가 발생했을 때도 미국군이 조선반도에서 작전하면 일본자위대는 일미안보조약에 따라 조선반도에 상륙한다. 한국에 체류하는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에 위해가 가해진다고 판단될 때는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자위대가 조선반도에 상륙한다.” 

▲ <사진 8> 일제는 1940년대에 원폭개발사업을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이 사진은 당시 원폭개발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던 이화학연구소 건물을 촬영한 것이다. 이화학연구소는 1943년 7월 원폭설계도를 완성하였다.     © 자주시보


4. 미국이 일본의 핵야욕을 충족시켜주는 방법

일본이 미일방위협력지침 2차 개정에서 노리는 군사적 목적 가운데 두 번째 목적은 앞으로 재창설될 일본군이 미국군의 핵전쟁에 가담하기 위한 핵전능력을 획득하려는 것이다. 이 심각한 문제를 파악하려면 아래와 같은 정밀분석이 요구된다.

일본은 74년 전부터 핵야욕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도쿄신붕> 2012년 8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1941년에 일본군으로부터 원폭개발연구를 의뢰받은 이화학연구소는 2년 동안 검토한 끝에 10킬로톤급 원폭을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1943년 3월 일본 육군항공기술연구소에 제출하였다. <교도통신> 2008년 7월 21일 보도에 따르면, 원폭개발연구에 착수한 이화학연구소는 1942년 7월부터 1943년 1월까지, 그리고 1943년 2월부터 1944년 4월까지 원폭개발에 사용되는 싸이클로트론(cyclotron)이라는 장치를 가동하였고, 1944년에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싸이클로트론을 제작하였다. <사진 8> 이화학연구소가 원폭설계도를 완성한 때는 1943년 7월이었다.

일제는 우라늄이 매장된 함경남도 흥남지구에 지하화된 토륨추출시설을 건설하였고, 1944년부터 거기서 일제 해군제독 하세가와 히데오(長谷川秀夫)의 지휘 밑에 300명에 이르는 일본인 과학자들이 ‘F-NZ’라는 사업명칭을 내걸고 핵물질을 개발하였다. 

그 무렵 일제로부터 핵물질추출을 위한 기술지원을 요청받은 나치독일은 자기들이 제작한 싸이클로트론을 대형수송기에 실어 북극항로를 통해 1945년 초 일제에게 넘겨주었다. 원폭개발에 광분하던 일제는 1945년 8월 12일 새벽 강원도 원산 앞바다 영흥만 북쪽에 있는 무인도에서 소규모 원폭실험을 실시하였다.

▲ <사진 9>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여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일제가 원폭개발연구에 사용하던 싸이클로트론 4기를 압수하여 1945년 11월 요꼬하마 앞바다에 버렸다. 이 사진은 미점령군이 압수한 싸이클로트론을 어선에 싣고 요꼬하마 앞바다로 나가 바다에 버리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 자주시보

1945년 8월 24일 공중강습으로 낙하산을 타고 흥남에 강하한 소련군 공수부대원들은 흥남지구의 토륨추출시설을 습격하여 일본인 과학자들을 체포한 뒤 그들을 모스크바로 압송하였고, 일본을 점령한 미국군은 일제의 원폭개발연구자료를 압수하여 워싱턴 디씨로 보내면서 그 연구사업에 참여했던 일본인 과학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렸으며, 일제에게서 압수한 4기의 싸이클로트론을 1945년 11월 요꼬하마 앞바다에 버렸다. <사진 9>

일제의 핵야욕은 패전으로 좌절된 것처럼 보였으나, 미국이 스가모형무소에서 석방한 기시 노부스께에 의해 12년 만에 되살아났다. 1957년 당시 일본 총리였던 그는 “현행 헌법 아래에서도 자위를 위한 핵보유는 용인된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 궤변은 미국이 일본의 핵야욕을 실현할 통로를 열어주었음을 의미하는데, 기시 노부스께는 자기의 핵야욕을 실현할 통로를 열어준 미국의 호의에 고무되어 핵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미국 국무부 산하 극동지역연구부는 1957년 8월 2일에 작성한 비밀보고서에서 “일본은 지금 원자로와 핵연료를 수입하지만, 곧 자체 기술로 원자로와 핵연료를 개발하면, 원자력 생산의 부산물인 플루토늄 또는 무기급 핵분열물질을 획득할 것으로 보인다”고 하면서, 그러면 일본은 5년 만에 핵탄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예견하였다. 기시 노부스께가 미국의 고무와 지원을 받으며 핵야욕을 실현할 시점이 1962년으로 예견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58년 6월 20일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낸 비밀전문에서 주일미국대사는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 야마다 히사나리(山田久就)가 자기에게 “방위용 핵무기에 관해 고려한 뒤에 그것을 보유하기로 결정할 것인지 결정하지 않을 것인지 논의한다”고 말한 사실을 전했으며, 1958년 9월 9일에 작성된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의 회의기록은 “기시 일본 총리는 일본의 핵무기 보유가 불가피하다고 믿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요미우리신붕> 2010년 11월 30일 보도에 따르면, 1969년 2월 3일부터 사흘 동안 일본에서 진행된 일본-서독정책기획협의에서 일본 외무성 관리는 “일본은 핵개발연구와 로켓개발연구를 통합하여 북조선의 위협이 있을 때 핵무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 발언은 일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핵무장을 할 수 있는 기술준비를 완료하였음을 의미한다.

핵야욕을 품은 일본이 이미 1969년에 고도의 핵기술을 획득하였으면서도 핵무장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까닭은, 미국이 일본에게 핵우산과 핵기술을 제공해주는 대신 일본의 핵무장을 저지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처럼 일본의 핵무장을 저지해오던 미국이 2010년부터 이상하게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이상한 행동이란 2010년부터 미국이 일본과 ‘확장억지대화(Extended Deterrence Dialogue)’를 진행하기 시작하였을 뿐 아니라, 2012년부터는 한 술 더 떠서 일본 외무성과 방위성의 고위관리들에게 미국 본토의 대륙간탄도미사일기지, 핵추진잠수함기지, 전략사령부 등을 시찰하도록 허용한 것이다. 

미국이 말하는 확장억지란 핵타격을 뜻하는 것이므로, 미국과 일본이 확장억지대화를 진행하는 것은 그 두 나라가 핵탄배비문제와 핵타격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미국이 일본에게 자기의 핵무장기지들을 보여주는 것은 논의 차원을 넘어서 실행 차원으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미국군은 자기들이 단독으로 운용해오던 핵전략을 앞으로 재창설될 일본군과 공동으로 운용하려는 준비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껏 미국의 핵우산은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제공해준 것이었지만, 지금 그 핵우산은 미국과 일본이 핵탄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유의 핵우산으로 전변되는 중이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핵무장을 저지해왔던 미국은 지금 미국의 핵탄을 일본과 공동으로 사용하는 미일공동확장억지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공동확장억지전략은 이번에 개정된 미일방위협력지침에 명시되었는데, 그 지침은 “양국 정부는 급변사태에 대처하여 가동할 관련기구들이 참가하는 쌍무조절기구(bilateral coordination mechanism)를 정상적인 환경 아래서 창설할 것”이라고 하면서, “미국군과 일본자위대는 쌍무조절센터(bilateral coordination center)의 운용을 포함하는 쌍무조절기구를 통하여 작전, 정보, 병참지원을 긴밀히 조절할 것”이라고 명시하였다. 이것은 주일미국군사령부와 일본자위대 통합막료감부가 함께 핵타격전을 지휘하는 공동작전지휘부를 상설기구로 창설하겠다는 뜻이다.

충격적인 것은, 미국이 이미 58년 전에 자기의 핵탄을 일본과 공동으로 사용하는 확장억지전략구상을 예행연습하였다는 사실이다. <교도통신> 2015년 1월 17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합참본부는 1958년 2월 17일에 작성한 비밀문서에서 미국군과 일본자위대가 1957년 9월 24일부터 닷새 동안 미국의 핵탄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핵타격도상훈련을 주일미국군기지에서 실시하였으며, “미국은 일본자위대가 핵무기를 도입하기를 바란다. 자위대는 가장 현대적인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를 갖추어야 한다”는 결정사항을 태평양사령관에게 통보했다는 것이다. 
 
▲ <사진 10> 기시 노부스께는 일본의 핵야욕을 실현하려다가 미국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오늘 아베 신조는 자기 외할아버지 기시가 58년 전에 이루지 못한 일본의 핵야욕을 미국의 확장억지전략에 편승하는 방법으로 실현하려는 것이다. 이 사진은 기시 노부스께가 자기의 어린 외손자 아베 신조를 무릎에 앉히고 찍은 가족사진이다.     © 자주시보

여기서 1957년이라는 시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57년은 미국의 특별석방조치로 스가모형무소에서 살아나온 기시 노부스께가 “현행 헌법 아래에서도 자위를 위한 핵보유는 용인된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일본의 핵야욕을 선동한 시점이다. 기시 노부스께는 일본의 핵야욕을 실현하려고 시도하다가 미국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오늘 아베 신조는 자기 외할아버지 기시가 58년 전에 이루지 못한 일본의 핵야욕을 미국의 확장억지전략에 편승하는 방법으로 실현하려는 것이다. <사진 10>

▲ <사진 11> 2015년 4월 28일 백악관에서 열린 일본 총리 환영행사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함께 손을 흔들고 있다. 버락 오바마는 기시 노부스께의 핵야욕을 계승한 아베 신조를 크게 환대하였다. 그 두 사람의 다정다감한 모습 뒤에 가려진 것은 미일공동북침핵전쟁을 노리는 오바마-아베의 위험하고 음흉한 계략이다.     © 자주시보

기시 노부스께가 1960년 1월 백악관에서 신미일안보조약에 서명한 때로부터 아베 신조가 미일방위협력지침 개정본에 서명한 오늘까지 55년 동안 미국은 일본의 군사적 지위와 역할을 점진적으로 격상, 확대시켜주었다. 이를테면 1978년에 제정된 미일방위협력지침에서 일본자위대는 조미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미국군의 후방지원을 맡게 되었고, 1997년에 개정된 미일방위협력지침에서 일본자위대는 미국군의 북침선제타격에 가담할 수 있게 되었으며, 2015년에 개정된 미일방위협력지침에서 일본자위대는 미국군과 공동으로 북침핵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사진 11>에서 보는 것처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15년 4월 28일 백악관에서 열린 환영행사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함께 연출한 친근한 모습은 이번에 미국이 일본자위대의 지위와 역할을 사상 최고 수준으로 격상, 확대시켜주었음을 암시한다. 

일본의 핵무장을 용인하지 않으면서도 자기의 북침핵전쟁에 일본자위대를 깊숙이 끌어들이려는 것, 바로 이것이 미일방위협력지침 2차 개정의 흑막에 가려진 미국의 계략이며, 핵야욕을 품은 일본이 미국의 확장억지전략에 편승하여 미일공동북침핵전쟁을 감행하려는 것, 바로 이것이 미일방위협력지침 2차 개정의 흑막 뒤에 가려진 일본의 계략이다.

그러나 일본의 그런 계략은 역사적 사실을 망각한 자기파멸의 꼼수로 보인다. 1940년대 태평양전쟁 시기에 미국 본토를 공격하기 위한 원폭을 개발하려고 광란하던 일제가 5년도 채 되지 않아 원폭재앙으로 패망한 역사적 사실을 망각한 결과는 자기파멸의 반복이다. 핵야욕에 눈이 멀어 역사적 사실도 망각하고, 미국의 확장억지전략에 매달려 북침핵전쟁음모에 광분하는 일제전범의 후예들은 어느 날 조선의 핵타격으로 파국적 종말을 맞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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