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24

선제공격에 궤멸된 미육군 극동공군과 미해군 2개 함대

[한호석의 개벽예감](150)
자주민보 2015년 02월 23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사진 1> 필리핀 바탄반도에 고립되어 혹심한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던 미국-필리핀연합군 76,000명은 1942년 4월 9일 일본군에게 집단투항하였다. 미국극동군총사령관 맥아더가 오스트레일리아로 도망친 뒤로 마지막 지탱점인 커리지도어 지하기지에 남아서 승산 없는 전투를 지휘하던 미국-필리핀연합군 사령관 조너던 웨인롸이트도 1942년 5월 6일 휘하병력 13,000명과 함께 일본군에게 집단투항하였다. 필리핀에 주둔하던 미군군은 '세계 최강'이 아니라 오합지졸이었다.     © 자주민보


오합지졸로 전락한 미육군 제5, 제13극동공군과 미해군 아시아함대
 
미국인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치욕스런 역사 가운데는 1941년 12월부터 1942년 5월까지 필리핀과 하와이에서 일본과 격돌하며 겪었던 패전경험도 있다. <사진 1> 당시 일본군은 필리핀과 하와이를 선제공격하여 그 두 지역에 주둔하던 미국군을 거의 궤멸시켰다. 당시 일본은 선제공격으로 대승을 거두었으나, 군사전략적 한계와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는 바람에 미국으로부터 반격을 받고 결국 패망하였다. 1941년 12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지속된 태평양전쟁은 미국의 반격을 받은 일본이 3년 9개월 만에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끝났던 것이다.

태평양전쟁에서 격돌한 미국과 일본은 명실상부한 제국주의국가들이었다. 한국에서는 일본만 제국주의국가였다고 생각하고, 당시 미국은 제국주의국가가 아니었던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것은 착오다. 명백하게도, 태평양전쟁은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영토확장을 위한 무력침공을 노리던 두 제국주의국가들이 충돌한 식민지쟁탈전이었다. 태평양전쟁의 배경과 원인은 다음과 같다.

일본은 조선을 침공하여 갑오농민전쟁(1894년)과 항일의병전쟁(1895-1909)을 살육무력으로 진압하였고, 1910년에 조선을 식민지로 강점하였으며, 조선을 발판으로 삼고 아시아대륙을 침략할 기회를 노렸다. 그에 뒤질세라 미국도 1898년 하와이왕국을 병합하였고, 필리핀-미국전쟁(1899-1902)이 막판에 들어선 1900년에는 서둘러 필리핀을 식민지로 강점한 뒤에, 필리핀을 발판으로 삼고 아시아대륙을 침략할 기회를 노렸다. 당시 미국이 식민지로 강점한 필리핀에 주둔하면서 중국침공을 노린 침략선견대의 역할을 수행한 무력이 바로 미해군 아시아함대(Asiatic Fleet)다.

1899년부터 1900년까지 기간에 ‘중국문호개방(Open Door in China)’이라는 미국판 아시아침략정책의 설계자는 제37대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 1838-1905)였고, ‘대동아공영권 건설’이라는 일본판 아시아침략정책의 설계자는 제34대 내각총리대신 고모에 후미마로(近衛文麿, 1891-1945)였다.  
1905년 7월 27일 일본 도쿄에 나타난 미국 전쟁장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 Taft, 1857-1930)와 일본 내각총리대신 가츠라 다로(桂 太郞, 1848-1913)가 합의한 밀약에서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강점하고,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강점하기로 이미 합의한 바 있었으나, 미국의 아시아침략정책과 일본의 아시아침략정책은 중국을 누가 강점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중국강점문제를 놓고 두 제국주의국가의 상호대립이 차츰 격화되는 가운데,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강점한 뒤 북진을 계속하여 1934년에 만주국을 세우고 1937년에는 중국을 침공하였다. 미국이 눈독을 드린 중국을 일본이 먼저 침공하자 미일관계는 적대적으로 돌변하였다. 미국은 강력한 경제제재와 외교고립의 고삐를 틀어쥐고 일본을 압박하였다.

일본의 숨통을 조이려는 미국의 압박공세는 석유수출중단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은 석유수요량의 80%를 미국에서 수입하였으니, 미국의 석유수출중단이 유발한 일본의 유류난은 일본의 산업가동률과 전쟁수행력을 급속히 저하시켰을 뿐 아니라, 차츰 일본의 국가적 생존마저 위협할 지경이었다. 그런 생사존망의 갈림길에서 일본의 선택은 동남아시아 유전지대를 강점하여 석유자원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동남아시아 유전지대를 강점한다고 해도, 미해군 아시아함대와 태평양함대가 동남아시아와 일본을 오가는 해상수송로를 차단해버리는 경우 동남아시아에서 약탈한 석유를 수송할 방도가 없었다. 동남아시아 유전지대를 강점하려던 일본은 미해군 아시아함대와 태평양함대부터 무력화시켜야 하였다. 당시 일본은 필리핀에 주둔하는 미해군 아시아함대와 하와이에 주둔하는 미해군 태평양함대를 힘껏 밀어붙이면 그 두 함대가 미국 본토 캘리포니아로 퇴각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동남아시아와 일본을 오가는 해상수송로를 안전하게 확보하는 한편, 북태평양의 해양패권까지 장악하게 되리라고 타산하고 전쟁준비에 들어갔다. 그로써 태평양전쟁은 불가피해졌다.

그런데 당시 미국은 겉으로는 압박공세로 일본에게 호령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일본과 막후협상을 벌여 전쟁을 피해보려고 하였다. 일본 외무성이 공개한, 자국의 오래된 외교문서를 인용한 <아사히신붕> 2013년 3월 7일 보도에 따르면, 일본군이 필리핀과 하와이를 동시에 공격하기 불과 몇 시간 전인 1941년 12월 7일(일본 현지 날짜) 정오에 일왕에게 보내는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미국 대통령의 친서가 도쿄중앙전신국으로 타전되었는데, 그 친서에는 전쟁을 피하자는 제안이 담겼다고 한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1941년 당시 미국은 공군을 별도의 군종으로 창설하지 못했고, 육군 산하에 공군부대를 두었다. 미육군 극동공군(Far East Air Force) 산하에는 제5공군, 제7공군, 제13공군이 편성되어 있었는데, 제5공군과 제13공군은 필리핀에 전진배치되었고, 제7공군은 하와이에 배치되었다.

일본군의 1차 공격목표는 필리핀에 주둔하는 미육군 극동공군 주력부대였다. 1941년 12월 8일 오후 12시 40분 일본해군항공대 소속 ‘96식 육상공격기’ 27대로 편성된 폭격편대가 당시 일본의 점령 하에 있던 대만에서 이륙하였다. 그 폭격편대는 필리핀 루손섬(Luzon Island)에 있는 미육군 극동공군 클락비행장(Clark Airfield)을 기습폭격으로 파괴하였고, 거의 동시에 일본해군항공대 소속 ‘1식 육상공격기’ 54대로 편성된 폭격편대의 공습이 필리핀 아이바비행장(Iba Airfield)을 강타했다. 잠시 후, 일본해군항공대 소속 ‘1식 육상공격기’ 26대로 편성된 폭격편대가 2차 폭격으로 클락비행장을 또 다시 파괴하였다.

당시 일본군의 공습에 사용된 폭격기는 전범기업 미쯔비시(三菱)가 생산한 두 종류의 프로펠라형 단엽기였다. ‘96식 육상공격기’는 최고비행속도가 시속 375km이고, 항속거리는 4,400km이며, 폭탄 800kg을 실었다. ‘1식 육상공격기’는 최고비행속도가 시속 428km이고, 항속거리는 2,852km이며, 폭탄 800kg을 실었다.

1941년 12월 8일 오후 약 45분 동안 계속된 일본해군항공대 폭격편대의 두 차례 기습폭격을 받은 미육군 제5, 제13극동공군은 전투기와 폭격기 절반을 잃었고, 그 이후 이틀 동안 계속된 일본해군항공대의 추가폭격으로 미육군 제5, 제13극동공군은 거의 궤멸되었다. 기습폭격 개시일로부터 사흘째 되던 12월 11일 미육군 극동공군은 필리핀 방어를 포기하였고, 간신히 살아남은 프로펠라형 중폭격기 B-17 14대를 챙겨 오스트레일리아로 황급히 달아났다.

일본해군항공대가 클락비행장과 아이바비행장을 맹폭하던 시각, 일본육군 제14군 보병부대는 루손섬에서 북쪽으로 190km 떨어진 바탄섬(Batan Island)에 상륙하였다. 필리핀에서 벌어진 미일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는데, 선제공격을 받고 정신을 잃은 미국에게는 연속퇴각과 집단투항의 치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군의 공습을 피해 커리지도어(Corregidor)지하기지로 피신했던 당시 미극동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는 1942년 3월 12일 자기 아내를 비롯한 측근 몇 사람을 어뢰정 4척에 태우고 탈출하여 필리핀 남쪽 민다나오(Mindanao)로 줄행랑을 쳤고, 거기서 폭격기 B-17로 갈아타고 4,000km나 떨어진 오스트레일리아로 도망쳤다. 극동군 총사령관이 저 혼자 살겠다고 다른 나라로 멀리 도망쳐버렸으니, 그 휘하의 군대가 집단투항으로 궤멸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였다.  

필리핀 바탄반도(Bataan Peninsula)에 고립되어 혹심한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던 미국-필리핀연합군 76,000명은 1942년 4월 9일 일본군에게 집단투항하였다. 맥아더가 도망친 뒤로 마지막 지탱점인 커리지도어 지하기지에 남아서 승산 없는 전투를 지휘하던 미국-필리핀연합군 사령관 조너던 웨인롸이트(Jonathan M. Wainwright)는 1942년 5월 6일 휘하 병력 13,000명과 함께 일본군에게 집단투항하였다. 그 날 일본군에게 사로잡힌 웨인롸이트는 필리핀, 대만, 만주의 포로수용소들로 끌려다니다가 만주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던 1945년 8월 16일 소련군에 의해 석방되었다.

필리핀 주둔 미육군 제5, 제13극동공군이 궤멸되는 바람에 항공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필리핀 주둔 미해군 아시아함대의 운명도 처참하였다. 미해군 아시아함대는 개전 나흘 뒤인 1941년 12월 12일 인도네시아 자바(Java)로 황급히 퇴각하였는데, 폭격기와 잠수함을 동원한 일본군의 집중공격을 받고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당시 미해군 아시아함대 소속 전투함선들 가운데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격침되거나 파손된 전투함선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미해군 최초의 항공모함  랭글리호(USS Langley),  중순양함 휴스턴호(USS Houston), 구축함들인 엣설호(USS Edsall), 포프호(USS Pope), 피어리호(USS Peary), 필스베리호(USS Pillsbury), 포함들인 애쉬빌호(USS Asheville)와 오하우호(USS Oahu), 군수보급함 페코스호(USS Pecos)가 격침되었다. 구축함들인 스투어트호(USS Stewart)와 패럿호(USS Parrott), 잠수함모함 캐노퍼스호(USS Canopus)는 대파되었다. 치욕스러운 참패를 당한 미해군 아시아함대는 1942년 2월에 결국 해산되었다. 

▲ <사진 2> 이 사진은 1941년 5월 8일 필리핀 주둔 미국군이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던 커리지도어 지하기지가 함락되어 일본군에게 집단투항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필리핀에서 벌어진 5개월 동안의 미일전쟁에서 미국은 전사자 25,000명, 부상자 21,000명, 포로 100,000명을 내고 패퇴하였다.     © 자주민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근해에서 벌어진 150일 동안의 격전에서 미국군 전사자는 25,000명, 부상자는 21,000명, 포로는 100,000명이었고, 일본군 전사자는 9,000명, 부상자는 13,200명, 실종자는 500명이었다. 150일 동안의 전투에서 미국군이 100,000명이나 포로로 붙잡힌 것은 그들이 ‘세계 최강’이 아니라 오합지졸이었음을 말해준다. <사진 2>

미국군과 일본군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근해에서 벌인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주목하는 것은, 미육군 제5, 제13극동공군과 미해군 아시아함대의 무력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근해에서 싸운 일본군보다 훨씬 더 우세했으나,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대패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서 확인하는 것은, 현대전의 승패가 우세한 무력보다 선제공격 성공여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 <사진 3> 1941년 12월 7일 미국 하와이 힉컴공군기지에 주기된 미육군 제7극동공군 소속 전투기들이 일본해군항공대 폭격편대의 선제공격을 받고 파괴된 모습이다. 하와이에 주둔하던 미육군 제7극동공군과 미해군 태평양함대는 선제공격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고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 자주민보


선제공격에 궤멸된 미육군 제7극동공군과 미해군 태평양함대

1941년 12월 7일 오전 7시 50분 일본해군 항공모함 6척에서 일제히 이륙한 쌍발함상폭격기 189대가 미국 하와이를 동시다발기습공격으로 파괴하였다.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뒤 쌍발함상폭격기 161대의 2차 공습이 하와이를 또 다시 강타했다. 

태평양전쟁에 등장한 일본의 폭격기는 항공모함에 이착륙하는 함상폭격기와 육상비행장에 이착륙하는 육상공격기로 대별되는데, 그 종류는 12종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빠른 폭격기는 최고속도 시속 660km로 비행하는, 태평양전쟁 후반부에 자폭공격에 내몰린 ‘영식 함상전투기’였고, 가장 먼 거리를 날아가는 폭격기는 항속거리 5,370km를 비행하는 ‘15식 폭격기’였고, 가장 많은 폭탄을 실은 폭격기는 폭탄 2,900kg을 적재한 ‘4식 폭격기’였다.

일본의 육상공격기는 중국침공에 동원되었고, 일본의 함상폭격기는 필리핀-하와이침공에 동원되었다. 일본이 필리핀-하와이침공에 동원한 함상폭격기에는 항공어뢰(areal torpedo)가 1발씩 실렸다.

일본산 ‘93식 항공어뢰’는 미국산 어뢰 ‘마크(Mark) 14’보다 성능이 훨씬 더 우세하였다. ‘마크 14’의 최장사거리는 7km밖에 되지 않았는데, ‘93식 항공어뢰’의 최장사거리는 36km나 되었고, 폭약도 ‘마크 14’보다 두 배나 더 많이 내장되었다. 함상폭격기가 타격목표 2km 전방에서 투하한 항공어뢰는 해수면 위 7m의 저고도까지 내려가 타격목표를 향해 돌진하였다. 

1941년 12월 7일에 2시간 20분 동안 계속된 일본해군항공대의 하와이 선제공습으로 진주항 해군기지(Pearl Harbor Naval Base), 캐너해군항공기지(Kaneohe Naval Air Station), 윌러공군기지(Wheeler Air Force Base), 이와공군기지(Ewa Air Force Base)가 파괴되었다. 당시 미육군 제7극동공군의 각종 전투기 402대 가운데 155대가 이륙하지도 못하고 공습을 받았다. 402대 가운데 188대는 지상에서 완파되거나 공중에서 격추되었고, 159대는 지상에서 반파되거나 공중에서 격상되었다. 그에 비해, 선제공습에 동원된 일본해군항공대 소속 함재기 414대 가운데 29대가 격추되었는데 첫 번째 공습에서 9대, 두 번째 공습에서 20대를 잃었을 뿐이다. 지상포화를 맞고 격상된 일본해군항공대 소속 함재기는 74대였다. <사진 3>

미육군 제7공군은 일본해군항공대의 선제공습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현대전의 승패가 무력우세보다 선제공격 성공여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미국 하와이의 진주항 해군기지에 주둔하는 미해군 태평양함대에 대한 일본군의 선제공격은 기습폭격과 어뢰공격을 배합한 공중-수중동시공격이었다. 당시 일본해군 지휘부는 ‘어뢰특공대’의 어뢰공격으로 미해군 태평양함대를 타격하기로 결정하고, 작전명을 ‘하와이작전’으로 정했다.

그런데 진주항 해군기지의 수심이 너무 얕아 일본해군의 3,500t급 잠수함은 그 해군기지 안으로 수중침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해군 지휘부는 46t급으로 특수제작한 초소형 2인승 침투잠수정을 3,500t급 잠수함에 싣고 하와이 인근해역으로 가서 내려놓으면, 초소형 잠수정이 진주항 해군기지 안으로 수중침투하여 전함들을 어뢰로 파괴하는 어뢰특공전법을 생각해냈다. ‘하와이작전’에 동원된 일본해군 잠수함대는 2인승 침투잠수정을 각각 1척씩 실은 3,500t급 잠수함 5척으로 편성되었다.

▲ <사진 4> 이 사진은 진주항 해군기지 앞바다 수심 365m 해저에서 2002년에 발견된 일본해군 잠수정 잔해를 촬영한 것이다. 이 사진에 나타난 2인승 침투잠수정 잔해는 1941년 12월 7일 진주항해군기지를 기습하기 위해 진주항 앞바다에 들어가 수중매복하고 있었던 일본해군항공대 소속 침투잠수정 5척 가운데 하나다. 이 침투잠수정은 일본해군항공대 소속 함상폭격기들이 진주항해군기지를 공습하기 직전 진주항 앞바다를 순찰하던 미해군 태평양함대 소속 소해정에게 해수면 위로 내놓은 전망탑 상층부가 포착되는 바람에 매복위치가 노출되어 미해군 구축함 워드호의 폭뢰공격으로 격침되었다.     © 자주민보

1941년 11월 19일 새벽 2시 15분 ‘어뢰특공대’를 실은 일본해군 잠수함 5척이 일본 히로시마(廣島)현 쿠레(吳市)항에서 비밀리에 출항하여 하와이로 향했다. 12월 7일 진주항 해군기지에서 약 10~20km 떨어진 바다밑으로 접근한 그 잠수함들에서 침투잠수정 5척이 일제히 분리배출되었다. 그 침투잠수정들에는 어뢰가 2발씩 실렸다. <사진 4>

태평양전쟁에 등장한 일본의 ‘95식 어뢰’는 사거리가 12km이고, 무게 405kg의 고폭탄두를 장착하였고, 최저속도 시속 83km, 최고속도 시속 94km로 타격목표를 향해 돌진하였는데, 그런 어뢰를 척당 2발씩 탑재한 잠수정 5척은 공중-수중동시공격시각을 대기하며 수중매복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작 어뢰공격이 개시되었을 때, 작전능력이 뒤떨어진 침투잠수정들은 공격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했다. 일본해군 ‘어뢰특공대’ 소속 침투잠수정 5척 가운데 4척은 격침되었고, 1척은 좌초되는 바람에 미해군에게 나포되었다. 5척 침투잠수정 가운데 단 1척만 어뢰 2발을 쏘고 격침되었는데, 1발은 31,000t급 전함 애리조나호(USS Arizona)에 명중하였고, 다른 1발은 33,000t급 전함 웨스트버지니아호(USS West Virginia)에 명중하였다.
어뢰 1발과 폭탄 4발을 맞은 애리조나호는 대폭발을 일으키며 침몰하였고, 어뢰 1발, 폭탄 2발, 항공어뢰 6발을 맞은 웨스트버지니아호도 침몰하였다.  

▲ <사진 5>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항 해군기지에 정박해 있던 미해군 태평양함대 소속 31,000t급 전함 애리조나호는 일본해군항공대 폭격편대가 투하한 폭탄 4발과 일본해군 침투잠수정이 발사한 어뢰 1발을 맞고 대폭발을 일으키며 침몰하였다. 그날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은 하와이 주둔 미국군은 거의 궤멸되었다.     © 자주민보

그것만이 아니었다. 33,000t급 전함 테네씨호(USS Tennessee)가 파손되었고, 32,000t급 전함 캘리포니아호(USS California)가 침몰하였고, 32,000t급 전함 매릴랜드호(USS Maryland)와 31,000t급 전함 펜실배니아호(USS Pennsylvania)가 각각 파손되었고, 27,000t급 전함 오클라호마호(USS Oklahoma)는 전복되었고, 27,000t급 전함 네바다호(USS Nevada)와 23,000t급 퇴역전함 유타호(USS Utah)는 각각 좌초되었다. 경순양함들인 헬레나호(USS Helena)와 랠레이호(USS Raleigh), 구축함들인 쇼우호(USS Shaw)와 캐씬호(USS Cassin)가 각각 파손되었고, 구축함 다운스호(USS Downes)는 곁에 있던 피격 구축함들에서 불이 옮겨 붙었다. 기뢰부설함 오글라라호(USS Oglala)는 좌초되었고, 정비함 비스틀호(USS Vestal)는 불탔고, 항공지원함 커티쓰호(USS Curtiss)는 파손되었다. 그 전투에서 미국은 사망자가 2,403명, 부상자가 1,178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다. <사진 5>

미국군과 일본군이 하와이에서 벌인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주목하는 것은, 미육군 제7극동공군과 미해군 태평양함대의 무력이 하와이를 공격한 일본군보다 훨씬 더 우세했으나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대패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서 확인하는 것은, 현대전의 승패가 우세한 무력보다 선제공격 성공여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 <사진 6> 1942년 9월 15일 미해군 19,000t급 최신형 항공모함 와스프호가 일본해군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 6발을 맞고 화염에 휩싸여 침몰하고 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항공모함도 잠수함 어뢰공격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 자주민보


전반부에 대승을 거둔 일본은 후반부에 왜 항복하였을까?

태평양전쟁 전반부에 필리핀과 하와이를 강타한 일본군의 동시선제공격은 ‘세계 최강’이라던 미국군에게 치욕스러운 참패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 후반부에 가서 일본군은 미국군의 거센 반격을 받고 패배를 거듭하다가 결국 항복의 백기를 들었다. 태평양전쟁 전반부에 대승을 거두었던 일본군은 왜 후반부에 전세가 역전당하여 항복하였을까? 일본군의 패인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군의 패인은 전략적 실수에 있었다. 태평양전쟁 전반부에 일본군은 필리핀에 주둔한 미육군 제5, 제13극동공군과 미해군 아시아함대, 하와이에 주둔한 미육군 제7극동공군과 미해군 태평양함대를 거의 궤멸시켰으나, 미해군 함대의 주력을 제거하지 않고 철수해버린 실수를 저질렀다. 그 때나 지금이나 미해군 함대의 주력은 항공모함이다. 미해군 항공모함을 격침시켜야 태평양전쟁에서 완승할 수 있었으므로 일본의 대미공격은 무엇보다도 항모공격에 집중되었어야 하였다. 1941년 12월 당시 하와이에 배치된 태평양함대 소속 항공모함들은 25,000t급 엔터프라이즈호(USS Enterprise), 36,000t급들인 렉싱턴호(USS Lexington)와 쌔라토가호(USS Saratoga) 3척이었다.

그런데 일본군이 진주항 해군기지를 공격하기 이틀 전에 항공모함 렉싱턴호는 그 해군기지에서 출항하여 서쪽으로 항해하였는데, 일본군이 진주항 해군기지를 공격할 때, 그 항공모함은 하와이에서 2,100km 떨어진 미드웨이섬(Midway Island)에서 동남쪽으로 930km 떨어진 해상에 있었다. 일본이 진주항 해군기지를 공격할 때, 항공모함 쌔라토가호는 미국 본토 캘리포니아의 최남단 쌘디에고(San Diego) 해군기지에 입항하였다. 그러므로 일본이 진주항 해군기지를 공격할 때, 하와이 인근에 남아있었던 항공모함은 엔터프라이즈호밖에 없었다.

이런 정황에서 일본해군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추적하여 공격해야 하였으나, 그들은 항모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일본해군이 항모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한 것은, 태평양전쟁 전반부에 패하였던 미해군이 전투력을 차츰 복원하여 반격에 나설 수 있게 허용한 전략적 실수였다. <사진 6>

둘째, 일본군의 패인은 미국군이 하와이에 건설한 대형조선소, 선박수리시설, 유류저장시설을 파괴하지 않고 철수한 것에 있었다. 당시 ‘하와이작전’에 참가한 일본해군항공대 지휘관들은 3차 공습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기했는데도, 일본해군제독 나구모 주이치(南雲忠一, 1887-1944)는 3차 공습을 명령하지 않았다. 그들이 대형조선소, 선박수리시설, 유류저장시설을 파괴하지 않은 것은, 미해군이 나중에 하와이를 거점으로 전투력을 차츰 복원하여 반격에 나설 수 있게 허용한 전략적인 실수였다.

셋째, 일본군의 패인은 미국 본토를 공격할 능력이 없었다는 데 있다. 필리핀과 하와이는 미육군 극동공군과 미해군 아시아함대 및 태평양함대의 전략거점들이지만, 미국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전진배치거점들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에서 완승하려면, 전진배치거점들은 물론 미국 본토까지 공격해야 하였다. 만일 당시에 일본군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장거리타격력을 갖고 있었다면, 전세는 일본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기울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에게는 미국 본토를 공격할 타격수단이 전혀 없었다.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에서 사용한 가장 위력적인 타격수단은 폭탄과 어뢰였고, 그것의 운반수단은 항속거리가 짧아 미국 본토의 심장부까지 날아가지 못하는 쌍발폭격기였다. 당시 일본해군의 잠수함은 미국 본토 해안까지 접근할 수는 있었으나, 수중에서 어뢰를 발사하는 대함공격력밖에 없었다. 일본군의 폭탄과 어뢰는 미국 본토의 심장부를 공격할 타격수단이 아니었다. 주목하는 것은, 미국 본토에 대한 공격력을 갖지 못한 일본군의 군사전략적 한계가 미국의 반격과 일본의 패망을 불러온 결정적 요인으로 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이 보유한 최강의 무기는 노래다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은 미국의 팔과 다리만 공격하고 급소는 공격하지 못한 채 미국의 반격을 받고 패망하였다. 태평양전쟁이 그런 식으로 끝난 때로부터 어느덧 70년 세월이 흐른 오늘, 미국은 자기의 명줄을 쥐고 흔드는 새로운 강적을 만났다. 그 강적은 미국에게 이미 최후결전을 선포해놓고 총공격명령을 기다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조선이 미국에게 선포한 최후결전은 70여 년 전 일본군의 원시적인 폭탄-어뢰공격과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최첨단 공중-수중동시공격으로 전개될 것이다. 조선인민군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는 사람들은 조선이 선포한 최후결전에서 최첨단 공중-수중동시공격이 전개될 것이라는 나의 예상을 과대망상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첫째, 조선인민군은 미국군에게 참패를 안겨주기에 충분한 선제공격력을 갖추었다. 조선이 말하는 선제공격력이란 전술핵탄과 정밀타격수단의 결합을 뜻한다. <로동신문> 2013년 5월 21일 보도에서 밝혀진 것처럼, 조선은 핵탄의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 정밀화를 완성하였다. 공격징후를 노출하지 않는 조선의 지하발사기지들 안에서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 정밀화된 전술핵탄이 정밀타격수단과 결합되어 24시간 격발대기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 전술핵탄미사일들에는 미국의 미사일방어망(MD)을 뚫고 들어가는 각개조준다핵탄두(Multiple Independently Targetable Nuclear Warheads)가 장착되었다.

조선이 공격징후를 노출하지 않고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군사전략거점들을 동시기습하기에 충분한 선제공격력을 갖추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지난 2월 16일 <자주민보>에 실린 나의 글 ‘조선의 대미핵공격력과 미국의 대북전쟁기획자들’에서 상세히 논한 바 있다.
www.jajuminbo.net/sub_read.html?uid=19384

물론 미국도 조선을 선제공격하기 위한 전쟁계획을 작성해놓고, 그 전쟁계획에 의거하여 다양한 실전연습을 실시해왔다. 하지만 미국이 언제가도 해결하지 못할 난제는 그들이 조선을 선제공격하기 전에 조선이 그들의 공격징후를 먼저 포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하군사기지들 안에서 최후결전의 총공격명령을 대기하는 조선인민군은 공격징후를 노출하지 않은 동시다발 초탄발사로 교전상대의 급소를 기습타격할 빨찌산식 핵전법을 연습하는데, 그런 그들을 상대할 미국군은 항모타격단(CSG) 같은 방대한 무력을 시차별로 동원하는 정규군식 핵전법밖에 모른다. 정규군식 핵전법은 공격징후를 노출할 수밖에 없으며, 현대전에서 공격징후노출은 선제공격을 자초하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된다.
  
둘째, 조선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군사전략거점들을 파괴할 선제공격력만 보유한 게 아니라, 조선의 대미선제공격에 뒤따라올 미국의 보복핵공격을 억제하기에 충분한 전략핵무력도 보유하였다. 미국의 심장부를 파괴할 대미핵공격력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 밖에도 더 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3종의 탄도미사일과 3종의 발사장비가 바로 그러한 전략핵무력의 실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조선은 수직갱발사대에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로이동식 8축16륜 자행발사대(TEL)에 탑재한 대륙간탄도미사일, 4,000t급 공격잠수함에 탑재한 수중발사탄도미사일(SLBM)을 비롯한 충분한 핵억지력을 보유한 것이다.

조선이 위와 같은 전략핵무력을 보유함으로써 대미핵공격력을 완성했다는 사실에 대해 미국은 자기들이 파악한 비밀정보를 통해 진작부터 알았으면서도, 그와 관련된 민감한 군사정보를 외부에 전혀 공개하지 않는다. 그런 식의 대북군사정보은폐는 조선의 핵무력에 대한 터무니없는 과소평가를 유발하였다.

그런데 아시아태평양지역 군사전략거점들에 대한 조선의 선제공격을 받은 미국이 만일 상황을 오판하여 조선에게 보복핵공격을 감행하는 경우, 조선은 위에 열거한 강력한 전략핵탄들을 발사하여 미국 본토를 그야말로 ‘불바다’로 만들 것으로 보인다. 이미 조선은 자기 영토에 불꽃 한 점이라도 떨어지면 미국 본토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한 바 있는데, 그것을 허풍으로 생각하는 것은 조선의 핵무력과 핵사용의지에 대한 터무니없는 과소평가가 유발한 착각이다.

조선이 미국의 보복핵공격을 억제하기에 충분한 핵공격력을 갖추었으므로, 미국은 아시아태평양지역에 산재한 자기의 군사전략거점들이 조선인민군의 빨찌산식 핵전법으로 파괴되어도 발만 동동 구를 뿐 감히 반격에 나서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것이 조선의 최후결전이 초단기속결전으로 될 것이라는 나의 거듭되는 주장의 논거다.  

셋째, 이전에 각종 자료를 분석하여 쓴 나의 글들에서 여러 차례 지적한 것처럼, 지금 조선은 전쟁의 격렬화, 장기화를 피하고 매우 짧은 시간에 ‘순간충격전법’으로 전쟁을 끝내면서 전쟁피해를 극소화하기 위해 초단기속결전의 준비와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다. 조선에서는 이것을 ‘싸움준비 완성’이라 하는데, 조선인민군은 이미 자기의 싸움준비를 완성하였다. 지난해부터 그들은 “싸움준비를 더욱 완성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 <사진 7> 조선인민군의 특징은 '노래하는 군대'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기 조국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기들의 정신세계가 '최후결전의 노래' 속에 응축되었다고 생각한다. 조선인민군의 '최후결전'에 등장할 최강의 무기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될 것이다. 이 사진은 2014년 3월 11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관람하는 가운데 진행된 조선인민군 제1차 예술선전대경연의 한 장면이다.     © 자주민보

넷째, 조선인민군의 특징은 ‘노래하는 군대’라고 할 수 있다. <사진 7> 물론 다른 나라 군대들도 군가나 유행가를 부르지만, 다른 나라들에서 군대가 노래를 부르는 것은 일상적인 군사복무생활이 아니라 특별한 계기에만 주어진다. 그런데 조선에서 나온 관련자료들을 보면, 조선인민군 각급 단위들에서는 군인예술선전대의 순회노래공연과 병사들의 화면반주음악 노래부르기가 일상화되었을 뿐 아니라, 군인들, 군인가족들, 후방가족들이 일상생활에서 ‘일심단결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불타는 포연 속에서도 ‘화선공연’을 열고 ‘승리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심지어 죽음을 각오한 마지막 순간에도 ‘신념의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에서 노래는 음악애호활동의 일부가 아니라 전군, 전민의 사상정신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되었다.

다른 나라들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조선은 그들이 말하는 최후결전에서 자기들이 부를 노래가 핵탄보다 더 강하고 무서운 정신적 폭발력을 분출시킬 것으로 믿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조국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기들의 정신세계가 ‘최후결전의 노래’ 속에 응축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쟁을 무기의 대결 이전에 사상정신의 대결이라고 보는 것이 조선에서 말하는 독특한 전쟁관이며, 사상정신의 대결에서 이겨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 조선에서 말하는 전승의 비결이다. 조선인민군의 ‘최후결전’에 등장할 최강의 무기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세계 최강’의 자아도취에 빠진 미국의 극동공군, 아시아함대, 태평양함대는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연속퇴각과 집단투항으로 궤멸되었지만, 오늘날 아시아태평양지역 곳곳에 배치된 미국군이 조선인민군의 상상을 초월한 선제공격을 받는 경우 연속퇴각과 집단투항이 아니라 무조건 항복으로 내몰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미국은 선제공격에 궤멸된 치욕스런 과거경험을 망각하고 오늘도 여전히 ‘세계 최강’의 자아도취에 빠져있다. 그런 까닭에 미국은 자기들이 북침전쟁연습을 강행하면 조선의 최후결전의지를 꺾을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후결전을 선포한 조선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세계 위에 군림하는 아메리카제국은 그런 착각 위에 세워진 거대한 모래집으로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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