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8/20

8.18 판문점사건의 진실과 허상

[한호석의 개벽예감](75)
자주민보 2013년 08월 19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제5차 비동맹운동정상회의와 제31차 유엔총회, 그리고 판문점사건

1970년대에 북은 국제외교전에서 비약적인 상승세를 탔고, 미국은 추락을 거듭하였다. 그런 변화를 일으킨 국제관계의 원인은 아래와 같다.

첫째, 1960년대에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반대하고 일어선 신생독립국들이 비동맹운동(북에서는 쁠럭불가담운동이라고 부름)에 결집하였는데, 비동맹운동 성원국들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북은 전 세계 반제전선에서 가장 선도적으로, 가장 비타협적으로 투쟁하였으므로 그들이 북을 지지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북의 국제적 위상은 비동맹운동의 지지에 힘입어 더욱 높아졌다.

둘째, 미국은 베트남전쟁의 깊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패전하여 국제적 위상이 땅에 떨어졌고, 반제자주노선을 제시한 비동맹운동의 위세 앞에서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런데 북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는 상승효과와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 떨어지는 하락효과가 각각 극대화되는 두 가지 계기가 판문점사건과 각각 결부되었으니, 그에 얽힌 기묘한 사연은 이러하였다.

판문점사건이 일어나기 이틀 전인 1976년 8월 16일부터 나흘 동안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 제5차 비동맹운동정상회의가 진행되었는데, 그 회의에서 북은 비동맹운동 성원국으로 가입하였다. 박성철 당시 정무원 총리와 허담 당시 정무원 외무상이 그 정상회의에 참석하여 주한미국군 철군문제와 미국 핵무기 철거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하였다.

판문점사건 하루 전인 1976년 8월 17일 북을 지지하는 유엔 성원국들은 미국이 남에서 모든 군사장비를 철수할 것과 대북침공위협을 중지할 것과 남에서 실시하는 군사연습 같은 도발행동을 중지할 것을 촉구하는 대미결의안을 유엔총회에 상정하였다.

북을 지지하는 유엔 성원국들은 1973년 12월 28일 제28차 유엔총회에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 해체 결의안을 채택하였고, 1975년 11월 18일 제30차 유엔총회에서 주한유엔군사령부 해체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미국이 유엔의 이름으로 조작해놓았던 정치기구와 군사기구를 각각 해체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것이다. 북을 지지하는 유엔 성원국들은 그 여세를 몰아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키고 미국이 남측에 배치한 핵무기를 철거시키는 결의안을 1976년 9월에 열리는 제31차 유엔총회에 상정해 놓았으니, 사상 최악의 외교적 패배로 궁지에 몰린 미국은 당황망조할 수밖에 없었다.

제31차 유엔총회를 며칠 앞둔 1976년 8월 30일 백악관에서 비상대책회의가 진행되었다.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 당시 국무장관, 브렌트 스카우크로프트(Brent Scowcroft)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윌리엄 스크랜튼(William W. Scranton) 당시 유엔주재미국대사가 진행한 그 회의의 비망록이 2008년 12월 31일에 기밀해제되었는데, 위에서 언급한 대미결의안을 지지하는 유엔 성원국은 31개국이었는데, 미국이 제출한 대북결의안을 지지하는 유엔 성원국은 19개국밖에 되지 않아 곤경에 빠진 그들의 모습이 비망록에서 드러난다.

만일 판문점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1976년 8월과 9월에 각각 열린 비동맹운동정상회의와 유엔총회에서 주한미국군 철군과 남측 배치 미국 핵무기 철거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을 것이며, 그로서 미국은 국제외교전에서 만회하기 힘든 참패를 당하였을 것이다. 적대적 북미관계에서 미국이 사상 최악의 외교적 곤경에 빠졌을 때 판문점사건이 일어났고, 미국은 그 사건을 이용하여 외교적 곤경에서 빠져나오려고 총력을 집중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76년 판문점 미루나무 벌채사건 당시 북과 미군의 육박전, 쓰러진 미군이 인민군에게 짖밟히고 있는데도 옆의 두명의 미군은 돕기는 커녕 동료를 버리고 도망가기에 바쁘다. 미군 측에서는 작업하기 위해 놓아둔 도끼를 인민군이 집어 들어 찍었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북은 미군이 먼저 도끼를 던지며 공격을 하기에 그 날아오는 도끼를 잡아 본격적으로 미군과 싸움을 벌렸다고 주장했다. 미군 측에서 촬영한 이 사진에서는 도끼나 무장없이 몸으로만 싸우고 있는데 표정만 봐도 인민군은 기세가 등등하다. 미군들은 쓰러진 동료를 버려두고 도망을 치거나, 의자 위에까지 몰려 더는 도망 못가게 되어 그런지 위자 꼭지에 털썩 주저 앉아 벌벌 떨고 있다. / 사진 자료 정설교 시인  제공 , 설명글은 자주민보   © 자주민보
 

새로운 사실을 밝혀주는 회고담

1976년 8월 18일 미루나무 가지치기작업을 지휘하던 미국군 경비병들을 인민군 경무원들이 도끼로 공격하여 그들 중 2명을 죽이고 다른 9명에게 부상을 입혔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진 판문점사건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건현장 목격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래리 쇄딕스(Larry G. Shaddix)가 판문점사건에 관한 기존 서술내용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사건 당시 미국군 판문점경비대 병참장교였는데, 작업현장을 지휘하다가 피살된 아서 보니파스(Arthur Bonifas) 대위와 무전기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제5관측초소에서 사건현장을 사진기로 촬영하고 있었다. 쇄딕스는 2008년 7월 15일 인터넷에 실은 판문점사건 회고담에서 “지난 32년 동안 (판문점사건에 관한) 모든 책들과 기록들을 큰 관심을 갖고 읽어온 나는 (사건에 관한) 부정확한 정보가 출판된 것을 보고 놀랐다”고 지적한 바 있다.

쇄딕스를 비롯한 판문점사건 체험자들이 남긴 회고담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판문점사건의 진상을 보여주는데, 판문점사건과 관련하여 미국측에서 세 사람, 북측에서 한 사람이 언론에 회고담을 남겼다.

회고담을 남긴 미국인 세 사람은 위에서 언급한 래리 쇄딕스, 사건 당시 보니파스 대위의 운전병 겸 호위병이었던 마크 루트럴(Mark Luttrull), 사건 당시 미국군 판문점경비대 제3소대 기동타격대원으로 사건현장에 출동한 스티브 스프래그(Steve Sprague)다. 루트럴과 스프래그의 회고담은 2001년 8월 17일 <코리아 타임스>에 실렸다.

다른 한 편, 북에서 회고담을 남긴 사람은 사건 당시 인민군 경무원으로 사건현장에 출동한 박지선이다. 그의 회고담은 2012년 12월에 촬영된 북의 텔레비전 방송 소개편집물 ‘<도끼사건>의 주인공으로 영생하는 전사-전 조선인민군 군관 공화국영웅 홍성문’에 들어있다.

 
물리적 충돌 예측하고 사전준비 갖춘 미국군 판문점경비대

판문점공동경비구역 서쪽에 사천이라는 내가 흐른다. 사천의 물줄기를 따라 군사분계선(MDL)이 그어져 있고, 미국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 부르는 사천교가 북측 지역과 판문점공동경비구역을 연결한다. 1976년 8월 당시 사천교 부근에 키가 24m 정도로 크게 자란 수령 30년의 노르만디 미루나무(Normandy poplar tree) 한 그루가 서 있었다.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 30분이 조금 지난 시각, 미루나무 나뭇가지를 자를 작업반이 현장에 도착하였다. 작업반은 미국군 판문점경비대 병력 11명과 나뭇가지를 자르는 작업에 동원된 남측 민간인 5명으로 구성되었다. 민간인 5명은 미8군사령부가 고용한 한국노무단(Korean Service Corps)에 소속된 노동자들이었다.

판문점사건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사건 직전에 있었던 미국군 판문점경비대의 준비행동이다. 이에 관한 정보는 콘래드 디래터(Conrad DeLateur) 미국군 해병대 대령이 1987년 3월 미국 국무부의 대외업무단기강좌(Foreign Service Institute) 제29차 상급토론회에서 발표하였고 1989년 12월에 기밀해제된 연구보고서 ‘판문점에서의 살해: 위기해결에서 전역사령관의 역할(Murder at Panmunjom: The Role of the Theater Commander in Crisis Resolution)’에서 찾을 수 있다.

디래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판문점경비대 지휘관 빅터 비에라(Victor S. Vierra) 중령은 보니파스 대위가 지휘하는 작업반을 현장에 보내기 직전 몇 가지 사전조치를 취하였다. 1개 소대병력으로 편성된 기동타격대를 작업현장에서 600m 떨어진 경비초소에 대기시킨 비에라 중령은 작업현장에서 인민군 경무원들과 충돌하면 기동타격대가 출동할 것이라고 보니파스 대위에게 일러두었고, 작업현장을 촬영하기 위해 미루나무 인근에 있는 다른 두 초소에 촬영담당인원을 각각 배치하였다. 이것은 미국군 경비병들이 인민군 경무원들과 물리적 충돌을 벌일 것에 대비한 사전준비였다.

비에라 중령은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 것을 어떻게 그처럼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을까? 루트럴의 회고담에 따르면, 판문점사건이 일어나기 12일 전인 8월 6일 미국군 경비병 4명과 남측 노동자 6명이 미루나무 제거작업을 하려고 현장에 나갔으나 인민군 경무원들이 나타나 작업반을 위협하여 현장에서 쫓아냈다는 것이다. 12일 전에 그런 일이 있었으므로, 비에라 중령은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 것에 대비해 사전준비를 갖추었던 것이다.

디래터의 보고서는 사건 당시 비에라 중령이 두 초소에 영화촬영기를 지참한 인원을 각각 배치하였다고 서술하였지만 그것은 사실과 조금 다르다. 쇄딕스의 회고담에 따르면, 자신은 “미국군 제5관측초소에서 사진기(camera)를 들고 사건현장을 촬영하였고, 자신이 찍은 현장사진들이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판문점경비대 기술하사관으로 근무하던 티모시 그레이(Timothy Gray)의 회고담에 따르면, 자신은 사천교 인근에 있는 제3검문소에서 영화촬영기로 사건현장을 촬영하였다는 것이다.

그레이가 사건현장을 촬영한 흑백영화필름은 사건진상을 밝혀줄 결정적인 증거자료인데도, 미국은 그런 영화필름이 있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다. 또한 쇄딕스의 회고담에 따르면, 자신이 촬영한 현장사진들 중에 미국이 공개하지 않은 현장사진들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처럼 결정적인 증거자료들인 영화필름과 일부 현장사진을 공개하지 않은 까닭은, 그 미공개 자료들이 판문점사건에 대한 미국의 기존 서술내용을 뒤집는 장면을 담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건현장에서 보니파스 대위의 지시에 따라 남측 노동자 5명이 미루나무에 올라가 가지치기작업을 막 시작하였을 때 촬영된 현장사진을 보면, 인민군 경무원 4명이 군용차(jeep)를 타고 현장에 도착한 장면이 나타난다. 처음부터 인민군 경무원 수 십 명이 군용트럭을 타고 사건현장에 몰려왔다고 서술한 것은 사실왜곡이다. 경무원 3명과 함께 현장에 도착한 인민군 군관은 박철 중위였다.

 
누가 곤봉을 사건현장에 가져갔을까?

박철 중위는 작업을 중지하라고 요구하였으나, 미8군한국군지원단(KATUSA) 장교의 통역을 통해 작업중단요구를 전해들은 보니파스 대위는 그 요구를 거부하였다. 박지선의 회고담에 따르면, 인민군 경비병들은 “이 나무를 찍자면 정전협정 합의조항에 따라서 사전에 우리와 합의를 하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는 것이다. 당시 군사정전위원회 미국군 특별고문이었던 이문항(제임스 리)의 회고담에 따르면, 판문점사건 다음날 열린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에서 인민군 대표는 “우리 경비병 4명이 그 곳에 가서 그 나무는 우리가 심고 기른 것으로 도로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라며 약 30분 동안 자르지 말라고 설득했었다. 그리고 반드시 잘라야 한다면 우리측과 상의해서 합의를 본 다음에 해야지 일방적으로 자르면 안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 충돌에 대비한 사전준비까지 갖추고 현장에 나온 미국군 경비병들에게 인민군의 작업중단요구가 통하지 않았고, 양측의 발언과 행동이 차츰 격해지며 격앙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박철 중위는 만일 작업을 중지하지 않으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마지막으로 경고하였으나, 보니파스 대위는 그 경고마저도 무시하고 가지치기작업을 계속 강행시켰다.

디래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박철 중위는 경무원 한 명을 인민군 경비초소에 보내 증원병 출동을 연락하였고, 그에 따라 경무원들이 군용트럭을 타고 사천교를 건너 현장에 도착하였다. 증원병이 도착하자 박철 중위는 작업을 중지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미국군 경비병들을 위협하였으나, 보니파스 대위는 가지치기작업을 계속 강행시켰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물리적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고, 가지치기작업은 어느덧 끝나가고 있었다. 쇄딕스의 회고담에 따르면, “나뭇가지를 충분히 쳤냈을 때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물리적 충돌이 어느 쪽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 먼저 공격을 시작하였을까?

디래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사건현장에 있던 미국군 경비병이 군용트럭을 몰고 인민군 경무원들에게 돌진하였다는 것이다. 미국군 경비병들의 작업강행에 화가 치민 인민군 경무원들은 자기들에게 차량을 돌진시킨 것을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격분한 인민군 경무원들은 손목시계를 풀어 주머니에 넣으며 격투태세를 취하였다.

디래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 긴박한 순간에 보니파스 대위는 인민군 경무원들을 등지고 서 있었기 때문에 인민군 경무원들이 격투태세를 취하는지 알 수 없었고, 박철 중위가 “죽여”라고 소리치며 보니파스 대위의 사타구니를 걷어차는 것을 신호로 인민군 경무원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격자가 상대의 사타구니를 등 뒤에서 걷어차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위의 서술은 신빙성을 잃는다. 박철 중위가 보니파스 대위를 뒤에서 덮쳐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두들겨 팼다는 스프래그의 회고담이 사실에 더 가까운 상황묘사로 보인다.

디래터의 보고서와 스프래그의 회고담에 따르면, 격분한 인민군 경무원들은 도끼는 물론 칼, 곤봉, 쇠파이프, 곡괭이자루를 마구 휘두르며 공격하였다는 것인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쇄딕스가 촬영한 현장사진을 보면 칼과 쇠파이프를 손에 쥔 인민군 경무원은 보이지 않고, 도끼와 곤봉을 손에 쥔 인민군 경무원만 보인다. 멀리서 찍은 현장사진에서 곤봉과 곡괭이자루를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문제의 곤봉은 미국군 경비병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건 당일 판문점경비대 지휘관 비에라 중령은 12일 전 미루나무를 베어버리려다가 인민군 경무원들에게 제지당하고 쫓겨난 실패경험을 잊지 않고, 8월 18일의 물리적 충돌을 예상하여 그에 대비하여 몇 가지 사전준비를 갖추었는데, 작업현장에 나가는 미국군 경비병들에게 곤봉을 준 것도 그런 사전준비에 속한 행동이었다.

박철 중위가 보니파스 대위를 뒤에서 덮쳐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두들겨 패기 시작하자, 미국군 경비병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박지선의 회고담에 따르면, “적들은 곤봉을 비롯한 흉기를 들고 집단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군 경비병들이 곤봉으로 인민군 경무원들을 제압하려고 한 것은 오산이었다. 판문점공동경비구역에서 근무하는 인민군 경무원들은 격술을 연마한 정예병들이다. 그들의 격술공격을 곤봉 따위로 제압해보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미국군 경비병들은 자기들이 휘두르던 곤봉을 인민군 경무원들에게 빼앗겼고, 결국 그 곤봉에 맞아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판문점공동경비구역 인근 북측 지역에 있는 정전협정조인장의 평화박물관에는 사건현장에서 인민군 경무원들이 격투 중에 빼앗은 미국군 경비병들의 곤봉이 도끼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영문자가 새겨진 미국산 도끼

판문점사건을 도끼사건이라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사건에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곤봉이 아니라 도끼였다. 미국측 자료들은, 남측 노동자들이 작업에 사용하다가 격투가 벌어지자 내던지고 달아난 도끼를 인민군 경무원들이 집어 들고 미국군 경비병들을 쳐죽였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아래의 정보를 살펴보면, 그러한 서술은 사실과 다르다.

문제의 도끼는 자루가 짧은 손도끼가 아니라, 자루가 긴 도끼다. 박지선의 회고담에 따르면, 그 도끼는 도끼날과 도끼자루를 합해 길이가 1m 25cm이고, 도끼날의 너비도 거의 20cm나 되는 것이다. 길이가 1m가 넘는 긴 도끼는 장작을 패거나 나무둥치를 찍는 벌목도구이지 나뭇가지를 치는 전지도구가 아니다. 작업현장에서 남측 노동자 5명은 미루나무 아래서 도끼로 나무둥치를 찍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나무에 걸친 사다리에 올라가 동력사슬톱(chain-saw)으로 나뭇가지를 잘라내고 있었다. 작업현장에 발동기가 있었다는 사실이 박지선의 회고담에 들어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동력사슬톱을 사용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 날의 가지치기작업에 도끼는 필요하지 않았는데, 문제의 도끼는 어디서 온 것일까?



 
 
▲ "판문점 사건"에서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도끼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
 




북이 정전협정조인장의 평화박물관에 전시해놓은 도끼를 촬영한 사진을 보면, 그 도끼날에 새겨진 ‘아메리카(America)’라는 영문자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것은 주한미국군에게 지급된 미국산 도끼인 것이다. 남측 노동자들이 미국산 도끼를 작업현장에 가져왔을 리 만무하다. 문제의 도끼는 미국군 경비병들이 타고 온 군용트럭에 실려 있었다. 박지선의 회고담에 따르면, “그 때 미제침략군 한 놈이 차에 달려있던 도끼를 조장 동무를 향해서 집어던졌”다는 것이다.

박지선의 회고담이 들어있는 소개편집물에는 판문점사건에서 격투를 벌인 경무원 홍성문이 자신의 전투기록장에 남긴 글이 소개되었는데, 그는 “나는 조장 동지를 향해 날아오는 도끼를 몸을 날려 잡아챘다. 순간 나의 눈에서는 복수의 불이 펄펄 일었고, 적들의 흰 철갑모와 이지러진 더러운 승냥이의 상통밖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고 썼다. 만일 미국군 경비병이 군용트럭에 있던 도끼를 집어 박철 중위에게 던지지 않았더라면 그 날의 충돌사건은 이전에 판문점공동경비구역에서 벌어지곤 하였던 주먹싸움으로 끝났을 것이고, 판문점도끼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박지선의 회고담에 따르면, “조장 동무 옆에서 적정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던 홍성문 동무는 잽싸게 도끼를 걷어쥐고 3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놈들을 네 놈이나 족쳐버렸”다고 한다. 홍성문이 미국국 경비병이 던진 도끼로 미국군 경비병들을 공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군 피살자 두 명이 그 도끼에 맞아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수 십 명이 서로 뒤엉켜 싸운 격투에서 도끼에 맞아 죽은 사람을 구별해내는 것은 부검을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쇄딕스의 회고담에 따르면, 미국이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미공개 현장사진들은 “북측 사람들이 곤봉으로 반장 보니파스를 때려죽이고, 반장 김씨(미8군한국군지원단 장교를 뜻함-옮긴이)가 그를 찾아내기까지 보니파스가 주차구역 한 복판에 홀로 남겨져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회고담은 미국이 말하지 않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첫째, 보니파스 대위가 도끼에 맞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목숨을 끊어놓은 치명타는 도끼가 아니라 곤봉이라는 점이다.

둘째, 격투 중 부상을 입은 미국군 경비병들이 집중공격을 받고 쓰러진 보니파스를 버려두고 모두 달아났다는 점이다.

보니파스는 현장에서 즉사하였지만, 또 다른 피살자인 마크 배럿(Mark T. Barrett) 중위는 현장에서 즉사하지 않았다. 쇄딕스의 회고담에 따르면, 중상을 입은 배럿을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4.5km 정도 떨어진 캠프 그리브스(Camp Greaves) 야전병원으로 자신이 데리고 갔고, 거기서 긴급의료수송에 쓰이는 군용헬기에 태웠을 때 그가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판문점사건 직후 북의 대응과 미국의 대응 

판문점사건은 북미적대관계를 전쟁 직전 상황으로 끌어간 심각한 사건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세상에 알려진 것은, ‘도끼살해’에 대해 보복하려는 미국이 북에게 초강경하게 대응하였고, 궁지에 몰린 북이 미국에게 ‘사과’함으로써 전쟁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과설’이야말로 사건진상을 왜곡한 미국의 극본이었다. ‘사과설’과 관련하여 아래의 정보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박지선의 회고담에 따르면, 당시 판문점사건에 관해 보고를 받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우리 경무원들의 행동은 응당한 자위적 행동이며 자랑할 만한 영웅적 행동”이며, “우리 인민과 영웅적 인민군대의 전투적 기상을 높이 보여주었다”고 치하하였고, 판문점사건에서 미국군 경비병들을 공격한 인민군 경무원들을 크게 표창하였다고 한다. 치하와 표창은 북이 궁지에 몰려 미국에게 사과하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둘째, 미국은 판문점사건에 대응하여 문제의 미루나무를 제거하는 ‘폴 번연 작전(Operation Paul Bunyun)’을 실시하였는데, 그 작전이 끝난 직후 군사정전위원회 인민군 대표인 한주경 소장은 군사정전위원회 미국군 대표인 마크 프루든(Mark P. Frudden) 해군소장에게 “사적인 만남(private meeting)”을 요구하였다. 그 날 정오에 있었던 사적인 만남에서 한주경 소장은 프루든 소장에게 통지문을 읽어주었다. 이문항의 회고담에 수록된 통지문은 다음과 같다.

“판문점에서 오랫동안 큰 사건이 없었던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판문점공동경비구역에서 이번에 사건이 일어나서 유감입니다. 앞으로는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측이 다같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당신측이 도발을 사전에 방지할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측은 절대로 먼저 도발하지 않을 것입니다. 도발을 받을 때만 오로지 자위적인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측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한주경 소장은 위의 통지문을 프루든 소장에게 읽어줄 때,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의 위임에 따라” 통지한다고 밝혔으므로, 위의 통지문은 김일성 주석이 미국에 보낸 것이다.

미국은 김일성 주석이 자기들에게 통지문을 보낸 사실만 언급하였지만, 판문점사건 다음날 열린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에서 미국이 김일성 주석에게 공식적으로 구두메시지를 보냈으므로 김일성 주석의 통지문은 그에 대한 답장이었다.

김일성 주석이 미국에 보낸 답장통지문은 미국에게 사과의사를 표명한 게 아니라, 미국군 경비병들의 도발로 유감스러운 사건이 일어났으니 앞으로는 그런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노력하라고 미국에게 훈계한 것이다. 디래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의 답장통지문을 전달받은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 리처드 스틸웰(Richard G. Stilwell)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부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도 미국은 북의 통지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1976년 8월 22일에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왜곡하고 ‘사과설’을 조작해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헨리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이다. 그는 북의 ‘유감표명’을 긍정적인 조치로 해석해야 한다는 긴급지시를 국무부에 내렸고, 그로써 미국 국무부는 불과 하루 만에 태도를 180도로 번복하여 미국이 북의 유감표명을 “긍정적인 조치”로 인정한다고 발표하였다. 키신저의 지시에 따라 국무부는 김일성 주석의 훈계를 유감표명으로 둔갑시키면서 자기들의 거부의사표명을 하루 만에 번복하여 수락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이 다급한 번복행위는 미국이 판문점사건으로 고조된 북미전쟁위험에서 벗어나려고 하였음을 말해준다.

판문점사건 직후 미국은 북에 대한 보복으로 전쟁을 당장 일으킬 것처럼 흥분했는데, 왜 갑자기 태도를 바꿔 전쟁위험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일까? 미국의 그런 돌변행동에는 사연이 있다.

2010년 미국에서 출판된, 일본정책대학원 교수 미치시타 나루시게(道下德成)의 책 ‘북의 군사-외교활동(North Korea's Military-Diplomatic Campaigns), 1966-2008)에 따르면, 판문점사건 직후 북에서는 50살 미만의 제대군인들이 모두 복대하여 군복을 다시 입었고, 공장과 기업소들은 생산설비를 후방으로 이동시킬 준비를 갖추었으며, 1976년 8월 말부터 11월 중순까지 평양시민 약 20만 명과 황해남도 및 강원도의 약 8,000가구가 후방으로 이동하는 대규모 소개작전이 실시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월간조선> 2013년 3월호에 실린 관련기사에 따르면, 당시 인민군 특전병들이 해상으로 침투하여 주한미국군기지들과 한국군기지들 주변에 매복하면서 기습타격명령을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규모 소개작전과 선제기습타격준비는 평시군사훈련이 아니라 전면전에 돌입하는 마지막 단계의 전시군사행동이다. 미국을 상대로 ‘최후결전’을 벌이려는 북의 결심과 준비가 얼마나 단호하고 강력했는지 알 수 있다. 판문점사건 직후 북을 위협하려는 무력시위를 며칠 동안 벌이다 슬그머니 물러간 미국과 달리, 북은 미국의 무력시위에 위축되기는커녕 선제기습타격으로 ‘최후결전’을 벌이는 전시군사행동단계에 돌입하였던 것이다. 박지선은 회고담에서 “정말 그 때 우리는 전쟁이 막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고 말했다.

전면전 태세에 돌입한 북의 단호한 결심과 대규모 타격준비를 보고 덜컥 겁이 난 미국은, 느닷없이 훈계발언을 유감표명으로 둔갑시켜 그것을 받아들이는 돌변행동을 취함으로써 북미전쟁위험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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