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09

25만 개의 수갑과 300대의 전차

진실의 말팔매 <41>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991년 8월 19일 오전 7시 소련군 제4수비대 칸테미로브스카야 전차사단 소속 T-80 전차들과 제2수비대 타만스카야 기계화보병사단 병력이 모스크바 중심부에 전격 진입하였다. 세계사에 '8월 정변(Avgustovsky Putch)'으로 기록된 사건이었다. '8월 정변'은 소련을 와해시키려는 당시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쵸브(Mikhail Gorbachev)와 인민대표회의 의장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의 책동을 막으려는 마지막 시도였다.

△1991년 8월 19일 모스크바 붉은광장에 진입한 소련군 전차 부대.

1991년 8월 4일 고르바쵸브는 가족과 함께 흑해 크리미아반도 최남단의 휴양지 포로스(Foros)에 있는 여름별장(dacha)으로 휴가를 떠났다가 8월 20일에 모스크바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가 휴가를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가면, 소련을 해체하고 독립국가연합으로 전환하기 위한 이른바 '신연방협정(New Union Treaty)'에 서명하기로 되어 있었다. 고르바쵸브의 '신연방협정' 서명은 사실상 소련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었다.

소련의 와해를 막기 위한 마지막 비상책은 무력을 동원한 정변밖에 없었다. 정변으로 소련을 살려내자는 데 의기투합한 최고위관료 8명은 부통령 게나디 야나예브(Gennady Yanayev), 총리 발렌틴 파블로브(Valentin Pavlov), 국가안전부(KGB) 의장 블라디미르 크류취코브(Vladimir Kryuchkov),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브(Dmitiry Yazov), 내무장관 보리스 푸고(Boris Pugo), 당중앙위원회 국방담당위원 올레그 바클라노브(Oleg Baklanov), 농민동맹 의장 바실리 스타로두브체브(Vasily Starodudtsev), 국영기업연합 의장 알레산드르 티쟈코브(Alexandr Tizyakov)였다.

그들은 국가비상위원회(GKchP)를 구성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모스크바 주요거점들을 점거하고, 국정을 장악할 정변계획을 세웠다.

예컨대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세계 각국의 친미군부세력을 배후조종하여 반미자주정권을 무너뜨리는 무장반란을 위한 기술과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당시 국가비상위원회를 구성한 최고위관료 8명은 정변에 대해 말로만 들어보았을 뿐이었으므로 허술하게 사전준비를 하였다. 바로 이것이 '8월 정변'이 실패한 결정적인 요인이다. 

첫째, 1991년 8월 18일 국가비상위원회는 국방차관 발렌틴 바레니코브(Valentin Varennikov),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원 올레그 쉐닌(Oleg Shenin), 당중앙위원회 국방담당위원 올레그 바클라노브, 당중앙위원회 총국장 발레리 볼딘(Valeriy Boldin)을 흑해 휴양지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는 고르바쵸브에게 급파하였다. 고르바쵸브에게 대통령직을 사퇴하라고 권고하기 위해서였다.

정변을 하루 앞둔 긴박한 시각에 축출대상을 찾아가 사퇴를 권고하다니, 정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한심한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르바쵸브는 자기에게 찾아와 대통령직 사퇴를 점잖게 권고한 그들 앞에서 '별 미친 놈들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너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짓을 해라, 빌어먹을 놈들아!"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둘째, '8월 정변' 첫째날, 국가안전부 요원들이 모스크바에서 체포한 사람은 고작 네 명이었다. 국가비상위원회는 정변을 일으키기 직전, 소련을 와해시키려는 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25만 개의 수갑과 30만 개의 죄수복을 공장에 주문하였고, 체포한 자들을 수감하기 위해 모스크바 근교의 레포르토브 구치소를 비워두었다. 그런데 겨우 네 명을 체포하다니, 정변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변이었다.

셋째, '8월 정변'의 성패를 좌우할 결정적인 계기는 소련을 와해시키려는 수괴들인 고르바쵸브와 옐친을 전격 체포하는 것이었다. 국가안전부 요원들은 흑해 연안 휴양지에 머물던 고르바쵸브를 가택연금하였으나, 옐친을 체포하지 않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옐친은 정변이 일어난지 두 시간만에 모스크바 중심부에 있는 의사당으로 들어가 '8월 정변'을 좌절시키려고 날뛰었다.
  
국가비상위원회는 정변을 개시하자마자 의사당부터 점거하고 축출대상을 체포하여야 정변을 성공시킬 수 있었으나, 정변을 어떻게 끌어갈지 몰라 우유부단하다가 반격을 받고 말았다. 당시 상황은 이러하였다.

국가비상위원회는 1991년 8월 20일 오후에 가서야 특수전부대, 공수부대, 경찰특공대, 내무군병력, 3개 전차대대, 1개 공격헬기 부대를 동원한 '우레작전(Operation Grom)'을 시작하였다. 장갑차를 타고 출동한 병력이 의사당에 이르렀을 때는 고르바쵸브와 옐친을 지지하는 군중들이 이미 의사당을 에워싸고 '인간방패'를 형성하고 있었다.

현장지휘관들은 유혈사태를 우려한다고 국가비상위원회에 보고하고, 공격명령을 집행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면서 대치하였다. 하지만, 의사당 공격명령을 받은 현장지휘관들이 유혈사태를 우려한다는 소리는 거짓말이었다.

2011년 8월 20일 러시아 일간지 <리아노보스티> 가 보도한, 당시 공수부대 지휘관으로 의사당 공격명령을 받았던 바벨 그라체브(Pavel Grachev)의 체험담을 읽어보면, 현장에 출동한 군지휘관들은 이미 옐친에게 정신적으로 굴복하였기 때문에 공격명령을 집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사정을 간파한 옐친은 버젓이 의사당 밖으로 나오더니 현장에 배치된 전차에 기어올라 자기를 지지하는 군중들에게 선동연설을 하는 기괴한 장면까지 연출하였다. 여기에 실은 현장사진은 어쩔줄 몰라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은 전차병 옆에서 옐친이 선동연설을 하는 장면을 찍은 것이다. 이 현장사진은 '8월 정변'의 실패와 소련의 와해를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1991년 8월 20일 탱크에 올라타 연설을 하는 옐친과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은 전차병.

그런데 만일 '8월 정변'이 성공하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8월 정변'의 성공은 소련의 와해시각을 뒤로 좀 늦출 수는 있었겠지만 와해를 막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소련 인민들의 사상이 약화, 변질되어 사회주의체제를 수호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련 인민들이 지키려고 하지 않는 체제를 8명이 25만 개의 수갑과 300대의 전차로 지키려고 애쓴 마지막 시도는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 천 년을 헤아리는 인류사에서 최초의 강력한 사회주의공화국으로 등장하여 진보적 인류에게 한때 사회변혁의 희망을 안겨주었던 소련은 그처럼 어이없게 와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8월 정변'을 일으킨 국가비상위원회 성원들은 전원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하였고, 몇 년 뒤에 석방되었다. '8월 정변'이 실패한 때로부터 6년이 지난 1997년 10월 7일 러시아 <이타르타스통신>은 당시 소련 국방장관으로 정변을 주도한 드미트리 야조브가 그 해 7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을 받고 평양을 방문하였다는 기사를 실었다.

1997년 7월 야조브가 가족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기 위해 탑승한 고려항공 여객기에 나도 타고 있었다. 그 여객기가 평양비행장에 착륙하였을 때, 탑승객들에게 자리에 앉아 기다려달라는 기내방송이 흘러나왔다.

탑승객들은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해, 창 밖에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잠시 후, 서양노인 한 사람과 가족 일행이 비행기에서 내리는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를 영접하기 위해 검은색 리무진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고, 북측 관리들이 그를 맞이하는 모습도 멀리서 보였다.

탑승객들 가운데 누군가가 "야조브가 왔구만"하고 말하는 통에 나는 그 서양노인이 야조브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무렵 러시아 정세에 어두웠던 나는 야조브가 러시아 사람이라는 것만 눈치챘을 뿐 그 이상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라를 다 망쳐놓고..쯪쯔"하며 혀를 차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내 귓전을 때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았더니, 놀랍게도 20대 초반의 아리따운 고려항공 여승무원이 탑승객들 틈에서 창 밖으로 환영행사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야조브가 누구이며, '8월 정변'이 왜 실패했는지를 퍽 시간이 흘러 나중에 알게 된 나는 고려항공 여승무원의 당당한 목소리를 영영 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당당한 목소리는 사회주의체제가 와해되는 것을 막지 못한 소련 인민들에게 보내는 북측 인민들의 질책으로 들렸다.

1997년 여름 <고난의 행군>으로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던 북측 인민들은 사상 최대의 시련기를 헤쳐가고 있었지만, 자기 체제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은 그 어떤 혹독한 시련으로도 꺾을 수 없었다.

고려항공 여승무원의 당당한 목소리를 충격 속에서 들은 나는 "앞으로 6개월 안에 북한도 소련처럼 무너진다"고 떠들던 '북한붕괴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유언비어인지 알게 되었다. 1997년 8월에 집필한 나의 글 '최근 북(조선)의 정세관과 정세대응에 대한 담론 분석'은 고려항공 여승무원의 당당한 목소리를 충격 속에서 듣고 '북한붕괴설'을 허구성을 폭로하기 위해 쓴 것이다. (2011년 11월 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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