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말팔매 <13>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토벌대'의 총탄이 뚫고 나간 열여덟 살 김상순의 마른 몸에서 선홍빛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김상순이 오라버니처럼 따랐던 빨찌산 전사 한 사람이 그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연필을 놓고 총을 잡았던 김상순의 작은 두 손이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숨을 몰아쉬던 그의 눈가에 마지막 이슬이 맺혔다. 빨찌산 전사의 얼굴을 올려보며 그는 말했다.
"나 잘 싸웠다고 전해주세요." 그가 남긴 마지막 음성이었다. 전선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올해 일흔 여덟 할머니가 되었을 김상순은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이름 없는 산기슭에서 그 한 마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심장의 고동을 멈추었다.
여기에 묘사한 김상순의 최후 장면은 빨찌산 출신의 비전향장기수 임방규 선생이 <통일뉴스>에 연재한 자서전 가운데 2011년 3월 5일에 기고한 글 '경남 동부 유격지구에 다녀오다'에 나오는, 구연철 선생의 회고담을 재구성한 것이다.
60년 전 빨찌산 소녀 전사로 싸우다가 경상남도 양산 부근 영축산 어느 산기슭에서 전사한 김상순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의 마지막 순간을 곁에서 지켜준 구연철 선생밖에 없을 것이다. 하마터면 망각의 늪으로 영원히 잠겨버릴 뻔했던 그 이름이 60년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고 되살아나 우리의 가슴을 흔들었다.
구연철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김상순이 빨찌산 부대에 자원해서 들어온 때는 열여섯 살이 나던 해였다고 한다. 추위가 살을 에던 1949년 말 어느 날 앳된 얼굴로 빨찌산 부대를 따라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그 또래 여고생들이면 책가방을 들고 재잘거리며 교문을 드나들 나이인데, 김상순은 왜 총탄이 오가고 피가 흐르는 전선에 성큼 들어섰던 것일까? 구연철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김상순의 아버지는 경상남도 지역에서 빨찌산 부대 지원사업을 하다가 6.25전쟁 직전 '토벌대'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김상순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들을 향한 불타는 복수심을 안고 빨찌산 부대에 입대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사랑하는 딸을 역사의 격동 속으로 이끌었던 그 소녀의 아버지는 누구였을까? 그 아버지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의 말에 따르면, 6.25전쟁을 전후하여 남측에서 이승만 정권이 집단학살한 민간인이 100만 명으로 추산된다 하니, 김상순의 아버지도 그 학살정권에게 희생된 수많은 피학살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빨찌산 부대에 입대한 여고생 김상순은 이태 동안 빨찌산 소녀 전사로 싸우면서 자신이 목숨을 건 그 싸움이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임방규 선생이 <통일뉴스>에 연재한 자서전에 따르면, 당시 빨찌산 부대는 유격전만 벌인 것이 아니라 눈비를 맞으며 산에서 싸우는 틈틈이 정치학습도 진행하였다고 하니, 김상순도 자신이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를 빨찌산 아저씨와 아주머니들 틈에서 배우는 동안 그의 복수심은 차츰 정치의식으로 승화되어갔을 것이다. 김상순만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임방규 선생이 <통일뉴스>에 발표한 자서전에 따르면, 빨찌산 부대들마다 10대 소년 전사들과 소녀 전사들이 여러 명 있었다고 하니, 그들도 모두 김상순과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나 잘 싸웠다고 전해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긴 김상순은 숨을 거두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누구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일까? 피붙이라고는 이 땅에 한 사람도 없는 그였으니, 빨찌산 사령부에 전해달라고 했던 것일까? 그의 작은 가슴에 총총한 별빛처럼 간직했던 통일조국의 미래에 전해달라고 했던 것은 아닐까?
빨찌산 소녀 전사 김상순이 통일조국의 미래에 전해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진 뒤로 꼭 60년 세월이 흘렀다. 그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유명무명의 전사들이 그 소녀 전사처럼 통일조국의 미래를 그리며 싸우다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각, 우리 땅 곳곳에서 북침전쟁연습에 동원된 미국군의 무장굉음이 요란하게 들리고 있다. 저들의 무장굉음은 김상순이 남긴 가녀린 마지막 음성을 마구 짓밟는 듯하다. 이러한 정황은, 김상순의 전사 이후 두 세대에 걸쳐 이어져온 이 민족의 통일염원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세대가 두 번이나 바뀌는 동안 투쟁방식은 달라졌어도, 60년 전 빨찌산 소녀 전사의 마지막 음성은 오늘 미국군의 무장굉음을 뚫고 후대들의 투혼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김상순의 마지막 음성을 기억하는 후대의 전사들은 오늘 그들 자신의 투혼 위에 이렇게 자서(自敍)할 것이다.
"용서하시라. 60년 세월 동안 그대의 이름을 잊고 살아온 못난 우리를 용서하시라. 그리고 눈을 감으시라. 통일조국의 미래를 위해 싸우는 60년 뒤의 후대들이 그대가 남긴 마지막 음성 잊지 않으리니 이제 두 눈을 고이 감으시라." (2011년 3월 14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