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18

광명성이 지구에 남긴 진귀한 사연들

<연재> 한호석의 진보담론 (239)
통일뉴스 2012년 12월 17일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긴급보도는 왜 새벽에 나왔을까?

<조선중앙통신>이 2012년 12월 13일에 보도한 보도사진들 가운데 눈길을 끄는 사진 한 장이 있다. 2012년 12월 12일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가 김정은 제1위원장에게 상신한 ‘인공지구위성 발사준비를 끝낸 정형과 대책적 의견’이라는 제목의 보고서 표지를 찍은 사진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그 보고서 표지에 “당중앙은 위성발사를 승인한다. 2012년 12월 12일 오전 10시에 발사할 것! 김정은 2012.12.12”라는 친필을 썼다.

이 친필명령에는 우주공간기술위원회가 광명성 3호 2호기를 성공적으로 발사하기까지 있었던 많은 사연이 담겨 있다. 북측 외부 언론에서는 말해주지 않는 사연들, 말해주더라도 사실과 다르게 왜곡한 그 사연들을 재구성하면 아래와 같다.

<조선중앙통신> 2012년 12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이 우주공간기술위원회에 친필명령을 하달한 시각은 2012년 12월 12일 오전 8시다. 이것은 우주공간기술위원회가 ‘인공지구위성 발사준비를 끝낸 정형과 대책적 의견’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한 시각이 12월 12일 아주 이른 아침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또한 그 보고서를 작성하기 전에 위성발사 준비작업을 완료한 시각이 12월 12일 새벽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주공간기술위원회 과학자, 기술자들이 12일 새벽에 위성발사 준비작업을 끝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우주공간기술위원회 과학자, 기술자들이 예정된 일정과 계획에 따라 위성발사를 정상적으로 준비해왔더라면, 그처럼 밤을 새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래 철야작업이란 임박한 마감시간에 쫓기는 비상상황에서 다그치는 작업방식이다. 우주공간기술위원회 과학자, 기술자들은 왜 마감시간에 쫓기고 있었을까? 그 까닭은, 서해위성발사장 발사대에 세워져 발사명령을 기다리던 위성운반로켓 은하 3호에서 뜻밖에 기술적 결함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위성발사를 준비하던 마지막 과정에서 “일련의 사정이 제기되여 (줄임) 위성발사시기를 조절하는 문제를 심중히 검토하고 있다”는 우주공간기술위원회 대변인의 발언을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때는 12월 8일이었는데, 실제로 그 보도가 나온 시각은 12월 8일 자정을 넘긴지 얼마 되지 않은 12월 9일 새벽이었다. 몇 시간 뒤 12월 9일 아침에도 보도할 수 있었을 텐데, 보도가 왜 자정을 넘긴 새벽에 나왔을까? 이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우주공간기술위원회가 한밤중에 <조선중앙통신>에게 보도자료를 보낼 만큼 긴급한 정황이 조성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은하 3호를 점검하는 마지막 과정에 심각한 기술적 결함이 발견되어 예정된 발사시각에 발사하지 못하는 난관이 조성된 것이다.

북의 위성발사문제에 ‘정통’하다는 남측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연합뉴스> 2012년 12월 9일 보도에 따르면, 12월 8일 낮부터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이상징후’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은하 3호에서 심각한 기술적 결함이 발견된 때는 12월 8일 낮이었던 것이다. 서해위성발사장 발사대에 은하 3호를 세우고 조립하는 작업은 12월 1일에 시작되어 12월 5일에 완료되었는데, 그로부터 사흘 뒤에 기술적 결함이 발견된 것이다.

기술적 결함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기에 그처럼 예정된 발사시각에 위성을 발사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2012년 12월 10일 우주공간기술위원회 대변인은 담화를 통해 “운반로케트의 1계단 조종발동기 계통의 기술적 결함이 발견되여 위성발사 예정일을 12월 29일까지 연장하게 된다”고 밝힌 바 있다. 이것은 은하 3호 1단 로켓에 장착된 조종발동기 계통에서 어떤 이상이 생겼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니라, 하필이면 1단 로켓의 조종발동기 계통에서 이상이 생겼으니, 정황은 심각하였다. 겨울철 지상 10km 높이의 한반도 상공에는 초속 100m에 이르는 한랭편서풍이 때로 휘몰아치는 판인데, 은하 3호의 조종발동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발사 직후 은하 3호는 서해 상공의 비행궤도에서 벗어나 남측 상공으로 날아갈 위험도 있었다. 그래서 우주공간기술위원회 과학자, 기술자들은 원래 12월 10일부터 12월 22일 사이에 은하 3호를 발사하려던 발사예정기간을 12월 29일로 미루었던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뜻밖에도, 은하 3호는 12월 12일에 발사되었다. 위성발사예정기간을 12월 29일까지 연장한다는 발표가 12월 10일에 나왔는데, 그로부터 불과 이틀 뒤에 은하 3호를 발사하였으니, 그에 얽힌 깊은 사연을 알지 못한 북측 외부에서는 모두들 어리둥절하였다.

이처럼 우주공간기술위원회가 위성발사예정기간을 일주일 연장한다고 발표해놓고 이틀 뒤에 위성을 발사하자, 이명박 정부는 한바탕 소동을 겪어야 하였다. 예컨대 <조선일보> 2012년 12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북의 위성발사소식을 들은 청와대, 국방부, 외교부 관리들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믿을 수 없다. 그게 정말이냐?”고 하면서 어쩔 줄 몰랐다고 한다.

북의 서해위성발사장을 감시하는 임무는 맡은 남측 국방부는, 북의 위성발사를 사전에 전혀 알지 못한 자기들에 대한 책임추궁을 회피하기 위해 우주공간기술위원회의 위성발사예정일 연장발표가 무슨 “고도의 기만전술”이었다느니 무슨 “치밀한 교란작전”이었다느니 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북이 기만전술과 교란작전으로 세계를 속였다고 주장한 남측 국방부의 소동은, 은하 3호 발사과정에 대한 무지와 편견에 사로잡힌 남측 군부가 빚어낸 우스꽝스러운 촌극이었다. 위성발사가 불의의 기습타격을 요구하는 군사작전도 아닌 데, 무슨 기만전술이니 교란작전이니 하는 말을 꺼낸 것부터가 억지이며 소동이다. 북으로서는 그런 억지와 소동을 바라보며 실소를 금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은하 3호에서 기술적 결함이 발견되었던 12월 8일 낮부터 그 기술적 결함이 해결되었던 12월 12일 새벽까지 긴박했던 시간에 서해위성발사장에서는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일어난 ‘12월의 기적’
 
<중앙일보> 2012년 12월 8일 보도에 따르면, 서해위성발사장 발사대에 설치된 높이 50m 정도의 직육면체형 가림막이 발사대에 세워놓은 은하 3호를 가렸다고 한다. 우주공간기술위원회는 은하 3호를 발사대에 세우기 시작한 12월 1일부터 검은색 가림막을 발사대에 쳐놓고 작업을 시작하였다.

지난 2012년 4월에 광명성 3호 1호기를 발사할 때는 가림막을 쳐놓지 않았는데, 이번에 가림막을 쳐놓은 까닭은, 남측 정부 당국자들이 말한 것처럼 그 가림막으로 미국 정찰위성의 시야를 가리고 발사준비상황을 노출하지 않으면서 기만전술과 교란작전을 펼치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다. 지난 4월에도 가림막을 쳤고, 이번 12월에도 똑같이 가림막을 쳤다면, 미국 정찰위성의 시야를 가리려고 그렇게 했다고 추측할 수 있겠지만, 지난 4월에는 가림막을 치지 않았고, 이번에만 가림막을 쳤으므로 ‘시야차단설’은 앞뒤가 맞지 않는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왜 발사대에 가림막을 쳐놓았던 것을까?

검은색 가림막은 미국 정찰위성의 시야를 가리기 위한 차단막이 아니라, 바람 세찬 발사대에 올라 장시간 작업을 해야 하는 현장준비요원들이 찬바람을 맞지 않도록 감싸주는 일종의 보온막이었다. 당시 서해위성발사장은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이례적인 강추위로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겨울철 평안북도 해안지대에는 시베리아 찬바람이 강하게 부는데, 발사대에 올라가 일하는 현장준비요원들에게 그런 찬바람을 맞게 할 수 없어서 태양 적외선을 잘 흡수하는 검은색 보온막이 필요했던 것이다.

<연합뉴스> 2012년 12월 11일 보도에 따르면, 12월 11일 우주공간기술위원회는 보온막을 걷고, 발사대에 세워놓았던 은하 3호를 끌어내려 분리한 다음, 발사장에서 1km 떨어져 있는 조립건물로 옮겼다고 한다. 그러나 아래에서 다시 논하겠지만, 은하 3호를 발사대에서 끌어내린 것은 사실이지만, 은하 3호를 조립건물로 옮긴 것은 아니었다. <연합뉴스> 2012년 12월 12일 보도에 따르면, 일본 방위상 모리모토 사토시(森本敏)는 12월 12일 방위성 청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북이 발사대에 세워놓았던 위성운반로켓을 발사대로부터 분리하였다는 사실을 일본 정부가 확인한 바 있다고 밝혔다. 그는 위성운반로켓이 발사대로부터 분리되었다고 말하면서도, 분리된 위성운반로켓이 조립건물로 옮겨졌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연합뉴스> 2012년 12월 11일 보도기사에서 남측 나로우주센터 소장은 북이 위성운반로켓을 발사대에서 분리하였으니, “사소한 결함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그것은 사소한 결함이 아니라 로켓을 해체하여 부품을 교체하거나 수리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결함이었다. 그런데 은하 3호는 발사대에서 분리된 바로 다음 날 오전에 발사된 것이다.

위에 열거한 여러 정보를 종합해보면, 우주공간기술위원회 과학자, 기술자들은 8일 낮에 은하 3호에서 기술적 결함을 발견하였고, 11일 오후에 은하 3호를 발사대에서 끌어내렸고, 12일 새벽에 발사준비를 완료하였고,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지 않은 이른 아침에 발사준비를 완료하였다는 보고서를 김정은 제1위원장에게 상신한 것이다.

은하 3호를 발사대에서 끌어내린 때를 12월 11일 오후로 보는 까닭은, 미국 정찰위성이 매일 오후 2시부터 3시까지 서해위성발사장 상공을 지나면서 공중촬영을 하므로, 바로 그 시간대에 은하 3호를 발사대에서 끌어내린 현장을 정찰위성이 포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공간기술위원회가 은하 3호를 발사대에서 끌어내린 12월 11일 오후 2시부터 3시까지 시간으로부터 위성발사준비작업을 완료한 12월 12일 새벽까지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15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우주공간기술위원회 과학자, 기술자들이 아무리 뛰어난 기술과 뜨거운 열정을 가졌다고 해도, 은하 3호에서 발견한 심각한 기술적 결함을 무슨 수로 15시간 만에 해결하면서 발사준비를 그처럼 초고속으로 완료할 수 있었을까? 발사대에 세워놓은 은하 3호의 기술적 결함을 해결하지 않고, 그냥 발사대에서 끌어내렸다가 다시 발사대에 세워 조립하려고만 해도 사흘 이상 걸릴 판인데, 어떻게 15시간 만에 기술적 결함을 해결하고 발사준비까지 완료한 것일까?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물론 실제로 기적이 일어난 것은 아니며, 북측 내부 사정을 모르는 외부 시야에 기적처럼 보이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기적 같은 사연을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우주공간기술위원회 과학자, 기술자들은 발사예정일이 임박한 은하 3호에서 심각한 기술적 결함을 발견하였을 때, 극도로 긴장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은하 3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하여 광명성 3호 2호기를 지구궤도에 올려놓느냐 올려놓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는 우주개발사업의 성패문제이기 전에, 그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을 관철하기로 맹세한 가장 중대한 과업이기 때문이었다. 2012년 12월 14일 <로동신문>에 실린 정론 ‘조선의 위성관제종합지휘소’에 따르면, “<광명성-3>호를 꼭 올려야 한다는 것은 우리 장군님의 유훈”이라는 것이다. 태양절 100주년을 맞은 지난 4월 13일 광명성 3호 1호기를 발사하였으나 실패하였으므로, 태양절 100주년인 2012년이 지나가기 전에 4월의 실패를 만회하고 위성발사에 반드시 성공해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12년 12월 14일 <로동신문>에 실린 정론 ‘조선의 위성관제종합지휘소’에 따르면, 겨울철에 과연 위성을 쏘아올릴 수 있겠는가 하는 기술적 의문이 제기되었을 때, 우주공간기술위원회 과학자, 기술자들은 “해야 합니다. 우리는 2012년이라는 이 해를 절대로 넘기지 않겠습니다. 과학기술위성인 <광명성-3>호의 성공은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의 유훈입니다. 장군님의 서거 1돐 전에 우리는 기어이 이 위성을 쏴올리겠습니다!”고 굳게 맹세하였다는 것이다. 북측 외부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북에서 유훈관철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과업이다.

그런데 그처럼 유훈관철에 힘쓰던 위성발사준비작업 막판에 뜻하지 않게 심각한 기술적 결함이 나타나, 위성발사예정기간을 한 주간이나 뒤로 늦출 수밖에 없었고, 그로써 김정일 국방위원장 서거 1주기가 되는 12월 17일 이전에는 은하 3호를 발사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들의 맹세와 의지가 뜨거웠던 것만큼 그들에게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걱정도 많았을 것이다.

우주공간기술위원회 과학자, 기술자들은 유훈관철의 맹세를 결사적으로 지키기 위하여 24시간 초긴장한 ‘강행군 전투’를 벌이는 수밖에 없었다. 상부에서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하려는 게 아니라, 자기들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그렇게 하려는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초긴장한 ‘강행군 전투’를 밤낮을 이어 계속한다고 해도, 김정일 국방위원장 서거 1주기가 되는 12월 17일 이전에 위성발사준비를 완료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남측 군부의 로켓 전문가는 <연합뉴스> 2012년 12월 11일 보도에서 “로켓을 해체하고 점검한 뒤 다시 장착하는 데만 1주일 이상 걸린다”고 말했다.

우주공간기술위원회 과학자, 기술자들이 자기들 가슴을 태우는 안타까운 시간이 한 초, 한 초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우주공간기술위원회 과학자, 기술자들이 은하 3호의 심각한 기술적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결사적인 ‘강행군 전투’를 개시하려 한다는 긴급보고를 받은 김정은 제1위원장은 기술적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수리작업을 하다가는 12월 17일 이전에 발사할 수 없으므로 결함이 생긴 은하 3호 1단 로켓을 다른 예비로켓으로 대체하고 쏘아올리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앙일보> 2012년 12월 13일 보도기사를 주의 깊게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은하 3호를 발사하기 전날인 12월 11일 오후 서해위성발사장에서는 미국의 위성사진 분석가들이 머리를 갸우뚱할 만한 이변이 일어났다. 위의 보도기사에 따르면, “차량들과 인력이 분주히 드나들”면서 보온막을 걷어내고 있었고, 위성발사대에 설치된 대형 탑식 기중기가 은하 3호를 잠시 들어 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미국의 위성사진 분석가들은 우주공간기술위원회 과학자, 기술자들이 은하 3호를 왜 잠시 들어 올리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의 위성사진 분석가들이 이해하지 못한 사정은 의외로 간단하였다. 은하 3호 1단 로켓을 다른 예비로켓으로 교체하기 위해, 우주공간기술위원회 과학자, 기술자들이 은하 3호를 잠시 들어 올리고, 1단 로켓을 다른 예비로켓으로 교체하였던 것이다.

2012년 12월 14일 <로동신문>에 실린 정론 ‘조선의 위성관제종합지휘소’에 따르면, 지난 4월 위성발사가 실패하였을 때, 김정은 제1위원장은 우주공간기술위원회 과학자, 기술자들에게 “사람은 밥을 먹으면서 크고, 과학은 실패 속에서 솟구쳐 오릅니다. 그러나 실패를 너무 많이 하면 소화불량에 걸립니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따뜻이 격려해주었고, “위성발사에 참가한 전체 성원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한 사랑의 조치를 취해주시고 녀성과학자들에게 고급 화장품까지 선물로 보내주”며 그들의 신심과 의지를 북돋아주었다고 하는데, 이번에도 김정은 제1위원장은 그들이 유훈관철의 맹세를 지킬 수 있도록 1단 로켓을 수리하지 않고 통째로 교체하는 비상대책을 허락해 주었던 것이다. 서해위성발사장에서 ‘12월의 기적’은 바로 그렇게 일어났다.

막판에 이명박 정부의 뒤통수를 친 미국

대북위성정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입만 쳐다볼 수밖에 없는 남측 군부는 2012년 12월 11일 서해위성발사장에서 ‘12월의 기적’이 일어난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남측 국방부는 은하 3호가 발사대에서 들어 올려진 것만 알았을 뿐, 1단 로켓을 예비로켓으로 교체하고 재빨리 다시 세워놓은 것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서해위성발사장에 대한 미국 정찰위성의 집중감시는 독보적이다. 일본 정찰위성도 있지만 수량도 적고, 미국 정찰위성에 비해 성능도 떨어져서, 일본은 서해위성발사장을 감시한다고 떠들기는 하지만, 집중감시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남측 국방부가 서해위성발사장에 대한 위성정보를 미국으로부터 전달받지 못하면,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미국이 남측에게 대북위성정보를 알려주는 과정에서 갑자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미국은 은하 3호가 발사대에서 분리되었다는 정보를 남측 국방부에 알려주었지만, 은하 3호가 얼마 뒤에 발사대에 재장착되었다는 결정적인 정보는 남측 국방부에 알려주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미국은 그 결정적인 정보를 일본 방위성에게는 알려주었으면서도 남측 국방부에는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아래와 같은 관련정보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2012년 12월 13일 일본 언론은 일본 정부 고위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미국이 은하 3호가 재장착되었다는 결정적인 정보를 남측 국방부에 알려주지 않았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일본 외무상 겐바 고이치로(玄葉光一郞)는 2012년 12월 12일 외무성 청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가까운 시일 안에는 (북의 위성발사가) 없을 것이라는 보도가 흘러나왔는데도, (일본 정부가) 경계수위를 낮추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발언함으로써, 은하 3호가 재장착되었다는 결정적인 정보를 미국으로부터 전달받았음을 넌지시 인정하였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일본 자위대 요격미사일부대 간부는 “12일에 (은하 3호가) 발사될 수도 있다고 보고 준비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은하 3호 발사에 대한 경계태세를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남측 군부는 북의 은하 3호 발사에 대비하려고 만들어놓은 통합대책반의 정상가동을 멈춰놓고 연말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연합뉴스> 2012년 12월 12일 보도에 따르면, 남측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는 통합대책반 책임자의 직급을 소장급에서 준장급으로 내리고, 근무인원까지 축소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런 행동은, 위성발사대에서 끌어내려진 은하 3호가 상당 기간 동안 수리작업을 받고 12월 하순에 가서야 재장착될 것으로 착각하였음을 말해준다. 은하 3호 1단 로켓이 통째로 다른 예비로켓과 교체되고, 신속히 발사대에 재장착되었다는 결정적인 정보를 미국으로부터 받지 못하였으니, 남측 군부가 그런 착각에 빠진 것은 불가피한 노릇이었다.

미국으로부터 은하 3호가 재장착되었다는 결정적인 정보를 전달받지 못하였다가, 갑자기 은하 3호 발사 소식을 들은 남측 정부 관계자들은 “북한이 로켓을 발사할 것이라는 임박한 징후는 포착하지 못했다. 북한도 발사기간을 1주일 늦췄기 때문이 이번 주 발사할 것으로는 사실상 판단하지 못했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라고 허둥대면서 당혹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면, 미국은 왜 은하 3호 재장착에 관한 결정적인 정보를 일본 방위성에게는 알려주면서 남측 국방부에게는 알려주지 않았을까? “한국 정부가 분별없이 (북의 위성발사에 관한) 정보를 (언론에) 유출하는 데 불만을 품은” 미국이, 은하 3호가 재장착되었다는 결정적인 정보를 남측 국방부에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 정부 고위관리의 해석이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대북적대감에 사로잡힌 남측 군부가 은하 3호 발사를 방해하려고 구축함까지 서해에 배치해놓았고, 그에 대처하여 북도 군사적 대응태세를 취하고 있었던 긴장된 상황에서, 남측 군부가 은하 3호 발사예정일을 미리 알아내는 경우, 무슨 일을 저지를지 미국으로서도 예측하기 힘들었다. 지난 12월 3일에 북은 국제해사기구(IMO)에 은하 3호 발사에 관해 통보하면서, 발사예정시간이 오전 7시부터 정오 사이가 될 것이라고 알려준 바 있으므로, 남측 군부가 발사예정일을 알아내면 발사예정시간대도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대선정국 막판에 이른바 ‘북풍’을 조작하여 여당후보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정황을 조성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이명박 정부가 은하 3호 발사를 방해하려 하다가 뜻밖의 ‘대형사고’를 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데 지금 집권 2기에 들어선 오바마 정부는 남측의 제18대 대선에서 북과 대화할 수 있는 후보, 북이 대화상대로 여기는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은 8.25 경축연설에서 조국통일대전을 선언하고 미국을 ‘핵절벽’으로 끌고 간 김정은 제1위원장의 최후통첩 앞에서 오바마 정부가 2013년 이후에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권이 결국 한반도 평화회담 개최문제로 좁혀졌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2012년 12월 10일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 ‘극적인 변화 일어난 대선국면과 북미관계’에서 논한 바 있다.

그런데 만일 남측 군부가 은하 3호 발사시간을 알아내어 무슨 ‘사고’라도 치면, 오바마 정부의 제18대 대선구상과 2013년 이후의 대북정책구상은 시작도 되기 전에 물거품으로 사라질 것이다. 미국은 이명박 정부가 그런 ‘대형사고’까지 일으켜 정세혼란을 조성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은 남측 군부에게 은하 3호가 재장착되었다는 결정적인 정보를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각계각층 민심이 외면하는 바람에 불행한 퇴장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명박 정부는, 임기 5년 동안 자기들이 ‘보호자’로 믿고 따르던 미국으로부터 막판에 뒤통수까지 얻어맞은 처량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앞으로 수많은 광명성들이 우주공간에 날아오를 것이다

<조선중앙통신> 2012년 12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은하 3호를 오전 10시에 발사하라는 친필명령을 오전 8시에 하달하고, 오전 9시에 위성관제종합지휘소에 도착하였고 한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위성관제종합지휘소에서 위성발사준비정형을 ‘료해’하고 직접 발사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발사명령을 받은 위성운반로켓 은하 3호는 오전 9시 49분 46초에 강한 폭음과 함께 거대한 화염을 내뿜으며 흰 눈 덮인 대지를 박차고 우주공간을 향해 솟아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발사 후 9분 27초가 지난 9시 59분 13초에 태양동기극궤도에 가볍게 올라섰다.

그 광경을 위성관제종합지휘소 전광판을 통해 바라보던 김정은 제1위원장의 시야에, 그리고 그 곁에서 감격의 만세를 부르던 과학자, 기술자들의 시야에는, 태양광선을 받아 찬연히 은빛을 발하는 위성 한 기가 4월의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12월의 기적’을 불러일으키며 우주공간으로 솟구쳐 오르는 장관이 비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위성을 운반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을 따르는 과학자, 기술자들의 맹세를 기어이 지키기 위해, 지상에서 우주로 날아가는 유훈관철의 은빛 동체였다. 2012년 12월 13일 <조선중앙통신> 취재기자는 광명성 3호 2호기가 태양동기극궤도에 올라서는 순간 위성관제종합지휘소의 과학자, 기술자들 속에서 “폭풍 같은 <만세!>의 환호성이 터져오르고”, 그들의 두 볼에서는 김정은 제1위원장을 우러르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였다”고 썼다.

2012년 12월 12일, 인류에게 100년마다 한 번 돌아오는 이 특별한 날은 북의 지구관측위성 광명성 3호 2호기가 세계 우주개발사에 새로운 기록을 써넣은 날이다. 요즈음 세계 여러 나라들이 경쟁적으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고 있지만, 그 날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솟구쳐 오른 북의 첫 실용위성만큼 전 세계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킨 위성은 없었다. 그래서 북의 첫 실용위성은 다른 나라의 실용위성들과 달리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 특별한 의미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우선 미국의 시각으로 보면, 자기의 최대 강적인 북이 북에서 말하는 ‘21세기 산업혁명의 불길’을 일으키며 마침내 우주강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하였으니 근심과 걱정이 태산 같이 커졌을 것이다. 그래서 북의 위성발사가 성공하였다는 긴급정보를 받은 백악관은 그 정보를 받자마자, 미국 동부 시간대로 한밤중인데도 긴급성명을 내면서 안절부절 못하였다.

다른 한 편, 북측 시각으로 보면, 북의 첫 실용위성은 북에서 말하는 ‘21세기 산업혁명의 불길’ 속에서 태어난 100% 자력갱생의 위성이어서 특별하고, 미국과 추종국들의 온갖 제재와 세계 최장기 봉쇄를 무력화시킨 부전완승(不戰完勝)의 위성이어서 특별하고, 김일성 주석 탄생 100주년이 되는 올해에 실용위성을 꼭 발사하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을 실현한 유훈관철의 위성이어서 특별한 것이다.

북은 앞으로 그런 특별한 위성을 계속 쏘아올릴 것이다. 지구궤도를 돌고 있는 광명성 3호 2호기는 크기가 작은 위성이지만, 그 작은 위성이 북의 우주개발분야에서 열어놓은 미래는 밝다. 우주강국을 향한 김정은 제1위원장의 의지가 강렬하고, 우주공간기술위원회 과학자, 기술자들의 충정과 실력이 대단하기에 밝아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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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독재자의 딸에 대한 백악관의 불편한 시선

[한호석의 개벽예감] (41)
자주민보 2012년 12월 15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백악관이 거역자로 기억하는 한 사람이 있다

1970년대에 폭압만행과 부정부패의 대명사로 전 세계에 악명 높았던 독재자 세 사람이 있었다.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1915-2006),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Marcos, 1917-1989), 그리고 일제 식민통치기에 일왕 히로히도에게 충성혈서를 쓴 다카키 마사오라는 일본 이름을 가진 박정희(1917-1979)다.

피노체트는 1998년 10월 17일 신병치료를 위해 영국 런던을 방문하던 중 인권유린죄로 전격 체포되어 가택연금을 당했고, 미국의 비호로 2000년 3월 3일에 간신히 귀국한 뒤에도 복잡한 재판절차를 거쳐야 했는데, 2006년 11월 28일 또 다시 가택연금형에 처해지자마자 12월 10일 자연사하였다. 마르코스는 1986년 2월 필리핀 민중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폭발하자 미국이 하와이로 피신시켜 망명생활을 하던 중 1989년 9월 28일 하와이에서 자연사하였다.

그런데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여성 연예인들이 술시중을 드는 비밀주연에서 양주잔을 기울이다가 자기 부하 김재규가 쏜 총탄에 비명횡사하였다. 이것을 10.26 사태라 한다. 자연사로 생을 마감한 다른 두 독재자와 달리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자기 부하가 쏜 총탄을 맞고 비명횡사하였다.

독재자 박정희의 비명횡사에 깔려있는 배경과 원인은 무엇일까? 세상에 알려진 대로, 박정희는 미국을 거역하고 핵개발을 고집하다가 결국 피살된 것이다. 그에 얽힌 과거사 내막을 정리하면 대충 이렇다.

박정희의 극비지령을 받고 핵개발 총책으로 일했던 오원철이 2010년 1월 12일에 발간된 <주간조선> 2089호 기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박정희는 이미 1970년 중반에 핵개발을 결심하였고, 1972년 초에 대통령 비서실장 김정렴과 당시 경제수석이었던 자신을 집무실로 불러 핵개발을 지시하였다고 한다.

오원철의 회고담에 따르면, 박정희는 자기 서재 뒤쪽에 들여놓은 풍금 크기만 한 철제금고 속에 핵문제에 관련된 비밀문서를 보관하면서 핵개발에 집착하였는데, 그렇게 7년 동안 미국의 감시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핵개발을 추진한 끝에 10.26 사태 직전에는 핵물질 생산기술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박정희는 비서실장 김정렴, 경제수석 오원철, 국방장관 서종철, 국방과학원(ADD) 책임자를 집무실로 불러, 핵물질을 무기화하라고 지시하였다. 박정희는 1979년 1월 어느 날 바닷가를 거닐면서 자기 비서관에게 1981년 봄에는 핵무기 개발을 완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박정희가 개발하려고 하였던 핵무기는 제국주의무력침공으로부터 조국과 민족을 지키는 정의의 무기가 아니라 동족인 북에 대한 핵공격으로 민족의 존립 자체를 파괴하려는 간악한 범죄의도를 품은 반민족적인 무기였다. 그런데도 박정희의 반민족적인 핵개발을 엉뚱하게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려는 것은 민족주의를 배반한 가짜 민족주의자의 궤변이다.

박정희의 핵개발은 그처럼 극악한 반민족적인 범죄였을 뿐 아니라, 다른 한 편으로는 다른 나라의 핵개발을 철저히 금압해온 미국의 핵정책과 피할 수 없는 정면충돌을 일으킨 자살행위로 되었다. 미국은 박정희에게 핵개발을 중단하라고 설득도 하고 압박도 하였지만, 박정희는 미국을 거역하고 핵개발을 끝내 고집하였다. 핵문제를 놓고 발생한 미국과 박정희의 정면충돌은 박정희를 백악관이 비호하는 친미독재자 명단에서 제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박정희의 핵개발이 종착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던 1979년에 미국은 박정희의 핵개발을 설득과 압박으로는 저지할 수 없음을 깨닫고, 결국 그를 제거하기로 하였다.

1967년부터 1994년까지 대외정보를 수집하는 첩보업무를 맡아보았던 남측 경찰청 정보책임자가 <신동아> 2008년 4월호에 실은 회고담에 따르면, 1979년 6월 29일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가 방한했을 때,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열린 비밀회의에서 박정희 제거공작이 논의되었다고 한다. 비밀회의에는 주한미국대사관에서 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William H. Gleysteen)과 부대사, 정치과장이 참석하였고, 미국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에서 지부장 로벗 부르스터(Robert G. Brewster)와 부지부장이 참석하였다. 그들 5명은 미국이 다른 나라 대통령을 제거하는 것은 위법이므로 자기들이 나서서 제거공작을 벌이지 않고 한국 중앙정보부에게 미국의 박정희 제거의사를 전하여 그들이 제거공작을 대행하게 하자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카터가 방한할 때 서울에 증파된 미국 중앙정보국 요원 250명은 10.26 사태가 일어날 때까지 4개월 동안 서울에 집단체류하며,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열린 5인 비밀회의 결정을 행동에 옮기기 위한 비밀공작을 벌였다.

박정희 제거공작이 5인 비밀회의에서 결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자의적으로 박정희 제거공작을 결정한 게 아니었고, 백악관의 극비지령을 현지에서 집행한 것뿐이었다. 명백하게도, 박정희 제거는 백악관의 결정이었다.

피노체트나 마르코스 같은 친미독재자는 미국의 비호를 받다가 자연사로 생을 마감하였지만, 박정희는 미국을 거역하고 핵개발을 고집하다가 미국의 제거공작으로 비명횡사하였다. 10.26 사태는, 피노체트나 마르코스 같은 친미독재자들과는 전혀 다른 기형적인 모습으로 등장한 박정희에 대한 백악관의 쓰디쓴 기억을 전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박정희는 미국을 거역한 독재자, 그래서 미국이 제거할 수밖에 없었던 거역자로 백악관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것이다.

두 여성 정치인을 바라보는 미국의 대조적인 시선

2012년 제18대 대선에 집권당 후보로 출마한 박근혜 후보를 바라보는 백악관의 심기는 불편하다. 왜냐하면, 박근혜 후보는 미국이 33년 전에 ‘거역죄’로 제거한 기형적 독재자 박정희의 친딸이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국면에서 박근혜 후보가 친미성향을 드러내며 백악관의 환심을 사려고 애써 봐도, 그런 행동이 그녀의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미국의 쓰디쓴 기억을 지워버릴 수는 없으며, 미국이 제거한 거역자의 딸이 권좌에 오를 경우 거역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소해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거역자의 딸을 바라보는 백악관의 심기는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계적인 보급망을 가진 미국의 유력한 시사주간지 <타임>이 2012년 12월 7일 아시아판 최신호 인터넷 기사에서 박근혜 후보를 표지인물로 등장시키고 특집기사를 실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것은, 그녀를 ‘권력자의 딸(Strongman's Daughter)’이라고 지칭한 좀 이상한 표제를 달아놓았다는 점이다. 미국인들이 ‘권력자’라는 말을 들으면, 거칠고 난폭한 통치자(harsh ruler)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권력자라는 말에는 독재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자기 당의 대선후보가 <타임>의 표지인물로 등장하였다고 좋아하던 박근혜 후보 선거본부는 표제를 읽어보고 그만 기겁하였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들은 표제를 ‘강력한 지도자의 딸’이라고 아전인수격으로 번역한 보도자료를 황급히 취재진에게 내돌리며 부산을 떨었는데, ‘권력자의 딸’이라는 표제에 관해 논란이 일어나자 <타임>지 편집국은 특집기사 제목을 아예 ‘독재자의 딸(Dictator's Daughter)’로 바꿔놓았다. 이것은 박근혜 후보 선거본부의 고의적인 오역을 비판한 것이다.

지금 아시아에서 친미성향의 여성 정치인으로 미국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Aung San Suu Kyi)도 1947년 7월 19일 당시 미얀마 총리가 보낸 테러단의 총격으로 비명횡사한 미얀마 건국영웅 아웅산(Aung San, 1915-1947)의 딸이다. 그런데 2011년 1월 10일 <타임>은 아웅산 수치를 표지인물로 등장시키면서, ‘투사(Fighter)’라는 표제를 달고, 그 밑에 “버마의 아웅산 수치는 자유 없는 나라를 비추는 자유의 횃불”이라는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런데 그와 달리, <타임>은 이번에 박근혜 후보를 표지인물로 등장시켜 ‘권력자의 딸’이라는 표제를 달고, 그 밑에 “박근혜는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으로 역사에 등장하려고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남긴, 물의를 일으키는 과거를 넘어설 수 있을까?”라고 써넣었다. 그 물음은 박근혜 후보가 박정희의 과거를 넘어서지 못할 것임을 암시하는 문구로 읽힌다.

아웅산 수치에게 ‘자유의 투사’라는 미국식 칭찬을 보낸 <타임>이 박근혜 후보에게는 ‘독재자의 딸’이라는 미국식 비난을 보낸 것은 너무 대조적이다. 박근혜와 아웅산 수치를 각각 바라보는 미국의 시선이 그처럼 대조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미국을 거역한 박정희에 대한 미국의 쓰디쓴 기억이 박근혜 후보에게 투영되기 때문이다.

위에 서술한 <타임>지 표제 아래 쓰여 있는 ‘그녀의 아버지가 남긴 물의를 일으키는 과거(controversial past)’라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타임>은 ‘박정희가 남긴 물의를 일으키는 과거’라는 말을 유신독재의 과거라는 뜻으로 서술하였지만, 그것은 <타임>의 시각이다. <타임>과 달리, 백악관은 ‘박정희가 남긴 물의를 일으키는 과거’를 미국을 거역하고 핵개발을 고집하다가 제거당한 괘씸한 독재자의 33년 전 과거로 인식하는 것이다.

제18대 대선 선거일을 불과 12일 앞둔 매우 민감한 시점에, 미국의 유력한 시사주간지가 박근혜 후보를 독재자의 딸로 지칭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를 바라보는 백악관의 불편한 심기를 유력한 시사주간지가 우회적으로 대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박근혜 후보는 김재규가 대행한 박정희 제거공작의 배후조종자가 백악관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고, 백악관도 자기들이 추진한 박정희 제거공작의 배후조종자가 누구였는지를 박근혜 후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백악관이 박근혜 후보에게서 느낄 수밖에 없는 묘한 긴장감을 간파할 필요가 있다.

대선을 불과 며칠 앞둔 지금, 얼마 전까지 ‘박근혜 대세론’으로 표현되어오던 박근혜 후보의 지지율 상승세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 대신 문재인 후보 지지율이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막판 추격전은, 박근혜 후보를 바라보는 미국의 불편한 시선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문재인의 맹렬한 막판 추격전은 미국의 대선개입공작이 선거일 직전에 어느 쪽으로 쏠리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만든다.

남, 북, 미 삼각관계에 복잡하게 얽힌 사연

2012년 12월 10일 헤리티지 재단이 워싱턴에서 개최한 세미나에 참석한 맨스필드 재단 이사장 고든 플레이크(L. Gordon Flake)는 “지난 2007년 대통령선거 당시에는 정동영 후보가 한미동맹에 대한 회의론을 제기했고, 2002년 선거 때는 노무현 후보가 반미주장을 내놨지만, 지금은 그런 후보가 없다. 한미동맹은 이번 선거에서 주된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다. 이것은 문재인 후보와 박근혜 후보가 한미동맹 강화론을 주장하는 친미성향을 똑같이 보여주고 있어서 2013년 이후 미국의 대남정책 추진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백악관은 문재인 후보가 지난 대선시기 노무현 후보, 정동영 후보와는 달리 친미성향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제18대 대선에 출마한 두 후보가 똑같이 한미동맹 강화론을 말하는 바람에 백악관은 2013년 이후 자기의 대남정책과 관련하여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지만, 백악관의 대북정책에서는 그와 전혀 다른 분위기가 뚜렷이 감지된다. 거기에 얽힌 사연은 이렇다.

얼마 전 미국 연방하원 차기 외교위원장으로 선임된 에드 로이스(Ed Royce)는 북이 위성발사에 성공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진 2012년 12월 12일에 발표한 성명에서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이 “오랫동안 실패하였다”고 지적하면서 “상상력이 부족하고 무기력한 것”이었다고 비판하였다.

북미관계에 관한 심층정보를 알지 못하는 로이스는 오바마 정부가 북의 위성발사를 저지하지 못하였다는 뜻으로 대북정책 실패를 거론한 것이지만, 실상은 그런 게 아니다. 북의 위성발사와 무관하게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이 이미 오래 전에 실패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2012년 12월 10일 <연합뉴스> 특파원과 대담한 조엘 위트(Joel Witt) 전 미국 국무부 대북담당관의 발언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위트는 대담에서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이 “실패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지적하고, 북미 대결에서 “실제로 북한이 이겼다”고 논평하였다.

오바마 정부 이전에도 역대 미국 정부의 대북정책이 모조리 실패로 끝나버렸지만, 지금 오바마 정부가 대북정책 실패 이후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더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는 까닭은, 집권 2기에 곧 들어설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 전환이 제18대 대선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위의 대담에서 조엘 위트는, 제18대 대선 이후에 등장할 남측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해서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면, 미국은 그 기회에 이미 실패한 대북정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북한과의 대화를 원하는 한국의 새 대통령은 우리에게(오바마 정부에게라는 뜻 - 옮긴이) 그런 기회를 줄 수 있다”는 뼈있는 말을 남겼다.

조엘 위트의 이 발언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제18대 대선에 대한 백악관의 분위기를 그 발언을 통해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발언을 통해 엿보는 백악관의 분위기는, 제18대 대선에서 북과 대화할 수 있는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라고, 북이 대화상대로 여기는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문재인 후보와 박근혜 후보가 똑같이 한미동맹 강화론을 꺼내든 조건에서, 백악관이 2013년 이후 자기의 대북정책에서 선호하게 될 후보는 북과 대화할 수 있고, 북이 대화상대로 여기는 문재인 후보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는 이명박 정부가 임기 5년 내내 그러했던 것처럼 ‘북한 붕괴설’과 ‘북한 정권교체설’을 미신처럼 믿으며 극도로 반북적대감을 드러내왔다. 그에 대응하여, 북도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보이며 맹비난을 퍼부어 왔다. 박근혜 후보는 대선을 의식해서 말조심을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북을 대화상대로 여기지 않고 있으며, 북도 그런 박근혜 후보를 대화상대로 여기지 않는다.

백악관과 박정희 사이에서 정면충돌을 일으켰던 핵문제는 33년 전 10.26 사태로 끝난 게 결코 아니며, 오늘 박근혜의 대선출마로 다시 살아났다. 2000년 1월과 2월에 고농축우라늄 실험에 성공하여 무기급 핵물질을 만들었던 핵개발 능력이 남측에 여전히 남아있는 한, 미국은 한미 원자력협정의 고삐를 더욱 세게 틀어쥐고 남측의 핵활동을 계속 감시할 것이며, 핵개발을 비밀리에 추진했던 박정희의 과거사를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특히 지난 20년 북미대결사를 되돌아보면, 백악관이 북의 초강경 대미압박에 정치적으로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패배국면들마다 백악관은 청와대를 따돌리고 북에게 ‘양보’를 하였고, 백악관의 그런 정치적 굴복을 바라보면서 심한 배신감을 느낀 이 땅의 수구세력은 박정희가 이루지 못한 핵개발을 재개해야 한다는 식의 핵무장론을 꺼내들었다.

2013년 이후 백악관이 청와대를 따돌리고 북에게 ‘양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경우 백악관의 ‘대북양보’에 심한 배신감을 느낀 박근혜 정권은 박정희가 이루지 못한 핵개발을 재개하려는 수구세력의 강한 요구를 받게 될 것으로 예견된다. 백악관이 박근혜의 대선출마와 관련하여 심히 우려하는 것은, 바로 그런 상황이 2013년 이후에 조성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들은 백악관의 의중을 알아차렸을까?

북미관계와 한미관계에 이중적으로 얽힌 이런 복잡한 사정을 헤아려보면, 지금 백악관이 거역자의 딸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이 글의 논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한미국대사관 정치부와 미국 중앙정보국 한국지부가 방대한 공작망을 총가동하여 벌이는 대선개입공작이 제18대 대선의 당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공공연한 비밀을 생각하면, 백악관이 거역자의 딸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과연 어떤 선거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33년 전 과거사를 완전히 망각하였을 뿐 아니라, 지금 북미관계를 중심으로 격변의 급류를 타고 있는 한반도 정세를 파악하기에는 정치적 지능지수가 한참 떨어지는 수구파 소굴 새누리당은, 자기들의 대선후보를 잘 못 뽑아놓은 치명적 실수를 저지르고도 그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할 만큼 너무 우매하다.

제18대 대선에 대한 백악관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어도, 그 동안 대선후보 지지문제에 대해 침묵하던 이수성, 정운찬, 문국현, 박주선은 물론이고, 새누리당 핵심부에 자주 얼굴을 내밀던 윤여준, 김덕룡, 김현철까지 줄줄이 문재인 후보에 대한 지지의사를 밝히고 있다. 이러한 이상한 상황전개는, 안철수가 열어놓은 문이 더 활짝 열리고 있는 느낌을 안겨준다. 제18대 대선 선거일이 바로 코앞에 다가왔다.(2012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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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1

북이 미사일을 초고속으로 만들어낸 비결

[한호석의 개벽 예감] (40)
자주민보 2012년 12월 10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위성운반로켓이 백두산 계열에서 은하 계열로 바뀐 사연
 
2012년 12월 6일 미국 국방부 청사에 나타난 태평양사령관이며 해군제독인 새뮤얼 락클리어 3세(Samuel J. Locklear III)는 국방부 출입기자단에게 북이 현재 준비 중인 위성 발사에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북측 지도부의 현재 행동이 한반도와 아시아의 전반적인 안보환경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를 고려해주기 권고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 지역만이 아니라 국제안보환경을 매우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다.”

이 발언은 북의 위성 발사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와 동일시하는 미국의 견해를 되풀이 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중요한 사실을 고의로 은폐하면서 북의 위성 발사를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라고 우기고 있다. 미국이 고의로 은폐한 것은, 북이 이미 오래 전에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실전배치하였고, 지금은 대륙간탄도미사일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위성운반로켓을 개발하여 본격적인 우주개발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북이 위성운반로켓을 백두산 계열에서 은하 계열로 교체하였다는 데 있다. 북은 백두산 1호라는 이름의 위성운반로켓에 시험위성 광명성 1호를 실어 1998년 8월 31일에 쏘아올렸다. 위성운반로켓 백두산 1호는 북이 대륙간탄도미사일 설계기술로 만든 것이었다.

위성운반로켓을 독자적으로 만드는 모든 나라들이 장거리 미사일 설계기술로 위성운반로켓을 만드는 초기개발단계를 거치는 법이다. 북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런 초기개발단계를 거쳤다. 그런데 만일 북이 15년이 지난 오늘에도 백두산 계열의 위성운반로켓을 쏘아올린다면, 북의 위성 발사가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라는 미국의 주장에 대해 북이 반박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지금 북은 백두산 계열의 위성운반로켓과는 전혀 다른 은하 계열의 위성운반로켓을 쏘아올리고 있다. 백두산 계열의 위성운반로켓은 외형부터 은하 계열의 위성운반로켓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북이 2009년 4월 5일에 두 번째로 쏘아올린 위성운반로켓에 백두산 2호가 아니라 은하 2호라는 새로운 명칭을 붙인 것은, 단순히 명칭을 바꾼 것만이 아니라, 그 두 번째 위성운반로켓이 8년 전에 쏘아올린 첫 번째 위성운반로켓과는 전혀 다른 계열에 속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리고 올해 북이 두 차례나 은하 3호를 쏘아올리면서 이전에 있었던 시험위성이 아니라 지구관측위성을 탑재한 것은 우주개발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대륙간탄도미사일 티를 아직 벗지 못한 백두산 1호를 개발하였던 때로부터 그 티를 완전히 벗은 은하 계열의 신형 위성운반로켓을 개발하기까지 약 10년이 걸렸다. 북에서 그 10년은 위성운반로켓 제작기술의 비군사화를 실현한 기간이었던 것이다.

은하 계열의 위성운반로켓을 가리켜 위성운반로켓으로 위장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고 우겨대는 미국의 생억지를 반박하려면, 북의 미사일 개발사에 대한 기본지식이 필요하다. 북의 미사일 개발사는 북이 이미 오래 전에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그것을 실전배치하였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위성운반로켓으로 위장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중국이 북의 미사일 공동개발 제안을 받아들인 사연

1975년 4월 18일부터 26일까지 김일성 주석은 오진우 당시 인민군 총참모장을 대동하고 중국을 공식방문하였다. 14년 만의 중국 방문이었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부설 국제안보 및 군비통제 센터(CISAC)가 발간하는 <국제안보> 1992년 가을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당시 중국 방문 중에 탄도미사일 공동개발을 마오쩌둥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제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지도부는 그 제안에 즉각 응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중국은 북의 미사일 기술수준을 자기들보다 한 수 낮게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북과 전통적인 친선관계를 유지해온 중국으로서는 북의 제안을 냉정히 거절할 수도 없었으므로, 시간을 질질 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1970년대 북과 중국의 미사일 기술수준은 실제로 어떠하였을까? 북은 1973년에 소련에서 미사일 SSC-2B 여섯 기를 도입하였는데, 이 미사일은 탄두무게가 600kg, 사거리가 90km이며, 전파유도항법장치로 날아간다. 북은 이 소련제 미사일을 분해하고 역설계하는 방법으로 단거리 미사일을 개발하여 1974년에 마침내 미사일 생산국이 되었다.

<뉴욕 타임스> 1970년 11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분석가들은 중국이 핵탄두를 탑재하고 1,600km를 날아가는 준중거리 미사일 개발을 마쳤고, 1970년 말 현재 사거리 4,000km 이상의 중거리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고 하였다. <뉴욕 타임스> 1971년 8월 6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는 중국이 사거리 2,400km의 준중거리 미사일 개발을 마쳤다고 한다. 또한 1975년 4월 14일에 발간된 미국 주간지 <뉴스위크>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가정보기관은 중국이 사거리 2,400km의 준중거리 미사일을 도로이동식 발사차량에 실어놓은 것을 항공정찰을 통해 포착하였다고 한다.

위의 정보를 종합하면, 당시 북은 사거리 90km의 단거리 미사일을 생산하는 수준이었는데 비해, 중국은 사거리 2,400km의 준중거리 미사일을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북과 중국의 미사일 사거리 연장기술을 산술적으로 비교하면, 당시 중국은 북보다 무려 26배나 앞서 있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중국이 북의 미사일 공동개발 제안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1년 반이나 시간을 끌며 응답을 하지 않던 중국이 1976년 말에 갑자기 태도를 바꿔 북의 미사일 공동개발 제안을 받아들였다. 1년 반이나 시간을 끌던 중국은 왜 1976년 말에 북의 미사일 공동개발 제안에 응하였을까? 너무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라서, 관련정보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주의 깊게 분석하면 아래와 같은 내막을 엿볼 수 있다.

1970년 대 중반부터 중국은 자기의 미사일 개발사업에 제기된 기술적 난제를 해결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뉴욕 타임스> 1973년 7월 2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 및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소속 관리들은 중국이 핵무기 개발사업에서는 급속한 진전을 보고 있지만, 그 운반수단인 미사일을 개발하는 사업에서는 기술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미국의 항공우주전문지 <주간 항공과 우주공학(Aviation Weekly and Space Technology)> 1975년 10월 12일 기사에 따르면, 당시 중국은 2단형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데서 기술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주간 항공과 우주공학> 1976년 10월 18일 기사에 따르면, 중국의 미사일 개발사업은 미국 정보기관이 이전에 예측한 것처럼 그렇게 급속히 진척되지 못하고 있는데, 중국의 경제적 한계와 기술적 제한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고 하였다. <워싱턴 포스트> 1977년 8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 산하 국방정보국(DIA)은 중국이 가까운 장래에 미국 본토를 위협하지 못할 만큼 미사일 개발의 진척속도가 느리다고 지적하면서, 앞으로 10년 동안은 중국의 미사일 능력이 미국 본토를 위협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당시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험악한 갈등을 빚고 있었으므로 중국은 미사일 기술수준에서 자기들보다 훨씬 앞선 소련으로부터 관련기술을 도입할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있었다. 중국은 소련이 아닌 다른 나라로부터 발전된 미사일 설계기술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지만, 중국에게 정치군사적으로 그처럼 중요한 미사일 설계기술을 넘겨줄 나라는 없었다.

그런데 1976년 어느 날, 중국은 정신이 번쩍 들 만한 놀라운 정보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북이 신형 미사일 설계기술을 확보하였다는 정보였는데, 그 사연은 이러하였다.

중동전쟁에서 참패하여 시나이 반도를 이스라엘에게 빼앗긴 이집트와 골란고원을 이스라엘에게 빼앗긴 시리아는 영토수복전쟁을 준비해왔다. 그러나 이집트와 시리아는 소련 군사지원단으로부터 배운 엉성한 소련식 전법을 가지고서는 강적 이스라엘을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영토수복전쟁을 준비하면서도 고심해오던 이집트와 시리아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준 실로 고맙기 그지없는 동방의 어느 한 나라가 있었으니, 그 나라가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다.
 
김일성 주석은 이집트의 나쎄르 대통령과 시리아의 아싸드 대통령으로부터 간곡한 요청을 받고 그 두 나라에 인민군 정예요원들로 구성된 군사지원단을 파견해주었다. 파견된 인민군 군사지원단은 강적 이스라엘을 제압할 기상천외한 ‘주체전법’을 이집트군과 시리아군에 전수해주었을 뿐 아니라, 영토수복전쟁이 개시되자 인민군 전투비행사들이 기습편대를 편성하여 직접 미그 전투기를 몰고 초저공 기습침투비행으로 이스라엘 공군기지를 급습하였고 최전방에 출격하여 이스라엘 공군기들과 공중전을 벌였다. 그 전쟁에서 기상천외한 초저공 기습침투비행과 놀라운 공중전 기술로 이스라엘 공군을 격파한 인민군 기습편대를 이끈 전쟁영웅이 바로 젊은 시절의 전투비행사 조명록 차수다.

전쟁 직후, 북의 전폭적인 지원에 감동한 나쎄르 대통령은 소련이 이집트에 제공해주면서 제3국에 절대로 넘겨주지 말라고 당부하였던 소련제 탄도미사일 스커드-B 두 기와 그 미사일을 탑재하는 4축8륜 발사차량 MAZ 543 두 대를 소련 몰래 북에 보냈다. 북은 그 소련제 미사일 두 기를 분해하고, 역설계하는 방법으로 신형 미사일 설계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북의 미사일 능력을 왜곡하고 깎아내리는 데 앞장선 자칭 미사일 전문가 로벗 쉬무커(Robert H. Schmucker)는 1999년 6월 스코틀란드 에딘버러에서 열린 제12차 미사일 방어 다국적 회의에 제출한 글 ‘제3세계 미사일 개발: 유엔특별위 경험과 자료평가에 기초한 새로운 평가’에서 북의 미사일 개발경험과 소련, 중국, 이라크의 미사일 개발경험을 비교하면서, 북의 미사일 개발기간이 매우 짧고 미사일 시험발사도 매우 적게 실시하였다는 점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대북혐오감에 사로잡힌 그의 두뇌로 북의 미사일 개발경험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쉬무커의 지적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신형 미사일을 개발하는 기간은 7년에서 10년이 걸리고, 실전배치하기 전에 세 차례에서 일곱 차례 시험발사를 실시한다. 또한 다른 나라의 미사일을 도입하여 분해하고 역설계하는 방법으로 미사일을 모방생산하는 경우에도, 미사일 생산국으로부터 전폭적인 기술지원을 받으며 20기에서 50기에 이르는 견본 미사일을 도입하여 분해-역설계하고, 여러 차례 시험발사를 실시한다.

그런데 북은 스커드-B 생산국인 소련으로부터 기술지원을 전혀 받지 않으면서 이집트가 소련 몰래 넘겨준 단 두 기의 견본 미사일을 자력으로 분해하고 역설계하고, 불과 몇 해만에 초고속으로 미사일 개발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중국이 개발을 포기한 둥펑 61, 북이 개발에 성공한 화성 7호

북의 미사일 기술자들이 스커드-B 설계도를 들고 중국에 가서 중국의 미사일 기술자들과 함께 신형 미사일 개발에 달라붙었다. 1976년 말부터 북과 중국이 공동개발을 추진하였던 그 미사일은 길이 11m, 탄두무게 1t, 사거리 600km이며, 도로이동식 발사차량에 탑재하는 단거리 미사일이었다.

북중 미사일 공동개발사업은 약 2년 간 지속되다가 당시 중국 내부에 복잡하게 조성된 정치상황 때문에 1978년 말에 중단되었다. 2년 동안 북과 중국이 공동으로 개발한 신형 미사일의 완성도가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찾을 수 없지만, 2년이라는 기간 동안 북과 중국이 적극 협력하면서 밀고나갔으므로 상당한 진척을 보았을 것이다.

중국이 자기 내부 정치사정으로 북과 추진해오던 미사일 공동개발을 중지하였지만, 북과 중국은 공동개발사업을 중단한 이후에도 각자 단독으로 미사일 개발을 계속 추진하였다. <뉴욕 타임스> 1979년 7월 4일 보도에 따르면, 중국 베이징에서 송출되는 중국 라디오 방송은 중국이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성공적으로 실시하였다고 한다.

미국에서 나온 자료들에 따르면, 당시 북과 중국이 미완으로 끝낸 공동개발에서 설계된 신형 미사일 명칭은 ‘둥펑(東風) 61’이다. 공동개발이었으므로, 중국이 중국식 명칭을 붙인 것에 상응해서 북도 당연히 조선식 명칭을 붙였을 것인데, 북에 대한 무지와 편견에 사로잡힌 미국 전문가들은 조선식 미사일 명칭이 무엇인지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1981년에 북이 개발한 미사일의 명칭이 태양을 중심으로 우주를 도는 붉은 별의 이름을 따서 화성(火星)으로 붙여졌다는 사실이 북측 외부에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퍽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는데, 오만하고 무식한 미국 전문가들은 화성이라는 고유명칭이 알려진 뒤에도 여전히 ‘스커드’라는 소련식 명칭을 고집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의 고집으로만 볼 게 아니다. 미국 전문가들은 북이 미사일 기술을 자체로 개발하였다는 사실을 덮어버리고, 소련의 미사일 기술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미련한 생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북이 1981년에 개발한 화성 미사일은 1976년 말부터 약 2년 동안 북이 중국과 공동으로 개발하고 있었던 탄도미사일의 탄두무게를 1,000kg에서 800kg으로 줄이는 대신, 사거리를 600km에서 800km로 늘인 것이다. 이 신형 미사일이 바로 화성 7호다.

북의 미사일 능력을 축소하기 좋아하는 미국 전문가들은 화성 7호를 화성 5호 또는 화성 6호와 헷갈렸다. 어떤 전문가는 북이 소련제 미사일 스커드-B를 개량하여 1985년에 화성 5호를 만들었는데, 사거리가 320km밖에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으나, 그런 주장은 의도적인 왜곡이 아니면 착오다.

북이 화성 7호를 만들었다는 정보를 들은 나라들이 평양에 대표단을 보내 구입계약을 체결하기 시작하였다. 이를테면, 1983년 4월 5일 당시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는 북을 공식방문하여 화성 7호를 구입하기 위한 계약을 체결하였고, 같은 해 9월 6일에는 국방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이집트 군사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하였다.

또한 1983년 10월 23일 이란 국무총리 루홀라 무사비(Ruhollah Musavi)와 국방장관 모하메드 할리미(Mohammed Salimi)도 이집트에 이어 북을 공식방문하고 화성 7호 구입계약을 체결하였다. 북은 이란에 화성 7호 120기와 발사차량 20대를 수출하였고, 나중에는 화성 7호 생산시설을 수출하고 기술진을 파견하여 현지에 생산공장까지 세워주었다. 북에서 건설해준 이란의 화성 7호 생산시설에서 만들어낸 미사일이 샤합(Shahab) 2호인데, 화성 7호에 비교하여 탄두무게를 800kg에서 990kg으로 늘인 대신, 사거리는 800km에서 750km로 줄였다.

이처럼 북은 화성 7호를 이집트와 이란에 대량 수출하였을 뿐 아니라, 쿠바, 민주콩고, 시리아, 미얀마, 리비아, 베트남, 예맨, 에디오피아, 아랍에미리트연합 등에도 수출하였다. 미국 전문가들은 북이 화성 7호 1,000기를 생산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북이 1981년부터 1991년까지 12년 동안 생산한 화성 7호가 1,000기에 이른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북, 마침내 화성 미사일을 발사하다

<서울신문> 1991년 12월 7일 보도에 따르면, 그 해 가을 북과 중국이 공동개발한 미사일을 중국 닝샤후이 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에서 시험발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북과 중국은 미사일 공동개발을 1978년 말에 중단한 이후 미사일 공동개발을 재개한 적이 없으므로, 1991년에 중국에서 시험발사된 미사일을 두 나라가 공동으로 개발하였다고 보도한 것은 오보였다. 명백하게도, 그 미사일은 북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인데, 북은 자기의 미사일 개발에 관한 정보가 미국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중국의 동의를 얻어 중국에서 시험발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신형 미사일이 어떤 미사일이었는지는 그로부터 1년 9개월 정도가 지난 1993년 5월 말에 세상에 알려졌다.

미국 언론인 데이빗 생어(David E. Sanger)가 1993년 6월 13일 <뉴욕 타임스>에 쓴 보도기사에 매우 흥미로운 정보가 들어있다. 그 기사는 1993년 5월 29일과 30일 이틀에 걸쳐 북이 발사한 미사일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런데 데이빗 생어가 일본 정부 당국자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북의 미사일 발사지점을 강원도 원산 부근 미사일 기지라고 쓴 것은 착오였고, 실제는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 해안에서 도로이동식 발사차량에 탑재한 미사일을 동해 쪽으로 쏜 것이었다.

데이빗 생어는 그 기사에서 북이 일본 열도의 동해 쪽에 있는 노토반도(能登半島) 쪽으로 미사일을 쏘았다고만 하였으나, 실상은 노토반도 쪽으로 날아간 그 미사일이 바다에 띄워놓은 부표표적에 명중하였던 것이다. 북이 발사한 미사일이 부표표적에 명중하였다는 사실은, 1991년 10월 4일 <연합뉴스>에 보도된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 서동권의 발언에서도 확인되었다. 북은 미사일 탄착상황을 관측하기 위해 노토반도에서 서북쪽으로 약 350km 떨어진 동해 해상에 라진급 프리깃함 한 척과 소해정 한 척을 서로 30km 거리를 두고 배치하였다.

데이빗 생어는 그 기사에서 북이 노토반도 쪽으로 발사한 미사일의 사거리를 1,000km로 추정하면서, 실제는 500km밖에 날아가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가 보도기사에서 지적한 것처럼, 북이 무수단 해안에서 쏜 미사일이 500km를 날아갔다면, 그 미사일은 노토반도를 넘어가서 도야마만(富山灣) 한 복판에 떨어졌을 것이지만, 북의 프리깃함이 일본 영해 안으로 들어가 부표표적을 설치할 리는 없으므로 실제 탄착점은 노토반도에서 서북쪽으로 떨어진 해상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동해의 폭이 좁으므로, 북은 미사일 사거리를 일부러 500km로 줄여 쏘았다.

바다에 띄워놓은 부표표적이 크지 않다는 점은 누구나 알 수 있는데, 북이 쏜 미사일이 500km밖에 있는 작은 표적을 맞춘 것은 명중률이 매우 높은 미사일을 쏘았음을 말해준다. 특히 그 미사일은 탄도비행 마지막 단계에서 탄두가 동체에서 분리되어 초고속으로 낙하하였는데, 탄두와 동체의 상호분리가 미사일 항법기능을 더욱 높여주어 명중률을 끌어올린 요인으로 되었다.

데이빗 생어의 지적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미사일은 무게 1t짜리 육중한 탄두를 싣고 1,300km를 날아갈 수 있다. 탄두무게가 1t이라는 것은 고폭탄두나 화학탄두는 물론이고 더 중요하게는 핵탄두까지 실을 수 있음을 뜻한다. 북이 1993년 5월 29일에 발사한 명중률이 매우 높은,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그 준중거리 미사일이 바로 화성 7호다. 미국은 화성 7호를 로동 1호라고 제멋대로 부른다.

북이 화성 7호 미사일을 발사하여 500km밖에 있는 작은 표적을 명중시키자, 일본이 발칵 뒤집혔다. 왜냐하면 사거리가 1,300km인 화성 7호는 일본 열도를 타격권 안에 넣고 있을 뿐 아니라, 저 멀리 북으로는 호카이도에서 남으로는 오키나와까지 타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북이 일본 전역을 타격할 미사일 공격력을 가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위에 인용한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북의 화성 7호 발사를 보고 일본 방위청(당시 명칭)은 “매우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화성 7호의 충격에 휩싸인 일본은 자기의 보호자인 미국에게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93년 8월 2일 일본 방위청 사무차관 하타케야마 시게루(畑山蕃)는 미국 국방부 정책담당 부장관 프랭크 와이즈너(Frank Wisner)와 회담을 갖고 화성 7호에 대처하기 위한 미일 공동위원회를 창설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1993년 10월 일본 방위청은 북의 미사일 발사를 감시할 정찰위성을 개발하는 비공개 연구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북의 화성 7호 발사는 새로 개발한 미사일의 성능을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미사일을 수입하려는 나라들에게 실제 성능을 보여주기 위한 발사였다. 이에 대해서는 1993년 8월 15일 <워싱턴 타임스>가 보도한 주한미국군사령관 출신 로벗 리스카시(Robert RisCassi)의 발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바 있다.

물론 북이 화성 7호 미사일을 발사한 목적이 미사일 수입국들에게 성능을 보여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고, 미국을 압박하여 북미 양자회담에 끌어내려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정치적 목적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논한다.

발사 당일 현장에서는 이란의 미사일 전문가들과 파키스탄의 미사일 전문가들이 화성 7호 미사일 발사를 참관하였다. 1993년 7월 14일 일본 언론은 이란 정부 대표단이 이미 1993년 4월에 방북하여 화성 7호 미사일 150기를 수입하는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고 보도하였다. 다른 한 편, 1993년 12월에는 당시 파키스탄 총리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가 북을 공식방문하였다. 그녀의 방북 역시 화성 7호를 구입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에 관해서는 2010년 3월 29일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 ‘이상한 핵실험과 핵확산 재개’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다.

이란이 북으로부터 화성 7호를 구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파악한 이스라엘은 발칵 뒤집혔다. 왜냐하면 이란이 화성 7호로 무장하는 날, 이스라엘은 심각한 미사일 피격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북의 화성 7호가 이란에 들어가는 것을 차단해야 할 절박한 요구를 느낀 이스라엘은 1993년 6월 14일 당시 이스라엘 외무장관 쉬몬 페레스(Shimon Peres)의 방북의사를 밝혔고, 6월 25일 당시 이스라엘 외무부 부총국장 에이탄 벤트수르(Eitan Bentsur)는 중국 베이징에서 북측 관리를 만나 이란에 화성 7호를 수출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중동문제에 관해 적대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북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그처럼 민감한 협상현안이 해결될 리 만무하였다. 1993년 8월 16일 이스라엘 총리 이작 라빈(Yitzhak Rabin)은 중동지역에 미사일을 수출하려는 북과의 협상을 미국의 요청에 따라 중단한다고 발표하였다.

화성 7호는 이란으로 가서 샤합(Shahab) 3호가 되었고, 파키스탄으로 가서 가우리(Ghauri) 2호가 되었고, 시리아에서도 면허생산되었다.

두 종류의 화성 미사일을 더 쏘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력적인 지도로 추진된 북의 국방공업 강화사업을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실무적으로 집행하였던 김광진 차수(당시 직책은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는 사거리 4,000km 이상의 중거리 미사일이 북에서 생산되고 있다는 말을 1990년 10월에 남긴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2012년 9월 17일 <자주민보>에 발표한 나의 글 ‘제4핵강국의 조용한 등장 알려주는 사진’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다.

위의 정보에 따르면, 북의 화성 7호가 일본 노토반도 앞바다에 떠있는 부표표적을 맞춘 놀라운 미사일 정밀도를 과시하였던 1993년 5월 말 현재 북은 사거리 1,300km의 준중거리 미사일 화성 7호 이외에 사거리 4,000km 이상의 중거리 미사일도 생산하고 있었다.

미국 언론의 관련보도에 따르면, 북이 1993년 5월 29일 화성 7호 한 기를 발사한 뒤, 이튿날에는 다른 종류의 미사일 두 기를 더 쏘았는데, 이튿날에 쏜 미사일 두 기는 100km 정도 날아간 단거리 미사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추측보도는 사실과 다른 엉터리 보도다. 1993년 5월 30일 북이 두 번째로 쏜 미사일 두 기는 화성 8호와 화성 9호였다. 화성 8호는 사거리 2,000km의 준중거리 미사일이고, 화성 9호는 사거리 4,000km의 중거리 미사일이다.

북은 화성 8호를 남쪽으로, 화성 9호를 동쪽으로 각각 쏘았다. 화성 8호는 무수단에서 동중국해를 넘어 서태평양의 미국 영토인 괌(Guam)으로 날아가, 괌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서태평양 해상에 떨어졌다. 다시 말해서, 무수단에서 괌까지 거리가 2,100km이므로, 화성 8호는 괌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서태평양에 탄착한 것이다.

화성 9호는 무수단에서 동해를 건너, 일본 쓰가루 해협(津輕海峽)을 넘어, 북태평양의 미국 영토 미드웨이제도(Midway Islands)를 넘어, 하와이 쪽으로 날아가다가 하와이 진주항(Pearl Harbor)에서 서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해상에 탄착하였다. 다시 말하면, 무수단에서 하와이 진주항까지 거리가 4,400km이므로, 화성 9호는 하와이 가까이 날아간 것이다.

일본은 화성 8호와 화성 9호가 자기들 머리 위로 넘어가 서태평양과 북태평양 한 복판에 각각 떨어졌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노토반도 쪽으로 날아간 화성 7호만 보고 깜짝 놀라 소동을 피우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화성 8호와 화성 9호를 보고 경악과 충격을 겪은 쪽은 미국이었다. 북의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믿었던 자기들의 태평양 전략거점들인 괌과 하와이가 화성 8호와 화성 9호의 타격권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화성 8호와 화성 9호의 충격을 겪은 미국은 1993년 6월 2일부터 11일까지 뉴욕에서 진행된 북미 양자회담에 끌려 나갔으며, 그 회담에서 미국이 북의 주권을 존중하며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지지한다는 내용으로 된 북미 공동성명을 사상 처음으로 채택하였다.

이처럼 미국이 적국의 무력압박을 견디지 못해 적국이 요구한 양자회담에 끌려 나가 적국이 요구하는 내용으로 외교문서를 작성해준 것은 미국이 북에게 정치적으로 굴복하였음을 말해준다. 1993년의 북미관계가 잘 말해주는 것처럼, 북의 미사일 개발사는 미국과의 격렬한 무력대결에서 이긴 북이 미국을 정치적으로 굴복시킨 역사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 북은 미국으로부터 평화협정 체결이라는 마지막 정치적 굴복을 받아내려는 반미대결전 준비를 완료한 것이다.(2012년 1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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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인 변화 일어난 대선국면과 북미관계

<연재> 한호석의 진보담론 (238)
통일뉴스 2012년 12월 10일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정치평론가들의 대선분석과 당락전망을 믿기 힘든 까닭 

2012년 12월 19일에 실시될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막바지에 오르면서 후보들의 각축전이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가운데, 정치평론가들이 이러저러한 분석과 전망을 내놓으며 유권자들의 심리를 자극하고 있다. 그들이 내놓는 분석과 전망을 들어보면, 어떤 정치평론가는 문재인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정치평론가는 박근혜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한 마디로 잘라 말하면, 그들의 분석과 전망은 믿을 만한 게 아니다. 그들의 분석과 전망을 믿기 힘든 까닭은, 대선향방을 결정짓는 핵심요인을 생각하지 못한 채 대선판세를 단순히 지지율 변화동향에만 근거하여 분석하면서 당락을 전망하기 때문이다. 

명백하게도, 대선후보의 지지율 변화동향은 변수이지 상수가 아니다. 지지율을 오르락내리락 변화시키는 요인은 변화현상 밑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는 법이다. 정치평론가들은 가장 중요한 상수를 빼놓고 부차적인 변수만 매만지고 있으니, 과학적인 분석과 정확한 전망이 나올 리 만무하다. 

이 땅에서 전개되는 곡절 많은 대선과정에서 여러 요인들이 뒤엉켜 조성된 복잡한 판세를 분석하고 당락을 전망할 때, 절대로 빼놓아서는 안 될 상수는 미국의 대선개입이다. 미국의 ‘사활적 안보이익’이 걸려있다는 이 땅에서 정권교체냐 정권연장이냐를 결정하는 대선국면이 날카롭게 조성된 오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수수방관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무지몽매 이외에 다른 게 아니다. 이제껏 이 땅에서 실시된 모든 대선에 미국이 깊숙이 개입하여 미국의 ‘사활적 안보이익’을 정권 차원에서 보장해줄 친미성향의 후보를 당선시켜왔다는 사실은, 한미관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정보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예컨대, 2007년에 조성된 제17대 대선국면에서도 미국은 이전 대선국면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집중적으로 선거개입공작을 벌였다. 주한미국대사관이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말해주는 비밀문건 93편이 ‘위킬릭스’에 게재되었는데, 그 비밀문건을 정밀분석한 나의 글 ‘한미동맹의 이름으로 선거개입공작 자행한 미국’은 2012년 4월 2일 <통일뉴스>에 실린 바 있다. 

‘위킬릭스’에 게재된, 제17대 대선에 관한 비밀문건 93편은 주한미국대사가 본국에 보낸 것인데, 정작 중요한 극비문건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선거개입공작의 실체는 비밀문건 93편에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충격적일 것이다. 더욱이 주한미국대사관 정치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충격적인 비밀공작과 첩보활동을 전문으로 하는 미국 중앙정보국 한국지부가 제17대 대선국면에서 벌여놓은 선거개입공작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으니, 비밀문건 93편에 드러난 선거개입공작은 빙산의 일각이다. 

나의 글 ‘한미동맹의 이름으로 선거개입공작 자행한 미국’에서 논한 것처럼, 미국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와 주한미국대사관 정치부는 2007년 대선에 이어 올해 대선에서도 각계각층에 침투시킨 방대한 첩보망, 공작망, 연락선, 인맥을 총가동하여 광란적으로 선거개입공작을 벌이는 중인데, 다만 그 비밀공작이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아서 유권자 대중이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땅의 대선후보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간택하고, 그들이 간택한 대선후보가 실제로 당선된다는 것은 이 땅의 선거역사를 관통하는 불문율이다. 이 땅의 유권자들은 분명히 자기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하였으므로, 유권자의 선택으로 대통령을 선출한 것처럼 여기는 깊은 착각 속에 빠져 있는데, 실제로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미리 간택하고 비밀공작으로 당선시키는 대선판도 안에서 그들이 간택한 대선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이것은 공정선거가 결코 아니다. 한미동맹이라는 간판 아래서 미국의 은밀한 지배를 받는 한, 이 땅에서 공정한 대통령 선거는 사실상 불가능하며, 따라서 가장 초보적인 선거민주주의조차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땅에서 유권자들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는 말은, 한미동맹의 은폐된 실체를 알지 못한 채 착시현상으로 나타난 투표현장의 ‘신기루’를 바라보고 중얼거리는 소리다. 

그런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이 땅의 대선후보를 간택하고, 그들이 간택한 대선후보가 실제로 당선된다는 불문율이 예상치 못한 강력한 돌발변수에 의해 깨져버린 예외적인 사례가 딱 한 차례 있었다. 2002년 12월 18일에 실시된 제16대 대선이다. 그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 맞서 격전을 벌인 끝에 57만980표 차이로 간신히 이겼다.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와 주한미국대사관 정치부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간택에 따라 이회창 후보를 당선시키려고 광란적으로 선거개입공작을 벌였겠지만, 뜻밖에도 아슬아슬한 표차로 노무현 후보가 이긴 것이다. 

제16대 대선에서 미국의 선거개입공작이 사상 처음으로 실패한 까닭은, 2002년 6월 13일 주한미보병사단 장갑차가 길을 가던 두 여학생을 무참히 깔아 죽인 참사가 일어났고, 11월 23일 동두천 미국군 기지 안에서 열린 미국 군사법정에서 두 여학생을 장갑차로 깔아 죽인 살인죄로 기소된 미국군 병사 두 명에게 무죄를 평결하고 미국으로 빼돌린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두 여학생을 장갑차로 깔아 죽인 만행을 보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대중의 반미감정은 무죄평결과 살인범 빼돌리기를 계기로 마침내 폭발하였다. 투표일을 불과 25일 앞두고 일어난 반미폭풍은 대선판도를 뒤흔들면서 결국 미국의 대선개입공작을 파탄시켰다. 제16대 대선은, 이 땅의 대중들이 각성, 단결하여 거대한 집단력을 폭발시키면 미국의 비밀공작도 파탄시킬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두 가지 간택기준 

그렇다면, 2012년 제18대 대선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문재인 후보와 박근혜 후보 가운데 과연 누구를 간택하였으며, 미국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와 주한미국대사관 정치부는 누구를 당선시키려는 비밀공작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주목해야 하는 것은, 미국이 그 두 후보 중에 어느 한 사람을 당선시키기 위해 비밀공작으로 펼쳐놓은 대선판도다. 대선판세 변화동향을 정밀분석하면, 미국의 비밀공작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감지할 수 있다. 

제18대 대선판세가 어떤 변화를 보이고 있는지를 논하기에 앞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이 땅의 대선후보를 간택하는 기준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간택기준은 두 가지다. 첫째는 한미동맹을 강화하겠다는 명백한 의사를 표명한 친미정치인을 간택하는 것이고, 둘째는 한미동맹 해체를 주장하는 반미성향 후보와 연대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의사를 표명한 친미정치인을 간택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간택기준은, 미국이 이 땅을 지배하는 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붙들고 있을 불변의 기준이다. 이 땅의 대선후보는 바로 이 두 가지 기준에 합격해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의해 간택되는 것이다. 

‘위킬릭스’가 폭로한 비밀문건들에는 주한미국대사가 직접 대선후보를 대사관저에 불러놓고 만찬까지 곁들인 비밀회동에서 간택을 위한 면접이 진행되었음을 말해주는 문건들이 있다. 2007년 대선국면에서 그러했으니, 올해 대선국면에서도 세 후보들 가운데 이정희 후보만 빼놓고 다른 두 후보는 당연히 주한미국대사와 만찬을 함께하는 비밀간택회동에 참석하여 ‘면접시험’을 치렀을 것으로 보인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정해놓은 두 가지 간택기준에 비춰보면, 문재인 후보도 합격이고 박근혜 후보도 합격이다. 친미수구정당에서 선출되었고, 친미수구세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박근혜 후보야 당연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간택기준에 합격하겠는데, 놀라운 것은 박근혜 후보와 대립각을 세운 문재인 후보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간택기준에 합격하였다는 점이다. 

2012년 12월 4일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문재인 후보가 발언한 대목 몇 군데를 인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가장 중시하는 한미동맹 강화론에 대해 명백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미국 하고 동맹을 강화하면서 상호호혜적인 관계로 발전시켜 나간다”고 말했고, 자신이 말하는 균형외교는 “우리가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중시하고 굳건하게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원래 한미동맹 강화론은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제기한 것인데, 이번 대선에서는 박근혜 후보는 말할 것도 없고, 문재인 후보까지 한미동맹 강화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특히 주목하는 것은,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문재인 후보가 정치쇄신에 대해 말하면서 미국식 양당제를 도입하겠다는 자신의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는 점이다. 그는 “제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처럼 여야대표들이 일상적으로 만나서 중요한 국정을 운영하고 또 필요하면 매일 같이 만나겠다. 여야정책협의회를 상설화해서 정책을 늘 논의하도록 하겠다”고 말했고, “미국 대통령을 보면, 거의 일상적으로 여야대표들을 만나서 국정을 협의하지 않느냐? 중요한 현안이 있을 때는 매일 같이 만나기도 하고”라고도 말했다. 

문재인 후보의 미국식 양당제 도입론은 그가 이명박 대통령에 버금가는 친미성향을 가졌음을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에 한미동맹 강화론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실행계획까지 제시하지는 못하였는데, 문재인 후보는 한미동맹 강화론의 실행계획을 미국식 양당제 도입으로 공식화하였으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게 만족을 주었을 것이다. 

미국식 양당제란, 공화당과 민주당이 제3당 출현을 원천봉쇄하고 자기들끼리 정권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식으로 운영해온 미국식 수구독재의 전형이다. 부유층 정당인 공화당과 중산층 정당인 민주당이 민중정당 출현을 막는 것부터가 다당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수구독재가 아니면 무엇인가. 미국 민주당은 입으로는 중산층을 대변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중산층의 진보적 정치세력화를 차단하고 중산층을 부유층과 끊임없이 타협하게 만드는 부유층 중심의 수구정치를 영구히 고착시켰다. 

미국식 양당제를 이 땅에 도입하겠다는 문재인 후보의 말은, 민주통합당이 통합진보당을 멀리하고 새누리당과 타협하여 정권을 주거니 받거니 하겠다는 뜻일 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서민을 대변하는 통합진보당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겠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아니나 다를까,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문재인 후보는 통합진보당과의 연대문제에 대해 분명한 선을 그었다. 그는 “통합진보당도 역시 혁신을 계속해서 국민들로부터 신뢰받는 그런 정당이 된다면 연대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그런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원래 통합진보당의 분당사태와 그 당에 대한 종북논란은 대중적 신뢰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당 내부의 기회주의자들이 경선부정을 왜곡과장하여 일으킨 분당소동이며, 수구세력이 연합하여 일으킨 종북논란은 그 당을 고립와해시키려는 모략난동이었는데도, 문재인 후보는 무슨 ‘국민의 신뢰’라는 엉뚱한 소리를 꺼내놓았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율 하락은 기회주의자들의 분당소동과 수구세력의 모략난동이 가져온 일시적인 현상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것이 한미동맹 해체, 주한미국군 철군, 연방제 통일을 주장하는 통합진보당이다. 그래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통합진보당이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장성하는 것을 싫어하고, 올해 대선에서 민주통합당이 통합진보당과 정치적으로 연대하는 것도 싫어하였다. 

지지율이 10%도 넘지 못하는 약체정당인 통합진보당에게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무슨 관심이나 두겠냐고 쉽게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생각은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해 무지한 것이다. 미국은 자기들의 ‘사활적 안보이익’이 걸려있는 나라에서 활동하는 반미성향의 개별인사들과 사회단체들까지 감시하고 있는 판이므로, 집권을 목표로 결성된 반미성향 정당에 대해서는 감시활동 정도가 아니라 고립시키고 와해시키는 비밀공작까지도 벌이는 것이다. 

이를테면, 진보당이 창당되자마자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교수형에 처하고, 진보당을 강제해산시킨 사건에 미국 정보기관이 깊숙이 개입하였다는 내막이 이미 세상에 드러난 바 있다. 지난 시기 미국은 진보당이 이승만의 북진통일을 반대하고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그처럼 악랄하게 탄압하였는데, 오늘 통합진보당은 한미동맹 해체, 주한미국군 철군, 연방제 통일을 주장하고 있으니 미국이 그런 정당을 방치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잘라 말하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와 통합진보당은 적대관계에 놓여있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을 적대하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시각으로 보면, 지난 4월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이 통합진보당과 야권연대를 실현하고, 그 여세를 몰아 12월 대선에서도 야권연대를 실현할 것처럼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극도로 혐오할 만한 사태였다. 특히 총선의 야권연대가 통합진보당이 주도하는 방식으로 실현되었으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대선의 야권연대도 통합진보당이 주도하는 방식으로 실현될 것으로 예상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총선 직후 폭발한 통합진보당의 분당사태와 수구세력의 종북모략으로 대선 야권연대 가능성에 대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우려는 말끔히 해소되었다. 

문재인 후보가 들고 나온 미국식 양당제 도입이 만일 차기 정권에서 실현되면, 통합진보당이 주도하는 야권연대전략은 폐기될 것이며, 정치권에서 통합진보당의 정치적 고립은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민주통합당과 새누리당에게 요구하는 한미동맹 강화는 바로 그런 미국식 양당제 도입으로 실현되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이명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군사부문에서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하여 대북전쟁위험을 고조시켜왔다면, 문재인 후보와 민주통합당은 정치부문에서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하여 한미동맹 폐기, 주한미국군 철군, 연방제 통일을 주장하는 진보정당을 고립시키려는 것이다. 


‘핵절벽’에 떠밀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묘책’을 찾을 수 있을까? 

이 땅의 정치평론가들이 제18대 대선국면을 분석한 내용을 읽어보면, 그들이 한반도 정세변화에 너무 무지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그들은 한반도 정세변화와 제18대 대선이 마치 무관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들의 시야에는 유권자의 지지율 변화밖에 보이지 않는다. 

유권자들이 직접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므로, 유권자의 지지율 변화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것은 대선국면에서 상수가 아니라 변수다. 왜냐하면, 한반도 정세변화가 유권자들의 심리를 변화시키고 지지율을 바꿔놓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대선국면에서 한반도 정세변화가 상수로 된다는 말은, 북미관계 변화가 한반도 정세를 변화시키고, 그렇게 변화된 정세가 대선국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뜻인 것이다. 

북미관계, 한미관계, 남북관계 중에서 북미관계가 한반도 정세를 변화시킨다고 보는 까닭은, 한미관계는 한미동맹으로 고착된 현상유지에 집착하기 때문이고, 남북관계는 독자적으로 변화되지 못하고 북미관계의 변화에 따라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북미관계에서 대선국면으로 이어지는 변화현상을 단순도식으로 표시하면, 북미관계 변화→한반도 정세변화→대선국면 변화가 순차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올해 북미관계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올해 북미관계에서 일어난 변화의 특징은 눈에 띄지 않게 조용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데 있다. 폭풍 전야에 숨 막히는 정적이 밀려오는 것처럼, 올해 북미관계에서 일어난 조용한 변화는 내년부터 한반도 정세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것임을 예고해주는 강한 신호를 발신하고 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8.25 경축연설과 오바마 대통령의 두 차례 대북밀사파견이 바로 그러한 조용한 변화가 북미관계에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의 자존심을 접고 적국에 두 차례나 밀사를 파견한 굴욕외교는,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이 마비상태에 빠져들고 있음을 말해준다. 원래 적대관계에 있는 나라에 밀사를 보내는 것은, 적국에 화친을 구걸하는 굴욕외교가 아닌가. 물론 미국은 대북밀사를 두 차례나 파견하여 대북적대정책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북에 전하면서도, 여전히 대북전쟁연습을 강행하면서 북을 자극하는 모순된 행동을 보였다. 대북적대정책 포기는 곧 북에 대한 정치적 굴복이므로, 미국의 그런 모순된 행동은 정치적 굴복을 정신적으로, 정책적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복잡한 심리상태를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복잡한 심리상태에서 모순된 행동을 취하고 있었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게 강력한 타격을 가한 사변이 바로 김정은 제1위원장의 8.25 경축연설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8.25 경축연설에서 조국통일대전 의지를 밝힘으로써 미국이 북의 정권을 폭동과 내란으로 무너뜨리려고 획책하는 ‘작전계획 5029’를 무력화시켰고, 대북관계에서 밀사파견과 전쟁연습이 혼재된 모순행동을 보이는 미국을 ‘핵절벽’으로 떠밀어 놓고 평화협정 체결과 조국통일전쟁 가운데 어느 한 쪽을 택하라는 최후통첩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보낸 것이다. 

그런 까닭에, 8.25 경축연설 이후의 북미관계에서는 지난 시기 미국이 시간만 질질 끌어온 6자회담이나 북미 양자회담 따위는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되었다. 이제 북미관계에 남아있는 가능성은 평화협정 체결이 아니면 조국통일대전 뿐이다. 

그래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걱정과 고심이 깊어졌다. 그들로서는 평화협정 체결을 택하기도 힘들거니와, 조국통일대전은 그들이 생각하기조차 싫은 북미 핵전쟁에 의한 미국의 멸망이다. 그들이 평화협정 체결을 택하기 싫어하는 까닭은, 그것이 미국의 자존심을 버리고 북의 요구를 따르는 정치적 굴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김정은 제1위원장의 8.25 경축연설 이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북미관계에서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 그들은 한반도에서 미국의 안보이익에 손실이 발생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면서, 8.25 경축연설 이후 북미관계에 조성된 위기에서 벗어나는 ‘묘책’을 찾으려고 애를 태웠을 것이다. 그들은 과연 어떤 ‘묘책’을 찾아냈을까? 

6자회담도 아니고 북미 양자회담도 아닌, 전혀 다른 형태의 회담으로 북미관계에 조성된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할 것으로 보인다.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혀 다른 형태의 회담이란 다른 게 아니라 한반도 평화회담이다. 8.25 경축연설 이후 ‘핵절벽’으로 떠밀려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가 바로 한반도 평화회담이다. 왜 그런가? 한반도 평화회담이 열리면, 평화협정을 체결하라는 북의 요구를 상당부분 충족시키는 것이며, 북의 조국통일대전 가능성을 상당부분 해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권 2기에 들어선 오바마 정부가 한반도 평화회담에 나서는 경우에도, 북이 요구하는 평화협정 체결까지는 절대로 가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자기들의 임기 5년 동안 한반도 평화회담을 계속하면서 위기관리에만 열중하려고 할 것이다. 

한반도 평화회담이 열리는 경우, 미국이 자기들의 위기관리에만 집착하면서 또 다시 시간을 질질 끌 수 있을지 아니면 북이 미국을 평화협정 조인식장으로 끌어낼 수 있을지는 지금 속단하기 힘들지만, 어째든 2013년 1월 20일 오바마 정부 2기가 시작되면 한반도 평화회담이 열리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2013년에 집권 2기를 맞는 오바마 정부와 2013년에 출범할 남측 정부는 한반도 평화회담이라는 정세격변을 맞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북미관계 변화→한반도 정세변화로 이어지는 2013년 이후의 시나리오 독해법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간택대상 교체설 

한반도 평화회담 개최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낯선 정치현안이 아니다. 2005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에서 채택된 9.19 공동성명에 한반도 평화회담 개최문제가 들어있고, 2007년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에서 채택된 10.4 선언에는 한반도 평화회담 개최문제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었다.

특히 10.4 선언에 명시된 한반도 평화회담 개최문제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10.4 선언은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명한 역사적인 합의인데, 참여정부의 흔적 지우기에 광분한 이명박 정부는 10.4 선언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려고 날뛰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10.4 선언을 지워버리려고 아무리 날뛰었어도 그 선언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 선언을 합의한 일방인 북이 그 선언의 이행을 강하게 요구해왔을 뿐 아니라, 민주통합당도 그 선언의 이행을 이명박 정부에게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제18대 대선에 출마한 문재인 후보는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10.4 선언을 이행하겠노라고 말하면서, 평화협정 체결 가능성에 대해서도 스쳐지나가듯이 언급하였다. 반면에 10.4 선언을 지워버리려는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에게는 당연히 그 선언을 이행하려는 의사도 자격도 없다. 

이제 결론을 말해야 할 차례다. 위에서 논한 것처럼 2013년 이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한반도 평화회담에 나설 수밖에 없는 곤혹스러운 처지에 있다면, 제18대 대선에서 어느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 한반도 평화회담을 생각하는 미국에게 유리할까? 

이런 상황에서 만일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면, 한반도 평화회담 개최문제를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하게 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평화회담 반대의사를 눌러야 하는 고충을 겪어야 할 것이다. 이전 시기 부쉬 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한반도 평화회담 요구를 눌러버려야 하는 고충을 감수하였다면, 2013년 이후에는 오바마 정부가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평화회담 반대의사를 눌러버려야 할 고충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세변화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제18대 대선에서 10.4 선언을 이행할 의사를 지닌 후보를 간택하였고, 정권교체를 위한 비밀공작을 벌이고 있다고 보는 분석을 강하게 뒷받침해준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8.25 경축연설 이전에는 박근혜 후보를 간택하였지만, 그 이후에 전개된 정세변화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가면서 간택대상을 문재인 후보로 교체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간택대상이 교체되었다면, 그에 걸맞게 대선개입공작 방향도 당연히 바뀌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재인 후보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국면이 제거되고 그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국면이 조성되는 어떤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어야 간택대상 교체설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물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간택대상 교체설을 사실로 입증할 객관적 근거를 이 글에서 제시하기는 힘들다. 백악관의 극비사항을 외부에서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지난 11월 말 이후 대선국면에서 갑자기 나타난 극적인 변화현상을 추적하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간택대상 교체설이 자의적인 상상화가 아니라는 점을 직감할 수 있다. 

이 글을 집필하고 있는 2012년 12월 9일 현재, 문재인 후보와 박근혜 후보의 지지율 조사결과를 보면 오차범위 안에서 접전을 벌이는 중이다. 제18대 대선국면에서 줄곧 지지율 격차로 열세를 면치 못하던 문재인 후보가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박근혜 후보의 지지율을 따라잡으면서 이제는 그녀의 지지율을 넘어서려는 조짐까지 보이고 있음을 간파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며칠 지나면, 문재인 후보는 오차범위 안에서 벌어진 접전상황에서 벗어나 박근혜 후보를 약간 앞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긴급히 교체한 대선개입공작이 실패하지 않는다면, 아슬아슬한 표차로 박근혜 후보를 누르고 이길 것으로 전망된다. 

문재인 후보의 당선전망에서 강조점은 아슬아슬한 표차로 이길 것이라는 데 찍힌다.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미국의 대선개입공작이 그 동안 상당히 추진된 대선국면 막판에 와서, 간택대상이 극적으로 교체되는 바람에 박근혜 후보에게 계속 쏠리는 지지율 관성력을 대선개입공작으로 갑자기 이탈시키기 힘들기 때문에 그렇다. ‘촌철살인의 비밀병기’를 비껴든 ‘저격복병’으로 갑자기 나타나 박근혜 후보에게 맹공을 퍼붓는 이정희 후보가 선거일을 앞두고 전격사퇴하는 경우, 그녀가 공언한 것처럼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는 데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 분석, 전망한 대로 문재인 후보가 신승하여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경우라도, 문재인 정부는 참여정부의 실패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겪었던 것처럼, 보수적 정권교체에 어떤 환상을 갖는 것은 역사의 교훈을 망각한 어리석은 짓이다. 

물론 문재인 정부가 등장하는 경우, 10.4 선언 이행과 남북관계 개선에서는 이명박 정부와 달리 전향적 태도를 취하겠지만, 그것도 미국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고 수구세력의 반발과 저항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사회계급적 양극화로 망신창이가 되어버린 이 땅에서 노동자, 농민, 서민의 삶이 끝없이 피폐해지는 사회적 불행지수를 개선할 가능성은 보수적 정권교체 이후에도 예견하기 힘들다. 문재인 정부가 등장한다 해도, 그 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전철을 밟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미국이 이 땅을 지배하는 한, 보수적 정권교체는 정치권에서 일어나는 인맥교체일 뿐 민중과 민족이 바라는 사회정치적 변화는 아니다. 오직 진보적 정권교체만이 진정한 의미의 사회정치적 변화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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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6

진보적 정권교체의 길 열어놓으려는 어떤 여성전사의 모습

변혁과 진보 (103)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과학정치와 미신정치의 격돌에서 어느 쪽이 이길 것인가?
 
 
2012년 12월 4일 대선후보 토론회가 1시간 50분짜리 생방송으로 남측 전역과 해외동포사회에 방영되었다. 대선국면에 큰 영향을 미칠 이 토론회는 흥미진진하게 진행되었다. 출연한 세 대선후보들도 그 토론회의 중요성을 잘 알기 때문에, 사전에 각별히 준비했을 텐데, 준비정도와 진행상황이 꼭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다.
 
토론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로 진행하는 것이므로, 그 자리에서의 승패는 화술에서 결정되는 법이다. 토론회에 제기된 내용의 핵심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대처하는 사고의 순발력, 유권자 대중이 알아들 수 있게 설명하는 논리전개력, 대중심리에 파고들며 공감을 불러일으킬 적확한 용어를 쓰는 언어구사력 등이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요구되는 화술기법의 중요요소들이다.
그런 화술기법을 놓고 비교한다면, 이번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문재인 후보나 박근혜 후보는 이정희 후보를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였다고 평할 수 있다. 이정희 후보를 싫어하는 수구언론마저 이번 대선후보 토론회가 이정희 후보의 독무대였다고 평했을 정도니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 토론회를 텔레비전 영상을 통해 지켜본 수많은 시청자들은 평소에 잘 알지 못했던 또는 수구세력의 악랄한 종북모략공세 때문에 완전히 잘 못 알고 있었던 이정희 후보의 ‘똑 소리 나는’ 진면목을 목격하였을 것이다.
 
특히 자기 마음에 드는 대선후보를 아직 고르지 못한 부동층 유권자들은 구구절절 옳은 말만 골라서 속사포처럼 막힘없이 쏟아내는 이정희 후보의 모습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이에 기겁한 어떤 수구언론매체는 오는 12월 10일에 진행될 제2차 대선후보 토론회는 이정희 후보를 제외시키고 문재인-박근혜 양자구도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억지를 늘어놓았다.

이정희 후보에 비해, 문재인 후보는 화술기법이 상당히 뒤졌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는 조리 있고, 설득력 있게 설명해야 할 대목을 여러 차례 놓치고 우물우물 넘기는 실수를 하였다. 더욱이 대선후보 토론회에서는 음성조절도 매우 중요한데, 문재인 후보는 상대에게 안겨주는 듯한 음성이 아니라 입 안에서 웅얼거리는 듯한 음성으로 말하는 바람에 시청자들에게 좀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화술기법 측면에서 본다면, 이번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완패한 쪽은 박근혜 후보다. 그녀는 언어교정학원에 다니면서 화술기법을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측은한 생각마저 들 정도로 토론회 내내 참 답답하고 어눌한 모습을 보였다.

주목하는 것은, 대선후보 토론회의 화술기법이 단순히 말솜씨가 아니라는 점이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정치현안들에 관한 정보에 정통해야 하고, 각종 정치현안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정리한 대선후보라야 토론회에 나가서 조리 있고 설득력 있게 자기의 견해와 주장을 펼 수 있다.
 
이번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박근혜 후보가 답답하고 어눌한 말솜씨를 보인 것은, 그녀가 단순히 화술기법이 모자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고, 각종 정치현안들에 관한 정보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어서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하였다는 데 근본원인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진보정치는 과학정치이고, 수구정치는 미신정치이며, 중도정치는 우왕좌왕정치라는 사실이 이번 대선후보 토론회를 통해서도 명백히 드러났다. 이번 대선후보 토론회는 과학정치와 미신정치의 격돌이었고, 과학정치가 미신정치를 제압한 대결이었다.

진보정치가 곧 과학정치라는 말은 사회역사발전의 과학적 합법칙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힘쓰는 과학적 속성을 지닌 정치라는 뜻이고, 수구정치가 곧 미신정치라는 말은 자본주의시장경제와 한미동맹 따위를 우상처럼 섬기는 미신행위의 정치적 연장이라는 뜻이고, 중도정치가 곧 우왕좌왕정치라는 말은 ‘오른쪽’에 한 발을 딛고, ‘왼쪽’에도 한 발을 살짝 걸친 다음, 시류에 따라 줏대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정치라는 뜻이다.

이번 대선후보 토론회 관전평을 요약적으로 서술하면, 진보정치를 역설한 이정희 후보는 노동자, 농민, 서민의 정치적 요구와 희망을 설득력 있게 대변하였고, 통합의 정치를 강조한 문재인 후보는 수구적 유권자층을 너무 의식해서 그런지 ‘오른쪽’에 두 발을 딛고 서서 가끔 ‘왼쪽’을 기웃거리며 우왕좌왕하였고, ‘안보정치’를 주장한 박근혜 후보는 이정희 후보의 날카로운 집중공세에 당황망조하여 횡설수설하다가 끝났다.
 
 
대선후보 토론회를 계기로 전환될 대선구도
이번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제1야당 대선후보인 문재인이 대결의 정치를 청산하고 통합의 정치를 추구하겠다고 말한 것은 큰 실수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무슨 ‘여야협의’를 운운하며 수구집권여당에게 무슨 아량과 관용 따위를 보여주고 그들과 ‘상생의 기회’를 찾아야 할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대선후보 토론회야말로 민족자주와 대미예속 사이의 적대적 모순, 민중과 수구독재정권 사이의 적대적인 모순,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적대적인 모순을 낱낱이 파헤쳐 유권자 대중에게 폭로하면서 그 추악한 모순 덩어리로 존재하는 수구집권세력을 향해 단호한 ‘여론심판’을 내려야 할 정치격전장이 아닌가.
 
평소에 이 땅의 이른바 주류언론들이 수구집권세력의 하수인 나팔수로 자처하면서 대미예속적 수구독재를 적극 두둔하는 바람에, 이 땅의 대중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온갖 모순을 그런 정치격전장에서 폭로하지 않는다면 수구집권세력을 상대로 ‘혈투’를 벌이는 대선에서 무슨 수로 그 세력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 폭로전술은 대중의 공분을 불러일으켜 수구세력을 대중의 힘으로 제압할 가장 위력적인 정치무기다.

그런데 이번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문재인 후보가 보여준 모습은 그런 폭로전술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고, 따라서 유권자 대중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사실상 실패한 것이다. 그로써 문재인 후보에 대한 지지율은 이번 대선후보 토론회를 계기로 올라가기는커녕 더 떨어질 공산이 커졌다. 12월 19일의 ‘결전’을 눈앞에 둔 대선국면 막바지에서, 민주통합당으로서는 문재인 후보의 지지율 하락보다 더 심각한 위기요인은 없을 것이다.

원래 민주통합당의 사회계급적 기반은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에서 시류에 따라 우왕좌왕하는 유동적인 중산층이기 때문에, 평소에도 그 당은 자기들의 정치적 유동성을 통합이니 상생이니 하는 듣기 좋은 말로 곧잘 치장하지만, 수구집권세력에 맞선 정권탈환문제를 놓고 격전을 벌이는 대선국면에서는 정적들을 향해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고 정면대결을 해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민주통합당의 대선후보 토론회 전략은 대선국면의 격전현실에서 한 걸음 이탈하여 통합과 상생의 잠언을 어물어물 늘어놓으며 우왕좌왕하였으니 잘 못되었어도 한참 잘 못된 것이다. 며칠 뒤 다시 진행될 제2차 대선후보 토론회에서는 문재인 후보가 그런 전략적 오판을 접고, 박근혜 후보와 대립각을 세워 공세에 집중하는 전략으로 전환하기를 기대한다.

지난 민주노동당 시절에도 그 당의 대선후보가 대선후보 토론회 생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 이정희 후보처럼 노동자, 농민, 서민의 정치적 요구와 희망을 설득력 있게 대변하면서, 수구정당 대선후보를 벼랑끝으로 마구 몰아붙인 적은 없었다.
 
‘촌철살인’이라더니 이정희 후보의 토론회 발언이야말로 바로 그런 격이었다. 이정희 후보를 알지 못하고, 통합진보당에 무관심하던 수많은 부동층 유권자들은 그녀의 짜릿한 촌철살인 공세발언을 듣고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꽉 막혔던 속이 다 후련해지는 억압감정해소를 집단적으로 경험하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정희 후보의 대선후보 토론회 참가는 성공적이었다.

이정희 후보가 앞으로 두 차례 더 남은 대선후보 토론회에서도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짓눌러온 온갖 모순을 속이 시원하게 폭로하고, 수구독재 대명사로 등장한 박근혜 후보를 ‘촌철살인의 무기’로 맹타한다면, 그녀와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율은 예상을 깨고 크게 뛰어오를 것이다.

이정희 후보의 지지율 상승과 문재인 후보의 지지율 정체 또는 소폭 하락이 가시화되면, 그것은 ‘국민연대’를 중얼거리는 민주통합당이 안철수가 무슨 말을 해줄까 그의 입만 쳐다보고, 통합진보당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려는 우스꽝스러운 실책을 강타할 것이고, 통합진보당의 정치적 위상을 끌어올리면서 그 당을 조준한 종북모략소동을 무력화시킬 것이고, 민주통합당을 통합진보당과의 연대로 견인할 것이다. 대선후보 토론회가 영향을 미칠 새로운 대선국면이 기대된다.
 이번 대선에 통합진보당이 제3당으로 출전하여, 이정희라는 이름으로 대중의 인정과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폭넓은 정치적 공감대를 형성하였다는 것, 바로 이것이 그 당이 이번 기회에 확실히 틀어쥔 그야말로 천금 같은 수확물이다.
 
지난 시기 이 땅의 진보정당은 대중의 인정과 지지를 받는 정치적 인물을 내세우지 못한 까닭에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정치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채, 대선국면마다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고 찬바람 부는 선거현장에서 여기저기 헤매기를 얼마나 하였던가. 그런 정치적 공감대를 형성할 유력한 정치인 한 사람을 대중 앞에 내세우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인가?
 
어느 천재적 화가가 이 땅에 나타나 화필을 잡는다면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이정희 후보가 거둔 소중한 성과는 노동자, 농민, 서민의 정치적 요구와 희망을 절절하게 대변한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그 성과는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을 진보적 정권교체라는 첫 승리로 이끌어가는 전진의 길을 열어놓을 것이다.

이번 대선국면에서 온갖 악조건을 딛고 일어서서 어떻게 해서든지 진보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어놓으려는 이정희 후보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19세기 유럽 낭만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프랑스 화가 외젠 들라끄루아(Eugène Delacroix)가 1830년 7월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을 생생하게 그린 대표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세계적인 명작을 연상하게 된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그 명작에 나오는 여신은 어떤 모습인가? 불타는 노뜨르담 사원이 멀리 배경에 보이는데, 신발을 벗어던진 맨발로, 앞가슴을 풀어헤치고 혁명의 길에 뛰쳐나온 실로 강렬한 여성전사의 모습이다. 바람에 휘날리는 프랑스 혁명의 상징 삼색기를 오른 손에 잡고 허공 높이 치켜들었고, 긴 총검이 꽂힌 혁명의 총을 왼 손에 힘껏 움켜쥐고, 고개를 뒤로 돌려 그녀의 뒤를 따라 혁명의 길로 진격하는 각계각층 혁명군 대오를 바라보는 시선이 온몸 떨리는 전율적 미감을 안겨준다.

들라끄루아는 프랑스 혁명을 이끄는 힘을 왜 여성전사의 모습으로 형상화했을까? 피끓는 혁명의 진격대오 맨 앞에 여성전사를 내세운 것은, 들라끄루아가 낭만주의 화풍에 젖어있었던 당대 예술사조의 미학적 표현이었다고 논평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꼭 그렇게만 볼 게 아니다. 근육질 남성전사들이 적들과 맞서 격렬하게 싸우는 모습만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세계가 혁명의 길에 있다는 것, 그리고 혁명이 아름다움으로 빛나기에 위대하다는 것, 바로 그런 진실을 비록 비사실주의적 화법이지만 여성전사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들라끄루아가 183년 전에 그린 그 그림은, 남성전사가 아니라 여성전사를 혁명의 길 맨 앞에 그려 넣은 것으로 하여 세계적인 명작이 될 수 있었다.

여성전사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혁명의 미학을 담은 예술작품에 대해 말하자면, 멀리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까지 갈 필요도 없다. 눈 덮인 백두산정이 올려다 보이는 삼지연 못가에 뽀얀 물안개 피어오를 때, 오른 손에 잡은 혁명의 총으로 조국 땅을 짚고 배낭을 멘 몸을 굽혀 살포시 왼 손을 물가에 내밀며 잔잔한 물결에 닿을 듯 말 듯한 모습을 형상한 삼지연 대기념비의 항일혁명 여성전사 모습이 들라끄루아가 프랑스 혁명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의 세계와 상통하는 게 아닐까.

만일 들라끄루아 같은 어느 천재 화가가 이 땅에 나타나 화필을 잡는다면, 맨발로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의 길에 뛰쳐나온 이 땅의 여인들이 바람에 휘날리는 한반도 통일기를 쥔 오른 손을 허공 높이 치켜들고, 수구독재를 겨냥한 ‘촌철살인의 무기’를 왼 손에 힘껏 움켜쥐고, 고개를 뒤로 돌려 그녀들을 따라 진격하는 민중대오를 바라보는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화폭에 그릴 것이다. 그리고 그 멋진 그림 밑에는 ‘민중을 이끄는 자주의 여성전사들’이라는 제목을 써넣을지 모른다. (2012년 12월 4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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