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6

크로마이트작전과 월미도방어전 70주년

 [한호석의 개벽예감](411)

자주시보 2020년 09월 14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1950년 6월 19일 미국의 북침작전계획

2. ‘작전계획 크로마이트’에 담긴 네 가지 씨나리오

3. 맥아더의 극비작전계획 빼돌린 조선인민군 정찰병 

4. 75,000명 대 400명의 싸움

5. 월미도의 마지막 혈전

6. 금성-4 순항미사일과 익명의 탄도미사일

 

 

1. 1950년 6월 19일 미국의 북침작전계획 

 

1950년 6월 25일 38도선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고속기동전으로 한국군 방어선을 돌파한 조선인민군은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공격을 중지했다. 남북무력충돌은 조선인민군의 서울점령으로 3일 만에 종식되었다.  

 

그런데 남북무력충돌이 종식된 이튿날인 1950년 6월 29일부터 미국 원동군 소속 폭격기들이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와 폭격을 감행하면서 전쟁을 도발했다. 남북무력충돌은 사상자를 많이 내지 않고 3일 만에 종식되었는데, 미국의 전쟁도발로 조선은 새로운 전면전에 돌입해야 했다. 만일 미국이 무력침공을 감행하지 않았다면, 6.25전쟁은 3일 만에 끝났을 것이다. 

 

1950년 6월 당시 일본을 점령하고 있었던 미국 원동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원동사령부 산하 합동전략기획단에게 조선을 침공할 작전계획을 수립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맥아더는 3일 만에 끝난 6.25전쟁을 재발시키고 확전시킨 전쟁도발의 주범이다. 1950년 7월 4일 합동전략기획단은 자기들이 완성한, ‘블루하츠(Bluehearts)’라는 제목의 작전계획을 맥아더에게 보고했다. 그 작전계획에 따르면, 미국 해병대가 1950년 7월 22일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미8군은 남부전선에서 북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의문이 떠오른다. 1950년에는 컴퓨터도 없었는데, 합동전략기획단은 어떻게 그처럼 짧은 시간에 ‘작전계획 블루하츠’를 후닥닥 완성할 수 있었을까? 누구나 아는 것처럼, 작전계획을 완성하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개념계획을 작성한 다음, 세부적인 작전씨나리오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서로 연결시켜 작전계획을 완성하려면 몇 달이 걸린다. 그런데 합동전략기획단은 불과 5일 만에 작전계획을 완성했다. 졸속작업이었을까?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1940년대 말 일본 도꾜 치요다구 유라구초에 있는 미국 원동사령부 청사의 모습이다. 당시 일본은 미국의 점령지였으므로, 그 건물에서 일본을 지배하는 최고권력이 행사되었다. 이 석조건물은 1938년에 건립되었는데,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일본을 점령하고,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원동사령부 청사로사용했다. 태평양전쟁 이후 원동사령부의 공식명칭은 연합국 최고사령부였고, 더글러스 맥아더가 총사령관이었다. 그 건물에 맥아더의 집무실이 있었다. 1950년 6월25일 38도선에서 남북무력충돌이 일어나자, 맥아더는 특별기획참모단을 조직하고그들에게 조선을 침공할 작전계획을 수립하라고 명령했다. 남북무력충돌은 사상자를 많이 내지 않고 3일 만에 종식되었는데, 미국은 바다를 건너와 무력침공을 감행하면서 전쟁을 도발했다.  

 

몇 달 걸리는 작전계획수립을 5일 만에 완성한 이변의 내막은 미국 역사학자 스탠리 웨인트롭(Stanley Weintraub)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다. 2000년 미국에서 출판된 ‘맥아더의 전쟁: 코리아와 미국 영웅의 파멸(MacArthur's War: Korea and the Undoing of an American Hero)'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그는 미국 국방부가 6.25전쟁 직전에 ’SL-17‘이라는 제목의 작전계획을 마련해두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작전계획 SL-17'에 따르면, 38도선에서 일어난 남북무력충돌에서 패한 한국군이 남쪽으로 후퇴하여 부산방어선을 구축하면, 미국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북진한다는 것이다. 이 작전계획을 일정별로 정리하면, 미국군 1개 군단이 1950년 9월 30일까지 인천을 점령하고, 10월 15일까지 서울을 점령하고, 1951년 1월 31일까지 남포와 원산에 동시상륙하여 평양을 점령한 다음, 1951년 6월까지 38도선 이북 전역을 점령하는 것이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6일 전인 1950년 6월 19일, 미국 국방부는 이 작전계획을 승인했다.   

 

이처럼 미국 국방부가 6.25전쟁 직전에 작전계획을 완성해놓았기 때문에, 미국 원동사령부 산하 합동전략기획단은 6.25 전쟁 직후 맥아더의 명령을 받은 때로부터 5일 만에 ‘작전계획 SL-17'의 재판인 ‘작전계획 블루하츠’를 맥아더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그런데 1950년 7월 당시 조선인민군은 고속기동전을 벌이며 부산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고, 미국군은 참패를 거듭하며 낙동강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1950년 7월 3일 한강을 도하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는 7월 5일 오산전투에서 미국군 제24보병사단 선견대를 궤멸시켰고, 7월 14일부터 16일까지 금강을 도하했고, 7월 20일에는 미국군 제24보병사단을 궤멸시키고 대전을 점령했다. 

 

맥아더는 합동전략기획단이 자기에게 보고한 ‘작전계획 블루하츠’가 ‘작전계획 SL-17’의 재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작전계획 블루하츠’를 폐기하고 새로운 작전계획을 수립하라고 명령했다. 맥아더의 명령을 받은 합동전략기획단이 ‘크로마이트(Chromite)’라는 제목의 개념계획(conceptual plan)을 완성한 날은 1950년 7월 23일이다.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경상북도 포항으로 진격하고 있었던 1950년 8월 15일 맥아더는 개념계획을 작전계획으로 완성하기 위한 사업을 극비리에 추진할 것을 합동전략기획단에 명령했다. 그런 명령에 따라 개념계획을 작전계획으로 완성할 특별기획참모단(Special Planning Staff)이 조직되었다. 

 

 

2. ‘작전계획 크로마이트’에 담긴 네 가지 씨나리오

 

1950년 8월 23일 일본 도꾜에 있는 미국 원동사령부 청사에서 중요한 전략회의가 진행되었다. 맥아더가 소집한 전략회의에는 육군참모총장 육군 대장 조섭 콜린스(Joseph L. Collins), 원동군 참모장 육군 소장 에드워드 알몬드(Edward L. Almond), 해군참모총장 해군 대장 포레스트 셔먼(Forrest P. Sherman), 원동군 해군사령관 해군 중장 터너 조이(C. Turner Joy), 상륙전단사령관 해군 중장 제임스 도일(James H. Doyle), 제7함대사령관 해군 중장 아서 스트러블(Arthur D. Struble), 공군사령부 작전국장 공군 중장 아이드월 에드워드(Idwal H. Edward)가 참석했다. 맥아더는 합동전략기획단이 작성한 개념계획을 꺼내놓고 인천상륙전으로 6.25전쟁의 전세를 바꿔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고위급 군사지휘관들은 인천 앞바다의 수로가 함대가 들어가기에 비좁다는 점,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세계 최고 수준이므로 함선이 개펄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점, 인천항 해안에 화강석으로 쌓아올린 방조제가 있어서 상륙하기에 매우 불리하다는 점 등을 지적하면서 맥아더의 의견에 반대했다. 그런데도 맥아더는 고집을 부리며 45분 동안 그들을 설득하더니 이런 해괴한 말도 했다.

 

“나는 제2운명의 손길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는다. 만일 우리가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을지 모른다. 인천(상륙전)은 성공할 것이고, 100,000명의 목숨을 구할 것이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고, 나는 적들을 짓밟을 것이다.”

 

맥아더와 고위급 군사지휘관들이 인천상륙문제를 놓고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낙동강 전선에서는 조선인민군의 격렬한 공격을 받은 미국군 방어선이 무너질 위험에 빠졌다. 낙동강 방어전을 지휘하던 미8군사령관 육군 중장 월튼 워커(Walton H. Walker)는 맥아더에게 미국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얼마나 더 버틸지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했지만, 맥아더는 인천상륙으로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더욱이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에게 인천지역 이외에 다른 지역에 상륙하는 것을 검토해보라는 지시를 내렸는데도, 맥아더는 그런 지시를 따르지 않고 인천상륙을 고집했다.  

 

▲ <사진 2> 이 사진에 나타난 사람들은 왼쪽부터 미국 육군참모총장 육군 대장 조섭 콜린스, 미국 원동군 총사령관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미국 해군참모총장 해군 대장 포레스트 셔먼이다. 6.25전쟁이 지속되고 있었던 1950년 8월 23일 일본 도꾜에있는 미국 원동사령부 작전회의실에서 중요한 전략회의가 열렸다. 그 전략회의에는위의 사진에 나온 콜린스, 맥아더, 셔먼을 비롯하여 고위급 군사지휘관들이 참석했다. 맥아더는 그 자리에서 인천상륙전으로 6.25전쟁의 전세를 바꿔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고위급 군사지휘관들은 인천의 자연지리적 조건이 상륙에 불리하다고지적하면서 반대했지만, 맥아더는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특별기획참모단이 작성한 '작전계획 크로마이트'는 1950년 8월 28일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승인을 거쳐 당시 대통령 해리 트루먼의 최종승인을 받았다.  


1950년 9월 1일 맥아더는 인천상륙전의 공식명칭을 크로마이트작전(Operation Chromite)으로 정했다. 크로마이트라는 말은 황연(Chrome)원광석을 뜻한다. 맥아더의 특별기획참모단이 작성한 ‘작전계획 크로마이트’는 1950년 8월 28일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승인을 거쳐 당시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의 최종승인을 받았다. ‘작전계획 크로마이트’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작전씨나리오로 구성되었다.   

 

1) 100-A: 미국 해병대가 전라북도 군산에 상륙하여 금강계선에서 조선인민군을 공격하는 작전씨나리오.

2) 100-B: 미국 해병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여 북진하는 미국 육군과 합세하여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조선인민군을 공격하는 작전씨나리오.

3) 100-C: 미국 해병대가 인천에 상륙하였으나, 미국 육군이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지 못하는 경우 미국 해병대가 군산에 상륙하여 대전을 점령하는 작전씨나리오.

4) 100-D: 강릉-주문진에 상륙한 미국 해병대가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고 북진하는 미국 육군과 합세하여 조선인민군을 공격하는 작전씨나리오.   

 

 

3. 맥아더의 극비작전계획 빼돌린 조선인민군 정찰병 

 

맥아더가 인천상륙전 준비를 다그치던 1950년 8월 30일 평양에 있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무전실로 한 장의 무전통신문이 날아들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정보가 담겨있었다. 

 

“최고사령부 앞. 

미 극동사령부 비상련락회의에서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아군의 배후를 타격하고 압록강 계선까지 북진하기 위한 작전이 결정되였음. 

상륙개시날자는 9월 13일. 

상륙지점은 인천.”

 

맥아더가 극비 중의 극비라고 하면서 철저한 정보보안조치로 은폐하였던 인천상륙전 극비정보를 빼돌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에 보고한 사람은 당시 일본 도꾜에 있는 미국 원동사령부 비상련락회의에 침투한 조선인민군 정찰병이었다. 조선은 그로부터 67년이 지난 2017년 12월 5일 온라인매체 <조선의 오늘>에 실린 ‘특집 - 전쟁과 녀인’에서 6.25전쟁 중에 배출된 여성영웅 14명을 소개하면서 맥아더의 극비정보를 빼돌린 여성정찰병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그 여성정찰병의 이름은 로남교다. 특집방송에 따르면, 1950년 8월 30일 로남교가 무선통신으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에 보고한 것은 ‘작전계획 크로마이트’ 중에서 인천상륙전씨나리오인 ‘100-B’였다고 한다. 

 

특집방송에서는 평양에 있는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영웅의 묘비를 방송화면을 통해 보여주었는데, 네 줄로 새겨진 묘비명에 영웅이 걸어온 한생이 비껴있었다. 

 

로남교 동지

남조선혁명가, 공화국 영웅

1907년 3월 3일 생 

2006년 1월 25일 서거

 

이 짤막한 묘비명만 읽어보면, 6.25전쟁의 운명을 바꿔놓은 극비정보를 빼돌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에 보고하기까지 로남교 영웅이 걸어온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를 가늠하기 어렵다. 지난 날 김일성상 계관인 허문길 작가는 로남교의 영웅적 투쟁을 형상한 장편소설 ‘포성 없는 전구’를 창작했고, ‘눈보라 창작단’은 그녀의 영웅적 투쟁을 형상한 다부작 영화 ‘포성 없는 전구’를 2014년에 창작했다. 조선의 특집방송에서 해설자는 일본 도꾜에 있는 미국 원동사령부 비상련락회의에 침투한 로남교 영웅이 “사랑하는 자식을 멀리 떼어두고 피눈물을 삼키며 적후활동을 벌였다”고 하면서, “몇 글자 안 되는 그 무전문에서 그가 넘어야 했던 아슬아슬한 순간들, 뛰여난 지략과 용감성으로 헤쳐야 했던 나날들과 죽음의 고비들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고 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1950년 8월 30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전 극비정보를 평양에 있는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에 보고한 조선인민군 정찰병 로남교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그녀는 미국 원동사령부 비상련락회의에 침투하여 극적인 정찰활동을 벌였다. 그녀가 무전통신으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에 보고한 것은 맥아더의 '작전계획 크로마이트' 중에서 인천상륙전씨나리오인 '100-B'였다. 그런 공로로 로남교는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았다. 그녀의 극적인 정찰보고를 통해 '크로마이트작전'에 관한 정보를파악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는 미국군이 1950년 9월 13일 인천상륙전을 개시할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로남교 영웅의 극적인 정찰보고를 통해 ‘크로마이트작전’에 관한 정보를 파악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는 미국군이 1950년 9월 13일 인천상륙전을 개시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는 두 가지 해결하기 힘든 작전적 난제를 안고 있었다.  

 

첫째, 조선인민군 주력부대를 낙동강 전선에 집결시켜 부산으로 진격하는 마지막 고비를 넘어서고 있었던 결정적인 시기에 주력부대 일부를 차출하여 인천으로 급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주력부대 일부를 인천으로 급파하면, 미국군은 조선인민군의 공격이 약화된 틈을 타서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었고, 조선인민군 주력부대 일부가 인천으로 이동하는 중에 미국군의 공습을 받아 인명손실을 입을 위험도 있었다. 

 

둘째, 조선인민군 주력부대 일부가 인천으로 이동하여 방어선을 구축한다고 해도, 미국군은 계획을 바꿔 인천이 아닌 다른 지역에 기습적으로 상륙할 수 있었다. 만일 미국군이 인천상륙-서울점령계획을 포기하고 남포상륙-평양점령계획을 실행에 옮기면, 조선은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바로 이런 난제들이 가로놓였기 때문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는 미국군이 인천에 상륙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았으면서도 주력부대 일부를 인천에 증파할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바야흐로 결전의 시각은 다가오고 있었다. 

 

4. 75,000명 대 400명의 싸움

 

지도에서 월미도를 찾아보면, 그 섬을 중심으로 사방에 펼쳐진 묘한 지형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육지와 연결되었지만, 원래 월미도는 면적이 0.7㎢밖에 되지 않은 작은 섬이었다. 그 섬의 가운데에는 해발고가 108m인 월미산이 있다. 1950년 9월 당시 월미도에는 주민 600여 명이 살고 있었다. 월미도에서 마주보이는, 면적이 104㎢인 영종도는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다. 영종도에는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섰고, 영종대교와 인천대교가 영종도와 육지를 연결해주었지만, 1950년 9월에는 영종도와 월미도는 월미수로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다. 6.25전쟁 당시 미국군은 월미수로를 날치수로(Flying Fish Channel)라고 불렀다. 미국군이 인천을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면 반드시 월미수로를 통해 월미도에 상륙해야 한다. 그러므로 조선인민군에게 월미도는 인천과 서울을 방어하는 전략요충지였고, 미국군에게 그 섬은 인천과 서울을 점령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상륙지점이었다. 

 

미국과 한국에서는 인천상륙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쓰이지만, 그들의 상륙지점은 인천이 아니라 월미도였다. 조선에서는 인천방어전이 아니라 월미도방어전이라고 부른다. 이 글에서는 인천상륙전을 월미도상륙전으로 고쳐 부른다.   

 

미국 해군 제7함대사령관 아서 스트러블이 월미도상륙전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유럽의 노르망디상륙전에 지휘관으로 참전했고, 필리핀의 레이트상륙전에도 지휘관으로 참전한 경력이 있어서 ‘상륙전의 백전로장’으로 자처했다. 

 

그는 1950년 8월 18일과 8월 20일 인천 앞바다에 있는 덕적도와 영흥도에 정찰병들을 침투시켜 조선인민군의 해안방어태세를 파악했다. 그는 정찰보고를 통해 월미도에 소수의 조선인민군 방어대가 주둔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월미도상륙전에 참가한 제7합동타격단은 제77항모타격단, 제91해상봉쇄단, 제99해상정찰단, 제79전투비행단, 제90상륙공격단, 해상수송단, 한국군 해군부대로 편성되었다. 

 

제7합동타격단은 1950년 9월 4일부터 인천지역을 폭격하면서 동시에 군산지역과 남포지역도 함께 폭격했다. 월미도가 상륙지점이라는 정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군산과 남포도 함께 폭격한 것이다. 그들은 매일 같이 B-29 폭격기를 출격시켜 인천 중심부로부터 반경 50km 안에 있는 모든 대상물을 파괴했다. 

 

제7합동타격단은 월미도상륙전 직전인 1950년 9월 10일 항공모함에서 이함한 함재기 43대를 출격시켜 주민 600여명이 사는 월미도에 소이탄(napalm tank) 93발을 투하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국 해병대 여단장으로 월미도상륙전에 참전한 에드윈 씨몬즈(Edwin Simmons)는 2013년에 출판된, ‘해안벽을 너머(Over the Seawall)’라는 제목의 책에서 그날 소이탄 폭격으로 월미도에 있는 집들이 모두 완파되었다고 회고했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1950년 9월 초 미국군 항공정찰기가 촬영한 월미도 사진이다. 당시 월미도는 육지와 연결되지 않은 작은 섬이었다. 그 섬의 가운데에는 월미산이 있다. 월미도는 월미수로를 사이에 두고 영종도와 마주보고 있다. 6.25전쟁 중에 조선인민군에게 월미도는 인천과 서울을 방어하는 전략요충지였고, 미국군에게 그 섬은인천과 서울을 점령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상륙지점이었다. 1950년 9월 13일 미국제7합동타격단 75,000명과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 400명이 싸운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인민군 월미도 방어대에게는 물리력으로 싸울 수 없는 전투였고, 죽음을 각오한 정신력으로 싸워야 하는 혈전이었다.  

 

결전의 날, 월미도상륙전에 참가할 제7합동타격단의 총병력은 75,000명이었다. 그들의 무장력은 다음과 같다.  

 

항공모함, 순양함, 구축함, 상륙정, 상륙함, 보급함 - 261척 

함포, 견인포, 기관포 - 1,600문 

전차 - 500대 

함재기 - 500대

 

제7합동타격단의 상륙을 저지할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는 제918포병련대 일부병력, 제3보병대대 일부병력, 제226륙전대 일부병력을 합쳐 400명으로 편성되었다. 그들의 무장력은 다음과 같다.

 

76mm 견인포 - 5문

37mm 견인고사포 - 2문

37mm 박격포 - 소량

 

1950년 9월 13일 마침내 결전의 날은 왔다. 바다를 건너와 남의 땅을 침공하는 ‘미제침략군’ 제7합동타격단 75,000명과 조국의 작은 섬을 피로써 사수하는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 400명이 싸운 전투였다. 항공모함을 비롯한 방대한 규모의 최신식 무장장비로 중무장한 제7합동타격단 75,000명과 견인포 7문밖에 갖지 못한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 400명은 세계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피의 결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에게 그것은 물리력으로는 싸울 수 없는 전투였고, 죽음을 각오한 정신력으로 싸워야 하는 혈전이었다. 

 

1950년 9월 13일 오전 10시 10분, 전운이 감도는 월미수로에 순양함 4척과 구축함 6척으로 편성된 함대가 나타났다. 10척의 거함들은 40mm 기관포를 쏘아 월미수로의 부유기뢰를 하나씩 폭파하면서 서서히 월미도로 접근했다. 

 

오후 12시 20분, 순양함 4척은 월미도에서 11~16km 떨어진 먼 바다에서 기동을 멈췄고, 구축함 6척은 월미도에서 730m 떨어진 해상까지 바짝 접근했다. 그러는 사이에 수평선 넘어 항공모함에서 이함한 함재기들이 까마귀떼처럼 하늘을 뒤덮으며 월미도 상공으로 몰려들어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이미 9월 4일부터 계속되어온 9일 동안의 연속폭격으로 월미도는 폐허로 변했건만, 함재기들은 폐허 위에 또 다시 폭탄을 투하했다.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가 보유한 37mm 견인고사포 2문은 포신을 85도 각도로 세워 공중으로 사격하는 방공무기인데, 유효사고도는 3km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월미도상륙전에 출격한 코쎄어(Corsair) 함재기의 비행고도는 10km 정도였다. 그러므로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는 37mm 견인고사포로 코쎄어 함재기를 격추할 수 없었다. 미국 해군 항공모함 한 척에는 날개가 접히는 코쎄어 함재기를 100대나 실을 수 있었는데, 그 함재기에는 20mm 기관포 4문이 장착되었고, 127mm 로켓탄 8발 또는 1,800kg의 폭탄을 탑재할 수 있었다.  

 

코쎄어 함재기의 집중폭격이 끝나자, 구축함 6척이 1시간 동안 월미도를 향해 127mm 함포를 집중사격했다. 폭격과 포격이 끝났을 때, 타래치는 포연과 불길 속에서 희미한 모습을 드러낸 월미도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제7합동타격단 지휘관들은 완전히 파괴된 월미도에서 어떤 생명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으로 여겼다. 포연과 불길 속에서 희미한 모습을 드러낸 월미도는 죽음의 침묵을 말해주는 듯했다.   

 

 

5. 월미도의 마지막 혈전

 

그런데 상상을 초월한 ‘기적’이 일어났다. 집중타격을 받고 전멸한 줄 알았던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의 75mm 견인포 5문이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불을 뿜었다. 수백 발의 포탄과 폭탄을 맞아 산산이 부서지고 불타버린 작은 섬에서 불사조처럼 살아남은 월미도방어대가 75mm 견인포를 지하진지 밖으로 끌어내 미국 구축함에게 기습타격을 시작한 것이다.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의 반격은 어떤 전과를 가져왔을까? 미국 역사학자 로이 애플먼(Roy E. Appleman)이 집필했고, 미국육군군사연구소가 1961년 워싱턴에서 초판을 발행한 ‘남으로는 낙동강, 북으로는 압록강(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그 책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가 포탄 9발을 명중시킨 2,200t급 미국 구축함 콜렛함(USS Collett)은 화력통제장치가 파괴되었고 승조원 5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또한 포탄 3발이 명중한 3,400t급 구축함 걸크함(USS Gurke)도 부분적으로 파손되었고, 승조원 3명이 부상당했으며, 2,200t급 구축함 스웬슨함(USS Swenson)은 포탄이 함체에 스치면서 승조원 1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했으며, 2,000t급 구축함 드 헤이븐함(USS De Haven)도 부분적으로 파손되었다고 한다.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가 사용한 76mm 견인포의 사거리는 13km다. 주목되는 것은, 그 견인포가 BR-350A 철갑탄을 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철갑탄을 쏘면 2km 밖에 있는 타격대상을 60도 각도로 직격하는 경우 43mm 두께의 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부대가 쏜 76mm 철갑탄이 명중했어도 거대한 미국 구축함은 부분적으로 파손되었을 뿐 격침되지는 않았다.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의 기습반격을 받고 놀란 미국 구축함들은 오후 1시 47분 견인포 사거리 밖으로 달아났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미국 순양함들은 오후 1시 52분부터 월미도를 향해 1시간 30분 동안 203mm 함포를 미친 듯이 쏘아댔고, 함포사격의 뒤를 이어 함재기들이 까마귀떼처럼 또 다시 날아와 월미도를 맹폭했다. 폭격이 끝나자 미국 순양함들은 오후 4시 10분부터 30분 동안 또 다시 함포를 쏘아댔고, 오후 4시 40분이 되어서야 수평선 너머로 물러갔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1950년 9월 15일 월미도 전투가 끝난 직후 촬영된 월미도의 모습이다. 상상을 초월한 격전이 3일 동안 벌어진 월미산에는 온전한 나무가 한 그루도남아있지 않았다. 그날 아침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는 76mm 견인포를 지하진지에서 끌어내 해안으로 몰려드는 미국 해병대 상륙정들을 향해 마지막 남은 철갑탄을쏘았다. 해안으로 밀려든 상륙정들에서는 미국 해병대원들이 긴 사다리를 해안방조제 곳곳에 걸쳐놓고 개미떼처럼 기어올랐다. 사흘 간의 격전에서 살아남은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 300여 명은 해안방조제를 기어오른 미국 해병대원 수 천 명에 맞서마지막 순간까지 혈전을 벌였다.  

 

이튿날인 1950년 9월 14일 오전 11시경 제7합동타격단 함대가 다시 월미수로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전날과 달리 순양함들이 먼저 월미도를 향해 203mm 함포를 집중사격했고, 그 다음에 함재기들이 날아와 월미도를 맹폭했고, 마지막으로 구축함들이 월미도를 향해 127mm 함포를 집중사격했다. 그런데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는 반격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철갑탄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15일은 월미도 전투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 오전 5시 함재기들이 날아와 월미도를 폭격했고, 순양함과 구축함들이 포격했고, 203mm 로켓포를 탑재한 군함 3척이 월미도 해안으로 접근하여 로켓포탄 1,000여 발을 난사했다. 오전 6시 25분, 월미도 해안에서 약 2km 떨어진 해상에 집결한 상륙정 17척과 상륙함 3척이 연막탄을 터뜨리며 일제히 해안으로 돌진했다.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부대는 76mm 견인포를 지하진지에서 끌어내 해안으로 몰려드는 상륙정들을 향해 마지막 남은 철갑탄을 쏘았다. 마지막 철갑탄은 벌떼처럼 몰려드는 상륙정 3척에 명중했다. 

 

이제 월미도방어대에게는 소총과 수류탄 같은 개인화기들, 그리고 37mm 박격포밖에 남지 않았다. 미국군 상륙정들은 해안방조제에 접근했다. 해병대원들은 꼭대기에 갈고리가 달린 긴 사다리를 해안방조제 곳곳에 걸쳐놓고 개미떼처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포연이 자욱한 월미도 해안에 운명의 시각이 왔다. 지난 사흘 동안 맥아더의 75,000명 대군을 상대로 벌인 격렬한 방어전에서 살아남은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 300여 명은 미국 해병대원 수 천 명을 상대로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미국 역사학자들이 서술한 많은 기록들은 월미도방어대의 마지막 전투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날 해병대원들과 함께 월미도에 상륙한, 미국의 저명한 여성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Marguerite Higgins)가 남긴 목격담이 월미도방어대의 마지막 전투를 증언해주는 유일한 역사기록이다. 

 

“우리가 사다리를 타고 수직에 가까운 해안방조제에 기어올랐을 때, 치명적인 함포사격과 폭격 속에서 살아남은 북조선 병사들이 해안 가까이에서 소총과 박격포로 쉴 새 없이 공격하며 우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히긴스의 목격담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 300여 명은 해안방조제를 기어오른 미국 해병대원 수 천 명에 맞서 마지막 순간까지 혈전을 벌였다. 미국측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 210여 명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전사했고, 나머지 136명은 부상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6. 금성-4 순항미사일과 익명의 탄도미사일

 

월미도가 피로 물들었던 그날로부터 세월은 흘러 70년이 지났다. 그 동안 월미도에서 혈전의 흔적은 사라졌고, 포탄화염이 작열했던 바닷가에는 유원지가 들어섰다. 

 

그러나 조선은 월미도 혈전을 잊지 않고 있다. 2014년 7월 23일과 7월 26일 <로동신문>은 “조국해방전쟁시기 47개 주요전투들”을 간략하게 해설한 기사를 실었는데, 거기에는 월미도방어전이 들어있다. 1982년 조선에서 첫 상영의 막을 올린 영화 ‘월미도’는 월미도방어대 400명이 제7합동타격단 75,000명과 맞서 혈전을 벌이며 최후를 맞는 이야기를 담은 명작인데, 요즈음도 그 영화는 가끔 <조선중앙텔레비죤> 전파를 타고 방영된다. 

 

월미도 혈전은 조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만이 아니다. 조선은 미국과 또 다시 결전을 벌여 그들을 기어이 꺾어버릴 강한 힘을 키워왔다. 월미도방어전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강한 힘이다. 70년 전 조선인민군에게는 눈앞의 적함을 격침시키지 못한 72mm 견인포와 철갑탄밖에 없었지만, 70년이 지난 오늘에는 수평선 너머 보이지 않는 적함을 격침시킬 타격력이 있다. 금성이라고 불리는 순항미사일이다. 

 

조선인민군은 금성-1 지대함순항미사일, 금성-2 공대함순항미사일, 금성-3 함대함순항미사일, 금성-4 지대함순항미사일을 해안지대 지하기지들 안에 대량으로 실전배치했다. 2017년 6월 8일 강원도 원산 인근 해안에서 동북방향으로 시험발사된 금성-4 지대함순항미사일은 레이더망을 피하여 낮은 고도로 200km를 날아가더니 표적에 가까운 상공에 이르러 공중에서 1~2차례 선회비행을 하고 아주 작은 표적에 명중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고도화된 정밀타격력이다. 이런 적아식별능력과 선회비행능력은 섬 뒤쪽에 숨은 적함까지 쫒아가 타격한다는 뜻이다. 금성-4 지대함순항미사일은 2020년 4월 14일과 7월 4일에도 시험발사되었다.  

 

그런데 미국이 자랑하는 100,000t급 핵추진항공모함은 함체길이가 332m인 거함이므로, 금성 계렬 순항미사일로는 격침하지 못한다. 조선인민군의 항모격침미사일은 따로 있다.

 

2017년 4월 15일 평양에서 진행된 군사행진 중에 세계 군사전문가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특이한 모양의 탄도미사일이 등장했다. 조선은 그 탄도미사일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미국은 ‘KN-18’이라는 자의적 명칭으로 부른다.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2017년 5월 2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현지지도로 진행된 시험발사에 다시 등장했다. 비행거리가 450km이었으므로, 실제 사거리는 500km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다음과 같은 절묘한 능력을 지녔다고 한다. <사진 6>

 

▲ <사진 6> 이 사진은 2017년 4월 15일 평양에서 진행된 군사행진에 등장한 특이한 모양의 탄도미사일이다. 이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2017년 5월 2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현지지도로 진행된 시험발사에 다시 등장했다.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초정밀타격력을 지난 항모타격미사일이며, 저위력전술핵탄두를 장착한 항모타격미사일이며,500km 밖에 있는 거대한 핵추진항공모함을 단 한 방에 격침시킬 수 있는 고체연료탄도미사일이다. 70년 전 월미도에서 견인포와 철갑탄을 쏘며 혈전을 벌였던 조선인민군은 70년이 지난 오늘 저위력전술핵탄두를 장착한 항모타격미사일을 보유했다.  

 

1) “적함선을 비롯한 해상과 지상의 임의의 바늘귀 같은 개별적 목표들을 정밀타격할 수 있는 정밀조종유도체계가 도입되었다. 중간비행구간에서 소형 열분사발동기에 의한 속도교정 및 자세안정화계통의 정확성이 재확증되였고, 보다 정밀화된 말기유도체계에 의한 재돌입구간에서의 초정밀유도정확성이 확증되였다.” 그리고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예정목표점을 7m의 편차로 정확히 명중하였다.” 

 

(해설 -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대기권을 벗어나 120km 고도에서 중간비행을 하는 동안, 미사일 탄체에 장착된 여러 개의 소형 열분사발동기로 비행속도와 비행방향을 조절했다. 또한 대기권 밖에서 대기권 안으로 재돌입할 때, 말기유도장치로 비행방향을 조절했다. 그리하여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450km 밖에 있는 작은 해상표적을 7m의 편차로 맞추는 초정밀타격능력을 과시했다.)

 

2) 시험발사에서는 “조종전투부의 말기유도단계까지 세밀한 원격관측”을 할 수 있었다. 

(해설 -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대기권 밖 120km 고도에서 해상표적을 향해 극초음속으로 낙하돌진비행을 했는데, 조선국방과학원 과학자들은 낙하돌진비행을 원격관측했다. 이것은 450km 밖에 있는 해상표적 인근 상공에 무인전략정찰기를 날려보내 원격관측을 했다는 뜻이다. 450km 밖에 있는 작은 해상표적은 레이더로 포착할 수 없으므로, 무인전략정찰기를 날려 보내야 포착할 수 있다. 이로써 익명의 탄도미사일과 무인전략정찰기가 연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인민군이 운용하는 방현-5 무인전략정찰기는 시속 200km의 속도로 10시간 동안 비행하는 스텔스무인전략정찰기다. 이런 스텔스무인전략정찰기를 날려 보내 원격관측을 하지 않으면, 익명의 탄도미사일로 450km 밖에 있는 작은 표적을 맞추기는커녕 포착할 수도 없다. 조선은 2016년에 스텔스무인전략정찰기를 개발했고, 2017년에 그것과 연동되는 익명의 탄도미사일을 개발했다.)

 

3) “발사 전 준비공정이 고도로 자동화되여 발사시간을 훨씬 단축하도록 체계가 완성”되었다. 

(해설 - 발사준비공정이 고도로 자동화되었다는 말은 고체연료를 사용했다는 뜻이다.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탄도미사일은 액체연료를 주입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발사준비시간이 대폭 단축된다.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탄도미사일이다.)

 

4)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무한궤도식 자행발사대에 탑재되었다. 

(해설 - 무한궤도식 자행발사대는 차륜식 자행발사대와 달리 길이 없는 산악지대로 들어갈 수 있다. 미국의 위성감시는 도로망을 따라 진행되므로, 익명의 탄도미사일을 탑재한 무한궤도식 자행발사대가 도로를 멀리 벗어나 산악지대로 들어가면 미국의 위성감시망은 ‘먹통’이 된다. 또한 무한궤도식 자행발사대는 모래사장에서 익명의 탄도미사일을 쏠 수 있다. 차륜식 자행발사대가 모래사장에 들어가면 차체 중량으로 발사대가 기울어져 미사일을 쏠 수 없지만, 무한궤도식 자행발사대는 모래사장에서도 탄도미사일을 쏠 수 있다.)  

 

2018년 2월 12일 미국의 안보전문지 <내셔널 인터레스트(National Interest)>는 2017년 7월 중국에서 발행된 해군전문지에 실린 분석기사를 인용하면서, 2016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화성-9 탄도미사일이 적함을 정밀타격하기 위한 무기로 생산되었는데, 이 탄도미사일은 중국의 둥펑(東風)-21D처럼 고도화된 정밀타격력을 지닌 탄도미사일이며, 미사일방어망을 뚫고 들어가 항공모함을 격침시킬 수 있다고 해설했다. 그런데 그 분석기사의 필자는 미국이 'KN-17'이라고 부르는 탄도미사일, 다시 말해서 조선에서 2017년 5월 29일에 시험발사된 익명의 탄도미사일을 화성-9로 착각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익명의 탄도미사일이 중국의 둥펑-21D처럼 초정밀타격력을 지닌 항모타격미사일이며, 저위력전술핵탄두를 장착한 항모타격미사일이며,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탄도미사일이라는 사실이다. 저위력전술핵탄두를 장착한 조선의 항모타격미사일은 500km 밖에 있는 핵추진항공모함을 단 한 방에 격침시킬 수 있다.

 

70년 전 월미도에서 사거리가 13km밖에 되지 않는 견인포로 철갑탄을 쏘며 혈전을 벌였던 조선인민군은 70년이 지난 오늘 사거리가 500km인 항모타격미사일에 저위력전술핵탄두를 장착했다. 그런 엄청난 위력 앞에서 미국의 핵추진항공모함은 무용지물이다.

2020/09/09

미국이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을 결성하기 전에

 [한호석의 개벽예감](410)

자주시보 2020년 09월 07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서훈-양제츠 회담과 에스퍼-고노 회담

2. 앤더슨공군기지에서 오간 밀담

3. 황후의 능묘에 남긴 트럼프의 발자국

4. 미국의 군사동맹결성과 중국의 반격

5. 미증유의 재난을 겪는 한국

 

 

1. 서훈-양제츠 회담과 에스퍼-고노 회담

 

2020년 8월 22일 양제츠(楊潔篪)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외교담당위원이 부산에 있는 웨스틴조선호텔에 도착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외교책사로 알려진 양제츠 정치국원은 2018년 3월 29일 서울에 있는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정의용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회담한 이후 두 번째로 방한한 것이다. 양제츠 정치국원은 2018년 3월 29일에 시진핑 주석의 특사로 방한했었으므로, 2020년 8월 22일에도 시진핑 주석의 특사로 방한했던 것이 분명하다. 

 

중국 국가주석은 특사를 아무 때나 파견하는 게 아니다. 중국의 국가이익에 직결된 중대현안이 제기되었을 때 특사를 파견한다. 2018년 3월 당시 베이징 조중정상회담,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이 연속적으로 성사되면서 일어난 정세격변에 대처하기 위해 시진핑 주석은 양제츠 특사를 서울에 파견했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2020년 8월 22일에 시진핑 주석이 양제츠 특사를 부산에 파견한 목적도 최근에 일어나기 시작한 정세격변에 대처하려는데 있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그런데 양제츠 특사의 부산방문에서 이례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이를테면, 2018년 3월 29일 양제츠 정치국원은 자신이 시진핑 주석의 특사로 서울을 방문하였다고 밝혔었는데, 2020년 8월 22일에는 시진핑 주석의 특사로 부산을 방문했으면서도 자신이 특사로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또한 2018년 3월 29일 정의용-양제츠 회담은 서울에서 진행되었는데, 2020년 8월 22일 서훈-양제츠 회담은 부산에서 진행되었다.  

 

그런 이례적인 현상이 일어난 까닭은 청와대가 중국 국가주석의 특사방문과 관련하여 미국의 눈치를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중국에게 무력도발과 압박공세를 가하고 있는 오늘의 긴장된 상황에서 만일 양제츠 특사가 청와대를 방문하여 문재인 대통령을 접견하고, 서훈 국가안보실장을 만나 청와대에서 회담을 진행했다면, 그것은 미국을 자극하는 행동으로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청와대는 서훈-양제츠 회담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부산에서 진행하여 양제츠 특사가 청와대를 방문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청와대를 방문하지 못한 양제츠 특사는 자신이 특사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외교관례에서 벗어난 특사방문이었다. 

 

미국이 중국에게 무력도발과 압박공세를 가하고 있는 긴장된 상황에서 중국 국가주석의 특사파견은 청와대로서는 전혀 반길 일이 아니었다. 양제츠 특사를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당시 청와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중국이 특사파견의사를 청와대에 알렸을 때, 청와대는 난색을 표명했다. 

 

그러나 청와대가 난색을 표명하면서 양제츠 특사를 외교관례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받았는데도 중국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특사파견을 강행했다. 특사를 파견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중대하고 시급한 문제가 한중관계에 제기된 것이 분명하다. 무슨 문제였을까?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2020년 8월 22일 부산에 있는 웨스틴조선호텔에서 회담을 진행한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양제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외교담당위원이 취재기자들과 회견하기 직전에 촬영한 사진이다. 양제츠 정치국원은 시진핑 중국국가주석의 특사로 방한하여 서훈 국가안보실장과 회담했다. 괌의 앤더슨공군기지에서 국방장관회담이 진행될 것이라는 정보를 파악한 중국은 양제츠 특사를 한국에 급파하여 정경두 국방장관이 앤더슨공군기지 국방장관회담에 참석하지 못하게 저지했다.  

 

2020년 8월 22일 부산에서 서훈-양제츠 회담이 진행되었을 때, 정세분석가들과 언론매체들은 양제츠 특사가 파견될 만큼 중대하고 시급한 문제가 한중관계에 제기되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했다. 정세분석가들과 언론매체들은 시진핑 주석이 자신의 방한일정을 합의하려고 양제츠 특사를 보낸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2020년 9월 2일 <중앙일보>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그 단독보도기사는 서훈-양제츠 회담이 진행된 날로부터 일주일 뒤에 일어난 특별한 사건과 관련된 사연을 담고 있다. 그 특별한 사건은 서훈-양제츠 회담과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막을 파헤쳐보면 뜻밖의 연결고리가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특별한 사건은, 2020년 8월 29일 마크 에스퍼(Mark T. Esper) 미국 국방장관과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방위상이 괌(Guam)에서 진행한 회담이다. 이전에도 미일국방장관회담은 열리곤 했지만, 2020년 8월 29일에 진행된 에스퍼-고노 회담이 특별한 사건으로 되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에스퍼-고노 회담이 워싱턴에 있는 미국 국방부 청사가 아니라 괌에 있는 앤더슨공군기지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앤더슨공군기지는 중국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무력도발거점이다. 미국 국방장관과 일본 방위상이 중국을 위협하는 무력도발거점에서 밀담을 나누었으니, 중국이 심한 자극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둘째, 위에서 언급한 <중앙일보> 단독보도에 따르면, 정경두 국방장관은 앤더슨공군기지에서 진행된 국방장관회담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 에스퍼 국방장관은 정경두 국방장관과 고노 방위상을 앤더슨공군기지로 불러 한미일 국방장관회담을 하려고 했었는데, 정경두 국방장관이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회담에 참석하지 않는 바람에 양자회담으로 진행되었다는 뜻이다. 미국과의 동맹을 신성시하는 한국 국방장관이 미국 국방장관이 소집한 회담에 참석하지 않았으니,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 이변이 일어난 까닭은 에스퍼-고노 회담이 앤더슨공군기지에서 진행되기 일주일 전인 2020년 8월 22일 부산에서 서훈-양제츠 회담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두 회담이 연결되었다는 내막은 다음과 같은 설명에서 밝혀진다.

 

2020년 8월 29일 에스퍼-고노 회담이 앤더슨공군기지에서 진행될 것이라는 예고가 일본 <교도통신>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바로 그날 8월 19일에 청와대는 8월 22일 부산에서 서훈-양제츠 회담이 진행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에스퍼-고노 회담의 일정과 서훈-양제츠 회담의 일정이 같은 날 세상에 알려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연처럼 보이는 그 현상을 파헤치면, 앤더슨공군기지에서 국방장관회담이 진행된다는 정보를 파악한 중국은 양제츠 특사를 급파하여 정경두 국방장관이 앤더슨공군기지 국방장관회담에 참석하지 못하게 저지했다는 내막이 드러난다. 

 

그런 내막의 흔적은 서훈-양제츠 회담이 진행된 날로부터 이틀 뒤인 2020년 8월 24일 싱하이밍(邢海明) 주한중국대사가 중국 언론매체 <차이나 데일리(China Daily)>에 중문과 영문으로 기고한 글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글에서 “차츰 고개를 드는 강권정치와 고립주의에 직면하여 중국과 한국은 유엔을 비롯한 다자체제에서 지속적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하면서, “어떤 풍랑에도 낚싯배에 끄떡없이 앉아 있겠다는 굳은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썼다. 이것은 한국이 미국의 강권정치, 고립주의와 결별하고 중국의 편에 서달라는 요구를 드러낸 것이다. 서훈-양제츠 회담에 배석했던 싱하이밍 대사가 회담 이틀 뒤에 위와 같은 글을 발표한 것은, 중국이 양제츠 특사를 급파하여 정경두 국방장관이 앤더슨공군기지 국방장관회담에 참석하지 못하게 저지하였음을 말해준다. 

 

 

2. 앤더슨공군기지에서 오간 밀담

 

궁금증이 생긴다. 2020년 8월 29일 정경두 국방장관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진행된 에스퍼-고노 회담에서 무슨 밀담이 오고간 것일까? 밀담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 법이지만, 미국 국방부가 발표한 언론보도문과 일본 언론매체들의 보도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 

 

1) 일본 <교도통신> 2020년 8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에스퍼-고노 회담 중에 에스퍼 국방장관은 “우리는 지역안전을 위협하는 중국의 무력행위를 단호하게 반대한다”고 말했고, 고노 방위상은 “일본과 미국은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일방적으로 무력을 사용하여 현재 상황을 바꾸려는 나라에 단호히 맞설 것”이라고 맞장구를 쳤다고 한다. 또한 미국 국방부가 발표한 언론보도문에 따르면, 에스퍼-고노 회담에서는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지역에 대한 공동의 전망에 관한 양측의 견해를 교환”했고,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그리고 인도-태평양지역과 전 세계에서 규칙에 근거한 질서(rules-based order)를 유지하는데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해설 - 이 발언내용은 미국과 일본이 힘을 합해 중국에 대한 무력도발과 압박공세를 더욱 증대하기로 합의하였음을 의미한다.) 

   

2) 미국 국방부가 발표한 언론보도문에 따르면, “(미국군과 일본자위대의) 상호작전능력을 지원하고 동맹의 역량을 강화하는 노력, 특히 통합적인 대공 및 미사일방어(Integrated Air and Missile Defense)와 정보-감시-정찰기능을 강화하는 노력을 계속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해설 - 이 발언내용은 미국과 일본이 중국에 대한 합동작전을 수행하는 대공방어체계, 미사일방어체계, 정보-감시-정찰체계를 강화하기로 합의하였음을 말해준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20년 8월 29일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과 고노 다로 일본방위상이 괌의 앤더슨공군기지에서 진행한 회담장면이다. 회담을 진행하기 직전, 에스퍼 국방장관은 고노 방위상을 미국 해병대가 주둔하게 될 새로운 군사기지인 캠프블라즈로 안내하여 함께 돌아보았다. 괌은 중국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미국의 군사도발거점이다. 그런 곳에서 미일국방장관회담이 진행되었으니, 중국이 자극을 받지않을 수 없다. 더욱이 에스퍼-고노 회담에서 주목되는 것은, 미국, 일본, 인디아, 오스트레일리아로 구성된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을 결성하는 준비사업이 미국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3) 미국 국방부가 발표한 언론보도문에 따르면, “안전한 정보통신체계의 중요성과 발전된 군사과학기술을 보호하기 위한 정보보안의 중요성에 대해 합의했다”고 한다.  

(해설 - 이 발언내용은 미국과 일본이 중국에 대한 무력도발에 사용되는 군사정보통신체계와 군사정보보안체계를 강화하기로 합의하였음을 말해준다.)

 

4) 미국 국방부가 발표한 언론보도문에 따르면, 에스퍼-고노 회담 중에 에스퍼 국방장관은 “홍콩에게 국가안전법을 강요하고, 대만에게 강압적이고 불안정한 행동을 취하는 베이징 당국의 조치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고, ”아세안(ASEAN) 성원국들, 인디아,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생각이 같은 다른 동반국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미국, 한국과 함께 3자협력을 강화하는 일본의 노력을 환영했다”고 한다.   

(해설 - 이 발언내용은 미국이 중국에 대한 무력도발과 압박공세를 확대하기 위해 인도-태평양지역에 새롭고, 포괄적인 군사동맹을 결성하는 준비사업을 추진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에스퍼-고노 회담에서 주목되는 것은, 미국, 일본, 인디아, 오스트레일리아로 구성된 인도-태평양지역의 새로운 군사동맹을 결성하는 준비사업이 미국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그런 준비사업을 추진하면서 가장 중시하는 인입대상은 인디아다.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는 대표적인 반중친미국가들이므로 미국의 요구를 따르지만, 인디아는 로씨야와 미국의 중간지점에 있다. 그래서 미국은 인디아를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에 끌어들이려고 애쓰는 것이다.  

 

 

3. 황후의 능묘에 남긴 트럼프의 발자국

 

인디아의 수도 뉴델리에서 남쪽으로 206km 떨어진 야무나 강변에는 상아빛 대리석이 눈부시게 빛나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있다. 1643년 모굴제국 황후의 능묘로 건립된 타지마할(Taj Mahal)이다. 2020년 2월 24일 인디아를 처음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은 타지마할에서 세계 각국 취재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멜라니아 영부인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2020년 2월 24일 트럼프 대통령의 인디아 방문은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인디아 방문과 다른 의미를 갖는다. 미국과 인디아의 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려는 백악관의 전략적 의도가 트럼프의 발걸음을 인디아로 이끌었던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인디아를 방문하기 전에 국무장관을 먼저 인디아에 보냈다. 2019년 6월 26일 뉴델리에 도착한 마익 팜페오(Mike R. Pompeo) 국무장관은 나렌드라 모디(Narendra Damodaras Modi) 총리를 접견한 다음, 수부라마냠 자이샨카(Subrahmanyam Jaishankar) 외무장관과 회담했다. 회담 직후 진행된 공동기자회견에서 자이샨카 외무장관은 “우리는 군사협력문제에 관해 토의했다. 이번 회담은 지난 10년이 넘는 기간 중에 가장 고무적인 회담이었다”고 자평했고, 팜페오 국무장관은 “미국과 인디아의 동반자관계는 새로운 높이에 이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군사협력을 확대했으며,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지역에 대한 공동의 전망을 뚜렷이 보았다”고 자평했다. 이런 발언을 들어보면, 미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가 참가는 기존 3자안보대화에 인디아가 동참하여 새로운 4자안보대화가 시작되리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2019년 9월 26일 뉴욕에서 미국, 일본, 인디아, 오스트레일리아 외무장관들이 참가한 가운데 인도-태평양 4자안보대화가 개최되었다. 

 

미국은 3자안보대화에 인디아를 끌어들여 4자안보대화를 성사시키면서 인디아와의 군사협력도 적극 추진했다. 2019년 12월 19일 워싱턴에서 미국과 인디아의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2+2 장관급 회담이 진행되었다. 미국-인디아 2+2 장관급 회담 제1차 회의는 2018년 9월 6일 뉴델리에서 진행되었으므로, 2019년 12월 19일 워싱턴에서 진행된 2+2 장관급 회담은 제2차 회의다. 제2차 회의에는 미국측에서 마익 팜페오 국무장관과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이 참석했고, 인디아측에서 라즈나드 씽(Rajnath Singh) 국방장관과 수부라마냠 자이샨카 외무장관이 참석했다. 그 회의에서 채택된 공동선언은 양측이 군사부문, 에너지부문, 환경부문에서 상호협력을 확대하기로 합의하였음을 보여주는데, 특히 군사부문에서 상호협력을 대폭 확대하기로 합의하였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2020년 2월 25일 인디아를 방문 중인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인디아의 수도 뉴델리에 있는 국빈관 하이드라바드에서 나렌드라 모디 인디아 총리와 공동기자회견을 마치고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모디 총리와악수를 하고 그를 끌어당겨 등을 다독이는 다정한 모습을 연출했고, 특이한 인사법에놀란 모디 총리는 어정쩡하게 팔을 뻗었다. 트럼프가 연출한 다정한 인사는 지금 미국이 인디아와의 군사협력을 급진전시키면서, 미국, 일본, 인디아, 오스트레일리아가 참가하는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을 결성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보여주었다.  

 

1) 이제까지는 해군의 상호협력만 추진했는데, 앞으로는 상호협력범위를 육군, 공군, 특수작전군으로 확대한다. 

2) 군수산업부문, 군사통신부문, 군사과학기술 및 무기수출부문, 항공우주부문에서 협력한다. 

3) 인디아군 연락장교를 미국군 중부사령부에 파견하고, 미국군 연락장교를 인디아양지역정보융합쎈터에 파견한다.

4) 말라바(MALABAR) 해군훈련의 수준을 높인다. 

(해설 - 말라바 해군훈련은 미국, 인디아,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싱가폴이 참가하는 연례군사훈련이다. 2019년도 말라바 해군훈련은 9월 26일부터 10월 4일까지 일본 근해에서 진행되었다.)

5) 호랑이 승리(Tiger Triumph) 3군합동상륙훈련을 새로운 군사협력의 본보기로 정착시킨다. 

(해설 - 호랑이 승리 3군합동상륙훈련은 미국군과 인디아군이 참가하는 연례군사훈련이다. 두 나라 군대는 2019년 9월 16일부터 20일까지 육해공군 및 해병대가 참가하는 제1차 호랑이 승리 3군합동상륙훈련을 인디아에서 실시했다.) 

6) 인디아 해군은 밀란(MILAN) 다국적해군훈련을 추진한다. 

(해설 - 밀란 다국적해군훈련은 인디아 해군이 주최하여 격년제로 진행되는 해군훈련이다. 2018년도 밀란 다국적해군훈련에는 인디아, 오스트레일리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미얀마, 싱가폴, 태국, 방글라데쉬, 쓰리랑카의 해군부대들이 참가했다. 2020년 3월 18일부터 20일까지 예정된 밀란 다국적해군훈련은 코로나바이러스의 세계적 대유행 때문에 연기되었다.)  

 

이처럼 미국과 인디아의 군사협력이 급진전되고 있었던 2020년 2월 24일에 트럼프 대통령이 인디아를 방문했으니 역대 미국 대통령의 인디아 방문과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2020년 2월 25일에 발표된 트럼프-모디 공동성명에 따르면, 미국과 인디아는 “두 나라의 긴밀한 동반관계가 자유롭고, 공개적이고, 포괄적이며, 평화롭고, 번영하는 인도-태평양지역에서 중요하다”고 인정하면서, 미국은 인디아의 주요방위동반국(Major Defense Partner) 지위를 재확인하여 미국산 무기를 판매하고 미국의 군사과학기술을 이전하는 데서 인디아를 우대하기로 했고, 그에 상응하여 인디아는 대당 가격이 4,300만 달러인 MH-60R 씨호크 해상작전헬기 24대와 대당 가격이 3,500만 달러인 AH-64F 아파치 헬기 6대를 미국에서 수입하기로 했다고 한다.  

 

 

4. 미국의 군사동맹결성과 중국의 반격

 

2020년 8월 6일 팜페오 국무장관과 자이샨카 외무장관은 화상통화를 통해 회담했다. 미국 국무부의 발표문에 따르면, 팜페오-자이샨카 회담에서는 미국, 일본, 인디아, 오스트레일리아가 참가하는 4자안보대화와 미국-인디아 2+2 장관급 회담 제3차 회의를 올해 안에 진행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지금 미국은 미국, 일본, 인디아, 오스트레일리아가 참가하는 인도-태평양 안보대화를 상설기구로 격상시켜 군사동맹을 결성하고, 더 나아가서 한국, 윁남, 브라질, 뉴질랜드, 캐나다 등을 끌어들인 다자군사동맹을 결성하려고 획책하고 있다. 2020년 8월 31일 스티브 비건(Stephen E. Biegun)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미국 민간단체가 주최한 화상토론회에서 “중국의 잠재적 도전”에 맞서기 위해 미국, 일본, 인디아, 오스트레일리아가 인도-태평양 안보대화에서 협력할 것이며, 앞으로 더 많은 나라들을 끌어들여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사한 다자안보협력체로 강화, 발전시키는 것이 미국의 전략적 목표라고 말했다.  

 

비건의 말마따나, 인도-태평양 안보대화가 안보협력체(군사동맹)으로 전환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앞으로 1~2년 안에 그렇게 될 것으로 예견된다. 

 

그런데 인도-태평양 안보대화를 군사동맹으로 전환하는 것은 중국에 대한 무력도발과 압박공세가 극대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이 결성되면, 미국은 중국과의 무력충돌을 상정한 전쟁연습을 더욱 광란적으로 벌일 것이며, 그로써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군사적 위험은 더욱 증대될 것이다. 

 

미국이 미국, 일본, 인디아, 오스트레일리아가 참가하는 군사동맹을 결성하여 중국에 대한 무력도발과 압박공세를 극대화하려는 여러 목적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대만을 중국에서 떼어내 분리독립시키려는 것이다. 미국에게 있어서 대만의 분리독립은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중국을 봉쇄하고 압박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된다. 이처럼 긴장된 상황에서 중국은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을 결성하려는 미국에게 반격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반격은 다음과 같이 예상된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2018년 중국인민해방군 해군 함대가 남중국해에 출동하여 항진하는 모습이다. 항공모함, 구축함, 잠수함, 보급함으로 편성된 강력한 함대다. 지금 미국은 중국에 대한 무력도발과 압박공세를 계속하고 있고, 중국은 그에 대항하여 무력시위와 군사훈련을 계속하고 있다. 그로써 무력충돌위험이 날로 고조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이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을 결성하여 대만을 분리독립시키기 전에 대만해방전쟁을 단행할 것이다. 중국이 대만해방전쟁에서 승리하면, 통일위업을 달성할 뿐 아니라, 미국의 인도-태평양지배전략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다.  

 

1) 중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에 아시아 나라들이 참가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외교활동에 주력할 것으로 예견된다. 하지만, 뉴질랜드는 2012년 6월 19일 미국과 군사협력을 추진하기 위한 ‘워싱턴선언’을 채택하였으므로 중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에 참가할 것이고, 미국의 전통적인 추종국인 캐나다도 중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에 참가할 것이다. 한국과 윁남은 중국과의 관계를 의식하여 시간을 끌면서 망설일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놓고 보면, 중국이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에 참가하는 것을 저지할 만한 대상은 브라질밖에 없다. 그래서 최근 중국은 브라질과의 외교관계와 경제협력관계에 공을 들이고 있다. 이를테면, 2019년 10월 15일 시진핑 주석은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M. Bolsonaro) 브라질 대통령을 베이징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진행했고, 2019년 11월 13일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보우소나루 대통령을 또 다시 만나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2) 중국은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을 결성하려는 미국의 책동에 맞서 로씨야와의 군사협력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 이를테면, 2019년 7월 23일 중국의 H-6 폭격기 2대와 로씨야의 TU-95 폭격기 2대가 동해 상공에서 합류하여 동중국해 상공까지 비행했는데, 이것은 중국 공군과 로씨야 공군이 사상 처음 진행한 합동비행훈련이었다. 또한 2019년 9월 16일부터 21일까지 로씨야가 주최한 ‘중부 2019’라는 명칭의 다국적군사훈련에 중국은 전투병력 1,600명, 군사장비 300종, 작전기 30대를 참가시켰다. 

 

3) 중국은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을 결성하려는 미국의 책동에 맞서 조선, 이란, 파키스탄과의 전략적 협력관계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4) 중국은 미국이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을 결성하여 대만을 분리독립시키기 전에 대만해방전쟁을 단행할 것이다. 중국이 대만해방전쟁에서 승리하면, 통일위업을 달성할 뿐 아니라, 미국의 인도-태평양지배전략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대만해방전쟁은 중국이 선택할 수 있고,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가장 중대하고 시급한 전략목표로 된다. 그래서 중국은 올해 2020년까지 대만해방전쟁준비를 완성하겠다고 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인도-태평양지역의 정세는 앞으로 1~2년 안에 중국이 대만해방전쟁을 단행하느냐 아니면 미국이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을 결성하느냐 하는 중대한 갈림길에 이르게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5. 미증유의 재난을 겪는 한국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에 참가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관심의 초점으로 떠오르는 대상은 한국이다. 미국에게 굴종해온 한국은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에 참가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지만, 중국이 극력 반대하는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에 참가하는 문제는 그리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은 미국과 중국의 격돌상황에 휘말려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다. 

 

만일 미국이 한국에게 주요군사장비의 부품을 공급하지 않고 수리 및 정비를 중지하면 한국군이 운용하는 미국산 무기체계들은 움직이지 않는 고철덩어리로 될 것이므로, 청와대는 미국에게 굴종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한편, 중국이 한국에게 경제보복을 단행하면, 그러지 않아도 코로나바이러스 재앙으로 파산위험에 빠진 한국경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므로, 청와대는 중국의 요구를 거부하기 힘들다. 한국에 대한 중국의 경제보복이 한국경제에 얼마나 치명적인가 하는 문제는 2016년 7월 8일 한국 국방부가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를 배치한다고 발표했을 때, 중국이 단행한 경제보복에서 입증되었다. <아시아경제> 2017년 3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중국의 경제보복으로 한국이 입은 연간 피해 200억 달러(22조4,000억 원)로 추산된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이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에 참가하는 문제는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한국에 배치하는 문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이므로, 한국이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에 참가하는 경우 중국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혹독한 경제보복을 가할 것이다.   

 

이처럼 미국과 중국의 격돌상황에 휘말려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는 한국은 대미관계에서 안보를 보장하고, 대중관계에서 경제를 발전시킨다고 하면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그런 위태로운 줄타기로 위험을 피할 수 없다. 

 

지금 한국은 미증유의 재난을 겪고 있다. 왜냐하면, 한국이 미국의 요구대로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에 참가하면 중국의 보복을 당해 한국경제가 붕괴할 것이고, 중국의 요구대로 그 군사동맹에 참가하지 않으면 미국의 군사협력중단으로 안보체제가 붕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붕괴도 치명적 재난이고, 안보붕괴도 치명적 재난이다.  

 

한미동맹이라는 족쇄에 결박당한 한국은 위태로운 줄타기로 시간을 좀 끌다가 결국 미국에게 굴종하여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에 참가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국은 상상을 초월한 경제보복으로 한국경제를 무너뜨릴 것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중국의 경제보복으로 한국경제가 무너지는 미증유의 재난 속에서 중국이 대만해방전쟁을 단행하는 경우, 조선도 즉각 조국통일대전에 돌입할 것으로 예견된다는 점이다. 

 

정세변화를 모르는 문외한들은 주한미국군이 주둔하면, 설령 중국이 대만해방전쟁을 단행해도 조선은 조국통일대전에 돌입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은 조선인민군이 조국통일대전준비를 완성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며, 주한미국군의 감축이 임박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이다. 조선인민군이 조국통일대전준비를 완성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전에 <자주시보>에 실린 나의 글들에서 여러 차례 논했으므로 재론하지 않고, 이 글에서는 주한미국군의 임박한 감축에 대해 논한다.  

 

<중앙일보> 2020년 8월 3일 보도에 따르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존 볼턴(John R. Bolton)은 2020년 7월 30일 <중앙일보> 취재기자와 진행한 화상통화 중에 트럼프 대통령이 2019년에 문재인 대통령에게 주한미국군 감축문제를 “분명히 암시했다”고 말했다. 볼턴의 그런 발언에 공명하듯, 2020년 8월 2일 미국 국방부는 주독미국군의 30%에 해당하는 12,000명 병력을 감축한다고 발표했는데, 주독미국군 감축한 다음에 주한미국군 감축이 이어질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2020년 11월 3일에 실시될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트럼프가 재선되면, 그는 자신의 지시에 따라 미국 국방부가 이미 준비해놓은 주한미국군감축안을 2021년에 실행할 것이다. 대선에서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하고 조 바이든(Joseph R. Biden Jr.)이 당선되어 정권이 바뀌어도, 미국은 주한미국군을 감축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이 중국과 대결하는 인도-태평양 군사동맹을 결성하는 사업을 추진할수록 조선과 대결하는 한미군사동맹의 전략적 가치는 급속히 반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의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주한미국군은 감축되는 것이다. 아시아에 주둔하는 미국군이 중국과의 전쟁에 대비해 재편되는 판이므로, 주한미국군을 현재 상태로 유지해달라는 한국의 간청은 미국이 고려할 만한 사항이 아니다. 

 

미국 국방부 소식지(DoD News) 2020년 8월 31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에스퍼 국방장관을 수행하여 에스퍼-고노 회담에 배석한 데이빗 헬비(David Helvey) 국방부 인도-태평양담당 차관보 대행은 동행한 취재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군대)는 동북아시아에 지나치게 많이 집중되었다. 이러한 군대배치는 제2차 세계대전의 유산이다. 우리는 우리 군대를 더 넓은 (인도-태평양)지역으로 분산배치하여 더 많은 작전적 탄력성을 갖고 싶다. 미래의 우리 군대는 군사기지들에는 더 적게 배치되고 작전지역에는 더 많이 배치되어 여러 지역을 누비며 작전하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양한 위협과 도전에 대처하는 유연성과 민첩성을 갖게 될 것이다. 괌의 군사기지는 우리 무력을 인도-태평양지역 전반에 신속히 전개시키는 거점으로 될 것이다. 이러한 구상은 미국이 중국을 비롯한 여러 유형의 위협들에 대처하는 탄력성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2020년 2월 27일 태국에서 진행된, '코브라 골드 2020'라는 명칭의 미국-태국합동군사훈련 중에 미국 해병대 제3해병원정군 산하 제31해병원정대가미국 해군 상륙수송함 그린 베이함에서 상륙돌격장갑차를 타고 해안으로 돌진하는 상륙전연습장면이다. 그런데 2020년 4월 1일 미국 해병대사령관이 발표한 전략문서 '무력설계 2030'에 따르면, 앞으로 미국 해병대는 대규모 전투부대를 소규모 신속기동부대로 재편하고, 공중수송능력과 화력타격능력을 증강하고, 무인항공기 및 무인함정을증강배치하는 한편, 전차를 없애고, 상륙돌격장갑차를 감축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미국 해병대 제3해병원정군과 한국 해병대가 진행해오는 대규모 한미연합상륙훈련의 작전방침인 '작전계획 5015'는 사실상 폐기되고, 한미연합상륙훈련도 중지되는 것이다.  

 

미국 국방부 소식지 2020년 8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앤더슨공군기지에서 고노 방위상을 만난 에스퍼 국방장관은 회담에 앞서 그를 미국 해병대가 주둔하게 될 새로운 군사기지인 캠프 블라즈(Camp Blaz)로 안내하여 함께 돌아보았다고 한다. 지금 미국은 일본 오끼나와에 주둔하는 해병대 병력 5,000명을 괌에 있는 캠프 블라즈로 이전시키려고 한다. 

 

미국 해병대는 미국 본토 캘리포니아주에 주둔하는 제1해병원정군, 미국 본토 노스 캐롤라이나주에 주둔하는 제2해병원정군, 일본 오끼나와에 주둔하는 제3해병원정군으로 편성되었는데, 제3해병원정군은 중국 본토를 침공할 상륙부대가 아니라 조선을 침공할 상륙부대이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조선을 침공하는 상륙작전보다 남중국해에 흩어져 있는 중국의 작은 섬들을 점령하는 상륙작전을 더 중시한다. 그래서 오끼나와에 주둔하는 제3해병원정군 27,000명 중에서 5,000명을 괌으로 이전하려는 것이다. 이런 무력재배치는 미국 해병대가 새로운 전략을 채택했음을 말해준다.  

 

2020년 4월 1일 미국 해병대사령관 데이빗 버거(David H. Berger)는 ‘무력설계(Force Design) 2030'이라는 제목의 전략문서를 발표했다. 미국 해병대 전쟁기획자들이 6개월 동안 진행한 컴퓨터모의전쟁의 결과를 놓고 검토를 거듭해온 끝에 작성한 해병대 개조계획이 그 전략문서에 담겼다. 개조계획에 따르면, 미국 해병대는 다음과 같이 바뀌게 된다. 

 

- 10,000명 이상으로 편성된 대규모 전투부대를 50~100명으로 편성된 소규모 신속기동부대로 재편한다. 

- 해병대 전차대대를 해체하고, 상륙돌격장갑차 중대를 6개에서 4개로 축소하고, 경량화된 상륙전투장갑차를 증강배치한다. 

- 해병대 1개 비행대대에 배속된 F-35B 스텔스전투기를 16대에서 10대로 축소하고, MV-22 오스프리 수직이착륙기와 CH-53 수송헬기, AH-1 공격헬기도 축소한다. 

- C-130J 수송기 중대를 3개에서 4개로 증대시킨다.  

- 다련장로켓포를 현재보다 3배 증강배치한다. 

- 미사일 중대를 7개에서 21개로 3배 확대한다. 

- 무인항공대대를 3개에서 6개로 2배 확대한다. 

- 무인전투함정과 무인정찰함정을 증강배치한다. 

 

일본 오끼나와에 주둔하는 미국 해병대 제3해병원정군은 북침전쟁계획인 ‘작전계획 5015’를 수행하는 상륙전문부대이다. 그들이 경상북도 포항시 인근에 있는 해병대 훈련장에서 한국군 해병대 상륙전투부대와 함께 진행하는 한미연합상륙훈련은 이른바 ‘참수작전’과 대량파괴무기 정밀타격을 핵심내용으로 하는 북침전쟁연습이다. 미국 해병대 제3해병원정군과 한국 해병대가 진행해온 한미연합상륙훈련에는 각종 중무기들과 대규모 병력이 동원된다.  

 

그런데 위에 서술한 미국 해병대의 개조계획에 따르면, 앞으로 미국 해병대는 대규모 상륙훈련은 그만두고, 50~100명의 병력이 참가하는 소규모 상륙훈련을 실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대규모 상륙전을 상정하여 작성된 ‘작전계획 5015’이 사실상 폐기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대규모 상륙전계획에 따라 진행해오던 한미연합군의 북침전쟁연습도 당연히 축소될 것임을 예고해준다. 

 

2020년 8월 18일부터 28일까지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진행되었는데, 올해는 미국 본토, 하와이, 괌, 오끼나와에서 동원되는 미국군 증원부대들이 사상 처음으로 참가하지 않았고, 주한미국군과 한국군만 참가하여 북침전쟁연습의 규모가 축소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세계적 대유행 때문에 미국군 증원부대가 참가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미국 해병대의 개조계획에 따른 감군의 전조로 볼 수도 있다.

2020/09/02

남북관계를 반목과 대결로 돌려세운 되돌이현상의 내막

[한호석의 개벽예감](409)

자주시보 2020년 08월 31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감동적인 장면 뒤에 펼쳐진 또 다른 장면

2. 대미굴종이 불러온 정신착란

3. 되돌이현상을 일으킨 결정적 원인

4. 통일방안논의에서 제기된 새로운 쟁점

 

 

1. 감동적인 장면 뒤에 펼쳐진 또 다른 장면

 

2000년 6월 3일 오전 6시경 판문점에서 조선인민군 소속 헬기 한 대가 아침햇살을 받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방금 승용차를 타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선 남측 인사 세 사람이 그 헬기를 탔다. 그들은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 김보현 당시 국정원 대북전략국장, 서훈 당시 국정원 정보관리실장이었다. 그들은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방문을 열흘 앞두고 파견한 특사단이었다. 판문점에서 헬기를 타고 평양에 도착한 특사단은 다시 북측 특별기를 타고 신의주로 날아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신의주 근교에 있는 초대소에서 대북특사단을 접견했다. 2008년 서울에서 출판된 임동원의 회고록 ‘피스 메이커: 남북관계와 북핵문제 20년’에 따르면, 임동원 특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김대중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고,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제기할 여러 의제들에 관해 근 한 시간 동안 길고 자세하게 설명했는데, 가장 먼저 설명한 것은 조국통일방안과 주한미국군문제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임동원 특사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남과 북이) 상호 긴밀히 협조하는 기구인 ‘남북연합’을 제도화하여 남과 북이 힘을 합쳐 민족경제공동체를 형성, 발전시키는 한편 군비통제를 실현하여 냉전의 잔재를 청산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등의 중차대한 당면과제들을 시행해나가자는 것이 대통령의 뜻입니다. (중략) 대통령께서는 주한미군의 위상에 대해서도 북측이 전향적으로 사고해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대통령께서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균형자와 안정자의 역할을 수행할 주한미군이 현재뿐 아니라 통일 이후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날 김대중 대통령은 위와 같은 자신의 견해를 대북특사를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전한 것인데, 이것은 11일 뒤에 열릴 남북정상회담이 그리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징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보다 앞서 2000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은 덩샤오핑의 장남 덩푸팡(鄧樸方)을 통해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국가주석에게 평양방문의사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전해달라고 요청했고, 장쩌민 주석은 2000년 3월 5일 황쥐(黃菊) 당시 상하이 당서기를 특사로 평양에 파견하여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의사를 전달했다.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이후 어느덧 20년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남북공동선언이 세 차례 더 발표되었다.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북남)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 발표되었고,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에서 ‘한(조선)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선언’이 발표되었고, 2018년 9월 19일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에서 ‘평양공동선언’이 발표된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고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될 때마다 삼천리강산에 통일열망이 물결쳤지만, 남북공동선언 합의사항들은 이행되지 않았고, 잠시 개선된 듯하던 남북관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반목과 대결로 되돌아갔다.    

 

왜 이런 되돌이현상이 지난 20년 동안 반복되었을까? 그 원인을 찾으려면, 원초적 경험을 분석, 고찰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원초적 경험이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을 뜻한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당시 텔레비전실황중계방송을 통해 방영된 남북정상회담의 감동적인 장면들이 남아있지만, 그 감동적인 장면들 뒤에서 또 다른 장면들이 펼쳐졌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장면들을 분석, 고찰하면, 지난 20년 동안 반복된 되돌이현상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사진 1>

 

▲ <사진 1> 위의 사진은 남북정상회담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2000년 6월 6일 빌 클린턴대통령이 급파한 검열단이 청와대를 방문하여 김대중 대통령의 접견을 받는 장면이다.사진 속의 여성은 미국 검열단 단장인 웬디 셔면 대조선정책조정관이다. 미국 검열단은김대중 대통령을 만난 직후, 당시 남북정상회담준비사업을 총괄하고 있었던 임동원 국정원장도 만났다. 미국 검열단이 김대중 대통령과 임동원 국정원장을 연달아 만난 목적은 남북정상회담준비사업을 검열하기 위해서였다. 대미굴종이 체질화된 청와대는 남북정상회담준비에 관한 기밀사항을 지속적으로 백악관에 보고하고 있었지만, 백악관은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기 일주일 전에 남북정상회담준비사업을 직접 검열하기 위해 클린턴 대통령의 특명으로 검열단을 서울에 급파했던 것이다.  

 

첫째 장면은 2000년 6월 6일 웬디 셔먼(Wendy R. Sherman) 대조선정책조정관을 단장으로 하는 미국 검열단의 서울방문이다. 빌 클린턴(William J. Clinton)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서울을 방문한 검열단은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고, 당시 남북정상회담준비사업을 총괄하고 있었던 임동원 국정원장도 만났다. 그들이 김대중 대통령과 임동원 국정원장을 연달아 만난 목적은 남북정상회담준비사업을 검열하기 위해서였다. 

 

임동원의 회고록에 따르면, 남북정상회담준비사업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은 웬디 셔먼은 임동원에게 귓속말로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임 원장께서 보스워스 대사(당시 주한미국대사-옮긴이)를 통해 사전에 모든 것을 솔직하게 미국 측에 알려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과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모두 신뢰하고 있으며 대단히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셔먼이 그렇게 말한 것을 들어보면, 당시 청와대가 임동원-보스워스 연락선을 통해 남북정상회담준비사업에 관한 “모든 것”을 백악관에 “솔직하게” 보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어느 나라에서나 정상회담준비는 비밀리에 추진되는 법이다. 그런데도 대미굴종이 체질화된 청와대는 남북정상회담준비에 관한 모든 기밀사항을 지속적으로 백악관에 보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악관은 남북정상회담준비에 관한 청와대의 자세한 보고를 받아보았으면서도 우려와 의혹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백악관은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기 일주일 전에 남북정상회담준비사업을 직접 검열하기 위해 클린턴 대통령이 지명한 검열단을 서울에 급파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2000년 6월 당시 백악관은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앞두고 무엇을 그토록 우려했던 것일까? 임동원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백악관은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몰래 주한미군철수라든가 평화협정체결과 같은 과감한 합의에 이르는 것이 아닌지 (중략) 우려와 의혹을 줄곧 제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2000년 6월 당시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에 조성된 분위기를 분석,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백악관은 남북정상회담 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을 회유, 설득하여 주한미국군철수와 평화협정체결을 밀약하지 않을까 하고 우려하면서 의혹의 눈총을 보냈지만, 그것은 백악관의 고질적인 의심증이 빚어낸 촌극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이 반대하는 주한미국군철수와 평화협정체결을 밀약하려는 생각을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는데, 의심증이 도진 백악관은 자기들이 직접 검열하기 전에는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클린턴 대통령은 검열단을 서울에 급파했던 것이다.    

 

위에 인용한 임동원의 회고록에 따르면, 검열단 단장 웬디 셔먼은 김대중 대통령과 임동원 국정원장으로부터 남북정상회담준비사업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우려가 말끔히 해소되었다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고 한다. 도대체 김대중 대통령과 임동원 국정원장이 웬디 셔먼에게 무슨 말을 했기에 미국 검열단의 우려가 말끔히 해소되고, 감사인사까지 받은 것일까? 임동원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과 임동원 국정원장은 미국 검열단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고 한다. “주한미군은 통일 이후에도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안정자, 균형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민족이익에 부합한다는 기조로 북측을 설득하겠다”고 미국 검열단에게 말했다. “그리고 한국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우방은 미국이며, 굳건한 한미동맹에 기초하여 남북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것이 김 대통령의 확고한 신념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함으로써 그들(미국 검열단-옮긴이)을 안심시켰다.”

 

 

2. 대미굴종이 불러온 정신착란

 

위의 인용문은 청와대의 대미굴종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말해준다. 그들의 대미굴종은 우리나라가 통일된 이후에도 주한미국군이 동북아시아의 균형자로 계속 주둔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궤변으로 표출되었다. 청와대의 대미굴종은 궤변을 진리로 믿어버리는 정신착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1) 주한미국군은 우리 민족의 조국통일운동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왜냐하면 주한미국군은 평양에 침투하여 최고지도부를 제거하려는 이른바 ‘참수작전연습’을 계속할 뿐 아니라, 선제핵타격으로 북을 파멸시키려는 북침전쟁연습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한미국군이 남아있는 한 조국통일은 절대로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진리다. 그러나 백악관에 굴종하는 청와대는 주한미국군이 주둔해야 통일이 실현될 것이라는 궤변을 진리로 믿고, 통일이 실현된 이후에도 주한미국군이 계속 주둔할 것이라는 궤변을 진리로 믿는다. 이 정도라면, 오판이 아니라 정신착란이다. 

 

2) 지금 미국은 대만문제와 남중국해문제를 비롯한 중국의 내정에 부당하게 간섭하면서 위협적 군사행동을 증가시켜 중국을 극도로 자극하고, 동아시아정세를 무력충돌계선으로 끌어가고 있다. 그런 무력충돌을 불러일으킬 촉발요인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주한미국군이다. 예를 들면, 전라북도 군산공군기지에 주둔하는 미국태평양공군 제7공군 제8전투비행단은 중국인민해방군 해군의 최강, 최대함대인 북해함대가 주둔하는 산둥성 칭다오(靑島)에서 560km 떨어져있다. 군산공군기지에 상시주둔하는 미국 제7공군 F-16 전투기가 이륙하면 14분 만에 북해함대 상공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런 급박한 정황은 주한미국군이 중국인민해방군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주한미국군을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규정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현실이 이런데도, 백악관에게 굴종하는 청와대는 주한미국군이 동북아시아의 안정자이며 균형자라는 궤변을 진리로 믿는다. 이 정도라면, 오판이 아니라 정신착란이다. 

 

3) 주한미국군의 장기주둔으로 우리나라의 통일이 실현되지 못하고,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이 직접적인 위협을 받는 것은 우리 민족의 이익에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것인데, 백악관에 굴종하는 청와대는 주한미국군의 장기주둔이 우리 민족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궤변을 진리로 믿는다. 이 정도라면, 오판이 아니라 정신착란이다. <사진 2>

 

▲ <사진 2> 위의 사진은 2000년 6월 14일 평양에 있는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담화하는 장면이다. 당시 남북정상회담 중에 김대중 대통령은일주일 전 청와대를 방문한 미국 검열단을 안심시켰던 이른바 '균형자론'을 김정일 국방위원장 앞에서 또 다시 거론했다. 그 회담에 배석한 김용순 당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장이 김대중 대통령의 '균형자론'을 논박하면서 철군론을 거듭 주장하는 바람에 분위기가갑자기 굳어졌다. 그래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굳어진 분위기를 유화적 발언으로 풀어주려고 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회담상대로부터 궤변을 듣고서도 논박하지 않고 되레 회담상대의 처지를 배려해준 도량이 넓은 지도자였다.  


2000년 6월 14일 평양에 있는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김대중 대통령은 일주일 전 청와대를 방문했던 미국 검열단을 안심시켰던 ‘균형자론’을 김정일 국방위원장 앞에서 또 다시 거론했다. 일본 <아사히신붕> 2000년 8월 9일 보도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중에 “주한미군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지역의 안정과 완충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미군이 없으면 지역의 세력균형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균형자론’을 주장했다고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런 발언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꾸할 수 없는 허황한 궤변이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위의 보도에 따르면, 남북정상회담에 배석한 김용순 당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장이 김대중 대통령의 ‘균형자론’을 논박하면서 철군론을 거듭 강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주한미군문제를 논의할 당사자도 아닌 김대중 대통령이 느닷없이 꺼내놓은 궤변을 못들은 척 하고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런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김용순 통일전선부장이 철군론으로 반박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갑자기 굳어졌다. 그래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굳어진 분위기를 유화적 발언으로 풀어주려고 했다. 위에 인용한 <아사히신붕> 보도기사와 임동원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 대통령의 설명에는 동감하는 면도 있습니다. 지금 철수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통일된 후에도 평화유지를 위해 미군은 남는 것이 좋습니다”라는 유화적 발언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체면을 세워주면서도, “미군이 남조선에 주둔하는 것이 남조선 정부로서는 여러 가지로 부담이 많겠으니 결국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철군문제를 우회적으로 지적했다고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30일 원산초대소에서 재미동포 언론인 문명자 주필과 진행한 단독회견에서 “통일 후에도 미군이 계속 주둔해야 한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 (중략) 등이 보도되어 사실 김 대통령에 대한 인민들의 인상이 좋지 않았다”고 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균형자론’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 중에 주한미국군의 즉각적인 철수가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설명을 듣고 부분적으로 납득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물은 문명자 주필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 동안 미군더러 나가라고 했지만, 그들이 당장 나가겠습니까? 우선 미국 스스로가 생각을 달리 해야 합니다. 그들은 분단에 책임이 있는 것만큼 통일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지난날 닉슨도 카터도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했는데, 주한미군문제는 우선 그들 스스로가 우리 민족의 통일을 적극적으로 돕는 방향에서 알아서 결정해야 합니다.” 

 

위의 인용문을 읽어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국통일을 실현하려면 주한미국군이 반드시 철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미국에게 철군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라고 촉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김대중 대통령을 수행하여 남북정상회담에 배석했던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과 박지원 현 국정원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의 ‘균형자론’에 동의한 것처럼 사실을 왜곡했다. 

 

 

3. 되돌이현상을 일으킨 결정적 원인

 

주한미국군철수와 평화협정체결은 백악관이 결정할 문제이지 청와대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며, 조미정상회담에서 해결할 문제이지 남북정상회담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청와대는 그 두 가지 문제를 결정할 아무런 권한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국군철수와 평화협정체결에 관해 논의하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2007년 10월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을 때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 두 문제를 논의하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중앙일보> 2015년 10월 1일 보도에 따르면, 2007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평화협정문제를 꺼냈으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평화협정문제는 조미정상회담에서 해결할 문제라고 하면서 그 문제를 논의하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그 대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미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사전조치를 노무현 대통령에게 권유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조지 부쉬(George W. Bush) 대통령을 설득해서 종전선언을 발표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면 좋지 않겠는가 하고 권유했던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그렇게 권유했다는 사실은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13년 7월 25일 국회 정보위원회는 국정원이 전날 배포한, 2007년 10월 3일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언론에 공개했는데, 회의록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권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얼마 전에 부시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화할 때 종전선언문제를 언급했다는 말이 지금 돌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주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종전을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지만, 그것이 하나의 시작으로 될 수 있다고 보면 어떻겠는가 나는 생각합니다. 조선전쟁에 관련 있는 3자나 4자들이 개성이나 금강산 같은 데서 분계선 가까운 곳에 모여 전쟁이 끝나는 것을 공동으로 선포한다면 평화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될 수 있다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께서 관심이 있다면, 부시 대통령 하고 미국 사람들과 사업해서 좀 성사시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그런 조건이 될 때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완전히 바꾸는 게 어떻겠는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진 3> 

 

▲ <사진 3> 위의 사진은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있는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진행하는 장면이다. 그 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조지 부쉬 대통령을 설득해서 종전선언을 발표할 수 있도록분위기를 만들면 좋지 않겠는가 하고 권유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하기 약 한 달 전에 부쉬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종전선언문제를 거론하였다가 부쉬로부터 싸늘한 답변을 듣고 무안을 당한 적이 있다. 부쉬 대통령의 전략방침은 조선이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해야 종전선언을 발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백악관에게 있어서 종전선언발표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준비조치가 아니라 조선을 핵포기로 이끌어가려는 한낱 유인책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하기 약 한 달 전에 부쉬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종전선언문제를 거론하였다가 부쉬로부터 싸늘한 답변을 듣고 무안을 당한 적이 있다. 2007년 9월 7일 오스트레일리아 씨드니에서 진행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중에 있었던 노무현-부쉬 담화에서 그런 불편한 이야기가 오갔던 것이다. 문제의 담화는 다음과 같다.

 

노무현 - “각하께서 조금 전에 말씀하실 때 한반도 평화체제 내지 종전선언에 대해서 말씀을 빠뜨리신 것 같습니다.”

부쉬 - “나는 (종전선언문제가) 김정일 북조선 지도자에게 달려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검증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핵무기와 핵무기개발사업을 없앤다면, 미국은 평화조약에 서명할 수 있습니다.”

노무현 -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김정일 위원장이나 한국 국민들은 그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어합니다.”

부쉬 - “대통령 각하, 나는 더 이상 말할 게 없습니다. 우리는 코리아전쟁을 종식시킬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이 핵무기와 핵무기개발사업을 검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없애야 (코리아전쟁이) 종식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은 그는 통역관이 자기의 말을 통역하자마자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더니 노무현 대통령과 악수하고 퇴장해버렸다.)

 

위의 인용문에서 드러난 것처럼, 부쉬 대통령의 전략방침은 조선이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해야 종전선언을 발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백악관에게 있어서 종전선언발표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준비조치가 아니라 조선을 핵포기로 이끌어가려는 한낱 유인책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쉬 대통령의 그런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노무현 대통령은 종전선언발표로 평화체제가 수립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부쉬 대통령에게서 종전선언문제에 관한 언약이라도 받아보려고 하다가 무안만 당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노무현 대통령이 바랐던 종전선언이 평화협정과 분리된 고립적 사안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분리시킨 까닭은, 평화협정체결로 주한미국군이 철수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철군만이 아니라 감군도 반대했다. <조선일보> 2016년 12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2003년 6월 당시 미국 국방부 부차관보였던 리처드 롤리스(Richard P. Lawless)가 청와대를 방문하여 김희상 당시 국방보좌관과 반기문 당시 외교보좌관에게 주한미국군 37,500명 중에서 12,500명을 2006년까지 단계적으로 감축하겠다고 통보했을 때, 노무현 대통령은 감축문제를 통보받았다는 사실을 은폐하였고, 2003년 7월 부쉬 대통령에게 그해 10월 한미정상회담에서 협의할 때까지 감축문제를 일절 논의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오늘 문재인 대통령도 김대중 대통령과 똑같이 ‘균형자론’을 주장하고, 노무현 대통령과 똑같이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분리시켰다. 이를테면,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9월 26일 미국 텔레비전방송 <팍스 뉴스>와 대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전선언이 이루어진다면 유엔사의 지위가 흔들리게 되거나 또는 주한미군이 철수해야 된다는 어떤 압박을 받는 것이 아니냐 라는 의심이 일부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전선언은 지금 한국이 65년 전에 정전협정을 체결하고는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못한 채 정전상태로 65년이 흘러왔기 때문에 이제라도 적대관계를 종식하고 전쟁을 종료하겠다는 하나의 정치적 선언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평화협정이 되려면 다시 평화협상이라는 과정을 거쳐 평화협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는 정전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엔사의 지위라든지 주한미군의 지위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화협정이 체결되더라도 주한미군은 전적으로 한미동맹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평화협정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지금 주한미군은 남북관계에서 평화를 만들어내는 대북억지력으로 큰 역할을 하지만 나아가서는 동북아 전체의 안정과 평화를 만들어내는 균형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중략) 그래서 나는 평화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심지어는 남북이 통일을 이룬 이후에도 동북아 전체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남북공동성명을 채택했으며, 남북교류협력을 추진했다. 이런 경험은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가 대북적대감에 사로잡혀 광분했던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와 다르다는 사실을 사람들의 뇌리 속에 새겨주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는 대북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으면서도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와 똑같이 북침전쟁연습에 집착했으며,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와 똑같이 미국에게 굴종했다. 북침전쟁연습과 대미굴종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사이에는 아무런 간격이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북침전쟁연습과 대미굴종이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가 성사시킨 남북정상회담의 중대한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었고, 남북공동선언을 불이행으로 몰아갔으며, 일정기간 추진되던 남북교류마저 중단시켰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일시적으로 개선되던 남북관계를 반목과 대결로 돌려세운 되돌이현상의 결정적 원인이다.     

 

 

4. 통일방안논의에서 제기된 새로운 쟁점

 

지난 20년 동안 되돌이현상이 반복된 원인을 찾으려면, 2000년 6월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을 분석, 고찰해야 하는데, 그 원초적 경험의 두 번째 장면은 2020년 4월 7일 <연합뉴스>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 보도기사에는 2000년 6월 당시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상임연구위원이었던 김달술이 노환으로 별세하였음을 알리는 부고내용이 담겼는데, 부고내용과 함께 들어있는 회고담에 시선이 집중된다. 

 

보도기사에 들어있는 회고담에 따르면,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기 9일 전인 2000년 6월 4일 청와대에서 남북정상회담 모의회담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4시간 동안 진행된 모의회담에서 김달술 당시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상임연구위원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역을 맡았고, 정세현 당시 통일부 차관은 김용순 당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장의 대역을 맡았다고 한다.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청와대에서 모의회담이 진행된 까닭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제기할 중대한 의견들에 맞서는 반대의견을 미리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위의 보도기사에 따르면,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별세한 김달술을 추모하는 발언을 하던 중에 2000년 6월 4일 청와대에서 모의회담을 마치고 고인이 “DJ(김대중을 지칭하는 영어대문자-옮긴이)가 빨갱이가 아니구먼. 김정일(국방위원장)한테 안 밀리겠어”라고 말했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제기할 중대한 의견들에 맞서는 반대의견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 청와대에서 모의회담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와대가 모의회담에서 준비한 반대의견들 가운데는 주한미국군철수와 평화협정체결을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위에 서술한 것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그 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김대중 대통령은 모의회담에서 준비한, 주한미국군철수에 관한 반대의견을 굳이 꺼내놓았다. 자기들 몰래 철군문제를 밀약하지 않을까 하고 우려한 백악관을 안심시키기 위해 김대중 대통령은 굳이 꺼내놓지 않아도 되는 문제를 일부러 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주한미국군철수와 평화협정체결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최대 쟁점으로 제기될 것으로 보았던 청와대와 백악관의 예상과 달리, 회담에서 가장 큰 쟁점으로 제기된 것은 조국통일방안에 관한 문제였다. 임동원의 회고록에는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이 주고받은 다음과 같은 대화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번에는 첫째로 민족자주의지를 천명하고, 둘째로 통일문제와 관련해서는 연방제통일을 지향하되 ‘낮은 단계의 연방제’부터 하자는 데 합의하십시다. 그리고 셋째 항에는 남북 당국 간 대화를 즉각 개시하여 정치, 경제, 사회문제를 함께 풀어나가자는 정도로 합의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2체제 연방제 통일방안은 수락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남북연합제’라는 것은 ‘2체제 2정부’의 협력형태를 의미하는 겁니다. 어쨌든 통일문제는 앞으로 더 논의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통일 이전 단계에서 남과 북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지금 당장 할 일이 무엇인가를 합의하는 게 좋겠습니다.”

 

“대통령께서 말씀하시는 ‘연합제’가 바로 제가 말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같은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는 완전통일은 10년 내지 20년은 걸릴 거라고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완전통일까지는 앞으로 40년, 50년이 걸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말은 연방제로 즉각 통일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냉전시대에 하던 얘기입니다. 내가 말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건 남측이 주장하는 ‘연합제’처럼 군사권과 외교권은 남과 북의 두 정부가 각각 보유하고 점진적으로 통일을 추진하자는 개념입니다.”

 

“통일방안은 여기서 합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남북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 대해 앞으로 계속 논의하기로 합의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가 뜻이 같은 것이니까, 낮은 단계 연방제로 남북이 협력해나가자고.”

 

“북이 낮은 단계 연방제를 제의했고 남이 남북연합제를 제의했는데 말씀하신대로 양자 간에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함께 논의해나가자는 것으로 합의합시다.”

 

“좋습니다. 그럼 그 정도로 합의합시다.” 

 

위의 대화록을 읽어보면,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어떻게 해서든지 조국통일방안을 합의하려고 하였으나, 김대중 대통령은 조국통일방안을 합의하지 않으려고 끝까지 버텼음을 알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통일의지가 없으므로 그가 통일방안논의 자체를 거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통일의지가 없어서 통일방안논의 자체를 막무가내로 거부하는 김대중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낮은 단계 연방제에 대해 설명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낮은 단계 연방제에 대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설명을 부연하면 다음과 같다. <사진 4>

 

▲ <사진 4> 위의 사진은 2018년 9월 19일 평양에 있는 백화원 영빈관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 중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양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악수를 나누는 장면이다. 지난 20년 동안 남북관계는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개선되다가 얼마가지 않아 반목과 대결로 돌아가는 되돌이현상을 반복해왔다. 그것은 남과 북이 조국통일방안을 논의하는 데서 쟁점으로 제기된 문제, 말하자면 남과 북이 낮은 단계 연방제의 통일국가를 건설할 것인가 아니면 남과 북이 두 국가로 분렬되어 남북연합제를 실현할 것인가 하는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측이 주장하는 남북연합제라는 이름의 국가분렬방안은 평화통일의 전망을 어둡게 만들었다.  

 

1) 남과 북의 두 정부가 각각 행사하는 외교권과 군사권을 통합하는 것을 반대하는 김대중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외교권과 군사권을 급진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낮은 단계 연방제를 실현한 후에 외교권과 군사권을 점진적으로 통합하게 된다는 점을 설명했다. 

 

2) 남측 자본주의체제와 북측 사회주의체제를 하나로 만드는 체제단일화문제와 관련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낮은 단계 연방제를 실현한 이후에 오랜 세월에 걸쳐 남북의 체제가 점진적으로 단일화된다는 점을 설명했다. 상이하고 대립적인 두 사회체제를 급진적으로 단일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점진적으로 단일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남과 북의 외교권과 자주권을 점진적으로 통합하는 문제, 그리고 남과 북의 사회체제를 점진적으로 단일화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견해와 김대중 대통령의 견해는 일치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제기한 남북연합제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기한 낮은 단계 연방제에서 위와 같은 점진적 통합과 점진적 단일화는 공히 수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견이 상충되는 지점은 어디였을까? 김대중 대통령의 주장대로, 만일 남과 북이 두 국가로 분렬되어 남북연합제가 실현되면, 두 국가의 외교권과 군사권은 언제가도 통합될 수 없다. 두 국가가 외교권과 군사권을 점진적으로 통합한다는 말은 국가의 자기중심적 성격을 모르는 무지의 발로다. 외교권과 군사권은 두 국가로 분렬되지 않은 낮은 단계 연방제 안에서만 점진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의 주장대로, 남과 북이 두 국가로 분렬되어 남북연합제가 실현되면, 두 사회체제가 점진적으로 단일화되기는커녕 두 사회체제는 끝없이 대립할 것이다. 두 국가가 상이하고, 대립적인 사회체제를 점진적으로 단일화한다는 말은 궤변이다. 

 

위와 같은 맥락을 이해하면,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에서 조국통일방안이 합의되지 못한 것은 통일국가건설문제에 대한 견해가 상충적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낮은 단계 연방제의 통일국가를 건설하고, 그 통일국가 안에서 남과 북의 외교권과 자주권을 점진적으로 통합하고, 남과 북의 사회체제를 점진적으로 단일화하는 조국통일방안을 제시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통일국가건설을 반대하고 남과 북이 두 국가로 분렬된 남북연합제를 세우는 분리독립방안을 주장했다.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주장한 남북연합제방안은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게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조국통일방안을 논의하는 데서 제기된 쟁점은 남과 북의 외교권과 군사권을 점진적으로 통합하는 문제도 아니었고, 남과 북의 사회체제를 점진적으로 단일화하는 문제도 아니었다. 쟁점은 남과 북이 낮은 단계 연방제의 통일국가를 건설할 것인가 아니면 두 국가로 분렬되어 남북연합제를 실현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쟁점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난 20년 동안 남북관계는 일시적으로 개선되다가도 얼마 가지 않아 반목과 대결로 돌아가는 되돌이현상을 반복해온 것이다.   

 

남과 북이 낮은 단계 연방제의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민족사 최고, 최대의 과업은 결코 점진적으로 수행될 수 없다. 통일국가건설은 민족의 생사존망을 좌우하는 역사적 위업이므로, 건설과정에서 2~3년씩 시간을 끌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앞으로 남측에 통일의지를 가진 새로운 정부가 세워진다면, 남과 북은 통일과정에 진입한 후 6개월 안에 통일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이 열망하는 조국통일의 실체는 통일국가건설이며, 통일국가는 급진적으로 건설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통일학의 정세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