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07

그 대학생들은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진실의 말팔매 <45>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2011121<연합뉴스>"평양 건설현장 공개...대학생 동원 확인"이라는 이상한 제목의 기사 한 편을 실었다. 그 기사는 평양에서 찍은 사진 몇 장을 '해설'한 것이다. 그 사진들은 지난 여름 평양에서 진행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관람하고 평양과 지방 명승지를 관광하던 외국인관광단 일원인 미국인 레이 커닝햄(Ray Cunningham)201195일 평양에서 길을 가다가 우연히 찍은 것들이다.
 
지금 평양은 엄청난 건설열기에 휩싸여있으므로, 곳곳의 건설현장들이 외국인관광객의 눈에 띈 것은 당연하다. 레이 커닝햄은 자기가 북측 각지를 관광하는 도중에 찍은 수 백 장 사진들 가운데 특히 평양의 여러 건설현장 주변을 지나면서 찍은 사진 30장을 '2011년 평양 건설(Pyongyang Construction 2011)'이라는 소제목으로 분류하여 사진 전문 웹사이트 '플리커(Flicker)'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그 사진들 가운데는, 맨 앞에 큰 깃발을 들고 평양 시내 어느 아파트 앞길을 행진하는 김책공업종합대학 재학생들의 행진대오를 먼 거리에서 촬영한 것이 있다. 사진을 확대해보면, 붉은 깃발에 "김책공업종합대학 응용화학00대대, 정보과학기술00대대"라고 쓰인 노란색 글씨가 보인다.
 
레이 커닝햄은 그 사진의 제목을 "일터로 행진하는 김책공대 학생들(Students of Kim Chaek University of Technology march to work)"이라고 붙이고 그 밑에 "그곳 대학교들은 휴교하였는데, 대학생들은 평양의 건설현장에 일하러 가는 것으로 보인다(The universities are dismissed and students can be seen heading to work on the construction sites of Pyongyang)"는 사진설명을 달아놓았다. 그가 행진 중인 대학생들에게 다가가 어디로 가는가고 물어보지 않고, 그냥 자기의 추측을 그렇게 써넣은 것이다.
   
△ 미국인 레이 커닝햄이 '플리커(Flicker)'에 올린 사진과 사진 설명

물론 그의 추측은 빗나갔다. 그 대학생들은 평양의 건설현장에 동원되어 행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의 추측이 틀렸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다음의 사실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첫째, 행진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은 건설현장에 험한 일을 하러 가는 차림새가 전혀 아니다. 그들은 모두 흰 색 상의에 검은 색 바지를 입었다. 여기에 실린 다른 사진을 보면, 그런 옷차림은 그 대학교의 여름 교복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흙먼지 펄펄 날리는 험한 건설현장에 흰색 정복차림으로 노동하러 가는 사람은 없다. 북측에서 건설현장에 일하러 가는 사람들은 여기에 실은 다른 사진에 나타난 것처럼, 노동복을 입는 게 정상이다.

△ 또 다른 외국인이 찍은 사진. 노동복 차림의 노동자가 평양시내를 걷고 있다.
프랑스인 에릭 라포그(Eric Lafforgue)가  '플리커(Flicker)'에 올린 사진.

또한 행진 중인 대학생들은 모두 손에 책가방을 들었거나 등에 책가방을 메었으며, 책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으면서 걸어가는 대학생들도 여러 명이 있다. 만일 건설현장에 노동하러 간다면, 무거운 책가방을 왜 가지고 가겠는가.
 
둘째, 레이 커닝햄이 '플리커'에 실은 여러 장 사진들 가운데는 김책공대 행진대오가 대동강에 놓인 다리를 건너가는 장면을 찍은 것도 있다. 위의 행진대오 사진보다 훨씬 더 먼 거리에서 찍은 이 사진에는 더 긴 대학생 행진대오가 나타나있고, 깃발도 하나 더 보인다. 커닝햄은 이 사진에 "양각다리 위의 노동여단(Work Brigades on Yanggak bridge)"이라는 제목을 달아놓았다. 사진설명은 없다.

△ 미국인 레이 커닝햄이 '플리커(Flicker)'에 올린 사진과 사진 설명
 
그런데 바로 이 사진이 커닝햄의 추측이 틀렸음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증거다. 왜냐하면 김책공대에서 만수대지구 아파트 건설현장으로 가려면 대동강을 건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동강변에 있는 김책공대에서 대동강을 건너가면 평양의 서부지역에 들어서게 되는데, 김책공대에서 직선거리로 측정하면 만수대지구 아파트 건설현장은 북쪽으로 약 2km 떨어진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그러면 사진에 나온 김책공대 행진대오는 대동강 다리를 건너 어디로 가고 있었던 것일까? 그 사진만 봐서는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기 힘들지만, 서평양에 있는 어느 생산현장으로 현장실습을 가는 길이 아니었을까?
 
셋째, 레이 커닝햄이 '플리커'에 실은 사진들 가운데는 평양에 있는 어떤 건물 신축공사장을 찍은 또 다른 사진 한 장이 들어있다. 이 사진에 그가 달아놓은 제목은 "북코리아 평양의 새 아파트 건설(New Apartment Construction in Pyongyang North Korea)".

△ 미국인 레이 커닝햄이 '플리커(Flicker)'에 올린 사진과 사진 설명

그 사진을 보면, 붉은 색 글씨로 "결사관철"이라고 쓴 커다란 구호판이 신축 중인 건물 정면에 걸려있고, 여기 저기에 붉은 깃발이 꽂혀있는데, 조금 작은 글씨로 "중국어학부"라고 쓴 글씨판도 보인다. 중국어학부라 했으니, 중국어학부 재학생들이 그 건설공사에 참가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김책공대에는 중국어학부가 없고, 평양외국어대학에 중국어학부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사진에 나온 어떤 건물 신축공사장은 만수대지구 초대형 아파트 공사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골조공사를 지상 6층에서 진행 중인 것으로 보나, 정면에서 바라본 건물 폭이 좁은 것으로 보나, 만수대지구 초대형 아파트가 아니라 어떤 다른 지역의 소형 아파트로 생각된다.

더 결정적인 사실은 그 사진 오른쪽에 류경호텔이 멀리 보인다는 점이다. 평양외국어대학에서 류경호텔까지 직선거리는 남서쪽으로 4.5km이므로, 그 사진은 평양외국어대학 부근에 있는 대학 부속건물 공사현장을 찍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사장에는 일하는 사람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학생들이 자기 대학 부속건물 공사장에 자원봉사하러 나간다면, 하루일과를 마치고 저녁시간에 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진을 촬영한 낮시간에는 그 공사장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틈만 나면 북측을 중상비방하는 <연합뉴스>는 레이 커닝햄이 잘못 추측한 사진 세 장을 가지고 너절한 헛소문을 퍼뜨렸고, 그 헛소문이 다른 언론매체들의 전재보도를 타고 흘러나가 일파만파로 번졌다.

그들이 퍼뜨린 너절한 헛소문에 따르면, 평양에서 진행되는 아파트 10만 세대 건설현장에 "대학생들을 동원한 사실이 확인됐다"는 것이며, "그 동안 공사에 동원된 대학생 가운데 200여 명이 각종 사고로 숨졌다는 얘기가 정통한 대북소식통 등에 의해 전해진 바 있다"는 것이며, "(평양 대학생들의) 부모가 골재를 상납하면 (건설현장) 동원을 면제해준다는 얘기도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평양의 대학들이 휴교하고 대학생들을 건설현장에 동원하였다는, 말이 되지 않는 헛소문은, 201175<미국의 소리>가 가장 먼저 퍼뜨렸다. <미국의 소리>는 평양의 대학생들이 2011627일부터 무려 10개월 동안 건설현장에 동원되고 있다는 헛소문을 날조한 것이다.
 
900억 달러에 이르는 거창한 아파트 공사가 예정대로 진척되는 것을 보고 밸이 꼴려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라 해도, 이쯤되면 흔히 떠도는 헛소문이 아니라 대북혐오에 중독되어 이제는 아예 이성적 판단기능이 마비된 정신질환자의 헛소리가 아닌가. 통신사나 방송이라는 간판을 달아놓고, 기자라는 명함을 들고 다니며, 하루가 멀다하고 정신질환자의 헛소리를 보도기사라고 써갈기는 그들의 처지가 참 가련해 보인다.
 
<로동신문> 2011124일 보도에 따르면, 자진하여 야간지원돌격대를 결성한 평양의 각계각층 시민들이 자기 직장에서 퇴근한 뒤에 만수대지구 아파트 건설현장을 돕고 있는데, 야간지원돌격대로 건설현장에 달려나간 연인원은 7월부터 10월말까지 10만여 명이나 된다.
 
201110월 초 평양을 방문한 재미동포 김현환 박사가 쓴 '방북기'에 따르면, 9시쯤 만수대지구 아파트 건설현장에 나가보았더니 평양의 청년들이 저녁마다 건설장에 달려와 야간청년돌격대에 가담하여 건설공사를 도와주고 있다고 한다.

김책공대를 비롯한 평양의 각 대학들에서 공부하는 대학생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 야간청년돌격대에 자진 탄원하여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어떤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닌데, 사회와 집단을 위해 청춘의 열정을 불태우는 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어디 없을까? (2011127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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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2

시장경제 붕괴와 양당체제 붕괴

변혁과 진보 (57)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유로존 경제의 붕괴와 4.11 총선정국
   
친자본 반노동 성향의 선동가들은 '성장둔화'라느니 또는 '침체단계'라느니 하는 알량한 거짓말로 붕괴위험에 대한 공포심을 감춰보려고 발버둥치고 있으나, 지금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가 전반적으로 붕괴위험에 빠져든 것은 분명하다.

그동안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수많은 개발도상국들을 지배하고 착취하여 이른바 '경제선진국'으로 올라섰던 미국, 서유럽, 일본 같은 자본주의 나라들의 국가재정파산이 시장경제 붕괴위험을 촉발시킨 결정적 요인이라는 점에서, 이번에 닥친 붕괴위험은 미국 금융권의 민간재정파산으로 촉발된 2008년의 시장경제 붕괴위험보다 한층 더 파괴적이다.
 
그러면 미국, 서유럽, 일본의 자본주의시장경제는 붕괴위험에서 탈출할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 잘라 말하면, 돌파구는 없으며, 붕괴위험은 불가피하게 붕괴재앙으로 이어질 것이다. 다만 붕괴충격을 조절하여 고통을 좀 덜 느끼도록 '진통제'를 처방하는 문제만 '경제선진국'들에게 남아있을 뿐이다.
 
20111130일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크리스틴 라가드(Chistine Lagarde)가 미국의 취재기자에게 전해준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국제통화기금이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국가재정위기에 대처할 긴급방책을 논의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국가재정위기가 얼마나 치명적이고, 그 두 나라의 국가재정파산이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에 미치는 위험도가 얼마나 심각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가 긴급방책을 논의하지 않고 있다니, 그러면 위험을 방치한다는 건가? 그녀는 취재기자에게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지만,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국가재정위기에 대처할 긴급방책을 세우기에는 때가 너무 늦은 것이다.
 
파산위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국가재정이 공식적으로 파산선고를 받는 날, 유로존 경제는 그 운명의 날부터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할 것이고, 유로존 경제가 무너지면 미국 경제나 일본 경제도 동반붕괴하게 되고, 중국 경제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에 기생해온 남측 경제는 어떻게 되나? 국제결제은행(BIS)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남측 은행권이 걸머진 외화부채 3,4946,700만 달러 가운데 유로존 금융권에서 빌려온 부채가 53.6%에 이르는 1,8725,800만 달러다.

유로존 경제가 붕괴되면, 유로존 금융권이 남측에서 급히 거둬가는 엄청난 외화가 한꺼번에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미 비틀거리는 남측 경제는 몇 일 안에 쓰러질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무시무시한 공포와 충격을 몰고 올 자본이탈과 경제붕괴의 연동 시나리오가 이 땅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199711월부터 1998년 상반기에 걸치는 기간에 남측 경제는 이미 붕괴를 경험한 적이 있는데, 그 때는 국제통화기금에 경제주권을 넘겨주는 굴욕적인 대가로 긴급구제금융을 받아 간신히 연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국제금융권 사정이 전혀 다르다. 유로존 경제가 무너지는 것과 더불어 미국, 일본, 중국이 얼마 시차를 두고 동반적으로 붕괴위험에 빠질 것이므로, 이명박 정부는 어디 가서 긴급구제금융을 꿔달라고 구걸하지도 못할 것이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공포와 충격의 붕괴소식을 그냥 앉아서 멍하니 듣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유로존 경제가 하필이면 2012년 상반기에 붕괴할 것으로 예견된다는 점이다. 이 땅에서 전개되는 변혁과 진보의 발전과정에서 2012년 상반기라는 특정시점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유로존 경제의 예견되는 붕괴시점이 4.11 총선정국과 겹치게 될 가능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2012411일 이 땅에서 총선이 실시된다. 2012115일에 창당될 통합진보정당이 처음 출전하는 총선이라는 점에서, 또한 그 총선에서 통합진보정당이 얻을 대중적 지지가 12.19 대선정국의 변화방향을 예고하는 객관적 지표로 될 것이라는 점에서, 2012년 총선은 역대 총선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대하고 결정적이다.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진보정치활동가들의 시야에서 2012년 상반기의 정세변화를 바라보면, 시장경제가 붕괴하는 충격과 혼란 속에서 4.11 총선에 대응해야 하고, 더 나아가 12.19 대선에도 대응해야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그렇다면 시장경제 붕괴가 통합진보정당의 총선대응과 대선대응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꼼꼼히 따져묻지 않을 수 없다. 붕괴정국은 통합진보정당의 총선대응과 대선대응에 유리할까 아니면 불리할까?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좀 어려운 일이지만,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나라의 경험을 분석해보면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글에서 관심을 끄는 대상은 스페인이다.
 
 
뜻 밖의 결과를 낳은 스페인의 5.15 운동
 
유로존 경제의 붕괴위험 속에서 그 위험과 피해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유럽의 노동자, 농민, 서민들이 벌이는 생존권 투쟁은 실로 격렬하다. 영국과 그리스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격렬한 대중투쟁이 폭발하였다. 상대적으로 건전한 국가재정을 가지고 버티는 독일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국가들에서 크고 작은 대중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 글의 초점이 가닿는 대상은, 스페인에서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는 대중투쟁이다. 스페인에서 대규모 대중투쟁이 폭발한 때는 2011515일이다. 그 날 스페인 전국 58개 도시들에서 폭발한 대중투쟁에 참가한 각계각층 대중은 연인원 650만명에서 800만명에 이르렀다. 스페인의 대중투쟁을 5.15 운동이라 부른다.

△2011년 5월 15일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뿌에르따 델 쏠 광장에 집결한 시위대
 
스페인의 5.15 운동을 촉발시킨 원인은 무엇일까? 스페인은 유로존 나라들 가운데 실업율이 가장 높다. 20113월 말 현재 스페인에서 실업율은 21.3%, 청년실업율은 43.5%이고, 실업자는 500만여 명으로 폭증하였다. 살인적인 대량실업으로 민생경제가 파탄되었으니, 민중들이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스페인의 대중투쟁은 5월에 10차례, 6월에 8차례, 7월에 2차례, 8월에 3차례, 10월에 1차례 일어났다. 스페인의 5.15 운동이 제기한 투쟁목표는, 대량실업과 민생경제파탄에서 스페인 민중을 보호해줄 사회보장대책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다른 유럽나라들에서 폭발한 대중투쟁들에서 그러한 것처럼, 스페인에서도 민생경제보장에 대한 절박한 요구가 터져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민생경제보장에 대한 요구보다 한층 더 중요한 정치적 요구가 제기되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스페인의 5.15 운동이 제기한 정치적 요구는 양당체제를 폐기하라는 것이다. 스페인 민중들이 5.15 운동에서 제기한, 양당체제를 폐기하라는 요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스페인 정치권에는 매우 오랫동안 번갈아 교차집권해온 두 개의 거대정당이 들어앉아 있다. 이 땅에서는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교차집권하면서 양당체제를 굳혀놓으려 하는데, 스페인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양당체제가 굳어져 버렸다. 스페인 정치권을 갈라먹은 거대정당은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과 국민당(PP)이다.
 
원래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1879년에 좌파정당으로 창당되었다. 이 땅에서 조선봉건왕조가 쇄국정책을 풀고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보내던 그 옛날에 스페인에서는 벌써 좌파정당이 등장하였으니 정치발전 격차가 너무 커 보인다. 스페인 사회노동당을 전폭적으로 지지한 세력은 1888년에 창설된 스페인 노동자총연맹(UGT)이다. 좌파정당과 좌파노조의 결합에 의거하여 변혁과 진보를 실현하려는 유럽형 변혁공식은 19세기말 스페인에서도 확정적이었다.
 
그러나 그 변혁공식은 유럽을 휩쓴 파시즘의 폭력 아래 짓밟히고 말았다. 스페인 내전 직후인 1939년부터 시작된 프랑코 파쇼통치는 스페인 사회노동당을 불법화하고 극심하게 탄압하였다. 그 당은 1977년에 가서야 합법화되었다. 그런데 오랜 탄압 아래서도 살아남은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19799월에 열린 임시당대회에서 당의 정치이념을 사회주의에서 사민주의로 바꿨다. 좌파정당에서 복지정당으로 전향한 것이다.
 
좌파정당에 중도우파정당으로 전향한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19821028일에 실시된 스페인 총선에서 48.5%의 득표율로 승리하여 집권에 성공하였다. 그 당은 1982년부터 1996년까지 15년 동안 집권하였고, 1996년에 실시된 총선에서 패하여 국민당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국민당은 프랑코 파쇼독재의 유산을 물려받은 전형적인 우파정당이다. 1996년에 스페인 사회노동당을 꺾고 집권한 국민당은 2004년까지 9년 동안 집권하였다. 그리고 2004년부터 2011년까지 다시 사회노동당이 집권하였다.

이처럼 스페인 정치권을 장악한 중도우파정당과 우파정당은 주기적 교차집권으로 정권을 나눠먹으며 민중에게 환멸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우파정당들의 교차집권에 환멸을 느낀 스페인 민중이 양당체제 폐기를 정치적 요구로 제기한 것은 당연하고 또 정당하다.
 
이처럼 5.15 운동이 양당체제 폐기를 정치적 요구로 제기한 가운데, 20111120일 스페인에서 총선이 실시되었다. 스페인 정치제도는 총선과 대선을 분리하지 않는데, 총선에서 이긴 정당이 내세운 총리후보가 자동적으로 총리에 당선되는 식으로 진행된다.
 
스페인 민중이 양당체제 폐기를 요구하는 가운데 실시된 스페인의 11.20 총선결과는 어떠했을까? 충격적인 사실은, 그 선거에서 44.62%의 득표율을 올린 국민당이 승리하였다는 점이다. 국민당은 하원 350석 가운데 186석을 차지하였다. 이것은 지난 30년 동안 스페인 총선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로 집권한 것이다. 총선에서 패한 사회노동당은 28.73%의 득표율밖에 건지지 못했다. 사회노동당은 의석이 169석에서 111석으로 줄어들어 집권연장에 실패하였다.
 
그러면 좌파정당은 얼마나 선전하였을까? 좌파연합(IU-ICV)6.92%의 득표율로 겨우 10석을 차지하였을 뿐이다. 좌파연합은 1982년 총선에서 3% 득표율밖에 건지지 못한 스페인 공산당(PCE)이 자구책으로 칼리스트당(Carlist Party)과 휴머니스트당(Humanist Party)과 손잡고 건설한 좌파통합정당이다. 이 좌파통합정당은 19864월에 창당된 이후 지금까지 총선 득표율을 10% 이상 올리지 못했다. 거대양당의 틈바구니에 끼어 자라지 못하는 정치적 발육부진증에 걸린 것이다.
 
그런 좌파연합에게 양당체제를 폐기하라는 민중의 요구가 제기된 이번 총선은 반전의 기회였으나,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양당체제 폐기를 요구하는 스페인 민중들은 좌파연합을 새로운 대안정당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좌파연합을 주도하는 스페인 공산당에게 일차적인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스페인 공산당은 프랑코 파쇼통치 하에서 불법화되고 극심한 탄압을 받다가 1977년에 합법화되었는데, 합법화된지 몇 주만에 20만 명 이상의 각계각층 대중들이 입당하였다. 만일 그 기세로 나갔더라면, 아마 집권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스페인 공산당의 우경화된 지도자들은 합법화 정국에서 당을 사회주의에서 이탈시켜 사민주의로 끌고 가려고 획책하였다. 그로써 당내에서 치열한 노선투쟁이 벌어졌으며, 사회주의자들의 탈당사태가 계속되었다. 당을 우경화시킨 사민주의자들이 1985년에 출당조치를 당하고 혼란이 간신히 수습되었으나, 그 동안 안팎에서 받은 상처는 너무 컸다. 스페인 민중들은 스페인 공산당을 분열당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 외면하였고, 스페인 공산당의 주도로 건설된 좌파연합에 대해서도 냉담하였다.
 
사분오열된 정당을 지지할 사람은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 정치적 단결과 조직적 통합에 대한 민중의 요구는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불변의 진리와 통한다. 그 요구를 거스르는 분열당은 망하고, 그 진리를 구현하는 통합당은 흥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스페인 좌파연합의 좌절경험에서 배우는 뼈저린 교훈이다.
 
 
무너져야 할 낡은 양당체제
 
<동아일보>20111123일부터 25일까지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해 휴대전화를 통해 실시한 여론조사결과가 나왔다. 그 조사결과에서 유달리 눈길을 끄는 것은,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양당체제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다.

놀랍게도, 응답자 가운데 70.9%가 양당체제가 바뀌어야 한다고 응답하였고, 바꿀 필요가 없다고 응답한 비율은 22.5%였다. 세대별로 구분하면, 20대 응답자 가운데 75.9%, 30대 응답자 가운데 77.5%, 40대 응답자 가운데 70.6%가 양당체제가 바뀌어야 한다고 응답하였고, 50대 응답자 가운데서는 58.6%만이 양당체제가 바뀌어야 한다고 응답하였다.
 
스페인 민중들이 스페인 사회노동당과 국민당의 양당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이 땅의 민중들도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양당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위의 여론조사결과에서 입증되었다.
 
그러면 이 땅의 민중들은 창당을 눈앞에 둔 통합진보정당을 새로운 대안정당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20111124일 한국여론조사연구소와 <시사인>이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창당을 앞둔 통합진보정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율이 14.7%로 나왔다.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이 각각 얻은 지지율을 합해도 10%를 밑돌았는데, 아직 창당되지도 않은 통합진보정당이 10% 선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이러한 여론조사결과는 통합진보정당이 창당되면 그 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율이 더 높아지리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민중의 정치적 요구가 그러하다면, 이 땅의 정치권이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낡은 양당체제에서 벗어나 3당체제로 전환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통합진보정당의 출범을 눈 앞에 두고 전국 순회활동을 벌이는 당 대표들
 
2011년 상반기에 시장경제 전반이 무너지는 경우, 출범 깃발을 높이 올린 통합진보정당이 붕괴의 충격과 혼란 속에서 대중으로부터 어떻게 자기의 정치실력을 인정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당면과제로 되었다. "시장경제 붕괴를 돌파할 진보정당의 정치실력을 대중에게 보여드리자!" 이것이 통합진보정당의 당면한 투쟁구호가 되지 않겠는가. (2011122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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