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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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5

길고 고통스러운 쇠퇴기

진실의 말팔매 <24>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최근 미국 언론에 나온 두 가지 정보가 눈길을 끈다.

하나는 미국의 대량실업에 관한 것이다. 2011년 6월 6일 미국 텔레비전방송 <cbs>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미국 전체 실업자 가운데 45.1%에 이르는 620여 만 명이 여섯 달 이상 일자리를 찾지 못한 장기실업자로 전락하였고, 6개월 이상 장기실업자 가운데 100만 명이 실업급여마저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1930년대 대공황기의 실업률을 넘어선 사상 최고의 실업률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 주택시장 붕괴에 관한 것이다. 2011년 6월 14일 미국 텔레비전방송 <cnbc>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2006년 이후 미국 주택가격이 33%나 떨어졌다는 것이다. 1930년대 대공황기에 주택가격 하락률은 31%였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악화된 것이다.

실업률은 노동계급의 소득격감을 나타내는 지수이고, 주택가격 하락률은 중산층의 자산격감을 나타내는 지수다. 소득과 자산이 대공황기에 비해 더 줄어들었다는 것은, 미국의 노동계급과 중산층이 대공황기보다 더 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음을 말해준다. 미국의 혹심한 경제난은 아래 자료에서도 입증된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 빵을 타기위해 줄지어 선 뉴욕시민들 

<로이터 통신> 2010년 1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전체 가구 가운데 18.2%가 소득감소로 식량구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어린아이가 있는 가구 가운데 24.1%가 식량구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 농무부는 2008년 한 해 동안 미국인 4,910만 명이 일정 기간 식량구입을 하지 못해 고통을 겪었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월 스트릿 저널> 2009년 12월 18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서 장기요금체납으로 전기, 가스, 수도가 끊긴 가구가 430만 가구에 이르렀다. 이것은 미국의 노동계급이 1930년대 대공황보다 더 심한 경제난에 겪고 있음을 말해준다.

 <월 스트릿 저널> 2010년 1월 5일 보도에 따르면, 2009년도 미국의 개인파산은 141만 건에 이르렀다. 이것은 미국에 금융위기가 몰아닥쳤던 2008년보다 32%가 늘어난 것이다. 2008년에 파산당한 미국인은 연소득 4만-8만 달러 수준의 빈곤층이었지만, 2009년에 파산당한 미국인은 연소득 10만-30만 달러 수준의 중산층이다.

이것은 미국의 중산층이 1930년대 대공황보다 더 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음을 말해준다. 미국의 근로대중과 중산층이 대공황기보다 더 심한 고통을 겪는 것은, 미국의 빈부격차가 사상 최대로 벌어졌음을 말해준다.

미국의 근로대중이 1930년대 대공황보다 더 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데도, 미국의 정부와 언론은 미국이 대공황에 빠졌다는 사실을 공식 인정하지 않고 있다. 대공황보다 더 심한 파국에 빠졌다는 사실이 각종 지표를 통해 드러났는 데도, 그들은 대공황(great depression)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대후퇴(great recession)이라는 어색한 신조어를 쓴다.

이것은 미국인들을 주저앉게 만들 심리적 공황(panic)을 피해보려는 궁여지책이다. 그렇지만 대공황이라는 말을 일부러 쓰지 않아도, 대공황이라는 현실은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객관적 현실로 존재한다.

△오늘의 미국 근로대중은 대공황기보다 더 심한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다.

미국은 뉴딜정책과 전시경제로 1930년대 대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정보통신산업과 군사비 삭감으로 1980년대 경제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2000년대에 또 다시 몰아닥친 대공황에서 벗어날 탈출구를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의 목을 조이는 경상수지적자와 재정수지적자와 국가채무가 이미 위험수위를 넘었고, 정보통신산업과 같은 새로운 경제성장동력이 없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대공황 탈출구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미국에게는 전시경제도 대책이 되지 못한다. 미국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지역은 한반도와 중동이지만, 한반도는 핵무장 군사강국으로 등장한 북측이 강력한 전쟁억지력을 보유하였으므로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고, 석유공급 중심지인 중동에서 전면전이 일어나면 미국 경제의 붕괴를 더 재촉하게 되므로 미국은 그 지역에서도 전쟁을 일으키지 못한다.

지난 10여 년 동안 미국은 '반테러전쟁'이라는 간판을 내건 저강도 전쟁에 줄곧 매달려왔는데, 오늘 재정수지적자에 허덕이는 미국은 '반테러전쟁'에 들어가는 전비를 대주기에도 숨이 찰 지경이다. 한 마디로, 미국을 붕괴위험에서 건져줄 대공황 탈출구는 없는 것이다.

대공황 탈출구가 없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미국 경제가 무너지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미국 경제가 무너진다는 말은 미국 경제를 중심으로 건설된 전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가 함께 무너진다는 뜻이다.

1930년대나 1980년대에는 미국 경제가 무너져도 전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가 동반붕괴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미국발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를 단일체제로 꽁꽁 묶어놓은 것이다. 세계화의 비극은 일찌감치 그렇게 잉태되었다.

이처럼 미국 경제가 무너지고 그에 따라 전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가 무너질 붕괴위험이 눈에 보이는 데도, 어떤 사람들은 현재 위험을 신자유주의 붕괴위험 정도로 가볍게 생각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전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가 전반적으로 무너질 위험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명백하게도, 21세기 자본주의시장경제는 발전전망을 완전히 상실하고 붕괴위험에 빠져버린 것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체제의 중핵이므로, 전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가 대공황으로 무너지는 것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지배해온 자본주의세계체제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 세 가지 문제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첫째, 19세기 고전이론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격화되어 자본주의체제가 필연적으로 멸망하고 사회주의체제로 이행할 것이라고 예상한 이론이다. 그러나 1930년대와 1980년대에 파국적 위기를 겪었으면서도 자본주의체제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 당시 미국이 파국적 위기를 피할 위기관리능력을 발휘하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위기관리능력은 1930년대의 뉴딜정책과 전시경제, 그리고 1980년대의 새로운 경제성장동력과 군사비 삭감으로 나타났다. 맑스가 아무리 뛰어난 분석력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거의 100년 뒤에 나타날 위기관리능력까지 예측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본주의 멸망론을 좌파적 상상력의 오류라고 생각하였다.

둘째, 2010년대에 겪고 있는 붕괴위험은 극적인 붕괴현상을 몰고 오지 않는다. 미국 경제가 무너지고 그에 따라 전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가 무너져도, 1930년대 대공황 때처럼 몇 년 몇 월 몇 일에 붕괴될 것이라고 예측할 수는 없다. 붕괴를 막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기는 했어도 위기관리능력이 극적인 붕괴를 어느 정도 방지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의 붕괴를 종말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비과학적이다. 지금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시장경제가 길고 고통스러운 쇠퇴기를 지나며 무너져내릴 것이라는 점이다. 그 쇠퇴기가 30년 동안 이어질지 아니면 50년 이상 길어질지 예측하기 힘들다.

셋째, 19세기 고전이론은 자본주의 멸망이 사회주의 이행으로 직결된다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체제가 극적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길고 고통스러운 쇠퇴기를 거치며 무너지기 때문에, 사회주의체제로 자동 이행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진보적 인류의 사회주의적 이상은 자동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역사발전을 긴 안목으로 바라보면, 자본주의체제가 길고 고통스러운 쇠퇴과정을 거치며 무너지는 한 편, 사회주의체제도 길고 복잡다단한 생성과정을 거치며 일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자본주의 쇠퇴기와 사회주의 생성기가 겹쳐지는 시대가 얼마나 길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다.

그런데 지구 위에서, 아니 인류 역사 전 기간을 통틀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지역은 한반도다. 자본주의의 쇠퇴와 사회주의의 생성이 인류사에 던져주는 난해한 물음을 풀어줄 21세기의 해답을 한반도 통일에서 찾을 수 있을까?

 미국이 쇠퇴하는 시기에 실현될 한반도 통일은 민족사적 의의와 세계사적 의의를 함께 지니는 대사변이 될 것이다. 6.15 공동선언 기념일을 맞은 오늘 그 선언의 깊고 넓은 의미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2011년 6월 15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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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1

필리핀 신애국동맹의 정체와 일본 사민당의 몰락

변혁과 진보 (35)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필리핀과 일본의 진보정당 경험을 주목하는 까닭

세계 각국에서 축적되어온 변혁과 진보의 다양한 경험들을 살펴볼 때, 우선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동아시아를 주시하게 된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 가운데 특히 필리핀과 일본을 주시하는 까닭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속국으로 전락한 그 두 나라가 예속자본주의의 길을 걸어온 역사적 경험을 지녔기 때문이다.

미국이 필리핀과 일본을 속국으로 만든 과정은 이른바 '안보조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완결되었다. 6.25 전쟁의 불길이 한반도를 휩쓸고 있었던 전시에 미국은 1951년 8월 30일 필리핀과 '상호안보조약'을 맺었고, 같은 해 9월 8일 일본과 '안보조약'을 맺었다. 미국은 필리핀, 일본과 더불어 남측과도 '안보조약'을 맺어야 했으나, 6.25 전쟁이 지속되는 바람에 뒤로 미루다가 정전협정에 조인한 직후인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안보조약'을 맺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논의의 배경에 두면서, 이 글의 관심사는 필리핀과 일본에서 진보정당들이 각기 겪어온 역사적 경험을 인식하는 문제에 집중한다.

이 땅에 민주노동당이 대표적 진보정당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필리핀에는 신애국동맹이 있고, 일본에는 사민당이 있다. 물론 민주노동당, 신애국동맹, 일본 사민당이 넓은 의미의 진보정당이라 해도 정치노선은 서로 크게 다르다. 이 땅의 민주노동당은 중도좌파정당이고, 필리핀의 신애국동맹은 좌파연합정당이고, 일본 사민당은 중도우파정당이다.

정치이념지형을 보면, 민주노동당은 필리핀 신애국동맹과 일본 사민당의 중간쯤에 자리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이념지형의 차별성이 말해주는 것은, 필리핀에서 사회계급적 모순이 격화되고 중산층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므로 필리핀 진보정당이 좌파노선을 추구하고, 일본에서 사회계급적 모순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중산층이 발달하였으므로 일본 진보정당이 중도우파노선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땅의 사회계급적 모순은 필리핀과 일본의 중간수준에 있으므로, 이 땅의 진보정당은 중도좌파노선을 추구하는 것이다.
  
만일 이 땅의 사회계급적 모순이 필리핀에서 그러한 것처럼 격화된다면,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민주노동당 이외에 새로운 좌파정당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땅의 사회계급적 모순이 일본에서 그러한 것처럼 매우 느슨해진다면, 민주노동당은 중산층을 위한 정책을 더욱 강화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현실, 사회경제적 지표, 사회계급구성 등을 비교해보면, 이 땅의 사회계급적 모순은 일본에서 그러한 것처럼 느슨해질 가능성은 보이지 않고, 되레 필리핀 쪽으로 기울어질 격화의 가능성이 보인다. 따라서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민주노동당을 건설하고 중도좌파노선을 추구하는 것은 현 시기 사회계급구성에 대한 사회변혁운동의 정합성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객관적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이 땅에서 좌파정당, 노동자계급정당, 사회주의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급진좌파노선이나, 사회변혁전망을 내려놓고 사민주의정당, 중산층정당, 복지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중도우파노선은 현 시기 사회계급구성에 대한 사회변혁운동의 정합성을 반영하지 못하는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민주노동당은 2000년에 창당되어 중도좌파노선을 추구해왔는데, 필리핀 신애국동맹은 1985년에 결성되어 26년 동안 좌파노선을 추구해왔고, 일본 사민당은 1945년에 일본 사회당으로 창당되었고 1996년에 일본 사민당으로 당명을 바꾸었으니 당명 개정 이후 11년 동안 중도우파노선을 추구해왔다. 신애국동맹의 26년 좌파노선과 일본 사민당의 15년 중도우파노선이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민주노동당이 걸어온 11년 중도좌파노선을 성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신애국동맹은 왜 정체상태에 빠졌을까?

신애국동맹(New Patriotic Alliance)은 바얀(BAYAN)이라고도 불리는 데, 바얀이란 바공 알량상 마까바얀(Bagong Alyansang Makabayan)이라는 타갈로그어 조직명칭의 약칭이다. 신애국동맹이 결성된 배경사는 196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오른다. 당시 필리핀의 사회변혁운동가들은 필리핀 사회변혁운동의 성격을 "반제자주노선에 기초한 새로운 형태의 민족민주운동(national democratic movement)"을 규정하였다. 

박정희 친미독재정권이 1972년에 '유신체제'를 세우고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이 땅의 민족민주운동을 짓밟은 것처럼, 마르코스 친미독재정권도 1972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필리핀 민족민주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이 땅의 친미독재정권은 1979년 부마민중항쟁과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군부의 학살작전으로 진압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필리핀의 친미독재정권은 1983년 8월 21일 저명한 야당지도자 베니그노 아퀴노를 암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퀴노 암살은 필리핀 민족민주운동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는 기폭제로 되었다. 1985년 5월 1일 세계노동절을 맞으며 지역과 부문으로 분산된 민중운동세력이 총결집하여 연합전선체를 창설하였으니, 그것이 신애국동맹이다.

신애국동맹에는 18개 진보적 대중조직들이 결집되었는데, 5.1운동노동센터(KMU), 필리핀농민운동(KMP), 청년동맹(Anakbayan), 필리핀학생동맹(LFS), 필리핀기독교학생운동(SCMP), 여성단체전국동맹(Gabriela), 여성노동자운동(KMK), 여성농민연합(PWA), 도시빈민여성연합(Samakana), 민주의료동맹(HEAD), 정의평화일치운동(EMJP), 진보교원동맹(ACT), 어민연합(Pamalakaya), 단결, 인정, 진보를 위한 공무원협의회(COURAGE), 교회의 책임을 위한 진흥회(PCPR), 전국소수자연합(KAMP), 국제이민자(MI), 1/4분기 폭풍운동(FQSM)이다.

신애국동맹은 "민족해방과 사회해방을 성취하기 위해 미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를 반대하는 필리핀 민중의 투쟁을 힘있게 전개한다"고 선언하여 자기의 좌파노선을 천명하고 8대 강령을 제시하였다. 1994년 4월에 채택된 신애국동맹 8대 강령은 반제자주강령, 민중민주주의강령, 경제자립강령, 민중복지강령, 민족민주문화강령, 소수민족자결강령, 양성평등강령, 국제연대강령이다. 

민주노동당과 신애국동맹은 연합전선체 형태의 정당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은데, 민주노동당은 개별당원들의 결합체인 것에 비해 신애국동맹은 대중조직들의 결합체다. 이 땅에서는 대중정당 형태의 연합전선체(민주노동당)과 대중조직 형태의 연합전선체('민중의 힘')로 역할이 분담되지만, 필리핀에서는 대중조직 형태의 연합전선체가 정당 역할까지 수행한다.
 
필리핀에는 신애국동맹이라는 진보적 대중정당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합법 전위정당인 필리핀공산당(CPP)도 있고,  그 당이 이끄는 비합법 연합전선체 민족민주전선(National Democratic Front)도 있고, 그 당의 무장조직인 신인민군(New People's Army)도 있다. 필리핀공산당은 1968년 12월 26일에 창당되었고, 민족민주전선과 신인민군은 1969년 3월 29일에 각각 창설되었다. 이것은 진보적 대중정당만 존재하는 이 땅의 정치현실과 필리핀의 정치현실이 매우 다르다는 점을 말해준다.

어느 나라에서나 진보적 대중정당은 원내진출과 대선참여를 중심으로 합법정치활동을 전개한다. 따라서 대중정당의 정치활동을 평가하는 객관적 기준은 그 정당이 대중적 지지기반을 얼마나 광범위하게 구축하였는가 하는 것으로 설정되며, 대중정당의 대중적 지지기반은 원내진출 수준에 직접적으로 반영된다. 그러면 신애국동맹의 원내진출 수준은 어떠한가?

양원제로 운영되는 필리핀 의회는 상원 24석, 하원 287석으로 구성되었는데, 필리핀 정치권을 장악한 5대 정당의 의석수는 이렇다. 자유당(Liberal Party)은 상원 4석, 하원 118석을 차지했고, 민주당(Lakas Kampi CMD)은 상원 4석, 하원 45석을 차지했고, 민족주의당 (Nacionalista Part) 상원 4석, 하원 22석을 차지했고, 국민연합(Nationalist People's Coalition)은 상원 2석, 하원 32석을 차지했고, 필리핀 대중의 힘(Force of the Filipino Masses)은 상원 2석, 하원 5석을 차지했다.

그런데 신애국동맹은 상원에서 한 석도 차지하지 못했고, 하원 287석 가운데 7석을 차지하였을 뿐이다. 또한 지방자치단체장 79석 가운데 한 석도 차지하지 못했고, 지방의회 756석 가운데서도 한 석도 차지하지 못했다. 더욱이 독자 대선후보출마는 생각하기 힘들다. 신애국동맹이 26년 동안 대중적 진보정당으로 활동해왔는데도 대중적 지지를 그것밖에 얻지 못했다면 당의 발전이 정체된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그러한 정체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신애국동맹은 진보적 대중정당이면서도 결성 이후 오랫동안 총선과 대선에 참가하지 않았다. 민중항쟁노선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좌편향으로 흘렀던 것이다. 신애국동맹이 총선에 처음 참가한 때는 결성 이후 16년이 지난 2001년이었다.

필리핀에는 비합법 전위정당도 있고, 비합법 연합전선체도 있으므로, 진보적 대중정당인 신애국동맹이 선거참여를 거부하고 민중항쟁노선에만 의존할 필요는 없는데도 민중항쟁노선에 전적으로 의존해왔다. 또한 좌파노선을 추구하는 신애국동맹은 중도우파세력들과 정치적으로 연합하여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대하고 정치역량을 강화하여야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독자발전의 길만 모색해왔다. 신애국동맹의 이러한 좌편향 정치노선은 그 당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그 당이 발전하는 길을 가로막은 전략적 오판이었다.


일본 사민당은 왜 몰락하였을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가 패망하였던 1945년에 일본에서 사회주의 정치노선을 추구하는 사회당이 창당되었다. 창당 이후 일본 사회당은 진보적 노동운동을 기본으로 하는 대중적 지지기반을 꾸준히 확대하여 제1야당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일본이 겪은 사회계급구성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우편향 오류를 반복하다가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 비극적인 몰락의 사연은 이렇다.

원래 일본 사회당의 대중적 지지기반은 일본노동조합평의회(총평)였다. 총평은 1950년 7월에 결성되어 한때 화학노조, 공무원노조, 교직원노조, 철도노조, 체신노조, 금속노조 등 노조원 550만 명을 망라하며 가장 강력한 조직력을 지녔으며, 1960년대에는 미일안보조약 페기투쟁, 주일미국군기지 철거투쟁을 주도하였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일본의 사회계급구성에 커다른 변화가 생겼다. 노동계급이 분화되고, 도시중산층이 인구구성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커다란 변화를 겪은 것이다. 일본 사회당은 그러한 사회계급구성의 변화를 주시하고 그에 대응해 새로운 전략을 모색해야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일본 사회당은 여전히 맑스주의 고전이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총평을 자기의 유일한 지지기반으로 삼았다.

일본에서 사회계급구성이 변화하는 것에 따라 노동운동도 변화을 겪었다. 일본 사회당의 지지기반이었던 총평은 날로 쇠락하더니, 1989년 11월에 자진해산하고 새로 건설된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에 흡수통합되었다. 총평 해산은 일본 사회당을 지지해온 진보적 노동운동이 사라지고, 일본 사회당이 더 이상 좌파노선을 견지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총평 해산 이후 일본 사회당은 급속히 우경화되었다.

일본 사회당은 1990년 4월에 열린 당대회에서 좌파노선을 버리고 중도좌파노선을 뛰어넘어 중도우파노선으로 급전환하였다. 당의 정치이념을 사회주의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뛰어넘어 사회민주주의로 바꾼 것이다. 1996년에는 당명도 사회당에서 사민당으로 바꾸고 자위대, 미일상호방위조약, 한일국교정상화를 인정하는 우경화의 길로 나아갔다. 그러나 일본 사회당의 우경화는 당의 부흥이 아니라 당의 몰락을 재촉하는 지름길이었다.

일본 사회당이 좌파노선을 견지하고 있었을 때는 우파정당과의 정치연합을 생각하지도 않았으나, 일단 중도우파노선으로 급전향하자 우파정당과의 정치연합에 거리낌을 느끼지 않았다. 이를테면, 일본 사회당은 1993년에 호소카와 연립정권에 참가하였는데, 호소카와 연립정권은 호소카와가 자민당에서 탈당하여 창당한 일본신당을 중심으로, 사회당, 공명당, 민사당, 신당사키가케, 사회민주연합,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가 결성한 우파연립정권이었다.

일본 사회당은 호소카와 연립정권에 참가한 뒤로 얼마 가지 않아 그 연립정권에서 탈퇴하였고, 1994년 6월 30일에는 일본 우파정당의 대표격인 자민당, 그리고 신당사키가케와 정치적으로 연합하여 3당 연립정권을 세웠다. 이것이 사회당 출신 무라야마를 총리로 하는 3당 연립정권이다.

3당 연립정권에서 사회당 출신 무라야마가 총리직을 차지했으나, 일본 사회당이 우파정당들과 정치적으로 연합한 것은, 현재 이 땅의 정치권에 비유하면, 민주노동당이 한나라당과 정치적으로 연합하여 우파연립정권을 세운 것과 마찬가지였다. 무라야마 연립정권이 미일안보조약을 인정하고 일본의 비무장 중립노선을 폐기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총평 해산과 급속한 우경화 노선이 일본 사회당에게 안겨준 것은 대중적 지지기반의 급속한 붕괴밖에 없었다. 일본의 각계각층 근로대중은 우경화한 일본 사회당을 외면하였다. 그 결과, 일본 사회당은 1996년 7월 18일에 실시된 중의원(하원) 선거에 사민당으로 당명을 바꿔 참가하였으나 480석 가운데 2석밖에 얻지 못하고 완전히 몰락하였다.

 1990년 2월 18일에 실시된 중의원 선거에서 136석을 차지한 제1야당 사민당이 불과 6년만에 재기불능상태에 빠져버린 충격적인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그 이후 사민당의 중의원 선거결과를 보면, 일본 사민당 당수로 등장한 저명한 여성정치인 도이 다까꼬의 대중적 인기가 힘을 발휘하여 2000년에 19석으로 조금 증가하였다가, 2005년과 2009년에 각각 7석으로 다시 주저앉았다.

재기불능상태에 빠진 일본 사민당은 2009년 9월 16일 하토야마 3당 연립정권에 참가하였다. 하토야마 3당 연립정권은 민주당, 사민당, 국민신당이 결성한 연립정권이다. 그런데 간판은 연립정권이었으나, 민주당이 308석, 사민당이 7석, 국민신당이 3석을 각각 차지한 상태에서 정치적으로 연합한 것이었으니 실제로는 연립정권이 아니라 민주당 정권이었다.

일본 사민당은 오키나와 후텐마 미국군기지 이전문제를 둘러싸고 친미성향의 일본 민주당과 정면충돌하는 바람에 2010년 5월 28일 연립정권에서 탈퇴하였다.

일본 사회당이 사민주의 복지담론에 매몰되어 좌파노선에서 중도우파노선으로 급선회하고 당명을 일본 사민당으로 바꾼 것은 정치적으로 몰락하는 길을 재촉하였다. 1970년대 이후 일본에서 사회계급구성이 변화되고 중산층이 발달한 것은 일본 사회당이 좌파노선을 더 이상 유지하기 못하게 만든 요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좌파노선에서 중도좌파노선을 건너뛰어 중도우파노선으로 급전환한 것은 명백한 우편향 오류였다.

만일 1970년대 이후에 일본 사회당이 중도좌파노선을 견지하면서 중산층을 포섭하는 새로운 정책을 제시하고, 사민주의정치세력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더라면 집권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민주노동당에게 필리핀 신애국동맹과 일본 사회당의 실패경험은 반면교사의 가르침을 준다

위에서 논한 것처럼, 필리핀 신애국동맹의 좌편향 오류와 일본 사회당의 우편향 오류는 그 두 나라에서 사회변혁의 앞길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되었다.

노동계급이 분화되고 중산층이 발달했다는 점에서 필리핀보다 일본의 사회계급구성에 더 가까운 이 땅에서 민주노동당이 만일 필리핀 신애국동맹처럼 중산층을 외면하고 노동계급에만 의존하며, 중도우파정당들과의 정치연대를 거부하고 민중항쟁노선에만 의존하는 것은 정치적 고립을 자초하여 당의 발전을 스스로 가로막는 정체의 지름길이다.

또한 이 땅의 사회계급구성이 필리핀보다 일본에 더 가깝다고 해서, 민주노동당이 만일 일본 사회당처럼 사회변혁을 포기하고 사민주의 복지담론에 매몰되며, 무분별하게 우파정당과 정치적으로 연합하는 것은 자기의 대중적 지지기반을 스스로 허물어버리는 몰락의 지름길이다.

오늘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노력하며 2011년 총선과 대선에 대처할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는 민주노동당에게 필리핀 신애국동맹과 일본 사회당의 실패경험은 반면교사의 가르침을 준다. (2011년 6월 11일 작성)

2011/06/07

밀란 공항에서 일어난 구두 60켤레 압수소동

진실의 말팔매 <23>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2011년 6월 1일 <로이터 통신>에 나온 뉴욕 유엔본부발 보도기사는, 유엔 제재위원회 소속 전문가 집단(Panel of Experts)이 작성한 대북제재 실태보고서를 읽어본 어느 유엔 주재 외교관이 <로이터 통신> 기자에게 흘려준 정보를 인용한 것이다. 인용보도에 따르면, 2010년 10월 이탈리아 밀란(Milan)의 오리오 알 쎄리오(Orio al Serio) 국제공항 세관당국이 북측으로 수출하기 위해 항공화물로 적재된 물품을 적발, 압수하였다.

<아사히신붕> 2011년 5월 31일 보도에 따르면, 압수물품은 미국산 수제품 탭댄스 구두 60켤레였다고 한다. 그들이 탭댄스 구두를 압수한 까닭은, 그 구두가 유엔 제재위원회 금수조치가 규정한 사치품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산 수제품 탭댄스 구두 한 켤레의 값은 180-200달러이므로, 북측은 약 12,000달러를 주고 미국산 탭댄스 구두 60켤레를 이탈리아를 거쳐 수입하려던 참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밀란 공항에서 항공화물로 적재된 탭댄스 구두 60켤레의 행선지는 중국이었다. 북측은 중국을 통해서 그 물품을 우회수입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탈리아 세관당국은 그 적재화물이 북측 수입품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을까? 중국에까지 침투하여 북측 동향을 감시하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아니면 그런 정보를 파악할 정보기관은 없다. 따라서 미국 중앙정보국이 이탈리아 세관당국에게 제보하여 압수조치를 강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자본주의나라의 부유층과 특권층은 품목당 수 만 달러 짜리 각종 사치품을 세계 각국에서 대량수입하여 향락과 방탕에 흥청망청 낭비하는데, 북측은 왜 200달러 짜리 탭댄스 구두를 수입해서는 안 되는가! 부유층과 특권층의 사치와 방탕이 극에 달한 미국이 유엔 간판을 빌려 대북금수조치를 조작해놓은 것이야말로 북측을 고립압살하려는 횡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탭댄스 구두 압수소동에서도 드러난다.



미국산 수제품 탭댄스 구두
 그런데 <아사히신붕>은 북측이 수입하려다가 압수당한 탭댄스 구두가 일반인들이 사용한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치품이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위한 무용단이 사용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압수당했다는 '해석'까지 덧붙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그러면 일본에서는 탭댄스 구두를 일반인이 아무나 신는다는 말인가? 어느 나라에서나 탭댄스 구두는 전문무용수들이나 무용애호가들이 신는 특수신발이지 아무나 신는 일반구두가 아니다.

그것은 그렇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위한 무용단이 탭댄스 구두를 신든다는 말은 또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인가. 북측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무조건 비방중상하는 악습은 <아사히신붕>보다 <중앙일보>가 한층 더 심했다. <중앙일보> 2011년 6월 2일 단독보도에 따르면, "북한에서 탭댄스를 추는 사람은 이른바 기쁨조 멤버들 뿐이다. 북한이 공개하는 '아리랑' 등 각종 공연에서도 탭댄스는 없다"는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기쁨조'라는 것을 날조해놓고, 탭댄스를 '기쁨조'에 연결시키는 수법은 악의적인 비방중상의 극치다.   

북측 무용수들 가운데도 탭댄스를 추는 무용수들이 있을까? 대북정보에 밝은 사람이라면, 북측 무용계에서도 탭댄스를 공연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북측에서는 탭댄스를 타프춤이라 한다.

남북을 가릴 것 없이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노래와 춤이 어울어진 멋과 풍류를 즐기는 민족인데, 특히 춤은 북측 군중문화에서 중요한 요소다. 예술선전대가 연주하는 흥겨운 선율에 신바람이 나서 춤판을 벌이는 인민들이나 군인들의 모습은 북측에서 일상적이다. 물론 타프춤은 특수신발을 신고 무대에 올라야 하고, 독특한 발동작을 배워야 출 수 있으므로, 전문성을 갖춘 무용수들이 공연하는 춤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북측에서 타프춤 무용수들은 인민군협주단 소속 무용수들이다. <조선중앙통신> 2009년 7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조국해방전쟁 승리 56돐 기념 조선인민군협주단 경축공연'이 평양에 있는 4.25문화회관에서 7월 26일에 진행되었는데, 그 공연은 타프춤 '승리의 명절'로 시작되었다. 인민군협주단이 6.25전쟁 기념공연 첫 종목을 타프춤으로 정한 것은, 타프춤이 인민군대에서 자주 공연되는 무용종목임을 말해준다. ( * 당시 인민군협주단의 타프춤 공연은 남측의 <연합뉴스>에서도 동영상 보도를 했다. 동영상 보기http://app.yonhapnews.co.kr/YNA/Basic/OnAir/YIBW_showMPICNewsPopup.aspx?contents_id=MYH20090728006300038  )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인민군협주단이 해외공연에서도 타프춤을 선보였다는 점이다. 인민군협주단은 2009년 12월 3일 중국 심양에서 진행된 '조선인민군협주단 초대공연'에서 타프춤 '영웅의 모습'을 공연하였다. 인민군협주단 공연에 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출항의 아침', '샘물터에서' 같은 제목의 타프춤을 공연하였음을 알 수 있다.


2009년 11월 27일 중국 베이징 중국극원에서 공연을 펼치는 조선인민군협주단.
                          아래 사진은 타프춤 공연 '영웅의 모습'. (신화통신 2009년 11월 27일 보도 사진) 


또한 <조선중앙통신> 2011년 3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 그리고 당과 군대의 책임간부들과 함께 해군협주단 공연을 관람하였는데, 그 공연에서 타프춤 '조국의 바다를 지킨 기쁨을 안고'가 종목에 올랐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북측에서 타프춤은 인민군협주단의 정식공연종목들 가운데 하나고, 특히 해군협주단이 타프춤을 공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타프춤은 왜 해군협주단과 연관되는 것일까? 해군협주단이 타프춤을 공연하는 까닭은, 해병(남측에서는 해병대원을 해병이라 하지만, 북측에서는 해군병사를 해병이라 한다)들이 전투함 갑판에서 추는 타프춤을 해군협주단 무용공연으로 형상화하였기 때문이다. 해병들의 전투적인 군무, 바로 이것이 북측에서 공연되는 타프춤인 것이다.

원래 타프춤은 아일랜드 민속무용에 기원을 둔 것인데, '신대륙 아메리카'로 건너간 아일랜드 이민자들에 의해서 미국식 탭댄스로 변환되었다. 미국식 탭댄스는 1930년대 뉴욕 연예계에서 재즈와 결합되어 최고 인기를 누린 공연종목이었다.

그런데 인민군협주단이 공연하는 타프춤은 재즈와 결합된 탭댄스가 아니다. 북측의 타프춤은 8.15 해방 직후 소련군으로부터 전해졌다. 소련 해군 소속 예술공연단이 전투함 갑판에서 바얀(Bayan)이라는 손풍금 비슷하게 생긴 러시아 전통악기로 연주하는 빠른 선율에 맞춰 타프춤을 추었다. 그 당시의 해군공연전통이 오늘 인민군에게 전승되어 인민군협주단이 타프춤을 공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유엔 제재위원회의 무식한 전문가들은, 북측에서 수입하는 타프춤 구두를 사치품목으로 규정하였고, 이탈리아 세관당국은 그 구두를 압수하는 소동을 피웠고, 남측 수구언론매체들은 악질적인 반북론자들이 날조한 '기쁨조'까지 들먹이며 정신착란에 가까운 비방중상기사를 써갈겼던 것이다.

관련보도에 따르면, 이탈리아 세관당국은 북측으로 수출하려던 영화상영설비, 음악녹음장비, 피아노도 압수하였다고 한다. 북측에서 수입하려던 그러한 수입품목들은 한결같이 인민들과 인민군대를 위한 문화예술공연에 필요한 물품들이다.

비열한 압수소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탈리아 세관당국은 벤츠 승용차, 양주, 화장품도 압수하였다. 남측의 생활경험에 비춰보면, 벤츠 승용차, 양주, 외제 화장품은 부유층과 특권층이 수입하는 사치품의 대명사이지만, 똑같은 물품이라도 북측에 들어가면 쓰임새가 전혀 달라진다. 자기들이 사는 사회체제와는 전혀 다른 사회체제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자기들에게 한정된 경험과 정보만 가지고 자기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해 중의 오해다.

이를테면, 남측에 들어간 벤츠 승용차는 부유층과 특권층만 소유하는 사치품으로 되지만, 북측에 들어간 벤츠 승용차는 관용차로 된다. 북측에서 벤츠 승용차를 관용차로 사용하는 까닭은, 그 승용차 부속품을 독일에서 수입하지 않고 북측에서 제작하여 정비비용을 절약하기 때문이다.

북측은 1980년대에 벤츠 승용차와 비슷하게 생긴 승용차 시제품을 자체 개발한 경험이 있으므로, 벤츠 승용차에 들어가는 웬만한 부속품은 자체로 제작할 수 있다. 북측은 화물차와 군용차를 중심으로 자동차산업을 발전시켜왔는데, 북측 각지에 있는 자동차부속품공장들에서 차량부속품을 생산하고, 자동차수리공장들에서 각종 차량을 정비한다.
 
또한 값비싼 양주가 남측에 들어가면 부유층과 특권층이 즐기는 사치품으로 되지만, 똑같은 양주가 북측에 들어가면 북측을 찾아간 외빈을 위한 연회나 만찬 같은 의전석상에 내오는 품목이 된다. 또한 외제 화장품이 남측에 들어가면 중산층 이상의 구매력을 가진 여성들이 소비하는 고급상품으로 되지만, 똑같은 외제 화장품이 북측에 들어가면 화장품 제조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쓸 견본상품으로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미국의 배후조종을 받는 유엔 제재위원회가 일으킨 압수소동은 북측을 고립압살하려는 충동이 빚어낸 무지막지한 횡포였음이 드러난다. 자주와 평화를 수호하려는 나라들에게 제재의 칼날을 들이대면서 제국주의 지배야욕에 장단이나 맞춰주는 유엔 제재위원회는 하루속히 해체되어야 한다. (2011년 6월 7일 작성)

2011/06/04

이름만큼 길고 복잡했던 협상과정

변혁과 진보 (34)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막을 끝낸 진보정치대통합

그 동안 '진보정치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진보진영 대표자 연석회의'라는 긴 이름의 협상이 진행되어왔다. 이름만큼 길고 복잡한 협상과정에서 협상을 진행한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웠고, 협상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협상의 고비를 바라볼 때마다 아슬아슬함 느꼈다. 협상결렬의 고비를 넘기고 '최종 합의문'에 서명하여 1막을 끝낸 때는 2011년 6월 1일 새벽 4시 40분경이었다.

진보정치대통합은 앞으로 9월까지 넉 달 동안 2막과 3막을 더 끝내야 한다. 이 달 안에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각각 '최종 합의문'에 대한 당내 승인을 거치는 과정이 2막이고, 7월부터 9월 사이에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과정이 3막이다. 앞으로 2막과 3막에서 얼마나 더 심각한 협상장애요인이 돌출할지 알 수 없다.

진보정치대통합에 대해 논하려면 1막에서 3막까지 펼쳐지는 복잡다단한 과정이 모두 끝난 뒤에 논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지만, 일단 1막을 끝냈으므로 그 동안 민주노동당이 이루어낸 성과를 돌아보는 중간평가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1막이 끝날 때 사회당이 스스로 퇴장하였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사회당은 진보정치대통합을 성사시키기 위해 협상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아니라, 진보정치대통합을 위한 협상을 결렬시키기 위해 협상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진보정치대통합을 반대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진보신당 독자파도 사회당과 똑같아 보인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회당과 진보신당 독자파는 진보정치대통합을 반대하는 반통합론자들이다. 진보정치대통합을 성사시키기 위해 애써온 민주노동당이 반통합론자들과 협상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의미하고 불가능하였다. 진보정치대통합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반통합론자들은 타협대상이 아니라 배제대상으로 규정되어야 마땅하다.

2011년 3월에 열린 진보신당 당대회에서 진보신당은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방침을 채택한 바 있는데, 그 방침들 가운데 하나는, 진보정치대통합 협상이 실패하여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이 불가능할 경우 진보신당은 자기들과 합의하는 세력들과 연합하여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진보신당 독자파가 진보신당 내부의 '최종 합의문' 승인절차에서 '최종 합의문'을 거부하는 경우, 그들은 자기들과 합의하는 세력들과 연합하여 또 다른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진보정당은 두 개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은 진보정치대통합을 저지하려는 '쎅트'의 준동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을 예고한다.  


'제3길'은 새로운 진보정당의 길이 아니다

새로운 진보정당의 강령은 이번에 연석회의에서 채택한 '최종 합의문'에 기초하여 작성될 것이다. '최종 합의문'은 새로운 진보정당이 강령에서 명시할, 사회체제 건설문제를 거론하였다. "남한 자본주의와 북한 사회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인간존중, 노동존중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측 자본주의와 북측 사회주의를 모두 비판하는 전형적인 양비론이다. 그러한 양비론은 민주노동당 강령과 진보신당 강령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민주노동당 강령은 "남한 자본주의의 천민성과 북한 사회주의의 경직성이 극복되면서 민중의 권익과 민주적 참여가 보장되는 체제"라고 표현하였고, 진보신당 강령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포로가 된 남한과 낡은 국가사회주의의 틀에 갇힌 북한"이라고 표현하였다.

민주노동당 강령에 나온 천민성과 경직성이라는 이상한 개념에 대해서는 2011년 2월 17일에 발표한 나의 글 '재개정 요구하는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에서 비판적으로 논하였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이번에 채택된 '최종 합의문'에서는 천민성과 경직성, 또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국가사회주의라는 개념을 쓰지 않은 대신 한계라는 모호한 개념을 썼다. 그러나 한계라는 모호한 개념을 썼다고 해서 양비론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원래 자본주의체제와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양비론은 이른바 '제3길(Third Way)'을 들고 나온 사민주의자들의 견해다. 사민주의자들이 말하는 '제3길'은 자본주의체제의 변형인데도 그들은 그것이 자본주의체제와 다른 어떤 새로운 사회체제인 것처럼 말하여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든다. 그러면 '제3길'을 들고 나온 사민주의 정당들이 실제로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제사회주의연맹(SI)에 가입한 사민주의 정당이 집권한 유럽 나라들은 그리스, 노르웨이, 스위스, 스페인, 아이슬랜드,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등이고, 아프리카 나라들은 가나, 나미비아, 남아공, 말리, 모잠비크, 앙골라, 짐바브웨 등이고, 중남미 나라들은 과떼말라, 니까라과, 에꾸아돌, 우루과이, 꼬스따리까, 빠라과이 등이고, 아시아 태평양 지역 나라들은 몽골, 오스트레일리아, 파키스탄 등이다.

사민주의정당이 집권한 이 나라들에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한계를 넘어선, 인간존중과 노동존중의 새로운 사회체제가 건설되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고, 한결같이 그저 그렇고 그런 나라들이다. 자본주의체제와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양비론이, 위의 나라들에서 집권한 사민주의 정당이 가는 길이라면 이 땅의 진보정당은 그 길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이 땅의 진보정당이 건설할 새로운 사회체제를 민주노동당의 관점에서 논한다면, 예속적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한 사회체제라고 표현하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진보정당에는 이념적 분광이 다양한 여러 정파들이 참가하게 될 것이므로, 민주노동당이 제시한 진보적 민주주의를 새로운 진보정당의 강령으로 명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민주의정당의 '제3길'을 비판적 검토 없이 새로운 진보정당의 강령에 받아들이는 오류도 피해야 할 것이다.


상충적 대북관을 어떻게 절충하였을까?

진보정치대통합 협상과정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대북관을 둘러싸고 심각하게 대립하였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민주노동당의 대북관은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 의거한 통일지향적 대북관이고, 진보신당의 대북관은 이른바 '세습반대론'과 '북핵반대론'에 의거한 대립적 대북관이다. 진보신당의 대립적 대북관이 한나라당의 대결적 대북관과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진보정치대통합 협상과정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대북정책과 관련하여 사실상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그처럼 타협의 여지가 없었던 대북정책에 대해 어떻게 타협하였을까? '최종 합의문'에 따르면, 새로운 진보정당은 6.15 정신에 따라 북의 체제를 인정하고, "북의 권력승계문제는 국민정서에서 이해하기 어려우며 비판적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견해를 존중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합의문에 따옴표를 친 문장을 집어넣은 것은 이 땅의 정치사에서 처음 있는 이변이다. 따옴표를 친 문장을 집어넣은 까닭은, 그 문장의 의미규정이 새로운 진보정당의 견해가 아니라 새로운 진보정당에 참가하는 특정정파의 견해라는 점을 나타내야 하였기 때문이다.

매우 이례적으로 따옴표까지 집어넣은 그 어색한 문장은 두 개의 구성부분을 억지로 연결시킨 것인데, 첫째 구성부분은 새로운 진보정당이 북측의 체제를 인정한다는 것이고, 둘째 구성부분은 새로운 진보정당이 당내 특정정파의 북측 권력승계에 대한 비판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몇 가지 논점을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북측 체제를 인정하는 것과 북측의 권력승계를 비판하는 것은 양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북측의 권력승계는 북측 체제에서 핵심 중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북측 체제를 인정한다고 하면서 북측 체제의 핵심인 권력승계를 비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적 모순이다. 만일 진보신당이 북측 체제를 인정한다면, 당연히 북측 체제의 핵심인 북측의 권력승계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종 합의문'에서는 북측 체제를 인정하는 민주노동당의 입장과 북측의 권력승계를 비판하는 진보신당의 입장이 상충적으로 병기되었다.

둘째, 새로운 진보정당이 당내 특정정파의 견해를 존중한다고 할 때, 존중행위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최종 합의문'에는 존중행위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다. 정치적 합의문에서 그런 세부사항까지 시시콜콜 명시할 수는 없으므로, 그냥 존중한다는 막연한 표현만 들어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장차 새로운 진보정당 안에서 대북정책에 관련하여 다수파의 견해와 소수파의 견해가 충돌할 때, 다수파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소수파의 견해를 존중하는 것인지 논란이 일어날 소지가 충분해 보인다.

셋째, 진보정치대통합 협상과정에서 진보신당은 '세습반대론'을 제기하였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세습반대론'은 최소한의 논리적 구성요건도 갖추지 못한, 극우파가 조작해낸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진보신당이 극우파의 궤변을 민주노동당과의 협상에 끌어들인 것은 처음부터 패착이었다.

'최종 합의문'에는 그들이 제기한 '세습반대론'이 들어가지 않았고, '권력승계비판론'만 들어갔으며, '권력승계비판론'도 새로운 진보정당의 당론이 아니라 당내 특정정파의 견해로 규정되었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이 진보신당과의 협상과정에서 가장 큰 쟁점으로 등장한 '세습반대론'을 효과적으로 억지하였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이 얻어낸 협상성과다.

북측의 권력승계를 올바로 인식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북측의 권력승계를 세습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사회주의국가의 후계체제와 입헌군주국의 왕위세습이 어떻게 다른지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다. 사물을 과학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식대상에 관한 모든 정보를 총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의 정치적 요구에 따라 골라낸 선별정보만 받아들이는데, 북측의 정치현실을 과학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진보신당은 북측의 권력승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자기들의 정치적 요구에 따라 골라낸 선별정보만 받아들인다. 그들이 골라내어 받아들인 선별정보가 바로 혈연관계다.

그러나 북측의 권력승계를 혈연관계라는 선별정보만으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자기들의 정치적 요구에 따라 골라낸 선별정보를 객관현실에 대한 총체적 정보라고 착각하는 오류다. 북측의 권력승계는 혈연관계라는 선별정보만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북측의 체제문제, 사상문제, 정치문제, 역사문제의 총체다. 북측의 체제문제, 사상문제, 정치문제, 역사문제를 총체적으로 인식할 때, 북측의 권력승계를 혈연관계로만 바라보는 무지와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국가보안법'이 철폐되어 북측에 대한 접촉과 방문, 과학적인 연구, 공정하고 자유로운 토론의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될 때, 그 때 비로소 진정한 대북인식이 가능하다. 북측의 권력승계가 세습인지 아닌지에 대해 공정하고 자유로운 토론을 한 적도 없으면서, 그리고 북측의 정치체제에 대해 연구도 하지 못했으면서, 분별 없이 '세습반대론'을 꺼내놓는 것은 이성을 저버리고 우상을 따르는 허황된 짓이다. 북측의 권력승계에 대한 공정하고 자유로운 토론은 '국가보안법' 철폐 이후에 가능하다.


유감스러운 야권연대 정체론

2011년 3월에 열린 진보신당 당대회에서 진보신당은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내부방침을 채택한 바 있다. 그 당의 내부방침은 새로운 진보정당이 민주당과 국민참여당 같은 신자유주의 정당과는 연대할 수 없고, 2012년 대선에서 연립정부도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내부방침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2012년 선거정국에서 연립정부 수립은 고사하고 야권연대마저도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이 땅의 각계각층 대중들이 요구하는 야권연대를 거부하는 것은 정치적 소수파가 자기의 정치이념을 선명하게 제시하는 정체성 고수가 아니라 자신을 골방에 스스로 가두어버리는 정치적 고립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야권연대문제에 대해 어떤 절충점을 찾았을까? '최종 합의문'에 따르면, 새로운 진보정당은 2012년 대선에서 "당의 후보를 출마시켜 진보정치세력의 승리를 위해 완주하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한다"고 명시하였다. 독자후보전술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최종 합의문'에 독자후보전술을 명시한 것은, 진보신당이 자기의 내부방침을 '최종 합의문'에 관철시킨 것이다. 이것은 진보신당이 얻어낸 성과다.

그런데 '최종 합의문'에는 독자후보전술만 들어간 것이 아니라 야권연대전술도 들어갔다. 새로운 진보정당은 2012년 대선에서 "신자유주의 극복과 관련된 주요정책들에 대한 가치를 확고한 기준으로 하여" 선거연대를 추진할 수 있다고 명시한 것이다. '최종 합의문'에 나온 선거연대는 선거전술의 일종인 야권연대를 뜻한다. '최종 합의문'에 야권연대전술을 집어넣은 것은 민주노동당이 얻어낸 성과다. 이 두 가지 상충되는 선거전술에 대해 아래와 같은 논점을 제기할 수 있다.

첫째, '최종 합의문'이 이처럼 독자후보전술과 야권연대전술 가운데 어느 한 쪽을 택하지 않고 둘 다 병기한 것은, 대선방침에 대한 불안정한 절충이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절충의 불안정성은 앞으로 선거정국이 본격적으로 가열될 때 새로운 진보정당 내부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킬 요인으로 부상할 것이다.

둘째, 새로운 진보정당의 2012년 대선방침을 독자후보의 출마와 완주로 규정한 것은 공동집권전략에 의한 연립정부 수립방안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물론 2012년 총선에서는 4.27 재보선처럼 후보단일화라는 선거연대가 실현될 수 있겠지만, 2012년 대선에서는 후보단일화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민주노동당, 민주당, 국민참여당이 각기 후보를 출마시키고 완주할 것으로 예견된다.

이것은 2012년 대선에 야권단일후보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각계각층 대중들의 정치적 요구를 외면하는 것이며, 한나라당 대선후보와의 표대결에서 야3당의 지지표가 분산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며, 2012년 대선이 종래의 후보단일화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되는 것이다.
 
셋째, 민주노동당 안에서 연립정부 수립문제에 대한 공식적인 토론을 한 차례도 진행하지 않은 채, '최종 합의문'에 진보신당의 연립정부 반대론을 비판적 검토 없이 받아들인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새로운 진보정당이 독자후보전술을 2012년 대선방침으로 채택하였으므로, 연립정부 수립문제에 대한 논의는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넷째, 2012년 대선에서 새로운 진보정당이 독자후보전술을 채택하는 경우, 의미 있는 득표율을 얻을 가능성은 없다. 예상하기 정말 꺼려지는 시나리오지만, 2012년 대선에서 야권단일후보를 출마시키지 못하는 경우, 새로운 진보정당의 독자후보전술이 의미 있는 득표율을 얻지 못한 데다가, 야3당 지지표가 분산되어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적은 표차로 승리하여 한나라당이 재집권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위험이 있다.

만일 그러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는 경우, 2012년 대선에서 야권단일후보를 내세워 한나라당 재집권을 저지해 달라고 절실히 요구한 각계각층 대중은 새로운 진보정당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2011년 6월 4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