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석의 개벽예감](423)
자주시보 2020년 12월 14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아부와 굴종이 가득 찬 사은환대
2. 모화사상, 모일사상, 모미사상
3. 비건의 거짓말과 허망한 기대
4. 협상탁자에 마주앉을 필요가 없다
1. 아부와 굴종이 가득 찬 사은환대
스티븐 비건(Stephen E. Biegun) 미국 국무부 부장관 겸 대조선특별대표가 서울을 방문하기 직전인 2020년 12월 6일 미국 국무부가 보도자료를 냈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비건 부장관은 “한미동맹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고, 인도-태평양의 안전, 안정, 번영을 위한 공동노력을 논의하고, 북조선에 대한 지속적이고 긴밀한 공조를 논의하기 위해 한국 정부 관리들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 이런 보도자료를 읽어보면, 비건 부장관이 중대현안을 논의하려고 서울을 방문했었구나 하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미국 국무부는 비건 부장관이 서울을 방문한 의미를 너무 크게 부풀려놓았다. 그가 서울을 방문한 목적은 퇴임을 앞둔 때에 서울에 가서 그 동안 알고 지낸 고위관리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려는 것 이외에 다른 게 아니었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비건 부장관이 서울을 방문한 때는 그가 퇴임하기 약 40일 전이다. 그의 부장관 임기는 2021년 1월 19일에 끝난다. 퇴임을 앞둔 그가 새로 들어설 바이든 행정부에 업무를 인계하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할 시기에 서울에 가서 무슨 중대현안을 논의할 수 있었겠는가. 실제로 그가 서울방문 중에 꺼내놓은 것은 알맹이 없는, 그저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퇴임을 앞둔 관리에게서 알맹이 있는 이야기를 들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2) 비건 부장관은 즉흥적인 초청발언을 즉석에서 수락하고 서울을 방문했는데, 그렇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2020년 11월 17일과 18일 전국경제인연합회와 주한미국상공회의소가 한미재계회의 제32차 총회를 대면회의 및 화상회의로 진행했는데, 회의참석자들 중에는 비건 부장관과 최종건 외교부 제1차관도 있었다. 그런데 최종건 제1차관은 화상회의에 참석한 비건 부장관에게 닭한마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면서 그를 초청했고, 비건 부장관은 “닭한마리라면 언제든지 좋다”고 말하면서 즉석에서 초청을 수락했다. (인삼, 대추, 밤, 당귀, 찹쌀을 닭 뱃속에 넣고 푹 끓이는 삼계탕과 달리, 닭한마리는 전골처럼 끓이는 요리인데, 그 담백한 맛에 매료된 비건 부장관은 서울에 갈 때마다 광화문에 있는 닭한마리식당을 찾는 단골손님이다.)
최종건 제1차관의 즉흥적인 초청을 수락한 비건 부장관은 2020년 12월 8일부터 11일까지 4박5일 동안 서울을 방문했다. 그런데 자기 혼자 가지 않고, 다른 관리들을 데리고 갔다. 알렉스 웡(Alex N. Wong) 미국 국무부 대조선특별부대표와 앨리슨 후커(Alliosn M. Hooker) 백안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이 비건 부장관과 함께 서울에 나타났다. 원래 최종건 제1차관은 비건 부장관에게 서울에 오면 닭한마리를 대접하고 싶다는 즉흥적인 초청의사를 전했는데, 외교부는 비건 부장관의 서울방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의 동료들까지 초청했다. 그렇게 되어 비건 부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고별방문단이 서울에 나타났던 것이다. 퇴임을 앞둔 미국 고위관리들이 고별방문단으로 서울에 나타난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2020년 12월 8일 고별방문단이 탑승한 전용기가 경기도 오산에 있는 미공군기지에 착륙했다. 오산미공군기지는 한국 정부의 행정권이 미치지 않는 미국통치구역이므로, 고별방문단은 출입국 절차를 전혀 밟지 않았다. 그들은 주한미국군사령부가 제공한 헬기를 타고 오산기지를 이륙해 서울 용산기지에 내렸다. 서울에서 4박5일 일정을 마친 고별방문단은 12월 12일 이른 아침 오산미공군기지에서 전용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사진 1>
그런데 고별방문단이 서울에 머무는 동안 해괴한 사건이 벌어졌다. 외교부 장관, 통일부 장관, 국가정보원장,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한 장관급 관리들이 줄줄이 차관급 관리인 비건을 만나느라 법석을 떨었고,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그들은 앞을 다투어 비건을 극진히 대접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문재인 정부의 고위관리들은 대등한 지위에서 외국 관리를 상대하는 외교활동의 기본원칙을 내던지고, 아부하고 굴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퇴임을 앞둔 비건에게 왜 아부하고 굴종했을까?
2020년 12월 11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 당국자들은 비건 부장관이 한미관계발전에 이바지한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비건 부장관이 한미관계발전에 무엇을 어떻게 이바지했는지 알 수 없지만, 문재인 정부의 고위관리들이 그에게 고마움을 느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비건 부장관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사례행위로 나타났는데, 그게 바로 아부와 굴종이 가득 찬 사은환대였다.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2020년 12월 9일 최종건 외교부 1차관과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각각 비건 부장관을 위해 사은회동을 했다. 2020년 12월 10일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비건 부장관을 위해 사은조찬을 차렸고,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그를 위해 사은오찬을 차렸다. 같은 날 박지원 국가정보원장과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도 각각 비건 부장관을 위해 사은회동을 했다.
사은환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2020년 12월 9일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비건 부장관을 위해 첫 번째 사은만찬을 차렸다. 12월 10일에는 최종권 외교부 1차관이 비건 부장관을 위해 두 번째 사은만찬을 차렸다. 그리고 12월 11일에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서울 한남동에 있는 장관공관에서 성대한 사은만찬을 대접했다. 퇴임을 앞둔 미국 차관급 관리가 닭한마리를 대접하고 싶다는 즉흥적인 초청을 받고 서울을 찾은 고별방문인데도, 외교부 장관, 통일부 장관, 국가정보원장,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한 장관급 관리들이 줄줄이 차관급 관리인 비건을 만나 사은회동을 했고, 사흘 동안 연속해서 그를 위해 사은만찬을 차렸다.
문재인 정부의 고위관리들이 퇴임을 앞둔 비건 부장관에게 사은환대를 베풀며 아부하고 굴종한 것은, 옛날 한양을 방문한 명제국 황제의 칙사를 극진히 영접하였던 조선왕조 고위관리들의 굴욕적인 보은환대를 연상케 한다.
2. 모화사상, 모일사상, 모미사상
‘조선왕조실록’에는 굴욕적인 보은환대에 관한 다음과 같은 역사기록이 있다.
“명나라 황제의 칙사가 와서 칙서를 받으라고 고하니 임금이 절하고 나서 서쪽 층계로 올라가 칙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조아리며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해 명을 받들지 않겠나이까 하고 아뢰었다.”
명제국 황제의 칙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조아리며 아부, 굴종한 임금은 1400년부터 1418년까지 조선왕조 제3대 국왕으로 재임한 태종 이방원이다. 태종은 명제국 황제에게 겉으로만 아부하고 굴종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1407년에 명제국을 숭모하는 모화라는 뜻을 지닌 모화루(慕華樓)라는 건축물을 세운 것만 봐도, 명제국 황제를 향한 그의 아부와 굴종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태종은 명제국 황제의 칙사가 한양을 방문할 때 지나가는 돈의문(서대문의 원래 명칭) 밖에 모화루를 세웠는데, 그 누각 앞에는 명제국 황제의 은덕을 맞이한다는 뜻을 지닌 영은문(迎恩門)을 세웠다.
명제국 황제의 칙사가 조선을 방문하면, 2품 이상 고위관리인 원접사(遠接使)가 한양을 떠나 압록강 국경에 있는 의주까지 올라가서 극진히 영접했고, 2품 이상 고위관리인 선위사(宣慰使)가 의주에서 한양에 이르는 먼 행로에 있는 5개소를 지날 때마다 성대한 환영연회를 차렸다. 명제국 황제의 칙사가 모화루에 당도하면, 왕세자가 고위관리들을 거느리고 그 앞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배례했다.
명제국 황제의 칙사가 경복궁에 입궐하면, 조선 국왕은 칙사 앞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황제의 칙서를 받고 황제에게 아부, 굴종하는 보은환대의식을 진행했다. 명제국 황제의 칙사가 한양방문을 마치고 베이징으로 돌아갈 때는 고위관리들이 영은문 왼쪽 도로변에 길게 늘어섰다가 일시에 배례하면서 그를 전송했다. <사진 2>
그런데 태종보다 한 술 더 떠서 명제국 황제에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아부하고 굴종한 조선 국왕이 있었다. 그는 1429년에 모화루를 모화관으로 개칭했고, 1433년에는 모화관을 확장, 개축하면서 모화관 남쪽에 연꽃이 만발하는 연못을 만들어놓았고, 연못 주위에 버드나무도 심었다. 명제국 황제인 영락제가 사망한 1424년, 그는 자기와 영락제는 군신관계(임금과 신하의 관계)라고 하면서 궁궐에 영락제 위패를 모시고 그 앞에서 27일 동안 소복을 입고 식음을 전폐하며 곡을 하는 해괴망측한 행동을 했다. 27일 동안이나 음식을 먹지 않고 곡을 하는 바람에 그의 건강은 매우 나빠졌다. 이처럼 명제국을 숭모하는 모화사상 중독자라고 부를 만한 그가 바로 조선의 제4대 국왕 세종이다. 세종은 27명에 이르는 조선 국왕들 가운데 가장 심한 모화사상 중독증에 걸린 왕이었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과학기술을 발전시킨 훌륭한 임금으로 후세에 알려져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동상까지 건립하고 세종대왕으로 칭송받는 그가 실은 자기 건강을 해치면서 명제국 황제에게 아부하고 굴종한 지독한 모화사상 중독자였다는 사실을 알면, 그를 더 이상 세종대왕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된다.
위에 서술한 역사적 사실은 조선왕조 통치계급이 모화사상에 얼마나 중독되었는지를 말해준다. 모화사상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 동안 조선왕조 통치계급의 사상정신에 파고들어 왕조의 몰락을 재촉했다.
19세기 말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청제국이 일본제국과 싸운 청일전쟁에서 패하고,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강점한 이후, 중국을 숭모하는 모화사상은 일본을 숭모하는 모일사상으로 변천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제국이 미제국과 싸운 태평양전쟁에서 패하고, 미제국이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을 점령한 이후, 일본을 숭모하는 모일사상은 미국을 숭모하는 모미사상으로 변천되었다.
조선왕조 518년 동안 모화사상에 중독되었고, 일제식민지시기 36년 동안 모일사상에 중독되었던 것처럼, 8.15해방 후 지금까지 75년 동안 미국의 지배를 받아온 한국은 ‘한미동맹’을 떠받드는 모미사상에 중독되었다. 이번에 문재인 정부의 장관급 인사들과 고위관리들이 서울을 고별방문한 비건 부장관을 위해 사은환대의식을 진행한 사건은, 모화사상에서 모일사상을 거쳐 모미사상으로 변천되어온 아부와 굴종의 추악한 역사가 오늘도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미동맹’이라는 허울을 쓰고 자행되는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모미사상을 타파하지 않으면, 몰락의 길을 걸을 것이다.
3. 비건의 거짓말과 허망한 기대
고별방문단은 4박5일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사은환대만 받고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명색이 미국의 고위관리인데, 어찌 얻어먹기만 할 수 있었겠는가. 비건 부장관은 회담도 했고, 강연도 했다. 2020년 12월 9일 미국 국무부는 비건 부장관이 최종건 제1차관과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각각 만나 진행한 회담과 관련하여 논평을 내놓았다. 그 논평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부장관은 한미동맹에 대한 우리의 노력을 재확인했고, 코로나-19 방역과 관련하여 한국이 지속적으로 협조해준 것에 사의를 표했다. 또한 비건 부장관은 미국이 남북협력을 지지한다는 것(U.S. support for inter-Korean cooperation)을 재확인했고, 미국이 완전한 비핵화를 추구하기 위한 조선과의 의미 있는 대화에 관여하기 위해 계속 준비해왔음을 재확인했다. 부장관은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과 지역안보를 증진시키기 위해 (한국이) 일본과 지속적으로 협력할 것을 권고했다.”
위의 인용문에 들어있는 초점은 한미동맹, 남북협력 및 조미대화, 그리고 한일안보협력으로 요약되는데, 지면이 제약된 이 글에서는 남북협력 및 조미대화에 관한 비건 부장관의 견해만 선별적으로 검토한다.
1) 비건 부장관은 미국이 남북협력을 지지한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사실을 오도하는 허위발언이다. 미국은 남북협력을 지지하기는커녕 대조선경제제재를 가중시켜 남북협력사업을 전면 차단해버렸다. 그래서 지금 남과 북이 상호협력을 하려고 해도 미국의 극단적인 대조선경제제재에 가로막혀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현실이 그런데도 비건 부장관은 미국이 남북협력을 지지한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았으니, 참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2017년 조미적대관계가 폭발 직전 상태에 이르렀을 때, 조선에 대한 적대감에 사로잡혀 광분하던 미국은 조선에 대한 무력위협과 경제제재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다. 그런 광란 속에서도 핵무력을 완성한 조선은 미국을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에 끌어냈다. 2018년 6월 15일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싱가폴 조미정상회담 전날에 진행된 회담준비접촉에서 최선희 외무성 부상(당시 직책)은 조선이 핵시험과 미사일발사시험을 중지하고, 미국인 억류자 3명을 석방하고, 지하핵시험장을 폐쇄하는 성의 있는 행동을 취했으므로, 그에 상응하여 미국은 조미정상회담 공동성명에 대조선제재를 해제한다는 조항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거듭 요구했지만, 미국측은 끝내 거부했다고 한다.
더구나 미국은 남북협력사업을 통제, 차단하기 위해 2018년 11월 20일 한미실무단(Working Group)이라는 것을 만들어놓았다. 한미실무단의 미국측 대표가 바로 비건 부장관이다. 한미실무단을 통해 남북협력사업을 통제, 차단하는 장본인의 입에서 미국이 남북협력을 지지한다는 말이 나왔으니, 그처럼 뻔뻔스러운 거짓말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을까!
2019년 2월 12일부터 13일까지 금강산에서 진행된 남북교류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남측 취재기자들이 휴대용 컴퓨터와 카메라 같은 취재장비를 가지고 금강산에 가려고 했지만, 미국은 그런 취재장비들이 제재품목에 속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방북을 가로막았다. 미국의 대조선제재는 취재장비는 물론이고 작은 나사못 한 개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남북협력을 완전 봉쇄하는 극단적인 조치다. 그런 극단적인 제재만행으로 남북협력사업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2019년 2월 28일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이 결렬되자 미국은 더욱 광란적으로 대조선제재를 가중시켰다. 미국은 2019년 3월 21일 조선 선박 49척과 조선과 거래한 것으로 의심된다는 외국 선박 46척을 무더기로 제재하는 횡포를 저질렀다. 그런 횡포가 거듭되면서 미국의 대조선제재대상은 개별인사 177명과 주요기관 313개소로 늘어났다.
2020년 1월 27일 일본 <요미우리신붕> 보도에 따르면, 정의용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백악관을 방문한 2020년 1월 8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남북협력을 재개할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의사를 전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묵묵부답으로 거부의사를 밝혔고, 그 전날 로벗 오브라이언(Robert C. O'Brien)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실장을 만났을 때도 금강산관광재개, 개성공단재개, 북측 철도 및 도로 현대화사업을 추진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오브라이언은 제재를 무시하고 남북협력을 추진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면서 반대했다고 한다.
2) 비건 부장관은 미국이 완전한 비핵화를 추구하는 조미대화를 재개하기 위해 준비되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조선과 협상을 재개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비건 부장관은 2020년 12월 10일 고별방문 중에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진행한 강연에서 조미협상을 재개하고 싶다는 의사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난 2년 반 동안(비건이 부장관으로 재임한 기간을 뜻함-옮긴이) 우리는 미국이 70년 묵은 갈등관계를 뒤로하고 새로운 관계로 함께 나아가기 위한 준비가 되어있음을 북조선에 언명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난 2년 동안 북조선측 협상상대는 참여의 기회를 잡는 것 대신에 협상의 장애물을 찾는 일에 자주 몰두함으로써 많은 기회를 허비하고 말았다. 하지만 주목되는 것은, 우리가 비록 합의사항을 진척시키지는 못했어도, 싱가폴 정상회담은 아직 온전히 건재한다는 사실이다.” <사진 3>
위의 인용문을 읽어보면, 비건 부장관이 조미협상이 파탄된 책임을 부당하게 조선에 돌리면서도,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의 합의사항을 이행하기 위한 협상을 재개하려는 의사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아산정책연구원 강연에서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의 합의사항을 이행하기 위한 협상이 재개되는 경우, 조선이 제시했던 단계적 해법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사도 표명했다. 강연에서 그는 만일 조미협상이 재개되면, “우리는 행동계획(roadmap for action)을 수립하는 것을 합의해야 하며, 그 행동계획이 궁극적으로 도달할 목표도 합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건 부장관이 그런 말을 꺼내놓기 전에 마익 팜페오(Michael R. Pompeo) 국무장관은 2020년 7월 9일 취재기자들에게 “트럼프 행정부는 북조선이 제기하는 전략적 위협에 관한 진지한 대화에 참여하는 접근법을 취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비건 부장관이 이제 와서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이 아직 건재하다느니, 조선이 제시한 단계적 해법을 받아들일 수 있다느니 하면서 협상재개의사를 표명해봤자 그것은 공허한 울림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 참석한 트럼프 대통령은 조선의 핵무기와 핵물질을 미국으로 가져가겠다는 “날강도 같은 요구”를 꺼내놓아 회담을 결렬시켰을 뿐 아니라, 회담결렬 이후 대조선제재를 더욱 광란적으로 가중시키면서 대조선전쟁연습을 형태와 방식만 바꿔 계속했는데, 이런 일련의 도발행동들을 본 조선은 조미협상에 대한 기대와 관심을 버렸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비건 부장관이 이번 고별방문 중에 조미협상을 재개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하기 훨씬 전부터 백악관과 국무부가 조선에 협상재개를 거듭 제의했건만, 조선은 응답조차 하지 않고 무시해버렸다. 2020년 1월 10일 로벗 오브라이언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미국의 온라인매체 <악시오스>와 대담하면서 “우리는 2019년 10월에 진행된 스톡홀름 조미실무회담을 다시 이어가기 바란다는 의사를 조선에 전했다”고 밝혔지만, 조선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다.
2020년 7월 16일 미국의 언론매체 <어메리컨 컨서버티브> 보도에 따르면, 백악관은 2020년 11월 미국 대통령선거 전에 그 동안 오랜 교착상태에 빠진 조미협상에 돌파구를 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런 희망을 품은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1월과 3월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친서를 보냈으나, 답신을 받지 못했다.
2020년 9월 17일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무부는 조선 외무성에 조선의 수해복구와 코로나방역을 위한 인도적 지원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회담을 제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은 응답조차 하지 않고 무시해버렸다.
위에 열거한 몇 가지 사실을 보면, 조미협상을 재개하고 싶다는 비건 부장관의 기대야말로 허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4. 협상탁자에 마주앉을 필요가 없다
조선이 미국의 협상제의에 응답하지 않는데도, 팜페오 장관과 비건 부장관이 조선에 협상재개의사를 거듭 밝힌 것은 그들이 2019년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두 차례에 걸쳐 언명한 중대한 문제를 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망각한 사연은 다음과 같다.
1) 미국 국무부 고위관리들은 2019년 6월 30일 판문점에서 진행된 조미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 언명한 중대한 문제를 망각하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조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언명한 중대한 문제는 김여정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2020년 7월 10일에 발표한 담화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담화에 따르면, 판문점 조미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북조선 경제의 밝은 전망과 경제적 지원을 설교하며 전제조건으로 추가적 비핵화조치를 요구하는 미국 대통령에게 화려한 변신과 급속한 경제번영의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 제도와 인민의 안전과 미래를 담보도 없는 제재해제 따위와 결코 맞바꾸지 않을 것이라는데 대하여서와 미국이 우리에게 강요해온 고통이 미국을 반대하는 증오로 변했으며 우리는 그 증오를 가지고 미국이 주도하는 집요한 제재봉쇄를 뚫고 우리 식대로, 우리 힘으로 살아나갈 것임을 분명히 천명하시였다”고 지적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선이 녕변핵시설과 다른 핵시설들을 폐쇄하면 그에 상응하여 미국이 제재를 완화할 수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조건을 즉석에서 거부한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 국무부 고위관리들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 거부의사를 밝힌, 말이 되지 않는 협상조건을 다시 꺼내놓고 협상을 재개해보려는 어리석은 생각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2) 미국 국무부 고위관리들은 2019년 8월 5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직접 언명한 중대한 문제를 망각하였다. 미국 언론인 밥 우드워드(Robert U. Woodward)가 트럼프 대통령과 고위관리들을 면담한 자료를 가지고 집필한 책 ‘격노(Rage)’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9년 8월 5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미국이 대조선전쟁연습을 중단하지 않은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나는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게 될 우리 두 나라의 실무협상에 앞서 도발적인 연합군사훈련이 취소 또는 연기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연합군사훈련은 취소도 연기도 되지 않았다. (중략) 조선반도 남반부에서 벌어지는 연합군사훈련은 누구를 상대로 하는 것이며, 누구를 억지하려는 것이며, 누구를 패배시키고 공격하려는 것인가? 개념적으로나 가설적으로, 전쟁준비훈련의 대상은 우리 군대이다. 이것은 우리의 오해가 아니다. (중략) 나는 이런 감정을 당신에게 숨기고 싶지 않다. 나는 정말 매우 불쾌하다.” <사진 4>
밥 우드워드가 집필한 책 ‘격노’에 따르면,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대조선전쟁연습을 중단하겠다고 공약했지만, 제임스 매티스(James N. Mattis) 당시 국방장관은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작은 단위의 군사훈련은 필요하다. 장병들이 훈련하지 않고 막사에 앉아있는 것은 좋지 않다. 군사훈련을 하지 않는 군대는 몰가치하다”고 말한 뒤에 국방부 청사로 돌아가서 사단급 대조선전쟁연습을 하지 않는 대신 연대급, 여단급, 대대급, 중대급, 소대급 대조선전쟁연습을 지상과 공중과 해상에서 중단 없이 계속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매티스가 억지주장을 늘어놓으며 트럼프 대통령의 대조선전쟁연습 중단공약을 반대했어도, 트럼프 대통령이 자기의 공약을 이행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매티스의 반대를 제지했다면, 미국의 대조선전쟁연습은 중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매티스의 억지주장을 용납하면서 대조선전쟁연습을 묵인하는 최악의 실책을 저질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대조선전쟁연습을 중단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공약이 이행되지 않은 것으로 하여 협상상대를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대조선전쟁연습이 중단되지 않는 한 조미협상을 재개하지 않을 것임을 친서에서 언명했다. 그러므로 미국은 대조선전쟁연습을 중단하지 않고 변칙적으로 계속하면서 협상을 재개해보려는 어리석은 생각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김여정 제1부부장은 2020년 7월 10일에 발표한 담화에서 “미국은 대화의 문이나 열어놓고 우리를 눅잦히면서 안전한 시간을 벌기를 원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나는 조미 사이의 심격한 대립과 풀지 못할 의견차이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미국의 결정적인 립장변화가 없는 한 올해 중 그리고 나아가 앞으로도 조미수뇌회담이 불필요하며 최소한 우리에게는 무익하다고 생각한다”고 단언했다. 이것은 조선과 미국이 협상탁자에 마주앉을 필요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미국이 협상재개를 기대하는 것은 허망한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