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5/26

드러난 독극물 제국주의의 범행

진실의 말팔매 <22>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군사학에서는 적국의 식량생산을 중단시키고 적군이 숨는 산림을 황폐화하는 것을 고엽전(herbicidal warfare)의 작전목표로 규정한다. 1960년대 초에 미국 군부는 고엽전을 벌이기 위해 다우 케미컬(Dow Chemical)을 비롯한 10개 대형 화학회사를 동원하여 일곱 종류의 맹독성 화학물질을 개발, 생산하였다.

그 가운데는 인체에 치명적인 맹독성 다이옥신(dioxin)이 들어간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라는 악명 높은 화학물질이 있다. 이 죽음의 화학물질은 단순한 화학물질이 아니라 미국군이 실제로 고엽전에 사용한 전쟁물자다.
베트남 전쟁사 자료를 읽어보면, 프랑스에 이어 베트남 전쟁을 도발한 미국은 1962년부터 1971년까지 10년 동안 무려 7천577만6,000 리터나 되는 각종 고엽제를 남베트남 각지에 마구 살포하는 끔찍스러운 화학전을 자행하였다. 미국군은 남베트남만이 아니라 인접국들인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들어가서도 고엽제를 살포하는 화학전을 자행하였다.

당시 미국군은 3,800리터가 들어가는 대형 저장탱크를 장착한 미국군 수송기(C-123) 편대를 출격시켜 작전목표 상공에서 나란히 비행하면서 드넓은 지역 상공에서 고엽제를 살포하였다. 그들은 수송기를 동원하여 공중살포만 한 것이 아니라, 미국군 기지 주변에 있는 숲을 제거하기 위해 지상에서도 분무기, 트럭, 헬기 등을 동원하여 고엽제를 마구 뿌렸다.
  
△베트남에서 고엽제를 살포하는 미국군수송기(C-123)

전쟁자료에 따르면, 미국군이 남베트남에서 자행한 고엽전으로 20,000㎢의 밀림과 2,000㎢의 농지가 황폐화되었다. 당시 남베트남 전체 밀림면적의 약 20%가 저들의 고엽전으로 황폐화된 것이다.

미국군이 자행한 고엽전은 밀림과 농지를 황폐화한 것만 아니라, 베트남 민중에게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전쟁참화를 입혔다. 신경마비와 인체변형, 백혈병을 비롯한 각종 암 발병, 기형아 출산이 베트남 민중의 목숨을 앗아가며 참혹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고엽제로 인해 기형아로 태어난 베트남 어린이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이처럼 인류가 겪은 최악의 화학전을 직접 지시한 사람은 1961년 1월부터 1963년 11월까지 재임한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존 케네디였다. 케네디는 암살로 생을 마쳤지만, 만일 그가 살았다면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고 극악한 화학전을 도발한 죄목 하나만으로도 전범으로 재판을 받아야 하였다.

그런데도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은, 집요하게 추진된 우민화 정책에 도취한 미국인들은 그런 흉악한 전범을 미국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서 훌륭한 대통령으로 우러르고 있다. 우민화 정책에 도취된 이 땅의 일반대중이 친일파 민족반역자이며, 독재자인 박정희를 경제개발을 성공시킨 훌륭한 대통령으로 칭송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미국 군부가 베트남 전쟁에서만 고엽전을 자행한 것이 아니라 같은 시기에 한반도에서도 고엽전을 동시에 자행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동안 군사기밀로 은폐되었다가 이번에 드러난 것은, 미국이 1961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다시 말해서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베트남과 한반도에서 동시에 고엽전을 자행해왔다는 충격적인 사실이다. 저들이 한반도에서 자행한 고엽전은 비무장지대와 주한미국군 기지 주변의 울창한 숲을 제거하는 화학전이었다.

베트남 전쟁은 1975년에 미국의 패배로 끝났는데, 패전하여 철군한 미국군은 남베트남에서 쓰다 남은 엄청난 분량의 고엽제를 그 땅에 버려두고 빠져나왔까? 그들은 값비싼 전쟁물자인 고엽제가 북베트남군의 손에 들어가도록 방치할 수 없었다. 패전한 미국군은 고엽제를 비롯한 화학전 전쟁물자를 모조리 한반도로 몰래 실어날랐다. 1975년 이후 주한미국군기지 보관창고들에는 베트남에서 밀려들어온 고엽제가 넘쳐났다.


55갤런 드럼통에 가득 담긴 에이전트 오렌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베트남 전쟁 종전으로부터 3년이 지난 1978년에 주한미국군사령관은 전쟁물자 보관창고에 넘쳐나는 고엽제를 전량 폐기하라는 긴급명령을 내렸다. 베트남 전쟁에서 패전한 그들에게 잔인한 고엽전 범죄를 추궁하는 국제사회의 드센 규탄이 제기될 것을 두려워한 미국 군부는 이 땅에 보관 중이던 고엽제를 전량 폐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국군 지휘부의 갑작스러운 폐기명령에 따라, 주한미국군은 기지 밖에 나가 지역주민들의 눈을 피해 매립장소를 찾아볼 시간적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당시 주한미국군이 그처럼 독성이 강한 고엽제를 자기들 발밑에 서둘러 파묻은 까닭이 거기에 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그들은 화학물질 보관창고에서 고엽제를 싣고 온 트럭까지 통째로 땅밑에 파묻어 버렸다.  

지금까지 드러난 것은, 경상북도 왜관에 있는 미국군 기지 캠프 캐럴과, 경기도 부천에 있는 캠프 머서에서 에이전트 오렌지를 비롯한 고엽전 화학물질을 몰래 파묻은 매립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땅에 있는 90여 개나 되는 미국군 기지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기지들에서 고엽전 화학물질을 몰래 파묻는 범행이 저질러졌는지 기록에 남아있지 않으니 알 수 없다.

당시 고엽전 화학물질을 캠프 캐럴에 파묻는 작업에 동원되었던 미국군 출신자가 이번에 언론에 그 범행을 폭로하는 바람에, 33년 전에 있었던 미국군의 범행이 이제서야 세상에 드러났다. 중요한 것은, 미국군이 33년 전에 이 땅에 파묻은 것은 단순한 화학물질이 아니라,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하고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사용한 화학전 물자라는 점이다.


 캠프 캐럴에 고엽제를 파묻은 사실을  폭로한 스티븐 하우스 전 주한미국군 사병

제네바 국제협약이 사용을 금지한 대량살상무기에는 핵무기만이 아니라 화학무기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이번에 일어난 고엽제 매립발각사건은 민간 화학공장이 폐기화학물질을 땅에 파묻은 환경범죄가 아니라 화학전 행위를 은폐한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제네바 국제협정은 어떤 형태의 화학전도 금지하고 있으므로, 미국군은 제네바 국제협정을 위반한 화학전을 이 땅에서 자행하고 나서 자기들의 전쟁범죄를 은폐하려고 고엽제 잔여분을 몰래 땅에 파묻었던 것이다.

△캠프 캐럴을 둘러 보는 민관합동조사단. 
가운데는 데이비드 폭스 주한 미 8군 준장(주한미국군 기지관리사령관)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미국군의 고엽제 매립을 환경재앙으로 규정하는 것은 핵심을 놓치고 변죽만 울리는 오류다. 미국군의 고엽제 매립은 명백하게도 화학전 범죄인 것이다. 지난 5,000년 동안 우리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아 대대로 살아온 이 땅에, 그리고 현 세대가 후대들에게 대대손손 물려줄 신성한 우리 강토에 집단발병을 일으킬 독극물을 주입한 미국군의 극악한 만행은 독극물 제국주의가 저지른 전형적인 화학전 범죄다.

그러므로 저들이 저지른 화학전 범죄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해 주한미국군 기지 전체를 정밀조사하여야 한다. 그 조사결과에 따라, 미국 정부로부터 피해배상금을 받아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매립을 지휘한 당시 미국군 지휘관들을 군사법정에 세워 화학전 범죄로 기소, 처벌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그런 악질적 전범행위를 뻔히 보았으면서도 항변 한 마디 하지 못하고 파문이 커지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꼴이다. 친미굴종으로 뼛속까지 온통 순화된 저들의 입에서 미국에 대한 그 어떤 항변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해가 서쪽에서 뜨기를 기대하는 것 같은 어리석은 일이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미국군이 이 땅에서 저지르는 각종 범죄를 용인해주는 '주둔군지위협정(SOFA)'이 남아있는 한, 미국군 범죄를 처벌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주둔군지위협정'에 따르면, '성역'처럼 불가침을 보장받는 미국군 기지에 대한 조사는 사실상 불가능하고, 설령 범죄사실이 입증되었어도 미국군에 대한 사법처리는 불가능하고, 피해지역주민들이 고엽제 독극물에 죽어나갔어도 미국에게 아무런 피해보상도 청구할 수 없다. 어떻게 이런 굴욕협정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지구 위에 있는 수많은 나라들 가운데 그처럼 주권을 완전히 포기한 굴욕협정을 맺은 나라는 단 한 나라도 없다. 국제법은 그만두고 일반상식으로 판단해도, 주권국가가 아닌 식민지에서나 그런 굴욕협정이 허용되는 것이다. 독극물 제국주의가 전쟁범죄와 집단발병을 일으켰어도 '주둔군지위협정'이라는 족쇄가 이 땅에 단단히 채워졌기 때문에 항변 한 마디 하지 못하는 치욕과 굴종, 이것이 오늘 고엽제 매립발각사건에서 드러난 참담한 현실이다.


△서울 용산 한미연합사령부 앞에서 주한미국군 규탄, 진상규명촉구 기자회견을 갖는 민주노동당과 한국진보연대 (민주노동당 <진보정치> 2011년 5월 20일 보도사진)

이번에 고엽제 매립발각사건을 겪으며, 한미동맹이 이 땅을 지켜준다는 거짓말에 속아온 60년 묵은 무지와 미몽에서 깨어나야 한다. 전쟁범죄와 집단발병을 일으키는 독극물 제국주의를 배격하고, 미국이 이 땅에 채워놓은 치욕과 굴종의 족쇄를 끊어버리는 반미자주화운동이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죽음과 고통에서 건지는 재생의 활로다. (2011년 5월 26일 작성)

2011/05/20

이 땅의 민중은 그 길에 서리라

변혁과 진보(33)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4대 투쟁강령을 제시하다

2011년 4월 8일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세상을 바꾸는 민중의 힘(준)'이 출범을 선언하였다. '세상을 바꾸는 민중의 힘'이라는 명칭은, 민중의 힘으로, 오직 민중의 단결된 힘으로 낡고 썩은 자본독재의 세상을 새롭고 건강한 민중주체의 세상으로 바꾸는 사회변혁의 진리를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민중의 힘' 공동대표단은 2개 진보정당 대표들과 6개 민중운동조직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2개 진보정당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고, 6개 민중운동조직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국빈민연합, 빈민해방실천연대, 전국여성연대다. '민중의 힘'에는 40여 개 사회단체들이 참가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공동대표단을 구성한 2개 진보정당과 6개 민중운동조직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 '민중의 힘'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6개 민중운동조직은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여성운동을 각각 대표하는 진보적 대중단체들이다.

△민주노총에서 열린 ' 민중의 힘 (준)' 출범 기자회견 모습. (뉴시스 2011년 4월 8일 보도 사진)

'민중의 힘'이 제시한 투쟁강령은 출범선언문에 들어있는데, 4대 투쟁강령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기층민중, 여성, 사회적 약자의 인간적인 삶과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한다.
둘째, 신자유주의 정책을 철폐하기 위해 투쟁한다.
셋째, 반민주적 제도와 악법을 철폐하고, 민중의 민주적 권리를 확대하며 사회공공성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한다
넷째, 제국주의 전쟁책동을 반대하고, 민족자주와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한다.

'민중의 힘'을 상설연대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공동투쟁강령을 채택하고 공동대표단을 구성하였으므로 연대수준을 넘어 연합수준으로 전진한 것으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연합전선체라고 불러야 더 정확하다. 사회변혁이라는 말만 들어도 흠칫 놀라는 수구언론매체들은 '민중의 힘' 출범을 애써 외면하였지만, 그들이 외면하건 말건 상관없이 '민중의 힘'은 사회변혁을 수행하는 연합전선체로 이 땅의 정치무대에 당당히 등장한 것이다.


형태와 임무와 역할이 구별된다

두 단계 사회변혁론의 견지에서 보면, 민주노동당의 지위나 '민중의 힘'의 지위는 똑같이 연합전선체이지만, 형태와 임무와 역할이 구별된다. 

민주노동당은 정당 형태의 연합전선체이고, '민중의 힘'은 대중조직 형태의 연합전선체다. 정당 형태로 결성된 연합전선체의 기본임무는 진보정치 실현이고, 대중조직 형태로 결성된 연합전선체의 기본임무는 대중투쟁 전개다.

△대중조직 형태로 결성된 연합전선체 '민중의 힘'의 기본임무는 대중투쟁 전개다. ( 노동계급과 각계각층 민중들이 모인 121주년 세계노동절 대회.  민주노총 <노동과 세계> 2011년 5월 1일 보도사진) 

진보정치를 실현하는 민주노동당은, 각계각층의 지지를 받으며 정치권에서 정당활동을 전개하고 진보적 정권교체를 추구한다. 그에 비해, 대중투쟁을 전개하는 '민중의 힘'은, 각계각층 투쟁력을 집중시킨 폭넓은 연합전선을 구축, 강화함으로써 민중의 분산적, 자연발생적 투쟁을 단결적, 변혁지향적 투쟁으로 이끌어 간다. 연합전선체가 이끌어 가는 민중의 단결적, 변혁지향적 투쟁의 3대 당면과업은, '민중의 힘' 출범선언문에 제시된 것처럼, 민주적 권리 확대, 신자유주의 제거, 사회공공성 강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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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역할이 서로 다르다. 정당 형태의 연합전선체는 기층민중에게 고통과 불행을 주는 우파정권을 물리치고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활동을 전개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파정당의 폭정으로 파탄위기에 내몰린 중산층을 위한 정치활동도 전개한다. 정당 형태의 연합전선체의 지지기반은 기층민중과 중산층을 포괄하는 가장 폭넓은 지지기반이다. 따라서 정당 형태의 연합전선체는 중산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 같은 중도우파정당과도 정치적으로 연합하여 우파정권에 맞서 싸우게 된다.

그와 달리, 대중조직 형태의 연합전선체는 노동계급 중심성을 강화하는 가운데 기층민중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 사업에 주력하면서, 중산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 같은 중도우파정당과도 정치적으로 연대하여 우파정권에 맞서싸우게 된다.


좌경급진주의와 속히 결별하라

그런데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겠다고 하면서,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 같은 중도우파정당과 정치적으로 연합할 가능성을 배제하거나 심지어 정치적으로 연대할 가능성마저 배제하려는 것은, 진보정당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려는 자승자박의 맹동이므로 무조건 배격해야 한다. 또한 중산층을 배제하고 기층민중만으로 사회변혁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현 시기 우리 사회에 성립된 사회계급관계를 외면한 비과학적 발상이며, 낮은 단계를 무시하고 높은 단계에서 사회변혁을 시작하려는 급진주의 조급증의 발로인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 같은 중도우파정당과 정치적으로 연대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적으로 연합하려는 것은, 지난 시기 그 두 당이 신자유주의를 수용하였던 중대한 오류를 못본 척 눈감아주자는 것이 아니라, 그 두 당을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길로 견인하여 신자유주의 자체를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노력이다. 그런 정치적 노력이 힘들고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노동당과 '민중의 힘'이 힘을 합해 중도우파정당들을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길로 견인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신자유주의를 제거할 방도는 어디에서도 찾을 길 없다.

만일 조급증에 걸린 좌경급진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따른다면,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내리고 사회주의 강령을 들어야 하며, 진보적 대중정당(progressive mass party)이 아니라 노동자 정당(workers party)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도우파정당들을 배척하면서 사회주의 강령을 든 노동자 정당을 건설하려는 좌경급진주의는, 현 시기 이 땅의 사회계급관계를 반영하는 과학적 인식에 눈을 감아버리고, 사회변혁을 단계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전략적 판단을 포기한 자기파멸적 맹동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특히 지금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논의과정에 참여한 민주노동당은 합리적인 좌파들과는 당연히 통합논의를 계속 해야 하지만, 그처럼 백해무익한 좌경급진주의와는 속히 결별해야 '쎅트(sect)'의 해악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만이 아니라, '민중의 힘'도 마땅히 좌경급진주의와 결별하고, '쎅트'의 준동를 배격하는 투쟁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민중의 힘' 출범의 정치적 의의

'민중의 힘' 출범의 정치적 의의는, 진보적 대중정당과 진보적 대중단체이 힘을 합해 대규모 연합전선체를 결성하였다는 데 있다. 진보적 대중정당과 진보적 대중단체들이 연합전선체를 결성한 것은, 민중의 분산된 힘을 총결집하여 낮은 단계 사회변혁을 수행하는 강력한 전략적 투쟁거점을 구축한 것이다. 이것은 낮은 단계 사회변혁을 수행할 조직태세를 갖추었음을 뜻한다.

진보적 대중정당과 진보적 대중단체들이 연합전선체를 결성하여 낮은 단계 사회변혁을 추진하려면, '민중의 힘' 출범선언문에 제시된 것처럼, 민주적 권리를 확대하고, 신자유주의를 제거하며, 사회공공성을 강화하는 3대 당면과업을 수행해야 한다. 3대 당면과업을 수행하는 것은, 낮은 단계 사회변혁의 요구에 맞게 남측의 사회계급관계를 상당부분 변화시키는 것이다.

낮은 단계 사회변혁을 수행하는 연합전선체는, 민주노동당이나 '민중의 힘'이나 가릴 것 없이, 계급노선과 대중노선을 결합하는 원칙을 견지하게 된다. 원래 계급노선을 견지한다는 말은 민주노총이 사회변혁을 수행한다는 뜻이 아니다. 노동조합은 대중단체 범주에 속하는 것이지 정당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장차 높은 단계 사회변혁을 수행할 주체는 어디까지나 노동자 정당이지 진보적 노동조합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낮은 단계 사회변혁을 수행할 조직태세를 이제 막 갖추었을 뿐이다. 노동계급의 정치역량이 아직 미성숙하고, 정치세력관계에서 노동계급이 단독으로 노동자 정당을 건설하지 못하는 현재 조건에서, 다시 말해서 낮은 단계 사회변혁을 실현하여야 하는 현재 조건에서는 당연히 각계각층이 참가하는 정당 형태의 연합전선체(민주노동당)와 대중조직 형태의 연합전선체(민중의 힘)를 함께 건설하고, 그 양대 기축에 의거하여 사회변혁운동을 떠밀고 나가야 한다.

따라서 '민중의 힘'은 계급노선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계급노선과 대중노선의 결합을 추구해야 한다. 계급노선과 대중노선의 결합은 민주적 권리를 확대하고, 신자유주의를 제거하며, 사회공공성을 강화하는 3대 정치과업을 수행하는 낮은 단계 사회변혁의 당면요구다.

연합전선체가 낮은 단계 사회변혁을 수행하기 위해 계급노선과 대중노선의 결합을 추구하는 것은, 자본독재를 타파하지도 못하면서 자본독재을 타파할 것처럼 무모한 좌경적 언사나 남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반민주적 제도와 악법부터 철폐하여 민주적 권리를 확대하고, 자본독재의 극악한 형태인 신자유주의부터 제거하여 근로대중의 인간적 삶을 보장하는 것이다.


사회공공성 강화와 연립정부 수립

주목하는 것은, 민주적 권리를 확대하고 신자유주의를 제거해야 사회공공성을 강화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지금처럼 민주적 권리가 억압당하고 신자유주의가 악랄하게 횡포를 부리는 사회에서 그 어떤 사회공공성을 강화한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 허튼 소리다. 

민주적 권리를 억압하는 신자유주의 폭정 아래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기층민중과 중산층이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민중의 힘'의 투쟁을 지지할 것이므로, '민중의 힘'이 신자유주의 제거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결코 난제가 아니다.

진짜 어려운 과제는 신자유주의를 제거한 뒤에 제기된다. 신자유주의를 제거한 뒤에 제기되는 새로운 과제는 사회공공성을 결정적으로 강화하여 중요산업 국유화를 준비하는 것인데, 사회공공성을 강화하는 것은 최소한 연립정부를 세울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만일 내년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연립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민주당이 단독으로 집권하는 경우, 사회공공성 강화는 실현하지 못하게 된다. 그와 반대로, 연립정부가 세워지는 경우, 2013년부터 연립정부 임기 5년 동안 달성해야 할 정책목표들 가운데는 민주적 권리를 확대하고 신자유주의를 제거하고 사회공공성을 강화하는 중요한 정책목표들이 당연히 포함된다.

그러나 만일 연립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민주당이 단독으로 집권하여 사회공공성을 강화하지 못하는 경우, 근로대중을 위한 복지정책을 실시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정치과업도 실현할 수 없으며, 그러한 정치과업을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 낮은 단계 사회변혁의 전략목표로 제시된 중요산업 국유화에 대해서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민중의 힘'은 조직화된 대중투쟁역량으로 사회공공성 강화를 강력히 요구함으로써, 민주노동당이 중도우파정당들과 공동집권전략을 합의하는 복잡하고 험난한 협상과정에서 중도우파정당들이 근로대중을 위한 복지정책을 실시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정치과업을 수용하도록 압박해야 할 것이다.   


이 땅의 민중은 그 길에 서리라

'민중의 힘' 출범의 정치적 의의는, 남측의 사회계급관계를 변화시킬 대중운동역량을 조직화하는 정치과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반도 정세를 변화시킬 대중운동역량을 조직화하는 전략적 투쟁거점을 구축하였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한반도 정세에서 변화를 일으킬 3대 정치노선을 견지하는 대중운동역량을 조직화하는 전략적 투쟁거점을 구축한 것이다. 3대 정치노선이란, '민중의 힘' 출범선언문에 제시된 것처럼, 반제자주노선과 반전평화노선과 자주적 평화통일노선이다. 한반도 정세를 변화시킬 3대 정치노선은 대미예속, 전쟁위험, 분단체제를 타파하는 정치노선이며, 낮은 단계 사회변혁에서 흔들림 없이 견지해야 할 정치노선이다.

중요한 것은, 반제자주노선, 반전평화노선, 자주적 평화통일노선을 견지하는 것이 남측의 사회계급관계를 낮은 단계 사회변혁의 요구에 따라 변화시키는 3대 정치과업 수행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이다. 위에서 논한 것처럼, 3대 정치과업은 민주적 권리를 확대하고, 신자유주의를 제거하며, 사회공공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처럼 남측이 미국에게 예속되고, 한반도에서 미국의 전쟁책동이 지속되며, 남북대결적 분단체제가 유지된다면, 남측에서 민주적 권리를 확대하고, 신자유주의를 제거하며, 사회공공성을 강화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집권 10년 동안 3대 정치노선을 견지하지 못한 까닭에 민주적 권리를 확대한다는 말잔치만 벌였고, 신자유주의를 제거하고 사회공공성을 강화하기는커녕 되레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고 사회공공성이 훼손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연합전선체가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실패경험을 딛고 앞으로 전진하여 민주적 권리 확대, 신자유주의 제거, 사회공공성 강화를 실현하려면, 마땅히 반제자주노선, 반전평화노선, 자주적 평화통일노선을 견지해야 한다. 3대 정치노선에 따라 자주, 평화, 통일로 나아가는 한반도 정세의 질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할 때, 바로 그런 변화 속에서 3대 투쟁강령에 따라 민주적 권리를 확대하고, 신자유주의를 제거하며, 사회공공성을 강화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그들 자신에게 묻는다. '민중의 힘'은 어디로 가는가? 그들은 대답한다. '민중의 힘'이 가는 길은 폭력경찰에게 두들겨맞고 국정원 요원들에게 끌려가는 저항과 수난의 길이 아니라, 3대 정치과업을 수행하고 3대 정치노선을 견지하는 낮은 단계 사회변혁의 길이라고 당당히 대답한다. 누구나 믿고 있듯이, 역사는 민중의 힘으로 발전해왔으며, 사회변혁의 길은 민중의 힘으로 기어이 쟁취할 위대한 승리의 길이다. 이제 그 길에 서리라. 이 땅의 민중은 '민중의 힘'과 함께 그 길에 굳건히 서리라. (2011년 5월 20일 작성)

2011/05/19

100자루의 연필을 깎는 어머니

진실의 말팔매 <21>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981년 1월 말 어느 날 프랑스 파리의 샤를 드골 국제공항. 여행객들로 붐비는 입국장에서 젊은 남녀 20여 명이 엉엉 우는 여아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하는 프랑스인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주위에 몰려들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당시 프랑스에서 열린 국제교예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공항에 내린 평양교예단 단원들이었고, 엉엉 우는 여아는 프랑스인 가정에 넘겨주기 위해 서울에서 데려온 입양아였다.

생전 처음보는 백인 얼굴, 낯설고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따라갈 수 없어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던 그 여아의 귀에 어디선가 귀익은 우리말을 주고받는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여아는 우리말을 주고받는 그들에게로 달려가 옷소매를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뜻하지 않게 우리 동포아이를 만난 것은 이채로운 일었건만, 그 여야가 우는 사연을 알게 된 평양교예단 단원들이 받은 충격과 슬픔은 컸다. 자기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아이의 멀어져가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여성단원들은 참았던 울음을 끝내 터뜨며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보살핌을 받아야 할 이 땅의 소외계층에게 보살핌은 커녕 슬픔과 비극만 강요해온 역대 정권들이 저지른 악행이 숱하게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용납하기 힘든 악행이 고아수출이다. 박정희 정권은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강탈한 1961년에 이른바 '고아입양특례법'이라는 것을 제정하여 해외입양을 적극 추진하였다.



해외입양산업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는 1985년인데, 그 한 해 동안 8,835명이 해외로 팔려나갔다. 6.25 전쟁 이후 해외입양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 넘겨진 아이는 2008년 현재 156,000명에 이른다. 연간 해외입양 아동수는 1995년에 2,000명 선이었는데, 1996년에는 3,000명 선으로 늘어났고, 경제위기사태가 일어난 1999년부터는 4,000명 선으로 급증했다. 2000년 4,046명, 2001년 4,206명, 2002년 4,059명, 2003년 3,851명, 2004년 3,899명, 2005년 3,562명, 2006년 3,231명이었다.

(도표를 한번 누르면 확대된 도표를 볼 수 있음)

이 땅의 역대 정권들이 해외입양정책을 추진한 목적은, 고아들을 보살펴줄 사회복지비용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들이 추진한 것은 명색이 입양정책이지 실제로는 우리 아이들을 다른 나라에 내다버리는 기아정책이나 다르지 않았다. 우리 땅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들을 부모가 없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해외 각국에 내다버리는 잔혹한 정권은 이미 존재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 중앙일보 보도사진 (2004년 8월 5일)

1998년 10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해외입양인 23명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150,000여 명에 이르는 해외입양인들에게 공식사과하였으나 사과의 말만 남겼을 뿐 달라진 것은 없었다. 2005년 노무현 정부 시기에 김근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앞으로 4-5년 안에 해외입양을 폐지하겠다고 말했으나, 후임자인 유시민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2006년 8월 언론과 대담하는 자리에서 10년 안에 해외입양을 폐지하겠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는 집권기간이 거의 끝나가던 2007년에 가서야 생후 6개월 이하 영아의 해외입양을 금지시키고 해외입양기관들에게 해외입양 자제를 권고하였다. 그 바람에 해외입양 아동수는 2007년 1,264명, 2008년 1,250명으로 급감하였다. 이것은 정부가 우리 아이들에 대해 정책적 관심을 가지고 입양정책을 근본적으로 전환할 때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이 땅에 자주적 민주정권이 세워지는 날, 그 정권이 수행해야할 정치과업들 가운데 하나가 고아수출 전면중단과 고아들을 위한 국가적 차원의 복지정책이다.
   
그러면 북측에서는 고아를 어떻게 키우고 있을까? 북측은 국가적 차원에서 고아들을 위한 복지정책을 실시하였다. 젖먹이부터 만 5살까지는 육아원에서 맡아 키우고, 만 5살부터 만 7살까지는 애육원에서 맡아 키우고, 만 7살부터 만 15살까지는 초등학원과 중등학원에서 각각 맡아 키운다. 육아원 원장은 의사와 간호사 사이의 전문직인 준의 이상의 자격증이 있어야 하며, 그 곳에서 아이들을 보살피는 사람도 간호사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 그 아이들에게는 분유와 식품이 최우선으로 공급된다.

북측은 미국과 전면전을 벌이던 6.25 전쟁시기에 갑자기 늘어난 수많은 전쟁고아들을 키울 수 없게 되자, 1952년부터 1959년까지 동유럽 각국에 보내 해외위탁교육을 실시하였다. 2004년 6월 23일 <kbs 1TV>는 루마니아 국립기록영화보존소에서 발굴한, 북측 전쟁고아들을 키우는 위탁교육현장을 찍은 동영상을 방영하였다.

동영상에 따르면, 북측은 1952년부터 1959년까지 해마다 전쟁고아 3,000여 명을 10여 개에 달하는 루마니아 위탁교육시설로 보냈는데, 그 위탁교육시설에 조선인민학교를 세우고, 북측 교사들을 현지에 파견하여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가르치는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남측에서 생겨난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으로 나갈 때, 북측은 남측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해외위탁교육을 통해 전쟁고아들을 정성껏 키운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6.25 전쟁 시기 전쟁고아를 수양딸로 삼아 키우며 고아들에 대한 사랑을 몸소 실천하였다. 평양 서성제1중학교 김경선 부교장이 바로 그 수양딸이다. 김일성 주석은 전쟁고아 모두를 자신의 수양아들, 수양딸로 여겼고, 전쟁의 불길 속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자기들을 해외위탁교육으로 따뜻이 보살펴주는 김일성 주석을 아버지로 부르며 진심으로 따랐다. 그들은 해외위탁교육을 마치고 북측에 돌아가서 대학에 진학하거나 해외유학을 하여 우수한 인재로 자라났으며, 1970년대부터 각계층에 지도간부로 진출하였다. 김일성 주석을 아버지로 부르며 따르는 지도간부들이 이끈 사회에서 수령과 인민의 혈연적 관계가 형성된 것은 필연이었다.

북측 고위간부들도 김일성 주석의 뒤를 따라 입양에 적극적이었다. 이를테면, 연형묵 전 총리는 2남1녀를 입양하였고, 강성산 전 총리는 1남1녀를 입양하였고, 림형구 전 강원도당 책임비서는 친자녀가 4명이 있는데도 3명을 입양하였다. 최영림 내각 총리는 1남1녀를 입양했는데, 그가 입양해 키운 딸은 오스트리아, 몰타, 중국에서 유학하고 외교관이 되었다. 김계관 외무성 부상을 수행하여 6자회담에 참가하였고, 대미협상을 위해 미국에도 여러 차례 수행방문하였던 최선희 씨가 바로 그 외교관인데, 그는 2010년 10월부터 외무성 부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남측이 치명적인 경제위기를 겪었던 1998년부터 고아들이 이전보다 더 많아진 것처럼, 북측에서도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 1995년부터 고아들이 이전보다 더 많아졌다. 1998년 이후 남측에서는 고아들을 다른 나라에 넘기는 해외입양정책이 더 활발해졌는데, 해외입양이라는 말 자체를 알지 못하는 북측에서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고아들을 어떻게 키웠을까? <로동신문> 2011년 4월 30일 부에 실린 기사 한 편이 감동적인 사연을 전해주었다.

1996년 2월 어느날 저녁 퇴근시간. 내각사무국에서 운전기사로 일하던 김영일 씨는 포단에 싼 갓난아기를 안고 집에 들어왔다. 그의 아내 리성옥 씨는 부모 잃은 아기를 맡아서 키우자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제안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장아장 걷는 효성이와 효명이를 키우는 것도 힘겨운 판에, 낯모를 아이를 하나 더 키우는 것은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 달 동안만 보살펴주고 애육원에 보내기로 하였다.

한 달 동안 정성껏 키운 아이를 애육원에 보내는 날, 리성옥 씨는 아이가 입을 옷가지를 보자기에 자꾸 쌌다 풀었다 하다가 아기를 덥썩 품에 안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가 키우자요. 내가, 내가 이 얘 엄마가 되겠어요. 선뜻 결심을 내리지 못했던 날 용서하세요." 뜨거운 음성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그 부부는 부모를 잃은 아이들 14명을 또 다시 품에 안았다. 친자녀 2명에 더하여 15명이나 되는 갓난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너무도 고된 일이었으나, 하루하루 사랑의 힘으로 그 어려움을 이겨냈다.

평양에서 제2차 전국어머니대회가 열린 날, 리성옥 씨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15명의 갓난아이를 키운 훌륭한 어머니로 그 대회에 참석하였다. 전국어머니대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그는 얼굴을 붉히며 남편에게 말했다. "조국과 인민, 사회와 집단을 위하여 좋은 일을 많이 한 훌륭한 녀성들과 나란히 대회장에 앉자있자니 정말 부끄러웠어요."

몇일 뒤, 그의 집에는 자그마한 베개 5개가 더 놓였다. 지난 날 아들딸 남매를 키우던 어머니가 이제는 아들딸 22명을 키우는 어머니가 된 것이다. 22명의 아들딸들이 학교에서 쓸 연필 100자루를 날마다 깎아주다가 손에 근육통이 생겨 밥숟가락을 들기 힘든 날도 많았다. 22명을 키우자니 주거공간도 넓어야 하였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직장동료들은 어느 날 이삿짐차를 가지고 집에 들이닥쳐 아이들을 각자 품에 하나씩 안고 떠났다. 직장동료들에게 이끌려 간, 22명 아이들이 자라날 넓은 집안에는 새로 장만한 집안살림들이 놓여있었다. 직장동료들은 때때로 각종 생활필수품을 안겨주며 그들 부부의 헌신적인 육아사업을 성심껏 도와주었다.

15년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다. 아들딸들이 한꺼번에 중학교(남측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이 어느덧 다가왔다. 아들딸들에게 줄 졸업기념품을 사려고 상점에 다녀오던 그들 부부는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방안에는 아들딸들이 정성껏 마련한 갖가지 음식들이 그득하였다.

 "우리를 키우시느라 이 날 이 때껏 남모르게 많은 수고를 하신 아버지, 어머니!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며 아버지, 어머니가 애오라지 바라고 또 바라신 그 소원을 우리는 한 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22명 아들딸이 합창하듯 외치는 힘찬 목소리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가슴을 흔들었다.

12명의 아들딸들이 다가와 자기들 손에 쥐고 있던 탄원증서를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내보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주의농촌에 진출하기로 탄원한 것이다. 다른 10명의 아들딸들도 다가와 "우리는 조국보위초소에 나가 꼭 영웅이 되여 돌아오겠습니다"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말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하고 22명의 아들딸들을 와락 그러안았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2010년 5월 17일 작성)

2011/05/14

25년 동안 기다리며 준비해온 정치대결

변혁과 진보 (32)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방대한 첩보망과 공작망을 가동하는 미국의 선거공작

미국이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 수많은 정보요원을 침투시켰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암약하는 자기들의 정보요원을 정보관리(information officer)라 부르지만, 우리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는 말로 표현하면 그들은 첩자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는 '지역조사과(Office of Regional Studies)'라는 위장명칭을 내걸고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 수많은 첩자들을 침투시켰다. 미국 중앙정보국 첩자는 흑색첩자(black)와 백색첩자(white)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국정원이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첩자이고 후자는 국정원이 파악하고 있는 첩자다. 흑색첩자는 첩보활동과 비밀공작을 담당하고, 백색첩자는 첩보활동만 담당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중앙정보국 첩자들은 미국인들이 아니라 현지인들이다. 중앙정보국이 주는 비밀자금으로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간 각 분야 지식인들이 그들이 앞잡이로 전락하여 현지인 첩자로 암약하는 것이다.

중앙정보국만이 아니라 미국대사관도 첩보활동을 벌인다. 미국대사관에 파견된 외교관들의 중요한 임무는 첩보활동이다. 중앙정보국은 현지인을 첩자로 매수, 포섭하여 첩보활동과 공작활동을 벌이는 데 비해, 미국대사관은 현지인들과의 비밀접촉을 통해 첩보활동을 벌인다. 이를테면, 2010년 12월 2일 독일 자유민주당 총재로 외무장관이 된 고위관리의 비서실장이 독일 연립정부의 비밀정보와 자유민주당 내부문건을 현지 미국대사관에 정기적으로 빼돌려왔음이 드러났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3개 부처 장관을 겸직한 현직 상원의원이 민감한 자국 정보를 현지 미국대사관에 정기적으로 빼돌려왔음이 드러났다.

독일이나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나라에 있는 미국대사관이 주재국 고위관리들과 정기적으로 접촉하며 첩보활동을 벌여왔으니, 독일과 오스트레일리아와 달리 대미예속성이 심화된 이 땅에서 미국대사관이 어느 수준의 고위관리들과 비밀접촉을 하며 첩보활동에 혈안이 되어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몇해 전에 있었던 두 사건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2006년 7월에 작성하여 미국 국무부로 보낸 기밀문서에서 주한미국대사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현직 대통령들에 대해 평가하고, 친미성향을 지닌 반기문 당시 외무장관이 유엔사무총장에 선출되는 경우 미국에게 유리할 것으로 분석하였다.

또한 한국갤럽 조사연구소 최시중 당시 회장은 대선을 1주일 앞둔 1997년 12월 10일에 실시한 대선후보 여론조사 결과를 분석한 정보자료를 이틀 뒤에 스티븐 보스워즈 당시 주한미국대사에게 넘겨주었다. 현재 최시중은 이명박 대통령의 핵심참모들이 모인 '6인회의' 성원이다. 보스워즈 당시 대사는 12월 15일 대선 여론조사 결과를 3급 기밀문서로 작성하여 미국 국무부에 보냈는데, 그 기밀문서에는 김대중 당시 대선후보가 이회창 당시 대선후보보다 지지율이 약 10% 앞섰다고 분석한 내용이 들어있었다.

△ 서울 종로구 세종로 32번지에 위치한 주한미국대사관. 대사관의 5층에 미국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가 '지역조사과(Office of Regional Studies)'라는 위장명칭을 내걸고 암약하고 있다.

물론 위의 두 사건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은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와 주한미국대사관의 첩보활동을 통해 이 땅의 정계, 관계, 군부, 재계를 비롯한 상층부 동향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미국이 이 땅에 설치해놓은 각종 첩보망과 공작망이 평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화된 조건에서 내년 총선과 대선이 실시될 것임을 말해준다.

미국의 첩보망과 공작망이 그처럼 강화된 조건에서 선거가 실시된다는 말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에게 적대적인 선거환경이 미국에 의해 조성된다는 뜻이다. 물론 미국의 첩보활동과 공작활동을 물증으로 확인하기는 힘들지만, 미국이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에게 적대적인 선거환경을 조성하리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런데 만일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이 미국이 자기들에게 적대적 선거환경을 조성하리라는 점을 예상하지 못하고 내년 선거에 대응한다면,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이 미국의 선거공작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대응전략을 세우는 것은 응당한 일이다. 


미국이 선택할 시나리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미국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와 주한미국대사관은 4.27 재보선을 분석, 평가한 기밀문서를 작성하여 중앙정보국 본부와 미국 국무부에 각각 보고하였을 것이다. 보나마나, 이명박 정권이 민심이반으로 치명타를 입었다는 것과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이 재보선에서 승리한 결정적 요인이 야권연대였다는 것이 그들이 보고한 기밀문서에 들어있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주시해야 할 것은, 4.27 재보선에 대한 그들의 분석과 평가가 아니라 내년 선거에 대한 그들의 전망과 대책이다. 그들의 전망과 대책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길은 없으나, 미국이 세 가지 시나리오를 상정해놓고, 그 가운데서 자기의 국익추구에 가장 적합한 시나리오를 선택할 것으로 예상된다.

민주당이 단독집권에 성공하는 제1시나리오, 한나라당이 재집권에 성공하는 제2시나리오, 민주노동당, 민주당, 국민참여당 등 주요야당들이 공동정부를 세우는 제3시나리오가 상정될 수 있는데, 그 가운데서 미국이 강한 거부감을 보일 시나리오는 제3시나리오다. 미국은 제3시나리오 실현을 저지할 것이다.

또한 미국은 제2시나리오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나라당이 재집권하는 경우, 우리 사회에서 사회계급적 모순이 점점 더 격화되고 정치적 불안정이 더욱 심화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사회계급적 모순이 완화되고 정치적으로 안정되어야 대미예속체제가 무리없이 유지될 수 있으므로, 한나라당이 재집권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한반도에서 미국의 국익을 해치는 요인으로 된다.

미국의 견지에서 볼 때, 민심이 외면해버린 한나라당은 미국의 국익추구에 더 이상 쓸모가 없어져 '버리고 싶은 카드'인 것이다. 또한 한나라당 재집권은 미국이 북측과 대화를 재개하는 데서도 걸림돌이 될 것이다. 이런 정황을 보면, 내년 선거에서 미국이 선택할 시나리오는 민주당이 단독집권에 성공하는 제1시나리오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아래와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첫째, 한나라당에 대한 민심이반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4.27 재보선을 통해 확인되었으므로, 미국은 한나라당 재집권에 대한 기대를 접는다.

둘째, 미국은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민주당이 대체정당으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하고, 민주당 소속 친미성향 정치인들의 주도로 정권교체를 실현하여 민주당이 집권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미국이 선택할 제1시나리오가 실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이 있다. 그것은 야권연대에 대한 민심의 강한 요구다. 미국이 선택할 민주당 단독집권은 야권연대가 실패로 끝났다는 뜻이고, 다른 말로 하면, 민주당이 야권연대를 바라는 민심의 요구를 저버렸다는 뜻이다. 민주당이 내년 선거에서 야권연대를 바라는 민심을 저버리는 경우 한나라당을 꺾을 가능성은 전무하므로, 제1시나리오보다 제2시나리오가 성공할 가능성이 더 커지게 된다. 그런데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한나라당이 재집권하는 제2시나리오는 미국이 선택할 만한 대안이 아니다.

그러므로 미국의 고민은 민주당이 집권하는 제1시나리오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하는 것인데, 제1시나리오가 실현되는 길은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전통적 지지기반이 분열되는 것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대권주자들 가운데 여전히 수위를 지키는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를 중심으로 새로운 수구정당을 창당하는 것이다.

△ 4. 27 재보궐선거 이후 한나라당내 친이계-쇄신소장파-친박계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친박계의 중진 홍사덕 의원은  “분당이 강요되고 불가피하면 그렇게 해서라도 승부하는 거고, 그 경우에도 (박근혜가) 이길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발언, 주목을 끌고 있다.

 한나라당의 분당사태는 그 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이 분열되는 것이므로, 한나라당과 새로운 수구정당이 선거에서 대결구도를 형성하는 경우 민주당이 어부지리를 얻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따라서 한나라당에서 갈라져나간 새로운 수구정당이 창당되는 경우, 미국이 선택할 제1시나리오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민심의 강물에 띄운 대안의 배

위와 같은 선거판세 예상도를 사회변혁의 관점에서 읽어보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이 내년 선거전략을 한나라당 재집권 저지에 한정시키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인식한계에 갇히는 것이다. 4.27 재보선 이전에는 한나라당 재집권 저지가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추진할 선거전략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한나라당에 대한 민심이반을 확인해준 4.27 재보선 이후에는 한나라당 재집권 저지와 함께 민주당 단독집권 저지가 선거전략의 새로운 목표로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에게 제기되었다.

민주당 단독집권은 민주당 자체의 요구이며 동시에 미국의 요구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민주당이 자체로 요구하는 단독집권은 정적들의 방해에 가로막혀 실현되기 힘들지만, 미국이 민주당 단독집권을 필요로 하는 경우 그것은 사실상 거의 방해를 받지 않으므로 실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한나라당을 분열시켜서라도 민주당 단독집권을 추진하려는 미국의 선거공작을 파탄시키는 것이야말로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전력을 기울여야 할 가장 중대한 선거전략이다.

그러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은 미국이 추진하게 될 민주당 단독집권을 어떻게 저지할 수 있을까? 참으로 다행하게도, 4.27 재보선에서 현실로 입증된 것처럼 야권연대를 강하게 요구하는 민심이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에게 강력한 지원역량을 공급해주고 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야권연대를 요구하는 민심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민주당 단독집권을 저지해야 하며, 또 저지할 수 있다. 실제로 민주당이 자기들의 당리당략을 앞세워 야권연대를 외면하고 단독집권에 집착할 때, 민심은 그들에게서 등을 돌릴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민심의 지지를 받을 때 민주당 단독집권을 저지할 수 있다.

주목하는 것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추진할 민주당 단독집권 저지가, 그들의 단독집권을 무조건 반대하는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민주당 단독집권을 대체할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관철하는 것이다. 민주당 단독집권을 대체할 합리적 대안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전술적 야권연대를 뛰어넘은 전략적 야권연합에 의한 공동정부 수립이다. 전략적 야권연합에 의한 공동정부 수립만이 민주당 단독집권을 저지할 대안인 것이다.

야권연대라는 모호한 개념 이외에 어떤 구체적인 대안이 아직 떠오르지 않은 민심의 강물에 전략적 야권연합에 의한 공동정부 수립이라는 대안의 배를 띄우는 정치활동, 바로 이것이 선거국면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추진해야 할 당면과업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이 민심의 강물에 대안의 배를 띄우면, 승리의 순풍이 불어오게 되어 있다. 그 대안은 그야말로 승산 있는 대안인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미국과 맞붙는 정치대결 
  
전략적 야권연합에 의한 공동정부 수립이라는 대안에 대해 미국도 그들 나름대로 분석할 것이다. 그들의 분석결과를 예상하면, 미국은 민주노동당이 다른 야당들과 전략적 야권연합을 실현하여 공동정부를 세우는 시나리오를 미국의 국익을 해칠 위험요인이라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이 전략적 야권연합에 의한 공동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한나라당 분당을 전제로 하는 민주당 단독집권을 적극 지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미국은 한반도에서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전략적 야권연합을 저지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할 것이다.

미국이 전략적 야권연합을 저지하기 위해 어떤 대책을 추진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저들의 대책이 어느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지는 짐작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 민주당, 국민참여당 등 주요야당을 분산상태에 계속 묶어두는 것, 바로 이것이 미국이 취할 대책인 것이다.

지금까지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전략적 야권연합에 의한 공동정부 수립의 의의를 바라보는 관점은 이 땅의 정치세력관계에 국한되었다. 그렇지만 위에서 논한 내용을 생각하면, 전략적 야권연합에 의한 공동정부 수립의 의의는 이 땅의 정치세력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의의를 한미관계로까지 확대하여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전략적 야권연합에 의한 공동정부 수립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이 미국을 상대로 벌이는 정치대결인 것이다. 물론 그 정치대결은 언론보도에 나타나지 않는 불가시적 정치대결이다. 전략적 야권연합에 의한 공동정부를 수립하는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민주노동당과 미국의 정치대결에서 어느 쪽이 이기느냐에 따라 2012년 이후 우리 정치권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반미자주화운동은 주한미국군 철군을 요구하는 반미투쟁으로만 전개되는 것이 아니며, 미국이 이 땅의 선거에서 노리는 전략적 이익추구에 치명타를 가하는 정치투쟁도 위력적인 반미자주화운동으로 된다. 그러므로 전략적 야권연합에 의한 공동정부 수립은 선거국면에서 제기되는 반미자주화운동의 중대한 과업이며,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으로 다가서는 지름길이다. 

민주노동당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반미성향의 정치조직이지만, 지금까지 민주노동당 이 미국과 정치대결을 벌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민주노동당의 정치역량이 미국과의 정치대결을 벌일 만큼 아직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정치역량이 약한 까닭은 각계각층 국민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민심의 정치적 요구에 부합하는 정치활동을 전개할 때, 당의 정치역량이 비상히 강화될 수 있다.

야권연대를 요구하는 민심의 거대한 흐름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강력한 역량이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이 자신을 그 강력한 역량에 일치시킬 때, 민주노동당은 더 이상 소수정당이 아니다. 민심을 따르고 민심의 지지를 받는 소수정당은 비록 원내 소수정당이라 해도 원외 다수정당으로 급성장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야권연대를 요구하는 민심의 지지를 얻어 야권연합에 의한 공동정부 수립을 추진할 때, 그 때 비로소 미국과 정면으로 맞붙는 정치대결을 시작하는 것이며, 민주노동당이 야권연대를 요구하는 민심의 거대한 흐름에 자신을 일치시킬 때, 오직 그러할 때만이 미국과 맞붙는 정치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과 정치대결로 맞붙는 결전의 날이 바야흐로 다가오고 있다.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25년 동안 미국과 맞붙는 결전의 날을 기다리며 싸울 준비를 해왔다. 민주노동당에 결집한 진보정치활동가들은 미국과 맞붙는 정치대결에서 반드시 이긴다는 필승불패의 신념으로 무장하고 전열을 정비해야 할 때를 맞이하였다. (2011년 5월 14일 작성)

2011/05/06

서방의 다름슈타트, 동방의 희천

진실의 말팔매 <20>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독일 라인(Rhine)지방 남쪽에 인구 14만 명이 사는 다름슈타트(Darmstadt)라는 도시가 있다. 그 도시가 유명해진 까닭은, 1990년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무동력 주택(Passivhaus)을 시범적으로 건설하였기 때문이다. 원래 무동력(passive)이란 말은 동력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에너지절약(low-energy)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무동력 주택에서는 일반 주택에서 쓰는 에너지의 10% 정도만 필요하다.

시범적으로 건설한 에너지절약형 주택이 큰 성과를 내자, 19969월 다름슈타트에 무동력 주택 연구원(Passivhaus-Institute)이 설립되어 에너지절약형 건축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난 10여 년 동안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약 25,000 채의 에너지절약형 건물이 세워졌다. 미국 일리노이주 얼바나(Urbana)에 미국 최초의 에너지절약형 건물이 시범적으로 세워진 때는 2003년이고, 미네소타주 베미지(Bemidji)에 본격적인 에너지절약형 건물이 세워진 때는 2006년이다. 세계 최초로 규격화된 에너지절약형 건물이 아일랜드에 세워진 때는 2005년이다. 현재 전 세계에 있는 에너지절약형 건물은 15,000-20,000채를 헤아린다.

이처럼 에너지절약형 건축술은 지금 기술선진국들에 막 도입되기 시작한 최첨단 건축기술이다. 이 분야에서 기술과 경험이 가장 앞선 나라는 독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북측이 그 최첨단 기술분야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전문가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그 사연은 이렇다.

자강도 남쪽에 있는 희천시의 희천역에서 약 6km 떨어진 곳에 북측에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공작기계공장이 있다. '기계공업의 어머니공장'이라고 불리는 희천공작기계종합공장이다. 거기서 생산된 각종 기계설비들이 북측 각지에 있는 120여 개의 기계공장들과 연합기업소들에 공급된다. 이미 오래 전부터 희천기계종합공장은 북측에서 가장 현대화된 공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20105월 어느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희천기계종합공장을 현지지도하면서 공장일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계적으로도 가장 앞선 것으로, 리상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선군시대에 새로 태여난 공장답게 한 번 멋들어지게 표본을 잡아봅시다. 힘을 넣읍시다. 건축물을 최상급으로 빠른 시간 내에 만듭시다. 표본공장을 만들어 가지고 참관조직도 하면서 우리 사람들도 계몽시켜야 하겠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앞선 이상적인 표본공장을 만들어보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말은, 공장설비만 첨단기술로 개조할 것이 아니라 공장설비들이 배치된 공장건물도 첨단기술로 개조하자는 뜻이다.

2010619CNC기술로 개조된 전극가공작업장을 현지지도하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작이 절반입니다. 우리의 땅밑에는 자원이 가득 차있습니다. 이 자원을 어떻게 리용하는가 하는 것은 동무들의 머리에 달려있습니다." 공장 지하에 자원이 가득 차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그 공장 지하에 광물자원이 묻혀있다는 뜻이 아니라, 에너지원천이 묻혀있다는 뜻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하수를 이용한 에너지절약형 건물을 세우는 첨단 건축술의 개발과 보급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구상에 따라,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희천기계종합공장을 에너지절약형 건물로 개조하기 위한 시범사업에 달라붙었다. 세계적으로 앞선 21세기 표본공장을 건설하기 위한 최첨단 돌파전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힘있게 벌어졌다.

20101221<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1세기 표본공장으로 전변된 희천련하기계종합공장"을 현지지도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불과 6개월 만에 세계적으로 앞선 에너지절약형 건물을 완공한 것이다. 이름도 희천기계종합공장에서 희천련하기계종합공장으로 바꾸었다. 그 공장은 최첨단 수준에서 CNC화를 실현한 거대한 공장이다. 4축부터 9축에 이르기까지 각종 CNC공작기계들이 가득하다. 축구장 넓이의 일곱 배가 되는 드넓은 건물이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전동차를 타고 공장 안을 돌아보았다. 어떤 것이든지 다 만들 수 있는 고도의 기계공학기술로 '무장'되어 있었고, 세계적으로 앞선 에너지절약형 공장으로 개조되어 있었다.

21세기 표본공장으로 전변된 희천련하기계종합공장 (<로동신문> 2011310일 보도사진)
 
북측에 처음으로 건설된 이 에너지절약형 공장을 북측에서는 록색형 공장이라 부른다. 록색형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북측이 개발한 기술은 무엇이었을까? 공장건물 전체를 단열재로 마감하여 보온효과를 높이고, 공장주변 지하에서 끌어올린 지하수를 가지고 겨울철 난방과 여름철 냉방을 보장하여 에너지 사용량을 결정적으로 줄인 것이다.

지하수를 이용하여 냉난방 에너지를 절약하는 설비를 지열교환기(underground heat exchanger)라 하는데, 그 원리를 이렇다. 지표 밑 3m에 흐르는 지하수의 온도는 1년 내내 변함없이 섭씨 10-15도로 유지되는데, 그 지하수를 끌어올려 열압축하면 섭씨 40-50도의 지열수로 된다. 겨울철에는 열압축한 지열수를 이용하여 실내온도를 높이고, 여름철에는 열압축을 하지 않은 섭씨 10-15도의 지하수로 실내온도를 낮춘다. 그렇게 하면, 에너지는 종전의 20분의 1밖에 들지 않는다.

축구장 넓이의 일곱 배나 되는 큰 공장에 냉난방을 보장하려면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였으므로, 이전에는 냉난방을 제대로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런데 CNC화된 설비들의 정밀공정에는 너무 춥지도 않고 너무 덥지도 않은 적당한 실내온도를 보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문제를 지열교환기가 완벽하게 해결한 것이다.

 
룡성기계련합기업소에서 개발한 첨단지열설비 (<로동신문> 201153일 보도사진)
 
<조선중앙통신> 201152일 보도에 따르면, 룡성기계련합기업소에서 첨단 지열수 기술을 자체로 개발하여 설비생산을 시작하였다. 그 기업소에서는 보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첨단 압축기계 설계를 완성하였고, 한 달 만에 시제품을 생산하였다. 바로 이 설비가 희천련하기계종합공장에서 가동되고 있는, 북측에서 자체 기술로 개발한 '우리식 지열교환기'. 보도에 따르면, 북측 각지에 있는 기계공장들에서 '우리식 지열교환기'를 대대적으로 생산하여 보급한다고 한다. 이것은 1-2년 안에 북측의 모든 공장들이 록색형 공장으로 개조된다는 뜻이다. 북측의 공학기술은 CNC부문에서만 아니라 녹색건축부문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 (201156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