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석의 개벽예감](425)
자주시보 2020년 12월 28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직설적인 질문과 솔직한 답변
2. 선평화, 후통일론의 실체
3. 선통일, 선평화론의 실체
4. 평화협정 체결하기까지 두 단계 거쳐야
5. 새로운 길, 2021년 1월에 제시된다
1. 직설적인 질문과 솔직한 답변
“통일을 해야 합니까? (Do you have to reunify?)" 이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제기한 질문이다. 2017년 11월 7일 서울을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은 청와대 상춘재에서 담화하다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위와 같은 엉뚱한 질문을 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서 우리나라의 통일문제에 대해 그처럼 직설적인 질문을 제기한 대통령은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좀 특이한 사람이다. 그는 기존 관례와 격식을 깨뜨리는 파격적인 행동을 하는가 하면, 어떤 때는 듣기에 민망한 왜곡발언이나 허위발언도 꺼내놓지만, 그런 역겨운 언행 뒤에는 직설적이고 솔직한 면도 있다.
통일을 해야 하느냐는 엉뚱하고 직설적인 질문을 받은 문재인 대통령은 어떻게 답변했을까? 자세한 답변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워싱턴포스트>의 정치분석가 조쉬 로긴(Josh Rogin)이 2017년 11월 15일 그 신문에 실은, ‘트럼프는 남한 대통령에게 ’통일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대략적인 사연을 찾아볼 수 있다. 그 기사에 따르면, 추미애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서울을 방문 중이던 조쉬 로긴과 대담하면서 그녀가 한미정상회담 이튿날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들은 문재인-트럼프 상춘재 담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추미애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조쉬 로긴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그날 상춘재 담화 중에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직설적인 질문에 답변할 때, “김정은 정권 아래서 비인간적인 대우(inhumane treatment)를 받으며 고통을 겪는 북조선 인민들에게 자신이 큰 책임감(great sense of responsibility)을 느낀다”고 하면서, “민주주의의 빛(light of democracy)을 북조선 인민들에게 비춰주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설마 그런 말을 했을까 하고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 상춘재 담화에서 솔직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으므로, 위에 서술한 답변은 문재인 대통령의 속마음이 드러난 솔직한 발언이었다. 답변에서 드러난 것처럼, 문재인 대통령은 ‘독재정권의 어둠 속에 있는 북측 인민들에게 자유민주주의의 빛을 비춰주는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여 북을 자유민주주의체제로 흡수해야 한다’는 극우반북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극우반북적인 견해를 가진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그가 ‘독재자’로 생각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회담한 직후 이런 말을 남겼다. “김정은 위원장과 나는 서로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해 정기적인 회담과 직통전화를 통해 수시로 논의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극우반북적인 견해를 은폐한 외교적인 발언이었다.
위선적인 발언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9월 19일 평양을 방문하는 중에 5.1경기장에 모인 평양시민 15만 명 앞에서, 그가 독재정권의 암흑 속에서 고통을 겪는다고 생각하는 북측 인민들에게 연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김 위원장과 북녘 동포들이 어떤 나라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지 가슴 뜨겁게 보았습니다. 얼마나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갈망하고 있는지 절실하게 확인했습니다.” 이것도 역시 자신의 극우반북적인 견해를 은폐한 외교적인 발언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외교적 발언 뒤에 극우반북적인 견해가 은폐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그가 남북정상회담에서 쏟아낸 외교적인 발언에 찬사를 보내며, 그의 방북에 큰 기대를 걸었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외교적 발언 뒤에 극우반북적인 견해가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파헤쳐보면, 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이 왜 전혀 이행되지 않았는지도 알 수 있고, 2020년 6월 16일 북이 왜 남북공동련락사무소를 폭파해버렸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어 8천만 민족의 통일열망이 뜨거워졌던 2018년 9월 26일 미국 텔레비전방송 <팍스뉴스(Fox News)>가 문재인 대통령과 대담을 진행했다. 그 자리에서 대담진행자가 “대통령님 생애 안에 통일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십니까?”라고 질문했다. 문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통일은 정말 예상할 수 없습니다. 통일은 계획대로 오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통일은 평화가 완전해지면 어느 순간 정말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시기가 제 생애 안에 오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가 통일되는 날이 언제인지 예언할 수는 없지만, 통일의지를 가는 대통령이라면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방안과 경로를 담은 통일정책을 제시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위의 대담에서 나온 답변을 들어보면,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통일의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문 대통령이 평화가 먼저 실현되고 통일이 나중에 실현될 것으로 예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선평화, 후통일론을 믿고 있음을 말해준다. <사진 1>
2. 선평화, 후통일론의 실체
문재인 대통령이 믿고 있는 선평화, 후통일론은 남과 북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면서 30년 정도 서로 왕래하고 협력하다보면 어느 날 갑자기 통일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선평화, 후통일론은 통일국가건설을 사실상 반대하는 반통일론의 변종이 아닐 수 없다. 통일학의 견지에서 이 문제를 분석,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1) 선평화, 후통일론은 7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조국통일이 앞으로 30여 년이 더 지나 100년 뒤에야 실현될 것처럼 상상하면서, 조국통일위업을 다음 세대에게 미루려는 허황된 주장이다. 75년 동안이나 지속되는 민족의 분렬을 어떻게 해서든지 하루빨리 극복하고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중대하고 절실한 조국통일위업을 기약 없는 먼 훗날로 미루는 것은 통일국가건설을 무한정 지연시키고 회피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선평화, 후통일론은 1960년대 박정희의 선건설 후통일론, 그리고 1970년대 김대중의 선민주, 후통일론을 모방한 통일무한연기론이며 통일위업회피론이다. 지난 시기 선건설, 후통일론이나 선민주, 후통일론이 그러했던 것처럼, 현 시기 선평화, 후통일론도 통일국가건설을 무한정 연기하고 조국통일위업을 회피한다는 점에서 반통일론의 변종이라고 할 수 있다.
2) 선평화, 후통일론은 남과 북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면서 30년 정도 서로 왕래하고 협력하면, 어느 날 동부도이췰란드가 갑자기 무너지고 서부도이췰란드에 흡수되었던 것처럼 북의 사회주의체제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고 남의 자본주의체제에 흡수될 것이라는 전형적인 흡수통일론이다. 이런 내막을 알게 되면, 문재인 대통령이 말하는 남북평화공존과 남북상호협력은 남측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시장경제가 30년 동안 북측에 점차적으로 침투, 확대되어 점진적인 개혁과 개방을 불러일으키고 북측의 자주적 사회주의와 사회주의계획경제가 변질, 소멸되는 점진적 붕괴과정 이외에 다른 게 아니다. 그러므로 문재인 대통령이 말하는 남북평화공존과 남북상호협력은 흡수통일론의 정체를 은폐한 현란한 수식어에 불과한 것이다. 명백하게도, 선평화, 후통일론은 점진적인 흡수통일론의 변종이다.
3) 선평화, 후통일론은 남과 북이 평화공존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평화를 실현하는 데서 가장 중요하고 선결적인 평화협정문제는 외면한다. 어느 날 누구의 머리 위에 포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위태로운 정전체제를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평화체제로 전환시키려면 반드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해야 하는데,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평화공존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강조해야 할 평화협정체결문제는 한 마디도 입 밖에 꺼내지 않는다. 하지만 명백한 것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지 않으면, 평화가 절대로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선평화, 후통일론은 평화를 강조하면서도 평화협정을 외면하는 비과학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화를 강조하면서도 평화협정을 외면하는 까닭은,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당연히 점령군이 철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주한미국군철수를 반대한다. 반대할 뿐 아니라, 철군이라는 말만 나와도 조건반사적인 거부반응을 보인다. 만일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철수하면, 한미동맹이 해체될 것이므로, 한미동맹을 ‘신성불가침’으로 여기는 문재인 대통령은 철군문제에 직결되는 평화협정체결문제를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다.
주한미국군이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정전체제 아래서 점령군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대북전쟁연습을 계속하고 있는데, 그런 참담한 현실 속에서 남과 북이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 궤변이다. 불행하게도, 문재인 대통령이 믿는 선평화, 후통일론은 그런 궤변과 결부되어 있다.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않고서도 평화를 실현할 수 있다는 비과학적인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문재인 대통령이 제시한 대안이 종전선언을 채택, 발표하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남, 북, 미 3자가 종전선언을 채택, 발표하면, 전쟁이 끝나는 것이므로, 평화가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이 생각하는 것처럼, 종전선언이 발표되더라도 정전상태는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지 않으면, 종전선언을 발표하더라도 정전체제는 여전히 유지될 것이고, 따라서 미국이 지휘하는 한미연합군은 여전히 북침전쟁연습을 계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북침전쟁연습은 종전선언문을 한낱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종전선언을 발표하려는 구상은 문재인 대통령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전략적 추진방향은 문재인 대통령의 구상과 매우 다르지만, 지난 시기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도 종전선언을 진지하게 검토한 적이 있었다. 이를테면, 2018년 6월 12일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이 성사되었을 때,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종전선언을 발표하려고 하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에서 합의하려고 했던 종전선언은 문재인 대통령이 구상한 종전선언과 다른 것이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전략구상은 종전선언⟶잠정협정⟶평화협정으로 이어지는 단계적, 점진적 과정이고, 그것은 곧 한미연합군의 북침전쟁연습중단⟶남과 북의 단계적 군비감축⟶주한미국군의 단계적 철수로 이어지는 단계적, 점진적 과정이다. 다른 한편,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에서 합의하려고 했던 종전선언은 한미연합군의 북침전쟁연습중단⟶주한미국군감축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설명한다. <사진 2>
3. 선통일, 선평화론의 실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6년 5월 6일 평양에서 진행된 조선로동당 제7차 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를 하면서 “조국통일을 실현하는 것은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책임진 우리 당 앞에 나선 가장 중대하고 절박한 과업”이라고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우리는 전체 조선민족의 한결같은 지향과 요구에 맞게 하루빨리 분렬의 장벽을 허물고 조국통일의 대통로를 열어나가야 합니다. (중략) 나라와 민족들이 저마다 자기 리익을 내세우며 경쟁적으로 발전을 지향해나가고 있는 때에 우리 민족이 북과 남으로 갈라져 아직까지도 서로 반목하며 대결하는 것은 민족의 통일적 발전을 스스로 가로막고 외세에 어부지리를 주는 자멸행위입니다. 민족의 분렬을 더 이상 지속시켜서는 안 되며 우리 대에 반드시 조국을 통일하여야 합니다.” 8천만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위업을 이른 시일 안에, 반드시 실현하려는 강렬한 통일의지를 표명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일방략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선통일론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선통일론은 자주적 평화통일론으로 집약된다. 자주적 평화통일론은 미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우리 민족끼리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는 주장이다. 역사적 견지에서 보면, 자주적 평화통일론은 1948년 4월 19일부터 4월 30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된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와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의에서 이루어진 전민족적 합의를 계승발전시킨 조국통일론이다. 연석회의와 지도자협의회는 미국의 조선분할점령정책을 추종한 친미우익세력을 제외한 남과 북의 좌우익세력이 모두 참가한 그야말로 전민족적 회의였다.
미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우리 민족끼리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해야 한다. 평화협정이 체결되어야 자주적 평화통일이 실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평화협정체결은 문재인 대통령이 말하는 남북평화공존론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말하는 자주적 평화통일의 전제조건이며, 미국의 대조선적대정책을 포기시키는 조치로 된다. 미국의 대조선적대정책을 포기시키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려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평화전략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선평화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통일우선주의와 평화우선주의를 통합한 선통일, 선평화론을 제시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처럼 중대하고 절박한 평화협정은 어떻게 체결될 수 있을까? 누구나 아는 것처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려면 협정체결당사자들이 평화회담을 해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까지만 해도, 북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는 평화회담을 조미양자회담 또는 남북미 3자회담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북은 1990년 5월 31일 발표한 ‘조선반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조국통일을 위한 평화적 환경을 마련할 데 대하여’라는 제목의 문서에서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조선반도에서 완전하고도 항구적인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현 정전상태를 평화상태로 전환시켜야 한다. 미국은 조선반도 평화보장의 주되는 당사자인 것만큼 평화협정체결을 위한 조미회담이나 3자회담에 반드시 나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1990년 이후 조미양자회담, 4자회담, 6자회담이 진행되었으나 평화협정체결문제는 미국이 거부하는 바람에 의제에 오르지 못했다. 더욱이 그런 회담들에 참석한 외교관들에게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는 중대사안을 다룰 권한이 없었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는 중대사안을 다룰 권한은 조선의 최고령도자와 미국 대통령에게 있다. 하지만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조미정상회담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조미고위급회담에도 소극적이었던 그들에게 조미정상회담은 언제나 관심 밖에 밀려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조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어떻게 해서든지 조미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자신의 전략구상을 실현해야 하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핵무기를 개발하여 조선의 핵무력을 완성하면, 미국은 조선의 핵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그 동안 외면해온 조미정상회담에 나설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런 예상은 적중했다. 2017년 11월 29일 조선이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화성-15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하자, 2018년 1월 16일 트럼프 대통령은 청와대를 통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조미정상회담을 제의했고, 마침내 2018년 6월 12일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이 성사되었던 것이다. <사진 3>
4. 평화협정 체결하기까지 두 단계 거쳐야
사상 처음 성사된 것으로 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8천만 민족에게 커다란 기대와 희망을 안겨준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에서 발표된 공동성명 제2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은 조선반도에서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할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선차적인 방도는, 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각각 구상하고 있었던 종전선언을 채택, 발표하는 것이었다. 2018년 6월 14일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말과 영어로 각각 작성된 종전선언문 초안을 가지고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에 참석했다고 한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트럼프 대통령이 종전선언을 채택, 발표하려던 계획은 그가 주한미국군을 감군하려던 계획과 맞물린 것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해외에 주둔하는 미국군을 유지하는데 너무 많은 국가재정을 지출하지 않으려고 감군정책을 추진했고, 종전선언을 발표하려는 계획을 감군정책과 연동시키려고 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함께 종전선언을 채택, 발표한 뒤에, 주한미국군을 부분적으로 철수하는 감군조치를 실행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자기가 준비해간 종전선언문 초안을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에서 꺼내놓지 않았다. 그는 왜 꺼내놓지 않았을까? 2020년 9월 15일 미국에서 출판된 밥 우드워드(Robert U. Woodward)의 책 ‘격노(Rage)’에서 공개되지 않은 사연을 엿볼 수 있다. 그 책에 나오는 트럼프 대통령의 회고담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싱가폴 조미정상회담 중에 “비핵화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서 정말로 힘들어했고, 주춤거렸다”고 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싱가폴 조미정상회담 중에 비핵화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매우 힘들어하고 주춤거린 까닭은, 조선이 “강도적인 비핵화요구”라고 비난할 만큼 일방적이고, 급진적인 비핵화요구를 트럼프 대통령이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2018년 6월 19일 마익 팜페오(Michael R. Pompeo) 국무장관은 미국 미시건주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행사에서 연설하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일방적이고, 급진적인 비핵화를 실행하면 트럼프 대통령은 “정전협정을 확실하게 교체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밝힌 바 있다.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정전협정을 확실하게 교체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었지만, 그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일방적이고 급진적인 비핵화를 제의한 것은 합의를 가로막은 걸림돌로 되었다.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우선 종전선언을 발표하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평화실현과정에 부합되는 쌍무적이고 점진적인 비핵화를 제시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일방적이고 급진적인 비핵화를 제의했던 것이다.
만일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의한 쌍무적이고 점진적인 비핵화를 받아들이면서 종전선언문 초안을 꺼내놓았다면, 회담결과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정전협정을 대신할 잠정협정(modus vivendi)을 체결하는 문제를 제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잠정협정이란 적대관계에 있는 쌍방이 평화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적대관계를 평화적으로 해소하는 정치적 합의를 말한다. 1996년 2월 22일 조선은 미국에게 다음과 같이 제의했었다.
“정전협정의 거의 모든 조항들이 파괴되고 남아있는 조항들마저 현실을 반영할 수 없는 조건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현 정전협정을 대신할 수 있는 잠정협정을 체결하고 그를 리행하기 위한 잠정기구를 내올 데 대한 제안을 내놓고 그와 관련한 협상을 진행할 것을 미국측에 또다시 제의하였다. 이 제안은 미국이 평화협정의 체결을 반대하고 있는 조건에서 조선반도에서 긴장을 완화하고 무력충돌을 방지하며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의 과도적인 기간에 필요한 잠정적인 조치로서 쌍방에 다같이 접수될 수 있는 현실적인 제안이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잠정협정과 트럼프 대통령의 종전선언은 조미정상회담에서 합의될 수 있는 현실적인 해결방안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2018년 조미정상회담 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전략구상은 트럼프 대통령이 종전선언을 제의하면 그것을 받아들여 정전협정체결 65주년이 되는 2018년 7월 27일 종전선언을 발표하고, 그에 기초하여 잠정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차기 조미정상회담을 추진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018년 7월 7일 조선 외무성 대변인이 발표한 담화가 말해주는 것처럼, 조선은 2018년 7월 6일과 7일 평양에서 진행된 조미고위급회담에서 싱가폴 조미정상회담 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한 몇 가지 방도를 제기했는데, 그 가운데는 “조선반도에서의 평화체제구축을 위하여 우선 조선정전협정체결 65돐을 계기로 종전선언을 발표할 데 대한 문제”가 들어있었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조선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 따르면, 싱가폴 조미정상회담 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한 조미고위급회담에서 팜페오 국무장관은 “싱가포르 수뇌상봉과 회담의 정신에 배치되게 CVID요, 신고요, 검증이요 하면서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요구만 들고 나왔”으며 “조선반도 평화체제 구축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이미 합의된 종전선언문제까지 이러저러한 조건과 구실을 대면서 멀리 뒤로 미루어놓으려는 립장을 취하였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2018년 7월 6일과 7일 평양에서 진행된 조미고위급회담이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음을 알 수 있다. 만일 그 회담에서 쌍방이 2018년 7월 27일 종전선언을 발표하기로 합의했다면, 2019년 2월 28일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은 결렬되지 않았을 것이며, 조미협상은 계속 진척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어렵사리 성사된 조미정상회담을 조선의 핵무장을 일방적으로 해제하려는 기회로만 생각하는 전략적 오판에 빠지는 바람에 자기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렸다. <사진 4>
5. 새로운 길, 2021년 1월에 제시된다
2021년 1월 20일 조 바이든(Joseph R. Biden Jr.)이 대통령에 취임해도, 그는 조미정상회담을 외면하면서 조선의 핵무장을 일방적으로 해제할 생각만 할 것이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생각은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예상하는 까닭은, 트럼프 대통령은 해외주둔미국군을 유지하는 비용을 너무 많이 지출하지 않기 위해 동맹관계를 약간 훼손하더라도 감군정책을 추진하려고 했지만, 동맹관계를 우선시하는 바이든에게서는 그런 감군정책마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대선유세 중에 감군문제를 언급했었지만, 바이든은 대선유세 중에 감군문제에 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9년 9월 초 트럼프 대통령에게 그가 평양을 방문하면 제3차 조미정상회담이 성사될 것이라는 의사를 담은 마지막 친서를 보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초청을 받고 평양을 방문할 의향이 있는가라고 묻는 백악관 출입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아마도 아니다. 우리는 그에 대해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그런 답변 이후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2018년부터 2019년까지 27통의 친서를 교환했던 친서외교는 중단되었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미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2019년 11월 18일 김계관 외무성 고문은 담화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무익한 그러한 회담에 더 이상 흥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고, 2019년 12월 12일 조선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에서 “미국이 입만 벌리면 대화타령을 늘어놓고 있는데 설사 대화를 한다고 해도 미국이 우리에게 내놓을 것이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위에 열거한 상황은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조미정상회담이 개최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불러온다. 협상의 문은 모두 닫혔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교착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조미정상회담이 개최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은 비관적인 전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2019년 9월 초 트럼프 대통령에게 마지막 친서를 보낸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방북초청거부의사를 접하고 친서외교를 중단한 이후,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2019년 10월 15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백두의 첫눈을 맞으시며 몸소 백마를 타시고 백두산정에 오르시였다”고 한다.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한 백두산 등정이었다. 당시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동행한 일군들 모두는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동지께서 백두령봉에서 보내신 위대한 사색의 순간들을 목격하며 또 다시 세상이 놀라고 우리 혁명이 한 걸음 전진될 웅대한 작전이 펼쳐질 것이라는 확신을 받아안으며 끓어오르는 감격과 환희를 누르지 못하였다”고 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첫눈 내리는 백두산에서 모색한 새로운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9년 1월 1일에 발표한 신년사에서 언급한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기 위한 새로운 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조미정상회담이 재개될 가능성이 사라져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없게 되었지만,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않으면서 조국통일위업을 실현하는 새로운 길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모색한 새로운 길은 장기간 협상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해결하는 기존 방도가 아니라, 협상을 배제하고 급진적으로 해결하는 새로운 방도이다.
2020년 8월 19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6차 전원회의에서는 조선로동당 제8차 대회를 2021년 1월에 소집할 것을 결정하였다. 2021년 1월에 조선로동당 제8차 대회가 열리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않으면서 조국통일위업을 실현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할 것으로 예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