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19)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국가경제의 30%만 국유화한 베네주엘라
2010년 4월 28일 브라질을 방문 중이던 우고 차베스 베네주엘라 대통령이 브라질리아에서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차베스 대통령은 "베네주엘라 경제 분야에 대한 국유화 목표가 30%를 넘지 않을 것이다. 국유화는 석유와 석유화학, 철강 등 전략산업 부문에만 집중되고 있다. 국유화 정책은 전략산업 부문을 장악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으며, 이를 제외한 다른 산업부문에는 민간투자 유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차베스 대통령이 말하는 전략산업 국유화는 주요산업 국유화이므로, 그의 말에 따르면 베네주엘라 정부는 국가경제의 30%를 국유화하고 나머지 70%는 사유화 상태로 남겨둘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국가경제의 50% 정도를 국유화해야 낡은 경제질서를 변혁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차베스 대통령은 왜 자국의 국유화 수준을 국가경제의 30% 이상으로 확대하지 않는 것일까? 베네주엘라 정부가 추진한 주요산업 국유화의 내막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동안 베네주엘라 정부가 추진해온 주요산업 국유화는 아래와 같다.
2007년 1월 베네주엘라 통신회사 CANTV를 국유화하였고, 2월 미국 전기회사 에이이에스 코포레이션(AES Corporation)이 소유한 전기회사 카라카스 전력(Electricidad de Caracas)을 국유화하였고, 5월 세계 최대의 유전지대인 오리노코 유전지대(Orinoco Petroleum Belt) 개발사업을 국유화하였다.
2008년 4월 룩셈부르그에 본부를 둔 다국적 제련회사 테르니움(Ternium)이 주식 60%를 소유한 제련회사 씨도르(Sidor)를 국유화하였고, 6월부터 8월까지 기간에는 멕시코에 본부를 둔 다국적 건재 및 시멘트 회사 쎄멕스(Cemex), 스위스에 본부를 둔 다국적 건재 및 시멘트 회사 홀씸(Holcim), 프랑스에 본부를 둔 다국적 건재 및 시멘트 회사 라파즈(Lafarge)의 현지 기업들을 각각 국유화하였다.
2009년 2월 미국에 본부를 둔 초국적 곡물기업 카길(Cargill)이 소유한 쌀가공기업을 국유화하였고, 3월 아일랜드 판지생산기업 스머핏 카파 그룹(Smurfit Kappa Group)이 소유한 토지 1,500 헥트아르를 국유화하였고, 5월 스페인 금융그룹 그루뽀 싼딴데르(Grupo Santander)가 소유한 베네주엘라 은행(Banco de Venezuela)을 국유화하였다.
2010년 1월 프랑스 식품기업 엑시또(Exito)가 소유한 대형 식료품판매장 6개소를 국유화하였고, 6월 미국 석유회사 헬머리취 앤드 페인(Helmerich & Payne)이 소유한 유정설비를 국유화하였고, 10월 미국 유리생산기업 오웬스 일리노이(Owens-Illinois)가 소유한 유리병 공장 두 곳을 국유화하였고, 같은 달 베네주엘라 제강회사 씨벤싸(Sivensa)가 소유한 제강회사 씨데투르(Sidetur)를 국유화하였다.
주요산업 국유화를 무상몰수 방식으로 추진하지 않았다
베네주엘라의 주요산업 국유화에서 주목하는 것은 국유화 추진기간과 국유화 시행대상이다.
첫째, 베네주엘라 정부는 4년에 걸쳐 국유화를 추진하였다. 전격적으로 단행하지 않고, 왜 4년동안 추진하였을까? 그 까닭은 베네주엘라 정부가 주요산업을 국유화할 때 무상몰수 방식이 아니라 유상수매 방식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유상수매 국유화란 국유화할 대상 기업의 주식을 60% 이상 사들여 경영권을 인수, 장악하는 것이다. 베네주엘라 정부가 국유화하려는 기업을 상대로 밀고 당기는 기업주식 매매협상을 벌이는 바람에 국유화 추진기간이 4년으로 늘어났다.
베네주엘라 정부가 국유화 대상 기업의 주식을 90% 이상 사들인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100%를 사들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업의 소유권을 완전히 국유화한 것은 아니고 경영권만 국유화한 것이다. 베네주엘라의 주요산업 국유화는 베네주엘라 정부가 주요산업의 주식을 수매하여 경영권을 장악한 것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주식을 수매하여 경영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베네주엘라 주식시장은 폐쇄되지 않고 여전히 온존, 가동되었다.
베네주엘라 정부는 왜 유상수매 국유화를 시행하였을까? 그 까닭은 시장붕괴에 따른 경제파국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베네주엘라 정부가 무상몰수 국유화를 시행하였다면, 주식시장을 비롯한 모든 형태의 시장이 무너졌을 것이고 그에 따르는 경제파국은 상상을 초월하였을 것이다. 시장붕괴와 경제파국에 대처할 방도가 없었던 베네주엘라 정부는 무상몰수 국유화에 따르는 치명적 위험부담을 피해야 하였다.
둘째, 제강회사와 통신회사 두 곳을 제외하면, 국유화한 기업들은 거의 모두 외국계 대기업들이 소유한 현지 기업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외국계 대기업들이 소유한 베네주엘라 현지 기업들이 국유화되었는데도, 해외에 존재하는 자국 대기업 자산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관련국들이 베네주엘라의 국유화에 반발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베네주엘라 정부가 무상몰수 방식이 아니라 유상수매 방식으로 외국계 대기업의 현지 기업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유상수매 국유화는 일종의 국제거래이므로, 국제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베네주엘라 정부가 무상몰수 국유화를 시행하였다면, 베네주엘라에 투자한 외국계 대기업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미국이 해상봉쇄, 무력침공, 전복공작 등을 자행하였을 것이다. 베네주엘라의 시장이 붕괴하여 경제파국에 빠진 조건에서 미국의 해상봉쇄, 무력침공, 전복공작까지 겹친다면, 베네주엘라 정부는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였을지 모른다.
이처럼 베네주엘라 정부는 변혁주체와 변혁대상의 세력관계를 타산하고 베네주엘라가 처한 현실에 맞게 유상수매 국유화를 시행하였고, 그로써 그들의 사회변혁은 패배와 좌절의 위험을 피하여 계속 전진할 수 있었다.
유상수매 국유화에 필요한 재정은 어디서 조달했을까?
누구나 알고 있듯이, 대기업 한 두 개의 주식도 아니고 주요산업 전반의 주식을 60% 이상 사들이려면 막대한 재정이 필요하다. 베네주엘라 정부는 유상수매 국유화에 필요한 막대한 재정을 어디서 조달하였을까?
베네주엘라 정부의 유상수매 국유화에 투입된 재정은 석유자금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베네주엘라의 국영석유기업 베네주엘라 석유(Petr leos de Venezuela)의 기업수익금으로 주요산업을 국유화할 수 있었다. 기업명칭의 머릿글자를 딴 약칭으로 뻬데베싸(PDVSA)라고 부르는 이 국영기업은 석유와 천연가스를 생산하는 거대한 전략기업이다. 2009년 현재 자산가치가 1,372억 달러가 되는 이 기업의 2009년도 총수익은 911억8,000만 달러이고, 실수익은 16억1,000만 달러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규모가 큰 석유기업이다. 이 석유기업은 1976년 1월 1일에 창설될 때부터 원래 국영기업이었다.
차베스 대통령이 룰라 당시 브라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진행하면서 베네주엘라 주요산업 국유화를 국가경제의 30%선까지 추진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베네주엘라 정부가 유상수매 국유화에 투입할 뻬데베싸의 자금동원력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베네주엘라 정부의 유상수매 국유화에 투입하는 자금동원력이 한계에 이른 까닭은, 뻬데베싸의 기업수익금을 모두 유상수매 국유화에만 투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베네주엘라 정부는 그 기업의 수익금 가운데 상당 부분을 각종 사회복지정책에 지출해왔다. 이를테면, 2004년부터 2010년까지 7년 동안 뻬데베싸가 베네주엘라 정부의 사회복지정책에 조달한 재정은 611억4,000만 달러다.
차베스 대통령이 사전에 예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베네주엘라의 사회변혁은 때를 잘 만나 '성공운'을 타고 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주요산업을 국유화하고 사회복지정책을 추진하는 기간 동안 국제석유시장에서 유가가 급등하는 바람에 뻬데베싸의 수입이 크게 늘었고, 그에 따라 주요산업 국유화와 사회복지 제도화에 요구되는 막대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뻬데베싸가 없었다면, 베네주엘라 사회변혁은 어떤 운명에 처하였을까? 베네주엘라 정부는 주요산업을 불가피하게 무상몰수 방식으로 국유화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시장붕괴와 외세침공의 엄청난 시련에 처한 사회변혁은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좌절과 실패를 겪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뻬데베싸는 베네주엘라의 주요산업 국유화와 사회복지 제도화의 성공적 안착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사회변혁의 '일등공신'인 것이다.
뻬데베싸가 없는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식 사회변혁담론은 이 땅의 주요산업 국유화를 어떻게 예상할 수 있을까? 우리식 사회변혁이 베네주엘라의 사회변혁과 구별되는 요인들 가운데 하나는, 뻬데베싸 같이 국유화된 대규모 전략기업이 우리 사회에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추진될 주요산업 국유화가 불가피하게 무상몰수 국유화가 될 것임을 예고한다. 무상몰수 국유화는 베네주엘라처럼 장기간에 걸쳐 차근차근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전격적으로 단번에 단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의지와 능력, 전망과 준비를 갖춘 진보정권(자주적 민주정부와 자주적 민주국회의 결합체)만이 주요산업 국유화를 전격적으로 단행할 수 있다.
세상이 다 아는 것처럼, 우리 사회의 주요산업 규모는 베네주엘라 주요산업 규모보다 더 크고, 그처럼 규모가 큰 만큼 대외예속성이 더 심화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미국, 일본, 유럽연합의 국제독점자본들이 이 땅의 주요산업을 집중적으로 장악, 수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주요산업을 무상몰수 방식으로 국유화하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전면적인 시장붕괴와 경제파국, 그리고 미국의 해상봉쇄, 무력침공, 전복공작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대선에서 승리했다고 해도 남측 국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여 지지기반이 취약한 진보정권이 전면적인 시장붕괴와 경제파국을 과연 견딜 수 있으며, 미국의 해상봉쇄, 무력침공, 전복공작에 맞서 과연 몇일 동안 버틸 수 있을까? 따져볼 필요도 없이,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렇다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세력은 이 땅의 주요산업 국유화 가능성을 어떻게 전망할 수 있을까? 베네주엘라의 사회변혁은 진보정권 수립→주요산업 국유화로 이어지는 일직선적인 단선경로를 밟아왔지만, 우리의 사회변혁은 매우 복잡한 복선경로를 밝아갈 것이다. 우리식 사회변혁과정에서 진보정권 수립→주요산업 국유화의 경로는 평화협정 체결→주한미국군 철군의 경로와 서로 분리되지 않고 겹쳐진다. 시간적 배열을 상정하면, 평화협정 체결→주한미국군 철군의 경로가 앞서고, 그와 연동되어 진보정권 수립→주요산업 국유화의 경로가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국군 철군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데, 하나는 한반도에서 무력충돌 위험이 현저히 제거된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주한미국군 철군이 외래자본 철수를 동반한다는 뜻이다.
이 땅의 주요산업을 장악하고 막대한 이윤을 수탈해온 외래자본이 주한미국군과 함께 동반철수한 뒤에 진보정권이 주요산업을 무상몰수 방식으로 국유화한다면, 미국의 해상봉쇄, 무력침공, 전복공작은 피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요구되는데, 지면관계상 다음 기회로 미룬다.
그런데 주한미국군 철군과 외래자본 철수 이후 주요산업을 무상몰수 방식으로 국유화하는 경우, 미국의 해상봉쇄, 무력침공, 전복공작은 피할 수 있어도 무상몰수 국유화에 수반될 시장붕괴와 경제파국까지 피하기는 힘들다. 시장붕괴와 경제파국은 주요산업을 국유화하기 전에 외래자본이 철수하는 것과 함께 이미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주요산업을 국유화하는 과정에서 시장붕괴와 경제파국은 어떤 경우에도 불가피하다.
시장붕괴와 경제파국에 처한 남측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방도는 남북경제협력밖에 없다.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민족공동경제만이 주요산업 국유화에 따르는 시장붕괴와 경제파국을 막아줄 수 있다. 외래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시장이 무너지고 경제파국에 휩쓸린다 해도, 남북경제협력으로 형성된 민족공동경제가 남측에 몰아친 시장붕괴와 경제파국의 격랑을 막아줄 수 있을 방파제로 탄탄하게 구축되었다면 진보정권이 주요산업 국유화를 무상몰수 방식으로 추진할 전망이 가능한 것이다.
베네주엘라의 주요산업 국유화를 위해 뻬데베싸가 있다면, 이 땅의 주요산업 국유화를 위해서는 민족공동경제가 있다. 뻬데베싸가 베네주엘라의 사회변혁을 계속 전진시킨 '일등공신'이 된 것처럼,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민족공동경제는 우리식 사회변혁을 계속 전진시킬 '일등공신'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추진해온 남북경제협력을 전면 중단하고 민족공동경제발전을 가로막았다. 경제체제가 완전히 다르고 상충적인 남북이 경제협력을 추진하고 민족공동경제를 발전시키는 일은 몇 해 사이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꾸준히 밀고 나가야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2012년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서 남북경제협력을 재개하고 민족공동경제를 발전시키는 과업은 단지 경제발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에까지 연장되는 것이다.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국군 철군을 실현할 시나리오를 전망한다면, 2012년에 반드시 정권교체를 실현해야 할 이유가 자명해진다. 만일 2012년에 정권교체에 실패하여 한나라당이 재집권하는 경우, 남북경제협력과 민족공동경제발전은 또 다시 가로막힐 것이며, 그에 따라 주요산업 국유화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기 위한 재정조달준비를 전혀 갖추지 못한 채 평화협정 체결→주한미국군 철군의 경로를 밟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식 사회변혁은 주요산업 국유화를 단행할 결정적인 기회를 잃어버리고 혼란에 빠질 수 있다.
현재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세력의 집권역량이 미흡하기 때문에 2012년 단독집권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단독집권 대신 공동집권을 추진하여 연립정부를 수립하고 남북경제협력을 재개하고 민족공동경제를 발전시키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어 보인다. 만일 공동집권 추진에 실패하여 민주당이 단독으로 집권하는 경우 남북경제협력은 재개되겠지만, 정권을 탈환한 민주당이 추진할 남북경제협력은 평화통일을 지향한 것이 아니고, 주요산업 국유화를 준비하기 위한 것은 더욱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2012년에 왜 민주당 단독집권을 저지해야 하고, 공동집권으로 연립정부를 수립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자명해진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세력은 '주미철'과 '주산국'을 실현하는 사회변혁의 긴 안목으로 2012년의 선거정국을 내다보고 지금부터 현명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2011년 1월 19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