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9/23

사회변혁은 왜 두 단계를 거쳐야 하는가?

변혁과 진보 (4)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특이하고 예외적인 사회변혁

이제까지 세계적 범위에서 진행된 모든 사회변혁은 두 단계로 진행된 사회변혁이었다. 딱 하나 예외가 있다면,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10월혁명이다. 그 역사적 사변을 부르는 고유명사가 말해주는 것처럼,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회변혁은 민주주의변혁단계를 거치지 않고 급진적으로 사회주의변혁단계로 진입하였다. 특이하게도, 사회주의 10월혁명은 무단계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사회변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급진주의적 좌편향이 나타났고, 그러한 좌편향이 불러온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반대방향으로 선회하는 우편향도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사회변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희생이 불가피하지만, 러시아 사회주의10월혁명의 경우에는 피할 수 있었던 좌우편향을 피하지 못하는 통에 희생이 너무 컸다. 그처럼 대내적으로 좌우편향의 우여곡절과 커다란 희생을 겪고, 대외적으로 제국주의연합세력의 무력침공을 당하면서도 러시아 사회주의10월혁명이 지속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회변혁이 그처럼 무단계적, 급진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그 때까지만 해도 두 단계 변혁론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고, 따라서 사회변혁은 오직 무단계적, 급진적으로만 실현되는 줄로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올바른 사회변혁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지만, 20세기 초 유럽은 사회변혁운동 열기로 들끓고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 사회변혁이 곧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었던 나라는 사실 러시아가 아니라 독일이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사회변혁은 러시아에서 실현되었고, 독일에서 추진되던 사회변혁운동은 유산되고 말았다. 1920-30년대 독일 사회변혁운동의 걸출한 지도자였던 에른스트 텔만(Ernst Thälmann, 1886-1944)이 만일 두 단계 변혁론을 알았더라면, 당시 독일의 사회변혁운동은 좌편향을 피할 수 있었고,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다. 역사인식에 가정법을 동원하는 것은 좀 우스운 일이라지만, 만일 러시아만이 아니라 독일에서도 사회변혁이 실현되었더라면, 세계사는 상상을 초월하여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오늘 유럽식 급진적 변혁담론이 두 단계 변혁론을 부정하는 것은, 세계사에서 딱 한 차례만 있었던 특이하고 예외적인 경험에 집착하는 것이다. 명백하게도, 무단계적이고 급진적으로 실현된 사회변혁은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예외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예외적으로 일어났던 사회변혁을 일반화하는 인식론적 오류에 빠질 것이 아니라, 그 이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두 단계 사회변혁의 다양한 역사적 경험을 참고로 하여 우리식 변혁담론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사회변혁에도 시나리오가 있어야 한다

어떤 사회가 급진적으로 뒤바뀌어 세상이 뒤집어졌다는 통속적인 표현을 쓸 수 있는 경우는 전쟁과 사회변혁이다.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 대비하여 군 수뇌부는 전쟁 시나리오를 연구한다. 전쟁 시나리오가 있는 것처럼, 사회변혁 시나리오도 있다. 사회변혁운동은 사회변혁이 일어나는 경우에 대비하여 사회변혁 시나리오를 준비한다. 시나리오를 준비하지 못한 사회변혁운동은 사회변혁을 실현할 결정적인 기회를 만난다해도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실패하게 된다. 세계 사회변혁운동사에서 그러한 실패교훈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변혁운동은 어떤 시나리오를 준비하였을까? 우리 사회변혁운동이 진행해온 사회변혁에 대한 연구와 토론은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으므로, 이 글에서 어떤 정밀한 사회변혁 시나리오를 논하는 것은 무리다. 그렇지만 비록 정밀하게 짜여진, 높은 수준의 사회변혁 시나리오를 아직 논하지 못하는 수준에 있더라도, 초보 수준의 사회변혁 시나리오를 논하지 못할 까닭은 없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변혁담론은 급진적 사회변혁과 두 단계 사회변혁으로 대별되므로, 초보 수준의 사회변혁 시나리오를 논한다면 그에 따라 두 유형의 시나리오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럽식 급진적 변혁담론에서 논하는 사회변혁 시나리오가 나올 수 있고, 우리식 두 단계 변혁담론에서 논하는 사회변혁 시나리오가 나올 수 있다. 급진적 변혁담론도 아니고, 단계적 변혁담론도 아닌 어떤 제3종 변혁담론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제3형태 사회변혁 시나리오가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

진리는 이 두 가지 사회변혁 시나리오 가운데 어느 쪽에 있다. 과연 어느 사회변혁 시나리오가 진리를 말해주는 것일까? 


급진적 변혁담론의 사회변혁 시나리오가 작성되는 경우

급진적 변혁담론에서 무단계적인 사회변혁이 일어나는 시나리오가 작성되는 경우, 거기에는 아래와 같은 다섯 가지 사회변혁요인들이 엮어질 것으로 보인다.

첫째, 좌파정당과 중도좌파정당이 형성한 공동전선이 우파정당 및 중도우파정당과 겨룰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둘째, 진보성향의 노조가 벌인 총파업이 국민적 지지를 받는다.

셋째,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으로 빈부격차가 극도로 심화되는 바람에, 우파 정권 또는 중도우파정권에 대한 노동계급, 근로대중, 도시중산층의 반감과 저항이 일어난다.

넷째, 사회주의에 대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서적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다섯째, 미국의 군사적 지배와 내정간섭을 받지 않기 때문에, 사회변혁과정에 미국이 개입할 우려가 없다.

만일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 사회변혁요인들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사회변혁이 일어나면, 명백하게도 그것은 두 단계 사회변혁이 아니라 무단계 사회변혁일 것이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 사회변혁요인들 가운데, 지금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요인은 하나도 없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위의 다섯 가지 사회변혁요인들과 상치되는, 사회변혁운동에 매우 불리한 요인들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 사회변혁요인들과 상치되는, 사회변혁운동에 매우 불리한 요인들은 지금 우리 사회변혁운동이 몸소 겪고 있는 현실이므로, 이 글에서 그 요인들이 무엇인지를 논할 필요는 없다.

주목하는 것은, 급진적 변혁담론과 무단계 사회변혁 시나리오가 우리 사회변혁운동에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급진적 변혁담론은 현실을 떠난 몽상적 담론이다. 이 땅에서 급진주의자들의 정치세력화가 불가능한 까닭은, 그들에게 가혹한 정치탄압이 가해지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몽상적 변혁담론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의미 있게 소통되지 않기 때문이다. 


단계적 변혁담론의 사회변혁 시나리오

이처럼 급진적 변혁담론과 무단계 사회변혁 시나리오가 사회변혁의 진리를 말해주지 못하므로 결론은 자명해진다. 우리 사회변혁운동이 찾아야 할 진리는, 단계적 변혁담론과 두 단계 사회변혁 시나리오에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변혁운동이 단계적 변혁담론과 두 단계 사회변혁 시나리오를 연구해야 하는 까닭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우리 사회변혁운동은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을 동시에 실현하는 사회변혁운동이기 때문에 두 단계 사회변혁 시나리오를 연구해야 한다. 물론 민족적 자주성과 동시에 실현해야 하는 계급적 자주성이란 사회주의변혁단계에서 요구되는 계급적 자주성이 아니라, 민주주의변혁단계에서 요구되는 계급적 자주성이다. 유럽의 사회변혁운동은 계급적 자주성만 실현하면 되지만, 우리 사회변혁운동은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을 동시에 실현해야 하는, 실로 버거운 과업을 걸머지고 있다. 그처럼 버거운 과업을 수행하려고 하면서, 사회주의변혁단계에서 요구하는 높은 수준에서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예견하는 급진적 발상은 현실을 모르는 인식착오다.

둘째, 우리 사회변혁운동은 도시중산층의 사회정치적 비중이 커진 자본주의사회를 개변하는 사회변혁운동이기 때문에 두 단계 사회변혁 시나리오를 연구해야 한다. 사회변혁운동에 대해 정서적 거부감을 느끼는 도시중산층의 비중이 사회정치적으로 증대된 사회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사회계급적 요구만 배타적으로 제기하는 변혁담론은 급진주의 오류로 흐르게 된다.  

셋째, 우리 사회에는 급진적 사회변혁운동을 이끌어갈 좌파정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두 단계 사회변혁 시나리오를 연구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조건에서는 좌파정당이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사회주의운동도 등장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좌파정당이 존재할 수 없고, 진보정당만 존재할 수 있는 조건에서 전개되는 사회변혁은 민주주의변혁단계에서 진행되는 사회변혁이다. 물론 그러한 민주주의변혁단계가 장차 사회주의변혁단계로 전화, 발전되리라는 점은 명백하다.

넷째, 전반적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사회정치의식이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두 단계 사회변혁 시나리오를 연구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사회변혁운동에 참가하여야 할 주체인데도, 사회변혁운동에 주체적으로 참가하기는커녕 반공이념을 주입당한 오랜 질곡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그처럼 열악한 환경에 있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변혁담론은 민주주의변혁담론밖에 없다. 지금 우리 사회변혁운동이 민주주의적 개념과 용어를 적극 받아들이고, 민주주의사상과 민주주의적 발전전망을 당면과제로 제기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다섯째, 우리 사회변혁운동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특별한 이중과업을 병행적으로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두 단계 사회변혁 시나리오를 연구해야 한다. 평화와 통일의 이중과업은 그 자체가 사회변혁운동의 고유한 과업은 아니지만, 한반도에서 평화와 통일과 무관한 사회변혁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이미 오래 전에 유명무실해져서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정전협정을 하루빨리 폐기하고,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것은 다른 나라 사회변혁운동에는 결부되지 않고 우리 사회변혁운동에만 결부된 특별과업이다. 또한 분단체제를 타파하고 나라의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것도 다른 나라 사회변혁운동에는 결부되지 않고, 우리 사회변혁운동에만 결부된 특별과업이다.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을 동시에 실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처럼 특별하게 결부된 이중과업까지 병행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이 땅의 사회변혁은 매우 복잡한 경로를 거쳐야 하며, 따라서 단계적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10년 9월 21일 작성)   

2010/09/16

제국주의세계체제론과 식민지반자본주의론

변혁과 진보 (3)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우파의 반론은 정당한가?

우리식 두 단계 변혁론에서 말하는 사회성격을 개변시키는 변혁이라는 개념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식민지적 예속성을 제거하는 사회변혁이라는 뜻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을 실현하는 사회변혁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론이 거세다.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이라는 개념 자체가 허구라는 반론이다. 이 반론은 제국주의가 지배하던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고 식민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우파이론에서 제기된 것이다. 이 반론에 따르면,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은 부정된다.

우리식 두 단계 변혁론이 사회변혁운동에 정합(整合)한 이론적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을 부정하는 우파이론에 정면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이라는 개념 자체가 허구라는 반론을 제기한 우파이론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제국주의가 종언을 고하면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이 해방되었기 때문에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이라는 개념이 더 이상 사회변혁과업으로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에 관한 변혁담론은 폐기해야 할 낡은 담론이라는 것이다.


친미정권의 자발적 편입, 친미예속정권의 재예속화

그러나 우파의 반론은 세계 정치사에 대한 인식에서 오류를 범한 것이다. 아래와 같은 논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대로, 제2차 세계대전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식민지 쟁탈전에 돌입한 제국주의강대국들 사이의 모순이 격화되다가 폭발한 세계적 범위의 전면전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제국주의강대국들의 전면전만 벌어졌다고 보는 인식은 일면적이라는 점이다. 제국주의강대국들의 전면전과 더불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들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민족해방혁명을 전개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30년대에서 1945년에 이르는 세계사의 격동기에 인류는 제국주의강대국들의 전쟁과 3개 대륙의 민족해방혁명을 동시에 경험하였다. 

3개 대륙 식민지들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전개한 민족해방혁명은 그 때까지 별로 주목 받지 못했던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과업을 전세계 사회변혁운동의 전면에 제기하였다. 사회변혁운동은 반자본주의 계급해방 과업만 중시해오던 유럽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들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수행하는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과업까지 포괄하는 세계적 관점을 세우게 된 것이다.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혁명은 사회변혁운동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킨 세계사적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세계사의 주변부에서 민족주의운동의 지위밖에 갖지 못했던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혁명은 1930년대에 이르러 진보적 인류가 수행하는 사회변혁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제국주의강대국들이 지배해온 세계질서는 전면 재편되었다. 제국주의강대국들 가운데서 전승 주도권을 장악한 미국이 세계질서 재편을 주도하였음은 물론이다. 미국이 주도한 세계질서의 재편으로 출현한 것이 제국주의세계체제다. 미국이 주도한 제국주의세계체제의 성립을 현대 제국주의의 출현이라는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전후 서유럽과 일본이 이 미증유의 체제에 자발적으로 편입하였을 뿐아니라, 제국주의강대국들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이 그 체제에 재예속화됨으로써 세계적 범위의 거대한 체제가 성립되었다. 미국이 장악한 제국주의세계체제의 특징은 무력침공과 강제분할에 의한 예속이 아니라, 서유럽과 일본에 등장한 친미정권의 자발적 편입, 그리고 3개 대륙에 등장한 친미예속정권의 재예속화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국주의 강대국들 사이의 전면전이 끝나고 식민지들이 해방되었으나, 미국이 장악한 제국주의세계체제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피흘려 쟁취한 민족해방혁명의 승리를 탈취하였고, 친미예속정권을 내세워 추진하는 재예속화의 길로 3개 대륙을 끌고 갔다.

제국주의세계체제의 성립과 친미예속정권의 재예속화는 당연히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격렬한 저항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세계사적 시각에서 4.3항쟁과 6.25전쟁을 재조명하면, 한반도는 제국주의세계체제의 성립과 친미예속정권의 재예속화 추진을 가장 먼저,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여 싸운 전후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지로 떠오른다. 


식민지는 사라져도 식민지적 사회성격은 여전하다

어떤 나라가 친미예속정권에 의해 제국주의세계체제에 재예속되었다고 말할 때, 예속이라는 개념을 좀 더 자세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제국주의세계체제가 출현한 이후, 친미예속정권이 등장한 나라들에서 정치적 독립은 껍데기 뿐이고 실제로는 간섭과 지배에 결박되었으며, 경제와 산업은 금융, 기술, 무역부문에서 삼중으로 수탈당했으며, 군사는 연합군, 동맹군, 다국적군이라는 각종 허울 아래서 지휘와 추종의 종속관계에 묶었으며, 사상문화는 미국식으로 동화되었다. 이처럼 예속은 말 그대로 총체적이다. 예속은 사회성격을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미상불, 제국주의는 식민지와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개념이다. 만일 식민지가 없으면, 제국주의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 반대도 진실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제국주의세계체제에서 식민지가 존재하는 것일까?  1945년 8월 이전에는 개별적 제국주의강대국들과 그에 상응하는 개별적 식민지들이 존재하였는데, 1945년 8월 이후에는 제국주의세계체제는 존재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식민지세계체제라는 개념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이 세계적 범위에서 상호협력하는 어떤 체제를 성립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점령군이 강점하고 총독이 직접 통치하는 식민지는 오늘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존재하는 것은 식민지적 사회성격을 지닌 예속국들이다. 3개 대륙의 식민지들에서 총독이나 점령군이 사라졌다고 해서, 식민지적 사회성격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식민지라는 개념과 식민지적 사회성격이라는 개념은 다르다. 식민지적 사회성격은 제국주의세계체제에서 여전히, 변함없이 존재한다. 그러한 사회성격을 예속성이라 한다. 예속성의 존재방식이 식민지에서 예속국으로 전환된 것 뿐이다. 

미국이 장악한 제국주의세계체제에서는 정치적 간섭과 지배, 경제적 수탈과 갈취, 군사적 지휘와 통제, 사상문화적 파괴와 동화가 계속 확대되고 심화되기 때문에 식민지적 예속성이 사라지거나 감소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개별적인 제국주의-식민지 관계가 난립했던 시기에는 식민지이냐 독립국이냐 하는 판별기준이 적용되었지만, 제국주의세계체제가 성립된 이후에는 예속성이냐 자주성이냐 하는 새로운 판별기준이 적용되는 것이다.


제국주의세계체제론과 식민지반자본주의론

식민지적 사회성격을 지닌 나라들은 미국이 장악한 제국주의세계체제에 예속되었기 때문에, 미국식 자본주의의 사상, 제도, 문화를 이식받는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적 사회성격을 지닌 나라에 이식된 자본주의가 발전한 것이다.

식민지적 사회성격을 지닌 나라에 이식된 자본주의가 어떻게 발전하였는지에 대해 두 가지 논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식민지적 사회성격을 지닌 나라에 이식된 자본주의의 발전수준을 결정한 요인은, 제국주의세계체제에 예속된 강도다. 예속강도가 높은 나라에서는 자본주의가 발전하였고, 예속강도가 낮은 나라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발전하였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예속국들에 이식된 자본주의에서 발전수준 격차가 생겨난 까닭이 거기에 있다. 우파이론이 종래 써오던 개발도상국이라는 개념에 더하여 이른바 중진국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쓰는 것은, 3개 대륙 예속국들에 이식된 자본주의의 발전수준 차이를 가늠하는 분류법이다.

1945년 8월 이전 식민지에서는 제국주의강대국들의 식민주의 정책에 의해 자본주의적 발전이 억제되고 종래의 봉건주의가 온존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1945년 8월 이후 예속국에서는 친미예속정권의 재예속화 정책에 의해 봉건주의가 폐절되고 미국에서 이식된 자본주의가 발전하였다.

둘째, 식민지적 사회성격을 지닌 나라에 이식된 자본주의는 제국주의세계체제에 예속된 상태에서 발전하기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예속심화는 좌파이론에서 말하는 '독점강화'에 결부되는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 발전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예속국에 이식된 자본주의가 비정상적으로 발전하는 원인은, 명백하게도, 식민지적 사회성격에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예속국에서 식민지적 예속성은 자본주의 발전을 규제하는 것이다. 예속국에 이식된 자본주의는 변태적, 기형적으로 발전한 자본주의다.

예속국에 이식된 자본주의가 식민지적 사회성격에 의해 변태적, 기형적으로 발전하였음을 해명한 이론이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이다. 전(全)자본주의에 대비되는 반(半)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자본주의가 억제되어 절반밖에 발전하지 못했다는 발전수준을 표시한 개념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비정상적 발전에서 나타나는 변태성과 기형성을 표시한 개념이다.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은 식민지와 자본주의를 기계적으로 합성한 이론이 아니다. 그 이론은 식민지적 사회성격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예속국에 이식된 자본주의를 어떻게 규제하였는지를 해명한다. 식민지적 사회성격에 의해 규제되어 변태적, 기형적으로 발전한 자본주의사회를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라 한다.

중요한 것은, 사회체제론과 사회성격론을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회체제론은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규정한 사회계급적 예속성을 해명하고, 사회성격론은 제국주의세계체제와 예속국의 관계를 규정한 식민지적 예속성을 해명한다.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은 자생적, 정상적으로 발전한 자본주의의 체제구성을 해명한 사회체제론이 아니라, 미국에서 이식되어 비정상적으로 발전한 자본주의의 식민지적 예속성을 해명한 사회성격론이다.

우리 사회에 이식된 자본주의의 현재 발전수준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당히 높다. 자본주의 발전수준을 보면, 3개 대륙 상위권에 속한다. 그래서 우파이론은 '한강의 기적', '산업화 성공', '압축성장', '중진국 진출' 같은 듣기 좋은 신조어를 만들어내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적 발전수준을 설명한다. 그러나 그런 설명은 미국에서 이식되어 변태적, 기형적으로 발전해온 비정상적 발전경로를 은폐한 수박 겉핥기식 설명이다. 속이 곯은 수박이라 해도 겉은 멀쩡해 보이는 법이다. 내재된 모순이 곯아터질 때까지.


중요산업 국유화 강령을 전면에 제기한 까닭

위에서 거론한 두 가지 논점에 비춰보면, 우리 사회는 제국주의세계체제에 예속된 강도가 가장 높은 사회이며, 따라서 우리 사회에 이식된 자본주의가 가장 변태적, 기형적으로 발전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의 현실을 말해주는 각종 지표, 통계, 정보를 열거할 필요 없이, 이 땅에 이식되어 비정상적으로 발전한 자본주의가 극도의 변태성과 기형성을 드러내고 있음은 너무도 명백하다.

두 단계 변혁론에서 말하는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이란, 미국이 장악한 제국주의세계체제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실현한다는 뜻이고, 식민지적 사회성격을 제거하여 자주성을 실현한다는 뜻이고,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의 예속성을 제거하여 자주성을 실현한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에 이식되어 비정상적으로 발전한 자본주의가 가장 심한 변태성과 기형성을 드러내는 곳은 중요산업이다. 두 단계 변혁론이 중요산업 국유화 강령을 전면에 제기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예속국에서 중요산업을 국유화하는 것은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을 실현하는 것이며, 동시에 반자본주의 계급해방을 민주주의변혁의 발전단계에 맞게 실현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논한 내용을 종합하면, 제국주의세계체제론과 식민지반자본주의론, 두 단계 변혁론과 중요산업 국유화론이 하나의 일관된 이론체계로 정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2010년 9월 15일 작성)

2010/09/15

변혁담론이 제기한 두 가지 논점

변혁과 진보 (2)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이론적 해명을 요구하는 논점들

유럽에서 정립된 두 단계 사회변혁론은 사회성격을 개변시키는 변혁에 대해 논하지 않으며, 근로대중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변혁에 대해서만 논한다. 다시 말해서, 유럽식 두 단계 변혁론의 핵심내용은 근로대중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변혁이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변혁으로 이행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유럽에서 정립된 변혁론들 가운데는 두 단계 사회변혁을 부정하는 변혁론도 있는데, 이러한 급진주의 변혁론은 근로대중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변혁마저 논하지 않고,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변혁만 논한다. 유럽식 변혁론이 두 단계 변혁론과 급진주의 변혁론으로 갈라져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 주변에는 유럽식 두 단계 변혁론에 심취한 사람들도 있고, 급진주의 변혁론에 심취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럽식 두 단계 변혁론이나 급진주의 변혁론은 우리의 사회변혁운동에 맞지 않는다. 우리는 유럽식 두 단계 변혁론이나 급진주의 변혁론을 참고하기 위해 살펴볼 필요는 있지만, 거기에 심취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식 변혁론을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식 변혁론을 탐구해야 한다는 말은 민족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어설픈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동일한 자본주의체제에 의해 규정된 사회현실이라 해도, 우리의 사회현실과 유럽의 사회현실 사이에 발생근원의 차이, 발전경로의 차이, 발전수준의 차이가 중첩적으로 개재되어 있으므로, 유럽의 사회현실과 크게 다른 우리의 사회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식 변혁론을 탐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식 변혁론을 탐구하기 위해서 우선 두 가지 이론적 해명이 요구된다. 

첫째, 유럽식 두 단계 변혁론은 왜 사회성격을 개변시키는 변혁에 대해 논하지 않고, 근로대중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변혁에 대해서만 논하였는지 알아보고, 그런 식의 변혁론이 왜 우리의 사회변혁운동에 들어맞지 않는지를 이론적으로 해명할 필요가 있다.

둘째,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변혁만 논하는 유럽식 급진주의 변혁론이 왜 우리의 사회변혁운동에 들어맞지 않는지를 이론적으로 해명할 필요가 있다. 

위의 두 가지 논점을 해명해야, 우리식 변혁론이 왜 사회성격의 개변시키는 변혁과 근로대중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변혁을 상호결합한 변혁론으로 정립되는지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유럽식 두 단계 변혁론의 맹점

유럽식 두 단계 변혁론이 사회성격을 개변시키는 변혁에 대해 논하지 않고, 근로대중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변혁에 대해서만 논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와 달리, 유럽에서는 사회성격을 개변시키는 변혁이 요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0년 9월 2일에 작성한 나의 글 '과학적 변혁담론과 두 단계의 변혁'에서 논한 대로, 우리의 사회변혁운동이 개변시켜야 할 사회성격이란 구체적으로 대미예속성을 뜻하는데, 유럽은 역사적으로 그러한 사회성격을 지닌 적이 없었다. 도리어 유럽 주요국들은 미국보다 한 발 앞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를 침략하고 3개 대륙을 자기들의 식민지로 분할, 강점, 예속하였다. 이처럼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예속한 경험밖에 없고, 다른 제국주의 강대국에게 예속당한 경험이 전혀 없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러시아 같은 유럽 주요국들에서 일어난 사회변혁운동은 사회성격을 개변시키는 변혁을 거론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였고 오직 사회체제를 개변시키는 변혁을 정립할 필요만 느꼈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변혁담론에서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과업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였을 것이다. 1930년대 유럽의 사회변혁운동이 근로대중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변혁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변혁으로 이행하는 유럽식 두 단계 변혁론을 정립한 것은 그들로서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하면, 유럽식 두 단계 변혁론에 심취한 사람들이 그 변혁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지도 않은 채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두 단계 변혁론이라 해도, 유럽식 두 단계 변혁론은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에 관심이 없고, 반자본주의 계급해방에만 관심을 두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유럽식 두 단계 변혁론은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에 대해 논하지 않고, 반자본주의 계급해방을 실현하는 두 단계 경로만을 논증하였던 것이다.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그러한 유럽식 두 단계 변혁론은 우리의 사회변혁운동에 맞지 않는다. 비유로 말하면, 자기 체질에 맞지 않는 음식물과 자기 체질에 맞는 음식물을 가려 먹지 못하고, 주어진 음식물을 통째로 삼키는 사람은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법이다.

우리의 사회변혁운동에 들어맞는 우리식 변혁론은 사회성격을 개변시키는 변혁과 근로대중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변혁을 상호결합한 두 단계 변혁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식 사회변혁은 반제국주의 민족해방과 반자본주의 계급해방을 동반적으로 추구하는 우리식 두 단계 변혁인 것이다.


급진주의 변혁론의 맹점

유럽식 급진주의 변혁론이 두 단계 변혁론을 부정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무단계 변혁만 논한 까닭은 무엇일까? 유럽식 급진주의 변혁론이 부정한 것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정립된 두 단계 변혁론이 아니라, 유럽에서 정립된 두 단계 변혁론이다. 유럽의 급진주의 변혁론자들은 3개 대륙에서 정립된 두 단계 변혁론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고 관심조차 없었으므로, 유럽에서 정립된 두 단계 변혁론만 부정한 것이다.

반자본주의 계급해방을 사회변혁의 강령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유럽식 급진주의 변혁론이나 유럽식 두 단계 변혁론이나 똑같지만, 그 강령을 어떤 경로로 실현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이론을 제시하였다. 이를테면, 유럽식 두 단계 변혁론은 근로대중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변혁경로를 중시하는 데 반해, 유럽식 급진주의 변혁론은 그 경로를 부정한다. 따라서 사회변혁의 강령이 같아도 사회변혁의 경로가 서로 다르다는 데 쟁점이 있는 것이다. 

유럽식 급진주의 변혁론이 근로대중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변혁경로를 부정하는 까닭은, 반자본주의 계급해방을 실현하는 변혁경로를 단선적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유럽식 급진주의 변혁론은 반자본주의 계급해방이 단계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무단계적으로, 급진적으로 실현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급진주의 변혁론과 두 단계 변혁론은 반자본주의 계급해방의 실현경로문제를 놓고 갈라서게 된다. 급진주의 변혁론은 급진적 실현경로를 주장하고, 두 단계 변혁론은 단계적 실현경로를 주장한다.

어느 쪽이 옳은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간명하게 표현하면, 반자본주의 계급해방은 급진적으로도 실현될 수 있고, 단계적으로도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모호한 답변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사회성격과 사회계급관계에 따라 급진적으로 실현될 수도 있고, 단계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주목하는 것은, 해당사회의 사회성격과 사회계급관계가 반자본주의 계급해방의 실현경로를 결정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제국주의 강대국에게 예속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사회정치역량이 자본가계급과 그 동맹세력의 지배력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사회에서는 반자본주의 계급해방이 급진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그에 비하여, 제국주의 강대국에게 예속되었을 뿐아니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사회정치역량이 아직 취약하여 자본가계급과 그 동맹세력의 지배력에 정면으로 맞설 수 없는 사회에서는 반자본주의 계급해방이 단계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반자본주의 계급해방이 어느 사회에서나 급진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급진주의 변혁론은, 각 사회마다 사회성격과 사회계급관계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론적 맹점을 안고 있다.

반자본주의 계급해방을 실현한다는 말을 정치경제학 개념으로 표현하면 가치법칙의 폐절이라는 뜻이고, 통속적으로 표현하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철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쟁점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급진적으로 철폐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단계적으로 철폐하여야 하는가 문제로 집약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 논거에 따라 판단을 내려야 한다.

첫째, 사회계급관계를 분석하고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사회계급관계에서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 대 중산층의 비중에 눈길을 돌려야 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체제가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여 중산층의 사회정치적 비중이 증대한 사회에서는 시장경제를 급진적으로 철폐할 수 없으므로 단계적으로 철폐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중산층은 시장경제의 철폐를 완강하게 반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정치적 비중이 커진 중산층이 독자적 정치세력화에 성공하여 중도우파 성향의 집권당을 출현시키는 사회에서 중산층을 자본가계급의 편으로 떠밀어 내고, 나머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힘만으로 반자본주의 계급해방을 실현하겠다는 생각은 과학적 판단을 버리고 패배를 자초하는 모험주의자의 무모한 발상이다. 

둘째,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사회정치의식 수준을 파악하고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양적으로 자본가계급과 그 동맹세력을 압도하는 사회라고 해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의존심리가 강하고 투쟁의지가 박약하다면 시장경제를 급진적으로 철폐할 수 없으므로 단계적으로 철폐하여야 한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발적, 주체적으로 수행하는 사회변혁운동에서 결정적인 요인은 그들의 사회정치의식이다. 사회변혁운동에 대한 정권의 탄압이 심하고 반사회주의 선전선동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사회정치의식이 질곡에 빠진 사회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이 시장경제를 철폐하라는 급진적 요구를 제기하고 싶어도 제기하지 못한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시장경제 철폐라는 급진적 요구에 무관심한데, 급진주의자들이 정권의 탄압을 무릅쓰고 "시장경제 철폐만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살 길"이라는 옳은 명제를 아무리 외쳐도 그 외침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생소하고 공허한 구호로 들린다. 

눈길을 우리 사회로 돌리면, 오늘 우리 사회에서 중산층의 사회정치적 비중은 매우 커졌으며,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각국과 비교해봐도 중산층의 사회정치적 비중이 가장 큰 사회로 손꼽힌다. 또한 오늘 우리 사회는 사회변혁운동에 대한 정권의 탄압이 극심하고 반사회주의 선전선동이 장기간 사회 전반에 확산되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사회정치의식이 질곡에 빠진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변혁운동이 급진주의 변혁론을 따라간다면, 그 결과는 보나마나 뻔하다. (2010년 9월 13일 작성)

과학적 변혁담론과 두 단계의 변혁

변혁과 진보 (1)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변혁담론의 열기가 식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의 노력은 사회적 진보를 실현하는 문제에 집중된다. 그런 노력을 반영하여 "세상을 바꾸자" 또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자!" 같은 구호가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아는 얘기지만, 세상을 누가 어떻게 바꿀 것인지, 새로운 사회를 누가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를 논할 때, 비로소 구호를 넘어 과학을 만나게 된다. 세상을 바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과업은 "000은 물러가라!" 또는 "000을 중단하라!"는 구호만으로는 수행할 수 없으며, 반드시 과학을 동반해야 수행되는 법이다. 다시 말해서, 저항은 구호만으로도 가능하지만, 변혁은 구호와 더불어 과학을 동반해야 가능하다. 저항은 과학 없이 일어날 수 있지만, 변혁은 과학 없이 일어날 수 없다. 변혁은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적이다.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이 구호를 넘어 과학을 만나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변혁이 동반하는 과학은 변혁의 과학이다. 변혁의 과학은 사회적 진보를 위한 과학이다. 사회적 진보는 오직 변혁에 의해서만 실현된다. 이전에는 많이 쓰지 않던 진보라는 말을 많이 쓰게 되면서, 어느 때부터인가 진보를 변혁과 떼어놓고 생각하는 풍조가 생겼지만, 원래 변혁과 진보의 관계는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명백하게도, 변혁만이 진보를 실현한다. 지금 형형색색의 진보주의가 등장하여 제각기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변혁을 지향하지 않는 진보 또는 변혁의 요구를 외면한 진보는 진보가 아니라, 사이비 진보다.

변혁의 과학은 세상을 바꾸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변혁담론을 제기한다. 사회적 진보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이론적 해명은 변혁담론에 담겨져있다. 그러므로 과학적 변혁담론이 풍부하게 발전되어야 세상을 바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진보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이치를 모르는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은 없다. 그러므로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이 항상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은 변혁담론이다.

그러면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은 변혁의 과학을 얼마나 진지하게,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까?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변혁담론은 들리지 않는다. 남몰래 골방에 들어가서 공부하는 것일까? 아니면, 높은 수준에 이르러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일까?

1980년대 컴퓨터도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알지 못하던 시절, 한글 타자기로 작성한 문건을 복사하여 변혁의 과학을 공부한 때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수없이 중복 복사하여 전해지는 통에 어떤 문장은 복사과정에서 글자가 희미하게 지워져 읽을 수 없는 대목도 있었다. 그 시절에는 그런 문건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엄중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그처럼 여건이 힘들고 분위기가 삼엄했어도, 변혁의 과학을 공부하는 열의는 뜨거웠다.

그런데 타자기가 아니라 컴퓨터로 문건을 작성하고, 복사기가 아니라 인터넷으로 문건을 전달하고, 공중전화가 아니라 휴대전화로 연락을 주고받는 오늘에는 변혁담론을 찾아보기 힘들다. 20여 년 세월이 흐르면서, 학습열의가 식어버린 것이다.

타자기와 복사기밖에 없던 1980년대에 그토록 바랐던 민주노조도 건설되었고, 그토록 기대하였던 진보적 대중단체들도 생겨났고, 그 시절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진보정당도 건설되어 벌써 10여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사회적 진보의 목적지가 멀어 보이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변혁담론의 열기가 식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해도 틀린 대답은 아닐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변혁의 과학에 대한 깊은 인식이 없기 때문에, 변혁담론에 무관심해지고, 정책과 대책을 세우거나 전략과 전술을 택하면서 본의 아니게 편향과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개인 대 개인의 관계에서 실수를 저지르거나 과오를 범하는 경우 사과하고 바로잡을 수 있지만, 정적들과 맞서는 정치투쟁에서 편향과 오류가 생기면 실패와 정체에 빠진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민주노동당이 분당사태를 겪으면서 진보신당으로 갈라져 나간 것은 가장 큰 실패경험이었고, 민주노총이나 민주노동당이 지속적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정체상태에 묶여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 실패와 정체를 극복하지 못하면, 진보의 길에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이명박 정권만이 진보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 정치세력 내부에서 발생한 실패와 정체도 그 길을 가로막고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외부의 침탈보다 내부의 우환이 더 무섭다는 말이 실감 난다.

이런 상황을 두고 어떤 사람은 출구전략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출구전략이라는 표현도 따지고 보면, 진보의 길을 가로막은 실패와 정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에서 제기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실패와 정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제기할 때,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것은 실패와 정체가 생겨난 원인이 무엇일까 하는 문제의식이다. 원인을 분석해야 극복하는 방도를 찾을 수 있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진보의 길을 가로막는 실패와 정체의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서라도 변혁의 과학을 공부하여야 하는 것이다.


과학적 변혁담론은 무엇인가?

진보를 실현할 바탕을 해명하지 않고, 진보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비과학적인 발상이다. 비유로 말하면, 토양의 성질에 맞는 씨앗을 뿌려야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와 똑같은 원리에서, 진보를 실현할 바탕을 해명하고, 그에 맞는 변혁 강령을 추구해야 진보의 길을 열어놓을 수 있다. 진보를 실현할 바탕을 해명하지 못하면, 아무리 애쓰더라도 시행착오를 거듭할 뿐이다. 지금 이 땅의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이 겪고 있는 실패와 정체는 그렇게 하여 생겨난 시행착오가 아닐까?

변혁담론에서 말하는 '바탕'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단답형으로 직설하면, 그 바탕은 사회성격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사회성격이란 예속성을 뜻한다. 변혁담론에서 쓰는 예속이라는 말은 사회성격을 규정하는 개념으로 쓰인다. 그래서 예속성이라고 한다. 이 땅의 사회성격은 대미예속성이다.

대미예속이 사회성격이라면, 정전상태와 분단상황은 그러한 사회성격에서 산생된 특수한 사회현실이다. 사회성격이 사회현실을 산생하는 것이므로, 대미예속성이라는 사회성격에서 정전상태와 분단상황이라는 특수한 사회현실이 나왔고, 오랜 기간에 걸쳐 유지되어온 것이다.

정전상태란, 방대한 무력이 집결하여 전쟁위험이 고조된 준전시상태를 유지해오는 특수한 사회현실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런 특수한 사회현실에서 어떻게 사회변혁을 실현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묻고, 그 해답을 찾는 것이 변혁담론이다.

정전상태가 규정하는 한반도 군사정세는 이 땅의 정치상황과 경제현실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고, 대중의 의식구조에까지 파고들었다. 따라서 다른 나라의 변혁담론과 달리, 이 땅의 변혁담론은 한반도 군사정세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 군사정세를 외면한 변혁담론은 비과학적이고,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을 거론하지 않는 변혁담론도 비과학적이다. 과학적인 변혁담론은 한반도 군사정세를 분석하고, 변혁의 과업과 한반도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과업의 상관성을 해명한다.

정전상태는 한반도의 분단상황에 직결된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상황이 정전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에 의해 유지된다는 점에서 정전상태와 분단상황이 직결된다고 말할 수 있다. 정전상태가 군사적인 것이라면, 분단상황은 정치적인 것이다. 정전상태의 정치적 측면이 분단상황이라면, 분단상황의 군사적 측면은 정전상태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분단상황은 이 땅의 정치적, 경제적 현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다른 나라의 변혁담론과 달리, 이 땅의 변혁담론은 분단상황이라는 특수한 사회현실에서 어떻게 사회변혁을 실현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묻고,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과학적인 변혁담론은 분단상황에서 사회변혁을 실현하는 과업을 해명한다. 분단된 남북관계를 외면한 변혁담론은 비과학적이고, 한반도 통일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변혁담론도 비과학적이다.

중요한 것은, 대미예속성이 사회성격으로 굳어지면, 사회체제가 변형된다는 점이다. 명백하게도, 이 땅의 자본주의체제는 대미예속성에 의해 변형된 사회체제다. 다른 나라의 자본주의체제와 달리, 이 땅의 자본주의체제가 변태적으로 형성되고 불구화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대미예속성과 무관한 나라들에서 제기된 변혁담론은 이 땅의 사회성격을 과학적으로 해명하지 못한다. 다른 나라의 변혁담론은 자본주의체제 일반에 대해 과학적 해명을 주지만, 대미예속성이 변형시킨 이 땅의 자본주의체제를 해명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사회성격을 개변시키는 문제를 해명하는 변혁담론은 다른 나라에서 수입할 수 없으며, 오직 이 땅의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이 독자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사회성격을 개변시키는 변혁이 사회체제를 개변시키는 변혁보다 먼저 수행된다는 점이다. 사회체제를 변혁하면, 사회 성격까지 한꺼번에 자동적으로 개변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회변혁에 대한 급진주의자들의 오해와 편견이다. 급진주의자들의 시야에는 사회체제만 중요하게 보이고, 사회성격은 무시해도 좋은 하찮은 부속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회성격이 이 땅의 사회체제를 변태적으로 형성시키고, 불구화시켰음을 생각하면, 급진주의자들의 그러한 견해가 얼마나 비과학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변혁의 과학을 깊이 공부하지 않아,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한 급진주의는 승리하지 못한다.

이 땅의 사회변혁은 사회성격을 개변시키는 단계를 거쳐야, 사회체제를 개변시키는 더 높은 단계로 들어설 수 있다. 물론 다른 나라에서 제기된 변혁담론에서도 두 단계 변혁이라는 개념이 제시된 바 있다. 민주주의 변혁을 완수하고 사회주의 변혁으로 이행한다는 변혁담론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두 단계 변혁담론은 이 땅에서 수행할 변혁과업을 전면적으로 해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땅의 사회체제와 마찬가지로 이 땅의 민주주의도 다른 나라의 민주주의와 달리, 사회성격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다른 나라에서는 1980년대에 이미 사라진 국가보안법 같은 파시스트적 악법이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 그리고 중도우파정권이 10년 동안 들어서서 형식적 민주주의를 실현한다고 하면서도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존치시킨 것은 이 땅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변형되었는지를 말해준다.

이 땅에서 민주주의적 변혁과업은 사회성격을 개변시키는 변혁과업과 어떻게 연관되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변혁의 과학을 깊이 있게 공부한 변혁담론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장활동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은 사회성격을 개변시키는 변혁과업을 올바르게,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변혁담론을 주고받아야 한다. (2010년 9월 2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