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시보 2018년 02월 26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남, 북, 미 3자구도로 복잡하게 얽힌 사연
2. 서훈-팜페오 비밀회담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최종결정
3. 평양과 워싱턴 사이에서 조용히 진행된 정치곡예
4. 대남특사파견 예측하지 못해 상황을 오판한 청와대와 국정원
5. 조미예비회담이 무산된 원인은 백악관의 자가당착 괴행
1. 남, 북, 미 3자구도로 복잡하게 얽힌 사연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보도기사가 <워싱턴포스트> 2018년 2월 20일부에 실렸다. 그 보도기사의 핵심내용을 간추리면, 평창동계올림픽이 시작된 지난 2월 10일 당시 서울에 머물고 있었던 조선 고위급 대표들과 미국 고위급 대표들이 청와대에서 비공개 회담을 진행하기로 예정되었는데, 회담을 시작할 시간이 2시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북측 고위급 대표단이 회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하여 무산되었다는 것이다. 그 사연을 <워싱턴포스트> 취재기자에게 털어놓은 제보자는 마익 펜스(Michael R. Pence) 미국 부통령과 함께 그 회담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닉 에이어스(J. Nick Ayers) 부통령 비서실장이다.
그날 조선 고위급 대표들이 취소한 회담은 백악관이 조선에게 몇 차례 만나자고 제의하였으나 조선이 번번이 거절하는 바람에 조선에게 말도 붙여보지 못했던 ‘조건 없는 조미예비회담’이다. <세계일보> 2018년 1월 8일부 보도기사에서 미국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미국과 대화에 나서겠다는 입장표면을 하면 언제든 북미직접대화가 열릴 수 있다. 미국은 이미 북한측에 회담개최제안을 했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북한과 조건 없이 대화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지만, 그런 제안은 외교채널을 통해 북한에도 공식 전달됐고, 이후에도 이 채널이 수시로 가동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아직 미국과의 대화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히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위에서 언급한 <워싱턴포스트> 2018년 2월 20일부 보도기사가 나왔을 때, 한국 언론매체들은 곧바로 그와 관련된 기사들을 써냈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사연들이 그 보도기사들을 통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조선 고위급 대표들과 미국 고위급 대표들이 청와대에서 비공개로 진행하려고 하였던 조미예비회담은 워낙 극비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보도기사 몇 편만 읽어봐서는 어떤 복잡한 사연이 얽혀있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더욱이 <워싱턴포스트> 2018년 2월 20일부에 실린 그 보도기사는 백악관의 제보자가 전해준 사연을 듣고 작성된 것이므로 남, 북, 미 3자구도로 복잡하게 얽힌 사연을 전체적으로 밝혀주지 않았다. 백악관의 시각으로 치우친 서술내용을 남, 북, 미 3자구도로 넓혀 서술균형을 바로잡을 때, 복잡하게 얽힌 사연 전체가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사진 1>
남, 북, 미 3자구도로 복잡하게 얽힌 사연이 시작된 날은 2018년 1월 4일이다. 그날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 대통령은 전화통화를 하였다. <워싱턴포스트> 2018년 1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을 옆집 아이 부르듯 ‘재인아(Jae-in)’라고 하대하였는데,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을 ‘대통령님(Mr. President)’이라는 존칭으로 깍듯이 공대하였던 전화통화였다. 그 보도기사에 따르면, 그날 전화통화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남북대화계획에 대해 설명하였고, 트럼프 대통령은 자기가 남북대화를 위한 환경을 마련하는 공을 세웠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밝혀달라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요구하였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그 발언에는 남북관계개선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겼지만, 남북관계개선이 마치 자기 노력으로 시작된 것처럼 착각한 것은 그가 정상인보다 약간 낮은 지능을 가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2018년 1월 10일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엿새 만에 또 다시 전화통화를 하였다. <로이터통신> 2018년 1월 10일 보도에 따르면, 그 전화통화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1월 9일에 있었던 남북고위급회담이 잘 진행되었다고 설명하였고,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적절한 시점과 상황에서 조선과 대화하려고 한다”고 말하였고, 펜스 부통령을 평창동계올림픽 미국 대표단 단장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음을 알려주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미국이 적절한 시점과 상황에서 조선과 대화하려고 한다”고 말하면서 대화의사를 드러낸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다. 그 발언이 언론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던 1월 20일 당시에는 그가 무슨 속셈을 가지고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하면 문재인 대통령이 평창동계올림픽에 참가할 북측 고위급 대표들과 미국 고위급 대표들이 만나는 회담을 중재하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날 두 정상이 전화통화에서 주고받은 대화내용을 좀 더 명료하게 재구성하면,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자신이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조미예비회담을 중재하고 싶다는 의향을 전했고, 그런 의향을 들은 트럼프 대통령도 적절한 시점과 상황에서 조선과 회담하려고 한다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위에 인용한 <세계일보> 2018년 1월 8일부 보도기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미국은 이미 2017년 12월에 조선에게 회담을 하자고 몇 차례 제의하였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는데, 해가 바뀌면서 시간이 더욱 촉박해지는 바람에 백악관은 조선과의 회담을 급하게 추진할 수밖에 없는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백악관이 그런 곤경에 빠진 때에 문재인 대통령이 조미예비회담을 중재해보겠다고 제의하였으니, 트럼프 대통령은 그 제의를 반대할 수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조미예비회담을 중재하고 싶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의향을 들은 뒤에 조미예비회담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기대감은 <가디언> 2018년 1월 10일부 보도기사와 <블룸벅뉴스> 2018년 1월 10일부 보도기사에서 각각 찾아볼 수 있다. 그 두 보도기사들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출입기자들에게 “우리와 북조선 사이에는 확실히 문제들이 있지만, 지금 유익한 대화들이 많이 진행되고 있다...좋은 에너지들이 많이...매우 좋은 일이다. 바라건대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기대감을 제 손으로 무너뜨리는 자가당착적인 괴행을 저지르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2. 서훈-팜페오 비밀회담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최종결정
트럼프 대통령은 조미예비회담을 중재하고 싶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제의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그런 중대하고 민감한 사안은 트럼프 대통령이 자기 혼자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고, 반드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공식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한 자신의 조미예비회담 중재제의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결정될 수 있도록 후속작업을 추진하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 후속작업에 관련된 모든 업무를 서훈 국정원장에게 맡겼다. 원래 국정원은 은밀히 움직이는 비밀활동기관이므로, 극비로 추진해야 할 조미예비회담 중재업무를 국정원장에게 맡기는 것이 적합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더욱이 2017년 5월 평택미국군기지 안에 대조선첩보기관인 ‘코리아임무쎈터(Korea Mission Center)’를 설치한 미국 중앙정보국은 대조선첩보사업에서 국정원과 더욱 긴밀히 협력하게 되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서훈 국정원장이 2017년 6월 1일에 취임하였으므로, 마익 팜페오(Michael R. Pompeo) 중앙정보국장과 서훈 국정원장의 관계는 전화통화를 주고받을 만큼 밀착되어 있었다.
<조선일보> 2018년 2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서훈 국정원장은 2018년 1월 하순 워싱턴을 극비로 방문하였다. 그는 워싱턴에서 팜페오 중앙정보국장을 만나 비밀회담을 진행하였다. 서훈-팜페오 비밀회담에서 조미예비회담 중재문제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훈 국정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의한 조미예비회담 중재문제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결정해달라고 팜페오 중앙정보국장에게 요청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그 비밀회담에서 서훈 국정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추진하려는 대북관계개선이 조선의 비핵화로 이어지게 될 것이므로, 미국도 평창동계올림픽의 호기를 놓치지 말고 조선과 예비회담을 하여 비핵화협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식으로 설득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진 2>
팜페오 중앙정보국장은 백악관 대결파 3인방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서훈 국정원장의 그런 설명을 듣고 공감을 표시하였다. 다시 말하면,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관계개선구상과 트럼프 대통령의 대조선비핵화구상이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팜페오 중앙정보국장이 그 사실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되어 트럼프 대통령은 조미예비회담 추진문제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기 위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회의를 소입하였는데, 그날은 2018년 2월 4일이었다. <워싱턴포스트> 2018년 2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그날 트럼프 대통령이 소집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트럼프 대통령, 마익 펜스 부통령, 렉스 틸러슨(Rex W. Tillerson) 국무장관, 제임스 매티스(James N. Mattis) 국방장관, 허벗 맥매스터(Herbert R. McMaster) 국가안보보좌관, 존 켈리(John F. Kelly) 대통령 비서실장, 닉 에이어스 부통령 비서실장이었고, 출장 중인 팜페오 중앙정보국장은 전화통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참석하였다고 한다. 위의 보도기사에 따르면, 그 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펜스 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이 중재하고 싶다고 한 조미예비회담에 대해 찬성하였다고 한다. 조미예비회담에 대한 백악관의 최종결정이 내려진 그날은 펜스 부통령이 평창동계올림픽 미국 대표단을 이끌고 워싱턴을 출발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3. 평양과 워싱턴 사이에서 조용히 진행된 정치곡예
평양과 워싱턴 사이에서 중재외교를 벌이는 문재인 대통령의 정치곡예는 계속되었다. 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자신의 조미예비회담 중재의사를 전해야 하였다. 그는 이 임무도 대북비밀사업을 전담해온 서훈 국정원장에게 맡겼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기에 국정원이 남북정상회담을 비공개로 준비할 때 상대하였던 북측 기관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였다. 그래서 서훈 국정원장은 국정원-통전부 연락통로를 복구하였다. 여기서 복구라는 말을 쓰는 까닭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 가동되었으나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끊어버린 국정원-통전부 연락통로가 다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복구된 국정원-통전부 연락통로를 통해 문재인 대통령의 조미예비회담 중재의사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중재제의를 받지 않았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중앙일보> 2018년 2월 23일 보도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보도기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통일외교안보특별보좌관인 문정인 연세대학교 특임명예교수는 2018년 1월 말 <중앙일보> 취재기자를 만났을 때, “북한이 북미접촉을 주선하는 우리의 말을 잘 듣지 않아서 서훈 원장이 상당히 고생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문정인 특보의 이 발언은 지난 1월 말 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조미예비회담 중재제의를 받지 않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사진 3>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조미예비회담 중재제의를 받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일까?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보도한 바 없으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미국이 조선과 회담을 하려면 백악관이 선행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선결문제는 대조선전쟁연습을 평창동계올림픽 이후로 연기하지 말고 이번 기회에 완전히 중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백악관이 대조선전쟁연습을 완전히 중단해야 조미예비회담이 성사될 수 있다는 뜻이다. 입으로는 대화하겠다고 떠들면서도 상대에게 총구를 겨눈다면, 대화가 어떻게 시작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조미예비회담을 중재하려던 평창동계올림픽 기간에 백악관은 대조선전쟁연습을 유예하는 중이므로, 대조선전쟁연습에 대한 백악관의 속셈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평창동계올림픽이 끝난 뒤에, 다시 말해서 대조선전쟁연습 유예기간이 끝난 뒤에 백악관이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지켜본 뒤에 백악관의 회담요청을 들어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려는 것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구상인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한 문재인 대통령은 국정원-통전부 연락통로를 통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중재제의를 거듭 전하였다. <동아일보> 2018년 2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지난 1월 말 청와대는 “펜스 부통령의 격에 맞는 최고위급 인사가 와야 한다는 뜻을 여러 차례 북측에 전달하면서 설득하였다”고 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앞으로 남북정상회담에서 상봉하게 될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을 봐서 그의 중재제의를 딱 잘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펜스 부통령의 회담상대로 남측에 파견하였다. 김영남 상임위원장을 고위급대표단 단장으로 남측에 파견한다는 북측 통보가 남측에 전달된 날은 2018년 2월 4일이었고, 펜스 부통령이 평창동계올림픽 미국 대표단을 이끌고 중간기착지인 일본 도꾜를 향해 워싱턴을 떠난 날은 한반도 시간으로 그 이튿날이었다. 그런데 2월 4일까지만 해도, 북측은 김영남 상임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고위급 대표단을 남측에 파견한다는 것과 대표단 성원이 몇 명이라는 것만 통보하였을 뿐, 고위급 대표단 전체 명단은 통보하지 않았다.
4. 대남특사파견 예측하지 못해 상황을 오판한 청와대와 국정원
펜스 부통령이 중간기착지인 도꾜에 잠시 머물고 있었던 2018년 2월 7일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날 북측은 고위급 대표단 전체 명단을 통보하였는데, 그 명단을 받아본 청와대는 자기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임을 직감하였다.
(1) 조선 고위급 대표들이 조미예비회담에 참석하려고 하면, 대미회담경험이 있는 외교관이 반드시 고위급 대표단에 포함되어야 한다. 예컨대 지난날 조미회담이 진행되었을 때, 조선외무성 외교관들이 대미회담에 나선 것은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북측이 그날 통보한 고위급 대표단 명단에는 대미회담경험이 있는 외교관이 없었고, 대남사업전문가들만 있었다.
(2) 놀라운 것은, 김여정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의 이름이 고위급 대표단 명단에 들어있었다는 점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세상에 알려졌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자신의 친서를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하고 그를 평양에 초청한다는 의사를 구두로 전하는 특명을 김여정 제1부부장에게 주어 그를 특사로 남측에 파견하였던 것이다.
2018년 2월 20일 <워싱턴포스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을 평양에 초청한 것은 조선에게 ‘최대압박공세’를 가하는 트럼프 행정부를 “소스라치게 만든 것 같다”고 지적하였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김여정 특사를 파견하여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된 까닭은 대북정보를 분석하는 국정원이 오판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대남관계개선구상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 예측하지 못하고 상황을 오판하였다. 당시 국정원은 북측이 전략적 차원의 남북정상회담이 아니라 전술적 차원의 장관급회담을 제의해올 것으로 오판하였다. 당시 국정원이 그렇게 오판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근거는 국정원 직속 연구기관인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이 2017년 12월에 펴낸 대북정보분석자료 ‘2018년 북한 정세 8대 관전 포인트’에서 발견된다. <연합뉴스> 2017년 12월 18일 보도에 따르면, 보도 당일 조동호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은 서울 세종문화회관 지하층에 있는 식당 설가온에서 기자간담회를 진행하면서 그 자료를 공개했는데, 거기에는 북측이 2018년에 한미관계를 이간시킬 목적으로 전술적 차원의 남북대화를 제의해올 가능성, 그리고 미중관계 및 미러관계를 이간시킬 목적으로 6자회담 재개를 제의해올 가능성이 있다고 오판한 내용이 들어있었다. <사진 4>
서훈 국정원장으로부터 빗나간 정세분석을 듣고, 북측이 전술적 차원의 남북회담을 제의해올 것으로 잘못 예상하고 있었던 문재인 대통령은 뜻밖에 남북정상회담 제의가 담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받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위에 서술한 몇 가지 사실들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조미예비회담을 추진하는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돌리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조미예비회담이 설령 성사되었다고 하더라도,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펜스 부통령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자는 식으로 대응하려고 하였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백악관도 그와 비슷한 회담대처방식을 생각하였다. 당시 청와대에서 진행하려고 하다가 무산된 조미예비회담에는 대조선회담경험이 있는 국무부 외교관이 반드시 참석해야 하였는데, 미국측 회담참석예정자 명단에는 그런 외교관의 이름이 들어있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 2018년 2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무산된 조미예비회담에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를 대표하는 펜스 부통령, 미국 국가정보기관을 대표하는 정보관료 한 사람, 그리고 닉 에이어스 부통령 비서실장이 참석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원래 예비회담은 본회담에 어떤 의제를 상정할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해 열리는 사전준비회담인데, 이번에 무산된 조미예비회담은 사실상 회담 쌍방이 사전준비회담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에서 건성으로 진행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이번에 조미예비회담이 설령 성사되었더라도, 서로 입장차이만 확인하였을 뿐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5. 조미예비회담이 무산된 원인은 백악관의 자가당착 괴행
상황은 문재인 대통령이 예상한 것보다 더욱 심하게 꼬이면서, 그가 기울여온 중재노력을 완전히 가로막아버렸다. 트럼프 대통령에 버금가는 막말쟁이로 악명이 높은 펜스 부통령은 중간기착지인 일본 도꾜에 들렀을 때부터 조선을 자극하고 남북관계개선을 방해하는 망언을 늘어놓았을 뿐 아니라, 한국에 도착한 뒤에는 한 술 더 떠서 꼴불견 망동까지 서슴없이 저질렀다. 조미예비회담에 미국 대표로 참석하려고 하였던 펜스 부통령이 회담 직전에 그처럼 조선을 극도로 자극하고 남북관계개선을 방해하는 망언과 망동을 저질렀던 데는 사연이 있었는데, 그 사연은 아래와 같다.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백악관의 고심은 깊어지고 있었다. <뉴욕타임스> 2018년 1월 17일 보도기사는 그들의 고심을 이렇게 전했다. “백악관 관료들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궁극적인 목표가 한반도에서 미국군을 몰아내고 두 개의 코리아를 하나의 깃발 아래 통일하려는 것이라는 점을 경고한다. (줄임) 올림픽 개막식 한 차례가 통일을 향한 발걸음으로 되기는 힘들겠지만, 통일기(unified Korea flag)를 들고 행진하는 남북단일선수단의 모습은 트럼프의 보좌관들이 우려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과시하는 계기로 될 것이며, 남과 북의 군중들이 함께 응원하는 모습은 트럼프 대통령의 전쟁위협에 맞서는 극적인 대조장면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줄임) 남과 북의 선수들이 다른 나라 선수들 특히 일본 선수들과 경기를 할 때, 강한 민족주의의식은 남과 북이 함께 자기 선수들을 응원하도록 추동할 것이다.” <사진 5>
위의 인용문이 말해주는 것처럼, 백악관은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과 북이 “우리는 하나”라는 민족단합의식을 고조시키고, 남북관계개선의 강한 추동력을 얻게 되는 것을 우려하였고, 그에 대응하는 대책을 고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이 미국에게 머리를 숙이고 회담을 제의해올 때까지 섣불리 조미회담을 시작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주장하는 백악관 대결파는 당시 워싱턴에 퍼져나가고 있었던 위와 같은 고심과 우려의 틈새를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지난 1월 10일 전화통화에서 조건 없는 조미예비회담을 중재해보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제의를 덜컥 받아준 트럼프 대통령의 ‘경솔한’ 행동을 못마땅하게 보면서, 조선이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대남관계개선을 공세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우려한 백악관 대결파는 자기들에게 불리한 정세변화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며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백악관 대결파의 우두머리로 악명이 높은 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은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만나 남북관계개선과 조미예비회담 중재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진의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되어 2018년 1월 13일 미국 쌘프랜씨스코에서 맥매스터-정의용 비밀회담이 진행되었다. 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은 그 비밀회담에 야찌 쇼따로(谷內正太郞)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도 동석시켰다.
백악관 대결파는 조선에 대한 최대압박공세를 강화하려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추세에 편승하여 조선이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추진하려는 대남관계개선에 ‘맞불’을 놓으려는 방해공작을 준비하였다. 남북관계개선에 대해 우려하면서 대책수립에 고심하고 있었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2018년 1월 23일에 진행된 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최대압박공세’를 더욱 강화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조선과의 예비회담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에 대한 최대압박공세를 더욱 강화하려는 그들의 결정은 악질 탈북자들을 앞세운 대조선인권공세로 전개되었다. 이를테면, 트럼프 대통령은 1월 30일 연방의회에서 연두교서를 발표할 때, 탈북자를 참석시키고 조선의 ‘인권실태’를 맹비난하는 악담을 늘어놓았고, 2월 2일에는 탈북자 8명을 대통령 집무실로 불러들여 조선의 ‘인권실태’를 청취하면서 “북조선은 살기 힘들고 위험한 곳”이라고 중얼거리는 어설픈 광대극까지 연출하였던 것이다.
백악관 대결파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조선에 대한 ‘최대압박공세’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벌여놓은 대조선인권공세를 남북관계개선을 방해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였다. 펜스 부통령은 백악관 대결파가 만들어준 각본에 따라 지난 2월 8일 천안함 기념관을 방문한 자리에 악질 탈북자들을 불러놓고 꼴불견 광대극을 연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만인의 시선은 온통 북측 고위급 대표단의 남측 방문과 평창동계올림픽으로 집중되었으므로, 펜스의 광대극을 구경한 관객은 악질 탈북자들밖에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중재하려는 조미예비회담에 참석하겠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쪽에서는 대조선인권공세로 강화된 ‘최대압박공세’에 분별없이 매달린 백악관의 행동은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었다. 대화하고 싶은 상대를 악담과 망동으로 적대하는 자가당착적인 괴행을 의학적으로 규명하면 조현병(schizophrenia)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증상을 보이는 백악관은 한반도만이 아니라 지구 전체를 혼란과 불안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조미예비회담에 참석하겠다고 하면서도 대조선인권공세로 강화된 ‘최대압박공세’에 매달리는 백악관에게 조선은 또 다시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북측 고위급 대표단은 2월 10일 청와대를 방문하여 문재인 대통령을 접견한 자리에서 조미예비회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렸다.
그날 북측 고위급 대표단은 청와대에서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3시간 동안 머물렀다. 그러므로 조미예비회담은 오후 4시에 청와대에서 북측 고위급 대표들과 미국 고위급 대표들만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로 열리기로 예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한미국대사관 관저에서 조미예비회담을 시작할 시각이 되었으니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연락이 오겠지 하고 대기하고 있었던 펜스 부통령은 조선 고위급 대표단이 그 회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는 통보를 청와대로부터 전달받고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번에 조미예비회담이 무산된 원인과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들을 알 수 있다.
(1) 조미예비회담은 제3자가 중재하기 보다는 당사자인 백악관이 직접 조선에게 제의하여야 성사될 수 있다.
(2) 백악관은 조선에게 예비회담을 제의하기 전에 대조선전쟁연습을 중단하는 선행조치를 취함으로써 대화의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3) 문재인 대통령은 조미예비회담을 중재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백악관의 눈치를 살피지 말고 남북정상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야 한다.
(4) 백악관은 조미예비회담과 대조선압박공세를 동시에 추진하는 자가당착에서 벗어나, 조미예비회담을 추진하는 것에만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5) 백악관은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조선의 비핵화를 독백하며 허송세월할 것이 아니라, 조선과 고위급 회담을 추진하여 주한미국군 철수의사를 밝혀야 국가안보파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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