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시보 2018년 01월 01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1082년 전에 등장한 통일국가 고려의 위용 2. 1012년 역사를 파괴한 1948년 분단체제 3. 민간인 165만7,000명이 희생된 참극과 재난 4. 민족대표 695명이 모란봉극장에 모였다 5.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정치대결
1. 1082년 전에 등장한 통일국가 고려의 위용
2018년은 통일국가건설 1082주년, 통일국가건설운동 70주년이 되는 해다. 그런 뜻깊은 새해의 첫날, 반만년 민족사에서 매우 중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통일국가건설역사와 통일국가건설운동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태조 왕건이 통일국가를 건설한 해는 936년이다. 918년에 고려를 창건한 그는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하여 민족사적 위업을 완수하였다. 왕건이 통일국가 고려를 건설한 것은 거대한 민족사적 의의를 지닌 대사변이다. 그 의의를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단순히 통일국가를 건설한 것이 아니라, 천년강국 고구려를 계승한 통일국가를 건설하였다는 점에서 거대한 의의를 지닌다. 고려라는 나라이름 자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명백히 말해준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통일국가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사진 1>
첫째, 통일국가 고려는 고구려의 첫 계승국이었던 발해를 우리 민족사에 포함시켰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 강역에서 698년에 창건되어 926년까지 존재했던 동방대국이다. 고려가 발해를 우리 민족사에 포함시켰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통일국가 고려는 민족사의 정통성을 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역사발전경로로 확립하였다. 신라는 당나라를 추종하였고, 고구려는 당나라와 대결하였으므로, 고려가 민족사의 정통성을 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역사발전경로로 확립한 것은 민족의 자주성을 첫 통일국가의 기초로 마련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2) 통일국가 고려는 이전에 고려의 국경선으로 알려졌던, 압록강 하구에서 강원도 원산을 잇는 선을 훌쩍 뛰어넘어 발해의 드넓은 강역을 자국 영토로 포괄하였다. 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역사발전경로를 확립하였으므로, 발해의 강역을 자국 영토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윤한택 연구교수가 요나라 역사서 ‘요사(遼史)’와 ‘고려사’를 대조하여 연구한 내용을 2017년 5월 26일에 발표하였는데, 그는 옛 문헌들에 고려의 서북방 국경선으로 기록된 압록은 오늘의 압록강이 아니라 중국 랴오닝성 톄링(鐵嶺)시에 흐르는 랴오허(遼河) 지류라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2017년 11월 17일 러시아 과학원 고고학자들은 서울에서 진행된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논문을 통해 고려의 유적과 유물들이 최근 연해주에서 발굴되었다는 정보를 공개하였다. 이런 새로운 사실들은 통일국가 고려가 서북방으로는 압록강을 넘어 요하 인근까지, 그리고 동북방으로는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까지 포괄하는 광대한 강역에 세워진 동방대국이었음을 말해준다.
둘째, 통일국가 고려는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고, 오늘의 개성인 송악을 수도로 삼았으며, 천자국(天子國)으로 자처하였다. 천자는 곧 황제이므로, 천자국은 황제가 통치하는 나라라는 뜻이다. 통일국가 고려가 독자적인 연호를 정하고, 천자국으로 자처한 것은, 세계문명중심에 천자국 중국이 있고, 그 변방에 미개한 네 무리의 오랑캐들과 여덟 무리의 야만족들이 있다고 보았던 이른바 사이팔만(四夷八蠻) 천하관(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천하관을 정립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992년 10월 개성 인근에 있는 왕건릉 개건공사장에서 땅을 파던 굴착기 삽날에 걸려 출토된 특이한 청동유물이 있다. 그 유물은 의자에 앉은 청동좌상이었는데, 큰 귀, 가늘고 긴 손가락, 사각형에 가까운 발, 평평한 발바닥을 가진 벌거벗은 형상이었다. 출토될 때, 그 나신청동상에는 비단으로 지은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 청동좌상은 금으로 장식한 옥대 장식물이 함께 출토되는 바람에 고려의 불상이 아니라 왕건의 청동좌상으로 고증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왕건의 청동좌상은 천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통천관(通天冠)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왕건의 통천관은 중국의 황제들이 쓰던 통천관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모양을 하고 있었다. 왕건의 통천관에는 태양을 표상하는 8개의 동그란 장식물들이 달려있는데, 이런 장식물은 중국 황제의 통천관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통일국가 고려가 자주성을 건국기초로 삼았음을 말해준다. <사진 2>
셋째, 통일국가 고려의 건설은 우리 민족이 사상 처음으로 통일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동질의식을 지니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아주 먼 옛날 아사달에서 단군조선이 개국된 이후 장구한 세월에 걸쳐 형성되어온 민족의 동질성을 공고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로 되었다.
우리 민족은 통일국가 고려가 건설되었던 936년부터 1948년까지 1012년 동안 통일국가 안에서 민족의 동질성을 더욱 강화, 발전시키며 함께 살아왔다. 1012년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은 분단이라는 말조차 알지 못했으며, 알 필요도 없었다. 1910년 일제는 974년 동안 우리 민족의 존립거점으로, 생활터전으로 되어왔던 통일국가를 무력으로 강탈했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6년 동안 일제의 악독한 식민통치를 받았지만, 남북으로 갈라지지는 않았다.
2. 1012년 역사를 파괴한 1948년 분단체제
미국의 분할점령정책과 단독정부수립정책에 의해 한반도에 세워진 것이 1948년 분단체제다. 미국의 분할점령정책에 따라 북위 38도선이 분단선으로 고착되었을 뿐 아니라,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의 열망을 짓누르면서 남조선단독선거가 강행되었으며, 그 선거결과에 의거하여 남조선단독정부가 출현하였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을 들춰낼 필요가 있다.
(1) 태평양전쟁 말기에 미국 극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밑에서 부관으로 복무했던 에드워드 로우니(Edward L. Rowny)는 2013년 6월에 출판된 자신의 회고록 ‘미국 병사의 코리아전쟁 무용담(An American Soldier's Saga of the Korean War)’에서 1945년 8월 초 미국 전쟁성 작전국 전략정책단 회의에서 딘 러스크(David Dean Rusk), 앤드루 굿패스터(Andrew J. Goodpaster)를 비롯한 영관급 장교들이 한반도를 북위 39도선으로 분할점령하자고 주장하였는데, 그들의 직속상관인 죠지 링컨(George A. Lincoln)은 북위 38도선으로 분할점령하자는 주장을 관철시켰다고 밝힌 바 있다. 이것은 만주전투에서 일제관동군을 제압한 소련군이 한반도를 향해 파죽지세로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한 미국이 허겁지겁 북위 38도선을 분할점령선으로 획정하였다는 기존 정설을 뒤엎는 것이며, 미국이 한반도분할점령을 오랜 시간에 걸쳐 주도면밀하게 검토하였음을 말해준다. <사진 3>
1945년 11월 20일 당시 점령군 군사정부 사령관이었던 존 하지(John R. Hodge)의 정치고문 윌리엄 랭던(William R. Langdon)은 미국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서 단독정부수립구상을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이런 사실은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점령한 직후부터 단독정부수립정책을 검토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준다. 명백하게도, 미국은 1000년 통일국가를 계승하여 새로운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우리 민족의 투쟁과 노력을 분할점령과 단독정부수립으로 좌절시키고 1948년 분단체제를 세웠던 것이다.
1947년 8월 26일 미국군 수송기 한 대가 김포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수송기 출입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당시 미국 대통령의 특사 앨벗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였다. 중국을 방문한 뒤 서울에 나타난 웨드마이어 특사는 서울 방문을 마치고 일본 도꾜를 거쳐 워싱턴으로 돌아갔는데, 중국 및 남조선 시찰활동을 정리한 장문의 보고서를 1947년 9월 9일 트루먼에게 제출하였다. 이 보고서는 트루먼 행정부가 한반도정책을 확정하는 데서 결정적인 요소로 되었다. 그 보고서에 제시된 권고사항이 눈길을 끄는데, 그 부분을 번역,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조선에서 미국의 철수는 소련의 비례적 철수에 영향을 주는 합의에 근거하여,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해줄 수 있는 여러 가지 담보조치들과 함께 시행되어야 한다. 그러한 적절한 담보조치들이 시행되는 것을 지지하고, 예상하는 남조선에 군사지원을 제공해야 한다.
- 조선국립경찰과 조선해안경비대에 무기와 장비를 계속 제공한다.
- 북의 위협에 대처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진, 미국군이 지휘하는 조선정찰군(Korean Scout Force)을 창설하여 현존 경비대를 대체한다.
- 조선에 대한 미국군의 임시점령(interim occupation)을 계속한다.
- 기술전문인력과 전술부대들의 훈련에 조언을 준다.”
위의 인용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1947년 9월 당시 트루먼 행정부가 한반도에서 미국군과 소련군이 동시에 철수하게 될 것을 예견하면서 그에 대비한 조치들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위의 인용문에 따르면, 철군에 대비한 조치라는 것은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해줄 수 있는 여러 가지 담보조치들”이다. 웨드마이어 보고서는 그 담보조치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았지만, 역사자료를 읽어보면, 트루먼 행정부가 아래와 같은 담보조치들을 시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1) 미국은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에서 해결하려던 기존 전략을 포기하고, 그 문제를 유엔으로 끌고 갔다. 왜냐하면 집권야욕에 사로잡혀 정세를 오판한 남조선 우익세력이 모스크바 삼국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바람에 그 세력을 앞세워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려던 미국의 계획추진에 큰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친미반소성향을 지닌 우익세력을 내세워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려던 미국의 전략구상이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더 이상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자, 그 위원회를 깨버리고 자기의 전략구상을 유엔무대에서 실행에 옮기려고 획책한 것이다.
그리하여 트루먼이 웨드마이어 보고서를 받아본 날로부터 여드레가 지난 1947년 9월 17일 미국은 조선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현저하게 남아있지만, 1947년 당시 유엔은 미국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끌고 가면 미국이 마음먹은 대로 처리할 수 있었고, 실제 그렇게 되었다.
(2) 미국은 한반도분할점령에 계속 집착하였다. 미국군은 38도선 이남지역에 진주한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1945년 8월 15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3년 동안 그 지역의 공식명칭은 남조선이었다.) 명백하게도, 그들은 남조선주둔군이 아니라 남조선점령군이었다. 트루먼 행정부의 공식문건들에서 남조선주둔군이라는 용어는 찾을 수 없고, “남조선점령군(occupation force in South Korea)”이라는 용어만 나온다. 미국은 그 점령지에 군사정부를 세우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점령군 군사정부는 8.15 직후 남조선 각지에 건설된 모든 인민위원회를 폭력으로 제거하였고, 친미반소의 옷으로 갈아입고 변신한 부일반민족세력이 주도하게 될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하려고 광분하였다. 하지만 점령군 군사정부의 그 전략수행은 진보정치세력의 반대와 민중의 저항에 부딪쳐 그들이 예상한 대로 순탄하게 추진될 수 없었다. 그래서 점령군 군사정부는 진보정치세력을 제거하고, 민중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부와 경비대를 증강시키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 사정은 아래와 같다. <사진 4>
1945년 10월 21일 점령군 군사정부는 일제강점기 경무부에 소속되었던 부일민족반역자들을 긁어모아 남조선 각 도에 경찰부를 설치하였고, 이듬해에는 그것을 경찰청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1946년 1월 15일 점령군 군사정부는 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 부일민족반역자들을 긁어모으고 광복군 출신자 몇 사람을 끌어들여 1개 연대 규모의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는데, 1948년 8월 15일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할 때 그 경비대를 정규군으로 개편, 증강시켰다.
점령군 군사정부가 부일민족반역자들을 긁어모아 창설하였고, 미국산 무기로 무장시켜 지휘통제하였던 남조선경찰청→한국경찰청과 남조선국방경비대→한국군은 6.25전쟁 직전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된 직후까지 남측 전역에서 진보적 민중들을 닥치는 대로 마구 학살하였다. 1960년 10월 20일에 결성된 전국피학살유족회가 당시 민주당 정부에 제출한 공문에 따르면, 자기 가족이 학살당했다고 신고한 피학살자 총인원은 남측 전역에서 113만명이었는데, 이를 지역별로 보면, 경상남도 25만명, 경상북도 21만명, 전라남도 21만명, 전라북도 19만명, 제주도 8만명, 경기도 6만명, 충청북도 5만명, 충청남도 3만명, 강원도 3만명, 서울 2만명이었다.
3. 민간인 165만7,000명이 희생된 참극과 재난
점령군 군사정부는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하고 지휘통제하였으며, 경비대의 군사훈련을 지도하면서 무력을 체계적으로 증강시켰다. 웨드마이어 보고서에 따르면, 점령군 군사정부가 남조선국방경비대의 무력을 증강시키는 목적은 “북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런 사실만 놓고 봐도, 미국은 70년 전부터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무력을 증강하는 구실로 ‘북의 위협’을 내세워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점령군 군사정부가 추진해온 남조선국방경비대 무력증강에 따라 그 경비대가 한국군으로 확대, 개편된 것에 한껏 고무된 이승만 정부는 무력으로 북을 점령하려는 이른바 ‘북벌정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 7월 17일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대한청년단 훈련장에 나타나 연설하면서 “국군은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하루 안에 평양이나 원산을 점령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49년 10월 7일 이승만은 <UP통신> 회견에서 “나는 우리가 3일 안으로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만주와 한국의 국경은 38선보다 방어하기가 쉬울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5>
이승만 정부의 ‘북벌정책’ 뒤에는 당시 일본-남조선 점령군을 총지휘하고 있었던 극동군사령관 맥아더가 버티고 있었다. 1948년 8월 15일 오전 11시 20분 중앙청 앞마당에서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 축하연설에 최고 귀빈으로 나선 맥아더는 “정의의 군대가 용진하는 이 시각, 그들의 승리는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 가운데 하나인 인위적 장벽과 분단으로 무색해졌다”고 하면서 “이 장벽은 반드시 무너져야 하며, 무너질 것이다. 자유국가에서 살게 된 자유로운 한국인들의 궁극적인 통일을 그 무엇도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북벌정책’의 실질적인 추진자가 맥아더 자신이었음을 드러내준 것이었다. 이처럼 미국은 1948년 분단체제를 수립해놓은 것에서 멈추지 않고, ‘북벌정책’까지 추진하였으니,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점령군이 한반도에 그어놓은 분단선은 국경선이 아니었다. 남측 시각에서 보면, 분단선은 대한민국과 그 북반부지역인 ‘북한’을 갈라놓은 것이고, 북측 시각에서 보면, 분단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그 남반부지역인 ‘남조선’을 갈라놓은 것이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분단선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국가로 양립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는 오직 하나의 국가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국가는 어떤 나라인가? 남측에서는 대한민국이 유일국가라고 하고, 북측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유일국가라고 한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가운데 어느 한 쪽은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이고, 다른 한 쪽은 국가가 아니면서도 국가를 참칭하는 집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남측에서는 북측을 ‘반국가단체’라고 부르고, 북측에서는 남측을 ‘미제의 식민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 그리고 국가가 아니면서도 국가를 참칭하는 집단 사이의 대립과 충돌은 결국 전쟁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분단이라는 말조차 알지 못했던 우리 민족에게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참극과 재난이 닥쳐왔다. 1012년 동안 함께 살아온 단일민족이 ‘한국사람’과 ‘조선사람’으로 갈라져 싸우면서 서로 죽이고 죽였고, 미국군은 조선사람을 죽였다. <사진 6>
누구도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없으나, 6.25전쟁에서 군인 전사자를 제외하고 민간인 사망자만 추산하면, 남측에서 24만5,000명이 죽었고, 북측에서 28만2,000명이 죽었으니 민간인 사망자는 총 52만7,000명이었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6.25전쟁 직전부터 정전협정 체결 직후까지 남측에서 민간인 113만명이 무참히 학살당했다는 사실이다. 대량학살을 명령한 미국군 고위지휘관들과 한국군 고위지휘관들, 한국 정부 고위관리들과 한국 경찰 고위간부들은 요즈음 같으면 국제형사재판소에 전범으로 기소되어 처벌을 받았어야 하였으나, 그들이 되레 피학살자 유족들을 처벌하는 정치탄압을 자행하였다.
전쟁 3년 동안 군인을 제외하고 민간인만 165만7,000명이 희생당했으니, 이보다 더 끔찍한 참극이 어디 있으며, 이보다 더 가혹한 재난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민족을 그런 참극과 재난 속에 빠뜨린 원흉은 분할점령과 단독정부수립으로 우리 민족의 통일국가건설운동을 짓누르고, 1948년 분단체제를 수립해놓은 미국이다.
6.25전쟁으로 더욱 굳어진 1948년 분단체제는 마땅히 자주적 발전을 위해 분출되어야 할 민족역량을 언제나 분열과 대결에 소모하도록 강제하였고,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의 의지와 지향을 끊임없이 도려내었다. 우리 민족이 단일한 언어와 혈통, 단일한 역사와 문화를 공유한 운명공동체로서 존립하고 발전하려는 의지와 지향을 끊임없이 도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1948년 분단체제야말로 우리 민족의 자주적 생명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가장 험악하고, 가장 해악적인 요인이 아닐 수 없다.
4. 민족대표 695명이 모란봉극장에 모였다
1948년 당시 우리 민족에게 들이닥친 사태는 너무도 긴박하고 위중하였다. 점령군 군사정부와 이승만을 앞세워 단독정부수립을 집요하게 획책한 미국은 1948년 5월 10일을 선거일로 정해놓고, 선거준비사업을 강행하였다. 고려의 통일위업달성 이후 면면히 이어진 1012년의 민족사가 파괴되고, 통일국가건설운동이 좌절될 절체절명의 위기가 우리 민족의 보전과 존립을 시시각각 위협하고 있었다.
바로 그러한 때, 남조선단독선거와 남조선단독정부수립을 강행하려는 미국과 맞서 싸우며 기어이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전민족적인 운동이 벌어졌다. 그 운동의 정점에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가 있다. 남북연석회의는 1948년 4월 19일 오후 6시 5분 평양에 있는 모란봉극장에서 성대히 개막되었다. 한반도 전역에서 56개 정당, 사회단체를 대표하는 민족대표 695명이 참석하였다. <사진 7>
역사적인 남북연석회의는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갈라놓으려는 미국의 한반도분단정책을 파탄시키고, 고구려→발해→고려→근세조선으로 이어진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할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전민족적인 투쟁의 고귀한 결실이었다. 이 위대한 민족사적 과업을 실현하는 투쟁에 민족구성원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적극 나서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익정치세력을 대표하는 김구 한국독립당 대표와 김규식 민족자주연맹 대표는 남북연석회의에 마지못해 얼굴을 내밀었다. 김구는 4월 20일에 평양에 도착하였고, 김규식은 4월 22일에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남북연석회의에는 참석하지 않고, 줄곧 밖에서 맴돌았다. 평양에 머무는 동안 모란봉, 영천암, 만경대, 혁명자유가족학원을 방문하였으나, 회의장에는 나가지 않았다.
소련군 연해주관구 25군사령부 군사위원이었던 니꼴라이 레베데브(Nikolai G. Lebedev)가 남긴 ‘비망록’에 따르면, 김구는 “나는 연석회의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신들 계획대로 회의를 계속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구는 4월 22일 회의 셋째 날이 되어서야 남북연석회의가 한창 진행되는 도중인 오후 12시 45분경 회의장에 나타났는데, 5분 동안 축하연설을 하더니, 곧바로 퇴장하여 자기 숙소로 돌아가 버렸다. 김규식은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면서 남북연석회의에는 얼굴도 내밀지 않고, 나중에 축하연회에만 잠깐 나타나 축하연설을 하였을 뿐이다.
김구는 남북연석회의가 끝난 이튿날인 4월 27일 평양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내가 대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몸도 피곤하고 또 대표들(그를 수행한 한국독립당의 다른 대표들-옮긴이)이 참석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구차한 변명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 간 진짜 목적은 자기들이 바라던 남북요인회담(4인회담)을 하기 위한 것이었지,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 두 우익정객은 왜 남북요인회담에만 집착하였을까? 원래 김구는 이승만과 손을 잡았었고, 김규식은 점령군 군사정부가 조작해놓은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에 들어가 활동했었다. 하지만 김구는 단독정부수립야욕을 품은 이승만에게 이용당했고, 김규식은 단독정부수립음모를 꾸미던 점령군 군사정부에게 이용당했을 뿐, 우익정치세력 내부에서 극우파들에게 밀리고 있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그런 정치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탈출구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바로 남북요인회담 추진이었다.
늙은 우익정객들의 우왕좌왕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각계각층 민중들은 남조선단선반대투쟁전국위원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한 남북연석회의 방침에 따라 한반도 전역의 도, 군, 면에 남조선단선반대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남조선단선반대투쟁전국위원회는 이승만을 앞세운 점령군 군사정부의 단독선거를 저지하려는 격렬한 대중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를테면 남조선 각지에서 선거사무소 습격사건들, 경찰서 습격사건들, 공공시설물에 대한 파괴 및 방화사건들, 야간봉화시위들이 계속 일어났다. 노동자들은 단선반대총파업투쟁에 궐기하였고, 청년학생들은 단선반대동맹휴학투쟁에 궐기하였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격렬한 민중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점령군 군사정부는 단독선거를 준비하는 선거인등록을 1948년 3월 30일부터 강행하였다. 1948년 4월 12일 서울에서 통행인 1,26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결과는 선거인등록이 강제로 진행되었음을 말해준다. <조선일보>가 1948년 4월 15일에 보도한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선거인등록에 참여한 사람은 934명(74%)이었고,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328명(26%)이었는데, 참여한 934명 가운데 850명(91%)은 강제로 등록하였고, 84명(9%)만 자발적으로 등록하였다는 것이다. 경찰, 시청, 동회, 선거위원회, 우익청년단, 초중등학교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거인등록을 강요하였다. 다른 사람의 도장을 갖고 가서 명부에 찍는 대리등록도 있었고, 있지도 않은 사람을 명부에 올려놓는 유령등록도 있었다. 이런 불법사례들은 선거인등록 자체가 민주주의적인 절차를 위반하였음을 말해준다. <사진 8>
1948년 5월 8일 점령군에게 특별경계령을 내린 점령군 군사정부는 5월 10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남조선단독선거를 강행하였다. 당시 언론보도는 “장총을 들은 경관, 곤봉을 들은 향보단원들이 길목마다 지켜 엄격한 경비를 섰고, 관공서, 각 학교, 상점, 음식점, 극장 기타 일체 신문사, 사회기관들은 설날처럼 문을 꼭꼭 닫고, 나다니는 길손도 미군 자동차 외에는 한산하기 짝이 없었고, 무섭게 흐리터분한 하늘에 미군 비행기의 폭음소리가 한갓 고요한 기분을 자아내었다. (중략) 무장경관 70명, 사복경관 30명, 향보단원 등 물샐틈없는 경비전 속에서 개표가 시작되었다”고 하면서 선거현장의 공포분위기를 전하였다. 단독선거반대투쟁에서 사망자는 128명, 중상자는 137명, 검거, 투옥된 사람은 5,425명이었다.
사태가 이 지경으로 되었으므로, 단독선거를 감시한다는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은 전 세계 민주국가들이 공인한 선거원칙에 따라 단독선거를 무효화해야 하였지만, 미국의 추종국들인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필리핀, 시리아, 엘쌀바돌, 대만, 프랑스가 파견한 친미대표들로 구성된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은 미국의 단독정부수립정책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였다. 1948년 2월 12일 유엔소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을 출발하기 전, 유엔조선임시위원단 단장 벤갈릴 메논(Bengalil K. K. Menon)은 서울의 라디오방송에 출연하여 “남은 남이고, 북은 북이니, 그들은 결코 만날 수 없으리라”는 극악한 망언은 늘어놓았다.
5.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정치대결
1948년 남북연석회의 이후 오늘까지 장장 70년 동안 우리 민족이 계속해온 통일국가건설운동의 대척점에 미국이 있다. 그 대척점에서 미국은 1948년 분단체제를 합법화, 영구화하려고 끊임없이 획책하고 있다. 지난날 미국의 분할점령정책과 단독정부수립정책은 오늘날 분단영구화정책과 대조선적대정책으로 전이되었다.
미국이 ‘한미동맹’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실제로 추구하는 목적은 군사분계선을 국경선으로 만들어 1948년 분단체제를 영구화하려는 것 이외에 다른 게 아니다. ‘한미동맹’이라는 명분을 내건 미국은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정전상태를 종식시키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하라는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방대한 핵전략자산을 투입한 전쟁연습을 계속하여 정세를 고의적으로 긴장시키고, 친미세력의 장기집권을 보장해줌으로써 1948년 분단체제를 영구화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이 1948년 분단체제를 해체하고,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려면, 그 체제를 수립해놓고 유지, 관리하는 미국의 분단영구화정책을 파탄시켜야 한다. 미국의 분단영구화정책이 존속되는 한, 1948년 분단체제를 해체하고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길은 열리지 않는다.
미국의 분단영구화정책을 파탄시킨다는 말은 미국과 전면적인 정치대결이 불가피하다는 뜻이다. 그 정치대결은 남북연석회의 역사를 계승한 전민족적인 통일국가건설운동과 그 운동을 짓누르는 미국의 분단영구화정책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결이다.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숙명적인 정치대결이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서 시작된 통일국가건설운동사에 어느덧 70년의 연륜을 새겨넣은 올해 2018년은 한반도 전역에서 자주통일을 열망하는 각당각파, 각계각층이 총단합하여 통일국가건설운동에 나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 9>
1948년 4월 23일에 진행된 남북연석회의 넷째 날 회의에서 ‘전조선동포에게 격함’이라는 제목의 격문이 발표되었다. 70년 전 통일국가건설운동을 벌였던 선대들은 그 격문에서 70년 뒤 통일국가건설을 벌이고 있는 후대들에게 이런 절규를 남겼다.
“....조선민족은 죽지 않았다. 우리 조선민족은 또 다시 외국의 노예로서 암흑의 길을 결코 밟지 않을 것이다. 우리 민족은 하나이며, 우리 조국도 하나이다.... 우리 민족은 통일독립을 요구한다.... 우리 조국에 위험이 박두한 이 엄숙한 순간에 만일 우리가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우리 후손들은 어찌될 것이며 그들은 얼마나 우리를 원망할 것인가....”
하지만 후대들은 선대들을 결코 원망하지 않는다. 선대들로부터 통일국가건설운동을 위대한 유업으로 넘겨받은 후대들에게는 미국의 분단영구화정책을 파탄시키고 기어이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결의가 넘친다. 통일국가건설운동 70주년을 맞이한 그들의 앞길에 2018년 새해 첫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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