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105)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전선에는 실의와 비관이 없다
대선패배의 후유증이 나타나고 있다. 대선패배로 절망에 빠진 민주노조 활동가들과 진보단체 활동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슴 아픈 비보가 전해졌다. 정권교체에 대한 열의와 요구가 강했으므로, 정권교체 실패에서 느끼는 실의와 비관도 그만큼 심한 것이다. 실패는 위험을 불러온다.
그러나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의 길에서 맞닥뜨리는 진짜 위험은 실패 그 자체가 아니라, 실패를 대하는 태도와 관점이다. 정권교체 실패를 실의와 비관으로 대하면 더 큰 실패를 불러오게 되며, 진보적 정권교체의 길은 그만큼 더 멀어질 뿐이다. 실의와 비관은 최후 승리를 믿는 주체의 신념과 의지가 박약한 까닭에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의 앞길을 스스로 가로막는 매우 유해한 자포자기 행위다.
허탈감에 빠져 있을 게 아니라, 패인을 정확히 분석하여 거기서 교훈을 찾고, 진보와 변혁이 승리할 내일을 굳게 믿으며 낙관할 때, 오늘의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실의와 비관은 없다. 이것은 자기위안적인 발상이 아니다. 진보정치활동가들이, 그들을 중심으로 건설된 진보정당과 진보적 대중단체들이 뼈아픈 실패를 겪으면서도 결코 실의와 비관을 모르는 까닭은, 그들의 시선이 패배가 아니라 전선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전선이란 무엇일까?
명백하게도, 전선은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의 존재방식이다. 이 명제를 달리 서술하면, 진보정치는 전선의 정치이며, 사회변혁은 전선의 변혁이라고 할 수 있다. 진보정치의 주체인 진보정당 자체가 진보정치세력을 당적 체계로 결합시킨 강고한 전선체이며, 또한 진보정치가 지향하는 사회변혁은 강력한 전선역량을 총결집시킨 가장 높은 수준의 전선운동으로 자기의 변혁강령을 실현해가는 것이다.
그런데 제18대 대선이 실시된 선거시기는 이전에 있었던 다른 선거시기들과 마찬가지로, 진보정당의 전선역량이 일시적으로 퇴조될 수밖에 없었던 시기였다. 왜냐하면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을 위해 존재하는 통합진보당이 민주통합당 대 새누리당의 양자대결구도가 지배적인 선거시기에 존재감을 거의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 지지율이 20%선으로 높아지면서 통합진보당, 민주통합당, 새누리당 사이에 삼자대결구도가 형성될 때, 바로 그런 정치적 변화가 일어날 때,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의 전선역량은 선거시기에도 약화되지 않고 되레 더 강화될 것이다.
실패를 불러온 주된 원인, 그리고 실패를 극복하는 방도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통합진보당은 자기의 추락한 지지율을 20%선으로 끌어올리는 ‘비결’을 반드시 전선에서 찾아야 한다. 진보정치활동가라면 그런 ‘비결’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민주통합당이나 새누리당은 자기들의 지지율을 높이는 ‘비결’을 전선이 아니라 여론에서 찾지만, 오직 통합진보당만은 전선체를 건설하고 전선역량을 강화하고 전선을 확대하는 고유한 방식으로 자기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게 된다. 바로 이것이 진보정당과 비진보정당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존재방식의 근본적 차이이며, 비진보정당들에 대한 진보정당의 전략적 우월성이다.
제18대 대선에서 정권교체에 실패한 까닭은, 분당소동과 종북모략소동으로 당세가 위축된 통합진보당이 전선역량을 잃어버리고 전선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당소동과 종북모략소동이 일어나기 전에 통합진보당 건설과 야권연대 실현이라는 개념으로 수행되었던 과업이 바로 전선구축의 실제 내용이었지만, 통합진보당은 분당소동과 종북모략소동에 휘말려 고군분투하는 바람에 그 두 가지 과업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전선구축의 실패가 제18대 대선의 정권교체 실패를 가져온 주된 원인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정권교체 실패의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주된 원인은 전선구축 실패였다. 전선구축에 실패한 통합진보당은 단기필마로 접전지에 나선 이정희 후보가 수구정당 대선후보에게 기습공세를 가하고 사퇴하는 전술밖에 취하지 못하였다. 단기필마 전술과 후보사퇴 전술은 통합진보당이 취할 수 있었던 제한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므로 통합진보당과 그 지지세력이 정권교체 실패의 후유증에서 벗어나려면, 전선구축 실패요인을 분석하고 그것을 극복할 방도를 찾아야 한다.
자기성찰의 심정으로 다시 읽는 전선론
지금이야말로 통합진보당과 그 지지세력이 전선론을 다시 읽어보며 생각을 가다듬는 자기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전에 두 단계 사회변혁론을 서술한 글들에서 설명한 적이 있지만, 전선론을 다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이해하기 쉽게 군사학 용어를 빌려 서술하면, 전선에는 정예병력과 주력부대가 전진배치되어야 한다. 이 글에서 일컫는 정예병력이란 생산자 대중 속에 파고들어 다양한 현장정치활동을 펼치는 진보정당활동가를 뜻한다. 현재 우리의 사회정치적 현실에서는 통합진보당에 결집된 진보정당활동가들이 전선의 정예병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한 편, 이 글에서 일컫는 주력부대란 조직력과 단결력을 지닌 민주노조를 뜻한다. 현재 우리의 사회정치적 현실에서는 민주노총이 전선의 주력부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의 통합진보당은 전선적 임무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힘들 만큼 당세가 약해졌고, 오늘의 민주노총도 전선적 임무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만큼 내부혼란을 겪고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다.
전선의 정예병력과 주력부대가 진보정치활동과 사회변혁운동을 이끌지 못하는 전선은 아직 전선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진보정당의 전선적 정치활동과 민주노조의 전선적 대중투쟁이 없이는 결코 강고한 전선을 구축할 수 없는 것이다. 진보정당과 민주노조가 전선에 나서지 못한 대중투쟁은 아무리 많은 대중을 동원하였더라도 오래 가지 못하고 사그라지고 만다. 다시 군사학 용어를 빌려 서술하면, 정예병력과 주력부대를 전전배치하지 못한 전투는 아무리 많은 병력을 동원하였더라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의 진보정치사와 사회변혁운동사를 살펴보면, 정예병력과 주력부대를 전진배치하지 못하여 좌절한 경험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시기 6월 민주항쟁이나 ‘촛불투쟁’이 강렬한 대중투쟁열기를 분출하였지만, 진보정당의 전선적 정치활동, 그리고 민주노조의 전선적 대중투쟁과 연결되지 못하고 분노한 대중의 자연발생적인 투쟁열기만 분출하였기 때문에, 그 폭발적 투쟁열기가 강력한 전선역량으로 전환되지 못했고, 강고한 전선이 구축되지 못했고, 미국과 수구정권의 기만술책과 폭력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중도에 주저앉았던 것이다. 그런 좌절경험에서 교훈과 극복방도를 찾아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통합진보당이 가장 선명한 진보정치이념을 제시한 진보정당이지만 아직 전선적 정치활동을 본격적으로 벌이지 못하고 있고, 또한 민주노총이 가장 규모가 큰 진보적 대중단체이지만 아직 대규모 총파업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강고한 전선이 구축되지 못하고, 전선구축을 지향하는 준전선만 존재하는 것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강고하지 못한 준전선의 역량으로는 강적들을 상대하는 투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 강고한 전선을 구축하고 강력한 전선역량을 축적해야 수구정권과 정면대결하는 위력적인 대중투쟁을 전개할 수 있고, 그런 대중투쟁을 통해 진보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어놓을 수 있다.
그런데 통합진보당을 최악 위기에 빠뜨린 분당소동과 종북모략소동이 당 안팎에서 일어났고, 이제껏 진보정당에게 ‘애정’이 별로 없던 민주노총이 그 와중에 결국 통합진보당에게 ‘별거’를 선언하였고, 민주노총 지도부 출신 노동계 인사들이 대선을 앞두고 민주통합당에 들어갔고, 대중들에게 아무런 존재감도 주지 못하는 무소속 노동자 대선후보와 무소속 청소노동자 대선후보가 각각 경쟁적으로 출마한 현재 상황에서, 전선적 대중투쟁과 진보적 정권교체는 너무 멀리에 있는 것으로 보이며, 준전선이나마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다.
극복방도는 명백하다. 오늘 우리의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에 요구되는 시급하고 당면한 과업은 준전선의 역량을 비상히 강화하여 강고한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다. 준전선의 역량강화와 전선구축이야말로 정권교체에 실패한 통합진보당과 진보적 대중단체들이 다시 일어설 재기의 활로이며 반드시 뚫고 나아가야 할 시련돌파의 지름길이다.
현 시기 전선구축에 유리한 세 가지 조건들
전선구축은 투쟁구호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계획도 요구된다. 전선구축에서 기본적인 과업은, 민주노총의 조직력을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전선역량으로 확대, 개편하는 것과 더불어 통합진보당과 진보적 대중단체들을 강고하게 결합시킴으로써 통합진보당을 강력한 전선체로 더욱 강화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과업이 전선구축에서 ‘기본’이다. 그러한 ‘기본’과 더불어, 통합진보당은 현재 정세 속에 형성된 유리한 조건을 최대로 살려 전선구축에 더욱 박차를 가할 필요가 있다. 아래와 같이 세 가지 유리한 조건을 손꼽을 수 있다.
첫째, 이번에 정권교체를 요구하였으나, 대선에서 패배하여 그 요구를 접을 수밖에 없었던 각계각층에서 새누리당의 집권연장에 대한 정치적 불만이 팽배하였다. 특히 20대와 30대 청년층에게 그런 정치적 불만이 매우 크다. 이런 현상은 이전의 대선 직후 상황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오늘날 각계각층에 팽배한 정치적 불만은 불시에 폭발할 수 있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다. 박근혜 당선인이 무슨 ‘탕평책’이라는 소리를 꺼내놓는 것은, 각계각층에 팽배한 정치적 불만이 폭발하기 전에 ‘뇌관’을 제거해버리려는 사전조치로 보인다.
통합진보당에게 요구되는 전선역량은 정권교체 실패로 정치적 불만을 느끼는 청년층 속에 널리 잠재되어 있다. 통합진보당의 전선적 정예병력이 그런 청년층 속에 파고들어, 그들의 정치적 불만을 전선역량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현 시기 전선구축의 당면요구다.
대중의 정치적 불만은 시간이 흐르면 식어버리기 쉬우므로, 통합진보당이 참신하고 호소력 있는 청년층 정치활동을 시급히 전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직후 청년층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던 ‘촛불투쟁’ 같은 대규모 대중투쟁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느닷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기 전에, 폭발적인 대중투쟁열기를 전선역량으로 전환시킬 치밀한 사전준비가 통합진보당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둘째, 민생파탄으로 생산자 대중의 생존권이 무참히 짓밟히고 있는 것이다. 정규직 저임금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심한 고통,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보다 더 심한 민생파탄에 빠진 영세자영업자와 영세농민이 겪는 고통은 너무 가혹하다. 그런 가혹한 고통을 겪고 있는 생산자 대중 가운데는 철탑에 올라 결사적인 생존권 투쟁을 벌이는 노동자들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자포자기식 절망과 좌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통합진보당에게 요구되는 전선역량은 민생파탄으로 생존권이 짓밟힌 생산자 대중들 속에 널리 잠재되어 있다. 통합진보당의 전선형 정예병력이 그런 생산자 대중들 속에 파고들어, 그들의 생존권 투쟁을 적극 지원하고, 그들이 자포자기식 절망과 좌절에서 벗어나 전선에 나서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현 시기 전선구축의 당면요구다.
생산자 대중의 절망과 고통이 더 깊어지기 전에, 통합진보당은 기존 현장정치활동에 더 많은 당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으며, 민주노총은 생산자 대중의 생존권 투쟁을 안받침하는 믿음직한 투쟁주체로 일어설 필요가 있다. 민생파탄으로 무너진 아르헨티나에서 대형매장 약탈폭동과 경찰의 유혈진압이 일어나고 있는 오늘의 불행한 현실은, 생산자 대중의 절박한 생존권 요구를 전선역량으로 전환시키는 현장정치활동이 얼마나 시급하고 중요한 것인지를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통합진보당은 ‘2013년 민중 생존권 수호 구상’을 노동자, 농민, 서민에게 제시하고 이를 위해 당력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셋째, 오늘 한반도 정세는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심각한 위험으로 다가서고 있다. 이것은 문학적 표현도 아니고 과장된 서술도 아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미국과 이명박 정권이 지난 5년 동안 반북대결로 북을 끊임없이 자극하여 전쟁위험을 극도로 고조시킨 것이다. 2013년 2월 박근혜 정권이 출범한 이후에도 반북대결은 여전히 지속될 것이다. 이런 오늘의 정세는 이 땅에서 전쟁위험이 고조될수록 평화실현에 대한 대중적 요구도 그만큼 더 절실해지고 강렬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통합진보당에게 요구되는 전선역량은 한반도 평화실현을 요구하는 각계각층 대중들 속에 널리 잠재되어 있다.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전쟁위험의 폭발을 저지하느냐 아니면 반북대결을 고집하게 될 박근혜 정권의 자기파멸적 행동을 방치하여 전쟁위험이 극도로 고조되느냐 하는 문제는, 반북대결을 저지하고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하는 각계각층 대중의 집단적 의지와 행동을 통합진보당이 어떻게 조직하고 표출시키느냐 하는 데 달려있다.
특히 2013년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때로부터 60년이 되는 해이므로, 평화협정 체결에 대한 각계각층 대중의 요구도 더 강하게 표출될 것이다. 통합진보당은 ‘2013년 평화협정 체결 구상’을 각계각층 대중들에게 제시하고, 미국과 박근혜 정권의 반북대결을 저지함으로써, 평화협정을 요구하는 각계각층 대중의 집단적 의지와 행동을 전선역량으로 조직하고 표출하는 정치활동에 힘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진보정치역량을 다시 전선구축으로! 이것이 진보정당과 진보적 대중단체들에게 주어진 당면임무다. (2012년 12월 26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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