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01

분당소동 이겨낸 17년만의 진보적 정권교체


변혁과 진보 (91)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푸네스 대통령 취임식장에 나타난 우파정권 축하사설들

2009년 6월 1일 인구 610만 명이 사는 태평양 연안의 중미국가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San Salvador)에서 매우 특별한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신임 대통령 마우리시오 푸네스(Mauricio Funes)가 취임식장에 나왔다. 스페인 식민통치에서 독립하여 엘살바도르를 건국한 이후 사상 처음으로 진보적 정권교체가 실현되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1838년부터 2008년까지 170년 동안 대미예속으로 억눌리고, 1931년부터 2008년까지 77년 동안 군사독재정권의 폭정과 지주계급의 착취로 짓밟히며 수탈당했고, 1980년부터 1992년까지 12년 동안 반미반독재 무장항쟁의 피를 흘려야 했던 참으로 굴곡 많은 한 시대가 진보적 정권교체로 막을 내리고, 엘살바도르 민중이 피와 땀과 눈물로 쟁취한 진보적 민주주의의 미래가 문을 열고 있었다.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arabudo Marti National Liberation Front, FMLN). 중남미 사회변혁운동사를 기억하는 전 세계 진보적 인류의 뇌리에 영원히 남아있을 그 이름은 2009년 6월 1일 진보적 정권교체를 기어이 실현한 엘살바도르 민중의 가슴 속에 가장 영예로운 칭호로 아로새겨졌다.
 
그런데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의 대선후보로 선거에서 승리한 푸네스가 대통령에 취임하던 날, 취임식장에 나타난 외국인 축하사절들 중에는 사람들의 눈에 익은 미국인 중년여성이 눈길을 끌었다. 미국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을 압살하려고 광분하는 제국주의깡패국가의 현직 국무장관이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의 집권으로 감격에 설레는 대통령 취임식에 축하사절로 나타나다니, 이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이상한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외국인 축하사절들 중에는 낯선 동양인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청와대가 대통령 특사로 보낸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 임태희와 김기현이었다. 민족해방이라는 말만 들어도 질겁하는 이명박 정권이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의 대통령 취임식에 축하사절까지 보내다니, 이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통합의 깃발을 올린 엘살바도르 사회변혁운동

1970년대에 미제국주의와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무장항쟁을 벌인 5개 좌파무장조직들이 연합하여 1980년 10월 10일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을 창설하였다. 전선에서 총을 잡고 싸우면서도 제각기 파벌을 형성한 까닭에 서로 반목하면서 알력이 심했던 5개 좌파무장조직들이 1980년 10월 10일에 엘살바도르 사회변혁을 이끌 연합전선체를 창설하기까지에는 사연이 있었다.
 
엘살바도르 사회변혁운동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5개 좌파무장조직들을 단일 깃발 아래 통합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대한 과업으로 나섰다. 5개 좌파무장조직 대표자들은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통합협상을 1979년 12월에 시작하여 6개월 동안 계속하면서 파벌주의의 가파른 문턱을 여러 차례 넘나들어야 하였다.
 
어려운 고비가 닥칠 적마다 통합협상이 반드시 성사되리라는 신심을 안겨주며 협상을 성공의 길로 이끈 영도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중남미 사회변혁운동을 대표하는 혁명가이자 쿠바 인민의 최고영도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다. 통합협상이 쿠바의 수도 아바나(Havana)에서 진행된 것만 봐도, 피델 카스트로가 통합협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만일 피델 카스트로의 영향을 받지 못하였더라면 통합협상 자체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했더라면 2009년에 진보적 정권교체는 실현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피델 카스트로의 고무적 영향 아래서 1979년 12월에 시작되어 6개월 동안이나 계속된 5개 좌파무장조직 대표자 협상은 1980년 5월 22일에 성공적으로 마감되었다. 사회변혁운동의 발전경로에 걸림돌로 들어박혔던 오랜 분열의 역사를 청산하고 하나의 깃발 아래 단결한 좌파무장조직들은 세 사람의 정치위원을 최고지도자로 추대하고 '통합혁명지휘부(Direccion Revolucionaria Unificada)'를 결성하였다. '통합혁명지휘부'는 창설선언문에서 "오직 하나의 영도, 오직 하나의 군사계획, 오직 하나의 지휘, 오직 하나의 정치노선만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통합혁명지휘부'가 치켜든 통합의 깃발은 붉은 색 바탕에 흰 색 글씨로 FMLN이라고 쓰고 왼쪽 상단부에 흰 색 별을 하나 그려넣은 것이다.
 
 
 

△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arabudo Marti National Liberation Front, FMLN)의 깃발과 노래를 담은 유튜브(YouTube) 동영상.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가는 "혁명이냐, 죽음이냐, 승리하리라. FMLN 전사들은  최후의 승리를 이끌기위해 싸운다. 형제들아, 투쟁을 향해 단결하라"라는 가사로 시작된다.
 
 
나의 개인경험을 잠깐 이야기하면, 1984년 당시 뉴욕에서 반미, 반독재민주화와 조국통일을 강령으로 든 청년운동을 처음으로 시작하였던 우리들이 무소유 공동생활을 하던 플러싱 지구의 허름한 아파트 거실 한 구석에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엘살바도르민중연대위원회(CISPES)'가 연대투쟁의 표시로 건네준 그 깃발이 걸려있었다. 그 깃발을 볼 때마다 우리 사회변혁운동은 언제면 저런 통합의 깃발 아래 뭉치게 될 것인가 생각하곤 하였던 28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여러 정파들이 모여 어렵사리 건설한 통합진보당을 다시 쪼개놓으려는 분당소동은, 엘살바도르를 비롯한 제3세계 사회변혁운동의 관점에서 볼 때도 명백히 진보와 변혁에 대한 파벌주의적 배반이다. 천백번 양보해서, 지금 분당파가 분당구실로 내걸은 '혁신'이 정당한 명분이라고 인정해도, 통합과 단결을 배반하는 혁신은 용납할 수 없으며 용납해서도 안 된다. 분당은 질병을 치료한다는 거짓명분으로 환자의 생명까지 앗아가버리는 정당살해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통합의 깃발 아래 이룩한 승리

통합의 깃발 아래 단결한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이 군사독재정권을 향해 첫 공격을 개시한 날은 1981년 1월 10일이다. 산악지대와 열대우림 속에 설치된 밀영들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남녀노소 무장대원들이 첫 공격에 나서 결사전을 벌여 승리하였으며, 그로써 엘살바도르 북동부지역을 해방하였다.
 
다른 한 편, 미국의 조종과 지원을 받는 엘살바도르 군사독재정권은 첫 공격전에서 승리하고 승승장구하는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을 꺾어보려고 악행과 살육을 자행하며 미쳐 날뛰었다. 그러나 군사독재정권이 전투기와 헬기를 동원하여 공중폭격을 감행할 때마다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을 지지하는 수많은 도시빈민들이 용약 길거리로 뛰쳐나와 피폭위험에 처한 무장대원들에게 피신길을 터주며 대신 자기들이 폭격에 희생되었다.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과 엘살바도르 민중은 그렇게 사상감정이 서로 통하는 불굴의 혈연관계로 결합되었다. 전선에서 함께 붉은 피를 흘리며 생성되고 결합되고 공고하게 굳어진 그 사상정신적 혈연체는 시공간에 존재하는 어떤 물리력으로도 깨뜨리지 못할 강력한 투쟁력을 폭발시켰다.
 
민중에게서 바로 그 폭발적인 투쟁력을 공급받은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은 1989년 11월 군사독재정권의 아성인 수도 산살바도르를 들이쳤다. 산살바도르 진격전이 벌어지자 공포에 질린 정부군은 너무 급해서 도시 한복판에 대미예속의 상징물로 우뚝 서 있는 미국 소유의 쉐라톤 호텔 안으로 피신하였고, 호텔 안으로 진격한 무장대원들은 치열한 교전을 벌이며 정부군을 소탕하였다.
 
산살바도르 진격전으로 전세는 바뀌었다. 엘살바도르 군사독재정권을 조종하고 지원해오던 미국은 자기 하수인들에게 패전이 임박하였음을 간파하고, 그들에게 평화회담을 시작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그에 따라,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과 엘살바도르 군사독재정권 사이에 평화회담이 시작되었고, 1992년 1월 16일 쌍방이 평화협정에 조인하였다.
 
차풀테펙 평화협정(Chapultepec Peace Accords)이라 부르는 그 역사적인 협정에 의하여, 군대의 내정개입을 금지하고 군병력을 감축하며 무장경찰을 해산하고 군사정보기관을 문민통제 아래 두기 위한 민주개헌이 실현되었다.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잔혹하게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정부군 지휘관들은 처벌을 받았고, 혁명의 총을 들고 결사전을 벌인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 소속 무장대원 35,000여 명에게는 경작토지가 분배되었다. 미제국주의와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무장항쟁을 벌였던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은 그렇게 승리하였다.

 
당내 우경파벌주의자들의 세 차례 분당소동

무장항쟁에서 승리한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은 합법정당으로 전환하여 대중정치활동을 벌이며 사회변혁운동을 계속 밀고 나갔다. 그런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의 앞길을 가로막은 장애물이 바로 엘살바도르의 수구우파정당 국민공화동맹(ARENA)이다. 미국과 국내 지배계급은 국민공화동맹을 적극 지지하면서, 그 수구우파정당을 앞세워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의 집권을 저지하고 사회변혁운동을 좌절시키려고 음양으로 책동하였다.
 
그런데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에게 국민공화동맹보다 더 큰 장애물은 내부분열이었다. 무장조직에서 합법정당으로 전환한 이후, 사회변혁노선을 수정하고 좌파정당을 중도정당으로 변질시키려는 우경적 분파가 생겨났다. 그들이 분당소동을 일으키며 1994년에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에서 떨어져 나가 '민주당(Partido Democrata)'을 창당하였으나 우경파벌주의자들의 가련한 운명이 언제나 그러하듯 단명으로 끝났고, 분당선동에 휩쓸려 탈당하였던 많은 당원들이 복당하였다. 분당사태가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어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 안에 존재해오던 모든 정파조직들이 자진해산하고 완전한 통합이 실현되었다.
 
그처럼 정파조직은 없어졌지만 사상조류는 없어지지 않았다. 당 안에 두 갈래의 사상조류가 흐르고 있었는데, 한 쪽은 '혁명적 사회주의파(CRS)'라 부르는 사회주의 사상조류이고, 다른 한 쪽은 '혁신파(Renovadores)'라 부르는 사회민주주의 사상조류였다. '혁신파'는 신자유주의를 전면 배격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려는 태도를 취하면서 반공주의 냄새까지 풍기기 시작했으므로, '혁명적 사회주의파'는 '혁신파'의 우경적 오류를 공격하였고, 그로써 두 사상조류가 충돌하였다. '혁신파'는 집단탈당하여 '혁신당'을 창당하였지만, 우경파벌주의자들의 가련한 운명이 언제나 그러하듯 단명으로 끝났다. 분당소동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2005년에 또 다시 우경파벌주의자들이 집단탈당하여 '민주혁명전선(FDR)'을 창당하였다.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은 합법정당으로 전환한 뒤에 무려 세 차례에 걸친 우경파벌주의자들의 분당소동으로 심한 내상을 입었으나, 분당소동은 17년 동안 당의 전진을 가로막지 못했다. 2009년 3월 15일 대선에서 마침내 국민공화동맹을 꺾고 집권에 성공한 것이다.

 
엘살바도르에서 실현되는 진보적 정권교체와 두 단계 사회변혁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은 어떻게 국민공화동맹을 꺾고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할 수 있었을까? 2007년 9월 28일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은 마우리시오 푸네스를 2009년 대선후보로 일찌감치 선출하였다. 푸네스는 1980년대에 무장항쟁을 벌이던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 지도자들을 텔레비전방송의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시켜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유명한 언론인이었다. 유명세를 탄 그는 나중에 미국의 보도전문 텔레비전방송 CNN에도 얼굴을 내비칠 만큼 널리 대중적 인기를 모았는데, 우파정권에 비판적인 방송을 계속하다가 미움을 사서 해고당하고 정계에 입문하였다.
 
푸네스의 정치성향은 중도파다. 굳이 비교한다면, 푸네스는 베네주엘라의 좌파대통령 차베스가 아니라 브라질의 중도파 대통령이었던 룰라 다 실바와 서로 통하는 중도파 대통령이다. 푸네스는 대통령 취임식에서 미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쿠바와 외교관계를 복원하겠다고 밝혔다.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이 당내 좌파지도자가 아니라 중도파 언론인 출신을 대선후보로 내세운 것은, 엘살바도르의 정치정세와 상관되는 현명한 조치였다. 우경파벌주의자들의 분당소동으로 상처를 입으면서 1994년, 1999년, 2004년 대선들에서 3연패하였던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이, 만일 좌파지도자를 대선후보로 내세우고 반미자주화와 주요산업 국유화 같은 선거공약을 내놓을 경우 중산층의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되고 따라서 국민공화동맹 대선후보를 꺾을 수 없었다. 실제로 2009년 대선에서 51.3%의 득표율을 얻은 푸네스는 48.7%의 득표율을 얻은 국민공화동맹 후보를 간신히 누르고 신승하였다.
 
그런데 2009년 대선에서 중도파 언론인 출신 저명인사를 대선후보로 내세우고 '온건한' 선거공약을 제시하여 집권에 성공한 때로부터 3년이 지난 2012년 6월 28일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은 현직 부통령 살바도르 산체스 세렌(Salvador Sanchez Cerén )을 2014년 대선후보를 선출하였다.
 
대선후보로 선출된 산체스 세렌은 1960년대에 엘살바도르 공산당 당원으로 교원노조에서 투쟁하였고, 1980년부터 무장항쟁에 참가하여 1984년에는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1992년에 차풀테펙 평화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무장항쟁을 총지휘하였으며,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 최고지도자 샤픽 한달(Schafik Handal)이 2006년 1월에 별세한 이후 당을 이끌어왔다.
 
좌파정치인 산체스 세렌이 대선후보로 등장한 것은, 중도파 대통령을 좌파 대통령으로 교체하여 사회변혁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의 정치적 결정에 따른 것이다. 엘살바도르에서 두 단계 사회변혁은 그렇게 진전되는 중이다. (2012년 8월 31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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