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분당은 진보정치에 대한 배반이다
통합진보당이 또 다른 혼란에 휘말려들고 있다. 당내 국민파가 일으킨 선거부정 고발사건과 반대파 제명사건, 그리고 당외 수구우파세력이 일으킨 '종북청산소동'으로 통합진보당이 더 할 나위 없이 혹심한 고통을 겪더니, 이제는 때아닌 분당위험으로 소용돌이에 빠졌다.
세상이 다 아는 것처럼, 분당위험이 발생한 원인은, 국민파가 선거부정 고발사건과 반대파 제명사건으로 반대파를 제거하고 당권을 장악한 다음, '당의 혁신'이라는 구실로 당을 우경화하려고 하다가, 반대파가 제동을 걸자 당에서 집단탈당하여 새로운 진보정당을 창당하려고 시도하는 분당발언에서 드러났다.
자주파와 국민파가 타협을 모르고 계속 충돌하여 당 안에 극도로 격앙된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므로, 격한 감정이 섞인 돌출발언들이 여기저기서 들리는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지만, 당을 둘로 쪼개겠다는 분당발언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당권장악문제를 놓고 당내 정파들끼리 충돌하여 어느 한 쪽이 패하는 경우에 당을 뛰쳐나가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는 분당소동은, 통합진보당에 속한 진보정치인들과는 거리가 멀고 수구우파정객들의 '전매특허'라는 점을 생각하면, 국민파의 분당발언은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원래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의 길에는 오로지 통합만 있고, 분당이란 있을 수 없으며, 분당은 정파적 이해관계에 눈이 멀어버린 수구우파정객들이 저지르는 졸렬한 기회주의적 행동이다. 그런데 서로 힘을 합하여 진보정치를 실현하자고 대중들 앞에서 공약하고 통합진보당을 함께 창당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국민파가 대중들 앞에서 발표한 공약을 스스로 깨고, 반대파와 더 이상 함께 정당활동을 하지 못하겠다고 불만을 터뜨리며 분당발언을 공공연히 꺼내고 있으니,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국민파의 분당경력에 대해서는 세상이 다 알고 있다. 국민파 다수 계열은 2002년에 국민개혁당을 창당한 이후 열린우리당, 대통합민주신당, 국민참여당, 통합진보당으로 이어진 10년 동안의 분당과 변신을 거듭해왔고, 국민파 소수 계열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통합진보당으로 이어진 곡절 많은 분당과 변신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그런 분당경력에서 그들이 얻은 것은 그들 자신의 정치적 실패와 '철새 정치인'이라는 대중의 비난 뿐이다. 국민파가 분당경력으로 얻은 것은 하나도 없고 잃어버린 것만 많다는 사실도 세상이 다 알고 있다. 분당으로 얻은 것은 정치적 실패와 대중의 비난밖에 없는데, 이제 또 다시 분당하겠다고 하니 이건 누가 봐도 난맥상이다.
진보정치인들 가운데서 왜 그러한 난맥상이 드러나는 것일까? 진보정치의 전체적 이익보다 자기들의 개별적 이익을 더 앞세우기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그 밖에 어떤 다른 원인을 찾기 어렵다.
당내 반대파와 맞붙은 당권투쟁에서 졌으면, 깨끗이 승복하고 반대파와 타협하는 방도를 찾는 게 정상인데, 당권투쟁에서 지는 바람에 당권을 차지할 가망이 없어져서 분당하겠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기본도 모르는 몰상식이다.
비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번에 자주파 다수 계열은 국민파의 총공세와 당외 수구우파세력의 집중공세에 밀려 당권을 잃고 완전히 고립되었으면서도, 분당하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당권을 잃고 정치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자주파 다수 계열이 분당소동을 일으키지 않은 까닭은, 분당이 진보정치에 대한 배반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보정당을 쪼개어 분당하면, 두 개의 진보정당이 생기는 게 아니라 진보정당의 '묘지' 두 기가 생겨나는 것이다. '묘지의 정적'에 대한 뼈아픈 기억은, 통합진보당이 창당되기 이전 지난 시기에 일어난 분당사태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국민파가 그 뼈아픈 기억을 벌써 잊은 것일까? 국민파가 또 다시 분당발언으로 통합진보당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그들에게 불치의 건망증이 있기 때문일까?
통합진보당을 창당한 목적과 의도는, 국민파 자신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통합노선으로 '묘지의 정적'을 깨뜨리고 대중적 지지를 받는 새로운 진보정치를 부활시키겠다는 데 있었다. 통합진보당 창당에서 현실로 입증된 것처럼, 진보정치는 정견이 서로 다른 정치세력들이 공동목표를 합의하고 서로 통합하여 정치역량을 극대화하는 통합정치다.
진보정치가 통합정치로 되어야 하는 까닭은, 진보정치세력이 수구정치세력에 비해 힘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약한 진보정치세력이 강한 수구정치세력과 맞서야 하는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통합밖에 없다. 그리하여 명백하게도, 진보정치가 추구하는 노선은 통합노선이다.
그러나 분당은 통합노선을 추구하는 진보정치에 대한 배반이며, 국민파가 그토록 강조해오는 '국민의 눈높이'에도 맞지 않는 패착이다. 그런 점에서, 국민파는 마땅히 분당발언을 철회하고 자주파와 타협하여 당의 통합을 유지하는 방도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분당과 통합의 흥망성쇠를 전해주는 역사적 경험들
1960년 4.19 혁명 직후 여러 진보정파들이 제각기 자기 정파의 이익만 생각하고 갈갈이 나뉘어져 소규모 혁신정당들을 창당하였다.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혁신동지총연맹이 창당되었는데, 1960년 7월 29일 총선에서 사회대중당이 4석, 한국사회당이 1석 밖에 얻지 못한 참패를 당하였다.
7.29 총선에서 혁신정당들이 분열로 참패하였으면, 거기에서 교훈을 찾고 정신을 차려 통합의 길로 나아갔어야 정상인데, 되레 더 사분오열되어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통일사회당, 혁신당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분당사태는 공멸하기로 작정한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1960년 12월 지방의회선거에서 사회대중당만 2석을 간신히 얻었을 뿐, 모조리 참패하였다.
통합을 버리고 분열을 택하여 공멸의 길에 들어선 혁신정당들은 결국 1961년에 일어난 5.16 군사정변으로 완전히 압살당하고 말았다. 4.19 혁명 직후 혁신정치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정세에서, 만일 혁신정당들이 힘을 합해 통합혁신정당을 창당하였더라면 그토록 허망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미와 서유럽에 산재하는 진보정당들이 겪어온 역사적 경험을 보더라도, 통합은 진보정치의 승리이고 분열은 진보정치에 대한 배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통합이 진보정치의 승리라는 진리를 현실로 입증한 가장 대표적인 경험은 베네주엘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금 그 나라에서는 진보정당들이 통합정신을 발휘하여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통합사회주의당(PSUV)을 창당하였고, 그 당의 영도로 진보와 변혁이 힘있게 추진되고 있다.
2007년 3월 24일에 570만 당원이 결집한 사상 최대의 진보정당으로 창당된 베네주엘라의 통합사회주의당도 이 땅의 통합진보당처럼 여러 정당 출신의 정파들이 통합한 통합정당이다. 통합사회주의당에는 6개 정당이 통합하였다. 그처럼 여러 정파들이 한 지붕 아래 결집하였으니 정파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반대파와 상종하기 싫어 분당하겠다는 희떠운 소리는 하지 않는다.
통합사회주의당이 당의 통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고 차베스 대통령을 중심으로 단결한 당의 최대 정파가 영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원래 이 정파는 1997년에 우고 차베스 대통령 자신이 창당하였고, 2007년에 통합사회주의당에 결합하면서 자진해산한 제5공화국운동(MVR)이라는 진보정당 출신으로 이루어진 정파다.
2005년에 실시된 의회선거에서 제5공화국운동은 167석 가운데 114석을 차지하였다. 이처럼 대중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강력한 정파가 통합사회주의당을 이끌어가기 때문에, 그 당의 통합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이 땅에서 통합진보당이 창당될 때, 만일 민주노동당 출신 자주파가 다른 정파들보다 압도적인 다수파였다면, 그리하여 자주파가 통합진보당의 통합을 유지하였더라면, 혹은 그와 반대로 국민파가 다른 정파들보다 압도적인 다수파로 당의 통합을 유지하였더라면, 이번에 격렬한 분쟁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통합진보당 안에서 자주파와 국민파가 서로 비등한 역량을 가졌던 것이 분쟁사태에 빌미를 준 여러 원인들 가운데 하나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전에 쓴 나의 글 '당의 침로는 기층에 있다'에서 논한 것처럼, 자주파가 풀뿌리 기층당조직을 건설하는 정치과업에 남달리 더욱 헌신분투하여야 앞으로 통합진보당의 통합을 유지하고 당을 이끌어가는 영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진보정당들이 통합하여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을 승리적으로 전진시키는 베네주엘라의 경험과 정반대의 경우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금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제국주의연합세력의 무력침공과 현지 종미정권의 반민중적 통치로 아프가니스탄은 끝모를 참상을 겪고 있지만, 그 이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진보정당들이 대중적 지지를 받으며 활동하였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진보정당은 맑스레닌주의노선을 추구하는 인민민주당과 마오주의노선을 추구하는 영원한 불꽃, 그리고 사회민주주의노선을 추구하는 민주조국당과 국민혁명당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처럼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는 4개 정당들은 처음부터 통합노선과 거리가 멀었다. 통합할 줄 모르고 제각기 다른 길을 걸어갔으니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정적들로부터 집중적으로 탄압을 받아 당이 와해되거나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식물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만일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진보정당들이 통합하여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내고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을 수호하였더라면, 오늘 그 나라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참상은 없었을 것이다.
베네주엘라의 통합정치와 아프가니스탄의 분열정치는 성공과 실패를 각각 극명하게 보여주는 양극단의 대표적인 사례다. 통합진보당 국민파는 4.19 혁명 직후 혁신정당 분열사태가 가르쳐주는 역사적 교훈, 그리고 베네주엘라와 아프가니스탄의 진보정치사가 가르쳐주는 역사적 교훈을 외면하지 말고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국민파 자신도 살고 진보정치도 살리는 현명한 선택은 분당강행이 아니라 통합유지다. (2012년 8월 2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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