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67년을 헤아리는 이 땅의 진보정당사
이 땅의 진보정당사에는 '족보'가 있다. 조선인민당→사회노동당→근로인민당→진보당→민중당→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으로 이어지는 긴 역사다. 이 땅에 첫 진보정당으로 등장하였던 조선인민당이 진보적 민주주의자 여운형을 중심으로 창당된 때가 1945년 11월 12일이었으니, 이 땅의 진보정당사에는 어느 덧 67년의 연륜이 쌓인 것이다.
조선인민당은 1945년 11월 12일 창당되었고, 사회노동당은 1946년 10월에 창당되었고, 근로인민당은 1947년 5월 24일 창당되었다. 1년 6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조선인민당→사회노동당→근로인민당으로 '변신'을 거듭한 것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결집한 진보정치세력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근로인민당은 1949년에 와해되었고, 진보당은 1956년 11월 10일에 창당되었으므로, 진보당 창당은 7년 동안 단절되었던 진보정당사를 이어놓은 것이다. 이 땅의 진보정당사는 진보당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진보당 이후에도 극심한 정치탄압으로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서는 좌절과 재기의 연속이었다.
진보당은 1958년 2월 25일 극심한 정치탄압으로 강제해산당했고, 민중당은 1990년 11월 10일에 창당되었으므로, 민중당 창당은 31년 동안 단절되었던 진보정당사를 이어놓은 것이다.또한 민중당은 1992년 3월에 해산하였고, 민주노동당은 2000년 1월 30일에 창당되었으므로, 민주노동당 창당은 8년 동안 단절되었던 진보정당사를 이어놓은 것이다.
주목하는 것은, 진보당이 정치탄압으로 강제해산당한 이후 민중당이 창당되기까지 31년 '공백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31년 '공백기'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진 군사독재정권 시기와 거의 중첩된다. 이것은 3대에 걸쳐 총칼을 휘두르며 집권을 연장한 군사독재 암흑기를 지나는 동안 진보정당이 재기하지 못하였음을 말해준다.
진보정당사의 31년 '공백기'를 메워준 것은 전위정당들이었다. 군사독재정권이 진보정치세력을 광란적으로 탄압하던 조건에서, 합법적 진보정당운동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으므로 비합법적 전위정당운동이 전개된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 땅의 전위정당사는 인민혁명당→통일혁명당→남조선민족해방전선→구국전위→민족민주혁명당으로 이어진 역사다. '간첩단'과 전위정당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저급한 지능지수밖에 갖지 못한 수구우파세력은 인민혁명당에서 시작하여 민족민주혁명당까지 이어진 전위정당사를 '북의 지령을 받는 간첩단 암약사'로 규정하고 혹심한 탄압을 가했다.
6.25 전쟁 후 첫 전위정당으로 등장한 인민혁명당은 1962년 1월에 창당되었고, 1964년 8월에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극심한 탄압을 받고 와해되었다. 통일혁명당은 1964년 3월 15일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1968년 8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은 1967년 2월에 결성되었고, 1979년 10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극심한 탄압을 받고 와해되었다.
구국전위는 1993년 1월에 결성되었고, 1994년 6월 김영삼 정권의 극심한 정치탄압으로 와해되었다. 민족민주혁명당은 1992년 3월에 결성되었고, 1999년 8월 김대중 정권의 극심한 정치탄압으로 와해되었다. 전위정당사는 극심한 정치탄압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37년 동안 이어졌으나, 전위정당사 관련자료는 '수사결과발표'나 '고소장'밖에 없으므로 역사적 진실을 파악하기 힘들다.
이 글에서 파헤치려는 것은 1950년대 후반 진보당에 대한 정치탄압 내막이다. 진보당을 강제해산시킨 정치탄압 잔혹사는 오늘 누가 왜 통합진보당을 와해시키려고 날뛰는지를 말해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그 역사적 교훈의 중심에 진보적 민주주의자 한 사람이 거연히 서 있으니, 그가 바로 진보당을 이끌었던 조봉암이다.
기소 중인 조봉암에게 갑자기 '간첩죄'를 추가한 내막
경찰의 수배를 받던 조봉암은 1958년 1월 13일 서울시 경찰국 수사관들에게 체포되었다. 검찰은 진보당의 평화통일 강령이 '반공국시'에 기초한 '북진통일론'에 위배된다고 하면서 조봉암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씌웠다. 이것은 이승만 극우독재정권이 조봉암을 제거하고 진보당을 파괴하려고 작정하였음을 말해준다.
반공광증에 걸린 이승만 극우독재정권의 정신병적 시각으로 보면, 조봉암 같은 진보적 민주주의자는 공산주의자로 보였고, 진보당 같은 진보정당은 공산당으로 보였다. 오늘날 세칭 '자주파'를 '종북좌파'라고 모략하고, 통합진보당을 '종북성향 좌파당'으로 비방하는 수구우파의 광기 어린 소동은, 이승만 극우독재정권이 걸렸던 정신질환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평화통일 강령을 범죄시하는 올가미로 진보당을 옭아매려던 검찰의 진보당 파괴공작은 그들의 뜻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진보당의 평화통일 강령을 범죄시한 검찰의 기소내용은 재판과정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또는 합법으로 판시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언론은 검찰이 짜맞추기 식으로 진보당을 '반국가단체'로 기소하였다고 지적하였고, 검찰은 망신만 당했다.
망신을 당하여 당황하고 있었던 검찰이 1958년 2월 28일에 갑자기 '추가공소장'이라는 것을 꺼내놓으면서 분위기가 급속히 반전되었다. 검찰이 의기양양하게 법정에 제출한 '추가공소장'에는 북측과 조봉암 사이를 연계한 '연락책'으로 양명산이라는 '간첩'이 등장하였다. 양명산의 등장으로 조봉암에게는 '국시위배죄'가 아니라 '간첩죄'가 씌워지고 말았다.
이승만 극우독재정권에게는 '국정원' 같은 대북정보기관이 없었으므로, 검찰의 기소는 조봉암을 북측과 연계시키려는 '간첩죄'를 씌우지 못하고, 진보당의 평화통일 강령을 트집잡아 조봉암을 '국시위배죄'로 처벌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추가공소장'에 '간첩'이 등장하여 조봉암에게 '간첩죄'가 추가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반전은 대북정보기관이 조봉암을 북측과 연계시킨 '추가정보'를 검찰에게 넘겨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검찰은 누구에게서 그런 '추가정보'를 넘겨받은 것일까? 당시 대북정보와 대북공작을 전문적으로 담당한 기관은 '특무대'였다. 다시 말해서, '특무대'가 조봉암과 북측을 연계시킨 '추가정보'를 검찰에 넘겨주어 조봉암에게 '간첩죄'를 씌우게 만든 것이다.
검찰이 양명산이라는 '간첩'을 등장시켜 조봉암에게 '간첩죄'를 추가한 직후, 이상한 보도기사 한 편이 나왔다. 검찰이 조봉암과 양명산을 구출하기 위해 북측에서 내려보낸 '여자 남파간첩' 김귀동을 체포하였다고 발표한 보도기사였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구속 중인 두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 '남파간첩'을 보냈다는 검찰 발표는 웃기지도 않는 만화였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김귀동은 '남파간첩'이 아니라 양명산의 아내였다.
검찰이 양명산의 아내를 '남파간첩'으로 몰아 긴급체포한 까닭은, 그 아내의 입에서 중요한 정보가 새어나왔기 때문이다. 김귀동은 자기 남편 양명산이 '간첩'으로 몰리게 되자, "특무대가 우리 남편에게 조봉암을 잡게 해주면 살려주겠다고 약속해놓고, 이제와서 우리 남편을 간첩으로 몰아 체포하였다"는 불평을 주변사람들에게 털어놓다가 검찰에 긴급체포된 것이다.
검찰이 김귀동을 긴급체포한 사건에서 드러난 중요한 사실은 '특무대'가 양명산을 내세워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갔다는 점이다. 양명산은 '특무대'에 끌려가서 취조를 받았는데, 재판과정에서 자신이 '특무대'의 협박을 받아 '특무대'가 시킨 대로 조봉암과 북측이 연계되었다고 진술하였다고 법정에서 폭로하였다.
양명산을 불법감금하고 고문수사하여 '간첩'으로 만든 '특무대'의 정체는 무엇일까? 검찰의 '상고이유서'에는 '특무대'의 정체가 '인천 HID 본부'라고 씌여 있다. 당시 인천 HID 본부 지휘관은 김일환 대령이었다. 김일환은 1956년 1월 양명산의 사상을 검증하고 그를 '특무대 대북공작원'으로 채용하기로 결정하고, 인천 HID 본부 소속 요원 엄숙진을 그의 상관으로 임명하였다.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에 처한 '사법살인'에 앞장섰던 악질 반공검사 오제도의 회고담에 따르면, 인천 CIC 지휘관이었던 밴스를 1977년경 홍콩에서 만났을 때 밴스는 자기가 조봉암 담당자였다고 하면서 조봉암의 신체 깊숙한 곳에 사마귀가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조봉암을 제거하고 진보당을 파괴한 진짜 주범
인천 CIC는 무엇이고, 인천 HID는 무엇인가? 인천 CIC는 미국육군방첩대(CIC) 한국현지사무소 산하 인천지역 담당기관이고, 인천 HID는 세칭 '특무대'라고 불렀던 한국군방첩대 정보분견대(HID) 산하 인천지역 담당기관이다. 미국육군방첩대(CIC)와 한국군방첩대 정보분견대(HID)가 서로 다른 정보기관처럼 보이지만, 실은 미국육군방첩대 휘하에 한국군방첩대 정보분견대가 있었다.
미국육군방첩대는 1961년에 해체되기까지 미국 중앙정보국(CIA)보다 더 강력한 권한과 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미국육군방첩대 한국현지사무소 총책은 '미8군사령관 특별보좌관'이라는 대외위장직책을 가지고 경무대(청와대의 당시 이름)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이 땅의 주권을 유린하고 있었던 미국 육군 대위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이었다.
서병조가 쓴 책 '주권자의 증언'에 따르면, 조봉암이 체포되기 얼마 전에 도널드 니콜스(Donald Nichos)가 오제도에게 조봉암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당시 미국 공군 중령이었던 도널드 니콜스는 1951년 5월 11일부터 1957년 11월까지 제6004공군정보국 중대(6004th Air Intelligence Service Squadron) 지휘관으로 있었다.
6.25 전쟁 시기 남측 각지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민간인들을 '빨갱이'로 몰아 대량학살한 현장을 사진촬영하여 본국에 보고하였고, '특무대'를 북측에 침투시켜 암살과 폭파를 자행하도록 지휘했던 악질 반공광신자가 바로 도널드 니콜스다.
당시 도쿄에 본부를 두고 있었던 제6004공군정보국은 당시 서울 용산기지 안에 자리잡고 있었던 미국육군방첩대 한국현지사무소와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었고, 대북육상 및 해상침투공작은 미국육군방첩대 한국현지사무소가 담당하고, 대북공중침투공작은 제6004공군정보국이 담당하였다.
위의 정보를 종합하면, 조봉암을 '간첩죄'에 옭아맨 '간첩죄 관련 정보'를 조작하여 검찰에 넘겨준 장본인은 미국육군방첩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은 진보당 탄압사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였을까? 주한미국대사관 무관들이 1958년 3월 13일에 본국에 보낸 보고서 '조인트 위카(Joint Weeka)' 제11호에 따르면, "미국 중앙정보국은 경찰과 검찰이 조봉암에게 간첩죄를 적용한 것이 매우 취약하다고 보고하였고, 진보당의 평화통일안을 대한민국을 반대하는 범죄로 설명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였다.
또한 "정보에 따르면, 중앙정보국 요원들은 조봉암 사건 공판이 6회에 걸쳐 계속되어 4월 중순쯤에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이것은 미국 중앙정보국이 진보당 탄압사건을 국외자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도널드 스톤 맥도널드(Donald Stone McDonald)가 쓴 책 '해방에서 자립까지 미국-코리아 관계: 1945년부터 1965년까지 기간의 미국 국무부 해석 요약(U.S.-Korean Relation from Liberation to Self-Reliance: An Interpretative Summary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 for the Period 1945 to 1965)'에 따르면, 주한미국대사관 요원들과 미국 중앙정보국 요원들이 진보당 사건 공판을 날마다 방청하면서 유심히 관찰하고, 때로 진보당 사건 공판을 맡은 고위급 인사들을 직접 만나 정보를 파악하였으며, 수사와 공판에 관해 수시로 본국에 보고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미국 중앙정보국이 진보당 탄압사건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물론 이승만 극우독재정권도 조봉암을 제거하고 진보당을 파괴하려고 미쳐 날뛰었지만,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검찰을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조봉암에게 '간첩죄'를 씌워 그를 제거하고 진보당을 파괴한 진짜 주범은 미국육군방첩대였다.
1956년 11월과 2011년 12월
1950년대 말 이 땅의 정치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민심은 부패와 악정의 대명사인 이승만 정권을 외면하였고, 그렇다고 민주당에게도 기대를 걸지 않았다. 민심의 시야에는 자유당이나 민주당이나 '모두 똑같은 놈들'이었다. 이 땅의 국민들은 자유당과 민주당을 넘어 새로운 진보정당이 출현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진보적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이라는 양대 정치강령을 국민들에게 제시한 조봉암과 진보당이야말로 국민들이 기다려온 새로운 진보정치인이었고 참신한 진보정당이었다. 당시 국민들의 정치적 요구대로, 조봉암이 노쇠한 독재자 이승만을 대선에서 물리치고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였더라면, 오늘 한반도는 전혀 다른 세상일 것이다.
1950년대 말 그처럼 급변하고 있었던 이 땅의 정치정세를 정확히 꿰뚫어본 것은, 서울 용산기지에 자리잡고 있던 미국육군방첩대 한국현지사무소였다. 미국육군방첩대 한국현지사무소가 진보당과 국민들을 떼어놓고 진보당의 집권을 저지하는 길은,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제거하고 진보당을 파괴하는 만행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세월은 어느덧 멀리 흘러 반세기가 지났다. 진보당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차츰 희미해지고 역사책 한 구석에 수록되었으나, 이 땅의 진보정당사는 의연히 발전해왔다. 1956년 11월 진보당이 반이승만세력을 규합하여 진보적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는 새로운 진보정당으로 등장하였던 것처럼, 2011년 12월 통합진보당은 반이명박세력을 규합하여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는 새로운 진보정당으로 등장하였다.
통합진보당은 중도좌파정당(민주노동당)과 중도우파정당(국민참여당 및 새진보통합연대)의 연합체로 창당되자마자 4.11 총선에서 민주통합당과 야권연대를 실현하여 원내 13석을 확보하였다. 진보연합정치의 성공 가능성을 입증한 것이다.
비록 4.11 총선 야권연대에서 명시적으로 표명되지 않았지만,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이 야권연대를 실현한 것은 2012년 12월 대선에서 그 두 당이 연립정부 구성으로 정권교체를 실현하기 위한 사전조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원래 연정구상에 적극적이었던 쪽은 민주노동당 당권파(지금은 통합진보당 구당권파)였다. 만일 통합진보당 구당권파가 민주노동당 시기부터 연정을 구상하지 않았더라면, 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 및 새진보통합연대와 통합하여 통합진보당을 창당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만일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의 야권연대가 올해 대선에서 승리하여 연립정부를 수립하면 정치정세는 어떻게 바뀌게 되는가? 4.11 총선 야권연대에서 통합진보당의 노숙한 정치견인력이 현실로 입증된 것처럼, 연립정부 5년 동안 통합진보당은 민주통합당을 꾸준히 진보의 길로 견인해나갈 것이다.
2013년부터 시작될, 한반도 평화협정을 중심으로 하는 북미관계 개선과 더불어, 남측에 새로 등장한 연립정부 안에서 통합진보당의 견인전략이 위력을 발휘하는 경우, '국가보안법' 철폐, 한미FTA 폐기, 진보적 노동정책 실시, 재벌 해체 및 전략산업 부분적 국유화, 전민복지 실현, 6.15 공동선언 및 10.4 선언 전면이행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정세변화는 정권을 상실하고 우왕좌왕하는 수구우파세력을 압도하고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통일로 나아가는 진보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어놓는 것이다.
진보당 창당으로 진보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어놓았던 조봉암이 '간첩'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당하고, 창당 직후 대중적 지지기반을 급속히 확대하고 있었던 진보당이 '국시위배정당'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강제해산을 당했던 때로부터 54년이 흐른 지금, 이석기 국회의원과 김재연 국회의원이 '종북좌파인사'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국회에서 쫓겨날 판이고, 통합진보당은 '헌법위반정당'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대중적 지지기반을 잃어버리고 있으며, 통합진보당이 주도하는 야권연대에 기초한 진보적 연정구상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실종위기에 빠졌다.
54년 전에 일어난 진보당 탄압의 배후에 미국육군방첩대가 있었다면, 오늘 통합진보당 탄압의 배후에는 누가 있을까? (2012년 6월 1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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