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2011년 9월 19일 오후 8시 <조선중앙텔레비죤>이 방영한 보도에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 그 영상화면에는 일렬로 길게 줄을 지어 병원문에 들어서는 여대생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흰 저고리에 짙은 청색 치마를 차려입은 북측 여대생들이 대부분이다. 그 다음 장면은 인민보안원(남측에서는 경찰)들이 일렬로 줄을 지어 병원문에 들어서는 모습을 비춰준다.
△2011년 9월 19일 오후 8시 <조선중앙텔레비죤>이 방영한 보도의 한 장면 |
여대생과 보안원,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이 병원으로 줄지어 들어가는 그 장면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그들이 줄을 지어 들어간 병원은 개성시에 있는 소아병원이다. 개성시 소아병원 우경재 원장이 보도영상에 나와 시청자들에게 사연을 말해주었다.
2010년 11월 초 어느 날, 심한 화상을 입은 여자아이가 병원으로 급히 실려왔다. 호흡과 맥박이 꺼져가며 혼수상태에 빠진 그 아이의 이름은 최설경이다. 보도영상화면에 비친 설경이의 어린 모습은 대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개성시 소아병원 의사들과 간호원(남측에서는 간호사)들은 거의 죽음에 이르러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이는 설경이를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내기로 결심하였다. 신체의 43%가 화상을 입어서 병상에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사경을 헤매는 아이를 붙들고 밤낮으로 이어진 눈물겨운 긴급치료는 무려 27일 동안 계속되었다.
보도화면에 나온 그 병원의 강승렬 의사는 "낮과 밤이 따로 없이 치료전투를 벌여서 근 27일만에 의식을 완전히 회복시켰다"고 말했다.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27일만에 겨우 두 눈을 뜬 설경이에게 당장 급한 것은 온몸에 퍼져가는 화독을 제거하는 피부이식수술이었다. 신체의 43%가 화상을 입었기에 피부이식수술을 여러 차례 하여야 하는데, 누군가 피와 살을 나누어주어야 수술을 할 수 있었다.
그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와 간호원 가운데 젊은 피부를 가진 간호원들이 자기 살을 설경이에게 떼어주기 위해 수술대에 누웠다. 하지만 그 여성 간호원들의 몸에서 떼어낸 살점 몇 개만으로는 설경이의 화독 오른 피부를 살려낼 수 없었고, 그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의 혈관에서 뽑아낸 피는 여러 차례 대수술을 계속하기에는 너무 모자랐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일분 일초가 급하게 대수술을 해야 하는데 피와 살이 모자란다는 다급한 소식이 유선방송을 타고 개성시 집집마다 전해졌다. 그 소식을 들은 개성시민들이 앞다투어 병원으로 몰려들었다. 여대생들과 보안원들이 줄지어 병원에 들어서는 텔레비전 보도화면은, 그런 감동적인 사연이 담긴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이다.
설경이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각계각층 개성시민들이 날마다 병원을 찾아와 피를 뽑고 살점을 떼어냈다. 보도에 따르면, 피부를 이식하는 대수술이 여섯 차례 진행되는 동안 무려 1,700여 명에 이르는 개성시민들이 피를 뽑고 살점을 떼어냈다. 1,700여 명의 피와 살을 받고, 의료진의 지성어린 치료를 받은 설경이는 300여 일만에 마침내 병상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300여일간 1,700명의 피와 살로 치료, 소생한 설경이 (2011년 9월 19일 <조선중앙텔레비죤>보도화면) |
부모의 피보다 더 진한 피를 수혈받고, 혈육의 피부보다 더 귀한 살점을 이식받고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설경이가 엄마와 아빠의 두 손을 잡고 퇴원하던 날, 그에게 피와 살을 나누어준 여대생들, 보안원들, 근로자들이 병원문 앞에 다시 모였다.
그들은 건강한 모습으로 아장아장 걸어나오는 설경이에게 꽃다발을 한아름 안겨주었다. 꽃다발보다 더 환한 웃음소리, 늦여름 햇살보다 더 눈부신 축하의 박수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퍼지며 9월의 푸른 하늘에 긴 여운을 남겼다.
설경이의 어머니 방인옥 씨는 취재기자의 마이크 앞에서 가늘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병원문을 나서는 설경이 (2011년 9월 19일 <조선중앙텔레비죤>보도화면) |
설경이의 어머니 방인옥 씨는 취재기자의 마이크 앞에서 가늘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정말 꿈만 같습니다. 처음 우리 설경이가 병원에 실려왔을 땐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하지만 여기 의사 선생님들이 300일 동안이나 하루와 같이 온갖 정성을 기울였으니 그 정성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하겠습니까. 평범한 노동자의 딸을 위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일군들과 대학생들, 보안원들이 저저마다 피와 살을 바친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이 고마운 제도를 마련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또 드렸습니다."
생명이 꺼져가는 설경이를 살리기 위해 자기의 피와 살을 아낌없이 나누어준 1,700여 명의 이름 없는 개성시민들. 그들이 분단장벽 너머 저 편에 펼쳐놓은 전설 같은 사랑의 화폭이 우리에게도 전해져 듣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서로 물고 뜯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살벌한 냉혈세상은 가고, 서로 돕고 아끼는 감동어린 이야기가 남북을 하나로 이어주는 인간사랑의 따뜻한 세상. 분단장벽을 허물고 우리에게 다가올 평화통일의 미래가 그런 아름다운 세상이다. (2011년 10월 5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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