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6.25전쟁 시기 한국군 제6사단 방첩부대(HID) 행정과장이었던 김용태가 <월간조선> 2002년 4월호에 실린 회고담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털어놓았다. 1952년 6월 19일, 그가 배속된 한국군 제6사단은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용문산에서 취침하던 중에 중국인민지원군 3개 사단의 야간기습공격을 받고 너무 경황이 없어 군화도 신지 못한 채 맨발로 도망갔다. 한국군 제6사단 사단장은 장도영이었는데, 그도 다른 사병들과 뒤섞여 산꼭대기로 도망갔다.
중국인민지원군이 산아래에서 포위망을 좁히며 산꼭대기로 올라오는 것을 보며, 포로로 잡히게 된 절망적 상황에 빠진 장도영은 움켜쥐고 있던 일본도로 할복자살을 하려고 하였다. 그 때 곁에 있던 김용태가 "사단장 각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장수가 죽으면 부하들은 어떻게 합니까. 용기를 가지십시오"라고 말하며 일본도를 빼앗았다고 한다. 그의 회고담에 따르면, 한국군 제6사단 사단장 장도영이 일본도를 휘두르며 전투를 지휘하였음을 알 수 있다.
8.15 해방 전에 장도영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하급장교로 일제를 위해 충성한 친일반역자였으므로, 일본군에 있을 때 일본도를 휘두르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한국군 사단장이 되어서도 일본도를 허리에 차고 돌아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장도영만 일본도를 휘두르며 전투를 지휘한 게 아니라, 당시 한국군 사단장들이 거의 모두 그러하였다는 점이다. 김용태는 6.25전쟁을 회고한 대목에서 "그 때 사단장들은 일본도를 갖고 다녔어요"라고 말했다. 이것은 6.25 전쟁 시기에 한국군 지휘관들이 거의 모두 일본군과 만주군에서 일제를 위해 충성한 친일반역자들이었음을 말해준다. 친일반역세력으로 구성된 당시 한국군 지휘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국방장관 신태영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26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 육군 중좌였다. 국방차관 김일환은 만주군 군관학교 5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군 경리장교였다.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49기생으로 일본 육군병기학교 교관을 지냈고 일제 패망 당시 일본 육군 포병 중좌였다. 채병덕의 뒤를 이은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55기생으로 만주국 헌병 상위(대위)로 간도헌병대 대장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군 고등군사학교 졸업예정자였다. 해병대사령관 신현준은 만주군 군관학교 5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군 대위였다.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 김창룡은 일본 관동군 헌병교습소를 졸업하였으며, 일제 패망 당시 관동군 헌병 오장이었다. 육군보병학교 교장 박임항은 만주군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 56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군 항공부대 중좌였다. 1군단장 김백일은 만주군 군관학교 5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군 상위(대위)였다. 공군 비행단장 이근석은 일본 구마다니비행학교를 졸업하였고, 일제 패망 당시 일본 육군항공대 소위였다. 육군 준장 김석원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27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군 육군 대좌였다. 헌병총사령관 원용덕은 만주군 군관학교 교의였으며,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군 중교(중령)였다.
△6.25 전쟁시기 백선엽 대령과 미군사고문 패리스 중령이 지도를 보며 626고지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 백선엽은 일제 시기 만주 군관학교 9기생 출신으로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 토벌에 앞장 선 간도특설대 소속 만주군 중위였다. |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선에 있었던 한국군 사단장들도 모두 친일반역자들이었다. 제1사단 사단장 백선엽은 만주군 군관학교 9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간도특설대 소속 만주군 중위였다. 제2사단 사단장 이형근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56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군 포병 대위였다. 제3사단 사단장 유승렬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26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군 육군 대좌였다.
제5사단 사단장 이응준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26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군 육군 대좌였다. 제6사단 사단장 김종오는 일제에 징병되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군 육군 소위였다. 제7사단 사단장 유재흥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55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군 육군 대위였다. 제8사단 사단장 이성가는 중국 남경군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일제 패망 당시 당시 중국 군벌 장교였다.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이종찬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49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 육군 소좌였다. 황해도 옹진반도에 배치된 제17독립보병연대 연대장 백인엽은 일본 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하였고, 일제 패망 당시 일본 육군항공대 소위였다.
이처럼 친일반역세력으로 구성된 한국군 지휘부에 맞서 6.25전쟁을 벌인 북측의 조선인민군 지휘부는 어떠하였을까? 조선인민군 전선사령관 김책과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은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중 8.15 해방을 맞았다. 인민군 제1군단장 김웅은 중국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신사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였고, 제2군단장 무정은 중국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팔로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인민군 제1사단 사단장 최광, 제2사단 사단장 최현, 제3사단 사단장 리영호는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중 8.15 해방을 맞았다. 제4사단 사단장 리권무는 조선의용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중 8.15 해방을 맞았다. 제5사단 사단장 오백룡은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중 8.15 해방을 맞았다. 제6사단 사단장 방호산은 팔로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제7사단 사단장 전우, 제9사단 사단장 박효삼은 조선의용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제13사단 사단장 최용진, 제15사단 사단장 박성철, 제105전차여단 여단장 류경수, 776부대장 오진우는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중 8.15 해방을 맞았다.
위의 사실을 읽어보면, 6.25전쟁 시기 한국군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친일반역자들이 지휘하였고, 조선인민군은 조선인민혁명군과 조선의용군 출신 항일혁명투사들이 지휘하였음이 명백히 드러난다. 8.15 해방 직후 일본군 군복과 만주군 군복을 벗어던지고 각처에 은신하며 친일반역죄 처벌을 모면하고 있었던 그들을 데려가 한국군 지휘관 모자를 씌워준 것은 미군정이었다. 미국이 친일반역죄를 덮어주고 그들을 한국군 지휘관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6.25전쟁의 성격을 동족상잔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부정확하며, 미국이 내세운 친일반역세력과 미국을 반대한 항일혁명세력의 전쟁이었다고 표현해야 정확하다. 미국이 내세운 친일반역세력이 6.25전쟁의 주역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한국군에게 씻을 수 없는 '원죄'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