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21

수구정권의 집권연장에 맞서 시련을 돌파하는 비결


변혁과 진보 (104)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사상정신적 혁신, 자주의식화, 진보조직화
 
20121219일에 실시된 제18대 대선결과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나왔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어 수구정권의 집권기간이 앞으로 5년 더 연장된 것이다. MB라는 소리만 들려도 환멸을 느껴야 했던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심한 절망과 고통 속에 살아왔는데, 이제부터는 GH라는 소리를 들으며 환멸을 느끼게 될 박근혜 정권 5년 동안 그 절망과 고통이 더 연장되는 것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시련이며,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위해 투쟁하는 진보정당에게도 시련이다.
 
우리 사회에 노동자들이 약 1,700만 명이고 그 가운데 특히 살인적인 저임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600만 명인데, 이번 대선에서 그 많은 노동자는 다 어디에 갔으며, 그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는 또 어디에 갔을까? 새누리당 후보와 민주통합당 후보를 가려볼 줄도 모르는 노동자가 1,700만 명이 아니라 5,000만 명이 있으면 뭐하나?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그들의 두뇌 속에 깊숙이 주입당한 수구친화적 허위의식을 깨뜨리고 스스로를 자주의식화하고 스스로를 진보조직화하지 못하면, 대선을 50, 100번 실시한들 뭐가 달라지나?
 
오늘날 이 땅의 사회계급관계는 명백하게도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의 적대적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이상하게도 대선정국에서는 그런 적대적 관계가 연기처럼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왜 그럴까?
 
예컨대, 이번 대선에서 비록 완주하지는 못하였지만 이정희 후보가 통합진보당 대선후보로 나왔을 때, 그녀를 지지한 것은 민주노총이 아니라 전농이었다. 진보적 농민단체는 진보정당 후보를 지지하는데, 민주노조는 진보정당에 대한 형식적 지지마저 철회해버린 어처구니없는 사례는 세계 진보정치사에서 전무후무하다. 민주노조가 설마 그렇게까지 몰상식한 과오를 저지를 수 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 만큼 너무 기괴한 일이라서 국제노동계와 국제진보정치계에 창피한 소문이라도 나돌까봐 걱정스럽다.
 
하기야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들마저 무슨 정파적 이해관계가 맞지 않는다고 투덜대면서 통합진보당을 등지고 민주통합당에 들어가거나 그 당의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해괴한 장면을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버젓이 연출하는 판이니, 그런 민주노총 지도부를 어느 노동자가 믿고 따르겠는가.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의 적대적 관계가 대선정국에서 연기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그 기이한 현상의 밑바닥에는 도대체 무슨 원인이 깔려있을까? 민주노조운동을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의 길로 이끌지 못하고 우왕좌왕해온 민주노조 지도부의 정치적 무능이 주된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정치적으로 무능하면서도 무슨 높은 자리나 차지해보려고 시류 따라 이리저리 쏠리는 정치적 야심이 또 다른 주된 원인으로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민주노조 지도부가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민주노조를 대표하는 위원장 출신들이 거의 예외 없이 이번 대선을 계기로 그런 무능과 야심을 속속 드러내 보였으니 이건 아주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통합진보당은 민주노총의 그런 심각한 사정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민주노총 지도부가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을 향한 사상정신적 혁신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면, 통합진보당의 장성과 발전은 한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민주노조와 진보정당이 별거하면, 진보정치는 힘을 잃어버리게 되고, 사회변혁의 앞길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면 그런 혁신은 어떻게 해야 하나?
 
위가 막혔으면, 아래에서 뚫어야 한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사상정신적 혁신은 각성한 조합원들의 단결된 힘으로 추진할 수 있다. 통합진보당을 쪼개놓으려는 우경파벌주의자들의 분당소동을 저지하고 당을 사수하기 위해 5,300명 노동자 당원이 지난 8월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듯이, 이제는 민주노총 지도부의 사상정신적 혁신을 위해 수 천 명 노동자 당원들이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한다.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이제껏 민주노총 안에서 활동해온 조합원들이 더욱 분발하고,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적대적인 사회계급관계를 타파하고, 그리하여 노동계급이 하나의 계급으로 단합하고, 근로대중과 협동한 광범위한 생산자 대중이 사회역사발전의 주체로 일어서는 저 눈부시게 새로운 미래를 향해 진보하려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사상정신을 진보적으로 변화시키는 자주의식화부터 실현해야 한다는 진보정치의 원리와 사회변혁의 진리를 이번 대선에서도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면 그 원리, 그 진리를 실현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민주노총 지도부부터 사상정신적으로 자기혁신을 해야 민주노총에 가입한 전체 조합원들이 자주의식화될 수 있고, 민주노총에 아직 가입하지 않은 수많은 노동자들을 진보조직화할 수 있다. 노조 지도부의 사상정신적 자기혁신, 전체 조합원의 자주의식화, 미가입 노동자들의 진보조직화, 바로 이것이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의 길을 열어 노동계급 자신을 살리는 길이요, 노동계급과 끝까지 함께 갈 근로대중을 살리는 길이며, 자주적 평화통일로 민족을 살리는 길이다.
 
지금으로서는 굴곡 많은 앞길이 험하게만 보이는 박근혜 정권 5년은 민주노총과 통합진보당에게 절망의 시간이 아니라, 바로 그런 사상정신적 혁신, 자주의식화, 진보조직화라는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주어진 천금 같이 귀중한 투쟁의 시간이다. 5년의 투쟁에서 승리해야 진보적 정권교체의 길이 열리게 된다.
 
 
멕시코에는 강력한 제2야당이 있다
 
세계 진보정치계를 살펴보면, 진보정당과 민주노조의 결합력만으로는 수구정치의 두꺼운 장벽을 돌파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진보정당이 진보적인 농민조직을 비롯한 각계각층 대중조직들과도 결합할 때, 진보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어놓을 수 있다. 이것이 통합진보당이 그 실현을 위해 투쟁해온 폭넓은 진보정치역량의 총결집이다. 그처럼 진보정당이 중심이 되어 폭넓은 진보정치역량을 결집시킨 사례는 멕시코 정치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멕시코의 현 집권당은 제도혁명당(PRI)이다. 우리 정당구도에 대비하면, 이 당은 민주통합당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910년에 시작되어 1920년까지 지속된 멕시코혁명의 불길 속에서 단련된 여러 정파들이 1929년에 민족혁명당(PNR)을 창당한 것이 제도혁명당의 출발이었다. 혁명정신이 펄펄 끓고 있었던 초창기에 민족혁명당은 멕시코혁명의 이념을 계승하여 농민에게 농지를 무상으로 분배하고, 석유산업을 국유화하고 국유산업을 보호하며, 선진적인 사회보장제도를 도입, 노동조합을 조직화하는 등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멕시코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을 받을 수 있었고, 장기집권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제도혁명당은 40여 년 장기집권기간 중에 멕시코혁명의 이념을 차츰 퇴색시켰고, 정권의 권력형 부패가 심해져 나중에는 멕시코 민중들에게 부패정당으로 낙인이 찍혔다. 그래서 2000년과 2006년에 각각 실시된 대선에서 연속적으로 두 차례 패하여 국민행동당에게 정권을 내주었는데, 올해 2012년에 다시 정권을 탈환하였다. 이런 사정은, 멕시코 민중이 이 부패정당에 대한 미련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제도혁명당은 현재 하원 500석 가운데 207(41.4%), 상원 128석 가운데 52(40.6%), 주지사 32석 가운데 20(62.5%)을 차지하였다.
 
제도혁명당에 맞서고 있는 제1야당은 1939년에 창당된 수구정당인 국민행동당(PAN)이다. 우리 정당구도에 대비하면, 이 당은 새누리당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당은 2000년부터 2011년까지 집권하였는데, 현재 하원 500석 가운데 114(22.8%), 상원 128석 가운데 38(29.6%), 주지사 32석 가운데 8(25.0%)을 차지하였다.
 
멕시코의 제2야당은 민주혁명당(PRD)이다. 우리 정당구도에 대비하면, 이 당은 통합진보당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정당의 도전을 압도적인 표차로 물리치고 장기집권을 순탄하게 지속해오던 제도혁명당 앞에 사상 처음으로 강력한 도전자로 등장한 것이 바로 민주혁명당이다. 민주혁명당이 아직 결성되기 전인 1988년에 실시된 대선에 출마한 진보정치연합세력의 후보가 31.1%의 득표율을 올린 것이다. 당시 집권당이었던 제도혁명당 후보의 득표율은 50.4%였다.
 
1988년 대선에서 비록 패하였으나 집권당을 크게 위협한 진보정치연합세력은 진보적 정권교체를 위해 새로운 형의 진보정당을 건설해야 할 절실한 요구를 느꼈다. 그런 요구에 따라 결성된 것이 민족민주전선(FDN)’이라는 전선체다. 이 전선체는 권력형 부패로 몸살을 앓던 제도혁명당에서 갈라져 나온 그 당의 진보세력과 4개의 군소좌파정당들(멕시코 공산당, 멕시코 통합사회당, 사회주의멕시코당, 멕시코노동자당)19895월에 결집하여 세운 것이다. 바로 이 전선체가 진보정당으로 확대강화되어 오늘의 민주혁명당으로 되었다. 현재 민주혁명당은 하원 500석 가운데 100석을 차지하였고(20.0%), 상원 128석 가운데 22석을 차지하였고(17.1%), 주지사 32석 가운데 3(9.3%)을 차지하였다.
 
민주혁명당은 2006년 총선 직후 노동당(PT), 시민운동(MC)과 연대하여 새로운 전선체인 폭넓은 진보전선(FAP)’을 결성하였다. 전선역량으로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려는 정치적 의지와 전망이 돋보인다.
 
오늘날 이 땅의 통합진보당과 멕시코의 민주혁명당은 각각 제2야당의 위치에 있지만, 그 두 당의 정치역량을 대비해보면, 통합진보당 당세는 민주혁명당 당세에 비해 현저하게 약하다. 멕시코 정당구도는 진보정당, 중도정당, 수구정당이 3파전을 벌이는 3당구도인데 비해, 이 땅의 정당구도는 수구정당이 여전히 우세한 가운데 중도정당과 수구정당이 2파전을 벌이는 보수양당구도에 고착되어 있다. 이번 대선이 그런 현실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낡고 무능한 보수양당구도를 깨고, 3당구도로 개편해야 할 중요한 임무가 통합진보당에게 주어졌다.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지난 해 말부터 민주노동당을 확대개편하는 노력을 기울여오다가 난데없는 분당소동으로 임무수행에 실패하였다.
 
 
멕시코 노조의 한심한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위에서 언급한 멕시코 정치권 사정을 살펴보면, 민주혁명당이 가까운 장래에 선거에서 승리하여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할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의 기치를 들고 투쟁하는 민주혁명당은 왜 멕시코 민중의 20% 지지선을 그처럼 오래도록 뛰어넘지 못하는 것일까?
 
결정적인 원인은 멕시코 노동계급의 우경화와 어용화에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멕시코의 노조조직화된 노동자들 가운데 85%를 포괄하는, 조합원 총수가 500만 명이 넘는 막강한 멕시코노동자연맹(CTM)이 제도혁명당과 구조적으로 밀착되어 어용노조로 전락한 것이다. 1936년에 결성된 멕시코노동자연맹은 1941년부터 멕시코 정권과 밀착되어 어용화되고 말았다. 어용화된 멕시코노동자연맹 지도부는 차츰 부정부패에 빠져 들었고, 권력을 잡은 제도혁명당은 노동법이라는 것을 만들어놓았고, 멕시코 정부는 그 법의 고삐를 틀어쥐고 노조를 통제, 관리하였다.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의 길을 가야 할 조직화된 노동자들이 제도혁명당 정권에 밀착되어 통제와 관리에 순응하고 있으니, 민주혁명당이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는 것에는 결정적인 제약이 따른다. 다시 말해서 민주혁명당과 멕시코 노동계급은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멕시코 노동자연맹이 어용노조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진보적 노조로 전환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민주혁명당은 폭넓은 진보전선을 결성하고 거기서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의 추진동력을 공급받고 있지만, 정작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의 주력인 노동계급으로부터는 매우 제한적인 동력밖에 공급받지 못한다. 멕시코의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이 뛰어넘지 못하는 한계선이 바로 거기에 그어져 있다.
 
이 땅의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에 나선 통합진보당 노동자 당원들은 진보정당과 노조가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멕시코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민주노총 지도부를 혁신하는 투쟁에 힘써야 할 것이다. 박근혜 정권 5년 동안, 통합진보당이 시련을 돌파할 수 있는 비결이 거기에 있다. (201212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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