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29

무력충돌위기는 재발된다

[한호석의 개벽예감](405)

자주시보 2020년 07월 27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충돌하는 대남군사훈련과 대북군사훈련

2. 위험한 도발사격 뒤에는 음흉한 정치음모

3. 2015년 8월 20일 ‘남조선해방전쟁계획’이 비준되었다

4. 2015년 8월 21일 전면공격태세 갖춘 조선인민군

 

 

1. 충돌하는 대남군사훈련과 대북군사훈련

 

2020년 7월 20일 <자주시보>에 실린 ‘최고로 중대한 극비안건 결정한 비공개회의’라는 제목의 글에서 나는 여러 객관적 사실들에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추론했다. 

 

1) 2020년 7월 18일에 진행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회의 비공개회의에서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제출한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이 승인되었다. 

2)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은 당중앙군사위원회가 승인한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을 비준했다. 

3)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은 교전상대의 저항정도에 따라 한 단계씩 높여가는 식으로 전개될 3단계 군사행동계획이다. 

4) 대남군사행동계획 제1단계는 군사분계선에서 우발적 무력충돌이 일어났을 때 조선인민군의 전투행동을 규정하는 것이고, 제2단계는 우발적 무력충돌이 국지전으로 확대되었을 때 조선인민군의 전투행동을 규정하는 것이고, 제3단계는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확전되었을 때 조선인민군의 전투행동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2020년 6월 17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은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작성한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이 검토되고 있다고 하면서, 그 군사행동계획들 가운데 일부내용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가 언급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연대급 부대들과 화력구분대들을 금강산관광지구와 개성공업지구에 전개한다.

2) 민경초소들을 비무장지대에 다시 진출, 전개시킨다.

3) 전 전선에 배치된 포병부대들의 전투직일근무를 증강하고 전반적 전선에서 전선경계근무급수를 1호전투근무체계로 격상시키며 접경지역에서 정상적인 군사훈련들을 재개한다.

4) 전 전선에서 대남삐라살포에 유리한 지역(구역)들을 개방하고, 인민들의 대남전단살포투쟁을 군사적으로 보장하는 안전대책을 세운다. 

 

위에 열거한 네 가지 사항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 번째 사항이다. 세 번째 사항을 중시하는 까닭은, 그것이 2020년 7월 18일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회의 비공개회의에서 승인되고,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의 비준을 받은 대남군사행동계획 제1단계와 직접 결부된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 인용된, 접경지역에서 재개되는 정상적인 군사훈련들은 연례적인 군사훈련이 아니라 군사분계선에서 우발적 무력충돌이 일어날 것에 대비한 특별한 대남군사훈련이다. 

 

그런데 내가 이 글이 집필하고 있는 2020년 7월 하순 현재 조선인민군은 대남군사훈련을 진행하는 중이다. 미국의 반사회주의선전매체 <자유아시아방송> 2020년 7월 9일 보도에 따르면, 2020년 7월 1일부터 조선인민군은 대남군사훈련을 시작했고,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은 대남군사훈련에 참가한 조선인민군 전체부대에게 “적과 평화에 대한 사소한 환상도 가지지 말고 언제나 격동상태를 견지하자”라는 내용의 선동자료 제6호를 배포했다고 한다. 

 

조선인민군이 대남군사훈련을 시작한 날은 2020년 7월 1일이었고,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가 비공개회의에서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을 승인한 날은 2020년 7월 18일이었으므로, 현재 진행되는 대남군사훈련은 이번에 승인된 대남군사행동계획에 따른 특별한 군사훈련이 아니라 연례적인 군사훈련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때라도 김정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명령하면,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즉시 연례적인 군사훈련을 특별한 군사훈련으로 전환시켜 우발적 무력충돌에 대처할 대비태세를 갖출 것이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우발적 무력충돌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대남군사훈련계획을 이미 마련해놓았으므로, 연례적인 군사훈련을 특별한 군사훈련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인민군의 군사훈련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진 1> 

 

▲ <사진 1> 위의 사진은 2020년 7월 26일 오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에서진행된 '백두산기념권총' 수여식 장면이다. 조선에서 '위대한 조국해방전쟁' 67주년을 맞이하기 하루 전날, 김정은 당중앙위원회 위원장은 고위급 군사지휘관들에게'백두산기념권총'을 수여하였다. 이 권총은 조선에서 새로 개발생산한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이날 수여식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언론매체들은'백두산기념권총'을 수여받은 군사지휘관들이 "전군을 최정예화, 최강군화하는 데힘을 기울이며 철저한 림전태세에서 우리 당의 대업을 굳건히 받들어 나갈 불같은맹세를 다짐하였다"고 보도했다.  

 

1) <로동신문> 2014년 11월 10일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5년 1월 1일부터 2011년 12월 14일까지 군사부문을 총 2,490여 차례 현지지도했는데, 이를 연평균 회수로 계산하면 155차례다. 그런데 조선의 언론에 보도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군사부문 현지지도는 연평균 50여 차례가 채 되지 않는다. 이런 정황은 군사부문에 대한 비공개현지지도가 공개현지지도보다 3배 이상 많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군사부문 현지지도방침을 계승한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군사부문에 대한 비공개현지지도를 공개현지지도보다 3배 이상 더 많이 진행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2020년 7월 16일 남측 통일연구원이 ‘김정은 위원장의 2020년 상반기 공개활동 평가와 분석’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펴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상반기 6개월 동안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공개활동을 진행한 회수는 19차례였는데, 이것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당과 국가를 영도하기 시작한 2012년 1월 이후 가장 적은 회수라고 한다. 2013년 상반기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공개활동을 진행한 회수는 근 100차례나 되었고, 2017년부터 2019년까지를 보더라도 매 상반기에 공개활동을 진행한 회수가 평균 40~50차례씩이었는데, 올해 상반기에는 공개활동을 진행한 회수가 19차례밖에 되지 않았다. 또한 보고서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올해 상반기에 진행한 19차례 공개활동 중에서 52.6%에 이르는 10차례가 군사부문에 집중되었다고 한다. 정치부문 공개활동은 4차례, 사회부문 공개활동은 3차례, 경제부문 공개활동은 2차례를 진행했고, 대외부문 공개활동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지난 6개월 동안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공개현지지도를 거의 하지 않고, 군사부문에 대한 비공개현지지도를 집중적으로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2020년 상반기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선인민군의 군사훈련상태를 점검하는 비공개현지지도와 전략무기개발사업에 대한 비공개현지지도에 집중한 것으로 생각된다. 

 

2) <자유아시아방송> 2020년 6월 1일 보도에 따르면, 2020년 1월부터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새로운 훈련방침에 따라 훈련을 진행한다고 한다. 이전에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간부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간부들, 인민무력성 간부들로 구성된 훈련판정검열단이 전투부대들에 내려가 훈련상태를 판정하고 점수를 산출하여 우수, 양호, 합격, 낙제로 순위를 매겼지만, 올해부터는 훈련판정검열단이 전투훈련정황을 해당부대들에 불시에 통보하면, 통보를 받은 부대들이 실전환경에서 훈련하게 되는데, 어느 부대가 실전에 가장 근접한 전투훈련을 벌이는가를 기준으로 평가하여 부대별 순위는 물론이고 개별 군사지휘관들의 순위도 매기고, 훈련판정검열에서 뒤떨어진 부대의 지휘관은 엄중한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군은 대북군사훈련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 2020년 6월 10일 정경두 국방장관은 국방부에서 진행된 ‘2020년 전반기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전반기에 한미연합공군전투준비태세훈련과 한미미사일방어체계통합연동훈련 등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2020년 6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한국군은 조선인민군의 “육해공 도발시나리오 20여 개에 대한 방어적 차원의 군별, 제대별 대응태세를 집중 점검하고” 있다고 한다. 

 

2020년 7월 1일 주한미국군사령관 로벗 에이브럼스는 서울에서 개최된 한미동맹포럼에서 “전구급 연합훈련은 연합준비태세에 필수적”이라고 하면서 “강도 높은 훈련을 지상과 공중에서 해야 한다. 우리는 상시전투태세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상시전투태세를 유지하기 위한 대북군사훈련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한국군 전시작전통제권을 반환하기 위해 예정된 군사훈련, 다시 말해서 ‘미래연합사령부의 완전한 운용능력(FOC)’을 검증하는 군사훈련을 접어두고, 한미연합군의 전투준비태세를 점검하는 군사훈련에 집중해야 한다는 견해를 표명한 것이다. 

 

2020년 7월 21일 정경두 국방장관과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은 전화회담에서 2020년 8월 중순에 예정된 한미연합훈련의 목적을 놓고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정경두 국방장관은 한국군 전시작전통제권을 반환받기 위한 ‘미래연합사령부의 완전한 운용능력’을 검증하는 한미연합훈련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에스퍼 국방장관은 한미연합군의 전투준비태세를 점검하는 군사훈련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결론을 내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연합뉴스> 2020년 7월 26일 보도를 읽어보면, 한국 국방부와 미국 국방부는 정경두-에스퍼 전화회담 이후 후속협의를 진행하면서 절충점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미래연합사령부의 완전한 운용능력’을 검증하는 군사훈련을 진행하면서 한미연합군의 전투준비태세를 점검하는 군사훈련도 병행하는 식으로 절충한 것이다. 올해는 대유행전염병 때문에 군사훈련을 축소할 것이라고 했지만, 미래연합군사령부의 운용능력을 검증하는 군사훈련과 한미연합군의 전투준비태세를 점검하는 군사훈련은 모두 조선을 침공하기 위한 군사훈련이므로, 조선의 시각에서 보면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한미연합군이 지금처럼 긴장이 고조된 군사상황에 아랑곳하지 하지 않고, 2020년 8월 중순부터 조선을 침공하기 위한 대북군사훈련을 강행하면, 조선인민군은 그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인민군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연례적인 대남군사훈련을 접고, 무력충돌이 일어날 것에 대비한 대남군사훈련을 시작하는 것으로 대응할 것이다. 그로써 군사적 긴장상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면, 무력충돌위험이 극도로 증대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무력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 

 

 

2. 위험한 도발사격 뒤에는 음흉한 정치음모

 

무력충돌위험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불의의 사태는 2015년 8월에 실제로 일어났는데,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올해 8월에 또 다시 무력충돌위험이 최고조에 이를 수 있는 충분조건이 마련되었다. 이런 형편에서 2015년 8월에 일어난 무력충돌위험의 진상을 돌이켜볼 필요가 생긴다.  

 

2015년 8월 20일 한국군 자주포부대가 군사분계선 북쪽을 향해 연발로 포사격을 감행했다. 당시 한국군 합동참모본부는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고사총 1발과 견인포 3발을 남쪽으로 사격했다고 주장하면서, 한국군 자주포부대에게 대응사격을 명령했다. 그 명령에 따라, 한국군 자주포부대는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사격했다는 시각으로부터 1시간 11분이 지난 뒤에 군사분계선 북쪽으로 155mm 자주포를 연발로 사격했다. 당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가 발표한 긴급보도에 따르면, 한국군 자주포부대가 사격한 포탄은 36발이었는데, 그 가운데 6발은 조선인민군 542민경초소와 543민경초소 부근에 떨어졌고, 15발은 조선인민군 250민경초소와 251민경초소 부근에 떨어졌다고 한다. 나머지 15발은 어디에 떨어졌는지 탄착점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한미국군사령부 특별조사반이 8월 20일의 포격사건진상을 조사했더니,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사격한 물증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국 국방부는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고사총 1발과 견인포 3발을 남쪽으로 사격했다고 주장했지만, 그 포탄들이 떨어졌다는 탄착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한국군 감시초소의 병사는 폭음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고, 탄착점에서 먼 곳에 있는 다른 한국군 감시초소의 병사는 “폭음을 들은 것 같기도 하다”고 아리송하게 말했다. 또한 한국군 최전방초소에 설치된, 열영상관측장비(TOD)에 촬영된 영상자료에는 포연이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한국 국방부가 탄착점으로 지목한 곳에서 주한미국군사령부 특별조사반이 정밀조사를 진행했지만, 아무런 물증도 찾지 못했다. 

 

이처럼 조선인민군 포병부대는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사격하지 않았는데도, 한국군 합참본부는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사격했다고 우기면서 자주포부대에게 대응사격을 명령했고, 그 명령을 받은 한국군 자주포부대는 군사분계선 북쪽으로 자주포 36발을 연발로 사격했던 것이다. 한국군 자주포부대가 군사분계선 북쪽으로 연발사격을 감행한 것은 무력충돌을 불러올 도발행위였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한국군 합동참모본부는 왜 무력충돌을 불러올 도발사격을 명령한 것일까? 이 의문을 풀려면, 당시 군사분계선 최전방에 주둔하는 한국군 자주포부대가 조선인민군 포병부대의 사격에 대응한다고 하면서 도발사격을 감행하기까지 1시간 11분이 걸렸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시간 11분은 국방장관이 대통령에게 도발사격을 건의하고, 청와대에서 그 건의를 검토하고, 최종적으로 대통령의 지시를 받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다시 말해서, 2015년 8월 20일에 일어난 한국군 자주포부대의 도발사격은 박근혜의 지시에 따른 행동이었던 것이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17년 8월 하순 한미연합군사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에 참가한 한국군 해병대 전투원들이 상륙전을 훈련하는 장면이다. 한미연합군은 2015년8월에도 '을지프리덤가디언'이라는 간판을 내건 북침전쟁연습을 감행했다. 미국군30,000명과 한국군 50,000명이 참가한 대규모 북침전쟁연습이었다. 그런데 2015년8월 북침전쟁연습으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시점에 한국군 자주포부대가 군사분계선 북쪽으로 자주포를 사격하는 뜻밖의 사태가 일어났다. 도발사격은 이미 조성된군사적 긴장을 걷잡을 수 없이 격화시켰고, 한반도 정세를 무력충돌위험 속에 밀어넣었다. 대북적대감에 사로잡힌 박근혜는 한미연합군이 대규모 전쟁연습을 진행하는 중에 한국군 자주포부대가 도발사격을 감행하더라도 조선인민군이 물리적으로대응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국방장관에게 도발사격을 지시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의문은 더 커진다. 박근혜는 왜 무력충돌을 불러올 도발사격을 국방장관에게 지시한 것일까? 이 의문을 푸는 열쇠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1) 한국군 자주포부대가 포격도발을 감행한 2015년 8월 20일, 한미연합군은 ‘을지프리덤가디언’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북침전쟁연습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한미연합군은 2015년 8월 17일부터 28일까지 미국군 30,000명과 한국군 50,000명이 참가한 ‘을지프리덤가디언’을 진행했다. 대북적대감에 사로잡힌 박근혜는 한미연합군이 대규모 전쟁연습을 진행하는 중에 한국군 자주포부대가 포격도발을 감행하더라도 조선인민군이 물리적으로 대응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국방장관에게 도발사격을 지시했던 것이다. 

 

2) 2015년 6월 주한미국군사령관과 한국군 합참의장은 새로운 북침전쟁계획인 ‘작전계획 5015’에 서명했다. ‘작전계획 5015’는 조선인민군의 대남공격징후가 나타나면 30분 안에 조선의 전략거점들을 선제타격으로 파괴하고, 미국군 특수부대와 한국군 특수부대가 합동작전으로 조선에 침투하여 수뇌부를 제거하는 이른바 ‘참수작전’을 전개하면서 조선의 대량파괴무기들을 탈취한다는 북침전쟁계획이다. 이런 ‘참수작전계획’을 보고받은 박근혜는 한미연합군이 ‘참수작전계획’을 실행하여 조선의 수뇌부를 제거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무력충돌이 일어나더라도 한미연합군이 이길 것으로 예상하고 국방장관에게 도발사격을 지시한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미국 중앙정보국의 실패한 대북비밀공작을 대체하기 위해 한미연합군의 ‘참수작전계획’이 수립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장성택 일당과 은밀히 연계하여 조선의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비밀공작계획을 추진했었는데, 중앙정보국과 장성택 일당의 연결고리는 당시 중국 마카오에 거주하던 김정남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의 대북비밀공작은 김정남과 장성택으로 연결된 역모집단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조선의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것이었으나, 그들의 정권전복음모는 조선의 국가안전보위부에게 발각되었다. 장성택 일당은 2013년 12월에 제거되었고, 김정남도 2017년 2월에 제거되었다. 조선의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미국 중앙정보국의 비밀공작이 완전히 파탄되자, 미국 국방부는 조선의 수뇌부를 제거하려는 ‘참수작전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3. 2015년 8월 20일 ‘남조선해방전쟁계획’이 비준되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조선의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비밀공작을 추진하다 실패했고, 미국 국방부는 정권전복음모보다 더 악질적인 ‘참수작전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선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조선의 대응은 무력응징이었다. 미국의 전쟁기획자들이 ‘참수작전계획’을 거의 완성해가던 2015년 2월 22일 평양에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가 소집되었다.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은 그날 확대회의에서 진행한 “력사적인 연설”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을 관철하기 위한 군사전략”을 제시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을 관철하기 위한 군사전략은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을 통일하라는 유훈”을 관철하기 위한 군사전략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남조선해방전쟁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은 2015년 2월 22일 확대회의 연설에서 “임의의 시각에 최고사령부의 전략적 기도를 실현할 수 있게 기구체계를 개편하기 위한 방향과 방도”를 제시했다고 한다. 이것은 김정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 임의의 시각에 총공격을 명령하면 조선인민군은 즉시 ‘남조선해방전쟁’을 개시할 수 있도록 조선인민군의 지휘통제체계가 개편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은 2015년 2월 22일 확대회의 연설에서 “앞으로 미제와 반드시 치르게 될 전쟁수행방식과 그에 따르는 작전전술적 문제들을 밝혀주시고 인민군대의 정치, 군사, 후방, 보위사업을 비롯한 모든 사업을 전시환경에 접근시켜 진행할 데 대하여 강조”했다. 이것은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이 ‘남조선해방전쟁’을 수행하는 방식과 그에 따른 작전전술적 문제들을 제시했고, 조선인민군에게 결전준비를 명령했음을 의미한다. 

 

<중앙일보> 2015년 1월 8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남조선해방전쟁’을 7일 안에 끝내는 속전속결작전계획을 비준했고, 2015년을 ‘조국통일대전의 해’로 선포했다고 한다. <신동아> 2020년 1월호에는 한국 국방부가 2015년에 작성하여 박근혜의 청와대에게 보고한 대외비 문건의 내용이 실렸는데, 그 대외비 문건에 따르면, 2015년 당시 조선인민군은 “새롭게 마련한 공격전술에 따라 주요부대들의 훈련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은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명령이 하달되면 즉각 ‘남조선해방전쟁’을 개시할 결전준비를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그처럼 긴장된 시간이 흐르고 있었던 2015년 8월 20일 오후 5시 4분 한국군 자주포부대가 군사분계선 북쪽으로 도발사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도발사격에 관한 보고를 받은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은 당일 오후 10시 당중앙군사위원회 비상확대회의를 긴급히 소집했다. 비상확대회의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2015년 8월 20일 밤 김정은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이 한국군의 도발사격으로 격화된 위기상황에서 당중앙군사위원회 비상확대회의를진행하는 장면이다. 그날 당중앙군사위원회 비상확대회의에서는 '남조선해방전쟁'을 위한 공격작전계획을 비준했고,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준전시상태를 선포했다.그에 따라 조선의 정규무력과 민간무력은 완전무장한 전시상태에 돌입했으며,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사상 처음으로 전투수단과 군사장비를 총동원한 공격태세를갖추었다. 2015년 8월 무력충돌위기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1) “8월 20일 오후 전선 중서부지역에서 발생한 적들의 군사적 도발행위의 경위와 진상, 전반적 적정에 대한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정찰총국 보고에 대한 청취가 있었다.”

 

2) “조선인민군 전선대련합부대들의 작전진입준비실태를 점검하고 적들의 전쟁도발책동을 진압하기 위한 정치군사적 대응계획이 토의되었”고, “전 전선에서 일제히 반타격, 반공격에로 이행하기 위한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 공격작전계획이 검토, 비준되었다.”

 

3) “남조선괴뢰국방부가 48시간 안으로 대북심리전방송을 중지하고 모든 심리전수단들을 전면 철거하지 않으면 강력한 군사적 행동으로 넘어간다는 최후통첩을 보낸 조선인민군 총참모부의 결심을 승인하였다.”

 

4)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8월 21일 17시부터 조선인민군 전선대련합부대들이 불시에 작전에 진입할 수 있도록 완전무장한 전시상태로 이전하고, 전선지대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한다는 명령을 하달했다.” 

 

5) “적들이 48시간 안에 심리모략방송을 중지하지 않는 경우 심리전수단들을 격파사격하기 위한 군사적 행동과 있을 수 있는 적들의 반작용을 진압하기 위한 지역의 군사작전을 지휘할 지휘관들이 임명되여 해당전선으로 급파되었다.” <조선일보> 2015년 8월 21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연락군관들이 전투부대들에 급파되었는데, 연락군관들은 전투원들에게 “제국주의침략자들을 몰아내고 남반부를 해방하는 정의의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지금부터 모든 부대의 지휘는 최고사령부에서 파견된 연락군관들이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정황을 보면,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전시상황에서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직접적인 지휘통제에 따라 작전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만대군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강력한 단일지휘통제체계가 확립된 것이다. 

 

6) “전선지대에 준전시상태가 선포된 데 맞게 해당 지역 안의 당 및 정권기관, 근로단체, 안전보위, 인민보안, 사법검찰기관,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들을 비롯한 모든 단위들을 준전시체제로 전환시키기 위한 대책적 문제들이 토의되었다.” <조선일보> 2015년 8월 21일 보도에 따르면, 8월 21일 오후 5시부터 로농적위대(지금은 로농적위군)와 붉은청년근위대는 실탄을 지급받고 철갑모와 위장막을 착용하는 등 완전무장을 갖추고 진지로 이동하여 전투태세에 돌입했다고 한다. 

 

7) “적들의 로골적이고 불의적인 침략으로 인한 현 사태의 진상을 낱낱이 까밝히고 폭로하기 위한 대외부문일군들의 임무와 과업이 제시되었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조선에 주재하는 각국 외교대표들, 국제기구 대표들, 무관들, 대사관 성원들, 외신기자들에게 무력충돌위기사태에 관해 통보하는 긴급모임이 2015년 8월 21일 인민문화궁전에서 진행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겸 정찰총국장인 김영철 육군대장이 전쟁위기사태와 한국군의 “파렴치한 모략소동의 진상”에 대해 통보했다고 한다. <로동신문> 편집국은 종군기자들로 구성된 종군보도반을 전선지대에 급파했다.

 

 

4. 2015년 8월 21일 전면공격태세 갖춘 조선인민군

 

2015년 8월 21일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조선인민군에게 전투동원명령을 하달하자, 전군이 완전무장을 하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면서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2015년 8월 당시 남측 언론매체들이 조선인민군의 공격태세에 관한 보도한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무인정찰기의 공중정찰

조선인민군 무인정찰기는 8월 22일 오전 11시 59분경 강원도 인제군 동부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한국군 일반전초(GOP) 상공까지 남하했는데, 그날부터 8월 24일까지 사흘 동안 매일 1~2차례씩 동부전선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면서 공중정찰을 했다. 한국군의 저고도방공레이더와 중앙방공통제소(MCRC) 레이더는 조선인민군 무인정찰기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희미한 항적을 30초 이상 식별하지 못했다. (<조선일보> 2015년 8월 25일 보도) 

 

2017년 3월 28일 통일연구원 소속 연구자는 보고서에서 조선인민군이 각종 무인항공기 1,000여 대를 보유하였다고 밝혔다. 무인항공기 1,000여 대 가운데 무인정찰기는 500여 대로 추산된다. 조선인민군 정찰총국이 운용하는 무인정찰기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제트엔진을 장착한 스텔스무인전략정찰공격기 ‘방현-5’이다. 이 스텔스무인전략정찰공격기는 한반도 전역을 정찰할 수 있고, 지상목표물을 공격할 수도 있다. 스텔스기능을 지닌 무인정찰기를 그처럼 많이 운용하는 조선인민군 정찰총국이 2015년 8월 당시 조선인민군 무인정찰기를 동부전선 상공에만 보낸 것이 아니라, 중부전선과 서부전선에도 보내 공중정찰을 했는데, 한국국 방공레이더망이 포착하지 못한 것이다. 

 

2) 포병부대들의 사격준비

조선인민군 포병부대들은 갱도진지에 들어있던 각종 포들을 즉시 사격할 수 있는 사격진지로 이동, 배치했다. (<조선일보> 2015년 8월 22일 보도) 조선인민군 포병부대는 전 전선에서 포병화력을 2배 넘게 증강했다. (<신동아> 2020년 1월호 보도) 황해북도 신계군에 주둔하는 620포병군단이 전선지대로 남하배치되었다. (<문화일보> 2015년 8월 26일 보도) 

 

조선인민군의 포화력은 엄청나다. 미국측 자료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은 방사포 6,000문, 자행포 3,200문, 견인포 3,500문, 박격포를 7,500문 보유했는데, 그 중에서 70%에 이르는 23,000문이 전방지대에 전진배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인민군 포병부대들이 전방에 배치된 23,000문의 포를 평균 1분에 1발씩만 사격해도, 개전시각부터 30분 동안 69만발을 사격하게 된다. 조선인민군 포병부대들의 압도적인 화력타격은 한국군 방어선을 무너뜨릴 수 있다. 

 

3) 미사일부대들의 발사준비

조선인민군 미사일부대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각종 미사일을 발사할 태세를 갖추었다. (<연합뉴스> 2015년 8월 24일 보도) 

조선인민군 포병부대들은 압도적인 화력타격이 전방에 있는 한국군 방어선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조선인민군 미사일부대들의 압도적인 화력타격은 후방에 있는 한국군 전략거점들을 파괴할 수 있다. 남측 언론보도에 나온 추산에 따르면, 2020년 7월 현재 조선인민군이 실전배치한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은 약 2,700발이다. 조선인민군이 2019년부터 실전배치하고 있는 저고도비행활공도약미사일을 한미연합군의 미사일방어망을 뚫고 들어가 족집게식 정밀타격으로 한국군 전략거점들을 파괴할 수 있다.    

  

4) 전투기들의 남하배치

조선인민군 전투기들이 이륙태세를 갖췄고, 후방지역에 있는 비행기지에서 이륙한 전투기들이 전방지역에 있는 비행기지로 남하배치되었다. (<연합뉴스> 2015년 8월 24일 보도) 미국측 자료와 남측 자료를 종합하여 추산하면, 조선인민군 항공군은 추격기, 습격기, 지상공격기를 약 800대를 실전배치했다. 조선인민군 항공군이 실전배치한 약 800대의 각종 작전기들 가운데 상당수는 작전수명을 넘긴 노후기종이므로 실전에서 쓸모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군사전문가들이 있지만,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단견이다. 조선인민군 항공군은 미그-29를 조립생산하는 능력을 가졌으므로, 노후기종의 각종 부품들을 자체로 생산하여 작전기의 성능을 최고상태로 유지할 뿐 아니라, 작전기를 한반도 작전환경에 맞게 개조하여 최적화된 성능을 발휘한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2020년 4월 1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서부지구 항공 및 반항공사단 관하 추격습격기련대를 시찰하는 장면이다. 사진 속에 보이는 기종은 미그-29이다. 그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추격습격기련대를 시찰하는 중에 최우수비행사들과 담화했고, 그들이 진행한 공중전투훈련을 참관했다. 전투비행사들은 평소에 연마한 전투비행술을 하늘에 펼쳤다. 2015년 8월 무력충돌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조선인민군 전투비행사들은 후방지역에 있는 전투기들을 몰고 전방지역에 있는 비행기지로 남하했었다.  

 

5) 공격헬기의 출동

조선인민군 소속 Mi-2 공격헬기가 서해 상공에 나타나 대남근접비행을 했다. (<조선일보> 2015년 8월 25일 보도) 조선인민군은 소련산 Mi-2 헬기를 모방한 혁신-2 공격헬기를 생산하여 약 140대를 실전배치했다. H-500 경무장헬기 80대도 실전배치했다. 혁신-2 공격헬기가 서해 상공에 나타났다는 말은 서해 백령도 인근 상공에 나타났다는 뜻이다. 백령도에서 아주 가까운 황해남도 룡연군 장산반도에는 2012년 초에 완공된 고암포기지가 있다. 고암포기지에는 조선인민군 특수작전군 소속 공기부양정 70여 척이 배치되었다. 특수작전군 전투원들은 그 공기부양정을 타고 남측 후방으로 고속침투하게 되는데, 한국군 공격헬기로부터 로켓포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공기부양정들은 공격헬기의 엄호를 받으면서 남측 후방으로 침투할 수 있다.  

 

6) 특수작전군의 기습공격준비

평안북도 철산군 기지에 있던 공기부양정 10여 척이 황해남도 룡연군 고암포기지로 남하배치되었다. (<연합뉴스> 2015년 8월 24일 보도) 2012년 초에 완공된 고암포기지 격납고들에는 공기부양정 70여 척이 배치되었다. 황해남도 룡연군보다 훨씬 더 남쪽에 있는 황해남도 옹진군 련봉리에 공기부양정기지가 2019년에 새로 건설되었다. 련봉리기지에는 공기부양정 54척이 배치되었다. 조선에서 생산하는 신형 공기부양정은 특수작전군 전투원 60명을 태우고 바다에서 시속 110km로 항해할 수 있다. 신형 공기부양정 54척은 특수작전군 전투원 3,240명을 남측 후방 해안에 기습적으로 상륙시킬 수 있다. 2015년 8월 당시 한국군 정찰기들은 조선인민군 소속 공기부양정들이 남하배치된 정황만 포착했지만, 조선인민군 특수작전군은 해상에서 공기부양정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공중과 지상과 지하에서 다양한 침투수단들을 사용하여 남측에 침투하게 된다. 조선인민군 특수작전군은 2017년 4월 15일 평양에서 진행된 태양절 경축 군사행진에서 그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조선인민군 특수작전군은 육군, 해군, 항공군 및 반항공군, 전략군에 이어 제5군종으로 창설되었다. 특수작전군 병력수는 10만명으로 추산된다. 조선인민군 특수작전군 10만명이 공중, 해상, 수상, 지하에서 다종다양한 침투수단들을 사용하여 남측 후방 곳곳에 침투하여 불시에 동시다발로 기습공격을 시작하면 한국군의 후방 방어선은 무너지고 수많은 전략거점들이 순식간에 점령될 것이다.  

  

7) 대연합함대의 출동

조선인민군 해군 잠수함 50여 척이 동시에 출항하여 “수상전투단의 선두에 전개”되었는데, 수상전투단은 “고속정⟶미사일고속정⟶호위함 순서로” 편성되었다. (<문화일보> 2015년 8월 26일 보도) 그처럼 많은 잠수함들을 동시에 출동시킨 것은 “선진국보다도 높은 가동률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되었다”고 한다. (<조선일보> 2015년 8월 27일 보도) 남측 언론매체들은 수상전투단이라고 불렀지만, 대연합함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015년 8월 무력충돌위기사태 중에 사상 처음으로 자기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 조선인민군 대연합함대는 잠수함, 방사포고속정, 어뢰고속정, 미사일고속정, 초계함, 호위함으로 편성된 강력한 해군무력이다. 그런데 조선인민군 대연합함대의 진짜 모습은 2015년 10월 5일 서해 백령도에서 북쪽으로 약 30km 떨어진 남포 앞바다에서 진행한 해상기동훈련에서 드러났다. 서방측 민간위성이 그 해상기동훈련을 촬영한 위성사진자료에 나타난 조선인민군 대연합함대는 총 87척으로 편성되었다. 무인쾌속정 32척, 방사포고속정 5척, 경비정 5척, 스텔스고속공격정 1척, 초계정 1척, 어뢰고속정 13척, 미사일고속정 5척, 잠수함 1척, 잠수정 8척, 상륙정 5척, 공기부양정 10척, 무인타격기발진선으로 편성된 것이다. 이런 놀라운 정황은 조선인민군 대연합함대가 한국군 해상방어선을 돌파하고, 남측 후방 해안에 특수작전군 전투원들을 상륙시킬 목적으로 편성되었음을 말해준다.   

 

위에 열거한 것처럼, 무력충돌위험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2015년 8월 조선인민군 각급 전투부대들은 임의의 시각에 대남공격을 개시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최고사령관의 총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력충돌위험을 직감한 미국은 한미연합군 북침전쟁연습인 ‘을지프리덤가디언’을 잠시 중지시키는 이변을 연출하면서, 박근혜의 청와대에게 무력충돌위험을 해소할 대북협상을 시작하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되어 2015년 8월 22일부터 판문점에서 무력충돌위험을 해소하기 위한 남북고위급회담이 시작되었다. 남북고위급회담은 8월 25일 오전 0시 55분에 공동보도문을 채택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남과 북의 대표들이 2박3일 동안 장시간 협상을 벌였는데도, 합의문을 채택하지 못하고 공동보도문을 채택한 것은 무력충돌위기가 해소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2015년 8월 박근혜 정부가 대북확성기방송을 재개한 사태로 촉발되었던 무력충돌위기는 5년이 지난 올해 문재인 정부가 악질탈북자단체들의 대북전단살포를 묵인한 사태로 다시 재발되었다. 5년 전과 마찬가지로, 무력충돌위험이 고조될 8월을 앞두고 있다.

2020/07/21

최고로 중대한 극비안건 결정한 비공개회의

[한호석의 개벽예감](404)
자주시보 2020년 07월 20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날로 심각해지는 한반도 주변정세
2. 최고로 중대한 극비안건을 토의, 결정한 비공개회의
3. 조선의 대남군사행동과 중국의 대만해방작전


1. 날로 심각해지는 한반도 주변정세

2020년 6월 23일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회의 예비회의가 화상회의로 진행되었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예비회의에서는 최근 조성된 정세가 평가되었고,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제출한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이 보류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언론보도기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예비회의에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는 조성된 최근 정세를 평가하고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당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회의에 제기한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을 보류하였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제출한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은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승인되어야 하므로, 6월 23일에 화상회의로 진행된 예비회의에서 그 계획들이 보류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비회의에서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을 보류하기로 결정하기 직전에 최근 조성된 정세에 대한 평가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최근 정세에 대한 평가가 대남군사행동계획들에 대한 보류결정을 이끌어낸 것이다. 

궁금증이 생긴다. 최근 조성된 정세가 얼마나 중대하고 심각하기에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예비회의에서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을 보류하였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가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을 보류할 만큼 중대하고 심각한 최근 정세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누구나 아는 것처럼, 최근 남북대화가 재개될 만한 정세가 조성되지 않았고, 조미협상이 재개될 만한 정세가 조성된 것도 아니다. 남북관계와 조미관계는 전혀 변화되지 않았고, 지난해부터 계속 경색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명백하게도, 최근 한반도 정세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지난 6월 23일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예비회의에서는 최근 조성된 정세를 평가하고 대남군사행동계획을 보류했으니, 궁금증이 더욱 커질 만하다. 최근 한반도 정세에서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지난 6월 23일 예비회의에서 최근 조성된 정세를 평가하고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을 보류한 것은, 그 예비회의에서 한반도 정세가 아니라 한반도 주변정세를 평가하고 보류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가 대남군사행동계획을 보류할 만큼 한반도 주변에 조성된 심각하고 중대한 정세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누구나 직감할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날로 악화되어 이제는 무력충돌이 거론될 만큼 악화되어버린 중국과 미국의 관계다. 한반도 주변에 조성된 중미대립관계는 그 두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 정세와 세계 정세를 변화시키는 중대한 요인이다. 요즈음 날로 악화되는 중미대립관계에 대해 살펴보자.

지난 시기 무역부문, 금융부문, 기술공학부문 등에서 경쟁하거나 갈등하던 중미관계는, 홍콩 언론매체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2020년 5월 21일 보도에서 드러난 것처럼, 공식 외교통로가 완전히 차단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비공식 외교통로마저 단절된 적대적 대립관계로 전환되었다. 

그런데 2019년 6월까지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에게 적대감을 느끼지 않았다.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존 볼턴이 2020년 6월에 펴낸 회고록에 따르면, 중국 텐안먼사건 30주년을 맞았던 2019년 6월 4일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공산당의 텐안먼사건 유혈진압을 비난하는 백악관 성명을 발표되지 않도록 막았으며, 2019년 6월 9일 홍콩에서 범인송환법 제정을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을 때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개입하고 싶지 않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인권문제가 있지 않느냐”고 하면서 내정불간섭원칙을 지켰고, 2019년 6월 29일 일본 오사까에서 개최된 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 참석한 기회에 시진핑 주석을 만나 정상회담을 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11월 대통령선거에서 자기의 재선을 도와달라고 청탁하면서 시진핑 주석을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고 추켜올렸다는 것이다. 

▲ <사진 1> 위의 사진은 2020년 5월 26일 미국 텍사스주에 있는 데이쓰공군기지에서이륙한 미국 공군 소속 B-1B 전략핵폭격기 2대가 공중급유를 받아가며 태평양 상공을가로질러 남중국해로 날아가는 장면이다. 요즈음 미국은 거의 매일 같이 전략핵폭격기와 항모타격단들을 동원하는 전례 없는 군사위협으로 중국을 압박, 자극하고 있다.이런 악조건에서 중국은 미국의 군사위협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전략핵폭격기와 항모전투단을 서태평양으로 출동시켜 대응공세를 펼치고 있다. 중국과 미국의 대립관계가 그처럼 격화된 배경에는 대만문제가 놓여있다. 대만의 국가분렬세력이 대만을 중국에서 분리시키려는 책동을 광란적으로 벌이는 와중에 대만의 국가분렬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려는 중국의 대만해방작전이 가시화되었으며, 중국의 대만해방작전을 가로막으려는 미국의 군사행동이 날로 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2020년에 들어와 중국을 대하는 미국의 태도가 싹 달라졌다. 미국은 중국에게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군사위협과 경제제재로 중국을 극심하게 압박, 자극했다. 이를테면, 미국 국방장관 마크 에스퍼는 2020년 7월 7일 국가방위전략을 수행하는 데서 미국군이 2020년 말까지 실행해야 할 임무와 목표를 명시한 10대 지침을 전군에 하달했는데, 10대 지침의 초점은 중국에 대한 군사위협에 맞춰져 있다. 미국군에 하달된 10대 지침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1) 중국과 로씨야에 대한 미국의 군사계획들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수정보완하고, 승인할 것.
2) 즉시대응무력, 급변사태대응무력, 역동적 군속부대는 준비태세개념을 향상시킬 것.
3) 국가방위전략에 따라 미국군을 재배속하고, 재조정하고, 재배치할 것.
4) 고도의 준비태세를 계속 유지할 것.
5) 동맹국들을 강화하고, 우호관계를 맺기 위한 조율된 계획을 수립할 것.
6) 미국 국방부를 개혁하고, 정치문제를 다루는 언론계를 관리할 것.
7) 미국 국방부 산하 중국부(Department on China)에 관심을 집중할 것.
8) 미국군을 현대화하고, 판세를 뒤집을 군사과학기술에 투자할 것.
9) 현실적인 전쟁모의실험, 군사훈련 및 훈련계획을 확립할 것.
10) 현대적인 전투개념과 전쟁교리를 개발할 것. 

요즈음 미국군은 위에 열거된 10대 지침에 따라 거의 매일 같이 전략핵폭격기들과 항모전투단들을 동원하는 전례 없는 군사위협으로 중국을 압박, 자극하고 있다. 이런 악조건에서 중국은 미국의 군사위협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대응공세를 펼치고 있다. 중국도 전략핵폭격기들과 항모전투단을 서태평양으로 출동시켜 반격능력을 시위하는 것이다. 

영국의 통신사 <로이터즈> 2020년 5월 5일 보도에 따르면, 중국국가안전부는 2020년 4월 말 중국 최고지도부에 제출한 내부보고서에서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서구식 민주주의체제에 대한 경제적, 안보적 위협이자 도전으로 인식하면서 중국공산당에 대한 대중적 신뢰를 깎아내리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미국의 반중정서에 의해 중미갈등이 증폭되어 무력충돌 같은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중국은 무력충돌에 대비해야 한다고 건의했다는 것이다. 중국국가안전부가 무력충돌에 대비해야 한다는 건의를 중국 최고지도부에 제출하기 전에, 중국인민해방군은 무력충돌에 대비하는 군사준비태세를 오래 전부터 갖추고 있다. 

지금 중미대립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들은 대만문제, 홍콩문제, 남중국해문제, 신장-위구르문제 등 여러 가지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심각하고, 가장 중대한 요인은 대만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대만의 국가분렬세력이 대만을 중국에서 분리시키려는 책동을 광란적으로 벌이는 와중에 대만의 국가분렬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려는 중국의 대만해방작전이 가시화되었으며, 중국의 대만해방작전을 가로막으려는 미국의 군사행동이 날로 격화되고 있다. 이처럼 심각하고 중대한 한반도 주변정세를 바라보는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제출한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을 신중히 검토하기 위해 일단 보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 최고로 중대한 극비안건을 토의, 결정한 비공개회의

김정은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은 당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확대회의를 소집했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2020년 7월 18일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회의 확대회의 및 비공개회의가 조선로동당 본부청사에 진행되었다고 한다.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이 지도한 확대회의에는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위원들, 조선인민군 고위급 지휘관들 및 고위급 정치위원들, 총정치국, 총참모부, 인민무력성 지휘성원들과 각 무력기관의 지휘성원들, 당중앙위원회 주요부서 부부장들이 참가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중대보도가 나왔다. 확대회의에 이어 곧바로 비공개회의가 진행되었다는 보도였다.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가 비공개회의를 진행했다는 보도는 처음 듣는 놀라운 보도였다.  

비공개회의는 당중앙군사위원회 작전회의실로 보이는 별도의 장소에서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의 주재로 진행되었는데, 15명 위원들만 그 회의에 참가했다. 비공개회의에 참가한 15명 위원들 중에서 남측 언론매체가 북측 언론의 보도사진을 보고 신원을 확인한 참가자들은 리병철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오수용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최부일 당중앙위원회 군사부장, 김수길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박정천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조경철 조선인민군 보위국장, 정경택 국가보위상, 조용원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김정길 조선인민군 상장 (군직은 알려지지 않음) 등 9명이다. 남측에서 알지 못하는 나머지 6명 위원들도 국방부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고위급 간부들이다.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이 15명 핵심위원들만 참가하는 비공개회의를 소집한 것은, 100여 명이 참가한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토의, 결정할 수 없을 만큼 최고로 중대한 극비안건들을 비공개회의에서 토의, 결정했음을 의미한다. 그날 비공개회의에서 토의, 결정된 최고로 중대한 극비안건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비공개회의 소식을 알려준 조선의 언론보도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정보가 들어있다. <사진 2> 


▲ <사진 2> 위쪽 사진은 2020년 7월 18일 조선로동당 본부청사에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회의 확대회의가 진행되는 장면이고, 아래쪽 사진은 확대회의직후 당중앙군사위원회 작전회의실로 보이는 별도의 장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회의 비공개회의가 진행되는 장면이다.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위원장의 주재로 진행된 비공개회의에는 15명 핵심위원들만 참가했다.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이 15명 핵심위원들만 참가하는 비공개회의를 소집한 것은, 100여명이 참가한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토의, 결정할 수 없을 만큼 최고로 중대한 극비안건들을 토의, 결정했음을 의미한다.  

1)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7월 18일 비공개회의에서는 “조선반도 주변에 조성된 군사정세”가 토의되었다고 한다. 조선반도와 그 주변에 조성된 군사정세가 아니라, 조선반도 주변에 조성된 군사정세를 토의한 것이다. 조선반도 주변에 조성된 군사정세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반도 주변에 조성된 군사정세는, 대만의 국가분렬세력이 국가분렬책동을 더욱 광란적으로 벌이는 복잡한 상황에서 그들의 국가분렬책동을 제압하려는 중국의 대만해방작전이 가시화되었고, 중국의 대만해방작전을 가로막으려는 미국의 군사행동이 날로 격화되고 있는 군사정세를 뜻한다. 만일 한반도 주변의 군사정세가 더욱 격화되어 중국인민해방군이 대만해방작전을 전개하면, 조선인민군도 대남군사행동을 전개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만해방작전이 임박했으면, 조선인민군의 대남군사행동도 임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지난 7월 18일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는 조선인민군의 대남군사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중국-미국-대만의 3각 관계의 군사정세를 비공개로 토의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7월 18일 비공개회의에서는 “나라의 전쟁억제력을 더한층 강화하기 위한 핵심문제들”이 토의, 결정되었다고 한다. 핵전쟁억제력이 아니라 전쟁억제력이라는 용어를 썼는데, 이것은 핵무력이 아니라 비핵무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중대한 의제들이 토의, 결정되었다는 뜻이다. 조선인민군의 핵무력이 미국군을 상대하는 것이라면, 조선인민군의 비핵무력은 한국군을 상대하는 것이다. 조선의 핵무기는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는 무기이지, 동족을 해치는 무기가 아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7월 18일 비공개회의에서 조선인민군의 비핵무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중대한 의제들이 토의, 결정된 것은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에 제출했으나 지난 6월 23일 예비회의에서 보류되었던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이 이번 비공개회의에서 토의, 결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은 7월 18일 비공개회의에서 “토의, 결정된 핵심과업들을 집행시키기 위한 여러 명령서들에 친필서명”했다고 한다.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이 친필서명한 여러 명령서들 가운데는, 위에서 언급한 조선인민군 총참모부의 대남군사행동계획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월 23일에 진행된 당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회의 예비회의에서 일단 보류된 조선인민군 총참모부의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이 이번 비공개회의에서 토의, 의결되었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의 최종 결재까지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조선인민군이 결정적인 시기에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을 실행에 옮기는 일만 남았다. 조선인민군이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을 실행에 옮길 결정적인 시기는 언제인가?   


3. 조선의 대남군사행동과 중국의 대만해방작전

조선의 언론보도를 읽어보면,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작성한 대남군사행동계획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이라고 복수로 표기된 것이다. 이런 사정은 대남군사행동계획이 단계별로, 아주 세밀하게 작성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번에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작전계획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군사행동계획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썼다. 작전계획(Operation Plan)이라는 용어는 조선인민군의 적인 미국군이 쓰는 용어이므로, 그것을 피해서 군사행동계획(Military Action Plan)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쓴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2012년 8월 25일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은 동부전선에서 소집한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작성, 제출한 작전계획에 최종 수표했었다. 그 작전계획은 대남작전계획이 아니라 대미작전계획이었다. 그런데 지난 7월 18일 비공개회의에서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이 최종 수표한 군사행동계획은 대미군사행동계획이 아니라 대남군사행동계획이다. 대미군사행동계획은 핵무기와 비핵무기를 모두 사용하는 전쟁계획이고, 대남군사행동계획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비핵무기만 사용하는 전쟁계획이다.    

대남군사행동계획이 몇 단계로 작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세 단계 군사행동계획인 것으로 추정된다. 교전상대의 저항정도에 따라 한 단계씩 높여가는 식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대남군사행동계획 제1단계는 군사분계선에서 우발적 무력충돌이 일어났을 때 조선인민군의 전투행동을 규정하는 것이고, 제2단계는 우발적 무력충돌이 국지전으로 확대되었을 때 조선인민군의 전투행동을 규정하는 것이고, 제3단계는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확전되었을 때 조선인민군의 전투행동을 규정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작성한 대남군사행동계획의 목표는 조국통일이다. 조선에서 쓰이는 용어를 빌리면, 그것은 조국통일대전을 수행하기 위한 대남군사행동계획인 것이다. 

조선의 대남군사행동과 중국의 대만해방작전은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의 대남군사행동과 중국의 대만해방작전이 동시다발로 전개되어야 조선과 중국의 공동의 적인 미국의 전투력을 분산, 약화시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70년 전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조선의 서울해방작전과 중국이 대만해방작전이 동시에 전개되었다면, 미국의 전투력은 분산,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70년 전 공군력과 해군력을 갖지 못했던 중국인민해방군은 6.25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대만해협을 가로막은 미국 해군 제7함대 소속 군함 10여 척의 차단선을 돌파할 수 없었다. 

그러나 70년이 지난 오늘 중국인민해방군은 미국이 항모타격단(carrier strike group)을 출동시켜 대만해협을 가로막는 상황에 대비하여 항모타격단을 격파할 공군력, 해군력, 미사일능력을 대폭 강화했다. 

미국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려면 반드시 항공모함을 출동시켜야 한다. 항공모함이 없으면 미국은 전쟁을 하지 못한다. 항공모함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미국의 최대 강점이 아니라 되레 최대 약점으로 된다. 왜냐하면 미국이 유사시 항공모함을 출동시키지 못하는 뜻밖의 사태가 일어나거나, 작전지대에 출동한 항공모함이 교전 중에 격침당하는 경우 전쟁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기 항공모함이 절대로 격침당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은 항공모함이야말로 적의 공격을 집중시켜 격침당할 위험이 높다고 지적한다. 만일 항공모함이 격침당하면, 항모타격단은 무용지물로 되고, 미국은 전쟁에서 패한다. 

대만의 국가분렬책동이 지금보다 더 격화되어 중국이 대만해방작전에 나설 징후가 보이면, 미국은 즉각 항모타격단을 대만 인근 해역으로 급파해야 한다. 그런데 미국은 항모타격단을 몇 개나 출동시킬 수 있을까? 미국 해군은 항모타격단을 9개 운용한다. 미국 해군이 보유한 항공모함은 11척이지만, 항공모함 2척은 교대로 정기적인 정비-수리를 받아야 하므로, 항모타격단은 9개밖에 운용하지 못한다. 미국 해군이 운용하는 9개의 항모타격단 중에서 5개의 항모타격단은 북태평양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4개의 항모타격단은 북대서양에 배치되었다. 미국은 북태평양에 5개의 항모타격단을 상시적으로 배치해놓고 있다. 인도-태평양사령부가 있는 하와이를 중심으로 북쪽, 남쪽, 서쪽 3개 방향에 배치해놓은 것이다. 이를테면, 제1항모타격단과 제11항모타격단은 북태평양 북쪽에 배치되었고, 제3항모타격단과 제9항모타격단은 북태평양 남쪽에 배치되었고, 제5항모타격단은 북태평양 서쪽에 배치되었다. 

미국 텔레비전방송 <CNN> 2020년 6월 15일 보도에 따르면, 최근 미국은 중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3개의 항모타격단을 북태평양에 출동시켰다고 한다. 그에 맞서 중국도 2개의 항모전투단을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 배치했다. 

그런데 전시에 미국은 3개의 항모타격단만으로는 중국의 2개 항모전투단을 이기지 못한다. 따라서 중국이 대만해방작전에 나설 징후가 보이면, 미국은 현재 북태평양에 배치한 항모타격단 3개에 항모타격단 1개를 추가하여 모두 4개의 항모타격단을 대만 인근 해역으로 출동시켜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산술적인 계산일뿐이다. 실제로는 더 복잡한 계산을 해야 한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2019년 8월 17일 중국인민해방군 전투부대들이 대만상륙을 상정한 대만해방작전을 연습하는 장면이다. 조선의 대남군사행동과 중국의 대만해방작전은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의 대남군사행동과 중국의 대만해방작전이 동시다발로 전개되어야 조선과 중국의 공동의 적인 미국의 전투력을 분산, 약화시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핵공격을 원천봉쇄할 핵방패를 가진 조선이 대남군사행동을 전개해도,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민간부문에 대한 전쟁피해를최소화하는 단기속결전으로 전개될 것이다. 중국의 대만해방작전은 대만해협, 대만섬, 동중국해를 포괄하는 매우 넓은 작전지대에서 전개될 것이므로, 단기속결전으로끝나기 힘들고, 민간부문에 대한 전쟁피해도 클 것으로 예상된다. 그와 다르게, 조선의대남군사행동은 작전종심이 매우 짧은 한반도에서 전개될 것이므로, 단기속결전으로끝날 것이고, 따라서 민간부문에 대한 전쟁피해가 매우 적을 것으로 예상된다. 

1) 중국인민해방군도 대만해방작전을 준비했고, 조선인민군도 대남군사행동을 준비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대만해방작전을 실행에 옮기면, 미국은 중국의 대만해방작전에 무력개입을 감행할 것이고, 동중국해에서 중국과 미국의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동중국해에서 벌어지는 중국과 미국의 전쟁은 조선인민군이 대남군사행동계획을 실행에 옮길 결정적인 기회로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조선인민군의 대남군사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2개의 항모타격단을 한반도 인근 해역에 급파해야 한다. 

2) 중국이 대만해방작전에 나설 징후가 보이면, 원동지역에 배치된 로씨야군도 고도의 대미경계태세를 취할 것이다. 원동지역에 배치된 로씨야군의 공군력과 해군력이 북태평양으로 대거 출동하면, 미국 알래스카주에 주둔하는 미국 공군은 대만 인근 해역까지 남하하지 못하고, 북태평양 상공에서 뱅뱅 맴돌아야 한다.    

3) 미국이 대만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항모타격단을 대만 인근 해역으로 급파하는 경우, 중국은 그에 대응하여 해군 함대를 하와이 인근 해역과 괌 인근 해역으로 급파하여 미국의 군사전략거점들을 동시에 위협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중국이 해군-공군합동작전으로 하와이와 괌을 공격할 것에 대비해 하와이 방어와 괌 방어에 각각 항모타격단 1개씩 배치해야 한다. 

위와 같은 전시상황이 조성되는 경우, 미국이 북태평양에 출동시켜야 할 항모타격단은 8개로 늘어난다. 하지만 항모타격단이 9개밖에 없는 미국이 중국과 전쟁을 하기 위해 8개의 항모타격단을 북태평양에 출동시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맥락을 살펴보면, 미국은 항모타격단을 어디에 출동시켜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다가 중국의 대만해방작전도 저지하지 못하고, 조선의 대남군사행동도 저지하지 못하는 바람에 동중국해와 한반도에서 연패할 가능성이 크다. 

주목되는 것은, 조선이 미국 본토 전역을 핵무기로 타격할 수 있는 핵보유국이고, 중국도 그런 핵타격력을 가진 핵보유국이라는 사실이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2019년 12월 28일부터 31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은 당위원장은 ‘조성된 대외의 형세 하에서 우리의 당면한 투쟁방향에 대하여’라는 첫째 의정에 대한 “력사적인 보고”에서 “미국의 핵위협을 제압하고 우리의 장기적인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강력한 핵억제력의 경상적 동원태세를 항시적으로 믿음직하게 유지할 것”이라고 언명했다. 

미국 본토 전역을 핵무기로 타격할 수 있는 조선의 강력한 핵억제력은 미국이 조선에게 핵공격을 감행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핵방패다. 중국의 강력한 핵억제력도 똑같은 핵방패 역할을 수행한다. 김정은 조선로동당 위원장은 2013년 3월 3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핵억제력만 든든하면 천만대적이 덤벼들어도 무서울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미국의 핵공격을 원천봉쇄할 핵방패를 가진 조선이 대남군사행동을 전개해도,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조선의 대남군사행동은 민간부문에 대한 전쟁피해를 최소화한 단기속결전으로 끝날 것이다. 중국의 대만해방작전은 대만해협, 대만섬, 동중국해를 포괄하는 매우 넓은 작전지대에서 전개될 것이므로, 단기속결전으로 끝나기 힘들고, 민간부문에 대한 전쟁피해도 클 것으로 예상된다. 그와 다르게, 조선의 대남군사행동은 작전종심이 매우 짧은 한반도에서 전개될 것이므로, 단기속결전으로 끝날 것이고, 따라서 민간부문에 대한 전쟁피해가 매우 적을 것으로 예상된다. 예를 들면, 2004년 4월 7일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가 지시한 ‘전시사업세칙’ 제2장 제92조에는 조선인민군이 대남군사행동을 실행에 옮길 때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을 비롯한 각급 정치기관들은 모든 작전과 전투에서...적군을 포섭, 전취하기 위한 조직, 선전공작을...작전단계별로...군사적 타격과 배합”해 전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조선인민군이 대남군사행동에서 한국군을 타격하는 전투만 벌이는 게 아니라 한국군을 포섭, 전취하는 비전투공작도 배합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사정을 예견하면, 조선의 대남군사행동이 민간부문에 대한 전쟁피해를 최소화할 것이라는 점도 알 수 있다.   

조선이 대남군사행동을 오랜 세월 미루어온 까닭, 그리고 중국이 대만해방작전을 오랜 세월 미루어온 까닭은, 미국이 핵공격을 감행하지 못하게 하고 핵참화를 막아줄 강력한 핵방패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조선과 중국이 미국이 핵공격을 감행하지 못하도록 막아줄 강력한 핵방패를 각각 가졌으니,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고, 가장 유리한 정세가 조성될 때 결행시기를 선택하는 문제만 남아있는 것이다. 

조선의 대남군사행동과 중국의 대만해방작전은 군사적 측면에서만 논할 수 없으며, 정치적 측면에서도 논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적 측면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조선의 시각에서 보면, 대남군사행동의 직접적 담당자인 조선인민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도를 받는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국가를 영도하는 최고조직인 조선로동당의 영도를 받는 당의 군대이므로, 조선군이 아니라 조선인민군이다. 그래서 조선인민군은 자기를 영도하는 조선로동당의 조국통일위업을 실현하는 길에서 피를 흘릴 각오를 한 혁명군대다. 그런 점에서, 중국인민해방군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조선로동당과 중국공산당은 평화통일도 준비해왔고, 무력통일도 준비해왔다. 김정은 조선로동당 위원장은 2016년 5월 6일 평양에서 진행된 조선로동당 제7차 대회 사업총화보고에서 “나라의 통일을 이룩하는 데는 평화적 방법과 비평화적 방법이 있을 수 있다”고 언명한 바 있다. 평화통일과 무력통일을 서로 대치시키거나, 어느 한쪽만 인정하는 것은 오류다. 평화통일이냐 무력통일이냐 하는 양자택일문제는 조성된 정세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평화통일에 유리한 정세가 조성되면, 평화통일의 길을 택하게 되는 것이고, 무력통일에 유리한 정세가 조성되면, 무력통일의 길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분렬세력이 평화통일의 약속을 끝내 이행하지 않아 평화통일의 가능성이 사라지면, 약속을 이행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게 아니라 국가분렬세력을 제압하고 조국통일위업을 성취하는 무력통일의 길을 택하게 되고, 무력통일에 유리한 정세가 조성되는 때에 맞춰 무력통일계획을 실행하는 것이다.

2020/07/14

비밀 속에 가려진 격전의 시작

[한호석의 개벽예감](403)
자주시보 2020년 07월 13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두 개의 정상회담
2. 미국이 제3차 세계대전 도발할 결절점
3. 백악관의 극비정보 빼돌린 전설적인 첩보원들
4. 하이난섬해방작전의 승리와 백악관의 극적인 정책전환
5. 격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두 개의 정상회담

일제가 패망한 직후 중국에서 내전이 재발했다. 중국공산당은 중국내전을 해방전쟁이라고 불렀고, 중국국민당은 중국내전을 반공감란전쟁이라고 불렀다. 감란(戡亂)은 반란을 무찌른다는 뜻이다. 해방전쟁에서 승리한 중국공산당은 중국국민당을 비롯한 악질군벌들의 억압과 수탈을 속에서 오랜 세월 신음해오던 5억 중국 인민을 해방하고 새로운 중국을 건설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내전에서 패한 중국국민당과 그들의 군대는 중국 본토에서 섬으로 쫓겨났다. 대만섬과 하이난섬이 그들의 마지막 근거지였다.   

중국인민해방군이 대만섬과 하이난섬을 해방하면 중국의 국토완정대업이 완수될 수 있었다. 중국국민당과 그들의 군대는 대만섬으로 쫓겨나 본토수복을 노리고 있었으므로,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해방군에게 대만해방은 뒤로 미룰 수 없는 중대한 과업이었다. 

그런데 중국인민해방군이 대만해협을 건너가 반란군을 제압하고 대만을 해방하려면 강력한 공군력과 해군력을 동원해야 하는데, 수립된 이후 1년도 채 되지 않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공군력과 해군력은 거의 전무했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은 대만해방작전에 반드시 필요한 전투기, 폭격기, 함정, 상륙정을 소련에서 들여와야 했다. 

1949년 12월 16일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은 로씨야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딸린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정상회담 중에 대만을 해방하는 최고중대사를 논의했다. 두 정상은 최고중대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주고받았다.

마오 주석 - “국민당 세력은 대만섬에 해군기지와 공군기지를 구축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해군력과 공군력이 없어서 인민해방군이 그 섬을 점령하기 힘듭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군사지휘관들은 대만섬 점령을 촉진시키기 위해 소련이 공군조종사 자원병들 또는 비공개 (공군)부대를 파견하는 (군사)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기해왔습니다.”

스딸린 서기장 - “(군사)지원의 방식은 검토해야 하겠지만, (군사)지원은 배제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미국이 (대만해방작전에) 개입할 구실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소련의) 군사지휘관들과 군사고문들은 어느 때나 파견할 수 있습니다만, 그 밖의 문제들은 좀 더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략)  

위의 담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마오 주석이 한시바삐 대만을 해방하기 위해 공군력과 해군력을 확보하는 군사지원을 요청했으나, 스딸린 서기장은 군사지휘관들과 군사고문들을 중국에 파견하는 군사지원사업은 선뜻 꺼내면서도 전투기, 폭격기, 함정, 상륙정을 보내는 군사지원을 보류했다는 사실이다. 

의문이 생긴다. 소련은 왜 대만해방작전을 위한 중국의 군사지원요청을 그처럼 소극적으로 대한 것일까? 이 문제를 해명하려면, 중소정상회담이 개최되기 약 8개월 전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조소정상회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9년 3월 7일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정상회담에서 김일성 수상(당시 직책)과 스딸린 서기장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주고받았다. <사진 1>

▲ <사진 1> 김일성 수상(당시 직책)은 소련이 마련한 특별항공기를 타고 로씨야모스크바를 방문하여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스딸린 서기장과의 정상회담을 세 차례 진행했다. 위의 사진은 김일성 수상이 스딸린 서기장과 함께 만찬을 나누는 장면이다. 정상회담에서 김일성 수상은 스딸린 서기장에게 외부의 군사지원을 받지 않고 주체력량으로 조선의 통일을 실현할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서울해방작전이 신속히 전개되어 3일이면 승리할 수있다고 말했다. 또한 김일성 수상은 정상회담 중에 스딸린 서기장에게 "미국이무력개입을 감행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정신을 차릴 때쯤이면전체 조선인민은 새로운 통일정부를 열렬히 지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성 수상의 통일국가건설의지는 강렬했다.  

김일성 수상 - “스딸린 동지, 이제 조건이 성숙되어 전 국토를 무력으로 해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조선 반동세력은 절대로 평화통일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우리를 공격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질 때까지 분단을 고착화하려고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공세를 취할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우리 군대는 강하고, 남조선에는 강력한 유격대의 지원이 (무력해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딸린 서기장 - “대남공격은 불가합니다. 첫째, 북조선인민군은 남조선군에 대해 확고한 우위를 아직 갖지 못했습니다. 수적으로도 열세입니다. 둘째, 남조선에는 아직 미국군이 있습니다. 전쟁이 나면 그들이 개입할 것입니다. 셋째, 우리와 미국 사이에 아직도 38도선 분할협정이 유효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먼저 위반하면 미국의 (무력)개입을 막을 명분이 없게 됩니다.”

위에 인용된 두 가지 정상회담의 담화록을 보면, 스딸린 서기장은 남조선해방작전과 대만해방작전에 대한 미국의 무력개입을 우려하면서 조선과 중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매우 소극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된 까닭은, 스딸린 서기장에게 있어서 미국의 무력개입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일 미국이 남조선해방작전이나 대만해방작전에 무력개입을 감행하면, 소련도 무력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한반도 내전과 중국 내전은 미국과 소련의 전쟁으로 대폭 확대되어 제3차 세계대전을 피할 수 없게 될 판이었다. 

소련에게 막대한 인명손실과 물적 피해를 안겨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때로부터 불과 5년 만에 소련이 또 다시 세계대전에 휘말려드는 것은 스딸린 서기장이 예상하기 싫은 일이었다. 더욱이 소련이 상대해야 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압도적인 무력으로 전범국들을 차례로 제압한 강적이었고, 당시에는 핵무기를 독점한 핵강국이었다. 소련이 첫 플루토늄원자로를 가동한 때는 1948년 6월 19일이었고, 첫 핵시험을 진행한 때는 1949년 8월 29일이었는데, 당시 소련이 만든 핵폭탄은 너무 크고 무거워 웬만한 폭격기로는 운반할 수도 없었다. 소련은 전쟁에서 사용할 수 없는 원시적인 핵폭탄밖에 갖지 못했으나, 미국은 전략폭격기에서 투하하는 실전용 핵폭탄을 대량으로 보유했다. 만일 소련이 그런 핵강국과 섣불리 전쟁을 하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입은 피해를 훨씬 능가하는 핵참사를 당할 것이 뻔했다. 그런 까닭에 소련은 미국과의 전쟁을 어떻게 해서든지 피해야 했다.   

소련은 미국과의 전쟁을 극력 피하려고 했지만, 압도적인 핵무력을 가진 미국은 소련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1948년 11월 23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핵무기개발을 추진하는 소련이 핵무기를 갖지 못하게 제압하고, 미국의 핵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1957년경에 소련과 전쟁을 하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이 그런 예상에 의거하여 작성한 핵공격계획이 바로 드롭샷 작전(Operation Dropshot)이다. 1949년에 작성된 드롭샷 작전에 따르면, 미국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나라들, 중국과 조선에 있는 100개 대도시들과 산업시설들에서 200개 타격대상을 선별했고, 핵폭탄 300발과 고폭탄 29,000발로 그 타격대상들을 모조리 파괴하고 세계사회주의진영 전체를 말살하는 제3차 세계대전을 도발하려고 광분했다. 또한 미국이 1949년에 세계 최초의 전략핵폭격기인 B-36을 실전배치한 것은 ‘드롭샷 작전’을 실제로 준비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B-36은 전략핵폭탄을 약 4t 정도 실을 수 있고, 비행도중에 급유를 받지 않고 대륙간 16,000km를 비행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전략핵폭격기였다. 그것만이 아니라, 미국은 1949년 4월 4일 서유럽 21개국 대표들을 워싱턴에 불러 모아 북대서양조약을 체결했는데, 이것도 소련과 사회주의진영을 상대로 제3차 세계대전을 도발하기 위해 광분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2. 미국이 제3차 세계대전 도발할 결절점

소련의 시각에서 보면, 미국이 제3차 세계대전을 도발할 만한 결절점은 전 세계에 세 군데밖에 없었다. 베를린, 대만해협, 한반도가 바로 그런 결절점이었다. 그래서 스딸린 서기장은 1949년 4월 17일 평양 주재 소련대사 떼렌티 슈띠꼬브(Tereti Shtykov)에게 보낸 비밀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내가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1949년) 5월 중 남조선 주둔 미국군이 일본의 가장 가까운 섬으로 철수할 계획임. 철수목적은 남조선군에게 행동의 자유를 더 많이 주기 위해서임. 미국군이 철수하는 것에 맞춰 유엔감시위원단도 남조선을 떠날 것임. 4~5월 중에 남조선은 38도선에 무력을 집중시킬 것이 틀림없음. 6월 중에 불시에 북진공격을 감행하고, 8월까지 북조선군을 완전히 궤멸시킬 목적으로 보임. 이런 정보의 사실여부를 긴급히 확인해 내게 보고하기 바람.” 

스딸린 서기장의 긴급지시를 받은 슈띠꼬브는 1949년 4월 20일 조선인민군의 전투준비태세가 “매우 미흡하고”, 소련군사고문단이 북조선에 도착하지 않았으며, 북조선의 무기생산과 탄약생산을 지원하기로 한 소련의 결정사항이 아직 집행되지 않았다는 내용의 비밀전문을 스딸린 서기장에게 보냈고, 1949년 5월 2일에 보낸 비밀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우리 첩보원이 보내온 정보와 서울의 라디오방송보도에 따르면, 미국과 남조선은 남조선주둔미국군의 철수문제를 협의하고 있음. (중략) 남조선의 대북작전계획과 관련하여 말하면, 남조선은 국방군을 계속 증강하고 있음. (중략) 미국은 남조선에 무기와 탄약을 많이 제공하고 있음.”  

위의 비밀전문을 받아본 스딸린 서기장은 미국의 전폭적인 군사지원을 받으며 한국군의 무력을 증강시킨 이승만 정부가 38도선을 너머 북진공격을 감행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 예상에 뒤따른 것은, 미국이 소련과의 전쟁을 도발하기 위해 한국군의 무력을 증강시켜 북진공격으로 내몰려는 게 아닌가 하는 심각한 우려였다. 

그러나 슈띠꼬브가 “미국이 남조선에 무기와 탄약을 많이 제공하고 있다“고 스딸린 서기장에게 보고한 것은 사실과는 다른 오보였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주한미국군철수에 대비하여 막대한 군사지원을 미국에게 요청했지만, 미국은 그 요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미국의 인색한 태도는 1949년 5월 9일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G. Acheson)이 주한미국대사 존 무쵸(John J. Muccio)에게 보낸 1급 비밀전문에서 드러났다. 비밀전문에 따르면, 이승만 정부는 미국에게 2억 달러가 넘는 막대한 군사지원을 요청했지만, 미국이 이승만 정부에게 제공할 수 있는 군사지원은 1,100만 달러밖에 되지 않으므로, 미국이 이승만 정부에게 제공할 수 있는 군사지원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무쵸가 이승만에게 “상세히 착오 없이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며, 미국이 이승만 정부에게 군함과 전투기를 제공하는 것이 좋겠다는 무쵸의 건의는 “사정상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미국원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와 미국정책기획실장폴 닛츠가 군사지도를 살펴보면서 담화하는 장면이다. 아마도 한반도 군사지도를 보면서 북침전쟁계획을 논의하는 장면인지 모른다. 1950년 1월 1일 초대 미국정책실장이었던 조지 케넌의 뒤를 이어 그 직책에 임명된 폴 닛츠는 소련을봉쇄하고, 유렵과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진영의 확장을 저지, 차단하기 위해 미국은 핵무력을 증강하고, 군사비를 증액하며, 군사동맹을 강화하고, 전쟁능력을향상시킨다는 새로운 대외정책기조를 작성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그에 따라1950년 4월 12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소련과 사회주의나라들에 대해 매우강경하고 도발적인 NSC-68을 채택했다. 이런 정책에 의거하여 미국 육군성은SL-17이라는 명칭으로 작성한 한반도 전쟁계획을 1950년 6월 19일 미국 합참본부에 제출했다. 그들은 북침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

하지만 “미국이 남조선에 무기와 탄약을 많이 제공하고 있다”는 슈띠꼬브의 오보를 믿은 스딸린 서기장은 제3차 세계대전을 도발하려는 미국이 한국군의 무력을 대폭 증강시키고 배후에서 조종하여 북진공격으로 내몰려는 게 아닌가 하고 상황을 오판했고 전쟁위기를 우려했다. 스딸린 서기장의 대응책은 소련이 미국의 전쟁도발에 절대로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딸린 서기장은 1949년 8월 13일 평양 주재 소련대사 슈띠꼬브에게 보낸 비밀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전쟁이 시작될 경우에 대비해 북조선에 있는 소련 해군기지와 공군부대를 폐쇄할 것. 우리가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또한 적을 심리적으로 무장해제시키며 전쟁이 일어날 경우 우리의 개입을 방지하기 위함임.”  

1949년 9월 24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조선인민이 통일을 고대하고 있다는 동지들의 견해에 동의하지만, 때를 기다려야 한다. 지금은 (남조선에서) 유격투쟁을 강화하고 남조선에서 반정부운동이 성숙되기를 기다리는 게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면서, 조선인민군의 서울해방작전은 “전쟁초기단계로 시작되는 것이므로,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의견을 담은 문서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 보냈다. 평양 주재 소련대사 슈띠꼬브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게 보내는 문서를 김일성 수상에게 전달했다. 슈띠꼬브가 스딸린 서기장에게 보낸 비밀전문에 따르면, 김일성 수상은 그 문서를 “냉담하게 받았다”고 한다.  

김일성 수상은 남조선해방작전을 대폭 축소한 서울해방작전을 실행하여 전쟁피해를 극력 줄이고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가졌지만, 서울해방작전이 제3차 세계대전을 도발할 구실을 미국에게 주게 될 것을 우려한 스딸린 서기장은 작전실행을 보류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기했다. 이런 의견불일치는 당시 소련과 중국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발생했다. 마오쩌둥 주석은 대만해방작전을 실행하여 국토완정을 실현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가졌지만, 대만해방작전이 제3차 세계대전을 도발할 구실을 미국에게 주게 될 것을 우려한 스딸린 서기장은 작전실행을 보류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스딸린 서기장이 제기한 보류의견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일국가건설의지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토완정의지를 약화시킬 수 없었다. 조선인민군은 서울해방작전에 필요한 군사준비를 다그쳤고, 중국인민해방군도 대만해방작전에 필요한 군사준비를 다그쳤다. 그처럼 복잡한 정세가 조성된 가운데 어느덧 1949년이 저물고 1950년을 맞았다.     


3. 백악관의 극비정보를 빼돌린 전설적인 첩보원들

연말연시의 들뜬 분위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워싱턴에서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1950년 1월 5일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미국 대통령은 대만섬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인정하고, 대만에서 특권을 얻을 생각도 없으며, 중국 내부문제에 군사적으로 관여할 의사도 없다는 중대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그리고 1950년 1월 12일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워싱턴에 있는 전국언론협회에서 진행된 공식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알루션렬도 ⟶ 일본 ⟶ 오끼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태평양방어선을 획정했음을 밝혔다. 트루먼과 애치슨이 한 주간의 시차를 두고 꺼내놓은 그런 놀라운 발언들은 즉흥발언이 아니었다. 미국이 한반도와 대만섬을 태평양방위선에서 제외한 것은 1949년 12월 30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채택된 1급 비밀문서인 NSC-48에 명시된 정책적 결정이었다. 그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49년 5월 5일 미국 육군참모총장 오마 브래들리(Omar N. Bradely)는 연방상원의원 아더 왯킨스(Arthur V. Watkins)가 제기한 질문에 답변하는 중에 태평양방위선에 관한 질의응답을 다음과 같이 주고받았다.

질의 - “태평양방위선은 어디에 설정되는가?”
답변 - “미국은 일본, 오끼나와, 필리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데, 현 정세에서 말하는 방위선은 거기에 설정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중략) 
질의 - “미국의 방위선은 중국에는 설정되지 않을 것인가?”
답변 - “미국은 중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지 않으며, 노르웨이, 프랑스, 이딸리아에도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지 않다. 전체 방위력을 일괄하여 유럽에 집중하고 아시아를 등한시 하는 것은 정치기획자들의 견해인 듯하다. 유럽 또는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내가 논하기에 적절한 문제가 아니며, 군당국은 외교정책을 수립하지는 않는다.” (하략)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한반도와 대만섬을 태평양방위선에서 제외한 NSC-48을 채택한 것은 미국이 북조선의 서울해방작전과 중국의 대만해방작전에 무력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NCS-48에 명시된 미국의 대외정책은 북조선의 서울해방작전과 중국의 대만해방작전을 실행단계로 떠밀어준 결정적 계기로 되었다. 

그런데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졌다. 어느 비밀첩보원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1급 비밀문서 NSC-48의 사본을 감쪽같이 빼돌려 소련 모스크바에 보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NSC-48의 사본을 모스크바로 빼돌린 비밀첩보원은 1950년 당시 워싱턴 주재 영국대사관 1등 서기관 도널드 맥클린(Donald Duart McLean)이다. 영국 정보국 M16 소속 워싱턴지부장인 그는 워싱턴 주재 영국대사관 1등 서기관이라는 공식 직함을 가지고 워싱턴에서 활동했다. 당시 미국과 영국은 정보교환협약에 따라 국가기밀을 서로 주고받았는데, 맥클린은 워싱턴 주재 영국대사관에서 미국과 영국의 정보교환업무를 맡아보았다. 그는 워싱턴 주재 영국대사가 본국으로 보내는 외교행낭에서 미국의 국가기밀문서들을 꺼내 사진기로 촬영한 다음, 그 필름을 런던의 어느 길거리에서 접선한 소련국가안전위원회(KGB) 소속 비밀첩보원에게 넘겨주는 첩보활동을 계속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1950년대 초 어느 날 도널드 맥클린과 그의 아내 멜린다가두 아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다. 아마도 맥클린이 워싱턴 주재 영국대사관 1등 서기관으로 워싱턴에서 근무하던 시기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공식직함은 1등 서기관이었지만, 그는 영국 정보국 M-16 소속 워싱턴지부장으로서워싱턴 주재 영국대사관에서 미국과 영국의 정보교환업무를 맡아보았다. 그는1944년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국제정세의 흐름을 바꿔놓은 전설적인 첩보망으로 역사에 남은 케임브리지 5인방의 성원이었다. 미국의 핵무기에 관한 극비정보, 미국의 유럽원조계획인 마셜플랜에 관한 극비정보를 비롯한 당대 국제정세를 좌우한 중대한 국가기밀문서들이 도널드 맥클린의 손을 거쳐 모스크바로계속 넘어갔다. 그가 모스크바에 넘겨준 미국의 극비정보문서들 중에는 1949년12월 30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채택한 NSC-48 이외에도, 1949년 3월 22일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채택한, 주한미국군철수를 1949년 6월 30일까지 완료하기로 결정한 1급 비밀문서도 있었다.  

도널드 맥클린은 1944년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국제정세의 흐름을 바꿔놓은 전설적인 첩보망으로 역사에 남은 케임브리지 5인방(Cambridge Five)의 성원이었다. 세계적인 명문으로 인정받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를 졸업한 당대 최고의 수재들인 도널드 맥클린을 비롯하여 킴 필비(Kim Philby), 가이 버지스(Guy Burgess), 앤서니 블런트(Anthony Blunt), 존 케인크로스(John Cairncross) 등 다섯 사람은 1930년대 미국과 유럽을 강타한 세계대공황(Great Depression)의 거대한 폭풍 속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빈곤과 불행으로 몰아넣은 자본주의의 저주스러운 현실을 직접 체험했고, 자본주의의 적인 소련에서 새로운 사회가 건설되는 놀라운 모습을 목격하면서 자생적 사회주의자로 변모되었고, 자기들에게 닥쳐올 위험을 무릅쓰고 사회주의를 위한 비밀첩보활동을 자원했다. 케임브리지 5인방이 이룩한 상상을 초월하는 첩보성과를 보고 감탄한 소련국가안전위원회(KGB)는 그들에게 거액의 보상금으로 감사의 뜻을 전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자기들이 돈 때문에 첩보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 보상금을 받지 않은 열렬한 사회주의자들이었다. 

미국의 핵무기에 관한 극비정보, 미국의 유럽원조계획인 마셜플랜(Marshall Plan)에 관한 극비정보를 비롯한 당대 국제정세를 좌우한 중대한 국가기밀문서들이 도널드 맥클린의 손을 거쳐 모스크바로 계속 넘어갔다. 맥클린이 모스크바에 넘겨준 미국의 극비정보문서들 중에는 1949년 12월 30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채택한 NSC-48 이외에도 1949년 3월 22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채택한, 주한미국군철수를 1949년 6월 30일까지 완료하기로 결정한 1급 비밀문서도 있었다. 

스딸린 서기장은 케임브리지 5인방의 비밀첩보활동 덕분에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철수할 뿐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한반도와 대만섬을 태평양방위선에서 제외시킨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대아시아정책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어 스딸린 서기장은 북조선의 서울해방작전과 중국의 대만해방작전이 미국에게 무력침공구실을 안겨줄 것으로 우려하여 보류를 권유했던 자신의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4. 하이난섬해방작전의 승리와 백악관의 극적인 정책전환

김일성 수상은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던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소련이 마련한 특별항공기를 타고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딸린 서기장과의 정상회담을 세 차례 진행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국이 작성한 조소정상회담의 기록은 45년 뒤에 세상에 공개되었다. 스딸린 서기장은 정상회담 중에 김일성 수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국제환경과 국내상황은 (소련이) 조선의 통일을 위해 더욱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북조선이 서울해방작전을 실행하는 경우 미국이 무력개입을 하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면서도, 북조선의 서울해방작전이 중국의 지지와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김일성 수상은 스딸린 서기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오쩌둥 동지는 조선을 해방하려는 우리의 희망을 언제나 지지했습니다. 마오쩌둥 동지는 중국혁명이 완성되면 우리를 도와줄 것이고, 필요한 경우 병력도 지원하겠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힘으로 조선의 통일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중요한 것은, 김일성 수상이 조선의 통일을 외부의 군사지원을 받지 않고 주체력량으로 실현할 것이라고 단언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6.25전쟁 중에 미국 지상군이 38도선을 넘어 무력침공을 감행한 1950년 10월 1일 이전까지 북조선은 중국의 거듭되는 파병제의를 거절했다. 중국인민지원군이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과 맞서 조선을 돕는다는 뜻)의 기치를 들고 6.25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넌 날은 1950년 10월 25일이다.

스딸린 서기장은 정상회담 중에 김일성 수상에게 미국이 남조선에 파병할지 모르기 때문에 소련은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김일성 수상은 “서울해방작전이 신속히 전개되어 3일이면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조선인민군은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38도선 무력충돌이 국지전으로 비화되자 서울해방작전을 개시하여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해방’했다. 또한 김일성 수상은 정상회담 중에 스딸린 서기장에게 “미국이 무력개입을 감행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정신을 차릴 때쯤이면 전체 조선인민은 새로운 통일정부를 열렬히 지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성 수상과 스딸린 서기장이 모스크바에서 진행한 정상회담을 중시하는 까닭은, 그 정상회담에서 북조선의 서울해방작전에 관한 중대한 합의가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정상회담에서 도출된 중대한 합의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평양에 파견되는 소련군사고문단의 도움을 받아 서울해방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조선인민군은 1950년 여름까지 전투준비태세를 완료한다는 것이었다. 

김일성 수상과 스딸린 서기장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이 진행된 날로부터 며칠이 지난 1950년 5월 1일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 중국인민해방군이 중국 최남단에 있는 하이난섬을 해방했다는 소식이다. 1950년 4월 10일 하이난섬을 해방하기 위한 대규모 상륙전을 개시한 중국인민해방군은 20일 동안 격전을 벌이며 남진하여 마침내 5월 1일 하이난섬 남단에 있는 싼야를 해방했다. 하이난섬해방작전에서 중국인민해방군 사상자는 약 4,500명이었고, 국민당군 사상자는 약 33,000명이었으니, 중국인민해방군의 압승이었다. 국민당군 패잔병들은 바다를 건너 대만섬으로 도망쳤다. 

하이난섬해방작전이 중국인민해방군의 압승으로 종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스딸린 서기장은 김일성 수상과의 정상회담에서 약속한 대로 246명으로 구성된 소련군사고문단을 조선에 급파하여 조선인민군 총참모부의 서울해방작전계획수립을 지원하도록 조치했다.  

하이난섬해방작전에서 승리한 중국인민해방군에게 남겨진 마지막 국토완정과업은 대만에 집결한 장제스 정권을 타도하고 대만을 해방하는 것이었다. 대만해방작전은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 하이난섬해방작전에서 승리한 중국인민해방군 주력부대는 곧바로 대만섬을 마주보는 푸젠성에 집결했다. 소련은 대만해방작전을 준비하는 중국에게 공군력을 지원했다. 미그-15 전투기 40대와 폭격기 및 지원기 116대를 보유한 소련 공군 제106비행사단은 1950년 3월부터 상하이 인근 비행장에 배치되기 시작했고, 중국인민해방군은 1950년 말까지 14개 비행사단을 양성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양안의 폭이 약 150km밖에 되지 않는 대만해협을 건너 대만섬에 상륙하는 것은 얼마 전에 하이난섬 상륙전을 경험한 중국인민해방군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더욱이 대규모 상륙전부대들은 상하이 인근 비행장에서 출격한 전투기와 폭격기들의 공중엄호를 받으며 대만섬 해안에 상륙할 수 있었다. 

이런 사정을 간파한 미국 원동군사령부는 1950년 5월 29일 미국 합참본부에 보낸 군사상황보고서에서 “최근 상하이와 베이징 인근에 주둔하는 중국 공군에 소련제 전투기들이 배치되었다. 이것은 대만문제와 직결되는 첩보”라고 하면서 “미국 합참본부의 비상계획에 중국의 대만점령과 소련의 서태평양 진출에 대한 대비책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1950년 4월 10일 중국인민해방군 상륙부대가 중국 최남단에 있는 하이난섬을 해방하기 위해 해안에 상륙하는 장면이다. 당시 중국인민해방군에는 상륙정이 없었기 때문에, 어민들이 사용하는 돛이 달린 어선을 많이동원하여 대규모 상륙전을 벌였다. 중국인민해방군 내에 조선인들로 구성된 전투부대는 하이난섬해방작전에서 가장 용맹하게 싸워 승리에 기여했다. 중국인민해방군은 하이난섬 북쪽 해안에 상륙하여 20일 동안 격전을 벌이며 남진하여5월 1일 마침내 하이난섬 남단에 있는 싼야를 해방했다. 하이난섬해방작전에서중국인민해방군 사상자는 약 4,500명이었고, 국민당군 사상자는 약 33,000명이었으니, 중국인민해방군의 압승이었다. 국민당군 패잔병들은 바다를 건너 대만섬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중국인민해방군이 하이난섬해방작전을 전개하던 시기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1950년 4월 12일 진행한 회의에서 기존 대외정책을 폐기하고 새로운 대외정책을 채택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존 대외정책은 1949년 12월 30일 한반도와 대만섬을 태평양방위선에서 제외한 NSC-48의 대외정책을 뜻하는데, 1950년 4월 12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1949년 12월 30일에 채택한 NSC-48을 폐기했고, 새로운 대외정책이 명시된 NSC-68을 채택했다. NSC-68에 명시된 새로운 대외정책은 소련을 봉쇄하고,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진영의 확장을 저지, 차단하기 위해 미국은 핵무력을 증강하고, 군사비를 증액하며, 군사동맹을 강화하고, 전쟁능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소련과 동맹국들에 대한 핵공격을 상정한 매우 강경하고 도발적인 정책이었다. 

강경하고 도발적인 NSC-68에 의거하여 미국 육군성은 SL-17이라는 명칭으로 작성한 한반도 전쟁계획을 1950년 6월 19일 미국 합참본부에 제출했다. 미국의 한반도 전쟁계획인 SL-17의 내용을 보면, 조선인민군이 한국군을 공격하는 경우 신속하게 후퇴하여 부산방어선을 구축하고 인천에 상륙하여 반격, 북진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6.25전쟁 중에 미국은 SL-17 전쟁계획에 의거하여 작전했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약 1주일 전,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로벗 멘지스(Robert G. Menzies)는 트루먼 정부로부터 이승만의 북진공격에 관한 극비외교문서를 받았다. 북진공격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멘지스는 미국이 이승만의 북진공격을 자제시키면 좋겠다는 외교전문을 트루먼에게 보냈다. 그런데 트루먼과 멘지스가 주고받은, 이승만의 북진공격에 관한 극비외교문서들을 누군가가 모두 파기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외교장관 존 버튼(John W. Burton)은 외교문서파기에 항의하여 사직했다. 

NSC-48을 폐기하고 NSC-68을 채택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1950년 6월 이승만의 북진공격을 부추기는 전쟁도발계획을 준비했지만, 스딸린 서기장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NSC-48을 폐기하고 NSC-68을 채택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 아니라 미국이 이승만의 북진공격을 부추기는 전쟁도발계획을 준비했다는 정보도 파악하지 못했다. 


5. 격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해방작전을 완료한 조선인민군은 한강도하와 남진공격을 하지 않고 서울에 머물렀다. 당시 북조선은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이승만과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을 체포하면 북의 최고인민회의와 남의 국회가 통합된 전민족통일의회가 구성되고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서울을 완전히 포위하여 퇴로를 차단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승만과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은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달아났다. 그래서 조선인민군 총사령부는 서울해방작전계획과 다르게 전개된 상황에 맞춰 작전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것은 서울해방작전 이후에 전개할 작전계획이었다.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서울을 점령하고 3일 동안 한강도하와 남진공격을 하지 않은 까닭은, 조선인민군 총사령부가 서울해방작전 이후에 전개할 작전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인민군 총사령부가 서울해방작전 이후에 전개할 작전계획을 작성하고 있었던 1950년 6월 27일 오후 8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백악관에서 국가안보회의 비상회의를 소집했다. 트루먼의 주재로 진행된 비상회의에서 한반도 내전에 무력개입을 감행하기로 결정했고, ‘코리아상황(Korean Situation)’이라는 제목의 정책문서가 작성되었다. 트루먼은 그 문서에서 미국 원동군사령부 관하 해군력과 공군력을 무제한으로 한반도에 동원하면서, 한국군에게 전폭적인 군사지원을 제공할 것이며, 미국 공군은 38도선 이남 지상에 있는 북조선군의 무기와 병력, 다른 군사목표들을 타격하고, 미국 해군은 38도선 이남 해상에서 전투력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것을 명령했다. 다른 한편, 트루먼은 미국 해군 제7함대에게 대만섬에 대한 중국인민해방군의 공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이 하달되자마자 일본에 주둔한 제7함대는 군함 10여 척을 대만해협에 급파하여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만상륙을 원천봉쇄했다. 

1950년 6월 28일 마오쩌둥 주석은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8차 회의에서 “올해 1월 5일 트루먼이 미국은 대만문제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성명을 발표했지만, 지금은 트루먼 스스로 자신의 성명이 거짓임을 증명했고, 중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국제협의를 깨버렸다”고 비난했으며, 저우언라이 외교부장(당시 직책)은 “트루먼이 27일에 발표한 성명과 미국 해군의 행동은 중국 영토를 무력으로 침략한 것이며 유엔헌장을 철저히 파괴한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미제국주의자들이 그 어떤 방해책동을 벌이더라도 대만이 중국에 속한다는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전체 인민은 한마음 한뜻으로 침략자 미제의 수중에서 대만을 해방하기 위해 끝까지 분투할 것”이라는 대미성명을 발표했다.    

조선인민군 총사령부가 서울해방작전 이후에 전개할 작전계획은 무엇이었을까? <월간조선> 2014년 2월호 분석기사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총사령부가 작성한 ‘공격작전의 정보계획’이라는 제목의 문서와 평양 주재 소련군사고문단 단장 울라지미르 라주바예브(Vladimir Razuvaev)가 소련군 총참모부에 보고한 ‘6.25전쟁 보고서’라는 제목의 문서에는 조선인민군 총사령부가 작성한 3단계 작전계획이 들어있다고 한다. 

그 두 가지 문서에 담긴 3단계 작전계획 중에서 제1단계 작전계획은 조선인민군이 금천-구화리, 연천-철원, 화천-양구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2일 안에 서울 부근의 한국군 주력부대를 포위, 섬멸하고 서울을 해방하고, 수원-원주-삼척을 연결하는 제1공격축선까지 약 90km를 5일 만에 진격하는 것이었다. 조선인민군이 수원-원주-삼척을 연결하는 제1공격축선까지 진격하면, 서울 외곽을 동서남북 방향에서 완전히 포위하고, 한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게 된다.  

제2단계 작전계획은 군산-대구-포항을 연결하는 제2공격축선까지 약 180km를 14일 만에 진격하는 것이었고, 제3단계 작전계획은 부산-여수-목포를 연결하는 제3공격축선까지 약 80km를 10일 만에 진격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만 보면,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제주도를 제외한 38도선 이남전역을 3단계에 걸쳐 29일 만에 ‘해방’하는 전면전 작전계획을 수립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선인민군 총사령부는 38도선 이남전역을 ‘해방’하는 전면전 작전계획을 수립한 것이 아니라, 서울을 ‘해방’하는 국지전 작전계획만 수립했다. 그렇게 판단하는 까닭은, 전투부대를 어떻게 편성하고 운용할 것인지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제1단계 작전계획에만 들어있고, 제2단계 작전계획과 제3단계 작전계획에는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제1단계 작전계획은 명실공히 작전계획이지만, 제2단계 작전계획과 제3단계 작전계획은 작전계획이라는 제목만 붙어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작전계획이 없으면 전투를 할 수 없다. 이런 사정은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38도선에서 남해안에 이르는 350km의 작전종심 중에서 90km 계선까지만 진격하여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였던 서울을 점령하고 이승만의 항복을 받아내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서울해방작전만 준비했음을 말해준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1950년 6월 28일 한국군이 구축한 서울방어선을 격파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가 T-34 땅크를 앞세우고 서울해방작전을 전개하는 장면이다. 당시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금천-구화리, 연천-철원, 화천-양구에서 공격을개시하여 2일 안에 서울 부근의 한국군 주력부대를 포위, 섬멸하고 서울을 해방하며, 수원-원주-삼척을 연결하는 제1공격축선까지 약 90km를 5일 만에 진격하는 서울해방작전을 전개했다. 조선인민군 전투부대가 수원-원주-삼척을 연결하는 제1공격축선까지 진격하면, 서울 외곽을 동서남북 방향에서 완전히 포위하고, 한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서울을점령하고 서울 남쪽 한강 계선까지 진격했지만, 서울 외곽을 동서남북 방향에서포위하여 한국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목표는 완수하지 못했다.  

하지만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제1단계 작전계획을 완수하지 못했다. 그들은 서울을 점령하고 서울 남쪽 한강 계선까지 진격했지만, 서울 외곽을 동서남북 방향에서 포위하고 한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수원-원주-삼척을 연결하는 제1공격축선까지 진격하지는 못한 것이다.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제1공격축선까지 진격하지 못하고 한강 계선에서 한국군과 대치하고 있었던 1950년 6월 29일 주일미공군기지에서 이륙한 미국 공군 B-29 폭격비행대가 한반도 영공을 침입하여 평양에 대한 첫 공습을 감행했다. 북조선 전쟁지휘부는 미국이 한반도 내전에 무력개입을 감행하는 수준을 넘어 38도선 이북에 대한 무력침공을 감행하기 시작했음을 직감했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북조선 전쟁지휘부의 전략적 선택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전략적 선택은 한강을 건너 남진공격을 재개하여 38도선 이남전역을 ‘해방’하는 전면전이었다. 실제로 조선인민군은 1950년 6월 30일 한강을 건너 남진공격을 재개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보면, 1950년 6월 29일 미국의 평양공습은 국지전을 전면전으로 확대시키고, 한반도 내전을 국제전으로 전환시킨 결정적인 요인으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이 평양을 공습했다는 소식을 들은 스딸린 서기장은 1950년 7월 1일 평양 주재 소련대사 슈띠꼬브에게 긴급전문을 보냈다. 그는 긴급전문에서 슈띠꼬브가 북조선의 작전계획에 관해 자신에게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조선인민군이 진격을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진격을 일단 멈추기로 결정했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스딸린 서기장은 “우리가 판단하기에는 (조선인민군이) 두말할 것 없이 계속 진격해야 한다. (남조선) 해방이 앞당겨질수록 (미국의) 개입기회는 그만큼 줄어든다”고 썼다.  

그러나 1950년 6월 현재, 일본을 점령한 미국 원동군은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었고, 백악관에서는 한반도 전쟁계획이 준비되었다. 당시 미국 원동군사령부 관하에는 정규군 143,000명과 주방위군 6,000명이 있었고, 폭격기, 전투기, 정찰기, 수송기를 비롯한 작전기 1,040대가 있었고, 항공모함, 중순양함, 구축함, 잠수함을 비롯한 군함 26척과 해군항공기 140대가 있었다. 그에 비해,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관하에는 정규군 175,000명, 프로펠러식 전투기를 비롯한 소형 작전기 239대, 그리고 어뢰정과 경비정을 비롯한 소형 함선 16척이 있었다. 

프로펠러식 소형 전투기밖에 갖지 못한 조선과 제트엔진식 전략핵폭격기를 보유한 미국의 격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소형 어뢰정 6척밖에 갖지 못한 조선과 항공모함, 중순양함, 구축함을 보유한 미국의 격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재래식 무기밖에 갖지 못한 조선과 핵폭탄을 보유한 미국의 격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