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24

오늘의 협동조합운동과 내일의 진보적 국가체제

변혁과 진보 (67)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협동조합기본법 제정과 협동조합운동의 명암

2011년 12월 29일 국회가 협동조합기본법을 제정하였다. 손학규 당시 민주당 대표가 이 법을 발의하였는데, 한나라당도 반대하지 않아 순조롭게 제정되었다. 협동조합이란 기업체의 협동적 소유와 기업활동의 민주적 통제를 실현한 생산자들의 연합체인데, 한나라당이 그런 협동조합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전향적 태도'를 취한 것은 이례적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배경이 깔려있는 듯하다.

첫째, 이제껏 농업협동조합과 신용협동조합 운영경험에서 입증된 것처럼, 새누리당은 협동조합쯤은 얼마든지 시장경제의 장악력으로 통제, 관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협동조합기본법 제정에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둘째, 유엔은 올해 2012년을 '세계 협동조합의 해'로 정하였다. 세계적 범위에서 발생한 자본주의시장경제의 전반적 파산위기에서 탈출하려는 몸부림이 유엔에도 영향을 미쳐 협동조합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그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이 땅의 정치권에서도 협동조합기본법을 제정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유엔은 2012년을 '세계 협동조합의 해'로 정했다.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국회의 협동조합기본법 제정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를 분석적으로 고찰하고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근대적 의미의 협동조합운동은 1844년 12월 21일 영국의 로취데일에서 소비조합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소비자들이 단합하여 상점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거기에서 식료품과 생활필수품을 파는 협동상점을 개설한 것이다. 그로부터 10년만에 영국에서는 근 1,000여 개의 소비조합이 생겨났다.

△1844년 영국 로취데일에서 문을 연 최초의 소비조합 상점. 현재는 소비조합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 소비조합운동을 바탕으로 1895년에 결성된 것이 국제협동조합련맹(International Co-operative Alliance)이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가 있는 이 연맹에는 현재 세계 각국의 248개 전국적 범위의 협동조합들이 가입하였다. 이 연맹은 1923년에 7월 첫째 토요일을 '국제협동조합의 날'로 정하였다. 유엔은 이 연맹 창설 100주년을 맞았던 1995년에 7월 첫째 토요일을 '국제협동조합의 날'로 정하였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협동조합운동은 사회민주주의와 친화성을 갖는다. 협동조합운동이나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시장경제를 새로운 경제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개선하여 '착한 자본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상호친화성을 공유한다.

협동조합운동이 특정한 경제단위 안에서 자본주의시장경제를 개선하려는 운동이라면, 사회민주주의는 국가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시장경제를 개선하려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협동조합운동은 특정기업경제를 개선할 수는 있어도 자본주의시장경제를 개선하지는 못한다. 자본주의시장경제는 개선이 불가능한 경제체제다. 불치의 병에 걸린 중환자에게 목숨은 붙어 있으되 생존할 가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자본주의시장경제도 전반적 파산위기 속에서 연명하고 있으되 존속할 가망은 보이지 않는다.

병상에 누워 인공호흡기를 끼고 숨을 쉬는 중환자, 바로 이것이 오늘날 자본주의시장경제의 몰골이다. 명백하게도, 자본주의시장경제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대안경제로 대체되어야 하는 것이지, 개선할 수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시장경제가 존속할 가망이 없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는데도, 세상은 자본주의시장경제 이후의 새로운 대안경제에 대해 너무 무심하다. 수구세력이 조장한 오해와 무지 때문에 그처럼 무심하게 된 측면도 있지만, 진보세력의 사상이론적 한계 때문에 그렇게 된 측면도 있다.

서유럽에 깊이 뿌리를 내린 자유주의 사상이 자본주의시장경제 이후의 새로운 대안경제에 대한 정치적 상상력을 결정적으로 제약하였다. 새로운 대안경제에 대한 정치적 상상력이 그처럼 제약당했으니, 자본주의시장경제를 대체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저 개선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대안경제로 대체할 가능성을 전망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시장경제를 개선하려는 사회적 운동이 바로 협동조합운동이다.

협동조합운동은 기업활동에 대한 국가적 통제를 거부하고 조합원들끼리 자율적으로 기업활동을 통제하려는 자유주의 사상전통에 뿌리를 둔 것이다. 자유주의 시각으로 보면, 기업활동에 대한 국가적 통제는 곧 관료적 억압이고, 자기들끼리 기업활동을 통제하는 것은 곧 협동적 자율이다.

이처럼 국가적 통제를 거부하고 협동적 자율을 주장한 서유럽의 자유주의 전통은, 국제협동조합련맹이 규정한 협동조합의 기본성격에도 녹아 있다. 그 규정에 따르면, 협동조합이란 "공동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기업을 통해 공동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요구와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연합한 자율적인 연합체(autonomous association)"다.

그런데 이 인용문을 읽고 보니, 이전에 어디서 읽어본 듯이 눈에 익다.

국제협동조합련맹의 협동조합 성격규정은, 1881년에 출판된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라는 고전에서 프레드릭 엥겔스가 "생산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체의 기초 위에서 생산을 재조직한다"고 쓴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엥겔스의 책에 나오는 문제의 서술부분은 이런 문장으로 씌여 있다. "사회계급과 함께 국가도 불가피하게 조락할 것이다. 생산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체의 기초 위에서 생산을 재조직할 사회는, 그것이 속할 국가기구 전체를 유물전시관으로 보내서 청동도끼와 물레 옆에 놓아둘 것이다."

세상에 알려진 대로, 엥겔스는 국가조락 또는 국가기구 철폐가 사회계급관계 폐절와 함께 불가피할 것이고, 국가기구가 생산협동조합으로 대체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엥겔스의 생산협동조합 전망과 국제협동조합련맹 창설이 상호연관되었음을 밝혀줄 역사기록을 찾아내기는 힘들지만, 엥겔스가 생산협동조합을 전망한 때로부터 11년 뒤에 국제협동조합련맹이 창설된 것은 양자의 상호연관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러나 패역하고 압제적인 자본주의국가기구가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협동조합으로 장차 대체될 것이라는 엥겔스의 전망은 오류로 판명되었다. 그의 사상전개에서 그런 오류가 생긴 까닭은, 사회계급관계 폐절 이후에 출현할 새로운 국가체제에 대한 정치적 상상력이 결여되었기 때문이었다.

사회계급관계 페절 이후에 출현할 새로운 국가체제에 대한 정치적 상상력이 결여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그가 국가적 통제 자체를 거부하는 자유주의 사상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자유주의 사상이 새로운 국가체제에 대한 엥겔스의 정치적 상상력을 제약하였던 것이다.


퇴색한 생산협동조합 발전전망

19세기 말엽에 엥겔스가 전망한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협동조합은, 사회주의적 이상을 추구하는 진보적 인류에게 강렬한 정치적 상상력을 공급하였지만, 그가 종내 벗어나지 못한 자유주의 사상전통은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협동조합의 발전전망을 퇴색시켰다. 세 가지 점에서 퇴색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협동조합이 사회계급관계 폐절 이후에 출현할 새로운 진보적 국가체제와 상호모순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착오였다. 사회계급관계가 폐절되면, 생산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되고, 그에 따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협동조합을 결성하게 되는데, 그러한 생산관계의 근본적 변화에 조응, 부합하는 새로운 사회적 관계 위에 새로운 국가체제가 성립될 것이다.

 근본적으로 변화된 새로운 생산관계와 진보적으로 변화된 새로운 국가체제는 결코 상호모순적이지 않다. 낡은 생산관계를 청산하면, 당연히 낡은 국가체제도 사라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낡은 국가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국가체제가 출현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새로운 생산관계를 꿈꾸는 정치적 상상력을 키워가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와 그 관계 위에 성립될 새로운 국가체제를 꿈꾸는 정치적 상상력을 키워갈 필요가 있다. 

둘째, 사회계급관계가 폐절되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협동조합을 자발적으로 결성할 것이라고 상상한 것은 너무 성급한 결론이었다. 경험은 그런 성급한 결론이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이었음을 입증하였다.

이를테면, 사회계급관계가 폐절되기는커녕 사회계급적 모순이 더 격화된 사회에서도 협동조합이 결성될 수 있다. 예컨대, 지금 미국에는 29,000여 개 협동조합이 결성되어 있는데, 200만 명이 가입되었고, 그 협동조합들의 연간 총재정규모는 6,520억 달러에 이른다.

△ 국제협동조합련맹은 전세계 10억 명이 협동조합에 참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와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만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진보의식화되지 못하였으면, 다시 말해 사회계급관계가 폐절되었는데도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협동조합을 자발적으로 결성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계급관계 폐절은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협동조합 결성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사회계급관계 폐절과 함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진보의식화가 동반되어야 그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협동조합을 자발적으로 결성할 수 있다.

 셋째, 사회계급관계 폐절 이후에 출현할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협동조합은, 사회계급관계 폐절 이후에 출현할 진보적 국가체제 안에서 지속적으로 공고화되고 전면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사회계급관계가 존재하는 낡은 국가체제에서도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협동조합이 결성될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실험적 의의만을 가질 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협동조합은 사회계급관계가 폐절된 진보적 국가체제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협동조합과 진보적 국가체제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상호불가결한 관계에 놓여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협동조합과 진보적 국가체제가 상호불가결한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기업체의 전사회적 소유 곧 국유화를 실현하였을 때, 그 때 비로소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협동조합을 전사회적으로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계급관계 폐절 이후에 출현할 진보적 국가기구는 기업체의 전사회적 소유를 실현할 뿐 아니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진보의식화를 추동함으로써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협동조합을 전사회적으로 완성하는 길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이끌어 간다. 국유화를 실현하지 못한 자본주의시장경제에서 협동조합운동은 실패할 위험이 큰 실험일 뿐이다.


진보적 국가체제를 향한 정치적 상상

협동조합운동은 기업체의 전사회적 소유와 기업활동에 대한 국가적 경리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체의 협동적 소유와 기업활동에 대한 협동적 경리에 기초한다. 조합원들의 기업체 공동소유와 기업활동에 대한 협동조합의 민주적 통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기업체의 공동소유와 기업활동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왜 기업별로만 가능하고, 전사회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까닭은, 국유화와 계획경제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와 무지가 있기 때문이다.

기업체를 국유화하고, 시장경제를 계획경제로 대체하는 경우, 협동조합운동이 추진하는 기업체의 공동소유와 기업활동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기업의 벽을 뛰어넘어 전사회적으로 확대, 실현될 것이다.

조합원들의 기업체 공동소유와 기업활동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조절하고 지도할 관리위원회가 기업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처럼, 기업체의 전사회적 소유와 기업활동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전사회적 조절하고 지도할 진보적 국가기구가 국가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자율적 관리위원회를 요구하면서도, 진보적 국가기구를 거부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진보적 국가체제의 출현은, 자유주의 사상전통에서 착각하는 기업활동에 대한 성가신 국가개입이 아니며, 기업활동에 대한 관료적 억압은 더욱 아니다. 진보적 국가체제는 사회적 소유와 민주적 통제 위에 성립한 새로운 기업과 그 활동의 안전을 제국주의깡패국가의 침탈로부터 보호할 것이며, 새로운 기업활동을 지속적인 혁신과 발전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엥겔스가 살았던 19세기 말엽에는 생산활동이 아주 단순해서 생산협동조합이 생산활동을 이끌어 갈 수 있었지만, 오늘날 너무 복잡하고 방대해진 기업활동을 생산협동조합이 단독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를테면 주요산업부문의 거대기업에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협동조합이 결성된다 해도, 그런 거대기업이 요구하는 막대한 자본조달은 생산협동조합의 처리능력범위를 벗어난다. 또한 주요산업부문의 거대기업에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협동조합이 결성된다 해도, 그런 거대기업이 요구하는 첨단기술개발은 생산협동조합의 제한된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엥겔스가 살았던 19세기 말엽에는 막대한 자본조달과 첨단기술개발을 요구하는 거대기업이 없었으므로 생산활동을 생산협동조합에서 이끌어가는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매우 복잡해지고 방대해진 기업활동을 전사회적으로 조절하는  임무, 그런 기업활동이 요구하는 자본조달과 첨단기술개발을 추진하는 임무는 진보적 국가기구가 수행하는 것이다.  

사회계급관계 폐절 이후에 출현할 진보적 국가체제는 국유화와 계획경제를 실현함으로써 기업체의 협동적 소유와 기업활동의 협동적 경리를 기업체의 전사회적 소유와 기업활동의 전사회적 통제로 완성할 것이다.

이것은 다음 세대가 수행해야 할 미래과업이 아니라, 머지 않아 이 땅에 세워질 자주적 진보정권이 주요산업 국유화와 민주적 통제를 실현하는 변혁과정에서 추진해야 할 과업이다. (2012년 2월 24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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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8

차베스는 어떻게 700만 당원을 모을 수 있었을까?

변혁과 진보 (66)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3년 동안 추진되는 제1단계 사회변혁

"진료, 교육, 육아시설과 협동조합이 모두 갖춰진 발전센터에서도 '쉰 살이 넘어 글을 배웠다', '이제야 생계를 꾸릴 수 있게 됐다'는 격찬이 쏟아졌다. '모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차베스 대통령 덕택'이라는 소리가 이어졌고, 거리의 서민들은 차베스를 '우리들의 최고사령관'이라고 자주 불렀다. 베네주엘라 정부의 각종 복지혜택을 설명하던 안내자는 '완전무료(¡totalmemte gratuita!)'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카라카스 시내의 하천 강둑에는 '사회주의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이라고 씌여 있었다."

위의 인용문은 베네주엘라를 찾아간 <한겨레> 취재기자가 쓴 2010년 9월 19일부 보도기사의 일부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베네주엘라의 사회변혁세력이 두 단계 사회변혁노선을 명시적으로 제기한 적은 없지만, 지금 그 나라에서는 제1단계 사회변혁이 힘있게 추진되고 있다.

만일 베네주엘라의 사회변혁세력이 과격하고 급진적인 무단계 사회변혁을 추진하였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했더라면 그들의 사회변혁은 대중의 참여와 지지를 받지 못한채 고립되었을 것이며, 미국의 배후조종을 받은 수구우파세력이 그 틈을 노려 폭동 또는 정변을 일으켜 사회변혁을 좌절시켰을 가능성이 100%다.

비록 이 땅의 현실과 베네주엘라의 현실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두 단계 사회변혁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에 일맥상통하는 원칙이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주목하는 것은, 베네주엘라에서 제1단계 사회변혁의 추진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집권한 1999년 2월 2일부터 제1단계 사회변혁이 시작되었다고 하면, 이제껏 13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베네주엘라에서 13년 동안 제1단계 사회변혁이 추진되고 있지만, 그들은 아직 제2단계 사회변혁으로 나아갈 만큼 제1단계 사회변혁을 완수하지 못하였다. 왜 그렇게 오랜 기간이 걸리는 것일까?

사회변혁정세에 조성된 세력관계에서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13년 전, 자주적 진보정권을 세운 베네주엘라의 사회변혁세력이 그 동안 국민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급성장해왔지만, 사회변혁을 저지하려는 수구우파세력이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움직이고 있다.

사회변혁을 저지하려는 수구우파세력을 물리적으로 제압하지 않으면서 사회변혁을 추진하는 것이 차베스 대통령의 독특한 변혁방식이므로, 사회변혁을 저지하려는 수구우파세력을 비강제적으로 무력화시키거나 또는 사회변혁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려세우는 데 그토록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오늘날 베네주엘라에서 사회변혁세력이란 변혁담론에 나오는 어떤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각계각층 대중의 정치역량이 조직적으로 결집된 변혁주체를 뜻한다. 베네주엘라의 제1단계 사회변혁이 전개되어온 지난 13년은 바로 그러한 변혁주체를 조직하고, 강화하고, 확대해온 기간이었다. 

중요한 것은, 베네주엘라의 제1단계 사회변혁 13년 동안, 변혁주체의 조직화가 두 갈래로 추진되었다는 사실이다. 집권당인 베네주엘라 통합사회당(Partido Socialista Unido de Venezuela)을 변혁주체로 조직하는 과정이 있었고, 공동체평의회(consejos comunales)를 변혁주체로 조직하는 또 다른 과정이 있었다.

공동체평의회를 주민자치위원회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다른 여러 나라들에 존재하는 주민자치조직에 비할 바 없이 강한 결속력과 생활력을 지닌 코뮌적 생활공동체이므로 공동체평의회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통사당을 변혁주체의 상부구조라고 하면, 공동체평의회는 변혁주체의 하부구조라고 할 수 있다. 상부구조로 건설한 통사당과 하부구조로 건설한 공동체평의회가 유기적으로 통합됨으로써 사회변혁을 밀고나갈 변혁주체가 형성된 것이다.

바로 그러한 변혁주체를 형성하기 위해 그토록 오랜 시간과 힘든 노력이 요구되었던 것이며, 그런 변혁주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베네주엘라의 사회변혁은 실패와 좌절을 모르고 연속 승리와 계속 전진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사회변혁세력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건설하고, 이를 유기적으로 통합함으로써 변혁주체를 형성한 그들의 경험을 좀 더 분석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변혁주체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가운데서 어느 것이 먼저 건설되었을까? 공동체평의회 조직은 2005년에 추진되기 시작하였고, 통사당 건설은 2008년에 추진되기 시작하였으니, 약 3년 시차가 있었다. 변혁주체를 형성하는 데서 그만한 시차를 두었던 까닭은, 하부구조를 먼저 조직하고 그 기반 위에 상부구조를 조직하는 상향식 조직화를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변혁주체의 상향식 조직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활동가들이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며 조직한 공동체평의회

경향 각지에서 추진되던 공동체평의회 조직사업을 더욱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베네주엘라 정부가 공동체평의회법을 제정한 때는 2006년 4월이고, 그 법을 시행하던 중 현실에 맞게 개정한 때는 2009년 11월이다. 공동체평의회법 개정은 공동체평의회를 감독하고 지원하는 중앙정부 부서를 내오기 위한 것이었다.

공동체평의회 1개에 망라되는 가구수는 400가구 이하로 제한되었다. 공동체평의회에 참여하는 주민수는 지역실정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인구가 밀집거주하는 도시의 경우라 해도 2,000명을 넘지 않는다.

공동체평의회는 자기 지역의 지역개발사업을 자율적으로 추진하는데, 2007년을 기준으로 중앙정부가 국가재정 530억 달러 가운데 50억 달러를 그들의 지역발전사업에 지원하였다. 공동체평의회가 자체적으로 설립한 공동은행은 300개이며, 그 공동은행들을 통해 7,000만 달러의 지역개발기금을 확보하였다.

농촌의 공동체평의회들은 자체로 농장을 건설하였고, 도시의 공동체평의회들은 자체로 식품공급시설을 건설하였으며, 무상으로 봉사하는 병원, 상하수도 설치, 도로포장, 보육 및 교육시설, 체육시설, 문화시설 등을 자체적으로 운영한다.

△공동체평의회의 회의 모습

공동체평의회는 2006년 4월 10일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2007년 3월에는 전국적으로 19,500개가 건설되었고, 2010년 9월 현재 30,000개를 넘어섰다.

공동체평의회 건설은, 참여민주주의를 실현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라는 평가를 받는데,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베네주엘라 국민대중 자신이 생산현장과 생활현장에서 광범위하게, 자발적으로 사회변혁역량을 축성한 것이며, 자주적 진보정권을 더 광범위하고 공고한 대중적 지지기반 위에서 강화, 발전시킬 조직체를 건설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공동체평의회 건설은 자본주의가 파괴한 집단주의적 공동생활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다.
 
주목하는 것은, 각 지역의 정치활동가들이 6개월 동안 자기 지역에서 가가호호 방문하여, 무관심하고 냉담한 주민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 공동체평의회를 건설하였다는 점이다. 발이 닳도록 뛰어다닌 정치활동가들의 열정적인 노력이 없었으면, 공동체평의회를 건설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공동체평의회는 지방자치활동의 거점일 뿐아니라 지방경제활동의 거점이기도 하다. 공동체평의회를 건설함으로써 베네주엘라 민중은 시장경제의 질곡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생산활동과 재정활동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베네주엘라 민생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주었고, 빈곤퇴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를테면, 베네주엘라의 경제성장률은 2004년부터 2007년 기간에 평균 11.85%를 기록하였고, 사회변혁이 시작되기 이전인 1998년에 55.44%까지 치솟았던 빈곤율은 2008년 말에 26%로 떨어졌다. 


논쟁과 결별을 겪어야 했던 통사당 건설

베네주엘라 통합사회당은 2007년 3월 24일에 창당되었다. 통사당이 창당되기 이전에 차베스 대통령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던 진보정당은 1997년에 창당된 제5공화국운동(MVR)이다. 1998년 12월 6일에 실시된 대선에서 제5공화국운동의 차베스 후보가 56.20%의 득표율로 승리하였는데, 당시 치열하게 경쟁한 수구정당 '프로젝트 베네주엘라'의 후보가 얻은 득표율은 39.97%였다.

또한 2006년 12월 3일에 실시된 대선에서 차베스 후보가 62.84%의 득표율로 승리하였는데, 당시 치열하게 경쟁한 수구정당 '새로운 시대'의 후보가 얻은 득표율은 36.9%였다.

2006년 대선에서 승리한 차베스 대통령은 선거연합에 참가하였던 진보정당들을 통합하기 위하여 '베네주엘라 통합사회당 건설을 위한 대통령 직속위원회'를 설치하였고, 2008년 초에 그 위원회는 새로운 통합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7대 강령을 제시하였다.

7대 강령을 열거하면, 볼리바리안 혁명의 무조건적 수호, 라틴아메리카의 단결과 해방을 위한 국제연대, 각계각층 대중이 중심이 되는 참여민주주의(participatory democracy) 실현, 공동체적 국가사회주의(communal state socialism)를 지향하는 과도기 경제체제 건설, 생태환경의 요구에 부합하는 계획생산, 혁명과 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국방력 강화, 대중권력(popular power)에 기초한 새로운 국가건설이다. 

그런데 베네주엘라 공산당(PCV)은 7대 강령이 급진적 사회변혁을 요구하는 자기들의 좌파강령과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통사당 건설에 참가하지 않았다. '사민주의를 위하여(PODEMOS)'나 '만인을 위한 조국(PPT)' 같은 사민주의 계열의 중도파 정당들도 7대 강령이 자기들의 우파강령과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참가하지 않았다.

또한 전국노동자련맹(UNT)과 통합자율혁명계급조류(C-Cura) 같은 좌파노조들도 7대 강령이 우경화되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한 논쟁과 결별을 거치고 나서, 차베스 대통령이 제시한 7대 강령에 찬동하는 11개 정당들이 통합하여 마침내 통사당이 창당되었다.

△환호하는 지지자들과 함께 시가행진을 벌이는 차베스와 통합사회당 당원들.

군소정당들이 공동강령에 따라 통합하여 크고 힘있는 진보정당을 건설하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없는데, 왜 몇몇 정당들과 노조들은 통사당 건설에 불참하였을까? '이념적 선명성'을 주장한 것은 겉으로 드러낸 구실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는 자기들끼리 모여 당기 하나 내걸고 당권에 집착하던 정파들이 통사당 건설을 끝내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2011년에 이 땅에서 추진된 통합진보당 건설과정에서 있었던 씁쓸한 경험이 당시 베네주엘라에서도 있었다.

위에서 논한 것처럼, 차베스 대통령을 중심으로 자주적 진보정권이 세워지고 사회변혁이 추진되자, 오랜 잠에서 깨어난 베네주엘라 민중들이 전국 각지에서 공동체평의회를 내오기 시작하였는데, 통사당을 이끌 새로운 주도세력은 당연히 민중들 속에서 성장한 공동체평의회를 대표하는 새로운 정치활동가들로 재편될 수밖에 없었다. 진보정당이 그처럼 당의 체질을 개선하는 통합과 재편의 과정에서 지역기반도 없이 명망에만 의존해온 정파대표들은 자연히 뒤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당원수가 700만여 명에 이르는, 서방세계에서 가장 큰 진보정당인 통사당의 당원 평균년령은 35세다. 창당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청년정당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실제로 청년당원이 다수이므로 청년정당인 것이다. 통사당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한 청년당원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차베스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자주적 진보정권이 추진한, 민중을 위한 각종 사회복지정책의 혜택을 받으며 성장하고 공동체평의회에서 지역활동경험을 쌓은 청년들이다. 통사당과 공동체평의회가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변혁주체를 형성하였다는 말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통사당은 2008년 11월 23일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500만표에 이르는 압도적인 득표를 기록하면서 주지사직 22석 가운데 17석을 차지하였고, 시장직의 81%를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또한 베네주엘라 의회의 현재 의석분포를 살펴보면, 전체 의석 165석 가운데, 통사당 97석(59%), 5개로 분산된 사민당 계열의 정당들 28석(17%), 4개로 분산된 우파정당들 19석(12%), 베네주엘라 공산당 1석(0.6%) 등이다.

의석분포가 말해주는 것처럼, 당권에만 집착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5개로 분산된 사민당 계열의 군소정당들은 국민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존재감을 상실하였으며, 베네주엘라 현실에 맞지도 않는 급진적 사회변혁노선을 고수하며 당의 간판이나 붙들고 있는 베네주엘라 공산당은 국민대중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사실상 소멸하고 말았다. (2012년 2월 17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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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0

깃발파와 대중파의 파쟁으로 와해된 인민민주당

변혁과 진보 (65)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깃발파와 대중파의 갈등

다른 나라 진보정당이 겪었던 역사적 경험에서 교훈을 찾는 것은, 사회변혁의 진로를 모색하고 있는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에게 도움을 준다. 다른 나라 진보정당이 겪은 다종다양한 경험들 속에는 성공과 승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도 있다.

성공과 승리의 경험은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에게 자신감을 안겨주고, 실패와 좌절의 경험은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이 글에서 논하는 인민민주당의 경험은, "그들처럼 하다가는 우리도 그런 꼴이 되겠구나" 하는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의 무력강점과 장기화된 내전으로 말할 수 없는 재앙과 불행을 겪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아프가니스탄 왕국이 세워진 때는 1926년이었다. 그로부터 근 40년이 지난 1965년에 봉건군주제를 타도하고 사회변혁을 실현하려는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이 창당되었다.

1965년 새해 첫날 27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모여 인민민주당을 창당하고,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Nur Mohammad Taraki, 1913-1979)를 총비서로, 바브락 카말(Babrak Karmal, 1929-1996)을 제2비서로 선출하였고, 5명으로 구성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을 내왔다.

총비서를 당의 영도자로 선출하면 되었는데도 구태여 제2비서까지 선출해야 했던 까닭은, 인민민주당이 두 정파로 갈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민민주당에는 깃발파(Parcham)와 대중파(Khalq)가 당권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다. 총비서로 선출된 모하마드 타라키는 대중파 수장이었고, 제2비서로 선출된 바브락 카말은 깃발파 수장이었다.

깃발파와 대중파는 서로 다른 사회변혁노선을 추구하였다. 이를테면, 깃발파는 봉건적 이슬람사상에 젖어있고 아직 산업화 수준이 낮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소수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급진적 사회변혁을 추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면서, 각계각층 대중을 대중정당으로 결집시켜 진보적 민주주의변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와 달리, 소련에서 레닌주의를 직수입한 대중파는 소수의 선진적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계급정당을 건설하여 급진적 사회변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너무도 치명적인 좌경급진주의 오류

1973년 7월 13일 아프가니스탄 왕국에서 정변이 일어났다. 모하메드 자히르 샤(Mohammed Zahir Shah, 1915-2007) 국왕이 신병치료차 이탈리아로 출국한 틈에 모하메드 다우드 칸(Mohammed Daoud Khan, 1909-1978)이 무혈정변을 일으켜 군주제를 폐지하고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을 세우고 대통령에 취임한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군주제 폐지와 민주공화국 수립을 강령으로 제기한 인민민주당은 다우드 칸이 주도한 정변에 협력하였다.

그런데 원래 왕족 출신인 다우드 칸은 아프가니스탄 왕국에서 군사령관, 국방장관, 내무장관, 총리를 지낸 사람이다. 이러한 사정은, 다우드 칸의 정변이 군주제 폐지와 공화국 수립이라는 변혁을 일으켰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왕족 내부의 권력투쟁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음을 말해준다.

무혈정변으로 세워진 새로운 공화국이 비록 그런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인민민주당은 정변으로 조성된 새로운 정세변화의 요구에 따라 공화국 수립에 참가하였다.

공화국 수립 이후 5년이 지난 1978년 4월 17일 인민민주당의 깃발파 지도자인 미르 아크바 카이버(Mir Akbar Khyber, 1925-1978)가 자기 집 앞에서 암살당했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지 못한채 미궁에 빠진 그 암살사건은 다우드 칸 정권의 우파관리인 당시 내무장관의 암살지령에 따라 자행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4월 19일에 열린 카이버의 장례식에 참석한, 인민민주당 당원과 지지자 15,000여 명이 시작한 군중시위는 자연스럽게 반정부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인민민주당이 강력한 반정부투쟁으로 다우드 칸 정권과 정면충돌을 빚게되자, 다우드 칸 당시 대통령은 인민민주당 수뇌부를 전격 체포하여 반정부투쟁을 초기에 진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정치탄압을 받은 인민민주당은 군부와 손잡고 1978년 4월 28일 정변을 일으켰다. 아프가니스탄 현대사에 쏘어 혁명(Saur Revolution)으로 기록된 사변이 바로 그 정변이다. 당시 아프가니스탄 군부는 중무장 전투병력과 전투기를 동원하여 대통령 경호병력과 교전하였으며, 그 교전에서 다우드 칸 대통령이 목숨을 잃었다. 정변에 성공한 인민민주당은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을 세우고 곧바로 사회변혁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쏘어혁명 직후 카불 대학의 모습. 최초로 여학생들이 학생의 과반수를 넘어섰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여성이 입는 브르카(Burka)를 벗고 서양 옷을 입고 있다.

인민민주당이 정변을 일으켰다고 하지만, 실제로 정변의 주도세력은 인민민주당 내의 대중파였다. 따라서 대중파가 인민민주당 집권과정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불가피하였다. 이처럼 대중파가 집권에 성공하였으나, 그들의 속좁은 자파중심주의와 그들이 추구한 급진주의 사회변혁은 이제 막 시작한 아프가니스탄 사회변혁을 실패와 좌절로 끌어간 치명적인 요인으로 되었다.

첫째,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대중파는 당내 경쟁세력인 깃발파를 배제하였다. 이를테면, 대중파는 깃발파 수장인 바브락 카말을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밀어냈다. 대중파의 이러한 권력독점은 변혁역량을 스스로 축소시키는 결정적인 오류로 되었다. 
  
둘째, 권력을 독점한 대중파가 밀어붙인 급진적 사회변혁은 봉건적 이슬람 사상에 젖어 우경화된 아프가니스탄 사회에서 강력한 대중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를테면, 대중파는 지주가 소유한 토지만이 아니라 중농이 소유한 토지까지 무상몰수하는 급진적이고 좌경적인 토지개혁을 강행하여 대중의 원성과 저항을 자초하였다. 

대중파가 장악주도한 인민민주당 정권은 좌경급진주의 오류를 범하면서 대중적 지지를 얻기는커녕 되레 정치적으로 더욱 고립되었다.


인민민주당의 와해와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의 붕괴

인민민주당 정권이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고립된 기회를 놓칠세라,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을 반대하는 7개 이슬람 무장정파들과 아랍 각국에서 지원병으로 달려간 '아랍-아프간 의용군'이 총결집하여 무장반란을 일으켰고, 아프가니스탄은 내전상태에 빠져들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인민민주당 정권을 전복시킬 기회를 노려온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1979년 7월 3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장반란을 일으킨 이슬람 정파들에게 재정과 무기를 지원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지원임무를 중앙정보국(CIA)에게 맡겼다.

가뜩이나 내부파쟁으로 역량을 소모하고 좌경급진주의 오류를 범해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한 인민민주당 정권은 미국의 강력한 배후지원을 받은 이슬람 무장정파의 집중공격으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소멸위기에 몰렸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개입한 것을 본 소련은 미국의 군사개입과 이슬람 무장정파들의 반란으로 인민민주당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 친미정책에 매달린 이란의 팔레비 왕조가 건재하고, 1977년 7월 5일 친미군부세력의 정변으로 파키스탄의 부토 정권이 전복된 상황에서, 이란과 파키스탄 사이에 위치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민민주당 정권마저 미국의 배후지원을 받은 이슬람 무장정파들에 의해 무너지는 것은 서아시아지역에서 소련의 전략적 이익에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개입하기로 결정하였다. 1979년 12월 24일 소련이 파병한 700명의 특수전 병력과 54명의 KGB 요원들은 2,500명의 아프가니스탄 수비군 병력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이것이 '333-폭풍 작전(Operation Storm-333)'이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 1929-1979)은 교전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소련이 아민 정권을 무력으로 전복한 까닭은, 아민을 '쏘어 혁명의 배신자'로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원래 대중파 수뇌부에 속했던 아민은 쏘어 혁명 직후 자기에게 경쟁적이었던 깃발파 수뇌부를 모조리 숙청하여 변혁역량을 극도로 약화시켰고, 1979년 9월 14일에는 자신과 함께 쏘어 혁명을 이끌었던 대중파 수장인 무하마드 타라키 대통령마저 암살하고 정권을 찬탈하였다.

아민 대통령이 교전과정에서 피살당한 직후인 1979년 12월 28일 깃발파 수장 바브락 카말이 소련의 전폭적인 비호를 받으며 정권을 잡았다. 카말 대통령은 대중파 집권기에 무상몰수한 중농의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각계각층 대중들이 참가하는 광범위한 민족전선(National Front)을 구축하여 변혁역량을 강화하고, 소련 국기를 모방하여 만드는 바람에 대중의 비난을 자초한 아프가니스탄 국기를 대중의 요구에 맞게 다시 제정하는 등 이전에 대중파가 저질렀던 실책과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대중파와 깃발파의 파쟁과 대중파의 좌경급진주의 오류가 극심한 혼란을 몰아온 아프가니스탄 사회변혁은 대중으로부터 신뢰를 회복할 수 없었고, 더욱이 내전에 휘말려 소련의 파병과 정치간섭을 용인하고 말았으니, 인민민주당 정권이 다시 일어설 가망은 없었다.

소련은 그런 인민민주당 정권을 유지해주기 위해 50,000명 병력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하여 무자헤딘의 무장반란을 진압하려고 애썼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민족전선'을 창설한 지도성원 27명 전원이 '민족전선' 창설 직후 불과 한 달 안에 무자헤딘 반란군에게 모두 암살당하는 바람에 '민족전선' 자체가 붕괴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소련군.
 
대규모 파병과 정치적 간섭으로 인민민주당 정권의 명맥을 간신히 유지해주던 소련에서 1985년 3월 11일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된 미하일 고르바쵸프(Mikhail Gorbachev)는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1988년 5월 15일부터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을 단계적으로 철군하기 시작하여 1989년 2월 15일 철군을 완료하였다.
 
1991년 12월 23일에 일어난 소련 붕괴와 함께 아프가니스탄 사회변혁도 종말을 고했다. 1980년대 후반기에 당원수가 160,000명이나 되었던 인민민주당은 1992년 3월에 맥없이 와해되었고,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은 1992년 4월 28일에 자기 존재를 끝마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불가피한 당권경쟁인가, 와해에 이르는 적대적 파쟁인가

인민민주당이 와해된 때로부터 꼭 20년이 지났다. 그런데 세상이 다 아는 것처럼, 오늘도 여전히 미국의 무력강점과 친미예속세력의 집권이 지속되는 아프가니스탄의 절망적 상황은 그 땅에서 사회변혁의 전망을 완전히 앗아가버린 듯하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진보정당의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기 나라 현실에 맞지 않는, 다른 나라에서 직수입한 급진주의 변혁노선을 떠받드는 급진주의 좌익정파가 당권을 장악하고 사회변혁을 급진적으로 밀어붙이면, 변혁의 주인으로 나서야 할 대중으로부터 외면과 배척을 받아 결국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이 좌절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의 좌경급진주의 오류가 말해주는 뼈저린 실패교훈이다.
 
두 단계 사회변혁노선을 추구하는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좌경급진주의 함정을 뛰어넘어 더 많은 진보정치역량을 묶어세우고 더 많은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해 통합진보당을 건설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식 사회변혁의 머나먼 길에서 첫 걸음에 지나지 않는다.

통합진보당 깃발 아래 여러 정파들과 계파들이 결집하였으니 그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하다. 당권을 둘러싼 정파적, 계파적 내부갈등은 어느 정당에서나 일어날 수 있지만, 그런 내부갈등이 조절기능을 상실한 채 적대적 파쟁으로 변질, 악화되면 당의 역량이 급속히 소진되어 결국 당 자체가 와해될 수밖에 없다.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에서 당권경쟁을 벌였던 깃발파와 대중파가 조절기능을 상실한 내부파쟁으로 역량을 소모한 나머지 결국 와해되어버린 쓰라린 교훈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여긴다면, 그것은 통합진보당에 내재된 내부갈등요인을 너무 가볍게 보는 오판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최근 통합진보당이 드러낸 내부갈등은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창당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정당이 정적들과 격돌할 총선을 앞두고 내부갈등을 드러낸 것은 실로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통합진보당에 결집한 진보정치활동가들은 당내의 여러 정파 및 계파들의 당권경쟁이 자해적 파쟁으로 변질, 악화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와 날카로운 경각심을 가져야 하며, 당권경쟁을 합리적으로 조절하는 순기능과 상호타협적 분위기를 의식적으로, 부단히 강화할 필요가 있다. 통합진보당에서 당권경쟁은 불가피하지만, 적대적 파쟁은 와해의 지름길이다. (2012년 2월 10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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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5

세 가지 과도강령과 두 군데 전략공간

변혁과 진보 (64)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대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좌파적 정치암호

극도로 우경화된 우리 사회에서 대중언론이 좌파의 목소리를 전달하지 않지만, 요즈음 자본주의시장경제의 위기와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사회정치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 분위기에서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좌파적 발언이 간혹 보도되는 경우가 있다.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발언에서 극복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악조건을 이겨낸다는 뜻인데, 자본주의체제의 악조건을 이겨낸다고 표현하는 것은, 체제는 그대로 놔둔 채 체제의 악조건을 이겨낸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으므로,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말은 정확한 용어가 아니다.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말은 자본주의체제 변혁이라는 뜻으로 다시 가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다.
 
세계적 범위에서 자본주의체제가 지배적인 이 시대에 모든 형태의 진보와 변혁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가 자본주의체제 변혁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다. 낡은 자본주의체제를 새로운 사회체제로 바꾸어가는 각이한 단계의 사회역사적 발전과정을 통틀어 사회변혁이라 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체제 변혁이라는 말은 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라, 진보와 변혁을 위해 투쟁하는 모든 정치활동가들의 지향을 표현하는 공유물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체제를 변혁해야 할 필요성을 아직 알지 못하는 대중에게 자본주의체제 변혁이라는 구호나 강령을 제시하는 것은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 구호는 정치조직 또는 개인이 제기한 정치적 요구와 주장이고, 강령은 정치조직이 대중에게 공약한 기본방침이다.

그러므로 우리식 사회변혁의 현 단계에서 자본주의체제 변혁은 급진주의자들끼리 주고받으며, 대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좌파적 정치암호가 로 들린다. 이 땅의 사회변혁과 진보정치가 그처럼 대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좌파적 정치암호를 피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회변혁과 진보정치는 진보변혁세력이 단독으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변혁세력이 대중과의 관계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진보변혁세력의 주관적 요구가 아니라 대중의 지지를 받는 진보정당의 정치역량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보변혁세력은 대중으로부터 동떨어진 비좁은 공간에서 좌파적 언사를 꺼내놓을 것이 아니라, 대중의 정치적 요구를 정확히 반영한 강령을 가진, 그리하여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 진보정당을 건설하고 그 정당 안에서 적극 활동함으로써 그 정당을 사회개혁에서 사회변혁으로 전진시키는 것이다.  


최소강령, 과도강령, 최대강령

자본주의체제는 급진적으로 단번에 변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사회변혁은 급진적으로 단번에 완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변혁의 먼 앞길에는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이 가닿지 않는 뜻밖의 난제들이 수없이 제기되고 돌출될 것이다. 우리식 사회변혁을 단계별로 추진해야 좌절위험을 피하고 승리의 고지에 다가설 수 있다.

그런데 우리식 사회변혁의 단계적 추진은 강령문제에 직결된다. 이를테면, 낡은 자본주의체제를 새로운 사회체제로 변혁하는 것은 사회변혁이 궁극적으로 추구하여야 할 최대강령(maximum program)이므로, 우리식 사회변혁의 현 단계에서는 자본주의체제 변혁을 강령으로 조급하게 제기할 수 없다.

최대강령과 대비되는 것은 최소강령(minimum program)인데, 최소강령은 사회개혁을 사회변혁으로 전진시키는 첫 단계에서 제기되는 강령이다. 그래서 최소강령은 사회개혁과 사회변혁의 중간선에 자리잡는다. 2010년 12월 15일 블로그 '변혁과 진보'에 게시된 나의 글 '중간강령(interim program)을 위하여'에서는 최소강령을 중간강령이라고 불렀다.

최소강령은 대중의 지지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강령, 그리하여 통합진보당이 당장 추진할 수 있고, 또 마땅히 추진해야 하는 강령이다. 예를 들면, 통합진보당이 제시한 재벌해체와 전민복지실현, 노동악법 및 '국가보안법' 폐지,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 따른 남북화해협력 추진 같은 대중의 정치적 요구들을 반영한 강령들은 최소강령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기는 문제는,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에 걸쳐있는 넓은 간격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과도강령(transitional program)이라는 개념이다.

원래 과도강령이라는 개념은 리온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가 1938년에 발표한 고전문헌 '자본주의의 소멸고통과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 권력장악을 준비하기 위한 과도적 요구에 부응하는 대중동원(The Death Agony of Capitalism and the Tasks of the Fourth International: The Mobilization of the Masses around Transitional Demands to Prepare the Conquest of Power)'에 나왔던 것이다.

그 고전문헌에서 트로츠키는 자본주의체제가 붕괴위기에 빠진 당대 유럽과 미국의 혁명정세를 고찰하면서 낡은 최소강령이 새로운 과도강령으로 대체되었다고 지적하고, 혁명을 위해 각계각층 대중을 조직적으로 동원하는 것을 당면임무로 규정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경제공황 발생과 자본주의체제 붕괴위기, 파시즘 대두와 제국주의침략전쟁 도발, 유럽의 인민전선 형성과 아시아의 식민지민족해방혁명 활성화 등으로 전 세계가 그야말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1930년대 후반기에 살았던 트로츠키의 급진적 사고가 빚어낸 논리다. 오늘 이 땅의 정세는 1930년대 후반기 정세와 크게 다르기 때문에, 최소강령이 과도강령으로 대체되었다고 보는 급진주의적 발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지금 이 땅에서 최소강령이 과도강령으로 대체된 급진적인 정세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소강령에만 몰두하고 과도강령을 외면하는 것은 현실에 안주하면서 사회변혁의 발전전망을 포기하는 우경적 오류다.

극도로 우경화된 이 사회에서 최소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대중과 함께 힘있게 밀고 나가면서, 그 투쟁의 지향점을 언제나, 변함없이, 그리고 한 치의 착오없이 과도강령에 집중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최소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당면투쟁이 과도강령에 집중된 지향성을 놓쳐버리는 순간, 사회변혁과 진보정치는 우경의 늪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식 변혁담론이 제시하는 최소강령이 사회개혁을 사회변혁으로 전진시키기 위한 중간강령이라면, 우리식 변혁담론이 제시하는 과도강령은 사회변혁을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전진시키기 위한 과도강령이다. 우리식 사회변혁의 과도강령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이 전에 발표한 여러 글들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리식 사회변혁의 과도강령도 최소강령과 마찬가지로 진보적 민주주의강령과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이라는 큰 양대 범주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또한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진보적 민주주의강령과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을 실현하는 주체가 될 것이며,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강력한 지지기반 위에 세워지는 진보정권이 그 양대 강령을 실현하는 직접적 수행자가 될 것이다.

전망적으로 말하면, 진보적 민주주의강령을 실현해가는 과정에서 주요산업을 국유화하고 민족자립경제와 민족통일경제를 확립하는 사회경제적 변혁이 추진될 것이다. 또한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을 실현해가는 과정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주한미국군 철군, 남북 군사적 긴장 해소, 한미동맹 폐기를 추진할 것이고, 남북 각계각층 대표자들이 참가하는 민족통일회의와 남북 최고위급 지도자의 통일회담을 성사시켜 통일공화국을 건설할 것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강력한 지지기반 위에 세워진 진보정권이 그처럼 사회경제적 변혁을 추진하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할 때, 우리식 사회변혁은 짧은 기간에 낮은 단계를 통과하여 마침내 더 높은 단계로 전진할 것이다. 


점령해야 할 전략공간이 두 군데 있다

사회변혁과 진보정치의 설계도를 그리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건축설계사들이 설계도면만 말끔하게 그려놓는다고 해서 건설공사가 실제로 진척되는 것은 아니다. 설계공정도 건설공정의 일부이지만, 그것은 길고 복잡한 여러 공정들 가운데 첫 공정일 뿐이다.

비유로 말하면, 설계도면에 따라 건설공사를 밀고 나갈 건설기사가 있어야 하고, 건설기사와 함께 공사를 떠맡을 건설근로자가 있어야 하고, 건설공사가 설계도면에 따라 올바르게 진척되도록 이끌어가는 현장감독이 있어야 한다. 설계도면을 손에 쥔 건설기사가 바로 통합진보당이고, 건축공사를 떠맡은 건설근로자가 바로 대중이고, 건설공사를 이끄는 현장감독이 바로 통합진보당에 속한 진보정치활동가들이다.

그런데 지금 이 땅의 사회변혁과 진보정치는 건설기사와 현장감독을 만나기는 했으나 정작 가장 중요한 역할과 임무를 맡아야 할 건설근로자를 만나지 못해 건설공사를 아직 본격적으로 추진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아무리 유능한 건설기사와 현장감독이 있더라도, 건설공사를 실제로 떠맡을 건설근로자가 없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당면문제는 대중을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이 만나야 할 대중은 누구이며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식 변혁담론에서 말하는 대중은 불특정 다수를 뜻하는 개념이 아니다. 진보의식화된 대중과 지지기반화된 대중이 우리식 변혁담론에 나오는 대중개념이다.

진보의식화된 대중은 통합진보당 당원들 또는 진보적 대중단체 성원들이고, 지지기반화된 대중은 평소에 통합진보당을 지지하고 선거국면에 그 당에게 지지표를 안겨주는 각계각층 대중이다. 진보의식화된 대중의 역할과 임무는 최소강령을 실현하는 강력한 투쟁전선을 구축하는 것에 집중되고, 지지기반화된 대중의 역할과 임무는 그 전선에 전략물자와 증원병력을 공급하는 전략적 후방사업에 집중된다.

전선구축을 담당한 진보의식화된 대중의 수가 10이라면, 후방사업을 담당한 지지기반화된 대중의 수는 100 정도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후방이 든든할수록 전선의 투쟁력이 강해지는 법이다.

통합진보당과 진보의식화된 대중의 관계는 조직관계이고, 통합진보당과 지지기반화된 대중의 관계는 소통관계다. 진보의식화된 대중은 각 부문별 및 지역별로 엮어지는 각양각색 현장조직들에 망라되고, 지지기반화된 대중은 각종 언론매체들과 현대적 통신수단들을 통해 통합진보당과 일상적으로 상호소통을 진행한다. 우리식 변혁담론에서 말하는 진보정치의 대중화란 어떤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그러한 현장조직과 상호소통을 끝없이 확대해가는 전략사업을 뜻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통합진보당이 풀어나가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대중과의 관계다. 어려움을 무릅쓰고 통합진보당을 건설한 것 자체가 당과 대중의 관계를 확장하기 위한 정치적 노력이었다. 통합진보당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려는 당면목표를 설정한 것도, 진보정치를 대중화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단순히 의석수나 몇 석 더 얻어보려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한나라당이나 민주통합당이 국회를 양분하여 의석을 대부분 차지하였지만, 현장조직과 상호소통에서는 상당히 무기력하고 어떤 측면에서는 심지어 불능화된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통합진보당이 그 두 당과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가는 전략적 차별성은, 현장조직과 상호소통을 끝없이 확대하여 진보정치의 대중화를 실현하려고 애쓰는 전략사업에서 뚜렷이 발현된다. 지금 통합진보당의 의석수는 비록 적지만, 현장조직과 상호소통에 당력을 집중하여 정력적으로 추진하면, 장차 의석판도를 뒤집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원내교섭단체 구성이란 우리식 사회변혁의 초기단계에서 통합진보당이 취하는 의회전술이다. 그에 비해, 현장조직과 상호소통은 사회변혁의 초기단계에서는 물론이고, 사회변혁을 수행하는 전 단계에서 전략적 사고의 출발점, 정치적 판단의 기준점, 변혁실현의 핵심문제으로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통합진보당 일각에서는 원내교섭단체 구성이라는 의회전술을 판단과 행동의 중심에 놓으려는 편향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식 변혁담론에 대한 학습부족이 그런 편향을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뉴욕 맨해튼에 있는 주코티 공원에 몰려간 미국의 진보활동가들은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를 외쳤지만, 이 땅의 통합진보당이 진보정치로 점령해야 할 전략공간은 두 군데다.

'대중의 생활공간을 점령하라!'
'대중의 소통공간(SNS)을 점령하라!'
(2012년 2월 3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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