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29

조작된 ‘공중우세’와 우매한 ‘맥스 썬더’

<연재> 한호석의 진보담론 (233)
통일뉴스 2012년 10월 29일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그들은 대나무로 만든 가건물에서 전투기를 정비하였다

‘베트남 전쟁의 미그-17, 미그-19 부대들(MiG-17 and MiG-19 Units of the Vietnam War)’이라는 제목의 책이 2001년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그 책을 쓴 사람은 당시 헝가리 공군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아이스트반 토퍼쩌(István Toperczer)다. 그는 베트남 인민공군(Vietnam People's Air Force) 박물관에 보존된 전투기록을 열람하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북베트남 공군 조종사들과의 면담에서 직접 들은 전투경험에 기초하여 그 책을 집필하였다. 그가 풍부한 사진자료를 곁들여 5년 동안 집필한 그 책은, 베트남 전선에서 벌어진 공중전에 관한 베트남 외부의 기록들 가운데 가장 정확하고, 가장 자세한 것으로 인정된다. 이 글은 토퍼쩌의 책을 주로 하고 다른 자료들에 들어있는 정보를 약간 더 보충하여 작성한 것이다.

북베트남 공군이 전투력을 처음으로 갖게 된 때는 1964년 2월 3일이다. 그 날 ‘붉은 별’이라는 별칭으로 불린 제921전투비행대가 중국에서 훈련을 받고 귀국한 공군 조종사 약 52명과 소련이 보내준 미그-17 36대로 창설되었다. 그 이전에 북베트남 공군에는 전투비행단이 없었으며, 낡은 기종의 수송기 44대를 보유한 제919수송비행단과 낡은 기종의 훈련기 27대를 보유한 제910훈련비행단만 있었다.

1964년 8월 2일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고 그것을 구실로 북베트남에 대규모 공중폭격을 개시하여 베트남 전쟁이 확전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북베트남은 당시 중국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공군 조종사들을 급히 귀국시켰고, 1965년 여름에는 소련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공군 조종사 30명을 귀국시켜 1965년 9월 7일 두 번째 전투비행단인 제923전투비행단을 창설하였다. 또한 북베트남은 소련에서 훈련을 받고 귀국한 공군 조종사들과 북베트남 제910훈련비행단에서 훈련을 받은 공군 조종사들로 1969년 2월 세 번째 전투비행단인 제925전투비행단을 창설하였다.

제921전투비행단에는 미그-17과 미그-21이 혼합배치되었고, 제923전투비행단에는 미그-17이 배치되었고, 제925전투비행단에는 미그-17 4대와 미그-19 9대가 배치되었다. 베트남 전쟁이 종전단계로 접어든 1974년에 중국이 북베트남에 추가로 보내준 미그-19 24대가 제925전투비행단에 배치되었다. 당시 북베트남 공군은 중국이 미그-19를 면허생산한 J-6 24대를 중국에서 도입하여 급히 실전배치하였는데, 기체에 그려진 중국인민해방군 공군 표식 위에 베트남 공군 표식을 덧칠하는 바람에 밑에 칠해진 중국인민해방군 공군 표식이 드러나 보이기도 하였다.

미국이 북베트남에 대한 대규모 공중폭격을 개시한 1964년 8월, 첫 전투비행단을 창설한지 불과 6개월밖에 되지 않은 북베트남 공군은 실전경험은 고사하고 숙련도 제대로 되지 못한 초보단계에 있었다. 당시 북베트남 공군은 공군 조종사를 양성하는 공군사관학교도 없었고, 소련과 중국에서 훈련을 받고 귀국한 숙련된 조종사도 너무 부족하였고, 그나마 숙련된 조종사들은 후배 조종사들의 훈련을 지도하는 데 열중하여 공중전투에 제대로 참가할 수도 없었다. 북베트남이 중국의 지원을 받아 공군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미그-17 정비공장을 건설하게 된 것은, 종전을 약 1년 앞둔 1974년 2월 22일 북베트남과 중국의 공군지원협정 체결로 가능하게 되었다.

1972년 5월 3일부터 10월 23일까지 미국은 B-52 폭격기를 3,000회나 출격시켜 약 40,000t의 폭탄을 집중투하하였다. ‘라인백커 작전(Operation Linebacker)’이라는 대규모 공중폭격이다. 그 공중폭격으로 북베트남 공군기지들에 주기되었던 훈련기들이 모두 파괴되었다. 북베트남 공군은 중국 영토로 피신하여 1973년 말에 가서야 공군 조종사 훈련을 재개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공군 조종사 훈련생 10명이 훈련기 한 대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훈련조건이 열악하였다.

또한 베트남 전쟁 시기 북베트남 공군이 운용하는 미그-17을 정비하기 위해서는 정비사 120명이 있어야 했는데, 당시 정비사는 43명밖에 없었다. 위에서 언급한 토퍼쩌의 책에는 대나무로 만든 마굿간처럼 생긴 가건물 안에 미그-17을 들여놓고 정비하는 모습을 촬영한 현장사진들이 들어있다.

그처럼 열악한 조건에서 싸워야 했던 북베트남 공군 조종사들에 비해, 미국 공군 및 해군 조종사들은 6.25전쟁에서 풍부한 실전경험을 쌓고 베트남 전쟁에 대비한 전투훈련을 받았다. 실전경험과 전투훈련을 비교하면, 북베트남 공군의 항공무력은 미국 공군 및 해군의 항공무력에 상대가 되지 못하였고, 정비능력을 살펴봐도, 당시 북베트남 공군의 정비능력은 미국 공군 및 해군의 정비능력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하였다.

북베트남 공군기들과 미국 공군기 및 해군기들이 공중전을 개시하였던 1965년에 북베트남 공군 주력기는 최고속도가 마하 0.9인 소련산 아음속 전투기 미그-17이었다. 그에 비해, 미국 공군과 해군이 베트남 전선 공중전에 투입한 전투기들은 마하 2.0 초음속으로 비행하는 F-105(썬더칩), 마하 2.2 초음속으로 비행하는 F-4(팬텀), 마하 1.8 초음속으로 비행하는 F-8(크루세이더)이었다. 북베트남 공군의 미그-17에는 37mm 기관포와 23mm 기관포밖에 없었지만, 미국 공군 및 해군 전투기들은 공대공 미사일로 무장하였다.

북베트남 공군기지도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공군기지마다 활주로는 한 개밖에 없었고, 항공연료 공급도 턱없이 부족하였고, 발동기를 돌려 공군기지의 전력수요를 충당해야 하는 너무도 열악한 조건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항공작전에서 ‘생명선’이라고 할 수 있는 레이더부문에서도 당시 북베트남 공군은 결정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국토의 60%가 밀림으로 덮혀있는 베트남의 자연지리적 조건에서 북베트남 공군이 보유한 레이더는 맥을 추지 못하였다. 북베트남 공군이 가동한 레이더는 최장 40km밖에서 비행물체를 포착할 수 있는 성능을 가졌지만, 밀림지대에서는 겨우 4km밖의 공중감시만 가능하였다. 이것은 초음속으로 접근하는 미국군 전투기에 대한 레이더 공중감시가 사실상 불가능하였음을 뜻한다.

전투기 보유대수로 보나, 전투기 성능으로 보나, 전투기 조종사 훈련수준으로 보나, 전투기 정비능력으로 보나, 전투기 무장력으로 보나, 불리한 자연지리적 조건으로 보나, 북베트남 공군은 미국 공군 및 해군에게 전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미국식 전쟁관념으로 생각하면, 북베트남 공군의 항공무력은 미국 공군 및 해군의 항공무력에 완패를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베트남 전선의 공중전은 예상을 뒤엎고 정반대로 전개되었다. 모든 면에서 그처럼 열악한 조건에 있었던 북베트남 공군기들은 공중전에서 미국 공군기와 해군기에게 결코 밀리지 않았고, 당당하게 맞서싸우며 결국 미국의 ‘공중우세’를 무너뜨렸다. 미국의 전투기 보유대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망정이지, 만일 북베트남과 미국의 전투기 보유대수가 엇비슷하였다면 미국은 공중전 초기에 이미 참패를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창설된지 불과 6개월밖에 되지 않은 북베트남 공군이 세계 최강이라고 자타가 공인한 미국 공군 및 해군을 꺾어버린 세계 전쟁사의 ‘기적’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1965년 4월 3일의 첫 공중전

1965년 초 어느 날, 당시 ‘세계 최강’이라고 자타가 공인한 미국군 전투기들을 상대로 첫 공중전을 벌이게 된 북베트남 공군 지휘소에서는 조국의 하늘을 사수할 결의와 투지에 불타는 젊은 공군 조종사 몇 사람이 전술토의에 열중하고 있었다. 수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자기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을 상대로 맞서싸울 첫 공중전에서 그들이 믿는 승리의 요건은 두 가지였다. 한 가지 요건은 자기들이 조국 영공에서 공중전을 벌인다는 것이었고, 다른 한 가지 요건은 조국의 하늘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긴장된 전술토의과정에서 어떤 공군 조종사는 적기를 향해 돌진하여 충돌하는 자폭전술을 제기하였으나, 그런 전술은 채택되지 않았고 아군기 손실을 줄이면서 이길 수 있는 전술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들의 전술토의에 제출된 중요한 정보는 미국군 전투기들이 폭탄과 공대지 미사일을 잔뜩 싣고, 미리 정해진 공격목표를 향해 항로를 거의 바꾸지 않고 비행한다는 것이었다. 무거운 탑재중량과 고정된 항로비행이 미국군 전투기의 민첩성을 떨어뜨리는 결정적인 한계라는 사실을 간파한 북베트남 공군 조종사들이 전술토의에서 내린 결론은, 공대공 미사일이 없는 미그-17이 공대공 미사일로 무장한 미국군 전투기와 맞서기 위해서는 미국군 전투기를 가까운 거리로 유인하여 근접공중전을 벌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300m 거리에서 기관포로 적기를 격추하는 공중전을 연습해오던 북베트남 공군 조종사들은 적기에 150m까지 바짝 접근하여 기관포로 격추하는 대담한 연습을 하면서 첫 공중전을 준비하였다.

마침내 결전의 날이 왔다. 1965년 4월 3일 27,000t급 항공모함 핸콕(USS Hancock)에서 이륙한 미국 해군 제211전투비행단 소속 F-8E 4대가 북베트남 영공을 깊숙이 침범하여 오전 9시 40분 타오(Tao), 도렌(Do Len), 함롱(Ham Long) 등에 있는 다리들에 공중폭격을 개시하였다. 7분 뒤 노이 바이(Noi Bai) 공군기지를 이륙한 북베트남 공군 전투기 편대가 미국군 전투기 편대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가시거리에 접근한 시각은 오전 10시 9분이었다. 적기를 발견한 순간, 북베트남 공군 전투기들은 연료통을 투하하여 기체무게를 줄이면서 즉각 공중전에 돌입하여, 미국군 전투기 두 대의 뒤쪽으로 재빨리 기동하였다. 미국군 전투기를 뒤쪽에서 바짝 따라가면서 사거리 안에 들어서는 순간, 북베트남 전투기의 기관포가 불을 뿜었다. 기관포에 맞은 F-8E 한 대가 화염에 휩싸여 지상에 추락하였다. 이것은 북베트남 공군 편대장 팜 응옥 란(Pham Ngoc Lan)이 조종한 미그-17이 미국군 전투기 F-8E를 사상 처음으로 격추한 순간이었다.

첫 공중전은 계속되었다. 북베트남 공군 조종사 트란 민 푸옹(Tran Minh Phuong)이 다른 F-8E를 향해 기관포를 발사했으나 빗나갔다. 오전 10시 15분 판 반 툭(Phan Van Tuc)은 오른쪽에 나타난 F-8E에 접근하여 기관포를 발사하였다. 기관포를 맞은 F-8E는 화염에 휩싸이며 추락하였다.

그런데 기체무게를 줄이기 위해 공중전 직전에 연료통을 투하하였던 편대장 팜 응옥 란의 미그-17는 연료가 거의 떨어져 공군기지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지상관제소는 그에게 전투기를 포기하고 낙하산으로 탈출하라고 무선으로 지시하였으나, 북베트남 공군에 전투기가 몇 대밖에 없고, 더욱이 앞으로 미국군 전투기들과 맞서싸울 임무가 남아있다고 생각한 그는 전투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비상착륙을 시도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비행하던 그의 시야에 두옹(Duong) 강변에 길게 뻗은 모래밭이 내려다보였다. 그는 미그-17을 그 모래밭에 비상착륙시킴으로써 첫 공중전을 완승으로 마감할 수 있었다.

공중전에서 승리한 비결

첫 공중전에서 승리한 북베트남 공군은 그 이후 계속된 공중전에서도 연전연승하였다. 그들이 공중전에서 승리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첫째, 북베트남 공군은 전투기 4대를 1개 편대로 편성하여 공중전에 출격시켰다. 원래 편대장 전투기와 편대원 전투기들의 비행간격은 50~100m였고, 편대비행 중에는 100~200m 간격을 유지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밀착대형비행은 공중전에 불리하였다. 그래서 편대장 전투기와 편대원 전투기들의 비행간격을 600~800m로 늘이고, 편대비행 중에는 800~1,200m 간격을 유지하는, 공중전에 유리한 비행대형으로 바꾸었다.

둘째,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군 전투기들은 적기 출현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지상표적을 공격하는 폭탄투하에 신경을 썼다. 그에 대응한 북베트남 공군 전투기들은 매복전술과 기습전술로 맞서싸웠다. 그들의 공중전 전술은 적기의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도록 무선교신을 꺼놓은 채 저고도 매복비행을 하다가 적기를 발견하면, 연료통을 투하하고 비행고도를 높여 고속으로 상승하면서 적기를 요격하는 저고도 기습전술이었다. 그런 까닭에 북베트남 공군 전투기들에게는 저공비행이 필수적이었는데, 미국군 전투기들은 고도를 3~5km 정도로 유지하며 비행하였던 것에 비해, 북베트남 공군 전투기들은 고도를 1~2km 정도로 낮게 유지하며 비행하였다. 또한 북베트남 공군 지휘부는 자국 공군 조종사들에게 적기가 600m 안으로 접근하기 전에 사격하지 말라는 전술지침을 내렸다. 저공에서 벌어진 근접공중전에서 낡은 기종인 미그-17의 기동능력은 당시 세계 최강 기종이었던 미국군 전투기 F-105나 F-4의 기동능력을 크게 앞질렀다.

셋째, 공중전에서 미국군 전투기들이 발사하는 공대공 미사일에 북베트남 공군 전투기가 격추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북베트남 공군 조종사들은 공대공 미사일 회피기동술을 연습하고 출격하였다. 미국군 전투기들이 공대공 미사일 사이드와인더(AIM-9 Sidewinder)를 발사하면, 날아오는 미사일의 꽁무니에서 화염이 분출되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적기의 공대공 미사일에서 화염이 분출되는 것을 본 북베트남 공군 조종사들은 즉각 갈지자형으로 비행하였다. 적기가 발사한 미사일은 시속 700~900km의 속도로 날아오게 되는데, 갈지자형 비행으로 미사일 열추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넷째, 북베트남 공군 전투기를 상대로 싸우는 공중전에서 연전연패하여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간파한 미국 공군과 해군은 북베트남 공군기지를 집중폭격으로 파괴하는 새로운 전술로 대응하였다. 공중폭격으로 파괴된 활주로는 북베트남 공병대와 인민들이 신속하게 복구할 수 있었으나, 지상에 주기된 전투기가 적기의 공중폭격으로 손상되는 경우, 공중폭격을 피하여 밤중에 전투기를 해체한 다음 대형수송트럭에 싣고 밀림 속의 정비소로 옮겨 수리하여야 하였다. 또한 미국군의 공중폭격을 피하기 위해 북베트남 공군은 Mi-6 수송헬기로 미그-17을 공중수송하여 공군기지로부터 약 30km 떨어진 밀림 속에 건설한 비밀기지에서 정비하고 연료를 보급한 뒤에 다시 수송헬기로 공군기지까지 공중수송하여 긴급히 출격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다섯째, 북베트남 공군은 자국에 파병된 쿠바 공군 요원들의 도움을 받아 1972년 4월 18일 미국 해군 함대를 공격하였다. 북베트남 연안에 침입하여 함포사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미국 해군 함대를 격침시키려는 과감한 해상공격이었다. 북베트남 공군은 함대공격에 앞서 레이더 기지를 해안가로 은밀히 이동배치하여 미국 해군 함대의 움직임을 파악하였다가, 제7함대 기함인 10,000t급 미사일 순양함 오클라호마 시티호(USS Oklahoma City)와 2,400t급 구축함 힉비(USS Higbee)에 기습공격을 퍼부었다. 당시 미그-17에는 무게가 250kg밖에 되지 않는 소형폭탄을 탑재하였으므로, 함대공격은 함체 일부만 파괴하는 데 그쳤으나, 미국 해군 함대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여섯째, 용맹과 투지로 미국군 전투기들에 맞서 공중전을 벌인 북베트남 공군도 손실을 입었다. 열악한 조건에서 속성훈련으로 배출된 북베트남 공군 조종사들은 미국군 전투기의 공대공 미사일에 격추되기도 하였고, 오인사격으로 아군기를 격추한 경우도 있었고, 조종미숙으로 착륙사고를 일어킨 경우도 있었다.

미국군의 ‘공중우세’는 조작된 전설이다
 
베트남 전쟁 기간 중에 미국은 지상전보다 공중전에 훨씬 더 많은 전비를 쏟아부었다. 이를테면, 1969년 한 해 동안 미국군 지상전 비용은 당시 화폐가치로 46억 달러였는데 비해, 공중전 비용은 93억 달러였다. 이것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자기의 ‘공중우세’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군비를 지출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북베트남 공군은 자기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한 것처럼 보인 미국 공군 및 해군과의 공중전에서 승리하여 미국의 ‘공중우세’를 무너뜨렸다.

미국 군부는 자국군 전투기가 북베트남 공군 전투기와 맞서싸운 공중전에서 격추되거나 또는 북베트남군의 방공미사일에 맞아 격추된 사실을 지속적으로 은폐하였고, 자국군 전투기가 격상당한 사실도 은폐하였다. 다만 미국 군부는 추락하는 전투기에서 낙하산으로 탈출한 조종사가 지상에 낙하하여 북베트남 지상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경우에만 하는 수 없이 격추사실을 인정하였다. 미국 군부는 자국군 전투기의 손실을 은폐한 것과는 정반대로, 자국군 전투기가 북베트남 공군 전투기를 격추하지 않았는데도 적기를 격추하였다고 주장하는 미국군 조종사를 표창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벌여놓은 경우도 있었다.

당시 북베트남 공군 전투기들은 앞부분에 촬영기를 장착하여 공중전 현장을 영상자료에 담을 수 있었다. 북베트남 공군 조종사들은 공중전에서 미국군 전투기를 격추하는 순간 그 촬영기를 작동시켜 격추한 적기의 기종과 고유번호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영상촬영 덕분으로, 북베트남 공군은 공중전 기록을 시간대에 따라 상세히 작성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출격한 자국기 조종사의 이름과 기종, 그리고 격추 또는 격상된 적기 조종사의 이름과 기종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토퍼쩌의 책에는 공중전을 벌이다가 기관포에 맞아 화염에 휩싸여 추락하는 미국군 전투기 모습을 촬영한 현장사진이 여러 장 들어있다.

예컨대, 베트남 전쟁 시기 1965년 3월 3일부터 1968년 10월 31일까지 북베트남 공군 전투기들은 1,602회 출격하여 19종의 다양한 미국군 전투기, 폭격기, 수송기 218대를 격추하였다. 그런데 미국의 공식기록에 따르면, 같은 기간 미국군 전투기들이 북베트남 전투기 121대를 격추하였고, 미국군 작전기는 50대만 격추되었다는 것이다. 공중전 기록을 조작한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 관한 미국의 공식기록에 따르면, 공군기 가운데 군용헬기 이외에 1,627대가 격추 또는 파괴당했고, 해군기 가운데 530대가 격추되었으며, 해병대 작전기 가운데 군용헬기 이외에 193대가 격추되었다. 그러므로 격추 또는 파괴된 작전기는 모두 2,350대다. 그런데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군 공군 및 해군 전사자는 5,152명(공군 2,587명, 해군 2,565명)이고 실종자는 935명(공군 566명, 해군 369명)이다. 공군과 해군의 전사자 및 실종자를 합하면 6,087명이나 되는데, 격추 또는 파괴된 공군기 및 해군기가 2,350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공군과 해군의 전사자 및 실종자가 약 6,000명이라면, 격추 또는 파괴된 공군기 및 해군기도 약 6,000대가 되어야 이치에 맞는다. 미국이 베트남 전선 공중전에서 패배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약 6,000대의 손실을 2,350대로 크게 축소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공중우세’가 조작된 전설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맥스 썬더’는 우매한 짓이다
 
북베트남 공군기들이 미국 공군기 및 해군기들과의 치열한 공중전에서 승리하기 15년 전에 미국의 ‘공중우세’를 사상 처음으로 무너뜨린 또 다른 전쟁기록이 있다. <로동신문> 2012년 4월 25일에 실린 보도기사 ‘공군무력창설의 첫 기슭에 새겨진 불멸의 자욱’에 따르면, 1945년 11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창설된 항공구락부인 신의주항공협회에서 비행술을 익힌 인민군 공군의 1세대 비행사들은 5년 뒤에 벌어진 6.25 전쟁에서 용맹과 투지로 미국군 전투기에 맞서싸웠다고 한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6.25 전쟁 “당시 미제침략자들이 ‘하늘의 공중요새’라고 자랑하던 ‘B-29’를 쏴떨군 추격기 비행사 리문순 영웅, 수 십 차례의 공중전에서 오만한 미군 비행사들을 불굴의 정신력으로 제압하며 조선인민군 비행사의 기개를 떨친 백기락 영웅, 적의 구축함 두 척을 격침, 격상시킨 리희영 영웅”을 비롯한 공화국 영웅 4명이 자그마한 신의주항공협회에서 배출되었다고 한다.

2012년 2월 북에서 출판된 ‘선군태양 김정일 장군’이라는 책에는 1972년 12월 인민군 공군부대를 방문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부대 지휘관과 오랜 시간 담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그 공군 지휘관은 자신이 1951년 2월에 입대하여 6.25 전쟁 중 항공학교에 다녔다고 하면서, 1956년 황해북도 동쪽에 있는 신계군 상공에서 벌어진 미국군 전투기들과의 공중전 경험담을 이야기하였다. 당시 미국군 F-51 두 대가 황해북도 신계군 상공까지 깊숙이 침입하였는데, 인민군 전투기 두 대가 출격하여 2.4km 상공에서 “주체적인 공중전법에 기초하여 과감한 돌격과 추격전으로” 격추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그 공군 지휘관은 베트남 전선에 출전하여 “‘하늘의 왕’이라고 자처하던 미제 침략군의 비행기들을 쥐락펴락하며 답새겼다”고 한다. 미국군이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 중에 벌어진 공중전에서 인민군에게 사실상 패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2010년 3월 1일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 ‘미국이 공중전에서 패한 두 전쟁’에서 자세히 논하였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그런데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 중 공중전에서 연패한 미국 공군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주한미공군은 2012년 10월 26일부터 한국 공군을 참가시킨 가운데 이 땅에서 ‘맥스 썬더(Max Thunder)’라고 부르는 한미 공중종합 연합훈련을 벌이고 있다. 2008년부터 해마다 봄과 가을에 한 차례씩 실시해오는 이 대북공중전 연습에 올해는 주한미공군기와 한국 공군기 62대가 동원되어 역대 최대 규모로 증강되었다.

6.25 전쟁, 베트남 전쟁, 중동 전쟁에서 실전경험을 쌓았고, 미국의 ‘공중우세’를 꺾을 ‘주체전법’을 끊임없이 연마해오면서 그에 부합하는 각종 전투기들과 강력한 방공전력과 견고한 지하요새와 투철한 정신력으로 무장한 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군을 미국 공군과 해군의 항공무력이 이길 수 있을까? 창설된지 6개월밖에 되지 않는 북베트남 공군과 싸워서도 패한 미국 공군과 해군은 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군에게 무참히 깨질 것으로 보인다. ‘맥스 썬더’는 한반도 상공에서 공중전이 재개되는 경우 승리하지도 못할 미국 공군이 무모하게 북을 자극하기만 하는 참으로 우매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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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4

최고사령관이 직접 지도하는 공중무력 강화사업

<연재> 한호석의 진보담론(232)
통일뉴스 2012년 10월 22일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993년 3월과 2012년 8월의 차이

지난 8월 하순 폭우가 쏟아지는 동부전선을 시찰하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8월 25일 동부지역에서 열린 경축연회에서 연설하면서 인민군이 자신의 최후돌격명령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였다. 8.25 경축연설 가운데서 그 구절을 인용하면, “지금 이 시각 나의 명령을 받은 영용한 인민군 장병들은 미국과 남조선 괴뢰들의 무모한 전쟁도발책동에 대처하여 전투진지를 차지하고 적들과의 판가리 결전을 위한 최후돌격명령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인용구절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이미 전군에 ‘조국통일대전’을 위한 전투준비명령을 내렸고, 그 명령을 받은 인민군은 최고사령관의 총공격 명령을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왜곡된 대북정보만 들려오는 남측에서는 8.25 경축연설에 관한 소식을 듣고서도 별다른 느낌을 받지 않겠지만, 8.25 경축연설을 제대로 읽으면 준전시상태의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8.25 경축연설에서 전군에 ‘조국통일대전’을 위한 전투준비를 명령하였고, 자신의 지휘를 받는 인민군이 총공격 명령을 대기하고 있다고 직접 밝힌 것은, 8월 20일부터 미국군이 한국군을 참가시킨 가운데 대북선제공격을 처음으로 연습한 ‘을지 가디언 프리덤’ 전쟁연습에 대응한 초강경한 반격공세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만일 미국이 8월 20일부터 대북선제공격을 연습하지 않았어도 김정은 제1위원장은 전군에 ‘조국통일대전’을 위한 전투준비를 명령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과 이명박 정권은 북과의 대화통로를 모조리 끊어버리고, 북과의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도발적인 발언과 행동으로 북을 계속 자극해왔을 뿐 아니라, 급기야 북에서 최고 존엄으로 숭앙하는 동상을 파괴하려는 극단적인 테러도발기도까지 감행하였기 때문이다.

주목하는 것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그처럼 북미관계와 남북관계가 완전히 파탄상태에 빠진 최악의 상황에서 인민군이 ‘조국통일대전’을 위한 ‘최후돌격명령’을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오늘 한반도 군사정세가 사실상 준전시상태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오늘 한반도 군사정세가 사실상 준전시상태에 들어선 것은, 19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1993년 3월 8일에도 북은 준전시상태에 돌입하였는데, 북미 대결분위기가 극도로 고조되었던 당시에 미국이 ‘팀 스피릿’ 대북전쟁연습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하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최고사령관 명령 제0034호를 하달하고 준전시상태를 선포하였다. 최고사령관 명령 제0034호의 제목은 ‘전국, 전민, 전군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함에 대하여’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준전시상태를 선포하자, 10여 일 동안에 북의 청년 150만 명이 입대와 복대를 탄원하였고, 해외에 나가있는 북의 청년들도 귀국하여 입대하겠다고 탄원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8.25 경축연설에서 전군에 ‘조국통일대전’을 위한 전투준비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밝혔지만, 1993년 3월처럼 최고사령관 명령서가 북의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고, 북의 청년들이 전선에 나가겠다고 자원하는 입대 및 복대 탄원운동도 없었다. 이처럼 최고사령관 명령서를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고, 입대 및 복대 탄원운동도 일어나지 않은 가운데, 전군이 총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최고사령관이 직접 밝힌 것이다.

원래 북이 준전시상태에 돌입하면, 인민군은 물론 인민들까지 전시동원체제로 전환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인민들이 전시동원체제로 전환하지 않고 인민군만 ‘조국통일대전’을 위한 전투준비를 완료한 것이다. 이것은 인민군이 과거처럼 총공격 징후를 외부에 노출하는 게 아니라, 총공격 징후를 노출하지 않고서도 ‘조국통일대전’을 임의의 시각에 개시할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993년 3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준전시상태 선포가 총공격 준비로 미국을 궁지에 몰아넣은 초강경한 대미압박조치였다면, 이번에 김정은 제1위원장의 8.25 경축연설은 미국을 압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군이 ‘조국통일대전’을 임의의 시각에 개시할 준비태세를 갖추었음을 밝힌 것이다. 만일 북측 언론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의 8.25 경축연설을 보도하지 않았다면, 인민군의 총공격 징후를 눈치채지 못한 미국과 이명박 정권은 인민군이 ‘조국통일대전’을 위한 전투준비를 완료하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8.25 경축연설에서 ‘조국통일대전’을 임의의 시각에 개시할 준비태세를 갖추었음을 밝히기 이전에, 인민군에게 총공격 준비태세를 갖추게 하기 위해 군부대들을 군종별, 병종별로 지도하였다는 사실이다. 특히 올해 1월 초부터 김정은 제1위원장이 계속해오는 군부대 현지지도를 살펴보면, 공군부대와 해군부대를 집중적으로 지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인민군 공군이 ‘조국통일대전’을 임의의 시각에 개시할 준비태세를 갖추도록 지도한 김정은 제1위원장의 공군부대 현지지도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공군부대 현지지도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은, 북에서 인민군 공군의 작전임무가 북의 ‘조국통일대전’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 군사전문가들이 공인하는 것처럼, 현대전에서 공군은 육군이나 해군을 공중화력으로 지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작전을 전개하는 가장 중요한 무력단위다.

현대전에 정통한 군사지식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김정은 제1위원장이 ‘조국통일대전’에서 인민군 공중무력의 전략적 임무를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2012년 4월에 인민군 공군의 공식명칭을 항공 및 반항공군으로 개칭하고 11월 29일을 항공절로 정하라고 지시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북에서는 지난 5월부터 공군이라고 부르지 않고, 항공 및 반항공군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고, 오는 11월 29일부터 해마다 그 날을 항공절로 기념할 예정이다. 이처럼 공군을 항공 및 반항공군으로 개칭하고 항공절을 새로 정한 것은, 단순한 명칭변경과 기념일 지정이 아니라 북의 공중무력 강화사업에서 어떤 획기적인 전환이 일어났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2012년 8월 7일 리병철 인민군 항공군 및 반항공군 사령관이 러시아 방문길에 올랐는데, 공중무력을 지휘하는 사령관의 러시아 방문도 김정은 제1위원장의 공중무력 강화사업과 직접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전쟁박물관에 전시된 낡은 전투기가 아니다
 
2012년 3월 4일 북의 인터넷 매체 <우리민족끼리>가 <유투브(You Yube)>에 게시한 기록영화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은 동지께서 인민군대사업을 현지에서 지도 (주체 101.1)’에는 2012년 1월 20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공군 제354군부대를 “시찰하시고 비행훈련을 지도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 비행훈련 장면에 나타난 전투기들은 미그(MiG)-19다.

미그-19는 인민군 전투비행사들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몰았던 구식 전투기이며, 초음속으로 날지 못하는 아음속 전투기다. 당연히 전자장비도 없다. 이전 시기 미그-19를 주력기로 실전배치하였던 네 나라를 손꼽으면, 북, 소련, 중국, 파키스탄, 방글라데쉬인데, 소련과 중국과 파키스탄에서는 미그-19가 이미 퇴역하였고, 아직도 미그-19기를 운용하는 나라는 북, 방글라데쉬, 미얀마 뿐이다. 그런데 방글라데쉬는 미그-19 6대를 훈련기로 사용하고 있고, 미얀마에는 미그-19가 1대밖에 없다. 이것은 전 세계에서 미그-19를 아직도 실전배치한 나라는 북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미국 군사전문가가 펴낸 ‘AMR 지역공군 연감 2012년판(AMR Regional Air Force Directory 2012)’에 따르면, 북은 현재 미그-19 98대를 운용하고 있다.

서방세계 군사전문가들은, 북이 전쟁박물관에서 전시품으로나 볼 수 있는 1960년대 구식 전투기를 아직 실전배치한 까닭은 신형 전투기로 대체할 경비가 없어 그런 줄로 생각하거나, 인민군의 미그-19는 실전에서 미국군과 한국군의 초음속 전투기에 상대가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거나, 미그-19가 너무 낡아서 실전에 투입할 수 있는 것은 보유량의 절반밖에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은 북의 ‘주체전법’에 대해 알지 못하는 무지와 억측의 결과다.

첫째, 인민군은 미국식 전법이나 러시아식 전법을 절대로 따라하지 않고 ‘우리식 전법’을 독자적으로 개발하였다. ‘우리식 전법’이란 ‘조국통일대전’ 상황에 부합하는 전법을 뜻한다. 북이 미그-19를 아직도 98대나 실전배치한 까닭은 그 기종이 ‘조국통일대전’ 공중전 상황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벌어질 전쟁에 출격한 전투기들이 초음속으로 날며 공중전을 벌일 것이라는 생각은 한낱 공상이다. 한반도 상공에서 벌어질 공중전에서 전투기들은 아음속으로밖에 날지 못한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베트남 전쟁 시기 공중전에서 입증되었다. 당시 미국군 초음속 전투기들은 북베트남군 전투기들과 공중전을 벌이면서 초음속으로 날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인민군이 구식 아음속 전투기인 미그-19에 초음속 공대공 미사일을 탑재하여 최상의 공격력을 확보하였다는 점이다. 인민군은 마하 2.5로 날아가는 사거리 8km의 공대공 단거리 미사일(Vympel K-13) 4기를 미그-19에 탑재하였다. 이 미사일은 미국 공군 전투기에 탑재된 미국산 공대공 단거리 미사일(AIM-9 Sidewinder)에 필적하는 성능을 가졌다. 공군 조종사가 가시거리 밖까지 멀리 보고 멀리서 쏘는 미국식 공중전 전법은 한반도 상공에서 벌어질 공중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둘째, 미그-19를 생산하였던 소련에서나, 그 기종을 면허생산하였던 중국에서는 미그-19가 단종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부품을 구할 수 없다. 그런데도 북이 단종된 미그-19를 98대나 실전배치한 것은 북에서 미그-19 부품을 자체로 생산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부품을 자체로 생산한다는 것은 전투기 성능을 최상의 수준에서 보장한다는 뜻이다.

셋째, 미그-19를 무인공격기로 개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민군이 미그-19를 무인공격기로 개조하였음을 알려주는 정보는 찾을 수 없지만, 중국인민해방군은 미그-19를 무인표적기로 개조하여 사용한다. 미그-19를 무인표적기로 개조하느냐 무인공격기로 개조하느냐 하는 기술적 문제는 무인공격기를 자체로 생산하는 북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민군 전투비행사들이 미그-19를 몰고 실시한 공중전 훈련을 현지지도한 김정은 제1위원장은 현장에서 부대 지휘관들에게 “적들의 변화된 전쟁방식과 전투행동조법, 무장장비의 발전추세에 맞게 우리식의 전법과 전술을 능란하게 활용하여 싸움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도록 머리를 쓰고 사색하고 실천하고 있는데 대하여 만족을 표시하시였다”고 한다. 한반도 상공에서 벌어질 공중전에서 인민군의 미그-19는 미국군과 한국군의 전투기들과 얼마든지 맞설 수 있고, 김정은 제1위원장의 말에 따르면 “우리식의 전법과 전술”로 상대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2012년 8월 5일 김정은 제1위원장은 제1017군부대 현지지도에서 “적과의 공중전에서 실지 써먹을 수 있는 비행전투행동조법들을 완전무결하게 숙련하기 위한 훈련열풍을 세차게 일으켜나가야 한다고 지적”하였는데, 인민군 전투비행사들이 얼마나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민족끼리>가 2012년 8월 12일 <유투브>에 게시한 ‘련속참관기 -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제1회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련속참관기’에는 1994년 4월 25일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현지지도한 인민군 비행구분대에서 군인들과 함께 찍은 마지막 기념사진이 나오는데, 동영상 해설에 따르면, 그 날 김일성 주석은 그 비행구분대의 18살 되는 전투비행사에게 “해상비행은 해보았는가? 초저공비행은 몇 m까지 해보았는가?”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 물음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인민군 전투비행사들이 해수면에서 불과 몇 m 높은 초저공에서 해상비행을 훈련한다는 사실이다. 인민군 전투비행사들의 공중전 숙련도가 얼마나 높은지 짐작할 수 있다.


올해 두 차례나 현지지도를 받은 제1017군부대
 
북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2012년 1월 30일 공군 제1017군부대를 “시찰하시고 비행훈련을 지도하시였다.” 2012년 3월 4일 북의 인터넷 매체 <우리민족끼리>가 <유투브(You Yube)>에 게시한 기록영화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은 동지께서 인민군대사업을 현지에서 지도 (주체 101.1)’에는, 김정은 제1위원장이 1월 30일 제1017군부대를 현지지도하였을 때, 외형이 미그-29처럼 생긴 자국산 전투기 편대와 SU-25 대지공격기 편대가 각각 비행훈련을 실시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제1017군부대 현지지도에서 세 가지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제1017군부대가 ‘사적 비행기’로 보존하고 있는, 외형이 미그-29처럼 생긴 전투기가 비행훈련에 참가하였다는 점이다. 북에서 ‘사적 비행기’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살펴본 전투기다. 위의 기록영화에 나온 화면을 보면, 그 ‘사적 비행기’ 기체에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 전투기를 직접 살펴보았음을 알려주는 표식판이 부착되어 있다. 그 표식판에는 김일성 주석이 1988년 8월 17일에 그 전투기를 살펴보았다고 쓰여 있다.

소련은 1988년 9월 영국에서 열린 국제공군전람회에서 미그-29 2대를 외부에 공개하였고, 19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공군전람회에서 미그-29 비행모습을 처음으로 공개하였다.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가 계승국으로 등장한 1991년 이후에 가서야 러시아군은 미그-29를 주력기로 실전배치하였다. 그런데 김일성 주석이 미그-29를 직접 살펴본 때는 1988년이다. 이것은 러시아군이 미그-29를 실전배치하기 훨씬 이전에 북이 미그-29를 수입하였음을 말해준다.

1988년에 북은 소련에서 미그-29를 몇 대나 수입하였을까? 관련정보가 공개되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본격적으로 수입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북이 러시아에서 미그-29를 본격적으로 수입한 때는 1996년이다. 미국의 군사정보에 따르면, 북은 1995년에 미그-29 12대를 벨라루시로부터 수입하였고, 1996년에 미그-29 18대를 러시아에서 수입하였다.

미국의 군사전문 누리집 <글로벌 씨큐리티(Global Security)>에 게시된 자료에 따르면, 북은 현재 미그-29를 약 40대 운용하고 있다고 한다. 북이 현재 미그-29 40여 대를 운용하고 있다는 정보는, 미국 정찰위성에 포착된 미그-29가 40여 대에 이른다는 뜻이지, 북의 미그-29 보유량을 정확히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북이 미그-29를 몇 대나 운용하는지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북이 수입한 미그-29는 30여 대밖에 되지 않는데, 미국군 정찰위성이 포착한 미그-29는 40여 대나 된다. 10여 대의 미그-29는 어디서 온 것일까? 이런 불일치 현상은 북이 미그-29처럼 생긴 전투기를 자체로 생산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북이 미그-29처럼 생긴 ‘폭풍전투기’를 1994년부터 자체로 생산하기 시작하여 현재 약 255대를 운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2012년 2월 20일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 ‘미국이 알지 못하는 북측의 ‘폭풍전력’’에서 자세히 논하였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둘째, 김정은 제1위원장의 제1017군부대 현지지도를 보도한 <조선중앙통신> 관련기사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군부대에서 무장장비를 현대화하기 위한 투쟁과정에 새로 제작한 전투기술기재들과 군사대상물들을 돌아보시며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고 하였고, “군사대상물들을 적들의 불의의 타격에도 끄떡없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꾸리고 전투기술기재들을 현대전의 요구에 맞게 우리식으로 현대화하였으며 경상적인 전투동원준비를 빈틈없이 갖춤으로써 임의의 시각에도 맡겨진 비행전투임무를 원만히 수행할 수 있게 최대의 격동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대해 평가하시였다”고 한다.

위의 인용구절에서 ‘군사대상물들을 적들의 불의의 타격에도 끄덕없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꾸렸다’는 말은 전투기를 보관하고 정비하고 출격시키는 거대한 지하공군기지를 건설하였다는 뜻이다. 또한 ‘전투기술기재들을 현대전의 요구에 맞게 우리식으로 현대화하였다’는 말은 전투기 성능을 현대적으로 개량하였다는 뜻이다.

셋째, 김정은 제1위원장은 2012년 8월 5일 제1017군부대를 또 다시 현지지도하면서 비행훈련을 지도하였다. 북의 최고영도자가 군부대를 약 7개월만에 또 다시 현지지도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제1017군부대를 왜 7개월만에 다시 현지지도한 것일까?

2012년 9월 3일 <유투브>에 게시된 기록영화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은 동지께서 인민군대사업을 현지에서 지도 (주체 101 5-8)’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8월 5일에 제552군부대 관하 구분대를 시찰하고 나서 곧바로 제1017군부대를 방문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사전예고 없이 제1017군부대를 방문하여 ‘조국통일대전’ 준비태세를 점검하였음을 말해준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제1017군부대에 대한 두 번째 현지지도에서 “어렵고 복잡한 정황 속에서 비행사들이 자기 앞에 맡겨진 전투임무를 원만히 수행할 수 있게 준비되여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료해하시였다”고 한다.

또한 김정은 제1위원장은 “비행사들이 명령을 받고 짧은 시간에 출동준비를 빈틈없이 갖춘 것을 보면 군부대가 전투력이 있다”고 평가하고, “비행기 정비상태도 좋고 평시에 비행술을 연마하기 위한 훈련도 잘했다”고 치하하였는데, 이것은 최고사령관이 불시에 점검한 제1017군부대가 공격명령만 내리면 즉시 ‘조국통일대전’에 돌입할 전투준비를 완료하였음을 말해준다.

기록영화에 나오는 장면은 제1017군부대의 SU-25 대지공격기 3대가 활주로 끝에 정렬되어 이륙명령을 대기하고 있는 모습, 굉음을 울리며 이륙하는 모습, 고도로 숙련된 비행술을 과시하며 공중기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원래 SU-25 대지공격기는 공중전을 벌일 기관포와 공대공 미사일을 탑재하였을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지상목표를 타격할 기관포, 로켓포, 공대지 미사일, 그리고 레이저 유도폭탄과 집속탄을 비롯한 각종 폭탄으로 적의 기갑부대를 공격하여 전차와 장갑차를 파괴하는 위력적인 작전기종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긴급출격명령을 받고 이륙하여 고도로 숙련된 비행술을 보여주며 공중기동을 한 SU-25 대지공격기 3대는 북의 자국산 전투기와 비슷하게 기체가 진록색으로 도색되었고 기체 아래쪽은 하늘색 물결무늬로 도색되었다.

북이 보유한 여러 작전기종들 가운데 그처럼 진록색으로 도색된 기종은 자국산 ‘폭풍전투기’와 SU-25 대지공격기 두 기종밖에 없다. 이것은 그 두 기종의 작전기가 북의 공중무력에서 중심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2012년 3월 24일 ‘우리민족끼리’가 <유투브>에 게시한 기록영화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은 동지께서 인민군대사업을 현지에서 지도 (주체 101.2)’를 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이 3월 14일 현지지도한 육해공군 합동타격훈련에서 인민군 비행대가 ‘적함선집단’을 타격, 격침시키고 ‘적진’을 불바다로 만드는 장면이 나오고, 4월 27일 현지지도한 제655련합부대 종합전술연습에서도 인민군 비행대가 출격하여 지상공격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2012년 5월 3일 절정에 이른 공중무력 강화사업

<연합뉴스> 2012년 9월 27일 보도에 따르면, 인민군은 예년에는 혹서기와 장마철에 지원기 위주로 작전기를 운용하고 공군조종사의 지상훈련에 집중해왔는데, 예년과 달리 올해는 7월부터 전투기 훈련횟수를 크게 늘렸다고 한다. <연합뉴스> 2012년 3월 29일 보도는 인민군이 예년과 달리 3월 이후 전투기 출격훈련을 동계훈련에 비해 크게 늘었다고 하였는데, 그러한 전투기 비행훈련 증가세는 7월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인민군이 올해 3월부터 공중무력훈련을 크게 강화한 것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지도하는 공중무력 강화사업에 따른 변화로 보인다. 2012년 5월 3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항공 및 반항공군 지휘부를 현지지도한 것은 공중무력 강화사업이 절정에 이른 계기로 되었다.

여기서 반항공군이란 각종 방공미사일을 운용하는 무력단위를 뜻한다. 다른 나라 군대에서는 방공미사일부대가 공군의 하위무력단위로 편제되어 있지만, 인민군에서는 방공미사일부대의 지위를 공군과 동등한 무력단위로 격상시켰다. 이것은 반항공군 전투력이 최근에 결정적으로 강화되었음을 말해준다. 북의 반항공군 전투력은 어떻게 강화되었을까?

구체적인 정보를 알 길은 없지만, 2012년 5월 3일 <조선중앙통신> 보도사진 한 장이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다. 그 보도사진은 항공 및 반항공군 지휘부 청사 뒷마당에 대기시켜놓은 도로이동식 요격미사일 발사차량을 김정은 제1위원장이 시찰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그 발사차량은 원통형 발사관을 수직으로 세워놓고 발사준비태세를 완료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2010년 10월 10일 평양에서 진행된 인민군 열병행진에 등장한 ‘주체식 요격미싸일종합체계’의 발사차량, 원통형 발사관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다. 이것은 그 날 김정일 제1위원장이 북에서 새로 개발한 최신형 도로이동식 요격미사일을 시찰하였음을 말해준다.

2010년 10월 10일 열병행진에 등장한 ‘주체식 요격미싸일종합체계’의 요격미사일은 러시아군이 운용하는 장거리 요격미사일 S-300에 맞먹는 성능을 가진 것이다. S-300 요격미사일은 요격거리 195km, 요격고도 30km이며, 동시에 12개 표적을 추적할 수 있고, 동시에 6개 표적을 요격할 수 있는데, 그보다 성능이 개량된 S-400 요격미사일은 전투기 요격거리 400km, 탄도미사일 요격거리 70km, 요격고도 40km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2012년 5월 3일 항공군 및 반항공군 지휘부 청사 뒷마당에서 살펴본 요격미사일은 S-400에 맞먹는 성능을 가진 최신형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인민군 반항공군의 요격능력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음을 말해준다.

2012년 5월 3일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제1위원장의 항공군 및 반항공군 지휘부 현지지도에 관해 보도한 기사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이 “부대에서 자체로 연구개발한 전투기술기재들”의 성능과 도입실태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훌륭한 일”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고 보도하면서, 김정은 제1위원장이 몸소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를 움직이는 모습을 촬영한 보도사진을 실었다. 이것은 인민군 공중무력 전투체계가 올해 들어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현대화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김정은 제1위원장은, “작전연구실의 매방들을 장시간에 걸쳐 돌아보시면서 우리 당의 주체적인 군사전략전술사상과 전법을 깊이 연구하고 철저히 구현할 수 있게 작전연구실을 잘 꾸린데 대하여 치하”하고, 지휘소와 작전연구실을 “정말 잘 꾸렸다고” 치하하였다고 한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지휘소와 작전연구실을 돌아보면서 잘 꾸렸다고 몇 차례나 치하한 것을 보면 항공군 및 반항공군 지휘체계가 이전보다 한층 더 현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현대화되었을까?

2012년 9월 3일 <유투브>에 게시된 기록영화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은 동지께서 인민군대사업을 현지에서 지도 (주체 101 5-8)’을 보면, 2012년 5월 3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항공군 및 반항공군 지휘부를 현지지도하면서 지휘소에서 촬영한 장면이 나온다. 지휘소 실내 한 쪽 면에 거대한 전자화면 두 개와 거대한 게시화면 한 개가 걸려있는 현장사진을 보면, 공중무력 지휘체계가 현대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작전연구실은 일층과 이층을 터놓아 넓어진 실내공간 중앙에 “사람이 살면 천년을 살겠는가 만년을 살겠는가 순간을 살아도 김정은 장군님을 위하여 하늘의 특공대로 값있게 살자!”라고 쓴 커다란 구호판이 걸려있고, 구호판 앞에 북의 자국산 전투기 커다란 모형 한 개가 공중에 걸려있다. 바로 그 앞쪽에는 거대한 한반도 지도모형사판이 수평으로 설치되었는데, 작전연구요원들이 그 사판 위에 올라갈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위에서 논한 정보를 종합하면, 인민군 항공군 및 반항공군은 올해 김정은 제1위원장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며 공중무력과 요격능력을 결정적으로 강화하고 이전보더 더욱 현대화함으로써 ‘조국통일대전’을 위한 전투준비를 완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휘부 작전연구실에 걸려있는 구호판에 적혀있는 것처럼, 지금 인민군 전투비행사들은 최고사령관의 출격명령을 받으면 즉시 각종 작전기를 몰고 지하공군기지에서 이륙하여 ‘하늘의 특공대’로 싸울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공중우세신화’를 믿고 있는 미국군과 한국군이 인민군 공중무력을 오판하는 것은 그들에게 치명적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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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2

헌정질서에 반하는 한국군 정신교육

[한호석의 개벽예감] (34)
자주민보 2012년 10월 20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국방부가 연출한 촌극 3막

최전방 경계근무 소홀사건에서 드러난 것처럼 정신을 못 차리는 한국군이 이제는 헌정질서에 반하는 위헌행위마저 저지르고 있다. 한국군이 위헌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니, 무슨 뜻인가? 군부대들에서 요즈음 집중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이른바 ‘종북세력 실체인식 정신교육’이라는 것이 현행 헌법 제5조 2항을 위반하는 위헌행위라는 뜻이다. 헌법 제5조 2항은 군이 정치적 중립성을 준수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는데, 지금 군이 수구우파세력의 ‘종북모략소동’에 적극 가담함으로써 자기의 정치적 중립성을 파기한 것은 헌정질서에 반하는 심각한 위헌행위가 아닐 수 없다.

대선열기가 달아오른 요즈음 군부대들에서 ‘종북세력 실체인식 정신교육’이 집중적으로 실시되는 것에 대해 군이 대선에 개입하여 수구우파정권의 재집권을 도와주려는 게 아니냐고 비판할 수 있지만, 그 내막을 파헤치면 대선개입 수준을 넘어선 충격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우선 사건개요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간지 <한겨레>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2012년 1월 17일 한국군 제6군단 군단장은 예하 부대에 ‘종북 사이트 및 정부 비방 스마트폰 앱 삭제조치 공문’을 내려보냈다. 그 공문은 제6군단 소속 장교 및 부사관들이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을 일제히 점검하여 ‘종북성향’의 웹싸이트/앱이 들어있는 경우 이를 삭제하고, 그 결과를 상부에 보고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런 지시에 따라, 제6군단 소속 장교들과 부사관들은 느닷없이 자기들의 스마트폰을 검열받는 ‘봉변’을 당했다. 스마트폰을 검열하고 삭제하는 해괴한 조치는 전 세계가 실소를 금치 못할 촌극이다.

그런데 촌극은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스마트폰 검열 및 삭제는 촌극 제1막이었다. 군부가 펼친 촌극 제2막은 군부대들에서 진행해오던 기존의 ‘안보의식’ 고취 강연이 ‘종북세력’ 적개심 고취 강연으로 대체된 것이다. 국방부는 ‘종북세력’ 적개심 고취 강연에 들어가는 2012년도 예산을 2009년에 비해 10배 이상 늘어난 11억3,000만 원으로 증액하였다. 얼마 전 육군본부가 국회의원에게 제출한 국감자료에 따르면, 육군의 경우 2010년에는 ‘종북세력’ 적개심 고취 강연이 한 차례도 없었는데, 2011년에 21차례를 실시하더니, 2012년에는 6월 말까지 무려 155차례나 실시하였다. ‘종북세력’ 적개심 고취 강연이라는 촌극 제2막에 출연하는 강사는 현대사상연구회, 국가발전미래교육협의회, 한국자유연합, 경찰청 치안정책연구소 등에서 활동하는 극우성향인사들이다.

촌극은 군부대 강연회로 끝난 게 아니라, 시험까지 치르는 제3막으로 이어졌다. 2012년 9월 3일 <한겨레>가 입수한 군부대의 ‘종북시험’ 관련 내부문서에는 150개 항목의 ‘종북세력’ 관련 문답집이 들어있는데, 그 문답집을 군부대들에 배포하고 공부하게 한 다음, 시험을 치러 그 결과를 상부에 보고하도록 한 것이다. ‘종북시험’에서 간부와 병장은 80점을 받아야 하고, 병사는 70점을 받아야 하는데, 시험성적이 목표점수에 미달하면 진급에서 불이익을 받게 된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시험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났던 이 땅의 젊은이들이 군대에 가서도 무슨 ‘종북시험’이라는 것을 또 치러야 하니, 촌극 치고 너무 기가 막힌 촌극이 아닌가.

‘종북세력 실체인식 정신교육’이라는 촌극이 절정에 이른 날은 2012년 10월 10일이었다. 그 날 국방부는 ‘사상전의 승리자가 되자!’는 제목으로 작성된 18쪽 분량의 ‘종북실체 표준교안’을 전군에 내려보내면서, 그것을 군부대 정신교육시간에 교재로 사용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사상전의 승리자가 되자!’는 구호는 북에서 쓰이는 중요한 정치구호인데, 북을 주적으로 규정한 국방부가 북의 정치구호를 따라하다니 이것 또한 웃지 못할 촌극이 아닌가.

그런데 국방부가 연출한 촌극의 절정에 이르러 경악과 충격을 관객에게 안겨준 명장면이 나왔다. 국방부가 ‘종북실체 표준교안’에서 ‘종북세력’을 “국군의 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군부가 어떤 대상을 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정쟁에서 상대를 정적으로 규정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국방부가 어떤 대상을 적으로 규정한 것은, 군이 그 대상을 군사행동으로 제거하려는 적의를 드러낸 것이다. 군이 어떤 대상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행동은, 단순한 감정표출이 아니라 군사작전에 연관된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는 매우 심각하다. 올해 들어 수구우파정권이 ‘종북모략소동’을 광란적으로 벌이더니, 이제는 군부까지 나서서 ‘종북세력’에 대한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헌정질서를 위협한 엄중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33만~53만여 명에 이르는 민간인을 적으로 규정하였다

국방부가 ‘종북세력’으로 지목하고 적의를 드러낸 제거대상은 누구일까? 국방부의 ‘종북실체 표준교안’에 따르면, 그들이 지목한 ‘종북세력’은 “주한미군 철수와 국가보안법 폐지, 이를 통한 연방제 통일을 추구하는 북한의 노선을 그대로 추종”하면서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는 북한의 대남전략노선을 맹종하는 이적세력”이다. 지금까지는 국정원, 경찰청 보안수사대, 공안검찰 등이 ‘종북세력’을 탄압해왔는데, 오늘에는 군부까지 나서서 ‘종북세력’을 제거하는 군사행동도 불사하겠다는 식으로 공언한 셈이니 정치탄압에 군사행동을 더한 상황이다. 이와 관련하여 세 가지 문제를 논할 필요가 있다.

첫째, ‘종북실체 표준교안’에서 국방부는 주한미국군 철군, ‘국가보안법’ 철폐, 연방제 통일 실현을 ‘종북세력’의 ‘대북추종 전략목표’라고 규정하였다. 국방부의 눈에는 주한미국군 철군 요구가 ‘남침위기’ 유발로 보일 것이고, ‘국가보안법’ 철폐요구가 ‘국가안보’ 훼손으로 보일 것이고, 연방제 통일 실현 요구가 ‘적화통일’ 동조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주한미국군 철군, ‘국가보안법’ 철폐, 연방제 통일 실현은 이 땅의 진보적 대중이 지향하고, 국제사회가 공감하고 지지하는 정당한 요구다. 물론 북도 주한미국군 철군, ‘국가보안법’ 철폐, 연방제 통일 실현을 요구하지만, 북측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미국 연방의원들이나 한반도 전문가들 가운데서도 주한미국군 철군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미국 국무부마저도 1990년 이후 계속하여 ‘국가보안법’ 철폐를 남측에 요구하고 있고, 연방제 통일을 지지하는 국제단체들도 많다.

그런데 국방부의 귀는 이 땅의 진보적 대중과 국제사회에서 들려오는 주한미국군 철군, ‘국가보안법’ 철폐, 연방제 통일 실현의 요구는 전혀 듣지 못하고, 오직 북에서 들려오는 주한미국군 철군, ‘국가보안법’ 철폐, 연방제 통일 실현의 요구만 듣고 그것을 ‘종북세력’의 전략목표로 몰아가고 있다. 정상인들의 청각기능과 달리, 국방부의 청각기능에는 어느 특정대상에게서 들려오는 소리만 자동적으로 가려듣는 놀라운 초능력이 있는 듯하다.

둘째, 위에서 언급한 ‘종북시험’ 관련 문서에 따르면, “2000년대에는 종북세력이 제도정치권, 언론계, 문화예술계 등에 안착해 친북, 사회주의활동을 민주화, 평화애호운동으로 미화하며 그 영향력을 국가 전반에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종북세력’의 영향력이 남측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다는 그들의 이상한 표현을 정상적으로 바로잡으면, 진보정치의 영향력이 남측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과장된 표현이다. 오늘 현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이 땅에서 진보정치의 영향력은 아직 강력하게 발산되지 못하고 있다. 진보정당이 10% 선을 밑도는 낮은 지지율을 얻고 있는 것이 그런 현실을 잘 말해준다.

그런데도 군대까지 나서서 ‘종북세력’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으니, 진보정치에 대한 군부의 두려움이 이만저만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전방 경계근무 소홀사건에서 드러난 것처럼, 원래 겁이 많은 군부라서 그런 것일까?

셋째, 위에서 언급한 ‘종북시험’ 관련 문서에 따르면, “종북세력이 전국 단위 조직만 80여 개 단체에 이르고, 핵심세력이 3만여 명, 종북동조세력이 30만~50만여 명, 부동세력이 30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는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추산하였는지 알 길이 없지만, 그들의 추산에 따르더라도 ‘종북세력’으로 지목된 대상은 최소 33만여 명에서 최대 53만여 명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추산은, 군부가 33만~53만여 명에 이르는 민간인을 적으로 규정해놓았음을 말해준다.

군부가 수 십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을 적으로 규정한 것은, 군이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느냐 아니면 정치적 중립성을 파기하느냐 하는 문제를 넘어 자기들과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민간인에게 적의를 드러낸 끔찍스러운 사건이다.


제4세대 전쟁론에 근거한 대적관념의 표출

국방부가 민간인을 핵심세력, 종북동조세력, 부동세력으로 분류해놓고 그들에게 적의를 드러낸 사건의 배경에서 꿈틀거리는 것은, 미국 군부의 ‘제4세대 전쟁론(Fourth-Generation War Theory)’을 맹종하는 한국 군부의 종미성향이다. 미국에게 작전통제와 무기공급을 의탁한 한국 군부야말로 세계가 알아주는 종미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종미세력이 미국 군부의 제4세대 전쟁론을 맹종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주목하는 것은, 군부가 제4세대 전쟁론의 시각에서 ‘종북세력’을 대하면서 적의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국방대학교 전문연구원이 2012년 10월 18일 <국방일보>에 발표한 ‘종북세력과 제4세대 전쟁’이라는 제목의 글에서도 그런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제4세대 전쟁론에 대한 미국 군부의 작전의지와 ‘종북세력’에 대한 한국 군부의 적의표출 사이에 얽혀있는 상관성을 들춰낼 필요가 있다. 한국 군부가 맹종하는 미국 군부의 제4세대 전쟁론에 따르면, 북이 한반도에서 수행하려는 전쟁은 미국 군부가 말하는 제4세대 전쟁이며, 제4세대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북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남측의 ‘종북세력’도 한국군의 적으로 된다. 국방부가 ‘종북실체 표준교안’에서 ‘종북세력’을 ‘국군의 적’으로 규정한 것은 바로 그러한 제4세대 전쟁론에 근거한 대적관념의 표출인 것이다.


62년 전에도 그들은 민간인을 3등급으로 분류하였다

오늘 한국 군부가 ‘종북세력’을 적으로 규정하고, ‘핵심세력’, ‘종북동조세력’, ‘부동세력’ 3등급으로 분류한 것은,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칠 일이 아니다. 62년 전에도 한국 군부가 자기의 적을 3등급으로 분류한 적이 있었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한국 군부는 자기의 적을 남로당원, 남로당 지지자, 토지개혁 지지자 3등급으로 분류하였다.

그 당시 한국 군부가 3등급으로 분류한 그들은 ‘보도연맹원’이었다. 이승만 극우정권은 6.25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49년 6월에 ‘국민보도연맹’이라는 것을 창설하고, 거기에 남로당원, 남로당 지지자, 토지개혁 지지자를 가입시켰다. 이승만 극우정권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킨 ‘보도연맹원’은 30만여 명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는 시인 정지용과 김기림, 소설가 황순원, 국어학자 양주동, 문학평론가 백철, 만화가 김용환 같은 유명인사들도 있었다. 원래 ‘국민보도연맹’은 일제강점시기 식민지 조선의 반일독립운동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만들어놓았던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이승만 극우정권이 일제의 뒤를 따라 ‘국민보도연맹’을 창설한 것은, 장차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그들이 적으로 규정한 ‘좌익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사전준비조치였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 군부는 미국군의 지시에 따라 1950년 6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남측 각지에서 헌병대, 경찰, 서북청년단 등을 동원하여 ‘보도연맹원’을 집단학살하였다. 그것만이 아니라, 6.25 전쟁 중에 인민군이 북으로 후퇴한 남측 지역의 수많은 민간인을 ‘인민군 부역자’ 또는 ‘빨치산 내통자’로 몰아 집단학살하였다. ‘보도연맹원’, ‘인민군 부역자’, ‘빨치산 내통자’로 몰려 집단학살당한 피학살자를 모두 합하면 100만여 명에 이른다.

1950년 7월 강원도와 충청북도에서 있었던 ‘보도연맹원’ 집단학살에 동원된 당시 제6사단 헌병대 제4과장의 증언에 따르면, 경찰이 ‘예비검속’으로 체포한 ‘보도연맹원’을 철사줄이나 전깃줄로 묶어 끌어오면, 육군 정보국 방첩대(CIC)가 A, B, C 3등급으로 분류하고, 헌병대가 A급과 B급을 산골짜기와 바닷가로 끌고가서 미국군의 현장감독 하에 아무런 절차 없이 곧바로 집단학살하였다. 그들이 무참히 학살한 30만여 명 피학살자들 가운데는 청소년, 여성, 임산부, 노인, 장애인도 있었으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설치한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밝혀낸 ‘보도연맹원 피학살자’는 30만여 명 가운데 겨우 4,934명 뿐이다.

‘보도연맹원’ 대학살은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반인륜적 범죄이지만, 대학살보다 더 참담한 것은 그런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미국군 지휘관들과 한국군 지휘관들 가운데 처벌을 받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다. 미국 정부와 남측 정부는 대학살을 덮어버렸을 뿐 아니라 대학살을 저지른 군인들에게 되레 훈장을 달아주었다. 중남미의 작은 나라인 과테말라에서는 군부가 1982년에 민간인 101명을 학살한 사건을 지난 몇 해 동안 파헤쳐 학살만행을 저지른 전직 특수부대원 5명에게 각각 징역 6,060년씩 선고하였는데, 이 땅에서 ‘보도연맹원’ 30만여 명을 학살한 범죄자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누구인지도 모른다. 미국군과 한국군의 학살범죄는 전혀 청산되지 않은 것이다.

오늘 미국 군부의 제4세대 전쟁론을 맹종하는 한국 군부가 62년 전의 학살범죄를 청산하지 않은 채, 자기의 적을 ‘핵심세력’, ‘종북동조세력’, ‘부동세력’ 3등급으로 분류한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미국 군부의 제4세대 전쟁론에 근거한 대북전쟁계획을 ‘작전계획 5029’라 하는데, 미국군이 한국군을 참가시킨 가운데 줄곧 연습해온 ‘작전계획 5029’에서 정권전복작전과 함께 제기되는 것이 이른바 ‘안정화 작전(stabilization operation)’이다. ‘안정화 작전’은 북의 정권이 전복된 뒤에 미국군과 한국군을 공격하는 북측의 ‘저항세력’을 제거하는 작전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작전계획 5029’에 나오는 ‘안정화 작전’은 북측의 ‘저항세력’만 제거하는 것일까? 이번에 한국 군부가 최소 33만여 명에서 최대 53만여 명에 이르는 ‘종북세력’을 적으로 규정하고, 3등급으로 분류해놓은 것을 보면, ‘안정화 작전’은 북측의 ‘저항세력’만이 아니라 남측의 ‘종북세력’도 제거하는 작전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강한 의혹이 생긴다. ‘작전계획 5029’에 나오는 ‘안정화 작전’을 연습하고 있는 한국 군부가 자기의 적을 3등급으로 분류해놓고, ‘종북세력’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는 정신교육을 전반적으로 강화하는 것을 보고, 그런 의혹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헌정질서를 위협하는 한국 군부의 ‘안정화 작전’ 연습과 ‘종북세력’ 적대감 고취 정신교육은 즉각 중지되어야 한다.(2012년 10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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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0

세 가지 강령이 서로 엮어지는 결합방식


변혁과 진보 (98)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실질적 민주주의,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 진보적 민주주의

진보정치세력이 이 땅에서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임무이며, 반드시 달성해야 할 전략적 목표는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이다.
 
돌이켜보면, 1980년대 중반 진보적 청년활동가들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폭압을 뚫고 민주화운동의 깃발을 처음 들어올렸을 때, 그들이 불타는 마음에 그려본 것은 군사독재정권을 타도하는 반독재민주화로 실현되는 민주주의였다. 그 당시 반독재민주화는 민주적 정치체제의 수립을 뜻하는 개념으로 정리되었다.
 
정치체제와 경제체제를 비롯한 사회체제 전반을 바꾸어 새로운 사회체제를 건설하는 사회변혁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그 때까지만 해도 아직 깊지 못하였으므로,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독재정권을 민주정권으로 교체한다는 뜻의 반독재민주화로만 좁혀서 이해하였던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반독재민주화 대신에 사회의 민주화라는 새로운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김영삼 정권이 이른바 문민정권이라는 간판을 내건 정세변화 속에서, 반독재민주화라는 용어만으로는 더 이상 설득력 있게 대중과 소통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 사회의 민주화라는 개념을 사회체제 전반을 바꾸어 새로운 사회체제를 건설한다는 변혁적 의미로 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사회의 민주화라는 개념의 등장이 반독재민주화라는 개념의 한계를 뛰어넘은 이론적 진전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더 정확히 그리고 더 깊이 이해하는 이러한 이론적 진전은, 민주주의를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로 구분하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라고 부르기 시작한 인식발전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원래 민주주의를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로 구분하는 도식은 서구의 진보적 사회과학에게서 배워온 것인데,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로 재정의한 것은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자기의 독창적인 생각을 잘 반영한 것이다. 그로써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는 당시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추구하는 강령으로 되었다.
 
어느 때부터 그러했는지는 꼭 집어서 말하기 어렵지만,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진보정치라는 개념에 결부시켜 생각하게 되었다. 원래 진보라는 말은 보수라는 말과 대칭되는 뜻으로 쓰던 것인데, 진보라는 말을 정치라는 개념 앞에 놓음으로써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정치방식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진보정치라는 새로운 정치방식으로 정식화된 것이다. 그리하여 진보정치는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새로운 정치방식으로 되었다.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진보정치라는 새로운 정치방식으로 실현할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를 진보적 민주주의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해 전부터의 일이다.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민주화라는 개념을 사회체제의 전반적 변혁이라는 변혁적 의미로 이해하면서,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강령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2000년대 중반에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으로 사용하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개념과 동의어로 사용한 것이지,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개념과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상호배치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에는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에는 없는 사회변혁사상이 담겨 있고, 더욱이 그 개념이 우리 사회의 실정에 부합된다는 점은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 속에 이미 널리 알려진 바 있다.
 
주목하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뜻으로 썼던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라는 사회변혁적 의미로 재정의하였다는 점이다. 사회변혁적 관점에서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진보적 민주주의로 재해석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진보정치강령으로 제시할 수 있었던 이론적 발전은 당시 민주노동당에 결집한 진보정치활동가들의 탐구와 해명에 의해 가능하였다.
 
지금 '노무현의 적자'를 자처하는 개혁정치세력은 노무현 대통령이 제시하였던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전혀 쓰지 않지만, 민주노동당에서 통합진보당으로 이어지는 진보정당의 변화와 발전을 거치면서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가장 중요한 자기의 역사적 임무로, 자기의 전략적 목표로 삼고 멀고 험한 진보정치의 길을 헤쳐가는 중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정치체제의 변혁과 경제체제의 변혁을 동반하는 두 단계 사회변혁의 발전과정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사회역사발전의 주체로 일어서는 저 눈부시게 새롭고 멋진 세상에 당당히 내걸 새로운 사회의 첫 번째 이름이다.
 
오늘 자본주의세계시장에 파상적으로 몰아치는 대공황 속에서 자본주의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한 '몰락의 시대'에 자본의 착취와 차별과 소외로 고통을 겪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대공황의 공포와 위험을 단숨에 뚫고 나아가 만날 새로운 시대의 이름, 바로 그것이 진보적 민주주의다.
 
오늘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여 상호결탁한 제국주의깡패국가들이 세계 곳곳에서 무력침공과 정권전복의 피바람을 몰아오는 '대량살상의 시대'에 제국주의깡패국가들의 광란적 폭거를 단숨에 진압하고 들어설 새로운 시대의 이름, 바로 그것이 진보적 민주주의다.

 
자주, 민주, 통일이 서로 엮어지는 결합방식

진보적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논할 때, 아니 진보적 민주주의가 실질적 민주주의와 어떻게 다른가를 논할 때 제기되는 두 가지 중요한 논제를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반제자주화와 진보적 민주주의를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실질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개혁정치세력은 자기들이 논하는 실질적 민주주의가 반제자주화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 반제자주화를 실현하지 않으면,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는 데도, 그들은 그렇게 착각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반제자주화는 곧 반미자주화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노무현 정권이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원인은 그 정권이 대미예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노무현 집권기간 5년의 경험은, 대미예속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실현하지 못한 정권은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전혀 실현할 수 없다는 진리를 입증하였다.
 
이 땅에서 반미자주화를 실현하여야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말은, 반미자주화가 선행하고 진보적 민주주의가 뒤따르는 식의 선후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해서, '선 자주화, 후 민주화'라는 도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반미자주화의 핵심적 실천과업으로 제기된 주한미국군 철군과 한미동맹 해체는 이 땅에 진보적 자주정권이 수립되어야 가능한 과업들이다. 오직 진보적 자주정권만이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키고 한미동맹을 해체하여 반미자주화를 실현할 수 있다. 개혁적 민주정권은 주한미국군 철군과 한미동맹 해체에 대해서 말도 꺼내지 못한다.
 
그런데 진보적 민주주의가 진보적 자주정권 수립으로 실현된다고 할 때, 진보적 자주정권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사회변혁과정에서, 바로 그 격동적인 변혁 속에서 주한미국군 철군과 한미동맹 해체를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진보적 민주주의와 반미자주화를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진리를 말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선 자주화, 후 민주화'라는 도식이 성립될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주한미국군 철군과 한미동맹 해체는 남측 사회만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격동적인 변화로 이끌어가고, 더 나아가서 동북아시아 정세를 개편하는 거대한 사변이 될 것이다. 그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격동적인 대변화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처럼 일어나는 게 아니다.
 
주한미국군 철군과 한미동맹 해체는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개선과 맞물려 일어나는 것이다. 주한미국군 철군과 한미동맹 해체가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개선과 맞물리지 않고 실현될 수 있는 경로는 북이 '조국통일대전'으로 미국의 항복을 받아내는 경우밖에 없는데, 북의 '조국통일대전'은 남측의 진보정치상황과 무관하게, 북의 의지대로 일어날 수 있는 대사변이기 때문에, 이에 관한 논의는 이 글의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생략한다.
 
이 글은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정세변화에 맞물려 주한미국군이 철군하고 한미동맹이 해체되는 경로를 주목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개선이 자주적 진보정권이 세워지기 이전에 실현될 수 있고, 또 반드시 그런 이전 단계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한반도 평화실현과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의지를 가진 개혁적 민주정권이 세워지는 경우에도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개선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합진보당이 집권하여 자주적 진보정권을 세우고, 그 정권이 평화협정에 체결에 나서고 남북관계를 개선한 다음, 순차적으로 주한미국군 철군과 한미동맹 해체를 추진하리라고 전망할 것이 아니라, 민주통합당이 집권하여 개혁적 민주정권을 세울 때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개선을 실현할 수 있고, 또 반드시 그렇게 실현해야 할 것으로 전망하는 것이다.
 
물론 개혁적 민주정권이 미국의 통제와 강압에 굴복하여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개선을 자기 의지대로 추진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통합진보당이 진보적 대중단체들과 힘을 합하여 개혁적 민주정권을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개선의 길로 힘있게 떠밀어주고, 다른 한 편, 북이 미국의 새 정부를 강하게 압박하여 평화협정의 길로 끌어낸다면 개혁적 민주정권 하에서도 얼마든지 평화협정이 체결될 수 있고, 남북관계가 개선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통합진보당은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남북관계가 개선된, 결정적으로 유리한 정세변화의 순풍을 타고 집권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자주적 평화통일과 진보적 민주주의를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1980년대 후반 진보적 청년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조국통일운동이 추진되고 있을 때, 개혁정치세력은 '선 민주, 후 통일'이라는 도식을 꺼내들고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논하는 이 글에서는 그런 낡은 도식을 논할 필요조차 없지만, 오늘 진보정치활동가들 가운데 일각에서는 아직도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시간적 선후배열로 이해하는 오류를 넘어서지 못한 듯하다.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통일은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한 다음에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자주적 진보정권이 등장하기 이전에 개혁적 민주정권이 세워지더라도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남북관계가 개선될 수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바로 그러한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개선이 자주적 평화통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며,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주적 평화통일에 직결된 선행과업인 것이다.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개선이 실현되지 않은 조건에서 자주적 평화통일은 실현될 수 없다.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개선이 실현되지 않은 조건에서 자주적 평화통일이 실현될 수 있는 경로는 북이 '조국통일대전'에서 승리하여 미국의 항복을 받아내는 경우밖에 없는데, 이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이 글의 주제에서 벗어나므로 생략한다.
 
장차 통합진보당의 집권으로 세워질 자주적 진보정권은, 자기가 등장하기 이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남북관계를 개선한 개혁적 민주정권의 성과를 딛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게 될 것이다.

 
소중한 시간 5년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진보적 민주주의가 형식적 민주주의와 갈라서는 근본적인 차이는, 그것이 전략산업 국유화와 생산활동 민주화를 실현하는 민주주의라는 데서 가장 선명하게 돋보인다. 전략산업 국유화와 생산활동 민주화를 실현하지 못한 민주주의는 대량실업, 비정규직 확산, 빈부격차 극대화, 농어민 소외 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이익과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민주주의이므로, 그런 민주주의는 진보적 민주주의가 아니다.
 
장차 이 땅에 세워질 진보적 자주정권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창조한 막대한 재부를 괴물처럼 마구 먹어치우며 몸집이 비대해질대로 비대해진 30대 재벌이 장악한 전략산업을 국유화하고, 그렇게 국유화한 기업의 생산활동을 생산자대중의 요구와 이익에 맞게 민주화하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 그런 임무를 수행하려면, 진보적 자주정권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지지와 성원에 힘입어 수구우파세력의 마지막 반발을 제압하고 진보적 개헌을 추진해야 한다.
 
명백하게도, 이 땅의 전략산업은 사실상 대미예속산업이다. 대미예속산업을 국유화하는 것이야말로 제국주의지배체제와 대미예속체제의 물질적 기반을 허물어버리는 반미자주화인 것이다. 그러므로 반미자주화의 실현경로에서 주한미국군 철군 및 한미동맹 해체는 반드시 전략산업 국유화 및 생산활동 민주화를 동반하게 될 것이다.
 
반미자주화는 주한미국군 철군과 한미동맹 해체라는 정치체제의 자주적 변혁을 통해서,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전략산업 국유화와 생산활동 민주화라는 경제체제의 자주적 변혁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새누리당은 무슨 '경제의 민주화'라는 사탕발림식 말장난으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환심을 사보려고 기만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이것은 유권자대중의 관심이 민생경제를 살리는 절박한 과제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현상이다.
 
그런데 민생경제를 살리는 길은 30대 재벌이 장악한 전략산업을 국유화하고 생산활동을 민주화하여 대량실업, 비정규직 확산, 빈부격차 극대화, 농어민 소외를 해결하는 것밖에 없다. 전략산업 국유화와 생산활동 민주화가 아니라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도대체 무엇으로 그처럼 격화된 모순을 해소할 수 있으며, 그처럼 깊은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앞으로 두 달 앞으로 다가온 대선, 그 중요한 갈림길에서 만일 새누리당이 이겨 불행하게도 집권연장에 성공하는 경우, 이 땅의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은 또 5년의 소중한 시간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시간상실은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불행과 고통의 시간을 5년이나 더 연장시키는 뼈아픈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평화와 통일을 열망하는 7천만 민족에게 분단과 대립의 시간을 5년이나 더 연장시키는 비극적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래서, 소중한 5년을 수구우파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이 진보정치활동가들의 가슴을 쾅쾅 울리고 있다.
 
통합진보당은 자기의 단독집권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개혁적 민주정권 수립의 의의를 가볍게 보거나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며, 개혁적 민주정권의 등장을 배척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질러서도 안 될 것이다. 비유를 들어 말한다면, 윷놀이를 할 때 상대를 이기기 위해 모가 아니면 도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걸을 치고 나아가 모에 이르는 길도 얼마든지 있다.
 
지금 통합진보당에게는 걸을 치고 나아가 모에 이르는 길이 요구되는데, 그 요구는 개혁적 민주정권의 등장을 야권연대로 끌어당기는 강한 견인력에 의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통합진보당에게 견인력이 없다면, 걸을 치고 나서도 모로 나아가지 못하여 야권연대가 불발로 끝날 것이다.
 
또한 통합진보당의 야권연대전략은 개혁적 민주정권이 집권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정권이 집권기간 중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길로 들어설 때까지 발휘해야 할 전략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2012년 대선은 통합진보당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안겨준다.
 
통합진보당의 야권연대 견인력은 민주통합당과의 협상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통합진보당에게 보내는 지지와 성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만일 통합진보당이 진보적 민중의 지지와 성원을 받지 못하면, 야권연대는 불가능하게 된다.
 
비록 지금은 하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을 반드시 실현하리라는 굳센 신념과 밝은 전망을 안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생산현장과 생활현장을 뛰고 또 뛰는 이름 없는 진보정치활동가들의 불타는 마음과 숨은 땀방울이 위대한 변화를 불러일으킬 새 날이 5년 뒤에 저만큼 다가오고 있지 아니한가. (2012년 10월 1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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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8

제4세대 전쟁론과 지뢰방호차량

<연재> 한호석의 진보담론 (231)
통일뉴스 2012년 10월 15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15년만에 다시 고개를 쳐든 제4세대 전쟁론
 
일반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의 군사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제4세대 전쟁론이 ‘인기품목’으로 유행되고 있다. 제4세대 전쟁론(Fourth-Generation War Theory)이란 무엇일까? 그 이론은 미국의 군사전문가 윌리엄 린드(William S. Lind)가 미국 해병대 및 육군 현역 장교들과 공동집필하여 1989년에 미국 해병대 군사이론지 <해병대 공보(Marine Corps Gazette)>에 발표한 논문 ‘제4세대로 변모하는 전쟁양상(The Changing Face of War: Into the Fouth Generation)’에서 처음 꺼내놓은 것인데, 그 때는 그 전쟁론이 ‘인기품목’으로 유행되지 못했다.

그런데 미국 해병대 대령 출신 군사전문가 토머스 헤임즈(Thomas X. Hammes)가 2004년에 미국 군사이론지 <무력 공보(Armed Forces Journal)>에 발표한 논문 ‘제4세대 전쟁: 힘을 겨루는 적들(4th-generation Warfare: Our Enemies Play to Their Strengths)’에서 제4세대 전쟁론을 다시 꺼내놓았다. 헤임즈가 제4세대 전쟁론을 15년 만에 다시 꺼내놓게 된 배경에는 미국이 2000년대에 들어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도발한 침략전쟁의 경험이 놓여 있다.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이 논하는 제4세대 전쟁이란 반란진압전(counter-insurgency warfare), 테러진압전(counter-terrorist warfare), 비대칭전(asymmetric warfare), 비재래식전(unconventional warfare), 비정규전(irregular warfare), 유격전(guerrilla warfare) 등을 포괄하여 넓은 뜻으로 쓰는 개념인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반란진압전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이 제4세대 전쟁을 반란진압전이라는 뜻으로 쓰는 까닭은, 미국군이 2001년 10월 7일 아프가니스탄에 쳐들어가 모하메드 오마르 정권을 붕괴시키고, 2003년 3월 20일 이라크에 쳐들어가 사담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킨 뒤에,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점령군을 공격하는 탈리반 반란(Taliban Insurgency)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이라크에서는 점령군을 공격하는 이라크 반란(Iraqi Insurgency)을 무력으로 진압해온 경험을 제4세대 전쟁론에 반영하였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제4세대 전쟁론이란 제국주의침략전쟁을 정권전복, 군사점령, 반란진압이라는 연속개념으로 설명하는 이론인 것이다. 최근 리비아에서 일어난 카다피 정권 전복사태와 시리아에서 일어난 아싸드 정권에 대한 반란사태는 제4세대 전쟁론에 대한 미국 군사전문가들의 관심을 더욱 집중시켰다.

미국의 군사전문가들 사이에서 요즈음 ‘인기품목’으로 유행되는 제4세대 전쟁론은 어떤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을까?

미국이 방대한 침략무력을 동원하여 아프가니스탄의 모하메드 오마르 정권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2년 시차를 두고 각각 전복한 행위는 전쟁이지만, 그 두 정권이 전복된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일어난 폭력저항과 그에 대한 미국군의 무력진압은 전쟁이 아니다.

그 두 나라에서 일어난 저항집단의 급조폭발물(IED) 공격이나 저격은 외래점령군의 군사점령에 폭력적으로 저항하는 것이지 교전이 아니다. 또한 알 카에다 같은 국제테러단체가 미국을 상대로 폭력을 사용하는 행위도 테러이지 교전은 아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저항집단이나 알 카에다 같은 국제테러집단은 국제법상 교전단체(belligerent body)로 인정될 수 없다. 다른 한 편, 교전단체가 아닌 저항집단이나 테러단체에 대해 미국이 무력을 사용하는 것 역시 무력진압이지 교전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제4세대 전쟁론자들이 저항집단 및 테러단체의 폭력저항과 제국주의연합군의 무력진압 사이의 물리적 충돌을 교전으로 규정하고, 무력진압작전을 전쟁범주에 집어넣은 것은 논리가 아니라 억지다. 미국의 정권전복 무력침공은 국가와 국가가 교전을 벌인 전쟁이지만, 정권전복 이후의 무력진압은 국가와 저항집단이 물리적으로 충돌한 것이므로 전쟁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어떤 국가가 다른 국가 또는 교전단체를 상대로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국제법상 전쟁으로 인정되지만, 어떤 국가가 저항집단 또한 테러단체를 상대로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국제법상 전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국제법상 전쟁으로 인정되지 않는 무력행사는, 국가가 비국가집단을 상대로 저지르는 국가테러(state terrorism)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국가테러는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 처벌을 받아야 하는 반인륜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에 속한다.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이 아프가니스탄전쟁과 이라크전쟁 직후 제4세대 전쟁론을 다시 꺼내놓은 것은, 국제법상 전쟁으로 인정될 수 없는 미국군의 대민무력진압을 ‘제4세대 전쟁’으로 규정함으로써 미국군이 대민무력진압 중에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를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덮어버리려는 술책이다.

물론 미국이 추종국가들을 거느리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쳐들어간 침략행위 자체가 반인륜적 범죄에 속하는 것이므로, 제4세대 전쟁론은 미국이 저지른 침략전쟁을 합리화, 정당화하는 술책으로도 이용되고 있지만, 제4세대 전쟁론의 방점은 정권전복 이후에 장기간 지속된 무력진압 중에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를 덮어버리는 술책으로 더 많이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한미관계에서 교호하는 제4세대 전쟁론과 대북전쟁론

이 땅의 군사전문가들이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의 제4세대 전쟁론을 앵무새처럼 복창하고 있으며, 남측 군부도 그들의 앵무새 복창소리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를테면, 국방대학교 안보문제연구소, 육군교육사령부 지상전연구소, 한국국방정책학회, 한국국방연구원, 한국전략문제연구원 등이 미국 군사전문가들의 제4세대 전쟁론을 앵무새처럼 복창하고 있다. 남측 군부도 거기에 장단을 맞추고 있는데, 2010년 6월 8일 육군본부가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개최한 ‘육군토론회’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 자리에서 국방선진화추진위원장 이상우는 기조연설을 통해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비정규전, 특수전이라는 제4세대의 새로운 전쟁양상이 보편화하고 있다”고 하면서 인민군이 “장거리 투발수단에 장착한 대량살상무기로 전략중심지를 강타하고, 대규모 정규군으로 전선을 돌파해 전략적 목표를 신속히 점령하려는 ‘기동조우전’을 준비하고, 20만에 달하는 특수전력을 투입해 전국토를 전장화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이상우 위원장의 발언에서 드러난 것처럼, 그들은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이 논하는 제4세대 전쟁론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앵무새처럼 복창소리만 높이고 있을 뿐이다. 미국 군사전문가들의 제4세대 전쟁론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무작정 따라하는 우스꽝스러운 행동은 미국에서 나온 것이면 무엇이든지 미신처럼 떠받드는 친미극우성향이 빚어낸 서글픈 촌극이다.

미국에서 제4세대 전쟁론자들이 술책을 부리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미국 군부와 남측 군부가 제4세대 전쟁론을 자기들의 대북전쟁 작전계획에 도입하였다는 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 군부와 남측 군부는 만일 한반도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그 전쟁도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처럼 제4세대 전쟁양상으로 전개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대북전쟁론에서 말하는 제4세대 전쟁양상이란 내란도발→무력침공→정권전복→군사점령→반란진압으로 이어지는 길고 복잡한 무력충돌양상을 뜻한다.

물론 그들의 대북전쟁론은 한반도 전쟁이 그러한 다섯 단계를 질서정연하게 밟아가며 단계적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예측에 고정된 것은 아니다. 다섯 단계 중에 어느 단계는 뛰어넘을 수도 있고, 순서가 좀 바뀔 수도 있다고 보는 예측의 탄력성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대북전쟁론이 다섯 단계로 설정된 기본구성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주목하는 것은, 미국군이 한국군을 참가시킨 가운데 정기적으로 벌이는 대규모 실전급 대북전쟁연습들인 ‘키 리졸브 군사훈련’이나 ‘을지 프리덤 가디언 군사훈련’은, 그들이 한반도의 제4세대 전쟁양상으로 예측하는, 내란도발→무력침공→정권전복→군사점령→반란진압으로 이어진 무력충돌을 준비하는 전쟁연습이라는 점이다.

미국 군부와 남측 군부가 대북전쟁론을 제4세대 전쟁론에 도입하였음을 말해주는 사례는, 2012년 7월 초 미국 군부가 이라크전쟁에서 썼던 지뢰방호차량(MRAP) 다섯 대를 미국으로 가져가 개보수한 다음 주한미국군에게 배정하였던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이 2007년부터 이라크전선에 배치한 지뢰방호차량은 지뢰, 급조폭발물, 저격으로부터 탑승병력을 보호하는 장갑전투차량이다. 미국 군부는 그 다섯 대의 지뢰방호차량을 2012년 8월에 실시한 ‘을지 프리덤 가디언’ 대북전쟁연습에 투입해 사용하면서 대북작전 적합성을 검토하였다.

지뢰방호차량의 대북작전 적합성을 실전 분위기 속에서 검토한 미국 군부는, 2012년 9월 26일 지뢰방호차량 78대를 주한미국군기지에 배치하였고, 앞으로 300여 대를 더 들여와 배치할 것이다. 미국 군부가 주한미국군기지에 배치하는 지뢰방호차량은 아프가니스탄전선과 이라크전선에서 사용한 중고차량이다.

또한 미국 군부는 아프가니스탄전선과 아프가니스탄전선에서 사용한 지뢰방호차량 2,000대를 대당 85,000달러로 쳐서 한국군에 판매하였고, 한국군은 그 중고차량을 2014년부터 최전방 부대에 배치하게 된다. 미국 군부가 이처럼 주한미국군기지에 지뢰방호차량 400대를 배치하고, 한국군에게 2,000대를 판매하였으므로 중고품 지뢰방호차량 2,400대가 남측에 실전배치되는 것이다.


왜 지뢰방호차량 2,400대를 남측에 배치하려는 것일까?

미국군이 쓰는 지뢰방호차량은 아프가니스탄전선과 이라크전선에서 어떠한 작전효과를 가져왔을까? 그 두 전선에서 저항집단의 급조폭발물 도로매설과 저격으로 커다란 인명피해를 입은 미국군은 지뢰방호차량을 전선에 도입함으로써 인명피해를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문제점이 드러났다. 지뢰방호차량 밑바닥은 지뢰나 급조폭발물이 터질 때 피폭충격을 줄이기 위해 V자형으로 설계되었는데, 차체를 그처럼 아래가 좁고 위가 넓게 설계하였기 때문에 차량의 무게중심점이 윗쪽으로 이동하여 차량전복위험이 그만큼 더 커지고 말았다. 예컨대, 2007년 11월부터 2008년 6월 사이에 이라크전선에 배치된 지뢰방호차량 66대가 작전 중 사고를 당했는데, 그 가운데 40대가 당한 사고는 전복사고였으며, 차량이 전복되면서 수로에 쳐박히는 바람에 탑승병력 5명이 익사하는 대형사고도 일어났다.

지뢰방호차량은 조야하게 만든 급조폭발물 폭발에는 견딜 수 있지만, 폭발력이 대전차 지뢰만큼 강한 장갑관통폭탄(EFP)에는 견디지 못한다. 장갑관통폭탄이 터지면 지뢰방호차량은 완파될 수밖에 없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전선과 이라크전선에 지뢰방호차량을 투입한 이후, 그 두 전선에서 저항집단들이 장갑관통폭탄을 도로에 매설하기 시작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런데 장갑관통폭탄 같은 조야한 무기는 민간저항세력이나 만들어 쓰는 것이지, 북에서는 만들지 않고 만들 필요도 없다. 북은 대전차 미사일을 소련-러시아에 계속 수출해올 만큼 대전차 무기부문에서 고도의 기술력을 보유하였다. 이를테면, 스웨덴의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2005년 6월 7일에 펴낸 ‘연감(Yearbook)’에 따르면, 북은 1976년부터 1995년까지 소련에 대전차 미사일 20,000기를 수출하였고, 1995년 이후에는 러시아에 대전차 미사일 3,250기를 수출하였다. 대전차 미사일부문 기술수준이 미국에 뒤지지 않는 러시아에게 북이 그처럼 막대한 분량의 대전차 미사일을 수출한 것은, 북의 대전차 미사일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음을 말해준다.

북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대량생산하는 대전차 미사일을 ‘수성포’라 부르는데, 3인 1조로 편성된 보병들이 등짐처럼 지고 다니며 발사하거나, 장갑차에 탑재하여 발사하거나, 공격헬기에 탑재하여 공중에서 발사한다. 북의 ‘수성포’는 1970년대 후반에 생산되기 시작하였으므로, 지난 30년 동안 몇 차례 성능을 개량하여 지금은 세계 최고 수준의 대전차 미사일로 되었다. 두꺼운 방호장갑을 두른 전차도 ‘수성포’ 한 방이면 파괴되므로, 방호장갑이 약한 지뢰방호차량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인민군은 지뢰방호차량을 파괴하기 위해 대전차 미사일을 쏘지 않고, 비유도무기인 견착식 대전차 로켓포를 쏠 것이다. 인민군이 보유한 견착식 대전차 로켓포 탄두에는 탠덤식 고폭탄두(tandem-charge high explosive warhead)가 장착되어 관통력이 매우 강하다. 2011년 9월 9일 평양에서 진행된 로농적위군 열병식을 보면, 현역인 인민군만이 아니라 예비역인 로농적위군도 견착식 대전차 로켓포로 무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뢰방호차량은 견착식 대전차 로켓포 한 방이면 파괴된다. 이에 놀란 미국 군부는 견착식 대전차 로켓포를 이라크전선에 반입하는 경우 그 무기가 저항집단에게 넘어가 미국군 전차와 지뢰방호차량을 파괴할 위험을 생각해서 아예 반입하지 않았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미국 군부가 남측에 배치한 지뢰방호차량은 전쟁에서 쓸모가 없다. 산악지형이 발달하여 노면굴록이 심하고, 벼랑을 낀 도로가 많은 북의 지형에 전복위험이 큰 지뢰방호차량을 투입하는 것도 현명하지 못한 일이고, 더욱이 견착식 대전차 로켓포로 무장한 인민군과 로농적위군을 상대하는 경우에 ‘무용지물’이 될 뿐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왜 지뢰방호차량 2,400대를 남측에 배치하려는 것일까? 두 가지 이유를 추적할 수 있다.

첫째, 미국군은 아프가니스탄전선과 이라크전선에서 철군하면서 막대한 분량의 재고품으로 남게 된 지뢰방호차량을 처리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이 그 두 전선에 투입하기 위해 구입한 지뢰방호차량은 20,000대에 이른다. 미국은 지뢰방호차량 20,000대의 구입비로 485억 달러를 지출하였다. 지난 5-6년 동안 485억 달러나 쏟아부으며 20,000대나 구입한 지뢰방호차량을 이제와서 폐차장에 고철로 팔아넘길 수 없는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진 미국 군부는 그것을 ‘중고무기 잘 사가는 단골손님’인 남측 군부에게 무려 2,000대나 팔아먹었다. 남측 군부는 전쟁에서 쓸모가 없는 중고품 지뢰방호차량 2,000대를 1억7,000만 달러를 주고 미국에서 사오는 것이다.

둘째, 미국의 대북전쟁계획인 ‘작전계획 5029’는 북에서 내란을 일으켜 정권을 전복시키고 북을 무력으로 침공하여 점령한 다음, 점령군을 공격하는 북의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작전계획 5029’에 따르면, 북의 정권을 전복한 이후에 점령군은 ‘안정화군(stabilization force)’으로 변신하고, 안정화군을 공격하는 북의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작전은 ‘안정화작전(stabilization operation)으로 된다.

미국이 ‘작전계획 5029’를 작성해놓고 미국군과 한국군을 동원하여 실전연습을 계속해온 것은, 제4세대 전쟁론에서 말하는 ‘반란진압전’이 북에서도 전개되리라고 예상하였음을 말해준다. 미국이 이처럼 아프가니스탄전선과 이라크전선에서 있었던 반란진압전이 북에서 ‘안정화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리라고 예상하고 있으므로, 지뢰방호차량 2,400대를 주한미국군기지에 배치하고, 한국군에게 판매하는 것이다.


지뢰방호차량은 미국 대도시들에서 필요할 것이다

미국의 지뢰방호차량 대남배치 및 대남판매는 헛수고다. 왜냐하면 미국의 대북전쟁계획인 ‘작전계획 5029’가 허구와 오판으로 가득찬 실패작이기 때문이다. ‘작전계획 5029’는 인민군과 로농적위군을 사담 후세인 정권이나 모하메드 오마르 정권의 ‘약골군대’들과 혼동한 치명적 오판에 의거한 것이므로, 허구로 될 수밖에 없다.

1994년 5월과 6월 북미관계가 전쟁 직전 상태까지 밀려갔을 때 미국 군부가 추산한 한반도 전쟁피해에 따르면, 미국인 사망자가 최소 80,000명에서 최대 100,000명에 이르고 미국군 사상자는 52,000명, 한국군 사상자는 490,000명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18년 전 미국 군부의 추산에 지나지 않지만, 지난 18년 동안 질적 발전을 거듭해온 북의 군사력을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일방적인 추산을 그대로 인정하더라도 한반도 전쟁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대전’으로 되리라는 것이 분명하다.

북에서 나온 군사관련 언론보도를 분석하면, 인민군과 로농적위군은 실로 방대한 규모의 각종 재래식 무기 및 군사장비로 무장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나라 군대가 갖지 못했거나 불충분하게 보유한 대량파괴무기, 집중타격수단, 신속기동수단, 기습침투장비, 무인작전기, 야간전투장비, 전자전장비, 반항공타격수단, 지하방호시설 등을 각 종류별로 전선 전반에 집중배비함으로써 매우 강력한 공격력을 유지하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정신무장수준과 훈련수준도 다른 나라 군대들보다 훨씬 더 높다. 그들은 ‘수령결사옹위’와 ‘조국결사수호’를 위해 ‘총폭탄정신’과 ‘자폭정신’으로 무장하고, 독자적으로 개발한 ‘주체전법’을 계속 연마해왔다.

북의 인민군과 로농적위군은 ‘조국통일대전 작전계획’을 세워놓고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최후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단순히 기다리는 게 아니라, 조국통일대전에서 전개할 ‘주체전법’을 연마해오면서 최후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유투브(You Tube)>에 게시된 북측 영화 ‘고요한 전방’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인민군 기본전투단위인 중대에 공격명령을 내리면 10분만에 전투에 돌입할 수 있도록 맹렬히 훈련하는 장면이다.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최후 공격명령을 내리면 인민군은 현재 위치에서 10분만에 총공격을 개시할 것이다. 2012년 8월 27일 인민군 제318군부대를 시찰한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지휘관들에게 부대 안의 장병들이 고도의 격동상태를 유지하면서 최고사령관의 최후 공격명령을 기다리라고 지시하”였으며, “조국통일대전의 날이 멀지 않았으니 싸움준비에 계속 큰 힘을 넣으라고 당부”하였다.

한남대학교 국방전략대학원 김종하 교수는 2012년 2월 9일 <아시아경제>기사에서 인민군이 보유한 공격력을 ‘복합적 군사위협(hybrid military threat)’이라고 표현하였다. 인민군의 강력한 기습타격력, 돌파공격력, 연속타격력, 거점파괴력을 그런 말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김종하 교수는 “지금 당장 북한이 휴전선을 통해 기습공격을 감행할 경우, 현재의 한국군 보병전력으로는 즉시적인 대응 및 반격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어렵다. 이는 절대 과장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인민군의 총공격으로 한국군 방어선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2012년 10월 9일에 발표된 북측 국방위원회 대변인 성명은 “전략로케트군을 비롯한 우리의 백두산 혁명강군이 괴뢰들의 본거지 뿐 아니라 신성한 우리 조국땅을 강점하고 있는 미제침략군기지들은 물론 일본과 괌도, 나아가서 미국 본토까지 명중타격권에 넣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숨기지 않는다. (줄임) 세상이 알지 못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진짜 전쟁맛을 보여주자는 것이 우리 군대와 인민의 철의 의지”라고 밝혔다. 북의 시각에서 보면, 최고사령관의 최후 공격명령을 기다리는 인민군과 로농적위군의 조국통일대전은 세상이 알지 못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진짜 전쟁’인 것이다.

‘진짜 전쟁’ 준비를 마친 북의 전쟁수행력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맥없이 무너진 사담 후세인 정권이나 모하메드 오마르 정권의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전쟁수행력에 비교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아마도 미국은 북과의 ‘진짜 전쟁’에서 참패를 당한 직후 미국 대도시들에서 일어날 도시빈민의 약탈과 방화에 대처하기 위해 지뢰방호차량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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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4

3중 철책은 왜 자꾸 뚫리는 것일까?

[한호석의 개벽예감] (33)
자주민보 2012년 10월 11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15명 대 150만명이 벌인 51일 간의 전투
전에는 잘 알지 못한 북측 사정이 인터넷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는 경우가 차츰 많아지고 있다. 북측 사정은 북의 언론기관들이 운영하는 몇몇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도 세상에 알려지지만, 북의 언론기관이 <유튜브(You Tube)>에 올려놓은 동영상을 통해서 알려지는 북에 관한 정보는 더욱 생생한 현장감을 준다. <유튜브>에는 갖가지 대북정보를 담은 동영상들이 많이 게시되어 있는데, 북의 인터넷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가 2012년 2월 22일에 게시한 다부작 기록영화도 그런 동영상들 가운데 하나다. 특히 조선기록과학영화촬영소가 2010년에 제작한 기록영화 ‘누리에 빛나는 선군태양 제4부 - 인민군대를 백두산 혁명강군으로’라는 제목의 상영시간 50분 짜리 기록영화는 이제껏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민군의 전투력에 관한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

그 기록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후반부에 나오는, 이름을 명시하지 않은 인민군 장병 전사자 25명의 얼굴사진인데, 지휘관 한 사람의 사진을 맨 앞에 두고, 그 다음으로 병사 8명의 사진을 세 줄로 배열하였다. 전사자 사진들은 1996년 9월 18일에 일어났던 인민군 잠수함 사건에서 전사한 인민군 장병들의 영정으로 보인다.

인민군 잠수함 사건이 있었던 때로부터 16년 세월이 흐른 지금,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진 그 사건을 다시 거론하는 까닭은 인민군 전투력에 관한 기록영화에 그 사건이 다시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을 보면, 북이 인민군 잠수함 사건을 인민군 전투력이 얼마나 강한지 말해주는 여러 사례들 가운데 한 사례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96년 9월 18일 동부전선 군사분계선(MDL)에서 남쪽으로 약 120km 떨어진 강원도 강릉시 안인진리 앞바다에서 인민군 소형 잠수함 한 척이 해안에 좌초되었다. 그 잠수함에는 승조원 23명과 정찰병 4명이 타고 있었다. 해안에 좌초한 잠수함을 더 이상 운항할 수 없게 되자, 그들 27명 가운데 소총으로 무장한 16명은 뿔뿔이 흩어져 오대산에서 설악산에 이르는 험준한 산줄기를 타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당시 산줄기를 타고 북상하며 한국군과 교전하였던 인민군 16명 가운데 정찰병은 3명 뿐이었고, 나머지 13명은 잠수함 승조원이었다. 정찰병 3병은 육상정찰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한국군의 포위공격 속에서도 교전할 수 있는 육상전투능력이 있었지만, 바다에서 잠수함을 타던 승조원 13명에게는 육상전투능력이 사실상 없었다. 그래서 투항자 1명이 잠수함 승조원 가운데서 나왔다.

해안에 좌초된 잠수함에 정찰병 3명이 타고 있었다는 보도를 보면, 그 소형 잠수함이 대남정찰을 위해 남하하였다가 해안에 좌초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사건에서 기억할 수 있는 것처럼, 지금으로부터 16년 전만 해도 북은 정찰병을 적진에 침투시키는 정찰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주한미국군과 한국군도 대북정찰활동을 벌였다. 한반도가 아직 전쟁을 끝내지 못한 정전상태에 있으므로, 교전쌍방이 서로 그러한 정찰활동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 전역을 미국 상업위성이 정밀하게 촬영한 위성사진자료가 2001년 6월 11일부터 인터넷에 공개되기 시작하자, 북은 정찰병을 남측에 침투시키는 대남정찰활동을 더 이상 지속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를테면, 2012년 10월 5일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민주통합당 소속 국회의원은 미국 상업위성이 촬영한 인터넷 위성사진자료에 한국군 각 부대들의 위치와 건물배치상태는 말할 것도 없고, 각종 지상배치 무기와 군사장비들까지 모조리 노출되었다고 개탄한 바 있다. 또한 2012년 6월 4일 인민군 총참모부가 당시 평양에서 진행된 소년단 창립 66주년 경축행사를 비방한 남측 신문사들의 좌표를 열거하면서 조준사격 위협을 가한 것은, 인민군이 위성사진자료를 통해 정밀한 타격좌표를 파악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인민군은 2000년대에 들어와 대남정찰활동을 중지하였지만, 미국군과 한국군은 지금도 이전처럼 대북정찰활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왜냐하면 미국 정찰위성이 찍어오는 위성사진에는 북의 갱도화된 군사지하시설들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1996년 9월 18일 인민군 잠수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무기라고는 소총 한 자루와 실탄 몇 발씩밖에 갖지 못한 정찰병 3명과 육상전투능력이 없는 잠수함 승조원 12명의 북상을 차단하기 위해 한국군은 연인원 150만 명을 투입하여 여러 겹으로 포위망을 쳤다. 15명 대 150만명이 벌인 51일 간의 전투, 그것은 세계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전무후무한 격전이었다. 51일 동안 계속된 전투에서 인민군 14명이 교전 중 전사하였고, 한국군은 11명, 예비군 1명, 경찰 1명이 전사하고 15명이 부상당했다. 한국군 전사자 11명 가운데 3명은 오인사격에 의한 사망자다. 소총 한 자루와 실탄 몇 발씩밖에 갖지 못한 인민군 15명의 북상을 차단하기 위해 병력수송헬기까지 동원한 한국군이 51일 동안 150만명 대병력을 작전에 투입하고서도 13명이 전사하고 15명이 부상당한 것은 그 작전이 사실상 실패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당시 인민군 잠수함 승조원들과 정찰병들이 한국군 포위망을 뚫고 오대산을 거쳐 설악산까지 북상하는 동안, 북에서는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특수군 병력을 실은 AN-2 기습항공기들을 군사분계선 부근까지 남하시켜 비행하는 무력시위를 벌였다. 만일 인민군 특수군 병력이 방공레이더에 포착되지 않는 AN-2기를 타고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한국군과 곳곳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였더라면 어떤 사태가 일어났을까? 한국군이 인민군 잠수함 승조원 11명과 정찰병 3명을 상대로 벌인 51일 동안의 교전에서도 그처럼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면, 북에서 자타가 최정예로 공인하는 특수군 병력을 상대로 벌이는 교전에서는 한국군이 상상하기 힘들 만큼 엄청난 인명손실과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군의 작전패인은 무엇인가?

한국군이 10만 배나 되는 대병력을 작전에 투입하고서도 결국 실패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한국군이 작전실패의 원인을 어디서 찾았는지는 언론에 보도된 적이 없어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작전과 관련해서 남과 북에서 각각 나온 기록들을 살펴보면 한국군의 작전실패 원인을 분석할 수 있다.

우선 남측에서 나온 관련기록부터 살펴보면, 인민군 잠수함 사건 당시 동부전선 매복작전에 동원된 익명의 한국군 병사가 남긴 생생한 체험담이 인터넷에 게시되어 있다. 체험담의 주요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수류탄을 지급받은 한국군 병사가 작전에 투입되기도 전에 수류탄 한 발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대대병력 500명이 잃어버린 수류탄을 찾기 위해 주둔지역을 사흘 동안이나 샅샅이 뒤졌다는 얘기, 수류탄은 안전핀과 클립을 모두 빼고 던져야 하는데 어떤 병사가 안전핀만 빼고 던지는 바람에 불발 수류탄을 잘못 건드리면 터지게 되므로 매복 중인 장병들이 날이 밝을 때까지 제자리에서 꼼짝없이 발이 묶여 있었다는 얘기, 매복작전 중 공포에 질린 병사들이 밤이 되면 어둠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앞뒤를 보지도 않고 미친 듯이 총을 쏘아대는 바람에 매복구역에 나타난 아군을 오인사살하거나 마을에서 기르는 황소를 오인사살하거나 송이버섯 캐러 산에 오른 주민을 오인사살하였다는 얘기, 교전 중에 전사한 전우의 시체를 보면서 느낀 감정 등이 체험담에 들어 있다.

그 체험담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한국군의 전투능력이 생각보다 부실할 뿐 아니라, 특히 정신적으로 매우 허약하다는 것이다. 사정이 그러했으므로 한국군 지휘부는 인민군 15명의 북상을 차단하는 포위작전에 150만 명에 이르는 대병력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군 지휘부가 그런 불편한 진실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아서, 일반대중은 한국군의 전투력에 대해 알지 못하였다.

다른 한 편, 인민군 잠수함 사건에 관해 언급한, 위에서 인용한 북의 기록영화에는 “전투근무 수행 중 폭풍에 떠밀려 남쪽으로 흘러가 적의 포위에 들었을 때 누구도 명령한 사람은 없었건만 전사들이 억세게 틀어쥔 자폭의 수류탄”이라는 해설이 나오는 동영상 화면에 수류탄 세 발이 땅에 놓여져 있는 장면과 소총 탄피들이 땅에 떨어져 있는 장면과 함께 “우리들은 혁명적 절개와 지조를 지켜 적들에게 절대로 포로가 되지 않을 것이며 장군님의 병사답게 영예로운 최후를 마칠 것이다...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일 장군 만세!”라는 글귀가 화면에 나타난다. 그 글귀와 함께 군용무전기가 화면에 나온 것으로 봐서, 그 글귀는 좌초된 잠수함에 탔던 인민군 장병들이 잠수함 운항을 포기하고 거기서 나와 강릉 해안에 상륙하기 직전 잠수함에서 마지막으로 북에 송신한 맹세문인 것으로 보인다.

강릉 해안에 상륙한 27명 가운데 소총마저 없었던 승조원 11명은 좌초지역에서 서남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있는 청학산 중턱에 가서 수류탄 세 발을 가운데 놓고 서로 어깨를 겯고 자폭하였다. 절대로 포로가 되지 않고 영예롭게 최후를 마치겠다고 맹세한 그대로 그들은 자폭의 길을 택하였다. 이런 사실을 보면, 북에서 말하는 ‘자폭정신’은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강인한 전투정신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소총을 가진 다른 승조원 및 정찰병 14명은 한국군과 교전하면서 북상하던 중 전사하였는데, 한국군이 겹겹으로 포위망을 둘러치고 좁혀오는 상황이었으므로 120km에 이르는 전선을 돌파하여 군사분계선 철책을 넘어갈 가망은 사실상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총에 마지막 실탄이 남을 때까지 싸웠다. 살아날 가망이 없는 포위망 속에서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것 역시 북에서 말하는 ‘자폭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밤중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

2012년 10월 2일 강원도 고성에 주둔하는 한국군 제22사단의 최전방 철책이 어이없게 뚫리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 날 밤 10시 30분쯤 한국군이 감시하는 최전방 철책에 걸어서 도착한 인민군 병사 한 사람이 높이 4m의 3중 철책을 맨손으로 타고 넘었다. 철책을 넘어 남하한 그는 불빛이 비치는 동해선 경비대로 가서 출입문을 두드렸으나 반응이 없자 다시 한국군 병사들이 잠을 자고 있던 생활관(이전에는 내무반)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한국군 병사 3명이 잠자리에서 부시시 일어나 출입문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인민군 병사 한 사람이 문 밖에 서 있었다.

한국군이 최전방에 가설한 철책은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3중으로 설치되었는데, 철책 아래쪽은 절단하기 힘든 촘촘한 판망이고 윗쪽은 타고 넘기 힘든 커다란 원통형 철망이다. 또한 철책 곳곳에는 돌과 깡통을 매달아놓아 철책이 흔들리는 경우 소리가 나게 되어 있다.

군사분계선과 3중 철책 사이 2km 구간에는 한국군 최전방 경계초소(GP)들이 있고, 철책 남쪽에는 최전방 소초(GOP)들이 있다. 최전방 소초에 주둔하는 한국군 소대병력 40여 명은 동서로 1.5km에 이르는 3중 철책구간을 24시간 감시하고 있다. 밤에도 동서구간 철책 400~500m마다 경계병력이 배치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군 최전방 경계초소는 인민군 병사가 3중 철책을 하나씩 타고 넘어 남하하는 것을 알지 못했고, 철책을 감시하던 한국군 경계병들도 철책에 매단 돌과 깡통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소대병력이 잠든 생활관 앞에는 보초병도 서 있지 않았고, 폐쇄화면 TV마저 작동하지 않았다. 그 날 오전, 강원도 강릉 앞바다에서 남측 어선을 북측 잠수함으로 오인한 사건이 일어나, 동부전선을 지키는 한국군 제22사단은 경계태세를 강화하였다고 하는 데도, 그런 사태가 일어났으니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번 사태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전해들은 남측 국회의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인민군 병사 한 사람이 어떻게 3중 철책을 아무런 도구 없이 약 12분만에 맨손으로 타고 넘을 수 있겠는가고 의문을 표시하면서 혹시 다른 인민군 병사의 도움을 받았을지 모른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글을 시작하면서 언급한 ‘누리에 빛나는 선군태양 제4부 - 인민군대를 백두산 혁명강군으로’라는 제목의 기록영화를 보면, 남측 국회의원들이 불가사의하게 여긴 3중 철책 타고넘기가 결코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은, 개인화기로 무장한 인민군 병사들이 불과 연기가 피어오르는 실전 분위기 속에서 높은 철조망을 타고 넘는 훈련장면이다. 그런 훈련을 평소에 받은 인민군이 군사분계선 철책을 타고 넘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다. 이번에 인민군 병사가 군사분계선 철책을 타고 넘은 시간이 4분이라고 하였는데, 철책 한 개를 타고 넘는 데 4분씩이나 걸린 것을 보면, 그는 평소에 철책 타고넘기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은 낙제생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했으니 탈영하여 남하하였을 것이다.

한국군이 경비하는 최전방 철책은 이번에 처음으로 뚫린 것이 아니다. 1996년 9월 18일 인민군 잠수함 사건이 일어났을 때, 겹겹으로 둘러치고 조여오는 한국군 포위망을 벗어나 북상하여 철책을 뚫고 북으로 돌아간 정찰병 1명도 한국군 제22사단이 경비하는 바로 그 지역에서 월북하였다. 그것만이 아니다. 2004년과 2009년에 남측 민간인들이 3중 철책을 뚫고 월북했을 때도 한국군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로켓포탄 두 발씩 가슴에 안은 그들은 누구인가?

‘철통 같은 경비태세’라고 항상 큰 소리를 치던 한국군이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SBS> 2012년 10월 11일 보도에서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보도에 따르면, 2008년 4월 인민군 1명이 군사분계선 철책을 넘어 한국군 최전방 경계초소에 접근하였는데, 경계초소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급한 생각에 권총을 꺼내 공포탄을 쏘며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경계초소에 있던 한국군 장병들은 “(권총 공포탄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응사하기는커녕 어떻게 할 줄 몰라했다. 들키면 총을 맞을까봐 참호에 숨어 있었다”는 것이다. 적과 대치하는 최전방 초소에서 경비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군인들이 갑작스럽게 울린 총소리 두 발을 듣고 놀라 참호에 숨어버린 웃지 못할 사건은 언론에 보도하기도 힘든 ‘창피사건’이다.

원래 공포란 정신력이 허약한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심리현상이다. 사람이 느끼는 갖가지 공포감 중에서 가장 무섭게 느끼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 사람은 공포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 필사의 각오로 싸움에 나선 전사가 적을 압도하는 용맹을 떨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런데 최전방에 배치된 한국군이 작전 중에 또는 경계근무 중에 공포에 사로잡혀 전의를 상실하고 몸을 숨긴다면 그런 그들의 전투는 해보나 마나 뻔하다. 더구나 상대는 ‘자폭정신’으로 무장한 강력한 인민군이 아닌가. 이 글을 시작하면서 언급한 ‘누리에 빛나는 선군태양 제4부 - 인민군대를 백두산 혁명강군으로’라는 제목의 기록영화에는 인민군 특수군이 야간습격훈련과 기습폭파훈련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특히 공중강하훈련에 나선 것으로 보이는 인민군 특수군이 출동을 앞두고 대오를 정렬한 장면을 보면, 그들이 커다란 로켓포탄을 두 발씩 앞가슴에 안고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류탄보다 더 강력한 로켓포탄을 두 발이나 터뜨려 적진을 깨부술 ‘자폭정신’으로 무장한 필사의 각오와 전의가 보이는 모습이다. 일부 탈북자들이 늘어놓는 허튼 소리만 듣고 인민군 전투력을 판단하는 것은 100% 오판이다.

150만 대병력의 포위망 속에서 어깨를 겯고 수류탄을 터뜨려 집단자폭의 길을 택하고, 소총 한 자루와 실탄 몇 발만 갖고 끝까지 싸우다가 최후를 맞는 ‘자폭정신’으로 무장한 인민군 전방부대들이 지상과 지하, 해상과 해저에서 그리고 공중에서 5차원 진격을 개시하면, 권총 공포탄 소리에도 겁을 먹고 참호에 숨는 한국군은 그들의 진격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한국군 방어선은 너무도 싱겁게 뚫릴 것이다. 인민군 전방부대들이 한국군 방어선을 순식간에 뚫는 사이, 미리 후방지역에 침투하여 사전대기 중이던 인민군 특수군 병력은 서울을 비롯한 남측 각지에 있는 전략시설들을 거의 교전도 하지 않은 채 신속히 무혈점거할 것이다. 그러면 북에서 말하는 ‘조국통일대전’은 그것으로 끝나게 된다. 경기도와 강원도 북부에 사는 남측 주민들은 그래도 포성이나 듣겠지만, 그 아래 남부지역에 사는 남측 주민들은 포성도 듣지 못한 채 어느 새 속결전이 끝났음을 알리는 긴급보도를 듣게 될지 모른다.

이번에 동부전선이 또 다시 뚫린 사태가 일어난 뒤 2012년 10월 11일에 국방장관은 전군 작전지휘관 화상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병력, 감시장비 운용을 포함한 접적지역 경계작전 시스템의 근원적인 보강대책을 조기에 마련해 추진”하라고 지시하고, “국민들께 심려를 끼친 것에 대해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전방 철책이 뚫릴 때마다 송구스럽다는 변명조 발언을 되풀이해온 한국군 지휘부의 말을 더 이상 곧이 듣기 어렵다.

지금 한국군은 북측 전역을 타격할 탄도미사일을 3년 안에 개발하겠다는 자극적인 무력증강책을 발표하여 북의 ‘조국통일대전’ 의지를 시험해보려고 할 게 아니라, 군사긴장을 완화하고 평화체제를 세우는 올바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할 것이다. “남과 북은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한반도에서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기로 하였다”고 명시한 10.4 선언을 이행하는 진지한 노력만이 한국군에게 참패를 면할 수 있는 방도가 될 것이다.(2012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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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3

챠베스의 20년 집권과 볼리바리안 혁명의 계속 전진


변혁과 진보 (97)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999년부터 2019년까지 20년 집권

2012년 10월 7일에 실시된 베네주엘라 대통령선거에서 우고 라파엘 챠베스 프리아스(Hugo Rafael Chavez Frias) 대통령이 엔리케 카프릴로스 라돈스키(Herique Caplrilos Radonski)를 55.25% 대 44.13%의 득표율로 꺾고 승리하였다.
 
이로써 챠베스 대통령이 이끄는 베네주엘라 연합사회주의당(PSUV)이 2019년 2월까지 6년 동안 집권을 연장하게 되었다. 우고 챠베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던 때는 1999년 2월이었으므로, 그가 2019년 2월까지 집권하게 되면 집권기간은 20년이 된다. 다시 말해서, 우고 챠베스 대통령이 이끄는 베네주엘라의 볼리바리안 혁명은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발전되어가는 것이다.
 
'21세기 사회주의'라는 기치를 들고 전진해온 베네주엘라의 볼리바리안 혁명은 라틴 아메리카식 사회변혁의 표준형으로 정착되었다. 베네주엘라의 볼리바리안 혁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에서 그와 매우 유사한 혁명이 일어났고, 또 현재 진행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라틴 아메리카에서 쿠바 혁명이 라틴 아메리카식 사회변혁의 표준형으로 공인되었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베네주엘라의 볼리바리안 혁명이 라틴 아메리카식 사회변혁의 표준형으로 공인된 것이다. 볼리바리안 혁명에는 쿠바 혁명을 계승한 측면도 있고, 쿠바 혁명을 새로운 시대환경에 맞게 더욱 발전시킨 측면도 있다. 쿠바 혁명과 볼리바리안 혁명의 상호관계는 매우 중요하므로, 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별도로 상론할 필요가 있다.
 
암투병 중에 57번 째 생일을 맞은 2011년 7월 28일, 챠베스 대통령은 자신이 이끌어온 볼리바리안 혁명의 투쟁구호를 새로운 투쟁구호로 바꾸었노라고 말했다. 이전에 제시하였던 '조국, 사회주의냐 죽음이냐'라는 투쟁구호를 "사회주의조국과 승리, 우리는 살아갈 것이며 승리할 것이다"라는 새로운 투쟁구호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혁명의 지도자가 혁명의 투쟁구호를 새로운 구호로 바꾼 것은 의미심장하다.
 
챠베스 대통령이 볼리바리안 혁명 초기에 제시한 '조국, 사회주의냐 죽음이냐'라는 투쟁구호는, 대미예속과 우익독재로 망해가던 베네주엘라를 자주적 사회주의로 살리지 못하면 베네주엘라는 죽는다는 절박한 인식을 뜻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고, 베네주엘라의 사회주의 변혁을 죽음을 각오한 투쟁으로 실현하겠다는 비장한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볼리바리안 혁명이 12년째 접어들었던 2011년에 그 혁명의 최고지도자는 "사회주의조국과 승리, 우리는 살아갈 것이며 승리할 것이다"라는 새로운 투쟁구호를 제시한 것이다. 이 새로운 투쟁구호는 무슨 뜻인가? 새로운 투쟁구호는 볼리바리안 혁명이 베네주엘라를 '사회주의조국(socialist motherland)'으로 변화발전시킨 오늘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고, 그와 더불어 베네주엘라 민중이 앞으로도 계속 사회주의로 살아갈 것이며, 사회주의조국의 최후 승리를 위해 투쟁할 것이라는 혁명적 의지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챠베스 대통령과 그를 지지하는 베네주엘라 민중이 자기 조국을 사회주의조국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볼리바리안 혁명이 베네주엘라 민중과 베네주엘라 국가의 상호관계를 변화발전시켜 사회변혁의 새로운 단계로 들어섰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볼리바리안 혁명의 새로운 단계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단계적으로 발전해가는 볼리바리안 혁명의 발전수준을 파악하려면, 새로운 정치방식의 실현, 새로운 사회적 생산양식의 도입, 새로운 사상문화생활의 창조라는 세 가지 발전양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볼리바리안 혁명이 실현한 새로운 정치방식

볼리바리안 혁명이 실현한 새로운 정치방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알려면, 그 혁명이 반제자주화를 실현하였는가 하는 문제와 인민주권을 실현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각각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 오늘 현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볼리바리안 혁명은 베네주엘라가 대미예속에서 벗어나 국가적 자주성을 실현하도록 이끄는 반제반미투쟁으로 전개되었다. 볼리바리안 혁명은 반제자주화투쟁에서 커다란 성과를 이룩하였다.
 
그런 베네주엘라를 반제자주화의 길에서 이탈시키려고 기회를 엿보던 미국은, 2002년에 베네주엘라 우익세력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챠베스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급변사태를 일으켰고, 급변사태가 실패로 끝나자 군사적 압박을 가하였다.
 
이를테면, 미국은 무인첩보기를 베네주엘라 영공에 침범시키고, 베네주엘라에 근접한 네덜란드령 섬들에 미국 공군 전투기를 전진배치하여 베네주엘라 영공을 침범하고, 베네주엘라에 인접한 친미예속국 콜롬비아에 미국군 기지를 건설하고, 중남미지역을 관할하는 제4함대를 재창설하면서 베네주엘라의 볼리바리안 혁명을 좌절시켜보려고 미쳐날뛰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나 제국주의깡패국가의 무력침공에 맞서 싸우며 국가적 자주성을 수호하는 물리력은 군대이므로, 베네주엘라에서도 볼리바리안 혁명 이후 군대를 강화하는 문제는 매우 중대한 혁명과업으로 제기되었다. 군인 출신인 챠베스 대통령은 베네주엘라군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에 힘쓰고 있다.
 
그런데 베네주엘라는 국방공업의 자립화를 아직 실현하지 못하였으므로, 모든 무기와 군사장비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 중국, 이란, 브라질, 스페인, 캐나다에서 무기와 군사장비를 수입하고 있다. 국방공업의 자립화는 베네주엘라의 볼리바리안 혁명이 풀어야 할 커다란 숙제다.
 
둘째, 어느 나라에서나 인민주권을 실현하는 정치과업은 진보정당 또는 혁명정당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므로, 베네주엘라에서 인민주권을 어떻게 실현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알아보려면, 볼리바리안 혁명을 수행하는 베네주엘라 연합사회주의당으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
 
베네주엘라 연합사회주의당은 2010년 4월에 개최한 임시전당대회에서 자기의 지위와 역할을 볼리바리안 혁명의 "정치전위(political vanguard)"로 규정하였다. 이것은 베네주엘라 연합사회주의당이 자신을 혁명적 전위당으로 자인하였음을 말해준다. 혁명적 전위당이란 대중정치조직을 이끌어가는 정당이다.
 
베네주엘라에는 인민생활향상과 사회환경개선을 책임진 베네주엘라식 대중정치조직인 코뮨협의회(Commune Council)가 2만개나 조직되었다. 150∼400가구로 구성된 도시의 코뮨협의회와 약 20가구로 구성된 농촌의 코뮨협의회는 자본주의시장경제에서 벗어나 생산과 소비를 코뮨적 협동생활로 이끌어가는 대중정치조직이다.
 
이처럼 베네주엘라 각지에 조직된 2만개의 코뮨협의회를 이끌어가는 것이 약 600만명 당원으로 조직된 베네주엘라 연합사회주의당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베네주엘라 연합사회주의당은 혁명적 전위당으로 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베네주엘라에서 인민주권은 전사회를 코뮨협의회로 조직하려는 투쟁과 그 투쟁에서 전위적 역할을 수행하는 베네주엘라 사회주의연합당의 정치적 영도에 의거하여 더 높은 단계에서 실현되고 있다.

 
볼리바리안 혁명의 새로운 사회적 생산방식을 도입한 '사회주의 과야나 계획'

베네주엘라의 볼리바리안 혁명이 새로운 사회적 생산방식을 어떻게 도입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지배와 착취를 유지해온 낡은 생산방식을 철폐하고 새로운 사회적 생산방식을 도입하는 문제는, 전략산업(주요산업) 국유화와 생산활동 민주화라는 두 가지 정치과업을 수행하는 것으로 실현된다.
 
베네주엘라에서 2007년 5월 1일에 시작된 전략산업 국유화는 계속되고 있다. 볼리바리안 혁명은 베네주엘라의 석유, 석유화학, 철강, 전력, 통신, 공항 및 항만, 금융, 시멘트, 제약, 식품가공을 비롯한 전략산업부문에서 국유화를 실현하였다. 현재 베네주엘라 경제부문에서 국유화 비율은 약 30%에 머물러 있다.
 
전략산업을 국유화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국유화된 기업의 노동자들이 생산활동을 민주적으로 경영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볼리바리안 혁명이 전략산업 생산활동의 민주화에서 이룩한 성과는, 베네주엘라 노동자 대표 600명이 오랜 토론과정을 거쳐 2009년 6월 9일 챠베스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 '2009 - 2019 사회주의 과야나 계획(Plan Socialist Guayana)'으로 집약되었다.
 
국유화된 전략산업부문의 노동자들이 챠베스 정부와 협력하여 생산활동을 직접적으로 통제하고, 민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노동자들 스스로가 작성한 이 역사적인 보고서는, 베네주엘라 국유기업에서 노동자들이 생산활동의 민주화를 실현하는 정치방침을 담은 것이다. 보고서 내용을 이 짧은 글에서 자세히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사회주의 과야나 계획'이 제시한 아홉 가지 목표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첫째, 노동자의 생산 통제(control of production by the workers)
둘째, 혁명적 이론과 행동의 개발(development of a revolutionary theory and action)
셋째, 기업체의 거대기업체로의 통합(integration of industries into a mega company)
넷째, 노동자의 사상적, 정치적 발전과 기술적, 생산적 발전(ideological-political and technical-productive development of workers)
다섯째, 노동자의 집단적인 기술 소유(collective ownership of technology by workers)
여섯째, 건강한 노동조건의 보장(guarantee of healthy working conditions)
일곱째, 노동자가 제기한 사업에 대한 재정적 실현가능성(financial viability of projects proposed by workers)
여덟째, 새로운 사업을 위한 에너지 사용능력을 확보하는 것(to ensure energy availability for new projects)
아홉째, 노동자 생산관리의 공적 책임성을 위한 법령을 제정하는 것(to establish codes for public accountability of the woker's management)이다.
 
이러한 아홉 가지 투쟁목표는 '사회주의 과야나 계획'을 높이 들고 전략산업 생산활동을 민주화하기 위해 투쟁하는 베네주엘라 노동계급의 앞길을 환히 밝혀주고 있다.

 
새로운 사상문화생활의 창조, 그리고 혁명의 후계문제

베네주엘라의 볼리바리안 혁명이 새로운 사상문화생활을 어떻게 창조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객관적 지표로 나타내기 힘들지만, 사회환경을 살펴보면 사상문화생활 형편을 가늠할 수 있다.
 
볼리바리안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 대미예속과 우익독재로 망해가고 있었던 베네주엘라의 암흑기에 마약, 납치, 살인 같은 흉악범죄가 만연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런 흉악범죄는 볼리바리안 혁명이 시작된 이후에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유엔 산하 마약 및 범죄국이 발표한 보고서는 베네주엘라의 살인범죄율이 챠베스 대통령이 집권한 첫 해인 1998년과 비교하여 2010년에 2.5배나 더 높아졌다고 지적한 바 있다. 베네주엘라의 범죄감시단체가 2011년 12월 28일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 한 해 동안 베네주엘라에서 살해된 사람은 19,336명이다. 농지개혁을 요구하는 농민활동가들이 살해되는 경우도 있는데, 2001년 이후 지금까지 살해된 농민활동가는 약 300명이나 된다.
 
베네주엘라에서 흉악범죄가 그처럼 횡행하는 원인들 가운데 하나는, 범죄자가 경찰, 판사, 검사 등에게 뇌물을 주고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부패한 사법체계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흉악범죄를 근절하기 힘들지만, 사법체계 개혁하여 법적 제재를 강화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근본적 해결방도는 법적 제재 강화를 요구하는 낡은 사상문화생활을 넘어서 도덕적으로 새로운 사상문화생활을 창조하는 것이다.
 
볼리바리안 혁명이 진전되는 나라에서 흉악범죄를 뿌리뽑지 못한 것은 그 혁명이 새로운 사상문화생활을 창조하는 역사적 임무를 아직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낡은 사상문화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사상문화생활을 창조하는 것은 혁명과업들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 어렵고, 장기성을 요구하는 과업이다.
 
그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교육, 새로운 문화, 새로운 예술, 새로운 인간관계를 혁명의 요구에 맞게 창조해야 하는데, 베네주엘라의 볼리바리안 혁명은 아직 그러한 발전수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낡은 사상문화에 사로잡힌 기성세대가 사라지고 새로운 사상문화 속에서 자라난 새 세대가 등장하는 세대교체는 약 30년을 요구한다. 시대 흐름만을 따져본다면, 지금 베네주엘라의 볼리바리안 혁명은 그러한 세대교체기간의 절반쯤에 이른 것이다. 볼리바리안 혁명에서는 지난 15년보다 다가오는 15년이 더 중요하다.
 
챠베스 대통령이 승리한 베네주엘라 대통령 선거일로부터 사흘이 지난 2012년 10월 10일, 대통령은 외무장관 니콜라스 마두로 모로스(Nicolas Maduro Moros)를 부통령에 임명하였다. 마두로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버스운전사로 전투적 노동운동을 이끌어었던 노조지도자였으며, 챠베스 대통령이 1998년에 당을 창당할 때 그를 보좌하여 창당사업을 추진하였던 최측근이다.
 
올해 50세인 그가 부통령에 임명된 것은, 볼리바리안 혁명의 미래를 이끌어갈 후계자로 사실상 지명된 것이다. 암투병 경력이 있는 자신의 건강에 대해 장담할 수 없는 챠베스 대통령이 자기 뒤를 이어 볼리바리안 혁명을 이끌어갈 후계자를 지명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만일 챠베스 대통령이 6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더라면, 볼리바리안 혁명은 초기에 중단되고 말았을 것이지만, 그가 20년 동안 집권하면서 혁명을 영도해오고 있고, 이제는 후계문제까지 해결하였으니 볼리바리안 혁명의 미래는 창창하다. 볼리바리안 혁명은 최후 승리를 향하여 계속 전진하고 있다. (2012년 10월 12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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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0

전면전 공격대형으로 집결한 침략무력

<연재> 한호석의 진보담론(230)
통일뉴스 2012년 10월 08일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괌에서 동중국해로 북상한 항모강습단 두 개 집단
 
주한미국군사령관 제임스 서먼(James D. Thurman)은 2012년 9월 22일 연평도 최전방부대를 시찰하였고, 13일 뒤인 10월 5일에도 연평도 최전방부대를 다시 시찰하였다. 주한미국군사령관이 연평도 최전방부대를 잇달아 시찰한 것은 아주 심상치 않은 일이다. 그의 연평도 최전방부대 연속시찰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주한미국군사령관의 연평도 최전방부대 연속시찰은 지난 9월부터 방대한 무력을 공격대형으로 집결시키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공격명령을 기다리는 미국의 전쟁준비에 직결되는 행동이다. 미국이 방대한 침략무력을 공격대형으로 집결시켰다는 사실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2012년 9월 30일 미국 주간지 <타임>지에 실린 기사가 스쳐지나가 듯이 대충 보도하였을 뿐이다.

<타임>지 기사에는 ‘분쟁 중인 섬들에 접근한 거대한 미국 함대, 그런데 뭘 위해? (Big U.S. Fleet Nears Disputed Islands, But What For?)’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기사에 따르면, 미국 해군 항모강습단이 동중국해에서 작전을 시작하였는데, 작전구역은 중국이 댜오위다오라고 부르고 일본은 센카쿠라고 부르는 섬들이 있는 분쟁수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해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사에 나오는 항모강습단은 놀랍게도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본 요코스카(橫須賀) 해군기지가 모항인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USS George Washington)를 주축으로 편성된 제5항모강습단과 미국 워싱턴주 킷샙 해군기지(Naval Base Kitsap)가 모항인 항공모함 존 스테니스호(USS John C. Stennis)를 주축으로 편성된 제3항모강습단이다.

제5항모강습단은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를 주축으로 미사일순양함들인 카우펜스호(USS Cowpens)와 존 맥케인호(USS John S. McCain), 미사일구축함들인 핏저럴드호(USS Fitzgerald), 맥캠블호(USS McCambell), 채피호(USS Chafee), 머스틴호(USS Mustin), 충훈호(USS Chung-Hoon), 그리고 함재기 80여 대를 운용하는 제5항모비행단 등으로 편성되었다.

제3항모강습단은 항공모함 존 스테니스호를 주축으로 미사일순양함들인 모빌 베이호(USS Mobile Bay)와 앤티텀호(USS Antietam), 미사일구축함들인 웨인 마이어호(USS Wayne E. Meyer), 듀이호(USS Dewey), 킷호(USS Kidd), 마일리어스호(USS Milius), 그리고 함재기 80여 대를 운용하는 제9항모비행단 등으로 편성되었다.

<타임>지 기사에 나오는 항모강습단 두 개 집단만 가지고서도, 미국은 전면전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타임> 기사는 “유별난 화력집중(unusual concentration of firepower)”이라고 서술하였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항모강습단은 대외침략전쟁에 앞장서는 침략선봉무력이다.

아래에 열거하는 정보를 살펴보면, 미국이 동중국해에 집결시킨 ‘유별난 화력집중’이야말로 침략전쟁을 예고하는 징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이 언론보도를 차단하고 은밀히 공격대형으로 집결하여 침략전쟁을 도발하려는 것은 실로 경악과 충격을 자아내는 비상사태가 아닐 수 없다.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고 집결한 미국 침략무력의 최근 동향은 아래와 같다.

첫째, 미국은 2012년 9월 11일부터 19일까지 미국의 서태평양 군사전략거점인 괌(Guam) 주변해역에서 25개 이상의 해상작전단위들을 총동원한, ‘용감한 방패(Valiant Shield) 2012’라는 작전명칭으로 대규모 침략전쟁연습을 감행하였다. 원래 ‘용감한 방패’는 2006년부터 격년제로 괌 주변해역에서 실시해오는 전쟁연습이지만, 이번에는 전례 없이 항모강습단을 두 개 집단이나 동원하였으므로 전면전을 예상한 실전연습이 분명하다.

미국 공군 보도국 2012년 9월 26일 보도자료에 따르면, ‘용감한 방패 2012’는 “현존 작전계획에 따라 미국군의 공중무력, 지상무력, 해군무력, 사이버전력을 통합적으로 운용하는” 데 중점을 둔 훈련이었다. 또한 미국 <해군보> 2012년 9월 20일 보도사진해설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안보와 안정을 강화하기 위한 작전을 펼치는, 미국 해군의 11개 항공모함들 가운데 2개 항공모함이 ‘용감한 방패’ 훈련의 마지막 단계에 준비작전을 벌였다”고 하면서, “그 지역에서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위기상황에도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통합비행작전만이 아니라 해상훈련과 대잠훈련도 실시하였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한 미국 해군 보도국 보도자료를 종합하면, ‘용감한 방패 2012’에서는 제5항모강습단과 제3항모강습단을 동원하여 공중전, 대잠수함전, 해상전을 연습하였고, 수색 및 구조훈련, 인도주의 지원훈련, 그리고 실탄사격 격침훈련도 실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용감한 방패 2012’를 마치고 괌 해군기지에 2012년 9월 21일부터 나흘 동안 정박한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는 9월 25일 그 곳을 떠났다. 제5항모강습단이 괌에 나흘 동안 머무는 동안, 제3항모강습단도 괌 주변해역을 벗어나 어디론가 항해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전면전을 예상한 실전연습을 마친 항모강습단 두 개 집단은 어디로 떠났을까?

위에 인용한 <타임>지 기사에 따르면, 괌 주변해역에서 북상한 제5항모강습단은 대만 북쪽 해역에 배치되었고, 역시 괌 주변해역에서 북상한 제3항모강습단도 대만 남쪽 해역에 배치되었다고 한다. 미국 군부는 항모강습단 이동경로에 관한 군사기밀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타임>지의 보도내용이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이 제5항모강습단과 제3항모강습단을 한꺼번에 동원하여 동중국해에 공격대형으로 배치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과거경험을 상기하면, 미국은 전면적인 침략전쟁을 도발하려 할 때마다 항모강습단 두 개 집단을 전진배치하는 공격대형을 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만 북쪽과 남쪽에 각각 항모강습단을 배치한 것은 전면전을 예상한 전형적인 공격대형이다.

셋째, 항공모함 존 스테니스호를 주축으로 편성된 제3항모강습단은 원래 제5함대 작전구역인 중동의 아라비아해에 출동하여 이란을 무력침공할 기회를 노리던 해상작전단위인데, 이번에는 아라비아해로 가지 않고 괌 주변해역에서 실전급 전쟁연습을 벌인 뒤에 동중국해로 북상하였다. 미국 해군 보도국이 일본 요코스카발로 발표한 2012년 9월 29일 보도자료에 따르면, 원래 제5함대 작전구역에 배치되는 항공모함 존 스테니스호는 이번에 “제7함대 작전구역 야전사령부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배치일정보다 4개월이나 일찍 제7함대 작전구역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항공모함 존 스테니스호의 연간 작전일정은 해마다 2월부터 8월까지 7개월 동안 아라비아해에 배치되었다가, 8월에 모항인 워싱턴주 킷샙 해군기지로 돌아가 4개월 동안 머물고, 이듬해 1월 말에 다시 아라비아해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4개월 동안 모항에 머물러야 할 정기체류일정을 갑자기 중지하고 자기 작전구역이 아닌 제7함대 작전구역의 동중국해에 나타났다. 이것은 일상적인 출동이 아니라 전쟁이 임박한 비상사태에 대처한 긴급출동이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항모강습단 긴급출동은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상륙준비단과 잠수함대도 집결하였다
 
이번에 미국이 방대한 침략무력을 동중국해에 집결시킨 상황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정보는, 해군무력 이외에 상륙무력까지 동원되었다는 점이다. 2012년 9월 10일부터 24일까지 반홈 리처드 상륙준비단(Bonhomme Richard Amphibious Ready Group)과 제31해병원정대(32st Marine Expeditionary Unit)가 동중국해에 인접한 필리핀해 서북쪽 해역에서 ‘검증훈련(CERTEX)’이라는 것을 실시하였다. 반홈 리처드 상륙준비단은 제7함대 작전지역에 전진배치된 유일한 상륙준비단인데, 일본 사세보(佐世保)가 모항인 상륙강습함 반홈 리처드호(USS Bonhomme Richard), 상륙정박함 토투가호(USS Tortuga), 상륙수송함 덴버호(USS Denver) 등으로 편성되었다. 40,500t급 초대형 상륙강습함 반홈 리처드호에는 강습헬기 42대, 해상공격기 5대, 대잠헬기 6대, 그리고 상륙정, 상륙돌격장갑차, 자주포 같은 전투장비로 중무장한 해병대 병력 1,800여 명이 실려 있다.

반홈 리처드 상륙준비단 검증훈련에는 일본 육상자위대가 참가하였고, 호주군 공군 및 육군까지 참관하였다. 또한 그 검증훈련에서는 민간인 소개작전을 연습하였는데, 이 작전연습은 미국이 무력침공을 도발할 때 침공대상국에 체류하는 미국인을 다른 나라로 도피시키는 작전이다.

심각한 상황전개는 거기서 멈춘 게 아니었다. 서태평양에로 출동명령을 받은 펠럴루 상륙준비단(Peleliu Amphibious Ready Group)과 제15해병원정대(15th Marine Expeditionary Unit)가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에 있는 샌디에고 해군기지를 출발하여 2012년 9월 17일 제7함대 작전구역으로 들어가 반홈 리처드 상륙준비단과 합류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미국 해군 잠수함대 움직임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미국 해군 잠수함대는 대잠수함전, 대수상함전, 지상타격전, 특수침투전, 비정규전, 기뢰전, 그리고 첩보-감시-정찰 등 가장 중요한 군사임무를 수행하는 전략적인 공격무력이다. 항모강습단이 배치되는 전방보다 침공대상에 한층 더 가깝게 전진배치되는 최전방 공격수단이 잠수함대이므로, 이번에 잠수함대가 배치된 작전구역이 어디인지를 밝혀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전혀 노출되지 않고 은밀하게 기동하는 잠수함의 동선(動線)을 추적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다행하게도 미국 <해군보>와 해군 보도국 보도자료에 실린 몇 개의 보도사진과 보도자료들을 읽어보면, 미국 해군 잠수함의 서태평양 이동경로를 엿볼 수 있다.

미국 하와이주 진주항(Pearl Harbor)에 모항을 둔 버지니아급 스텔스 잠수함 하와이호(USS Hawaii)가 2012년 9월 7일 필리핀 수빅만(Subic Bay) 해군기지에 입항하였다. 또한 미국 하와이주 진주항에 모항을 둔 로스앤젤레스급 신속공격 잠수함 라 홀라호(USS La Jolla)가 2012년 9월 10일 일본 요코스카 해군기지에 입항하였다.

미국이 항모강습단 두 개 집단을 괌 주변해역에 동원하여 ‘용감한 방패 2012’라는 침략전쟁연습을 벌이고 있었던 2012년 9월 11일부터 19일까지 스텔스 잠수함 하와이호와 신속공격 잠수함 라 홀라호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두 핵추진 잠수함이 한반도 남쪽 해역을 향해 차츰 북상하고 있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괌 해군기지에 모항을 둔 잠수함 보급함 프랭크 케이블호(USS Frank Cable)가 북상하여 2012년 9월 7일 필리핀 수빅만(Subic Bay)에 입항한 것이다. 잠수함 보급함이 괌을 떠나 필리핀으로 북상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스텔스 잠수함 하와이호와 신속공격 잠수함 라 홀라호 이외에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다른 잠수함들도 이번 작전에 동원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런 정황을 생각하면, 이번에 미국이 잠수함 여러 척으로 편성된 잠수함대를 공격대형으로 동중국해에 배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잠수함대를 공격대형으로 전진배치하고, 잠수함 보급함이 잠수함대를 따라 북상한 것이야말로 선제기습공격을 도발하려는 징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위에 열거한 정보를 종합하면, 2012년 9월 미국은 항모강습단 두 개 집단, 상륙준비단 두 개 집단, 그리고 강력한 잠수함대를 동중국해에 전면전 공격대형으로 집결시킨 것이다. 베트남전쟁 이후 미국이 그처럼 방대한 해군무력과 상륙무력을 전면전 공격대형으로 집결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상황은 너무 심각하다.

공격대형으로 집결한 침략무력은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방대한 해군무력과 상륙무력을 전면전 공격대형으로 동중국해에 집결시킨 미국은 어느 나라를 침공하려는 것일까? 위에서 인용한 <타임>지 기사에서는 미국의 ‘유별난 화력집중’이 중국과 일본의 댜오위다오 영유권 갈등이 두 나라의 무력충돌로 비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사전무력배치로 보인다고 추정하였다. 미국의 유력한 주간지 <타임>이 그런 추정기사를 내보내자 이에 자극을 받은 중국 언론매체들은 2012년 10월 3일 미국이 항모강습단을 댜오위다오에 접근시켜 긴장을 더 격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하였고, 중국의 일부 언론매체는 중국의 핵잠수함들이 댜오위다오에 접근한 미국 항모강습단을 핵미사일로 조준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잠수함대, 항모강습단, 상륙준비단 순으로 북상배치한 전면전 공격대형은 한반도에서 대북전쟁을 도발하기 위한 것이지 중국과 일본의 댜오위다오 무력충돌을 예방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만일 미국이 중국과 일본의 댜오위다오 무력충돌을 예방하기 위해 해군무력을 사전배치하였다면, 항모강습단 한 개 집단을 동중국해에 배치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잠수함대와 상륙준비단 두 개 집단까지 동원할 필요는 전혀 없다.

물론 중국과 일본이 댜오위다오 영유권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고 있지만, 그 두 나라가 지금 해군 함대를 동원한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중국 감시선과 일본 순시선이 대치하고, 접근한 어선단을 향해 물대포나 쏘는 정도일 뿐이며, 무력충돌이 임박한 상황은 아니다.

더욱이 중국과 미국은 동중국해에서 자국의 해군무력이 대치하는 긴박한 상황을 예상하지도 않고 있다. 예컨대, 2012년 9월 17일 ‘아프리카의 뿔’ 주변해역에서 미국 해군 미사일구축함 윈스턴 처칠호(USS Winston Churchill)와 다른 해군함선들이 중국인민해방군 해군 호위함 이양호(frigate Yi Yang)와 함께 해적퇴치 합동훈련을 실시한 것만 봐도, 그 두 나라가 동중국해에서 당장 무력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미국 태평양함대사령부 대변인 대린 제임스(Darryn James)는 <타임>지 취재기자에게 “이번 작전(서태평양에 방대한 해군무력을 집결시킨 작전을 뜻함 - 옮긴이)은 어떤 특별한 사건과는 무관하다. 미국의 지역안보활동의 일환으로, 미국 해군의 11개 항모강습단 중에서 2개의 항모강습단을 서태평양에 배치하여 안정과 평화를 지키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깊은 군사정보를 아는 전문가들에게 그런 말은 어설픈 속임수다. 잠수함대, 항모강습단, 상륙준비단을 전면전 공격대형으로 전진배치해놓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공격명령을 기다리면서, 무슨 안정이니 평화니 하는 따위의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는 것은 세상을 기만하는 짓이다.

명백하게도, 미국이 동중국해에 배치한 전면전 공격대형은 미국이 대북전쟁을 임의의 시각에 일으킬 수 있음을 현실로 입증한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핵추진 잠수함이 북측 근해에 은밀히 잠입하여 수중발사 미사일로 불시에 북의 군사전략거점들을 정밀타격하는 선제기습공격을 개시하고, 곧바로 항모강습단 두 개 집단이 전격적으로 투입되어 북의 전쟁수행력을 제거한 다음, 상륙준비단 두 개 집단이 북에 상륙하여 평양을 점령하는 대북전쟁 시나리오를 실제행동에 옮기기 직전 상태에 이른 것이다.

물론 미국의 대북전쟁 도발책동은 동중국해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었다. 미국은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 사용한 특수지뢰방호차량 78대를 2012년 9월 26일 주한미국군 기지들에 이동배치하였으며, 2004년에 남측에서 철수했던 화학대대를 주한미국군 전방부대에 재배치하고, 정밀유도폭탄과 지대지 탄도미사일과 방공미사일까지 추가로 배치하겠다고 밝혔다. 거기에 더하여, 미국은 2012년 9월 27일 부산 동남쪽 해역에서 한국군, 일본자위대, 호주군을 참가시킨 가운데 이른바 ‘확산방지구상(PSI)’이라는 작전명칭으로 대북해상봉쇄연습까지 벌여놓았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언급한 주한미국군사령관 제임스 서먼의 연평도 최전방부대 연속시찰은 바로 그런 심각한 상황에서 취한 행동이었다.

여러 군사정보들을 종합해보면, 미국은 선제기습공격으로 북을 침공하려는 전면전 공격대형을 갖추고 공격시각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미국이 이번에 항모강습단을 제주도 남쪽 해상까지 바짝 북상시켜 전진배치하는 식으로 전쟁징후를 더 노골적으로 드러냈더라면, 미국과의 최후 결전을 벼르는 북은 자기의 전쟁징후를 노출하지 않은 상태에서 불시에 조국통일대전을 개시하였을지 모른다. 그런 사실을 미리 간파한 미국은 잠수함대만 한반도 쪽으로 은밀히 북상시키고, 항모강습단 두 개 집단을 괌에 집결시켜 대북전쟁연습을 감행한 다음, 상륙강습단 두 개 집단을 후방에 대기시킨 상태에서, 항모강습단 두 개 집단을 동중국해로 좀 더 북상시켜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최후 결전을 앞두고 군화를 벗지 않는 군대가 있다
 
미국이 그처럼 방대한 침략무력을 동중국해에 공격대형으로 집결시킨 전례 없는 도발행동은, 방대한 해군무력과 상륙무력을 집결시켜 북을 위협하면 북이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리라는 판단이 전제된 것이며, 만일 정세가 최악으로 돌변하여 북미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전진배치한 방대한 침략무력을 총동원하여 대북전쟁에서 이길 수 있으리라는 타산이 전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그런 판단과 타산은 북의 전쟁수행력을 너무 오인한 것이다. 이미 조국통일대전 공격대형으로 배치된 인민군은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공격명령만 내리면 언제든지 전쟁징후를 노출하지 않은 채 선제기습공격으로 조국통일대전을 개시할 수 있다. 만일 북측 인근해역에 잠입한 미국 해군 잠수함대가 수중발사 미사일로 북의 군사전략거점을 향해 선제기습공격을 개시하는 순간, 당연히 인민군 잠수함대도 수중발사 미사일로 미국의 군사전략거점들을 향해 기습공격을 개시할 것이며, 북의 조국통일대전은 동중국해에서 한반도로 북상하는 항모강습단과 상륙준비단이 서해와 동해에 들어서기 전에 너무도 신속하게 끝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북의 조국통일대전은 미국 해군 잠수함대가 북의 영토를 먼저 공격한 것에 대한 군사적 대응이므로 당연히 미국 본토에 치명적인 보복공격을 가하여 미국을 ‘전기 없는 19세기’로 되돌려놓을 것이다.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이미 최종 결재한 북의 조국통일대전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이전에 발표한 나의 몇몇 글들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으므로 이 글에서 재론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유아시아방송> 2012년 10월 2일 보도에 따르면, 요즈음 인민군 전방부대는 물론이고 후방부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병들이 전투복을 입고 군화를 신은 채 비상취침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보도에 따르면, 지난 시기 북에서 준전시동원령이 선포되었을 때나 연례적인 군사훈련 중에는 전방부대가 전투복을 입고 군화를 신은 채 비상취침을 하였으나 후방부대까지 비상취침을 계속한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지금 인민군이 그처럼 전례 없는 비상태세를 갖추고 최후 결전에 대비하는 것은,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인민군에게 조국통일대전 동원태세에 돌입하라는 명령을 내렸음을 뜻한다. 위의 보도기사에 따르면, 인민군 전체 장병들이 비상취침을 시작한 때는 9월 20일을 전후라고 한다. 9월 20일 전후라면, 항모강습단 두 개 집단이 괌 주변해역에서 ‘용감한 방패 2012’라는 대북전쟁연습을 끝내고 동중국해로 막 북상하기 시작한 때이고, 상륙준비단 두 개 집단이 제7함대 작전구역에서 대기상태에 있었던 때다.

비록 언론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인민군은 최후 결전 동원태세에 돌입하였고, 미국군은 대북전쟁 공격대형으로 결집함으로써, 북과 미국이 사실상 전면전에 근접한 일촉즉발의 상황에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그처럼 방대한 침략무력을 공격대형으로 집결시켜놓고서도 섣불리 공격명령을 내리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는 것은 북의 치명적인 무력보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북미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북이 미국으로부터 수중발사 미사일 몇 발을 맞는 동안 미국은 북으로부터 파멸적인 집중공격을 받고 재기불능의 대재앙을 입게 될 것임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미국은 정세오판에 빠져 북의 전쟁의지를 시험해보려는 위험천만하고 무모한 대북자극행동을 중지하고 즉각 퇴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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