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14

MB는 왜 한일군사정보협정을 서둘렀을까?

민중의 소리
2012년 07년 12일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마무리 단계에 진입한 한미일 3자 대북전쟁준비


이명박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국민들 몰래 처리하려고 시도하다가 들통이 나는 바람에 한일 군사관계가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지만, 정작 한일 군사관계에 관한 중요한 정보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일본이 한반도 유사시 자위대를 한국에 파병하여 재한일본인들을 일본으로 도피시킨다는 정도다. 2010년 12월 11일 당시 일본 총리 간 나오토(菅直人)는 한반도 유사시 일본 자위대 파병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일본에서 한일 군사관계를 거론할 때마다 ‘한반도 유사시(有事時)’라는 말이 빠짐없이 나온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일 군사관계는 그 여섯 글자가 가리키는 한반도 전쟁상황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한반도 유사시’라는 전쟁상황에서 일본 자위대는 후방지원을 맡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자위대를 전선에 파병하지 않고 후방에 배치하여 미국군에게 병참지원이나 해주겠다는 뜻이 아니다. 베트남전쟁 시기에 일본은 베트남전선에 투입된 미국군을 위해 병참지원을 맡았지만, 한반도 전쟁상황이 발생하면 전혀 다른 판이 될 것이다.

현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일본 자위대는 미국군과 함께 전선에 투입되어 교전하는 전쟁능력을 오랫동안 꾸준히 길러왔다. 해마다 계속되는 미일 합동군사훈련은 미국 태평양사령부가 미일 연합함대의 대북공격력을 강화하기 위해 실시해온 것이다. 물론 미국이 노리는 대북공격은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전쟁행위이므로, 미국은 당연히 한국군을 미일 연합함대의 대북공격에 끌어들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미국이 미일 연합함대 실전훈련에 한국 해군을 참가시키는 것은 미국군이 주도하고 일본 자위대와 한국군을 동원하는 ‘미일한’ 3자대북전쟁준비가 사실상 마무리 단계에 진입하였음을 말해준다. 더욱이 미국의 전쟁전략이 선제공격전략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상 마무리 단계에 진입한 ‘미일한’ 3자대북전쟁준비는 선제공격으로 대북전쟁을 도발하려는 극히 위험천만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미일한’ 3자대북전쟁준비는 파괴적이고 침략적이다.

한일 연합 수색구조훈련
지난해 열린 한일 연합 수색구조훈련에 참가한 한국 해군과 일본 해상자위대가 함정을 동원해 조난선박 화재진압 연합작전을 펼치고 있다. 한일 연합 수색구조훈련전대는 이틀 간 공해상 선박화재와 인명사고 등에 대비한 훈련을 펼친 뒤 14일 오전 일본 마이즈루항에 함께 입항, 훈련 사후강평과 연합 봉사활동, 함상리셉션 등 친선 및 교류행사를 진행했다.


그러면 ‘미일한’ 3자대북전쟁준비는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마무리 단계에 진입한 것일까? 충격적인 사실은, ‘미일한’ 3자가 2008년부터 연합해상훈련을 실시하며 대북전쟁준비를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2011년 1월 28일 미국 태평양사령관 로벗 윌러드(Robert F. Willard)는 일본 방문 중 주일미국대사관에서 취재기자들에게 “미일한 3자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할 좋은 기회(good chance)가 앞으로 어느 시점에 올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이미 2008년부터 ‘미일한 연합해상훈련’이 실시되었으나, 비공개로 실시되어온 까닭에 3자대북전쟁준비에 관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거의 없고, 그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 땅의 국민들은 무관심하다.

‘미일한 연합해상훈련’은 2008년 8월과 2010년 8월에 ‘림팩(RIMPAC)훈련’을 마친 직후 하와이 서쪽 200km 해상에서 비공개로 각각 실시되었고, 2011년 7월에는 동중국해에서 역시 비공개로 실시되었다. 그리고 올해 2012년 6월 21일부터 22일까지 이틀 동안 제주도 남쪽 바다로 북상하여 미국 제7함대 항모강습단이 출동한 가운데 공개적으로, 최대 규모로 실시되었다. 사상 처음으로 항모강습단을 동원하여 한반도 근해에서 실시된 올해 ‘미일한 연합해상훈련’은 3자대북전쟁준비가 사실상 마무리 단계에 진입하였음을 말해주는 뚜렷한 증좌다.

해군 관련 정보를 게시하는 <정보유포(Information Dissemination)>에 나온 자료에 따르면, ‘미일한 연합해상훈련’에서는 “동아시아 어느 나라의 잠수함대”로 가정한 일본 해상자위대와 한국 해군의 연합잠수함대가 미국 제7함대 항모강습단을 공격하는 작전상황이 설정되었고, 쌍방이 실탄사격을 하면서 실전을 방불한 전쟁연습을 벌였다고 한다. 제7함대 항모강습단을 공격할 잠수함대를 보유한 “동아시아 어느 나라”가 북측을 뜻한다는 점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미일한’ 3자관계에서 일어난 제1차 전략적 변화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미일한’ 3자대북전쟁준비는 3자연합해상훈련이라는 군사행동으로만 마무리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반드시 정치행동이 동반되어야 한다. 폭로전문 누리집 ‘위킬릭스(Wikileaks)’에 게시된, 주일미국대사 토머스 쉬퍼(J. Thomas Schieffer)가 작성하여 2008년 1월 22일 본국에 보낸 비밀전문 ‘일한전략대화:새로운 한국정부에 대해 낙관하는 도쿄(JAPAN-ROK STRATEGIC DIALOUE:TOKYO OPTIMISTIC ABOUT NEW ROK ADMINISTRATION)’에서 3자대북전쟁준비를 마무리하기 위한 정치적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비밀전문에 따르면, 2008년 1월 8일 서울에서 진행된 제5차 한일전략대화(Korea-Japan Strategic Dialogue)에 참석한 당시 일본 외무차관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는 북핵문제에만 집중해온 기존 ‘3자협력감시그룹(Trilateral Cooperation and Oversight Group)’의 틀을 벗어나 지역문제까지 폭넓게 다루는 ‘미일한 차관급 3자회담’을 시작하자고 제의하였다. 그 제의는 이미 미국과 일본이 ‘미일한 3자회담’을 시작하기로 서로 합의한 다음에 나온 것이므로, 곧 실행에 옮겨졌다. 그리하여 2008년 11월 6일부터 7일까지 미국 워싱턴 디씨에서 ‘미일한 차관보급 국방회담’ 제1차 회의가 열렸다.

이처럼 2008년 8월에 ‘미일한 연합해상훈련’을 사상 처음으로 실시하고, 곧이어 11월에 ‘미일한 차관보급 국방회담’을 사상 처음으로 개최한 것은, 미국이 자기의 오랜 ‘숙원’을 푼 것이었다. 그들의 오랜 ‘숙원’에 얽힌 사연은 이러하다.

일제침략군 출신 병력이 비밀리에 참전한 전면전이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1951년 9월 8일, 미국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일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체결은 미국이 전범국 일본을 6.25 전쟁에 동원한 것도 모자라서, 6.25 전쟁에 참전한 일본을 전범국 지위에서 해제시켜주고 재무장의 길을 터준 엄청난 사건이었다.

대일강화조약 체결에 따라 미일관계와 한일관계는 1960년부터 1965년까지 기간에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1960년 1월 19일 미국은 일본과 상호안보조약을 체결하였다. 상호안보조약 체결 당시 미국이 상대한 일본 총리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일제가 1936년에 괴뢰국으로 조작한 ‘만주제국’에서 고위관리로 일하다 일제의 농상무성 장관으로 패전을 맞았고, 패전 직후 미국이 벌여놓은 전범재판에서 1급 전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이튿날 미국에 의해 무죄로 석방된 전범출신자다. 사형선고와 무죄석방의 모순된 전후처리는 전범들을 친미파로 포섭한 미국의 교활한 작간이었다.


일본의 전범세력과 한국의 친일 인맥의 합작


 
한일 연합 수색구조훈련




미국의 포섭공작으로 재기한 전범출신자들은 1954년 7월 1일 자위대를 창설하였고, 일본 자위대 통합막료부(한국군 합참본부에 해당)는 한반도 유사시 자위대를 한반도에 상륙시키는 ‘통합방위도상연구’라는 것을 1963년 2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진행하고서 이른바 ‘미쓰야(三矢) 연구’라는 비밀작전문서를 완성하였다.

1962년부터 일본은 그 동안 지체되던 한일관계 정상화 협상을 조기에 타결하기 위해 부쩍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두른 까닭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세력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집권하였기 때문이다. 5.16 군사정변은 일제 식민지강점기에 한반도에서 일제에게 충성한 국내파 친일인맥이 뒤로 물러가고, 일제 식민지강점기에 괴뢰국 ‘만주제국’에서 육성된 만주군 인맥이 전면에 등장한 사건이다.

만주군 인맥으로 구성된 박정희 정권이 국민적 반대투쟁을 경찰폭력으로 짓누르고 강행한 것이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체결이다. 만주군 인맥으로 구성된 친일정권은, 일제가 식민지강점기에 한반도와 만주와 일본에서 이 민족에게 저지른 극악무도한 범죄를 눈감아주고, 독도를 중심으로 한 광활한 전략수역까지 일본에게 넘겨주고 대일관계를 ‘정상화’하였다. 굴욕외교의 극치였다.

미일관계와 한일관계는 왜 1960년부터 1965년까지 기간에 그처럼 커다란 변화를 겪었을까? 소련이 강력한 사회주의핵보유국으로 등장함으로써 국제정세 재편이 불가피하였기 때문이다. 1955년 11월 22일 소련은 1.6 메가톤급 수소폭탄 폭발실험에 성공하였고, 1957년 10월 4일에는 세계 최초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Sputnik 1)를 성공적으로 발사하여 미국을 압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과 전쟁을 하였고, 전승국 소련에게 ‘북방영토’를 점령당한 패전국 일본은, 소련이 강력한 사회주의핵보유국으로 등장하자 ‘안보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한편, 소련과 직접 대치한 일본 열도 북방전선에 군사력을 집중하였다. 소련과 냉전을 벌이고 있었던 미국은 일본에게 재무장의 길을 터주고 한일관계를 ‘정상화’시킴으로써 한미군사동맹을 미일군사동맹의 하위에 두었다. 바로 이것이 1960년부터 5년 동안 ‘미일한’ 3자관계에서 일어난 제1차 전략적 변화다.  



43년 뒤에 일어나기 시작한 제2차 전략적 변화

‘미일한’ 3자관계에서 제1차 전략적 변화가 일어난 때로부터 43년이 흐른 2008년에 이르러 제2차 전략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제2차 전략적 변화는 왜 2008년에 일어나기 시작한 것일까?

2006년 10월 9일 북이 지하핵실험을 실시하였고, 2007년에는 미국의 군사전략거점 괌(Guam)을 타격할 수 있는 초강력한 다탄두 전략미사일을 작전배치함으로써 사회주의핵보유국으로 등장하였다. 1955년 수소폭탄 폭발실험과 1957년 인공위성 발사에 연이어 성공한 소련이 강력한 사회주의핵보유국으로 등장하여 국제정세를 뒤바꿔놓은 것처럼, 2006년에 지하핵실험에 성공하고 2007년에 다탄두 전략미사일을 작전배치한 북이 강력한 사회주의핵보유국으로 등장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정세재편은 불가피해졌다. 이것이 2008년에 ‘미일한’ 3자관계에서 전략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원인이다.


일본, 북핵실험 발표에 대북제재 강화
일본 언론들은 3일 북한 외무성의 핵실험 발표 이후, 지속적으로 속보로 뉴스를 전하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모습이다. ⓒANN


미국의 시각에서 보면, 그러한 전략적 변화요구를 결정적으로 충족시켜준 것이 2008년 2월 25일 이명박 정권의 등장이다. 19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식민지시대의 만주군 인맥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집권하였다면, 2008년에는 이명박을 중심으로 하는 분단시대의 수구인맥이 2007년 12월의 대선승리로 집권하였다. 집권방식만 다를 뿐, ‘미일한’ 3자관계의 전략적 변화요구를 결정적으로 충족시켜주었다는 점에서 박정희 정권의 등장과 이명박 정권의 등장은 47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이명박 정권의 등장과 ‘미일한’ 3자관계의 전략적 변화는 미국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결착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은 한일관계를 미일관계에 편입, 종속시킬 임무를 수행해줄 새로운 정권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고, 미국의 그런 기대에 전적으로 부응한 것이 이명박 정권의 등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당시 대통령 당선자 이명박은 2008년 1월 15일부터 18일까지 자기 친형인 이상득을 특사자격으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상득의 방일은 “일한관계를 강화하고 미일한 3자협력을 촉구”한 일본의 요구에 즉각 화답한 것이었다.

‘위킬릭스’에 게시된, 주일미국부대사 조셉 도노반(Joseph R. Donovan)이 작성하여 2008년 1월 11일 본국에 보낸 비밀전문 ‘한국 특사 방문은 일한관계 개선을 가리킨다(ROK ENVOY VISIT POINTS TO IMPROVING JAPAN-ROK RELATIONS)’에 따르면, 2008년 1월 10일 당시 일본 총리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의 특사인 전직 일본 총리 모리 요시로(森喜朗)가 서울을 방문하여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에게 “일한관계를 강화하고 미일한 3자협력을 촉구하는” 내용의 총리 친서를 전달하였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일본 총리의 친서를 받은지 불과 닷새만에 자신의 첫 특사를 일본에 보낼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이명박-후쿠다 정상회담, 일본의 ‘설레임과 희망’

일본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에게 친서를 전달하기 이틀 전에 서울에서 제5차 ‘한일전략대화(Korea-Japan Strategic Dialogue)’가 진행되었다. 주일미국대사 토머스 쉬퍼가 작성하여 2008년 1월 22일 본국에 보낸 비밀전문 ‘일한전략대화:새로운 한국정부에 대해 낙관하는 도쿄’에 따르면, 2008년 1월 8일 서울에서 진행된 제5차 ‘한일전략대화’에 참석한 일본 관리들은 “한일관계가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지도 아래 근본적으로 개선되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가졌다는 것이다. 일본을 설레게 한 ‘기대와 희망’에 찬 분위기는, ‘미래지향적 성숙한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기로 합의한 2008년 4월 21일 이명박-후쿠다 정상회담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명박-후쿠다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미래지향적 성숙한 동반자 관계’는 한일 군사관계 강화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2009년 4월 23일 당시 국방장관 이상희가 일본을 방문하여 당시 일본 방위상 하마다 야스카즈(浜田靖一)와 함께 ‘한일 국방교류에 관한 의향서’를 채택하였다. 그 의향서 채택으로, 한일 군사관계는 정기적으로 군사협의체를 운영하고, 군사부문 상호교류를 확대하고, 한일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단계로 들어섰다.

2009년 7월 16일부터 17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미일한 3자국방회담’이 진행되었고, 2009년 7월 30일 일본 자위대 항공막료장 호카노조 겐이치로(外薗健一郞)가 방한하여 한국 공군과 일본 항공자위대의 상호협력방안을 협의하였다. 사회주의핵보유국으로 등장한 북측에 맞서는 침략적 핵전쟁전략에 집착한 미국이 바라던 ‘미일한’ 3자대북전쟁준비는 그렇게 갖추어지고 있었다.


 
한일정상회담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008년 취임식 직후 청와대에서 첫 정상외교 상대인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기 전 악수를 나누고 있다


2010년 4월 6일 미국 국방부가 대북선제핵공격을 공식화한 ‘핵태세검토보고서(Nuclear Posture Review Report)’를 발표하였고, 2010년 12월 17일 일본 안전보장회의와 내각회의는 잠수함전력 증강, 미사일방어망 강화, 자위대 기동성 증대를 추진하는 ‘신방위대강계획’을 채택하였다.

2010년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동해에서 실시된 한미연합훈련에 일본 자위대가 사상 처음 ‘참관단’을 보냈다. <아사히신붕> 2010년 7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일본 자위대에게 한미연합훈련 참관을 요청했고, 일본은 참관요청을 환영한다는 뜻을 한미연합군사령부에게 표시하였다.

2011년 1월 10일부터 11일까지 일본 방위상 기타자와 도시미(北澤俊美)의 서울 방문으로 열린 한일 국방장관회담에서 한일 상호군수지원협정(ACSA) 체결을 위해 구체적인 협의를 진행하기로 합의하였다. 2011년 2월 7일 일본 방위성 방위정책국장 다카미자와 시게노부(高見澤將林)는 일본 민주당 방위부문회의에 출석하여 2011년 가을에 한일 상호군수지원협정을 체결하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말했다.

2011년 8월 5일 일본 방위성 부대신 오가와 가츠야(小川勝也)를 위원장으로 하는 ‘조직개편과 방위력 강화를 위한 구조개혁 추진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에 ‘미일한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위에서 논한 내용을 살펴보면, 이명박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체결하려고 하는 것이 ‘미일한’ 3자대북전쟁준비를 마무리하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12년 7월 현재 이명박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을 추진하는 가운데, 박근혜가 집권당 대선후보로 등장한 것은, 박정희-정일권으로 이어진 식민지시대 만주군 인맥에 의해 1960년부터 5년 동안 수행되었던 악역이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분단시대 수구정치인맥에 의해 재연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2013년에 박근혜 정권이 출현해서는 안 되는 절박한 사정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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