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악전고투에서 상황반전으로
예상치 못한 '함정'에 빠져 어려움을 겪고 있는 통합진보당은, 정치적 견해가 서로 다른 정파들이 함께 걸어가는 진보적 대중정당의 길이 생각보다 힘들고 어렵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번에 통합진보당이 체험한 것처럼, 정치적 견해가 서로 다른 정파들이 함께 걸어가는 진보적 대중정당의 길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추락위험이 불시에 엄습하는 험로이고, 어디서 날아오는지 알기 힘든 돌팔매가 불시에 날아들어 기껏 쌓아올린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붕괴위험이 도사린 험로이기도 하다.
이전에 민주노동당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한,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여러 경험들을 한꺼번에 겪었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는 통합진보당에게, 특히 통합진보당 자주파에게 심각한 교훈을 안겨주었다.
당 안에서는 국민파가 자주파를 당지도부에서 밀어내고 당권을 장악하기 위해 자주파의 다수 계열에게 제거공세를 집중하였고, 당 밖에서는 민주통합당과 시민운동세력, 그 주변인사들이 국민파의 자주파 제거공세에 적극 가세하였고, 그런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이 새누리당, 사법기관, 언론계는 '종북청산소동'을 전방위적으로 확대하면서 통합진보당 전체를 무너뜨리려는 와해공세에 광란하였다. 여론몰이를 추동하는 강력한 무기를 틀어쥔 저들의 제거공세와 와해공세는 실로 집요하고 압도적이었다.
사회여론을 움직일 만한 역량도 수단도 갖지 못한 자주파는 저들의 강력한 무기 앞에 맨주먹으로 맞서 힘겹게 싸워야 하였다. 그것은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퇴로마저 끊긴 고립상태에서 벌인 악전고투였다. 지난 시기 수구우파세력의 우세한 공격에 맞서 끈질기게 투쟁해온 실전경험에서 습득한 불굴의 투지와 집념이 만일 자주파에게 없었더라면, 역량상 대비가 되지 않을 만큼 불리한 이번 싸움에서 자주파가 완패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수구우파세력들이 광란하는 '종북청산소동'의 위압감에 눌린 국민파는 '애국가'를 부르는 자기들의 공손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정적들의 공격예봉을 피해 일보후퇴하였고, 그 동안 계속 수세에 몰려 악전고투하던 자주파는 7월 25일에 열린 통합진보당 제2기 중앙위원회를 계기로 우려와 불안의 그물을 걷어내고 상황을 뒤집었다.
당지도부를 장악한 국민파는 당권을 쥐고 있는데도 제2기 중앙위원회를 정상적으로 진행시키지 못할 만큼 위축되었고, 이튿날 열린 의원총회에서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이로써 상황은 자주파에게 유리하게 반전되었다.
상황이 자주파에게 유리하게 반전되자, 국민파가 당권을 장악한 이후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온 이른바 '중단 없는 혁신'은 자주파의 제동으로 중단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반전에 반발하는 국민파는 집단탈당설, 계속추락설, 내부동요설을 여론화하면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파가 밀어붙여오던 '중단 없는 혁신'은 당의 혁신이 아니라 당의 진보성을 거세하고 진보당을 국민당 아류로 만들어가는 우경화이므로, 자주파가 국민파의 우경화 추진에 제동을 걸게 된 것은 진보와 변혁을 위해 다행하고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통합진보당 안에는 자주파의 정적이 없다
통합진보당에 결집한 자주파에게는 진보와 변혁의 미래가 무엇보다 소중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서도 바꿀 수 없는 진보와 변혁의 미래, 그것을 위해 이제껏 피땀 흐르는 투쟁의 험한 길을 헤쳐온 게 아닌가! 그런 자주파가 이번 사태에서 겪은 체험을 농축하여 진보와 변혁의 미래를 위한 정치적 교훈을 추출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오늘의 교훈은 내일을 위한 가르침이다.
통합진보당 안에서 양대 세력권을 형성한 자주파와 국민파는 이번 사태에서 격렬하게 충돌하였지만, 결코 적대적으로 대립해서도 안 되고 적대적으로 대립할 수도 없다. 이번 사태를 감정이 아니라 이성으로 판단해야 한다. 이번 사태에 대한 이성적 판단은, 자기의 정치적 생명을 끊어버리려는 갈등상대와 겨루되, 그 상대를 정적으로 배격하지 말아야 하며, 거꾸로 진보적 대중정당의 길을 끝까지 함께 갈 동반자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밝혀준다.
이것은 단지 인내심을 가지고 갈등상대를 포용하는 도덕적 태도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내분과 외압으로 자칫 깨지기 쉬운 진보연합전선을 끝까지 책임지고 이끌어가는 사회변혁운동의 전략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말이다.
역사는 말한다.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제침략세력과 싸워야 했던 항일투쟁시기에, 희생과 고통을 감수하고서도 민족주의자들과의 항일연합전선을 끝까지 책임지고 이끌어간 사회주의계열 항일선열들은 대일항전을 치르며 승리의 8.15를 맞았던 반면, 사회주의자들과의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하지 못하고 분열과 분산을 거듭하였던 민족주의계열 항일선열들은 고립과 무력감에 사로잡혀 우울한 8.15를 맞았다. 항일연합전선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민족주의계열 항일선열의 실패와 좌절이 오늘 이 땅의 진보연합전선에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국민파 상층인사들이 자주파에게 부실선거 책임을 뒤집어씌워 출당시키는 것이 '국민의 뜻'이라는 궤변을 들고 나와 당활동가 두 사람의 정치생명을 끊어놓고 다른 두 당활동가의 정치생명마저 더 끊어버리려고 하다가 실패로 끝났지만, 비록 국민파 상층인사들이 그처럼 자주파를 공격하였어도 국민파는 자주파의 정적이 아니라 진보연합전선이 승리하는 날까지 함께 가야할 동반자다.
이번 사태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처럼, 자주파의 정적은 국민파가 아니라 통합진보당을 와해하려고 날뛰는 새누리당을 비롯한 수구우파세력들이다. 자주파는 국민파로부터 공격을 받아도 국민파와 함께 통합진보당을 끝까지 흔들림 없이 지키고 이끌어가야 한다.
통합진보당의 지도력은 어디서 형성되는가?
진보적 대중정당이 수구우파정당과 다른 점은, 당의 조직적 기초 위에 당의 지도력이 형성된다는 데 있다. 수구우파정당은 당의 조직적 기초가 매우 부실하기 때문에 텔레비전 방송에 얼굴을 많이 내비치는 대중적 인기 위에 당의 지도력을 형성한다.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획득한 대중적 인기를 자기의 존재기반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수구우파정당 상층인사와 인기연예인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진보적 대중정당을 이끌어가는 지도력은 대중적 인기가 아니라 정녕 당의 조직적 기초 위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수구우파정당 상층인사들이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여 톡톡 튀는 발언과 행동으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연기술을 능숙하게 발휘하면 그들의 대중적 인기가 절로 올라가지만, 진보적 대중정당의 지도력은 당의 조직적 기초를 튼튼하게 축성하는 정치활동을 통해서만 형성할 수 있다. 당의 조직적 기초를 축성하는 것은, 당원대중을 조직화하여 기층당조직을 건설하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의 기층당조직은 당원대중의 생산현장과 생활현장 속에 축성되는 풀뿌리 조직이다. 그런 풀뿌리 조직이 수많이 생겨날 때 당의 지도력이 기층당조직에 뿌리를 내리고 튼튼하게 형성될 수 있다.
그런데 당원대중의 생산현장과 생활현장 속에 기층당조직을 건설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당활동가들이 그 사업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바치며 헌신분투해야 기층당조직을 건설, 확대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당원대중은 당원명부에만 존재하고 당원대중이 참여하는 기층당조직이 부실하면, 다른 구태정당들에서 그러한 것처럼 통합진보당에서도 뿌리 없는 부평초 인사들이 언론공작에 편승하여 설치게 될 것이다.
다른 구태정당들과 달리, 통합진보당은 당원대중이 참여하는 기층당조직이 뿌리를 내린 새 형의 대중정당으로 거듭나야 하며, 당원대중의 생활현장과 생산현장에서 당의 진취적 동력을 공급받는 새 형의 진보정당으로 부단히 성장, 발전해야 한다.
역사는 또 다시 말한다. 지난 항일투쟁시기에 민족주의계열 항일선열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그들이 건설한 정당들이 예외 없이 기층은 없고 상층만 있는 기형정당이었기 때문이다. 당원대중은 당원명부에만 있고 당의 기층조직은 없으며, 당지도부를 자처하는 부평초 정객들만 모여앉아 당권경쟁에나 몰두하는 정당은 있으나 마나 한 정당이다.
그러므로 통합진보당의 자주파 당활동가들은 풀뿌리 당원들이 있는 기층으로 내려가 기층을 조직해야 한다. 당원대중의 생산현장과 생활현장 속에 구축되었으나 이번 사태로 허물어진 기층당조직을 하루빨리 복구해야 하며, 그런 기층당조직이 아직 없는 곳에서는 새로 내와야 한다. 그리하여 그 어떤 언론공작에도 휘둘리지 않는 튼튼하고 올곧은 진보정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자주파가 요구하는 당의 혁신에서는 방송국 냄새가 아니라 풀뿌리 냄새가 물씬 나야 하는 것이다.
누가 기층당조직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바치는지 풀뿌리 당원들이 알게 하라. 누가 진보와 변혁의 과학적 전망을 제시하는지 풀뿌리 당원들이 알게 하라. 누가 수구우파세력의 탄압과 협박에도 물러서지 않고 투쟁하여 난국을 정면돌파하는지 풀뿌리 당원들이 알게 하라. 당의 침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기층에 있다. (2012년 7월 28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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