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26

1939년의 혈서, 1979년의 암살

진실의 말팔매 <39>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939년의 혈서

1939년 2월 29일 만주국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에 박정희가 제출한 두툼한 지원서류가 들어갔다. 박정희의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박정희가 쓴 지원서가 나왔다.

지원서에서 그는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은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의 굳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할 각오를 하였습니다. 만주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뜻함-옮긴이)을 위해 일신의 영달도 바라지 않겠습니다"고 절절히 썼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두 번째로 보낸 그 지원서와 함께 "죽음으로 봉공하리라 박정희"라는 뜻으로 쓴 혈서가 들어있었다. 박정희의 지원서와 혈서는 1939년 3월 31일 <만주신문>에 보도되었는데, 거기에 나타난 그의 열렬한 충성심이 "징모과 계원들을 감격시켰다"고 하였다.
 
1939년 2월 경상북도 문경을 떠나 만주로 간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지원서류를 두 번 제출하였는데, 두 번째로 그가 쓴 지원서와 혈서를 읽고 감동한 사람들 가운데는 당시 만주군 간도특설대 대위 강재호도 있었다.

강재호가 만주군관학교 입학시험장까지 데리고 가서 입학을 추천하였던 박정희는 1940년 4월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하였고, 1942년 10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하여 1944년 5월 졸업과 함께 소위로 임관하였다.

1938년 9월 15일 창설된 만주군 간도특설대 지휘관은 일본군이었고 대원들은 거의 조선인이었는데, 만주군관학교 생도들은 재학 중에 만주군 간도특설대에서 이른바 '토벌작전' 실전훈련을 받는 견습생이었으며, '토벌작전'이 벌어지는 경우 만주군 간도특설대 예비병력으로 실전에 동원되었다.
 
만주군 간도특설대는 1938년 9월 15일 창설되어 같은 해 12월부터 1943년 말까지 간도에서 항일무장부대를 '토벌'한다고 날뛰면서, 조선인 마을에 들어가 민간인 학살, 부녀자 강간, 재물 약탈, 방화를 일삼은 극악무도한 살인집단이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문제는, 만주군 간도특설대의 극악무도한 '토벌작전'에 만주군관학교 생도들이 예비대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만주군관학교 생도였던 박정희가 만주군 간도특설대의 '토벌작전'에 예비대 병력으로 동원되었음을 말해준다.

만주군 간도특설대는 조선인민혁명군과 두 차례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1939년 8월 23일 안도현 대사하와 대장강지구에서 벌어진 전투를 대사하전투라 한다. 만주군 간도특설대는 대사하전투에서 500여 명이 살상되거나 포로로 잡혀 거의 궤멸되다시피 하였다.

그런데 대사하전투가 벌어졌던 1939년 8월 박정희는 아직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하기 전이었으므로, 그가 대사하전투에 예비대 병력으로 동원되었을 가능성은 없다.

대사하전투에서 참패하고 복수심에 사로잡힌 일제는 관동군과 만주군, 그리고 만주군 산하 간도특설대를 총동원하여 1940년 봄부터 만주 각지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을 상대로 대규모 '춘계토벌작전'을 벌였다.

1940년 6월 연길현과 안도현에서 군사활동을 벌이던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대사하치기에서 만주군 간도특설대와 불의의 조우전을 벌이게 되었으니, 이것이 대사하치기전투다. 당시 만주군 간도특설대는 만주군 군관학교 생도들로 편성된 예비대까지 '토벌작전'에 동원하였는데, 거기에 박정희도 있었다.

<세계일보> 취재기자들이 2006년 5월 29일부터 6월 5일까지 중국 동북지방 각지에서 취재하면서 만난 조선족 함형도의 증언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1941년 그의 부친은 안도현 명월구에서 아사히사진관 사진기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일본도를 허리에 차고 군복을 입은 조선인 장교가 사진을 찍으러 그 사진관에 오곤 하였다.

막걸리를 좋아하고 경상도 말씨를 쓴 그 조선인 장교는 당시 어린애였던 함 씨를 귀여워하여 사탕을 사먹으라고 돈도 주었고, 간도특설대로 가는 길에 그를 졸졸 따라가면 부대 정문 앞에서 "너는 여기 있거라"고 말하고 부대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와 자신을 사진관으로 데려다주기도 하였다.

함 씨는 훗날 흑룡강성 신문에 보도된 남측의 역대 대통령 사진들을 우연히 살펴보다가, 지난 날 아사히사진관을 드나들던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었음을 알았다고 한다.


1979년의 암살

이처럼 일제강점기에 민족반역자였던 박정희는 미국육군방첩대 한국현지사무소 책임자 제임스 하우스만의 배후조종으로 일어난 5.16 군사반란의 지도자로 집권한 뒤에는 한일국교수립과정에서 독도 영유권을 포기하였으며, 산업화를 위해 대일경제예속화를 추진하였으며, 미국의 베트남침략전쟁을 추종하여 파병하였으며, 폭압통치로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하려고 지원혈서를 썼던 때로부터 40년이 지난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경내에 있는,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안가'에서 비밀주연이 벌어졌다.

만찬이 차려진 커다란 교자상 앞에 박정희가 앉았고,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가 '함구각서'를 받고 불러온 인기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이 유행가를 부르며 박정희의 술잔에 값비싼 양주를 연신 따르고 있었다. 


<한겨레> 2011년 10월 24일 부에 실린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의 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황음'에 빠진 박정희는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된 이들 안가에서 주연을 벌이고 주흥을 돋우기 위해 젊은 여자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이런 술판은 소행사와 대행사로 구분되는데, 대행사는 두 명 이상의 여인과 비서실장, 경호실장, 정보부장 등 권력자 3-4명이 참석해 벌이는 연회였고, 소행사는 대통령 혼자서 한 여인만 불러서 즐기는 밀회를 말한다. 한 달에 대행사가 2-3회, 소행사가 7-8회, 도합 10회 안팎의 대소연이 벌어졌다. 이 자리에 여인을 공급하는 것도 의전과장의 몫이었다. 당시 의전과장 박선호가 서울 장충동에 있는 요정의 한 마담에게 소개받아 공급한 여인만도 100명을 넘는다."

김재홍 경기대 교수가 2011년 10월 19일 <오마이뉴스>에 발표한 글에는 김재규가 사형 당하기 전에 변호사에게 털어놓은 이야기가 인용되었는데, 박정희의 비밀안가에 불려간 여자는 200명이 넘는다. 그 가운데는 "누구나 한 번 듣기만 하면 입을 딱 벌릴 만한" 여자탤런트와 여자배우들이 있었다. 이러한 증언은 박정희가 타락한 인격파탄자였음 말해준다.

이 땅에 진정한 자주적 민주정권이 세워져 부패하고 피묻은 과거사를 청산하였더라면, 박정희는 사후에라도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 사라져야 했을 것이다. 


최면에 걸린 국민들

충격적인 사실은, 2011년 5월 한국정당학회와 <조선일보>가 공동기획한 여론조사에서 드러났다.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이 땅의 국민들 가운데 무려 82.6%가 박정희가 "국가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하였다.

"경제발전"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92.1%, "국민의식변화"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66.6%, "외교안보"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64.8%, "정치민주화"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38.3%로 나타났다. 자신을 진보라고 생각하는 응답자 가운데서도 박정희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 비율이 76.5%나 되었다.

박정희가 민족과 역사 앞에 저지른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을 은폐하고, 그의 행적을 미화분식한 속임수에 넘어간 국민들이 '박정희 향수'라는 최면에 걸려있는 것이다. 그렇게 최면에 걸린 사람에게 투표용지를 주고 대통령을 뽑으라고 하면, 박정희의 딸에게 투표할 것으로 예상된다.

 '박정희 향수'라는 최면에 걸린 이 땅의 국민들은 1939년의 혈서와 1979년의 암살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아야 최면에서 깨어날 것이다. (2011년 10월 26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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