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1/01

‘백마 타고 오는 초인’ 기다리는 말띠해

자주민보 2014년 01월 01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노래하며 자주독립투쟁의 짧은 한 생을 마감한 항일시인 이육사의 절절한 육성을 오늘 다시 듣는다. 분단시대가 69년으로 접어든 말띠해 2014년 첫 아침에 자주민보 독자들과 함께...  © 자주민보, 한호석 소장 제공



2014년 새해가 밝았다. 묵은 12월 달력을 한 장 떼어낸 게 아니라, 새로운 한 해를 뭉클한 가슴 속에 맞이한 것이다. 동해 푸른 물결 위로 아침노을 붉게 비치며 새해 첫 태양이 떠오르는 그 장엄한 시각, 내 가슴은 왜 뭉클한 감동을 느끼고 있었던가. 어느 옛 시인의 절절한 육성이 내 귓가에 울려왔기 때문이다.

이육사라는 이름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하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를 야만적으로 수탈하던 일제의 식민지수탈거점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사제폭탄을 던진 항일투쟁에 가담하였다가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자기가 입은 재소복 가슴팍에 적힌 수감번호 ‘264’를 이육사라는 필명으로 썼다고 한다.

내가 이육사와 그의 시를 잊지 못하는 까닭은, 그가 항일혁명운동에 자신을 바치면서 자기의 항일사상을 부단히 발전시켜 나간 견결한 신념의 투사이자 영원한 청년시인이기 때문이다. 피끓는 몇몇 열혈청년들이 은행지점에 사제폭탄을 던지는 파편적 투쟁으로는 강대한 일제를 타도하고 조선독립을 실현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항일사제폭탄보다 더 크고 강력한 항일타격수단을 민중 속에서 찾아내자, 바로 이것이 이육사가 대구형무소 쇠창살 안에서 깨달은 항일혁명의 진리였다.

식민지조선의 자주독립을 실현하려면, 뿔뿔이 흩어져 절망과 탄식 속에 날을 맞고 보내는 각계각층 민중을 항일의 기치 아래 묶어세우고 그들을 강력한 대중투쟁으로 불러일으킬 핵심골간 곧 군정간부를 키워내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어느 날 이육사는 압록강 건너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에서 그가 조선혁명군 군관학교에 입교한 때는 1931년이었다. 1933년에 조선혁명군 군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압록강을 넘나들며 항일혁명운동자금을 모으고 똑똑한 조선청년들 중에서 군관학교 지원생을 모집하는 비밀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던 중 일제의 마수에 검거되었다. 그것은 청년 이육사에게 어느덧 열일곱번째 투옥이었다.

이육사의 열일곱번째 투옥은 그에게서 39년 생애를 앗아갔다. 일제교형리들의 악독한 고문을 받은 그는 경성감옥에서 쓰러져 39세의 시퍼런 나이에 항일투사로서 짧은 생을 마쳤다. 1944년 1월 16일 경성감옥 간수로부터 이육사 사망통보를 받고, 그날 저녁 5시 경성감옥으로 달려간, 이육사의 항일동지였던 이병희 여사는 코에서 피와 거품이 흐르는 시신을 부여잡고 목놓아 울었다. 일제강점기에 문필가로 이름을 날린 식민지문인들이 허다하지만, 이육사처럼 항일혁명과 자주독립의 길에 자기 목숨까지 바친 진짜배기 시인은 드물다.

그가 나서 자란 고향산천인 경상북도 안동에는 ‘이육사문학관’이 있는데, 그가 남긴 39편의 시들 가운데 후세에 가장 널리 전하는 애송시는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시작하여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두렴”으로 끝나는 시 ‘청포도’다. 서울에서 살 때 청포도처럼 푸르싱싱한 꿈을 꾸던 나의 학창시절, 시 ‘청포도’를 애송하였던 아련한 기억이 문득 뇌리에 스친다.

항일시인 이육사가 남긴 39편의 시를 꿰뚫고 있는 주옥같은 시어를 하나 고르라면, 나는 선뜻 기다림이라는 시어를 고르겠다. 시 ‘청포도’에서 그는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라는 시구절을 엮어가며 자기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둔 기다림의 사연을 노래했다. 항일시인이 절절한 육성으로 노래한 기다림이란 무엇이었나?

일제침략자들의 차디찬 쇠창살과 가혹한 고문형틀도, 그리고 조국의 푸른 하늘을 다시 우러러 볼 수 없게 만든 죽음의 마지막 순간도 이육사의 가슴에서 기다림을 결코 앗아가지 못하였나니, 그에게 기다림은 곧 자주독립과 동의어가 아니었던가. 항일투사 이육사가 자주독립이라는 투쟁구호를 외치다 그 길에 목숨을 바쳤다면, 항일시인 이육사는 기다림이라는 시어로 시를 쓰다가 그 길에 목숨을 바친 것이다.

활활 타는 불꽃처럼 식민지시대의 어둠과 싸우며 살았던 이육사가 오늘 무덤에서 다시 일어난다면, 분단시대의 어둠 속에서 웅성거리며 서 있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질타할지 모른다. “미국놈들이 갈라놓은 삼천리 금수강산이 69년 동안 피눈물 흘리는데 어찌하여 너희들은 여태 조국을 통일하지 못했느냐!” 이육사의 시세계를 지배하는 기다림의 언어를 가장 빼어난 시적 형상으로 빚어낸 그의 대표작은 ‘광야’라는 시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여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나는 조국분단 69년이 되는 갑오년 새해를 맞으며 시 ‘광야’를 다시 읽었다. 조국에서 멀리 떨어진 뉴욕의 하늘 아래서 그가 노래한 ‘광야’를 마음의 눈길로 오래도록 바라보던 내 눈가에 눈물이 젖어들었다. 바로 그 때, 눈물에 젖어 뿌연 시야를 뚫고 펼쳐진 광야 한 복판에서는 어느덧 말발굽 소리 우렁우렁 울려와 내 가슴을 마구 흔들었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아침노을 속에서 홀연히 다가오고 있었다. 말띠해를 맞은 분단시대의 광야에 서서 나도 그 옛날 시인처럼 목놓아 부르고 싶었다. 이육사가 부르다가 쓰러진 기다림의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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