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98)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실질적 민주주의,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 진보적 민주주의
진보정치세력이 이 땅에서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임무이며, 반드시 달성해야 할 전략적 목표는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이다.
돌이켜보면, 1980년대 중반 진보적 청년활동가들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폭압을 뚫고 민주화운동의 깃발을 처음 들어올렸을 때, 그들이 불타는 마음에 그려본 것은 군사독재정권을 타도하는 반독재민주화로 실현되는 민주주의였다. 그 당시 반독재민주화는 민주적 정치체제의 수립을 뜻하는 개념으로 정리되었다.
정치체제와 경제체제를 비롯한 사회체제 전반을 바꾸어 새로운 사회체제를 건설하는 사회변혁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그 때까지만 해도 아직 깊지 못하였으므로,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독재정권을 민주정권으로 교체한다는 뜻의 반독재민주화로만 좁혀서 이해하였던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반독재민주화 대신에 사회의 민주화라는 새로운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김영삼 정권이 이른바 문민정권이라는 간판을 내건 정세변화 속에서, 반독재민주화라는 용어만으로는 더 이상 설득력 있게 대중과 소통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 사회의 민주화라는 개념을 사회체제 전반을 바꾸어 새로운 사회체제를 건설한다는 변혁적 의미로 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사회의 민주화라는 개념의 등장이 반독재민주화라는 개념의 한계를 뛰어넘은 이론적 진전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더 정확히 그리고 더 깊이 이해하는 이러한 이론적 진전은, 민주주의를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로 구분하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라고 부르기 시작한 인식발전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원래 민주주의를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로 구분하는 도식은 서구의 진보적 사회과학에게서 배워온 것인데,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로 재정의한 것은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자기의 독창적인 생각을 잘 반영한 것이다. 그로써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는 당시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추구하는 강령으로 되었다.
어느 때부터 그러했는지는 꼭 집어서 말하기 어렵지만,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진보정치라는 개념에 결부시켜 생각하게 되었다. 원래 진보라는 말은 보수라는 말과 대칭되는 뜻으로 쓰던 것인데, 진보라는 말을 정치라는 개념 앞에 놓음으로써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정치방식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진보정치라는 새로운 정치방식으로 정식화된 것이다. 그리하여 진보정치는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새로운 정치방식으로 되었다.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진보정치라는 새로운 정치방식으로 실현할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를 진보적 민주주의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해 전부터의 일이다.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민주화라는 개념을 사회체제의 전반적 변혁이라는 변혁적 의미로 이해하면서,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강령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2000년대 중반에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으로 사용하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개념과 동의어로 사용한 것이지,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개념과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상호배치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에는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에는 없는 사회변혁사상이 담겨 있고, 더욱이 그 개념이 우리 사회의 실정에 부합된다는 점은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 속에 이미 널리 알려진 바 있다.
주목하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뜻으로 썼던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라는 사회변혁적 의미로 재정의하였다는 점이다. 사회변혁적 관점에서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진보적 민주주의로 재해석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진보정치강령으로 제시할 수 있었던 이론적 발전은 당시 민주노동당에 결집한 진보정치활동가들의 탐구와 해명에 의해 가능하였다.
지금 '노무현의 적자'를 자처하는 개혁정치세력은 노무현 대통령이 제시하였던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전혀 쓰지 않지만, 민주노동당에서 통합진보당으로 이어지는 진보정당의 변화와 발전을 거치면서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가장 중요한 자기의 역사적 임무로, 자기의 전략적 목표로 삼고 멀고 험한 진보정치의 길을 헤쳐가는 중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정치체제의 변혁과 경제체제의 변혁을 동반하는 두 단계 사회변혁의 발전과정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사회역사발전의 주체로 일어서는 저 눈부시게 새롭고 멋진 세상에 당당히 내걸 새로운 사회의 첫 번째 이름이다.
오늘 자본주의세계시장에 파상적으로 몰아치는 대공황 속에서 자본주의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한 '몰락의 시대'에 자본의 착취와 차별과 소외로 고통을 겪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대공황의 공포와 위험을 단숨에 뚫고 나아가 만날 새로운 시대의 이름, 바로 그것이 진보적 민주주의다.
오늘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여 상호결탁한 제국주의깡패국가들이 세계 곳곳에서 무력침공과 정권전복의 피바람을 몰아오는 '대량살상의 시대'에 제국주의깡패국가들의 광란적 폭거를 단숨에 진압하고 들어설 새로운 시대의 이름, 바로 그것이 진보적 민주주의다.
자주, 민주, 통일이 서로 엮어지는 결합방식
진보적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논할 때, 아니 진보적 민주주의가 실질적 민주주의와 어떻게 다른가를 논할 때 제기되는 두 가지 중요한 논제를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반제자주화와 진보적 민주주의를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실질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개혁정치세력은 자기들이 논하는 실질적 민주주의가 반제자주화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 반제자주화를 실현하지 않으면,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는 데도, 그들은 그렇게 착각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반제자주화는 곧 반미자주화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노무현 정권이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원인은 그 정권이 대미예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노무현 집권기간 5년의 경험은, 대미예속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실현하지 못한 정권은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전혀 실현할 수 없다는 진리를 입증하였다.
이 땅에서 반미자주화를 실현하여야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말은, 반미자주화가 선행하고 진보적 민주주의가 뒤따르는 식의 선후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해서, '선 자주화, 후 민주화'라는 도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반미자주화의 핵심적 실천과업으로 제기된 주한미국군 철군과 한미동맹 해체는 이 땅에 진보적 자주정권이 수립되어야 가능한 과업들이다. 오직 진보적 자주정권만이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키고 한미동맹을 해체하여 반미자주화를 실현할 수 있다. 개혁적 민주정권은 주한미국군 철군과 한미동맹 해체에 대해서 말도 꺼내지 못한다.
그런데 진보적 민주주의가 진보적 자주정권 수립으로 실현된다고 할 때, 진보적 자주정권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사회변혁과정에서, 바로 그 격동적인 변혁 속에서 주한미국군 철군과 한미동맹 해체를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진보적 민주주의와 반미자주화를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진리를 말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선 자주화, 후 민주화'라는 도식이 성립될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주한미국군 철군과 한미동맹 해체는 남측 사회만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격동적인 변화로 이끌어가고, 더 나아가서 동북아시아 정세를 개편하는 거대한 사변이 될 것이다. 그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격동적인 대변화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처럼 일어나는 게 아니다.
주한미국군 철군과 한미동맹 해체는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개선과 맞물려 일어나는 것이다. 주한미국군 철군과 한미동맹 해체가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개선과 맞물리지 않고 실현될 수 있는 경로는 북이 '조국통일대전'으로 미국의 항복을 받아내는 경우밖에 없는데, 북의 '조국통일대전'은 남측의 진보정치상황과 무관하게, 북의 의지대로 일어날 수 있는 대사변이기 때문에, 이에 관한 논의는 이 글의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생략한다.
이 글은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정세변화에 맞물려 주한미국군이 철군하고 한미동맹이 해체되는 경로를 주목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개선이 자주적 진보정권이 세워지기 이전에 실현될 수 있고, 또 반드시 그런 이전 단계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한반도 평화실현과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의지를 가진 개혁적 민주정권이 세워지는 경우에도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개선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합진보당이 집권하여 자주적 진보정권을 세우고, 그 정권이 평화협정에 체결에 나서고 남북관계를 개선한 다음, 순차적으로 주한미국군 철군과 한미동맹 해체를 추진하리라고 전망할 것이 아니라, 민주통합당이 집권하여 개혁적 민주정권을 세울 때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개선을 실현할 수 있고, 또 반드시 그렇게 실현해야 할 것으로 전망하는 것이다.
물론 개혁적 민주정권이 미국의 통제와 강압에 굴복하여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개선을 자기 의지대로 추진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통합진보당이 진보적 대중단체들과 힘을 합하여 개혁적 민주정권을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개선의 길로 힘있게 떠밀어주고, 다른 한 편, 북이 미국의 새 정부를 강하게 압박하여 평화협정의 길로 끌어낸다면 개혁적 민주정권 하에서도 얼마든지 평화협정이 체결될 수 있고, 남북관계가 개선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통합진보당은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남북관계가 개선된, 결정적으로 유리한 정세변화의 순풍을 타고 집권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자주적 평화통일과 진보적 민주주의를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1980년대 후반 진보적 청년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조국통일운동이 추진되고 있을 때, 개혁정치세력은 '선 민주, 후 통일'이라는 도식을 꺼내들고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논하는 이 글에서는 그런 낡은 도식을 논할 필요조차 없지만, 오늘 진보정치활동가들 가운데 일각에서는 아직도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시간적 선후배열로 이해하는 오류를 넘어서지 못한 듯하다.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통일은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한 다음에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자주적 진보정권이 등장하기 이전에 개혁적 민주정권이 세워지더라도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남북관계가 개선될 수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바로 그러한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개선이 자주적 평화통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며,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주적 평화통일에 직결된 선행과업인 것이다.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개선이 실현되지 않은 조건에서 자주적 평화통일은 실현될 수 없다.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개선이 실현되지 않은 조건에서 자주적 평화통일이 실현될 수 있는 경로는 북이 '조국통일대전'에서 승리하여 미국의 항복을 받아내는 경우밖에 없는데, 이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이 글의 주제에서 벗어나므로 생략한다.
장차 통합진보당의 집권으로 세워질 자주적 진보정권은, 자기가 등장하기 이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남북관계를 개선한 개혁적 민주정권의 성과를 딛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게 될 것이다.
소중한 시간 5년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진보적 민주주의가 형식적 민주주의와 갈라서는 근본적인 차이는, 그것이 전략산업 국유화와 생산활동 민주화를 실현하는 민주주의라는 데서 가장 선명하게 돋보인다. 전략산업 국유화와 생산활동 민주화를 실현하지 못한 민주주의는 대량실업, 비정규직 확산, 빈부격차 극대화, 농어민 소외 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이익과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민주주의이므로, 그런 민주주의는 진보적 민주주의가 아니다.
장차 이 땅에 세워질 진보적 자주정권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창조한 막대한 재부를 괴물처럼 마구 먹어치우며 몸집이 비대해질대로 비대해진 30대 재벌이 장악한 전략산업을 국유화하고, 그렇게 국유화한 기업의 생산활동을 생산자대중의 요구와 이익에 맞게 민주화하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 그런 임무를 수행하려면, 진보적 자주정권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지지와 성원에 힘입어 수구우파세력의 마지막 반발을 제압하고 진보적 개헌을 추진해야 한다.
명백하게도, 이 땅의 전략산업은 사실상 대미예속산업이다. 대미예속산업을 국유화하는 것이야말로 제국주의지배체제와 대미예속체제의 물질적 기반을 허물어버리는 반미자주화인 것이다. 그러므로 반미자주화의 실현경로에서 주한미국군 철군 및 한미동맹 해체는 반드시 전략산업 국유화 및 생산활동 민주화를 동반하게 될 것이다.
반미자주화는 주한미국군 철군과 한미동맹 해체라는 정치체제의 자주적 변혁을 통해서,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전략산업 국유화와 생산활동 민주화라는 경제체제의 자주적 변혁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새누리당은 무슨 '경제의 민주화'라는 사탕발림식 말장난으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환심을 사보려고 기만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이것은 유권자대중의 관심이 민생경제를 살리는 절박한 과제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현상이다.
그런데 민생경제를 살리는 길은 30대 재벌이 장악한 전략산업을 국유화하고 생산활동을 민주화하여 대량실업, 비정규직 확산, 빈부격차 극대화, 농어민 소외를 해결하는 것밖에 없다. 전략산업 국유화와 생산활동 민주화가 아니라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도대체 무엇으로 그처럼 격화된 모순을 해소할 수 있으며, 그처럼 깊은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앞으로 두 달 앞으로 다가온 대선, 그 중요한 갈림길에서 만일 새누리당이 이겨 불행하게도 집권연장에 성공하는 경우, 이 땅의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은 또 5년의 소중한 시간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시간상실은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불행과 고통의 시간을 5년이나 더 연장시키는 뼈아픈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평화와 통일을 열망하는 7천만 민족에게 분단과 대립의 시간을 5년이나 더 연장시키는 비극적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래서, 소중한 5년을 수구우파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이 진보정치활동가들의 가슴을 쾅쾅 울리고 있다.
통합진보당은 자기의 단독집권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개혁적 민주정권 수립의 의의를 가볍게 보거나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며, 개혁적 민주정권의 등장을 배척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질러서도 안 될 것이다. 비유를 들어 말한다면, 윷놀이를 할 때 상대를 이기기 위해 모가 아니면 도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걸을 치고 나아가 모에 이르는 길도 얼마든지 있다.
지금 통합진보당에게는 걸을 치고 나아가 모에 이르는 길이 요구되는데, 그 요구는 개혁적 민주정권의 등장을 야권연대로 끌어당기는 강한 견인력에 의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통합진보당에게 견인력이 없다면, 걸을 치고 나서도 모로 나아가지 못하여 야권연대가 불발로 끝날 것이다.
또한 통합진보당의 야권연대전략은 개혁적 민주정권이 집권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정권이 집권기간 중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길로 들어설 때까지 발휘해야 할 전략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2012년 대선은 통합진보당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안겨준다.
통합진보당의 야권연대 견인력은 민주통합당과의 협상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통합진보당에게 보내는 지지와 성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만일 통합진보당이 진보적 민중의 지지와 성원을 받지 못하면, 야권연대는 불가능하게 된다.
비록 지금은 하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을 반드시 실현하리라는 굳센 신념과 밝은 전망을 안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생산현장과 생활현장을 뛰고 또 뛰는 이름 없는 진보정치활동가들의 불타는 마음과 숨은 땀방울이 위대한 변화를 불러일으킬 새 날이 5년 뒤에 저만큼 다가오고 있지 아니한가. (2012년 10월 1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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