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14

3중 철책은 왜 자꾸 뚫리는 것일까?

[한호석의 개벽예감] (33)
자주민보 2012년 10월 11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15명 대 150만명이 벌인 51일 간의 전투
전에는 잘 알지 못한 북측 사정이 인터넷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는 경우가 차츰 많아지고 있다. 북측 사정은 북의 언론기관들이 운영하는 몇몇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도 세상에 알려지지만, 북의 언론기관이 <유튜브(You Tube)>에 올려놓은 동영상을 통해서 알려지는 북에 관한 정보는 더욱 생생한 현장감을 준다. <유튜브>에는 갖가지 대북정보를 담은 동영상들이 많이 게시되어 있는데, 북의 인터넷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가 2012년 2월 22일에 게시한 다부작 기록영화도 그런 동영상들 가운데 하나다. 특히 조선기록과학영화촬영소가 2010년에 제작한 기록영화 ‘누리에 빛나는 선군태양 제4부 - 인민군대를 백두산 혁명강군으로’라는 제목의 상영시간 50분 짜리 기록영화는 이제껏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민군의 전투력에 관한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

그 기록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후반부에 나오는, 이름을 명시하지 않은 인민군 장병 전사자 25명의 얼굴사진인데, 지휘관 한 사람의 사진을 맨 앞에 두고, 그 다음으로 병사 8명의 사진을 세 줄로 배열하였다. 전사자 사진들은 1996년 9월 18일에 일어났던 인민군 잠수함 사건에서 전사한 인민군 장병들의 영정으로 보인다.

인민군 잠수함 사건이 있었던 때로부터 16년 세월이 흐른 지금,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진 그 사건을 다시 거론하는 까닭은 인민군 전투력에 관한 기록영화에 그 사건이 다시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을 보면, 북이 인민군 잠수함 사건을 인민군 전투력이 얼마나 강한지 말해주는 여러 사례들 가운데 한 사례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96년 9월 18일 동부전선 군사분계선(MDL)에서 남쪽으로 약 120km 떨어진 강원도 강릉시 안인진리 앞바다에서 인민군 소형 잠수함 한 척이 해안에 좌초되었다. 그 잠수함에는 승조원 23명과 정찰병 4명이 타고 있었다. 해안에 좌초한 잠수함을 더 이상 운항할 수 없게 되자, 그들 27명 가운데 소총으로 무장한 16명은 뿔뿔이 흩어져 오대산에서 설악산에 이르는 험준한 산줄기를 타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당시 산줄기를 타고 북상하며 한국군과 교전하였던 인민군 16명 가운데 정찰병은 3명 뿐이었고, 나머지 13명은 잠수함 승조원이었다. 정찰병 3병은 육상정찰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한국군의 포위공격 속에서도 교전할 수 있는 육상전투능력이 있었지만, 바다에서 잠수함을 타던 승조원 13명에게는 육상전투능력이 사실상 없었다. 그래서 투항자 1명이 잠수함 승조원 가운데서 나왔다.

해안에 좌초된 잠수함에 정찰병 3명이 타고 있었다는 보도를 보면, 그 소형 잠수함이 대남정찰을 위해 남하하였다가 해안에 좌초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사건에서 기억할 수 있는 것처럼, 지금으로부터 16년 전만 해도 북은 정찰병을 적진에 침투시키는 정찰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주한미국군과 한국군도 대북정찰활동을 벌였다. 한반도가 아직 전쟁을 끝내지 못한 정전상태에 있으므로, 교전쌍방이 서로 그러한 정찰활동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 전역을 미국 상업위성이 정밀하게 촬영한 위성사진자료가 2001년 6월 11일부터 인터넷에 공개되기 시작하자, 북은 정찰병을 남측에 침투시키는 대남정찰활동을 더 이상 지속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를테면, 2012년 10월 5일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민주통합당 소속 국회의원은 미국 상업위성이 촬영한 인터넷 위성사진자료에 한국군 각 부대들의 위치와 건물배치상태는 말할 것도 없고, 각종 지상배치 무기와 군사장비들까지 모조리 노출되었다고 개탄한 바 있다. 또한 2012년 6월 4일 인민군 총참모부가 당시 평양에서 진행된 소년단 창립 66주년 경축행사를 비방한 남측 신문사들의 좌표를 열거하면서 조준사격 위협을 가한 것은, 인민군이 위성사진자료를 통해 정밀한 타격좌표를 파악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인민군은 2000년대에 들어와 대남정찰활동을 중지하였지만, 미국군과 한국군은 지금도 이전처럼 대북정찰활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왜냐하면 미국 정찰위성이 찍어오는 위성사진에는 북의 갱도화된 군사지하시설들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1996년 9월 18일 인민군 잠수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무기라고는 소총 한 자루와 실탄 몇 발씩밖에 갖지 못한 정찰병 3명과 육상전투능력이 없는 잠수함 승조원 12명의 북상을 차단하기 위해 한국군은 연인원 150만 명을 투입하여 여러 겹으로 포위망을 쳤다. 15명 대 150만명이 벌인 51일 간의 전투, 그것은 세계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전무후무한 격전이었다. 51일 동안 계속된 전투에서 인민군 14명이 교전 중 전사하였고, 한국군은 11명, 예비군 1명, 경찰 1명이 전사하고 15명이 부상당했다. 한국군 전사자 11명 가운데 3명은 오인사격에 의한 사망자다. 소총 한 자루와 실탄 몇 발씩밖에 갖지 못한 인민군 15명의 북상을 차단하기 위해 병력수송헬기까지 동원한 한국군이 51일 동안 150만명 대병력을 작전에 투입하고서도 13명이 전사하고 15명이 부상당한 것은 그 작전이 사실상 실패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당시 인민군 잠수함 승조원들과 정찰병들이 한국군 포위망을 뚫고 오대산을 거쳐 설악산까지 북상하는 동안, 북에서는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특수군 병력을 실은 AN-2 기습항공기들을 군사분계선 부근까지 남하시켜 비행하는 무력시위를 벌였다. 만일 인민군 특수군 병력이 방공레이더에 포착되지 않는 AN-2기를 타고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한국군과 곳곳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였더라면 어떤 사태가 일어났을까? 한국군이 인민군 잠수함 승조원 11명과 정찰병 3명을 상대로 벌인 51일 동안의 교전에서도 그처럼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면, 북에서 자타가 최정예로 공인하는 특수군 병력을 상대로 벌이는 교전에서는 한국군이 상상하기 힘들 만큼 엄청난 인명손실과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군의 작전패인은 무엇인가?

한국군이 10만 배나 되는 대병력을 작전에 투입하고서도 결국 실패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한국군이 작전실패의 원인을 어디서 찾았는지는 언론에 보도된 적이 없어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작전과 관련해서 남과 북에서 각각 나온 기록들을 살펴보면 한국군의 작전실패 원인을 분석할 수 있다.

우선 남측에서 나온 관련기록부터 살펴보면, 인민군 잠수함 사건 당시 동부전선 매복작전에 동원된 익명의 한국군 병사가 남긴 생생한 체험담이 인터넷에 게시되어 있다. 체험담의 주요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수류탄을 지급받은 한국군 병사가 작전에 투입되기도 전에 수류탄 한 발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대대병력 500명이 잃어버린 수류탄을 찾기 위해 주둔지역을 사흘 동안이나 샅샅이 뒤졌다는 얘기, 수류탄은 안전핀과 클립을 모두 빼고 던져야 하는데 어떤 병사가 안전핀만 빼고 던지는 바람에 불발 수류탄을 잘못 건드리면 터지게 되므로 매복 중인 장병들이 날이 밝을 때까지 제자리에서 꼼짝없이 발이 묶여 있었다는 얘기, 매복작전 중 공포에 질린 병사들이 밤이 되면 어둠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앞뒤를 보지도 않고 미친 듯이 총을 쏘아대는 바람에 매복구역에 나타난 아군을 오인사살하거나 마을에서 기르는 황소를 오인사살하거나 송이버섯 캐러 산에 오른 주민을 오인사살하였다는 얘기, 교전 중에 전사한 전우의 시체를 보면서 느낀 감정 등이 체험담에 들어 있다.

그 체험담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한국군의 전투능력이 생각보다 부실할 뿐 아니라, 특히 정신적으로 매우 허약하다는 것이다. 사정이 그러했으므로 한국군 지휘부는 인민군 15명의 북상을 차단하는 포위작전에 150만 명에 이르는 대병력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군 지휘부가 그런 불편한 진실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아서, 일반대중은 한국군의 전투력에 대해 알지 못하였다.

다른 한 편, 인민군 잠수함 사건에 관해 언급한, 위에서 인용한 북의 기록영화에는 “전투근무 수행 중 폭풍에 떠밀려 남쪽으로 흘러가 적의 포위에 들었을 때 누구도 명령한 사람은 없었건만 전사들이 억세게 틀어쥔 자폭의 수류탄”이라는 해설이 나오는 동영상 화면에 수류탄 세 발이 땅에 놓여져 있는 장면과 소총 탄피들이 땅에 떨어져 있는 장면과 함께 “우리들은 혁명적 절개와 지조를 지켜 적들에게 절대로 포로가 되지 않을 것이며 장군님의 병사답게 영예로운 최후를 마칠 것이다...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일 장군 만세!”라는 글귀가 화면에 나타난다. 그 글귀와 함께 군용무전기가 화면에 나온 것으로 봐서, 그 글귀는 좌초된 잠수함에 탔던 인민군 장병들이 잠수함 운항을 포기하고 거기서 나와 강릉 해안에 상륙하기 직전 잠수함에서 마지막으로 북에 송신한 맹세문인 것으로 보인다.

강릉 해안에 상륙한 27명 가운데 소총마저 없었던 승조원 11명은 좌초지역에서 서남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있는 청학산 중턱에 가서 수류탄 세 발을 가운데 놓고 서로 어깨를 겯고 자폭하였다. 절대로 포로가 되지 않고 영예롭게 최후를 마치겠다고 맹세한 그대로 그들은 자폭의 길을 택하였다. 이런 사실을 보면, 북에서 말하는 ‘자폭정신’은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강인한 전투정신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소총을 가진 다른 승조원 및 정찰병 14명은 한국군과 교전하면서 북상하던 중 전사하였는데, 한국군이 겹겹으로 포위망을 둘러치고 좁혀오는 상황이었으므로 120km에 이르는 전선을 돌파하여 군사분계선 철책을 넘어갈 가망은 사실상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총에 마지막 실탄이 남을 때까지 싸웠다. 살아날 가망이 없는 포위망 속에서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것 역시 북에서 말하는 ‘자폭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밤중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

2012년 10월 2일 강원도 고성에 주둔하는 한국군 제22사단의 최전방 철책이 어이없게 뚫리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 날 밤 10시 30분쯤 한국군이 감시하는 최전방 철책에 걸어서 도착한 인민군 병사 한 사람이 높이 4m의 3중 철책을 맨손으로 타고 넘었다. 철책을 넘어 남하한 그는 불빛이 비치는 동해선 경비대로 가서 출입문을 두드렸으나 반응이 없자 다시 한국군 병사들이 잠을 자고 있던 생활관(이전에는 내무반)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한국군 병사 3명이 잠자리에서 부시시 일어나 출입문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인민군 병사 한 사람이 문 밖에 서 있었다.

한국군이 최전방에 가설한 철책은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3중으로 설치되었는데, 철책 아래쪽은 절단하기 힘든 촘촘한 판망이고 윗쪽은 타고 넘기 힘든 커다란 원통형 철망이다. 또한 철책 곳곳에는 돌과 깡통을 매달아놓아 철책이 흔들리는 경우 소리가 나게 되어 있다.

군사분계선과 3중 철책 사이 2km 구간에는 한국군 최전방 경계초소(GP)들이 있고, 철책 남쪽에는 최전방 소초(GOP)들이 있다. 최전방 소초에 주둔하는 한국군 소대병력 40여 명은 동서로 1.5km에 이르는 3중 철책구간을 24시간 감시하고 있다. 밤에도 동서구간 철책 400~500m마다 경계병력이 배치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군 최전방 경계초소는 인민군 병사가 3중 철책을 하나씩 타고 넘어 남하하는 것을 알지 못했고, 철책을 감시하던 한국군 경계병들도 철책에 매단 돌과 깡통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소대병력이 잠든 생활관 앞에는 보초병도 서 있지 않았고, 폐쇄화면 TV마저 작동하지 않았다. 그 날 오전, 강원도 강릉 앞바다에서 남측 어선을 북측 잠수함으로 오인한 사건이 일어나, 동부전선을 지키는 한국군 제22사단은 경계태세를 강화하였다고 하는 데도, 그런 사태가 일어났으니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번 사태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전해들은 남측 국회의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인민군 병사 한 사람이 어떻게 3중 철책을 아무런 도구 없이 약 12분만에 맨손으로 타고 넘을 수 있겠는가고 의문을 표시하면서 혹시 다른 인민군 병사의 도움을 받았을지 모른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글을 시작하면서 언급한 ‘누리에 빛나는 선군태양 제4부 - 인민군대를 백두산 혁명강군으로’라는 제목의 기록영화를 보면, 남측 국회의원들이 불가사의하게 여긴 3중 철책 타고넘기가 결코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은, 개인화기로 무장한 인민군 병사들이 불과 연기가 피어오르는 실전 분위기 속에서 높은 철조망을 타고 넘는 훈련장면이다. 그런 훈련을 평소에 받은 인민군이 군사분계선 철책을 타고 넘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다. 이번에 인민군 병사가 군사분계선 철책을 타고 넘은 시간이 4분이라고 하였는데, 철책 한 개를 타고 넘는 데 4분씩이나 걸린 것을 보면, 그는 평소에 철책 타고넘기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은 낙제생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했으니 탈영하여 남하하였을 것이다.

한국군이 경비하는 최전방 철책은 이번에 처음으로 뚫린 것이 아니다. 1996년 9월 18일 인민군 잠수함 사건이 일어났을 때, 겹겹으로 둘러치고 조여오는 한국군 포위망을 벗어나 북상하여 철책을 뚫고 북으로 돌아간 정찰병 1명도 한국군 제22사단이 경비하는 바로 그 지역에서 월북하였다. 그것만이 아니다. 2004년과 2009년에 남측 민간인들이 3중 철책을 뚫고 월북했을 때도 한국군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로켓포탄 두 발씩 가슴에 안은 그들은 누구인가?

‘철통 같은 경비태세’라고 항상 큰 소리를 치던 한국군이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SBS> 2012년 10월 11일 보도에서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보도에 따르면, 2008년 4월 인민군 1명이 군사분계선 철책을 넘어 한국군 최전방 경계초소에 접근하였는데, 경계초소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급한 생각에 권총을 꺼내 공포탄을 쏘며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경계초소에 있던 한국군 장병들은 “(권총 공포탄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응사하기는커녕 어떻게 할 줄 몰라했다. 들키면 총을 맞을까봐 참호에 숨어 있었다”는 것이다. 적과 대치하는 최전방 초소에서 경비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군인들이 갑작스럽게 울린 총소리 두 발을 듣고 놀라 참호에 숨어버린 웃지 못할 사건은 언론에 보도하기도 힘든 ‘창피사건’이다.

원래 공포란 정신력이 허약한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심리현상이다. 사람이 느끼는 갖가지 공포감 중에서 가장 무섭게 느끼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 사람은 공포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 필사의 각오로 싸움에 나선 전사가 적을 압도하는 용맹을 떨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런데 최전방에 배치된 한국군이 작전 중에 또는 경계근무 중에 공포에 사로잡혀 전의를 상실하고 몸을 숨긴다면 그런 그들의 전투는 해보나 마나 뻔하다. 더구나 상대는 ‘자폭정신’으로 무장한 강력한 인민군이 아닌가. 이 글을 시작하면서 언급한 ‘누리에 빛나는 선군태양 제4부 - 인민군대를 백두산 혁명강군으로’라는 제목의 기록영화에는 인민군 특수군이 야간습격훈련과 기습폭파훈련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특히 공중강하훈련에 나선 것으로 보이는 인민군 특수군이 출동을 앞두고 대오를 정렬한 장면을 보면, 그들이 커다란 로켓포탄을 두 발씩 앞가슴에 안고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류탄보다 더 강력한 로켓포탄을 두 발이나 터뜨려 적진을 깨부술 ‘자폭정신’으로 무장한 필사의 각오와 전의가 보이는 모습이다. 일부 탈북자들이 늘어놓는 허튼 소리만 듣고 인민군 전투력을 판단하는 것은 100% 오판이다.

150만 대병력의 포위망 속에서 어깨를 겯고 수류탄을 터뜨려 집단자폭의 길을 택하고, 소총 한 자루와 실탄 몇 발만 갖고 끝까지 싸우다가 최후를 맞는 ‘자폭정신’으로 무장한 인민군 전방부대들이 지상과 지하, 해상과 해저에서 그리고 공중에서 5차원 진격을 개시하면, 권총 공포탄 소리에도 겁을 먹고 참호에 숨는 한국군은 그들의 진격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한국군 방어선은 너무도 싱겁게 뚫릴 것이다. 인민군 전방부대들이 한국군 방어선을 순식간에 뚫는 사이, 미리 후방지역에 침투하여 사전대기 중이던 인민군 특수군 병력은 서울을 비롯한 남측 각지에 있는 전략시설들을 거의 교전도 하지 않은 채 신속히 무혈점거할 것이다. 그러면 북에서 말하는 ‘조국통일대전’은 그것으로 끝나게 된다. 경기도와 강원도 북부에 사는 남측 주민들은 그래도 포성이나 듣겠지만, 그 아래 남부지역에 사는 남측 주민들은 포성도 듣지 못한 채 어느 새 속결전이 끝났음을 알리는 긴급보도를 듣게 될지 모른다.

이번에 동부전선이 또 다시 뚫린 사태가 일어난 뒤 2012년 10월 11일에 국방장관은 전군 작전지휘관 화상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병력, 감시장비 운용을 포함한 접적지역 경계작전 시스템의 근원적인 보강대책을 조기에 마련해 추진”하라고 지시하고, “국민들께 심려를 끼친 것에 대해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전방 철책이 뚫릴 때마다 송구스럽다는 변명조 발언을 되풀이해온 한국군 지휘부의 말을 더 이상 곧이 듣기 어렵다.

지금 한국군은 북측 전역을 타격할 탄도미사일을 3년 안에 개발하겠다는 자극적인 무력증강책을 발표하여 북의 ‘조국통일대전’ 의지를 시험해보려고 할 게 아니라, 군사긴장을 완화하고 평화체제를 세우는 올바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할 것이다. “남과 북은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한반도에서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기로 하였다”고 명시한 10.4 선언을 이행하는 진지한 노력만이 한국군에게 참패를 면할 수 있는 방도가 될 것이다.(2012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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