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19

불굴의 아프리카 대지 위에 남긴 마지막 말

진실의 말팔매 <49>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이 땅에서 크와메 투레(Kwame Ture)라는 혁명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면 스토클리 카마이클(Stokely Carmichael, 1941-1998)이라는 이름은 기억할까?

1986년부터 미국인들은 해마다 1월에 세 번째로 돌아오는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을 기념하는 국경절로 지키는데, 올해는 1월 16일이 그 국경절이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처럼, 마틴 루터 킹은 1955년부터 1968년까지 미국에서 계속된 흑인민권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거꾸로 뒤집힌 세상에서는 흑인민권운동의 지도자가 마틴 루터 킹밖에 없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훌륭한 지도자가 두 사람이나 더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스토클리 카마이클과 말콤 엑스(Malcolm X, 1925-1965)다.

미국의 흑인운동노선은 흑인과 백인의 평화공존을 추구한 인종통합주의(racial integrationism)와 백인지배체제에 흡수통합되는 것을 거부하고 흑인의 자주성을 추구한 흑인분리주의(black separatism)로 갈라졌는데, 전자는 미국 중산층의 자유주의와 타협하였고, 후자는 흑인민중의 정치세력화와 사회정치적 해방을 추구하였다. 마틴 루터 킹은 인종통합주의를 주창한 지도자였고, 스토클리 카마이클과 말콤 엑스는 흑인분리주의를 주창한 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운동노선을 넘어 사상분야로 들어가면 다른 모습이 보인다. 마틴 루터 킹이 인종통합주의의 사상적 기초를 기독교에 두었고, 말콤 엑스가 흑인분리주의의 사상적 기초를 이슬람교에 두었던 것에 비해, 스토클리 카마이클은 낡은 종교적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반제자주적 사회주의를 자기의 사상적 기초로 삼았다.

바로 그런 점에서, 카마이클은 민권운동 수준에 머물렀던 마틴 루터 킹을 훌쩍 뛰어넘은 흑인해방운동가였다. 그래서 그의 흑인운동을 흑인민권운동(African-American Civil Rights Movement)과 구별하여 흑인의 힘 운동(Black Power Movement)이라 부른다.

△ "검은, 우리는 아름답다" 스토클리 카마이클이 흑인의 힘 운동을 역설하며 연설을 하는 모습. (사진을 누르면 동영상 연설 장면을 볼 수 있음.)

미국에서 흑인의 힘 운동을 이끌던 그는 1969년에 홀연히 미국을 떠나 서아프리카로 건너갔다. 그는 왜 자기의 정치활동현장을 미국에서 서아프리카로 옮겼을까? 서아프리카에서 스토클리 카마이클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범아프리카 인민혁명당(All-African Peoples Revolutionary Party)이었다.

1968년에 기니(Guinea)에서 창당된 이 당은 당시 서아프리카에 불길처럼 타오른 아프리카민중의 반제자주화 사회주의운동의 정치적 중심이었다. 스토클리 카마이클은 생을 마칠 때까지 그 당의 지도성원으로 활동하였다.

1960년대 서아프리카에서 반제자주화 사회주의운동을 이끈 지도자 세 사람이 있었다. 아흐메드 세쿠 투레(Ahmed Sekou Toure, 1922-1984), 크와메 엔크루마(Kwame Nkrumah, 1909-1972), 모디보 케이타(Modibo Keita, 1915-1977)였다.

아흐메드 세쿠 투레는 프랑스의 제국주의지배에서 벗어나 1958년 10월 2일에 독립한 기니의 초대 대통령이었고, 엔크루마는 영국의 제국주의지배에서 벗어나 1957년 3월 6일에 독립한 가나(Ghana)의 대통령이었고, 모디보 케이타는 프랑스의 제국주의지배에서 벗어나 1960년 6월 20일에 독립한 말리(Mali)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서아프리카의 반제자주화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게 된 미국 출신의 흑인해방운동가 스토클리 카마이클은 미국식 이름을 버리고, 그 운동을 이끄는 두 지도자의 이름에서 하나씩 따온 아프리카식 이름 크와메 투레로 개명하였다.

그의 서아프리카 이주와 아프리카식 개명은, 미국의 흑인해방운동가가 아프리카의 흑인혁명가로 다시 태어났음을 뜻한다. 1971년에 출판된 그의 두 번째 저서 '스토클리는 말한다: 흑인의 힘에서 범아프리카주의에로의 귀환(Stokely Speaks: Black Power Back to Pan-Africanism)'이 그의 사상적 전환과 발전을 말해준다.

△ 1992년 미국을 방문, 샌프란시스코에서 범아프리카주의와 신세계 질서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는 크와메 투레(스토클리 카마이클) (사진을 누르면 동영상 연설 장면을 볼 수 있음.)

서아프리카에서 반제자주화 사회주의운동에 앞장선 흑인혁명가 크와메 투레는 아프리카 나라들의 정치적 단결을 역설하면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 반제자주적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아프리카식 사회변혁의 길을 제시하고, 자기가 속한 범아프리카 인민혁명당을 통해 정력적인 정치활동을 벌였다.

원래 크와메 엔크루마 대통령과 세쿠 투레 대통령의 주도로 1968년에 창당된 범아프리카 인민혁명당의 당면목표는,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를 짓밟는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제국주의깡패국가들과 맞서 싸우기 위한 범아프리카 인민혁명군을 창설하려는 것이었다.

만일 범아프리카 인민혁명당이 범아프리카 인민혁명군을 창설하였더라면, 미국,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제국주의깡패국가들의 무력침공에 맞서 싸우는 전세계 반제군사전선이 강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제자주화 사회주의운동을 시작하더니 이제는 반제군사전선까지 형성하려는 그들을 제국주의깡패국가들이 그대로 놔둘리 없었다. 이를테면, 1966년 2월 24일 당시 크와메 엔크루마 대통령이 미국의 베트남 침략전쟁에 맞서 싸우던 북베트남과 중국을 순방하는 동안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배후조종을 받은 군사반란이 가나에서 일어나 정권이 전복되고 엔크루마 대통령은 해외를 떠도는 망명객으로 한많은 생을 마쳤다.

제국주의깡패국가들의 난동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1970년 11월 21일 밤, 포르투갈군은 기니반란군과 함께 상륙정을 타고 기니의 수도 코나크리에 인접한 해안에 상륙하여 세쿠 투레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기습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것이 이른바 '녹색바다 작전(Operation Green Sea)'으로 알려진 포르투갈의 기니 무력침공이다. 

다른 한 편, 미국에서 흑인해방운동가로 활동할 때부터 크와메 투레를 감시하였던 미국 중앙정보국은 그가 서아프리카로 이주하여 반제자주화 사회주의운동에 참가하자 그를 암살하려는 비밀공작을 추진하였다.

2007년에 기밀해제되어 세상에 공개된 미국 중앙정보국 비밀자료에 따르면, 크와메 투레가 서아프리카로 건너간 1968년부터 미국 중앙정보국은 그를 이전보다 더 집중적으로 감시, 추적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흑인해방운동가로 투쟁하던 시기에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자기 몸에 비밀리에 발암물질을 주입하여 자신을 살해하려고 기도하였음을 폭로한 적이 있다. 결국 전립선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던 그는 1998년 11월 15일 기니의 수도 코나크리에서 5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흑인민권운동에서 출발하여 흑인해방운동을 거쳐 반제자주화 사회주의운동으로 나아갔던 흑인혁명가 크와메 투레가 병마와 싸우던 병원 입원실 창가로 아프리카의 눈부신 햇볕이 비쳐들고 있었다. 의식이 꺼져가던 생의 마지막 순간, 흑인민중과 함께 헤쳐온 고난과 승리의 한생이 그의 망막에 주마등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불굴의 아프리카 대지 위에 두 마디 말을 남기고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조직하라! 조직하라!" (2012년 1월 17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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